강해, 제19과
유다와 요셉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5:1-17:18약 42분 분량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7:17,18)
<여호수아>의 핵심 주제어인 “그 땅”과 관련하여, 책의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 1부: 그 땅을 정복하라(1-12장)
(2) 제 2부: 그 땅을 나누어라(13-19장)
(3) 제 3부: 그 땅에서 살아라(20-24장)
그리고 제 2부는 다시 다섯 개의 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네 가진 것을 나누어라(13:1-7)
(2) 모세의 명령을 상기함(13:8-33)
(3) 갈렙부터 시작함(14:1-15)
(4) 유다와 요셉의 기업(15:1-17:18)
(5) 실로의 선택(18:1-19:51)
위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 두 개의 단락은 ‘요단’ 서편 땅을 나누는 대 원칙을 기록해 놓은 곳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대원칙에 입각하한 땅의 분배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갈렙’부터 시작하여(14:1-15), ‘유다’와 ‘요셉’ 지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군소 지파들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책의 제 2부에는 “땅의 분배”라는 주제에 걸맞게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지명과, 도시, 그리고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명이나 도시 이름과 관련하여 적어도 112개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현대 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 각각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본문의 주제를 파악함에 있어 치명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다만 족보와 마찬가지로 지리에도 신학이 있다는 <성경>의 대전제를 인식할 때, 이들 이름을 통해서도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재삼 확인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유목민 이스라엘이 광야 대신 정착할 땅을 갖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전셋집만 전전긍긍하다 마침내 자신의 주택을 소유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의 요구 사항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땅을 차지하고, 사이좋게 나누며,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게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과 관련해서 반복되는 모티브는 다름 아닌 “말씀과 순종”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이루고 있는 구조적 원리도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의 형식과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구조와 형식. 본문(15:1-17:18)은 책의 제 2부에서 네 번째 단락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유다’와 ‘요셉’의 유업을 다루고 있습니다(지도 참고). 이는 다시 세 개의 단락(15:1; 16:1; 17:1)과 결론으로 세분할 수 있으며, 각 단락은 나름대로 각기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1. 유다의 분깃(15:1-63)
1) 유다의 사방 경계(15:1-12)
(1) 남쪽 경계(1-4절)
(2) 동쪽 경계(5절상)
(3) 북쪽 경계(5하-11절)
(4) 서쪽 경계(12절)
2) 예외: 갈렙의 성읍들(15:13-19)
3) 요약(15:20)
4) 유다의 성읍들(15:21-62)
(1) 남쪽 에돔과의 경계(21하-32절)
① 29개 성읍(21하-32절)
(2) 중부평지(33-47절)
② 14 성읍(33-36절
③ 16 성읍(37-41절)
④ 9 성읍(42-44절)
⑤ 블레셋 지역(45-47절)
(3) 산지(48-60절)
⑥ 11 성읍(48-51절)
⑦ 9 성읍(52-54절)
⑧ 10 성읍(55-57절)
⑨ 6 성읍(58-59절)
⑩ 11성읍(59상, 칠십 인 역)
⑪ 2 성읍(60절)
(4) 광야(61-62절)
⑫ 6 성읍(61-62절)
5) 반복(후렴) 구절: 남아있는 여부스 족(63절)
2. 요셉의 분깃(16장)
1) 남방 경계(1하-3절)
2)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분깃(4-9절)
(1) 에브라임의 경계(5-9절)
① 남쪽 경계(5하-6상절)
② 동쪽 경계(6하-7절)
③ 북쪽 경계(8절)
④ 결론적 요약(8절하)
⑤ 예외: 므낫세 지역 내의 에브라임 성읍(9절)
(2) 반복(후렴) 구절: 남아있는 가나안 족(10절)
3. 므낫세의 분깃(17:1-13)
1) 예외: 므낫세의 장자 마길의 분깃(17:1)
2) 므낫세의 분깃(17:2-11)
(1) 므낫세의 남은 자손(2절)
(2) 슬로보앗의 딸들(3-4절)
(3) 요약(5-6절)
(4) 므낫세의 경계(7-11절)
① 남쪽 경계(7절)
② 예외: 므낫세 지역 내의 에브라임 성읍들(8절)
③ 남쪽 경계(계속)(9절상)
④ 예외: 므낫세 지역 내의 에브라임 성읍들(9절상)
⑤ 서쪽 경계(9절하)
⑥ 요약(10절상)
⑦ 북쪽 경계(10절하)
⑧ 동쪽 경계(10절하)
⑨ 예외: 잇사갈과 아셀 지역 내의 므낫세 성읍들(11절)
3) 반복(후렴) 구절: 남아있는 가나안 족(12-13절)
4. 결론(17:14-18)
자료와 편집. 화자는 이러한 구조를 형성함에 있어 다양한 전승과 자료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지파 별 지역 구분을 명시하고 있는 전승이나 사료(史料)들은 원래는 지파 간의 이해관계나 갈등을 포함해서 정치∙사회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었겠으나, 최종 편집과정에서 <여호수아>의 신학적 주제에 걸맞게 화자는 당대와 후대를 위한 교훈적 목적으로 수정하거나 재해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화자가 그가 가진 일련의 자료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재해석했을지 구분 가능한 일련의 자료들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구분 가능한 자료들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역별 경계에 관한 진술(15:1-12; 16:1하-3, 5-8; 17:7-10)
2) 유다 지파에 속한 성읍들(15:21-62)
3) <갈렙 전승> (15:13-19)
4)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에 관한 전승(15:63; 16:10; 17:12-13; 15-16, 18)
5) <슬로보핫 전승>(17:3-4)
6) 확장된 <요셉 전승>(17:14-18)
1) 지역별 경계를 담고 있는 전승은 책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분명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동일한 자료가 15:1-4에서는 ‘유다’ 지파의 남방 경계를 정하는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남방 경계를 알려주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신 34:3-5). 그런데 이곳에서 이 남방 경계선에 대한 언급이 당대의 정치 상황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특정 지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는지, 또는 어떤 특정 기능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본문의 구조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남방 한계선은 북방 경계와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의 동쪽 경계는 천연 경계로서 염해(鹽海)를 연하여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요단’ 끝자락에 있는 지역으로 북방 한계를 구분 짓는 곳이기도 합니다. ‘유다’ 지파의 사방 경계를 기술하고 있는 본문 중에서 북쪽 경계(5-11절)에 관한 언급이 가장 상세하고 길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예루살렘’이 ‘유다’ 지파의 북방 경계에서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 이유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정복하기 전까지 ‘여부스’가 계속해서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2) ‘예루살렘’을 ‘유다’ 지파의 행정관할에서 분리시켜 ‘다윗’ 왕의 개인 소유 즉 “‘다윗’의 성”으로 호칭했던 당시의 행정 절차를 반영하는 것이다; (3)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의 오래된 경쟁과 갈등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아마도 ‘베냐민’ 지파가 이 지역을 처음 정복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수 10; 삿 1:21) 그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지역 경계 목록은 ‘요셉’ 지파의 남방 한계에 관한 것입니다(16:1-3). 이 목록 역시 ‘베냐민’ 지파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로서, ‘유다’ 지파의 북방 한계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 목록은 남북조 왕국이 분열된 이후 형성된 전승의 일부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동쪽 경계와 ‘요단’에 관한 목록(5-8절) 역시 비교적 길고 상세한데, 이 지역은 흔히 ‘므낫세’ 지파의 소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목록이 형성되게 된 배경에는 ‘베냐민’, ‘에브라임’, 그리고 ‘므낫세’ 지파 간의 갈등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들 세 지파는 <여호수아> 제 1부와 ‘사울’ 왕국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자들입니다(참고. 삼상 7:15-17; 삼하 2:8-9). 물론 이 목록의 배경은 북쪽 여섯 지파(‘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스불론’, ‘앗셀’, ‘납달리’) 모두를 망라하는 것이었겠습니다만, 특히 ‘베냐민’의 ‘길갈’ 성소에 <여호수아> 1-11장의 전승들과 함께 더 잘 보존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원래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였을 그 전승들이 점차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땅의 경계들이 어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2) ‘유다’ 지파에 속한 성읍(도시)의 목록(15:21-62)들을 보면 적어도 두 가지 다른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각각은 아마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는 우선 전체 123개의 유다 도시들을 크게 네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고 있으며(남쪽, 중부, 산지, 광야), 다시 이들을 열 두 개의 그룹으로 묶어 각 지역으로 분산시켜 놓고 있습니다(목록 참고). 각 성읍을 네 개의 지역으로 나눈 것은 군사적 기능과 연관이 있는 것 같고, 열두 그룹으로 전체 도시들을 나눈 것은 왕정 시대 당시의 행정 체계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정치∙사회적 환경이 달라지면 이들 구분이나 체계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화자는 이런 역사적 상황의 변화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유다’ 지파의 모든 성읍들이 이스라엘의 통치 하에 놓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땅이나 각 지파의 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각 도시들을 그분의 백성 모두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그 땅을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겠으나, 그 땅이나 그 안에 모든 성읍들의 궁극적인 운명은 그 땅을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갈렙 전승>(15:13-19)에 대해서는 전승 전체에 대한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앞 장에서(14:6-15) 끊어졌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주는 가교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4절이 전승의 원래 시작 부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구절과 함께 <사사기>(1:11-15)에서 동일한 내용의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약간의 변화가 있긴 합니다만).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위와 같은 견해가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구절이 큰 무리 없이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4:15);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15:14)
아무튼 <갈렙 전승>의 원래의 상황이나 본문이 어떠했든, 15:15-19의 본문은 구전 전승에 바탕을 둔 잘 짜인 한 편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무모하기까지 한 ‘갈렙’의 도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6절). 즉 그는 ‘드빌’을 치는 용감한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웃니엘’이라는 자가 그의 말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여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만(18-19절), 정작 이 대목에서 ‘웃니엘’은 대화에서 침묵하는 방관자일 뿐이고, 새로 신부가 된 ‘갈렙’의 딸 ‘악사만이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갈렙’으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떼쓰고, 응석부리는 어린 아이의 역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빠, 나에게 이러시면 안 되죠. 나를 속일 상각일랑 접어세요. 이는 공평치 못한 처사라는 것이에요. 그 땅을 나에게 주셔야죠.” ‘갈렙’은 즉각적으로 딸의 요구에 순응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다 내어줍니다.
그렇다면 <갈렙 전승>을 이곳에 편집해 넣은 화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비록 이 이야기가 기원론적인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언급, “오늘날까지...있었더라”는 없지만, 내용상 기원론적인 이야기로 분류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히 본문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초기의 전승에서는 이런 기원론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전승의 원해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갈렙’ 지파가 ‘갈렙’을 지파의 영웅으로 만들고자 함이었을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땅 헤브론을 개척한 다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경제적 이익을 담보로 정략결혼을 이끌어내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가는 유목민의 우두머리로 그리고 싶은 것이었을까? 본문의 분위기로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런 의도였다면 ‘갈렙’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으로 결혼 약정을 이끌어내려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본문을 통해서 받게 되는 인상은 ‘갈렙’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개의치 않고 딸을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리의 불한당도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갈렙’ 지파의 편에서 보자면, 그를 진정 지파의 영웅으로 삼고자 했다면 이보다는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분위기는 역시 14장에서 소개한 바 있는 <갈렙 이야기>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두 장면에서 모두 ‘갈렙’은 거래에서 손해를 보는 쪽입니다. 불리한 패를 쥐는 쪽이라는 말입니다. 추측컨대 이번에도 지파 간 갈등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정확한 배경은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땅과 관련한 <여호수아>의 주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인데,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한 종 ‘갈렙’을 통해서 그분의 백성에게 축복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4)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에 관한 전승들은 원래의 출처는 <사사기> 1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여호수아>에서 등장하고 있는 이들에 관한 언급들은 모두 이곳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1-21의 본문은 <유대 전승>의 일부로서, ‘유다’ 지파의 강력한 정복전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도 정복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족속의 저항이 워낙 강력했던지라 이들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는 진술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절(21절)은 ‘예루살렘’이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남아있는 현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책임을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에게로 돌리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본문은 이와는 정 반대로 그 책임을 ‘유다’ 지파에게도 돌리면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봅시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삿 1:21)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수 15:63)
따라서 ‘예루살렘’을 ‘베냐민’ 지파와 연계시키고 있는 <사사기>의 전승은 왕정 시대 이전의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동일한 현실에 대한 후대 역사의 재해석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사기> 1장의 나머지 부분(1:22-26)에서는 북쪽 지파들에 눈을 돌리면서 이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언급조차도 실은 북쪽 지파들과 관련된 다른 사실들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들의 불순종에 관한 것입니다(삿 1:27-36). 이 대목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무엇인지 찾아보면 쉽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 기록을 보면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 기록들을 통해서 원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여호수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에 관해서도 <사사기>와 <여호수아> 모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사기>의 기록이 좀 더 단순한 것으로 보아 <여호수아>의 기록이 후대의 수정 내지는 원인론적 해석이 첨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삿 1:29)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수 16:10)
<여호수아>에서 노역과 관련된 언급은 왜 추가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이들에 대한 원인론적 언급은 ‘여호수아’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므낫세’ 지파와 관련된 언급에서도 미미하긴 하지만 <사사기>의 원래 전승을 수정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아래 두 구절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않으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삿 1:27)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숫 17:12)
즉 <사사기>에서는 ‘므낫세’ 지파가 자기 지역 내에서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여호수아>에서는 ‘므낫세’가 “몰아내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말 <성경>에는 이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 두 기록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현저한 입장의 차이가 있음을 놓칠 수 없습니다. “하지 못했다”와 “하지 않았다”의 차이는 고의성 여부이며, 후자(後者)의 경우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명백한 거부행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기록은 북쪽 지파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동정적인 입장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에서 ‘므낫세’ 지역에 함께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몰아내시겠다고 약속하셨던(13:6) 족속들의 잔당일 뿐입니다만, <사사기> 화자의 입장은 이 사실을 ‘므낫세’ 지파의 공공연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사사기>의 이러한 입장은 <여호수아>에서도 일부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수 17:17-18)
결국 이 두 구절을 포함해서 본문의 마지막 단락(17:14-18)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처럼, 이 단락의 편집자의 주된 관심사는 그 땅에 남아 있던 잔당들의 문제였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들 잔당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사기> 화자도 유다 지파가 산지 주민들을 몰아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들이 병거를 가진 강력한 무리였기 때문이라고 덧붙인 바 있습니다(삿 1:19). 그러나 <여호수아>의 화자는 이 단락에서 이스라엘이 이들 잔당을 몰아내지 않았다는 언급은 자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쫓아내게 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17:18). 이렇게 볼 때, <사사기> 1장의 전승이 가나안의 잔당들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여호수아> 15-17장을 기록하고 있는 화자는 이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신학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사기> 1장과 <여호수아> 15-17장은 둘 다 보다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 쪽은 ‘유다’ 지파의 입장에서,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요셉 지파-‘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입장에서 동일한 전승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최종 편집자는 이들 자료들을 취하되, <사사기> 1장과 <여호수아> 15-17장에서 공히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논의의 대상은 <슬로보핫 전승>(17:3-4)입니다. 이 전승은 그 뿌리를 <민수기> 27:1-7에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만 <여호수아>는 전승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재창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즉 <민수기> 27장의 정보를 바탕으로 ‘모세’의 규례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여호수아’를 부각시킴으로써, <여호수아>의 주제어 중의 하나인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확장된 <요셉 전승>(17:14-18) 역시 오래된 전승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가장 까다로운 두 지역 ‘벧 스안’과 ‘이스르엘’ 골짜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문제는 ‘요셉’ 지파가 당면했던 문제이지 화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락은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아주 친숙한 이야기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현재의 본문은 어휘의 사용에 있어서나 그 목적에 있어서나 원 자료가 당면하고 있었을 상황이나 배경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업”; “제비뽑기”; “축복”; “르바임”; “브리스 사람”; “가나안의 철 병거”(삿 1:19에서 취한 것). 본문은 그 형식에 있어 두 개의 유사 병행 구절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14-15절; 16-18절). 편집자는 아마 이전에 여호수아가 땅의 분배와 관련해서 지파들 간에 중재를 맡았던 내용을 담은 이전의 전승으로부터 본문을 취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의도는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모든 백성의 필요를 채우셨으며, 그들의 승리에 대한 보장을 약속해 주셨는지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최종 편집자는 수 세대를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름대로 독특한 의미를 제공해주었던 전승들을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서 새롭게 각색하고 수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유다의 기업(15:1-63)
유다의 사방 경계(15:1-12). 제비뽑기의 첫 수혜자는 ‘유다’ 지파입니다. 이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출생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 바라보는 우선순위에 따른 것으로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것 같습니다. 즉 그의 주 관심의 대상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남쪽 ‘유다’ 왕국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있어 ‘유다’ 지파야말로 가장 먼저 기업을 받아야 할 지파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재건할 마지막 희망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 열두 절은 ‘유다’ 지파의 사방 경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1) 남쪽 경계(1-4절); (2) 동쪽 경계(5절상); (3) 북쪽 경계(5하-11절); (4) 서쪽 경계(12절). 구체적인 지명의 확인과 이에 대한 설명은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화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유다’ 지파의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는 1-12절 사이에서 보듯이, 산이나 강 같은 자연적인 특징에 따라 구분되는 경계들이고, 또 하나의 방식은 개별적으로 정착한 도시나 지역들을 중심으로 구분한 경계들입니다(21-62절).
갈렙의 성읍들(15:13-19). ‘갈렙’이 14장에 이어(14:6-15) 이곳에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들 목록은 소위 <갈렙 전승>에서 취하여 이곳에 삽입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모든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수행한 모든 명령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른 바 명령과 동일한 것이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갈렙’ 지파의 경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명령을 내리셨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말입니다(참고. 삿 1:20). 어쩌면 이 전승은 완성된 <성경> 속에는 한 번도 포함된 적이 없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갈렙’은 기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웃니엘’을 사위로 맞기까지 합니다. ‘웃니엘’은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남쪽 ‘유다’ 지파를 대표하는 유일한 사사이기도 합니다(삿 3:9-11).
그는 ‘드빌/‘기럇-세벨’을 공격하여 정복한 ‘웃니엘’에게 자기 딸 ‘악사’를 주었습니다(15:15-19; 삿 1:11-15). ‘악사’는 ‘야곱’과 마찬가지로(창 27:19) 아버지를 설득하여 자신의 결혼에 대한 기념으로 선물 즉 축복을 달라고 요청합니다(15:19). ‘갈렙’은 딸의 요청에 윗 샘과 아랫 샘을 선물로 줍니다. 이것은 신부가 가족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풍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라반’이 ‘레아’와 ‘라헬’에게 여종을 “준” 것이나(창 29:24, 29), ‘바로’가 딸에게 ‘게셀’을 혼인 지참금의 형식으로 “주는” 것처럼(왕상 9:16) 말입니다.
그러나 딸이 아버지를 “재촉했다”(tWs, 수트)는 ‘히브리’ 동사는, “꾀다, “유혹하다”, “속이다”, “부추기다”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사탄’이 ‘다윗’을 꾀어 인구조사를 하게 한 경우와 같습니다(대상 21:1). 이로 미루어 ‘갈렙’의 행동이 자발적이거나 당시의 풍습을 따른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악사’의 행위가 ‘야곱’에 버금갈 정도로 기회를 활용함에 있어 거의 완벽한 수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웃니엘’이 승리를 거둔 직후 아버지가 가장 기분이 들떠 있을 때 선물을 요청한 것입니다.
요약(15:20). ‘유다’ 지파의 기업에 대한 요약이 <갈렙-웃니엘> 이야기에 뒤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렙-웃니엘> 전승은 처음부터 <유다지파 전승>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갈렙’과 ‘웃니엘’이 차지한 기업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기업으로 주신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인식 체계를 엿볼 수 있는데, 즉 겉으로 보기에 사람이 이룬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일들이 실은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간섭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성읍들(15:21-62). 화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하심을 ‘유다’의 성읍들에 대한 목록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들 목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나 확인은 생략합니다.
이 목록의 구조나 형식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화자 당대의 정치∙군사적인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단순히 그에게 속한 모든 영토와 경계를 관할하고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다’에 속한 모든 도시가 다 목록에 포함된 것은 아닙니다만, 경계 내에 들어와 있는 그 모든 성읍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암시받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이들 성읍의 목록이 당시의 정치군사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담대하게도 그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데, 그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다름 아닌 인간의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정치나 역사에 관한 과거의 문헌이나 자료가 무엇을 말하고 있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사도 바울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결론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후렴(15:63). ‘유다’ 지파에 관한 마지막 결론에서 화자가 강조하려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후렴과도 같은 반복이 그것입니다:
예루살렘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15:63)
화자는 마치 ‘예루살렘’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주문(呪文)을 걸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윗’ 왕 시대에 ‘유다’ 지파는 ‘여부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적이 있기는 합니다(삼하 5:6-10).
‘예루살렘’에 관한 이러한 언급이 각별히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신명기 역사서” 주요 관심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왕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정부는 하나님의 첫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오명(汚名)을 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심장부인 수도(首都)에서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유다’는 ‘여부스’의 종교와 문화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신명기>의 가르침(신 7:1-26; 20:16-18)에 대하여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에 이르러는 이들 족속들을 노예로 삼기도 했으나(왕상 9:20-21), 이나마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2. 요셉의 기업: 에브라임(16)
남방 경계(16:1하-3). ‘유다’ 다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지파는 한 지파가 아니라,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본문의 이런 형식과 구조는 상당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적어도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요셉’ 역시 ‘야곱’의 적자(嫡子)라는 전통을 유지시켜 가겠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요셉’의 지파는 하나가 아니라 두 아들의 이름을 따서 두 개의 지파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이 단락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역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언급은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16:5; 18:11-13). 혹자는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역이 다름 아닌 15:5하-11 사이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대 지파의 기업을 대체한 것으로 ‘르호보암’ 왕 이후부터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분명치는 않습니다.
에브라임의 분깃(16:4-9). ‘요셉’의 후손들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다는 진술은 이스라엘이 ‘요단’의 동과 서에서 각 지파별로 기업을 받았다는 일반적인 진술(13:8; 14:1)과 병행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16:4)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속은 요단 저편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13:8)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16:4)
이들 두 지파가 받은 기업의 목록과 관련해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두 지파의 지역 경계가 일부 모호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분한 모든 성읍과 그 마을들도 있었더라(9절)
즉 ‘므낫세’ 지파는 그들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을 위하여 일부 성읍들을 따로 구분하였다는 점입니다.
후렴(16:10). 이곳에서도 다시 후렴과도 같은 반복이 ‘유다’ 지파의 경우에서처럼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 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서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10절)
오늘까지라 함은 ‘솔로몬’ 재위 시를 말하는 것인데, 당시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왕국을 위한 건설 사업에 외국인 노동자를 이주시키고 있었습니다.(왕상 9:15-22). 그렇다면 이 구절은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있었다”는 15:63의 진술과는 시기적으로 다소 후대의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구절을 통해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으며, 15:63과 함께 이 모든 후렴들은 결국 17:18에서 드러나고 있는 화자의 의도를 가리키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것을 쫓아내리라 하였더라(17:18)
3. 므낫세의 기업(17:1-13))
‘요셉’의 두 아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본문에서는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기업을 먼저 언급한 다음 장자 ‘므낫세’의 기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17장의 형식과 구조는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서는 <창세기> 48장의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사 시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지파도 ‘에브라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순서는 역사적 사실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길의 기업(17:1). ‘마길’은 ‘므낫세’의 장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이곳에서 ‘므낫세’의 기업을 언급하면서 ‘마길’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 점은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제비 뽑은 것은 이러하니라. 므낫세는 요셉의 장자였고 므낫세의 장자 마길은 길르앗의 아버지라 그는 용사였기 때문에 길르앗과 바산을 받았으므로(17:1)
<사사기>에서 ‘마길’은 ‘므낫세’의 장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지파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삿 5:14).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논란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서 ‘마길’은 요단 동편에 거주했던 ‘므낫세’의 절반 지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민 32:39-40; 신 3:15; 수 13:31).
므낫세의 기업(17:2-11). ‘므낫세’의 기업과 관련해서 본문의 구조는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2-6절)은 ‘므낫세’의 자녀들에 따라 기업을 구분하는 방식이고, 나머지 단락(7-11절)에서는 각 지역 경계를 남서남북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화자가 소개하고 ‘므낫세’의 족보가 다소 복잡합니다. 예컨대, 2절에 따르면 ‘헤벨’은 분명 ‘므낫세’의 아들로 보입니다만, 3절에 의하면 그렇게 단순치가 않습니다:
2므낫세의 남은 자손을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는데 그들은 곧 아비에셀의 자손과 헬렉의 자손과 아스리엘의 자손과 세겜의 자손과 헤벨의 자손과 스미다의 자손이니 그들의 가족대로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남자 자손들이며, 3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17:2-3)
이들의 관계가 어떠하든 화자의 의도는 초지일관, 즉 ‘여호수아’가 ‘모세’와 ‘야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민 27:1-11; 36:1-13).
‘므낫세’에게는 모두 열 분깃이 돌아갔습니다(5절). ‘므낫세’의 나머지 다섯 자손에게 각 한 분깃씩과, ‘헤벨’의 아들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에게 각 한 분깃 씩 입니다. 이들 다섯 명의 딸이 아들과 같은 분깃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므낫세’에게 돌아간 것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바산’을 합치면 도합 열두 분깃이었습니다.
후렴(17:12-13): 후렴과도 같은 반복이 ‘유다’와 요셉 지파의 경우에서처럼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12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13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7:12-13)
이보다 앞서 11절은 ‘므낫세’와 함께 살던 가나안의 성읍들을 언급하고 있는데(‘돌’, ‘므깃도’, ‘다아낙’, ‘이블르암’, ‘벧스안’), 이들 지역은 ‘가나안’의 보루로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왕정이 들어서고 나서야 이들 주민들은 왕국의 노예로 부역에 종사하게 됩니다. 이 후렴을 통해서 화자는 다시 한 번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비록 이들을 정복하여 노예로 삼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이어지는 책 <사사기>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국에는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약속을 거두고 맙니다:
21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1-23)
4. 결론(17:14-18)
마지막 단락은 화자 자신의 신학적 결론을 위하여 덧붙인 추가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언약의 축복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그동안 매 단락의 끝에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후렴처럼 반복하던 것과는 극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축복은 ‘요셉’ 지파를 대상에서 하고 있는데, 축복의 내용인 즉은 그가 앞에서 ‘유다’ 지파의 ‘갈렙’을 통해서 강조하던 바와 동일한 것입니다(참고. 14:13; 15:19):
14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 함이니이까 하니, 15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16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7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17:14-18)
설교의 요점은 땅의 축복은 지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다’와 ‘요셉’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남북조 왕국에서 핵심 역할을 했으며, 나머지 지파들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힘에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설교는 아주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 지파가 진정으로 위대하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신 민족이라면,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땅의 강력한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살아갈 땅을 새롭게 개척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특히나 이 지파가 불평하고 있는 바처럼, 산지가 그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협소하여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다면 더욱 힘써 원하는 바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15절). 이 지파의 불평은 또 있습니다. 지역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강력한 철 무기로 무장한 ‘가나안’이 살고 있어 싸움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16절). ‘요셉’ 지파는 여전히 ‘여호수아’의 도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여호수아’가 대답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도전을 주는 대답입니다(17절). 그는 ‘요셉’ 지파가 크고 강력하여 축복받은 지파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 분깃 이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요셉’ 지파가 왜 하나의 지파가 아니라 둘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분깃을 얻는 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그들의 도전 정신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18절). 도전은 이미 15절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삼림 지역에서 두 번째 분깃을 개척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산지를 넘어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여 구릉지대 전체를 통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도전은 새로운 약속과 함께 다가옵니다. ‘요셉’은 ‘유다’나, ‘에브라임’이나 ‘므낫세’와는 달리, 가나안이 아무리 철병거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마저도 실은 도전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지명들과, 도시들, 그리고 사람들! 이 모든 이름들이 현대 독자들에게 과연 무슨 의미와 교훈을 줄 수 있을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을까?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여호수아>의 중심 주제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혹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서막>에서 밝힌 바 있듯이, <여호수아>를 시작으로 하는 <히브성경>의 <전기 예언서>는 모두 객관적 역사기록이 아니라, 신학화 한 역사 즉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한 책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이름들의 목록은 <성경>의 족보 기록처럼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호수아>의 경우라면,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도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교과서대로 살아라
본문의 교훈을 위해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첫 번째 작업은 무엇인가? 본문의 수사적 특징 중의 하나를 찾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본문 중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마치 노래의 후렴 구절과도 같은 반복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반복은 매우 중요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반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15:63)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16:10)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7:12-13)
화자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상기해 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책 <사사기>의 시대적 상황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열세 번에 걸쳐 민족적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것도 그들이 정복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남겨두었던 그 땅의 이방 족속들이 대반격을 가해오는 위기적 상황을 말합니다. 물론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열두 번씩이나 위기를 맞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서 한 번도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이번만 구원해 주시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겠다고 맹세합니다만, 지나고 나면 그만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언약을 취하해 버리고 맙니다:
21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1-23)
그처럼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만일 이런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아직 신실함의 정의를 잘 모르거나, 또는 언약의 속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13)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분은 실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언약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자가 공동체에 던지는 도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조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갈렙’의 전철을 밟고 싶으십니까?”
지금 이 공동체가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날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형제간에 그 땅의 지분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벌어지고 있던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남쪽의 ‘유다’ 왕국이든 북쪽의 이스라엘이든 처음에는 신정일치(神政一致)의 나라로 시작하였지만, 어느새 신(神은) 사라지고 정치만 난무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강하고 부요한 자들, 왕이나 귀족들은 더 가지려 안달이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모세’의 규례와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라 공평하게 땅을 나누고, 구획을 정하여, 사이좋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책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했든 아니 하였든, 세 번에 걸친 언급도 따지고 보면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사회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는 그 세대를 향하여 외칩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남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또 하나 상정할 수 있는 가능한 시대적 상황은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남의 땅에서 절망과 회의 가운데서 대부분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고 있던 시대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던 시절입니다. 화자는 묻습니다: “우리에게 과연 미래가 있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올 것인가?”
‘여호수아’의 처방은 지극히 원론적이고 간단합니다: “교과서대로 살아라.” 이거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기본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세대가 처음부터 교과서에 충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땅에서 다른 땅의 민족들과 더불어 살기를 택했고, 더 나아가 그 땅의 신을 섬기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 또한 그들을 버렸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쫓겨났고, 그들이 그토록 함께 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방 족속과 함께 아예 그 나라에서 살도록 유배를 당한 것입니다.
미국이 80년대의 불황을 이기고 약 20여 년 동안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미국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기초과학 분야에서의 엄청난 투자와 잠재력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지난 90년 이후 미국은 대부분의 노벨상을 석권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그 나라에서 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가 발발하면서, 지존의 지위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경제학자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그 기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나는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기도와 성경 묵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매 주 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제자 삼기나 선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매 달 책 한 권을 만나고 있습니까(지적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모습이 지난주와 다르지 않고, 지난해와 다르지 않다면, 다음 주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녕 그렇다면 이미 주님은 나를 포기하고 떠나셨는지 모릅니다.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내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주님은 내 안에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내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게으름의 고리를 결단코 끊어내고야 말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기도를 그런 식으로 하십시오. 결코 추상적이거나, 중언부언하거나, 애매모호한 기도는 드리지 마십시오. 매 주 예배 시 교회의 기도 제목부터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해놓은 목표와 올해의 말씀과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목장의 기도제목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안동 우리집 교회>에서처럼, 목자의 선창에 따라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고, 함께 행동하는 교회가 됩시다. 그리고 다음 주에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하는 과정을 꼭 거칩시다.
2. 스스로 개척하라(창조하라)
교훈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교훈으로 나아가 봅시다.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단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두 지파가 불만 가운데 ‘여호수아’에게 나아옵니다. 이 두 지파는 수적으로 다른 지파보다 훨씬 많습니다. 북 이스라엘 중에서 ‘에브라임’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지파와 마찬가지로 한 분깃만을 배당받지 못하자 불만과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17:14).
이들의 불만에 대해서 ‘여호수아’의 답변이 걸작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17:15). 다시 말하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정말 네가 큰 민족이라면 당연히 ‘에브라임’ 산 하나만으로 부족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말인데 이 넓은 산지를 그대로 두지 말고 개척해야지.” 여기서 “개척하다”는 동사는 ‘바라’(bara) 즉 “창조하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단어가 하나님의 창조,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와 관련해서만 쓰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창조적 행위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그의 형상인 우리 인간 특히 그의 백성의 모든 사역이나 활동이 창의적이고 창조적이 되어야 마땅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사람은 수동적인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현상유지도 싫어하고 복지부동은 더욱 싫어합니다. 반대로 남이 하지 않는 생각, 남이 하지 않는 행동을 먼저 합니다. 실험정신이 강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공무원처럼 그냥 규정집에 나와 있는 것만을 소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도 만들어 행합니다.
그러나 이들 두 지파는 아직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족들 때문에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에게 대들고 있습니다(17:16). 원래 게으른 자가 늘 남 탓입니다. 신통찮은 목수가 연장 나무랍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지도자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그들을 다그칩니다(17:17). 뭐 이런 뜻이었겠지요: “그런데 말이야, 정말 너희들이 크고 강하다면 그들 쯤이야 금방 해치울 수 있는 것 아니야?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내가 개인적으로 개척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인생을 단순히 취업하는 기계로 전락시키지 맙시다. 그냥 먹고사는 일에 연연해하는, 그래서 늘 한 많은 인생으로 전락시키지 맙시다. 취업준비를 할 때라도, 그냥 시험에 필요한 과목들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취미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분야에도 적극 투자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됩시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고,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경쟁력이 되고, 지적재산권이 되도록 합시다.
3.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무엇인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하셨는가?” 그 분은 명령하시기 전에 약속하십니다. ‘여호수아’에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내가 정녕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겠고 내가 정녕 너희를 버리지 아니 하리라”(히 13:5; 수 1:6).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맹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헤세드’라 부릅니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다’에 남아있던 소수의 무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서까지 동일한 ‘헤세드’를 보여주셨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깊은 한숨으로 회개함이니라(렘 42:10)
기도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약속에 의거해서 하나님께 요청합시다. ‘느헤미야’나 ‘갈렙’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나는 얼마나 교과서에 충실합니까? <우리교회>는 어떠합니까? 교과서에 충실하다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2. 교과서에 충실할 때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지 기대하는 바를 토의해 봅시다.
3. 우리 목장 모임을 본문에 비추어 점검해 봅시다. 과연 기본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목장 모임에 관한 우리 교회의 매뉴얼이 있으며,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까?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