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재는 우리 교회 가족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여호수아: 역사와 문학과 신학>의 보조 자료로 만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훈계하며, 책망하고, 바르게 하며, 또 의로 교육하기’ 위해서 쓰신 그분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읽고 계시며, 우리 또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를 하고자 하는 자는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변화 받기를 원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변화 없는 성경공부는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이므로 성경을 모르는 자보다 오히려 더 불순종하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이 이와 같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기는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전달함에 있어서 법조문이나 신문기사처럼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한 방식이 아니라, 시나 노래로 아름답게 부르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등으로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즉 문학이라는 그릇을 빌어서 그의 의도를 전달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신학이라는 내용이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진리들이 얼마다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교훈을 배울 뿐만 아니라, 교훈이 지닌 심미적인 아름다움 또한 감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공부의 이차적인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외에도 성경공부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는데, 성경이 현재의 본문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전승들의 역사와 배경과 관련된 연구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역사비평적(歷史批評的) 연구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세 번째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성경공부를 하는 우리의 종합적인 목적이 삼중적임을 알게 됩니다. 신학과 문학과 역사가 그것입니다.
사실 인류 최고의 걸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성경은 자체가 지닌 역사적 사실적 신뢰도에 대하여, 미적이고 운율적인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 탁월성에 대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예리한 비평을 시도하도록 도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적 작업을 거치는 동안 성경은 더욱 권위 있고, 영감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스스럼없이 보여줄 것입니다. 필자도 비록 신학적 지식에 있어서나 문학적 소양에 있어 그야말로 천학비재하기 짝이 없지만, 나름대로 이러한 기본자세에 입각해서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본 교재의 <서론> 부분에서는 <여호수아>에 대한 서론적인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인데, 주로 해석과 관련한 일련의 연구들을 간단히 소개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각 부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원리에 따라 역사와 문학과 신학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1993년 겨울 <창조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를 개척하여 그 후 2000년 2월까지 약 7여 년 동안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서 섬겼습니다. 본 교재는 1995년 약 일 년 동안 주일 예배 설교를 위하여 준비했던 것인데, 2002년 일 년 동안 안동의 <우리집 교회>에서 주일 설교로 사용하면서 그 내용을 일부 개정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후 다시 6년이 지난 2008년 <우리교회>의 주일 설교용으로 사용하면서,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아 재수정과 보완이 불가피해졌음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내용과 분위기와 음조와 색깔을 일부 바꾸어 재편집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깊은 연구나 묵상을 위해서, 본인이 설교에 참고한 책들을 아래에 목록으로 만들어 두었으니 이 책들을 직접 구하여 읽어보도록 권합니다. 본 교재를 읽는 것보다 오히려 더 유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본 교재 역시 필자의 다른 교재들처럼 일정한 형식에 따라 편집되었기에 개인 성경공부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어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편저자: 김 태 정
참고도서
1. Butler, T. C. Joshua. Word Biblcal Commentary, Waco: Word Books Publishers, 1983.
2. Woudstra, M. H. The Book of Joshua.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ment: Eerdmans, Grand Rapids, Michigan, 1981.
3. Hamilton, V. 「역사서 개론」. 강성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4. 이형원, 「구약성서비평학입문」. 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91.
5. 프란시스 쉐퍼, 「기독교 성경관」. 문석호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제 1과: 그 땅 이야기..................................................................................................................21
제 2과: 진군 명령........................................................................................................................32
제 3과: 지휘체계..........................................................................................................................53
제 4과: 리더십의 교훈................................................................................................................66
제 5과: 라합의 고백....................................................................................................................83
제 6과: 요단강의 기적..............................................................................................................101
제 7과: 길갈의 서약..................................................................................................................138
제 8과: 언약의 두 얼굴-믿음은 요새를 허물고................................................................162
제 9과: 언약의 두 얼굴-아이 성의 패배............................................................................183
제 10과: 언약의 회복-아이 성을 불사르고........................................................................210
제 11과: 언약의 재확인...........................................................................................................231
제 12과: 언약의 타협...............................................................................................................249
제 13과: 남방 정벌...................................................................................................................270
제 14과: 메롬 대첩과 북방 정벌..........................................................................................304
제 15과: 승리의 희생자들.......................................................................................................329
제 2 부: 그 땅을 나누어라(13:1-19:51)
제 16과: 네 가진 것을 나누어라..........................................................................................347
제 17과: 모세를 회상하며......................................................................................................365
제 18과: 갈렙에게 먼저..........................................................................................................384
제 19과: 유다와 요셉..............................................................................................................406
제 20과: 실로의 선택..............................................................................................................438
제 3 부: 그 땅에서 살아라(20-24장)
제 21과: 도피성-자유와 구속................................................................................................462
제 22과: 레위의 도시들...........................................................................................................475
제 23과: 하나님의 선하심.......................................................................................................493
제 24과: 야훼의 제단...............................................................................................................502
제 25과: 마지막 설교...............................................................................................................527
제 26과: 언약-세겜의 예배....................................................................................................545
제 27과: 끝까지 충성하라......................................................................................................552
개론:
역사와 문학과 신학
제 1과: 개론
1
개론
<여호수아> 제 1부에서는 필자의 다른 교재들에서처럼 먼저 이 책의 해석과 관련한 제반 문제들, 즉 “역사와 문학과 신학” 등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역사적 문제라 함은 이 책에 대한 역사비평적 질문들에 관한 것이며, 문학이라 함은 이 책의 구성과 형식 및 내용, 그리고 제반 수사적(修辭的) 기법들에 관한 것이며, 신학이라 함은 이 책이 담아내고 있는 일련의 신학적 주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성경>의 어떤 책을 공부하더라도, 이처럼 그 책에 대한 “종합비평적” 접근을 시도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이해를 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과 해석>에 관한 공부는 본 교회학교의 다른 과목에서 보다 상세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 교재의 제 1부에서는 이와 관련한 제반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역사
1. 여호수아
<여호수아>의 주인공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이 책의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파생했음에 분명해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그가 이 책을 썼을 것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 자체가 그 점을 전혀 암시하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반 지파의 아들로서, ‘애굽’에서 태어났으며, 출애굽 당시에는 젊은 청년이었습니다(출 33:11). 그는 ‘호세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민 13:8), ‘모세’는 그를 ‘여호수아’ 또는 ‘요수아’(‘야훼’는 구원이시다; 16절)로 불렀습니다. ‘모세는 그를 수종자(개인 수행원?)로 선택하였으며, 시내 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갈 때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출 24:13). 그는 또한 ‘모세’가 ‘야훼’를 만나는 동안 회막을 지키는 자였습니다(33:11).
‘여호수아’는 또한 ‘시내’ 광야의 ‘르비딤’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격퇴시키기 위한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지휘하기도 했으며(출 17:9), 후에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된 열두 명 중의 하나였습니다(민 13:8). 이 정탐에서 그는 ‘갈렙’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내놓았으며, 이 일로 해서 훗날 그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일 세대의 유일한 인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차세대 지도자로 임명되었습니다(신 31:14, 15, 23).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길갈’에 주둔지를 두는 작전을 세웠는데, 이 작전은 그 땅을 효과적으로 양분하여 먼저 남쪽을 친 후에 북쪽을 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서, 군사전문가들로부터 탁월한 선택이라는 평가를 듣습니다. 본문 지도참고.
구체적인 전투에 대해서는 해당 본문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본문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의 전략으로 돌리는 것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헤렘’ 즉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사실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사실을 본문의 신학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호수아’를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의 전형으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일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행정가, 그리고 사심 없고, 불편부당한 지도자,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2. 정복시기
<여호수아>의 역사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대두되는 질문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연대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소위 “초기 정착설”(주전 15세기)과 “후기 정착설”(주전 13세기)이 그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 학계의 경향은 “후기 정착설”을 받아들이는 쪽이지만, 일부 보수 신학 진영에서는 “초기 정착설”을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두 견해는 출애굽의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구약 이야기: 역사와 문학과 신학>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쪽을 받아들이든 이 책의 신학과 관련해서 특별하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합니다.
3. 실제적인 승리
<여호수아>의 곳곳에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부 언급들이나 <사사기>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고 이 책만을 있는 그대로 읽어 내려가면, ‘가나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복은 신속하고도 완벽한 것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온 땅을 다 정복하였더라”(10:40); “여호수아가 그 온 땅을 취하였으니”(11:16);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11:16);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한 바 되었으니”(11:19).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아직 얻을 땅이 많도다”하고 언급하고 있으며, 얻을 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중에는 ‘블레셋’인들의 지역과 ‘팔레스타’인 북부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나안’의 집단 거주 지역들이 그러했는데, 이 지역들에 남아 있던 ‘가나안’ 제단(祭壇)들과 성소(聖所)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4. 역사적 신빙성
<여호수아> 내에 존재하는 일견 모순되고 상충되는 진술들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전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들 고고학적 발견이나 기타 연관된 연구 결과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구약개론>이나 <성경과 해석> 등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5. 태양의 멈춤
‘여호수아’는 과연 태양을 멈추게 했을까? 이 질문은 <여호수아>의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입니다:
12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13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수 10:12-13)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태양과 달이 거의 하루 동안 하늘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 전 세계의 많은 민담 속에 태양이 지지 않았던 날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근본주의적인 창조론 진영에서도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는 듯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본문이 이런 기적을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과 어떤 성경 구절이 정말 기적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지 아닌 지를 해석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할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성경>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구절은 시(詩)의 한 구절입니다. 시에서 대개 문자적인 의미는 수사적(修辭的) 표현으로 대치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더 나아가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번역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문체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몇 개의 단어가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자적으로 그대로 번역하면(우리는 이에 대해서 해당 본문에서 다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기브온 위의 태양아, 가만히 있으라,
아얄론 골짜기 달도 가만히 있으라?
그래서 태양이 가만히 있었으며, 달도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가만히 있다”(!m"D, 다맘) 또는 “멈추다”(dm'[, 아마드) 등은 문자적으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조용히 있다”(be still) 또는 “침묵하다”(be quite) 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이들 천체를 향해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또는 “잠잠하라”(즉 심한 열을 발하지 말고)고 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13절에 따르면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는 의미를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는 “야살의 책”에 관한 언급입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이며, 누가 썼으며,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의 분량을 인용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만일 이 책을 뒤 구절과 관련해서 인용하고 있다면 “야살의 책”은 “머무르다”라는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자가 이 시를 인용하면서 정확하게 의도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일 길은 없지만, 아마 중요한 사실은 기적과 그 기적의 목적 사이에는 반드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재미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기적의 규모와 목적 간에도 일말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기적은 적어도 우주적인 기적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지구의 회전이 24시간은 멈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그처럼 거대한 기적이 필요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은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 전체가 이교도적인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실제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를 다르게 이해하려 합니다. 혹자는 ‘여호수아’가 태양의 열기를 다소 완화시켜 줄 것을 간구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대기의 반사력이 변함에 따라 태양과 달의 빛이 굴절되었으며, 그 결과 이들이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적의 규모가 어떠했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이들의 신앙은 크게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6. 자료와 편집
<여호수아>의 역사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제기할 수 있는 관심사는 이 책에 대한 소위 “역사비평적” 질문들일 것입니다. 즉 자료와 편집 등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구약> 전체에 대한 일반적이고 총괄적인 “역사비평” 연구에 대해서는 필자의 <성경과 해석>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여호수아>에 국한해서 이 책의 자료나 편집 등에 대해서만 논의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의 자료와 관련해서 <창세기>에 적용하던 소위 “문서설”이 이 책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학자들 사이에서 <여호수아>를 “육경”(六經) 중의 마지막 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즉 <모세 오경>에 이 책이 추가되었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더욱 최근에 와서는 <신명기>를 앞의 네 책과 분리시켜 <전기 예언서>와 연결시켜, <전기 예언서>에 속한 모든 책들을 “신명기적 역사”(the Deutronomic hostory)로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육경으로 부르는 이유도 “신명기적 사관”(史觀)이 책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적 역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신학> 부분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문서설”의 가정을 이 책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하는 이유는 <오경>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문학적인 상수(常數)나 신학적인 주제 등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중복되거나, 또는 모순되는 부분들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이한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 “상이한 문체의 존재”; “중복되는 내용”;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이한 원인 설명”; “후대의 상황이나 지명이 그보다 이전 시대의 기록 속에 등장하고 있음”(“야살의 책,” “유다 왕의 역대지략” 등). 이들 각각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본문의 <문학과 역사>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문서설”에 따르면, 이 책의 제 1부(1-12장)는 대부분 <신명기 전승>과 <야훼/엘로힘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책의 나머지 부분(13-24장)은 거의 전부 <사제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결국 처음 열두 장은 일련의 원인론적 이야기(etiological tales), 즉 “이스라엘은 어디서 왔는가?”, “기브온 족속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등에 관한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이전의 전승들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명한 역사비평학자 ‘노트’(M. Noth)는 이러한 가설을 배격하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여호수아>를 위시해서 <전기 예언서>는 J, E. P 등의 전승보다는 전체적으로 <신명기>(D 자료)와 더 공통점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 1-12장은 “신명기적 역사관”에 입각해서 수집 및 편집되었으며, 이들 자료에 후대의 자료들 즉 성읍들의 목록이나 경계에 관한 기록 등이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후대 자료의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저명한 역사학자 ‘브라이트’(J. Bright)는 그 연대를 주전 10세기의 완정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직후에 나머지 “신명기적” 자료들이 첨가되었으며(13-21장), 다른 첨가 자료들은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여호수아>의 일부 자료, 특히 5-7장은 목격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장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부 세부적인 기록들은 ‘여호수아’와 동시대이거나 또는 그렇게 많이 늦지 않은 시대의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고 있습니다: (1) ‘페니키아’의 중심 도시는 시돈(13:4 이하; 19:28)이었는데, 나중에는 ‘두로’가 중심 도시가 되었음; (2) ‘라합’이 그 당시 생존해 있었음; (3) 성소는 아직 고정된 자리가 없었음(9:23); (4) ‘기브온’ 주민들은 그 당시에도 여전히 성소에서 수종드는 노예였음(9:27; 삼하 21:1-6); (5) ‘여부스’ 족속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음(15:8; 참고 삼하 5:6 이하); (6) ‘가나안’인들은 여전히 ‘게셀’에서 살고 있었음(16:10; 참고, 왕상 9:16); (7) 옛 지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반드시 해설이 덧붙여져야 했음(15:9 이하).
그러나 본문 중에 “오늘날까지”라는 문구는 그 사건이 분명 사건의 기록 당시보다 이전에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당연히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 내지는 수정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후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적” 자료의 연대를 상당히 이른 시기-왕정시대나 그 이전-로 잡지 않는 한 본문이 전적으로 “신명기적 역사관”에 따라 편집되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문학
1. 분류상의 문제
신학화 된 역사. <여호수아>는 개신교 <영어성경>의 분류에 따르면 역사서의 첫 책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예언서>(또는 <선지서>)의 첫 번째 책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분류에 대해서는 <구약개론> 등 다른 책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이 책을 <선지서>로 불렀으며, 왜 지금은 <역사서>로 간주되고 있는 것일까? 흔히 개신교 <정경>의 순서는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어도 고대 ‘유대’인들에게 <선지서>가 역사적인 성격보다는 선지적인 성격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역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역사에는 순수한 사실(事實)로서의 역사가 있긴 하지만, 모든 사실을 다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들을 취사선택하고 배열함에 있어 실제 사건과 후대의 독자 사이에는 기록자의 주관적 입장이 끼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연대기나 족보를 역사로 규정할 수 없듯이, <전기 예언서>의 책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아무리 역사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규정한다 하더라도 현대의 역사가들을 만족시키는 그러한 종류의 역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신학화 된 역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의 경우,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은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공평성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단강 도하 이야기”, “길갈의 언약 의식”, “여리고와 아이성의 이야기” 등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가나안 남부 지역 정벌”에 관한 기록은 매우 간결합니다. “북부 지역 정벌”에 관한 기록은 이보다 더 짧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복된 민족이나 도시의 이름조차 생략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이 반드시 연대기적으로 기록된 아니라, 후대 화자의 신학적 의도를 담은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사기> 역시 당대의 정확한 역사를 소개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 역시 이스라엘의 왕정에 관한 모든 사실(史實)들을 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북조 왕국에 얽힌 정치적인 이야기보다 신앙적인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전기 예언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관점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함직한 그런 종류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선지자적 관점의 “신학화 된 역사”입니다. 선지자의 주된 목적은 우선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사무엘’, ‘나단,’ ‘엘리야’, ‘엘리사’ 등과 같은 선지자들의 활동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언약과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인과응보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중요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 즉 <전기 예언서>의 책들의 역사적인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역사 기록은 선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매우 편향된 시각을 가진 ‘아시리아’ 왕들의 연보(年譜)나 ‘헤르도투스’ 및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은 당연히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역사 기록이 역사적인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역사가는 목적에 따라 자료를 선별할 뿐입니다. 그는 역사 기록을 창조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다른 목적을 가진 자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목적에 따라 선별할 뿐입니다. <전기 예언서>의 선지자들 역시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역사적 자료들을 선별했던 것입니다.
<구약>이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르도투스’ 이전의 어떠한 책보다도 역사적인 기록을 더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해서 <구약>의 역사적인 정확성은 반감되기보다 오히려 더 인정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예언서>는 그리고 <구약> 전체의 역사적인 요소는 종교적인 메시지에 종속 내지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들 책속에는 예언(預言)과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그 메시지가 인식되고 있습니다.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 <히브리 성경>이 <예언서>를 이처럼 구분하는 것은 이 두 예언서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前者)는 주로 ‘가나안’ 정복 시기와 초기 왕정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루는 내용은 포로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후자(後者)는 두 왕국이 종말을 고하는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적인 차이가 두 <예언서>의 유일한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각 책의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전기 예언서>는 더욱 “역사적”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비교적 연대기에 맞추어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로부터 <열왕기>까지를 통해서 우리는 “가나안 입성”에서부터 “포로시대”까지의 기간, 즉 주전 1250-586년 사이의 역사를 연결해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어 성경>에서 이 책들을 <역사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후기 예언서>를 통해서는 역사에 대한 희미한 개요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순서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전기 예언서>를 통해서 그 순서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경우에도 <후기 예언서>에 등장하는 내용들을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후기 예언서>는 그야말로 “예언서적”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 할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도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는 <전기 예언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는 주인공 ‘여호수아’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일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메시지도 <사무엘>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단’이 전한 메시지가 <예레미야>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예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전기 예언서>에서 중에서 그나마 예언적인 내용으로서 가장 긴 것이 “엘리야 이야기”(왕상 16-왕하1)나 “엘리사 이야기”(왕하 2-9)일 것인데, 이들 선지자들의 예언을 ‘미가’나 ‘스바냐’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기 예언서>가 원래는 예언적(또는 선지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연속적인 기록을 제공해 주긴 하지만 항상 선지자의 눈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2. 구조와 내용
<여호수아>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그 땅”이며, 따라서 책도 이 주제와 관련해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 땅을 차지하라”; (2) “그 땅을 나누어라”; (3) “그 땅에서 살아라.” 이를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1부. 그 땅을 차지하라(1-12장)
(1) 하나님의 진군 명령(1:1-9)
(2) 명령의 연쇄 고리(1:10-11)
(3) 리더십에 관해서(1:12-18)
(4) 창기의 고백(2:1-24)
(5) 요단 도강(3:1-5:1)
(6) 예배와 정복(5:2-15)
(7) 언약의 두 얼굴(1): 여리고 이야기(6:1-27)
(8) 언약의 두 얼굴(2): 아이 성 이야기(7:1-8:29)
(9) 모세의 명령을 수행하다(8:30-35)
(10) 언약의 타협(9:1-27)
(11) 남방 정벌(10:1-43)
(12) 북방 정벌(11:1-23)
(13) 승리의 희생자들(12:1-24)
제 2부. 그 땅을 나누어라(13:1-19:51)
(1) 가진 것을 나누라(13:1-7)
(2) 모세를 회상하며(13:8-33)
(3) 갈렙에게 먼저 주어라(14:1-15)
(4) 유다와 요셉(15:1-17:18)
(5) 실로의 선택(18:1-19:51)
제 3부. 그 땅에서 살아라(20-24장)
(1) 성막 건설(20:1-9)
(2) 레위의 도시들(21:2-42)
(3) 은혜의 선물(21:43-45)
(4) 제단: 권위와 목적(22:1-34)
(5) 마지막 권면(23:1-16)
(6) 언약과 헌신(24:1-28)
<여호수아>의 신학
1. 신명기적 역사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개입이나 섭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분명 <성경>에만 있는 독특한 개념임에 분명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들 중에는 어떤 사건들을 특정 신들의 활동과 연결시킨 경우들이 더러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 이외의 어디에도 이런 개념을 실제 역사 속에서 일관성 있게 전개시킨 경우는 없으며, 모든 사건들이 오직 한 신과만 연결시키고 있는 경우도 없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보려는 시도가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근 학계는 이러한 사상이 주전 7세기 경 “신명기적 역사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경우는 <사사기>입니다. 이 책에는 죄와 심판과 회개와 구원에 관한 신명기적 개념이 무려 열세 번에 걸쳐 나타남으로써 소위 신학적 윤회(輪回)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심판 즉 외국의 침입을 부르고, 회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사를 세워 구원을 가져오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호수아>나 <열왕기> 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보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과도 완전하게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이스라엘 특유의 것이라 아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탁월한 종교적 통찰력,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간단합니다. 즉 “신명기적 역사관”이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왕국이 종말을 고하던 ‘요시야’ 시절 당시의 일단의 학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둘의 합작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간단치는 않습니다. 대개 역사철학을 전개시키기에 합당한 시기는 한 시대의 시작보다는 마지막 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을 목도한 이후라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의 시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지혜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요시야’ 의 시대야말로 역사철학을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시기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위대한 천재 또는 선지자들의 이름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놀랍기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놀라운 경험을 했던 자입니다. <신명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역사철학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힐기야’가 ‘요시야’ 시대에 발견한 “율법책”(왕하 22:8-13)이 바로 <신명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해 보입니다. 그것은 이 책의 최종 단계에만 조명을 비춤으로써, 그 이전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적 뿌리들, 그리고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인과응보(因果應報)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과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주-본주 간의 조약 양식이 ‘시내’ 산에서 계시된 ‘모세’의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언약의 두 얼굴인 축복과 저주 즉 인과응보적 개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사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동일한 사상에 대한 배경 내지는 뿌리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열왕기>의 여러 대화나 화자의 진술 속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과 은혜의 개념은 원래는 주로 개인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만, <아모스>에 이르는 동안 국가에 대해서도 적용되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후 “신명기 역사관”은 한동안 잊혀 있다가 ‘요시야’ 시대에 새롭게 조명 받게 된 것 같습니다. 국가의 종말과 더불어 이 역사관은 최종적인 형태로 신명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편집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결국 “신명기 역사관”은 ‘모세’ 시대에 배아의 상태로 출발하여, 왕국의 종말의 시대에 최고조로 발달된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2. 언약
역사서의 첫 번째 책 <여호수아>는 <오경>을 관통하는 언약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신명기 역사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전제에 대한 당연할 결과입니다.
수 세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후손들에게 주겠다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은 이후 ‘이삭’과 ‘야곱’을 거쳐 ‘모세’에 이르러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전수되고 갱신되기에 이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 언약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 그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을 끝내고 그 땅을 나누며 각 지파의 경계를 정할 때, 하나님의 언약은 부분적이긴 하나 성취를 맞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의 땅이 미 정복의 상태로 남아있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그 땅의 주민들을 쫓아내겠다고 약속하십니다(13:2-6절상). 그리고 이미 취한 땅에 대해서는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약속과 성취의 개념은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를 이루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해내셨으며, 어떻게 광야에서 그들을 보호하셨으며, 그리고 마침내 그 땅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언약 사상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점을 화자의 진술이나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바, 예컨대 다음 구절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21: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5)
이처럼 <여호수아>에서 땅은 언약과 관련해서 불가분의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땅은 불가분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장수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사는 한에 있어서는 시대나 세대를 불문하고 지켜져야 했던 원칙이었으며, 선지자들의 미시지도 바로 이 언약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훗날 우상숭배나 배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때, 선지자들은 회개를 촉구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때문에 다시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으며, 그 땅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포로시대 중에 이러한 회복은 소망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3. 헤렘
‘헤렘’(!rej)은 “바쳐진 것”, “봉헌된 것”(devoted thing), “봉헌”, “헌신”(devotion), “금지”, “저주”(ban) 등을 의미하며, <구약> 전체적으로 19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주민과 그 성을 불태웠습니다(수 6:24-25). 그들은 ‘아이’ 성이나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8:24-29). 이처럼 완전한 파괴를 가리키는 말이 궁극적으로 ‘헤렘’(!rej)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헤렘’은 언약 사상과 함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가 이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적어도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물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것을 원하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만):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10:40)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붙잡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바쳤으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시켜서 누구를 죽이라고 한다거나,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완전히 멸절하라고 명령했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신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만, 아무튼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헤렘’의 주제는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한 가지 대답은 ‘헤렘’을 당시의 역사∙문화적 상황 하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사람이나 전리품 또는 포로들을 자신들의 신(들)에게 바치는 행위는 일종의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행위가 완전히 정당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아직도 계시의 초보 수준으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같은 가르침을 받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그들에게 상응하는 수준의 계시를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해답은 아닙니다. <성경>은 ‘가나안’ 사람들을 단순히 “진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나안’ 사람들은 극히 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증스러운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그들의 부패한 종교적인 행위에 동참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묵인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는 마치 의시가 외과적인 수술을 통해서 환부를 드러냄으로써(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신체의 한 일부라 할지라도), 환자를 살려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약하자면, ‘헤렘’은 의 입장은 ‘가나안’에 대한 징계와 이스라엘에 대한 보호라는 이중적인 조처로 보자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헤렘’을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명령으로 이해하자는 입장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든 이방인들을 다 멸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나안’ 족속들만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이 명령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때까지만 유효한 한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도 이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학살에 염증을 느꼈던지, 아니면 성적인 환락으로 가득 찬 종교 의식들에 유혹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나안’ 종교는 점차 이스라엘 종교 속으로 퍼져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훗날 <선지서> 등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가나안’ 종교는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나중에 <아모스>, <미가>, <이사야> 등에서는 <신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의 윤리∙도덕적 가르침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헤렘’을 이런 맥락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헤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그의 적들과 싸우십니다.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땅의 만민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언약의 축복을 공급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속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판단이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증오와 반목이 가득 찰 뿐 일 것입니다.
4. 안식
<여호수아>의 또 다른 주제는 “안식”으로서, 이는 본문에서보다는 오히려 찬송가에서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땅에 도착함으로써 광야의 고생과 방랑, 그리고 정복 전쟁의 수고로부터 안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1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이스라엘은 그 땅에 정착한 뒤에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살아가며,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증인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점에 있어 실패를 해서 결국 다시 그 땅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안식은 노동 이후의 안식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미래적인 것이며, 기다림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당연히 미래의 소망과 축복이라는 교리로 발전되었으며(예. 삼하 7:1), 종국에는 지상의 순례를 마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연결이 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광야의 경험과 그 땅으로부터 은유를 이끌어오고 있습니다(히 3:7-4:10).
그러나 안식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신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제한적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안식은 미래적이거나 순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된 과거적인 사건이며, 이를 바탕으로 매일 매일의 삶에서 누려야 하는 현재적이며 역동적인 그 무엇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의 안식은 “성령 충만”을 통해서 쟁취하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적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천국에서의 미래의 안식은 우리가 싸워 얻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사역으로 완성된 안식입니다.
5. 지도자
공동체와 지도자에 관한 주제는 <여호수아>의 핵심적인 주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화자는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서 암시나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기 위해서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보이는 지도자의 역할모델과 그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체화 되고,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과 답변이 이점을 잘 드러내 줄 것입니다: “어떻게 그 땅을 정복할 것인가?”; “율법에 순종해라.” “그러면 어떻게 율법에 순종할 것인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순종하라.”
따라서 “땅”과 “율법”과 “지도자”는 <여호수아>를 구성하는 신학적 주제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오늘의 교회를 위해서도 심오한 교훈을 제공해 주는 지극히 현재적인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제 1과: 그 땅 이야기
제 1부
그 땅을 차지하라
(1-12장)
1
그 땅 이야기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1:3, 4)
<여호수아>는 새 출발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 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땅의 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책 전체적으로 무려 87회에 걸쳐 이 단어가 등장하고 있고, 신명기에서도 200여 회 나타나고 있으며, 그 중에서 50여 회가 “차지하다”는 단어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땅이 갖는 의미는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땅, 즉 <가나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훨씬 이상입니다. <에스겔>은 이 땅을 가리켜 세상의 “중앙”(겔 38:12)으로, ‘예루살렘’을 열방의 “중앙”(겔 5:5)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 중앙이라는 말의 ‘히브리’ 단어는 “배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 말은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이 세상을 잇는 “생명선”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요 4:22).
‘제임스 브라운’(J. Brown)도 그의 책 <The Land in Between>에서 이 점을 기막히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즉 이 땅은 대륙과 대륙 사이, 역사와 역사 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에도 ‘예루살렘’에 세계의 3대 종교가 혼재해 있는 것을 보면 이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유대교에 있어서 이 도시는 이 역사의 마지막 날에 대망의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역사를 펼쳐갈 ‘시온’ 성이 될 것이며, 기독교에 있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향이자 기독교의 발원지이며,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 ‘메카’이자 ‘알쿠드’(거룩한 도성)입니다. 이제 ‘브라운’이 간파한 대로 이 땅이 갖는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본 후, <여호수아>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를 파악함으로써 이 책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고자 합니다.
1. 대륙과 대륙 사이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을 中東이라 부르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본 강해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앞 페이지에 지도를 첨부했습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지도 작성 시 ‘예루살렘’을 먼저 종이 위에 그려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들을 그려나갔다고 합니다. 필자가 수년 전 학회 참석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받은 감회와 흥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가 8월이라 시기적으로 기후는 건기에 속해 있어, 구름 한 점 없는 산뜻한 지중해 날씨가 주는 이방적인 분위기에는 이미 익숙해 있었던지라 별로 새로울 게 없었으나, 정작 나를 흥분시키고 들뜨게 했던 것은 바로 주님이 태어나셨고, 걸어 다니셨으며, 그리고 돌아가셨던 그 땅을 나도 밟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흥분은 내가 이곳에 오는 동안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불편함을 씻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으로 오는 직항로가 없었던 관계로, 파리 공항에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무비자 통과를 원칙으로 하고 있던 파리 공항조차도 이스라엘 방문객에 대해서만은 철저한 검문검색을 거친 후에야 탑승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불편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군사, 외교적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이스라엘 당국이 또한 계산에 넣고 있는 점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여 관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 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이 보다 큰 수확이었습니다. <에스겔>의 말에 절로 동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명을 듣는 동안 절로 “과연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구나”하고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때 곁에 선 외국인 교수들이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필자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느냐는 뜻이었겠죠.
2. 역사와 역사 사이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늘 중심 무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 땅이 지리적으로 대륙과 대륙 사이에 있다는 전략적 중요성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예를 들어봅시다. 수년 전 백악관에서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발표가 있자 ‘아랍’ 제국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겠다는 외교적 결정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밝혔듯이 이 지역은 어느 특정 민족이나 종교의 영향력 아래 둔다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은 ‘솔로몬’ 왕 통치를 제외하고는 늘 열방들의 힘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이 지역의 역사는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시리아’, 그리고 동으로는 ‘바벨론’이나 ‘페르샤’의 끊임없는 침략과 정복의 악순환의 역사였습니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강자가 되었을 때는 이 지역은 로마 총독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이어서 ‘비잔틴’의 지배는 성지탈환이라는 명목 하에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그 후 1517-1917년까지 약 400년에 걸친 ‘오스만 터키’의 긴 지배가 있는 동안 이 지역은 거의 완전히 ‘이슬람’화 되는 듯 했습니다. ‘이슬람’의 이러한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7년 “팔레스타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승자인 영국의 ‘알렌비’ 장군과 관련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말을 타고 입성하면서, 예수님이 살아 걸어 다니시던 이 땅을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에서 내려 걷자, 그를 따르던 병사 모두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는 일화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 지역은 다시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 이 전쟁의 두 영웅, 독일의 ‘롬멜’과 영국의 ‘몽고메리’가 ‘사하라’ 사막에서 운명의 한 판 승부를 위해 이 지역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어 왔습니다. 멋진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성경>의 예언이자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세상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났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의 상황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지배하던 상황으로, 문화적으로 언어가 하나였고, 정치 군사적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동일 화폐 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때가 찬 경륜”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갈 4:10). <로마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3. 문화와 문화 사이
이 땅의 특징은 또 있습니다. 이 땅은 서로 다른 문화와 기후가 만나는 곳입니다. 서로 다른 두 기후라 함은 동으로는 ‘아라비아’ 사막의 건조하고 뜨거운 대륙성 기후와, 서쪽으로는 온난다습 한 지중해성 기후를 말합니다. 이 두 기후의 규칙적인 순환은 이 지역의 문화나 제반 경제 활동들을 결정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한 해의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지중해성 기후가 지배하는 시기로서, 제반 농작물 경작이 이 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건기 시에 필요한 물을 확보해 두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4월에서 9월까지는 대륙성 사막기후가 이 지역을 뒤덮어 모든 식물들은 다 말라 죽어버립니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 치고 이때를 잘 구별 못하면 한 해의 농사는 물론 제반 경제생활이 아주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천기(天期)를 잘 구별함으로써 자연의 탁월한 해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갈멜’ 산에 올라 서편 지중해 하늘을 관측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를 ‘아합’ 왕에게 전달했던 ‘엘리야’의 일화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왕상 18:43)? 이 점을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영적 무지를 들어 비유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마 16:1).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예로, 오늘의 북한의 산하를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현실과 미래를 쉽게 진단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땅의 문화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영향은 그들의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가나안’ 땅의 정착민들을 농경의 신 ‘바알’을 섬기고 있었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그 땅에 정착하기 전에는 사막의 유목민이었고 그들의 신은 장막과 함께 이동하는 ‘야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들이 그 땅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 땅 거민 들의 신, ‘바알’을 함께 숭배하는 배교와 혼합의 타협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원래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 땅의 신학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 땅의 주인이시며,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그 땅에 살아야 함을 ‘여호수아’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 군대는 하나님께서 400여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에 처음으로 들어가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백성이 그 땅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이 땅과 관련해서 <여호수아서>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실은 이 책의 구조적 원리가 되기도 합니다.
1. 그 땅을 소유하라
첫 번째 사실은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땅에 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땅에 들어가라는 말은 죽어서 훗날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당장 싸워 쟁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네 찬송가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 땅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그러한 천국의 예표가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획득해야 하는 우리의 당연한 삶이자 권리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싸워 빼앗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약의 성도에게 “그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통한 승리하는 삶, 즉 “성령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단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 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이지, 사람들과의 싸움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는 칼과 방패가 아니라 성령의 칼,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늘 패배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 ‘여호수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매사에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2. 그 땅을 나누어라
두 번째 그 땅과 관련해서 상기해야 할 사실은 그들이 차지한 땅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승리를 나누라는 것이죠. 사실 이 역시 신약의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학교에서나 목장에서 만나는 목적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나누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간의 믿음으로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치고 아무도 공동체 밖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싫든 좋든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교회를 위한 책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겠다는 주장은 자기 기만적인 것입니다.
3. 그 땅에서 살아라
이 세 번째 관점은 일견 중복되는 사상처럼 보이나, 실은 그 땅을 소유하고, 나누기 위해서 요구되는 일종의 대전제라고 보면 됩니다. 이 전제란 말할 것도 없이 이 책 전체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상세하게는 “율법의 삶” 또는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설교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책의 세 가지 핵심 주제를 알기 쉽게 정리해 보면 아래에 도시한 바처럼 영문 이니셜 “L”로 시작되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여호수아>서는 새 출발의 책입니다. 승전가는 언제 부릅니까? 승리하고 난 뒤라기보다는 승리를 간절히 사모할 때입니다. 언제 천국을 간절하게 그릴까요? 천국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실의와 환멸을 느낄 때입니다. 이 책은 누구에게 필요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책을 모두 마친 후에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겠지만, 오래 된 공동체나 인생의 사추기(思秋期)에 접어들어 이제 더 이상 낙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스라엘의 지도는 ‘바벨론’도, ‘이집트’도, 광야도 아닌, “그 땅”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살도록 따로 마련해 두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땅에 살 때만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긴 해도,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을 싸워서 뺏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할 때만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더욱 풍성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을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여호수아’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엡 1:3).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이 사실을 확인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과거 이스라엘처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 그의 약속을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에 순종함을 말합니다. 나의 지도는 지금 어디입니까?
연습과 토의
1. 국가의 삼 대 요소는 무엇입니까?
2. 이스라엘이 이 세 가지 요소들을 다 갖추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오경>을 이 세 요소들이 갖추어지는 순서대로 구분해 보시기 바랍니다.
3. 학자들은 “땅에도 신학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 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제 2과: 진군 명령
2
진군 명령
(1:1-9)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1:2, 3).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8).
우리는 <서론>에서 “그 땅”이 갖는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특성들에 대해서 개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는데, 그 땅이 지니는 성경적인 의미가 그것입니다. 즉 이 땅은 하나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국가의 세 요소로 백성, 주권, 그리고 국토를 듭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과 함께 백성이 형성되었고, 이 백성은 ‘시내’ 산에서 율법, 즉 주권을 부여받았으며, 이제 <여호수아>에서는 국토를 확보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요소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이어 <여호수아>가 와야 하는데 <민수기>와 <신명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지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민수기>와 <신명기>가 그 중간에 끼어들고 있습니까? 주권 즉 하나님의 법이 제대로 안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이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에 신실했을 때는 그 땅은 항상 그들의 것이었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했을 때는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야 했습니다. <신명기>의 모든 가르침들이 이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 땅”과 “율법”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구약 신학에서 두 개의 큰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수아>에서 또 하나의 축을 만나게 되는데, ‘여호수아’ 자신 즉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 율법에 순종하기 위한 통로이자 살아있는 규범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백성이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순종해야 하며, 눈에 보이는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율법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주제는 영어로 모두 영어 자음 “L”로 시작하는 아래 세 개의 단어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여호수아서>의 신학적 주제는 <신명기>의 그것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흔히 “신명기 사관(史觀)”으로 통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핵심 주제어 세 가지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본다면, ‘모세’와 ‘모세’의 율법 그리고 “그 땅”일 것입니다. 이 셋 중에서 첫 두 주제어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이미”라고 한다면, 나머지 하나는 “아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아직”을 “이미”로 바꾸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미래를 현재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간단합니다. “현재에 충실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충실해야 할 현재는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지키고 순종할 것인가? “눈앞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에게 순종하라”입니다.
이들 원리가 책의 전반부(1-12장)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 1장이 기능하는 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책의 전반부의 주제들을 총망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 1장을 다시 그 주제에 따라 세분해 보자면, 크게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단락은 다시 각기 세 개의 소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도표):
(1) 단락 1: 진군 명령(1-9절)
(2) 단락 2: 명령 체계(10-16절)
자료와 편집. 이상과 같은 단락 구분과 관련해서 Lohfink 등과 같은 일단의 양식비평학자들의 견해를 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본문(1:1-9)은 <신명기>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해설(신 1:37-38; 3:21-22, 28; 31:2-8, 14-15, 23; 수 1:2-9)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장이 기능하는 바는 책 전체에 대한 서막 내지는 전주곡으로서, <오경> 특히 <신명기>의 중요한 모티브들을 등장시키면서 <여호수아서>를 이들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여호수아서>의 구조를 일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후자의 기능과 관련해서 본문은 두 가지 주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요단 서편 땅의 정복(1-12장); (2) 지파들 간의 땅의 분배(13-21장). 이 때 각 부분은 해당되는 주제에 걸 맞는 일련의 독특한 어휘나 용어들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책의 전반부에서 땅의 정복과 관련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건너가다”(rb'[,아바르) 또는 “들어가다”(a/B, 보)입니다(신 1:38; 3:21, 28; 31:3, 7, 23; 수 1:2). 한편 후반부에서 땅을 나누는 것과 관련해서 핵심어로 등장하고 있는 단어는 “상속하다”(lj'n, 나할)입니다(신 1:38; 3:28; 31:7; 수 1:6).
Lohfink는 이처럼 상이한 두 개의 단어가 본문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두 개의 양식이 혼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각 단어는 각기 다른 양식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각 양식은 각기 다른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목이기도 한 “하나님의 진군 명령”은 군대의 지휘관 ‘여호수아’를 임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데(2-5절), 이 직책은 <신명기>에서 이미 확립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31:23). 지휘관 임명과 관련된 문장은 그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이스라엘의 법률 문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내용 상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 사실 확인(2절상); (2) 명령(2절하); (3) 명령의 근거(3-5절). 한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된 문장(6절, 9절하)의 양식적 특징 역시 <신명기>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것으로서(신 31:7-8, 23; 삼하 10:12; 학 2:4; 대하 19:11하), 대략 다음 세 가지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1) 격려와 위로(6절상); (2) 수행해야 할 과업(6절하-8절); (3)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9절하). 이 외에도 <여호수아서>에 대한 다양한 역사비평적 연구가 알려져 있으며, 이들 연구의 핵심은 <여호수아서>와 <오경> 특히 <신명기>와의 자료 및 양식의 유사성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상세한 정보를 위해서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Butler, 6-8쪽.
이들 연구를 통해서 공통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내용의 결론만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면, 본문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신명기>의 전승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일반 세속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서, 즉 사실의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역사서란 신명기 학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서>의 모든 역사적 기록도 사실상 신명기 사가(史家)의 “신학화 된 역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본문 중에서 8절 만이 후대 편집자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참고로 이 구절을 <신명기> 17:18-19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남은 문제는 과연 본문의 최종 편집에 간여한 신명기 학자들의 수가 몇이나 되는가에 있습니다. 본문 3-4절의 내용은 <신명기> 11:24-25에 근거하여 추가 편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3-4)
24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신 11:24-25)
그리고 또 한 가지 본문의 양식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은 7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1:7)
이 구절은 전임 지도자가 후임 지도자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훈(遺訓)으로서 그 양식에 있어 격려문에 해당합니다. 이에 상응하는 다른 본문은 <열왕기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4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 2:1-4)
이 두 문장은 구조적으로 유사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론; 권면; 실질적인 지시 사항들. 두 경우 모두 권면의 초점은 율법에 대한 충성에 맞추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명기 사가들에게 있어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주제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다름 아닌 <모세의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수아’,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평안과 안식을 보장해 주었으며, 반대로 불순종은 ‘여호수아’로부터 ‘솔로몬’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남북조 왕국의 파멸을 가져왔습니다. 두 경우 전임 지도자는 각기 ‘모세’와 ‘다윗’이며, 이들의 후임은 각기 ‘여호수아’와 ‘솔로몬’입니다. 따라서 전임 두 지도자는 율법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후임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하달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두 지도자 ‘여호수아’와 ‘솔로몬’은 이 점에 있어 명암이 갈리고 있는데, 전자가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그 약속의 땅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후자는 그렇지 못하고 왕국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관한 7절의 권면은 “신명기 역사”의 골격을 형성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율법에 관한 권면은 따라서 <언약>의 형식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서도 그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8절을 제외한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그 속에 등장하고 있는 어휘나 용어, 구조나 형식, 그리고 그 신학적 목적에 있어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할 것입니다.
형식과 수사. 본문의 형식적 특징으로 “반복과 모순”을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이를 통해서 이 단락의 신학적 사상을 강조하려는 것 같습니다.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나 어휘는 <신명기> 31장에서 이미 진술한 바 있는 여호수아의 소명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에서 반복하고 있는 단어나 용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모세”(1, 2, 3, 5, 7절); (2) “주다”(2, 3, 6절); (3) “모두”(2, 3, 4, 5, 7상, 8하, 9하); (4) “너와 함께 하리니”(5, 9절); (5) “격려의 말”(6, 7, 9절). 이들에 더하여 비록 다른 표현이긴 하나 결국 같은 사상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습니다: (1) “성공적인 정복에 관한 약속”(3상, 4, 5, 6, 7하, 8하, 9하); (2)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5하, 9상). 그러나 이처럼 본문 중에 표현이나 용어들이 반복되고 있다고 해서 화자의 의도가 단순 명료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증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1-3절의 경우만 하더라도, 약속의 수혜자이자 중재자이기도 한 ‘모세’가 죽었으므로,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일견 모순된 진술처럼 들립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서, 1절과 7절에 따르면, ‘모세’는 죽었지만 율법과 후임 지도자를 통해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상충되는 진술은 3절과 6절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모세’에게 말한 바대로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했지만(3절), 실은 그 약속은 ‘모세’가 아니라 족장들에게 한 것입니다(6절). 승리에 대한 약속도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만(3-9절), 그것은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며(2, 3, 5절), 그나마도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7-9절). 약속의 땅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만(4절), 발바닥으로 밝는 곳만이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3절). 승리는 분명한 것이지만, 지도자의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5-9절).
본문의 신학적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또 한 가지 대조를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형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 속에는 명령문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2하, 5하, 6, 7, 8절). 그러나 신학적인 의도는 명령문이 아니라, 오히려 의문문을 통해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의문문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하신 지도자의 반응과 대응을 요구하는 수사적 질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명령문은 즉각적인 반응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위압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대화를 통해서 하되 위압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설득과 유도를 통한 명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거룩한 명령: 그 땅으로 가라(1:1-2)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은 ‘모세’와 ‘여호수아’ 두 사람에 대한 서로 다른 호칭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는 ‘야훼’의 “종”(db,[, 에베드)으로, 그리고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또는 “수종자”)(tr'v,샤라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1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1:1-2)
이로 미루어 이 단락의 핵심 관심사가 지도자에 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가 두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만, 특히 ‘모세’를 “야훼의 종”으로 부르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를 바라보는 화자의 입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칭은 <오경>의 다른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출 4:10; 14:31; 민 11:11; 12:7-8). 이 두 호칭은 <출애굽> 1-14장과 신학적으로 연결되면서 <오경> 전체의 신학적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경>의 기원이나 편집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튼 <출애굽> 1-14장이 편집의 손길에 의하여 보다 큰 단위 속으로 나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기적으로는 ‘히스기야’ 재위 기간 동안 ‘야훼 기자’의 작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 주제 그 자체는 선지자 “이사야 학파”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이사야> 7장과 <출애굽> 14장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주제에 있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탁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부분에 있어서 두 책은 아주 유사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출애굽> 4장에서 ‘모세’의 소명과 관련된 부분 역시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민수기> 11-12장에서도 핵심 내용은 ‘모세’의 선지자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민 11:23; 12:6-8). 결국 ‘야훼’의 종으로서의 ‘모세’에 관한 ‘모티브’가 나타났던 시기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늦어도 ‘히스기야’ 시대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보아집니다. <신명기> 사가(史家)들은 바로 이 모티브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했을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근거해서 ‘모세’나 ‘모세’의 말에 대한 진정성이나 권위가 확립되었습니다(신 34;5; 수 1:1, 2, 7, 13, 15; 8:31, 33; 11:12, 15; 12:6; 13:8; 14:7; 18:7; 22:2; 4-5; 왕상 8:53, 56; 왕하 18:12; 21:8).
호칭의 한 쪽 편에 ‘야훼’의 위대한 “종” ‘모세’가 있고, 또 다른 한 쪽 편에 그의 시종(내지는 부관) ‘여호수아’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이곳과 <오경> 전체적으로 단 세 곳에 불과합니다(출 24:13; 33:11; 민 11:28). ‘여호수아’의 호칭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시종”이 의미하는 바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의 “젊은 부관” 내지는 “견습생”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관련된 이런 호칭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출애굽> 24:13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32:17-18에서 홀연히 등장해서는 이스라엘 진중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우는 소리”에 관한 정보를 ‘모세’에게 전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적어도 문학적으로 24:13은 32장과 연결시키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잠간, 그의 모습은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33:11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가 하고 있는 역할은 ‘모세’의 수종을 들며 “회막”을 지키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이 갑자기 등장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회막”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예언하는 일과 관련해서 ‘모세’에게 이를 보고하면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간청하는 장면을 말하는 것입니다(민 11:26-30). 이곳에서도 출 32:17-18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그의 말을 묵살함으로써 그를 잠잠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과 관련해서 어떤 문학적 기원이나 모티브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책 외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수아> 1장외에,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으로 부르고 있는 경우는 두 번 모두 제의 적인 상황, 즉 “회막”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다룰 때입니다(위 내용 참조). <신명기>에서도 ‘여호수아’를 “회막”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으며(신 31:14), <민수기> 11장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보다 더 구체적으로 한 특정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민수기> 11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진중에서 예언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 본문의 자료적 기원이 선지자 학파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상전과 시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자료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설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에피소드를 보면, ‘여호수아’는 항상 파괴하고 저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용맹스럽지만 무지한 전쟁광(戰爭狂)으로 그리고 있는가 하면, ‘모세’는 이러한 그를 제지하고 억제시키는 상관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자료>에서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시종”으로 칭할 때, ‘여호수아’를 그처럼 단순 무식한 자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모세’의 부하이기는 하나 무식한 것이 아니며, 그의 자발적인 순종은 오히려 그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여호수아’를 어떻게 그리든 이 책의 중심 사상은 수차례 언급한 바 있듯이, 그 땅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여호수아’가 정복한 그 땅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강대국들의 존재를 상상해 볼 때, 이스라엘이 그 땅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원래는 ‘가나안’ 족속들의 것이었거나(창 11:31; 12:5; 신 1:7), 또는 그 이전부터 살던 여러 족속의 원주민들의 것이었습니다(출 3:17). 이스라엘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있다면, ‘야훼’께서 그곳 주민들을 심판하기로 했다는 사실입니다(창 15:16; 신 9:4-5). 하나님은 그 첫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바 있습니다.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땅이라는 ‘모티브’는 이후 <오경>를 관통하는 신학적 연결고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창 50:24; 출 3:8; 6:4; 13:5, 11; 32:13; 33:1; 민 11:12; 14:16, 23-24; 32:11-12; 신 1:8; 4:38; 6:3, 10, 등). 땅과 관련한 <오경>의 이러한 신학 사상은 “신명기 사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들 사상의 편집과 관련한 신학적 작업 또한 주로 “신명기 학파”의 손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 주제를 이어받고 있으며, 그 신학적 근거 또한 <신명기>에 두고 있으며, <신명기>가 그 땅에 대한 약속을 다루고 있다면, <여호수아>는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고, 그 땅의 주민들은 심판을 받았으며, <오경>의 희망은 성취되었고, ‘야훼’의 유업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 거룩한 약속: 그 땅은 어디 있나?(1:3-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어디에 얼마만큼 있습니까? 이어지는 두 절은 이에 대한 답변입니다: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3-4절)
이 두 구절을 통해서 두 번째 단락의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그 땅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두 종류의 국경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살고 있는 “현실의 땅”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상의 땅”입니다. 전자(前者)와 관련해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단순하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삼하 24:2-8, 15; 왕하 4:25; 신 34:1-3)만, ‘요단’ 동편도 간혹 포함하기도 합니다(삼하 24:5-6). 한편 “이상의 땅”의 경계는 남북으로는 “이집트 하수”에서 ‘유프라데스’ 지역까지이며, 동서로는 ‘요단’ 강에서 지중해 연안까지를 포함합니다(창 15:18; 출 23:21; 민 13:21; 34:1-12; 신 1:7; 11:24, 왕상 5:1; 8:65; 왕하 14:25; 암 6:14; 대상 13:5; 대하 7:8). <여호수아>는 이 두 경계를 모두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 책에서 정복한 땅은 “현실의 땅”일뿐입니다만(10:41; 11:17, 22; 13:2-7), “이상의 땅”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이 두 가지 경계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나름대로 역사적 현실이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실제 정복하였고 후대의 왕들이 지배하고 있는 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상의 땅”과 관련된 표현은 주전 13-14세기 경 “이집트 문헌”에서 ‘가나안’ 땅을 지칭하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후대 이스라엘 전승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후자의 전승에 따르면, ‘요단’ 동편에 살던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약속의 땅” 밖에서 살고 있으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수 22:9-34). 이스라엘이 그 땅 즉 흔히 “이상의 땅”으로서의 그 땅을 지배하여 이들 지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했던 적이 간혹 있기는 했습니다(왕상 5:1).
<신명기>에서 땅에 대한 ‘모티브’로서 “유업”(נחלה)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신명기 사상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이 의미하는 바는 “정착하다”, “차지하다” 등입니다. <신명기>에서 특별히 이 땅을 한 개인이나 지파의 거주지로 인식하기보다는 모든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간혹 예외적인 용례(用例) 없는 것도 아닙니다(예. 믹 2:2; 왕상 21:3; 민 16:14).
따라서 “신명기 신학 사상”에 의하면, 이 용어는 전체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주는 조국, 즉 이전에 방랑과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한 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고향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용어는 그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장과 관련해서 제한적인 의미도 드러내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그 땅은 이스라엘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땅도 아니고, 한 개인이나 국가 권력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땅의 신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신명기적” ‘모티브’가 있는데, “모세의 신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3절하). 물론 예언의 성취와 관련해서 “신명기” 특유의 사상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인즉, <족장 이야기>의 여러 곳에서 이에 관해서 암시하고 있으며, ‘나단’ 이후 선지자들의 글에서는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만 <신명기 전승>에서는 하나님의 신탁과 그 성취를 이스라엘의 역사의 핵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 독창적인 기여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3절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사실 “모세의 예언”의 성취와 관련해서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당연히 이 구절은 이전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부여한 특별한 소명을 상기시켜주고 있는데, 이는 오직 <신명기>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3:21, 28; 31:3-8).
땅에 대한 약속과 성취에 관한 모티브가 두 번째 단락의 절반(3-4절)을 이루고 있다면, 나머지 절반(5-6절)은 또 다른 ‘모티브’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5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5-6)
이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유목 생활, 특히 <족장 이야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족장들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행을 시작할 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은 이들 이야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예. 창 28:15; 31:3; 출 3:12).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한 이러한 표현은 <여호수아>에서는 하나의 전형이 되어 이스라엘이 앞으로 수행하는 모든 소위 “성전”(聖戰)의 ‘모티브’로 굳어지고 있습니다(삿 6:11-16; 민 14:43; 삼상 17:37; 삼하 7:9). 따라서 이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믿음이란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며, 인도하고, 보호하며, 적에 대항해서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처럼 아주 오래된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나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에 등장하던 ‘모티브’를 ‘여호수아’ 당대의 삶을 위한 새로운 ‘모티브’로 재포장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모세’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3. 거룩한 성취: 그 땅을 어떻게 차지하나?(1:7-9)
<여호수아> 제 1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티브’와 관련해서 볼 때 처음 두 단락(1-6절)이 “그 땅”과 “지도자”에 관한 것이라면, 이 마지막 단락의 관심사는 “율법”에 있습니다:
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율법”은 물론 이전의 지도자(선지자)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후 모든 <선지서>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예 18:18; 겔 7:26; 호 4:6). ‘이사야’는 그의 제자들에게 ‘토라’를 가르쳤으며(사 8:16), 이스라엘의 현자들 또한 ‘토라’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잠 13:14). <잠언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토라’는 그 내용으로 볼 때 그 유래를 가정교육의 필요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참 1:8; 4:4, 11). <호세아서>는 ‘토라’로 불리는 일단의 전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호 4, 8장), 이들 역시 <오경>의 그것들과 동일한 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거룩한 명령: 그 땅으로 가라(1:1-2)
첫 두 절은 첫 번째 주제, 즉 땅을 정복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거룩한 진군 명령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땅으로 가라.”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입니까! 그동안의 여호수아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절치부심’(切齒腐心)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의 시계를 40년 전으로 잠시 되돌려, <민수기> 13장의 현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가데스바네아’에서 행한 운명의 선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백성은 선택의 기로에서-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동료 인생들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믿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오, 통재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인생은 늘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버립니다. 가장 큰 힘이 필요할 때, 그 힘을 버리고 나 자신의 연약한 힘에 의지하려 합니다. 이처럼 절대 다수의 지극히 민주적이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청년 ‘여호수아’는 지난 40년을 분노와 눈물로 허송세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초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민수기>는 그의 분노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3:6-9).
그러나 이 백성은 이들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추측컨대 이 두 사람은 그날 이후 매일처럼 만나 함께 위로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오지 않았을까? 바로 오늘 이 순간까지 말입니다. 나는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확신하는 바를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곧이듣기는커녕 오히려 냉소하며 나를 잡아가두려 할 때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진군명령을 곰곰이 상고해 봅시다. 아주 흥미로운 표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이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입니다. 물론 이 표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엉뚱한 해석을 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여전히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요, 구원자였던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부터 배제당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필자의 묵상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를 버리신단 말인가? 그가 얼마나 억울해 했을까? 지난 40년을 죽을 고생해가며 이 백성을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사실 그는 자기도 그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내가 ‘모세’라면 어떠한 기분일까?
‘모세’는 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신명기>는 여러 곳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만(신 3:23-27; 32:48-52; 31:23; 34:5), 흔히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므리바’의 물 사건일 것입니다(민 20:2-12). ‘가데스바네아’ 근처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위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했습니다만, ‘모세’가 홧김에 혈기를 부려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을 내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만일 이 일이 화근이 되었다고 설명하다면, 궁색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정도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하나님이시라면 천국에는 사람 하나 없는 황량한 곳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설명은 없을까? 오히려 그 운명의 기로, 즉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모세’의 마지막 선택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궁금증은 이런 것입니다. 즉 그 결정적인 순간에 왜 ‘모세’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그는 백성의 편을 들었거나, 아니면 우유부단(優柔不斷)함으로 결정적 패착을 둔 것으로 보이기에 해보는 말입니다. 지도자의 선택, 그것은 백성들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라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모세’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신명기>도 ‘모세’만한 지도자가 이스라엘 역사상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신 34:10-12).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전형 내지는 원형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를 “야훼의 종”으로, ‘여호수아’를 그의 “시종”으로 부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분명 ‘여호수아’가 정치 및 군사적으로 ‘모세’보다는 열등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더더욱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있었을 것이고, 백성의 잘못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몰라도 ‘모세’만큼은 그 땅에 들어가야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그 첫 번째 대답은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 새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지도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하듯이 이제 이 민족은 새로운 지도자의 부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도 한 때는 ‘이집트’의 노예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구원”을 뜻하는 ‘호세아’였던 것도 그의 이런 신분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민 13:8). 나중에 ‘모세’가 그 이름을 ‘예수’ 즉 ‘여호수아’로 바꾸어 주었습니다(16절). 그는 ‘에브라임’ 지파 소속으로, ‘눈’의 장자였습니다(대상 7:20-27). 이 말은 그의 생명이 유월절 날 밤에 위태로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기적과 이사와 능력을 다 목격했습니다. 그는 또한 용맹스러운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공적은 ‘아말렉’ 군대를 무찌르는 것이었는데(출 17:8-16), ‘출애굽’ 이후 두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혹시 그도 ‘모세’처럼 ‘바로’의 궁전에서 군인으로 복역하고 있다가 그의 군인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군인이 되기 위해서 그 모든 보상들을 거절하고 ‘모세’를 따라 나온 것은 아닐까요? 청년 ‘여호수아’가 다시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 정상입니다. 이때에는 ‘모세’의 부관으로서 그와 함께 산 정상(頂上)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습니다(출 24:13). 그리고는 하산하여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에서 ‘모세’와 함께 분노하면서, 그 백성들의 타락을 목도했습니다(출 32:17 이후). 이 장면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 그가 섬기고 있는 상관 ‘모세’를 위해서도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뽑은 70명의 장로 및 유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다른 장로들과는 달리 회막에 있지 않았던 두 사람 ‘엘닷’과 ‘메닷’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이때에도 그는 분연히 일어나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중지시키라고 ‘모세’에게 간할 정도로, ‘모세’의 권위와 지도력을 위해서 “질투”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3장에서 그는 정탐꾼으로서의 믿음과 헌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도도히 흐르는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좁은 길을 혼자서라도 걷기를 원하는 외롭지만 헌신된 사나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 ‘모세’가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를 격려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실패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잘못된 결정으로 백성들의 손을 들어 주자 그는 순순히 따르고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겸손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 시점에서 그가 차세대 지도자로서 낙점을 받은 것은 아닐런지요: “내가 어찌 이런 아들에게 차세대 지도력을 맡기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모세’가 대표하고 있는 세대는 바로 불신과 불순종의 구원 1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들과 함께 동일시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다”하시면 “나도 ~이다”로 일관했던 ‘여호수아’에게 새 시대를 열도록 특권을 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대답은 없을까? 영적이면서 종교적인 차원에서 두 번째 대답을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닌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것인데, 이 두 사람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하자는 것입니다. <신약>의 용어를 빌자면 “구원”과 “성화”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의 역할을 “구원” 즉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역할로 본다면, ‘여호수아’의 역할은 죽음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승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시는 성령 하나님으로서의 역할로 보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과거에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확신만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구원”은 과거의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오늘의 구원, 즉 “여호수아의 구원”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두 번째 단락이 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2. 거룩한 약속: 그 땅은 어디 있나?(1:3-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어디에 얼마만큼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예정해 두셨습니까? 이어지는 두 절을 봅시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3-4절).
우리는 여기서 소위 “이상(理想)의 땅”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절은 실은 같은 약속을 유사반복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땅”의 한계란 없다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기막힌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예정된 땅은 이스라엘의 노력과 의지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은 그들이 차지하고 싶은 만큼 예정되어 있다. 뭐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발로 밟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이 약속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백성의 운명을 기계적으로 결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어 두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은 이스라엘의 무기력이나 운명론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한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만큼 실현할 수 있는가는 그들이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는가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런 점에서 소위 ‘블루오션’(blue ocean)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신약>에도 이와 병행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10:10).
3. 거룩한 성취: 그 땅을 어떻게 차지하나?(1:7-9)
그러나 하나님의 ‘블루오션’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입니까? 마지막 단락은 이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떻게 그 “땅”을 획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취에 관한 해답인 셈입니다. 그 대답은 율법(토라)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답은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볼 때 썩 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쟁의 유일한 대안이자 궁극적인 선(善)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전쟁을 앞둔 마당에 한가한 성경공부라니요! 인생의 위기 앞에서 <성경>을 읽으라는 충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기드온’이 바라던 그것입니다. 즉 용감한 군사와 뛰어난 작전, 그리고 첨단 무기 장비들 말입니다.
이 충고는 정말 믿어도 괜찮은 것일까?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선택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교회의 지도자란 사람이 와서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해결이 될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질문 하나 더 생각해 봅시다. 나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에게 찾아갑니까? 대개는 혼자 고민하거나 또는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리라 생각합니다. 친구가 좋은 것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같이 해주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학생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료 학생을 찾습니다. 필자도 학생 시절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인도 목사나 다른 지도자를 찾기 보다는 다른 지체들을 찾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 대상이 누구든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시편>은 “인간의 구원은 다 헛것이라”고 노래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 역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예수께서 해주셨다면, 그 이후의 삶도 마땅히 그분께서 해주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연약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자신 즉 그분의 말씀일 것입니다. 인생의 ‘가데스바네아’에 도달했다 싶으면 늘 찾아가서 물어야 할 상대가 바로 이 하나님입니다. 탁월한 스승을 만나면 탁월해 집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들은 세 가지 충고를 귀담아 들어 볼 일입니다. 첫째, “네 입에서 율법이 떠나지 않게 하라”입니다. 율법을 매일처럼 말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암송입니다. 둘째,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라”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되 뇌이고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탐구와 추론을 말합니다. 필자도 때로 설교 준비를 하면서 본문의 특정 구절을 놓고 씨름할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이번에는 “모세가 죽은 후에...”였습니다. 한 구절을 놓고 계속 묵상하다보면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경험해 보시길.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입니다. 즉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실천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하고 말입니다.
과연 ‘여호수아’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진정한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적을 믿습니까? 누가 기적을 일으킵니까? 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까? 누가 ‘나만’ 장군의 문둥병을 치유했습니까? 이 모두 순종 없이는 불가능했던 기적들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딥니까? 약속의 땅 밖, ‘가네스바네아’입니까? 아니면 그 땅입니까? 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 만큼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계속 간구하며 찾고 있습니까? 내 발로 확인해 볼 일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며, “여호수아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나타나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마 28:20).
연습과 토의
1. 제 1장의 문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제 1장에는 책 전체를 통해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일련의 모티브들이 있습니다. 찾아보고 책 전체의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내 봅시다.
3.왜 모세가 아니고 여호수아입니까?
4.그 땅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 땅은 천국입니까?
5.하나님의 약속과 예정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약속의 땅의 범위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까?
6. 그 땅은 어떻게 차지할 수 있습니까?
7.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만족하십니까?
3
제 3과: 지휘체계
지휘 체계
(1:10-11)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10-11절상)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 출발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요단’강 동편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 저편에 펼쳐진 그 약 속의 땅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40년 내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그토록 그 땅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던 그들의 부모 세대도 자신들의 소원대로 결국은 그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다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을까? 만감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기대와 두려움 가운데서, 지나간 세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동일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강을 건널 것인가 아니면 되돌아 갈 것인가? 건너가자니 기골이 장대한 그 땅 주민들이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신실하신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야훼께서 우리에게 대해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대하시지 않을까? 이 땅을 우리에게 약속은 하셨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 억지로 주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아무리 그 땅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은 강요는 될지언정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가 우리를 이 선택의 기로에서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인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죽고 없는 이 시점에...”
지금 이스라엘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립니다. 담대하고도 확신에 찬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서 새 역사를 이루어 가야할 운명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 그가 가장 시급한 우선적인 과제로 수행한 작업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여호수아서> 제 1장은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고 앞 과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진군명령(1-9절)
2. 명령체계의 확립(10-11절)
3. 여호수아의 진군명령(12-18절)
세 개의 단락이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는 명령 체계에 대한 일종의 계통도(系統圖)와 같은 것으로서, 이를 통해서 진군 명령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수아’를 거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로, 마지막으로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일사불란하게 전달되고 있는 양상을 한 눈에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 한 언어의 유희는 “건너다”(rb'[, 아바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처음 두 단락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 강을 “건너라”고 하셨고(2절), 이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진중(陣中)을 두루 “다니면서”(문자적으로는 “건너다니면서”)(11절), 백성들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강을 “건너라”고 촉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11절).
두 번째 단락을 이루고 있는 두 절(10-11절)은 그 양식이나 내용에 있어 이곳에 두기에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1장 전체의 주제나 모티브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리더십”과 “순종”이라는 두 주제가 그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1-9절)은 이 주제에 대한 신학적 배경과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곳인데,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진군 명령 속에 잘 드러나고 있음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을 뛰어 넘어, 세 번째 단락(12-18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바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를 향한 ‘여호수아’의 연설로서, 내용인 즉은 첫 번째 단락에서 선언한 신학적 주제를 완성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서 두 번째 단락(10-11절)이 기능하고 있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이 단락 역시 ‘여호수아’의 연설을 담고 있는데, 그 대상과 연설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백성의 관리(유사)”들, 즉 “이스라엘의 중간 지도자들”이며, 연설의 내용은 그 땅의 정복에 관한 소개입니다. 이 세 단락을 이런 식으로 일별해 보면 리더십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 다시 각 지파의 두령들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흘러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두 절은 특별한 신학적인 기능을 하기보다는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이 두 절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는 될 수는 없고, 전체 이야기의 한 단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진군 명령의 배경이나 그것을 수행하는 것에 관한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의 배경은 1-2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구체적인 수행에 관한 이야기는 3:2-17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볼 때 두 번째 단락은 오히려 3:2-17의 내용에 연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10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1:10-11상)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3:2상)
자료와 편집. 이 두 절은 특히 <여호수아> 1장에 대한 자료비평 연구에서 논란의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1장을 <신명기 전승>으로 간주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11절 후반은 그 내용이나 어휘에 있어서 <신명기> 11:31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수 1:11하)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신 11:31)
10절에 등장하고 있는 단어 “관리”(rfev, 쇼테르)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만(출 5; 민 11:16), <신명기> 특유의 단어입니다. 또한 11절의 “양식”(hd:yx,체다)은 <오경> 전체적으로 등장하는 회수는 세 번에 불과하지만(창 42:25; 45:21; 출 12:39),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 본문은 모두 <야훼 자료>이거나 또는 <엘로힘 자료>로 인정받는 본문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로 인정되고 있는 여러 책에서도 독특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수 9:11; 삿 7:8; 20:10; 삼상 22:10). 이 두 단어 자체는 아주 오래된 단어임에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본문 자체도 반드시 오래된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Wenham). 추측컨대 <신명기> 화자가 이 시점에서 전승에 의존하여 나름대로 수정 작업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3장 참고). 물론 이러한 추측은 현재의 본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책의 나머지 장들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서 내려진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권위: 위임과 분담
리더십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여호수아서> 제 1장의 첫 번째 단락이 보여주고 있는 바가, 리더십의 “위임”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단락의 핵심은 리더십의 “분담” 내지는 “확산”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리더십을 위임받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진군 명령을 하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1:10-11)
여기서 중간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 “관리”(rfev, 쇼테르)는 <오경>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출 18:25-25; 민 11:16; 신 1:15), 그 배경은 ‘모세’가 자신에게만 몰려있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각 지파의 수령들에게 일부 위임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전승은 또한 이후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법적이고도 군사적인 체계를 재편하는 일에 있어서도 직∙간접적인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대하 19:5-11). <역대기> 기자에게 있어 리더십의 분산은 레위 지파의 법적 의무 사항들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대상 23:4; 26:29; 27:1; 대하 19:11; 26:11; 34:13). 그러니까 <신명기> 화자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민사상의 책임과 관련된 부분은 ‘모세’가 확립해 놓은 것이며, 그 책임은 단순히 법적 영역뿐만 아니라(16:18), 군사적인 영역까지 포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신 20:5-9). 이와 관련해서 <잠언서>는 지도자가 정치적 권력까지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잠 6:7). 따라서 리더십에 대한 <신명기> 화자의 관점은 이스라엘에 왕국이 출현하기 전에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신 1:15; 29:9; 31:21: 수 8:33; 23:2; 24:1). 훗날 왕정이 들어섰을 때에도 제반 행정적 체계나 용어들이 <신명기>의 이러한 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신학”의 또 다른 요소가 11절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차지하다”(기본 어근: vr'y:,야라쉬)는 동사가 그것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다소 광범위하고 애매하기는 합니다만, 비군사적인 의미로는 “상속받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창 15;3-4; 21:10; 삼하 14:7; 렘 49:1-2).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군사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땅을 무력으로 차지하는 행동을 나타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신 2:12, 21, 22, 24, 31; 4:47; 6:18). <민수기>에서도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이 단어의 의미를 확정지어주고 있습니다(민 13:30; 21:24, 32, 35; 33:53).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을 군사적으로 정복하라는 권면은 사실 <신명기> 설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예. 신 4; 5:31; 6:1; 18; 28:21, 63; 30:5, 16, 18; 31:13; 32:47). 이들 예외에도 무려 50여회에 걸쳐 유사한 의미의 구절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단어는 “땅의 정복”과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을 <족장 이야기>와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창 15:7; 22:17; 28:4; 민 33:53; 신 1:8, 21, 39; 3:12, 18, 20; 31:3; 수 1:11). 따라서, 이 예에서 보듯이, 본문 11절은 마지막으로 땅과 관련한 “족장 언약”과 그 성취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싸워 정복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그러한 약속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요단’강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강입니다. 이 강은 ‘안티레바논’(Anti-Lebanon) 기슭의 수많은 급류와 작은 시내들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사모코니티스’ 호수(Lake Samochonitis, 소위 Merom; 현대는 el-Huleh)로 흘러 들어간 후 거기로부터 지상에서 가장 깊은 협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강이며, ‘디베랴’ 호수(‘갈릴리’ 바다)로 유입됩니다. 이 호수를 떠난 후 흐르는 도중 보다 작은 다수의 물줄기에 의해 유량이 증대되며 마침내 이 강은 사해로 흘러들게 됩니다. 이 강은 평소에는 수심이 얕고, 폭이 좁아 개울 같지만 봄철 해빙기가 되면 북쪽 ‘헬몬’ 산으로부터 홍수에 가까운 물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이 주변은 경작이나 거주지로 쓰기에는 여전히 어려우며, 지리적으로 가나안과 요단 동편 땅을 가르는 경계로서, 군사적 요충지의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요단 강 지류>
<요단강 물줄기>
교훈과 적용
오랜 식민 지배를 받았거나 또는 독재 지배를 겪은 국가나 민족일수록 권위에 대한 혐오감 내지는 거부감이 강한 법입니다. 정치권력이 올바르게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남용되어,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만 주로 이용되는 것을 보아왔기에 어쩌면 이런 감정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국가일수록 대의민주주의 보다는 직접민주주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심합니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정으로 촉발된 대규모 촛불시위를 두고 전직 대통령이란 자들이 아테네 식 직접 민주주의를 보는 것 같아 감격스럽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기도 했지만, 직접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열린사회의 공적(公敵)으로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선동(煽動)이나 인기영합주의(populism)가 판을 치게 되고, 다양한 여론이 수렴되기는커녕 인민재판식의 여론 몰이가 사회를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저명한 과학철학자 ‘칼 포퍼’(K. Popper)도 <열린 사회의 적들>에서 이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바로 이런 현상이 예외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싫어하는 언론에 광고를 게재했다 하여 광고주들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공격과 음해를 자행하고, 불매운동을 하는 행위, 광고 담당자의 신상 명세를 인터넷에 공개하여 난도질을 하는 행위, 당연한 법과 권위의 상징인 경찰을 향하여 욕설과 조롱과 심지어 구타도 마다 않는 행위, 선거에 의하여 당선된 대통령에 대하여 물러나라고 명령을 내리는 행위,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을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과 다른 견해는 용서를 하지 못하는 자기모순과 위선 등... 실로 열린사회의 적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통계나 자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절차나 과정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문명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역사가 일천한 국가일수록 집회나, 시위나, 선동이나, 구호가 난무하고, 빈번한 법입니다. 이 모든 난동과 무질서의 근본적인 기저에는 올바른 리더십의 부재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남을 위하여 자기를 태우는 촛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권위에 대한 심각한 불신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진단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지금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이제 가고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땅”을 차지해야만 합니다. 그 대답은 무엇입니까?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즉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권위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입니다. “권위”(ejxousiva, 엑수시아)는 곧 “힘”(power, force)을 뜻합니다. 이 우주에는 세 가지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1) 강력(强力)-흔히 만유인력으로 불리는 별과 별 사이에 작용하는 힘; (2) 중력(中力)-전자기력; (3) 약력(弱力)-원자 내에서 작용하는 핵력. 이 세 종류의 힘은 자연계를 지탱시켜주는 기본 골격입니다. 이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우주는 그 순간 와해되어 버립니다. 가정이나 정부나 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위와 힘이 없으면 그날로 망합니다. 교회의 지도자 역시 그러함을 이 본문 역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10절상). ‘여호수아’의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권위의 분담(분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는 혼자 행세할 것이 아니라 다시 분담되고 분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10절하). 무슨 말입니까? 그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백성의 중간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분담시키고 분산시켰다는 말입니다. 힘이 한 곳으로 모이거나 쏠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특히 정치권력에서 그러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중간 지도자들에게 분담시킨 권위의 내용은 최고 지도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내용 그대로입니다. 즉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요단을 “건널” 준비를 시키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루 다니다”와 “건너다”는 실은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즉 백성의 관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흥미롭게도 백성들 사이를 “건너다니면서” 그들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순종했습니까? 그렇습니다(3:2). 하나님의 권위는 ‘여호수아’를 거쳐 백성들의 중간 지도자들에게 전달됨으로써 전쟁을 위한 지휘∙명령체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를 ‘여호수아’에게 “위임”하고(1절상), ‘여호수아’는 즉각적인 순종을 통해서 위임받은 권위를 백성의 관리들 즉 중간 지도자들에게 “분담”시키고(10절), 이들은 이를 받아들여 백성들 사이에서 “수행”함으로써(3:2), 신정(神政) 공동체의 권위와 질서가 확산되고 확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 오늘날 교회를 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이처럼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위임과 분담, 그리고 확산을 통해서 교회의 질서와 체계를 확립해 가야 할 것입니다. 모두의 절대적인 헌신과 순종이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정반대의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소위 거룩한 방해자들이 교회에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결코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셋째, “권위에 대한 인정과 격려”입니다. 이 세 번째 항목은 최고 지도자의 몫이라기보다는 권위를 분담 받고 이를 수행해야 하는 자들의 몫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위임받은 권위에 대한 “용기와 확신에 찬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초심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를 향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첫 번째 단락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분의 권위를 위임하실 때 하신 말씀 중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1:1-5). 다름 아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의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격려도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11절하).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확인입니다. 물론 40년 ‘가데스바네아’에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을 백성들에게 주지시켜 준 바가 있었습니다(민 13).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위로나 격려는 일방통행식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공동체의 모든 지도자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동체 회중으로부터도 나와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는 초자연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장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있는지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8절). 첫 번째 단락의 친숙한 모티브가 다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하나님이 아닌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되돌려주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소위 “셀 교회” 또는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꿈꾸는 자라면 바로 이 대목을 사역의 철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화자와 그의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삶의 자리는 어디이며, 당면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하나님 나라의 전체성은 온데간데없고, 열방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골육상쟁의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화자는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의 단결과 통일을 염원하면서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북 열 지파를 향해서 말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 남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가! 우리 조상들이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일치단결하여 이 땅을 정복한 것처럼 이제 우리도 다시 연합하여 새로운 민족의 번영을 이루어 보세.”
아니면 지금 화자는 ‘바벨론’에서 또 한 번의 “출애굽”의 기적을 고대하며, 저 약속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회복의 기운을 보면서, 그들을 도와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데 다 함께 돕자는 설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 메시지가 필요 없는 상황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그 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확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장막과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혼자 있을 때나, 교회목장이나 교회학교에서 모일 때마다, 우리가 기억하고, 확인하고, 또 행동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교훈과 적용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이곳에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동일한 모티브나 주제는 무엇입니까?
3. 리더십과 권위에 대해서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4
제 4과: 리더십의 교훈
리더십의 교훈
(1:12-18)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7-18절)
중국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마, 중국인의 자녀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태어났건, 그리고 어디서 살고 있건 상관없이 모두 중국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점 우리 역시 뒤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정하고 있습니다. 북한 영토도 대한민국이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대한민국 백성입니다. 그 흔한 말로 “우리는 결코 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쉐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 하나님 야훼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니”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곧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곧 열두 지파입니다. 그들이 사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들이 약속의 땅밖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백성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여호수아서> 제 1장의 세 번째 단락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이야기가 본래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야기의 주제가 갑자기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관한 이야기로 초점을 옮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화자의 의도는 무엇이며, 그 의도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본문에 대한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신학적 주제와 일련의 모티브들이 무엇인지 발견함으로써 화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서>에서 “성령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요, 교회도 하나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이 본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소위 <셀 교회 목장>의 이상과 정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좋은 사례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은 <여호수아서> 제 1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락의 내용입니다. 앞에서 본 바처럼 제 1장은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1. 하나님의 진군명령(1-9절)
2. 명령체계의 확립(10-11절)
3. 여호수아의 진군명령(12-18절)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은 한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두 곳 모두에서 진군명령을 내리고 있는 사람은 ‘여호수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은 그 자체적으로 별개의 독립된 단락으로 별도 취급할 수 있으며, 내용상 세 번째 단락이 아닌 제 3장으로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전쟁 준비를 독려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고, 그 후속 조치가 다음 단락이 아닌 3장에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 정착하여 살게 될 두 지파 반을 항하여 정복 전쟁에 동참하여 나머지 형제들을 도우라는 명령과, 이들의 순종과 각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명령(12-15절)
(2) 반응(16-18절)
이어지는 제 2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주제로 전환하고 있는데, 내용인 즉은 <스파이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서론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여호수아서>의 자료나 편집은 <신명기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제 1장은 “신명기 역사관”의 축소판 내지는 요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 번째 단락의 신학적 결론 역시 <신명기>의 그것을 이어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문학적 양식에 있어서도 “신학화 된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기자”들에게는 엄격한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역사는 없고, 다만 “신학화 된 역사”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 중에는 <신명기> 특유의 양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자료들 역시 반복해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여러 인용문들의 집합체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편집자들은 단순한 필경사들이 아니라 창조적 신학자들로서, 인용문들을 있는 그대로 느슨하게 연결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의 독특한 양식을 갖춘 채 본문 속에 삽입하고 있습니다.
양식과 배경. ‘바르트’(C. Barth)는 이런 양식을 일컬어, “이스라엘의 대답” 또는 “준비 완료 선언”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Barth는 본문과 <구약>의 다른 본문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대답”이라는 양식으로 규정할 만 한 일련의 요소들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참고 구절: 출 19:7-8; 출 24:1-7; 스10:10-12; 느 8:2-6; 신 27:11-26; 왕상 18:17-40; 수 24:14-28; 왕하 23:1-3; 민 32:28-32; 신 31:9-13).
이들 양식이 반영하고 있는 배경은 일단의 회중(會衆)이 하나님 앞에서 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는 제의(祭儀)나 축제 등일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특정 절기 제사를 반영하고 있는지는 분명치는 않습니다. 이 제의를 통해서 백성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겠다는 각오나 결의를 다지며, 맹세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지도자는 하나님과 회중 사이의 중재자로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결의하고 있는 바는 예컨대 “전쟁 준비 완료”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양식은 주전 7 세기경에 일단의 “신명기 학파”의 설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C. Barth). 물론 이러한 견해는 나름대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신명기 학파”의 활동 시기를 그토록 늦게 잡을 수 없다는 엇갈린 주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문제와 관련해서
제의란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며, 맹세의 서약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신명기>의 설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인간과 인간 사이 즉 ‘모세’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양식은 이곳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관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가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충성 맹세를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충성서약이 절대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호수아’에게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야 할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위대한 확신과 용기를 겸비한 자라야 할 것입니다. 이 두 조건 모두 실은 ‘모세’가 갖추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단락에서 ‘여호수아’가 상대하고 있는 무리는 전체 이스라엘이 아니라, 정복 전쟁 이후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될 두 지파 반입니다. 이들 두 지파 반에 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는 <민수기>와(32장) <신명기>(3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에 관해서 소상히 밝혀줄 역사적 배경이나 전승은 결코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본문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르우벤’과 ‘갓’의 두 지파는 정복 초창기부터 일치감지 이곳에 정착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화자가 이들 지파에 관한 전승을 정복 이야기 속으로 끌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호수아서>의 화자는 “신명기 학파”이거나 또는 “사제”들일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결속성”에서 그 해답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로서, 당연히 그 모든 책임과 권리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참고. 민 32:20-23).
‘여호수아’가 두 지파 반을 향해서 설교하고 있는 내용(12-15절)은 ‘모세’가 이전에 이들 지파들에게 설교한 내용(신 3:18-20)을 거의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다만 두 본문에서 차이가 있는 부분은 달라진 역사적 상황과, <여호수아서> 자체의 각별한 신학적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단락은 내용상 이야기의 흐름에서 갑자기 일탈(逸脫)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어지는 본문의 배경과 상황을 확정짓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12절이 이 단락의 배경과 상황을 결정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13절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12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13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12-13)
그런데 13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황은 이중적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이전의 역사적 상황 즉 <신명기>(3장)의 상황과, 또 한편으로 달라진 역사적 상황 즉 <여호수아>의 그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본문 중에 “기억하라”는 요구는 지금 이들 두 지파 반을 향해서 ‘모세’가 이전 세대에 들려주었던 그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모세’의 설교에는 없었던 새로운 표현들을 새롭게 첨가함으로써, 달라진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너희 모두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새로운 표현, 즉 “정복과 안식”은 이 단락의 핵심어이기도 한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소개하기 위함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종 모세”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리더십의 권위와 승계”와 관련한 모티브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1:1-9). 달라진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주는 표현은 14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1:14)
중요한 변화는 다름 아닌 “땅”입니다. 이 책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이 “땅”을 모두 “성읍”으로 부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15절과 연계해서 고려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신명기>와 흥미로운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1:15)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신 3:20)
일견 같은 진술로 보입니다만, <신명기>에서의 땅의 소유에 대한 강조점이 개개인에게 있었다면, 이곳 <여호수아서>에서는 그것이 지파의 소유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역시 이 책의 모티브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여호수아서>에서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이며, 그 땅도 개개인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새롭게 추가하고 있는 “그들을 도와”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달라진 역사적 상황은 이 단락에서 군사적인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14, 18절).
이어지는 16-17절은 <신명기>보다는 오히려 <민수기>(32장)와 더 가깝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그 내용에 있는 것이지, 기원론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오히려 제의적인 것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8절은 최종 편집자의 손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장은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단락은 그 어조에 있어 신명기적이며, 따라서 내용에 있어서도 신 3:18-20에 의존하고 있습니다만, 달라진 역사적 상황이나 화자 자신의 신학적 관심사에 따라 어휘나 표현에 있어 일련의 변화를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이미 언급한 바처럼 본문은 내용상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는 면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통해서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은 1:1-9 사이에서 요약해 놓은 핵심 주제나 모티브들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1) ‘모세’(13, 14, 15, 17절); (2) “주다”(@t'n, 나탄)(13, 14, 15절상); (3) “땅”($r,a, 에레츠)(13, 14, 15절). 이를 통해서 두 개의 소 단락이 각기 독특하게 강조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의 경우, 13절은 새로운 주제 “안식”을 소개하고 있고, 14절은 반복해서 군사적 용어를 등장시키고 있는가 하면, 15절에서는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 16-17절은 백성들의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마지막 18절은 불순종의 대가나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 용어 모두 <신명기> 특유의 모티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도자 모세; 그에 대한 순종; 땅. <여호수아>의 역사적 상황은 <신명기>의 그것과 분명히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두고 흐르는 메시지는 동일함을 읽을 수 있게 합니다. 지금의 상황은 제사가 아니라 전투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며, 최고 지도자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순종의 대상도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를 향한 것이라야 합니다.
1. 명령 하달(12-15절)
화자의 관심사는 연합과 일치입니다. 첫 두 절은 그의 관심사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12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13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12-13)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될 두 지파 반(半)에 관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는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민 32; 신 3:18-20). 지금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모세’가 이전에 이들에게 한 설교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두 지도자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을 끄는 새로운 용어는 “안식하다”(j'Wn,누아흐)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이 단어가 약속과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제전승>에서는 이 단어를 개인에게 안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구원”을 뜻하거나(시 116:7; 23:2; 렘 45;3; 욥 3:13, 26; 참고 출 33:14), 또는 하나님이 계시는 “평안한 장소”를 뜻하기도 합니다(시 132:8, 14, 대상 28:2). 그리고 안식일과 관련한 초기의 계명에서는 인간의 안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만(출 23:12; 신 5:14), <사제전승>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안식(שׁבת, 쉐바트)”으로 재해석하기도 합니다(출 20:11; 창 2:2-4).
<이사야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이 거부했던 “생명”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사 28:12). 따라서 <예언서>에서는 이 단어를 종말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으며(사 14:3, 7; 11:20; 32:18), 보다 넓게는 “신의 영”을 뜻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민 11:25-26; 왕하 2:15).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일부 <예언서>에서는 종말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사 11:2; 63:14; 슥 6:8).
그렇다면 <신명기 전승>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곳에서는 그 의미가 보다 광범위하고 폭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생의 제반 문제로부터 “평강이나 안식”을 뜻하게 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쟁이나 적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의 안식을 말합니다(신 3:20; 12:9-10; 25:19). 본문에서 채택하고 있는 의미도 바로 이러한 <신명기 전승>전승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신 3:20),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식의 궁극적인 성취나 실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안식이 이루어졌다 해서 그것이 영영 불변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가변적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안식을 잃어버리거나 또 회복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삼하 7:1, 11; 왕상 5:18; 8:56). 주전 597-586 사이에 있었던 “바벨론 유배”야말로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결과로 안식을 잃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신 28:65). 이처럼 안식을 구원과 연계시키려는 시도는 비단 <신명기 전승>이 아니더라도 이스라엘의 다른 전승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시 95:11; 사 63:14; 대상 22:9, 18; 23:25; 대하 14:5; 15:15; 20:30; 느 9:28). 안식은 이스라엘에게는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잃어버린 이상이자 또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있든 안식은 구체화시킬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적의 압박이나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상황은 ‘요단’ 동편에 서서 강 건너 편에 펼쳐져 있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힘들었던 지난 세월과, 가나안에 살고 있던 거인들에 대한 기억들에 사로잡힌 채, 이스라엘은 지금 운명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들어가 그들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다시 광야로 되돌아갈 것인가. 대답은 당연히 강을 건너 그 땅을 싸워 빼앗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안식은 이스라엘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여호수아’는 ‘모세’의 이전 설교를 반복함으로써, 동기 부여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4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15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1:14-15)
‘모세’의 설교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이 아니라 안식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안식은 그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쟁을 통해서 이길 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충성 맹세(16-18절)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향한 ‘여호수아’의 설교는 ‘모세’의 설교를 회상시키는 것이었고, 백성들은 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 대한 충성 맹세입니다:
16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
“모든 이스라엘”의 모티브는 뜨겁고 또한 완벽한 충성 맹세로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든...”; “당신이 우리를 어디로 보내든...”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호수아’를 ‘모세’와 연결시킴으로써, 리더십에 관한 모티브롤 보여주고 있습니다. 훗날 <사사기>에서 보듯이 일부 지파는 어려움에 빠진 다른 지파들을 도우러 나서는 일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만(삿 5:16-17), 이 장면에서만큼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따르겠다는 이들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1:18)
즉 불순종의 대가로 죽음의 저주까지 감수하겠다는 결의가 그것입니다. 이곳에서 “불순종하다”(hr;m, 마라)가 의미하는 바는, “반역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신명기 역사서>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신 1:26, 43; 9:23; 삼상 12:14). 이로 미루어 이들 결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장 전체의 또 다른 모티브 “강하고 담대하라”를 수미상관 식으로 처리함으로써, 1장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명령: 모세의 약속을 기억하라(12-15절)
이야기는 난데없이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향해서 명령을 내리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 하필 이들입니까?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위해서 <민수기> 32장을 회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원래 ‘요단’ 동편이 아니라 서편에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야셀’과 ‘길르앗’에 도달했을 때 이들 두 지파 반은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민 32:1, 4)
이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잇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에서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함께 거하기보다는 많은 양떼와 가축들과 함께 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약 속의 땅 밖에서 살기를 택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이들은 예배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자녀들도 또한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기 위해서 특별한 제단을 따로 세워야만 했습니다(수 22:10).
‘위어즈비’(W. Wiersbe) 목사님은 이들을 가리켜 “경계선 신자”라고 합니다. 그는 오늘날 교회에도 이들 “경계선 신자”들은 수없이 많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필경 그리스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유업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이들은 교회 내 지체들과의 교제나, 교회의 힘든 사역에 동참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취미나 생계를 우선적으로 택합니다. 공동체의 관심사나 비전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공동체나 공동체의 지체를 위한 기도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올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약한 교회의 누룩이 되어 교회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화자의 관심은 바로 이들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위함일까요?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모세’와 맺었던 약속입니다. 무슨 약속을 했습니까? 형제들을 도와 약속의 땅을 정복한 후에야 이 땅에 돌아오겠다는 이전의 약속입니다. 이들의 숫자가 지극히 미미했지만 말입니다. 실제 전쟁에 나간 사람의 수는 40,000명으로서(수 4:13), 기록에 의하면 136,930명이었습니다(민 26:7, 18, 34). 나머지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냥 눌러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는 유기체로서, 너와 내가 아니라 단지 우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구원받고 혼자 살아가는 교인을 위한 책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로 일치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구원받고 확신 가운데 혼자서 신나게 살아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예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사탄’의 책에는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너희”라는 단어는 실은 “너희 모두”로 바꾸어 읽어야 합니다. 무려 열한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일치와 연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원리는 교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안식”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안식은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그 땅을 정복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에 대해서도 얼마나 진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이야말로 교회를 약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리더십과 관련해서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설교는 직전의 지도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이스라엘이 지도자의 원형으로 삼고 있는 ‘모세’의 설교입니다. ‘여호수아’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주제로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과 계획을 담은 새로운 내용의 설교를 새로운 세대에게 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모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것이며, ‘모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나 ‘여호수아’를 따르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리더십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혼자 사막으로 들어가 오랜 수련을 통해서 갈고 닦은 결과도 아니고, 신학교를 졸업할 때 받는 졸업장도 아닙니다. 적어도 <여호수아서>는 <신명기 전승>을 따라, 지도자의 권위와 자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인 것이다.”
2. 반응: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16-18절)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여호수아’가 하나님에게 보였던 반응 그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이들 역시 ‘여호수아’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첫째, 순종하겠다는 헌신과 결단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명령만 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그대로 하겠습니다! 어디든지 보내십시오. 우리 모두가 가겠습니다.” 지파는 지파의 목적을 따라, 개인은 개인의 비전을 쫓아 흩어져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우리 지파를 향한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를 향한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일말의 저항감이나 불안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불완전한 인간 지도자를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 당연히 하나님의 뜻도 예수님을 통해서 물어봐야지 어찌 내 선생이나 리더나 목사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말인가?” 지극히 합리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야고보서>는 “누구나 함부로 선생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완벽하고도 진정한 스승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 불완전한 리더에게 순종하며, 따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6:7, 17).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사실 현대인들에게 “순종”이라는 단어만큼 혐오감을 일으키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자유와 독립, 자율과 그에 따른 책임 등이 미덕이 되어버린 오늘날 순종은 그야말로 케케묵은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현실이 이러한대, 교회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나, 직업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나, 심지어 결혼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자의 말에 따르고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교회가 있다면, 필경 이단으로 지목받을 것이 뻔합니다. 특히 순종의 결과로 오히려 이전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빠지게 되었다면 그러한 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대개 <셀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일수록 이런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필자가 오래 몸담아 왔고, 관계를 유지해 왔던 교회도 이런 범주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학생은 그를 가르치는 선생이 옳다고 믿을 때 비로소 발전이 있는 법입니다. 특히 도제 관계를 중시하는 직업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필자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여러 유형의 제자들을 가르쳐 보았습니다만, 필자의 권유나 가르침에 순종해 그대로 따라했던 학생들은 지금 나름대로 만족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 나보다는 타인이 나를 더 잘 파악하고 있는 법니다. <셀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라면, 진정한 목자는 양의 기질을 양 자신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에는 용서와 이해와 인내가 필수적일 것입니다만, 권면과 질책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인데,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는 순종이 최대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결과는 지도자를 위한 기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17절). 중보의 기도를 해 줄 필요가 없는 지도자란 없습니다. ‘여호수아’ 같은 백전노장도 이 백성의 기도를 누구보다 필요로 하고 있었던 자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세 번째로, 믿음의 결과는, 헌신과 기도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헌신과 결단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 간주하겠다고 말합니다(18절상). 약속을 어겼을 때 저주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자기 저주는 “신명기 언약”의 당연한 인과응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 장면은 참으로 눈물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원의 결의”(桃園의 決意)를 방불케 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나 하나님 앞에서 행한 헌신의 결단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서원을 하지 말라고까지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언약을 파기한 결과의 심각성이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시사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목장 모임에서 경험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모임에서 항상 무엇인가 헌신하고 결단도 해보지만 끝나기가 무섭게 까맣게 잊고 한 주를 지내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지금 이 공동체가 어떤 헌신을 어떻게 하고 있으며, 어떤 각오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 경각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나의 결단과 기도 제목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매일처럼 기도해 왔습니까?
네 번째로, 믿음의 결과는 지도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18절하). 이 동일한 위로와 격려는 제 1장 전체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 두 번의 경우가 위로부터 온 것이라면(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여호수아’가 백성의 관리들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백성들로부터 ‘여호수아’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양들이 그들의 목자를 위로하는 장면입니다. 힘을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눈물겹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이런 것이겠지요: “이리하여, 공동체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약속의 땅을 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책의 제 1장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문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세 번째 단락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단락을 구분하고 이곳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모티브들을 발견하고 주제와 연결시켜 봅시다.
3. 본문을 통해서 <교회 목장>을 위한 이상과 정신을 이끌어내 봅시다.
5
제 5과: 라합의 고백
라합의 고백
(2:1-24)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24)
‘할리우드’에 “스타의 거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명예의 전당으로서, 미국에서 명성을 날렸던 스타들의 손이 보도블록 위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KBS 홀에도 이와 유사한 명예의 전당이 있어, 그동안 KBS 연극대상을 받은 연예인들의 흉상이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명예의 전당이 있습니다. 물론 연예인들이 아닌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이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그 전당은 다름 아닌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이곳에 오늘 본문의 여주인공 ‘라합’이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함께 당당하게 안치되어 있습니다(히 11:31). <야고보서>는 이 여자를 ‘아브라함’과 함께, 그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입은” 대표적인 예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약 2:25). 그래서 그녀는 이방여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은 말할 것도 없고, 창녀라는 명예롭지 못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지위, 그것도 예수님의 선조족보에 들게 되는 영예를 안게 된 것입니다(마 1:5-6). ‘라합’ 외에 ‘다말’과 ‘룻’도 이 족보에 등장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 모두 자랑스럽지 못한 경력을 가졌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남자를 유혹하는 데 일가견을 가졌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은 마치 ‘라합’의 믿음이나 무용담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담대한 고백이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11)!” ‘라합’과 관련한 가장 초기의 전승은 혹시 그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그녀의 직계 후손들이나, 또는 순전히 억측이긴 하지만 후대의 ‘팔레스타인’ 창녀협회(?) 같은 단체가 무슨 “여리고성의 축제”같은 정기적인 기념행사에서 예배나 제사의 일부분으로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거나, 무용담(saga)의 양식을 빌어 그들의 영웅을 미화했을 법도 합니다. 마치 오늘날에도 “황진이 사당(祠堂)”과도 같은 특정 여인의 사당을 지어 공적을 기리고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이 시대에도 그런 행사가 있었을 법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추측해 보자면, 이야기의 원제목은 <여리고 요새와 라합>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과연 화자의 관심사는 ‘라합’을 본문의 주인공으로 삼아 <라합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일까? 화자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며, 본문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일까? 이 점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숙제는 그 내용보다 양식이나 자료 분석에 더 많은 논의나 연구가 있어왔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지 본문의 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과 배경. 본문의 배경은 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싯딤’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아직 ‘싯딤’의 옛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싯딤’은 ‘요단’강으로부터 약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화자의 관심은 ‘요단’을 건너는 것에서(1:11) ‘여리고’를 정탐하는(2:1)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본문의 내용도 화자의 이러한 관심사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이야기의 도입부는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할 스파이를 임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1절), 그들이 돌아와 정탐 결과를 보고하는 것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23-24절). 그리고 이어지는 3장은 1장의 주제를 이어받아 다시 “요단 도강”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2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 단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표적 양식비평학자 ‘궁켈’(Gunkel)은 <라합 이야기>를 전형적인 “원인론적 무용담”으로 간주합니다. 주인공의 여행의 모티브, 그가 여행 중 낯선 곳에서 용기 있는 한 여인의 환대와 보호를 받게 되는 모티브 등이 본문 이야기 속에도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화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6:25)
‘와그너’(Wagner)는 본문의 양식과 관련해서 ‘궁켈’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전형적인 <스파이 이야기>의 양식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 스파이의 차출 또는 호명(呼名); (2) 임무 부여와 파송; (3) 임무 수행과 신탁의 확인; (4) 귀환 및 보고; (5) 땅에 대한 야훼하나님의 약속의 확인-완료형의 문장; (6) 결론-진군 및 땅의 정복. 이러한 구분에 잘 들어맞는 본문은 다음 예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민 13-14; 신 1:19-46; 수 14:7-8; 삿 18; 민 21:32-35.
그렇다면 이들 <스파이 이야기>의 배경 즉 삶의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와그너’는 성전(聖戰)을 앞둔 제사 의식을 상정(上程)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제사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음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며, 보다 포괄적으로는 <여호수아> 1-6장 전체를 포함하는 소위 ‘길갈’의 유월절-무교절 축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Wilcox). 그러나 1-6장 전체를 하나의 제의적 상황으로 보려는 시각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일단의 학자들은 2장의 <라합 이야기>를 서론과 결론을 지닌 독립적인 양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는 양식비평에만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 단계에 걸친 편집의 과정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적 연구에 대한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원론적으로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본문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도 광범위한 연구 결과는 Butler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Butler, 29-31쪽.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원래의 <라합 무용담>은 <여호수아서> 2장과 6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색과 수정 등을 거치면서 핵심 주제가 일부 추가되기도 하고 변모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의 최종 편집자로 알려져 있는 “신명기 학자”들의 편집적인 손길을 거치게 되면서, <신명기> 특유의 역사∙신학적 관점들이 자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본문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그 점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라합의 고백과”, 이 고백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두 정탐꾼들의 보고”가 바로 그것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9절)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4절)
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핵심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주다.” 이 동사야말로 1장과 2장을 이어주는 핵심 고리입니다. 이해를 위하여 제 1장을 다시 간략하게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장은 그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와 격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1-9).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그리고 위로와 격려는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유사들과 백성들에게 전달되었고(1:10-15), 이를 전해들은 모든 백성들은 이에 호응하여 순종의 결의를 다지면서, ‘여호수아’에게 동일한 약속과 격려를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1:16-17).
공동체는 이제 믿음과 비전에 있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은 진정 새롭게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곧 “거룩한 전쟁”(하렘)을 시작하게 될 하나님의 교회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필수적인 요소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 동일한 비전, 그리고 동일한 생활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으로의 약속과 위로, 아래로는 회중들로의 헌신과 격려가 있으니 그냥 진군 명령만 내리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야기를 <요단강 도강>(3장) 이야기로 이어가지 않고, <라합 이야기>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제자리걸음을 하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라합 이야기>가 기능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야기의 절정을 발견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단락과 범위. 이야기의 절정은 구조 분석을 통해서 비교적 용이하게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바처럼 본문은 문학적 양식에 있어, <스파이 이야기>에 속합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듯이, <스파이 이야기>는 대략 여섯 개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위 내용 참조), 이 구성 요소에 따라 본문의 단락은 자연스럽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성의 절정은 어디일까요?
(1) 스파이 차출 및 호명(1절상)
(2) 임무부여와 파송(1절하)
(3) 임무수행(2-22절)
(4) 귀환 및 보고(23-24)
신학과 신앙
1. 차출과 파송(2:1)
오래 전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 역할을 수행했던(민 13-14장) ‘여호수아’는 이제 자신의 지도력에 근거하여, 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하면서, 은밀하게 ‘여리고’에 관한 전략 정보를 수집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
이야기의 중심 무대는 ‘여리고’입니다. 이 도시는 흔히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된 요새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주전 8000-7000년), 고고학적 발굴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어느 다른 도시들보다 더 많이 이루어진 지역이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지역이기도 한데, 해발 250 미터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리고’에 얽힌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 및 <라합 이야기>와 관계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T. C. Butler, 32-33쪽.
화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두 명의 정탐꾼을 “남자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리고’의 왕도 이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2:3).
이들은 또한 “젊은이들”로 부르기도 합니다. 두 번째 호칭은 정탐꾼들의 나이를 강조하기보다는, ‘여호수아’의 측근 세력에 속한 자들의 군사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Hamilton). Hamilton, V. P. <역사서 개론>.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5.
이 구절을 통해서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싯딤’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장소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머물렀던 마지막 장소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을 아직 이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곳은 ‘요단’강으로부터 약 7마일 정도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장소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에 빠져든 바 있습니다(민 25:1-3).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곳 ‘싯딤’(음행의 도시)로부터 파송된 두 명의 정탐꾼은 ‘여리고’를 정탐하는 중에 한 창녀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점은 전쟁 전에 ‘여리고’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내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의 결정은 일견 믿음과 배치되는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그에게 거의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증하신 바 있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라”(1:5절). 무엇 때문에 정탐이 필요하겠습니까? 믿음과 행동은 서로 배치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책임을 부정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훈련을 불필요하게 합니까?
두 정탐꾼은 “기생”(혹은 창녀)(hn:z, 자나)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됩니다. 일부 증거에 의하면 ‘라합’은 창녀가 아니라 여관 주인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나’를 창기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창기”에 해당하는 ‘아람’어 “여관 주인”은 술집이나 여관을 매춘 장소와 연결시키는 완곡어법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창녀 집인가?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창기의 집에 머물고자 했던 정탐꾼들의 결정은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창기의 집은 그들에게 적절한 은신처를 제공하며,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사실 창기들은 외부인들에 대하여 더 동정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이며, 고객들의 비밀을 지켜 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Hamilton).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화자의 역설적 표현이 익살스럽습니다: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후); “두 사람이 눕기 전에”(8절상). 창녀와의 동침을 암시하는 아주 아슬아슬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화자의 이런 표현은 오히려 한가롭게만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질 것이지만 독자들이 우려할 만 한 상황은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참고)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8절).
2. 임무수행(2:2-22)
정탐꾼 차출과 파송에 이어 세 번째 단락은 임무 수행에 관한 이야기로서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라합’은 모범적인 한 개인으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명의 정탐꾼들과 비교할 때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능한 어릿광대 같거나 아니면 신기할 정도로 짝이 잘 맞는 정탐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기는 여리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샐 틈 없는 경비망 덕택에 수상한 자의 침입을 확인을 할 수는 있었으나, ‘라합’의 거짓말에 넘어가 그들을 잡아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돌아가고 맙니다:
2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2-7절)
특히 ‘여리고’ 왕과 그의 수색대를 따돌리는 ‘라합’은 훗날 그를 닮은 <성경>의 다른 여인들을 연상케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히브리’ 남자 신생아들은 다 죽이라는 ‘바로’ 왕의 명을 어기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너무 빨리 태어나서 미쳐 손을 쓸 수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이집트의 한 산파나(출 1:15-19), 또는 ‘드라빔’이라는 아버지의 수호신을 숨기고서는 월경 때문에 낙타 안장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아버지를 속인 ‘라헬’을 들 수 있습니다(창 31:35). 특정 남자를 다른 남자들로부터 구한 여인을 예로 들자면 ‘미갈’이 있는데, 그녀는 자신의 계략으로 ‘다윗’을 ‘사울’로부터 구했습니다(삼상 19:11-17). 또한 ‘압살롬’ 지지 세력의 추격을 받던 친(親) ‘다윗’ 계열의 ‘요나단’과 ‘아히마스’를 숨겨준 익명의 여인도 있습니다(삼하 17:15-20).
아마 이 사건과 가장 비슷한 이야기는 <소돔 이야기>일 것입니다(창 19). 두 이야기는 공히 밤중에 일어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여호수아:2장>: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 “이 밤에”(2절);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 쯤”(5절); “성문을 닫았더라”(7절); “두 사람이 눕기 전에”(8절).
두 이야기에서 닮은 점은 또 있습니다. 두 명의 사자(使者)가 특정 개인과 그의 가족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모두 멸망당하게 될 도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창 19:1; 수 6:17, 25). 처음에 ‘롯’을 찾아온 그 사자들은 “거리에서”(bjor, 레호브) 경야하겠다고 말합니다(창 19:2). 여기서 ‘레호브’는 ‘라합’과 음가(音價)가 매우 비슷하여 마치 언어의 유희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 두 에피소드의 차이를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소돔 이야기>에서 ‘롯’은 우유부단하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며,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라합’은 진취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구원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신 결과 ‘롯’을 구원하신 것처럼(창 19:29), ‘라합’을 기억하신 결과 그녀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라합’의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9절)
그녀의 고백은 훗날 홍해 구원을 겪은 후에 ‘모세’와 이스라엘이 부른 영광송의 한 부분을 교차대구의 방식으로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출 15:15하)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출 15:16상)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수 2:9)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수 2:9)
화자가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호수아서> 특유의 모티브, “담대하고 강하라”입니다: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0-11절)
‘여호수아’는 정보 수집을 위하여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삼중적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이스라엘 회중들로부터; 이방인 라합으로부터.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바는 또 있습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 간의 대화를 주목해 볼 일입니다:
12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12-22절)
대화의 내용은 2장의 핵심 주제는 아닙니다만, ‘가나안’ 주민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파멸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초지일관 이 전쟁을 거룩한 전쟁, 즉 하렘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가나안’ 주민들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적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가 본문 중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 오고간 계약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전문(前文): 너희 하나님 야훼는...(11절)
(2) 머리말: 우리가 들었음이라(9-11절)
(3) 규정: 내게 맹세하고(12-13절)
(4) 약속(18-20절)
(5) 맹세(15-17절)
(6) 언약의 징표: 창문에 걸기로 한 붉은 줄(18, 21절)
‘라합’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 언약을 맺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제 성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12-13절). 두 정탐꾼이 언약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징표를 제공해 줍니다(14절). ‘라합’의 창문이 연해 있는 성벽에 매달려 있는 붉은 끈이 그것입니다(15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이 붉은 줄을 창가에 내걸어 두라는 것입니다. 친숙한 출애굽 유월절의 모티브입니다. 누구든 이 언약을 어기고 집 밖에 나가있거나, 아니면 이 줄을 치워버리는 날에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17-21절).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집행자라는 점입니다. ‘라합’은 계약 조건을 받아들입니다(21절).
3. 귀환과 보고(1:23-24)
정탐꾼들은 무사히 귀환하여 임무 수행에 관한 보고를 올립니다:
23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23-24)
이 부분은 <스파이 이야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파이의 보고 내용 때문입니다. 이들이 보고하고 있는 내용은 실은 ‘라합’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동안 반복해서 등장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담대함. 이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이자, 격려요, 위로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래 가자” 뿐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차출과 파송
약 사십년 전에 그 자신 정탐꾼이 되어 ‘가나안’을 살피러 간 적이 있었던 ‘여호수아’가 이제는 이스라엘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정탐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정탐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것입니다. 손자병법에도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 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전쟁에서 유일한 대안은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탐꾼을 보내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반응일까? 하나님은 수차례에 걸쳐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던가? 내가 밝는 그 모든 땅이 다 내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당할 자가 없다고까지 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대도 수고스럽게, 아니 불경스럽게 정탐꾼을 보내야 할까?
이 당연한 질문들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믿음과 탐색,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훈련은 상호 대척점에 서 있는 반명제의 개념들이 아니라, 오히려 동전의 양면처럼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쌍들입니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보내는 문제 사이에 하등 모순이나 갈등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위해서 전략을 수립하는 일은 오히려 하나님을 곤란에 빠뜨리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그는 아직 이 성이 기적적으로 그냥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점을 꿈에도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그냥 앉아 기다린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믿음이 역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망대를 짓는 자의 무계획을 오히려 나무라시고 계십니다. 무계획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탐꾼 두 사람이 처음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믿음의 행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 처음 찾아간 곳이 창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이런 곳입니까? 모르긴 해도 이들은 이런 곳이야말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민심을 가장 잘 파악하려면 택시를 타라는 말이 있듯이, 창기의 집이야말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민심 파악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특별히 주목을 받지 않고 그 성 안에 잠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창녀들은 대개 범죄자들이나 도망자들에게 후한 법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창기의 집에 숨어드는 정탐꾼들에 대해서 화자의 묘사는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후); “두 사람이 눕기 전에”(8절상). 성적(性的) 암시를 줄 수 있는 아주 아슬아슬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자들의 상상력은 이런 것이겠지요: “과연 이들이 ‘라합’과 하루 밤을 보냈을까? 만일 그랬다면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서 이 무슨 망발인가?” 그러나 화자는 이런 상상은 단순히 기우(杞憂)에 불과함을 나중에 알려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대목은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성전”(聖戰) 즉 ‘하렘’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전쟁의 승리가 멸망당하기로 되어 있는 ‘가나안’ 인,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더러운 한 창녀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외모나, 신분이나, 지위나, 과거의 행적에 의존하지 않음을 시사해 주려는 것이겠지요.
2. 임무수행
성의 경비는 철통같았고, 정보망 또한 막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의 수색대가 두 정탐꾼들이 언제, 무슨 경로를 통해서 잠입했는지 이내 파악하고 ‘라합’의 집에 들이 닥칩니다. 그들은 정탐꾼들의 투항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예의 그 번뜩이는 유머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삼엄한 경비망에 비해 대조적으로 너무나 허술한 수색대의 순진함과 어리석음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정보 수집에는 빨랐지만 일개 창녀의 기지에 찬 거짓말에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라합’의 집을 제대로 수색도 해보지 않고 그냥 떠나가 버립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 전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정탐꾼들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라합’의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라”(9, 11절).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가? 그 땅에 관한 지식, 하나님의 인격과 계획에 관한 믿음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신앙고백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이자, 여인이요, 창녀인 ‘라합’의 신앙고백을 빌어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
혹시 이런 것은 아닙니까?: “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창녀와 사귀어도 무방하구나. 그리고 거짓말을 좀 해도 괜찮겠구나.” 그렇다면 나의 지적 수준은 평강공주의 남편의 그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정보 수집을 위해서 보낸 두 정탐꾼이 가지고 온 정보는 그 지역의 형편에 관한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번에는 그 약속을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이 아니라, 이방인 창녀 ‘라합’이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세 번째로 “담대하고 강하라”는 메시지를 듣고 있는 셈입니다. ‘여호수아’의 반응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과연 하나님의 것이로구나. 싸울 필요도 없는 것으로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로구나. 정말 하나도 겁낼 필요가 없구나. 오히려 적들이 지금 혼비백산 두려워 떨고 있구나!” 지금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간의 대화를 주목해 볼 일입니다(12-21절). 대화의 내용은 2장의 핵심 주제는 아닙니다만, ‘가나안’ 주민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파멸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초지일관 이 전쟁을 거룩한 전쟁, 즉 하렘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가나안’ 주민들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적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가 본문 중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합’은 지금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 두 정탐꾼과 언약을 맺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성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12-13절). 두 정탐꾼은 언약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징표를 제공해 줍니다(14절). ‘라합’의 창문이 연해 있는 성벽에 매달려 있는 붉은 끈이 그것입니다(15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이 붉은 줄을 창가에 내걸어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출애굽” 유월절의 모티브입니다. 누구든 이 언약을 어기고 집 밖에 나가있거나, 아니면 이 줄을 치워버리는 날에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17-21절).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집행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2-3)
이처럼 우리는 세상은 물론 천사들까지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먼저 언약 맺기를 요구하고 있는 ‘라합’ 역시 이점에 있어 지혜를 겸비한 자라 아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두 정탐꾼이 제시하는 언약의 조건을 받아들였고(21절), 가족의 다른 구성원도 이를 받아들이도록 요청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처럼 항상 개인적이라 ‘라합’ 혼자서 대표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 위험하기까지 한 이 모험을 그대로 지켜야 했고, 실제 이 집 식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 성의 경찰 요원들이 다시 들이닥쳐서는 이전에는 없던 웬 붉은 줄인가 하고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도 귀찮게 물어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성 안에 살던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고의로 배제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붉은 줄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20절). 하나님의 선택은 이처럼 배타적입니다. 그렇다면 성의 멸망이나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대 왜 하나님은 이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약하고 완악한 쪽은 이들 거민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 역시 ‘라합’이 본 것을 보았고, 들은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배워서 마음이 녹고 정신이 혼비백산했습니다(9-11절).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혼비백산하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라합’처럼 반응하여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감사치도 않았습니다(롬 1: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의 정욕대로 불순종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가(롬 1:24), 그들의 머리 위에 더 큰 진노를 쌓아가셨습니다. 무려 40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들은 실로 핑계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신비한 섭리의 방법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3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롬 11: 11).
3. 귀환과 보고
두 정탐꾼의 귀환 보고는 이야기의 절정이자 결말입니다. 이들이 보고하고 있는 내용은 실은 ‘라합’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동안 반복해서 등장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담대함. 이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이자, 격려요, 위로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래 가자” 뿐입니다. 이들이 40년 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듣고 이처럼 행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래 동안 고민하고, 기도하던 문제가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화자는 이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라합’의 고백이나 두 정탐꾼의 보고를 통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전쟁을 위해서 정탐꾼을 보내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중심으로 믿음과 행위, 은혜와 훈련, 약속과 책임 등에 관해서 토의해 봅시다.
제 6과: 요단강의 기적
6
요단강의 기적
(수 3:1-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5:1)
역사(history)를 흔히 “하나님의 역사”(His story)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점 특히 <성경>의 화자들에게 각별한 것으로서, 이들에게 사실로서의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신학화(神學化) 한 역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모든 현상과 사건에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섭리가 배후에서 작동한 결과입니다. <요단 이야기>(3:1-5:1)도 그 대표적인 경우로서, 화자는 <여호수아서> 1-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시켰던 예의 친숙한 모티브로써 “요단의 기적”에 대한 신학적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참고. 5:1). 이 구절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본문의 핵심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요단 이야기>의 구성적인 원리는 (1) 준비, (2) 도강(渡江), 및 (3) 기념이라는 세 개의 요소가 직선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또 다른 문학적 특징으로서 “반복과 모순”의 패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본문은 많은 역사 비평학자들의 각별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 대한 문학적 연구 또한 중요한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학과 역사
자료와 편집.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식상의 특징은 “반복과 모순”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복이란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고, 모순은 사건의 전개가 연대기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등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연대기적 불일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언급들을 차례대로 나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삼일 후에 ‘요단’을 건널 것이라는 언급이 처음으로 있은 후에(1:11), <아합의 고백>에서 두 명의 정탐꾼들이 산속에서 삼일을 유숙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2:22). 그 후 이스라엘은 ‘싯딤’에서 ‘요단’까지 와서 다시 3일을 더 유숙합니다(3:2). 그리고는 다시 성결의식을 위해서 하루를 더 지체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3:5). 물론 이 의식은 실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참고. 3:6).
다음으로 “반복”과 관련된 내용들을 질문과 함께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요단’강 도강에 관한 언급(3:16; 4:10).
과연 ‘요단’ 강을 건넌 일이 한 번에 걸쳐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인가? 본문은 두 곳(3:17; 4:1)에서 ‘요단’을 건넌 일을 기정사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그러나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요단’을 건넜다는 추가 언급이 4:10-13, 18절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2) 기념비로 세운 돌에 관한 문제.
‘여호수아’는 먼저 열두 지파들로부터 열두 명의 사람들을 선발하라고 명하는데, 선발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3:12). 나중에 ‘요단’을 건넌 후(4:1), ‘여호수아’는 열두 명의 사람들을 선발하라는 두 번째 명령을 받습니다(4:2). 이번에는 그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열두 명으로 하여금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그날 밤에 진을 칠 장소로 옮겨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4:3).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며(4:4-7), 열두 명의 사람들 역시 명령 받은 대로 행동합니다(4:8). 그리고나서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별도의 명령을 받지 않은 채로 열두 개의 돌들을 ‘요단’ 강 가운데 세웁니다(4:9). 마지막으로 ‘여호수아’는 ‘요단’으로부터 가져온 열두 개의 돌을 ‘길갈’에 세웁니다(4:20). 종합해 보면 돌을 운반할 12명을 선택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두 번(3:12; 4:2), 돌무덤이 있는 장소에 관한 언급이 세 번(4:8, 19, 20), 그리고 돌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교훈이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4:6-7, 21-24).
이렇게 볼 때, 최소한 두 개의 상이한 전승이 혼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 대한 상세한 자료비평적 연구 결과는 Butl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Butler, 41-44쪽.
그리고 각 전승의 강조점이 다소 다르다는 점을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각 전승의 이름을 편의상 <여리고 전승>과 <길갈 전승>으로 명명한다면, 각 전승은 우선 “요단강 도강의 목표 지점”을 달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3:16)와 ‘길갈’(4:19-20). 그리고 각 전승의 절정은 “요단의 기적”에 대한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물의 흐름을 끊는 언약궤와 기념 돌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4:6-7), 다른 하나는 마른 땅과 그 마른 땅을 건너는 제사장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4:21-23). 언약궤를 강조하고 있는 전자의 전승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문학적인 상수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떠나다”(출발하다); “(물이) 끊어지다”(3:2-4, 6, 9, 11-14, 16; 4:4-7, 11). 한편 제사장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후자의 전승에서 빈번한 어휘들을 다음과 같습니다: (1) “나오다”; “서다”; “올라오다”; “마른 땅”; “물가”(3:1, 7, 8-10, 15-16, 17; 4:1-3, 8, 15-22).
<여리고 전승>의 핵심으로 추측되는 언약궤나 돌무덤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실물 그대로 각각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를 위한 “제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들은 단순하게 상징적인 기념물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의 공동체는 자신들을 위한 교육적 목적으로 이들의 의미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려주고 있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약궤에 대한 명칭이 아주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1) “궤”(3:15; 4:10); (2) “언약궤”(3:6; 4:9); (3) “증거궤”(4:16); (4) “여호와의 궤”(4:11); (5) “여호와의 언약궤”(3:3, 6, 8, 14, 17); (6) “주 여호와의 궤”(4:5); (7) “온 땅의 주 여호와의 언약궤”(3:11, 13; 4:18). 이외에도 다양한 증거들이 있습니다만, 본문 주석 시에 그 일부를 다루고자 합니다.
한편 <길갈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마른 땅”(3:17; 4:22)은 과거의 전승 즉 <출애굽>의 <홍해 이야기>(출 14-15)에 등장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와 결합하여 당대의 공동체를 위한 교훈으로 새롭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길갈 전승>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은 예배와 제의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당연히 강조하고 있는 바도 <시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신앙고백 입니다.
단락과 범위. 이러한 역사 비평적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요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이야기 단위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모티브나 구조적 통일성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반복되고 있는 모티브는 1-2장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것들입니다: (1) “건너다”(rb'[, 아바르)(최소 22회 등장); (2) “두려워하지 말라”; (3) “리더십”; (4) “일치와 연합.” 그리고 본문의 구조적 통일성에 관한 근거는 3-4장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단락 구분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핵심 주제는 <요단의 기적>으로 결정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 이는 두 장을 관통하는 중심 되는 사건이 다름 아닌 “요단강 도강”이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바로 건널 새”(3:16).
이 구절은 이야기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서, 이 구절을 기점으로 앞부분은 “요단의 기적” 자체에 대한 서술을 담고 있고, 뒷부분은 기적의 의미에 대한 강론 내지는 설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성은 직선적이며 진행적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에 따라 본문을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제 1단락(3:1-7): 요단 앞에 서라
(2) 제 2단락(3:8-17): 요단에 들어서라
(3) 제 3단락(4:1-5:1): 요단을 기념하라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의 형식과 구조가 흥미롭습니다. 이 단락은 형식에 있어 1장과 아주 유사합니다. 특히 명령체계 즉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고 수행되는 방식과 순서가 두 장이 아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형식을 이 단락에서 두 번씩이나 관찰할 수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4:1) ⇒ “여호수아가 열두 사람을 불러”(4:4) ⇒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대로”(4:18);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4:15) ⇒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4:17) ⇒ “제사장들이”(4:18).
세 번째 단락의 구조는 이처럼 두 번의 반복되는 패턴에 따라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도표 참조). 도표에서 보듯이, 각 단락은 <요단의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측면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전반부가 ‘여호수아’에게 촉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반부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각 부분의 핵심 구절을 읽어봄으로써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부분이 모두 <요단의 기적>에 대한 의미와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면 두 부분의 절정과 핵심 주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단락의 이와 같은 구조적 특징은 두 번째의 그것과도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 봉우리(3:7): 기적의 일차적 목표
(2) 야훼 봉우리(3:16): 기적의 궁극적 목적
(3) 대결론(3:17)
이렇게 볼 때 화자는 이곳 세 번째 단락에서 <요단강 기적>을 단순히 반복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4장은 이야기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일종의 반절정(反絶頂)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가진 모든 전승들을 결합시켜,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주제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입니다. 물론 세 번째 단락에서 독특하게 마치 “캠브리아 대폭발”을 보듯이 새로운 표현이나 강조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단 가운데 즉 제사장들의 발이 선 그곳에”(4:3상, 5상, 8후, 9상, 10후, 18상). 그러나 이 역시 동일한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여호수아’가 이 단락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 두 번째로 “물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1) 홍해; (2) ‘요단’ 강. 홍해와 ‘요단’ 강의 차이는 전자가 출구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입구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다는 이스라엘이 결코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곳이며, 강은 목표를 향하여 반드시 건너야 하는 곳입니다. 바다에서는 배후에 원수가 있었으나, 강에서는 앞에 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강을 건널 때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책임은 놀랍게도 지극히 미미한 것입니다. 단순히 두 발을 강에 내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3:5)
여기서 순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먼저 스스로를 성결하게 해야만 합니다. 이 순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성 공격에 실패한 후에도 다시 보게 됩니다:
13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14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7:13-14)
역시 같은 내용이 <민수기>의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민 11:18)
마찬가지로 ‘욥’도 그의 자녀들에게 늘 성결하게 하라는 지시를 보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욥 1:5). 그리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현을 준비하시는 중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11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출 19:10-11)
이 구절은 옷을 세탁하고 일상적인 성관계를 금지하는 행동이 성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위 모든 구절들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 내용은 동일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적이 가능하게 되려면 백성의 성별(聖別)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 준비: 요단 앞에 서라(3:1-7)
첫 번째 단락의 핵심은 “기적을 기대하고 준비하라”입니다. 당연히 본문은 기적에 대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으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건너지 아니하고(1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라”(4절); “야훼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5절후);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7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싯딤’에서 출발하여 ‘요단’까지 당도하는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3:1)
화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도자 ‘여호수아’에 대한 강조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들, 즉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은”(1절상). ‘여호수아’의 지시와 행동에 따라 이스라엘 전체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락의 주인공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매 구절마다 ‘여호수아’ 리더십과 관련하여 그의 인격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이를 요약함으로써, 절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수아’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총사령관; (2) 예언자; (3) 하나님의 대언자. 물론 혹자는 이를 두고 다양한 전승이 결합한 증거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여호수아’의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입니다. 그는 두 명의 정탐꾼이 돌아오자 말자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여, 목표지점인 ‘요단’ 강까지 내달려 왔습니다. 이 구절은 분명 <라합 이야기>을 연상시켜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기회의 문을 열어 주셨을 때, 그는 지체치 않고 순종하여,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대 이 강은 홍수 시기가 아니라면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장애 요인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단’은 지리적인 장애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장애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에서 탈출하여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장애입니다. 이 강을 신앙적인 장애로 규정하는 이유는 이 강은 봄철 홍수 때가 아니면 범람하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에서 주목을 끄는 단어는 “건너다”(rb'[, 아바르)입니다. 이 단어는 앞으로 무려 22회에 걸쳐 마치 합창하듯 본문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텐데, 여기서 처음 등장함으로써 서곡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두 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다소 지체시키는 내용과 표현입니다. 고조되던 긴장도 다소 완화되고 있습니다:
2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3:2-3)
우선 “관리”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뜻밖입니다.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들은 ‘여호수아’가 진군 명령을 내릴 때, ‘여호수아’ 다음으로 지휘 계통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1:10). 이곳에서 이들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최고 지도자의 계획과 명령이 어김없이 실행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함입니다.
또 한 가지 뜻밖의 등장은 제사장과 언약궤입니다. 이 역시 화자의 의도를 놓칠 수 없습니다. 물론 전승에 따라 그 의미나 강조가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언약궤에 대한 다양한 전승과 의미의 변화에 대해서는 Butl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ibid, 44-45쪽.
이 전쟁은 분명 “하나님의 전쟁”(하렘)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두 번째 ‘모세’인 ‘여호수아’와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론인 즉은 백성들이 “관리”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은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한 번은 관리들에게, 또 한 번은 일반 백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3:4-5)
그러나 화자의 핵심은 명령을 듣는 청중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령의 내용에 있습니다: (1) “너무 가까이서 따르지 말라”; (2) “스스로 성결케 하라.” 특히 첫 번째 명령 속에 등장하는 “이천 규빗”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습니다. 이 거리는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 “이천 규빗”이 ‘레위’의 경작지였습니다(민 35:4).
다소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이 두 명령은 실은 동일한 화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하나의 명령으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전쟁의 성격에 관한 강조로 볼 수 있는데,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전쟁은 단순히 정복 전쟁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두 명령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면,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별(聖別)에 대한 강조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남은 일은 행동 개시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3:6)
마침내 ‘여호수아’는 오래 기다려 왔던 진군 명령을 내리고, 제사장들은 이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모세’에 이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며, ‘여호수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1:2)이 실현을 보고 있는 순간입니다. 마침내 ‘야훼’ 하나님께서 이 단락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3:7)
이 말씀은 새로운 계시라기보다는 이미 1장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약속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참고. 1:5), 이 단락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스라엘이 목격하게 될 <요단의 기적>의 일차적인 목표가 있다면 ‘여호수아’가 제 2의 ‘모세’임을 보이는데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의 권위는 그가 이루어 놓은 그 어떠한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있다면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이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고 따랐던 ‘여호수아’의 순종 때문일 것입니다.
2. 행동: 요단에 들어서라(3:8-17)
정복을 위한 “도강”(渡江)은 준비에 이어 행동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요단에 들어서라”는 곧 “기적을 체험하라”는 메시지와 같습니다. 이곳 두 번째 단락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 ‘여호수아’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강조점이 사뭇 달라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즉 그는 이곳에서 “예언자” 또는 “대언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의 주인공이 ‘여호수아’였다면, 두 번째 단락의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각 단락은 7절과 16절을 절정으로 삼으면서 두 주인공을 한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7절에서 “여호수아의 봉우리”를, 그리고 16절에서 “야훼의 봉우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이스라엘 그리고 ‘여호수아’는 조연들입니다. 제사장은 언약궤를 매고 서 있고(8절), 이스라엘은 듣고 있으며(9절), ‘여호수아’는 신탁(神託)을 전하고 있습니다(10절).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7절과 8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을 위한 훈령입니다:
바야흐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하실 텐데,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긴장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언약궤를 매고 ‘요단’ 강가에 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는지라 긴장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13절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8절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와 예견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불러 모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9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3:9-10)
바야흐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보이실 일은 그분의 능력과 인격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는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가나안’의 주민들을 내쫓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경>은 ‘가나안’의 주민들과 관련해서, 그 이름이나 순서 및 목록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창 15:19-21; 출 3:17; 23:28; 신 7:1 등). 이곳에서는 일곱 족속을 거명하고 있는데, 아마도 숫자 일곱이 상징하는 완전함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가나안의 모든 족속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다 할 것입니다. 참고로, 여섯 족속만을 거명하고 있는 곳도 있는가 하면(수 9:1; 출 3:17), 열 족속을 소개하기도 합니다(창 15:19-21). ‘가나안’은 이 지역 주민 전체를 대표하기도 하고, 한 족속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지중해에 연하여 살고 있는 한 특정 족속을 지칭하고 있습니다(5:1; 민 13:29). 또한 ‘가나안’은 본문에서처럼 이 지역 원주민들을 족속별로 거명할 때, 가장 앞에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헷’ 족속은 ‘히위’ 족에 속한 더 작은 무리의 씨족으로 보이며(9:7; 11:19), 이들은 ‘세겜’에 살기도 했습니다(창 34:2; 수 9:7; 11:3). ‘브리스’ 족속은 족장 시대 당시 ‘팔레스타인’의 중앙 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창 13:7; 출 3:8, 17; 23:23), <성경>외는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르가스’ 족속은 ‘갈릴리 호수’ 근처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추정되나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아모리’ 족속 역시 ‘가나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가나안’ 주민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며(24:15; 창 15:16; 삿 1:34-35), ‘가나안’의 산악 지역에 살았던 한 족속을 나타내기도 합니다(민 13:29; 신 1:7). ‘여부스’ 족속은 <여호수아>에서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면(11:3), 항상 ‘가나안’ 원주민 목록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모리’ 족속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산악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11:3; 민 13:29). 이들은 또한 ‘예루살렘’ 지역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삿 1:21; 19:10-11; 삼하 5:6).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쫓아내실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것으로써 너희가 알리라”고만 말씀하십니다. 3-4장의 핵심 사건이 될 <요단의 기적>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 있습니다. 화자는 이야기 서술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면서 독자의 궁금증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소위 <요단의 기적>이 어떤 형태로 일어나든 그것은 단순한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표적”(sign)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빈도에 있어 기적으로 불러 마땅할 “초자연적 사건”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가치중립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기적들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빈도”나 “규모” 외에도 “목적”을 가져야 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게 될”([d'y, 야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 지식은 단순히 머리 지식이 아니라, 체험을 통한 습득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될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방 민족의 신들, 즉 행동할 수 없고 구원할 수 없는 신들과는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시 96:5; 115:3-7). 이들 신들은 단순히 “우상”이거나(레 19:4) 또는 “허무한 것”(신 32:21; 렘 8:19)일 뿐입니다. 이 때 “허무한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발림’(lb<h)으로서, “증기”, “숨”, “허무”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곧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그 분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바로 그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언약궤로 초점을 옮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3:11)
여기서 ‘여호수아’의 요점은 분명합니다만, 언약궤와 관련하여 “온 땅의 주의 언약궤”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의 요지를 풀어 보자면,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계시며, “온 땅의 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땅”($r,a, 에레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땅”; “지구.” 본문에서는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 땅의 주”로 부르는 것을 놓고 특별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참고. 미 4:13; 슥 4:14; 6:5; 시 97:5; 114:7), 정확히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상황에서 볼 때, 약속의 땅에 대한 정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나름대로 화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이어지는 지시는 다소 뜻밖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3:12)
전후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구절이 원래 속해 있던 전승이나 그 기능에 대해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신탁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지금 <요단의 기적>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이들을 독려하고 준비시키는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하게 요구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곳에 삽입하고 있는 화자의 의도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이 구절 역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신탁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화자는 세 번째 단락에서 이들 열두 명을 언약궤와 보다 구체적으로 연관 짓고 있습니다(참고. 4:2).
이야기는 13절에서 결정적인 절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마침내 앞으로 무슨 기적이 일어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3:13)
이 구절과 함께 나머지 14-16절의 ‘히브리’ 문장은 구문(構文) 상 매우 길고도 복잡한 문장입니다. 이처럼 여러 개의 문장을 일렬로 나열시킴으로써, 각 문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현상이나 행위들이 결국 하나의 목표 지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현상은 16절에서 그리고 있는 바, 거대한 물기둥이 쌓여 멈추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서 화자는 13-16절 사이에서 무려 열 번에 걸쳐 사해(死海)로 향해 흘러들어가는 “요단의 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시시각각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마치 생중계를 하듯 긴박감 넘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 가니라. 15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14-16절)
화자의 의도에 따라 이 부분을 다시 재구성해보면 <요단의 기적>이 일어나기까지의 긴박감을 보다 현실감 있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13절);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일어나 쌓이고...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바로 건널 새”(16절). 이 장면을 음악에 비유하자면 “점점 더 세게”가 될 것이며, 16절의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는 절정의 스타카토가 될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장면의 관심의 초점은 “요단의 물”입니다. 두 번째 단락이 서두에서 ‘여호수아’의 사역과 지도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적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보다 앞서 가시면서 물의 기적을 통해서 과연 “온 땅의 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요단의 기적>이 단순히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15절상).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신 때가 “수확기의 홍수 철”(봄철 어느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름 철 기근이 한참일 때, 즉 ‘요단’의 물이 거의 없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봄철에 고지대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강 수면이 불어났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키셨다는 것입니다(아래 두 사진은 시기에 따라 요단의 물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정보는 전략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 홍수 철에 강물이 불어나게 되면 강 건너편의 주민들이 경계심을 덜 갖게 만들기 때문에 침공이 용이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임을 강변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화자는 친절하게도 추가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4:18)
기적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로 “규모”나 “빈도” 외에도 “시점” 즉 타이밍을 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위에서 밝힌 이유 외에도 17절에서 다시 한 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3:17)
모든 백성이 강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단의 기적>에 대한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 “섭리의 기적” 그 자체에 대한 변론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화자는 이어지는 4장에서 다시 한 번 <요단의 기적>에 대해서 언급하게 될 것이지만, 다른 의도에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3. 교훈: 요단을 기념하라(4:1-5:1)
세 번째 단락의 핵심은 앞선 두 단락과는 사뭇 다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요단의 기적>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사건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와 교훈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의 반복되는 질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4:6후, 21후).
그러나 “기념 돌”들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동일한 두 번의 질문에 대해서 화자는 각기 다른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단락과 구조도 이들 대답을 축으로 두 개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각 단락은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신탁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마지막은 위 질문에 대한 각기 다른 대답을 결말과 절정으로 삼고 있음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도표 참조).
기념 1(1-14절). 세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신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4:1-3)
그러나 이것은 그 형식에 있어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자신의 위대한 계획과 활동을 말씀하셨습니다. 기적은 실현되었고 백성들은 이를 통해서 ‘여호수아’의 위대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패턴의 신탁은 한 때는 이스라엘 전체 또는 일단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그 대상은 ‘여호수아’ 혼자뿐입니다.
<요단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여 열두 지파에서 각기 한 사람씩 뽑아서 제사장들이 서 있던 ‘요단’강 “가운데”에서 열두 개의 돌을 가져와 “기념 돌”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단’강 “가운데”는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만(4:3, 5, 8, 9, 10, 18), 3장에서는 17절을 제외한 나머지 곳에서 모두 이 장소가 강 한가운데가 아니라 “물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8, 15). 기념 돌을 세운 장소 또한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이 “유숙하는 곳”이라고 했다가(4:8), 또 한 번은 제사장들이 서 있던 ‘요단’강 가운데라고 쓰고 있습니다(4:9).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앞에서 설명한대로 자료비평적 접근이 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최종 본문 속에 두 개의 전승 즉 <여리고 전승>과 <길갈 전승>이 혼재해 있어 나름대로 상이한 관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념 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일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념 돌”을 두 장소에 세웠는지, 아니면 한 곳에 세웠는지, 그리고 한 번이라면 어디에 세웠는지 등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여호수아’의 행동과 관련해서 보여주고 있는 다음의 정보입니다:
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4:4-7)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순종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 모델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화자는 그 이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여호수아’를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자요, ‘모세’처럼 이스라엘의 교사의 원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6-7절의 표현은 자식과 아비 사이에 오가는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갖춘 교육용 자료로서, 이러한 패턴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출 12:26-27; 13:14-15; 신 6:20-21). 아마도 이스라엘의 성인들은 출애굽 등과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후대의 자녀들에게 이를 가르치기 위한 예배용 교재로서 이러한 패턴을 채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하여 교육 체계의 근간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며, 후대의 제사장들 사이에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육 내용은 <요단의 기적>에 한정될 것이며, 하나님의 기적으로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에 대한 언급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지시에 대해서 백성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4:8)
역시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단락에서 화자가 보여주고 싶은 신학적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 한 지도자를 선택하셨는데, 그는 하나님께 대해서 순종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순종을 이끌어내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다소 어색한 삽입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여호수아’의 연설이 아니라 행동이 돋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4:9)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제사장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건국의 아버지로 기념하여 높이고 있습니다. ‘요단’ 한 가운데에서 직접 제사장들을 영원히 기념할 돌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제사장들의 행위를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나름대로의 신학적 관점을 지닌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제사장의 역할과 지위에 관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영원한 기념비적인 지위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 전승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내에서 직분을 가진 각 방면의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나름대로의 권위를 부여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다음 절은 이 단락의 절정이자, 1-9절 사이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10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말하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 서 있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11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4:10-11)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두 번째 단락(3:17-4:1)의 절정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표현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이 건넜다.” <요단의 기적>에 대한 반복적 서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이 구절은 앞서 진술한 그 모든 내용에 대한 절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강을 건너는 동안 물속에 서 있으라고 명령한 바 있습니다(3:8). 그리고 제사장들은 그 명령에 순종했다고 이 구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인 즉은 이스라엘이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명령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모세’가 이전에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명령한 것을 지켜 순종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계명을 따랐을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의 임재 하에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2-13절은 적어도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다시 반 절정을 향한 일종의 사족(蛇足) 같은 것입니다:
12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 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13무장한 사만 명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4:12-13)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대한 언급이 느닷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관한 언급은 1:12-18에서 한 번 등장한 바 있습니다만, 화자는 왜 이곳에서 이들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일치와 연합에 관한 모티브를 위한 것으로서, 이들 지파는 자신들의 약속을 다 지켰다는 점입니다(참고. 1:16-18). 둘째, 리더십에 관한 모티브로서 ‘여호수아’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13절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12절을 다시 한 번 요약하는데 그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구절은 12절에는 없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 단순히 12절에 대한 반복으로 보기는 어려움 점이 있습니다. 13절의 기능과 관련해서 두 가지 정도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자료적인 측면과 관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 내에서의 신학적 기능과 관련한 것입니다. 우선 화자가 13절에서 구사하고 있는 일련의 어휘들로 미루어 볼 때, 이 구절은 <민수기> 32장 특히 32:27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대한 또 다른 전승에 속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문법적으로 볼 때, 12절과 13절은 일종의 동등 접속사로 연결되고 있어 13절이 12절에 대한 설명이나 요약이 아니라, 앞선 이야기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 보아야 함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13절에 따르면 “무장 군인 사만 명”이 ‘여리고’를 향하여 진군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구절은 논리적으로 5장의 이야기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3절은 ‘요단’강 도강 이야기를 담은 초기 전승의 결론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4장의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기능과 관련해서 13절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다름 아닌 리더십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이 될 것입니다.
14절에서 마침내 4장 전반부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4:14)
결론은 분명합니다. <요단의 기적>의 일차적인 목표는 ‘여호수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홍해의 기적>이 ‘모세’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반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수아에게로 하달되었고(1-3절), ‘여호수아’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독려하고 지시했습니다(4-8절). 그 결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고(10절), 이 일에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도 기꺼이 순종했으며(12-13절),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두 번째 ‘모세’로 세우셨습니다.
기념 2(15-24절). ‘여호수아’의 역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이야기가 만일 14절에서 끝난다면, 아직 절반 밖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4장의 나머지 절반은 또 다른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15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17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18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4:15-18)
우리는 여기서 동일한 명령 체계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지시하고, 다시 백성들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패턴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이곳에서도 순종의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조점은 기적 그 자체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화자의 초점은 하나님의 기적에서 제의적인 관점으로 다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원래의 제사장 계열의 관심사를 드러내고 있는 <길갈전승>에서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20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4:19-20)
도강(渡江)의 지점을 ‘길갈’로 부르고 있는 점이나, 도강의 시기를 농사력(農事曆)인 4월이 아니라 종교력(宗敎曆)인 정월 십일로 부르고 있는 점, 그리고 12 개의 기념 돌에 관한 언급 등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들 용어의 사용과 관련해서 다음 구절은 흥미로운 비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每人이 어린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출 12:3). 두 본문에서 “정월 십일”이 특별히 눈에 띕니다.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요단의 기적>의 신학적 의미를 <홍해의 기적>과 같은 선상에 두고 있습니다. ‘요단’ 도강의 시기는 “출애굽”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홍수 철인 4월이 아니라, 신앙적인 신년 즉 새해라는 말입니다. 새 출발에 대한 강조입니다. 마치 한국의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새 출발의 시기는 신년 정월이 아니라 새 학기의 시작 3월이듯이 말입니다.
화자의 제의적인 관심사는 곧바로 후대를 위한 교훈 즉 교육적인 관심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1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22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4:21-22)
여기서 밝히고 있는 도강의 의미는 4장의 전반부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만(4:6-7), 이번에는 강조점이 다른 것이, “물이 갈라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른 땅”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 “마른 땅”에 대한 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단의 마른 땅”을 “홍해의 마른 땅”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젠가 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4:23)
이처럼 현재 공동체가 경험하고 있는 사건을 이전 시대의 공동체가 경험했던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시공을 뛰어넘는 공동체적인 일치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가령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해서 세대를 뛰어넘는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마른 요단강을 건넜는가? 우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덕분에 마른 홍해를 건넜지! 우리는 결국 하나이구나!”
이제 드디어 <요단의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천황봉인 24절에 도달하게 됩니다(23-24절은 문법적으로 22절에 종속절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4:24)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열방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적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온 땅의 주”로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자신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지, 이방인을 향한 것이 아닐진대, 이스라엘의 적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리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 열방의 적들을 가차 없이 진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날레. 마지막으로 5:1은 4:24절에 대한 결과이거나 또는 이야기 전체의 대결론(大結論)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5:1)
<요단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이전에 <홍해의 기적>을 듣고 그들이 보였던 반응과 동일한 것입니다.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듣고 있는 소식은 조금 전 ‘여호수아’가 ‘라합’을 통해서 정탐꾼으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것입니다. 동일한 모티브의 등장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얻었다”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가 성취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화자가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말하고 싶은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바를 주셨다면, 어찌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지 않겠습니까?”
교훈 및 적용
‘존 호건’은 [과학의 종말]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일 과학자들이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알아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을 알아버린 후의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물음 속에는, 과학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과학의 급속한 종말을 가져올 것이고(질주를 더할수록 목표지점에 빨리 도달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지식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일종의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과연 지식이 더하면 외경심이 사라지는 것일까? <잠언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또는 시작)”이라고 말합니다(잠 1:7).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만(시 14:1), 더욱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롬 1:21) 자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그런데 그의 비극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운명까지도 훤히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경배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여호수아>의 반복되는 모티브 중의 하나는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수 1:6)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진실로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마태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다르게 답하고 있습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를 두려워하라. 그것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를 두려워함이 없이는 나를 두려워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 준비: 요단 앞에 서라(3:1-7)
‘여호수아’는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어떤 일이 날까? 기적입니다. 이들이 기적을 체험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하라”입니다. 당연히 본문은 기적에 대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으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건너지 아니하고(1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라”(4절); “야훼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5절후);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7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싯딤’에서 출발하여 ‘요단’까지 당도하는 것입니다(1절). 사실 ‘요단’은 지리적인 장애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급복해야 할 마지막 장애입니다. 그러나 이 장애는 실은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큰 것이 아닌데도 크게 느껴지는 그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강은 봄철 홍수 때가 아니면 범람하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싯딤’을 떠나 ‘요단’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팔이 짧아서 능히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종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질문을 하지 않는 학생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겠으니 도와달라는 학생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부른 자에게 자꾸 음식을 권할 수 없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주님께서도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받기를 싫어하는 자에게 억지로 떠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님께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죄인을 향한 선포이지. 구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요단’ 앞에 서게 할 것인가? 누가 이 기적을 준비하도록 할 것인가?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여호수아’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권위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들, 즉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은”(1절상). ‘여호수아’의 지시와 행동에 따라 이스라엘 전체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락의 주인공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매 구절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그의 인격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이를 요약함으로써, 절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3:7).
지도자나 정부가 영이 서지 않으면 국가나 공동체가 어떻게 되는지를 현재 우리나라의 난맥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향하여 쥐새끼, 미국 대통령의 강아지, 도둑놈 등 온갖 조롱과 욕설을 퍼부어도 아무도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좌익 폭도들은 국가 공권력을 향해서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경찰차를 불 지르고, 시도 때도 없이 거리를 장악하여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해도, 경찰은 속수무책입니다. 이런 자들을 국가 공영 방송들은 오히려 경찰의 과격 진압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 난국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일까요?
화자가 ‘여호수아’와 관련해서 보여주고 싶은 두 번째 강조점은 그의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입니다. 무릇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려는 자는 그보다 위의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점 ‘여호수아’는 완벽한 역할 모델입니다. 그는 두 명의 정탐꾼이 돌아오자 말자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여, 목표지점인 ‘요단’ 강까지 내달려 왔습니다. 이 구절은 분명 <라합 이야기>을 연상시켜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기회의 문을 열어 주셨을 때, 그는 지체치 않고 순종하여,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앞에 서기 위해서 이 백성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준비만은 아닙니다. 성결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뜻밖에 제사장과 언약궤를 언급하고 있는 장면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명령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너무 가까이서 따르지 말라”; (2) “스스로 성결케 하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소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이 두 명령은 실은 동일한 화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하나의 명령으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전쟁의 성격에 관한 강조로 볼 수 있는데,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전쟁은 단순히 정복 전쟁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두 명령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면,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별(聖別)에 대한 강조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남은 일은 행동 개시입니다. 마침내 ‘여호수아’는 오래 기다려 왔던 진군 명령을 내리고, 제사장들은 이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3:6). ‘모세’에 이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며, ‘여호수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1:2)이 실현을 보고 있는 순간입니다. 마침내 ‘야훼’ 하나님께서 이 단락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3:7).
이 말씀은 새로운 계시라기보다는 이미 1장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약속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참고. 1:5), 이 단락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스라엘이 목격하게 될 <요단의 기적>의 일차적인 목표가 있다면 ‘여호수아’가 두 번째 ‘모세’임을 보이는데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의 권위는 그가 이루어 놓은 그 어떠한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있다면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이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고 따랐던 ‘여호수아’의 순종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슨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를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2. 행동: 요단에 들어서라(3:8-17)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 섰을 때,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이어서 하나님께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고 물이 갈라져 바다가 바른 땅이 되어 이스라엘이 그 가운데를 걸어갔습니다(출 14:21-22).
“홍해의 기적”이 “요단의 기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상황이 우선 다릅니다. 예컨대, 이전에는 적들이 이스라엘을 뒤쫓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적들이 그들의 앞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도록 했고, ‘모세’가 그대로 행했을 때 바다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나고, 갈라진 물은 두 개의 물기둥을 이루었으며, 이스라엘은 그 사이를 건너갔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로 하여금 먼저 요단에 들어서라고 명령하십니다. 물이 흐르고 있는 강으로 들어가는 것과 물이 갈라진 강바닥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편에서 보면 출애굽 당시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한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공동체”에게 더 큰 믿음의 시험이 있다면, 기적에 대한 사전 예고가 이번에는 즉각적으로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홍해의 기적”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곧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사전에 예고해 주십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6). 그런 점에서 이 새로운 명령은 더 큰 긴장감을 조성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는 13절에 가서야 알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 “요단에 들어서라”는 말은 곧 “기적을 체험하라”는 메시지와 같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행동 즉 “순종의 행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물론 순종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주며, 우리가 들을 수도 또 볼 수도 없는 것들을 듣고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블루오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꿈에 대해서 들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세 가지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헐리웃’의 액션 배우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케네디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 가지 꿈을 모두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행동하고, 기도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놀드의 기적”은 다소 무모하고, 황당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면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만, “요단의 기적”은 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단의 기적”은 어느 한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여호수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만도 아닙니다(7절). 그것은 이스라엘 교회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요단의 기적”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 이스라엘이나 제사장이나, ‘여호수아’ 모두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동안 ‘여호수아’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무대의 前面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7절상); (2) “너는...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8절상); (3)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9절하).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며, 제사장은 언약궤를 매고 서 있고(8절), 이스라엘은 듣고 있으며(9절), ‘여호수아’는 신탁(神託)을 전하고 있습니다(10절).
이런 점에서 볼 때 “요단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무슨 결단이나, 믿음이나,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야 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출애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해야 했던 일은 마른 땅 위를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단의 기적”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것인지에 대해서 처음에는 암시를 통해서만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하다가,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의 긴장을 절정으로 고조시켜 놓고 있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10절);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13절);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일어나 쌓이고...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바로 건널 새”(16절). 이와 더불어 기적에 대한 묘사도 아주 사실적입니다: (1) 열 번에 걸친 “물”에 대한 강조와; (2) 그 물에 대해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언급(16절).
그리고 화자는 <요단의 기적>이 단순히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표적”(sign)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15절상).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신 때가 “수확기의 홍수 철”(봄철 어느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름 철 기근이 한참일 때, 즉 ‘요단’의 물이 거의 없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봄철에 고지대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강 수면이 불어났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빈도에 있어 기적으로 불러 마땅할 “초자연적 사건”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가치중립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기적들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빈도”나 “규모” 외에도 “목적”을 가져야 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임을 강변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화자는 친절하게도 추가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4:18). 기적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로 “규모”나 “빈도” 외에도 “시점” 즉 타이밍을 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위에서 밝힌 이유 외에도 17절에서 다시 한 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3:17). 모든 백성이 강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단의 기적>에 대한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섭리의 기적” 그 자체에 대한 변론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합니다.
3. 요단을 기념하라(4:1-5:1)
희랍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流轉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발을 담구고 있는 이 강물은 더 이상 어제의 강물이 아닙니다. 있다면 늘 새로운 것뿐입니다.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역시 “無常”입니다. 즉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더 이상의 홍해도, 더 이상의 ‘요단’강도 없습니다. 이들에게 역사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서> 3-4장은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본성, 즉 하나님의 인격이 있고, 그의 행위 즉 역사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에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왜 존재합니까? 후대의 교훈을 위해서 입니다(고전 10:1-6).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전 1:9).
<요단의 기적>은 <홍해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세대에게 일어났습니다. 다시 반복되지 않을 사건들 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둘을 하나의 사건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의 두 전승을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하나의 큰 전승으로 재창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두 개의 작은 물줄기가 합쳐서 새로운 큰 물줄기를 형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재창조의 작업이 가능한 이유는 두 사건이 지닌 동일한 교훈 때문입니다.
세 번째 단락의 목적이 후대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교훈과 교육을 위한 것이라면, <요단강 이야기>도 마땅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사건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와 교훈을 부각시켜야 할 것입니다.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질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4:6후, 21후).”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동일한 이 질문이야말로 본문의 세 번째 단락의 신학적 기능과 제목을 결정짓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즉 “요단을 기념하라”입니다.
기념 돌. 그렇다면 ‘요단’을 어떻게 기념해야 합니까?
“기념 돌을 세워야 합니다.” 즉 예배를 통해서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란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세 가지 중요한 사역-교제, 증거, 예배-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관계의 사역이라고 할 때(참고. 마 16:18-19), 예배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예배는 건강한 관계를, 따분한 예배는 따분한 관계를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듯이 예배의 형식과 절차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십니다. 이점 다른 제사와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제사는 필경 한 가지 목적을 가지게 되는데 자기만족과 위안을 얻기 위함입니다. 즉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한 뇌물의 성격이 짙다는 것입니다.
기념 돌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예배의 구체성에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예배는 추상적일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여호수아’ 공동체의 예배는 ‘요단’의 기적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자리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고 기억합니다. 물론 기념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예배에 참여하는 나 자신의 지난 한 주간의 죽음과 부활의 삶, 즉 실존적 사실을 기념하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예배에 구체성과 역사성이 결여될 수 없습니다. 열두 개의 돌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제목을 정함에 있어서나, 성도간의 교제 시에 한 주를 간증하고, 회고함에 있어서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그저 범사에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그것도 감사하고. 그래서 결국 범사에 감사한 것이지, 처음부터 무턱대고 범사에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 제목이 구체적이지 못할 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한 그리스도인”이 양산되는 것입니다. 애매하고 막연한 기도 제목이 있다면 지금 당장 바꾸어 봅시다. 병 고침을 받았던 한 문둥병자는 자신의 기도 제목이 무어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응답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열두 돌. 하나님은 또한 “열두 개의 기념 돌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3절). 이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함께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의 화자는 일련의 에피소드나 또는 해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결속성”(solidarity)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가 아니라 공동 운명체라는 것이지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도 결코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12-13절). 결속성에 대한 극적인 사례는 “아이성”의 패배 이후 하나님과 여호수아 간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투 같지도 않던 전투에서 수치스럽게 패한 후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며 대드는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수 7:11). “결속성”에 관한 상세한 신학적 논의는 다른 곳에서 다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결속성”을 인류 전체로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즉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 혼자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 자리에서 함께 공법자로 참여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1).
이 모두 일치와 연합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강력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교회의 이미지들, 즉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군대, 그리스도의 신부 등이 모두 일치와 연합에 대한 강력한 표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여호수아. 열두 개의 기념 돌을 보며 이스라엘이 기념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즉 그들이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기념합니까? 앞에서도 잠간 언급하였듯이 예배를 제정하신 이가 하나님이실진대, 예배의 주인공은 마땅히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를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역사 속에서 노시는 분이십니다(E. Peterson). 이 말은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는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성을 띄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단’을 기념하되 구체적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열두 개의 돌이 바로 구체적인 기념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가 나타난 일차적인 현장은 다름 아닌 공동체의 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떠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으며, ‘여호수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자요, 후대 자녀들을 위하여 교육 체계의 근간을 마련하고 있는 교사의 원형입니다(4:4-7).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하게 한 지도자의 역할 모델을 자임하고 있기도 합니다(4:8).
<신약>은 신자 개개인이 왕이자 제사장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만(벧전 2:9), 여전히 교회의 리더십에 관해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히 13:17). 눈에 보이는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함이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 그러나 여호수아가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지도자의 궁극적인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고, 따르도록 하는 것 이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예배의 초점도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침례 ‘요한’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 번째 단락의 나머지 절반(15-24절)에서 화자 역시 같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락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그 형식에 있어 동일한 명령 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백성들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형식적 특징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순종의 모티브이기는 합니다만,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기적 그 자체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의도에 걸맞게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와 행위를 암시하는 일련의 단어나 표현들이 마치 “캠브리아 대폭발”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증거궤; 언약궤; 제사장; 마른 땅.
선교와 교육. 예배의 또 다른 기능은 없습니까? <요단 이야기>의 천황봉이자 대 절정을 읽어 봅시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서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4절).
이 구절은 우선 우리의 예배가 세상을 향해서 증거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향한 메시지는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열방들아, 어찌 허사를 경영하려 드는가? 헛된 짓을 말지어다. 내가 진정한 만군의 主 야훼시니라!” 그러나 열방들이 이 메시지를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지, 이방인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은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를 두려워 떨기는 할지언정(5:1), 경외와 믿음으로 반응해 나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재앙 앞에 두려워 떨기는 했으나, 순종으로 나아오지는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존중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24, 26, 28).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사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예배의 또 다른 기능과 관련한 질문입니다. 즉 우리의 예배는 공동체의 교육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24절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나안’의 적들을 인정사정없이 진멸하시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적들을 그토록 진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들어봅시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롬 11:18-22)
이스라엘을 향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스라엘의 ‘쉐마’는 예배가 신앙의 선배나 어버이가, 후배나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신앙교육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세대가 새롭게 경험하는, 새로운 사건들의 의미를, 이전 세대가 먼저 경험했던 사건들과 연관시켜 해석해 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면서, 함께 어우러져 새 시대를 개척해 가는 공동체에 대한 좋은 교훈이 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체험들이 창조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미래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대차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경우 개인이나 교회는 늘 과거의 전통, 즉 “이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이전 교회에서는 이렇게 했는데”에만 집착합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해 냉소적입니다: “나도 왕년에 그랬었지.” 아니면 정 반대로 모든 전통이나 역사에 대해서 경멸적인 자세를 태도를 취하기 일쑤입니다.
오순절 성령 하나님을 체험했던 그 사도들이 우리의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들의 체험과 고백이 우리의 것이라면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4).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136장)
내 삶의 목적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최근 건넌 ‘요단’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요단’에서 가져온 돌은 무엇이며, 몇 개나 됩니까? 이들을 예배에서 지체들이나 이웃이게 증거한 적 있습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돌의 수가 증가해 왔습니까?
토의와 연습
1. <요단 이야기>는 이 책의 3-4장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데, 가장 독특한 문학적 특징이 “반복과 모순”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토의해 봅시다.
2. <요단 이야기>의 반복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주제에 따라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 단락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3. <요단 이야기>가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제 7과: 길갈의 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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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갈의 서약
(5:2-15)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5:2a).
<요단 이야기>는 곧바로 <여리고 성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5:1과 6:1의 표현은 분명 그렇게 해도 충분히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서는 소위 <길갈의 서약> 의식을 담고 있는 본문이 필요치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만일 이스라엘이 이 의식을 생략하고 그대로 ‘여리고’를 공격했다면 틀림없이 실패로 끝날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전쟁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이 치루는 일종의 대리전인데, 대단히 안타깝게도 ‘요단’을 건넌 ‘여호수아’의 군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면 아무도 이스라엘로 부를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냥 열방 중의 한 족속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전쟁을 치르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이 되는 절차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 절차란 무엇입니까? 언약체결입니다. 이 언약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은 곧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 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화자는 바로 이 주제를 위해 세 가지 다른 이야기(또는 전승)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세 이야기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부드럽게 연결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위한 분위기를 창출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결의식 내지는 헌신예배의 분위기로서, 아주 거룩하고, 엄숙하면서도, 희망에 찬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삼국지의 ‘도원의 결의’를 연상시켜 주기도 합니다.
그 세 이야기란 (1) 할례 의식(5:2-9); (2) 유월절 예배(축제)(5:10-12); (3) 하나님의 환상(임재)(5:13-15)입니다. 그리고 이 세 이야기가 본문의 구조적인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 각각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위해서 기여하고 있는지 살펴 볼 일입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을까요? 즉 그들이 승리하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의 범위를 결정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본문의 시작과 끝에 두 개의 전환(轉換) 구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범위는 이 두 전이구절 사이에 있는 내용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은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두려움”이라는 모티브를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5: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6:1)
이 두 구절은 각기 <요단강 이야기>에 대한 결론과 <여리고 전투>에 대한 배경 진술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어, 내용 상 본문(5:2-15) 내용이 없더라도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본문을 이곳에 추가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이며 그 의도는 무엇일까?
화자는 이곳에서 일견 상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세 개의 전승을 결합시켜, 이들이 마치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진술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전승이란 “할례”와 “유월절” 및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이야기로서, 이 셋은 실은 그 주제에 있어서나, 지리∙역사적인 배경에 있어 상호 연관성이 다소 희박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신학적 주제에 있어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화자의 최대 관심사는 제의(祭儀)나 예배에 있고, 이는 곧 이 책의 핵심어인 ‘하렘’ 즉 “성전”(聖戰)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즉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요단 강 도강(渡江)”이나 “여리고 전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즉 거룩함에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리고 전투”를 앞둔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에게는 이 세 전승의 이야기는 특히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이 세 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본문의 단락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할례(2-9절)
2. 유월절(10-12절)
3. 하나님의 임재(13-15)
할례. 첫 번째 이야기의 주제인 할례와 관련해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여호수아’의 즉각적인 순종과(2, 3, 8절), “할례 산”에 대한 언급과(3절), 그리고 할례에 따른 고통과 기다림에 관한 언급(8절; 참고. 창 34:25) 등입니다. 이 백성이 할례를 행한 시기와 관련해서 화자는 단순히 “그 때에”(2절)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다소 막연한 표현으로서 정확히 언제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당시가 청동기 시대인 점을 감안하다면, 할례의 도구로서 부싯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의도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부싯돌이 아니더라도 할례는 그 자체로서 아픔과 상처의 회복을 기다려야 하는 아주 오래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제의의 한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전통을 그대로 오늘 다시 행하자는 말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충실하자는 권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할례가 필요한 것일까? “출애굽” 당시에는 이스라엘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할례를 받았겠으나(5절상), 광야에서 이들 모두는 불순종으로 죽어갔습니다(4절후, 6절).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만, 이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로 볼 수 없었던 것이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5절하, 7절하). 따라서 이들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다시 받아야 했습니다(2절).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여리고’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본문의 문학적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은 할례의 장소에 관한 기원론적 언급을 통해서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절). 하지만 여기서 할례의 장소로 “백성의 진중”(8절)이 아니라 ‘길갈’을 거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이 구태여 이 본문 속에 포함되어야 할 당위성을 찾는다면, ‘여호수아’ 공동체 즉 지금 ‘길갈’에 진치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할 수 있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예임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즉 할례에 관한 오래 된 전승에 포함되었을 내용, 즉 “부싯돌”에 관한 언급이나(2절) 할례의 후유증에 관한 언급이나(8절), 출애굽 당시의 할례에 관한 언급(4절) 등을 할례의 장소 ‘길갈’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세대는 진정 약속의 땅을 차지할 권리를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 두 번째 이야기는 그 땅에서 행한 첫 번째 유월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전승과 관련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길갈’과 관련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10절). 우선 동일한 구절을 다르고 있는 <칠십인 역>에는 ‘길갈’에 관한 언급은 없으며, 이 구절은 또한 4:19와도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치매”(4:19). 그리고 10절은 이어지는 11절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11절). 특별히 두 축제를 기념한 날짜와 관련된 이러한 모순은 아마도 후대의 편집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각기 다른 축제로 보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겔 45:21; 민 28:16; 레 23:6).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락이 실은 <출애굽-광야 생활 이야기>의 절정이라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결론이 그 땅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축제와 관련하여 더 이상의 상세한 언급은 없습니다. “출애굽”을 감행하기 전에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기념했던 이 백성은 이제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유월절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땅은 정치∙군사적으로 아직 미정복의 상태로 남아있지만, 그 땅의 소산물은 이 백성이 유월절의 음식으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야훼의 임재.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은 그 주제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 있어 앞의 두 에피소드와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는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아닌 미완성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앞의 두 이야기에서 ‘여호수아’가 직접 등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곳 ‘여리고’에서는(13절상) 그가 유일한 등장인물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 형식에 있어 <출애굽기: 3장>과 흡사합니다(특히 출 3:5와 본문 15절을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여호수아’와 그의 행동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한 신비한 인물 때문에 놀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를 보고 무엇이지 알아보기 위하여 다가갔던 것처럼(출 3:3), ‘여호수아’ 역시 그가 누구인지 다가가 묻습니다(13절하). 그는 ‘모세’와 달리 그 자가 왜 왔는지 먼저 물어봅니다(13절하).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자기가 왜 왔는지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14절상). 그런데 더 이상 이어지는 설명이 없고, 여기서 문장이 끊어져 버립니다. 그가 온 이유에 대해서 이어지는 설명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으니, 이 본문의 원래 내용이나 양식에 대해서 이런저런 논의가 많습니다. 원래의 전승에는 무엇인가 이보다는 더 긴 이야기를 담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혹시 화자가 강조하려는 바가 군대 장관의 추가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행동에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생략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여호수아’가 너무 민첩하고 신속하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는 바람에, 이 군대 장관이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할 겨를도 없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점 ‘모세’의 행동과 대비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밝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을 가렸습니다(출 3:6). ‘여호수아’는 충분히 먼저 경의를 표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추가 설명을 듣기를 청하고 있습니다(24절하). 그가 듣게 된 대답은 어떤 임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추가 명령과 함께 그 장소가 거룩하다는 계시입니다(15절). 그리고 이야기의 결론은 ‘여호수아’가 이에 순종하여 그대로 행했다는 언급입니다(15절하). 이번 에피소드의 원래의 전승이 어떤 형태이었든, 현재 본문 속에서 기능하는 바는 순종에 대한 “시험”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창 17:22-27).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하나님 만나기를 그렇게 열망하고 있는 것일까요?
따라서 본문의 결론적인 언급은 화자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5절하).
결론적으로, 본문이 포함하고 있는 세 개의 독립적인 전승이 기능하고 있는 바는 그 땅에서 시대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화자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세 개의 전승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의 신학적 주제는 “신명기 역사관”에 입각한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상의 중심에 “유월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신 16;2; 왕하 23:21-23). 비록 <신명기> 법전에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할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야말로 초기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민족들과 구별 짓는 가장 독특한 표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삿 14:3; 15:18; 삼상 14:6; 17:26, 36; 31:4; 삼하 1:20; 창 34:14). 그리고 ‘여호수아’의 순종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할례”와 “유월절”과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세 전승 이야기는 지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나, 그리고 그 주제에 있어 크게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화자는 당대의 공동체를 위하여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솜씨로 이들 상호간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핵심 주제는 그 땅에 사는 이스라엘의 본질과 형식에 관한 것으로서, “순종”이 그 내면의 본질이라면, “제의”(祭儀)를 통한 거룩함이 내적 본질을 드러내는 외적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본질은커녕 그 형식에 대해서조차 한 번도 충실해 본 적이 없었음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그 정체성에 충실하자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할례(5:2-9)
이야기는 다시 하나님과 ‘여호수아’ 사이의 대화로 시작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2절)
이 명령의 핵심은 “할례를 행하라”는 것인데, “부싯돌”을 사용하라는 대목이 특이합니다. 할례 시 “부싯돌”을 사용하는 전통은 이스라엘에서는 상당히 오래된 제의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여호수아’ 당시는 청동기 시대로서 돌이 아니라 청동 기구들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대도 구태여 “부싯돌”을 사용하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오래 동안 지켜오던 옛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출애굽기>에서 부싯돌을 사용해서 할례를 행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출 4:25). 이스라엘은 할례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의식, 예컨대 “돌 제단”을 세울 때에도 쇠칼이나 정을 사용해서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출 20:25; 신 27:5; 수 8:31).
할례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성인식의 의미를 가지고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습니다만, 이스라엘의 할례는 이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는 시기에서부터 그 방식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드러내는 종교적 의식이었습니다(창 17; 21:4; 출 12:43-49; 레 12:3).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행하던 할례는 외형적이고 육체적인 할례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만(참고, 렘 9:24-25),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의 요점은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외적 표현으로서, ‘아브라함’은 나이 99세에 할례를 받은 바 있습니다(창 17:24). 따라서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7:13-14). 즉 할례 곧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지요. 이점 <신명기> 학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특별히 중요했던 것이, 당시 ‘바벨론’ 군주들은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할례로써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주변 이방 문화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려 했습니다. 물론 <신명기> 학자들은 단순히 육체적 의식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고 말한 적은 없으며,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신 10:16; 30:6; 레 26:41; 렘 9:4).
지금 ‘여호수아’는 할례를 처음으로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오래된 이스라엘의 원래의 할례의 의미를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공동체를 <출애굽> 직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5절). 그리고 <출애굽기> 화자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받았던 할례의 기원을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할례(창 17)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 12:43-49).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는 “할례 산”에서 이 과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3절)
“할례 산”은 직역하자면 “표피의 산(언덕)”으로서 그 장소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물론 화자는 이 모든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장소를 ‘길갈’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만(9절), 이 구절의 핵심은 할례의 장소를 기원론적으로 알려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 단락의 결론이나 핵심 주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세대가 새롭게 할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의 초기 전승은 2-4절과 7-8절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본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6절 및 9절은 후대의 교훈을 위한 편집적 삽입으로 여겨집니다. 예컨대, 5-6절은 4절과 7절 사이에서 두 절의 의미를 반복하고 추가해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4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4-7절)
즉 할례는 단순히 종교적 행사이거나 의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공동체에게 있어 할례는 “속죄”이거나 “구속”입니다. 즉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출애굽” 첫 세대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4절). 그러나 ‘이집트’를 빠져나오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도 “출애굽”을 해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도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은 불순종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세대에 속한 모두가 다 사라질 때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던 세대가 다 사라져 버렸으니, 할례 받지 못한 다음 세대 즉 ‘여호수아’ 공동체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이 점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화자는 “출애굽” 첫 세대를 “애굽에서 나온 백성”(![, 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는가 하면(4절), 동시에 불순종한 이들 무리를 가리켜 “애굽에서 나온 족속”(y/G, 고이)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6절). 그리고 ‘여호수아’ 공동체를 향해서도 같은 백성이 아닌 족속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또 그 모든 백성(y/G, 고이)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8절상). 화자의 의도인 즉은 ‘여호수아’ 공동체는 할례를 다시 받을 때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단순한 한 이방 족속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할례의 목적은 족속을 변화시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할례의 목적입니다: “너희는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y/G, 고이)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 욤)이로다 하리라”(신 4:6). 그러나 이스라엘은 늘 족속(y/G, 고이)으로 남기를 고집해 왔던 것입니다(신 17:14-20; 삼상 8:5).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할례 받지 못한 족속으로 그 신분이 바뀔 수 있을까? <신명기>적 인과응보의 사상이 그 해답입니다(참고, 신 27-28장).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축복과 저주라는 양 날을 가진 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축복을, 그리고 불순종은 저주를 불러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공동체는 할례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8절)
그러나 이 구절이 원래 할례를 포함하고 있는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초기의 전승에서 강조하고 있었던 바는 아마도 할례에 따른 고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창 34). 백성이 할례 후 “낫기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이를 암시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구절에서 “낫다”(hy:j, 하야)는 “살다” 또는 “살아있다”입니다. <시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병이 들었거나 상처가 난 상태는 불완전한 상태 즉 완전히 살아있는 상태가 아닌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시 33:19; 56:14). 할례에 따른 상처와 아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례로 인한 육체적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삶으로 회복해가는 것이라면, 영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할례의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단순한 “족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길갈’에 관한 기원론적 설명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절)
독자들은 “애굽의 수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수치”(hP;r]j, 헤르파)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이런 저런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당시 받아야만 했던 사회적 수치나 모멸감 등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도, 이스라엘의 수치가 정치∙군사적 방법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제의적인 방식 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현인 할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9절은 첫 번째 단락의 신학적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여기에 ‘길갈’에 대한 기원론적 설명을 추가함으로써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화자는 ‘길갈’을 “굴리다” 또는 “떠나가게 하다”는 동사 ‘갈랄’(ll'G;)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요단 이야기>(3-4장)의 핵심이 “돌무덤”이나 “제단”을 세우는 등의 제의적인 행위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곳 “길갈의 할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돌무덤”이나 “제단”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할례”도 행했습니다. 이 모두 후대를 위한 교육이자 교훈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길갈’은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거룩한 장소로 기능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유월절(5:10-12)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첫 번째와 연결되는 방식은 다분히 신학적입니다. 즉 두 번째 단락의 주제는 “유월절” 축제에 관한 것으로서, 원래 “할례”는 유월절 식사를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습니다(출 12:48후). <구약>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시기는 별도로 정해져 있습니다: 신 16:1; 출 12:4; 민 9:3; 레 23:5.
‘길갈’이 이스라엘의 제의와 관련해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장소라면, 화자는 이 두 번째 단락에서 ‘길갈’에서의 <할례 이야기>를 <유월절 이야기>로 곧바로 연결시킴으로써, 본문의 신학적인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0-12절)
따라서 화자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켰는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두 번째 단락은 본문 비평이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문장과의 불일치나 모순되는 진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날짜가 정월 십일인가 아니면 십사일 인가?”(참고. 4:19; 5:10); (2) “유월절을 며칠 동안 지켰는가? 일주일인가 또는 하루인가?”(참고. 11절상).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그 땅의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달라진 생활 방식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그 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12절상)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화자가 두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단어 “소산물”(rWb[, 아부르)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11, 12절). 그리고 “볶은 곡식”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동사의 원형 “볶다”(hl;q, 칼라)는 아홉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레 2:14; 23:14; 수 5:11; 삼상 17:17; 25:18; 삼하 17:28; 룻 2:14). 이들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광야 생활 내내 먹어왔던 ‘만나’와는 분명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을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문맥 상 이스라엘이 먹은 소산물은 자신들이 직접 농사지어 추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그 땅에서 자라고 있던 일종의 야생 열매나 곡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그냥 거두어 먹었을 것입니다. “무교병”(hX;m, 맛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교병”은 원래 여행용 간이 음식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아주 친숙한 음식입니다.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이 빵을 먹었다고 해서 이들이 유월절의 엄격한 규례에 따라 이 절기를 지켰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유월절 분위기는 엄격하고 딱딱한 규례로서의 절기 지키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발성과 흥겨움이 느껴지는 축제 그 자체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 땅의 주민들이 먹는 “정상적인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앞에 놓인 가나안의 넓은 땅을 바라보면서, 더 많고 풍성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 공동체”가 지킨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절기나 제의의 역사에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인 유월절을 지키면서 과거 조상들의 “출애굽”을 회상하고, 동시에 그 땅에서 난 소산물을 먹고 즐기는 축제의 성격을 가미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에게는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지키던 무교절의 전통은 아마 더 이상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기 절기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과 무교절은 각기 나름대로의 기원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출 12:21-27; 13:3-9), 어떤 곳에서는 무교절만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출 23:15; 34:18).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시기에 이 두 절기는 하나의 축제로 통합되어 한동안 지켜졌던 것으로 보입니다(신 16:1-8; 레 23:5-8). 이즈음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에 관한 성경 본문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유월절 이튿날에 무교병을 먹었다”(11절)는 언급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날에 ‘만나’가 그쳤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특별한 인도와 보호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아직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 그 땅에서 나는 풍성한 소산물들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의 요새들을 주기 전에 이미 그 땅의 소산물을 주심으로써,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 야훼의 임재(5:13-15)
세 번째 단락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한 에피소드로서, 처음 두 단락과는 다소 연관성이 멀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제의와 하나님의 임재는 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3-15절)
하나님의 임재는 칼을 든 모습의 장군의 현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오경>에서 그리고 있는 ‘여호수아’의 모습은 다소 성급하고 경솔하며, 나서지 말아야 할 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출 32:17; 민 11:28). 그는 지금 한 낯선 방문객의 방문을 받고서는 담대하게 맞서며,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왔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곳이 “여리고 근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이미 처음 단락에서 등장한 바 있고, 다음 에피소드의 주요 무대가 될 것이라 전후 문맥 상 부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만, 처음 두 단락에서(9절하, 10절상) 강조하고 있는 ‘길갈’과는 아무런 연결도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다소 특이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길갈’은 이 공동체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한 장소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야훼의 군대 대장”은 ‘야훼’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구약> 전체적으로 단 두 번만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11절, 단 8:11). 이 표현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일컫는 표현으로 더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야훼의 사자”나 “하나님의 사자”라는 표현은 각기 88번 및 11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는 역할은 다양한데, ‘기드온’이나 모세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소명을 주기도하며(삿 6:11; 출 3:2), 또는 직접적으로 백성들을 바다에서 구원하기도 합니다(출 14:19; 민 20:16). “하나님의 사자”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동일 시 됩니다(삭 13:22). “하나님의 사자”는 때로는 군사적 영웅이 되어 하나님의 적들을 물리치기도 합니다(민 22:23; 삼하 24:16-17; 왕하 19:35).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이와 같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기대를 완전히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야훼의 군대 대장”은 아무런 소명도, 지시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화를 먼저 주도하고 있는 쪽은 ‘여호수아’입니다. “야훼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한 말이라고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신발을 벗어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했다”는 말로 이야기의 결말로 삼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진술도, 더 이상의 계시나 소명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의 순종의 한 행동만이 돋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야말로 화자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일 것입니다. 거듭 요약하자면 지금 ‘여호수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순종”일 것인바, 바로 이 두 요소가 마지막 단락의 핵심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훈과 적용
영화「써머스비(Sumersby)」중에서 ‘써머스비’로 행세하고 있는 주인공은 진짜가 아니라, 그와 꼭 같이 닮은 한 사기꾼입니다. 그는 진짜 ‘써머스비’를 감옥에서 만나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들어 알게 되고, 그가 죽은 후에 출옥하여, ‘써머스비’가 되어 귀향합니다. 목적은 한 가지, 이곳에 눌러앉아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땅과 재산을 가로채 달아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막상 와보니 별 것 없어서 큰 실망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집과 땅은 물론, 그의 아내까지 차지하여, 둘 사이에는 딸까지 생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동네에 담배농사를 도입하여 농가수입을 올려주어, 동네사람들의 영웅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물론 처음부터 이 사람이 가짜임을 알고 있었으나, 난봉꾼이자 무정했던 옛 남편에 비하면 너무나 자기를 한 여인으로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 역시 스스로도 진짜 ‘써머스비’로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이 여인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아주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검찰에서 그를 잡으러 온 것입니다. 죄목은 살인죄입니다. 재판 결과는 사형입니다. 물론 그가 살인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진짜가 죽기 전에 저지른 일입니다. 그가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써머스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증인도 그렇다고 증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의 아내마저도 그를 살리기 위해서 법정에서 그가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증언해 줍니다. 이 충격적인 증언에 모든 참석자들은 기겁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내 이름이 없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사형선고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 여인의 남편인 ‘써머스비’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의 옛 사람은 이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순간에 이미 죽어버렸고, 그는 진짜 ‘써머스비’가 되었으며, 또 그렇게 행세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바꾸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가 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이 여인의 남편이 아닙니다.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써머스비’로 죽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한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사기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서는 ‘써머스비’만큼은 투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형 ‘에서’를 속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후로도 그의 삶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사기행각은 여전히 계속됐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도 없었고, 소망과 평안도 없었습니다. 늘 초조하고 쫓기는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 그리고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한 선언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싸움에서 이기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정체성은 “승리” 바로 그것입니다(그 승리를 어떻게 얻어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접어두고서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이스라엘이 되라. 그의 정체성에 충실하라”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가?” 또는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이스라엘 되기”입니다. 무엇입니까?
시인이나 문학가들이 홍진에 지친 붓끝을 새롭게 하고 자신의 삶과 문학을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종종 고행(苦行)을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예로, 시인 고은도 불교의 시작이자 중심지인 티벳트의 수미산을 향해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 한 구절을 남긴 바 있습니다: “벗들, 어디 가서 실컷 울부짖든지 미치든지 한 다음, 피투성이 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시작만이 구원입니다.” 문학가들이 하루하루의 시간이나 매체에 종속된 채 죽어가는 자신의 시나 문학을 위해 이처럼 고뇌하며 투쟁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그 영혼을 위해서 어찌 고민하며, 투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1. 다시 할례를 행하라(5:2-9)
그렇다면 이스라엘 돌아가야 할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첫째, 그들은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다시 할례를 행하라”(2절). 할례와 관련해서 화자는 세 가지 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다시”라는 강조가 그것입니다. “두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언약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오라는 재 헌신을 위한 초청입니다. 그리하여 열방처럼 남아있지 말고 참된 이스라엘이 되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연후에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할례를 다시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할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이유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문학과 역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애굽” 즉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였으나,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도 자유와 해방을 원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원하던 대로 되었습니다. 모두 광야에서 죽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새로운 구속, 즉 하나님을 향한 예배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나라를 변하여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 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신 4:6).
우리는 여기서 할례의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해서 잠시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7장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일방적으로 「그 땅과 후손」에 대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창 12:1-3). 이 축복은 사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쪼개진 시체 사이로 지나는” 환상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한 공식적인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창 15). 그러나 곧바로 그는 자신의 육신을 의뢰하는 신앙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는데,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갖게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창 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의 약속을 반복하시면서, 참여 여부를 묻습니다: “그런즉 너는”(17:9). 따라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자신의 것으로 확인하겠다는 믿음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 백성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38년 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민13-14장). 바로 여기에 지금 이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싯돌”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2-3절). 사실 ‘여호수아’ 시대는 청동기 시대로서 구태여 흉측스러운 돌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진정 무엇일까요? 사실 할례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성인식의 의미를 가지고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그것은 마땅히 이들과 구분되는 것이라야 합니다. 할례의 연령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방법도 그렇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아마 그의 공동체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가장 이스라엘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면 우리들의 옛 전통을 충실히 보존하고 따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했다 할지라도,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여리고’ 전투를 이기게 했던 그 옛 전통-부싯돌 할례-을 고수할 때만이 우리 역시 오늘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랑스러운 여호수아의 후예들이 아닙니까?”
지금 화자는 자신의 세대를 옛날의 그 전통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여호수아’가 주변국가의 조롱과 멸시를 무릅쓰고 부싯돌로 할례를 행하여, ‘여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면 자기들 역시 그럴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권고와 권면일 것입니다. 그는 지금 다원화되고 세속화되어가는 ‘바벨론’ 사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를 들어, 침례교회에서 편리한 세례를 마다하고 굳이 귀찮고 힘든 침례를 고집하는 것이나, 교회마다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이나, 새벽기도를 한사코 강조하는 것 등이 다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선조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써, 역사를 두고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들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들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귀찮은 일이나 행사를 만날 때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나?”하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사랑한다고 하늘에서 말하지 않고, 귀찮게 시리 ‘예수 그리스도’로 태어나셔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증명)해 보이셨습니다(롬 5:9). 사랑은 정말 귀찮은 것입니다.
할례에 대한 강조점은 또 있습니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서 낫기를 기다릴 때에”(8절) 이것은 할례에 따르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 군대는 고통과 위험(예: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있을 수 있는 적의 침공)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를 받았습니다. 흔히들 새롭게 시작할 때 “뼈를 깍는 아픔” 또는 “알을 깨는 고통” 등등의 표현을 씁니다. 할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살을 벗기는 고통입니다. ‘여호수아’가 고통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다면, 이후 이어지는 화자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헌신의 징표로서 이 할례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례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화자는 말합니다: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9절). ‘애굽’은 일종의 주변 환경입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조롱하며 기죽이는 어마어마한 현실의 벽입니다. 그들을 노예로 사로잡아 죽는 것이 두려워, 할 수 없이 순종하게 하던 바로 그 죄와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벗어 던졌던 그 피부껍질은 거짓과, 가식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할례의 고통을 감수했을 때 비로소 자유와 회복의 승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속 사람”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회복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가나안의 열매를 먹어라(5:10-12)
할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축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11절후).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두 번째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 선언은 실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자 두 번째 단락의 주제입니다. 이스라엘이라면 마땅히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는 화자의 진술은 이스라엘의 달라진 생활방식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그 땅의 소산을 먹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 다 출애굽의 ‘모티브’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출 12-14장). 하나는, 방금 강조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의 당당한 백성으로서 마치 선조들이 “출애굽” 전야에 할례를 행한 후에야 유월절 양을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참고. 출 12:43-51). 과거에 대한 회고와 감사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며 즐기는 기대와 희망찬 확신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지금 적진을 눈앞에 두고 한가하게 축제를 벌이고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아직 그 성이 함락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와 소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의 성만찬식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가 천국의 시식코너라고 언젠가 말한 바 있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오늘날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합니다(고전 5:7). 동시에 그의 부활을 통한 종말의 성취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우리는 침례도 받았고, 수시로 성찬식에도 참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여리고’성의 현실은 굳게 닫혀 우리를 좌절시키고, 겁을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동안 잘 먹던 이전의 만나마져 끊어지고, 불필요한 고생을 사서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 때문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3. 네 신을 벗어라(5:13-15)
이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세 번째 주제로 넘어 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호수아’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도적 역할은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불붙는 떨기나무를 보고 했던 것처럼(출 3:3), 자기 앞에 난데 없이 나타나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세’와는 달리 먼저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곳에 왔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는 충분한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아니, ‘여호수아’ 자신이 그의 대답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즉 그자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그는 먼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조아립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지시를 내려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여기서도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이 낯선 인물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봅시다: “이 땅은 거룩한 곳이라...네 신을 벗어라.” 지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과 함께 새로운 할례를 행하였고, 그 땅의 열매를 먹으면서 유월절 축제를 즐겼고, 또한 곧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일말의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없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늘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 두려움과 불안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내린 결정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운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 그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확신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전쟁”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즉 그가 수행하려고 하는 사역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도무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순종의 ‘모티브’입니다. ‘여호수아’의 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그대로 행하니라”(15절하).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할례는 무엇이며, 우리의 유월절 음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골 2:11,12). 그러나 이러한 외적 체험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우리의 육체를 의지하며, 신앙에서 실수하고 넘어지기가 일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영원한 내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직접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심으로써, 그의 구원의 역사를 스스로 이루어 가심을 우리는 압니다. 그는 바로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연습과 토의
1.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자가 본문에서 보여주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토의해 봅시다.
2. 본문이 정상적인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음을 확인해 봅시다(참고. 5:1; 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이 이곳에 위치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가 결단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8
언약의 두 얼굴(1):
믿음은 요새를 허물고
(6:1-27)
제 8과: 언약의 두 얼굴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6:20)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여리고’ 정복을 위한 전쟁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유월절” 축제를 벌이는 등 하나님 앞에 한가하게 예배와 제사를 드린 바 있습니다(5장). 전쟁터에 나갈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할례를 받은 것이나, 하나님의 ‘만나’가 중단된 것이 이상한 일이라면, “여리고 성의 함락”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받은 지시 사항 또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서> 6장은 군사 전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5장과 마찬가지로, 제의(祭儀)적인 것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그 전쟁이 무슨 고도의 심리전이 아닌 한은 말입니다. 요점인 즉은 ‘여리고’ 성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을 제대로 수행할 때에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6장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 5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하겠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승리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것뿐입니다. 즉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고 있는 제사나 예배는 보이지 않는 내적 본질에 대한 가시적이고 외적인 표현입니다.
‘팔머 로벗슨’ 박사는 언약과 관련해서 세 가지 특징을 꼽고 있습니다. 첫째, 언약은 “약정”입니다. 이 약정을 통해서 언약 당사자-하나님과 그의 백성-는 상호 구속을 받게 됩니다. 즉 상호 구속(속박)이라는 관계 속으로 두 당사자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피로 맺은 약정(또는 관계)”입니다. 이는 언약이 삶과 죽음이라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면 그에 대한 삶의 축복이 주어지지만, 파기하는 경우에는 계약 위반자는 죽음 외에는 그 구속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모든 언약체결과 관련해서 피가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할례; 쪼개진 시체 사이로 지나는 것; 등).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 9:22)는 선언도 바로 이 점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피로 맺은 약정”입니다. 언약은 계약 당사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도적으로 제정하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그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들어오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5장에서 이스라엘이 할례를 통하여 이 언약을 체결하고, 유월절 축제에 참가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출발하는 장면을 목도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제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행하신 바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동시에 미래의 축복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장과 7장은 언약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장이 언약의 빛이라면, 7장은 그 그림자에 해당됩니다. 6장이 <여호수아서>의 가장 밝은 곳이라면, 7장은 가장 어두운 곳입니다. 바로 이 점이 6-7장과 5장이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즉 언약이라는 주제로 이들 세 장은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언약체결(5장)
(2) 언약의 축복(6장)
(3) 언약의 저주(7장)
따라서 <여리고 이야기>의 독서 관점은 언약의 축복에 있으니만치, 이와 관련해서 핵심 단어나 모티브 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다른 모티브들은 없는지도 살펴볼 일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여리고 성 이야기>는 <요단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야기를 “두려움”의 모티브를 강조함으로써 시작하고 있으며,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5:1).
마지막을 ‘여호수아’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책 전체의 중요한 두 요소가 수미상관처럼 이야기의 범위를 결정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1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27절)
하지만 본문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역시 “반복”과 “모순”입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입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정확한 순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단락 구분도 다소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주제 하에 단락 구분을 해 보자면, 전체를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배경(1절)
2. 언약의 축복: 하나님의 약속(2-5절);
3. 언약의 이행: 믿음의 행위(6-21절)
4. 부록(22-27절).
양식과 배경. 이야기의 반복이 특히 두드러진 곳은 두 번째 단락입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 관해서 포괄적으로 요약을 한 다음, 세 번째 단락에 이르러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계획의 세부 내용을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세 번째 단락을 내용 별로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 번째 에피소드(6-11절): 첫째 날에 성을 한 바퀴 돌다
(2) 두 번째 에피소드(12-14절): 둘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의 여섯 바퀴 순회
(3) 세 번째 에피소드(15-20절상): 일곱째 날의 일곱 번째 순회
(4) 네 번째 에피소드(20하-21절): 성벽이 무너지고 주민은 멸망당함
본문의 또 다른 중요한 형식적 특징은 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명령과 이행”입니다. 이는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세 개의 중요한 핵심어 중의 하나인 “리더십”과 관련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양식은 시적 유사반복처럼 본문에서 네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함(3-5절)
‘여호수아’가 ‘야훼’의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전함(7절)
이스라엘이 그 명령을 수행함(8-9절)
“외치지 말라”는 ‘야훼’의 명령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전함(10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언제 외칠지를 가르침(16절)
이스라엘이 외침(20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를 파괴할 것을 지시함(17절상)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여리고’의 물품들을 파괴할 것을 지시함(18-19절)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그곳의 물건들을 파괴함(21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라합’을 구할 것을 지시함(17절하)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에게 ‘라합’을 구할 것을 지시함(22절하)
‘라합’이 구원받음(24-25절)
이러한 유사 반복의 형식을 보고 있노라면, 화자는 지금 전쟁에 관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중 예배를 실황중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배의 중요한 형식적 특징 중의 하나가 “선포와 응답(화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어느 누구도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세 등장인물 즉 하나님과 ‘여호수아’ 그리고 화자만이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회중 일부는 행진 중에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기는 하지만, 결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 번 화자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다른 것들은 대부분 화자의 관심 밖입니다. 예컨대, 이야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벽의 파괴”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처리하고 맙니다. <개역 성경>과 영어 <NIV>는 단 세 개의 단어로, ‘히브리’어로는 단 두 개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2) “the wall collapsed”(NIV); (3) “hm;/jh lPoTiw”(화팁폴 하오마).
자료와 편집. 본문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역시 “반복”과 “모순”이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본문 속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승들이 혼재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형식적 특징을 나름대로 설명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와 같은 형식적 특징들과 관련해서 제기할 수 있는 일련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스라엘이 한 편으로 완전한 침묵 가운데 성 주변을 돌면서(10절), 또 한편으로 나팔을 계속해서 불어댔다는 진술(8, 9, 13절)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2) 제사장들만이 나팔을 불되, 일곱째 날에만 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4-5절)?
(3) 여리고 성 주변을 돌며 행군할 때, 일반 백성(3절)과 무장한 군사(7, 9, 13절)와 후군(9, 13절)과 제사장들의 행군 순서나, 각기 맡은 역할들은 무엇이었을까?
(4)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대화중에 등장하는 지시 사항이나 명령들은 일련의 명령 체계를 보여주기 위함인가, 아니면 이들 명령을 받았던 대상이 다 달랐던 것인가? 우리는 앞에서 전자(前者)의 입장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5) 마지막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관한 진술은 왜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을까(16, 20절)?
(6) 성벽 파괴에 관한 진술은 왜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을까(21, 24절)?
이들 질문들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자료∙편집설이 알려져 있습니다. Butler, T. C. 66-70쪽(참고도서 1).
본문 속에 혼재하는 전승의 종류에서부터 그 전승들이 발전하고 편집되는 과정에 대한 이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다만 한 가지 본문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화자의 관심사는 “제의”(祭儀)와 관련한 것으로서, 이 전통이 <여리고 성 이야기>가 계승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리고 성의 함락”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여러 “삶의 자리”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기도 하고, 추가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기도 했을 것임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전승의 변천사를 일일이 다 가려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본문 속에 몇 가지 대표적인 전승들이 혼재해 있음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 전승>(27, 3/6-7, 2/6, 16/20절); (2) <라합 전승>(17, 22-23, 25절); (3) <성전(聖戰) 전승>(17-19, 21, 24절); (4) <언약궤 전승>(6, 11, 7, 12절); (4) <제의 전승>(제사장, 양각 뿔, 백성들의 함성, 칠일에 대한 언급 등).
이들 전승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여호수아 전승>일 것입니다. 본문 이야기는 그 결론을 다음과 같은 진술로 끝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27절). 마치 <여리고 성 이야기>의 목적이 ‘여호수아’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이 항상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백성이나 제사장에게 전달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나(참고. 3절), 거의 대부분 명령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달되고 있습니다(6, 7, 10, 11, 16, 17절). 그리고 <여호수아 전승>이 일련의 발전 과정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10-11절에 대한 <칠십인 역>의 번역에서는 ‘여호수아’의 주도적인 행동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함성을 지르는 장면”(16, 20절)에서 두 서술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두 번째 서술에서는 ‘여호수아’의 명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도 전승의 변천 내지는 발전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성전”(聖戰)의 개념은 “신명기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신 7, 20장), 고대 근동 사회에서도 이 개념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성전”(聖戰) 사상이 이야기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부록”으로 첨부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화자의 진술 역시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17-19, 21절).
<라합 전승>은 이 책의 2장의 주된 결론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집이 성벽 위에 있다는 진술(2:15)은 <여리고 이야기>의 결론과는 논리적으로 잘 부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벽은 ‘라합’이 구출되기 전에 모두 무너지고 함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라합’과 관련하여 6장에서 다소 다르게 드러나고 있는 진술(6:17, 22-23, 25)은 후대의 재해석 내지는 편집적 삽입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 추가적인 설명은 명령과 이행 그리고 약속의 성취와 관련해서 추가적인 강조를 더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언약궤 전승>은 다소 신비하고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이 전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성곽 주위를 맴도는 장면”이나(11절), “무장 군인에 대한 묘사”(6절), “제사장에 관한 언급”(7, 12절) 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 전승은 전쟁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만(민 10:35; 14:44; 삼상 4:3), <신명기>에서 이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단지 율법을 담고 있는 도구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신 10, 31장). 본문을 통해서 받게 되는 언약궤에 대한 인상은 이 전승이 비교적 초기의 것이라는 점인데, 언약궤를 전쟁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 경우 언약궤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앞서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인도자 되심을 상징하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본문에서는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앞서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집 전승>은 주변적인 것으로서 <칠십인 역>에서는 무시하고 있긴 하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전승은 <聖戰 전승>의 일부로서, 이 전승이 비교적 후대의 자료임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에는 “하나님의 집”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그들의 전승을 새롭게 해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새로운 세대에게 과거 전승을 들려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후대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 노획물은 “하나님의 집”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리고 이야기>와 관련해서 가장 압도적으로 본문을 지배하고 있는 전승은 <사제 전승>으로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적어도 네 개의 요소가 제의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제의 등장 그 자체입니다. 이들은 원래의 이야기 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상징물을 들고 다니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본문에서 보면 그들은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나팔을 들고 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는 아닙니다. 만일 이들을 이야기에서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고 해도 이야기 그 자체의 완성도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더 쉬울 것입니다. 사제들의 존재를 이야기 속에 포함시킨 것은 자료의 편집 결과 때문이 아니라, 사제들의 역할이 시대를 두고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갔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들의 역할은 그러니까 <여리고 이야기>를 단순히 전쟁 이야기에서 종교적이거나 제의적인 연극이나 드라마로 바꾸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공동체의 인기 있는 이야기에서 종교 행사로 바뀌었습니다. 이야기는 드라마로 각색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기억하고 예배드리는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게 된 <여리고 이야기>는 원래의 전쟁 전승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기억하고 들려주기 위해서 제의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게 된 것입니다.
<사제 전승>의 두 번째 요소는 “양각 뿔”입니다. 이것은 원래의 전쟁 전승에서는 후방에 포진해 있던 사제들의 손에 들려있었습니다만, 이야기에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드라마로 변하면서 극적 흥미를 위해 소리 내어 울려 퍼지는 나팔로 대체되었습니다. “양각 뿔”은 더 이상 단순히 전쟁의 신호를 전달해 주는 도구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드라마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계속 불어대야 했습니다.
<사제 전승>의 세 번째 요소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입니다. 이 역시 원래의 전쟁 전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원래 군사들의 함성은 공격 신호가 되기도 하고 적들을 놀래주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극 <여리고>에서는 바로 이 요소를 강화시켰고 다르게 변화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연극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함성은 승리의 순간을 드러내기도 하고 동시에 찬양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사제 전승>의 네 번째 요소는 “칠일”과 관련된 계략입니다. 이 역시 원래의 <여리고 전쟁> 이야기에서 전쟁의 한 계책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중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서, 이튿날의 행동 지침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처음부터 원래의 전승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 날의 행동 지침과 관련된 내용이 현재의 본문 속에서는 어딘지 흐름이 끊어진 듯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본문 속에서 “칠일의 작전”은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작전이라기보다는 “칠일의 제사” 또는 “칠일의 예배”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축제를 반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고, 다만 현재의 본문은 이 자료를 ‘길갈’에서의 “유월절”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5:1).
<여리고 이야기>는 이처럼 다양한 전승과 여러 세대에 걸친 편집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의 의도는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를 위한 승리의 교본(敎本)이나 ‘패러다임’을 마련해 주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은 아주 정교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지만(1-5절),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지도자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지도자는 전투 계획을 세우고(5-7절), 이 계획은 곧바로 순종을 불러옵니다(8-9절). 마지막 명령(10절)으로 이야기의 서두는 막을 내리고, 백성이 전투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잠잠히 하도록 주문하고 있습니다(11-16절). 이 계획은 여호수아가 계획한대로 정확하게 수행되고 있습니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 모든 행동이 일순 멈춤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락은 승리에 대한 간략한 선포와 함께 끝을 맞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단락은 전투 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승리한 후에도 순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1-25절). 단락의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와(26절) 순종에 따르는 축복(27절)에 대한 예를 제시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1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1절)
이 구절은 본문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이 선언을 통해서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이중적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동안 반복적으로 일관되게 사용해 왔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여리고’ 주민들의 태도와 행동을 연상해 봄으로써 이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행위로 말미암아 이들이 보였던 “두려움”에 대해서 일찍이 ‘라합’이 두 정탐꾼들에게 전해 준 것이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이들이 보였던 반응 모두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1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5:1)
이 모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그 땅 주민들의 두려움에 대한 반복되는 모티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가 전하려고 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 역설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지금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일견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그것입니다. 성문이 굳게 닫혀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암시가 그것입니다. 언약과 관련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언약의 축복(2-5절)
이어지는 네 절에서 화자는 언약의 축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2절)
이 역시 그동안 계속해서 반복해 온 모티브입니다. 여기서 동사의 시제가 중요합니다. 이미 성취된 완료형 입니다. 승리는 이미 이스라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여호수아’와 그 백성은 이 약속을 주장하고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는 승리를 얻기 위해서 싸운다기보다는, 이미 성취된 승리 위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사실 그는 광야에서도(마 4:1-11), 그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도(12:22-29), 십자가 위에서도(골 2:13-15), 그리고 부활 및 승천에서도(엡 1:19-23),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십니다(히 1:3). 사도 바울도 외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이처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는 백성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는 것과 그 약속에 의지해서 순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위어즈비’ 목사님은, “약속을 믿는 것이 수표를 맡는 것이라면, 의지한다는 것은 그 수표에 서명한 다음 헌금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이어지는 ‘여리고’ 함락에 관한 하나님의 작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위한 작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인내와 순종을 시험해 보는 일종의 시험으로 간주하는 편이 더 옳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의 제사 즉 예배 그것입니다:
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6:3-5)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그의 제자 ‘빌립’을 시험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 6:5-6).
하나님의 ‘여리고’ 작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담은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사 55:8-9). 그리고 그는 세상적으로 볼 때 미련해 보이는 사람이나 계획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제사장의 양각 나팔은 히브리어로 ‘요벨’(jobel)이라고 하는데, ‘희년’(jubilee)이라는 단어의 어근이 됩니다. 따라서 이 나팔은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왕과 군대를 향해서 전쟁을 선포하기 위하여 불던 나팔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희년(禧年)을 알리기 위해서 불었던 나팔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승리를 선포하는 나팔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승리자처럼 살아야지 패배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찬양 하나를 부를 때도 승리자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리가 이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때, 그것은 엄청난 힘이 되어 우리의 운명과 체질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3. 언약의 확인(6-21절)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가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백성들의 믿음의 행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락이 어떻게 믿음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본문의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이 공히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형식적인 특징은 이야기의 반복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를 여섯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서 ‘여리고’ 작전을 점차적으로 확장시켜가고 있습니다:
(1) ‘여호수아’의 지시(6-7절)
(2) 백성들의 순종-진군행렬에 대한 요약적 묘사(8-9절)
(3) 진군방법에 대한 ‘여호수아’의 추가적인 지시(10-11a)
(4) 백성들의 순종(11b-15)
(5) ‘여호수아’의 지시(16-19절)
(6) 백성들의 순종(20-21절)
요약하자면 ‘여호수아’가 지시하고, 백성들은 이에 순종하여 따랐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7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히 11:30).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과 지도자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본문은 믿음과 관련해서 우리의 기존의 사고의 틀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단순한 맹신이 아닙니다. 이 백성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른 것이지 무조건 따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과거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고, 그들의 믿음은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하여 통계적 외삽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인내와 절제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아주 조직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무장군인-일곱 제사장-언약궤-후군의 순서), 한 주간동안 성 주위를 돌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나팔 부는 제사장을 제외하고 나면 모두 하나님의 개입을 기도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혹시 회의나 불평이 있었을 런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 역시 기다리며 기도하는 동안 잠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두 번 기도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끊기 있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믿음은 공동체적인 체험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공부의 주요 관심사는 개인 구원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을 공부하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마치 편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개인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혼자서 경천동지하는 믿음의 체험을 했다 하드라도, 그것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으면 그야말로 ‘람보’로 끝나고 맙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전서>에서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방언의 경우도, 그것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면 차라리 잠잠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사야 말로 교회에 유익과 덕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늘 혼자서만 하는 기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구원이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일 뿐, 교회에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혼연일체가 되어 ‘여리고’ 성을 돌면서, 공동체적인 믿음의 체험, 즉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기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이래야겠습니다. 교회적인 기도의 응답에 대한 체험을 갖도록 합시다.
4. 부록(6:22-27)
네 번째 단락은 일종의 부록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여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몇 가지 추가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자기 앞에 놓인 일련의 전승들을 사용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첫째, <라합 전승>이 그것입니다: “라합과 그 가족을 구하라”(17b, 22-23, 25-26). 이 구절은 여기서 세 번이나 반복 등장하면서, 2장에서 미해결로 남겨두었던 과제에 대한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화자가 ‘여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반복해서 ‘라합’을 언급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원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들이었습니다(엡 2:11-12). 이들은 지금 진밖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을 봅시다(23절).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히 11:31), ‘라합’은 ‘살몬’과의 결합으로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마 1:5). 이스라엘은 민족적 혈통이 아니라, “순종(順從)의 혈통”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함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의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여리고’의 운명과는 정반대의 운명, 즉 선한 목적으로 쓰일 ‘나실’ 인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라합 전승>과는 정반대의 각도에서 조명하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헤렘’ 전승>이 그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되는 일종의 제사장적 구별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저주와 멸망을 위해서 구별되는 ‘헤렘’의 구별이 그것입니다. 일단 ‘헤렘’으로 구별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대속될 수 없습니다(레 27:28). 오로지 죽음과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처음으로 소유하게 되는 ‘여리고’와 그 안에 속한 모든 생명체가 바로 이러한 운명에 놓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여리고’의 어린아이나 가축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 봅시다.
첫째, 그들의 멸망은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은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완악하여 도무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다 소진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400년이 그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이후 40년 보여준 이스라엘의 행적은 추가적인 기회였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리고 바로 목전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목도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라합’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 성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복음의 나팔소리에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 “피리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눈물 흘리지도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가 필요했을까요? 더 이상의 자비가 필요했을까요?
둘째, 그들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0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쟁 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외국과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화평을 제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일 적이 이 제의에 응해 오면 화평조약을 맺어 그들과 평화롭게 지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섬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 땅은 적들이 아닌 이스라엘이 살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사는 주변 환경은 순결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변화를 유도해야 할 책임을 지닌 족속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잡다한 열방들과 어울려 살 때, 그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합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법입니다. 한 성도의 신앙의 친구가 누구인지 살펴보면 그의 신앙 상태를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순결한 신부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그분이 자기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함에 있어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상이 비 인격체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신성불가침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직시하고,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화자가 마지막으로 활용하고 있는 전승은 <여호수아 전승>입니다. 그는 특히 이 전승을 강조하면서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마치 <여리고 이야기>의 목적이 ‘여호수아’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유명해지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구절은 이런 사람들을 향한 권면 같기도 합니다:
유명해 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사역에 동참함으로써,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유명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믿읍시다.
교훈과 적용
<여리고 이야기>는 <여호수아> 전체적으로 아마 가장 유명한 텍스트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 및 <노아 대홍수> 등과 함께 <구약>를 대표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이야기>도 다른 에피소드들과 마찬가지로 흥미를 넘어, 후대를 위한 교육적이고도 교훈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예배 시에 노래하고, 선포하던 전천후(全天候) 교회학교 교재의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여리고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순종의 제사
<여리고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주민 사이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이한 종교적 의식에 관한 이야기로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드린 순종의 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결론도 “전쟁의 승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기적”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은 칠일 동안 고함치고, 창검을 휘두르며, ‘여리고’ 주민과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닙니다. 정 반대로, 온 공동체가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앞세워, 침묵 가운데, 성 주변을 맴돌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을 때, 그처럼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여리고’ 성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예배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 일은 지극히 평범하고, 시시한 것이었으며, 가나안 주민들이 보기에는 기이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을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평범하고 하찮은 행위가 기적을 불러온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것에 충실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비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며 무슨 준비를 한 것도 아닙니다. 무슨 작전 회의 같은 것도 열지 않았습니다. 이전처럼 정탐꾼을 보낸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한 일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의 제사, 즉 예배를 드린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이점 교회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기능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예배란 과연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는 것입니다. 예배를 굳이 행위와 연관시킨다면, 그것은 믿음의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히 11:30)
오늘 내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입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리고의 기적>이나 <히브리서> 본문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받는 자식이 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모님의 사랑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 외는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내가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언약의 하나님
이스라엘이 ‘여리고’에서 하나님 앞에 드린 단순한 예배가 이처럼 엄청난 기적을 낳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땅과 집과 재산과 과실 등-을 주신 언약의 주도자이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보다 먼저 이 모든 약속을 제정하시고, 그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며, 그리고 그 모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기적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아니면 무엇이 남아돌아 잉여의 유업을 이스라엘에게 주려하십니까? 이스라엘의 공로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크고 강한 나라였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직 그의 자비스러운 은혜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이 자비스러운 은혜의 약속에 끝까지 신실하셨습니다.
언약의 두 얼굴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이긴 하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순종은 축복을 부르고, 거부는 저주를 자초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순종의 제사 때문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저주는 무엇이며,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언약의 축복이 그 대상을 가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저주 또한 그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 유일한 잣대는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있습니다. 그 대상이 이스라엘이든 가나안 주민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신명기>와는 달리 <여호수아>는 ‘가나안’ 주민을 결코 퇴폐적인 종족들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정죄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하렘’으로 선택된 특정 민족이나 국가나 종족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리고’는 어떻게 해서 ‘하렘’이 되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신학과 신앙>에서 충분히 그 이유를 개진한 바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날에도 ‘하렘’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약 교회가 새 이스라엘로 탄생한 이후에도 ‘하렘’의 운명을 지닌 특정 민족이나 국가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공동체, 즉 교회는 교회와 국가를 한 대 묶는 특정 주권 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극단적인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정국가(神政國家)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신정국가 즉 “하나님의 나라”는 혈연이나, 인간의 의지나 뜻-모든 인간적인 요소-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거듭난 자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요 1:12-13). 교회는 지상의 모든 종속들과 민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6장과 8장에서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은 전쟁은 더 이상 반복되거나 재현될 수 없습니다. 즉 오늘날 더 이상의 성전(聖戰)은 없다는 말이다.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가릴 것 없이 성전(聖戰)을 이유로 다른 민족이나 종교를 억압하거나 진멸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그분의 가족이며 형제인지 묻습니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계속적으로 그리고 반복해서 궁극적으로 종말의 날에 ‘헤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이러한 ‘헤렘’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능숙한 말로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끊임없이 당면하고 있는 ‘헤렘’ 전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한 마디로 교회의 적은 특정 종교나,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당면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전쟁의 잔인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자 즉 ‘사탄’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 끝날 까지 성도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가 함께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후)
교훈과 적용
1. <여리고 이야기>는 <여리고 전쟁>이 아니라 <여리고 예배>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2. 본문을 통해서 다음의 용어들에 대해서 설명해 보고 상호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토의해 봅시다: 예배; 공동체; 승리; 여호수아.
3. 우리는 오늘날 ‘헤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도 ‘헤렘’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제 9과: 언약의 두 얼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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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두 얼굴(2):
아이 성의 패배
(7:1-26)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7:11-12)
예수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라”(마 24:28)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의 眞意는 물론 그의 마지막 재림사건과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 예언이 아주 묘한 곳에서 성취되는 것을 목도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수 년 전 ‘베트남’ 항공사 소속 여객기(TU 134) 추락 현장인 ‘캄보디아’의 ‘프놈펜’ 근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고현장에는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몰려와 화염에 휩싸인 추락 현장을 헤집고 다니면서 희생자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과 달러화는 물론, 희생자들이 입고 있던 옷과, 화물까지 닥치는 대로 훔쳐가는 모습을 목도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사고현장에 파견된 일부 구조대원까지 구조는 뒤로 하고, 이 추악한 도둑질에 가세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1997.9.12字.
당시 추락현장에 있던 한 자유기고 사진작가는 “당시 현장은 경멸 그 자체였다. 이들은 인간의 탈을 쓴 이리들 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얄궂게도 이 역시 이들 ‘프리렌스’ 사진작가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흔히 ‘파파라치’로 불리는 이들 삼류 사진작가들은, 세계 유명인사가 있다는 곳이면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사생활이나 밀애 장면 등 아주 선정적인 사진들을 찍어 신문사에 팔아 넘겨 수백만 불고의 돈을 챙기기도 합니다. 1997년 ‘파리’ 지하터널에서, ‘다이애나’ 왕 세자 빈과 그의 애인 ‘도디 알 파예드’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도 따지고 보면 이들 ‘파파라치’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태운 운전사가 이들을 피하기 위하여 과속으로 달리다 변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조차도, 두 사람을 구조할 생각은 않고 연신 사진 찍기에만 급급했다 하여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프랑스 법원은 이 사고가 난지 10여 년이 지난 2006년 2월에, 이들 세 명에 대하여 1유로(약 1150원) 씩의 벌금형을 상징적으로 선고했다고 합니다. 사고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돌보지 않고 사고 모습을 필름에 담은 혐의 치고는 말도 안 되는 액수입니다. 그나마 이 재판도 죽은 ‘도디 알 파예드’의 아버지가 항소함에 따라 열린 것이었다고 합니다(조선일보, 2006.2.23日字, A16).
이들은 주검 주변에 있는 독수리처럼, 유명인사 주변에 몰려듭니다. 그러나 ‘파파라치’들의 이러한 목숨을 건 노력 뒤에는, 소위 황색신문(yellow paper)이라 불리는 후견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사진들을 비싼 값을 주고 사들여서, 확대, 과장하여 선정적으로 보도합니다. 그래서 사진 한 번 잘 찍어 평생 팔자 고친 사진작가 많습니다. 이들 신문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진 한 장 잘 구하여 판매부수를 엄청나게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 황색신문은 누가 사줍니까? 독자들입니다. 72년 당시 ‘파파라치’들의 단골 사냥감이었던 그리스 거부 ‘오나시스’와 ‘케네디’ 전 대통령의 망부 ‘재클린’의 반나체 수영 장면을 게재했던 ‘이탈리아’ 포르노 잡지 ‘플레이맨’은 단 하루 만에 75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래저래 그동안 이들 신문 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아가던 모든 독자들은 ‘다이애나’ 세자빈의 죽음에 다 한 몫을 한 셈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파파라치’나 또는 ‘프놈펜’ 주민들과 같은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아간’입니다. 이 사람은 그의 동료 지체들이 여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은 ‘아간’을 범죄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과연 범죄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의 문제가 자신만의 문제로 끝났습니까?
화자는 이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해학과 역설, <창세기>의 <에덴 이야기>의 모티브 등을 동원하면서 일련의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언약의 저주”라든지 “인류의 결속성”이라든지 ‘헤렘’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도, ‘아이’ 성의 전투는 궁극적으로 실패가 아니라 승리로 끝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대 반전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새로운 단락의 범위를 결정함에 있어 그 시작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결말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직전의 에피소드 <여리고 성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하나의 이야기 단위의 결말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지도자 ‘여호수아’와 관련한 이런 표현은 앞선 <요단 강 이야기>에서도 하나의 결론으로서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7:1)은 <여리고 성 이야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정보로서, 지난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전체적인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그렇다면 새로운 단락의 끝은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새 이야기에서 관심의 초점을 ‘아간’에게만 국한시켜 본다면(새 이야기를 그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였으니), 그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7장의 마지막 구절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7:26). 그러나 이 구절은 어디까지나 ‘아간’ 한 개인에 관한 이야기의 결말로 보기에는 적절하지만, 이스라엘과 ‘아이’ 성의 운명에 관한 언급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아이 성 이야기>의 결말로 삼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8:29를 이야기의 전체적인 결론으로 삼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8:29). 다시 요약해 보자면, 7:26과 8:29는 그 기능에 있어, 각기 ‘아간’과 ‘아이’ 성의 운명에 관한 기원론적인 언급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이야기의 결말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학적인 결론으로 삼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결론이라 함은 “길갈 언약”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 언약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길갈 언약”의 시작을 5장으로 볼 때, 6장과 7장은 각기 언약의 “축복”과 “저주”를 다루고 있으며, 신학적 결론으로 당연한 귀결은 언약의 “재계약” 내지는 “갱신”을 담고 있는 본문이 되어야 할 것인즉,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곳은 8장의 마지막 다섯 절입니다(8:30-35). 따라서 5-8장은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의 완전한 문학 및 신학적 단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준비-언약의 체결(5장)
(2) 승리-언약의 축복(6장)
(3) 패배-언약의 저주(7장);
(4) 승리-언약의 갱신(8장)
그러나 편의 상 7장만을 따로 구분해 볼 때, 이야기 제목은 <아간 이야기>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며, 단락 구분 또한 비교적 명확해 집니다. 본문은 네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독특한 양식과 전승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1) 배경: 문제 제기(1절)
(2) 정탐: 오만과 패배(2-5절)
(3) 예배: 애도와 간구(6-12절)
(4) 응답: 심판과 제거(13-26절)
양식과 배경. 첫 번째 단락은 이야기의 배경으로써, 신학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간’의 범죄, 즉 언약의 파기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단락은 범죄의 결과, 즉 언약 파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시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아이’ 성에서 이스라엘의 패배를 다루고 있는데, 이야기의 양식은 전쟁 이야기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스파이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형으로서(민 13-14장; 수 2; 삿 18; 민 21:32-35; 신 1:19-25), 대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담고 있습니다: (1) 파송(2절); (2) 임무부여(2절상); (3) 정탐(2절하); (4) 보고(3절); (5) 공격개시(4절).
그런데 <아이 성 이야기>에서는 무언가 석연치 않는, 새로운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정탐꾼들의 이름이나 신분 등에 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민 13:2; 삿 18:2; 신 1:23), 정탐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으며(수 2:9-11; 삿 18:5-6),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투적인 선언, “야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부치셨느니라”(수 2:24; 민 14:8; 21:34; 신 1:25; 삿 18:10)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정탐꾼의 보고에도 이와 같은 확신에 찬 언급은 없고, 오히려 새로운 요소 즉 정탐꾼 자신들의 계획을 대신 추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3절). 당연히 이번 일은 실패로 끝날 운명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4절하-5절상). 그리고 실패를 마감 짓는 해학과 조롱 섞인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이점을 더욱 곤고히 할 뿐입니다: “백성의 마음이 물같이 된지라”(5절하). 이 선언이 갖는 상징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7장은 2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마치 피고와 검사 사이에 벌어지는 법정 공방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용어들은 대부분 제의적인 것들입니다. 참패를 접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절망과 수치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서 보여주는 모습은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배 시 드리는 “애가와 간구”의 전형(典型)입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6절). 먼저 그는 (1)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로 시작하여, (2) 하나님께서 과거의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언급한 다음, (3) 애가와 간구의 순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애원하는 내용은 그들 자신과, 대적자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한 가지 요소가 새롭게 추가되면서 기존의 예배 양식에서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의 비정상적인 태도가 두드러집니다. 이전의 지도자 ‘모세’의 기도와는 아주 딴 판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회개와 간구가 아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와 불평에 가까운 것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7:7-10). 이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오히려 단호하고 명쾌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7:11상).
바로 이런 차이로 인해서 전형적인 예배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희망의 소식 즉 미래의 구원에 대한 신탁의 메시지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법정공방만이 계속될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최종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도하고 맙니다: “이스라엘도 조차도 바친 것(헤렘)이 되었다”(12절하). 이리하여 예배는 희망은커녕 절망과 저주의 메시지로 끝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락에 이르러 그 양식은 다시 한 번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배적인 상황이 아니라 마치 예언자의 신탁을 듣고 있는 듯합니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13절). 이스라엘은 그들의 원수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 있으며, 그 원수를 제거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이어지는 메시지는 주사위를 던져 범죄자를 적발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며(14-15절), 이스라엘은 절차에 따라 범법자를 가려냅니다(16-18절).
범법자를 가려내기 위한 이 모든 절차와 그에 따른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피고는 자신의 죄를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처벌이 지당함을 인정하게 합니다(19-21절). 사람들이 아간의 처소에서 도적질한 물건들을 가져와 ‘여호수아’에게 보여줌으로써 ‘아간’의 고백은 다시 한 번 확인 작업을 거칩니다(22-23절). ‘아간’ 자신의 고백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물증의 확보로 그를 처벌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이중적으로 확보한 셈입니다. 결국 그는 공동체의 재판을 받고 죽어갑니다(24-25절). 화자는 “아골 골짜기”의 유래에 대해서 원인론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아간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6절).
이어지는 8장은 승리, 즉 “아이 성의 파괴”를 다루고 있으며, 핵심 주제는 언약의 갱신입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아이 성 이야기>의 제 2부 정도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만, 길갈 언약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들 이야기의 전승이나 자료와 편집 등에 관해서는 다음 과에서 다룰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 문제 제기(7:1)
‘여리고’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다음에 취해야 할 성읍은 가까이에 있는 ‘아이’ 성입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크게 패하고 맙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화자는 서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특정 범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이 성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접속사 “그러나”가 없습니다.
그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범죄자 ‘아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구체적으로 저지른 범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그는 ‘아간’의 조상을 3대에 걸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미 > 삽디 > 세라. 마지막 인물 ‘세라’는 ‘다말’이 유다를 통해서 낳은 쌍둥이 중의 한 사람입니다(창 38:30). ‘세라’와 ‘라합’ 사이에 한 가지 흥미로운 연결 고리를 찾는다면, ‘붉은 줄’을 들 수 있습니다. ‘세라’가 태어날 때 붉은 줄을 손에 쥐고 있었고, ‘라합’은 그녀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수 2:18, 21).
이스라엘의 행동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마알’(ל)이며, 번역하자면 “믿음을 저버리다” 또는 “불성실하게 행동하다”입니다. ‘마알’(ל)은 성물(聖物)을 착복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속건제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레 5:14-6:7). <레위기>의 법은 희생제사와 함께 20퍼센트를 더한 완전한 배상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마알’의 행동이 용서받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간’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음에도 말입니다. 아마도 그 차이는 고의성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아간’은 분명 자신의 탐욕으로 “바친 물건”(헤렘)을 취했으나, <레위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마알’은 부지중에 저지른 범죄로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2. 정탐: 오만과 패배(7:2-5)
아무 것도 알 지 못하는 ‘여호수아’는 ‘아이’ 성으로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본문 이야기의 역사성 여부는 고사하고 아이 성의 위치나 그 존재 여부에 대해서조차 고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은 것이 사실입니다: Butler, T. C., 83-84쪽(참고 도서 1).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2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자들은 ‘아이’ 성을 정복하는 것이 식은 죽 먹기라고 보고합니다. 이전에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참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24).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7:3)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러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정탐꾼들이 보고하고 있는 이삼천 명의 숫자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의 조언에 따라 삼천 명의 군사를 보냅니다만(4절), 이 전투에서 3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5절). 나중에 두 번째 공격에서 이보다 열배나 많은 삼만 명을 보내는데, 직접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매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8:3).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단지 오천 명만이 매복에 투입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8:12). 그리고 두 번째 공격에서 죽은 ‘아이’ 성의 주민들은 남녀 모두 일만 이천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8:25). 이들 수자는 그 자체로서 매우 사실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서로 간에 일관성이 없거나 또는 뚜렷하게 대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숫자의 등장에 대해서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화자는 이야기의 수사적(修辭的) 목적을 위해서 다른 두 전승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사적 목적이라 함은 이스라엘의 자만과 교만을 조롱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두 전승이라 함은 <아간 이야기>와 <아이 성 전투>로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처음의 전투에서 삼천 명의 군사를 보내어 36 명의 아군 사상자를 낸 것과, 두 번째 전투에서 순전히 매복을 위해서만 삼만 명의 군사를 보내어 만이천 명의 적군 사상자를 낸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이스라엘이 처음 보였던 교만한 태도를 비웃고 조롱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매복한 군사의 수가 삼만이 아니라 오천 명이었다 해도, 이는 분명 처음 삼천 명의 군사로 전투를 치르려 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조심스럽고 신중한 모습입니다. 믿음의 자세라고 할까요. 그리고 아이 성 주민이 만 이천 이나 죽었다는 화자의 진술(8:25)은 정탐꾼들이 그 성에 소수의 백성만 살고 있다는 보고(7:3)를 비웃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숫자는 이스라엘 전체 군사의 약 사분의 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참고. 4:3). 종합적으로 화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그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과업은 정탐꾼들이 보고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며, 이스라엘 혼자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성전(聖戰)입니다. 성전을 성전으로 보지 않고 동네 싸움 하듯이 달려나갔을 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5절)
우리는 5절 하반에서 <신명기 전승> 특유의 표현을 만나게 되는데, 다름 아닌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화자는 앞에서 두 번에 걸쳐 이스라엘의 적에 대해서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2:11; 5:1).
3. 애도와 간구(7:6-12)
참담한 패배로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전에 그가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을 때도 땅에 엎드린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때는 경배를 드리기 위함이었으며(5:14), 이번의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의 상황은 치욕과 분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6절)
이 장면은 분명 기도와 예배의 상황인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상적인 예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기도는 선임자 ‘모세’의 그것에 비하면 수준 미달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V. Hamilton, 「역사서 개론」.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48쪽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장광설(長廣舌)에 더 가까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7-8절)
“슬프도소이다”(Hh;a, 아하흐)는 충격과 절망의 탄식입니다(삿 11:35; 왕하 3:10; 6:5, 15).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삿 6:22; 렘 1:6; 4:10; 14:13; 겔 4:14; 9:8; 11:13). 이 장면은 3-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길갈’의 축제와는 지극히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애도는 광야에서 ‘모세’가 아닌 이스라엘이 내뱉었던 불평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야훼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민 14:3). 같은 지도자로서 ‘여호수아’는 선임 지도자 ‘모세’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지금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이름이 그 땅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9절)
그가 말하는 이름이란 다름 아닌 명성 또는 평판일 것입니다. 이 말속에는 중요한 <신명기 전승> 특유의 중요한 신학 사상이 담겨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나 인격이 아닌 이름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스스로 성전에 자신의 이름이 거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신 12:5-28; 왕상 8; 신 26:15; 4:12; 왕하 23:27). 그런데 이스라엘 편에서 보자면 이 사실을 늘 아전인수(我田引水)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이나, 성전(聖殿)이나 또는 이스라엘의 능력과 동일시하고 싶다는 유혹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전(聖殿) 없으면 하나님도 없고, 이스라엘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아전인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사관”에 따르면, 하나님은 비록 자신의 이름을 성전(聖殿)에 두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성전이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에 의존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그렇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됩니다(10-15절):
11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12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1-12절)
자비로운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추상같은 검사의 논고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처음으로 듣게 되는 정보는 “(‘아간’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이미 서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1절). 범죄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약을 “어긴”(rb'[;, 아바르) 것입니다. 이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지나치다” 또는 “건너다”(pass over)로서,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널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참고. 3:4; 7:7). 알다시피 “유월절”의 의미도 여기서 파생한 것입니다. 화자의 해학(諧謔)은 이런 것이지요. 즉 ‘요단’을 건너기를 주저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은 너무 쉽게 건너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서> 7장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첫 번째 사례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 곧 죽음으로 나타날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저주받은 대상 즉 ‘헤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2절상)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으며(1:5, 9; 3:7),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1:17). 하나님의 임재는 ‘여호수아’에게도 큰 격려가 되었으며(3:7), 땅의 정복에 대한 희망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3:10). 그러나 이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그냥 “건너버린”(rb'[;, 아바르) 결과, 이 모든 약속과 희망 또한 이스라엘을 “건너가”(rb'[;, 아바르)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물 건너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기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느냐 아니면 ‘헤렘’과 함께 하느냐 입니다. 선택은 당연히 스스로를 ‘헤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13절)
이로써 이야기의 흐름은 갑작스럽게 외부의 원수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내부의 원수에 대한 언급으로 움직여가고 있습니다(Hamilton). .
4. 심판과 제거(7:13-26)
어떻게 ‘헤렘’을 가려낼 것인가? 이 일마저도 이스라엘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둑을 집적 가려내실 요량인 것입니다: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14절)
범죄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주사위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이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화자는 주사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간’이 범죄하였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자를 가려내는 몇 가지 방법들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들 방법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컨대, 간음죄로 의심을 받는 여인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오염된 물을 그 여인에게 마시게 했습니다(민 5:11-31). 주사위를 던지는 방법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전쟁을 계속 해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에 관해서 묻습니다(삼상 14:37).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자 ‘사울’은 누군가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주사위를 던져 범죄자를 찾아내고자 합니다(삼상 14:41). 그 결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뽑히게 됩니다(삼상 14:42). 이에 ‘요나단’은 자기가 소량의 꿀을 먹었노라고 대답합니다(삼상 14:43). 이것은 ‘사울’이 이전에 그의 군대를 향하여 한 맹세를 정면으로 위반한 행동입니다(삼상 14:24). 그러나 ‘요나단’이 아버지의 맹세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으며(삼상 14:27), 따라서 그를 속량하려는 백성들의 결정(아마 대속의 제사를 통해서)으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요나’의 경우에도 볼 수 있습니다.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나 위기에 처하자, 선원들은 배에 탄 누군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결론을 짓고, 주사위를 던져 범인 색출에 나섭니다(욘 1:7). 이상 세 가지 에피소드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이 범죄자를 가려내는 전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수사대가 한 범인 색출을 위해서 수사망을 점점 좁혀가듯 합니다: 지파 > 족속 > 가족 > 아간(16-18절). 결국 범인은 ‘아간’으로 밝혀지며, 그는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자백을 요구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19절)
그의 자백은 일견 칭찬할 만합니다(Hamilton):
20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21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20-21절)
우선 그는 공동체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범죄 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20절).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에덴 이야기>에서 화자가 ‘하와’의 범죄를 설명할 때 사용한 언어와 놀랄 정도로 유사한 것입니다: “여자가...본즉...여자가...따먹고”(창 3:6). ‘아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보고...취하였나이다.”
적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고백과 회개는 징계를 피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본문은 정상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Hamilton).
‘아간’이 어떤 종류의 물건을 취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쉐퍼’는 그가 훔친 두 종류의 물건에 대해서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F. Shaeffer, 「기독교 성경관」.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그의 진단에 따르면, ‘아간’은 두 종류의 유혹에 직면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금전적인 유혹입니다: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두 번째 유혹은 보다 은밀하고 교묘한 것으로서, ‘시날’ 산 외투 한 벌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이 옷은 당시 화려한 문명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바벨론’ 산 제품입니다. 그것은 성공과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를 세계인으로 승격시키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옷입니다(Schaeffer). 오늘날로 치자면, 값비싼 외제 자동차나 명품 브랜드를 지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간’은 이 멋진 옷을 입고 유명인사가 되어 교회 안을 거들먹거리며 활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아간’은 이중적인 범죄를 저지른 셈이 됩니다. 첫째, ‘여리고’에 있는 모든 사람과 물건들은 완전히 멸하지 않았습니다(참고. 6:17). 둘째, 은과 금을 ‘야훼’의 창고에 들이지 않았습니다(참고. 6:19). ‘아간’은 외투를 취함으로써 첫 번째 명령을 위반했고, 은과 금을 취함으로써 두 번째 명령을 위반했습니다. 그가 취한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들이므로, 그의 횡령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여기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징계가 결정된 다음에 내놓은 처방 즉 “때늦은 고백”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사건이 불가사의한 것은 그의 가족과 재산과 가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이스라엘 모두가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Hamilton, 52-53쪽.
“결속성의 원리”(solidarity)가 가장 근접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원리를 인류 전체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롬 5:12).
이야기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장소를 언급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2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6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4, 26절).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아골’과 관련해서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rk'[, 아카르)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rk'[, 아카르)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25절). 즉 ‘아간’(@k;[;,아칸)은 이스라엘을 ‘아카르’한 죄로, 하나님께서 그를 ‘아카르’하셨고, 그와 그의 가족과 그 모든 소유를 불태워 ‘아골’(r/k[,아코르) 골짜기에 묻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지은 지명이 “괴로움의 골짜기” 또는 “폐허의 골짜기”라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코 상서로운 시작이 아닙니다!
교훈과 적용
1. 배경: 문제 제기(7:1)
‘여리고’의 승리로 ‘여호수아’ 공동체는 축제의 분위기에 싸였습니다. 약속의 땅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의 정상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1절상).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접속사 ‘그러나’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반전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이 선언은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신학적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본질적인 문제 한 가지만 다루고 넘어갑시다. 7장 전체의 문제의 핵심이자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간’이 저주받은 물건(하렘)을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아간’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그의 평소 생활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즉 평소 남의 말을 대충대충, 건성으로 듣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시험 문제를 출제하다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학생들은 대개 문제지를 대하면,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신중히 파악하려 하지 않고, 언뜻 보고 비슷한 문제다 싶으면 자신이 미리 외워둔 답안을 그대로 적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면 와서 항의를 합니다. 맞게 썼는데 왜 점수를 안주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점수는 출제자의 절대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출제자의 의도를 면밀히 파악하거나, 영 자신이 없으면 직접 재확인하면 됩니다. 설교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간’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작전”에 대해서 심각하게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 여느 때처럼 혼자서 딴 생각을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리고 작전”의 심각성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문제는 늘 이런 식으로 살다보면 점차 남의 말이 우습게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 늘 ‘람보’로 살면서 교회의 연합기도에는 관심도 없이, 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관심사에만 매달려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공동체의 운명에는 별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교회의 사역보다는 항상 자신의 사역, 즉 직업이나 취미생활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과 돈을 투자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는 도무지 신뢰와 애틋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나라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 1:3)을 이 세상의 복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 모든 것을 먼저 구한 연후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여기서 범죄 하였다는 동사가 바로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경홀히 여기다” 또는 “불성실하다” 등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인류의 범죄가 어떻게 확장되고 심화되어 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롬 1:20-32). 처음에는 지극히 미미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은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감사치도 않게 되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과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일종의 직무유기에 해당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인류는 보다 적극적인 죄악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거침없이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인류는 역사를 두고 온갖 종류의 죄악을 다 저질러 왔습니다(롬 1:29-32). ‘아간’ 역시 같은 전철을 밟았으리라 생각됩니다.
2. 오만과 패배(7:2-5)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 첫째 반응이 “그냥 내어 버려두는 것”으로 나타납니다(롬 1:24, 26, 28). “그래 너희들 멋대로 한 번 해 봐라!” 하나님께서 손을 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교만과 방자함입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가련한 ‘여호수아’는 이전처럼 정탐꾼을 보냅니다. 정탐꾼 이야기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만, 이들의 자신만만한 보고를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가 이 전투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평가입니다. 이 정탐꾼 이야기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들의 자신만만한 보고를 들어 봅시다: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7:3).
사실 ‘아이’ 성의 군사는 이들의 보고처럼 결코 소수는 아닙니다. 적어도 일만 이천은 되었으니(8:25), 잘못된 보고는 아주 교만에 찬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두 번째 공격에서 ‘여호수아’가 3만 명의 군사를 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8:3). 어쨌든 결과는 대참패였습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쫓겨났으며, 그 와중에 36명이나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왜 죽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어, 이게 아닌데... 하나님도 영 별 볼일 없구나.”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들이 왜 이처럼 처참한 패배를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보듯이, 그들의 보고 어디에도 그 유명한 고백, “여호와께서 우리 손에 부쳤더이다”(2:24)가 없습니다. 사실 이 정탐 이야기 어디에도 ‘야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책임질 일은 없습니까? 화자는 이 점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잠언서>는 좋은 지도자의 한 가지 특징이 무엇보다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활용 가능한 모든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잠 20:18; 24:6; 11:14; 15:22). 훌륭한 조언이 승리를 가능하게 한다면, 나쁜 조언은 패배를 불러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책임을 물을 만한 사고는 또 있습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희생된 36명의 이스라엘 사상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7:5).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한 마디!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에 충실할 때만 특권과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즉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에만 주어집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그 특권을 잃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의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해설자의 해학적 표현을 들어 봅시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7:5하). 이러한 표현은 그동안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대해서나 쓰던 표현이었습니다(2:11; 5:1).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3. 애도와 간구(7:6-12)
참담한 실패 후에 ‘여호수아’는 비록 늦기는 했지만,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역시 지도자다운 모습입니다. 그는 지난 40년 동안 모든 실패의 원인이 항상 자신들 편에 있었고, 그 점을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면 문제는 즉각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심정은 정상이 아닌 듯합니다.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기는 하나(6절), 치욕과 분노로 아무 말도 못하고 하루 종일 이런 모습으로 꿇어 앉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간구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기 가장 쉬운 상황은 다름 아닌 환난과 고초가 아니겠습니까?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없습니까? 이렇게 꿇어 엎드려 애도하고 간구해야 할 무슨 문제는 없습니까?
‘여호수아’ 교회의 현재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배 또한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고, 승리는커녕 치욕의 패배를 당했으니 원만과 불평이 앞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구하고 회개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원성과 불평이 앞서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겉으로는 짐짓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명성을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대적자들의 방자한 태도에 분개하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97-9절). 그의 요점은 이런 것이지요: “주님, 우리 이름이 없어진다면 당신의 이름 역시 사라질 것 아닙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성전에도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논리를 조금 확대해 보자면, 이스라엘의 성전이 사라지거나 이스라엘이 사라진다면 하나님의 이름 또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이처럼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의 착각이고 오만입니다. 그들은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의 이름 속에 가두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나 존재를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모든 원인의 제 일 원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서 이스라엘이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는 분입니다. 천지 창조 이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4).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달처럼 말입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빛이 없다고 해서 해가 빛을 비추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빛을 내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착각하고 살다가 복음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되던 당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언어로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다양한 방언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셨겠습니까? 참된 빛을 거부하고 스스로 빛임을 자부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언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언어)을 선포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 이스라엘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만사형통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내가 만사형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손상이 오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교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만사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는 뜻대로 일이 잘 안 풀릴 때, 하나님의 과거 행적마저 문제를 삼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7절) 왜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왔느냐는 것이지요. 나는 어떻습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런 항의 하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기독교인이 되어 이 고생을 하는가?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자비스러운 구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추상같은 검사의 논고가 있을 뿐입니다(11-12절). 첫째, 놀랍게도 ‘아간’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가 범죄 했다고 말합니다. 즉 ‘아간’이 범죄할 때, 이스라엘 모든 지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이지요. 드디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속성의 원리라 부릅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전 인류에게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롬 5:12). 여기서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각자 나름대로의 죄를 저질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함께 동일한 그 범죄에 동참했고, 그런 의미에서 공범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결속성의 원리”는 무슨 논리적인 사유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역사적이고도 체험적인 사례를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겠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인식이자 선포입니다.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추상같은 논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범죄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깨우침입니다. 범죄란 흔히 생각하듯 무슨 윤리∙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르거나 또는 사회적 계약을 어기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도덕불감증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죄의식이 없기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불감증은 단순한 도덕불감증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감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불감증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 직무유기(職務遺棄)일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나는 지금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제자 삼는 일이 내 인생의 중요한 소명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까? 만일 이들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부정적이라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내가 이 문제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범죄 하는 백성을 용서해주실 지는 몰라도 축복해 주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러한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능력과 생동감이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라지는 편이 더 낫습니다. 전 공동체적으로 심각하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4. 심판과 제거(7:13-26)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영원한 특권은 그 사전에 결코 절망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엄청난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또다시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하나님은 다시 얼굴을 돌이키십니다. 이래서 인간의 존재 방식이 선택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 아니면 ‘헤렘’과 함께 하느냐는 순전히 나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나 자유의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영역에 속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7:14). ‘여호수아’ 교회에서 어떻게 누룩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처럼 범죄자를 상세하게 가려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7:14-18). 모두가 “듣고, 보고, 취하도록(깨닫도록) 하려 함일 것입니다.
누가 범죄 하였습니까? 충격적이게도 그는 ‘유다’ 지파에 속한 자입니다. ‘유다’ 지파는 열두 지파 중에서 보통 지파가 아닙니다. ‘요셉’의 유언을 들어 봅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8-10). 그렇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에서 지도자가 될 지파였습니다. 지도자의 범죄는 비단 이스라엘 공동체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교회 내의 분열과 잡음은 초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 일으킵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지도자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드디어 ‘아간’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숨김없는 자백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7:19).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나, 신앙적 어려움에 대해서 최소한 한 사람에게만은 고백하고 상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목자라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해도 우리의 목장 모임에서 이러한 것들이 잘 되지 않으면, 이는 교회전체의 문제로 비화된다는 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아간’ 자신은 끝까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중간에라도 뛰쳐나와 그의 죄를 고백할 만한데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간’이 훔친 것이 무엇입니까? ‘쉐퍼’ 박사님의 진단에 따르면, 그는 두 종류의 유혹에 직면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금전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유혹에 빠져 결국 범죄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일련의 연속적인 동사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7:21). 사실 그는 조금만 참았어도 아이 성에서 그가 취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보다 은밀하고 교묘한 것입니다. 그것은 ‘시날’ 산 외투 한 벌입니다. 그게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입니까? 이 옷은 당시 화려한 문명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바벨론 산 옷입니다. 그것은 성공과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 옷은 따라서 그를 세계인으로 승격시키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값비싼 외제 자동차나 수입 옷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간’은 이 멋진 옷을 입고 교회 내의 VIP가 되어 뽑내고,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신약>의 초대교회에도 이러한 질병을 지닌 한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행 5:1-11). 그들은 괜한 짓을 해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아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그 부질없는 명예와 부를 탐욕스럽게 추구하다가 스스로 ‘헤렘’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디 그들뿐인가요? ‘아간’의 경우를 보면, 그의 아들, 딸, 그리고 그의 모든 소유가 ‘헤렘’이 되어 버렸습니다(7:24). ‘아골’ 골짜기의 돌무덤 속에서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장식한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아간’의 또 다른 이름은 ‘아골’ 입니다. 왜 이들은 회개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까요? ‘여호수아’의 절규를 들어 봅시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7:25상). 그들은 교회의 순결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연합과 일치를 해쳤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마땅히 교회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힌두교 잠언에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간’은 하나님과의 거룩하고도 엄숙한 약속(언약)을 우습게 알고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것이 고의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생활방식과 직무유기적인 체질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에 대한 신뢰나 순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공동체의 관심사에는 아랑곳 않고, 오직 혼자만의 기도 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세계만을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공동체 전체에 아무런 영향도 줄 것 같지도 않았던 이런 생활 방식이 신기하게도 교회 전체의 문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범죄를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로 간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한 구성원의 잘못은 결국 그 가족 전체의 잘못이 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나는 혹시 ‘아간’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숨겨둔 ‘시날’ 산 외투는 없습니까?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십니다(요일 1:9). 그리하여 교회 전체가 건강하고 밝은 토양을 유지해 가도록 합시다.
토의와 연습
1. <여호수아서> 5장에서 8장까지의 네 개의 장은 하나의 주제 “언약”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이루는 한 편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문학과 신학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의해 봅시다.
2. <여호수아서> 7장만을 따로 떼어놓는다면, <아간 이야기>로 명명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특히 “헤렘”의 신학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본 교재의 <서론>를 참고합시다.
3. 본문의 교훈과 관련한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다음 한 주를 위한 기도 제목으로 삼을 것은 무엇입니까?
제 10과: 언약의 회복
10
언약의 회복:
아이 성을 불사르고
(8:1-29)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으니(8:28a)
한국의 대표적인 토종(土鐘) 오페라로 자리 잡은 <명성황후>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한국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공연되었을 때,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웬만한 작품들은 아예 공연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그곳의 문화 풍토를 고려해 보면, 이 작품의 성공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관중의 대부분이 우리와는 문화적 토양이 전혀 다른 미국인들이라는 점에서 그 작품의 진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성공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두 사람의 “무모한 신념”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이 작품의 연출자입니다. “한국에서도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공연을 어떻게 세계 예술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까?” 기자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창작 분야에서 실패를 두려워해서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자신의 세계에 미친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 오페라가 뉴욕에서 공연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국내의 한 중소기업 사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전 직원들의 재산까지 담보로 잡아 공연에 필요한 일체의 재정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모험을 할 수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의 답변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작품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연출자야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불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연출자보다 더 미친 사람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출자의 모험심과, 한 번 약속했던 것을 끝까지 지켜내었던 한 사업가의 헌신이 대한민국의 토종 오페라 <명성황후>를 전 세계에 알리는 거사를 가능하게 한 것이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승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승리자가 약속의 땅에서 첫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이 패배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아이’ 즉 “황폐(또는 폐허)의 땅”에서 ‘아이’가 “폐허”가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폐허” 즉 초토화(焦土化)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원인은 ‘아간’의 범죄,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문자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이’가 ‘아이’가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아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옵니다. 애도의 예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인’의 예배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겠지요.
할 수 없이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자신의 거룩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모든 더러운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이 백성은 한 편으로는 울면서, 또 한 편으로는 울분과 고통 가운데서 ‘아간’과 그의 온 가족들을 돌로 쳐 죽이고, 그 위에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 “‘아간’의 돌무덤”을 쌓습니다(7:26). 이렇게 해서 공동체의 누룩은 제거되었지만, 이 일로 공동체는 모두 실의와 절망 가운데서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사역을 시작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7장의 마지막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후). 바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은혜를 보이실 때인 것입니다. 알렉산더 휫트(Alexander Whyte)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 가운데 가장 큰 실수는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많아지는 법입니다. <여호수아서> 8장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작, 즉 언약의 회복과 그에 따른 ‘아이’ 성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회복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8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라기보다는 7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지난 과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7장이 언약의 파기와 관련해서 “‘아간’의 운명”에 대해서만 그려놓고 있지, 이후 이어지는 ‘아이’ 성이나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죽은 후에 ‘아이’ 성은 어떻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 본문은 특별히 이 두 질문 가운데 첫 번째 것에 대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아이’ 성에서 패배한 후에 이스라엘이 드리고 있던 예배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7:6-12).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배드리는 자가 진정과 신령이 아니라 원망과 불평으로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배가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끝에 무슨 희망에 찬 신탁이 아니라, 저주의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본문은 이스라엘의 예배가 정상적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본문의 시작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7:10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8:1상)
이 두 선언 사이에 길고도 지루한 범죄자 ‘아간’의 색출과 그에 대한 공개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즉 예배가 재판에 관한 이야기로 일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재판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구원의 신탁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탁은 전투에 관한 지시사항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주로 매복에 관한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 이처럼 본문은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형식에 있어 <사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벤야민’ 지파 간의 전쟁 이야기(삿 20:18-48)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통적인 내용이나 양식을 아래 표에서처럼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교를 위해서 <여호수아> 본문의 범위를 7장까지 확대해 보면, 두 이야기에서 등장하고 있는 “애가”(哀歌)의 양식 또한 밀접하게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 7:6-9; 삿 20:23, 26-27. 당연히 두 이야기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가를 초래한 원인 즉 이스라엘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도 동시에 등장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 7:2-5; 삿 20:19-25.
자료와 편집. 이처럼 <여호수아서> 7-8장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료비평 진영에서는 이 두 이야기를 <아간 이야기>와 <아이 이야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7장은 ‘아간’의 범죄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어(7:1), 소위 <아간 전승>으로 불리는 자료에서 그 내용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7장의 나머지 이야기도 그의 범죄와 연관된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이 성 전투>에 관한 것입니다( 7:2-12). 그러다가 다시 이야기는 ‘아간’에 관한 내용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7:13-26). 이 부분은 그 내용에 있어 분명 <아간 전승>에서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일 이 전승이 있기라도 하다면). 그리고 중간에 끊어졌던 <아이 전승>은 다시 8장에서 그 내용을 이어가고 있습니다(8:1-29). 이곳에서 주된 내용은 “매복과 위장 도피” 및 ‘아이 성’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적 특징을 <사사기> 20:18-48의 본문과 비교해 본 바 있습니다(도표).
요약하자면, 7-8장은 구조와 형식에 있어 <아간 전승>이 <아이 성 전승> 사이에 끼어들어 그 내용을 양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각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살펴보면 이 설명이 타당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원인론적 설명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간 전승>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6).
<아이 전승>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8:29).
두 전승에서 강조하는 지명이나 지역도 다릅니다. <아간 전승>에서는 ‘아골’ 골짜기이고, <아이 전승>에서는 ‘벧엘’입니다. 그리고 <아간 전승>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냉소적인 것을 봅니다. 특히 ‘아간’이 ‘유다’지파라고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이 전승의 기록자는 아마도 ‘유다’지파와는 상당히 적대적인 지파, 예를 들어, ‘베냐민’이나 북쪽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사울’에 이어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두 지파간의 알력과 충돌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우월성에 대해서도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전승의 원 배경과 기원, 그리고 이들의 결합과 편집 과정 등에 관해서는 일일이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Butler, 81-82쪽.
우리가 만나는 최종 본문은 분명 이스라엘을 위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신학과 신앙
1. 신탁(8:1-2)
본문은 구원의 신탁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끝났던 예배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1절)
구원의 신탁 속에는 약속과 명령이 함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독자들에게 예의 친숙한 표현이자 모티브들입니다. 즉 독자들로 하여금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2)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3) “네 손에 주었노라.”
이들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믿음과 순종에 관한 또 다른 모티브의 등장입니다: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2절)
‘여리고’ 왕에 관한 언급은 지난 이야기(6장)에는 없었습니다. 그를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적어도 지금 이스라엘에 있어 ‘아이’ 왕이 여리고 왕보다 더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을 것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공격 명령과 함께 이번 전투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 사항 또한 뒤따르고 있습니다. 원래 <신명기> 20장에 따르면 단지 ‘가나안’의 주민들만 멸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의 주된 관심사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데 있으며, 만일 가나안 주민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땅 주민들 외에 별도 ‘헤렘’의 목록을 작성하는 데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나중에 이스라엘이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승리를 위해서 이런저런 맹세나 서원을 하면서 ‘헤렘’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새로운 목록을 추가하거나 새롭게 해석했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신 21:2; 삼상 15:3, 9-10). 예컨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물건과 가축”을 ‘헤렘’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의 다른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신 2:35; 3:7). 그러니까 ‘헤렘’의 대상과 관련해서 2절에 등장하고 있는 이 새로운 명령은 이스라엘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으며, 과연 이스라엘이 이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음을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27절).
2. 작전(8:3-9)
<여호수아서>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됩니다.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이 친숙한 표현,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로 시작하고 있다면(8:1상), 두 번째 단락은 “이에 여호수아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8:3상). 두 표현 모두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암시해주는 중요한 수사적(修辭的일)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이’ 성 공략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작전은 간단하지만 ‘여리고’ 작전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여리고’ 작전에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강조되었습니다. 문이 굳게 닫혀 아무도 출입하는 자가 없고,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성벽이 단순히 법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과 함께 나팔 소리와 고함 소리에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여리고’에서는 어떤 무기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에서는 매복과 협공이 주된 군사 작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둘로 나누어 한 조는 매복조로, 다른 한 조는 전투조로 나누어 일종의 유인전(誘引戰)을 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두 가지 방식을 알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방식; 인간의 계획과 전략.
3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4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여 매복하되 그 성읍에서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준비하라. 5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 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6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7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3-7절상)
둘째, 이것은 다소 미묘한 것이긴 하지만 ‘여리고’ 전투에서는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하람’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6:17). 그러나 ‘아이’ 성 전투에서는 그런 명령이 없습니다. 다만 완곡한 말씀만이 있을 뿐입니다: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8:12). <아이 성 이야기>에서도 ‘헤렘’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어디까지나 두 군대의 대면이 끝나고 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8:26).
그런데 이 미묘한 차이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 번째 차이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 성 이야기>에서는 전리품과 관련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어 버렸습니다. 즉 ‘여리고’에서 금지되었던 그 행동이 ‘아이’ 전투에서는 허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이’ 성에서는 전쟁 노획물과 가축을 마음껏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8:2, 27). 달리 말해서 ‘아간’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에서 허락받은 일을 ‘여리고’에서 행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아간’이 저지른 행동은 범죄 행위였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노획물을 탈취하는 것을 허용한 ‘아이’ 성 이야기는 <신명기>의 내용과 크게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1)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오직 그 육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신 2:34-35); (2)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들을 진멸하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진멸하였으나, 오직 모든 육축과 그 성읍들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신 3:6-7). 이 두 기록은 똑같이 ‘헤렘’의 대상이 된 도시나 성읍의 가축과 노획물을 탈취하는 행동이 정당한 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참조, 수 11:11-14).
다만 ‘아이’ 성에서 허용되는 일이 ‘여리고’에서는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해밀턴’(V. Hamilton)은 이 질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승리의 결과로서 얻은 노획물에 한정되며, 노획물 자체는 결코 승리의 목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다소 애매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Hamilton, 56쪽(참고도서, 3).
‘아이’ 성 전투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전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다른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전투에 필요한 군인의 수가 삼천이 아니라(7:4) 삼 만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8:3). 이 말은 앞에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의 삼천 명이면 충분하다는 자신만만 보고에 대한 수사적 ‘조롱’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방식에 관한 강조일 뿐, 전쟁의 주인공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임을 동일한 ‘모티브’를 사용해서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7하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8너희가 그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느니라 하고(8:7하-8절)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직접 수행하고 계신다는 모티브는 또 있는데, 여호수아가 그날 저녁 이스라엘과 함께 잤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9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에서 잤더라(3-9절)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자 이스라엘의 탁월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 즉 ‘임마뉴엘’의 상징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날 저녁 함께 자면서 백성들을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며 보냈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이 지난번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성 이야기>는 그 전후에 있는 다른 사건들과도 여러 면에서 평행되는 요소들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1-11장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두 번의 위기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민수기> 13-14장에서 다루고 있는 “정탐꾼 이야기”이고(신 1장),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등장하는 “금송아지 이야기”입니다(신 9장). <아이 성 이야기>를 포함해서 이들 세 이야기는 거의 동일한 양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의 두 “정탐꾼 이야기”는 그 유사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Hamilton, 56-57쪽(참고도서 3).
(1) 정탐꾼을 보내고 나중에 그들의 보고를 들음(신 1:22-25; 수 7:2-3).
(2)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패배가 있을 뿐이다. 추적자가 도리어 추적당하는 자로 처지가 역전됨(신 1:43-44; 수 7:4-5).
(3) 패배에 대한 통곡이 따름(신 1:45; 수 7:6-9).
(4) 이스라엘의 행동은 야훼의 진노를 초래함(신 1:34; 수 7:1).
(5) ‘야훼’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심(신 1:42; 수 7:12).
(6) 범죄자들이 죄를 고백함(신 1:41; 수 7:20-21).
(7)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범죄자들을 제거해야 함(신 1:46-2:16; 수 7:24-26).
(8) 걸림돌을 제거하고 ‘야훼’는 다시 약속과 명령을 주심(신 2:18-25; 수 8:1-2).
(9) 이스라엘이 적군의 공격을 받음(신 2:32; 3:1; 수 8:14-16).
(10) 공격을 물리침(신 2:33; 3:3; 수 8:21-23).
(11) 적군에 대하여 ‘헤렘’을 적용함(신 2:34; 3:6; 수 8:26).
(12) 적군의 가축을 노획물로 취함(신 2:35; 3:7; 수 8:27).
이들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식과 일련의 요소들은 <사사기>에서도 13회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 요소들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에 이은 “회복”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성경> 전체를 흐르는 일종의 “신학적 윤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인 즉은 “축복은 순종을 요구하고, 불순종은 저주를 자초하게 되나, 다시 회개의 고백은 용서와 구원의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3. 승리(8:10-23)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신 그대로 전쟁을 수행합니다. 다시 한 번 화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순종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0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백성을 점호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11그와 함께 한 군사가 다 올라가서(10-11절상)
전쟁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작전 지시대로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듯하고, 끝난 시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언급이 없지만 적어도 하루 종일 걸린 듯합니다:
이와 같이 성읍 북쪽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쪽에는 복병이 있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13절)
이처럼 화자는 전투의 시작과 진행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밝히고는 있습니다만, 분명치 않은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일예로, 매복한 군사의 수가 삼 만인지 오천인지가 분명치가 않습니다(참고, 3절 및 12절). 아무튼 매복과 기습 작전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처음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교만했던 대가로 패배하여 “마음이 물같이 녹았다면”(7:5후), 이번에는 ‘아이’ 성의 왕과 군사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을 차례입니다. 지난 번 승리에 도취하여, 성을 온통 비워두고 거짓 도망치는 이스라엘을 쫓아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나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5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16그 성읍에 있는 모든 백성이 그들을 추격하려고 모여 여호수아를 추격하며 유인함을 받아 아이 성읍을 멀리 떠나니, 17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14-17절) 화자는 17절에서 ‘아이’와 함께 ‘벧엘’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를 본문 변조 내지 오류의 전형적인 예로 보아야 할지, 또는 의도적인 강조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아이’ 성 뿐만 아니라 ‘벧엘’도 정복했음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상할 수 있는 바대로 이 추적은 대참패로 끝날 운명입니다. ‘아이’ 왕은 지금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전투에 개입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친숙한 표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19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18-19절)
다만 ‘여호수아’가 손에 든 “단창”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장검(長劍)도 아닌 단창을, 그것도 대낮이 아닌 한 밤중에, 그리고 성 다른 편 숲속에 매복해 있는 군사들이 이 단창을 신호로 공격을 개시했다는 사실이 납득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굳이 이 전투를 <출애굽>(17:8-13)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아말렉’ 간의 전투와 비교해 보자면 나름대로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아이’ 성의 전투에서 ‘여호수아’가 단창을 든 손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은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손을 높이 들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이 두 장면은 리더십이나 순종 등과 관련한 일련의 공통적인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예상대로 전투는 ‘아이’ 왕의 대참패로 끝납니다. 마지막 두 절이 이를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22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쪽에서 쳐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23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22-23절)
4. 승리 이후(8:24-29)
네 번째 단락은 일종의 후기(後記)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대충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가 순종의 모티브입니다:
25그 날에 엎드려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26아이 주민들을 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25-26절)
그리고 두 번째는 후대(後代)를 위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전쟁 후에 이스라엘이 세운 또 다른 기념비, 즉 ‘아이’ 성의 돌무더기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8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29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28-29절)
이스라엘은 시대를 두고두고 두 개의 돌무더기 즉 “아간의 돌무더기”와 “아이 성의 돌무더기”를 지켜보게 될 텐데, 교훈즉인 즉은 “하나님의 땅과 그의 공동체는 결코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조차도 이를 어길 경우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신탁(8:1-2)
실수를 하면 우리는 종종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는 지난 일에 대한 좌절과 실망으로, 그리고 또 하나는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화 된 해답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두 가지 모두를 날려버릴 수 있는 해결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과거의 실패에 언제까지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노래한 것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구원의 신탁이었습니다. 특히 ‘아이’ 성의 실패와 관련해서 <호세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호 2:15)
약속대로 이스라엘이 일단 그 진영을 깨끗이 하자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구원의 신탁을 선포하십니다. 약속과 함께 새로운 소명과 비전을 담은 것입니다. 약속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아주 친숙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네 손에 주었노라.” 우리가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아, 이제 일이 제대로 풀리겠구나”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늘 먹던 음식, 늘 다니던 길, 늘 앉던 자리, 늘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온 공동체가 불안과 근심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이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실의와 불안에 빠졌을 때, 늘 들려주는 자장가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를 <성경>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조카 ‘롯’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양보하고 난 뒤 배신감과 허탈감에 빠져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2)
심한 풍랑을 만나 흔들리고 있는 배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또한 동일한 것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요 6:20)
실망이나, 두려움이나, 정신적 스트레스조차, 이들 모두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7). ‘사마리아’ 여인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님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이 여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모르긴 해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동분서주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그를 배척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혹시 유대 땅으로도 갔을까요? 나는 어떻습니까? 늘 내 자신의 문제로 고통과 갈등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현”(顯現)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그저 묵상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照明)해 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십니다”(히 4:12).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주장과 소원과 결정들을 다스리고 인도해 주십니다. <잠언서>는 말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잠 3:6). 우리가 매일처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무장을 푼 채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는 반드시 지시가 따릅니다. 즉 그분의 약속에는 반드시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아이’ 성에 속한 모든 재물들은 이스라엘의 것이 됩니다. ‘아이’ 성을 처음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은 너무 주제넘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패였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지 주제넘게 행동함으로써 취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2. 작전(8:3-9)
이번에 그들이 믿어야 할 하나님의 기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지시 사항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전투에 나갔다가 대 참패를 당했으니, 이번에도 ‘여리고’에서처럼 무슨 다른 신비한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무한하게 구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위어스비’ 목사님이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작전은 ‘여리고’에서 사용하셨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을 사용하셨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 방법 즉 인간의 계획과 전략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둘로 나누어 한 조는 매복조로, 다른 한 조는 전투조로 나누어 일종의 유인 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밤에 ‘길갈’로부터 ‘아이’ 성까지 24킬로를 행군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중에서 삼만 군사를 뽑아 성읍 서편 뒤에 매복시켰습니다(8:3-9). 그리고 성읍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오천 명을 매복시켰는데(12절), ‘벧엘’은 ‘아이’에서 약 3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지점입니다. 복병을 이처럼 멀리 떨어지게 배치함으로써 ‘벧엘’로부터 오는 기습을 막을 수 있게 하였는데, 그것은 또 다른 ‘전방’(前方)을 열어 놓은 셈입니다. ‘아이’ 성 주변의 고지대는 바위가 많은 지형이기 때문에 복병을 매복시키기가 용이합니다. 그리고 매복은 야밤에 이루어졌습니다. 계획은 간단하지만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나머지 군인들을 이끌고 북쪽으로부터 ‘아이’ 성을 정면 공격할 예정이었는데, 지난 번 전투 때처럼 짐짓 도주하는 흉내만 내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이’ 주민들이 당할 차례입니다. 지난 승리에 도취하여 자기네들 성읍은 내버려 둔 채 이스라엘을 쫓아 달려 나올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여호수아’의 단창을 든 손이 높이 올라가면 매복해 있던 군사가 성읍으로 들어가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 사람들은 양편에서 오는 이스라엘 군대의 중간에 끼어 모두 전멸할 것이고, 이스라엘의 나머지 군대는 ‘벧엘’로부터 올지 모르는 원군(援軍)을 맞아 싸울 것입니다.
훌륭한 지휘관 ‘여호수아’는 그날 밤 군사들과 함께 잤습니다(9절). 그들을 격려하며, 혼자 있을 때는 기도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필경 전략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 계획 없이 그저 기도만 하고 있거나, 아니면 기도 없이 계획만 세우고 있는 지도자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승리(8:10-23)
‘여호수아’의 이른 기상을 주목합시다(8:10). 밤새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며 기도해본 경험이 있는 자라면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늦잠자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머리속에 해야 할 일이 꽉 차있기 때문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전의 새벽을 맞아 다시 한 번 새벽 기도를 드렸을 것이며, 기도 후에 맞이하는 아침은 결코 다른 날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드디어 작전개시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전략은 지난 번 전투에서 경험했던 실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했던 결과로 “마음이 물같이 녹았다”(7:5후)면, 이번에는 ‘아이’ 성의 왕과 군사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을 차례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교만 때문입니다. 마음이 한껏 부풀대로 부풀어 있어, 성을 텅텅 비워두고 거짓 도망치는 이스라엘을 쫓아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대참패입니다. 단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고 사로잡혀 죽었습니다(22절).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성의 모든 주민들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성의 왕도 ‘여호수아’의 칼에 찔려 죽고, 죽은 후에도 그의 시체는 해가 질 때까지 나무에 매달려 수치를 당함으로써 두 번 죽은 꼴이 되었습니다. 다시 그 시체는 성문 어귀에 내던져지고, 그 위에 큰 돌 무더기가 쌓여졌습니다.
4. 승리 이후(8:24-29)
이번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두 개의 돌무더기를 기념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아간의 돌무더기”이며 다른 하나는 “아이 성의 돌무더기”입니다. 전자가 이스라엘의 것이라면, 후자는 이방인의 것입니다. 두 경우 다 자연사(自然死) 한 사람의 무덤이 아니라 때 아닌 죽음을 맞이했던 자들의 것입니다. 저주로 내버려진 자들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두 얼굴이 있다고 했습니다. 축복과 저주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그 백성 즉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 이방인과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습니다. 오직 ‘헤렘’외는 다른 운명이 없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이 성의 돌무더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아이 성의 돌무더기”가 주는 교훈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아간의 돌무더기”와 함께 이스라엘도 ‘헤렘’이 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믿음이 ‘여리고’를 허물었다면, 불순종은 언약의 백성을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그리고 회복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신학적 윤회(輪回)입니다. 축복은 순종을 요구하고, 불순종은 저주를 자초하게 되나, 다시 회개의 고백은 용서와 구원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아이’의 패배는 승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 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습니까? 승리가 아니라 패배의 연속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예배와 간구를 드립시다. 회개와 순종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 모두 탁월한 삶을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를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 5:15)
연습과 토의
1. <여리고 성 이야기>와 <아이 성 이야기>의 공통점과 유사성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토의해 봅시다.
2. 두 이야기는 각기 기원론에 관한 진술로 끝나고 있습니다. 각 이야기의 교훈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내가 결단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을 헌신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헌신과 관련하여 다음 한 주를 위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11
제 11과: 언약의 재확인
언약의 재확인
(8:30-35)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8:34-35)
서구의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가리켜 양파껍질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는 땅의 깊이에 따라 다른 문화와 역사의 흔적들이 출토되기 때문에 붙인 이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사시대 이래 현재까지 수많은 민족과 왕들이 번갈아 가며 이 지역을 차지해가면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꽃피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금의 ‘욥바’ 항구에는 중세에 십자군이 세운 거대한 지하 사원과 동굴이 있는데, 이는 원래는 지상 건축물이었습니다만, 십자군을 내쫓고 이슬람 제국이 들어섰을 때 이들은 이 지역을 매몰시키고 그 위에 새로운 이슬람 사원을 세운 바 있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벽도 역시 그렇습니다. 성벽의 높이에 따라 돌의 색갈이 다른 것은 성벽을 개축하고 증축했던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돌 하나, 깨진 토기, 그릇 파편 하나까지 아주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따라서 이 땅의 각 지명도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됩니다. 본문 속에서 ‘여호수아’ 공동체가 서있는 ‘세겜’이라 불리는 지역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 이름이 <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2장으로서, ‘아브라함’이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아 그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제사였습니다. 이후 그의 손자 ‘야곱’이 이곳에서 잠시 살았고,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던 곳, 즉 “야곱의 우물”이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장소에 지금 “여호수아 교회”가 와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연속적인 것으로 볼 때,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다말고 갑자기 ‘여리고’와 ‘아이’ 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한 셈이 됩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 파악을 위해서 첨부한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5).
아무리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임에 분명합니다. 무슨 전쟁을 이렇게 한가하게 치르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이곳이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에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본문의 신학적 주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세겜’에 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언약의 두 얼굴이 있습니다. 이 땅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는 저주의 산 ‘에발’이 있고, 남으로는 축복의 산 ‘그리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언약의 두 얼굴을 보기 위해서 두 산으로 둘러 싸여 평평한 원형 경기장 같은 ‘세겜’의 구릉에 와있는 것입니다. 국가적 대장정을 앞두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언약을 재확인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새롭게 재 헌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늘 혼돈과 좌절 가운데서 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즉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계시, 즉 그분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지금 출발점에 다시 와 있는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앞선 내용들과는 여러 면에서 연결이 아주 부자연스럽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지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문학적으로도 부자연스럽기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앞선 본문들처럼 그 양식에 있어 이야기(narrative)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신명기>의 규례들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바꾸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당연히 ‘여호수아’이며, 지도자로서 ‘모세’의 계명을 남김없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가 취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은 네 개의 동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세’의 규례에 따라, 우선 제단을 건설하여, 희생 제사를 드렸으며, 돌판 위에 ‘모세’의 율법을 기록하여, 백성들을 모아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낭독해 주었습니다.
자료와 편집. 본문의 배경과 출처는 어디일까?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는가하면, 장소도 ‘여리고’나 ‘아이’에서 ‘세겜’으로 옮겨왔고, 서술의 내용도 전쟁이 아닌 예배나 제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우선 본문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명기> 기자의 최종 손길이 느껴집니다만, 자료의 출처는 <세겜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전승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여호수아> 제 24장을 연구한 이후라야 할 것입니다: 버틀러, 90쪽(참고 도서 1).
그러나 본문의 배경과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자료의 출처 즉 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데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본문은 그동안의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다말고 예배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 그렇고, 본문의 배경 또한 ‘여리고’나 ‘아이’가 아니라 여태 한 번도 이야기 중에 등장한 적이 없는 ‘세겜’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겜은 아직 이스라엘이 차지하지도 않은 지역입니다. 전쟁을 하다말고 갑자기 이곳으로 옮겨와 제단을 건설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본문은 분명 이곳에 있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 차라리 이 책의 마지막 부분(24장)에 위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이고도 연대기적 모순만 무시한다면 설명이 전혀 불가능 한 것만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문학적인 기능을 고려해 본다면, 본문은 1장과 함께 2-7장 사이의 내용을 수미상관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1) 그 땅(the Land); (2) 율법(the Law); (3) 지도자(the Leader). 이들은 <여호수아서>의 주제이자, 책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들입니다. 화자는 책의 서두에서(1장) 이들 모두를 등장시켜 강조한 바 있습니다(1:1, 3, 4, 6, 8, 16, 17).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에서(2-7장) 이 세 요소들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땅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언약의 축복을 통해서입니다. 언약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이 핵심 요소입니다. 지도자의 역할은 이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그 자신은 물론 공동체 모두를 상대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는 지도자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 그 땅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이 그 땅에 이르게 하는 문이라면, ‘여호수아’는 그 문의 열쇠가 되는 셈입니다.
남아 있는 질문은,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불충실해 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다짐을 새롭게 받아두고 싶은 모양입니다. 대답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가장 적절한 장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던 ‘세겜’이 되어야 할 것이며, 새 출발의 근거 내지는 원동력은 말할 것도 없이 ‘모세’의 율법 즉 <신명기>입니다. 그리고 새 출발의 다짐은 <신명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일련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화자는 이야기의 흐름이나 기타 논리적인 모순에 개의치 않고, 이전의 전승을 이곳에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단을 쌓아라(8:30-31)
새로운 헌신 즉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 걸음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30절).
‘에발’ 산에 제단을 쌓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왜 하필 ‘에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단을 쌓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만, 그 장소가 ‘에발’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제단을 세운 장소가 ‘에발’이라는 사실은 이곳과 <신명기>에서 세 번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신 11:29; 27:4, 13). 그러나 <신명기>에 의하면 ‘에발’은 축복의 산이 아니라 저주의 산입니다(신 11: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 11:29).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당연히 그 장소는 ‘에발’이 아니라 ‘그리심’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실제 <신명기> 27:4에 대한 <사마리아 사본>에서는 ‘에발’을 ‘그리심’으로 바꾸어 놓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보듯이,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을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할 수 있는 거룩한 예배 장소로 여기고 있었습니다(요 4장). 예배 장소를 놓고 정통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들 사이에 존재했을 입장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 때문에 이처럼 서로 다른 본문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본문이 어떠했든, 화자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문제는 예배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본질 즉 <신명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바에 따라 드리는 합법적인 예배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30-31절).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은 ‘다윗’ 왕 시대 이후부터였으며, 그 이전에는 예배 장소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음이 <신명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위 본문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바도 ‘모세’의 율법 그 자체입니다. ‘에발’에 제단을 세우게 된 것은 철저하게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행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강조는 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모세’의 율법을 중요시했는가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 그것입니다: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31절후). 이러한 표현이 의미심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길갈’에서 그들이 돌로 행한 할례식과 관련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는 당시의 시류(時流)나, 자신의 편의나 지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 제단을 세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번제와 화목제에 대한 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31절후). 번제란 짐승의 껍질을 벗겨 각을 떠서 통 채로 태우는 제사를 말합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작업일 뿐만 아니라, 피 냄새가 진동하며 살이 타들어가는 아주 끔찍한 제사입니다. 시대나 상황에 따라 예배의 내용도 바뀔 법도 한데, 이 역시 “모세의 규례”를 그대로 따랐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2. 율법을 기록하라(8:32-33)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대로 함이라(32-33절).
제단을 쌓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돌들이 이제는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돌 판으로 그 기능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기록한 돌 판과 제사를 위하여 제단으로 사용한 돌 판이 같은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에 관해서는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다른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논리적일 것입니다.
이 구절 역시 ‘모세’의 율법 즉 <신명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을 봅니다. 스스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 찌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찌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찌니라(신 27:1-8).
돌과 관련한 ‘모세’의 명령은 “큰 돌들을 세워 율법을 기록하고”(2-4절), “제사를 위하여 제단을 세우라”는 것입니다(5-7절). “큰 돌들을 세워 그 위에 율법을 기록하라”는 명령이 말미에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제단이나 제사가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순종하는 ‘여호수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사하고 있는 ‘여호수아’는 단순한 종요 지도자를 넘어, <신명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왕에 버금가는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 서를 등사하여”(신 17:18). 그는 이 백성의 표본이 될 뿐만 아니라, 이 백성의 선생이기도 합니다.
헌신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특권이자 의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신명기>는 요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이 예배를 지켜보는 자들 가운데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이 역시 그들의 예배가 <신명기>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언급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비록 약속의 백성은 아니지만, <신명기>는 여러 곳에서 이들에 대하여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신 1:16; 5:14; 14:21, 29; 16:11, 14; 24:17, 19-21; 26:12-13; 27:19.
따라서 이방인들이 이 자리에 함께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각별한 호의와 배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방인들에 대하여 각별한 배려와 호의를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경우에는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의존해서 살아가야하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주고 계십니다: (예)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신 28:43-44).
이스라엘이 축복의 산 ‘그리심’과 저주의 산 ‘에발’에 나누어 서긴 했지만, 이들 모두에게 처음 들려준 율법의 말씀은 축복이었습니다. 이 역시 <신명기>의 제사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12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신 27:12-13)
그러나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신명기>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축복에 대한 강조가 우선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범죄하여 언약의 저주 하에 있기는 해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약속의 백성이며, 저주의 말씀보다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먼저 듣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33-34절). 화자가 하고 싶은 말은 어느 누구든 범죄한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재 헌신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용서와 약속의 축복을 다시 얻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3. 율법을 낭독하라(8:34)
그리고 세 번째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율법을 낭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34절).
이 역시 <신명기>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신 27장). 다만 모든 축복의 말씀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저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처음으로 들었던 때는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였습니다(출 19-20). 이 때 백성들은 순종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헌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하나님은 40년이 지난 후 ‘요단’ 동편 ‘모압’ 땅에서 다시 한 번 ‘모세’를 통해서 같은 율법을 낭독하게 합니다. 이 때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함께 상기시켜 주셨습니다(신 11:26-28). 이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유서 깊은 ‘세겜’ 땅에서 언약을 재확인하고 계십니다. 두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의 상대적인 권위에 대한 화자의 입장은 분명해 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들려주었다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을 간접적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율법을 낭독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산 사이의 평평한 구릉지대는 전체적으로 마치 원형경기장의 역할을 하여, 모인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일찍이 가르쳐 준 바에 따라 (신 27:11-13), 북편 ‘에발’ 산에는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납달리’의 다섯 지파가, 남쪽의 ‘그리심’ 산에는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에브라임’과 ‘므낫세’), ‘베냐민’의 일곱 지파가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여호수아’가 ‘모세’의 율법을 낭독할 때마다 “아멘!”하며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화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온 회중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이들의 언약을 마치 증인처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4. 결론(8:35)
마지막으로 화자는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을 강조함으로써 본문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35절).
다시 한 번 화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여호수아’야말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강조는 또 있습니다. 공동체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이상적인 공동체는 이상적인 지도자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본문 중에 “모두”라는 단어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도자가 단순히 혼자서 낭독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회원들이 다 듣는 가운데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배우고 따라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교훈과 적용
출애굽을 기억하라
심신이 피곤할 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태기에 빠진 연인에게 가장 중요한 충고가 있다면 “첫 사랑을 회복하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을 기억하라”는 충고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충고는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빠져나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던 이스라엘 제 1세대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의 시계를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한참을 돌려 이스라엘의 “포로기”로 옮겨 봅시다. 국토와 주권을 빼앗긴 채 ‘바벨론’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혼돈과 무질서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옛날 조상들이 살던 고토(故土), 그러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그 땅을 바라보면서 심한 좌절과 실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열방 가운데서 가장 왜소하고 별 볼일 없는 무리가 되어 이방인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러한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특별히 잘못 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편하고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현실에 안주해서 말입니다. 잃어버린 그 땅을 다시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치스러운 꿈일 뿐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나음이 무엇이며 특권이 무엇이란 말인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이들의 역사적 사명은 무엇이며, 누가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이들의 소명은 고토회복(古土回復) 즉 두 번째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과 더불어,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땅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두 번째 “출애굽”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소명을 알려주어야 합니까? 혼돈과 어둠 가운데서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여, 길과 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야한다고 소리 높여주어야 합니다. 즉 누군가는 ‘여호수아’ 되기를 자임(自任)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과연 그 시대의 ‘여호수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그렇습니다. 그 일을 맡고 싶어 안달이 나는 사람, 즉 스스로 지도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여호수아’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말인즉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여호수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탄식하고, 염려하며, 간구하고, 능력을 공급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제단을 쌓아라
‘여호수아’가 해야 할 첫 번째 사역은 무엇일까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행동 즉 “수신”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기본은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 즉 <신명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라”, 즉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아라”고 말합니다(30-31절).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것이라면, 예배는 이 관계에 대한 외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올바른 관계에 대한 증표가 되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 시대의 ‘여호수아’가 되는 것과 관련해서 예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 구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나(30-31절),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나 동일한 영적예배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린다는 것의 의미를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분리”와 “변화”. 이 두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결국 “거룩”입니다. 물론 이 변화는 자신을 주위나 세상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철저한 자기분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들 “사랑에 빠지는 것”을 고상하고 숭고한 행위로 칭송합니다. 희생적 사랑도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한국의 어머니 상도 자식에 대한 희생적 사랑, 즉 자신의 정체성을 자식에게 투영시켜 자신은 없어지는 그런 사랑입니다. 연인 간이나 부부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상대를 너무 열렬하게 사랑하여 자신의 존재감마저 상실해 버리는 그런 사랑이 숭고한 것입니까? ‘스콧 펙’(S. Peck) 박사님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하되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분리가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가 온전히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신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것을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 본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나름대로의 표지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6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9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6, 9)
아니 반대로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소위 신령한 표지판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자신이 현재 행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듯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성(聖) ‘어거스틴’이야말로 <전도서>의 가르침을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대 헌장과도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주에서 자유와 책임을 지닌 유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영적 예배 즉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행위가 아닐까요?
율법을 낭독하라
그러나 우리가 제단을 세우는 일에만 온전히 헌신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수신(修身)의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타 종교에서처럼 수도원이나, 기도원이나, 교회 안에 틀어박혀 도(道)를 닦는 자들이 아닙니다.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윤리∙도덕적 삶의 규범을 보여주는 자들도 아닙니다. 특히 종교적 관용이나 다원론적 세계관의 수용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명예의 고립이나 관용의 침묵을 지키는 일은 오히려 훨씬 쉽고도 나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적어도 쓸데없는 논쟁이나 갈등에 휘말려 들 소지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변으로부터 인격적인 종교인으로 칭송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여호수아’는 제단을 쌓는 일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새벽 제단을 쌓는 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고 한 날 예배만 드리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기록”하고, “낭독”했습니다(32-34절). 다시 말하자면 그는 교회로 하여금 성경공부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성전”(聖殿)이 아닌 “학교”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에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이들이 보고 배우고 따라야 할 그 모든 행동 지침들은 결국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자신의 행실을 능히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는 자신의 과오를 먼저 시인하는 자를 패배자로 부릅니다. 큰 소리를 치고 떼를 써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과연 무엇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입니다: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그는 말합니다. 그 어떠한 철학도, 사상도, 가르침도, 그리고 과학기술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 많은 인간이(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보다 더 우선되는 일이 과연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그것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그것을 듣고 행하는 사람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느니라”(히 4:12). 우리의 삶은 실은 매일처럼 죽는 일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살았다 하나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어떻게 소멸과 죽음이라는 자연법칙을 거역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자는 새로운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은 육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병마저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진위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차대전 당시 독일군 내에서 신생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약 6개월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먹을 것만을 주입한 결과 이들 신생아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다 죽었다고 합니다. 역시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제대로 된 의사전달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머니 품안에서 어머니와의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어린아이는 생명의 전수를 받는 모양입니다. 이처럼 대화를 통해서 생명이 전달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비과학적인 주장 같지만 생명현상은 정말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백부장과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말을 통해서 생명이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 멀리서 단순히 말을 통해서 치료하고 있음을 봅니다. 외국생활에서 오는 가장 큰 불편과 고통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경우 역시 생명의 전수가 제대로 안 되는데서 오는 일종의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창조적 능력을 공급받아 삶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역역을 확대하려 합니다. 천지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면, 그 말씀 속에는 오묘하고도 신비한 창조적 지혜가 담겨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지혜와 기질이 유전자 속에 들어 있듯이 말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보드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적 능력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필자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 모든 동기는 개인적인 성경 공부와 독서를 통해서 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도 성경을 통해서 였습니다. ‘나자로’는 어떻습니까?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한낱 유기물질로 변해가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자로야, 일어나라!”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흩어져 제 멋대로 분해되고 와해되어가던 ‘나자로’를 이루던 원자와 분자들이 다시 모여, 반응하여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이 일은 ‘나자로’의 의지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창조적 능력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말씀의 창조적 능력은 육체적 현상에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정신인격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역에서 일하려고 안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은 길에 들어가려 합니다. 자신의 은사와 취미와 재능이 무엇인지 제대로 연구검토해 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영역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합니다. 좁은 오솔길 같아서 잘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귀 기울임은 창조적 삶을 위한 훌륭한 통찰력과 용기를 갖게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시간과 재능과 그리고 재산을 투자하고 두드려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린이 교회 학교가 아닌 성인 교회 학교가 있습니까? 그리고 모두가 학교에 등록하여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따르고 있습니까? 모두들 가르치거나 아니면 배우고 있습니까? 배우는 자들은 언젠가는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소명을 불태우고 있습니까?
토의와 연습
1. 본문은 그 장르에 있어 이야기라기보다는 <신명기> 율법에 대한 서술 내지는 해설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 문맥과 비교했을 때 지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나, 이야기의 문학적인 일관성에 있어서나, 현재의 문맥에 있기에는 어색한 곳이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논의해 봅시다.
2. 본문이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면, 그동안의 내용에 대한 신학적인 요약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3. 나의 삶 중에서 말씀의 창조적 능력이 드러났던 적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함께 나누어봅시다.
여호수아(10): 언약의 타협
12
제 12과: 언약의 타협
언약의 타협
(9:1-27)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9:14-15).
<기브온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라합 이야기>를 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다음 장(10장)에서 계속될 <정복 이야기>를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항상 이방인들과 함께 섞여 살아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자 현실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그랬고(출 12:38),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랬으며(삿 1:21-36; 수 13:1-7, 13), ‘바벨론’ 포로시대에도 역시 그랬습니다(스 9:1-10).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합’과 같은 참된 신앙고백과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자만이 이스라엘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기브온’처럼 거짓이나 사기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의 회원을 구분함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누가 회원이며, 누가 아닌지를 구별하여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컨대, 오늘날 “집사”라는 명칭은 마치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인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서리집사”와 “장립집사” 등등 온갖 이상한 호칭을 갖다 붙여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서리”는 무엇이며 “장립”은 무엇입니까? <신약>에는 이런 구분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사의 자격에 관해서 정확하고도 엄격한 잣대와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딤전 3:8-13).
교회 안에서 누가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인지, 누가 아닌지 그 구분이 애매모호하게 되면, 교회 교육이나, 성도 간의 교제나, 그리고 선교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분명치 않게 됩니다. 특히 상호간에 끝까지 책임지는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이런 구분이 애매모호하게 되면, 사랑의 책임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은 아주 현실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모든 이웃이나 인류에게 다가가 그 믿음의 성장을 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득이 선별적이며 선택적인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교회의 회원이 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회중 앞에서 믿음의 고백과 고백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늘 ‘기브온’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회원이 되는 데에는 두 가지 선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본인의 선택이 그것입니다.
교회 회원과 비회원을 구별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는 말은 비회원을 차별하거나 배척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같은 질병의 환자라도 그 증세의 경중(輕重)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적절한 진단과 올바른 처방이 의사나 약사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역시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결코 독단적이거나 즉흥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의 결정은 반드시 확고부동한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 권위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결정은 반드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소위 초자연적인 은사나 체험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성경>에 근거한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늘 거하는 자라야 합니다(1:8). 이와 동시에 지도자의 권위는 회중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회중의 갈채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그야말로 낙하산 인사에 불과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였거나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리더십은 초자연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이기도 합니다. 회중은 이런 자격을 갖춘 지도자를 도와주고, 격려하며, 또한 그에게 순종하기를 즐거워 할 것입니다.
본문의 독서 포인트는 바로 이 두 가지 핵심 주제, 즉 “이스라엘”과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파악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무대는 ‘세겜’에서 다시 ‘기브온’으로 옮겨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본문의 첫 두 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 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2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1-2절)
이 두 절로 미루어 9장은 분명히 새로운 하나의 이야기 단위가 될 것이며, 이야기의 내용은 다시 정복 이야기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야기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전쟁 이야기는 10장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있습니다. 9장은 별도의 내용으로서 의도하는바 목적도 달라 보입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9:27). 마치 ‘기브온’ 족속의 현실에 대하여 원인론적인 설명을 제공해주는데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9장의 첫 두절은 9장만의 서론으로 보기보다는 더 큰 이야기 단위인 9-10장 전체의 서론으로 봄이 마땅할 것입니다.
9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기브온’ 주민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군사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인근 지역 족속들이 ‘반(反) 이스라엘’ 동맹을 결성하여 전쟁 준비를 하는 동안에 ‘기브온’만 유독 이스라엘에 투항하여 그들의 편에 서서 다른 민족들에 대항하여 싸워주는 조건으로, 이스라엘은 ‘기브온’을 보호해 준다는 조약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주종계약(從主契約)으로서, 당시 근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계약의 기본 골격은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대신에 약자는 강자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스라엘이 ‘헤렘’과 어떠한 형태로든 언약을 맺는 것이 허용되는 일일까? 그것도 상대방에 속아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는 일이 말입니다! 9장은 이 문제를 두 가지 각도에서 조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기브온’의 편에서, 또 한 번은 이스라엘의 편에서 입니다. 바로 이 두 관점이 9장을 이루는 구조적 원리가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본문을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전반부(9:1-15)
(2) 후반부(9:16-27)
자료와 편집. 두 이야기는 마치 시적 대조병행처럼 각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기브온’과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가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두 개의 전승을 병렬시킨 후대의 편집의 손길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고로 두 이야기에서 무엇이 어떻게 대조되고 있는지 파악해 봅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기브온’의 뱀 같은 기지와 지혜가 돋보이고 있으며, 화자는 이들의 속임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처음부터 긴장과 서스펜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4-6절상). 화자의 진술은 곧바로 등장인물 간의 대화로 연결되면서 긴장은 절정을 향해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결국 이스라엘이 ‘기브온’에 속아 군사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마는 장면에 이르러 긴장은 맥없이 풀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를 물어보지도 않았기에 ‘기브온’에 속고 맙니다(14절). 언약은 체결되었고 ‘기브온’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15절). 화자는 이 단락에서 ‘기브온’의 행동을 비난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을 더 비난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상황이 역전되고 있습니다. ‘기브온’의 사기행각이 드러나고, 이스라엘은 이를 빌미로 계약을 무효 선언하는 동시에 ‘기브온’을 저주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시켜버립니다. 화자는 이 결정이 당연하고 정당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가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했다면,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 즉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 즉 언제 어디서 이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사무엘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삼하 21:1-4).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삼하 21:1-4).
‘사울’과 ‘다윗’ 왕조 시대에 이르러 ‘기브온’의 후예들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나 특권을 누릴 정도로 세력이 증대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하여 국가적으로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지 ‘사울’ 왕은 이들을 멸족시키려고도 했습니다만, 오히려 이들로부터 그의 가문에 대한 보복만 초래했을 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서>에서 화자는 ‘다윗’ 시대에 3년에 걸쳐 기근이 들게 된 것도 ‘사울’ 왕이 ‘기브온’ 거민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에 대한 복수가 ‘다윗’ 시대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기브온’ 지역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기 전까지 중요한 성소의 기능을 하기도 했습니다(왕상 3:4-5). ‘다윗’ 왕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세력이나 지위는 여전했을 것이며, 따라서 ‘기브온’의 사기 행각을 정당화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첫 번째 이야기는 필경 현재 이스라엘 왕국 내에서 누리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져 졌을 개연성이 큽니다. 이야기의 실질적인 기원은 이보다 더 오래 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첫 번째 이야기의 출처는 가칭 <기브온 전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상황도 달라지는 법, ‘솔로몬’ 시대에 이르면 ‘기브온’의 처지는 한낱 노예의 신분으로 돌변하고 맙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왕국 내에 사는 모든 이방인들을 노예로 삼아버렸기 때문입니다(왕상 9:20-21; 스 2:43-58; 느 7:46-60). 이렇게 달라진 시대적 상황이 두 번째 이야기의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통치이념이 필요하듯이, 이스라엘은 기존의 <기브온 전승>을 수정 및 보완할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가 본문 후반 이야기의 내용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참고. 16-21절). 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 삼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린에 있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라 함을 들으니라(16절). 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하여 제 삼일에 그들의 여러 성읍에 이르렀으니 그 성읍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17절). 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18절),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19절).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20절),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더라(21절).
즉 ‘기브온’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는 역사적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반전을 예고하는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면서(16절상) 곧바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16절하).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근 마을을 둘러보는 과정을 통해서 긴장이 고조되면서(17-18절), 이후 이어지는 대화에서 절정을 맞고 있습니다. 회중이 족장들을 원망하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라 파기할 수도 없다는 점이 딜레마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브온과 맺은 언약은 지키되, 차제에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영구히 각인시켜놓는 것이야.” 새로운 전승의 결론은 이 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21절).
그렇다면 이야기에서 남아있는 부분(22-27절)의 출처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일견 두 번째 이야기의 결말을 다시 반복하면서 핵심 주제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두 가지 새로운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신명기 율법
(2)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22절).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23절).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 같이 하였나이다(24절).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25절).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26절).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27절).
동일한 내용을 다루면서도 앞선 이야기의 결론에 대한 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기브온’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노예로 살게 될 것인데, 이는 다름 아닌 <신명기>의 법에 근거한 저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앞의 두 이야기와는 또 다른 배경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부분을 기록한 자가 9장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최종 편집했을 것이며, 그는 다름 아닌 <신명기> 기자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C. T. Butler, 100쪽(참고도서 1).
그렇다면 <신명기> 화자는 두 개의 전승을 하나로 결합시켜서 새로운 하나의 주제를 도출해 내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인바, <여호수아서>의 신학적인 세 축(軸) 중의 하나인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조약체결(9:1-15)
첫 번째 이야기의 첫 두 절은 9-10장 전체의 배경에 해당됩니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상대가 더 이상 ‘여리고’나 ‘아이 성’처럼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모든 국가들이 참여하는 연합전선이 구축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 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2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1-2절).
이곳에서 화자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나아오는 왕들이 모두 일심으로 단합되어있다는 점과, 이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에게도 싸움을 걸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지도자 ‘여호수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반(反) 이스라엘 연합 전선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세 등등하게 밀려오는 이스라엘의 위협으로부터 피할 방도를 궁리하는 족속도 있었습니다. ‘기브온’ 지역 주민들이 그들입니다. ‘기브온’은 오늘날 ‘엘-집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9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벤야민’ 족속에 속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수18:25)
이들은 이스라엘과 싸우는 대신에 강화조약을 맺어 살아남기 위하여 교활하게도 책략과 속임수를 사용했다고 화자는 전합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3-4절상)
이들의 행동은 분명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가리키는 낱말 ‘오르마’(ה)는 구약에서 이중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슬기로움이나 지혜로움등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참고, 잠 15:5; 19:25), 부정적으로는 교활함이나 간교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욥 5:13; 시 83:4).
이들은 과연 교활하게 행동한 것인가, 아니면 현명하게 행동한 것인가? ‘기브온’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취한 선택은 아주 지혜로운 것이며 칭찬 받을 만한 것입니다만, 이스라엘의 편에서 보자면 아주 간교한 거짓 술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기브온’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무지하고 완고한 주변 족속들과는 달리 아주 영리하고 똑똑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4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6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4-6절).
이스라엘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혜를 능가하고 있는지 정리해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첫째,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아주 멀리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며, 이에 놀라서 먼 거리도 마다않고 달려왔다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많은 양식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12절)
아니나 다를까 이를 보자말자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압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14절상).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들이 달려온 것이 군사적인 보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6절하). 이런 해석에 대해서 해밀턴은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즉 본문에서 계약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대등하지 않은 자들, 곧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맺는 계약으로서 만약에 ‘기브온’ 족속에게 이것이 허용된다면 계약 조건을 제시할 자는 당연히 이스라엘이지 ‘기브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데, 포위당한 ‘길르앗 야베스’ 거민은 ‘나하스’와 ‘암몬’ 족속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자. 그리하면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다”라고 말합니다(삼상 11:1). ‘기브온’은 ‘여호수아’에게 자기들의 이스라엘의 종임을 반복해서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의 열등한 지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밀턴, 60쪽.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이스라엘도 동맹군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도와주겠다는 자를 마다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셋째, 이스라엘을 향해서 최대의 경의를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 이니이다(8절상)
치켜 세워주는데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넷째, 최근에 ‘여리고’와 ‘아이’ 성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3절), 정작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먼 과거의 출애굽 사건이나 요단강 도강 이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만 언급함으로써 신뢰를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9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또 그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9-10절)
다섯째, 자신들을 왕이 보낸 정식 외교사절의 흉내를 냄으로써, 조약의 당사자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4절상, 11절). 이스라엘이 빠져나갈 길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11절)
이처럼 치밀하고도 주도면밀한 공작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한 일이란 고작해야 신분 확인을 위해서 물었던 질문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8절후). 전쟁 시 상대방으로부터 관동성명과 암호를 대라는 요구를 받을 때는 정확하게 답변해주어야지 어물어물하다가는 사살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기브온’이 보이고 있는 태도는 애매모호하고 두리 뭉실합니다: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9절상). 정확하게 어디서 왔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제대로 근무수칙을 아는 근무병이라면 이런 자는 사살해 버립니다.
이처럼 긴장이 한껏 고조 된 가운데 남은 질문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과연 ‘기브온’의 계책이 성공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이 이를 알아차릴 것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긴장의 절정에서 맥없이 끝나버립니다:
14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14-15절).
영적 싸움은 이스라엘의 참패로 끝나고 맙니다. ‘기브온’이 한 수 위였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기브온’의 잘못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아니라 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화자는 ‘여호수아’가 화친을 선포하고 조약을 체결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난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그가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약 당사자에게는 한 마디 상의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것은 ‘기브온’의 설득력 있는 간증과 증거물들이었습니다. 그는 변변한 대답도 들어보지도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 버렸습니다. 철저한 연구조사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을 뒤져서 연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 즉 중간 지도자들은 다만 ‘여호수아’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 맹세를 한 죄밖에 없습니다.
2. 조약 폐기(9:16-27)
적어도 ‘기브온’의 입장에서 볼 때, 계약 당사자는 이스라엘이라기보다는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일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에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궁극적인 책임자로 비난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오면서 다소 완화되고 균형을 잡으려는 흔적이 보입니다. 즉 비난을 받아야 할 ‘여호수아’가 오히려 ‘기브온’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스라엘의 편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5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15절)
이 구절은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두 번째 이야기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모든 실패의 책임을 회중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와 중간 지도자가 져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조약체결을 주도했고, 목자들은 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16-21절)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16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 삼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린에 있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라 함을 들으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하여 제 삼일에 그들의 여러 성읍에 이르렀으니 그 성읍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 18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19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20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21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더라(16-21절)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제기하고 있는 리더십에 관한 문제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보여준 입장과는 정반대 편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회중들이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평을 하고 있는 점은 광야에서 그들의 선조가 보였던 것과 동일하기는 하나, 이번에는 잘못된 쪽은 회중이 아니라, 지도자들입니다. 이유 있는 불평이자 항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기브온’의 편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16-21절의 본문 역시 <기브온 전승>에 속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점 회중들의 불평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결코 파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파기하면 오히려 자신들이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것인데, 여전히 변명과 핑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과감한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합니다. 이 계책은 ‘기브온’의 그것에 맞먹을 정도로 교활하고 음흉한 것입니다. 즉 ‘기브온’을 다 죽이는 대신에 영원히 노예로 삼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제한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은 회중들에게 먹혀든 것 같습니다(18-20절).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리더십에 관하여 <오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세’의 리더십과는 다소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지도자는 회중들의 요구와 불만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지도자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근거는 당연히 <모세>의 법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화자는 리더십에 관하여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 주제에 대하여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22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23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24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 같이 하였나이다. 25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26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27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22-27절)
이곳에서 주제가 급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잘못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을 하는 쪽은 ‘여호수아’이고 심판을 당하는 쪽은 ‘기브온’입니다. 이들이 ‘여호수아’ 앞에 끌려나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맺은 조약이므로 마땅히 폐기처분되어야 한다는 선고가 들리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말입니다(23절상). 23절 후반부의 문제점은 당시 “하나님의 집”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항의성 변명을 ‘기브온’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기는 합니다만, 이조차도 화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기브온’이 “두려워 떨었다”고 하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취한 행동은 두려움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 ‘라합’의 행동과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라합’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속임수를 써서 잠시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쾌합니다. 다른 목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구차한 변병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립니다(26절). 화자는 ‘여호수아’의 결정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하면서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화자가 속해 있던 당대에 ‘기브온’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근거로 삼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타협(9:1-15)
수 년 전 프랑스에서 한 결석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는 나이 87세로 중병이 들어 피고석에 앉을 수도 없는 처지라 재판은 결석으로 열렸습니다. 그의 죄명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나치 점령군에게 넘겨주는데 협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재판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프랑스 시민들조차 지극히 당연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재판을 미루어 온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는 이 사람들의 철저함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철저하기는 일본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나라입니다. 보잉사가 제작한 일본 항공사 소속 비행기가 추락 사고를 일으켰을 때, 일본 항공사와 보잉사 간에 사고의 책임을 서로 상대편에게 떠넘기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이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본 항공사는 국내의 전 항공 기술진을 동원하여 약 4 년간에 걸친 조사와 연구 끝에, 사고의 원인이 비행기의 결함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보잉사의 책임으로 끝이 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국익에는 철저함을 보이는 이들도, 2차 대전 당시 인접 국가들에 대하여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는 요지부동 입을 다물고 있어 우리는 물론 당시 피해 당사국들의 분노와 불신을 사고 있습니다. 그들의 非行은 남경대학살, 인체실험, 종군위안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최근 수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뇌물수수나 부정부패와 관련해서 기소를 당했던 피의자의 약 90%가 형 집행 정지 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특히 선거사범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래서야 과거가 청산될 리가 없습니다. 비리는 계속되고, 적당주의는 민족의 문화와 체질로 자리 잡아 갑니다. 일예로,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 ‘공동기기실험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건물 준공 검사를 받은 지 한 달도 못되어 벽에 금이 가고, 그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는 또 있습니다. 안양에 있는 ‘박달교’가 개통 첫날부터 橋脚이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는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사고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당시에 시공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고속철의 70%가 부실시공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기술 부족인가 아니면 인심이 후한 것인가? 원칙과 법규를 무시한 타협의 결과입니다. 자연법칙이든 영적법칙이든 그것을 어기게 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우주만물은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 1:1-3). 우리는 이 원리를 ‘이치’ 또는 ‘로고스’로 부릅니다. 당연히 ‘로고스’의 법칙에 위배되는 생각이나 행동은 모두 비이성적인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본주의(humanism)는 이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이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아주 매혹적으로 들립니다. 인간미가 넘쳐나는 ‘박애정신’(humanitarianism)으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서>는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인본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이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자 모든 가치판단의 주체라는 무신론적인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맺은 언약은 이러한 인본주의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브온’과 이스라엘은 각기 나름대로의 계책에 따라 자신들이 보기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성, 즉 언약의 율법을 포기합니다. 신본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지요. ‘여호수아’보다 후대에 사는 특권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몰랐을까?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을까? 이스라엘의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박애정신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멀리서 달려와 우리 편이 되겠다고 하는데 구태여 적을 만들어 다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사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이러한 태도야 말로 전형적인 인본주의의 전형이 아닐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가나안’에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지난번의 실패와 성공을 거울삼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동기는 없었을까요? 지도자의 탐욕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를 암시하는 듯한 화자의 진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14절상). 이 문장의 동사 “취하다”는 “게걸스럽게 집어삼켜버리다”라는 뜻이 담긴 일종의 언어의 유희입니다. 우리는 식사를 나누는 행위가 언약체결의 한 방법임을 압니다. 즉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가지고 온 군수물자를 탐내 그것을 “먹어치움”으로써 언약을 “먹어치워버렸다”(언약을 맺었다)는 화자의 조롱 섞인 비난입니다. 이 역시 인본주의의 발로입니다.
우리의 체험 역시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 뜻을 행하고 싶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내 뜻과는 다른 계시가 내려올까 봐 그럴까요? 그래서 <성경>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대신 <성경>에는 없지만 혹시 다른 초자연적인 현상(꿈, 환상, 등등)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를 알아내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와 결혼할까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학교로 가야 할까요?” 혹시 이러한 기도로 날이 새고, 달이 간다면 기도를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성경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는 내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 속에 다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없는 곳에 무원칙과, 비원칙과, 즉흥적인 결단과, 세속적인 권위주의가 판을 칩니다. 특히 이런 일은 소위 교회의 신령한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자들일수록 교인들과 더불어 <성경> 토론을 통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기보다는 일방적인 선포로 일을 수습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사이비일 뿐입니다. 사이비는 당연히 회중들의 질타와 원성과 불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하는데도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결정으로 인해서 사후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될 때, 그 책임은 회중 전체가 아니라 그 신령한 지도자가 져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중은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호수아’ 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2. 수정(9:16-27)
지도자로서 회중의 불만과 원성을 받는다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모든 실패의 책임을 회중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와 중간 지도자가 져야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조약체결을 주도했고, 목자들은 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중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항의를 하는 것에 대해서 하등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이처럼 회중들이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평을 하고 있는 점은 광야에서 그들의 선조가 보였던 것과 동일하기는 하나, 이번에는 잘못된 쪽은 회중이 아니라, 지도자들입니다. 이유 있는 불평이자 항거입니다.
이에 대해 ‘여호수아’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가 보여준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결코 파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되 원칙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과감한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합니다. ‘기브온’을 다 죽이는 대신에 영원히 노예로 삼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제한하자는 제안이 그것입니다. ‘기브온’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되갚아주는 절묘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기브온’의 제안이 교활하고 음흉한 것이었다면, ‘여호수아’의 제안 역시 그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그의 제안은 회중들에게 먹혀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리더십에 관하여 오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세의 리더십과는 다소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지도자는 회중들의 요구와 불만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실수로든 또는 지나친 확신으로든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결과를 수습하는 모습 또한 보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지극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수습하는 과정에 내려지는 새로운 결정이나 행동에 대해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경우라면 그의 선임자 ‘모세’의 규례를 도입하면 될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는 우선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앞서 행함으로써 회중의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가장 우선 되는 권위는 바로 <성경>으로부터 와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 때 회중의 인정과 승인이 따라옵니다. 지도자의 권위와 관련해서 두 번째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본문의 서두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과연 탁월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앞서 저지른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기브온’ 거민들을 끌어내어 그들에게 ‘모세’의 법에 근거하여 회중이 위탁해준 결정을 알려줍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향해서 내리고 있는 저주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브온’은 조약 당사자에서 노예로 그 신분이 격하되고 있습니다. ‘기브온’은 부당하다는 항의를 해보지만, ‘여호수아’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쾌합니다. 화자가 전하는 교훈은 한 가지입니다: “굴복한 자들은 살지만, 저항한 자들은 죽는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굴복한 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은 내면적으로는 진정으로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이나 사람들 앞에 짐짓 순종과 거룩을 가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누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묵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구조와 단락을 구분하고, 각 단락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교회 공동체 내에서 회원과 비회원을 구별하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이 일이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일은 아닙니까?
3. 교회의 리더십과 관련해서 일련의 교훈들을 이끌어내고 토의해 봅시다.
13
제 13과: 남방 정벌
남방 정벌(征伐)
(10:1-43)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10:41-42)
<여호수아서> 10장과 11장은 각기 “남방 정벌”과 “북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전투>(6장)나 <아이 성 전투>(7장)를 통해서 ‘가나안’ 중부 지역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이후에 수행한 것입니다. 이 두 번에 걸친 정벌전은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방어전의 성격이 더 짙습니다. 즉 먼저 공격을 감행한 쪽은 이스라엘의 승승장구에 두려움을 느낀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이 구축한 반 이스라엘 연합 세력입니다.
첩그러나 이스라엘은 파죽지세로 이들 연합 세력을 격파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이처럼 승승장구, 연전연승 했던 시절도 없었을 것입니다. 시체 말로 “개 발에 땀났습니다.” 한 개인이나 국가가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이 승승장구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처럼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두 번의 정벌 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승리는 “기브온 언약”(9장)의 실패에 바탕을 두고 있음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가나안 정벌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화자는 10-11장에서 다시 <정복 이야기>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즉 10-11장은 ‘가나안’ 정복 이야기로서, 9장의 첫 두절에서 끊어졌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 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9:1-2)
이어지는 10장에서 “남방 정벌”, 그리고 11장에서는 “북방 정벌”을 다루고 있는데, “남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네 개의 단락으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1) ‘기브온’ 대첩(10:1-15)
(2) ‘막게다’의 심판(10:16-27)
(3) 남방 대장정(10:28-39)
(4) 결론(10:40-43)
양식과 배경.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듯이 역사 편찬도 그렇습니다. 역사학자의 의무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의 주제를 위해서 그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전승이나 자료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취사선택하기도 하고, 선택한 자료들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또한 이들을 최종적으로 편집하는 일련의 문학적인 작업을 거치기도 합니다.
“남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도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개의 전승들이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본문이 여러 개의 자료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전체 내용이 한 개 이상의 양식(genre)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1) 이야기(說話); (2) 시(詩)(예: 야살의 시). 그리고 각 이야기는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전쟁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주제를 반복하고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화자 자신의 신학적인 결론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각 단락의 이야기는 원래의 배경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학화 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브온 대첩(1-15절). 첫 번째 단락은 그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성전(聖戰) 이야기”입니다. 전쟁의 배경이 먼저 등장하면서(1-2절), 이야기는 곧바로 긴장 국면으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의 일차적인 당사자인 ‘기브온’과 예루살렘 왕 ‘아도니 세덱’이 각기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우군(友軍)을 향해 지원과 동맹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에서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4절상)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6절하)
이어서 아주 친숙한 하나님의 약속, 즉 구원의 신탁에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고(8절), 전쟁은 예상대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9-11절). 이스라엘의 승리를 알리는 전형적인 결구(結句)가 이야기의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11절하)
그러나 화자는 당시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을 고대 시가 <야살의 노래>에서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절정의 여운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찌어다(12절하-13절상)
현대의 독자들은 화자가 본문에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을 통해서만 그러한 책이 존재했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만, 이 책에서 힘주어 노래하고 있었던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비록 ‘기브온’의 요청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쟁이었기에 그분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전쟁은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4절).
이처럼 화자는 두 번에 걸친 절정의 끝에 다음과 같은 마침표로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15절은 43절과 함께 마소라 사본에는 있으나 <칠십 인 역>에는 없는 구절로서, 아마도 후대의 삽입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갈’을 강조하고 있는 편집자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소는 ‘여호수아서’에서 상당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로 돌아왔더라(15절)
막게다의 심판(16-28절). 형식 상 두 번째 단락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내용적으로는 앞의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부록 내지는 후기(後記)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섯 왕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16절)
다만 이곳에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편집적인 재구성을 통해서 정복 전쟁(10-11장)에 관한 주제를 계속 이어가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단락은 새로운 이야기로써 갖추어야 할 도입부 또는 배경 설명이 전혀 없고 오히려 무대 장면만을 달리해서 첫 번째 이야기와 차별을 시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 무대가 ‘기브온’과 ‘벧호론’ 이라면(10-11절), 이곳에서는 ‘막게다’가 주 무대입니다(16절).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을 “막게다의 심판”으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첫 번째 단락의 끝에(10절) ‘막게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야기는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곧바로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아직 살아있는 다섯 왕들의 소재를 알려 오자말자(17절), ‘여호수아’가 즉각적으로 대응책을 하달합니다(18절).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19-20절)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단락의 주제에 혼란을 가져옵니다. 즉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적의 후군을 소탕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새로운 명령을 하달하고 있는 셈입니다:
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19절)
끊어졌던 이야기는 다시 그 무대를 ‘막게다’ 동굴로 돌려놓고 있습니다(21절). ‘여호수아’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새롭게 명령을 하달하고(22절), 백성들이 명령을 수행하며(23절), ‘여호수아’가 다시 새로운 명령을 하달하면서(24절), 예의 그 유명한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25절). “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 죽여 다섯 나무에 매어 달고 석양까지 나무에 달린대로 두었다”는 마무리 언급으로(26절), 두 번째 이야기가 끝을 맺는듯하다가 아주 어색하게 기원론적인 언급을 덧붙여 놓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있더라”(27절하).
전체적으로 두 번째 단락은 구성이 산만하여, 처음 가졌던 긴장감을 완화시켜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적의 후군 잔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19-20절), 또는 다섯 왕들을 매달아 죽인 이야기를(21-27절) 하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 질문이야말로 두 번째 단락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을 파악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신학적인 의도는 보다 분명해 보입니다. 즉 21-27절을 이야기의 주된 내용으로 볼 때, 곳곳에서 반복되는 모티브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 10:19하, 25. 한 편 19-20절의 내용은 본궤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20절 끝의 언급-“...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읍으로 들어간 고로...”-은 문학적으로 세 번째 단락을 암시하고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 성읍이야말로 다섯 왕들의 본거지로서 남방대첩 이야기(29-39절)의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남방 대장정(29-39). 세 번째 단락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작과 결론이 비교적 뚜렷하기 때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게다’의 전투에 이어 남방 다섯 왕들과 그들의 성읍을 차례로 파괴하였다는 종합적인 진술은 정복 이야기 전체를 요약하고 회고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하나의 이야기를 끝맺는 전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39절)
결론(40-43). 세 번째 단락이 정복 전쟁에 관한 요약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 화자 자신의 전쟁에 대한 신학적 요약이자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후대의 편집적인 손길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부분으로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모티브를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여호수아의 순종; (2) 헤렘; (3) 하나님의 전쟁. 특히 마지막 구절은 상당히 의도적인 결론으로서, 이미 첫 번째 단락에서 언급한 바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15절)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43절)
본문에서 도입하고 있는 일련의 양식들을 살펴보면, <성전 이야기>(the holy war narrative)에서부터, 산문적인 서론과 결론을 포함한 시 <야살의 노래>, 기원론적인 삽입, 정복 여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적인 대 결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자료와 편집. 이처럼 본문의 구조와 양식이 복잡하고 산만하다는 사실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전승들 또한 아주 다양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전승들이 모여 본문을 구성하고 있을까? Butler, 112-113쪽(참고도서, 1).
첫 번째 이야기 <기브온 전투>의 출처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많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덱’으로 불리는 고대 ‘예루살렘’ 왕에 관한 전승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 전승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反) 기브온 연합군”을 패배시켰는가를 다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브온 언약”에 관한 이야기도(9장) 실은 동일한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사울’과 ‘솔로몬’ 왕 시대에 ‘기브온’ 족들은 이 언약을 바탕으로 자신들에게 대한 부당한 처우를 개선해줄 것을 왕에게 요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편 화자는 이 전승을 “기브온 전투”의 신학적 근거로 삼아, <성전(聖戰) 이야기>의 한 예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다른 전승, <벧호른과 아세가의 전투>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삽입하고 있습니다(11절). 이 두 전승을 결합하여 <여호수아서> 특유의 신학적 모티브들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지요:
(아도니세덱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으니(2절)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8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11절하).
<야살의 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더욱 강하게 각인시켜주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업을 기리고 노래하는 이러한 시를 구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의 노래>(출 15:21);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5); <여호와의 전쟁기>(민 21:14-15; 21:27-30).
이 시를 인용하는 목적도 승리의 기쁨이나 감동을 더 이어가자는데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시의 정확한 출처나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기브온 전투” 당시에 탄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아주 특이한 기도의 내용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는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12절하)
즉 이스라엘은 야간 기습 작전을 통해서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만큼, 달이 기울고 태양이 떠오르는 상황, 즉 밤이 지나고 낮이 밝아오는 상황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의 배경이 어떠했든 화자는 오히려 정반대되는 상황에서 같은 노래를 도입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반대되는 상황이라 함은 전투에서 도망하는 잔당들을 추적하고 도륙하는 상황을 말합니다(10절하). 이 경우라면 태양은 오히려 중천에 더욱 오래 머물면서 도망하는 적군들이 잘 보이도록 해야 할 것인즉,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개입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13절하) 12절을 단순히 시적인 과장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실제 그날 우주적인 기적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 미해결의 난제(難題)로 남아있습니다. 보수진영에서는 당연히 이 구절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인가 하면(화자 자신도 13절에서 그렇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보나 자유주의적 진영에서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입장입니다.
화자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여호와의 전쟁” 모티브를 계속 이어가면서 ‘여호수아’의 특별한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4절)
‘막게다’ 동굴에 갇힌 다섯 왕들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23절) <막게다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왕들이 처음 연합 세력을 형성하여 모였던 곳은 ‘벧호른’이 아니라 ‘막게다’ 근처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볼 수 있으나, 화자는 그 내용을 <기브온 전투>와 <막게다의 추적 이야기>에 똑같이 도입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마도 동일한 전승이 두 이야기에서 공히 나름대로 다른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사실 <막게다의 심판>에서는 잔당들에 대한 추적과 소탕이 주된 관심사이므로, 이 다섯 왕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 둔 것도 이 지역의 잔당들을 완전히 다 소탕할 때까지 일시적인 조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입하고 있는 기원론적 언급, “오늘날까지 있더라”(27절)는 물론 ‘헤렘’ 모티브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세 번째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남방 정벌”의 남은 여정도(29-39절) 실은 두 번째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서, “추적과 소탕”이라는 주제를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립나’에서 ‘라기스’와 ‘에글론’을 거쳐 ‘헤브론’과 ‘드빌’에 이르는 ‘가나안’ 남쪽의 다섯 성읍을 차례로 정복해 가는 이야기 역시 원래의 전승에서 일부 취하여 동일한 주제를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40-43절) 이 점을 재확인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단락은 이야기 전체의 종합적인 결론에 해당됩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그동안 계속 강조해왔던 일련의 모티브와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데, 강조가 지나쳐 이야기의 다른 부분과 상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40절의 선언은 동일한 책의 다른 부분뿐만 아니라 <구약>의 다른 책과도 상호 모순되는 긴장관계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수15:13-19; 16:10; (2) 삿 1:10-15.
신학과 신앙
1. 기브온 전투(1-15)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참여했던 다른 전투들과는 달리 공격보다는 방어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11장에서 다루고 있는 북방 정벌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헤렘’을 행하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다섯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기브온’을 돕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이 연합군은 이스라엘보다는 ‘기브온’을 치기 위해서 결성된 군대입니다. 화자는 첫 두 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이스라엘이 참여했던 모든 정복 이야기들을(7-9장) 하나로 묶어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를 취하여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1절)
이들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모리’와 ‘가나안’의 다섯 왕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브온’은 배신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배신자를 응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또 다른 동기가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아도니세덱’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창세기 14:18; 22:14 등에서도 이 이름을 암시하고 있기는 하나 직접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도니-세덱은’ ‘아돈’과 ‘세덱’의 합성어로 볼 수 있는데, ‘아돈’은 ‘주’(主)를 의미하고 ‘세덱’은 ‘의롭다’라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종합하면 “나의 주는 의로우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2절)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가나안 주민들의 “두려운 반응”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온 모티브로서,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들려준 ‘여리고’ 주민들의 반응이 처음이자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2:9).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듣게 되면 정 반대되는 두 가지 반응이 생겨납니다. 그 하나는 두려움, 승인, 굴복 등의 반응이고, 2:9-10; 5:1; 9:3-4, 9-10.
다른 하나는 적대감과 저항하는 태도입니다. 9:1-2; 10:1-3; 11:1-5.
무관심이나 냉소주의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모리’ 다섯 도시 국가들은 하나님을 대항하기로 선택합니다: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이는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화친하였음이니라(3-4절).
‘아도니 세덱’은 자신의 공격목표가 이스라엘이 아닌 ‘기브온’이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참여하도록 유도했으니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기로 작정한 셈입니다. ‘기브온’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즉각적으로 구조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하는 쪽이나 공격을 당하는 쪽이나 후원자의 도움을 요청하는 표현이 너무 흡사하여 흥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6절)
‘기브온’의 요청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신속하고도 관대한 자세로 응답합니다. 단순히 다섯 왕들이 아닌 ‘아모리’의 모든 왕들을 물리치기 위해(6절), ‘여호수아’는 밤중에 ‘길갈’로부터 ‘기브온’으로 모든 용사들을 보냅니다(7, 9절):
7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9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7, 9절)
이곳에서 화자가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비록 속아서 맺은 것이라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순히 개인이나 국가 간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차원에서 결정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 성전(聖戰) 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돕기 위해 달려간 것도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때문이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를 위해서 싸웠다는 표현도 그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8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10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홀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전쟁에서 ‘기브온’이 한 역할에 대해서는 화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분명이 이들 중에도 용사가 많았을 텐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칼에 죽은 자보다 하나님의 행위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보고가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11절)
파괴적인 우박을 “던지신” 하나님의 행위는 후에 ‘여호수아’가 다섯 왕들의 시체를 ‘막게다’ 동굴에 “던진” 행위를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우박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을 피해 적군에게만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분명 “출애굽”의 기적을 연상시켜줍니다. 당시 “악질”과(출 9:4, 6) “우박”과(출 9:26) “흑암”(출 10:23) 등의 재앙도 이스라엘을 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야살의 노래>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를 소개하지 않고는 이야기를 마치기가 어딘지 부족하다고 생각했을까요? 화자는 <야살의 책>에서 “기브온 전투”에 관한 전설적인 옛 노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살의 책>에서 인용한 부분을 12-14절 전체로 볼 것인지, 또는 12절하-13절상까지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후자의 견해를 취할 때 12절상과 13절하-14절은 화자가 해설을 위해서 추가로 삽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의 정확한 상황이나 배경은 베일 속에 가려있을 뿐입니다. <사무엘>에서도 「야살의 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삼하 1:18).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 할지어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12절하-13절상)
화자는 마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믿지 못하겠다는 독자들 앞에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래도 믿지 못하겠느냐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과연 우주의 역사에서 이런 엄청난 대 격변이 실제 있었는가에 관해서 과학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화자의 의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구절의 진위 여부를 증명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다만 성경 해석의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과연 이 구절이 기적을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과 <성경>의 특정 구절이 기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해석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구절은 어떤 시(詩)의 몇 행(行)에 불과한 것입니다. 시에서는 보통 문자적인 의미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대치됩니다. 또한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번역이 정확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동사 “머무르다”(ם 다맘)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remain motionless) 또는 “잠잠하다”(be quite), “침묵을 지키다”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태양을 향해서 “머무르라”고 했는지 또는 “열을 발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화자는 전자(前者)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13절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야살의 책>의 내용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상 무어라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태양과 달을 향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은 태양이나 달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의 세계관을 통해서 볼 때는 하등 문제 될 것이 없겠으나,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태양이나 달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 것조차 꺼려하면서 이들을 각각 ‘큰 광명’과 ‘작은 광명’으로 부를 정도였으니 말입니다(창 1:14-19). 자칫 ‘여호수아’가 이들 천체를 향해서 기도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분명 우상 숭배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천체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었으며, 천체들에 대해서는 다만 명령을 내리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12절)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여호수아’입니다. 실제 화자는 태양과 달이 ‘여호수아’가 요구한대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고 전합니다. 태양계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사건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14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5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14-15절)
그리고 화자는 “온 이스라엘이 길갈로 돌아왔다”고 진술함으로써, 다시 한 번 ‘하렘’ 모티브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길갈’은 ‘세겜’과 함께 신학적으로 중요한 장소임을 앞의 몇몇 에피소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본문이 “바벨론 포로기” 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라면,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히 과거의 영웅적인 사건을 회상하고 회고하기보다, “고토(故土) 회복”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도전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전쟁을 계획하고 군대를 모으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것임을 권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막게다의 추격(16-28)
두 번째 에피소드는 ‘기브온’에서 ‘막게다’에 이르는 대 추격과 소탕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만, 화자는 계속해서 “추격”의 모티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19절)
이 전쟁은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승리를 이루려 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기브온’의 승리에 만족하며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도전이자 소명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미 암시해 놓은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10절)
즉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제가 다름 아닌 “막게다의 추격”이 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전한 승리를 눈앞에 두고 다시 한 번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길갈’로 철수해 버렸고(15절),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 버렸습니다. 잔당들은 아직 남아있고, 특히 적장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막게다’의 동굴에 피신해 숨어있는데도 말입니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처음과 두 번째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처음 이야기의 끝에 이스라엘이 ‘길갈’로 돌아갔다는 언급은 전쟁을 마치고 철수했다는 의미일 것인데, 두 번째 이야기를 읽어보면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거나, 아니면 철수한 이스라엘이 다시 ‘막게다’로 되돌아 와 전쟁을 재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어느 경우든 이야기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자료비평학자들은 이를 두고 두 이야기가 다른 전승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식 이야기 특유의 “중첩과 반복”의 기법을 상정한다면, 반드시 자료비평적인 논리에 동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즉 화자는 두 번째 단락에서 동일한 <기브온 전쟁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즉 이곳에서 새로운 모티브를 도입하면서 ‘기브온’ 전쟁의 신학적 주제인 ‘헤렘’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새로운 모티브란 ‘여리고’ 전투에서 본 바 있는 “하나도 남김없이”와 관련된 것으로서,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두 번째 단락의 제목을 “막게다의 섬멸” 또는 “막게다의 심판”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16그 다섯 왕들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17어떤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이르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들이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하니(16-17절)
혹시 ‘여호수아’가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막게다’ 동굴에서 생명을 부지하기에 급급하게 되어버린 ‘아모리’의 다섯 왕들을 동정해서 살려주어야 할 것인가, ‘기브온’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의 이런 속내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달려와 다섯 왕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요지인 즉은, “계속해, 계속해, 고삐를 늦추지 말고 계속 추격해.” 두 번째 단락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정보를 들은 ‘여호수아’가 즉각적으로 행동에 돌입했다고 함으로써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지체하지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19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재촉하여 잔당 소탕 작전을 펼칩니다. ‘막게다’ 동굴로 피신해 들어간 다선 왕들을 지키게 하고(18절), 나머지 잔당들을 크게 도륙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르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18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크게 도륙하여 거의 진멸시켰고 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간 고로, 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으나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20-21절)
이 대목과 이어지는 부분에서 ‘헤렘’ 모티브는 이스라엘의 순종과 지도자 ‘여호수아’의 권위에 대한 모티브와 함께 어우러져, 두 번째 에피소드의 신학적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22때에 여호수아가 가로되 굴 어귀를 열고 그 굴에서 그 다섯 왕을 내게로 끌어내라 하매, 23그들이 그대로 하여 그 다섯 왕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을 굴에서 그에게로 끌어 내니라. 24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25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26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 죽여 다섯 나무에 매어 달고 석양까지 나무에 달린 대로 두었다가(22-26절)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은 기원론적 언급입니다:
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하매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리어 그들의 숨었던 굴에 들여 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27절)
왕들이 숨었던 동굴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무덤이 되어버렸다는 화자의 해학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후대의 독자들에게 확인해 주는 이상의 신학적 교훈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막게다’의 승리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며,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3. 남방 대장정(28-39절)
‘기브온’ 구출을 위하여 시작한 전쟁은 이곳 세 번째 단락에 이르러서는 “남방 대 장정(長征)”과 그 결과로 정복한 지역들을 차례로 언급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무엇일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단순히 ‘기브온’과 ‘막게다’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가나안 남방에 대한 “대 정벌”에 나서, 그 땅에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일체의 세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시켜버렸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한 남방 다섯 성읍에 대한 정복 이야기가 동일한 형식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8그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0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2여호와께서 라기스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이튿날에 그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으니 립나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3때에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오므로 여호수아가 그와 그 백성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35그 날에 그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을 쳐서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당일에 진멸하였으니 라기스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7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한 것이 에글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39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요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40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28, 30, 32, 33, 35, 37, 39, 40절)
이스라엘은 두 번 다시 ‘아이’ 성의 패배와 ‘기브온’과의 언약 체결 등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또한 이들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고 그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셨습니다.
4. 결론(40-43)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 9장 서두에서 시작한 이야기의 결론이자 신학적 결론입니다: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9:1-2).
신학적 결론이라 함은 단순히 ‘기브온’과 남방 정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주제들을 요약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첫 번째가 ‘하렘’의 모티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42절상)
이 전쟁은 단순히 국가와 국가, 또는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 그 이상입니다. 비록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은 앞에서 기술한 바처럼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9:1-2; 10:1-2),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분이 직접 개입한 전쟁이므로 지루하고도 힘들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으로 끝이 납니다:
단번에 취하니라(43절하)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언급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의 나머지 이야기나 <사사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정복 전쟁은 적어도 7년 이상이나 끈 길고도 지루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교훈과 격려를 위해서 그런 역사적 진실은 무시하거나 왜곡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화자는 그 땅과 관련된 나머지 주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40절)
이 선언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역시 화자 본인의 신학적이고도 교훈적인 메시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나머지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교훈과 적용
기브온 돕기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할까? ‘도날드 케이건’ 교수는 두려움이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도널드 케이건. 「전쟁과 인간」. 김지원 역. 서울: 세종연구원, 1998.
탐욕이나 명예 때문에 전쟁을 한다면 이해가 되나 두려움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전쟁이 두려움 때문에 비롯되었는지 일일이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기브온’에 모여 있는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분명 그렇게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야말로 <여호수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 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참고: 1:9, 18; 2:10-11; 5:1; 9:1-2, 24). “기브온 전투”는 이렇게 두려움 때문에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은 ‘여리고’에서 ‘아이’ 성까지 승승장구해 오던 이스라엘이 두려웠고, 더 나아가 ‘기브온’이 이들과 군사적 조약을 체결한 것 때문에 더욱 두려워졌습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가장 큰 도시 ‘기브온’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이스라엘과 한 편이 되어버렸으니 이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위기감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에 이웃 왕들과 함께 반(反) 이스라엘 연합 전선을 구축합니다. 명분은 배반자 ‘기브온’을 응징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브온’이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승인과 굴복의 길을 선택했다면, 이들은 저항하고 싸우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가히 위협적입니다. 화자는 다섯 왕들의 이름과 그들의 성읍을 일일이 거명함으로써 긴장과 두려움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3-5절). 반(反) ‘기브온’ 연합에 참여하고 있는 도시는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그리고 ‘에글론’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도서 1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아도니-세덱’의 격문(檄文)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4절). 이 격문은 ‘기브온’이 다급한 가운데 구조를 요청하는 파발마를 이스라엘에게 보내면서 울부짖는 호소와 묘한 공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소하소서”(6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전쟁은 단순히 ‘아모리’ 족속 간에 벌어지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참여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요청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닥친 두 번째 중대한 시험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을까?” 그들이 당면했던 첫 번째 시험은 ‘기브온’에 속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라 할지라도 속아서 맺은 것에 대해서 지킬 의무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대체적인 생각은 조약을 폐기하고 ‘기브온’을 다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 ‘여호수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책임은 ‘기브온’의 몫이기는 하나,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내 차가 중앙 분리선을 넘어 반대편에서 오는 도난 차량과 충돌했다고 할 때, 그 차가 도난 차량이라고 해서 내 과실이 없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요. 도난 차량 운전자는 도적질 한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나 또한 교통 위반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결코 그 언약을 폐기할 수 없었으며, 한편 ‘기브온’ 역시 이후부터 언약의 대등한 당사자가 아니라 노예가 되어 이스라엘을 섬겨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당면한 두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책임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노예로 부릴 권리가 있었지만 동시에 이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도 동시에 떠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의 새로운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브온’이 지금 위기를 맞아 구조를 요청해옵니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여리고’나 ‘아이’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가나안’ 주민 모두가 참여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3, 5절). 이스라엘은 이 경우에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것인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도우러 나서야 할 것인가? 약속을 지키기에는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 맺은 언약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 주실 것인가? 이 긴박한 상황에서 구원의 신탁이 들려옵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8절)
다시 한 번 친숙한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들릴 때마다 항상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신탁은 전쟁이 ‘아모리’와 ‘기브온’과의 전쟁도 아니고, ‘아모리’와 이스라엘의 전쟁도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한 ‘헤렘’이라는 선언입니다. ‘기브온’에도 분명 장수나 영웅들이 많이 있었을 것인데도 이들이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에 일조했다는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탁에 힘을 얻었음인지, ‘여호수아’는 관대하게, 지체함이 없이 ‘기브온’을 도우러 달려감으로써 그가 맺은 언약에 충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갈’에서 ‘기브온’까지 약 35 킬로미터를 밤을 달려 행군한 끝에 아침 무렵에 도착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있습니다(9절).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부분은 무엇입니까? 예의 그 “두려움”입니다. 적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이처럼 공포에 질렸을까요? 하늘에서 떨어진 돌덩이와 우박 덩이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인 수보다 돌과 우박으로 죽은 수가 더 많았다는 언급이 이를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11절). 즉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긴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을 들어야 할 대상은 비단 ‘여호수아’ 공동체에 국한할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누가 이 우렁찬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까요? ‘바벨론’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지금 정복자가 아니라 피정복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기브온 전투”는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나 기적은 언필칭 지금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지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포로 시절 이스라엘의 처지는 ‘여호수아’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 무기력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삼류 시민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 이민자들처럼 말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나 계시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잊은 채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살아왔으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나 기적은 희망이나 격려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절망과 냉소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우리의 경험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실패자들에게 성공 사례는 반드시 용기와 격려가 되지만은 않습니다. “기브온 전투”에 이은 “막게다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바벨론공동체”의 심정도 혹시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의심과 절망에 빠져있는 청중들에게 가장 필요한 처방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의심과 절망 가운데 어둠침침한 골방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도마’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손과 허리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자국이었습니다. 마치 “네가 이래도 나의 부활을 믿지 않겠느냐?”하며 다그치듯 말입니다. 화자가 지금 그 유명한 <야셀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목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약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믿고 있듯이, “바벨론 공동체” 또한 전설적인 “기브온 전투”를 노래하고 있는 이 책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회중 가운데 어느 누가 이 엄청난 우주적 대 격변이 과학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놓고 따지며 논쟁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누가 예수님의 부활의 진위 여부를 놓고 따지고 논쟁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회중 개개인의 영적 부흥에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자도 없을 바에야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증명하는 것 또한 검증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며, 불필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야살의 책>이 주는 신학적 메시지는 또 있습니다. 영웅적인 지도자 ‘예수’ 즉 ‘여호수아’와, 그의 기도와,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 노래는 자칫 ‘여호수아’가 태양이나 달을 향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분명 우상 숭배이며, 당시 가나안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는 몰라도, 이스라엘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향해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태양이나 천체들을 향해서는 명령을 내렸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찌어다(12절)
요점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14절). 사실 화자는 두 번에 걸쳐 태양과 달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여호수아’가 요구한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2절하-13절상). 태양계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사건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오로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기도하는 지도자”와 “응답하는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교회”의 목사는 주일 예배에서 불을 뿜어 내듯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리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 나라가 어떻게 급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주변 강대국과의 안보동맹입니까? 외교적 수단입니까? 경제적 풍요함입니까?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과연 성공을 거두었습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처럼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우리의 옛 영토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연약한 ‘기브온’은 왜 살아남았습니까? 그처럼 위세 등등하던 반 ‘기브온’ 연맹은 왜 사라졌습니까? 우리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신다면, 당연히 우리의 온 정력과 힘을 그의 뜻을 아는데 쏟고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의 하나까지
기독교 소책자 <오늘의 양식>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 미국 항공사의 회장이자 창립자의 사업 철학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분은 두려움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두렵게 하는 일들을 하기 좋아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용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항공사의 번영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사업 확장을 할 새로운 노선을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때 일어날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도 아랑곳 않고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입니다.”
“성격은 운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격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유사한 경구에 혼돈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람의 성격은 예정되어 있고 천성(天性)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의 성격이 화석처럼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창조되고 변화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구원은 재창조로서 사람의 운명을 바꾼 것이고, 바뀐 운명은 그 자리에 정체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날로 새롭게 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임에 틀림없지만, 그 자체로서 완벽한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구원을 가꾸고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신생아는 젖을 먹어야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라갈수록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과거의 구원만을 자랑하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자는 마치 갈비뼈 우려먹듯 가문과 조상 자랑으로 일관하는 못난 후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은혜의 복음을 이루어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것일까? 어떻게 승승장구, 연전연승하며 살 수 있을까? “기브온 전투”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이처럼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시체 말로 “개 발에 땀났습니다.”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무엇이 성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인가?”를 묻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 ‘포스터’(R. Poster)는 우리 시대의 고질적인 질병 가운데 하나로 “피상성”(superficiality)을 꼽고 있습니다. “피상성”이란 매사에 대충 대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영적 훈련에 있어서나, 성경 지식에 있어서나 “피상성” 즉 적당주의는 아무 것도 제대로 이루어 놓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적당히 시험공부해서 합격할 수 없습니다. 결핵 약을 적당히 복용하고 그만두면 나중에 더 강도가 높은 약을 사용해도 고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왜 끊임없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야만 할까?” “이쯤해서 살육을 멈추면 안 될까?” “살겠다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저들 왕들을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여호수아’도 이스라엘도 “여리고 전투”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런 질문들로 시달려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적어도 양식(良識)과 인정(人情)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을 가지기 위해서 굳이 박애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런 태도와 기분을 꾸짖고 있습니다. 절대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추격해서 원수의 하나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하라”고 말하십니다(19절). 잔당(殘黨)들이 아직 남아있고, 이들을 완전히 격멸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도전이자 소명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쯤해서 그만두면 안 되는 것일까? 한 예를 들어봅시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한 겨울 망망대해에서 배가 난파를 당하여 선원들은 모두 배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헤엄을 쳐서 인근 조그만 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위한 구조선이 10 시간 뒤에 이 섬에 도착했을 때에 한 사람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매서운 추위에 오직 이 사람만 섬 주위를 계속 달리면서 동사(凍死)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너무 추워서 앉은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떨고만 있다가 죽고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려고 하는 곳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우호적인 곳은 아닙니다. 유혹과 거짓의 삭풍이 불어대는 그런 곳입니다.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윤리∙도덕적으로나 할 것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제 갓난아이와 같아서 맨 몸으로 얼음 속에 들어가 그 얼음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얼음에 갇혀 얼어 죽기가 십상입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 얼음을 깨어 부수는 일밖에 없습니다.
‘헤렘’은 이 원리를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 두 번째 단락의 제목을 “막게다의 섬멸” 내지는 “막게다의 심판”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리고 전투”에서부터 등장한 바 있는 “하나도 남김없이”의 구호가 바로 이것입니다.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전한 승리를 목전에 두고 다시 한 번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며, 전쟁을 하다 말고 ‘길갈’로 철수해 버렸고(15절), 하나님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 버립니다. 잔당들은 아직 남아있고, 특히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막게다’ 동굴에 피신해 숨어있습니다(16절). 그리고 이 사실을 누군가가 ‘여호수아’에게 와서 알려주고 있습니다(17절). 무엇을 말하려 함일까요? 적어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모리’의 다섯 왕들의 처지를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배신자 ‘기브온’을 응징하겠다고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위세도 당당하게 나서던 이들 왕들의 꼬락서니를 보라! 지금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 승리는커녕 자기 목숨 하나 지키려고 동굴에 숨어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라! 두려움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큰 두려움으로 동굴 속에서 떨고 있는 이들을 보라! 차라리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랴!
두 번째이자 더 큰 교훈은 이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얼마 전 ‘기브온’ 족속들에게 했던 것처럼, 불쌍한 이들 왕들도 동정하며 살려주어야 할까? 박애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까? 박애정신은 그 자체로서 참으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항상 군사적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각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생각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기브온 언약”을 통해서 체험한 바 있습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과연 ‘여호수아’는 철저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위하여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동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아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18절), 잔당들을 소탕합니다(20절). 이후 곧바로 군사를 돌려 동굴에 가두어두었던 ‘아모리’ 다섯 왕들을 끌어내어(22-23절), 그들의 목을 발로 짓밟게 하고(24-25절), 다시 이들을 쳐 죽여, 그 목을 나무에 매달아 저녁까지 두었다가(26절), 해질 무렵에 시체들을 내려 동굴에 내던져 돌로 막아버립니다(27절). 이 모든 장면에서 화자는 ‘여호수아’를 거의 매 구절마다 주어로 등장시키면서(10회) 철저하고도 완벽한 순종의 모티브를 끝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 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28절)
‘막게다’의 동굴에 대한 기원론적 언급(27절)도 단순히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을 후대의 독자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기능 그 이상을 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최대 관심사는 전쟁에서 승패 여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영적 승리, 즉 순종 여부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은 것이겠지요:
기억합시다. 또 기억합시다. ‘막게다’의 승리는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인생의 장애를 만났습니까? 목을 죄어오는 두려움과 어려움의 벽이 있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싸우실 것입니다. 그 모든 장벽들을 내 발 아래에 꿇게 하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계명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 사도 역시 오늘 우리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친 김에
“막게다의 심판”조차도 완벽한 승리가 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것일까요? 아직도 ‘가나안’ 도처에 저항 세력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하나님과 그 기름 부은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참고. 시 2편). “쇠뿔도 단김에 빼어라.” 지금 이 순간 이스라엘을 위한 시의적절한 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내친 김에 “남방 대정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머뭇거릴 이유도 시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또한 그 땅에 남아있는 이방인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충실하게 수행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수행한 남방 다섯 성읍에 대한 정복 이야기가 매번 동일한 표현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봄으로써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ooo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ooo 왕에게 행한 것과 ooo 왕에게 행한 것이 일반이었더라(28, 30, 32, 33, 35, 37, 39, 40절).
그리고 이번에도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이 핵심 모티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패배나 ‘기브온’과의 언약 체결 등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또한 이들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고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할 때 성령 충만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크레센도
아직도 할 말이 더 남은 것입니까? 아니면 절정의 여운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것입니까? 이 두 번째 ‘크레센도’(crescendo)는 사족(蛇足)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화자 자신의 역사적 결론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결론으로 삼는다면 노인네의 실없는 잔소리로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적 결론이라 함은 단순히 “남방 정벌”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호수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주제들에 대한 요약과 정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하렘’입니다(42절). “기브온 전투”와 “남방 대장정”은 단순히 국가와 국가, 또는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 그 이상입니다. 비록 전쟁이 발발하게 된 일차적인 원인은 ‘아모리’ 왕의 두려움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지만(1-2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신비한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분이 직접 개입한 전쟁이었으므로 지루하고도 힘들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으로 끝이 납니다: “단번에 취하니라”(43절하).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의 나머지 이야기나 <사사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정복 전쟁은 적어도 7년 이상이나 끈, 길고도 지루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화자는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교훈과 격려를 위해서 역사적 진실은 무시하거나 왜곡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화자는 그 땅과 관련된 나머지 주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40절)
이 선언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역시 화자 본인의 신학적이고도 교훈적인 메시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지금 역사적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신학적 요구 사항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아직 할 말이 남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은 또한 완벽한 승리를 가능하게 해준 한 인물 ‘여호수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모든 왕들이 지도자의 전형으로 삼고 따라야 할 인물, 그가 곧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기브온’과 맺은 터무니없는 언약 때문에 맞이한 국가적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고, 실패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한 순간의 승리에 자만하거나 도취하지 않고 끝까지 일관된 태도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이루어갔습니다. 이런 지도자는 공동체를 향해서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이 하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이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위해서 나의 적들과 싸우게 할 수 있을까? ‘여호수아’가 했던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기브온’ 전투, ‘막게다’의 심판, 남방 대장정에 이르기까지 적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끝까지 밀어붙여 적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소탕하고 섬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순종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바벨론’에서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그리고 노예로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세상이 주는 거짓 약속에 연연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이집트나, 아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세상과 언약을 맺어 국가 안보를 보장 받으려 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할 때만이 참된 자유와 안식이 있다고 말입니다(요 8:32).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을 때 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43절).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길갈’에서 쉬고 있는 중입니까?
토의 문제
1. 우리가 어느 누구와 약속을 했을 때, 그 약속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서원에 관한 유명한 충고도 함께 토의해 봅시다. 지난 한 주 내가 약속한 것은 무엇이며 지키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 ‘기브온’과 ‘아모리’의 다섯 왕들이 취한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해 봅시다. 이들의 선택은 ‘라합’의 선택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라합’과 그녀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비교해 봅시다.
3. 지난 한 주 나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싸워주신 영역이나 체험이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나누어 봅시다.
4. 믿고 따를 수 있는 모범적인 지도자가 나에게 있습니까? 있다면 그의 어떤 부분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이 누구에게 그런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까? 다음 한 주를 위한 각오와 결단은 무엇입니까?
14
제 14과: 메롬 대첩과 북방 정벌
메롬 대첩과 북방 정벌
(11:1-23)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1:15)
앞선 이야기에서 <여호수아서> 10장과 11장은 각기 “남방 정벌”과 “북방 정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북방 정벌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두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과정을 보면 마치 “한국 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전략을 따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아니면 ‘맥아더’ 장군이 본문을 통해서 암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전략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전투>(6장)와 <아이 성 전투>(7장)를 거치면서 ‘가나안’ 중부 지역에서 교두보를 일단 확보합니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의 남과 북은 자연스럽게 각기 고립되었으며, 상호 연락이나 연합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효과적으로 남과 북을 끊어 놓은 다음 남쪽 지역 공략에 나섭니다. 남방정벌이 끝난 후, 군사를 돌이켜 북방 진군에 나섭니다. 북방 정벌 역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전쟁은 단숨에 끝난 것으로 화자는 보고하고 있습니다(실은 정복전쟁은 7년여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만).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동일한 신학적 주제가 본문에서도 관통하고 있습니다.
. 문학과 역사
<여호수아>의 구조적 원리를 다시 요약해 본다면 그 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주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그 땅을 정복하라(1-12); (2) 그 땅을 나누어라(13-18); (3) 그 땅에서 살아라(19-24). 이 중에서 정복과 관련한 대 전제는 ‘헤렘’이며, 그 절정이 마지막 세 장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1) 정복전쟁의 발단과 배경(9장); (2) ‘기브온’ 대첩과 남방정벌(10장); (3) ‘메롬’ 대첩과 북방정벌(11장). 화자는 11장의 마지막 절에서 이 주제를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동시에 12장부터 전개될 두 번째 주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11:23)
따라서 11장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10장과는 아주 흡사하기 때문에 동일한 이야기 단위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두 곳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표현들 또한 이런 주장을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두 장은 마치 시적 “유사병행”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구조적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각 장은 첫 단락에서 전쟁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물론 11장에서 ‘메롬’ 전투가 ‘기브온’ 전투 때처럼 두려움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화자의 침묵이 오히려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도 남습니다. 왜냐하면 ‘메롬’을 포함한 북방 지역 주민들의 두려움이 ‘기브온’이나 ‘예루살렘’ 등을 비롯한 남방 지역 주민들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아이’ 성으로, 그리고 남방 지역 모든 성읍을 차례로 섬멸하면서 시시각각 자신들을 압박해오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북방 지역 주민들의 위기감과 두려움은 ‘가나안’ 남부 지역 주민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 역시 항복보다는 저항과 도전을 선택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응전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헤렘’이라는 신학적 주제가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브온’ 전투의 우두머리는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고, ‘메롬’ 전투의 괴수는 ‘하솔’ 왕 ‘야빈’입니다. 이 두 전투는 ‘가나안’ 정복전쟁의 대표적이고도 핵심적인 사건으로서 각기 긴장과 서스펜스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두 왕이 주변 왕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통해서나(10:4; 11:3),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오는 다섯 왕들의 위용과 위엄을 통해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10:3, 5; 11:4, 5). ‘기브온’ 전투의 경우 ‘예루살렘’ 왕 ‘아도네-세덱’의 격문에 응하여 나아오는 주변 다섯 왕들의 위용과 위세를 두 번씩이나 상세하게 그려줌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가 하면, ‘메론’ 전투의 경우에는 ‘하솔’ 왕의 격문에 부응하여 모래와 같이 많은 군대가 말과 병거와 함께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하여 ‘메롬’ 물가에 진치고 있다고 기술함으로써 전쟁의 위기와 긴장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시> 2편은 이러한 전쟁의 긴장된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화자는 11장에서 두 가지 요소를 새롭게 추가함으로써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야빈’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말과 전차를 이끌고서 ‘메롬’ 물가로 나왔다는 언급입니다: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4절)
책 전체를 통해서 “말과 전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두 번째 새로운 요소는 ‘여호수아’가 ‘유다’와 이스라엘의 산지로부터 ‘아낙’ 자손을 몰아냈다는 언급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21-22절)
‘아낙’ 자손은 체격이 큰 족속으로서 다른 민족에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낙’ 족속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민 13:22, 28, 33; 신 1:28; 2:10-11, 21; 9:2; 수 14:12, 15; 15:13, 14; 21:11; 삿 1:20). 이들은 ‘헤브론’ 지역에 살던 거인들로서 이스라엘이 두려워서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할 정도였습니다(민 13:22). ‘여호수아’ 시대에 이르러 ‘갈렙’에 의하여 쫓겨나게 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두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두 가지 다른 점에서 우위를 보이는 대적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는 무기이고(1-20절), 다른 하나는 신체적 조건입니다(21-22절).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안하고 긴장되는 분위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으로 깨끗이 날아가 버리면서 전쟁은 갑자기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10:10-15; 11:6)
이 신탁 이후 고조되고 긴장된 전쟁 분위기는 눈 녹듯 사라져 버립니다. 이스라엘을 단숨에 삼켜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아모리’ 연합군이 패하여 도주하는 모습은 차라리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이고,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7-9). 10:10-15; 11:
비록 이곳에서 우박이나 태양의 운행 중지와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없지만,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런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합니다. 이스라엘이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전차들을 불사른 행동은 단순히 승리의 결과라기보다는 북방 정벌을 가능하게 한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요인은 기적 말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순종입니다: “여호수아가...그대로 행하여...”(10:9; 11:9). 그는 두 전쟁에서 모두 기습 공격을 통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10:9; 11:7).
두 번째 단락에서도 동일한 모티브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단순히 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잔당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섬멸하고 소탕하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히 이스라엘은 연합군의 우두머리를 끝까지 추격하여 잡아 죽이는 것으로 시작하여, 잔당을 격멸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헤렘’의 모티브와 함께 ‘순종’의 모티브가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11장의 두 단락을 문학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 직접 연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두 번째 단락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 중 일부가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순종’의 모티브와는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북방 정벌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11:18), 북방 지역의 그 많은 성읍 중에서 ‘하솔’ 성만을 불태웠을 뿐이라는 사실(11:13) 등이 그렇습니다. 두 단락이 각기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헤렘’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부치셨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0:39; 11:15).
두 이야기의 세 번째 단락에서는 이스라엘이 각 지역에서 정복한 성읍들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10:40-41; 11:16-20). 단락의 말미에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도 동일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20절)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 공히 신학적 결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만 11장의 경우 그 결론은 두 이야기 전체(10-11장)에 대한 결론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단순히 북방 지역뿐만 아니라 남방 지역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낙’ 족속에 대한 자료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거인(巨人)들로서 ‘갈렙’이 쫓아낸 자들입니다. 덧붙여 마지막 구절의 문학적 기능은 <여호수아서>의 제 1부 전체를 회고하면서 동시에 제 2부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23절)
신학과 신앙
1. 메롬 대첩(1-9절)
‘기브온’을 포함한 남쪽 지역을 성공적으로 정복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메롬’ 전투를 시작으로 북방 정복에 나서게 됩니다. 이번 전투 역시 선제공격이라기보다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방어전의 성격이 짙습니다. 북방 연합군의 우두머리는 ‘하솔’ 왕 ‘야빈’으로서, <사사기>는 ‘야빈’을 ‘하솔’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으며(삿 4:2, 7, 17, 23, 24), <시편> 기자도 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시 83:10). 그런데 ‘야빈’에 관한 기록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라빈’은 전쟁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사사기>에서는 그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삿 4-5장). 이런 모순에 대해서 혹자는 ‘라빈’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조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아도니-세댁’처럼 선제공격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솔 왕 야빈이 이 소식을 듣고(1절상)
그러나 북방 연합군의 규모나 세력은 남방 연합군에 비해서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화자는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왕들과 통치 지역을 대부분 실명(實名)이 아닌 익명(匿名)으로 거명하고 있으며, 북방에 산재해 있는 모든 지역과 그곳 주민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항하러 나오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10장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하하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2및 북쪽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쪽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3동쪽과 서쪽의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산지의 여부스 족속과 미스바 땅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족속에게 사람을 보내매, 4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5이 왕들이 모두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 가에 함께 진 쳤더라(1절하-5절) 북방 정벌에 포함된 지역들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는 지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으며, 보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T. C. Butler, 126-127쪽.
북방 연합군의 수에 대한 화자의 묘사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인산인해 전술을 연상시켜주는 듯합니다만, 이런 표현을 통해서 화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상상해 봅시다.
우선 화자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듯합니다: “이 많은 적들을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든 족속들은 철저하게 궤멸시켜야 하고,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모든 지역들은 이스라엘에게 돌아가야 한다”입니다. 지금 적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땅은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던 그분의 땅이며(창 15:18-21),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약속의 땅이었습니다(출 3:8, 17). 따라서 지금 다른 족속들이 이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거룩한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참고: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출 33:2).
지금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모여 있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그 수에 관계없이 철저하게 궤멸시켜야 한다는 ‘헤렘’의 모티브를 화자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신 7:1);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신 20:17).
화자가 강조하는 바는 또 있습니다. “말과 병거”에 관한 언급입니다(4절). 전쟁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말과 전차 등의 첨단 무기로 무장한 적군은 수적으로 뿐만 아니라 화력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쟁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 결과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것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직면해 있습니다. 주전 1500년 경 이후부터 근동지역에서 말과 전차는 전쟁의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군사적 힘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각 부족 국가들도 나름대로 이들 현대식 무기들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러한 무기들을 갖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신 17:16). 오히려 장차 올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는 전쟁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는 당나귀를 타고 올 것이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습니다(슥 9:9). 실제 적들의 이러한 첨단 무기들은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과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17:16-18; 삿 1:19; 4:13).
화자가 강조하고자 바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초자연적인 개입이 그것입니다. 구원의 신탁이자 반복해서 등장하는 ‘헤렘’에 대한 선언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 맘 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6절)
<시편> 기자의 이런 상황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과연 전쟁은 너무 싱겁게 끝나버리고, 이야기는 곧바로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고 소탕하는 장면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이고,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7-9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두 진영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을 길게 서술하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막상 전투 개시 이후의 상황을 아주 짧고도 간략하게 기술함으로써 이 전쟁이 과연 ‘여호와’의 전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술은 ‘기브온’ 전투에서 사용했던 바 있던 비장의 무기, 즉 “기습 공격”이었습니다. 적이 자랑하던 엄청난 화력은 이 무기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11:9).
죄 없는 짐승들을 이처럼 대한 것이 한 편으로 잔인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가축의 힘줄을 끊는 것은 그 존재 및 사용 가치를 없애버리는 잔인한 행위로서, 이스라엘이 ‘세겜’에게 취한 복수의 한 형태였습니다: “그들이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혈기를 끊었음이로다”(창 49:6).
전차나 말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쪽에서 보자면 어쩔 수 없는 작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후대 다윗도 블레셋 왕 ‘하닷에셀’과 전쟁을 치를 때 마찬가지로 적군의 말들에 대해서 꼭 같은 조처를 취한 바 있습니다(삼하 8:4).
더 나아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과 전차가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들 위에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음을 화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9절상). 하나님께서는 적군의 첨단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라고 명령하셨고(6절하), 여호수아는 이 명령에 충실히 따라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전차를 불로 태워버립니다(9절하).
이스라엘은 단순히 ‘메롬’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내친 김에 ‘가나안’의 북방 한계선 ‘시돈’과 서쪽 지중해 한계선 ‘미스르봇마임’, 그리고 동쪽 한계선 ‘미스바’까지 밀어붙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궤멸시켜버림으로써 북쪽 땅도 완전히 정복하고 맙니다(8절). 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과 ‘여호수아’의 순종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성취입니다. 11:8의 언급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보다는 기자 자신의 신학적 진술로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돈’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앗셀’ 부족의 북방 한계에 위치한 지역으로서(19:29), 이 부족이 한 번도 정복해 본 적이 없었고(삿 1:31), ‘여호수아’ 자신도 ‘미스르봇마임’을 포함한 ‘시돈’ 지역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수 13:1-6).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 같습니다(삼하 24:6). 따라서 화자가 11:8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이야기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의 모티브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동일한 주제, 동일한 모티브의 반복 또 반복입니다.
2. 하솔과 북방 정벌(10-15절)
‘하솔’ 왕국은 청동기 당시 ‘가나안’ 지역을 수 세기 동안 지배하던 군사적 대국이었다고 합니다. 화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11:10)
북방 정벌 이야기의 첫 번째 단락을 ‘하솔’ 왕국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던 것처럼, 두 번째 단락에서도 다시 그를 언급함으로써 이 왕국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려는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솔’을 특별히 지명하여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지역의 맹주로서 권세를 누리던 막강했던 그 왕국이 단 하루 만에 지상에서 사라지지는 것을 독자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하솔’의 편에서 보면 치욕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화자의 편에서 ‘헤렘’의 연장일 뿐입니다. ‘야훼’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땅이므로 이스라엘에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솔’이 겪어야 했던 운명은 오래 전에 이미 예고된 것일 뿐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그리고 그와 함께 자발적이든 억지로든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다른 왕들 역시 동일한 운명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줄을 잘못 선 결과였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화자가 이 단락에서 두 번째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여호수아’의 지도력입니다. 이 모든 과업을 이룸에 있어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다시 한 번 큰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화자는 전합니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오직 그만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의 승리를 이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5절)
그러나 ‘여호수아’를 향한 극찬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가 알고 있는 옛 전승을 다룸에 있어 보다 솔직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하다거나 전혀 실패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북방 정벌을 통해서 빼앗은 그 많은 성들 중에서 불태워 없애 버린 성읍은 ‘하솔’뿐이었으며(13절), 여전히 많은 지역이 정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고 말합니다(수 13:1-6).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그 모든 과업을 다 이루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서로 모순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처럼 논리적으로 모순된 일이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났다는 점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여호수아’를 지도자의 원형으로 삼아 살아가야 했습니다만, 현실 생활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솔로몬’도 ‘다윗’도 그 어떤 왕도 예외가 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처럼 완벽했던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도하에서조차도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화자가 강자하고자 하는 바도 바로 이점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단락의 마지막 구절은 후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권면이자 설교입니다.
3. 정복지 요약(16-20절)
세 번째 단락은 이야기의 잠정적인 결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방 정벌은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이 문제가 계속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13:1-6; 15:63; 16:10).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땅은 모두 이스라엘의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는 것일까요? 화자는 이곳에서 ‘가나안’의 동서남북 전체를 망라하는 지명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16절)
이 구절은 형식상 10:40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10:40).
그러나 그 기능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단순히 북방 지역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전체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정복한 지역을 요약해서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지나(유다 산지), 온 남방(네게브), ‘고센 땅’, 평지(세블라), 그리고 ‘아라바’는 모두 남쪽 지역에 속한 지명들입니다.
화자는 정복 전쟁을 치른 기간에 대해서도 원래의 전승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모든 지역을 단숨에 정복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 즉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을 수행했다고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복과 정착 이 모든 작업이 며칠 만에 이루어졌다고 믿는 쪽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진술은 앞의 것들과 모순되기도 하지만 그 차이에 크게 신경 쓸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셨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도를 따라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게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그들은 ‘기브온’에서 저질렀던 그 실패를 교훈 삼아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그 땅의 모든 족속들을 전멸시켰습니다(18절). 전쟁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땅의 나머지 족속들이 ‘기브온’처럼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맺기는커녕, ‘이집트’의 ‘바로 왕’처럼 끝까지 이스라엘에 대항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20절)
이 구절은 일반 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책의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순종’이지 ‘자비’나 ‘긍휼’이 아닙니다. 그 땅의 족속들은 ‘헤렘’일 뿐입니다. <신명기>에서도 동일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신 7:1-3)
이들 명령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분은 진정 이방인들에게만 무자비한 분이십니까?
4. 결론(21-22절)
이야기의 마지막에 ‘여호수아’가 ‘아낙’ 족속을 멸절시켰다는 언급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21-22절)
이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38년의 광야 생활을 하게 했던 원흉들입니다(민 13:28, 33; 신 1:28).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역시 전멸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고(신 9:1-3), 이제 비로소 실현된 것입니다. ‘가나안’의 가장 악독한 무리들조차 다 사라졌으므로,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이방 문화에 오염됨이 없이 거룩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차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강조일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화자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여운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가사’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 여전히 남아 있다가 이후 <사무엘서>나 <사사기>에서 다시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삼상 17:4; 삼하 21:18-22).
교훈과 적용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여론 조사에서 국가 정책 순위에서 항상 1위를 차지하는 항목이 있습니다. 경제가 그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늘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입니다. 상대적으로 이념이나 사상은 오히려 경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대부분 응답합니다. 그래서인지 역대 정권마다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소위 각종 ‘게이트’가 끊이지 않고 발생합니다. 특히 한 정권이 끝나고 새 정권이 들어서면 어김없이 지난 정권 실세들이나 친인척들이 줄줄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일이 마치 자연법칙처럼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하겠다는 각오로 달려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지극히 한가하게 다른 주장을 펼치는 자가 있습니다. <신명기> 화자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후).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통찰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의 금식 후에 배와 등이 거의 맞붙어 있었을 시점에 이 말씀에 의지해서 그를 유혹하던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신 바 있다고 했습니다: 땅과 율법과 그리고 지도자. 이 셋은 구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땅과 율법은 각기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종류의 양식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땅이 가시적(可視的)이고 물질적인 양식이라면, 율법은 비가시적이면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둘로 나누어지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육체를 떠난 영혼이 아무 의미가 없듯이, 영혼이 없는 육체 또한 한낱 유기물질에 불과합니다.
<신명기>에서 “율법과 땅”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이자, 조건과 성취의 관계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그 땅을 얻을 수도 없고, 그 안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기브온’ 전투에서 ‘아모리’ 족속들은 ‘여호수아’의 군대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고 알면서도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대항하다가, 끝내 추방과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아이’ 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점 이스라엘이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땅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가나안’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불순종과 반역의 세월을 살다가 결국에는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떠나왔던 ‘갈대아’의 ‘우르’ 땅으로 다시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개처럼 살다가 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한 조그만 공동체에게나 해당되었던 고리타분하고도 구시대적인 종교적 유산이 아니라, 시대를 두고두고 배우고, 지켜야 할 영원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양식(糧食)임을 압니다.
돌이켜 보면 오늘 우리의 정신적 빈곤과 타락의 중요한 원인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역설적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가 이루어 놓았던 엄청난 물질적 풍요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동안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의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영적각성과 부흥을 성취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을 원하고 있기나 한가? 나는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이기만 하는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희망과 투지를 불태우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들 질문이 본문의 독서 관점이 될 것입니다
메롬 대첩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성공의 비결은 성공사례를 그대로 따라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역할 모델의 존재는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생이자 선지자의 모델은 역시 ‘모세’나 그의 부관 ‘여호수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수행했던 방식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는 우선 전체 땅의 허리에 해당하는 ‘길갈’을 취하여 총 지휘 본부로 삼고, 남과 북을 끊어놓은 다음, ‘기브온’ 전투를 필두로 남방 지역 전체를 일차적으로 정벌합니다(10:1-43). 이어서 방향을 북으로 돌려 ‘메롬’ 전투를 시작으로 북방 정복에 나섭니다(첨부 지도 참고).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대단한 군사 전략가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이러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화자가 전하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술 방식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복전쟁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모든 전쟁의 발단은 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땅의 거민들이 선제공격을 해왔기 때문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왜 이들이 선제공격을 감행했을까?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무슨 두려움? 누구나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등장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갖추거나 심하면 싸움을 걸어오게 마련입니다. ‘여리고’와 ‘아이 성’을 격파하고 그 땅의 새로운 군사적 강자(强者)로 떠오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가나안’의 원주민들의 마음이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했습니다. 피하든지 또는 대항하든지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시시각각 그들의 명줄을 압박해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화자는 먼저 ‘기브온’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들은 떠오르는 태양 이스라엘에게 항복하여 머리를 숙이고 그의 보호 아래 들기로 작정했습니다. 체면이고 의리고 할 것 없이 모두 내던져버렸습니다. 결과는 몰살의 위험을 넘기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고 머리를 숙인 결과이지요.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도니-세댁’은 정 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땅에 그동안 지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해왔는데, 새롭게 나타난 이방인에게 머리를 숙일 수야 없지요. 자존심이 상할 일입니다. 더구나 한 때 자기 밑에서 빌붙어 살던 ‘기브온’ 녀석들이 나를 버리고 새로운 강자에게 붙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멸감과 함께 배신감으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일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이없게도 몰살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들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도 하지요. 자신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함께 했던 다른 친구들마저 모두 사지(死地)로 내몰아버렸습니다. 이 친구들 모두 줄을 잘 못 선 것이지요.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해 버린 것입니다. 이들을 위한 경고 한 마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잠 1:7)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은 결국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모하고 무지하기로는 ‘하솔’ 왕 ‘야빈’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자입니다. 이 자 역시 ‘아도니-세댁’처럼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선제공격을 선택합니다. 무언가 믿었던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군대 수자와 첨단 무기였습니다. 이번에도 ‘야빈’의 격문을 듣고 모여든 군대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고, 말과 전차 역시 그 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들이 지금 ‘메롬’ 냇가에 모여 이스라엘을 마주하며 진을 치고 있습니다. 깃발은 하늘을 뒤덮고, 말발굽과 전차 끄는 소리는 땅을 뒤흔들며, 군인들의 함성은 산이라도 무너뜨릴 기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전차는커녕 말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습니다. 수적으로도 절대적인 열세입니다. 도무지 믿고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모로 보드라도 기가 죽어야 할 쪽은 이스라엘 이지 ‘야빈’이 아닙니다. 혹시 남방 정벌에서 경험한 바 있던 초자연적인 기적이 이번에도 일어날까? 그러나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입니다. 새로운 현실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 다른 두려움 가운데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처럼 연약하게 무릎 꿇고, 아무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기적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큰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 맘 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6절). 전쟁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라 ‘헤렘’ 즉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노래가 혹시 이런 상황을 회상하면서 부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과연 전쟁은 아주 싱겁게 끝이 나버립니다. 이스라엘은 도망하는 적들을 추적하고 소탕하기 바쁩니다(11:7-9). 한 판 싸움이 붙기 전에 두 진영 사이에 팽팽하게 흐르던 긴장감을 길게 서술하던 것과는 지극히 대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야훼’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우박이 내린 것도 아니고, 태양이 멈추어 선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기브온 전투’에서처럼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 전부였습니다(사실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가진 가장 유일한 무기입니다만).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무기를 가지고 적이 그렇게도 의지하고 자랑하는 가장 강력한 최신 병기들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9절).
그러나 아무 죄 없는 짐승들까지 이처럼 무참하게 죽여야만 했을까요? 전차나 말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편에서 보자면 이런 만행(蠻行)도 어쩔 수 없는 작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과 전차가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자비”나 “긍휼”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 모든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행동조차 ‘야훼’ 하나님을 향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9절상). 하나님께서는 적군의 첨단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라고 명령하셨고(6절하), ‘여호수아’는 이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메롬’의 승리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친 김에 그 땅의 북방 한계선 ‘시돈’과, 서쪽 지중해 한계선 ‘미스르봇마임’, 그리고 동쪽 한계선 ‘미스바’까지 밀어붙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궤멸시켜버렸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과 ‘여호수아’의 순종이 없이는 불가능한 성취일 것입니다. 동일한 주제, 동일한 모티브의 반복 또 반복입니다.
하솔과 북방 정벌
북방 정벌의 중심에는 ‘하솔’ 왕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왕국은 이스라엘이 오기 전 수 세기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왔습니다. 화자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 였더니”(10절).
왜 ‘하솔’입니까? 왜 화자는 이 왕국을 특별히 선택하여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일까? 짓궂기도 하고 얄밉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헤렘’의 모티브를 만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지역의 맹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하솔’이 단 하루 만에 그 땅에서 사라져버린 사실을 설명할 방도를 마련해 보라는 화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솔’의 편에서는 치욕적인 일이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야말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이루실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겠지요. ‘하솔’에게 붙어 줄을 잘 못 섰던 다른 왕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이 역시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해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고 알면서도 대항하고, 거부합니다. 줄서기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오늘날 우리를 향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어디에 서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다니는 넓은 길입니까 아니면 불편하고 고독한 좁은 길입니까?
이 모든 과업을 완수함에 있어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다시 한 번 큰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오직 ‘여호수아’만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의 승리를 이룩한 자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5)
그러나 ‘여호수아’를 향한 이러한 극찬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진실조차 숨길 이유는 없는 듯합니다. 화자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하거나 전혀 실패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정복한 북방의 모든 성읍들 중에서 오직 ‘하솔 성’만 불태웠을 뿐이며, 여전히 많은 지역은 정복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수 13:1-6). 이처럼 서로 모순된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그 모든 과업을 다 이루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지도자의 원형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를 통해서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솔로몬’이나 ‘다윗’과 같은 왕들도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에도 따라 살지 못한 백성이 어찌 그의 사후에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나에게는 ‘여호수아’를 능가하는 참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나는 그분의 삶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역할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놓인 영적인 전쟁을 위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과 무엇이 다릅니까? 내가 정복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황무지나 산지나 평야는 무엇입니까?
화자는 이런 나를 향해서 지금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15).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질책이자 권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선택과 유기
화자는 정복지를 요약하면서 ‘가나안’에서 ‘기브온’ 주민 외에는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은 성읍이 하나도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9절). 이들 모두가 하나 같이 마음을 악하게 먹고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진술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20절). 그러니까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이집트’의 ‘바로’ 왕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방식으로 대하셨습니다. 즉 그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 역시 처음부터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가혹한 하나님의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순종” 이지 “자비나 긍휼”이 아닙니다. ‘가나안’과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은 단지 ‘헤렘’일 뿐입니다. 즉 그들은 멸망의 대상 이지 자비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명기>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과는 어떠한 언약도, 결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서도 안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을 망치는 것은 값싼 인본주의적 박애정신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반역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순종은 생명을, 저항은 죽음을.”
화자는 마지막 두 절에서 ‘아말렉’ 족속을 언급하면서 절정의 여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순종으로 ‘아말렉’ 족속까지 궤멸시킬 수 있었다는 진술이 그것입니다(21절). 왜 ‘아말렉’입니까? 이들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 년을 허송하게 만들었던 원흉들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던 자들이었습니다(민 13:28, 33; 신 1:2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역시 전멸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고(신 9:1-3), 그 약속이 비로소 실현된 것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이방 문화에 오염됨이 없이 거룩하고 순수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이스라엘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완강하게 저항하던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들도, 그렇게도 무섭던 ‘아낙’ 거인들도 하나 남김없이 철저하게 궤멸당하고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에 따라, ‘여호수아’를 통하여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실수도 저질렀고, 때로는 어정쩡하게 싸우다 만적도 있었고, 아직도 싸워서 뺏어야 할 땅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 그 땅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남은 숙제가 있다면 노동과 안식을 통해서 서로 나누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여호수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할 ‘가나안’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히 4).
토의 문제
1. 우리가 어느 누구와 약속을 했을 때, 그 약속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서원에 관해서 주신 유명한 충고도 함께 토의해 봅시다. 지난 한 주 내가 약속한 것은 무엇이며 지키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2. ‘기브온’과 ‘아모리’의 다섯 왕들이 취한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해 봅시다. 이들의 선택은 ‘라합’의 선택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라합’과 그녀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비교해 봅시다.
3. 지난 한 주 나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싸워주신 영역이나 체험이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나누어 봅시다.
4. 믿고 따를 수 있는 모범적인 지도자나 조언자가 나에게 있습니까? 있다면 그의 어떤 부분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이 누구에게 그런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까? 각오와 결단을 피력해 봅시다.
제 9과: 아이성을 불사르고
15
제 15과: 슴리의 희생자들
승리의 희생자들
(12:1-24)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1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 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을 따라 그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7절)
누구에게나 싫어하는 과목이 있기 마련입니다. 필자는 수학과 과학 그리고 지리를 가장 싫어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을 싫어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가 있겠으나, 왜 지리과목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외워야 할 지명이나 인명 등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도 한 번도 가본적도 없는 지역의 문화나 기후 풍토 등에 대해서 교실에서 단순히 책을 통해서 배워야 했으니 무슨 흥미와 유익이 있었겠습니까?
이 점은 <성경>을 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 숫자나 가계나 족보 그리고 지명 등이 등장하는 본문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따분함과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은 구성상 아무런 극적 요소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현대 독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경우 그들은 더 이상 오늘날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일이 그 위치를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라 더욱 그러합니다. 모르긴 해도 특별히 성서 고고학이나 역사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가 아니라면 이런 본문을 만날 때마다 피하고 싶은 심정은 비단 필자 뿐만은 아닐 것이라 여겨집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본문을 설교 본문으로 삼고 싶은 설교자는 더더욱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수아서> 12장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무수히도 많은 지명과 인명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자의 관심사는 이러한 지명이나 인명의 목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이 책의 제 1부의 결론으로 삼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본문의 내용에 가장 충실한 가나안 땅의 지도를 본 장의 마지막에 첨부하였습니다(참고서적 2에서 취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염두에 둘 수 있는 일련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책의 제 1부의 주제는 무엇인가?”; “본문은 그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하고 있는가? 즉 본문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특징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는가?”
문학과 역사
본문에 이르러 여호수아서 제 1부는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제 1부의 주제가 ‘땅의 정복’ 내지는 ‘약속의 획득’ 이었던 만큼, 그 사실을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 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1절)
하나는 디르사 왕이라 도합 삼십 일 왕이었더라(24절) 24절에서 전쟁의 희생자들이 모두 31명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야기의 한 단위를 마무리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를 보다 세분해 보면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는데, 1절과 7절에서 각각 유사한 서론에 해당하는 언급으로 단락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개의 단락은 내용 면에 있어 일종의 유사 병행의 관계로 연결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두 단락은 닮은 유사성뿐만 아니라, 뚜렷한 차이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각 단락은 첫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 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1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 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을 따라 그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7절)
바로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본문 전체의 이중적인 기능 즉 회고와 전망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화자는 첫 단락이 강조하는 바가 정복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두 번째 <여호수아서> 제 2부의 주제인 ‘그 땅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본문은 형식상으로는 병행반복의 기법을 따르면서, 내용상으로는 상이한 두 개의 단락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각 단락이 강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물론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는 지명이나 인명을 그대로 단순 복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첫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은 ‘모세’의 지휘 하에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요단’강 동편으로서, 단지 두 명의 왕과 그들이 통치하던 지역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반면 두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요단’ 서편에 관한 이야기로서, 화자는 이곳에서 그 땅 전체를 먼저 개괄한 다음(8절), 기자는 요단 서편 땅을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남방”(8절).
각 지역의 왕들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도합 31명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목록 또한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도 왜 이처럼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학자들은 화자가 아마 두 개의 다른 전승을 참조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으로 첫 번째 단락에 소개한 내용은 <신명기> 1-3장을 참고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은 ‘요단’ 서편 지역의 왕들의 목록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역시 그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이들 목록의 전승과 관련하여 대략 세 가지 정도의 학설이 알려져 있습니다. Butler, T. C. 134쪽(참고도서 1).
첫째는, 10-24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목록은 ‘솔로몬’ 왕 당시 존재했던 요새(要塞)들을 대표하는 것이며, 9절의 내용은 단순히 <여호수아> 6-8장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는, 이 모든 이름들이 <민수기>나 <여호수아서>에서 다루고 있는 초기 ‘가나안’ 정복 이야기 속에 보존되어있던(당시 기자에게는 알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내용일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세 번째로, 아주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여호수아서> 1-11장의 내용과 불일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 대한 지리적 묘사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정확하고 상세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9절은 이 책의 6-8장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있으며, 10-12절은 10:3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여리고 왕이요 하나는 벧엘 곁의 아이 왕이요(9절)
하나는 예루살렘 왕이요 하나는 헤브론 왕이요 하나는 야르뭇 왕이요, 하나는 라기스 왕이요, 하나는 에글론 왕이요 하나는 게셀 왕이요(10-12절)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보내어 가로되(수 10:3)
일부 학자들은 10장에 소개하고 있는 이름들은 12장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오히려 화자는 12장을 기록함에 있어 이전의 전승을 참고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는데, 1-9장의 기록 방식이 이런 입장을 지지해 주는 듯합니다.
12절에 보면 ‘에글론’ 다음으로 ‘게셀’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10:33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에 게셀 왕 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오므로 여호수아가 그와 그 백성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라기스에서 에글론으로 나아가서 대진하고 싸워(10:33-34). ‘게셀’이 ‘라기스’와 ‘에글론’에 이어 멸망을 당했다고 이 구절이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드빌’이 13절에 등장하고 있는데 10:36-38에서 다루고 있는 순서와 흡사합니다. 이런 저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12:14-24에서 제공하고 있는 정보들은 <여호수아서> 외의 전승에 의존한 것처럼 보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요단 동편 이야기(1-6절)
화자는 ‘요단’ 동편을 언급하면서 단지 두 명의 왕(‘시혼’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그들이 통치하던 지역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우선 이스라엘이 정복하여 취한 ‘요단’ 동편의 북쪽 한계를 ‘헬몬’ 산으로, 남쪽 한계를 ‘아르논’ 골짜기로 규정한 다음, 그 두 지역 사이에 두 왕국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 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수 12:1). 신명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제어 기능을 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 1:1; 4:44; 28:69.
당시 ‘팔레스타인’의 지도를 보면, 이 두 지역을 경계로 그 사이에 네 개의 큰 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는데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이르기까지 차례로 ‘예렛’ 강, ‘아르논’ 강, ‘얍복’ 강, 그리고 ‘야르묵’ 강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강을 경계로 하여 ‘에돔’, ‘모압’, ‘암몬’, ‘길르앗’, 그리고 ‘아람’ 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시혼’이 통치하는 ‘아모리’ 왕국은 ‘헤스본’을 중심으로(2절), 동쪽으로는 ‘얍복’ 강 하류를 경계로 ‘암몬’족과 대치하며(2절하), 남과 북의 한계는 각각 ‘아르논’ 강과(2절) ‘얍복’ 강(내지는 ‘긴네롯’ 바다 즉 오늘의 갈릴리 호수)까지 이르고 있었습니다(3절): 시혼 왕국의 지역적 경계에 대해서 2-3절에서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으나 정확치는 않습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다음 두 서적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참고 도서 1과 2).
헤스본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이라 그 다스리던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성읍과 길르앗 절반 곧 암몬 자손의 지경 얍복강까지며, 또 동방 아라바 긴네롯 바다까지며 또 동방 아라바의 바다 곧 염해의 벧여시못으로 통한 길까지와 남편으로 비스가 산록까지며(2-3절)
이스라엘이 이 왕국을 취했다는 이야기는 <민수기>에 처음 등장하고 있고(민 21:21-30), <신명기>에서 다시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신 1:4; 2:24-37; 29:7-8).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에서 이 왕국을 궤멸했다는 소식은 근처 ‘요단’ 서편에 살고 있던 ‘기브온’ 족속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며(수 2:10; 9:10), 이후 이어지는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는 초석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혼’ 왕이 다스리던 지역에 대해서 비교적 길고 상세하게 설명한 것과는 달리, ‘바산’ 왕 ‘옥’에 대해서는 간단히 처리하고 있습니다. ‘바산’ 왕국은 ‘시혼’ 왕국에 비해 ‘야르묵’ 강 이북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북으로는 ‘헬몬’ 산까지 그 경계가 이르고 있었고(5절상), 남쪽 경계는 2절에서 그대로 취하여 ‘길르앗’의 북쪽 절반으로 ‘시혼’ 왕국과 그 경계를 삼고 있었습니다(5절하).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얍복’ 강 남북 지역을 지칭하는 다소 애매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쪽 경계는 ‘살르가’로서 아마도 오늘날 ‘살카드’로 불리는 방어기지가 있는 곳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옥’을 ‘르바임’의 남은 족속이라고 부르고 있는데(4절), 이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으며(창 14:5; 15:20), ‘바산’ 왕국도 이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신 3:13; 수 17:15). 전승에 의하면 여러 다른 족속들이 ‘르바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신 2:11, 20),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족속이 ‘옥’이었던 것 같습니다(신 3:11; 수 13:12). ‘아스다롯’은 이 왕국의 가장 큰 도시였던 것이며, 갈릴리 바다 동쪽 약 30 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약의 여러 곳에서 이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창14:5; 신1:4; 수 9:10; 13:12, 31; 대상 6:56).
‘바산’ 지역은 전체적으로 땅이 비옥하고(암 4:1), 산과 숲이 많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사 2:13; 33:9). 그래서인지 이 지역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윗 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이 가능했던 곳입니다(삼상 27:8; 삼하 10:6-14). 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술’ 사람과 ‘마아가’ 사람이 바로 그들로서 이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상당 기간 동안 그곳에서 내쫒기지 않고 살았습니다(13:2, 13). 다윗은 후에 ‘그술’ 왕의 딸을 ‘압살롬’의 아내로 맞아들이기도 했으며(삼하 3:3),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킨 후 이곳으로 도망하기도 했습니다(삼하 13:37-15:8).
2. 요단 서편 이야기(7-24절)
두 번째 단락에 이르러 화자의 서술 방식이 약간 달라지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단지 두 사람의 왕에 대해서만 언급하면서 그들이 다스리던 영토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던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모든 지역과 그곳의 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록에 소개하고 있는 순서는 대략 그동안의 정복 이야기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만(6-11장), 새로운 이름도 간혹 등장하기도 합니다.
우선 ‘여리고’와 ‘아이’의 왕을 가장 먼저 소개하면서, ‘아이’ 성 곁에 ‘벧엘’이 있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 지역 역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9절). 이어서 ‘예루살렘’과 함께 남부 동맹을 결성했던(10:3, 23) 다섯 도시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기스’, ‘에글론’(10-12절). 단지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게셀’ 왕은 ‘라기스’를 도와 이스라엘에 대항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10:33). ‘드빌’(13절) 역시 다섯 도시 연맹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남방 정벌 시에 함께 소탕한 지역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10:38).
이어서 등장하는 세 이름 ‘게델’(13절) 및 ‘호르마’와 ‘아랏’(14절)은 앞의 이야기에서는 없었던 이름들입니다. 혹자는 ‘게델’이 ‘게셀’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필경(筆經) 상의 오류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만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호르마’는 이스라엘의 영욕이 어린 곳으로서 승리와 패배를 함께 경험했던 곳이기도 합니다(민 14:45; 신 1:44; 민 21:3). ‘호르마’는 유다 남방에 위치한 곳으로서(수 15:30) 나중에 ‘시므온’ 지파에 속하게 됩니다(19:4). <사사기>는 ‘유다’와 ‘시므온’이 힘을 합하여 이 지역을 점령했다고 전합니다(삿 1:17). 후에 이곳에서 ‘다윗’은 왕으로서 추대받기도 합니다(삼상 33:30). ‘아랏’은 항상 ‘호르마’와 함께 등장하고 있는데(민 21:1-3) ‘겐’ 족이 이곳에서 정착하여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삿 1:16).
‘아둘만’(15절)은 유다 남쪽의 한 도시로서(5:35; 느 11:30) <미가서>에서 멸망의 운명을 받은 한 도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믹 1:15). 이곳 근처 한 동굴에서 ‘다윗’이 숨어 지내기도 했으며(삼상 22:1; 삼하 23:13), 그보다 더 오래는 <야곱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창 38). ‘립나’와 ‘막게다’(15절)는 남방 정벌 이야기(10:28-30) 때의 순서와는 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답부아’(17절)는 두 지역의 이름으로서 한 곳은 ‘유다’ 땅 내에 있는 한 도시의 이름이고(15:34), 또 한 곳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경계에 있었던 도시 이름이기도 합니다(17:7-8; 1:8). 이곳에서는 후자를 일컫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헤벨’은(17절) ‘므낫세’ 지파 중의 한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서(민 26:33; 27:1; 수 17:2-3), 열왕기에서 다시 이 지역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왕상 4:10).
‘아벡’(18절)은 ‘야르묵’ 강 입구 근처인 것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거명하고 있는 ‘랏사론’은 ‘샤론’ 평야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다낙’(21절)은 ‘므낫세’ 지파의 요단 서쪽에 속하는 지역으로서(수 21:25), 이스라엘이 한참 후에나 정복한 곳입니다(삿 1:27). 그 유명한 ‘메기도’ 전투가 있었던 곳이며(삿 5:19), ‘솔로몬’ 재위 시에는 왕에게 식물을 바치기 위해서 제정했던 열두 관장 중의 하나였습니다(왕상 4:12). ‘게데스’(22절)는 여러 지역을 칭하는 이름으로서 본문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가려내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욕느암’(22절하)은 ‘스불론’ 경계에 위치해 있었으며(19:11) ‘레위’ 성읍 중의 하나였습니다(21:34). ‘돌’ 왕에 대한 표현, “돌의 높은 곳의 돌 왕”(23절)의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함께 소개하고 있는 ‘길갈’은 <여호수아>에서 여러 차례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입니다. 이 성읍은 ‘가나안’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길갈’의 ‘고임’ 왕은 <사사기> 4장에 등장하고 있는 ‘하로셋-하고임’ 이라는 이름의 일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디르사’는 중앙 고지의 여러 도시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며(16-17절), 이 이름을 ‘므낫세’ 지파의 가계 중에서 한 여자의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민 26:33; 27:1; 36:11; 수 17:3). 후에 이곳은 북 왕국의 수도로 잠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왕상 14:17-16:23).
교훈 및 적용
지난 1992년 미국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 ‘부시’를 누르고 무명의 ‘알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을 당선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한 구호가 있습니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Stupid, It's Economy)!” 당시 걸프전 승리로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부시’가 경제 실정을 외면함으로써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는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이 글의 일부는 장훈 교수님의 칼럼에서 그대로 취한 것입니다(조선일보, 2002년 3월 1일, 제 6면).
역사는 반복하는 것인지 그의 아들인 현직 ‘부시’ 대통령도 역시 아버지와 비슷한 운명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들 부시 대통령의 최대의 실책은 “이라크 침공”이라는 데 이견을 다는 이가 많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도 대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 당의 대선 후보는 TV 토론회에서 소위 “스마트 공약”이라 하여 한 결 같이 “문제는 경제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특정 후보는 자신이 경제 전문가임을 내세워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과연 한국의 작금의 문제가 경제적인 것입니까?
<여호수아서>의 화자 역시 오늘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모르긴 해도 그가 처한 상황은 한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갈라져 적대국으로 마주하고 있었거나, 또는 두 나라 모두 외세에 의하며 멸망을 당하고 나라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남의 땅 ‘바벨론’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던 상황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내리는 처방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그 역시 오늘날 각 정당 후보들처럼 “문제는 경제야!”하며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1. 요단 동편 이야기(1-6절)
요단 동편 정복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모세’의 지휘 아래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입니다. ‘모세’는 그 땅을 이스라엘의 두 지파 반에게 이미 할당해 준 바 있습니다(신 3:12-13; 수 13:8-32). 따라서 화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도 다시 한 번 수고스럽게도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은 결국 첫 번째 단락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기능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 양 팀은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한반도를 그린 깃발을 들고 입장한 바 있습니다. 그 의도도 좋았고, 각국의 반응 또한 열렬했습니다. 평화와 화해의 대제전에 걸 맞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은 원래 남이 아니고 단일 민족이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 그 깃발에 독도가 빠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에 항의도 하고 개탄도 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냐는 것이죠. 그렇잖아도 일본이 심심하면 자기 땅이라고 우겨대는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그 땅을 빼버렸으니 참으로 경솔했고 한심한 일이었다는 것이겠지요. 최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우리가 일본 영토인 독도를 강점하고 있다는 점을 국가의 공식 견해로 채택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헌법에도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의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북통일이나 연합에 지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점 화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그 땅을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이스라엘인가? 그 나라 속에 누가 포함되어야 마땅한가? 열두 지파인가 아니면 요단 동편에 살게 될 두 지파 반을 뺀 나머지 지파들인가?”
대한민국 지도에 독도가 포함됨이 마땅합니까? 독도는 우리 땅입니까? 그렇다면 ‘요단’ 동편의 땅도 이스라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 역시 이스라엘입니다. 비록 그들이 ‘요단’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누어 살고 있지만, 분명 그들은 한 분 하나님의 하나의 백성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봅시다: “독도가 우리 땅인 것과 마찬가지로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의 땅입니다. 북한의 주민이 우리와 동일한 한민족인 것처럼 요단 동편에 살고 있는 두 지파 반 역시 하나의 이스라엘 족속입니다.”
화자가 ‘가나안’ 땅을 이야기하면서 왜 ‘요단’ 동편도 포함시키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바로 여기에 첫 번째 단락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1절은 문학적으로는 일종의 표제어와 같은 기능을 하면서 이야기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편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방 온 아라바를 점령하고 그 땅에서 쳐 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수 12:1)
화자는 말합니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땅인 것과 마찬가지로 ‘요단’ 동편도 이스라엘의 땅입니다. 북한의 주민이 동일한 한민족인 것처럼 ‘요단’ 동편에 살고 있는 두 지파 반 역시 하나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오, 그 땅도 하나이며, 이스라엘도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공동체 여러분, 지금 우리 앞에는 정복하고 차지해야 할 땅이 광활하게 널려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흩어져 살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말입니다. ‘요단’ 동편이 이스라엘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 ‘모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고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 땅을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더라(6절)
2. 요단 서편 이야기(7-24절)
‘모세’를 통해서 그 땅의 동편을 주신 하나님께서, 나머지 서편 지역도 ‘여호수아’를 통해서 모두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구별을 따라 그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7절)
수차례 언급하였듯이 이 선언은 1절과 6절에 병행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을 지휘하여 ‘요단’ 동편의 땅을 정복했던 것처럼, ‘여호수아’ 역시 충실하게 그의 모범을 따라 ‘요단’ 서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이스라엘의 지파를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화자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가장 모범적인 지도자로서 ‘모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가 정복한 서른 한 개의 지역과 그 왕들에 대한 긴 목록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따랐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화자의 마지막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체 여러분,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와 함께 하는 신실한 믿음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돌아갑시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신실한 지도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지금 찾고 계십니다. 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여호수아’의 모범을 보입시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유난히도 인명과 지명이 많은 곳입니다. 본문이 <여호수아서> 제 1부의 결론이 되어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참고로, 이 책 제 1부의 주제는 “그 땅을 정복하라”입니다.
2. 본문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3. 화자는 본문에서 ‘요단’ 동(東)과 서(西) 편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의도를 파악해 봅시다.
제 2 부
그 땅을 나누어라
(13-19)
<여호수아서> 13-19장은 책의 제 2부에 해당합니다. 그 땅을 정복하였으니 남은 과제는 당연히 그 땅을 나누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용이 온통 지명이나 지역, 그리고 경계선 등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들 이름이 현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의 독자들에게조차 무슨 의미나 교훈이 되었을까? 만일 그 독자들이 바벨론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라면 이 본문을 통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땅에도 신학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땅과 관련해서 책의 2부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땅을 나누되,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별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땅 전체를 소개하면서 지파별로 일목요연하게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가 그 형식을 결정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 2부의 기술 형식은 그 주제를 충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당시 그 땅에 살고 있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지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화자는 외칩니다: “저기 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있고, 우리가 얻게 될 땅은 그야말로 무궁무진 합니다. 그 옛날 ‘여호수아’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다면, 그가 그 땅을 정복하여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광개토 대왕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오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고 있다면 저 넓은 만주 땅도 어렵잖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평양 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그만” 이라는 우리네 경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 앞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땅을 차지하고 싶은 의사가 그들에게 없다면 그 땅은 여전히 남의 것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가 약속하셨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억지로 꺾어가면서까지 뜻을 관철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이방에서 유배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나 ‘갈렙’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쫓아 기꺼이 순종한다면, “출애굽”의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차지해야 할 땅은 지천에 널려있습니다.
새로운 ‘여호수아’는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정복할 땅을 사리사욕으로 혼자 취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특정 계급이나 지파에게 특혜를 주지도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불편부당하게 골고루 나누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모두를 위해서 마련해 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들은 단지 임차인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지도자나 왕도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여 이 점을 잊지 말지어다!
제 2부에 들어서도 여전히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책 전체의 모티브나 주제를 계속해서 발견하고 맛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제 16과: 네 가진 나누라
16
네 가진 것을 나누라
(13:1-7)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1절)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7절)
문학과 역사
본문의 문학적 기능은 제 2부 전체에 대한 요약 내지는 개괄적 서술입니다. 우선 내용이 그렇고, 형식상으로도 첫 절에서 새로운 내용이 등장하고 있으며, 본문의 끝에 등장하고 있는 ‘야훼’ 하나님의 일인칭 명령문은 8절의 화자 자신의 진술(역사적 회고)과는 분명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8절에서부터 하나님은 삼인칭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락 구분은 더욱 용이해 집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1절) 제 1절은 형식상 23:1이나 1:1처럼 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준다는 데에 있어 아주 유사한 표현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23:1).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7절)
이처럼 본문 내용이 전후의 다른 문맥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 본문이 원래 속해있던 전승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작업은 그렇게 용이하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특히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이 책의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상이하고, 때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내용 상 혼란스럽거나 상호 모순되는 내용들을 간추려보면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정복한 땅에 대한 진술과(10:40-43) 아직 남아있는 땅에 대한 진술(11:16-23 및 본문)이 서로 모순을 보이고 있음. 두 본문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정복한 땅에 대한 진술: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10:40-43); (2) 남아있는 땅에 대한 진술: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부터 ‘헤르몬’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 까지라 그 모든 왕을 잡아 쳐 죽였으며,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16-23).
(2) 정복하지 않고 남아있는 땅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미흡함.
(3)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곳이 자주 발견됨:
(가) 급하게 재촉하듯 두 번에 걸쳐 땅을 나누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어(6-7절) 곧바로 ‘요단’ 동편 땅에 대한 회고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점(13:8-33),
(나) 제 2부의 마지막 부분에서(18-19장) 일곱 지파의 땅 분배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고 있음.
책의 제 1부(1-12장)와 제 2부(13-19장)가 각기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면 이런 모순이나 부자연스러움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버틀러’(C. T. Butler)에 의하면, 제 1부의 내용은 보다 오래된 구두전승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최종적으로는 <신명기>적 편집과정을 통해서 1-12장의 내용의 일부로서 정착되었으며, 한편 제 2부의 출처는 대대적인 편집 작업의 결과로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신 1-왕하 25) 보다 광범위한 <신명기> 전승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도서 1, 146-147쪽). 구두 전승의 양식은 그래서 책의 2부에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3장은 이 책의 전환점이 되는 곳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고 있는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의 변화는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의 서두에서(1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2-12장을 통해서 정복전쟁으로 구체화되고 있으며, <사사기> 1장과 ‘다윗’의 통치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삼상 30; 삼하 5; 8; 10).
각 전승의 문학적인 특징이나 신학적인 강조점이 다르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로써, 13장에 이르면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강조점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 1부의 주제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싸우고 투쟁하면서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다면, 제 2부에서는 그 이후의 문제 즉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문제로 고심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하여 책의 구성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고, 복잡한 편집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그 땅에서의 삶에 관한 주제는 책의 후반부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 주제는 23장부터 시작되고 있어 우리는 그 사이에 10장에 걸쳐서 길고도 지루한 땅의 분배에 관한 내용을 먼저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늙어버린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도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처해있는 상황은 옛날 ‘요단’ 동편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서있는 ‘모세’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모세’는 그곳에서 고별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의 요지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신 33-34). 우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나라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그 백성을 권면하고 축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설교의 성격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역사적 회고와 전망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 여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다시금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역할이 있는 바,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 그들이 정복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내일 그곳에서”에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를 백성들 앞에서 설교할 것입니다(23장). 책의 후반부에 들어오면서 이처럼 달라진 상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우리를 곧바로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의 고별 설교를 들으려면 열장에 걸쳐(13-22장), 지루하게 소개하고 있는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처럼(각주 4), 이곳 제 2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은 일련의 전승들을 바탕으로 한 의도적인 편집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전승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 반)의 정착에 관한 자료(민 32; 신 3:12-22); (2)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의 경계에 관한 전승(민 34; 수 1; 참고, 왕상 8:65); (3) 여전히 남아있는 땅에 대한 전승(삿 1).
그 첫 시작을 읽어봅시다:
1하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6후너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7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라(1절후; 6후-7절)
‘여호수아’는 설교 이전에(23:1) 정복한 땅을 먼저 나누어주어야 합니다(14-21).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자세에 대한 설교를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의 요지는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현 상황에 대한 진단(1절)
2) 아직 남아있는 땅에 대한 언급(2-5절)
3) 궁극적으로 완성하게 될 땅의 정복에 대한 약속(6절상)
4) 여호수아의 당면한 과제와 즉각적인 수행에 관한 독려(6절하-7절)
신학과 신앙
1. 진단(1절)
화자는 신학적 긴장을 조성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1절)
긴장이라 함은 다름 아닌 <사사기>나 <신명기> 등에서 중심 되는 주제로 발전하고 있는 그 땅에서의 이방인과 더불어 살게 됨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긴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자는 느닷없이 아직도 그 땅이 완전히 점령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역사적 사실로써 그냥 선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강조하고자 바는 다른 데 있어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책의 제 1부에서(1-12장) 다룬 바 있는 주제와 동일한 주제를 다시 끄집어내고자 함인데, 다름 아닌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여호수아’에게는 이루어야 할 과업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도합 서른 한 명의 왕들을 다 죽이고 그 땅을 완전히 평정했다고 직전의 구절에서 언급하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12:24), 이 선언은 분명 앞의 진술과는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여호수아’가 이제 너무 늙어 그 일을 다 이루기에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보냈고(11:18),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였습니다(11:15).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 있다면 무슨 새로운 과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이루어 놓은 일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정복한 땅을 나누는 일을 말할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화자는 일단 남은 지역을 언급함으로써 독자의 주의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2. 남아있는 땅(2-5절)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보듯이, 남아있는 땅은 크게 지역별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블레셋’ 땅과 그의 남방 동맹국들(2-3절)
(2) ‘시돈’ 등을 포함한 ‘페니키아’ 해변 지역(4절)
(3) ‘레바논’의 북방 산악지대(5절)
그 땅을 이런 식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처음 독자들의 삶의 자리는 ‘다윗’이나 ‘솔로몬’ 왕 재위 당시에 이루어야 할 과업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블레셋’은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 모두 정복이 되었고(삼상 27:2; 삼하 8:1; 21:15-22; 23:8-17), ‘페니키아’ 해변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다는 기록은 <사무엘서>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삼상 24:6-7). 그리고 ‘솔로몬’은 ‘다윗’이 ‘시리아’ 인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거둔 승리를 바탕으로 ‘레바논’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삼하 8:3-12; 10:1-19).
‘블레셋’ 땅이라 함은 그 주변의 여러 지역을 포함해서 부르는 이름이기도 한데, <사사기>나 이스라엘의 왕정 초기에 이들 족속이 당시 행사했을 정치, 군사적인 영향력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참고: 삿 3:31; 10:6-7; 13-16; 삼상 4:7; 13-14; 17-19; 23:1-6, 27-28; 27-29; 31:2; 삼하 5:17-25.
<여호수아서>에서도 이들이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11:22).
이들은 원래 “해양 족속”으로서 소아시아 동쪽과 ‘크레테’(Crete) 섬으로부터 이주해 와서 주전 12 세기경에는 다섯 개의 거점 도시에서 정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3절). 그러다가 주전 604년에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하여 추방당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편 ‘그술’ 족은 북방 ‘시리아’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두 지파 반이 정복한 지역이기도 합니다(신 3:14; 수 12:5; 13:11-13). ‘다윗’은 정략결혼을 통해서 비로소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나(삼하 3:3; 대상 3:2), 이후 ‘압살롬’이 반란에 실패한 후 피신처가 되기도 했습니다(삼하 13:37-38).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다윗’이 ‘시리아’ 거민들과 전쟁을 치룰 때, 이 지역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삼하 8, 10). 아마도 사돈뻘이 되었던 족속들이 살던 지역이니 만치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술’ 족도 아마도 이 지역에 살던 거민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보다는 ‘다윗’이 공격했던 ‘블레셋’ 남쪽 지역에 살던 족속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듯싶습니다(삼상 27:8). 화자는 ‘블레셋’과 ‘그술’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방 에그론 지경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방백의 땅 곧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 가드 사람과 에그론 사람과 또 남방 아위 사람의 땅과(3절)
즉 남쪽으로는 ‘이집트’ 변경 ‘시홀’에서 북쪽으로는 ‘에그론’까지 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지리를 알기 위해서는 성서지도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이몬 젠킨스’, 「성경과 함께 보는 지도」, 박현덕 역. 서울: 목회자료사. 1990.
이러한 지역 구분에 따르면 ‘그술’ 족은 ‘가사’ 지역에서 남방 ‘이집트’ 국경까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자가 ‘시홀’을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신명기 전승> 내에서 다른 전승들과는 뚜렷이 구분되고, 오직 <역대하>의 기록하고만 연관이 있는 어떤 전승을 인용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참고, 대하 13:5). 이 구절에 따르면 ‘시홀’은 ‘이집트’의 남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언급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이집트’의 국경 내까지 확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여 집니다. 아무튼 이 지명은 ‘사울’과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오게 됩니다.
한 편 ‘에그론’ 지경에 살았다는 ‘가나안’ 사람에 대한 언급은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원래 이 땅 전역에 흩어져 살던 일곱 족속 전체를 ‘가나안 족속’으로 지칭하기는 했지만(민 13:29; 신 1:7; 수 5:1; 11:3), 한 때 이 해안 지역을 가나안에 속한 것으로 기록한 특별한 한 전승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신명기>-<여호수아> 중에서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요단’ 서편의 전 지역을 ‘가나안’으로 부른 경우도 있습니다(수 22:9-11, 32). 본문과 일부 다른 곳에서는(신 11:30; 32:49; 수 5:12; 14:1), 이 지역 속에 ‘블레셋’과 ‘그술’까지 포함하여 보다 광범위한 지역을 총칭하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이 지역을 이스라엘의 영토와 ‘가나안’의 영토로 구분하고 있는 데, 이는 후에 이 두 세력 간의 충돌과 마찰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섯 개의 도시 국가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이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가사’는 ‘삼손’ 시대에 ‘다곤’ 신전이 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삿 16:23-30). 원래 이 지역은 이집트의 ‘아마르나’ 왕조 시대에는 그 지역에서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여호수아가 나중에 정복하게 됩니다(수 10:41). 그러나 이후에도 이 지역에는 여전히 ‘아낙’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수11:22). <사사기>에 의하면(삿 1:18), 이 지역은 ‘유다’에게 할당되었으며,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왕상 5:4) ‘가나안’의 서쪽 경계로 굳어지게 됩니다.
‘아스돗’은 오늘날 ‘이스둣’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고대 ‘아스글론’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14 킬로미터, 그리고 현대의 ‘아스돗’으로부터 육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유가리트’ 문헌에 의하면 이 지역은 직물 산업이 번창했으며, 이곳에 있던 ‘다곤’ 신전은 후에 하나님의 법궤로 인하여 큰 수난을 겪게 됩니다(삼상 5:1-9).
‘아스글론’은 ‘가사’와 ‘아스돗’의 사이에 위치해 있고 ‘블레셋’의 도시로는 유일하게 해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문헌에 의하면 이 도시는 ‘라암세스 2세’가 저주를 내린 여러 도시 중 하나였으며, 이집트의 신 ‘프타’(Ptah)에 대한 제사 의식이 비롯된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아마르나’ 왕조 시대에는 ‘아스글론’ 왕이 ‘바로’에게 전적인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드’는 오늘날 그 정확한 위치 확인 문제와 관련하여 성서 고고학자나 지리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참고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1, 150쪽).
이 지역에서도 하나님의 법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삼상 5:8-9). <사무엘서>에 의하면(삼상 7:14), 선지자 ‘사무엘’이 ‘에글론’과 함께 이 지역을 이스라엘에게 복속시켰으며, 이스라엘은 ‘가드’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써 ‘블레셋’ 족을 그들의 본거지 ‘가드’와 ‘에글론’까지 밀어부칠 수 있었습니다(삼상 17). 다윗은 그가 ‘블레셋’으로부터 ‘시글락’을 선물로 얻을 때까지 ‘가드’ 왕과 함께 지내기도 했으며(삼상 27:1-7), 결국 이 지역을 전쟁으로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만(삼하 21:20-22), ‘블레셋’의 왕은 여전히 ‘솔로몬’ 시대에도 ‘가드’에 남아있었습니다.
‘에글론’ 역시 정확한 위치 확인 문제로 고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유다’가 이 성을 얻기도 했으나(15:45-46), ‘단’ 지파의 몫이기도 했습니다(19:43).
‘블레셋’에 속한 다섯 도시에 이어 ‘아위 사람의 땅’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신명기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블레셋’에 속한 ‘갑돌’ 사람이 이들을 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신 2:23). 이어지는 설명은 다소 애매합니다:
또 가나안 사람의 온 땅과 시돈 사람에게 속한 므아라와 아모리 사람의 지경 아벡까지와(4절)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나안’ 사람은 좁은 의미로는 북쪽 해안 ‘페니키아’에서 남쪽을 ‘아벡’까지 이르는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아모리’ 사람의 땅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아모리’ 사람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산악 지대에 살았다고 합니다(민 13:29; 수 5:1). ‘므아라’ 사람이 살았다는 지역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한 채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아벡’은 성경에서 여러 지역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1) ‘아셀’ 지파에게 할당되긴 했지만 그들이 정복하지 못한 땅으로서(19:30; 삿 1:31), ‘아코’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2) ‘요단’ 동편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도시(왕상 20:26-30; 왕하 13:14-19, 25); (3) ‘레바논’의 고대 ‘비블로스’로부터 동으로 15 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아프카’에 해당함; (4) 이 이름으로 가장 잘 알려진 지역으로 ‘샤론’ 평야에 위치했던 한 도시 국가의 이름. 그리고 이어지는 5절은 북쪽 한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그발 사람의 땅과 동편 온 레바논 곧 헤르몬산 아래 바알갓에서부터 하맛에 들어가는 곳까지와(5절)
이 지역은 ‘그발’에 있는 ‘시돈’ 이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서 모세가 일찍부터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땅이었습니다만(신 1:7; 3:25; 수 1:4), 여호수아 당시에도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있었습니다(수 11:17; 12:7). ‘솔로몬’ 당시 국경이 북으로 ‘레바논’까지 미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왕상 8:65), 이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영토로 편입된 듯합니다.
3. 약속(6절상)
마지막으로 6절은 그동안 언급한 지역 모두를 요약하고 총칭하는 듯 보입니다만, 실은 고작해야 4-5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6절상)
‘시돈’이라 함은 ‘레바논’ 계곡과 ‘페니키아’ 해변 지역을 일컫는 것이며, ‘미스르봇마임’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북쪽 땅의 한계를 일컫는 것입니다(11:8). 그러나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동일한 모티브를 담아내고 있음을 놓칠 수 없습니다.
4. 독려(6절하-7절)
그러나 두 번째 단락의 주제는 ‘요단’ 서편의 땅을 나누는 일입니다. 강의 동편에 사는 두 지파 반은 이미 그들의 몫을 받았으므로, ‘여호수아’가 새롭게 해야 할 일은 서편 땅을 나머지 지파들에게 나누는 일로서, 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찍이 부과하셨던 일이기도 합니다(민 26:52-56). ‘여호수아’가 새롭게 수행해야 할 이 과업이 그 땅을 정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화자는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너는 나의 명한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6절하-7절)
이 일은 앞으로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임을 문장의 분위기를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화자는 즉각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은 요단 동편에 관한 또 한 번의 회고입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교훈과 적용
1.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전쟁은 끝이 났고, 백성들은 승리했습니다. 남은 과제가 있다면 그 땅을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정복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23절).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수행해야 할 숙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즉 아직도 그 땅에는 이방인들이 수두룩하게 여기저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2-6절상). 아직도 이방인들의 수중에 들어있는 땅에 대한 묘사를 보면, 지역별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쪽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땅과 그들의 남쪽 동맹국들(2-3절); (2) 북서쪽 지중해 연안 ‘시돈’을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 해변;.(3) 북쪽 ‘레바논’ 산악지대(5절) (지도 참고).
전쟁이 끝났으면 마땅히 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스라엘만이 새 주인이 되어 살고 있어야 마땅할 텐데, 현실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앞 이야기의 결론과도 맞지가 않습니다. 화자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입니다. 그냥 사실로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화자는 마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어떻습니까?: “과연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이 땅을 계속 차지하고 유지할 의지라도 있었을까?”; “말(馬)을 물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 그만 일 텐데 하나님의 언약도 그러한 것일까?”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독특한 방식, 즉 인격적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주제는 하등 새로울 것은 없으나, 그의 뜻을 드러내거나 인도하시는 방식이 인격적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두 권의 탁월한 저서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달라스 윌라드’.「하나님의 음성」. 윤종석 역. 서울: IVP, 2001; (2) ‘게리 프리슨’. ‘로빈 맥슨’. 「하나님의 뜻과 자유의지」. 장동민 역. 서울: 아가페, 1991.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납니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부여받고 태어난다는 말이겠지요. 마찬가지로 기회도 역시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마지막을 꼭 같이 장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쉬운 예로 마라톤 경주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같이 출발하지만 일등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꼴찌가 있고, 아예 중도에 포기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각 개인의 타고난 능력이나 체질이라고 하는 선천적인 요소, 즉 다분히 운명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어쨌든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그 목표지점에 어떻게 당당하게, 멋있게, 그리고 힘차게 도달할 수 있을까(물론 이 질문마저도 천국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만 묻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이 또한 운명적일까?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만일 모든 것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경기는 처음부터 불공정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천국의 운명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흔히 이중적이라고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약속”과 그리고 “아직 이루어질 약속”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점을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후)
이 구절의 앞부분은 우리가 “이미 얻은 생명”에 관한 약속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계속해서 얻어야 할 그의 생명”에 관한 약속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자로’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 하셨을 때, 그들은 분명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늦게 오신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모순된 이 여인들의 태도를 대하면서 그들이 부활에 대해서 지극히 단편적이거나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부활은 죽음 이후에나 맞게 될 미래형 부활이었던 것 같다는 것입니다(요 11:24).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들의 믿음도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알고 있는 “생명”은 늘 미래형에 속한 것이지, 현재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 생명은 항상 현재형 내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은 “늘 스스로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도 이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나자로야, (지금 당장) 일어나라!”(요 11:43).
이제 다시 <요한복음> 10:10에서 선포하고 있는 유명한 이중적 약속으로 돌아가 봅시다. 약속의 앞부분은 누가 한 것이며, 뒷부분은 누가 한 것입니까?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고, 뒷부분은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반드시 독재나 전횡(專橫)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의 방식은 늘 “인격적 방식”입니다. 인격은 강요나, 폭력이나, 또는 억압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내 의사가 무시당하고, 강요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독재자를 싫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는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하거나, 마음에도 안 드는 옷을 억지로 사 입히는 부모님이 혐오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런 식으로 자식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지요.
그런대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모순된 태도를 보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싫다는데도,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사코, 억지로 주신다는 잘못된 믿음이 그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주권적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그랬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감격스럽고 고맙기 보다는 귀찮고 짜증스럽습니다. 모태신앙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아담’ 역시 모태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에덴’동산에 잘 차려놓은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강렬하게 원하던 것을 힘써 구한 것이 아니면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우리가 공기나 태양에 대해서 늘 감사하며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나’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박 넝쿨이 강렬한 태양열 때문에 말라죽어 더 이상 더위를 피할 곳이 없자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비인격적인 방법”이란 것도 있습니까? 죽은 사람에게 영약을 투입하여 살려내는 등과 같은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방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며 보호해 주시던 그러한 방식은 어떻습니까? 도움을 받는 사람의 의지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이런 식의 방식을 “비인격적 방식”으로 불러 마땅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는 우리가 참여할 필요가 없고, 의견을 말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지닌 상상력이나 창조적 사고에 의지하여 모험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고, 그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는 항상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성취감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늘 우리의 참여의 몫을 남겨두십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주 극찬의 칭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이 없는 것을 싫어합니다.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발령은 다름 아닌 “대기발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기발령 상태로 두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대기발령 상태로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2. 네 가진 것을 나누라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나 성취감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더 정확하게 질문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떤 성취감이나 풍성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도록 초청하는 것일까? 원수의 마지막 한 명까지 쳐서 무찌르라고 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도자 ‘여호수아’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달라진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너무 늙어 전쟁을 수행하기조차 어렵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언제 이처럼 여호수아가 늙어버린 것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대할 수 있는 바는, 40년 전처럼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면 될 것입니다(신 31, 34장). 그리하여 새로운 지도자가 이스라엘을 다시 독려하여 남은 전쟁을 마저 수행해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재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는 새로운 지도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숙제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숙제란 그 땅을 공평하게 백성들 사이에서 나누어 갖는 일이며, ‘여호수아’가 그 책임을 맡아서 새롭게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지도자 ‘여호수아’의 헌신이 필요할 때가 왔습니다. 이번에도 요구되는 것은 무슨 새로운 자질이 아니라, 그동안 그가 보여 왔던 그 자질입니다. 일관성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땅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까? 아니 나누어 줄 의사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 질문은 실은 우리가 아니라, 화자 자신이 그의 공동체를 향해서 던지는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까? 다름 아닌 사악한 지도자 밑에서 온갖 고초를 당해왔던 이스라엘의 힘없는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역사상 제대로 한 번도 정의로운 지도자(또는 왕)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왕은 그 땅을 공평하게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빼앗고,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땅은 백성들의 것이 아니라, 왕이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왕하 21장).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자유와 해방의 역사가 아니라 독재와 억압의 역사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외치고 있는 메시지가 바로 지도자들의 공평과 공의에 관한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 에스겔 45장.
이스라엘은 결국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마는데, 그 원인은 불순종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자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여호수아’입니다. 앞으로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는 자가 있다면, 교회에서 목자나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호수아’를 닮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일관되게 충실하여 그 땅을 정복하였고, 정복한 땅을 자신의 전리품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쫓아, 전쟁이 끝난 후 지체하지 않고(11:23; 12:7), 모든 백성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공평하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그 땅에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습니다(11:23). 그는 정복한 땅을 나누어가지기 위해서, 그 땅의 모든 지역을 한 군데도 빠짐없이 다 정복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스라엘 역사상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땅은 늘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장에서 이 문제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오늘의 교훈을 위해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얼마나 많은 재물과 시간과 재능이 필요합니까?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 당장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토의 문제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는 내용상의 모순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은 무엇일까요?
3. 본문의 핵심 내용인 땅의 분배와 관련하여 연상할 수 있는 기자의 삶의 자리를 추측해 봅시다. 공동체가 당면한 과제나 문제점은 무엇인지, 오늘 나를 향한 메시지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토의해 봅시다.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제 17과: 모세를 회상하며
17
모세를 회상하며
(13:8-33)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13:8)
흔히 우리나라에는 원로(元老)가 없다고 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에 빠져있을 때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지혜를 들려줄 국가적인 스승이나 어른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 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나 경제 지도자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아닌 가 여겨집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고 봉사했던 자들이 아니라, 반대로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 국가나 민족을 희생시켰던 자들로 기억에 남아있는 경우가 더 많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각 나라는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학교와 연구소, 기업과 정부 가릴 것 없이 구태와 타성을 벗어던지고 변혁과 구조조정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의 한 신문사에서도 특별 연속 기획으로 ‘살기 좋은 나라’를 위한 지상토론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당연히 국가의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난 20세기 벽두에 저질렀던 실패를 교훈삼아, 21세기에는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 분야에서 국가 발전을 저해하거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각종 제도나 조직, 인습이나 사고 체계들을 과감히 개선하고 혁파해야한다는 의견들이 지상토론회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이처럼 다양한 해법들의 핵심은 결국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양성과 전문성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국가의 미래가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갈구했던 이른 바 정의로운 사회가 전제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꿈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위한 지도자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도덕성과 책임성을 갖춘 지도자를 가진 국가나 공동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모세’나 ‘여호수아’를 사모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쫓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봉사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언제쯤이나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동과 서로, 그리고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갈라진 이 민족을 하나로 묶어 위대한 국가 건설을 주도해 갈 것인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여호수아>의 제 2부를 시작하면서 ‘모세’가 정복하여 나누어주었던 ‘요단’ 동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화자도 마음속에 이러한 꿈과 소망을 품고 자신과 회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하며, 무슨 꿈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수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후 뿔뿔이 흩어져 그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이방의 노예로 전전긍긍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실까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할 모세와 여호수아를 닮은 영웅은 언제쯤이나 나타나겠습니까?
문학과 역사
문법적으로 본문은 앞선 8절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새로운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 화자가 왜 ‘요단’ 동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장황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책의 제 2부(13-19장)를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눈다면, 서론(또는 배경)에 해당하는 첫 번째 단락에(13:1-7) 이어, ‘요단’ 동편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와(13:8-33) ‘요단’ 서편 땅에 대한 긴 이야기가(14-19장)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원리는 12장의 형식과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기자는 그 땅을 언급할 때 ‘요단’의 동과 서를 별도로 취급하지 않고 나란히 연결시키고 있는데(12:1-6; 12:7-24), 이처럼 반복되는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화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고 간단해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네 개의 단락 중에서 처음과 마지막 단락이 서론과 결론의 기능을 하면서 마치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가운데 두 개의 단락은 나름대로 독특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서론(요약)(8-12절)
(2) ‘그술’과 ‘마아갈’과 ‘레위 인’(13-14절)
(3) 요단 동편 지역(15-31절)
(가) ‘르우벤’의 영토(15-23절)
(나) ‘갓’의 영토(24-28절)
(다) ‘므낫세’의 반 지파의 영토(29-31)
(4) 결론(32-33절)
화자는 서론에서(8-12절) ‘모세’가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게 할당해 준 땅 전체를 길게 개괄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남쪽의 ‘아르논’ 강에서부터 북쪽의 ‘헤르몬’ 산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다시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이르기까지 일곱 개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가) ‘아르논’ 강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 성읍(9절상)
(나) ‘메드바’에서 ‘드본’까지 이르는 ‘모압’ 평지의 남북(9절하)
(다) ‘에스본’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으로부터 뺏은 땅으로서 ‘암몬’과 ‘요단’을 잇는 동서의 지역(10절)
(라) ‘헤스본’과 ‘야르묵’ 강에 이르는 ‘길르앗’ 땅(11절)
(마) ‘야르묵’ 강에서 ‘헬몬’ 산에 이르는 ‘그술’과 ‘마아갓’ 사람의 땅(11절); (6) ‘레바논’ 땅에 있는 ‘헬몬’ 산 북쪽 경계(11절)
(바) ‘그술’과 ‘마아갓’ 땅의 동쪽 경계에 해당하는 ‘바산’ 땅. ‘바산’은 ‘옥’ 왕국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북으로 ‘아스다롯’과 남으로 ‘에드레이’의 두 도시에 도읍을 두고 있었습니다(11-12절상).
두 번째 단락은(13-14절) 두 가지 점에서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술’과 ‘마아갈’ 사람들에 관한 언급이 그것인데, 이들은 화자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적의 수중에 남아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땅의 분배와 관련해서 왜 이 두 지역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이외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레위’ 인에 관한 언급으로서, 이들 역시 ‘요단’ 동편 지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족속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본문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 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13절).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14절)
세 번째 단락이야말로 본문의 중심 내용으로서(15-33절),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차지한 지역입니다. 이 단락은 다시 각 지파가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따라 세 개의 작은 단락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가) ‘르우벤’의 영토(15-23절)
(나) ‘갓’의 영토(24-28)
(다) ‘므낫세’의 반 지파의 영토(29-31)
그리고 각 단락을 언급할 때마다 ‘모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형식상의 특징을 통해서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15절)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24절)
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29절)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32-33절) 전체 내용에 대한 요약내지는 결론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32절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 마치 합창의 후렴처럼 ‘레위’ 인에 관한 언급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단 동편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32절),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33절)
이곳에서도 ‘모세’의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화자는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일정한 형식상의 반복을 유지하고 싶은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언급하자면, 각 세부 단락은 ‘모세’가 각 지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언급으로 시작한 다음, 그 지역에 대한 추가 설명이 따르고, 각 지역을 보다 세부적으로 설명하는 방식 역시 일정한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각 지파의 땅의 경계를 언급하고, 이어서 지역 내 도시들을 망라한 다음,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함께 소개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르우벤’의 경우 그 경계는 ‘아르논’ 골짜기와 ‘아로엘’의 남쪽 끝에서 시작하여 ‘메드바’ 평지(16절), 즉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그 평지에 있는 ‘헤스본’과 모든 성읍들이라고 소개한 다음(16절하), 그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성읍들을 차례로 망라하고 있습니다(17하-20절). 그리고 각 도시들은 평지 내에 있으며 옥 왕국의 성읍들이라고 재차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있으며(21절), 아울러 이들 성읍들에 대한 정복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21하-22절). ‘갓’의 지역을 언급하는 방식은 보다 다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지역의 경계는 ‘야셀’과 ‘길르앗’의 모든 성읍들이라고 소개하면서(25절상) 각 지역을 다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으로는 ‘암몬’ 땅의 절반 ‘암몬’의 수도 ‘랍바’ 앞에 있는 ‘아로엘’까지이며(25절하), 남으로는 ‘헤스본’에서 시작하여 ‘라마미스바’와 ‘브도님’까지이며(26절상), 북으로는 ‘마하나임’에서 시작하여 ‘드빌’까지 이며(26절하), 그리고 서쪽으로는 ‘르우벤’에게 할당하고 남은 ‘시혼’ 왕국의 땅으로서 ‘요단’에서부터 북으로 ‘긴네렛’ 바다까지입니다(27절). 마지막으로 ‘므낫세’ 반 지파의 경우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그 땅이 ‘마하나임’에서 북으로 ‘바산’ 왕 전 지역과 그 속에 포함된 ‘야일’까지 이른다고 설명한 연후에(30절), 이어서 그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후기처럼 덧붙이고 있습니다(31절). 이렇게 볼 때 31절은 21절하-22절과 형식상 병행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지역은 각 지파별 기업이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단지 ‘므낫세’ 반 지파의 소유에 대한 언급에 이르러 약간의 형식상의 변형을 꾀하고 있기는 합니다.
‘본문의 역사’ 즉 전승과 관련하여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보다 상세한 설명은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Butler, C. T.(참고도서 1, 158-160쪽).
신학과 신앙
1. 서론(8-12절)
<여호수아서>의 두 번째 중요한 주제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여호수아’가 따라야 할 지표나 모델은 무엇인가? 서론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8절)
이 선언은 땅을 나눔에 있어 따라야 할 대원칙으로서, 나머지 구절들은 부차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9-12절). 즉 과거 요단 동편 땅을 나눌 때 이스라엘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했던 것처럼, ‘요단’ 서편의 땅을 나눌 때도 그대로 적용하면 될 것이라는 시사입니다.
2. 그술과 마아갓(13-14절)
두 번째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첫 번째 단락의 교훈과는 정 반대 편에서 공동체가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 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13절)
이 책에서도 그렇고 이어지는 책 <사사기>에서도 그러하듯이(삿 1:19-36), 메아리처럼 반복해서 울려오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술’과 ‘마아갓’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모세’의 탁월한 지도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어찌된 영문인지 이 두 지역만은 미해결의 문제로 그냥 남겨두고 살아가고 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서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통치 하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삼하 3:3; 10:6-14).
일을 하다말고 중단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여호수아’의 사후에 이스라엘을 큰 낭패 지경으로 몰아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삿 2-3).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더 이상 사역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그를 이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이 두 지역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도자를 향한 이러한 경고는 이 책이 끝나는 동안 계속적으로 들려오다가 <사사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삿 1-3).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 문제를 안고 살다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사기>의 첫 부분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태도를 나무라고 심판하려는 신학적 의도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런 암시를 느낄 수 있는 것이, 화자는 ‘갓’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차지한 땅이 기껏 ‘암몬’ 자손이 살던 땅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경은 야셀과 길르앗 모든 성읍과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와(25절)
후대를 위한 교훈으로 ‘그술’과 ‘마아갓’을 공동체 회중들에게 상기시켜주는 일은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어서 ‘레위’ 지파를 언급하는 것은 다소 뜻밖입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14절)
굳이 추측해 보자면, 내친 김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를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전에 ‘모세’를 통해서 주신 명령을 사항을 충실하게 따라야 함을 강조하고자 함인 듯싶습니다(민 18:20-24; 신 10:6-9; 18:1-5). 즉 ‘모세’의 가르침에 따르면,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사제로서 필요한 양식은 직접적인 경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단으로부터 공급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당연히 ‘레위’의 사역은 농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이러한 특별한 책임과 특권 때문인지 이들은 자신들만의 땅을 갖지 못하고 여러 지파들의 땅에 흩어져서 살도록 명령받고 있습니다(21장).
3. 요단 동편(15-31절)
1) 르우벤의 영토(15-21절)
주지하다시피 ‘요단’ 동편의 땅은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경우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일한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장자 ‘르우벤’의 영토에 관한 언급입니다:
15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16그들의 지역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과 메드바 곁에 있는 온 평지와, 17헤스본과 그 평지에 있는 모든 성읍 곧 디본과 바못 바알과 벧 바알 므온과(15-17절)
‘르우벤’이 취한 ‘모압’ 땅은 주로 ‘요단’ 남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경계를 긋자면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북으로 ‘헤스본’에 이르고 있습니다(17절). 그렇다고 해서 ‘르우벤’이 남북으로만 좁게 뻗은 지역을 차지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동쪽 변방에 해당하는 성읍들은 거명한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북에 걸쳐서 산재해 있는 여러 성읍들 중 ‘메드바 평지’(16절)에 관해서는 이미 9절에서 언급한 바 있고, 알다시피 ‘헤스본’은 ‘시혼’ 왕국의 도읍지였습니다(10절; 12:2). ‘시혼’은 ‘아르논’과 ‘얍복’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21:39; 민 32:37; 대상 6:81), 이 왕국의 땅의 대부분이 ‘르우벤’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헤스본’은 또한 여러 개의 위성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던 바, 그중 하나가 ‘아르논’ 북쪽에 위치한 ‘갓의 드본’으로 불리는 성읍으로서, 이는 ‘갓’ 족속이 이 도시를 요새화했다고 해서 부른 이름입니다(민 32:34).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서 이 지역은 다시 ‘모압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사 15:2; 렘 48:18, 22),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르우벤’ 족속은 일찍부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음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바못바알’은(17절) ‘바알의 산지’라는 뜻으로 ‘메드바’ 근처에 있었고, ‘발람’이 이곳에 올라 이스라엘을 저주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민 22:41). ‘벧바알므온’은(17절) ‘바알메온’으로 부르기도 하는데(민 32:38), 오늘날의 ‘마인’에 해당됩니다(렘 49:34). ‘르우벤’의 영토에 관한 언급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야하스와, 그데못과, 메바앗과, 기랴다임과, 십마와, 골짜기 가운데 산에 있는 세렛 사할과(18-19절)
‘야하스’는 ‘시혼’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가 패배를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데못’은 문자적으로 ‘동쪽 마을’이라는 뜻으로서, ‘시혼’ 왕국의 동쪽 경계에 가까운 ‘드본’으로부터 북으로 7.5 마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신 2:26). ‘메바앗’은 나중에 레위의 성읍이 된 곳으로서(21:37; 대상 6:79), 이 역시 동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렘 48:21). ‘르우벤’의 또 다른 도시로 거명하고 있는 세 성읍이 있는데, ‘기랴다임’과 ‘십마’와 ‘세렛사할’이 그들입니다(19절). ‘기랴다임’은 르우벤이 정복하여 요새로 삼았으나(민 32:37), 이 역시 후에 다시 ‘모압’의 땅이 되어버립니다(렘 48:1). ‘십마’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헤스본’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은 포도 재배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사 16:8-9; 렘 48:32). ‘세렛사할’은 본문에서 ‘골짜기 가운데 산에 있는’ 지역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요단 골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르우벤’의 나머지 영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벧브올과 비스가 산록과 벧여시못과, 21평지 모든 성읍과 헤스본에 도읍한 아모리 사람 시혼의 온 나라라. 모세가 시혼을 그 땅에 거하는 시혼의 방백 곧 미디안의 귀족 에위와 레겜과 술과 훌과 레바와 함께 죽였으며, 22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23르우벤 자손의 서편 경계는 요단과 그 강가라. 이상은 르우벤 자손의 기업으로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과 촌락이니라(20-23절)
‘벧브올’(20절)은 ‘모세’가 고별 연설을 행한 곳이며(신 3:29), 또한 ‘발람’이 ‘브올’ 산 정상에서 예언을 발했던 곳이기도 합니다(민 23:28). 그리고 이곳은 ‘싯딤’으로부터도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스라엘이 여기서 ‘모압’의 신 ‘바알브올’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민 25:1-3; 민 4:3). ‘비스가의 산록’에 대해서는 12:3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며, ‘벧여시못’은 문자적으로는 ‘초원지대’라는 뜻으로서, 아마 오늘날의 ‘사해’ 북방 근처에 있는 ‘텔 엘아제메’로 생각됩니다(참고 12:3).
2) 갓의 영토(24-28절)
‘갓’ 지파는 ‘요단’ 동편의 남북에 걸쳐 ‘르우벤’과 ‘므낫세’의 중간 지역에 자리 잡았습니다(민 32:33-36). 이 지역을 언급하는 방식 역시 ‘르우벤’의 경우와 유사합니다(15절).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고, 그 가족을 따라 그 땅을 나누어주었다는 표현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24절) ‘갓’은 레아의 종 ‘실바’를 통해서 태어난 ‘야곱’의 아들입니다(창 30:10-11). 이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요셉’의 예언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으며(창 49:19; 신 32:20-21), ‘에스겔’은 이들이 그 땅의 최 남방 지역을 훗날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겔 48:27-28).
‘갓’ 지파는 ‘요단’ 계곡의 동쪽 지역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으로 ‘길르앗’ 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면서 ‘얍복’ 강의 동쪽 한계까지 미치고 있었고, 북으로는 ‘요단’ 계곡이 ‘갈릴리’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부터 동으로 ‘마하나임’과 ‘라못-길르앗’까지 미쳤습니다:
그 지경은 야셀과 길르앗 모든 성읍과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와(25절)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명은 개별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길르앗’과 마찬가지로 ‘야셀’도 한 지역이자 동시에 그 지역의 도시의 이름이기도 합니다(민 32:1, 3). 두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지역은 ‘길르앗의 모든 성읍’으로서 ‘길르앗’의 남쪽 지방을 의미합니다. ‘길르앗’의 북쪽 지방은 ‘므낫세’ 지파에 속해있습니다(31절). 그리고 ‘암몬 자손의 땅 절반’은 ‘암몬’ 땅의 서편 경계로서 ‘아르논’ 강과 ‘얍복’ 강의 중간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 땅의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의 힘이 미치지 못한 지역입니다(신 2:19). ‘랍바 앞의 아로엘’. ‘랍바’는 ‘암몬’의 수도로서 요단에서 동으로 22마일 떨어져있는 오늘날의 ‘암만’에 해당됩니다만, ‘아로엘’이 ‘랍바’의 동쪽인지 또는 서쪽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로엘’은 ‘르우벤’ 지파의 땅에 속해있던 동일한 이름의 지명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두 절에서는(26-27절) 먼저 지역 내 여러 도시들을 일별한 다음, 이 지파의 서쪽 경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26헤스본에서 라맛 미스베와 브도님까지와 마하나임에서 드빌 지경까지와, 27골짜기에 있는 벧 하람과 벧니므라와 숙곳과 사본 곧 헤스본 왕 시혼의 나라의 남은 땅 요단과 그 강 가에서부터 요단 동편 긴네렛 바다의 끝까지라(26-27절)
두 절은 각각 남에서 북으로 나란히 두 번씩 이 지역 내 도시들을 개괄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헤스본’에서 ‘얍복’에 있는 ‘마하나님’까지이고, 또 한 번은 이와 나란히 ‘요단’ 골짜기의 남북을 따라 ‘벧 하람’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사본’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길르앗 라못’으로 부르기도 하는 ‘라마 미스바’는 도피성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20:8). 그리고 이웃에 있는 ‘브도님’은 오늘날 ‘키르벧 바네’이며, ‘마나하임’은 오늘날에도 그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한 곳입니다만, 아마도 ‘갓’ 지파와 ‘므나세’ 지파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30절). 이 지점에서 곧바로 ‘드빌’까지 연결됩니다. ‘얍복’ 강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두 도시가 있는데, 남쪽에 있는 두 도시는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벧 하람’과 ‘벧 니므라’이고, 북쪽으로는 ‘숙곳’과 ‘사본’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8절에서 이 영토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수미상관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과 촌락이니라(28절)
3) 므낫세 반 지파의 영토(29-31절)
‘므낫세’ 반 지파의 땅에 대한 개괄적 언급은 앞의 경우와 그 서술 방식이 동일합니다.
29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에게 그 가족대로 주었으니, 30그 지경은 마하나임에서부터 온 바산 곧 바산 왕 옥의 전국과 바산 경내 야일의 모든 고을 육십 성읍과, 31길르앗 절반과 바산 왕 옥의 나라 성읍 아스다롯과 에드레이라 이는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자손에게 돌린 것이니 곧 마길 자손의 절반이 그 가족대로 받으니라(31절)
이곳에서는 ‘므낫세’의 후손으로 ‘야일’과 ‘마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30-31절), <사사기>의 기록에 의하면(삿 5:14), ‘요단’ 서편 땅에 정착한 후손은 ‘마길’ 자손으로 보입니다. 이 지파가 차지한 지역은 ‘갓’ 지파의 북쪽 경계, 즉 ‘마하나임’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26절 참조). 그리하여 ‘옥’ 왕국의 ‘바산’ 전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야르묵’ 강에서 ‘헬몬’ 산까지 뻗어있습니다. 참고로 ‘바산’을 ‘옥’왕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참고: 12:5). ‘야일의 모든 고을 육십 성읍’이라함은 이 족속들이 모여 살던 일종의 천막촌들로 추측이 되며, 이 모두 ‘바산’의 지역내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므낫세’의 또 다른 후손 ‘마길’ 족속의 땅은 당연히 ‘야일’ 족속보다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길르앗 절반’과 ‘옥’ 왕국의 도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가 바로 그 지역입니다. ‘마길’이 ‘길르앗’을 정복하는 이야기는 <민수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민 32:39-40).
교훈과 적용
1. 서론(8-12절)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바뀌면 기존의 정책이나 정책의 우선순위에 큰 변동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념이나 정강 정책을 달리하는 정권이 새롭게 들어서면 변화는 개혁이나 혁명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기도 합니다. 전임자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작용한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미국에서 ‘클린턴’ 대통령에 이어 ‘부시’ 정권이 들어섰을 때, ‘부시’ 정권의 정책 기조가 ABC (Anything But Clinton)로 불릴 정도였다고 하니, 변화나 차별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도 이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차별성이 지나치다 보면 역사의 단절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어떠했습니까? 특히 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여호수아’가 보여주어야 할 리더십은 어떤 것입니까?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아니면 기존의 지표나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따르지 말아야 할 교훈이라도 있었습니까? 서론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8절)
즉 과거 ‘요단’ 동편 땅을 나눌 때 이스라엘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했던 것처럼, ‘요단’ 서편의 땅을 나눌 때도 그대로 적용하면 될 것이라는 시사입니다. 이 선언은 땅을 나눔에 있어 따라야 할 대원칙으로서, 나머지 구절들은 부차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9-12절). 더 나아가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리더십에 대한 교훈은 시공을 초월한 것으로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교과서 삼아 충실하게 그 뒤를 좇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었고, 지도자가 달라졌다고 해서 이전의 약속들이나 원리들을 개혁하고 갈아 치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정치 분야에서 비일비재 합니다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모세’가 세워놓았던 원리는 하나님의 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하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1:6-8), 이 백성들 또한 순종과 헌신의 서약을 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1:18). 바로 이 점 ‘요단’ 동편에서 살게 될 지파들에게는 각별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 일까요?
만일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도자가 아니라면, 그에 이르러 역사의 단절이 생긴다면, 새 지도자가 나타나서 새 시대에 걸 맞는 개혁을 한답시고 ‘모세’가 했던 이전의 약속들을 폐기 처분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결속성은 지도자의 결속성에 있고, 이것은 결국 한 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의 땅이 이스라엘의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며, 서편의 땅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원리 위에서 출발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본받아야 할 교인과 본받지 말아야 할 교인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디서 살든 그들의 교과서로 삼아야 할 모범이 있다면 탁월한 하나님의 종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이만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을 탁월하다고 하는지 새삼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의 제 1부를 통해서 알 수 있었고, 제 2부에 들어서도 계속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용기 있는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행정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하나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 자들입니다.
2. 그술과 마아갈(13-14절)
그러나 교회에는 항상 본받을 만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받지 말아야 할 교인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아닐까요? ‘워어즈비’ 목사님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경계선 신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에 있는 일종의 완충 지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원이기는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늘 끊임없이 이방인의 군사적인 위협과 세속적인 문화의 유혹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삿 3; 10-11; 삼상 11:11; 14:47; 삼하 10-12. 결국 이 지파들은 이러한 적들의 이러한 위협과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고 맙니다(대상 5:25-26).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하나님과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적들을 몰아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종교적인 유혹에 굴복하고 말 것인가? 이러한 선택은 한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사는 동안 내내 직면해야 했던 문제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다른 지파들에 비해 일찌감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롯’이 그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는 순간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당위성과 현실 사이에서의 선택은 그렇게 간단하지 만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들 경계선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공동체의 관심사보다는 내 개인의 관심사가 늘 앞서며, 공동체의 유익보다는 나의 유익이 늘 앞서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 ‘그술’과 ‘마아갓’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늘 해야 할 일은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서 공동체를 괴롭히고 또 괴롭힙니다. 그 자신은 물론 지도자와 공동체 전체를 무기력하게 하다가 급기야는 허물어버립니다. 나는 어느 편입니까? 공동체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입니까? 공동체의 기도가 나의 기도이기도 합니까? 지도자의 근심이 나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3. 요단 동편(15-32절)
‘르우벤’의 영토는 주로 ‘모압’으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 화자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세’를 쫓아 그곳에 사는 ‘시혼’의 왕과 ‘미디안’의 귀족들뿐만 아니라(21절),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마저(22절)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21모세가 시혼을 그 땅에 거하는 시혼의 방백 곧 미디안의 귀족 에위와 레겜과 술과 훌과 레바와 함께 죽였으며, 22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21-22절)
이들의 행동은 아주 <여호수아> 전체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어,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찬할 만합니다.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즉 전투를 치른 후 그들의 선택에 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열심히 싸워 그 땅을 차지하고 보니, 딴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지체들과 함께 계속 싸워 언약의 땅으로 들어갔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곳에 눌러앉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넓은 평지가 목축지로서 아주 적합해 보였을 것입니다. ‘롯’이 이전에 탐을 냈던 곳이기도 하지요.
명색이 ‘야곱’의 장자로서 양보와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먼저 그 좋은 땅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영 체통이 서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가 늘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 교회는 장래가 뻔합니다. 이들이 땅의 중심도 아닌 변두리 지역에서 공동체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변두리 시민으로서 살아가기로 작정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일말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명분이나 명예보다는 실리를 택한 것이지요. 이 점에 있어 그들은 ‘롯’이나 ‘에서’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이 운명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롯’이나 ‘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극으로 끝났다고 말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다른 지파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 그릇 죽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나,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삼촌을 버린 ‘롯’의 비극적 운명과 동일한 종말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요단’ 서편입니까 아니면 동편입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화자와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연상해 봅시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3. 나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제 18과: 갈렙에게 먼저
18
갈렙에게 먼저 주어라
(14:1-15)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14:14)
제 1부의 주제인 “정복과 전쟁” 이야기는 11장에서 끝이 나고, 제 2부의 주제인 “‘요단’ 서쪽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는 세 장을 건너 뛰어 15장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여호수아가 온 땅을 취하여...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 남단은...(15:1).
그렇다면 중간의 이야기(12-14장)는 문학적인 일탈로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중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유의해서 살펴보면 12장의 기능은, “정복의 희생자”들을 ‘요단’강의 동과 서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제 1부의 절정내지는 결론으로 볼 수 있고, 이어지는 13-14장은 제 2부의 서론 내지는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장이 ‘요단’ 서편 땅을 분배함에 있어 따라야 할 대원칙을 제시하려는 것이라면, 14장에서는 그 원칙을 수행한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 땅을 분배한 자가 누구이며,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를 배제한 것인지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2-14장은 문학적으로 두 단원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일관되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갈렙’의 주장과 고백을 통해서 땅과, 율법과, 지도자에 대한 “신명기 신학”의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이곳에 이르러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제 2부의 주제인 ‘요단’ 서편 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아래와 같으니라(1절). 14장도 그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새로운 단락을 이루고 있으며(1, 15절), 이 두 절은 각각 책의 다른 곳에서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독특한 양식을 취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선 15절이 취하고 있는 결론으로서의 양식,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표현은 11:23하의 그것을 그대로 취함으로써 12-13장의 문학적 일탈을 뛰어넘어 11장의 내용을 계승 및 발전시켜가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두 개의 독특한 양식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14:1하의 시작 절입니다: “...이 아래와 같으니라.” 이와 유사한 양식이 12-13장 사이에서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12:1하); (2)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12:7); (3)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13:2); (4) “...이상은 르우벤 자손의 기업으로”(13:23하); (5) “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13:28); (6)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13:32). 다른 하나의 독특한 양식은 역시 11:23과 병행되는 표현으로서 “취하다”라는 동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1) “...모세가 그 땅을...기업으로 주었더라”(12:6); (2) “...그 땅을 여호수아가...기업으로 주었으니”(12:7하); (3)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13:8하); (4)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13:15); (5) “모세가...갓 자손에게도 그 가족을 따라 주었으니”(13:24); (6) “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그 가족대로 주었으니”(13:29).
그러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정상적인 흐름에서 일탈하면서, 일견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두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습니다(실은 이 두 이야기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잊고, 이 이야기를 듣게 위해서는 15장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화자가 들려주는 새로운 두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는 ‘레위’ 지파에 관한 것으로서(2-5절), 이미 앞에서 간략하게 두 번에 걸쳐 다룬 바 있습니다(13:14, 33). 이곳에서는 내용을 조금 확대하면서 21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다른 하나는 충성스러운 스파이 ‘갈렙’에 관한 이야기로서(6-15절), <민수기>나 <신명기> 등에서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던 주제입니다(민 13:14; 신 1:21-36). 적어도 ‘갈렙’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 성취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가 본문을 이루는 구조적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 두 이야기가 이곳에서 필요한 것일까? 두 주제는 상호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본문의 배경과 역사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선 첫 번째 단락에서는 ‘레위’ 인들에 관한 주제와 함께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다른 주제들이 다소 복잡하게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문제; 그 땅을 취하는 문제. 이들 각각의 주제는 나름대로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최종 본문으로 완성되기까지 신학적 편집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 편 두 번째 단락의 ‘갈렙 이야기’는 외견상 일종의 “원인론적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14절).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 즉 신학적 주제 선언일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사전 배경 설명도 없이 <갈렙 이야기>가 갑자기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6절), 이야기는 처음부터 ‘여호수아’, ‘갈렙’, ‘유다’ 지파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상존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갈렙’ 자신이 털어놓고 있는 고백을 들어보면 그가 무엇을 주장하려는지 알 수 있습니다(7-12절):
1) 장수와 건강의 비결이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 것이다(7절상, 10-11절);
2) ‘갈렙’은 ‘모세’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7절상, 8절하, 9절하, 14절);
3) ‘갈렙’은 그 땅을 약속받았다(9, 10절상, 12절).
그런데 바로 이 세 번째 주장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일찍부터 ‘갈렙’이 밟는 모든 땅을 그에게 주기로 약속한 바 있습니다(9절). ‘갈렙’이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가 밟은 모든 땅이 아니라, 산지(山地) 즉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여러 성읍을 포함하는 그 산지만입니다(12절).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에게 ‘헤브론’만을 주었을 뿐입니다(13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13절)
이 사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민수기>(13-14장)에 비추어 볼 때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이야기의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갈렙’이 야훼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사실과(14:24; 참고, 민 32:11, 12), 또 하나는 다른 스파이들은 반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입니다(14:4; 민 13:28, 31). 반역의 결과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민 14:39-45). 그런데 ‘갈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슨 보상이라도 받았습니까? <민수기> 화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그렇습니다. 약속만 받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 이야기>(민 13-14)는 일종의 미완성으로 끝난 셈입니다. ‘갈렙’의 영웅적인 행위가 어떻게 보상을 받았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14:6-15) 바로 그 빠진 부분을 채워주는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소위 <갈렙 전승> 중에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이러한 이야기가 보존되어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빠진 고리를 연결시키면서 역사적 ‘카텐자’를 도입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갈렙’이 받은 땅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받은 땅은 그가 밟은 모든 땅도 아니고, 먼저 요구한 산지도 아니며,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14절)
어떻게 그가 이 도시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영웅 ‘여호수아’가 ‘유다’ 지파의 영웅 ‘갈렙’의 손을 들어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지파 ‘갈렙’이 ‘헤브론’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뜻합니까?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그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갈렙’의 독백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6-12절).
긴장과 갈등이 느껴지는 연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갈렙’이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역사적 상황을 연상해 본다면, 이 장면이 주는 분위기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 그리고 있는 ‘사울’과 ‘다윗’ 간의 갈등은 실은 두 인물이 속해 있는 ‘벤야민’과 ‘유다’ 지파 간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이런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건국 초기에, ‘갈렙’ 족속이 나서서 남방 ‘느게브’ 땅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분위기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을 침로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삼상 30:14).
이와는 반대로 ‘다윗’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알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갈렙’ 족속 ‘나발’의 태도 또한 잘 알려져 있습니다(삼상 25). 물론 ‘나발’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급사를 당하고, ‘다윗’은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결혼을 함으로써 법적으로 ‘갈렙’ 족속의 재산을 차지하게 됩니다.
‘헤브론’은 ‘다윗’ 지파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입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곳이기도 하고(삼하 2:1-4), 아들 ‘압살롬’이 스스로 왕이 되어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합니다(삼하 15). 이처럼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 정치적으로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바로 그 도시, 즉 ‘다윗’ 이전까지 ‘벤야민’ 지파에게 속해있던 도시가 바야흐로 ‘유다’ 족속 ‘갈렙’의 소유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의 신학적 의도는 지파간의 갈등이나 그들의 법적인 권리를 다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이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를 강조함에 있습니다. 누가 그 권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단락에서 계속 이어져 오던 주제입니다. 즉 ‘순종과 축복’이라는 “신명기 신학 사상”이 그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자야말로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갈렙’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먼저 이스라엘의 요충지 ‘헤브론’을 차지할 자격과 권리를 갖춘 자입니다. 편집 비평의 관점에서 보자면, 본문은 결국 <신명기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서 화자는 오래된 <갈렙 전승>을 “인과응보”의 “신명기 사관”에 입각하여 재해석 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모세에게 명한 것처럼(1-5절)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백성이 차지한)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항상 동의어처럼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는데, 그것은 “모세가 그들에게 준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동사로부터 파생되는 명사 형 단어 “기업”은 시적인 유사 반복처럼 책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1:23; 13:6, 7, 8, 14, 23, 28, 33; 14:2, 3, 9, 13, 14; 15:20; 16:5, 8, 9; 17:4, 6, 14; 18:2, 4, 7, 20, 28; 19:1, 2, 8, 9, 10, 16, 23, 31, 39, 41, 48, 49, 51; 21:2; 23:4; 24:28, 30, 32).
1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1-2절)
이들 표현들이 책 전체에 걸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명기 전승>의 손길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신명기> 화자가 사용하던 이전 자료에는 “정착”이나 “주택” 등과 같은 다른 표현들을 사용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자손 대대로 이스라엘의 소유로 주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화자가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사실은, 그 땅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의 대가로 주신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요구할 수 있는 무슨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땅을 나누어 주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의 면면을 보면, 대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그리고 각 지파의 족장들입니다(1절).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신명기 전승>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0:6). 대제사장과 각 지파들의 우두머리로 구성된 책임자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 땅을 나누게 될 것인데, 이들의 권위와 책임에 대해서는 <민수기>에서 이미 상세하게 규정해 놓은 바 있습니다(민 34:16-29; 32:28). :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땅을 기업으로 나눌 자의 이름이 이러하니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니라. 너희는 또 기업의 땅을 나누기 위하여 매 지파에 한 족장씩 택하라. 그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시므온 지파에서는 암미훗의 아들 스므엘이요. 베냐민 지파에서는 기슬론의 아들 엘리닷이요. 단 자손 지파의 족장 요글리의 아들 북기요. 요셉 자손 중 므낫세 자손 지파의 족장 에봇의 아들 한니엘이요. 에브라임 자손 지파의 족장 십단의 아들 그므엘이요. 스불론 자손 지파의 족장 바르낙의 아들 엘리사반이요. 잇사갈 자손 지파의 족장 앗산의 아들 발디엘이요. 아셀 자손 지파의 족장 슬로미의 아들 아히훗이요. 납달리 자손 지파의 족장 암미훗의 아들 브다헬이니라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명하사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을 나누게 하신 자들이니라(민 34:16-29)
이에 모세가 그들에게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명하니라(민 32:28)
그리고 그 땅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선택하고 있는데(2절), 이 역시 <민수기>에서 이미 규정해 놓은바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참고. 민 26:55-56; 33:54; 34:13). 이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했던 것 같은데(잠 16:33), 나름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평한 방법으로 이 백성들이 채택한 듯합니다. 물론 정확한 의미나 사용 방법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땅을 분배함에 있어 속았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화자가 계속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한대로”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활 규범과 미래를 결정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적과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런 순종의 모티브가 제비뽑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어서 제비뽑기에 참여한 지파가 왜 아홉 반인지 그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만 줄 뿐으로(3-4절)
제비뽑기에 참여한 지파가 아홉 반이라고 했을 때, 계산 상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열두 지파 중에서 동편의 두 지파 반과 ‘레위’ 지파를 빼고 나면 여덟 반 지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화자의 설명에 따라, ‘요셉’으로부터 두 지파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포함시키면 아홉 반 지파가 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포함시키는 것은 ‘야곱’이 그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전통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창 48:5-6).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레위’ 지파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민 18; 신 10:9; 12:12; 14:27, 29; 18:1; 수 13:14, 33).
그렇다고 해서 ‘레위’ 지파가 땅의 분배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닌 것이, 그들은 여러 곳에서 자신들이 살 도시와 목축지를 배당받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에 대한 이런 언급은 21장에서 반복해서 다룰 동일한 내용에 대한 예비 진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첫 단락을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예의 친숙한 표현을 통해서 신학적 의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수미상관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5절)
그 주제란 말할 것도 없이 “순종”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앞으로 구체적으로 소개할 내용(15장-19장)에 대한 서론적인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2. 갈렙부터 먼저(6-15절)
실제 땅의 분배는 ‘유다’ 지파로부터 시작됩니다(15:1). 그동안 정복 전쟁에서 ‘벤야민’과 ‘에브라임-므낫세’ 두 지파가 주로 조명을 받아왔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유다’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이외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승은 아마 ‘벤야민’ 지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성경>의 최종 본문으로 확정될 즈음에는 지파 간 갈등이나 적대감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Butler, T. C.(참고도서 1, 172쪽).
따라서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도 지파 별로 공평하게 땅을 분배하는 데에 있으며, ‘유다’ 지파는 ‘갈렙’의 특별한 역할로 인하여 가장 먼저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6절)
그런데 6절의 자료와 배경을 놓고 일련의 난제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길갈’이라는 장소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은 책의 제 1부에서는 무대의 중심이었습니다만(4:19; 5:9; 10:6), 제 2부에 들어서는 단지 이곳에서만 단 한 번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점이 제 2부의 배경과 관련해서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또는 이 이야기에 국한해서 우연히 등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가 ‘길갈’로 나아왔다는 사실과,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땅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때때로 ‘갈렙’과 ‘유다’ 지파를 함께 묶어 언급한 적도 있기는 합니다만(민 13:6; 34:19), 둘 사이에 어떠한 혈연적인 기원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갈렙’은 ‘그니스’ 족속으로서(6, 14절; 민 32:12), 이 족속은 원래 ‘에서’의 족보에 속한 ‘에돔’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창 36:11, 15, 42). 물론 ‘갈렙’과 ‘그니스’ 족속을 함께 ‘유다’ 지파와 연계시키고 있는 곳도 있어(대상 4:11), ‘갈렙’이 ‘유다’의 한 지파의 후손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6절의 자료와 관련해서 소위 <갈렙-그니스 전승>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스라엘의 첫 사사 ‘웃니엘’이 여기에 속한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습니다(삿 3:9-11).
두 번째 단락의 중심인물은 ‘갈렙’입니다(6절). 그가 ‘유다’ 지파를 대표하면서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단락의 핵심 주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실은 이 부분은 독백의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만):
여호와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는 바라(6절하).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전환점을 이룬 사건입니다. 대화의 두 당사자 모두 그 사건의 결과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민 13:16; 14:6, 30, 38; 26:65; 32:12.
‘갈렙’이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회고함에 있어,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라고 말함으로써 ‘여호수아’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의도적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두 사람은 당시 그곳에서 다른 열 명의 스파이와 함께 그 땅을 정탐하러 떠났던 동료였고, 그 결과를 체험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민 13:30-33; 14;24). ‘갈렙’은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미 약속은 하셨으나, 아직 성취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을 ‘여호수아’에게 먼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8절)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9절상)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이런 표현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지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어쩌면 <갈렙 전승>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성경> 외의 전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민 14:24; 32:12; 신 1:36). 그런데 바로 이 선언이야말로 본문의 핵심 주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른 바 <갈렙 전승> 밖에서 이런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단 한 번 있는데, ‘솔로몬’에게 내린 <신명기>적 심판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왕상 11:6). 이 심판이 있은 후 이스라엘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니까 화자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갈렙 전승>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것에 대한 <신명기>적 보응은 땅을 차지할 권리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과 장수의 축복까지 포함되고 있다고 ‘갈렙’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1-12절)
땅과 건강과 장수의 축복, 이 모두 “신명기 신학”의 핵심적 요소들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아낙 인’들은 거인 ‘네피림’ 족속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두려워 떨며 ‘가나안’ 문턱에서 하나님의 명령마저 무시하고 돌아서게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아낙’ 인들은 고대의 거인으로 불리던 ‘네피림’ 족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으며(민 13:33; 창 6:4),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신 2:10-11, 20-21). 특히 이들은 ‘헤브론’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민 13:22, 28).
따라서 만일 ‘갈렙’이 이들을 몰아낸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신9:2).
‘여호수아’는 지도자의 권위를 가지고 ‘갈렙’을 축복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13절)
이러한 장면은 구약에서 우리가 자주 발견하는 것으로서, 족장들이 그들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전해주고 있는 모습과 유사한 것입니다(참고: 창 27; 24:60; 31:55; 48:9 등등). ‘여호수아’는 ‘갈렙’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전해주었을 것이며, 축복의 내용은 땅과 후손에 관한 이른 바 “신명기적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창 1:28; 28:3, 26:3; 28:4; 시 37:22; 신 15:4, 14; 16, 17.
그러나 ‘갈렙’이 실제 차지한 땅은 ‘헤브론’뿐이었습니다. ‘헤브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 이야기가 전하는 바는 ‘갈렙’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먼저 ‘요단’ 서쪽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화자는 이 이야기를 기원론적으로 전함으로써, ‘헤브론’이 당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갈렙’ 후손의 소유로 전해지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14절)
‘헤브론’에 관한 기원론적 설명은 다음 절에서 조금 상세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5절)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인데, 문자적으로 “네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사람에 따라 “네 사람”(‘아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또는 “네 도시 연맹”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화자가 ‘아라바’를 도시가 아닌 사람의 이름, 즉 ‘아낙’ 족속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가장 무섭고 거대한 족속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족속의 이름을 ‘갈렙’이 차지한 ‘헤브론’과 연계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이야기의 결론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교훈과 적용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1-1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상충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두 본문은 인간의 책임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책임과 관련해서 <오경>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 사상이 하나 있는데, 흔히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이 사상은 <신명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신명기 사관> 또는 <신명기 사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서>의 핵심 주제 또한 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본문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개론>에서 진술한 바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갈렙’이라는 믿음의 전형을 통해서 그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 땅의 소유를 주장할 수 있으며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갈렙’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8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8-9절)
그렇습니다. 화자가 두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속한 ‘유다’ 지파는 그래서 ‘요단’ 서쪽 땅을 가장 먼저 차지하게 되고, 가장 끝까지 그 땅에 남아있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갈렙’은 혈통적으로는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에돔’ 족속에 가까운 ‘그니스’ 족속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방인 혈통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에돔’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시 저주를 받았던 족속이기도 합니다(시 137:7; 렘 49:7-22; 사 63). 이렇게 볼 때 ‘갈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그의 가족이나 혈통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born of God)란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난 자”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되고, 누구나 처음부터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먼 훗날 이스라엘이 그 땅을 잃어버리고 포로로 잡혀간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이 ‘갈렙’의 모범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솔로몬’ 왕의 행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처음에 지녔던 ‘야훼’를 향한 열정과 사랑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쫓아간 자입니다(왕상 11). 그를 쫓아 이스라엘 역시 이후부터 점차 쇠락의 길을 걷다가 멸망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신명기>의 약속이 어김없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신 27-28).
결국 시대를 두고 변하지 않는 교훈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그 스스로의 계획이나 이기적인 탐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를 축복해 주십니다. 현실에 있어서 우리가 사는 동안 그분의 축복을 누리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신명기>의 변함없는 충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에게 명한 것처럼
“요단 서편 땅을 나눔에 있어 적용한 원칙과 권위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첫 번째 단락의 핵심적 주제가 될 것입니다. ‘요단’의 동과 서를 막론하고 그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해서 이 백성이 따라야 할 대원칙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서 ‘모세’에게 천명하신 바, 계명과 율법이 바로 그 원칙이 됩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백성이 차지한)기업”이라는 구절이 등장할 때마다 항상 동의어처럼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는데, 그것은 “‘모세가 그들에게 준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시적인 유사 반복처럼 책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1:23; 13:6, 7, 8, 14, 23, 28, 33; 14:2, 3, 9, 13, 14; 15:20; 16:5, 8, 9; 17:4, 6, 14; 18:2, 4, 7, 20, 28; 19:1, 2, 8, 9, 10, 16, 23, 31, 39, 41, 48, 49, 51; 21:2; 23:4; 24:28, 30, 32).
<신명기>의 주제는 한 마디로 언약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대전제는 인과응보입니다. 즉 순종은 축복을 낳고, 불순종은 저주를 부른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한 법칙입니다. 사실 이 지극하고 단순한 원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상 제대로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음을 구약 전체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약 기자들(특히 바울)의 깨달음 인즉,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이 언약을 지킬 것으로 기대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교육적 효과, 즉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은 그들이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의 대가로 주신 선물입니다.
누가 그 땅을 나누어주었습니까? 정당한 권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대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그리고 각 지파의 족장들이라고 말합니다(1절). 이 역시 <민수기>에서 각각의 권위와 책임에 대해서 규정해 놓은 바 있습니다(민 34:16-29; 32:28). 그리고 그 땅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택했는데(2절), 이 역시 <민수기>에서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은바(민 26:55-56; 33:54; 34:13),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했던 것 같은데(잠 16:33), 나름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평한 방법으로 이 백성들이 채택한 듯합니다. 더 나아가 백성들이 자신들의 미래와 관련해서 행동을 결정함에 있어 자신들의 뜻대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대로 따라야 한다는 교훈적 메시지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그 교훈을 단락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수미상관적으로 첨언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렙부터 먼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선발 공모에 이만 명이 넘는 응모자가 몰렸다고 합니다. 성별과 연령은 물론 직업도 아주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누구보다 관심을 끈 응모자가 있었는데, 67세의 모 그룹 명예 회장님이었습니다. 최고령자임에도 불구하고 체력과 어학 실력은 물론 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도전장을 냈다는 것입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는 ‘사무엘 울만’의 말은 이런 분을 두고 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이 노익장의 회장님처럼 인생의 제 1막을 부지런히 살아온 장년층이 또 다른 도전으로 인생의 2막을 여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환갑의 나이에 요트 한 척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며 독도 알리기에 나서는가 하면, 청년기 때보다 더 큰 인기로 승승장구하는 장년층 여배우들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인 ‘레블론’은 60세의 ‘수잔 서랜던’을 모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인식이 변하면서 노년층을 지칭하는 용어도 달라졌습니다. “노인”, “황혼”이라는 말이 흰 머리를 미화시킨 표현인 ‘실버’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연장자 또는 선배라는 의미의 ‘시니어’로 불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마케팅 영역에서는 이런 노익장을 가리켜 에플(APPLE)족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활동적이고”(Active), “자부심이 강하며”(Proud), “안정적이며”(Peace), “고급문화를 즐기는”(Luxury), “경제력”(Economy)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노인들은 더 이상 사회의 주변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련하고,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젊은이들에게 없는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심과 큰 흔들림 없이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회의 중량급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나라의 경우 시니어들은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듯합니다. 마흔만 넘어도 밀고 올라오는 부하를 부담스럽게 쳐다보고 명퇴라는 말 앞에서 몸이 뻣뻣해집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하는 조로(早老)를 부추기는 풍토가 나이 먹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니어가 되려면 용감하게 나이의 벽부터 넘어야 합니다. 미국 UCLA 신경학자 ‘조지 바트조키스’에 의하면, 중년이 되어야 뇌에 들어오는 직접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가공해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주간지 <TIME>은 인간의 인지 기능이 50-60세에 절정에 이른다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현대 여성의 의상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세계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 역시 71세부터 절정기를 맞았습니다. 나이의 벽을 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외모를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몸이 튼튼해야 마음도 튼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기적인 운동으로 체력을 키워서 탄력있고 깨끗한 피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니어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열정이 생깁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시니어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균형된 사고와 인식을 심어주는 일은 성숙한 눈이 있어야 하고 그 몫은 시니어의 것입니다. 미국 일리노이 본사가 있는 대형 농기구 제조업체 ‘디어 앤 컴퍼니’의 4만 6000여 근로자 가운데 35% 이상이 50세 이상입니다. 70살이 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이곳에 소개한 글은 이미지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하민회 씨가 <조선일보> 시론(時論)에 “아름다운 시니어”라는 제목으로 쓴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 조선일보, 2006년 5월 31일자.
두 번째 단락의 중심인물은 이스라엘의 노익장(老益壯) ‘갈렙’입니다. 과연 그를 “아름다운 시니어”로 부를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유다’ 지파를 대표하면서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있습니다. 85세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아주 당당하며, 요구 사항 또한 질서정연하고 조리가 있어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선 그는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여호수아’에게 먼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는 바라(6절하)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전환점을 이룬 사건입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거부하고 반역한 이스라엘은 결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저주와, 반대로 ‘갈렙’은 그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 그것입니다(민 14:20-24).
40년이 지난 지금 ‘갈렙’은 왜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숙제를 마무리해야겠다. 그가 하신 약속 중 나에 관한 절반의 약속은 아직 이루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명분이 없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8절)
‘갈렙’은 지금 이 단락의 핵심 주제를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누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자격에 관한 선언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처럼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수 있을까요? ‘갈렙’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자만이나 허세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백을 통해서 그가 지난 45년을 일관되고 신실하게 ‘모세’의 언약만을 믿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겨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10절).
‘갈렙’이 받은 축복은 단순히 땅만이 아닙니다. 나이 85세가 되었음에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건하고, 활기 넘친 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청년의 꿈과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11절). 대개 이 나이가 되면 집에 들어앉아 손자나 보며 노인에게 걸 맞는 손쉬운 일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갈렙’의 사전에는 은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비전으로 힘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내가 필경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12절)
‘아낙’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땅에 살던 거인 ‘네피림’ 족속들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이들을 두려워하여 ‘가나안’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명령마저 무시하고 돌아서게 만들었던 그 족속들이 아닙니까? 바로 그들을 정복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새로운 정복을 이루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12절하)
‘갈렙’의 이런 모습은 승리 신학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누구나 이런 믿음의 축복을 받아봤으면 하는 소망을 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지도자의 권위를 가지고 승인과 축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호수아’는 ‘갈렙’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전해주었을 것이며, 축복의 내용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신명기적 축복”으로서, 주로 땅과 후손에 관한 것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준 것은 ‘헤브론’뿐이었습니다. ‘헤브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갈렙’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먼저 ‘요단’ 서쪽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화자가 ‘아라바’를 도시가 아닌 사람의 이름, 즉 ‘아낙’ 족속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무섭고 거대한 족속들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름을 ‘갈렙’이 물려받은 ‘헤브론’과 연계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야기의 결론-“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갈렙’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땅을 나누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믿고 따랐던 ‘갈렙’이 그 모든 축복을 상급으로 받을 수 있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본문은 그 핵심 사상을 전하기 위하여 두 가지의 전승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두 가지 전승이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3. 나는 ‘갈렙’과 어떻게 다릅니까? 다음 한 주 동안에 내가 차지할 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기도 제목은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얼마나 구체적이며, 그것을 얼마나 자주 점검하고 지냅니까? 한 주간의 목표는 무엇이며, 그것을 얼마나 성취하며 지냅니까? 이번 한 해의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 시점에 그 목표의 몇 %가 진척되었습니까?
제 19과: 유다와 요셉
19
유다와 요셉
(15:1-17:18)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7:17,18)
<여호수아>의 핵심 주제어인 “그 땅”과 관련하여, 책의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 1부: 그 땅을 정복하라(1-12장)
(2) 제 2부: 그 땅을 나누어라(13-19장)
(3) 제 3부: 그 땅에서 살아라(20-24장)
그리고 제 2부는 다시 다섯 개의 단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네 가진 것을 나누어라(13:1-7)
(2) 모세의 명령을 상기함(13:8-33)
(3) 갈렙부터 시작함(14:1-15)
(4) 유다와 요셉의 기업(15:1-17:18)
(5) 실로의 선택(18:1-19:51)
위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 두 개의 단락은 ‘요단’ 서편 땅을 나누는 대 원칙을 기록해 놓은 곳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대원칙에 입각하한 땅의 분배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갈렙’부터 시작하여(14:1-15), ‘유다’와 ‘요셉’ 지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군소 지파들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책의 제 2부에는 “땅의 분배”라는 주제에 걸맞게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지명과, 도시, 그리고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명이나 도시 이름과 관련하여 적어도 112개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현대 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 각각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본문의 주제를 파악함에 있어 치명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다만 족보와 마찬가지로 지리에도 신학이 있다는 <성경>의 대전제를 인식할 때, 이들 이름을 통해서도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재삼 확인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유목민 이스라엘이 광야 대신 정착할 땅을 갖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전셋집만 전전긍긍하다 마침내 자신의 주택을 소유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의 요구 사항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땅을 차지하고, 사이좋게 나누며,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게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과 관련해서 반복되는 모티브는 다름 아닌 “말씀과 순종”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이루고 있는 구조적 원리도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의 형식과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구조와 형식. 본문(15:1-17:18)은 책의 제 2부에서 네 번째 단락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유다’와 ‘요셉’의 유업을 다루고 있습니다(지도 참고). 이는 다시 세 개의 단락(15:1; 16:1; 17:1)과 결론으로 세분할 수 있으며, 각 단락은 나름대로 각기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1. 유다의 분깃(15:1-63)
1) 유다의 사방 경계(15:1-12)
(1) 남쪽 경계(1-4절)
(2) 동쪽 경계(5절상)
(3) 북쪽 경계(5하-11절)
(4) 서쪽 경계(12절)
2) 예외: 갈렙의 성읍들(15:13-19)
3) 요약(15:20)
4) 유다의 성읍들(15:21-62)
(1) 남쪽 에돔과의 경계(21하-32절)
① 29개 성읍(21하-32절)
(2) 중부평지(33-47절)
② 14 성읍(33-36절
③ 16 성읍(37-41절)
④ 9 성읍(42-44절)
⑤ 블레셋 지역(45-47절)
(3) 산지(48-60절)
⑥ 11 성읍(48-51절)
⑦ 9 성읍(52-54절)
⑧ 10 성읍(55-57절)
⑨ 6 성읍(58-59절)
⑩ 11성읍(59상, 칠십 인 역)
⑪ 2 성읍(60절)
(4) 광야(61-62절)
⑫ 6 성읍(61-62절)
5) 반복(후렴) 구절: 남아있는 여부스 족(63절)
2. 요셉의 분깃(16장)
1) 남방 경계(1하-3절)
2)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분깃(4-9절)
(1) 에브라임의 경계(5-9절)
① 남쪽 경계(5하-6상절)
② 동쪽 경계(6하-7절)
③ 북쪽 경계(8절)
④ 결론적 요약(8절하)
⑤ 예외: 므낫세 지역 내의 에브라임 성읍(9절)
(2) 반복(후렴) 구절: 남아있는 가나안 족(10절)
3. 므낫세의 분깃(17:1-13)
1) 예외: 므낫세의 장자 마길의 분깃(17:1)
2) 므낫세의 분깃(17:2-11)
(1) 므낫세의 남은 자손(2절)
(2) 슬로보앗의 딸들(3-4절)
(3) 요약(5-6절)
(4) 므낫세의 경계(7-11절)
① 남쪽 경계(7절)
② 예외: 므낫세 지역 내의 에브라임 성읍들(8절)
③ 남쪽 경계(계속)(9절상)
④ 예외: 므낫세 지역 내의 에브라임 성읍들(9절상)
⑤ 서쪽 경계(9절하)
⑥ 요약(10절상)
⑦ 북쪽 경계(10절하)
⑧ 동쪽 경계(10절하)
⑨ 예외: 잇사갈과 아셀 지역 내의 므낫세 성읍들(11절)
3) 반복(후렴) 구절: 남아있는 가나안 족(12-13절)
4. 결론(17:14-18)
자료와 편집. 화자는 이러한 구조를 형성함에 있어 다양한 전승과 자료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지파 별 지역 구분을 명시하고 있는 전승이나 사료(史料)들은 원래는 지파 간의 이해관계나 갈등을 포함해서 정치∙사회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었겠으나, 최종 편집과정에서 <여호수아>의 신학적 주제에 걸맞게 화자는 당대와 후대를 위한 교훈적 목적으로 수정하거나 재해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화자가 그가 가진 일련의 자료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재해석했을지 구분 가능한 일련의 자료들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구분 가능한 자료들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역별 경계에 관한 진술(15:1-12; 16:1하-3, 5-8; 17:7-10)
2) 유다 지파에 속한 성읍들(15:21-62)
3) <갈렙 전승> (15:13-19)
4)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에 관한 전승(15:63; 16:10; 17:12-13; 15-16, 18)
5) <슬로보핫 전승>(17:3-4)
6) 확장된 <요셉 전승>(17:14-18)
1) 지역별 경계를 담고 있는 전승은 책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분명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동일한 자료가 15:1-4에서는 ‘유다’ 지파의 남방 경계를 정하는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남방 경계를 알려주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신 34:3-5). 그런데 이곳에서 이 남방 경계선에 대한 언급이 당대의 정치 상황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특정 지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는지, 또는 어떤 특정 기능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본문의 구조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남방 한계선은 북방 경계와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의 동쪽 경계는 천연 경계로서 염해(鹽海)를 연하여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요단’ 끝자락에 있는 지역으로 북방 한계를 구분 짓는 곳이기도 합니다. ‘유다’ 지파의 사방 경계를 기술하고 있는 본문 중에서 북쪽 경계(5-11절)에 관한 언급이 가장 상세하고 길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예루살렘’이 ‘유다’ 지파의 북방 경계에서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 이유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정복하기 전까지 ‘여부스’가 계속해서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2) ‘예루살렘’을 ‘유다’ 지파의 행정관할에서 분리시켜 ‘다윗’ 왕의 개인 소유 즉 “‘다윗’의 성”으로 호칭했던 당시의 행정 절차를 반영하는 것이다; (3)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의 오래된 경쟁과 갈등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아마도 ‘베냐민’ 지파가 이 지역을 처음 정복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수 10; 삿 1:21) 그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지역 경계 목록은 ‘요셉’ 지파의 남방 한계에 관한 것입니다(16:1-3). 이 목록 역시 ‘베냐민’ 지파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로서, ‘유다’ 지파의 북방 한계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 목록은 남북조 왕국이 분열된 이후 형성된 전승의 일부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동쪽 경계와 ‘요단’에 관한 목록(5-8절) 역시 비교적 길고 상세한데, 이 지역은 흔히 ‘므낫세’ 지파의 소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목록이 형성되게 된 배경에는 ‘베냐민’, ‘에브라임’, 그리고 ‘므낫세’ 지파 간의 갈등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들 세 지파는 <여호수아> 제 1부와 ‘사울’ 왕국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자들입니다(참고. 삼상 7:15-17; 삼하 2:8-9). 물론 이 목록의 배경은 북쪽 여섯 지파(‘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스불론’, ‘앗셀’, ‘납달리’) 모두를 망라하는 것이었겠습니다만, 특히 ‘베냐민’의 ‘길갈’ 성소에 <여호수아> 1-11장의 전승들과 함께 더 잘 보존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원래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였을 그 전승들이 점차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땅의 경계들이 어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2) ‘유다’ 지파에 속한 성읍(도시)의 목록(15:21-62)들을 보면 적어도 두 가지 다른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각각은 아마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는 우선 전체 123개의 유다 도시들을 크게 네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고 있으며(남쪽, 중부, 산지, 광야), 다시 이들을 열 두 개의 그룹으로 묶어 각 지역으로 분산시켜 놓고 있습니다(목록 참고). 각 성읍을 네 개의 지역으로 나눈 것은 군사적 기능과 연관이 있는 것 같고, 열두 그룹으로 전체 도시들을 나눈 것은 왕정 시대 당시의 행정 체계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정치∙사회적 환경이 달라지면 이들 구분이나 체계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화자는 이런 역사적 상황의 변화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유다’ 지파의 모든 성읍들이 이스라엘의 통치 하에 놓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땅이나 각 지파의 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각 도시들을 그분의 백성 모두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그 땅을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겠으나, 그 땅이나 그 안에 모든 성읍들의 궁극적인 운명은 그 땅을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갈렙 전승>(15:13-19)에 대해서는 전승 전체에 대한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앞 장에서(14:6-15) 끊어졌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주는 가교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4절이 전승의 원래 시작 부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구절과 함께 <사사기>(1:11-15)에서 동일한 내용의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약간의 변화가 있긴 합니다만).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위와 같은 견해가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구절이 큰 무리 없이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4:15);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15:14)
아무튼 <갈렙 전승>의 원래의 상황이나 본문이 어떠했든, 15:15-19의 본문은 구전 전승에 바탕을 둔 잘 짜인 한 편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무모하기까지 한 ‘갈렙’의 도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6절). 즉 그는 ‘드빌’을 치는 용감한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웃니엘’이라는 자가 그의 말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여 이야기는 절정에 이릅니다만(18-19절), 정작 이 대목에서 ‘웃니엘’은 대화에서 침묵하는 방관자일 뿐이고, 새로 신부가 된 ‘갈렙’의 딸 ‘악사만이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갈렙’으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떼쓰고, 응석부리는 어린 아이의 역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빠, 나에게 이러시면 안 되죠. 나를 속일 상각일랑 접어세요. 이는 공평치 못한 처사라는 것이에요. 그 땅을 나에게 주셔야죠.” ‘갈렙’은 즉각적으로 딸의 요구에 순응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다 내어줍니다.
그렇다면 <갈렙 전승>을 이곳에 편집해 넣은 화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비록 이 이야기가 기원론적인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언급, “오늘날까지...있었더라”는 없지만, 내용상 기원론적인 이야기로 분류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히 본문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초기의 전승에서는 이런 기원론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전승의 원해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갈렙’ 지파가 ‘갈렙’을 지파의 영웅으로 만들고자 함이었을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땅 헤브론을 개척한 다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경제적 이익을 담보로 정략결혼을 이끌어내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가는 유목민의 우두머리로 그리고 싶은 것이었을까? 본문의 분위기로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런 의도였다면 ‘갈렙’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으로 결혼 약정을 이끌어내려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본문을 통해서 받게 되는 인상은 ‘갈렙’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개의치 않고 딸을 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리의 불한당도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갈렙’ 지파의 편에서 보자면, 그를 진정 지파의 영웅으로 삼고자 했다면 이보다는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분위기는 역시 14장에서 소개한 바 있는 <갈렙 이야기>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두 장면에서 모두 ‘갈렙’은 거래에서 손해를 보는 쪽입니다. 불리한 패를 쥐는 쪽이라는 말입니다. 추측컨대 이번에도 지파 간 갈등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정확한 배경은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땅과 관련한 <여호수아>의 주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인데,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한 종 ‘갈렙’을 통해서 그분의 백성에게 축복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4)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에 관한 전승들은 원래의 출처는 <사사기> 1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여호수아>에서 등장하고 있는 이들에 관한 언급들은 모두 이곳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1-21의 본문은 <유대 전승>의 일부로서, ‘유다’ 지파의 강력한 정복전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도 정복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족속의 저항이 워낙 강력했던지라 이들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는 진술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절(21절)은 ‘예루살렘’이 다윗 왕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남아있는 현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책임을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에게로 돌리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본문은 이와는 정 반대로 그 책임을 ‘유다’ 지파에게도 돌리면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봅시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삿 1:21)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수 15:63)
따라서 ‘예루살렘’을 ‘베냐민’ 지파와 연계시키고 있는 <사사기>의 전승은 왕정 시대 이전의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동일한 현실에 대한 후대 역사의 재해석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사기> 1장의 나머지 부분(1:22-26)에서는 북쪽 지파들에 눈을 돌리면서 이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언급조차도 실은 북쪽 지파들과 관련된 다른 사실들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들의 불순종에 관한 것입니다(삿 1:27-36). 이 대목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무엇인지 찾아보면 쉽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 기록을 보면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 기록들을 통해서 원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여호수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에 관해서도 <사사기>와 <여호수아> 모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사기>의 기록이 좀 더 단순한 것으로 보아 <여호수아>의 기록이 후대의 수정 내지는 원인론적 해석이 첨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삿 1:29)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수 16:10)
<여호수아>에서 노역과 관련된 언급은 왜 추가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이들에 대한 원인론적 언급은 ‘여호수아’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므낫세’ 지파와 관련된 언급에서도 미미하긴 하지만 <사사기>의 원래 전승을 수정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아래 두 구절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않으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삿 1:27)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숫 17:12)
즉 <사사기>에서는 ‘므낫세’ 지파가 자기 지역 내에서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여호수아>에서는 ‘므낫세’가 “몰아내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말 <성경>에는 이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 두 기록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현저한 입장의 차이가 있음을 놓칠 수 없습니다. “하지 못했다”와 “하지 않았다”의 차이는 고의성 여부이며, 후자(後者)의 경우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명백한 거부행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기록은 북쪽 지파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동정적인 입장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에서 ‘므낫세’ 지역에 함께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몰아내시겠다고 약속하셨던(13:6) 족속들의 잔당일 뿐입니다만, <사사기> 화자의 입장은 이 사실을 ‘므낫세’ 지파의 공공연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사사기>의 이러한 입장은 <여호수아>에서도 일부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수 17:17-18)
결국 이 두 구절을 포함해서 본문의 마지막 단락(17:14-18)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처럼, 이 단락의 편집자의 주된 관심사는 그 땅에 남아 있던 잔당들의 문제였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들 잔당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사기> 화자도 유다 지파가 산지 주민들을 몰아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들이 병거를 가진 강력한 무리였기 때문이라고 덧붙인 바 있습니다(삿 1:19). 그러나 <여호수아>의 화자는 이 단락에서 이스라엘이 이들 잔당을 몰아내지 않았다는 언급은 자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쫓아내게 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17:18). 이렇게 볼 때, <사사기> 1장의 전승이 가나안의 잔당들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여호수아> 15-17장을 기록하고 있는 화자는 이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신학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사기> 1장과 <여호수아> 15-17장은 둘 다 보다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 쪽은 ‘유다’ 지파의 입장에서,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요셉 지파-‘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입장에서 동일한 전승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최종 편집자는 이들 자료들을 취하되, <사사기> 1장과 <여호수아> 15-17장에서 공히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논의의 대상은 <슬로보핫 전승>(17:3-4)입니다. 이 전승은 그 뿌리를 <민수기> 27:1-7에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만 <여호수아>는 전승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재창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즉 <민수기> 27장의 정보를 바탕으로 ‘모세’의 규례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여호수아’를 부각시킴으로써, <여호수아>의 주제어 중의 하나인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6) 마지막으로, 확장된 <요셉 전승>(17:14-18) 역시 오래된 전승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가장 까다로운 두 지역 ‘벧 스안’과 ‘이스르엘’ 골짜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문제는 ‘요셉’ 지파가 당면했던 문제이지 화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락은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아주 친숙한 이야기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현재의 본문은 어휘의 사용에 있어서나 그 목적에 있어서나 원 자료가 당면하고 있었을 상황이나 배경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업”; “제비뽑기”; “축복”; “르바임”; “브리스 사람”; “가나안의 철 병거”(삿 1:19에서 취한 것). 본문은 그 형식에 있어 두 개의 유사 병행 구절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14-15절; 16-18절). 편집자는 아마 이전에 여호수아가 땅의 분배와 관련해서 지파들 간에 중재를 맡았던 내용을 담은 이전의 전승으로부터 본문을 취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의도는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모든 백성의 필요를 채우셨으며, 그들의 승리에 대한 보장을 약속해 주셨는지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최종 편집자는 수 세대를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름대로 독특한 의미를 제공해주었던 전승들을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서 새롭게 각색하고 수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유다의 기업(15:1-63)
유다의 사방 경계(15:1-12). 제비뽑기의 첫 수혜자는 ‘유다’ 지파입니다. 이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출생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 바라보는 우선순위에 따른 것으로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것 같습니다. 즉 그의 주 관심의 대상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남쪽 ‘유다’ 왕국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있어 ‘유다’ 지파야말로 가장 먼저 기업을 받아야 할 지파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재건할 마지막 희망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 열두 절은 ‘유다’ 지파의 사방 경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1) 남쪽 경계(1-4절); (2) 동쪽 경계(5절상); (3) 북쪽 경계(5하-11절); (4) 서쪽 경계(12절). 구체적인 지명의 확인과 이에 대한 설명은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화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유다’ 지파의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는 1-12절 사이에서 보듯이, 산이나 강 같은 자연적인 특징에 따라 구분되는 경계들이고, 또 하나의 방식은 개별적으로 정착한 도시나 지역들을 중심으로 구분한 경계들입니다(21-62절).
갈렙의 성읍들(15:13-19). ‘갈렙’이 14장에 이어(14:6-15) 이곳에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들 목록은 소위 <갈렙 전승>에서 취하여 이곳에 삽입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모든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수행한 모든 명령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른 바 명령과 동일한 것이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갈렙’ 지파의 경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명령을 내리셨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말입니다(참고. 삿 1:20). 어쩌면 이 전승은 완성된 <성경> 속에는 한 번도 포함된 적이 없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갈렙’은 기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웃니엘’을 사위로 맞기까지 합니다. ‘웃니엘’은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남쪽 ‘유다’ 지파를 대표하는 유일한 사사이기도 합니다(삿 3:9-11).
그는 ‘드빌/‘기럇-세벨’을 공격하여 정복한 ‘웃니엘’에게 자기 딸 ‘악사’를 주었습니다(15:15-19; 삿 1:11-15). ‘악사’는 ‘야곱’과 마찬가지로(창 27:19) 아버지를 설득하여 자신의 결혼에 대한 기념으로 선물 즉 축복을 달라고 요청합니다(15:19). ‘갈렙’은 딸의 요청에 윗 샘과 아랫 샘을 선물로 줍니다. 이것은 신부가 가족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풍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라반’이 ‘레아’와 ‘라헬’에게 여종을 “준” 것이나(창 29:24, 29), ‘바로’가 딸에게 ‘게셀’을 혼인 지참금의 형식으로 “주는” 것처럼(왕상 9:16) 말입니다.
그러나 딸이 아버지를 “재촉했다”(tWs, 수트)는 ‘히브리’ 동사는, “꾀다, “유혹하다”, “속이다”, “부추기다”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사탄’이 ‘다윗’을 꾀어 인구조사를 하게 한 경우와 같습니다(대상 21:1). 이로 미루어 ‘갈렙’의 행동이 자발적이거나 당시의 풍습을 따른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악사’의 행위가 ‘야곱’에 버금갈 정도로 기회를 활용함에 있어 거의 완벽한 수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웃니엘’이 승리를 거둔 직후 아버지가 가장 기분이 들떠 있을 때 선물을 요청한 것입니다.
요약(15:20). ‘유다’ 지파의 기업에 대한 요약이 <갈렙-웃니엘> 이야기에 뒤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렙-웃니엘> 전승은 처음부터 <유다지파 전승>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갈렙’과 ‘웃니엘’이 차지한 기업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기업으로 주신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인식 체계를 엿볼 수 있는데, 즉 겉으로 보기에 사람이 이룬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일들이 실은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간섭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성읍들(15:21-62). 화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하심을 ‘유다’의 성읍들에 대한 목록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들 목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나 확인은 생략합니다.
이 목록의 구조나 형식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화자 당대의 정치∙군사적인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단순히 그에게 속한 모든 영토와 경계를 관할하고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다’에 속한 모든 도시가 다 목록에 포함된 것은 아닙니다만, 경계 내에 들어와 있는 그 모든 성읍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암시받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이들 성읍의 목록이 당시의 정치군사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또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담대하게도 그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데, 그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다름 아닌 인간의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정치나 역사에 관한 과거의 문헌이나 자료가 무엇을 말하고 있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사도 바울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결론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후렴(15:63). ‘유다’ 지파에 관한 마지막 결론에서 화자가 강조하려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후렴과도 같은 반복이 그것입니다:
예루살렘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15:63)
화자는 마치 ‘예루살렘’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주문(呪文)을 걸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윗’ 왕 시대에 ‘유다’ 지파는 ‘여부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적이 있기는 합니다(삼하 5:6-10).
‘예루살렘’에 관한 이러한 언급이 각별히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신명기 역사서” 주요 관심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왕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정부는 하나님의 첫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오명(汚名)을 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심장부인 수도(首都)에서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유다’는 ‘여부스’의 종교와 문화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신명기>의 가르침(신 7:1-26; 20:16-18)에 대하여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에 이르러는 이들 족속들을 노예로 삼기도 했으나(왕상 9:20-21), 이나마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2. 요셉의 기업: 에브라임(16)
남방 경계(16:1하-3). ‘유다’ 다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지파는 한 지파가 아니라,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본문의 이런 형식과 구조는 상당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적어도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요셉’ 역시 ‘야곱’의 적자(嫡子)라는 전통을 유지시켜 가겠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요셉’의 지파는 하나가 아니라 두 아들의 이름을 따서 두 개의 지파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이 단락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역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언급은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16:5; 18:11-13). 혹자는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역이 다름 아닌 15:5하-11 사이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대 지파의 기업을 대체한 것으로 ‘르호보암’ 왕 이후부터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분명치는 않습니다.
에브라임의 분깃(16:4-9). ‘요셉’의 후손들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다는 진술은 이스라엘이 ‘요단’의 동과 서에서 각 지파별로 기업을 받았다는 일반적인 진술(13:8; 14:1)과 병행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16:4)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속은 요단 저편 동쪽에서 그들의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13:8)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16:4)
이들 두 지파가 받은 기업의 목록과 관련해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두 지파의 지역 경계가 일부 모호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분한 모든 성읍과 그 마을들도 있었더라(9절)
즉 ‘므낫세’ 지파는 그들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을 위하여 일부 성읍들을 따로 구분하였다는 점입니다.
후렴(16:10). 이곳에서도 다시 후렴과도 같은 반복이 ‘유다’ 지파의 경우에서처럼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 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서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10절)
오늘까지라 함은 ‘솔로몬’ 재위 시를 말하는 것인데, 당시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왕국을 위한 건설 사업에 외국인 노동자를 이주시키고 있었습니다.(왕상 9:15-22). 그렇다면 이 구절은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있었다”는 15:63의 진술과는 시기적으로 다소 후대의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구절을 통해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으며, 15:63과 함께 이 모든 후렴들은 결국 17:18에서 드러나고 있는 화자의 의도를 가리키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것을 쫓아내리라 하였더라(17:18)
3. 므낫세의 기업(17:1-13))
‘요셉’의 두 아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본문에서는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기업을 먼저 언급한 다음 장자 ‘므낫세’의 기업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17장의 형식과 구조는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서는 <창세기> 48장의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사 시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지파도 ‘에브라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순서는 역사적 사실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길의 기업(17:1). ‘마길’은 ‘므낫세’의 장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이곳에서 ‘므낫세’의 기업을 언급하면서 ‘마길’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 점은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제비 뽑은 것은 이러하니라. 므낫세는 요셉의 장자였고 므낫세의 장자 마길은 길르앗의 아버지라 그는 용사였기 때문에 길르앗과 바산을 받았으므로(17:1)
<사사기>에서 ‘마길’은 ‘므낫세’의 장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지파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삿 5:14).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논란에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서 ‘마길’은 요단 동편에 거주했던 ‘므낫세’의 절반 지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민 32:39-40; 신 3:15; 수 13:31).
므낫세의 기업(17:2-11). ‘므낫세’의 기업과 관련해서 본문의 구조는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2-6절)은 ‘므낫세’의 자녀들에 따라 기업을 구분하는 방식이고, 나머지 단락(7-11절)에서는 각 지역 경계를 남서남북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화자가 소개하고 ‘므낫세’의 족보가 다소 복잡합니다. 예컨대, 2절에 따르면 ‘헤벨’은 분명 ‘므낫세’의 아들로 보입니다만, 3절에 의하면 그렇게 단순치가 않습니다:
2므낫세의 남은 자손을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는데 그들은 곧 아비에셀의 자손과 헬렉의 자손과 아스리엘의 자손과 세겜의 자손과 헤벨의 자손과 스미다의 자손이니 그들의 가족대로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남자 자손들이며, 3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17:2-3)
이들의 관계가 어떠하든 화자의 의도는 초지일관, 즉 ‘여호수아’가 ‘모세’와 ‘야훼’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민 27:1-11; 36:1-13).
‘므낫세’에게는 모두 열 분깃이 돌아갔습니다(5절). ‘므낫세’의 나머지 다섯 자손에게 각 한 분깃씩과, ‘헤벨’의 아들 ‘슬로보핫’의 다섯 딸들에게 각 한 분깃 씩 입니다. 이들 다섯 명의 딸이 아들과 같은 분깃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므낫세’에게 돌아간 것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바산’을 합치면 도합 열두 분깃이었습니다.
후렴(17:12-13): 후렴과도 같은 반복이 ‘유다’와 요셉 지파의 경우에서처럼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12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13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7:12-13)
이보다 앞서 11절은 ‘므낫세’와 함께 살던 가나안의 성읍들을 언급하고 있는데(‘돌’, ‘므깃도’, ‘다아낙’, ‘이블르암’, ‘벧스안’), 이들 지역은 ‘가나안’의 보루로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왕정이 들어서고 나서야 이들 주민들은 왕국의 노예로 부역에 종사하게 됩니다. 이 후렴을 통해서 화자는 다시 한 번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비록 이들을 정복하여 노예로 삼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이어지는 책 <사사기>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종국에는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약속을 거두고 맙니다:
21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1-23)
4. 결론(17:14-18)
마지막 단락은 화자 자신의 신학적 결론을 위하여 덧붙인 추가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언약의 축복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그동안 매 단락의 끝에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후렴처럼 반복하던 것과는 극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축복은 ‘요셉’ 지파를 대상에서 하고 있는데, 축복의 내용인 즉은 그가 앞에서 ‘유다’ 지파의 ‘갈렙’을 통해서 강조하던 바와 동일한 것입니다(참고. 14:13; 15:19):
14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 함이니이까 하니, 15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16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7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17:14-18)
설교의 요점은 땅의 축복은 지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다’와 ‘요셉’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남북조 왕국에서 핵심 역할을 했으며, 나머지 지파들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힘에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설교는 아주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 지파가 진정으로 위대하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신 민족이라면,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땅의 강력한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살아갈 땅을 새롭게 개척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특히나 이 지파가 불평하고 있는 바처럼, 산지가 그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협소하여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빠져나오고 싶다면 더욱 힘써 원하는 바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15절). 이 지파의 불평은 또 있습니다. 지역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강력한 철 무기로 무장한 ‘가나안’이 살고 있어 싸움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16절). ‘요셉’ 지파는 여전히 ‘여호수아’의 도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여호수아’가 대답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도전을 주는 대답입니다(17절). 그는 ‘요셉’ 지파가 크고 강력하여 축복받은 지파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 분깃 이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요셉’ 지파가 왜 하나의 지파가 아니라 둘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분깃을 얻는 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그들의 도전 정신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18절). 도전은 이미 15절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삼림 지역에서 두 번째 분깃을 개척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산지를 넘어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여 구릉지대 전체를 통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도전은 새로운 약속과 함께 다가옵니다. ‘요셉’은 ‘유다’나, ‘에브라임’이나 ‘므낫세’와는 달리, 가나안이 아무리 철병거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마저도 실은 도전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지명들과, 도시들, 그리고 사람들! 이 모든 이름들이 현대 독자들에게 과연 무슨 의미와 교훈을 줄 수 있을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을까?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여호수아>의 중심 주제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혹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서막>에서 밝힌 바 있듯이, <여호수아>를 시작으로 하는 <히브성경>의 <전기 예언서>는 모두 객관적 역사기록이 아니라, 신학화 한 역사 즉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한 책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이름들의 목록은 <성경>의 족보 기록처럼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호수아>의 경우라면,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도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교과서대로 살아라
본문의 교훈을 위해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첫 번째 작업은 무엇인가? 본문의 수사적 특징 중의 하나를 찾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본문 중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마치 노래의 후렴 구절과도 같은 반복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반복은 매우 중요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반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15:63)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16:10)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7:12-13)
화자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상기해 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책 <사사기>의 시대적 상황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열세 번에 걸쳐 민족적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것도 그들이 정복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남겨두었던 그 땅의 이방 족속들이 대반격을 가해오는 위기적 상황을 말합니다. 물론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열두 번씩이나 위기를 맞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서 한 번도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이번만 구원해 주시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겠다고 맹세합니다만, 지나고 나면 그만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언약을 취하해 버리고 맙니다:
21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1-23)
그처럼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을까요? 만일 이런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아직 신실함의 정의를 잘 모르거나, 또는 언약의 속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13)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분은 실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언약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자가 공동체에 던지는 도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조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갈렙’의 전철을 밟고 싶으십니까?”
지금 이 공동체가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날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형제간에 그 땅의 지분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벌어지고 있던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남쪽의 ‘유다’ 왕국이든 북쪽의 이스라엘이든 처음에는 신정일치(神政一致)의 나라로 시작하였지만, 어느새 신(神은) 사라지고 정치만 난무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강하고 부요한 자들, 왕이나 귀족들은 더 가지려 안달이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모세’의 규례와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라 공평하게 땅을 나누고, 구획을 정하여, 사이좋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책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했든 아니 하였든, 세 번에 걸친 언급도 따지고 보면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사회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는 그 세대를 향하여 외칩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남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또 하나 상정할 수 있는 가능한 시대적 상황은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남의 땅에서 절망과 회의 가운데서 대부분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고 있던 시대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던 시절입니다. 화자는 묻습니다: “우리에게 과연 미래가 있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올 것인가?”
‘여호수아’의 처방은 지극히 원론적이고 간단합니다: “교과서대로 살아라.” 이거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기본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세대가 처음부터 교과서에 충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땅에서 다른 땅의 민족들과 더불어 살기를 택했고, 더 나아가 그 땅의 신을 섬기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 또한 그들을 버렸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쫓겨났고, 그들이 그토록 함께 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방 족속과 함께 아예 그 나라에서 살도록 유배를 당한 것입니다.
미국이 80년대의 불황을 이기고 약 20여 년 동안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바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미국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기초과학 분야에서의 엄청난 투자와 잠재력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지난 90년 이후 미국은 대부분의 노벨상을 석권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그 나라에서 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가 발발하면서, 지존의 지위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경제학자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그 기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나는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기도와 성경 묵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매 주 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제자 삼기나 선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매 달 책 한 권을 만나고 있습니까(지적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모습이 지난주와 다르지 않고, 지난해와 다르지 않다면, 다음 주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녕 그렇다면 이미 주님은 나를 포기하고 떠나셨는지 모릅니다.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내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주님은 내 안에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내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게으름의 고리를 결단코 끊어내고야 말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기도를 그런 식으로 하십시오. 결코 추상적이거나, 중언부언하거나, 애매모호한 기도는 드리지 마십시오. 매 주 예배 시 교회의 기도 제목부터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해놓은 목표와 올해의 말씀과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목장의 기도제목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안동 우리집 교회>에서처럼, 목자의 선창에 따라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고, 함께 행동하는 교회가 됩시다. 그리고 다음 주에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하는 과정을 꼭 거칩시다.
2. 스스로 개척하라(창조하라)
교훈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교훈으로 나아가 봅시다.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단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두 지파가 불만 가운데 ‘여호수아’에게 나아옵니다. 이 두 지파는 수적으로 다른 지파보다 훨씬 많습니다. 북 이스라엘 중에서 ‘에브라임’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지파와 마찬가지로 한 분깃만을 배당받지 못하자 불만과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17:14).
이들의 불만에 대해서 ‘여호수아’의 답변이 걸작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찐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17:15). 다시 말하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정말 네가 큰 민족이라면 당연히 ‘에브라임’ 산 하나만으로 부족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말인데 이 넓은 산지를 그대로 두지 말고 개척해야지.” 여기서 “개척하다”는 동사는 ‘바라’(bara) 즉 “창조하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단어가 하나님의 창조,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와 관련해서만 쓰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창조적 행위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그의 형상인 우리 인간 특히 그의 백성의 모든 사역이나 활동이 창의적이고 창조적이 되어야 마땅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사람은 수동적인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현상유지도 싫어하고 복지부동은 더욱 싫어합니다. 반대로 남이 하지 않는 생각, 남이 하지 않는 행동을 먼저 합니다. 실험정신이 강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공무원처럼 그냥 규정집에 나와 있는 것만을 소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도 만들어 행합니다.
그러나 이들 두 지파는 아직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족들 때문에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에게 대들고 있습니다(17:16). 원래 게으른 자가 늘 남 탓입니다. 신통찮은 목수가 연장 나무랍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지도자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그들을 다그칩니다(17:17). 뭐 이런 뜻이었겠지요: “그런데 말이야, 정말 너희들이 크고 강하다면 그들 쯤이야 금방 해치울 수 있는 것 아니야?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내가 개인적으로 개척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인생을 단순히 취업하는 기계로 전락시키지 맙시다. 그냥 먹고사는 일에 연연해하는, 그래서 늘 한 많은 인생으로 전락시키지 맙시다. 취업준비를 할 때라도, 그냥 시험에 필요한 과목들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취미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분야에도 적극 투자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됩시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고,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경쟁력이 되고, 지적재산권이 되도록 합시다.
3.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무엇인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하셨는가?” 그 분은 명령하시기 전에 약속하십니다. ‘여호수아’에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내가 정녕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겠고 내가 정녕 너희를 버리지 아니 하리라”(히 13:5; 수 1:6).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맹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헤세드’라 부릅니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다’에 남아있던 소수의 무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서까지 동일한 ‘헤세드’를 보여주셨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깊은 한숨으로 회개함이니라(렘 42:10)
기도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약속에 의거해서 하나님께 요청합시다. ‘느헤미야’나 ‘갈렙’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나는 얼마나 교과서에 충실합니까? <우리교회>는 어떠합니까? 교과서에 충실하다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2. 교과서에 충실할 때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지 기대하는 바를 토의해 봅시다.
3. 우리 목장 모임을 본문에 비추어 점검해 봅시다. 과연 기본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목장 모임에 관한 우리 교회의 매뉴얼이 있으며,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까?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20과: 실로의 선택
20
실로의 선택
(18:2-19:5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너희는 매 지파에 삼인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가지고 내게로 올 것이라(18:3-4)
본문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미건조함입니다. 수없이 등장하는 지명들이 그렇고, 그 형식과 내용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일곱 번에 걸쳐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본문의 교훈, 즉 신학적 메시지가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15-17장과 나란히 보게 될 때,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집니다. 형식적으로 볼 때, 15-17장과 본문(18-19장)은 시의 유사반복 또는 대조반복과도 같습니다. 각각의 본문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공히 ‘요단’ 서편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동일한 내용을 최종 화자는 인위적으로 전반(15-17장)과 후반(18-19장)으로 나누어 전반부에서는 ‘유다’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후반에서는 나머지 일곱 지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각 본문의 내용만 볼 때,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최종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전체적인 신학적 주제일 것입니다. 특히 책 전체의 주제와 관련해서,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에 대답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바벨론’ 유수 이후의 이스라엘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그 땅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에 관한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해 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독서 관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 이야기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본문을 새로운 별개의 단락으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무대가 ‘길갈’이 아니라 14-17장의 이야기의 주 무대(설화세계)는 길갈로 보입니다(참고 14:1).
‘실로’로 옮겨왔으며(18:1), 이야기의 주된 관심사도 ‘유다’와 ‘요셉’을 뺀 나머지 일곱 지파에 관한 것입니다(18:2). 본문의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서론: 배경과 주제 도입(18:1-10)
2. 일곱 지파의 기업(18:11-19:48)
3. 결론(19:49-51)
첫 두 단락은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서론의 전체적인 기능은 이야기의 배경과 주제를 도입하는 것인데, 다섯 개의 작은 단락을 통해서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1) 일반적인 배경(18:1)
(2) 남아있는 과업(18:2)
(3) 과업 성취를 위한 독려와 지시(18:3-7)
(4) 반복되는 지시(18:8)
(5) 지시에 따른 순종(18:9-10)
이어서 두 번째 단락은 일곱 지파들이 차지한 땅의 경계와 지역 내 성읍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각 지파 별로 일곱 개의 작은 단위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1) 베냐민의 땅(18:11-28)
(1) 북쪽 경계(12-13)
(2) 서쪽 경계(14)
(3) 남쪽 경계(15-19)
(4) 지역 내 성읍들(21-28)
2) 시므온의 땅(19:1-9)
(1) 지역 내 성읍들(2-7)
(2) 경계의 확장과 요약(8)
(3) 추가 설명(9)
3) 스불론의 땅(19:10-16)
(1) 남서쪽 경계(10하-11)
(2) 남동쪽 경계(12)
(3) 동쪽 경계(13)
(4) 북쪽 경계(14)
(5) 지역 내 성읍들 (15)
4) 잇사갈의 땅(19:17-23)
(1) 지역 내 성읍들(18-21)
(2) 복쪽 경계(22상)
(3) 요약(23)
5) 앗셀의 땅(19:24-31)
(1) 지역 내 성읍들(25-26상)
(2) 서쪽 경계(26하)
(3) 남쪽 경계(27상)
(4) 동쪽 경계(27하)
(5) 지역 내 성읍들(28상)
(6) 북쪽 경계(28하)
(7) 북서쪽 경계(29)
(8) 지역 내 성읍들(30)
(9) 요약(31)
6) 납달리의 땅(19:32-39)
(1) 남동쪽 경계(33)
(2) 남서쪽 경계(34상)
(3) 지역 내 성읍들(35-38)
(4) 요약(39)
7) 단의 땅(19:40-48)
(1) 지역 내 성읍들(41-45)
(2) 역사적 회고(46-47)
(3) 요약(48)
본문의 세 번째 단락은 결론으로서, 이스라엘의 신실한 지도자 ‘여호수아’에 관한 것입니다. 즉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19:49-50), 그의 기업도 잊지 않고 배려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19:51) 책의 제 2부를 요약하는 선언으로서, 이미 앞에서 두 번에 걸쳐(14:1; 18:1) 언급한 바 있는 내용입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19:51)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14: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18:1)
자료와 편집.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즉 ‘요단’ 서편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의 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일곱 지파에 관한 이야기를 별도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왜 ‘실로’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화자 자신이 독자들에게 주고자하는 신학적 메시지와 관련하여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지만, 자료비평적인 접근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즉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의 기본적인 가정은 본문 속에 후대의 <오경 전승>과, 그보다 다소 오래된 여러 전승들이 혼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본문이 후대 <신명기> 학파에서 발전시킨 원인론적인 내용으로서, ‘페르샤’ 왕국의 후대에 ‘사마리아’에 계속 남아있던 이스라엘의 후손과 이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돌아오는 부유한 ‘유대 디아스포라’ 계층 사이에 그 땅의 소유를 놓고 중재안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로 기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실로’를 선택한 것은 이곳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견해도 만만치 않은 것이, <신명기> 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수아’와 각 지파의 족장들과 함께 그 땅을 분배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점은 <신명기 전승>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명기 전승>보다는 훨씬 오래된 전승들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땅을 분배하기 위하여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사역과 관련한 본문들을 말합니다. 즉 지파별로 대표자를 선정하고, 이들이 그 땅을 돌아보고, 그 결과 합의에 따라 공정하게 그 땅을 나누었다는 본문의 기록들은 보다 오래된 전승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혹자는 땅의 분배와 관련한 보다 오래된, 제 2의 전승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전승이 본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유다’와 ‘요셉’을 위한 땅의 분배를 다루고 있는 본문(14-17장)은 분명 일곱 지파를 위한 본문(18-19장)과 별개의 독립적인 전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두 전승에서 땅의 분배와 관련한 이스라엘의 입장이나 태도가 분명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유다’와 ‘요셉’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매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 처리 방식은 사뭇 상업적인 거래를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본문(14-17장과 18-19장)이 각기 나름대로의 양식과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최종 본문에서도 그러한 차이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14-19장의 기록이 모두 하나의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면, 전체 이야기의 문학적인 모순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두 이야기의 무대의 중심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길갈’에서 ‘실로’로 바뀌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실로는 10절에 걸쳐 무려 네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요셉’이 그 땅의 남쪽과 북쪽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본문의 기록(18:5) 역시 이스라엘 역사에서 훨씬 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보다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실로’를 포함하고 있는 본문과도 서로 연대기상의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난제들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본문 속에 두 개의 전승, 즉 후기의 <신명기 전승>과 그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는 땅의 분배와 관련한 전승이 혼재해 있다는 견해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최종 본문의 형식과 내용일 것입니다. 본문의 서론과, 이어지는 각 지파별 이야기에서 전승의 배경과 관련한 문제를 보다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은 참고도서 1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201-203 쪽).
신학과 신앙
1. 서론과 배경(18:1-10)
첫 번째 단락의 첫 구절은 본문의 자료와 관련해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1절)
여기서 “회중”(hd:[, 에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후기 “신명기적 편집”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만,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런 입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밀러’(J. Miller)는 “회중”을 이스라엘 전체적으로 지파 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각 지파의 족장들이 소집한 일종의 비상 기구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왕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 단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사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 “회중”은 여자와 어린 아이를 포함하는 전 국가적인 기구였거나, 성인 남자만으로 구성되었거나, 또는 범국가적인 대표 기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밀그롬’(J. Milgrom)은 이 단어가 후기 이스라엘 문헌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 단어는 분명 아주 오래된 이스라엘의 한 기구였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또 다른 단어는 “회막”입니다. 이 단어는 <여호수아>에서는 단지 이곳과 19:51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명기 자료>보다 더 오래된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대체적으로 일치된 견해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믿을 만 한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회막”은 백성의 진영 밖에서 ‘모세’의 명에 따라 세워졌으며, ‘여호수아’가 이를 지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출 33:7-11; 민 11:16-29). 그리고 이곳에서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곳이기도 합니다(신 31:14).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의 오래 된 전승에서는 “회막”과 ‘실로’ 뿐만 아니라 “회막”과 ‘여호수아’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삼상 2:22; 시 78:60).
“회막”은 원래 <야훼 전승>에서는 하나님의 예언이나 신탁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텅 빈 장소였으나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대화를 위해서 임재하시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묻기 위해서 나아오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회막”의 배경이 어떠했던 이곳에서 화자가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의도는 분명 신학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회막”과 관련한 이전의 전승만으로도 화자가 왜 “회막”를 ‘실로’와 연계시키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회막에 모였다”는 것은 이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으며, 일곱 지파에게 땅을 나누는 일도 하나님의 임재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전쟁이 모두 끝난 후에 회막으로 나아왔다”는 언급입니다. “회막”과 관련한 또 다른 화자의 의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실 수 있도록 여유(시공?)를 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전시(戰時)가 아니라 평화 시에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더 이상의 정복이나 전쟁은 필요치 않으며, 그 땅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준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이점을 새삼 강조라도 하려는 듯, 화자는 여전히 그 땅을 얻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일곱 지파를 ‘유다’와 ‘요셉’의 두 지파와 대별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2절)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지파들이 그 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이스라엘은 그들의 과업을 완수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모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3절에서도 단지 일곱 지파가 아닌 전체 이스라엘의 순종의 주제를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3절)
‘여호수아’의 질책은 전혀 예상 밖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게으름과 두려움에 대한 질책으로서, 본문의 핵심 주제와 배경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단순히 일곱 지파만이 아니라)은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즉 그 땅을 차지하고 말고는 그들의 행동과 용기에 달린 것이라고 말입니다(1장). 따라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준 그 땅을 차지할 믿음과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이르러 주제는 다시 1-12장의 <정복 이야기>의 그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일컬어 “너희 조상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일입니다. 화자는 분명 <창세기>의 족장들과 족장들의 하나님을, 당대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호통과 질책이 하나님의 마지막 단어는 아닙니다. 연약하고, 게으르며, 불순종하기까지 한 이 백성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
4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5그들이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되 유다는 남쪽 자기 지역에 있고 요셉의 족속은 북쪽에 있는 그들의 지역에 있으니, 6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4-6절)
이스라엘이 받은 소명은 “그 땅을 두루 다니며, 발견한 바를 책에 기록하고, 그 땅 전체를 일곱 지역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곳에 천명해 놓은 하나님의 소명은 비단 ‘여호수아’ 당대뿐만 아니라, 뒤이은 세대에서 정치•사회적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계속해서 따라야 할 대원칙과도 같은 것이며, 이스라엘을 위한 영원한 보장이자 약속이기도 합니다. 즉 책에 기록한 이 말씀이야말로 훗날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어떻게 변하든, 즉 그들이 분열과 갈등 가운데 살아가든, 때로는 그 땅에서 내쫓겨 지내든,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땅의 영원한 주인은 이스라엘이라는 합법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각 지파를 대표하는 세 사람의 대표자들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과업을 완수하러 나아갑니다. ‘유다’와 ‘요셉’에 관한 언급을 통해서(5절) 15-17장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면서 동시에 왜 그 땅이 열두 지파가 아니라 일곱 지파에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 ‘여호수아’의 역할은 이전보다 줄어든 것입니다. 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여호수아’가 아니라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더 큰 책임이 돌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수아’의 역할은 지파의 대표자들이 일곱으로 나눈 그 땅의 주인을 제비뽑기로 정해주는 정도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곱 지파의 대표자들이 모여 상호 합의 하에 공정하게 그 땅을 나누었다는 의미가 강하게 묻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할도 어떤 땅이 어느 지파에게 돌아갈지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6절하).
이와 함께 ‘레위’ 지파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에 대한 언급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13:14, 33; 14:3-4):
레위 사람은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저편 동쪽에서 이미 기업을 받았나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이니라 하더라(7절)
‘레위’ 지파에 관한 주제는 이전에 등장한 바 있고(13:14, 33; 14:3-4), 21장에서 다시 이어갈 것이지만, 이곳에서도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한 곳에서는 “화제물”(火祭物)이 ‘레위’의 분깃이라고 하고 있는가 하면(13:14),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분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13:33). 그런데 이곳에서는 “제사장 직분”이 그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제사장 직분을 ‘레위’와 연관시켜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출 29:9; 40:15; 민 25:13; 민 18:1-7).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으로 별고 구분함으로써 “모세의 규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화자 역시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참고. 13장). 이처럼 ‘레위’ 지파의 분깃에 관한 언급이나,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 관한 언급이나 공히 쓸데없는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결속성에 관한 화자 자신의 관심입니다. 즉 어느 한 지파도 자신의 분깃을 차지하는 일에 있어 소외되거나 배제될 수 없으며, 동일한 관심과 배려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각 지파의 대표들은 그 땅을 두루 다니며, ‘여호수아’가 지시한대로 일을 수행하고 돌아옵니다: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려서 실로 진영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9절)
이 구절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 대표들이 그 땅을 성읍에 따라 일곱 부분으로 나누었다는 언급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지파의 경계를 지역별로 구분하고 있는 전승을 이 새로운 기록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19장을 통틀어 이곳에서 처음으로 “진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5-10장 사이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진영은 이곳이 아니라, ‘길갈’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이 본문을 <길갈 전승>과 연계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진영이 한 곳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11; 3:2; 8:13; 10:21). <오경>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광야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진영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은 크게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화자는 ‘실로’를 이스라엘의 마지막 진영으로 언급함으로써, ‘실로’에서의 예배를 합법화하고 정당화 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10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실로의 회막” 즉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땅을 나누는 그 모든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을 수미상관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의도인 즉은, 이스라엘은 인간의 탐욕이나 자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평하게 그 땅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2. 일곱 지파의 기업(18:11-19:48)
벤야민의 기업(18:11-28). ‘베냐민’은 족보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의 막내로서, 땅의 분배와 관련해서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만, 일곱 지파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15-17장에서도 ‘베냐민’의 기업은 ‘유다’와 ‘요셉’ 지파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지파의 경계나 도시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2, 277-279 쪽).
이런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베냐민’은 본문의 전승을 확립함에 있어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훗날 북 왕국 ‘이스라엘’이나 남 왕국 ‘유다’에게 모두 종교적으로 중요한 두 지역 ‘베델’과 ‘예루살렘’이 ‘베냐민’의 기업으로 할당되고 있다는 것입니다(11-28절).
시므온의 기업(19:1-9). ‘시므온’은 ‘레아’가 낳은 ‘야곱’의 아들 중 두 번째 자식입니다(창 29:33). ‘시므온’은 결코 작은 지파는 아니었습니다만, 민수기 1:23에 의하면 첫 인구조사에서 59,300 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을 위한 땅을 별도로 받지 못하고 ‘유다’ 지파 안에 있는 땅을 기업으로 얻고 있습니다. ‘유다’의 땅이 너무 넓기 때문에 그 중 일부를 얻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19:9)
왜 ‘시므온’ 지파가 이러한 대우를 받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혹자는 “야곱의 유언”을 그 근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창 49:7). 저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지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듯합니다. 실제 <민수기>에서 두 번의 인구조사에서 보듯이 그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민 1, 26장). ‘시므온’ 지파가 상대적으로 작고 미약하다는 언급은 <역대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대상 4:24-43).
이 지파에게 할당된 도시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모두 남방‘네게브’에 산재해 있는 13개 성읍(또는 14개 성읍)이고, 두 번째는 네 개의 도시로서 그 중 둘은 ‘네게브’에, 그리고 나머지 둘은 평지(‘세벨라’)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 성읍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2, 280-282쪽).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다른 지파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 지파를 위해서는 명확하게 땅의 경계를 언급하지도 않으며, 그마나 언급하고 있는 성읍들은 모두 ‘유다’의 기업 내에 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불론의 기업(19:10-16). ‘레아’가 낳은 여섯 아들 중 막내가 ‘스불론’입니다(창 30:20). <창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창 49:13-14) 여기서도 ‘스불론’이 ‘잇사갈’의 동생인데도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경우나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처럼 구속과 관련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광야 시절에는 ‘스불론’은 ‘잇사갈’과 더불어 장막의 동편에서 ‘유다’와 인접해 있었습니다만, 그들이 받은 땅은 ‘유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북쪽 편에 있는 ‘이스르엘’(Jezreel) 골짜기 북쪽으로 펼쳐진 지역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아셀’과 경계를 두고 있으며, 북쪽 및 북서편으로는 ‘납달리’와, 남동쪽으로는 ‘잇사갈’과 경계를 두고 있습니다만 지중해나 ‘요단’ 강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지파가 차지한 땅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 도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참고 도서 2, 282-285 쪽).
잇사갈의 기업(19:17-23). ‘잇사갈’은 ‘레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동생보다 나중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기록도 간단하고 짧아 이 지파의 상대적인 역할이나 중요성을 추측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들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파들은, 북으로는 ‘납달리’, 남으로는 ‘므낫세’, 서쪽으로는 ‘아셀’, 그리고 서북쪽으로 ‘스불론’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차지한 땅은 ‘이스르엘’ 평원의 가장 비옥한 요지로서 ‘스불론’ 지파도 이 중 일부를 받았던 곳입니다.
앗셀의 기업(19:24-31). ‘앗셀’은 레아의 여종 ‘빌하’가 낳은 두 번째 아들입니다(창 30:13). ‘야곱’은 이 지파가 후에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창 49:20). 이들이 차지한 땅은 주로 ‘두로’와 ‘시돈’을 포함하는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동쪽으로는 ‘납달리’, 남으로는 ‘스불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참고도서 2, 287-290 쪽.
납달리의 기업(19:32-39). ‘납달리’는 라헬의 몸종 ‘빌하’가 낳은 막내아들입니다(창 30:8). 이 지파의 영토는 동서로는 각각 ‘아셀’과 ‘단’ 지파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남으로는 ‘스불론’ 및 ‘잇사갈’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으로는 ‘가나안’ 땅 그 자체의 한계를 이루고 있었으니 이 지파는 그 땅의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단의 기업(19:40-48). ‘단’은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난 ‘야곱’의 두 아들 중 첫 째 입니다(창 30:1-6). 이 지파의 지역은 ‘베냐민’ 지파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볼 때 역시 ‘유다’와 ‘에브라임’의 중간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을 끼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소렉’ 강으로부터 ‘욥바’ 맞은편의 ‘야르곤’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지파가 차지한 지역에 대해서도 사방 경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다만 지역 내 일련의 도시들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리고 이 도시들 중 일부는 다른 지파들로부터 취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참고: 41절 및 15:33).
그동안 다른 여섯 지파에 대한 무미건조한 기술과는 달리, ‘단’ 지파에 이르러 특별한 언급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들이 북쪽으로 그 영토를 확장하여 ‘레센’을 취하였으며, 이 승리 후에 이곳의 지명을 ‘단’으로 바꾸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9:47). 이러한 정보는 <사사기>에서 보다 상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곳에서는 그 강조점이 다릅니다. 즉 이 지파는 늘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해왔으며, 한 때 이들의 위세에 밀려 산지로 쫓겨나 살기도 했습니다(삿 1:34-35).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바는 그 뒤의 이야기, 즉 <사사기> 18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이들이 실지(失地)를 회복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비록 이들이 한 때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고 못하고 ‘가나안’의 이방 족속에게 눌려 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3. 결론
화자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잊지 않고 그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는 언급으로 본문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그동안 의 주도권이 역전된 셈입니다. 즉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쥐고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성품, 즉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여호수아’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그 해답은 50 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렇게 행했을 뿐입니다. 순종의 축복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이건 국가이건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린다는 <신명기> 특유의 신학을 결론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51절은 제 2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결론의 결론으로서, 14:1에서 언급했던 대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요단’ 서편 땅을 나눔에 있어 그 모든 사역을 그 땅의 주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정확하게 수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 이니라”(잠 12:2). 서구 사회에서도 일찍부터 이와 유사한 금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생기지 않는다.” 이 모두 성공이나 부귀의 비결에 대해서 인간의 오랜 지혜를 담은 교훈이자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충고는 동서고금을 불문하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당장 이 충고에 가장 귀 기울여야 할 사람들은 ‘유다’나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지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들 지파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다’나 ‘요셉’ 지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분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각기 남과 북의 두 왕조에 흡수된 이후 더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처음부터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탕으로 출발했습니다. 땅도 각 지파의 대표들과 제사장과 ‘여호수아’의 참관 하에 제비뽑기를 통해서 공정하고 공평하게 나누어가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원망할 소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다’와 ‘요셉’은 강성하게 되었고, 나머지 일곱 지파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을까? 그 유명한 소위 ‘야곱’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으로 ‘유다’와 ‘요셉’의 전형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앞 단락을 회고해보면, 이 두 지파는 상대적으로 강했고 용맹스러웠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17:14).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분깃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호수아’에게 더 많은 땅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여호수아’가 해준 충고는 “스스로 개척하고 싸워서 뺏으라”는 것이었습니다(17:14-18).
이 충고는 게으르고 유약한 이들 일곱 지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 일곱 지파가 이스라엘의 역사의 무대에서 크게 이름도 날리지도 못하고, 별 중요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지게 된 것이 결국은 자신들의 게으름과 유약함 때문이었지 무슨 운명이나, 섭리나, 외부 환경 탓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룸에 있어 ‘유다’와 ‘요셉’의 두 지파에 비해서 더디고, 소극적이었습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화자는 도입부에서부터 일찌감치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 일곱 지파는 아직도 땅의 분배를 얻지도 못했다고 소개하고 있고(18:2), ‘여호수아’가 이들을 향해서 야단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18:3)
일곱 지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이 단락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모티브가 흐르고 있습니다. ‘유다’와 ‘요셉’ 지파가 당면했던 바로 그 문제이며, 따라서 그 해결책도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비책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 지파 이야기를 읽으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19:47상).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19:47하)
‘여호수아’가 ‘유다’와 ‘요셉’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사사기>에 의하면, 이 지파 역시 게으르고 적들을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경내에 살던 ‘블레셋’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힘에 눌러 지내기도 했습니다만, 결국에는 그들과 싸워 이겨 그 땅을 다시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약속한 것이니까 인간의 편에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담대한 개척 정신과 노력과 분투,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1:9)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책의 모티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는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지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8-9).
그러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구체적인 적용을 함에 있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측면을 지니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 말씀에 대한 순종은 ‘회막’과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가 그 백성을 만나 주기로 지정해 준 장소에 나아오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막은 ‘실로’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그 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실로에 있는 회막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왜 난데없이 ‘실로’이며, “회막”입니까? “회막”이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회막”은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만나는 곳이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회막”이 다른 곳이 아닌 ‘실로’, 즉 그 땅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언급은 본문의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와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화자가 처한 삶의 자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스라엘은 지금 국가적으로 큰 위기 즉 “분열과 와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론은 분열되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열두 개의 공동체가 되어 지파별로 자신의 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습니다.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두려움과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할 외부의 적은 이웃에 방치해 둔 채, 공동체의 내적인 문제에 집착하면서, 급기야는 하나님의 땅을 놓고 갈등과 분쟁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결속을 다지게 할 방안은 없을까?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의 공동체라는 자각을 갖게 할 방안은 없을까? 하나님이 계신 성전, 즉 “회막”으로 나아와 함께 예배를 드린다면 어떨까? 이것이 화자가 생각해 낸 해결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한 장소에 모여, 한 분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의 언어로, 하나의 노래로, 함께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은 진정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기도 합니다. 일 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예배드리기 위해서 세계 각 지역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행렬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를 위한 화자의 의도는 본문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들을 다시 한 번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예컨대, ‘레위’ 지파에 관한 언급이라든지, 대한 언급이라든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대한 언급들이 이에 속합니다(18:7). 일견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스라엘의 결속성을 강조할 때 더없이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웠다”(1절)는 이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듣게 되는 말씀은 각 지파를 위한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한 질책의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질책과 함께 주어지는 일련의 지시사항을 새롭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들은 각 지파마다 세 사람씩 선정하여 그 땅을 두루 다니면서 자신들이 살게 될 땅의 경계를 (책에) “그려오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이러한 지시가 율법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단어는 여기서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며, 적어도 두 가지 점에 있어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첫째, 앞에서 다룬 바 있는 ‘이스라엘의 책임’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들 일곱 지파가 얻게 될 땅의 경계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 점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해두신 바 있습니다: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1:3). 그 땅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을 얼마만큼 넓고도 크게 차지하느냐는 순전히 자신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이 점에 있어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의 결정자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도, 지도자 ‘여호수아’도, 각 지파의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미리 결정해 놓지 않았으며, 따라서 훗날 그 땅과 관련하여 무슨 책임을 질 일이나 비난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땅의 경계나 구획을 “제비뽑기”를 통해서 처음부터 공정하게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문서 기록은 말보다 더 구속력이 있고 오래 갑니다. 훗날 정치•사회적 상황이 변하여 지파 간 땅의 경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을 때, 책의 기록은 그 모든 분쟁이나 애매모호함을 잠재울 수 있는 완벽한 중재자의 기능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기록해 놓은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시대나 상황이 바뀔 때마다 지파 간 이기주의가 발동하여 땅의 경계를 놓고 싸우게 될 때 이러한 원칙이나 규정이 없으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 땅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본문에서 거듭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단어, “그리다”와 관련한 두 번째 측면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성공의 비결은 실패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의 인생을 개척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에 쫓아 살아가려는 각오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토의와 연습
1. 본문은 이전의 단락(15-17장)과 신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2. “땅의 경계를 책에 그려오라”는 여호수아의 지시가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관점에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본문의 서론과 결론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서 신학적 주제와 화자가 속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연상해 봅시다.
제 3 부
그 땅에서 살아라
책의 마지막 제 3부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책 각 부의 주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1부: 그 땅을 정복하라(1-12장)
제 2부: 그 땅을 나누어라(13-19장)
제 3부: 그 땅에서 살아라(20-24장)
이러한 구성에 따르자면, 제 2부의 결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실로의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땅 나누는 모든 일”을 다 마치고(19:51),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이야기도 이 주제와 걸맞은 내용들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뜻밖에도 전혀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련의 이야기들이 마구 뒤섞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도피성”(逃避城)을 다루고 있는 첫 번째 이야기가 그렇고(20:1-9), 제 2부에서 간간히 언급한 바 있었던 ‘레위’ 지파의 기업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가 뒤이어 나타나고 있습니다(21장). 그리고는 느닷없이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모아놓고 교훈을 주고 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도무지 제 3부의 주제와는 일견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의 전개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이야기들이 제 3부의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구약>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된 이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하고 이루어가야 할 책임을 진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그 나라의 법에 대한 “순종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 점은 새 이스라엘 “신약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교회의 그림자이자 모형이라면, 교회는 천국의 그림자이자 모형으로서,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천국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가야 할 존재가 바로 교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 이 선언은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선언이기보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도전이자 과제입니다. 이 점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제 3부를 이루고 있는 마지막 다섯 장에서 다루고 있는 바도, 그 땅에서 자손 대대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세부 실천 사항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전 포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시적(例示的 )이며, 대표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첫 두 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정의에 관한 것으로서, 관심의 대상은 살인 혐의자들과 땅이 없는 자들입니다(19-21장).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의심이 살인 혐의로서, 예나 지금이나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다루어지기 십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레위’ 인들 즉 그 사회에서 땅이 없는 자들 역시 소외되고 무시되기 쉬운 존재들로서 공동체의 각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화자는 이러한 문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희락은 요원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또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관련된 문제로서, 사회 구성원 간의 단결과 일치가 그 관건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이며, 성전과 예배는 그 언약을 다짐하고 재확인하는 수단이며 목표입니다.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는 분열과 갈등이 있을 때마다 예배와 대제사장의 중재와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속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를 책의 마지막 세 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22-24장).
제 21과: 도피성-자유와 구속
21
도피성: 자유와 구속
(20:1-9)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20:2-3)
문학과 역사
단락과 구조. 본문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된 단락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하는 제 1절은 분명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알리고 있으며, 9절은 결론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21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레위 인들의 성읍에 관한 것으로서 분명 새로운 내용이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구조는 그 내용에 따라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1-6절)
(2) 이스라엘의 순종(7-8절)
(3) 결론(9절)
이 중 첫 번째 단락은 다시 여러 개의 소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용(1-2절)
② 명령의 목적(3절)
③ 명령을 수행하는 절차에 대한 설명(4절)
④ 새로운 관점에서의 결의론적인 설명(5절)
⑤ 절차에 대한 추가 설명(6절)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순종도 두 개의 병행 구절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요단’ 동편과 서편에 각각 세 개 씩의 도피성을 선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앞 선 내용에 대한 반복과 함께 새로운 내용도 아울러 소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내용이란 이방인 도피자들도 동등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설명이며, 반복되는 내용 중에서 앞의 설명(6절)과 다소 다른 내용은 살인자가 본래의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도피성에서 머물 수 있는 기한에 대한 규정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에서는 두 가지 경우 중 한 가지, 즉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피성 제도의 역사나 전승에 관해서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구약의 다른 책이나(출 21:12-14; 민 35; 신 4; 19), 고대 근동의 유사한 제도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선 <출애굽>(20:22-23:33)에서 보면 타인을 다치게 한 경우와 관련하여 일반적인 규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출 21:12).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일종의 수정 법안이 등장하고 있는데 고의적이 아닌 우발적인 살인의 경우 도피성을 마려해 주라는 규례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자의 경우에는 그가 하나님의 제단으로 피신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고 추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도피와 관련한 <출애굽>의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추론해 볼 때, 도피성은 하나님의 성전 한 곳이거나 아니면 불특정 다수의 지역일 수 있습니다.
한편 <민수기> 35장에 의하면, 도피성은 ‘레위’ 인의 40 성읍 중에서 여섯을 선택하도록 규정하면서(민 35:6),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추가로 더하고 있습니다(35:9-28). 그러나 이 본문 중에서 성의 숫자와 관련하여 여섯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곳은 13절 한 곳뿐이며, 9-11절을 통해서 보면 오히려 그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튼 이곳에서도 도망자의 자격 여부를 가리는 경우에 대해서 <출애굽>이나 <여호수아>의 본문보다는 훨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버틀러(T. C. Butler).
<신명기> 4:41-4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가 ‘요단’ 동편에서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들을 위한 도피성을 할당하고 있는데 세 곳의 이름은 ‘르우벤’ 지파의 속하는 광야 땅에 있는 ‘베셀’과, ‘갓’ 족속의 땅인 ‘길르앗의 라못’,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땅인 ‘바산의 골란’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19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단’ 서쪽에서 세 성읍을 도피성을 위하여 할당하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여기서도 살인자를 “본래 혐원이 없이 부지중 그 이웃을 죽인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19:4). 그리고 이어서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죽게 한 자”가 이에 속합니다(19:5). 이러한 도피성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신명기> 19:10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대로 그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며 동시에 그의 창조의 명령, 즉 그 땅에서 그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번창하라는 그의 명령이 방해받음이 없이 성취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고의적인 살인으로 그 땅을 더럽힌 자에 대해서는 살인으로 응징하라는 명령을 덧붙이고 있습니다(19:11-13).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각기 다른 <성경>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도피성에 대한 유사성과 공통성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이 제도의 기원과 전승 과정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는 시도가 학자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만 이곳에서 다루고자 하는 범위를 벗어나고 있어 이에 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버틀러(T. C. Butler)는 도피성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성경의 네 본문(출 21; 민 35; 신 4, 19; 수 20)으로부터 이 제도에 대한 각 본문의 유사성과 공통성을 상세하게 도표로 잘 정리해 놓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학자들의 견해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참고도서 1, 211-215쪽).
신학과 신앙
1. 신탁(1-6절)
<오경>과 <여호수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있다면 ‘모세’와 ‘여호수아’일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 여섯 책을 통 털어 <육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섯 책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신학적 메시지가 일관되고 통일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 성취되어 나타나고 있는 곳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땅에서의 삶을 다루고 있는 본문의 서두에서도 이 점은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서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19:2하)
‘여호수아’가 그동안 ‘모세’의 규례에 얼마나 충실하게 순종해 왔는지는 익히 드러나 있습니다(예: 11:15, 20, 23). 이 구절에서 화자는 다시 한 번 이점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피성에 관한 참고 구절은 신 19:1-13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피성은 고의성이 없는 우발적인 살인을 범한 자들을 위한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3절)
그러나 살인은 어떠한 연유에서든 심각한 범죄 행위임에는 틀림없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일련의 속죄 의식을 거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레 4; 민 15:27-29). 따라서 도피성은 범죄자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피난처가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곳에서 자신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에서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피살자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소위 “피의 보수자”로서의 법적인 책임을 지닌 자라면 이 문제를 그냥 모른 채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피의 보수자”는 “기업 무를 자”(לאג, 고엘)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 룻 3-4; 렘 32:6-7. 특히 “피의 보수자”에 관해서는 삼하 14:1-1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공적인 재판 제도가 성립되기 전의 고대 사회에서 행해지던 오래된 관습이었으나, 상당 기간 동안 존속해 왔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 전통은 화자에 의해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4절)
즉 복수나 처벌의 문제를 피해 당사자의 친척의 손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으로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집행할 기구는 도피성의 “장로회”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장로회”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 내지는 법 기관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성경>에서도 이 기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룻 4:1-2; 삼상 11:3; 16:4). 이로 미루어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정착 이후까지 나름대로 일정 부분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출 17:5-6; 민 11:14-17; 16:25; 신 5:23; 19:12; 21:1-9;, 18-21; 22:13-21; 25:5-10; 27:1; 29:9; 31:9, 28). 한편 <여호수아>에서 이들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7:6; 8:10, 33; 23:2; 24:1, 31). 이 단락에서 장로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5절)
살인의 고의성 여부일 것인데, 이 때 중요한 기준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이전 관계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두 사람이 혹시 이전부터 알고 지냈는지, 서로 상대를 미워하고 있지나 않았는지, 등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이 참석한 재판에서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살인자는 도피성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살인자가 지낼 수 있는 장소로 도피성을 의미하고 있지만, <민수기>에 의하면 살인자 자신의 성읍을 의미하는 듯합니다(민 35:24-25).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6절)
그런데 이 구절은 다소 애매모호합니다. 모든 재판마다 이스라엘 “회중”이 다 간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 했을 것 같은데, 본문에서는 분명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 “회중”(הדע, 에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재판에 참석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결정에 영향을 끼쳤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도피가 허락된 경우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이 무한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 경우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서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입니다만, 이 역시 상세한 설명이 없어 어떤 방식으로 재판이 진행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는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두 경우를 나란히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만,<민수기>에 의하면(민 35:12, 25, 28), 이 두 경우를 각기 별도로 다루고 있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습니다. 즉 살인자의 도피 기한을 결정함에 있어 어느 쪽이 먼저든 한 쪽만을 택하면 되는 것인지, 또는 두 경우를 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전체 재판 과정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이 따릅니다만 확실한 답변의 근거가 오늘까지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대제사장의 소위 “대속적 죽음”과 관련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죄인이 속죄함을 입게 되는 경우는 오직 희생제사를 통해서이지 제사장의 죽음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다소 이상합니다. 사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대속적” 효능을 갖는다는 언급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사상은 초기 랍비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살인자는 자신의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보호와 감독 아래 성전에서 섬기는 임무를 담당했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처지는 한편으로는 망명자의 신분으로 볼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 보면 제사장에게 구속된 일종의 노예의 신분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므로 그 제사장이 죽은 연후에야 그는 비로소 자유인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사장의 죽음은 분명 그에게는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주는 대속적 죽음의 효과를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죽음과 대속적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참고도서 2의 해당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 순종(7-8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지시한 사항은 여섯 개의 성읍을 도피성으로 “구별하라”는 것이었는데, 이 때 구별과 관련하여 쓰이고 단어는 분명 제의적 용어로서 “성별”(sanctify)의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들 도시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나 그들의 소유가 되었을 뿐인 곳들로서,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혹자는 본문이 오래된 전승의 역사를 지녔다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갈릴리의 게데스’는 주전 734년에 아시리아의 왕 ‘티글랏’ 3세가 점령한 도시이며, ‘세겜’은 ‘에브라임’의 중앙 산지에 있던 도시로서 여러 곳에서 등장한 바 있습니다(8:30; 21:21; 24:1). ‘기럇아르바’는 그 땅의 남쪽 ‘유다’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상이 ‘요단’ 서편의 세 성읍이고, 나머지 셋은 ‘요단’ 동편에서 취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이스라엘의 결속성과 연합을 강조하는 모티브를 강조하기 위한 화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 두 도시는 이곳과 ‘레위’의 소유 성읍 목록에서만 등장하고 있는데, 하나는 ‘베셀’로서 ‘르우벤’ 지파 중에서 취한 것이도, 또 하나는 ‘므낫세’의 영토 중에서 취한 ‘바산의 수도 골란’을 말합니다. 세 번째 도시는 ‘갓’ 지파에서 취한 ‘길르앗’ 땅의 ‘라못’입니다.
7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7-8절)
3. 결론(9절)
본문의 결론은 이 책의 제 2부(13-19장)의 결론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화자의 손길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9절)
한 가지 새로운 요소가 있다면 이방인에 관한 언급입니다. 즉 도피성은 이스라엘 모두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이방인의 인권에 대해서도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느낄 수는 대목입니다.
교훈과 적용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의 광야 유목 생활을 버리고, 그 땅에 정착하여 농경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해답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야훼’의 말씀을 따라 살면 될 것입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백성이 따라야 할 사표이자 모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시적인 모델입니다. 화자는 본문 전체를 통해서 이점을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즉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그 모든 명령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따랐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모세’의 법을 가시화시키고 구체화시킨 장본인입니다. <여호수아>를 <오경> 속에 포함시켜 <모세 육경>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신학적 연결성과 통일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의 제 3부에 이르러 ‘여호수아’의 역할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데 그치지 않고, 그 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황은 바뀌었지만 옛 전통이나 관습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당화시켜주는 “피의 복수”에 관한 규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법을 엄격하게 원칙적으로 그대로 적용했다가는 공동체 전체의 삶에 막대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이 상당히 도전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살인 행위 자체를 방조하거나 간과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도피성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서 고의성이 없는 우발적인 살인 혐의자의 인권을 보호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땅이 쓸데없는 복수의 피로 더럽혀지지 않게 하자는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도피성 제도에는 두 가지 법적 절차가 따르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피성에 살고 있는 장로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일단의 회중으로 구성된 공청회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절차를 거쳐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에게 고의적인 살인 동기도 없었고, 살인이 우발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해도 그냥 자유의 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죄로 입증된 후에도 그는 도피성에서 사실상의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 당시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 그곳에서 성전 등에서 봉사의 일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도피성이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작동하는 중요한 원리로 존속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 공동체는 죄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도 이스라엘의 사회 환경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랜 본문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통찰력을 얻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통찰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교훈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범죄 행위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이해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범죄 행위를 묵과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피의자의 인권에 대해서도 신중한 배려를 해야 하겠다는 점입니다. 무고한 사람이 공연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면서, 또한 범죄자의 경우에도 죄에 마땅한 처벌 규정을 마련하되 형을 마친 후에는 새로운 삶을 위한 기회와 희망을 갖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도피성 제도에 대한 교훈을 사형제도와 관련시켜보면 어떻습니까? 작금의 대한민국은 사형제도의 존치 여부를 놓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뜨겁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 김영삼 정권 이후 사형집행을 한 사례가 없어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대충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또 다른 형태의 살인으로서 피의자(즉 살인자)의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사형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으로서 이 제도를 존속시킨다고 해서 범죄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우선 첫 번째 주장과 관련해서 간과해서 안 될 사실은, 도피성 제도는 의도적인 살인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연쇄살인과 같은 의도적이고도 습관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위 진보적 사고의 문제점은 항상 주의주장이 편향적이며, 자가당착에 쉽게 빠져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피의자의 인권을 주장하면서 피해자의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동정심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흥미롭게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드라도 우리나라 국민의 70% 정도가 여전히 사형제도의 존치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서도 강호순과 같은 습관적 살인마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 폐지론자는 이러한 태도를 두고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피해자 가족이나 친척의 복수심을 만족시켜줄 뿐이지 살인과 같은 범죄 행위를 실효적으로 방지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 역시 지나치게 기계론적이고 편향적인 것입니다. 사형제도는 단순히 범죄를 예방하자는 목적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적으로 피해자를 대신해서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국가가 개인을 대신해서 북수를 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만 하드라도, 범죄의 예방이라는 차원보다는 되갚아준다는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 한 편 도피성 제도를 오늘날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탈북자들의 대탈출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더욱 최근에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합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내의 처참한 인권 유린 참상을 폭로하는 국내외 언론 보도도 갈수록 구체적이고 생생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만든 한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한 수용소 내 인권 유린 참상은 말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합니다. 수용소 내의 임산부들은 강제로 낙태 주사를 맞고, 그래도 살아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곧바로 처참한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탈출하다 붙잡혀 온 여성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2000년 3월에서 5월까지 두 달 동안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탈북자가 8000명에 이르며 이 중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언필칭 인권과 자유를 내세우며 출범한 김대중과 노무현의 두 정권 하에서 이러한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해서 보여준 바 있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입니다. 이 두 정권은 유엔에서 개최하는 북한의 인권 사태를 규탄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국제적 결의에 늘 기권하거나 반대편에 서왔습니다. 이유인 즉은 남북대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남북 갈등과 충돌만 야기 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권 문제 해결에 아무런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소위 기능적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번 양보를 하드라도, 이러한 접근 방식이 실효적 이유 때문에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논리의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지요. 위선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남북대화의 궁극적인 목적도, 그렇게 염원하는 남북통일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일진대, 이런 인권 참상을 애써 외면 한다면 그동안 모든 구호도 노력도 위선이요 거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선적이기는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툭하면 자유와 인권을 외쳐대던 이 정부도 정작 한 탈북자 가족이 중국 의 영사관으로 도피하여 미국으로 망명을 요청하자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대도 미국의 의회는 중국이 탈북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해서는 안 되며 유엔이 규정하는 난민 처리 규정에 따라 인도주의적 원칙에 입각해서 처리해야 된다는 성명서를 내놓는 등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 바가 있습니다. 이런 미국도 부시 정권에 들어서는 탈북자의 인권 개선을 위해서 특별 기금을 마련하는가 하면, 얼마 전 탈북자의 미국 망명을 허용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인권에 관한 한 구미 제국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관심과 염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탈북자들의 출애굽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우리나라의 재외 영사관이나 주변 외국은 탈북자들로 바빠질 것입니다. 이들이 살인자들이 아니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이들 탈북자들을 어떻게 처리함이 마땅할까요? 도피성을 마련해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도피성 예수 그리스도를 마련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도피성이 되어야 한다면 나 또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피성이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라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더 큰 문제는 영적 고아나 과부들입니다.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질병 중의 하나를 피상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피상성이라 함은 대충 대충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제대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하는 법이 없고, 지식을 대함에 있어서나 무슨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도 수박 겉핥기식입니다. 성도간의 교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대형 교회일수록 더 심한 법입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아야 들어줄 사람도 없고, 괜한 짓만 해서 자신의 수치만 드러내게 될 뿐임을 알고 오랜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만의 성벽을 높이 쌓고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들여보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모두들 스스로의 도피성이 되어 영적 고아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도피성으로 삼고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또는 나에게 도피성이 되어줄 만 한 단 한 사람의 친구라도 있습니까?
제 22과: 레위의 도시들
22
레위의 도시들
(21:1-42)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아래 성읍들과 그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21:3)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은 내용상 앞의 단락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새 단락의 시작과 결말의 진술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1절)
41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받은 성읍은 모두 마흔여덟 성읍이요 또 그 목초지들이라. 42이 각 성읍의 주위에 목초지가 있었고 모든 성읍이 다 그러하였더라(41-42절).
자료와 편집. 본문의 구조적 특징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역대기>의 본문(대상 6:54-81)과 비교해보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 본문의 구조적 특징은 <역대기>의 해당 본문과의 비교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Butler, 223-224쪽.
두 본문을 개괄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모두 기본적으로 동일한 자료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그 배열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예: 21:5-9와 6:61-65). <여호수아>의 본문은 그 설화적 배경을 <민수기> 35:1-8에 바탕을 두면서, 동시에 <여호수아> 14-19장에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모티브들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컨대, 기업의 분배에 관한 것이나(14:2; 15:1; 16:1; 17:1, 14, 17; 18:6, 8, 10, 11; 19:1, 10, 17, 24, 32, 40, 51), ‘레위’ 인들의 어려운 처지에 관한 것(13:14, 33; 14:3-4; 18:7), 그리고 기업의 분배에 관한 ‘갈렙’의 주도적인 권리 주장(14:6-15; 15:13-14)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본문과 <역대기> 모두 ‘레위’ 인들의 성읍에 관해서 상세하게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일치하고 있습니다만, <역대기>에서는 ‘단’지파에 관한 언급이나, ‘아론’의 성읍과 관련하여 ‘시므온’ 지파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역대기>는 <여호수아>를 토대로 서술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Butler, 225쪽.
단지 자료를 배열함에 있어 다소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은 <역대기> 편집자 자신의 신학적 관점이 반영된 결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 화자의 주 관심사는 ‘레위’의 성읍들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목록을 제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개괄적이고 종합적인 그림을 먼저 제시해 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서론에서 먼저 주제에 관한 진술을 한 다음(4절), 이어서 개괄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5-7절). 반면 <역대기> 화자의 주요 관심사는 ‘아론’의 성읍과 여타 ‘레위’ 인들의 성읍들을 별개로 구별하는 데 있느니만치, 따라서 ‘아론’과 관련한 제반 요소들을 먼저 언급한 연후에 결론적인 요약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본문을 연대기적으로 비교해 볼 때, <여호수아>가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두 본문의 문학과 역사(배경)를 연구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인 것입니다. 9절과 13-40절과 관련해서 자료와 편집에 관한 연구가 보다 상세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Butler, 225-226쪽.
구조와 형식. 이 점과 관련하여 본문의 수사적인 특징을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우선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로 순종의 모티브를 위한 ‘반복’을 들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2, 3, 8절); “제비뽑기”(4-12절). 독자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화자는 순종의 결과를 두 단락에 걸쳐 소개하고 있는데, ‘레위’의 성읍들에 관한 목록이 그것입니다: 5-7절; 13-40절. 이러한 신학적 모티브에 따라 단락 구분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3절: 배경과 주제 도입
2) 4-7절: 주제의 요약
3) 8-42절: 레위의 성읍들
(1) 8절: 서론
(2) 9-19절: 아론의 성읍
(3) 20-26절: 고핫 자손의 성읍
(4) 27-33절: 게르손 자손의 성읍
(5) 34-40절: 므라리 자손의 성읍
(6) 41-42절: 결론
위 단락 구분에서 볼 수 있듯이, 마지막 단락은 다시 여섯 개의 소 단락으로 세분될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부분(8절; 41-42절)은 이 단락의 전체적인 내용을 수미 상관적으로 요약하면서 각각 서론과 결론의 기능을 하면서, 신학적인 주제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순종에 대한 모티브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아론’과 ‘레위’의 세 후손들의 기업에 따른 목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반복과 신학적 주제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과 주제(1-3절)
‘레위’ 인들에게 성읍을 나누어주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몇 번씩이나 등장했던 내용이긴 합니다만(13:14, 33; 14:3; 18:7),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오히려 이들은 땅과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의 족장들이 아니라, ‘레위’ 지파 스스로 나아와서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갈렙’이 자신의 몫을 요구하던 것과 흡사합니다(14:6). ‘레위’가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바 있는 그 법에 있다는 것입니다:
1그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2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 하매(1-2절)
이들의 요구 사항은 받아들여졌습니까? 화자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자기의 기업에서 그 성읍들을 주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3절)
사실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일찍이 명령을 내린 바 있습니다(민 35:1-8).
이 단락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레위’가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며 나아온 곳이 ‘실로’라는 점입니다. 반복되는 두 표현, “모세의 규례”와 “실로”는 화자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표지판과도 같습니다. 책 전체를 통해서 흐르고 있는 일관된 주제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레위’ 인들이 차지하게 될 땅은 농사를 짓기 위한 땅이 아니라 가축들을 먹일 방목지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양이나 염소 등의 가축들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장 잡아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옷을 위한 가죽으로도 쓰일 수 있고, 더 나아가 희생 제사를 위한 제물로도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었다”는 언급(3절)은 마치 이스라엘 각 지파가 희생제물을 레위 지파에게 가져오는 행위를 연상케 합니다.
2. 주제 요약(4-7절)
각 지파가 그 땅을 나누어주는 방식 역시 이번에도 이전에 다른 지파들에게 적용했던 “제비뽑기”의 방식을 따랐다고 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4그핫 가족을 위하여 제비를 뽑았는데 레위 사람 중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 중에서 제비 뽑은 대로 열세 성읍을 받았고, 5그핫 자손들 중에 남은 자는 에브라임 지파의 가족과 단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제비 뽑은 대로 열 성읍을 받았으며, 6게르손 자손들은 잇사갈 지파의 가족들과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와 바산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제비 뽑은 대로 열세 성읍을 받았더라(4-6절)
다시 한 번 화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순종과 하나님의 임재와 개입에 관한 모티브입니다. ‘레위’의 세 아들은 태어난 순서로 보자면, ‘게르손’, ‘그핫’(또는 ‘고핫’), 그리고 ‘므라리’ 입니다만(창 46:11; 출 6:16), 먼저 제비가 돌아간 지파는 대제사장 ‘아론’의 조상 ‘그핫’의 후손들이었습니다(4절후). 그리고 이들에게 돌아간 성읍은 ‘유다’와 ‘시므온’과 ‘베냐민’ 지파의 땅 중에서 취한 13개 성읍입니다. 그리고 이들 성읍은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예루살렘’에 인접한 성읍들입니다. 21장 전체를 보면 ‘레위’의 성읍이 도합 48개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문학적 표현으로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로부터 각각 네 성읍을 취한다고 볼 때 산술적으로 얻어지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핫’ 자손이 세 지파로부터 취한 도시의 수는 13이 아니라, 12가 됨이 마땅할 텐데 이곳에서 그러한 형식상의 규칙이 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불규칙성은 ‘납달리’ 지파를 언급할 때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16절). 혹자는 이러한 숫자상의 불규칙성은 오히려 본문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척도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아론’의 13개 성읍은 처음부터 48개의 ‘레위’ 성읍들과는 별개로 구별되어있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두 가지 관점에서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하나는 <역대기>의 기록과 관련한 것으로서 이곳에서는 ‘아론’의 성읍을 언급하면서 ‘시므온’ 지파에 대한 언급은 빠뜨림으로서 ‘유다’지파로부터 9성읍만 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은 각 지파 당 네 성읍씩이라는 숫자상의 규칙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는 후대의 편집적인 손길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 예를 들어 <민수기> 35:8에 의하면 지파 당 인구 숫자에 따라 성읍의 숫자 역시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의 전승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규칙성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5절에 따르면 ‘단’ 지파는 원래 배정받았던 지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만, <사사기>에 따르면 훗날 북방으로 이주하여 그 경계를 확장한 바 있습니다(삿 18). 이 지파의 경계는 남쪽 ‘유다’나 ‘베냐민’ 지파가 아니라(삿 15:9-13), 북쪽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와 접해 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주지하다시피 ‘바산’ 지역의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만, 이 단락에 따르면(6절) 오히려 ‘요단’ 서쪽의 ‘잇사갈’, ‘아셀’, 그리고 ‘납달리’ 지파와 연계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스불론’은 ‘요단’ 동편의 ‘르우벤’과 ‘갓’ 지파와 연계해서 소개하고 있는데(7절), 이를 통해서 고대 전승에서 취한 자료의 일부로 볼 수 있게 하는데 이 전승은 레위의 성읍들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지파의 목록과는 다른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므라리 자손들은 그 가족대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열두 성읍을 받았더라(7절)
3. 레위의 성읍들(8-42절)
서론. 세 번째 단락은 ‘레위’ 인들에게 돌아간 48개 성읍의 목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제비 뽑아 레위 사람에게 준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이 이러하니라(8절)
이 구절은 일견 앞 단락의 결론으로 귀속시킬 수도 있겠으나, 세 번째 단락의 서론적 요약으로 취급함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신학적 기능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순종의 모티브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아론의 성읍. 8절의 신학적 서론에 이어 9절에서부터 실제 성읍들의 목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다 자손의 지파와 시므온 자손의 지파 중에서는 이 아래에 기명한 성읍들을 주었는데(9절)
그런데 9절 후반의, “기명한 성읍”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훗날 이들 성읍들의 이름을 새롭게 불렀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이들 48개 성읍의 목록이 분명하게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어느 왕도 이 목록에서 한 도시를 빼거나 더하거나 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론’의 주도적인 역할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아론’ 자손의 분깃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 자손 중 그핫 가족들에 속한 아론 자손이 첫째로 제비 뽑혔으므로(10절)
그리고 이 구절은 이어지는 두 절에 대한 서론에 해당합니다.
11아낙의 아버지 아르바의 성읍 유다 산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그 주위의 목초지를 그들에게 주었고, 12그 성읍의 밭과 그 촌락들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어 소유가 되게 하였더라(11-12절)
이 두 절은 <갈렙 전승>이나(14:6-15; 15:13-14) <레위 전승>(13절)에 비추어 볼 때,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즉 이 두 절이 분명하게 해 주고 있는 바는, ‘아르바’ 성읍과 주변 목초지는 ‘레위’ 지파에게 주었으나, ‘헤브론’을 비롯한 여타 성읍들과 농경지들은 여전히 ‘갈렙’ 지파에게 속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구분을 통해서 ‘레위’ 지파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 세력화 하는 것이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력을 축적해 가는 것 또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민수기>(35:6)에 소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도피성은 모두 ‘레위’의 성읍 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목초지이요 또 립나와 그 목초지와(13절)
이처럼 도피성이 ‘레위’의 성읍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어 후대 편집의 결과로 보기도 합니다만(Noth),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사실 <민수기> 35:6은 여섯 개의 도피성과 그 외에 42 성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 어떤 다른 전승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듯도 합니다만, 이 역시 분명치가 않습니다. 추측컨대 도피성은 고대의 제단(祭壇)과 일단의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으로서, 이들 성읍이 ‘레위’의 소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도 나름대로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레위’의 모든 성읍들이 고대의 성소였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헤브론’과 관련해서 10:3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며, ‘립나’에 대해서는 10:29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론의 후손들의 성읍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4얏딜과 그 목초지와 에스드모아와 그 목초지와, 15홀론과 그 목초지와 드빌과 그 목초지와, 16아인과 그 목초지와 윳다와 그 목초지와 벧 세메스와 그 목초지이니 이 두 지파에서 아홉 성읍을 냈고, 17또 베냐민 지파 중에서는 기브온과 그 목초지와 게바와 그 목초지와, 18아나돗과 그 목초지와 알몬과 그 목초지 곧 네 성읍을 냈으니, 19제사장 아론 자손의 성읍은 모두 열세 성읍과 그 목초지들이었더라(14-19절)
‘얏딜’은 오늘날의 ‘기르벳 아티르’로 보이며, 이 지역은 ‘헤브론’의 동남 13 마일과 ‘브엘세바’의 북동 14 마일 떨어져 있습니다(참고. 15:48; 삼상 30:27). ‘에스드모아’는 오늘날의 ‘에스-사무’로서, ‘헤브론’의 남서 14 킬로미터에 위치해 있습니다. 철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은장구와 주괴(鑄塊)들이 이곳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참고. 15:50; 삼상 30:28). ‘홀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15:51). ‘드빌’은 이 책의 제 1부에서 정복 전쟁과 관련해서 등장한 바 있습니다(10:3). ‘아인’은 도시의 이름이라기보다는 한 지역의 이름으로 보입니다(15:32; 19:7; 민 34:11). ‘윳다’는 ‘헤브론’의 남서 9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얏다’(Yatta)인 것으로 보입니다(15:55). 그 위치는 오늘날의 ‘벳-세메스’(Beth-Shemesh) 근처로서, ‘예루살렘’ 서쪽 20킬로미터 지점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성경>외의 다른 고대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 18세기 경 유적이 발굴된 바 있습니다. 이 도시는 “태양의 집”이라는 호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태양신을 섬기던 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단’ 지파에게 할당된 ‘이르세메스’ 즉 “태양의 도시”와 동일한 지역일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19:41; 15:10; 삼상 6; 왕상 4:9; 왕하 14:11, 13; 대하 28:18). ‘베냐민’ 지파에서 내놓은 네 성읍들은(17절) ‘예루살렘’ 성소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목록에서 뺘져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목록은 ‘예루살렘’이 성소(즉 ‘기브온’의 山堂)로 확정되기 이전 ‘다윗’ 시절을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게바’는 유다의 북방 경계와 연한 ‘베냐민’의 도시로서(18:24; 왕하 23;8; 슥 14:10), 오늘날 ‘예루살렘’의 북동 쪽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예바’(Jeba)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고. 삼상 13-14; 삼하 5:25; 왕상 15:22; 사 10:29; 스 2:26; 느 7:30; 11:31; 12:29). ‘아나돗’은 <예레미야>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유명한 도시입니다(렘 1:1; 11:21-23; 29:27; 32:7-9). 그 이름은 ‘가나안’의 여신 ‘아낫’(Anath) 신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사 10:30; 스 2:23; 느 7:27; 11:32).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라스 엘-카루베’(Ras el-Kharrubeh)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몬’은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는데, ‘아나돗’ 북동쪽 1.6킬로 지점에 위치에 있습니다.
고핫 자손의 성읍. ‘고핫’ 자손의 남은 자들의 가족들에게는 이전에 ‘에브라임’과 ‘단’과 ‘므낫세’ 반 지파의 경계 상에 있는 ‘가나안’의 요새들이 돌아갔습니다:
20레위 사람인 그핫 자손 중에 남은 자들의 가족들 곧 그핫 자손에게는 제비 뽑아 에브라임 지파 중에서 그 성읍들을 주었으니, 21곧 살인자의 도피성 에브라임 산지 세겜과 그 목초지이요 또 게셀과 그 목초지와, 22깁사임과 그 목초지와 벧호론과 그 목초지이니 네 성읍이요, 23또 단 지파 중에서 준 것은 엘드게와 그 목초지와 깁브돈과 그 목초지와, 24아얄론과 그 목초지와 가드 림몬과 그 목초지이니 네 성읍이요, 25또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준 것은 다아낙과 그 목초지와 가드 림몬과 그 목초지이니 두 성읍이라. 26그핫 자손의 남은 가족들을 위한 성읍들은 모두 열 성읍과 그 목초지들이었더라(20-26절)
‘세겜’은 <육경>의 역사에서 핵심 도시입니다. <사사기> 8-9장에 따르면, 이곳은 ‘바알’ 신앙의 본산으로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바알-베릿트’, 즉 “언약의 바알”이라는 언급이 등장할 정도입니다(삿 8:33). 그리고 이 도시는 또한 <족장 이야기>와도 깊은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만(창 12:6; 33:18-35:4; 37:2-14), 유독 <여호수아>의 정복 이야기에서는 이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단지 종교적 제의와 관련해서 두 번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8:30-33; 24:1-28). 이 도시의 위치는 ‘므낫세’ 지파의 영역과 경계선 상에 있습니다만(17:7), 도시 목록에는 빠져 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 결과에 따르면, 적어도 주전 3600년경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1900-1540년 사이와 1450-112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많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이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서 종교와 관련하여 이 도시가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게셀은 ‘세겜’에서 남서쪽으로 꽤 떨어진 곳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도피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 단락의 일부 구절이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기도 합니다. ‘게셀’의 위치는 ‘텔-예세르’로서 ‘라므레’에서 남동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도 적어도 주전 3300년경에 이미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2500-1900년 사이에는 버려진 채로 남아 있다가 1650에 이르러 요새가 세워졌습니다. 이곳에서 열 개의 성전 기둥을 가진 거대한 성전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이 도시가 파괴된 것은 1470년으로서 이마 ‘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이며, 도시의 재건은 1400년 경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주전 14세기에 ‘게셀’의 왕들로부터 ‘아마르나’ 서신 열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집트’의 ‘메르넵타’가 1232년경에 이 도시를 파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현재까지 아무런 고고학적 증거는 없는 실정입니다. ‘게셀’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할당된 것이긴 합니다만, 정복된 적은 없습니다(16:3, 10). ‘블레셋’ 족속이 12세기경에 이 도시를 차지하여 이스라엘 왕정이 시작될 때까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왕상 9:15-17). ‘솔로몬’ 왕이 이곳에서 새로운 요새를 건설합니다만, 924년경에 곧바로 ‘시삭’ 왕이 이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이 도시를 재탈환하게 되나 733년에 ‘아시리아’에게 다시 내어주고 맙니다. ‘히스기야’ 왕이 이 도시를 다시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586년에는 ‘바벨론’이 다시 약탈해 버립니다.
‘깁사임’은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으며, 그 위치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아마도 ‘욕느암’에 대한 본문 파괴로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열왕기 상>이나(왕상 4:12), 이 책의 다른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12:22; 19:11; 21:34) 유사한 이름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벧 호른’은 적어도 네 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베냐민’과 ‘에브라임’의 경계 상에 위치한 저지대와(16;3; 18:13), 고지대, 및 ‘에브라임’의 남쪽 경계 상에 위치한 지역(16:5) 등을 말합니다(참고. 왕상 9:17; 대하 25:13).
‘단’ 지파에 속해있던 ‘엘드게’는(19:44) 주전 701년에 ‘아시리아’의 ‘산헤립’과 ‘이집트’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혹자는 이 도시를 ‘게셀’의 북서쪽에 위치한 ‘텔 엘-멜랏’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의 또 다른 도시 깁브돈은(19:44) 남북조 시대 초기에 블레셋이 차지하게 됩니다(왕상 15:27; 16:15-17). 그 위치는 ‘텔 엘-멜랏’의 서쪽 4킬로미터의 ‘아기르’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역시 ‘단’ 지파의 ‘아얄론’은(19:44) 이스라엘이 정복한 도시였음에도(수 10:12), ‘아모리’ 족속의 지배하에 남아있었습니다(삿 1:35). 그 위치는 ‘예루살렘’의 북서 20킬로미터의 ‘엠마오’ 근처 ‘얄로’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참고. 삼상 14:31; 대하 11:10; 28:18). 그리고 ‘가드 림몬’의 위치는 오늘날 ‘야콘’ 강 유역의 ‘라맛’ 간 지역 내에 있는 ‘텔 예리세’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고고학 발견에 따르면 주전 2300년이 이미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000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그곳을 요새화 했습니다만, 주전 16세기 중반에 파괴됩니다. 도시 재건이 곧바로 있었습니다만, 다시 파괴가 뒤따랐고(주전 1200년) 곧이어 ‘블레셋’이 이곳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도시는 아마 ‘다윗’이 훗날 파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스라엘의 통치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주전 920년경에 ‘시삭’ 왕이 다시 파괴해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다아낙’은 위치상으로는 ‘잇사갈’ 지파의 경계 내에 있었습니다만, ‘므낫세’의 소유였습니다(17:11). 그런데도 ‘가나안’의 손에 계속 남아있었습니다(삿 1:27).
게르손 자손의 성읍. ‘게르손’ 자손이 얻은 것은 ‘갈릴리’ 호수의 동서 양쪽에 위치한 도시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한 지파가 ‘요단’강의 동과 서에 걸쳐 지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아마 이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군사적 세력을 창출해 내기 위한 정책적 배려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7레위 가족의 게르손 자손에게는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살인자의 도피성 바산 골란과 그 목초지를 주었고 또 브에스드라와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두 성읍이요, 28잇사갈 지파 중에서는 기시온과 그 목초지와 다브랏과 그 목초지와, 29야르뭇과 그 목초지와 엔 간님과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네 성읍이요, 30아셀 지파 중에서는 미살과 그 목초지와 압돈과 그 목초지와, 31헬갓과 그 목초지와 르홉과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네 성읍이요, 32납달리 지파 중에서는 살인자의 도피성 갈릴리 게데스와 그 목초지를 주었고 또 함못 돌과 그 목초지와 가르단과 그 목초지를 주었으니 세 성읍이라. 33게르손 사람이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은 모두 열세 성읍과 그 목초지들이었더라(27-33절)
‘골란’은 도피성 전승과 관련해서 알려져 있는 도시로서, 그 위치는 ‘엘-알란’ 강의 동쪽 제방으로 연해있는 ‘삼 엘-얄란’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7절의 ‘브에스드라’가 ‘에스드롯’의 표기 오류라고 한다면, 이는 고대의 도시 ‘옥’(Og)일 가능성이 큽니다.
‘잇사갈’ 지파에게 속한 ‘기시온’(19:20)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기손’과 관련되어 있는 듯합니다(삿 4:7, 13; 5:21; 왕상 18:40). 그 위치는 ‘텔 엘-무카르카스’나 ‘텔 엘-아줄’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만 분명치는 않습니다. ‘스불론’ 지파와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다브랏’(19:20)은 ‘다보르’ 산 서쪽 ‘다부리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르뭇’은 ‘유다’ 지파에 속한 한 도시의 이름입니다(15:35; 10:3, 5, 23; 12:11; 느 11:29). 그런데 이 도시가 ‘잇사갈’ 지파에 속한 도시라고 언급하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잠정적이긴 하지만 이 도시는 ‘카우캅 엘-화와’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엔 간님’은 ‘유다’ 지파에 속한 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15:34), ‘잇사갈’ 지파의 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잠정적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예닌’에 해당하는 ‘키르벳 베이트’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아셀’ 지파의 ‘미살’(19:26)은 고대 ‘이집트’ 문헌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 도시와 관련하여 ‘텔 키산’, ‘텔 엔-나할’, ‘텔 아부-하완’ 등의 여러 다른 도시들이 동일한 위치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들 도시들은 모두 ‘아코’ 평원에 위치해 있습니다만, 그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셀’ 지파의 ‘압돈’(19:28)은 ‘악집’의 동쪽 5킬로미터 지점의 ‘키르벳 아브데’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역시 ‘아셀’ 지파의 ‘헬갓’(19:25)은 ‘아코’ 평원 남동편의 ‘텔 엘-하르바’로 확인되고 있습니다만, 분명치는 않습니다. ‘아셀’ 지파의 ‘르홉’은 실제 이들 지파가 정복한 도시는 아닙니다(삿 1:31). 그 위치는 ‘아코’ 평원 동남쪽 10킬로미터 지점의 ‘텔 엘-가르비’(또는 ‘베르웨’로 불림)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납달리’ 지파의 ‘게데스’(19:37)는 <사사기>에 따르면(삿 4-5) 이스라엘 군대가 집결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 위치는 ‘하솔’의 북쪽 10킬로미터의 ‘텔 케데스’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발굴에 따르면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이른 시기에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후기 청동기 시대나 철기시대에도 간헐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기는 합니다. ‘함못 돌’은 아마도 ‘납달리’ 지파의 ‘하마스’(19:35)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름에 따르면 이곳에 온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위치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의 ‘티베리우스’의 남쪽에 있는 ‘함만 타마리예’일 것으로 보입니다. ‘돌’은 지중해 연안의 갈멜 산의 남쪽에 위치한 한 도시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가르단’(또는 ‘락갓’)은 ‘티베리우스’의 북서쪽에 있는 ‘키르벳 엘-쿠레이예’와 ‘텔 에크라티예’로 보입니다.
므라리 자손의 성읍. ‘므라리’ 후손이 받은 도시들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지역에 나누어져 있습니다. 즉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북서쪽에 있는 ‘스불론’ 지파의 땅에 속한 도시들이며, 또 하나는 좀 더 넓은 지역으로서 ‘요단’ 강 동편과 ‘갈릴리’ 호수 이남의 ‘르우벤’과 ‘갓’ 지파에 속한 도시들입니다. 이처럼 이들 후손의 도시들에 대한 언급이 다소 의도적이며 인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Noth의 견해에 따르면, 본문 기록은 레위 지파가 자신들이 소유한 땅도 없이 이스라엘 내의 여러 지파의 땅을 전전하며 흩어져 살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각 지역의 전승들을 결합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4그 남은 레위 사람 므라리 자손의 가족들에게 준 것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욕느암과 그 목초지와 가르다와 그 목초지와, 35딤나와 그 목초지와 나할랄과 그 목초지이니 네 성읍이요, 36르우벤 지파 중에서 준 것은 베셀과 그 목초지와 야하스와 그 목초지와, 37그데못과 그 목초지와 므바앗과 그 목초지이니 네 성읍이요, 38갓 지파 중에서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길르앗 라못과 그 목초지이요 또 마하나임과 그 목초지와, 39헤스본과 그 목초지와 야셀과 그 목초지이니 모두 네 성읍이라. 40이는 레위 가족의 남은 자 곧 므라리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성읍이니 그들이 제비 뽑아 얻은 성읍이 열두 성읍이었더라(34-40절)
‘욕느암’은 ‘스불론’의 경계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9:11). 가르다는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아트릿’에 위치한 이 도시는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청동기 중후반 시대와 주전 18-17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도시의 위치는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딤나’ 역시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이름으로서, ‘스불론’과의 경계에 위치한 ‘림몬’인 것으로 보입니다(19:13). 그 위치는 오늘날 ‘나사렛’의 북동쪽 10킬로미터 지점의 ‘루마네’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스불론’의 ‘나할랄’(19:15)은 정복된 적이 없는 도시입니다(삿 1:30). 오늘날 그 위치는 ‘이스르엘’ 계곡의 ‘말룰’ 마을이나 또는 ‘아코’ 평원 남방 끝에 있는 ‘텔 엔-나할’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베셀’은 도피성과 관련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혹자는 이 도시를 오늘날 ‘메데바’ 북동쪽 13킬로미터에 있는 ‘움 엘-야마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의 또 다른 도시 ‘야하스’와 관련해서는 13:18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또한 <사사기>(11:20) 또는 <이사야>(15:4), <예레미야>(48:21, 34) 등도 함께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르우벤’에 속한 두 도시 ‘그데못’과 ‘므바앗’도 13:18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르앗 라못’은 13장의 목록에는 빠져 있는 도시로서, ‘솔로몬’ 왕의 여섯 주의 수도였습니다(왕상 4:13). 이 도시의 위치에 대해서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학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오늘날 ‘다마스커스’의 남쪽 70마일 지점의 ‘텔 엘-라밋’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갓’ 지파의 ‘마하나임’과 관련해서는 다음 구절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수 13:26; 창 32:3; 삼하 2; 17:24-27; 19:33; 왕상 2:8; 4:14. 그리고 ‘헤스본’은 다음 구절들을 통해서 더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 12:2; 9:10; 13:10, 17, 21, 26, 27; 민 21; 32:3, 37; 신 1:4; 2:24-35; 3:2, 6; 4:46; 29:6; 삿 11:19, 26; 사 15:4; 16:9; 렘 48:2, 34, 45; 49:3; 느 9:22. ‘갓’ 지파의 또 다른 도시 ‘야셀’은 13:25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 참고로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 더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민 21:32; 32:1, 3, 35; 삼하 24:5; 사 16:8-9; 렘 48:32; 대상 26:31.
결론. 화자는 마지막 결론을 <민수기> 35장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41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받은 성읍은 모두 마흔여덟 성읍이요 또 그 목초지들이라. 42이 각 성읍의 주위에 목초지가 있었고 모든 성읍이 다 그러하였더라(41-42절)
그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모세’의 명령이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칠십인역>에서는 이점을 더욱 분명하고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가난한 제사장들을 잘 보살피라! 이것이 본문의 핵심 주제가 될 것입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민수기>나 <신명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민 35). 흔히 우리나라 목회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그러하듯이, 이스라엘 역시 전통적으로 ‘레위’ 인들에 대한 인식이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에 있는 자”였던 것 같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이들 ‘레위’ 지파가 왜 가난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왜 이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주된 업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계를 당연히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물려받았던 것은 땅이나 농작물 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13:14, 33). 이들은 농사 일로 자신들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18:7). 당연히 다른 지파들에 비해서 가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 책임을 함께 떠맡으면 될 것입니다. 그 한 방법으로 이들에게 일정 몫을 지급해 주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각 지파마다 자신들의 성읍 중 몇 개를 제사장 몫으로 할당해 줄 수 있을 것이고, 희생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 몫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13:14). 제사장이 취할 수 있는 희생 제물에 대해서는 <레위기>에서 이미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레 2:3, 10; 5:13; 6:9, 11, 19, 22; 6:16, 18, 26, 29; 7:6-10, 14, 31-36; 8:31).
물론 이러한 제도가 도가 지나쳐 남용될 소지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제사장 ‘엘리’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의 아들들은 제대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불량자들로서” 하나님께 돌아갈 희생 제물조차도 자신들이 차지해 버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강제로 빼앗기도 했습니다(삼상 2:12-17).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전의 제사장들이 오히려 일반 백성들보다 더 부유하게 되고 그들 위에서 군림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경우 제사장의 권한 남용은 훗날 성전이 파괴되고 사라짐으로써 자연스럽게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신약 교회의 경우 우리의 제사장은 오직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사장을 먹여 살리는 문제나 제사장의 권력 남용과 같은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초대 교회의 경우 교회 내에서 복음 전도자나 교사나 또는 목회자로 섬겼던 사람들에 대한 처우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은 자비량 사역으로 생계를 꾸려가긴 했지만,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 21장은 복음 사역자들의 권리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바울’은 스스로의 생활을 통해 그러한 권리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권리는 복음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사실 필자도 복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이 말씀을 신조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나누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그렇게 해 갈 계획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다음 구절을 필자의 대답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전 9:18)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2. 신약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3.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제 23과: 하나님의 선하심
23
하나님의 선하심
(21:43-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5)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역사를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역사에 관한 연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고, 또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란 무엇 인가」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될 만 한 책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아래 책들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도움을 될 것입니다: E. H. Carr.「역사란 무엇 인가」. 김택현 옮김, 서울: 까치, 1997; 이원설. 「기독교 세계관과 역사발전」. 서울: 혜선 출판사, 1990.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해서 한두 가지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화자는 이 점에 대해서 지나치리만치 단순하고 흑백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과격하다 못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가 대변하고 있는 입장은 <모세 오경> 전체를 지배하는 한 가지 역사관, 즉 “신명기 사관”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중심 세계관입니다. 이를 근거로 화자는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합니다. 그에게 있어 역사의 과정은 아무 의미 없는 순환과 반복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며, 그렇다고 지상에서 인간 세상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향한 끝없는 진보도 아닙니다. 역사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들에게 약속하신 바, 그 언약을 이루어 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언약의 축복을,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언약의 저주가 내려졌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늘 신실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항상 믿음직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통한 역사의 교훈이라면 이스라엘이 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는 자명해집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지금까지의 책 내용 전체에 대한 신학적 결론 내지는 요약을 담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본문이 미완료형의 구문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과 이후의 단락들과는 구별되는 문학적으로 하나의 독립적인 단위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전 단락은 41-42절에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지니고 있으며, 본문은 “그 때에”라는 부사절로써 이야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내용과 주제. 세 절에 불과한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으며, 「땅과 율법」에 관한 <신명기> 특유의 역사 인식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으며(신 1:8), 이스라엘은 가서 그 땅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결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맹세도 동시에 하셨습니다(신 1:34-35). 그리고 왜 ‘모세’와 광야의 세대가 그 땅을 얻지 못할 것인가에 대한 이유도 아울러 설명해 주셨습니다(신 4:21-22). 즉 하나님께서는 그 땅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서원을 하셨으며, 하나님의 이 서원이야말로 <신명기> 설교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참고: 신 6:10, 18, 23; 7:8, 13; 8:1, 18; 9:5; 10:11; 11:, 21; 19:8; 26:3, 15; 28:9, 11; 30:20; 31:7, 20, 21, 23; 34:4.
<여호수아>는 서두에서부터 바로 이 주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한 땅을 얻게 하리라”(1:6). 하나님의 두 가지 서원 가운데 첫 번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책의 제 1부는 이 약속을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더 나아가 <신명기>는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향한 설교에서 그 땅에서의 ‘안식’에 대한 주제를 추가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신 3:20). <여호수아>는 이 주제 또한 그대로 이어받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이러 가로되”(1:12-15).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을 위하여 ‘요단’ 서편을 향한 진군이 시작된 것입니다. 단순히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전쟁과 갈등이 없는 삶, 즉 ‘샬롬’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여호수아>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샬롬’의 삶을 대표하는 두 가지 상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제사를 확립하는 것이고(신 12:9-12), 다른 하나는 그 땅에서 ‘아말렉’ 족속을 전멸시켜 그 이름을 그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신 25:19). <여호수아>의 마지막 두 장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끝나고 있음도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땅과 안식-이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책의 제 1 부의 결론은 그 땅에 전쟁이 끝나고 안식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11:23). 그리고 본문 44절은 이 주제를 절정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21:44상)
따라서 이 구절에 이르러 <여호수아>의 신학적 주제는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를 <신명기>의 신학적 속편이라고 볼 때, 이제 남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요단’ 동편 지파들을 그들의 기업으로 돌려보내는 것일 것이며, 이어지는 단락(22:1-6)이 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화자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다고 선언함으로써 새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43절)
이것이 그의 현실인식이자 역사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은 그의 선언과는 상반되는 상황 가운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그리고 <사사기> 또한 그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13:1-6, 13; 15:63; 16:10; 17:12-13; 참고, 삿 1:19, 21, 27-35).
따라서 이들 구절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나 불성실함입니다. 요지인 즉은, 아직도 그 땅의 많은 지역에서 이방인들이 주인 노릇을 하며 살고 있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실과 화자의 선언 사이에 왜 이런 괴리가 있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사 기술(記述)은 모든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반된 현실을 반영하는 다양한 사료들이 있다고 하드라도, 필요한 부분만을 취사선택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역사 기술에 더 가깝습니다. 어떤 사료들을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는 달라질 것이며, 그 작업은 순전히 역사가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본문과 13:1-7 및 <사사기> 1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본문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다 이루셨고 책임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불성실하였고, 화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13:1-7; 삿 1).
현실이 이러한대도, 화자는 무슨 의도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다 이루셨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실 위와 같은 선언은 단순히 ‘여호수아’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이스라엘의 정치 현실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하여 싸우고 있을 때이든,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할 때이든, 또는 남쪽 유대 왕국이 멸망하고 그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조차도, 이스라엘은 그 모든 일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비극의 책임은 이스라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보다 확대하자면 <창세기> 1-3장의 주제 선언이기도 합니다. 타락 이전의 그 모든 것들은 선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모든 악하고 추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악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하나님께서 한 국가나 개인이 잘못 사용한 자신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훈련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책임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 다룬 책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만, J. Stott의 두 권의 책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을 다 이루신 결과는 안식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44절)
<오경> 특히 <신명기>에서 안식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그것은 적이나 전쟁이 없는 평화, 즉 ‘샬롬’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1:12-18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샬롬’은 12장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정복 전쟁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식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출 33:14). 그동안 이 책의 제 1부와 2부가 공히 동일한 결론, 즉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모두 소탕하심으로써 그의 약속을 이루셨다는 선언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실로에서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19:51)
44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바도 역시 이들과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여 전멸시켰습니다. ‘이집트’의 노예가 이제는 이 땅의 주인으로 신분이 바뀌어 스스로 자신의 인생과 운명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이러한 현실 인식은 인생의 한 면만을 바라본 것뿐입니다. 적들은 여전히 도처에 상존하고 있고, 전쟁의 위협은 늘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안식이 깨어질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안식을 미래에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땅에서 평화롭게 안식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좁게는 이 책 3부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관련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대답은 당연히 <신명기> 역사관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땅과 율법의 관계 바로 그것입니다. 앞으로의 전쟁도, 지금 누리고 있는 안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렸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소명이자 목표입니다. 화자는 이 단락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45절)
즉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자신의 약속을 이루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하나님의 공동체는 역사를 바라볼 때 항상 하나님의 역사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바울’은 신실함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우리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러면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바울’ 역시 <신명기> 역사가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언약의 역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약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언약도 아니며, 인간과 자연 사이에 맺은 언약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맺은 언약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항상 두 얼굴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우리는 현실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바라보아야 하며, 따라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세계관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판이합니다.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에 따르면, ‘필립 얀시’는 그의 책 「Reaching for the Invisible God(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에서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이 그의 저서 「The Creators(창조자들)」에서 밝히고 있는 유대-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세상의 시작과 끝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단지 이 세상의 문제로부터 해탈을 위해 고행하고 수행합니다.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들은 세상의 문제들을 숙명으로 달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구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처럼 일그러진 세상에 저항하며 살아가려합니다. 시간도 중요하고, 역사도 중요하며, 각 개인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 사도가 외치고 있듯이 완전한 구속 그것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세월을 아끼라”는 그의 메시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실은 시간을 구속해내라는 것입니다. 즉 악한 이 세대에서 그것을 구출해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구속에서 구출해 내셨듯이 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이 <신명기>에서 이어져온 신학적 주제에 대한 대단원의 결론이라는 진술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그 주제는 무엇입니까?
2. 역사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일련의 세계관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나의 세월과 시간은 누구의 노예가 되어있습니까? 이번 한 주 나는 그것을 어떻게 구출해 낼 계획입니까?
제 24과: 야훼의 제단
24
야훼의 제단: 권위와 목적
(22:1-34)
르우벤 지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22:10)
다양성과 다원화는 현대 문명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정통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모든 조직이나 기관이 다 그러하듯이, 그 정통성에 도전하는 어떠한 형태의 유사한 조직이나 기관들이 생겨나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합니다. 조직의 기강이나 단합이 해이해지고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조직일수록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제나 유지를 원할 것이며, 그에 반하는 어떠한 형태의 다원화도 반대하게 됩니다.
다양성이나 다원화가 종교의 영역에서 나타나게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종교가 지닌 특성상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옳고 그름의 주장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양보나 타협은 배교나 이단을 인정하고 공생하는 길과 동일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점 유일신 사상을 신봉하는 유수 종교, 예컨대 유대교나 이슬람교 및 기독교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놀랍게도 이들 종교 모두 한 분 하나님 ‘야훼’를 신봉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해석과 인식을 달리할 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지금 심각한 이단 논쟁에 빠져 있습니다. ‘요단’ 동편 즉 약속의 땅 밖에서 새로운 종교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 지파가 자신들 만의 새로운 제단을 세워 예배를 드린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와 유사한 문제가 오늘날에는 없는가? 있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22장을 하나의 통일된 문학적 단위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1-8절의 독특한 성격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요단’ 동편의 지파를 향한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로서, 그 자체로서 한 편의 신학적 메시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43-45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는 이 책의 주제를 마무리 짓는 기능도 아울러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두 단락의 신학적 관계를 유추해 보시기 바랍니다. 22:1-8가 21:43-45의 신학적 결론 내지는 완결에 해당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 과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적 기능과 관련해서 볼 때, 1-8절은 이어지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 이야기”(9-34절)를 위한 전환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 1절의 “그 때에”는 분명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며, 9절은 앞의 내용(1-8절)을 마감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이야기(9-34절)를 위한 서론의 기능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1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9절)
이렇게 볼 때 22장은 문학적 양식에 따라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1-8절: 설교와 권면과 축도
(2) 9-34절: 설화(이야기)
첫 번째 단락은 “독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정복 전쟁에 참여했던 ‘요단’ 동편 지파에 대한 화자 자신의 편집적인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의 독백은 7절의 역사적 회고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첫 번째 단락을 문학적 양식에 따라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요단 동편 지파를 돌려보냄(1-6절)
1) 서론(1절)
2) 격려와 칭찬(2절)
3) 격려의 이유(3절)
4) 순종의 결과(4절)
5) 미래를 위한 권면(5절)
6) 축도와 해산과 귀환(6절)
2. 므낫세 반 지파를 돌려보냄(7-8절)
1) 역사적 회고(7절)
2) 축복의 명령(8절)
이야기 형식을 담고 있는 두 번째 단락 역시 아래와 같이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론(9-12절)
1) 이스라엘을 떠나 길르앗으로(9절)
2) 요단 강가에 제단을 세움(10절)
3) 이스라엘이 분노함: 전쟁을 준비함(11-12절)
2. 법적/군사적 조치를 피하기 위한 조사와 협의(13-34절)
1) 이스라엘이 조사단을 파견함(13-15절)
2) 조사단의 연설(16-20절)
(1) 두 지파 반의 범죄를 비난함(16절상)
(2) 범죄의 구체적인 성격을 제시함(16절하)
(3) 범죄의 결과와 역사적인 사례를 제시함(17-18절)
(4) 문제 해결을 위해서 대안을 제시함(19절상)
(5) 범죄에 대해서 경고함(19절하)
(6) 경고를 지지해 주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함(20절)
3) 두 지파 반의 변론(21-29절)
(1) 서론(21절)
(2) 스스로 저주의 서원을 함(22절)
(3) 비난에 대한 반박과 서원(23절)
(4) 서원과 함께 화의를 제안함(24-28절)
4) 문제의 해결(30-34절)
(1) 이스라엘이 변론을 받아들임(30절)
(2) 판결을 선언함(31절)
(3) 조사단의 귀환과 보고(32절)
(4) 원고(이스라엘)의 반응(33절)
(5) 피고(두 지파 반)의 반응(34절)
이처럼 각 단락을 문학적인 양식에 따라 구분해 볼 때, 전체적으로 법적이고 제의적인 용어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제단과 희생제사를 두고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과 나머지 지파들 간의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마치 법정에서 심문과 변론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논쟁의 빌미를 제공한 측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입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도 결국 제의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따라서 본문은 성격상 <사제 전승>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여호수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비느하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 또한 한 곳이 아니라 두 곳으로서, 하나는 ‘실로’이고 또 하나는 ‘요단’ 동편 지파를 위한 곳으로서 <칠십인 역>은 이곳을 ‘길갈’로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의 출처와 배경은 무엇일까? 일견 지파 간 갈등의 중심에 성소의 위치에 대한 문제, 즉 ‘실로’와 ‘길갈’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자는 ‘실로’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길갈’이 아닌 ‘실로’가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예배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갈’ 역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정기간 동안 합법적인 예배 장소로서 중요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 내에서도 ‘길갈’을 공공연히 “거룩한 곳”으로 부르면서(수 4:19-5:15), 그에 합당한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넌 후 이곳에 역사적인 열두 개의 돌무더기를 세웠으며, 할례 의식을 행하였고, 유월절의 축제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야훼’의 이름으로 ‘기브온’과 언약을 체결할 때도 이스라엘은 이곳을 택하였습니다(수 9:6-15). 이러한 전통은 ‘사무엘’과 그 이후 시대까지 이어지면서, ‘길갈’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이고도 합법적인 성소(예배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곳)로 부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0:8; 11:15; 13:8-14; 15:12-15, 21; 암 4:4-5). 그리고 <사무엘>에 의하면 ‘길갈’은 ‘사울’ 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서 ‘길갈’이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자신은 ‘에브라임’ 족속으로서 ‘길갈’이 아닌 ‘실로’ 출신임이 분명합니다(삼상 1-4). 그의 어머니 ‘한나’가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을 보드라도 당시 성소는 ‘길갈’이 아닌 ‘실로’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실로’가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바, ‘블레셋’과의 전투를 통해서 ‘실로’에서 가져온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겨 버린 이후가 될 것입니다(삼상 4). 이 사건을 통해서 제사장 ‘엘리’의 집안은 몰락하게 되고 따라서 ‘실로’를 중심으로 한 제사의 전통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의 이름도 ‘실로’의 제사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하겠습니다(삼상 1:3; 2:34; 4:4, 11, 17, 19; 14:3).
이렇게 볼 때 ‘실로’가 성소로서 중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시기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가나안’ 정복이후부터 ‘사무엘’에 이르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는 ‘에브라임’ 지파의 영향력이나 세력이 ‘베냐민’이나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능가하며, 압도하고 있었을 시기였을 것입니다(삿 12:1; 19-20). 그리고 ‘실로’의 성소가 백성들의 종교 생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시기이기도 했습니다(삿 21:12, 19). 그렇다면 성소의 위치를 놓고서 ‘실로’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의 지파들과, ‘길갈’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베냐민’과 같은 ‘요단’ 동편의 지파 사이에 일종의 합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그러한 합의로 손해를 보는 쪽은 분명 ‘길갈’ 성소를 고집하는 지파 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의가 갖는 구속력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 ‘실로’는 ‘블레셋’과의 전투로 그 지위와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전투 이후 언약궤는 ‘기럇여바림’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솔로몬’ 이후 성전에 영구 보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실로’의 성전은 일찍부터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긴 했어도 그 영향력이나 전승은 계속 살아남아 이곳 <여호수아> 전체를 통해서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여러 곳에서 소위 <길갈 전승>이 압도하고 있지만, 책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실로 전승>이 다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음을 봅니다(18:1-22, 34). 이처럼 <실로 전승>은 마치 등고선처럼 책 전체를 휘감고 있는 형국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유수 이후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많은 학자들은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가 바로 이 시기라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성전과 제의의 정통성을 놓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을 것입니다. 포로 당시 예배의 중심지는 더 이상 ‘실로’가 아니라 ‘예루살렘’입니다. 비록 옛 성전은 파괴되고 그 자리는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예배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재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를 집전하고 주도할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그곳에 있지 않고 ‘바벨론’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지, 즉 ‘요단’강 밖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본문이 들려주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 대답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던 정상적인 희생제사와 같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피치 못할 상황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심리적 긴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은 <에스라>나 <느헤미야>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자들과 ‘사마리아’에서 남아 살고 있던 자들 사이에 있었던 적대감과 분열의 양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해결할 방안은 없을까?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타협안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의 방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방안을 한 번도 제대로 받아들인 적도 없고 실현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늘 만날 수 있는 문제이고, 그 때마다 이 옛 이야기는 문제 해결의 좋은 방안으로서 백성들을 자극하고 도전하게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요단 동편 지파를 돌려보냄(1-8절)
이 단락은 내용상 앞부분(21:43-45)과 긴밀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도 나머지 지파들을 위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책임을 다 완수한 셈입니다. ‘여호수아’는 정복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들 지파들의 참여를 촉구하였고(1:12-18), 이제 그 모든 사역이 다 끝났으므로, 이야기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출발 지점에 와있는 듯합니다. 이제 한 형제로서, 한 가족으로서 그 모든 책임을 완수하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들 지파에게 ‘여호수아’가 당부할 말은 무엇일까요? 설교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책의 전체적인 주제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1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3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4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5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7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8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1-8절)
‘요단’ 동편 지파들에 대한 ‘여호수아’의 관심과 배려는 각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약속의 땅 밖에서 살아갈 지파들이기 때문입니다. 늘 적들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거나 타협하여 배교와 이단의 길로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은 본문의 역사적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지도자가 해 줄 수 있는 권면은, 그들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가족이요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주면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을 주시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안식을 말합니다(4절. 참고, 1:15; 21:43-44).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안식은 특별히 ‘요단’ 서편 지파들의 것으로서, ‘요단’ 동편 지파들은 이미 그 안식을 획득한 상태에 있었습니다(1:13).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그 안식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안식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누리고 있는 안식이 ‘요단’ 동편 지파들의 순종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요단’ 동편 지파들의 안식 역시 그들이 그 땅에 돌아가서 어떻게 순종하며 사는가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계명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당연한 결과이자 열매입니다. 평화 시에나 전쟁 시에나, 번성의 때에나 위기의 때에나 초지일관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설교의 요지는 바로 그것입니다(22:5와 1:7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 축도로써 설교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축복의 한 형태로서, 아비가 자식에게 주는 그러한 것입니다. 이어서 ‘여호수아’는 ‘므낫세’ 두 지파에 대해서 역사적 회고를 덧붙이고 있는데, 왜 특별히 이 지파를 언급하고 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스라엘의 결속과 연합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므낫세’ 지파가 ‘요단’의 동과 서로 갈라져서 살아가게 될 것이지만 원래는 한 지파이듯이,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선언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한 형제로서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그 모든 축복의 결과들(금, 은, 동, 가축, 의복 등등) 역시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8절).
2. 이스라엘과 제단(9-34절)
두 번째 단락의 핵심 내용은 ‘요단’ 동편 지파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후에 그들을 위하여 ‘요단’ 강가에 별도의 제단(祭壇)을 세운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견 불법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화자는 당대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이야기는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전•후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반부 이야기(9-12절)는 일종의 서론으로서 배경 및 문제 제기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후반부(13-34절)는 문제 해결 및 결론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결론에 이르는 전 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서론: 불법적인 제단(9-12절)
화자는 첫 번째 단락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내용(6절하), 즉 ‘요단’ 동편 지파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시 반복 진술함으로써 두 번째 이야기의 서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전 진술과의 비교를 위해서 두 구절을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9절)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6절하)
두 진술의 차이는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화자는 ‘요단’ 동편 지파를 이스라엘과 구별하여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지파가 거주할 땅도 ‘길르앗’으로 부르면서 ‘가나안’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에서 열두 지파가 지파연합과 같은 단일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요단’ 동편 지파 역시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화자는 이들 지파가 그들의 땅에서 무엇을 했는지 진술하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10절)
자신들을 위한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제단의 위치는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요단’ 서쪽 땅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위치에 대한 언급이 시사해 주는 바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요단’ 서편은 ‘야훼’ 하나님이 계시며 제단을 세우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것입니다(19절).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볼 때, ‘요단’ 동편 지파와 ‘길갈’에 성소를 두고 있던 ‘베냐민’ 지파 간에 일종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제단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11절)
그런데 이곳에서 제단의 위치에 대한 표현이 애매하며, 이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문제가 되는 표현은 “(가나안 땅의) 맨 앞쪽”(l~WmAla,, 엘물)과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rb,[eAla, 엘 에베르)때문입니다. 전자(前者)의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출 26:9; 28:25, 27, 37; 수 8:33), 가장 근접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곳은 <여호수아> 9:1의 “(레바논) 앞(이쪽)”으로서, ‘요단’ 서쪽을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화자가 가나안 땅에서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표현은 더욱 애매합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30:13에 의하면 “(요단의) 다른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신 30:13)
그러나 이 표현은 가장자리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출 28:26; 겔 1:9, 12). 아마 본문에서도 화자가 의도하는 바도 이 두 번째 의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요단’ 동편의 지파가 세운 제단은 가나안 땅에 있기는 하나, 그 땅의 동쪽 언저리에 있으면서, 약속의 땅이 아닌 ‘길르앗’에 살고 있는 지파들의 성소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의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의 분리와 해체에 대한 염려입니다. 화자는 12절에서 이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12절)
이들이 모인 이유는 응징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사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사사기>는 ‘다윗’과 ‘사울’로 대표되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간의 갈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삿 19-21장).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지파간의 갈등과 분열은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서부터 흔히 있었던 듯합니다.
2) 이스라엘의 대응(13-34절)
조사단 파견(13-20절). 그런데 갑자기 이스라엘은 태도를 돌변하여, 전쟁 대신 사태 파악을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상 이러한 방법으로 문제를 예는 거의 전무하지만, 매사를 법적이고 군사적인 방법을 통해서 해결하기보다는 조정이나 중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최상의 선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사단장은 제사장 ‘비느하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13절)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의 유일한 지도자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14:1; 19:51; 21:1), 특히 이곳에서는 ‘여호수아’를 제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단을 놓고 일어나고 있는 지파 간 분쟁을 해결하는 최고 책임자로서 ‘비느하스’의 역할은 오히려 ‘여호수아’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 이곳에서는 ‘여호수아’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비느하스’가 등장하는 곳은 그의 출생과 관련한 부분(출 6:25) 외에, “바알브올 사건”과(민 25) “미디안과의 전쟁”(민 31:6), 그리고 “이스라엘과 베냐민과의 전투” 등입니다(삿 20:28).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본문에서는 그를 ‘실로’에 있는 제단과 연계시키고 있는 반면, <사사기>에서는 ‘베델’임이 분명하고(삿 20), <여호수아> 24:33에서는 ‘기브아’와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느하스’와 함께 조사단에 포함된 자는 ‘요단’ 서쪽의 아홉 반 지파들 중에서 한 명씩 선정한 대표자들입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14절)
그런데 이 구절 중에서 “지파”의 의미가 다소 애매모호합니다. 흔히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호칭할 때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규모에 따라 큰 무리에서 작은 무리로 갈수록 “지파”(טבש 또는 הטמ; tribe) > “가계”/“가족”(תוחפשמ 또는 םיפלא; clan) > באתב (the house of the father) 등의 단어를 사용합니다만,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 번째 단어라 그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이 단어 역시 가장 포괄적인 의미의 “지파”를 드러내는 용어로 확대 사용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사단의 공식 발언은 그 양식에 있어 이스라엘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소위 “예언적 메시지” 내지는 “신탁의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15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16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15-16절)
메시지의 내용인 즉은 <아이 성 이야기>를 통해서 공식화 한 비난성 발언,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바벨론 유배” 시에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오래 동안 잘 보존되어 온 전승에서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자는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며, 패역한 이스라엘의 역할은 ‘요단’ 동쪽의 두 지파 반이 맡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의 비난은 나름대로 역설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 입장에서 보면 제단을 쌓은 일이 다른 이방신을 섬기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종교적 열정과 헌신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신앙적 배교로 오인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마치 하나님의 성소는 단 한곳에만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듯합니다(신 12). 성소의 숫자에 대한 초기 전승들의 입장도 다소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신전들과 구별되는 합법적인 성소들만 허락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바라볼 때, ‘요단’ 동편 지파들이 세운 제단은 불법적이며, 사사로운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서편의 지파들은 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조사단은 자신들의 심문과 비난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 <브올의 반역>(민 25) 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명기> 화자 자신도 일찍이 이 사건을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순종에 대한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바 있습니다(신 4). 조사단의 우려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즉 새로운 제단은 결국에는 이방신을 쫓는 제단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7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18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17-18절)
그러나 조사단의 목적은 심판과 정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심문 속에서도 동지애적인 배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세운 제단을 버리는 대가로 필요하다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제공할 용의도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19절)
‘요단’ 동편과 그곳에 세운 제단에 대한 서편 지파들의 태도는 단호하고 분명하지만,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내놓는 이러한 제안은 분명 자기희생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간 이야기>를 역사적 선례로 들어 한 개인의 범죄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를 설명하면서, 조사단은 이 문제가 단순히 두 지파 반의 범죄에 국한된 것이 아님도 역설하고 있습니다:
세라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느니라 하니라(20절)
변론과 방어(21-29절). 그러나 조사를 받는 지파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들 지파가 단순히 제사장 ‘비느하스’를 향해서가 아니라 이례적으로 “이스라엘 천만 인의 두령”(14절)을 향해서 변론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22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21-22절)
하나님의 이름 하나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인지, 세 개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고 그것도 두 번에 걸쳐 노래하듯 반복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전능하신 자 하나님”(hw:hy] !yhila> la; 엘, 엘로힘, 야훼). 첫 번째 하나님의 이름 ‘엘’은 원래 ‘가나안’의 최고 신(神)의 이름으로서, <족장 이야기>에서 족장들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여러 수식어와 함께 채택한 이름입니다: ‘엘 샤다이’(창 17:1; 28:3; 35:11; 43:14; 48:3; 49:25; 출 6:2-3); ‘엘 올람’(창 21:33); ‘엘 엘리온’(창 14:18-22); ‘엘 로이’(창 16:13); ‘엘 베리트’(삿 9:46); ‘엘, 이스라엘의 하나님’(창 33:19-20). 두 번째 이름 ‘엘로힘’은 문법적으로 복수형이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대개 단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이름입니다(창 1).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름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으로서 <출애굽>에서 모세에게 현현하셨던 하나님입니다(출 3, 6). 아무튼 이들 지파는 자신들의 결백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맹세 위에 새로운 서원 한 가지를 더하고 있는데, 만일 혐의가 사실로 드러날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두 번째 서원은 직접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종 판단은 ‘요단’ 서편의 아홉 반 지파도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도 아닌, 하나님에게 달렸음을 전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자신들을 변론하는 이 두 번째 서원에서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23절)
그것은 다름 아닌 세 가지 제사에 관한 것으로서 조사단도 이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만, 자신들이 받고 있는 혐의가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은 <사제 전승>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예루살렘’이 성전 제사의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장소임을 천명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서원 역시 직접 하나님을 향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대하면서 처벌을 받겠다는 서원까지 밝힌 후에, 이들 지파는 자신들의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와 동기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4절)
즉 그들의 그렇게 한 것은 “두려움과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미래에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단의 사태에 관한 것입니다:
25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26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25-26절)
즉 현재에도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닐진대, 훗날 자신들의 후손들이 ‘요단’ 동쪽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는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염려는 충분히 신학적인 근거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의 범위가 분명 ‘요단’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면, 강의 동쪽과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당연히 이방인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이미 ‘요단’ 서편에서 온 조사단이 공공연히 선포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 지파들의 염려는 타당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 대한 반격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두려움을 피력한 후에, 간절한 열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27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8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이 지은 여호와의 제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27-28절)
그들의 간절한 열망인 즉은 자신들이 세운 제단이 ‘야훼’ 하나님께 세워진 것으로서,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훗날 같은 문제를 놓고 불필요한 충돌을 없애 줄 증거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요단’이 지리적으로 분리의 상징임에 분명하지만, 제단은 지리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연합의 상징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자신들의 순수한 동기와 열정, 그리고 무죄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함으로써, 이들 지파는 변론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29절)
문제 해결(30-34절). 조사단은 동편 지파들의 변론에 만족했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30절)
<구약>에서 “좋게 여기다”는 표현은 상대의 제안이나 증거를 받아들일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창 41:37; 레 10:20; 신 1:23; 삼상 18:5; 삼하 3:36; 18:4; 왕상 3:10; 에 1:21; 2:4).
이에 제사장 ‘비느하스’가 동편 지파들의 혐의를 벗겨주는 최종 판결을 내려줍니다. 그는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31절)
제사장의 이 선언은 실은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이기도 합니다(1:5, 9, 17).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분쟁이 사라지고 평화와 안식이 가능하게 된 것이 결국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을 화자는 여기서 재확인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자신들의 순수함과 무죄를 입증해 보임으로써,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전쟁과 분열의 위기로부터 구원해 낸 것입니다.
조사단의 임무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돌아가서 이스라엘 공동체 앞에서 자신들이 듣고 본 바를 보고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모두는 만족했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32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와 그들에게 보고하매, 33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32-33절)
전쟁과 공멸(共滅)의 위기는 사라지고 예배와 신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요단’ 동편 지파들이 세운 제단은 이 모든 일의 역사적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이스라엘의 연합과 결속에 대한 증거를 넘어, ‘야훼’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에 대한 증거로 남게 될 것입니다. 즉 그 제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화자의 결론도 바로 그것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34절)
교훈과 적용
수 년 전 어느 부활 주일 성찬 예배를 준비하면서 한 교우에게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곁에 있던 한 집사가 포도주는 술이니 성찬의식에 쓸 수 없고 포도 주스로 대신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우기는 바람에 결국 그 분의 뜻대로 해 준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아버님이 목회자였던 가정에서 자란 신앙의 연륜이 아주 오래된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먹거나 마시는 것에 있지 않다”고 설득시킬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우리나라 일부 교단에서는 이단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척도로 “사도신경”에 대한 고백 여부를 묻는다고 합니다. “사도신경”은 그 자체로서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는 아주 훌륭한 신앙 고백이긴 하지만, 그 역시 하나의 신조(信條)로서 타인에게 그것을 강요했을 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기독교 역사가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일부 침례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이나 또는 찬송가 집에 수록된 교독문을 낭독하거나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의례적인 중언부언으로 흐리기 쉽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전통적인 신앙에 익숙한 성도라면 이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내심 못마땅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라면 예배 시간에 소위 “축도”를 행할 수 없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침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 아닌 다른 사람이 “침례식”(또는 세례식)을 집전한다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담임 목사를 제쳐두고 다른 지도자가 이를 대신할 필요는 없겠지만(그것도 신학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교회 내의 질서를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사 혼자서 그 모든 의식을 집전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제단
그렇다면 한 교회 내에서 일단의 회중이 별도의 장소와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여호수아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별도의 장소에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문제로 해서 이스라엘은 상호 불신과 이단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당면한 위기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 때문이 아닙니다(수 1-12장). 또는 차지할 땅을 놓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지파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탐욕이나 지파 간 싸움도 아닙니다(17:14-18). 적어도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설화세계의 배경 내에서만 보자면,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는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것에 있는 듯합니다. 논쟁의 핵심이 이스라엘이 과연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지정된 성소(聖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드릴 수 있는가 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 문제를 조명해 보면, 보다 더 깊은 의도 즉 정치•사회적인 의도가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 의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표면적인 문제 즉 종교적인 문제부터 짚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예배를 위한 단 하나의 성소만 두어야만 할까요? ‘모세’의 율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신명기>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나아가서(신 12:5)
이 구절에 따르면 일견 하나님의 성소가 그 땅에 단 한곳에만 있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듯합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다른 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 땅에 몇 개의 성소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신 ‘바알’에 대한 제사를 공공연하게 드리고 있는 그 땅에서 오직 ‘야훼’ 하나님께만 예배드릴 수 있는 제단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 구절의 핵심 의도인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에도 ‘요시아’ 시대 이전까지는 성소의 숫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편하게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허락 없이 사람들이 임의로 예배 장소를 선정하는 것을 금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임의로 성소를 여기저기 세워 나름대로 제사를 드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강력한 중앙 성소 체제가 없는 곳에 이단과 배교가 싹틀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공동체의 분열과 와해(瓦解)에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당면하게 될 위기는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한 분 이시므로 이스라엘 역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을 해칠 수 있는 그 어떠한 조짐도 사전에 예방하고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적 일치를 강조하는 화자의 의도는 그가 구사하고 있는 수사적 기법 즉 역설을 통해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그가 구사하고 있는 단어들은 그 반대의 상황, 즉 이스라엘이 한 때 분열되어 있었던 시대를 연상시켜주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예컨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과 나머지 지파들을 각기 “요단 동편 지파”와 “이스라엘 자손”으로 구별하여 부르면서 마치 이들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다루고 있는가 하면, 이들 두 진영이 살고 있는 장소도 각기 “가나안 땅 실로” 및 “길르앗 땅”으로 다르게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일치와 단결이 강조되는 곳에 부작용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일치와 단결을 요구하는 요란한 구호는 공동체의 경직과 획일성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쉽사리 독선과 이단 정죄로까지 나아가기 일쑤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수 없이 보여준 바 있습니다. 지금 ‘요단’ 동편 지파들의 행동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12절). 상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전후사정 알아보지도 않고 정죄의 칼을 먼저 꺼내들고 있습니다. 대개 종교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예배 그 자체가 아니라 예배의 장소와 형식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질이 아니라 비 본질,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조사와 타협
그러나 무슨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일까요? 누가 중재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까? 그들은 싸우고 정죄하기 앞서 사전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결정은 참으로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조사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이들의 의도나 행동이 단죄를 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 역시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계명을 어김없이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세운 제단은 다름 아닌 한 분이신 ‘야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단이 있는 장소 또한 “약속의 땅” 밖이 아니라 “가나안 땅” 경내였습니다: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10절상). 다만 그 장소가 ‘가나안’과 ‘길르앗’의 경계 지역, 즉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약속의 땅” 최 동편의 가장자리라는 점이 미심쩍었을 뿐입니다. 이곳은 아무래도 이방인들과의 접촉이 가장 빈번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방 문화와 이방 종교에 가장 쉽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으며, 가장 먼저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염려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길르앗’의 형제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염려입니다. 이러한 염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응징을 위하여 곧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들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단’ 동편 지파들 역시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후손이 “약속의 땅” 밖, 즉 ‘요단’ 동쪽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는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제외되고 배척당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입니다. 이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사는 곳에도 제단을 세워 동일한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들 역시 공동체의 일원임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주면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진심을 이렇게 밝히고 있는 이들의 고백은 정말 눈물겹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동기요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진심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전쟁을 벌이겠다고 으르렁댔으니 조사단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조사단을 파견한 일은 정말 잘 한 일이었습니다.
두 진영은 타협과 양보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각 지파는 자신의 관점에서 나름대로의 해결책과 타협안을 제시하여 합의에 이르게 되고,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백성으로 결속하게 됩니다. 이러한 합의는 ‘요단’ 동편 지파 자신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분열과 파멸로부터 보호해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일로 온 이스라엘은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운 제단이 기능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제단은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에 대한 증거로써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분열과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고 새로운 단결과 신뢰 속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증거하는 상징으로도 기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 교훈
그러나 이것이 화자가 의도하는바 신학적 주제의 전부일까? 보다 영속적인 교훈은 없을까?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렵사리 갈등을 봉하자 말자, 정작 이해 당사자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맙니다.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목숨처럼 귀중하게 여겼던 ‘실로’의 제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본문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며 이해 당사자로 등장했던 자신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이들 모두는 역사의 무대에서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도 점점 그 세력을 잃어가다가 자신의 독립적인 지위마저 상실해 버렸고, <사사기> 이후부터는 아예 언급조차 없습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제단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관한 그 중요한 역사적 언약을 이끌어 내었던 그 백성들과, 언약의 핵심이 되었던 그 제단마저 망각의 세월 속으로 사라져가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에 대해서 왜 그토록 사생결단 전쟁까지 불사하며 전의를 불태웠을까? 본문의 역설은 모든 보이는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데 있습니다. 가변적이면 지엽적인 것들이란 무엇일까요?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예배는 어디서 드릴 것인가?”, “어떻게 드려야 할까?”, “각 지파의 경계는 어디로 할 것인가?”, “하나님은 어디에 모실 것인가?”, “이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러면 보이지는 않지만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대의 주인공들이 그날 그 무대 위에서 맺었던 “언약”이 아닐까요? 또는 언약의 정신은 아닐까요? 이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전통과 역사가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살아 숨 쉬며 계속 이어져 갔던 것은 아닐까요? 마치 흐르는 강물이 지역에 따라 물길을 달리하며 유유히 그러나 도도히 흘러가는 것처럼, 언약의 숨결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그 표현이나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이스라엘의 삶의 현장에서 해석되고 적용되어 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중요한 불변의 진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즉 본문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하든 시공을 뛰어넘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즉 하나님의 백성이 종교적, 이념적, 그리고 정치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분열의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요단’의 동과 서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하나 되게 하는 처방은 없을까?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분열과 갈등을 뛰어넘어 하나 되는 감격적 체험을 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월드컵 축구 대회 때 였습니다. 당시 모두를 하나로 묶는 구호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입니다. 월드컵이라는 축제가 외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한민족이라는 인식이 내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식대로 태극기를 들고 흔드는 것에서부터, 태극기 모양의 스티커를 얼굴이나 손에 붙인다든지, 아예 얼굴 전체를 태극기로 페인팅을 하기도 하며, 태극기로 옷을 만들어 입는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고 어느 누구도 태극기를 모독하는 불경스런 짓이라고 비난한 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유행으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축제가 있다면, 예배와 제사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축제를 통해서 외칠 수 있는 한 가지 구호가 있다면, “야훼 하나님”입니다.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든, 어떤 톤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야훼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구호가 들리는 이상 분열이 아니라, 하나 된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를 한 가족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변적인 것들에 집착하다 불변적이고 영원한 것들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면 될 수록 하나님의 공동체는 연합과 단결이 아니라 분열과 와해의 길로 치닫게 됨이 기독교 역사의 교훈입니다. 이단 논쟁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논쟁이 극심할수록 세상을 향한 선교는 쇠퇴하고 맙니다. 우리 목장 운용의 방식을 놓고서도 지나친 획일화를 추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낸 합의를 토대로 논의해 봅시다.
2. 나의 신앙에 있어 비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제 25과: 마지막 설교
25
마지막 설교
(23:1-16)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23:2)
은퇴나 죽음을 앞둔 영웅이나 지도자의 고별설교는 후대를 위한 교훈으로서 인류가 역사를 두고 즐겨 사용해 왔던 문학의 한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 <신명기>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이 이 책 전체가 실은 ‘모세’의 “고별 설교 모음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여호수아> 역시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은퇴를 앞둔 영웅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를 싣고 있습니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은 <신명기>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바, 화자는 이곳에서 열여섯 절에 걸쳐 소위 <신명기>의 핵심 신학적 주제를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전체 사상을 아주 압축해서 요약하고 있는지라, 그 깊이나 강도에 있어 마치 “빅뱅”을 기다리고 있는 태초의 미립자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의 ‘다이나마이트’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이 설교를 들어야 할 공동체의 배경이나 상황은 어떠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본문의 독서 관점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은지라”로 시작하는 제 1절의 부사절은 본문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 상 15-16절은 일종의 위협과 경고로서, 본문의 결론으로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법적으로 볼 때 23장과 24장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마치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과에서 보다 상세하게 논의할 것입니다.
양식과 내용. 본문은 문학적 장르에 있어 “설교”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 하나하나마다 소위 “신명기 신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현재의 본문으로 정착되기까지 편집 작업의 과정이나 기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양식과 관련해서는 “설교”와 “언약”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본문 제 1절은 <구약>의 다른 본문을 통해서 이미 친숙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는데, 영락없는 “임종 설교(축복)” 내지는 “고별설교” 그것입니다. 예컨대 ‘야곱’의 임종설교(창 48-49), ‘요셉’의 임종설교(창 50:22-26), ‘모세’의 고별설교(신 33), 그리고 ‘다윗’의 임종설교(상하 23:1-7; 왕상 2:1-9) 등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그 양식에 있어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즉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양식에 있어서도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위 “언약 양식”과 관련한 일련의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언약을 체결하거나 갱신할 때 대개 다음과 같은 패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역사적 회고(3-5절)
(2) 기본 원칙의 진술(6-8절)
(3) 언약의 축복(9-10절)
(4) 기본 원칙의 반복 진술(11절)
(5) 언약의 저주(12-13, 15-16절)
따라서 본문은 그 내용으로 볼 때, 언약의 갱신 의식과 연관해서 그 배경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독특한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즉 본문은 그 내용이나 분위기에 있어 언약 갱신을 위한 예배나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설교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학자는 본문의 배경을 고대 ‘히윗’ 족속의 “봉신계약”(封臣契約)과 연결시키면서, 나이든 왕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면서 그 후계자에게 백성의 충성을 담보해주는 의식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Baltzer).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곳 본문에서는 후계자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회중을 향한 직접적인 설교만 있을 뿐입니다. 다만 축복과 저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순환되고 반복되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언약 갱신과 관련한 내용이 족장의 임종 시에 “유훈 설교”(遺訓 說敎)의 일부로 채택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본문의 설교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축복보다는 저주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설교의 분위기는 현재 공동체가 당면한 삶의 자리를 연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벨론의 이스라엘 공동체일 것입니다. 이들은 한 때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으나 지금은 그분의 저주 하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리셨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긴장으로 가득 찬 본문의 저주의 경고는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왕하 17).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연이은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왕하 21:1-16; 23:26-27).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를 체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역의 결과가 무엇인지 곧바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삿 2:6-23; 3:1-6).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 23장은 <성경>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은 이스라엘의 이후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예고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출발에서부터 어두운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만이 아닙니다. 전망과 아울러 역사적 회고의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출애굽을 회고했던 것처럼(출 19:4-6), 이곳에서도 이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을 회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3-4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출 23:23-33), 이곳에서도 역시 그렇게 하시고 계십니다(5-13절). 또한 ‘시내’ 산에서 자신의 진노를 보여주신 것처럼(출 33:1-3), 이곳에서도 저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위협적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13, 15-16절). <출애굽> 34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 갱신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언약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적들을 물리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충성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 동일한 언약이 본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전제 하에 불순종의 심각한 결과가 어떨지를 사전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을 관통하는 핵심 신학적 주제가 될 것이며, 이는 <신명기> 전체 특히 27-29장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벽두에서부터 이러한 “신명기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1:1-9). 마지막으로 이곳 23장에서는, 13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과 당면 과제, 즉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고 정복할 땅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수아> 23장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사기 시대와 남북조 시대와 “바벨론 유수기”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의 요약이자 핵(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1-2절)
본문은 이 책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달리 배경이 될 만 한 시점이나 장소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1절)
다만 본문의 배경과 관련해서 화자는 두 가지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이 두 가지 사실은 화자 자신이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참고. 13:1; 21:44).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배경으로 상정할 수 있는 바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화자 당대까지 늘 꿈꾸어왔던 하나의 이상(理想)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출 33:14).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위기 상황 즉 리더십의 전환기를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본문의 메시지가 반영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는 이스라엘의 번영에 대한 기대와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닥친 위기상황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 1절은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서로 상충되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리더십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절박한 상황은 2절에서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2절)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로 거명하고 있는 네 가지 이름들은 이 책의 전반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등장한 바 있습니다: “장로들”(6:21; 7:6; 8:10, 33); “재판장들”(8:33); “관리들”(1:10; 3:2; 8:33); “수령들”(14:1; 19:51; 21:1; 22:14, 21, 30).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사장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소위 일반 세속적 지도자들입니다.
2. 회고(3-5절)
‘여호수아’는 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역사적 회고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3절)
이스라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대적자들을 물리치시며(출 14:14, 25; 신 1:30; 3:22; 20:4; 수 10:14, 25, 29, 42), 이를 통해서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대조를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 33:1-3; 수 1:5, 9, 17.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며, 전투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 제 1부는 이점을 확인시켜주고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 여전히 적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단 상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그 땅입니다(이것은 22장에서 다룬 바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4절)
화자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지파별로 나누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14-19장), 대적(對敵)들도 지파 별로 나누어 각 지파의 땅에서 살도록 허용하셨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술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신바 약속에 대한 진술과는 상반된 것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3-45). 두 상반되는 진술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하였으며, 따라서 더 이상 정복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 땅의 여러 곳에 골치 아픈 대적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사사기>는 바로 이 두 번째 주제를 이어받고 있습니다(삿 1:1-3: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5절)
하나님께서 남아 있는 적들을 몰아내시겠다는 약속은 <신명기>에서 이미 선언하신 바 있는데(신 6:19; 9:3-4), 이곳에서 그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쫒아낼 것”이라는 약속은 멀리는 “출애굽” 당시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도 합니다(출 34:24; 민 32:21; 신 4:38; 9:4-5; 11:23; 18:12; 수 3:10; 13:6).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 언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창 15:7; 22:17; 24:60; 28:4). 이들 약속은 <민수기>에서 성취되기 시작합니다만(민 21:24, 35), 이후에도 동일한 약속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이스라엘의 과업에 대해서도 <신명기> 전체에 걸쳐 무려 60여 회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예: 1:8, 21, 39).
3. 대 원칙(6-8절)
그런데 이스라엘의 남은 과업은 다시 정복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 속하는 과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문제와 직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6절)
이와 동일한 모티브는 <여호수아> 뿐만 아니라 <오경>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1:7-8; 출 24:7; 신 28:58, 61; 29:20-21, 27; 30:10; 31:24, 26; 수 8:31, 34).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말할 것도 없이 <신명기>의 율법에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거룩” 즉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 차별성을 유지할 것인가? 7절은 이 질문에 대한 요약적인 답변이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7절)
한 마디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구별은 다름 아닌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이 예배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일은 이들 민족들과의 왕래나 접촉을 끊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불러서도 안 됩니다(출 23:13; 사 26:13). 그것은 그 신들을 찬양하고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들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서도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신 6:13; 10:20). 그 또한 이들 신들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참고. 렘 5:7; 12:16; 습 1:5). 이스라엘은 또한 다른 신들을 섬겨서도 안 되고 오직 한 분 하나님 ‘야훼’만을 섬겨야 합니다(출 3:12; 20:5; 23:24-25, 33; 신 4:19, 28; 6:13; 7:4, 16; 8:19; 10:12, 20; 11:13, 16; 12:2, 30; 13:5, 7, 14; 17:3; 28:14, 36, 47, 64; 29:17, 25; 30:17; 31:20; 수 22:5, 27).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해서도 안 됩니다(출 20:5; 23:24; 32:8; 34:14; 레 26:1; 민 25:2; 신 4:19; 5:9; 8:19; 11:16; 17:3; 29:25; 30:17). 결국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충성과 헌신입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복수(複數)의 신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회에서 오직 이스라엘만은 한 분 하나님 ‘야훼’만을 섬겨야 하는 절대적인 믿음과 충성심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그 땅의 “풍요의 신”이나 “전쟁의 신”들을 의지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절대적인 충성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의 충성과 헌신을 요청하면서 일종의 공식적인 서원의 형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0:20; 11:22; 13:5; 30:20; 수 22: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8절)
이 부분에서 화자의 태도는 격려와 위안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일에 있어 성공적으로 잘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칭찬과 격려는 화자의 당대가 아니라 정복 전쟁에 참여했던 이전 세대에만 국한됩니다. 광야 세대나 정복전쟁 이후의 이스라엘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4. 언약의 축복(9-10절)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3절에서 했던 바 역사적 회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충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9절)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참고. 수 1:5). <신명기> 28:7과 32:30에서 천명하신 그분의 축복도 성취되었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10절)
5. 원칙의 재천명(11절)
당연히 지금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헌신입니다. 화자는 이러한 대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왕에 대한 충성이나 헌신을 요구하는 자리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11절)
6. 언약의 저주(12-16절)
이 모든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즉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그 땅의 여러 신들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새로운 민족의 탄생입니다. 이스라엘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나안’ 족속도 아닌 일종의 영적 혼혈아가 탄생될 것입니다. 당연히 이 혼혈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결혼의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11절에서 사용한 바 있는 “사랑”의 모티브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12절)
화자는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일로 이방인과의 결혼을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의 통혼(通婚)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혼혈아를 낳게 되며,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지름길이 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면 ‘솔로몬’ 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고통과 좌절 가운데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왕상 11).
사랑과 결혼을 예로 들며 충성과 헌신을 요구했던 화자는 갑자기 톤을 바꾸어 위협과 저주로 불순종에 대하여 경고하며 나서고 있습니다.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13절)
그런데 이 구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자는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그 땅의 이방 족속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물리치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4-5절).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어떠한 유혹도 무시하라고 요청하신 바도 있습니다(7, 11-12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고 무시한다면 하나님 역시 자신의 약속을 철회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자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러한 요청을 무시한다면 심판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상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이방인과의 통혼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점차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될 것이며, 그 결과 혼혈과 혼합은 더욱 가속화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갈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점점 더 깊이 쌓여가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 땅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며, 이전에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대단히 슬픈 일이지만 여호수아가 지금 이스라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경고를 발하셨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실패를 거듭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상실했습니다.
위협의 설교를 전하는 중에 ‘여호수아’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애절한 간청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24절)
늙어 죽어가고 있는 노인의 말은 듣지 않을까요? 그의 개인적인 간증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스스로를 돌아보아 현재 처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나님께서 이루지 못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가 말한 것 중에 그분이 이루지 못한 일이 과연 있었던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기 위해서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약의 축복뿐만 아니라 언약의 저주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15절)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약속을 이루시기도 하지만, 저주의 말씀 또한 이루실 능력과 의지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신명기> 특히 28:15-68에 소개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저주를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그 땅입니다. 바로 그 선물을 하나님께서 가져가실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은 7장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에 대한 신학적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약 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16절)
교훈과 적용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를 놓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잘못 때문인지 말입니다(요 9:2).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만족할 만 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즉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원인 규명을 해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일견 유치하고 단세포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인생의 제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모범답안 즉 정답이 있으며, 또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을진대,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해결책 또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기에 모든 현상이나 사건을 인과의 원리로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단순•유치한 해석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어 보이기는 하다는 생각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 역시 이점에 있어 예수님의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역경과 고통에는 필경 이유와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단하는 원인이란 다름 아닌 ‘욥’의 범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무엇인가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욥’은 이들의 진단에 대해서 분노하며 다툼까지 벌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진단을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부인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그 지경으로 몰아간 당사자가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과연 ‘욥’을 비롯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현실인식은 온당한 것입니까? 지나치게 단세포적이고, 유치하며, 이분법적이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책의 말미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판결 내리고 계십니다. 드러난 현상이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단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화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아예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사는 자가 더 장수하고, 부유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 현실을 돌아보아도 그의 진단은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그의 말처럼 인생에는 인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더욱 헛되며 무상하기만 합니다. 이처럼 헛된 인생에서 지혜는 무슨 소용이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 또한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다짐이나 결단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현자(賢者)나 우자(愚者)나 결국에는 죽기는 매 일반인데 말이지요.
그러나 만일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이라고 한다면, 그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내리고 있는 이런 식의 진단이 과연 온당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임종을 맞은 아비가 자식들에게 이런 유의 유훈(遺訓)을 남겨도 괜찮은 것입니까?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그의 고별 설교 본문으로 ‘솔로몬’의 <전도서>를 택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모세’는 그의 고별설교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는 고별설교에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가나안’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가 ‘바벨론’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살아가게 되었을까? 우연히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무슨 원인이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공동체의 지도자라면 어떤 진단을 내려주어야 할까?
이스라엘이 자녀교육을 위하여 한 권의 책을 선택한다면 <신명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솔로몬’의 일생에 관해서나, 또는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현실을 진단함에 있어서, 설교의 본문으로 <전도서>보다는 <신명기>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서>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신명기>의 인과응보를 가르치고 싶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신비하여 그 뜻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언약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있으며 또한 그 언약에 철저하게 충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한 국가나 개인의 흥망성쇠가 우연이나 운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언약의 공식 즉 필연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가르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세상의 모든 현상이나 사건들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전도서>가 바라보는 <신명기>는 지나치게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합니다. 보다 지적이거나, 오랜 신앙의 연륜을 가진 성도라면 십중팔구 이런 식의 설교에 대해서 ‘욥’처럼 분노하거나 냉소하거나 또는 혐오감을 드러낼 것이 분명합니다. “좀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해석은 없을까? 이런 해석은 정말 지긋지긋해.” 그러나 듣기 싫다고 해서 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주를 탐구할 때 망원경이 필요하다면, 인체를 연구할 때 현미경이 필요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도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신명기>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기막힌 현실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은 그 땅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사후(死後) 마치 ‘이집트’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더불어 살면서 수시로 조폭처럼 떼를 지어 나타나 재산을 약탈해 가는 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사사기>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사사기>의 현실 인식은 철저하게 <신명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고별설교에서 경고한 바대로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믿지 않았고, 그분의 명령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열왕기>가 ‘솔로몬’의 일생을 진단하는 방식도 철저하게 <신명기>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 왕국이 하나님의 언약을 업고 희망에 찬 출발을 하였으나, 결국 쇠락과 멸망의 길을 걷게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열왕기> 화자는 그 원인을 ‘솔로몬’의 “혼합주의”에서 찾고 있습니다(왕상 11). 즉 그는 온갖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영적 혼혈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지금 화자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그 땅의 주인도 아니며, 그 땅의 이방인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동방의 땅 ‘바벨론’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기약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한심한 역사는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화자는 <신명기>를 그의 설교 본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청중들에게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은 <신명기>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바, 화자는 이곳에서 열여섯 절에 걸쳐 소위 <신명기>의 핵심 신학적 주제를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시대와 장소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늘 천편일률적인 설교를 들어야만 할까? 역사를 두고 변하지 않는 두 본성 때문일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본성과 그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늘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철부지 어린 아이로 남아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같은 내용의 설교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언감생심 <전도서>의 인생무상의 노래를 듣고 있을 겨를도 자격도 없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책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신학은 보수적으로 신앙은 급진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신학을 나무의 뿌리에 비유하자면 신앙은 그 열매나 잎에 해당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강의나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 볼 수는 있을까요?
흔히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탈현대기”(post modernism)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신앙의 열정이나 흥미나 에너지를 상실해 가고 있으며, 선교나 전도에 대한 열정의 엔진이 식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보상심리인지는 몰라도 기독교회는 전통적인 복음 전도의 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선교를 대체하려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사회봉사나, 복지나, 구제 등을 놓고 교회는 정부나 지방 자치 단체 또는 각종 재단들과 경쟁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실적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너도 나도 열심입니다. 물론 기독교 선교가 전도와 봉사라는 양 날개를 가지고 있어 교회가 봉사나 구제에 힘을 쏟는다 해서 나무랄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칭찬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필자의 질문은 왜 교회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그 일에 매달려 경쟁을 벌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레아’와 ‘라헬’이 각기 자신은 갖지 못했으나 상대가 가진 것을 가지려고 질투하며 싸우는 바람에 정작 자신이 가진 것을 즐기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교회가 가르치지 않으면 누가 가르쳐야 합니까? 성도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합니까? 교회가 다른 일 하느라고 이들 소중한 자산들을 다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70-80년대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목회자와 성도들의 열정적인 기도와 전도활동이 때문이었다는 연구 보고서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나 선교 방식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지금도 안동의 <우리집 교회>에는 지도자의 밥 먹듯 하는 금식 기도, 하루에 세 번이나 드리는 열정에 찬 기도회, 중단 없는 <성경> 읽기 등이 <우리 집>을 지키는 버팀목이라고 장 전도사님은 말합니다. 필자가 잘 아는 한 권사님은 지난 십 사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가 예수님을 믿을 당시 자신의 부모님을 비롯해서 오남매 중 아무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분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신명기>적 아전인수라고 비난하실 건가요?
과연 우리 교회는 성장할까요? 아니 수적인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과연 수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요? 사실 기도와 전도가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노인들 발 씻겨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회 성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 된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은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보다는 어리거나 젊은 영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필자가 마치 본문의 주제가 전도인 것 같은 착각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필자는 지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의 행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흥미와 열정과 에너지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본문이 주는 교훈은 <신명기> 신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고리타분한 그 가르침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비범함이란 지극히 평범한 일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그 형식에 있어 고별설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 내용이나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고대의 조약 체결문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가지 양식이 혼재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는 본문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2. 본문은 <신명기> 사상의 압축 내지는 요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3. 오늘 나를 향한 교훈이나 경고는 무엇입니까?
제 26과: 세겜의 예배
26
언약: 세겜의 예배
(24:1-28)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24:15, 25)
결혼 생활과 관련해서 영어권에서는 물어오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How long have you been married?” 직역하자면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해왔습니까?”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언제 결혼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까요? 구태여 차이를 구분해보자면 서양식 표현에는 결혼이란 시작, 출발,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그 무엇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우리네 표현에는 끝, 종착역, 내지는 “다 이루었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설명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서라도, 만일 우리가 결혼을 후자(後者)의 경우로 인식한다면 이 결혼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더 이상 이루어 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자(前者)의 경우는 상당히 다릅니다.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일종의 등산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갈 것인가? 어떠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까? 우리가 알다시피 결혼은 ‘언약’입니다. 상대를(상대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입니다. 만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파경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은 바꾸어 말하자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 순간만 아니라 일평생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선 사랑할 자를 선택하는 행위이고, 그러한 선택은 단순한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야 하며, 그리고 어느 한 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무미건조한 주례사 같습니까? 사실 우리는 늘 신혼부부처럼 감정 충만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늘 보면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아마 얼마 못가 기진맥진 탈진해 버릴 것입니다. 사실 사랑에는 의지적인 선택, 즉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상대를 더 알아가고, 더 잘 이해하며, 그래서 보다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사랑은 언약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 책을 접어면서 책의 마지막 두 장에서 우리는 이 언약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23장이 보여주는 장면은 이제 은퇴를 앞둔 지도자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행하는 ‘고별 설교’의 장면입니다. 마치 모세가 요단 동편에서 그랬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세겜의 예배’ 장면입니다. 또는 비록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결혼식을 연상시켜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도 설교자 또는 결혼 주례는 역시 여호수아입니다만, 언약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이곳에서 이제 그 언약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내용. <여호수아>의 마지막 두 장(23-24장)은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나 또는 구문(構文)에 있어서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장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것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23:2상)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24:1)
두 장의 핵심 주제는 “언약”에 관한 것으로서, 그 형식이나 내용이 시적 유사반복처럼 두 곳에서 공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역사적 회고(23:3-5; 24:2-13)와 현재를 위한 권면(23:6-13; 24:14-15)
(2)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경고(23:13, 15-16; 24:19-20).
(3) 이방신의 배격과 야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23:7, 12, 16; 24:2, 14-24, 27)
이와 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장을 별개의 문학적 단위로 볼 수 있게 하는 내용도 상당히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 배경: 23장이 시제(時制) 즉 ‘여호수아’의 노령(老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24장은 장소 즉 ‘세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2) 역사적 회고: 23장이 땅의 분배에 대한 회고를 하고 있다면, 24장은 ‘야훼’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3) ‘야훼’에 대한 충성: 23장이 율법 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면, 24장은 ‘야훼’를 섬기는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음.
(4) 불순종의 사례: 23장이 이방인과의 결혼을, 24장은 이방 신을 섬기는 행위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고 있음.
(5) 본문의 문학적 형식: 두 장을 구별 짓는 가장 뚜렷한 차이로서, 23장의 양식이 죽어가는 지도자의 백성들을 향한 “연설” 내지는 “고별설교”라면, 24장은 지도자와 백성의 대표자들 간의 대화를 담은 예배 또는 제의(祭儀)로 이루어져 있음.
자료와 편집. 따라서 24장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는 바로 이 양식, 즉 “제의”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양식비평(樣式批評)의 대 전제에 따르면, 본문의 양식에 대한 이해는 본문의 배경과 전승(傳承)의 역사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소라> 본문으로 인정되고 있는 본문의 구조는 언약 양식의 특징에 따라 구분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회합(1절): ‘세겜’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위하여 모임
(2) 회고(2-13절): 이스라엘의 선택과 보호에 관한 하나님의 일인칭 신탁
(3) 초청(14-16절): 순종을 위한 하나님의 일인칭 신탁
(4) 서원(17-18절):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
(5) 경고(19-20절): 서원의 결과에 대한 경고
(6) 재확인(21절): 경고에 대한 백성들의 재확인
(7) 체결(22-24절): 공식적인 언약의 체결
(8) 증거(25-27절): 언약의 돌판을 증거로 세움
(9) 해산(28절): 무리의 해산
이처럼 본문은 그 양식에 있어 전형적인 언약 체결에 관한 보고서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양식이 그려내고 있는 원래의 “삶의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양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고: T. C. Butler, 266-268쪽(참고도서 1).
가장 그럴듯한 가정은 본문을 아주 오래된 “세겜의 제의”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할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제의의 주된 목적은 주변의 이방 신들이 아닌 ‘야훼’ 하나님에 대해서 충성과 순종의 서약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헌신 서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겜의 제의” 또는 “세겜의 헌신”은 첫 예배 이후 시대를 거듭하면서, 그 양식이나 강조하는바 내용도 점차 변모해 갔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처음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이방 신을 제거하고 버리는 의식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나, 점차 새로운 내용들이 추가되면서 일정한 예배 순서 내지는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즉 본문을 통해서 보는 바처럼,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역사적 회고에 이은 재 헌신의 서약이 전체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로 자리 매김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방 신의 유혹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회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서 이스라엘의 골칫거리였던 만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는 비단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제의에서 중심 되는 선포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예배의 전통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수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사사기 시대” 이후 “세겜의 성소”가 사라지고 없는 상황에서 기존의 전통을 보전하는 문제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베델의 성소”로 이 전통이 전수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북 왕국의 멸망으로 이 전통은 <신명기 전승>의 일부로 채택되어 계승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후 <신명기 전승>은 ‘아시리아’아 ‘바벨론’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의 신학적 체계로 확립되면서 절정을 맞이하게 되고, <여호수아>의 핵심 신학적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여호수아>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들이 제의적인 언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길갈’의 “할례 의식”이나(5:2-9) “유월절 축제”(5:10-12), 그리고 ‘여리고’ 성 주위를 법궤를 메고 일곱 바퀴를 도는 의식(6장)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친 물건”에 대한 ‘아간’의 범죄로(7:1) 백성들이 성결 의식을 거친 연후에 쌓은 ‘아골’ 골짜기의 “돌무덤”(7:25-26)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발’ 산에 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며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낭독하는 의식도 그러하며(8:30-35), 지파 별로 땅을 나누는 사역은 항상 ‘길갈’이나 ‘실로’와 같은 소위 거룩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14:6; 18:1; 19:51), 이 예배 장소를 놓고 지파 간 분열과 대립의 양상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도(22:28, 34) 역시 <신명기> 화자의 편집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책의 절정이나 결론으로 적합한 것은 언약의 두 얼굴에 대한 “고별 설교”보다는(23장), 언약에 대한 헌신과 순종을 다짐하는 “예배”일 것입니다(24장). 따라서 <여호수아>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계명이나 율법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그 이름에 가장 충실했던 시기가 바로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동안이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사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영적으로 쇠락해 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회합(1절)
본문은 이야기의 시작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회중을 ‘세겜’에 모으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1절상)
하지만 화자의 진술은 이야기가 처음이 아니라 중간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모으고”(#s'a, 아사프)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성경>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배경이나 목적 등에 관한 진술이 있은 다음에 이런 표현이 뒤따르는 것이 상례입니다(예: 창 29:22; 출 3:16; 4:29; 민 11:16, 24).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이야기의 배경에 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채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런 점에서 본문을 어떤 목적을 위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의 모델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겜’에 대한 소개는 다소 놀랍습니다. ‘세겜’은 이전에도 이곳에서처럼 이야기의 중간에 느닷없이 한 번 등장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8:30-35). 그 때에도 지금처럼 율법에 대한 헌신 예배와 관련해서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여호수아> 1-11장 전체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으며, 13-19장에서 다루고 있는 정복지 성읍의 목록에도 빠져 있습니다. 다만 도피성 중의 한 도시로(20:7), 그리고 레위의 한 성읍으로(21:21) 등장한 바 있을 뿐입니다.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에피소드가 실제 ‘세겜’ 성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과 관련된 성읍 밖에 있는 한 성소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참고. 신 27; 수 8:30-35).
‘여호수아’가 마지막 설교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은 것과 마찬가지로(23:2), 이곳에서도 언약 체결을 위하여 ‘여호수아’가 불러 모으고 있는 무리에 대해서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장면 역시 고별 설교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겠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일상생활 속에는 종교적인 책임과 일반 백성들을 돌보는 책임까지 포함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섰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며, 이스라엘의 대중 집회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심상 10:19). 보다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표현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욥 33:5; 41:2; 잠 22:29; 출 8:16; 9:13).
2. 역사적 회고(2-13절)
‘여호수아’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온 백성을 향해서 연설을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2절상)
연설의 첫머리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는 선지자적 신탁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세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기원은 추측컨대 족장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인데, 일단의 무리를 이스라엘로 부르던 시절을 말합니다(창 33:20). 본문은 특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엘’이 아닌 ‘야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연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회고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 출발점을 ‘요단’ 강 동편에 살던 족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호수아’의 역사적 회고는 <신명기>에서 ‘모세’의 그것에 비해서 적어도 한 세대 내지는 두 세대를 앞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이주와 “출애굽”을 각기 출발점으로 삼은 바 있습니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신 26:5);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신 6:21).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2절하)
‘여호수아’가 근거로 삼고 있는 전승은 <창세기>의 계보입니다(창 11:24-32). 그는 특별히 이방 신을 섬기던 “조상들”의 원조(元祖)로서 ‘데라’를 언급함으로써, 이러한 아비와 단절하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아브라함’의 결정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창 12:1-6). “조상들”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언급과 관련해서는 <창세기> 35:1-4의 본문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4장 전체의 핵심 주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주제는 실은 <십계명>의 핵심 모티브를 이루고 있으며(출 20:3; 신 5:7), “신명기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참고: 신 6:14; 7:4; 8:19; 11:16, 28; 13:3, 7, 14; 17:3; 18:20; 28:14, 36, 64; 29:25; 30:17; 31:18, 20; 수 23:16; 삿 2:12, 17, 19; 10:13; 삼상 8:8; 26:19; 왕상 9:6, 9; 11:4, 10; 14:9; 왕하 5:17; 17:7, 35, 37, 38; 22:17.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단순히 그에 대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당연히 예배의 형태나 내용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주된 관심사일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그들의 유일한 신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이 좁게는 본문 속에, 그리고 보다 넓게는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신명기 역사서” 전체에 녹아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다른 신을 섬기는” 문제에서 소위 <신명기>적 약속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3-4절)
두 가지 핵심적인 약속은 그 땅과 후손에 관한 것인데, 그 약속은 이미 성취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여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창 12:5-9). 그리고 후손에 관한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진 바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화자의 입장은 선별적이고 선택적입니다. 즉 ‘이삭’을 언급하면서 그의 이복 형 ‘이스마엘’은 생략하는가 하면, ‘에서’는 ‘야곱’과 함께 나란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에서’를 ‘야곱’과 함께 언급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신학적 의도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에서’의 후손은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에서’를 ‘야곱’보다 더 축복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야곱’을 향한 더 원대한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아무리 역사적으로 암흑기나 시련기 속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거나 잊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특히 이점은 포로기 공동체의 청중들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신명기>적 교훈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바벨론’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바라는 꿈은 다름 아닌 “고토회복”(故土回復) 즉 두 번째 “출애굽”일 것인즉, 화자는 이들에게 역사적 첫 번째 “출애굽”의 기억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5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7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5-7절)
‘모세’와 ‘아론’은 역사적 사건의 두 주역으로서, 시공(時空)을 불문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두 중요한 권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과 제사장 제도가 그것입니다. 따라서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도 이들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모세’나 ‘아론’에 근거한 그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는 부차적일 뿐입니다.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유일한 권위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세 구절이 전해주는 분위기입니다.
“애굽에 내린 재앙” 즉 “야훼께서 애굽을 치셨다”는 표현은 분명 이전의 <유월절 전승>과 연결되고 있으며(출 12:23),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표현, “인도해 내다”는 <신명기 전승>에서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서 추측컨대 북 이스라엘의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홍해의 기적” 이전에 일어난 일로서, 흔히 <광야 전승>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추격”이나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 관한 언급은 <출애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만(출 14:9, 23; 14:10), 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은 “신명기 화자”의 청중 즉 포로기 이스라엘에게는 의미 있는 모티브였습니다. 화자는 또한 홍해 근처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흑암”을 언급하면서(7절), <출애굽>에서의 동일한 사건을 연상시켜주기보다는(출 14:10), 그 이전에 이집트 땅 전체를 뒤덮었던 삼일 동안의 “흑암”(&v,j, 호셰크)의 재난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의 활동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자는 이 기적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여호수아’ 세대가 광야 세대와는 한 세대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적의 현장에서 그 사건을 직접 목도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7절). 이 표현 역시 <신명기> 화자가 자주 애용하는 일종의 공식과도 같은 것입니다(참고. 신 4:3; 11:7; 3:21; 4:9; 7:19; 10:21; 29:2).
광야 시절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불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만, 광야 시절을 바라보는 <오경>의 대체적인 시각은 하나님의 심판 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다”는 짧고도 함축적인 표현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의 초점은 하나님의 인도와 승리에 있습니다.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8절)
‘요단’ 동쪽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민 21;23-25, 32, 33-35; 31:1-12). 하지만 ‘가데스’에서 ‘에돔’ 족속과의 싸움을 피하여 우회한 이야기는 고의로 빠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민 20:14-21; 신 2:2-8).
‘요단’ 동쪽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간략한 역사적 회고에 이어, 본문의 의도에 걸 맞는 구체적인 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발람 이야기>입니다(참고. 민 22-24; 수 13:22):
9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9-10절)
화자의 의도인 즉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이방의 왕이나 예언자의 의도를 무산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입니다(민 25:2-3).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신탁(神託)의 저자이시지, 예언자의 신탁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으로서, 예언자의 신탁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그에게 갚아야 할 빚도 없는 분입니다. 선지자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다는 화자의 번뜩이는 해학(諧謔)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극적으로 느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그의 손 안에 있을 정도로 아주 무서운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선지자들의 손아귀로부터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있는 한, 그 어떠한 하나님의 대언자도 두려워 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발람’의 예언을 무위(無爲)로 돌리셨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어지는 <여리고 이야기>에서도 화자의 강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주었으며(11절)
그는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는 대신에 하나의 전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 전투와 관련해서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본 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기적을 목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출처가 다른 전승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일한 전승이라 해도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리고 이야기>와 관련해서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역시 이스라엘의 전체 정복 전쟁에서 하나의 예로 포함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나간 역사에 대한 간략한 요약의 기법은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12절상)
즉 ‘요단’ 서쪽의 “두 왕”(실은 열두 왕)에 대한 정복 전쟁을 오래 전에 통용되던 “왕벌”(공포 또는 두려움)이라는 상징어로 간단히 처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행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는 표현은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2하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12하-13절)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그 어떠한 축복도, 그들의 이름마저도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활동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신명기>의 언어를 느낄 수 있으며(참고. 신 6:10-11), 이방 숭배와 관련한 모종의 상황을 연상해 낼 수 있습니다. 화자의 청중은 지금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읍이나 들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초청의 신탁(14-16절)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분위기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의 역할마저 달라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선지자 ‘여호수아’에서 변호사 ‘여호수아’가 된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고객을 위하여 선처를 호소하고 있는 변호사 말입니다.
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14-15)
변호사로서 고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우상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마땅한 경외심과 그에 상응하는 섬김의 행위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습니다(14절).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한 쌍의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함”(!ymiT, 타밈)과 “신실함”(tm,a, 에메트). 이 단어는 섬김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온전함”은 “온 종일” 또는 “일 년 내내” 등처럼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만(수 10:13; 레 23:15; 25:30), 그보다는 “흠 없는” 희생제물과 관련하여 더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출 12:5; 29:1; 레 1:3, 10 등 16회; <민수기> 6장과 19장에서 18회; <에스겔> 43-46장에서 10회). 이 단어가 사람과 연관해서 사용한 경우는 ‘노아’의 경우뿐입니다(창 6:9).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온전하라”는 명령어와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창 17:1), <에스겔>에서는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을 “온전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겔 28:15). 또한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과 함께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행동 즉 “진실하고”, “의로운” 행동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삿 9:16, 19). 원래 이 단어는 제의적인 배경을 지닌 전승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신 32:4; 삼하 22:31; 시 18:31; 시 19:8). 그리고 이 단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나아오는 자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요구되기도 했고(시 15:2), 예배드리는 자가 드릴 무죄함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삼하 22:24; 시 18:24). <지혜서> 기자들은 간혹 이 용어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축복받는 자를 지칭하며 사용하기도 합니다(욥 12:4; 36:4; 잠 2:21; 11:20; 28:10). 따라서 본문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규범일 것입니다(신 18:13). 물론 이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간혹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욥 12:4; 암 5:10).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한 단어는 “신실함”입니다. 이 역시 인간에 대해서 사용하기는 부적절하지만 <시편>에서 종종 사용하고 있기는 합니다. 이 속성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인간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이나 행동 등에 있어서 “신뢰할 만 한” 어떤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가 지금 이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태도나 행위는 인간의 상식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보여주신 그러한 수준의 태도와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전적인 충성과 헌신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 시절 때뿐만 아니라 ‘이집트’에 거주할 때조차도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인데, 화자는 이점을 지금 지적해 내고 있습니다. 요점인 즉은 이스라엘은 여태 한 번도 ‘야훼’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필요할 때마다 울며 도움을 요청했을 뿐입니다(7절). 이스라엘은 지금 새 땅에 와있습니다. 새 땅에서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삶의 방식은 ‘바알’과 ‘엘’과 기타 수없이 많은 여신들에 대한 숭배와 예배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은 나름대로의 예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족장들의 신과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숭배와 예배입니다.
‘여호수아’의 호소는 이제 이스라엘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초청하면서 결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15절). 이처럼 이스라엘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초청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첫째, 이러한 초청은 선택의 교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신 4:37; 7:6, 7; 10:15; 14;2; 왕상 3:8; 사 41:8-9; 43:10; 44:1-2; 49:7; 겔 20:5; 시 33:12; 47:5; 135:4; 느 9:7).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신다 해도, 이스라엘 편에서는 여전히 그 부르심에 응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땅에는 이스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그럴 듯하고 매력적인 종교들이 진열장에 든 상품처럼 나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가나안’ 종교에 대항해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탄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한 신만을 선택하라는 초청은 다신론적 토양에서 지극히 어리석은 선택이며, 이단적이기까지 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그 땅의 족속들이라면 이와 같이 위기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어떤 신을 섬길 것인가?”일 것입니다. 다신론이 지배하던 그 땅에서 이런 식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예배는 섬기는 신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이미 선택한 신에 대한 축제나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여호수아’의 초청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초청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주변 족속들은 이전에 한 번도 선택하도록 강요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선택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제사의 성격이나 질적 수준에 있어 그 어떠한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그러한 초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은 어떠한 강요나 위협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행동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회고해 보고, 과연 ‘야훼’ 하나님의 주장이 정당하고 근거 있는 것인가를 확인해 보는 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혼자서 감당해야 할 외롭고 고독한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가족이 이미 앞서 선택의 모범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요청대로 동일한 선택을 했을 때, 이미 그들은 따라야 할 지도자의 역할 모델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마침내 백성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서원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16절)
4. 서원(17-18절)
이 백성들의 서원은 그 내용에 있어 지극히 상투적이며 전형적인 용어들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내용인 즉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17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17-18절)
하지만 이 백성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여호수아’가 강조했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족속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이사와 기적, 그리고 인도와 보호, 그리고 이 땅에서의 정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입니다.
5. 경고(19-20절)
백성들의 서원에 대한 ‘여호수아’의 화답은 아마 <구약> 전체를 통해서 가장 충격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19-20절)
왜입니까? ‘여호수아’가 그토록 간절하게 요구하던 그것을 이 백성이 지키겠다고 서원하자말자, ‘여호수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결코 그 서원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9절상). 마치 끈질긴 구애(求愛) 끝에 상대방의 결혼 승낙을 얻어내자 말자, 상대를 내팽개치는 형국과 같습니다. 왜 ‘여호수아’는 이 백성의 헌신과 결단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아주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보이고 있는 태도는 문맥의 흐름 상 다소 엉뚱한 삽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지 이 구절이 후대의 편집에 의한 삽입이라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기도 한 바 있습니다(Rudolph, Noth, Floss, Mohlenbrink). 즉 “바벨론 포로”를 기억하고 있는 후대 편집자의 진술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단지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같은 힘든 경험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메시지라는 것입니다(Schmitt). 또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의 배경을 조약체결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McCarthy). 즉 저주와 축복은 서로에 대한 대안(代案)이 아니라 번갈아 가면서 순환하는 역사적 필요악 정도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은 본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되기에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24장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당면 화두(話頭)는 이방신에 대한 섬김과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여호수아’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섬겨온 신들은 ‘야훼’ 하나님에 비해서 비교적 덜 엄격하고 요구사항이 적은 신들이었습니다. 그런 신들을 섬기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이들의 형상을 세울 수도 있고, 이들에게 옷을 입히거나 화장품을 발라주는 등 치장을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집을 지어주거나, 희생 제물을 바쳐 사육(飼育)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들고 다닐 수도 있으며, 때로 땅에 파묻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창 35:4; 31:34). 이처럼 이스라엘은 자신의 방식대로,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헌신의 서약에서 간파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지켜주어야 하며,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을 지키고 섬길 수 있다는 정도의 태도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백성들에게 바라는 바는 이처럼 가벼운 헌신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내면의 동기가 아니었을까요? 그들의 서약이 보답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성찰에서 우러나온 것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백성들의 헌신을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야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두 가지 속성, 즉 왜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지를 설명해주는 그 두 가지 속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야훼’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이 거룩하고 초월적이며 신비한 존재라는 인식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여호수아’가 도입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표현은 오히려 당시 ‘가나안’ 의 보편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에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구원의 능력과 동일 시 되고 있었습니다만, 동시에 어떤 파괴적인 능력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에 대해서 전혀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오히려 모욕감을 느끼는 그러한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룩하시므로 예배자로 하여금 거룩하도록 요구하고 계시며(출 22:31; 레 19:2), 예배자 역시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거룩하시므로 그분의 요구에 결코 미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결코 ‘야훼’ 같은 신을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야훼’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두 번째 표현 역시 다신론적 주변 문화에서도 친숙한 개념입니다. 즉 각 신들은 인간의 사랑과 헌신을 두고 저들끼리 서로 경쟁하며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야훼’ 역시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놓고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시므로 이스라엘 역시 오직 그분만은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그분의 질투는 분노로 바뀌는데, 분노의 대상은 다른 신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야훼’는 자신을 다른 신들과 함께 섬기는 것에 대해서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오직 처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절대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보이셨으며, 이스라엘 역시 같은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출 20:5; 34:14-16). 이렇게 볼 때,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가장 익숙하고 핵심적인 개념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섬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신들에게 한 눈 팔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야훼’에게만 충성과 헌신을 바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심각한 결과를 야기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참고. 출 23:21). 그분의 기대치는 너무나 높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과도하여 이스라엘이 단 한 순간이라도 한 눈을 팔거나 다른 신들과 노닥거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방신들이라면 바람난 이스라엘을 벌하기 보다는 그냥 그들의 사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만, ‘야훼’는 다릅니다. 그분은 바람 난 이스라엘이 돌아올 때까지 징계와 훈련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어서 배신의 결과가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20절). 이스라엘이 받게 되는 유혹은 단순히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전혀 낯설고, 이상한 신들입니다. 즉 이스라엘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신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런 신들과 짝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의 출생의 신분과 정체성을 망각하고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유혹은 어쩔 수 없이 선택 가능한 하나의 현실로서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를 선택한다면, ‘야훼’의 선택 역시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규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경고하고 예언한 메시지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먼저 설정하셨고, 그 관계를 무엇보다 우선하여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줄 것입니다.
6. 재확인(21절)
‘야훼’ 하나님의 속성과 요구 사항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여전합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21절)
오히려 더 엄숙하고, 심각하며, 적극적인 모습니다. 이 장면 어디에도 억지나 강요나 맹목에 의한 헌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경고로 ‘야훼’가 어떤 신인지에 관해서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헌신은 정확한 지식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자발적인 헌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언약 체결(22-24절)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이 체결될 것입니다:
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22-24절)
그런데 이 장면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데가 많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결혼식을 보는 듯합니다. 결혼의 주례자는 ‘여호수아’이며, 결혼 당사자는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의 증인은 하객이나 또는 다른 신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입니다(22절). 다른 의식 같았으면 고대 근동 지역의 전통에서 볼 때 증인은 신들이 맡는 것이 상례일 것입니다. 그러나 서약에 참여하고 있는 당사자가 ‘야훼’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이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대상이 다른 신들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서약을 맺고 있느니만치 스스로 자신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증인의 역할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섬겨왔던 이방 신들을 거부하고 야훼 하나님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맺고 있는 자리에서 이들 신들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증거나 증언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헌신을 받아낸 ‘여호수아’는 이제 다시 한 번 ‘야훼’의 요구 사항을 들려줍니다(23절; 참고. 14절). 요구 사항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 땅의 신들은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 조상들의 신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신들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세대라고 해서 이전 조상들이 저질렀던 범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방신들을 치워버리는 의식(23절)은 그 자체로서 결코 충분치는 않습니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헌신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단순히 예배에서 손을 뻗거나 들어 올려 회개나 헌신의 표현을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기 자신의 헌신의 각오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야훼’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은 ‘야훼’를 자신들의 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24절; 참고. 17절). 그리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참고. 18절하).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여 듣겠다는 약속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의 약속은 이전에 한 적이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본문의 핵심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은 단순히 신앙 고백이나 종교적 헌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대화, 즉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8. 증거의 돌판(25-27절)
이러한 이스라엘의 서약을 바탕으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과 ‘야훼’ 하나님 사이의 계약 체결을 마무리합니다.
25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26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25-27절)
이 단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언약”(tyriB, 베리트)의 기원이나 의미, 그리고 본문에 들어오게 된 경위 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제정했다는 “율례와 법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시내’ 산에서 제정한 “모세의 법”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단락의 핵심은 그 내용에 있다기보다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섬김에 있다 하겠습니다.
언약의 장소는 다시 ‘세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문을 ‘세겜’과 관련된 오래된 전승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본문의 첫 번째 단락에서 도입한 바 있는 ‘세겜’의 모티브를 이곳에서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26절과 25절은 일종의 시적 유사 반복과 같으며, 26절에서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신명기>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전 전승에 대한 추가 내지는 재해석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호수아>에서 다루고 있는 규례나 심판에 관한 용어는 <하나님의 율법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참고. 1:7-8; 8:31-34; 22:5; 23:6).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운 “증거의 돌판”(26절하)은 고대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한 때 “돌판”에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참고. 창 28:18-22; 31:13, 44-52; 35:14, 20; 출 24:4; 수 4; 삼하 18:18). 이스라엘의 법적 유산은 “돌판”을 세우는 등의 행위를 정죄하고 있습니다만(출 23:24; 34:13; 레 26:1; 신 7:5; 12:3; 16:22), 이스라엘의 그러한 행위를 막지는 못했습니다(호 3:4; 10:1-2; 믹 5:13; 겔 26:11; 왕상 14:23; 왕하 3:2; 10:26;27; 17:10; 18:4; 23:14).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돌판”은 다소 애매모호한 채로 남아있습니다. 혹자들에게 이 “돌판”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동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행위와 그분에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을 기념하는 오래된 전통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야훼’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가나안’의 전통을 답습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기자들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와 같이 “돌판”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돌판”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용어는 “상수리나무”입니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이 나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창 12:6; 35:4; 신 11:30; 삿 9:6, 37; 삿 6:11, 19; 창 13;8; 14:13; 18:1; 삿 4:11; 삼상 10:3). 다소 다른 형태의 거룩한 나무도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창 21:33; 삼상 22:6; 31:13). 성소 내에서 이 나무를 사용하는 것 또한 정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신 12:2; 왕하 16:4; 사 1:29; 57:5; 호 4:13; 렘 2:27; 3:6; 합 2:19; 겔 6:13; 20:38). 여기서,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시기는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로서, 그 때만 하더라도 “돌판”과 “상수리나무”는 종교적으로 무슨 특별한 의미나 가지 부여를 하지 않은 채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후대 <성경> 화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하겠습니다.
성소를 “야훼의 성소”로 지칭함으로써(26절하), 그 성소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세겜’ 근처에 있는 이스라엘의 성소를 ‘세겜’ 도시 내에 있던 ‘바알-베릿트’ 성소(삿 9)로 불리는 ‘세겜’ 족속의 성소와 구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약을 체결한 장소는 이스라엘의 성소였습니다. 의식의 구체적인 장면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모르긴 해도 희생 제물이나 식사 등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참고. 출 24). 그러나 적어도 이 장면에서 이러한 것들은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이 의식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의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의식이 요구하고 있는 기본 전제들인 것입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치른 행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27절). 언약 체결에 있어 두 증인이 동원되고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당사자 자신이며(22절),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고 제 삼자인 “돌판”이 될 것입니다(참고. 창 31:51-52). 이와 관련해서 ‘여호수아’는 그 “돌판”을 의인화하면서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는 바는, “돌판” 위에 써놓은 일련의 규례들일 것입니다(참고. 신 27; 수 8:30-35).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은 2-13절 사이에서 읽을 수 있는 역사적 회고가 전부입니다. 따라서 이 “돌판” 위에 어떤 규례들을 써놓았는가 하는 문제는 다분히 형식적인 문제로서 ‘여호수아’의 주된 관심사는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 즉 하나님이 다른 신을 섬길 것인가 아닌가 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9. 해산(28절)
모든 합의 절차가 끝났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기업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28절)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야훼’만을 섬기며 살기로 서원한 백성을 말합니다.
교훈과 적용
결혼 생활과 관련해서 영어권에서 묻는 질문은,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해왔습니까?”(How long have you been married)인데 반해, 우리네 표현은 “언제 결혼했습니까?”입니다. 결혼에 관한 동서양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구태여 그 차이를 강조해보자면, 서양식 사고 속에는 결혼이란 시작, 출발,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그 무엇 정도로 이해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 같고, 우리네 인식은 결혼을 하나의 종착역 내지는 완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다 이루었다”는 인식입니다. 과연 동서양에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만일 결혼을 하나의 완성 또는 다 이룬 그 무엇 정도로 이해한다면, 이 결혼은 처음부터 문제점을 안고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루어 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나의 출발로 본다면 기본자세가 달라집니다. 더 나은 결혼생활, 더 풍성한 결혼생활을 위해 마치 산 정상을 향해 등산을 하듯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관심을 쏟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갈 것인가? 어떠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까? 우리가 알다시피 결혼은 “언약”입니다. 상대를(상대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입니다. 만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파경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은 바꾸어 말하자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 순간만 아니라 일평생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선 사랑할 자를 선택하는 행위이고, 그러한 선택은 단순한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야 하며, 그리고 어느 한 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너무 무미건조한 주례사처럼 들립니다. 사실 우리는 늘 신혼부부처럼 감정 충만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늘 보면 즐겁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아마 얼마 못가 기진맥진 탈진해 버릴 것입니다. 사실 사랑에는 의지적인 선택, 즉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상대를 더 알아가고, 더 잘 이해하며, 그래서 보다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밝히자면 사랑은 언약의 행위입니다. <여호수아>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두 장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두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퇴를 앞둔 지도자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행하는 “고별 설교”입니다(23장). 이는 마치 ‘모세’가 ‘요단’ 동편에서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겜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장면은 비록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결혼식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결혼식의 주례자 역시 ‘여호수아’입니다. 두 장면 모두 공통되는 주제 언약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이제 “세겜의 언약”이 그 언약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본문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먼저 떠올려야 할 질문이 하나 있는 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순서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예컨대, 자신이 하는 일을 놓고 단순한 무료 봉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인즉, 이럴 경우 그가 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자칫 오만과 교만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구속의 역사”(救贖史)입니다(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바라보는 인류 전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순전히 그분의 “자유 의지”(自由 意志)로 인류 가운데서 한 백성을 선택하여 이스라엘로 삼았습니다. 선택의 기준이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신비한 자유 의지에 속한 것이지, 다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선택의 조건이 이스라엘이 가진 그 어떤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 강해서도 아니고, 더 지혜롭거나 거룩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자유입니다. 자유야말로 구원이나 구속의 핵심 주제입니다. 자유는 절대적인 해방이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구속, 즉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구속을 위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희망은 좌절을 맞이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자유를 구속이 아니라 방종을 위해서 사용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역사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자유의 감격의 주인주체가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매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나 지도자를 보내 그분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탁월한 지도자의 영도 아래 있을 때에만 나름대로의 정체성에 충실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세겜’ 교회에 모였고 ‘여호수아’는 강단에 올라가 이제 막 설교를 하려 합니다. 이 장면을 다른 모습으로 비유하자면 결혼식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주례자는 여호수아, 신부는 이스라엘, 그리고 놀랍게도 신랑은 하나님입니다. 이 결혼이 여느 결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신랑과 신부가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신혼부부가 아니라, 오래 전에 결혼을 하여 이제는 권태기에 들어선 부부라는 점입니다. 권태감을 떨쳐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에서 치르는 일종의 金婚式이나 銀婚式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 방송국에서 매주 토요일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내용인 즉은 수십 년간 결혼 생활을 한 노부부를 한 쌍씩 선택해서 결혼식을 재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온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부부가 다시 결혼식을 치르면서 행복해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 이 장면도 이스라엘과 하나님이라는 노부부의 금혼식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주례사를 준다면 어떤 내용이 적절할까? 결혼의 의미? 신부란 누구인가? 신랑은 누구인가? 아니면 이 모두? 만일 이 부부가 그동안 금실 좋게 살아왔다면 이런 주제들은 아무 필요도 쓸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부는 이들 주제들에 대해서 다시 들어야 할 정도로 그동안의 관계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아니 불화의 연속이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는 신랑이 아니라 신부입니다. 당연히 주례사는 신부를 향해야 할 것입니다. 주례사의 핵심은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라, “네 신랑이 누구인지 알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랑을 잘 알 수 있을까? 너무나 단순, 명료합니다. 신랑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한 사람의 이름은 그의 인격과 특성과 체질 그리고 그의 운명마저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랑의 이름은 ‘야훼’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이름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음인지 두 이름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두 이름은 “거룩”과 “질투”입니다(19절). 이 두 이름은 ‘야훼’의 속성이자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별명으로서, <레위기>를 비롯하여 <구약> 전체에서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 “거룩”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입니다. “구별됨”입니다. “초월”입니다. 그리고 “질투”는 순간적인 감정의 발작이나 흥분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본능적인 혐오감을 말합니다. 마치 우리의 위(謂)가 불순물을 받아들였을 때 보이는 반응, 즉 구토와 같은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불순물을 다 쏟아낼 때까지 위가 보이는 그런 반응입니다.
‘야훼’는 그 이름에 걸 맞는 행동을 보이십니다. 주례자가 나열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들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과 구별”; “(땅과 후손의) 약속”; “(비천한 처녀의) 구속”; “(광야의) 인도와 보호”; “(전쟁에서의) 승리”; “(저주를) 축복으로”; “(그 땅의) 선물.” 주례자는 지금 단순히 신부의 과거사를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훼’라는 신랑이자 한 인격체가 그 이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행동의 목록을 제시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이름에 충실하기를 원하시는 그의 질투심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데! 내 신부가 누군데! ‘야훼’는 이스라엘을 자기 이름 때문에 사랑하고, 보호하며, 잘못에서 회복해주었다고 주례자는 회고하고 있습니다. ‘야훼’는 순전히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이스라엘을 선택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선택을 고집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신부가 기억해 내야 할 이름이 바로 이 이름인 것입니다.
주례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부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객(賀客)으로 참여하고 있는 우리도 함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야훼’가 그 이름 때문에 행한 이 모든 행동에 대해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에는(적어도 그것이 인격적인 관계라면) 반드시 대가가 따라야 합니다. 대가없는 사랑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감각하고 기계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대가는 과연 무엇입니까? 부모가 자식을 양육할 때 바라는 대가는 무엇입니까? 부모가 쓴 모든 양육비를 되돌려 받는 것일까? 노후에 자식의 보살핌을 받는 것일까? 이런 수준의 대가를 바라는 부모라면 부모로서는 아직 수준 미달입니다. 필자는 내 두 아들에 대해서 이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기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큰 인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나로부터 독립해서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진정으로 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필자는 그들이 성인이 되고난 뒤에도 내 품 속에서, 내 영향력 아래 메여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혹이나 효자라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창의적인 인간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야훼’의 기대치도 이런 수준이 아닐까? 그분이 우리에게 준 자유를 가지고 ‘야훼’처럼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거룩함과 질투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명예와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 옛 시인은 이런 삶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파에 고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바울’ 사도 역시 같은 수준의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갈 4: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어린아이나 종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늘 부모나 주인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사건건 물어보고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하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흔히 신실하고 경건하다고 인정하는 신앙생활도 이런 유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대답을 듣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자세 말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니 존경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신앙의 수준은 종이나 어린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신비주의 정도라고나 할까요. 성숙한 결혼 생활에서도 이런 일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각자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판단을 통해서 가정을 잘 꾸려가는 것이지, 상대에게 일일이 보고하거나 물어보지 않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이 신부가 보고 따라야 할 모델은 없습니까? 주례자 ‘여호수아’입니다. 주례는 결혼을 해본 사람만이 실감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터득한 자라면 더욱 안성맞춤일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 ‘여호수아’는 주례자로 아주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그 자신도 그런 자격을 갖추었노라고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은 교만도 아니고 인기에 영합하는 선동도 아닙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주례사를 마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를 오직 야훼 한 분만을 사랑하는 데 쓰겠습니다. 비록 온 세상이 그를 버리고 떠날지라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흥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스라엘이 가장 이스라엘답게 살았던 때는 언제였을까? ‘여호수아’ 당대였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후는 추락과 쇠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은 결론에서 ‘여호수아’를 더 이상 ‘모세’의 부관으로서가 아니라(1:1), “야훼의 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24:29). 즉 그는 이제 ‘모세’와 대등한 반열에 올라서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선택하며, 무엇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순간의 선택과 지속적인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여호수아> 23장과 24장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 시적 유사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에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유사성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발견해 봅시다.
2. 본문은 <여호수아> 전체의 핵심 주제를 요약하고 있는 곳으로서 책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주제는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책 전체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3.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27
제 27과: 끝까지 충성하라
끝까지 충성하라
(24:29-33)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의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24:31).
아주 오래 전에 가수 ‘팻분’이 불렀던 영화 <Exodus>의 주제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This land is mine. God gave this land to me. This brave and this golden land to me” 노래는 아주 감미로우면서도 장엄하지만, 가사는 “시온주의”(Zionism)를 표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는 확신입니다. 그것도 그냥 얻은 것이 아니고, 일찍이 그들의 선조들이 그 땅의 원주민들로부터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주장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장 때문에 지금도 그 땅에 피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성경>의 약속이 아니라면 이 땅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길만한 아무런 법적이고도 역사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그 땅에 살던 민족도 아니었고, ‘다윗’ 이후 ‘바벨론’ 유수까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 땅의 주인은 늘 다른 민족들이었습니다. 특히 ‘로마’가 그 땅을 강점한 이후 지난 이천 년 동안 그 땅의 주인은 이스라엘의 형제 ‘이스마엘’의 후손, 즉 ‘아랍’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후 최근까지의 중동 분쟁과 관련하여 비 유대 적이거나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다룬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흔히 미국에서 진보적 반체제 작가로 알려진 ‘노암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이 그 중 한 권이 될 것입니다.
이런 땅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무슨 조건은 없었습니까? 그리고 과연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까? 화자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세겜’에 쌓은 세 무덤에 관한 이야기로써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이야기는 이 책의 신학적 결론이자 절정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숙명의 삼각형”을 상기할 준비가 되어있어야겠습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29절에서 “이 일 후에”라는 지극히 통상적인 시간과 관련한 부사절로 시작하고 있어 이 구절부터 새로운 단락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절(32-33절)에서는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 본문의 단락은 31절에서 끝나는 것처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2절은 대조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어 전후의 내용을 상호 대조 비교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우리 말 <개역 성경>에는 이 점이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만, 두 내용을 잇는 접속사는 “이와 동시에”(at the same time)라는 의미를 가진 접속사입니다: 참고도서 1, 280쪽.
따라서 29-33절 전체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 단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을 언급함으로써(삿 1:1), <여호수아>의 마지막 단락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또한 29-33절의 본문을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간주하게 하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식과 배경. 본문의 문학적 양식은 일종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 정도로 간주할 수 있겠는데, ‘여호수아’를 비롯한 다른 세 사람의 영웅, ‘야곱’과 ‘요셉’과 ‘엘르아살’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진술(29절)은 형식상 <구약> 여러 곳에서 자주 도입하는 전형적 표현이기도 합니다(창 23:2, 19; 25:7-8; 35:28-29; 신 34:5). 참고: 창 35:19; 48:7; 49:33-50:13).
다만 29절의 진술에서 특기할 만 한 점은, ‘여호수아’의 죽음을 그의 생애보다 앞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개의 경우 수명을 먼저 언급한 연후에 죽음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5).
31절은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일종의 해석 내지는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어서 32절에서 <요셉 이야기>의 일부(창 33:18-19; 50:22-26)를 취한 다음,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 즉 ‘엘르아살’의 죽음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33절). 마지막 두 절은 구문론적으로 상호 도치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두 구절을 형식적으로 상호 연장선상에 두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본문은 소위 <세겜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건국의 영웅들이 묻혀 있는 ‘에브라임’ 산지 ‘세겜’에서 예를 표하고 기념 의식을 행하던 오래된 전승 말입니다. 그리고 ‘세겜’의 무덤이 하나가 아니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차례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겜’의 예배 전승이 여러 세대를 두고 축적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의 영웅들이 ‘세겜’에 묻혔다는 사실은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다시 한 번 <여호수아>의 핵심 주제어 셋을 떠올리게 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본문의 신학적 기능은 <여호수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여호수아: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 백성들은 이제 무사히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위험에 대해서 사전 경고를 받았으며, 이를 피하기 위하여 언약에 참여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났으니 ‘여호수아’는 이제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퇴 식장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영예는 어떤 것일까요?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29절)
그것은 새로운 호칭, 즉 “야훼의 종”입니다. 그동안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습니다(1:1). 그가 죽어 받게 된 이 명예의 훈장은 ‘모세’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호칭이었습니다(참고. 1:1, 2, 7, 13, 15; 8:31, 33; 9:24; 11:12, 15; 12:6; 13:8; 14:7; 18:7; 22:2, 4, 5). 그가 물려받은 새로운 호칭은 그의 생전에 받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높여서 자칭 그렇게 불렀던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가 살아생전에 딱 한 번 스스로를 “주의 종”으로 부른 적은 있습니다만,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 중에 스스로를 낮추어 그렇게 불렀을 뿐입니다(5:4).
그가 죽은 후 그의 동료 백성들이 선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야훼의 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종이라고 하지만 그 신분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서나, 남을 지배하거나 남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붙일 수 있는 호칭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그의 사후 존경과 예우의 표시로 그렇게 불러주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에게 ‘여호수아’에게 최상의 예우와 함께 장사지내주었습니다. 장지(葬地)는 그가 일찍이 하나님에게 요청하여 얻은 그의 소유 땅이었습니다(참고. 19:5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30절)
이곳에서 ‘여호수아’의 매장지로 언급하고 있는 ‘딤낫 세라’는 앞에서도 등장한 바 있지만(19:50), ‘가아스’ 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삿 2:9). 이곳은 ‘다윗’의 30명의 영웅 중의 한 사람 ‘힛대’의 출생지로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만(삼하 23:30; 대상 11:32), 더 이상의 정보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묘(墓) 비문(墓碑文)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은 없지만, 지도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비문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31절)
즉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야훼의 종”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야훼의 종”이 되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여호수아> 전체를 통해서 마치 합창처럼 반복해서 들려오는 신학적 주제가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참고. 22:5; 23:7, 16; 24:14, 15, 16, 18, 19, 20, 21, 22, 24). 그리고 역설적이긴 하지만, 바로 이점에서 ‘여호수아’가 ‘모세’를 능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모세’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매진해 왔지만, 그가 본 것은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과 반항이었습니다(참고. 신 31:27). 결국 그 자신도 약속의 땅 밖에서 생애를 마감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순종은 지속적이지 못할 것임을 이 구절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는 동안까지 만입니다. 그가 죽고 그를 아는 사람들도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반역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가 이를 보여줄 것입니다(삿 2:6-10).
2. 세겜의 세 무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백성들은 순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요셉’과 ‘야곱’과 제사장 ‘엘르아살’의 유해를 역사적인 성소 ‘세겜’ 땅에 장사지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들의 순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행동입니다. 에 묻고 있는 행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32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32-33절)
이스라엘은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으며(창 50:25), 그가 ‘여호수아’와 정확하게 같은 나이에 죽으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남긴 그 유언을 지금 수행하고 있습니다. 매장지는 ‘야곱’이 제단을 세웠던 그 장소이며(창 33:19), 추측컨대 이 장소는 또한 ‘아브라함’이 제단을 세웠던 곳이기도 합니다(창 12:7).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세겜’으로서 ‘여호수아’가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했던 거룩한 곳입니다(수 24:1-28). 그러나 이곳에서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 땅은 값을 치르고 산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세겜’을 자신의 땅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그들이 이 땅을 전쟁을 통해서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값을 치르고 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에서 ‘비느하스’의 역할이 적지 않음에도(참고. 22장), 이곳에서는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14:1; 17:4; 19:51) ‘비느하스’의 아버지 ‘엘르아살’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장지의 이름과 관련해서 ‘비느하스’의 소유라고 밝히고 있기는 합니다. 매장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2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실로’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여호수아: 야훼의 종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 모두 “그 땅”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약속은 듣고 받았으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이들이 그 땅에서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기껏해야 제단을 세우는데 필요한 한 평도 채 안 되는 땅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땅의 주민들로부터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들 족장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주변만 맴돌다가 사라져간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도자 ‘모세’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역시 그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아쉬움 가운데서 생애를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그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만 위대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여호수아입니다! 화자는 어떤 점에서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의 새로운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훼의 종”입니다. 지금까지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1:1)이었습니다만, 이제부터 그는 ‘모세’와 같은 서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에게 새로운 호칭을 선사했습니까? 그리고 언제 받은 것입니까? 이 새로운 호칭은 그가 살아있을 때 받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높여서 자칭 그렇게 불렀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죽은 후 동료 백성들이 선사한 것입니다. 원래 ‘종’이란 말 그대로 아주 비천한 존재입니다(사도 ‘바울’도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부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천한 신분도 그가 모시는 주인이 누군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얼마 전 대통령의 운전사가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사직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그 운전사가 여느 다른 운전사와는 그 격이 엄청나게 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정승의 개는 정승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야훼의 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입니다. 종이라고 하지만 그 신분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스스로 갖다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을 지배하거나 군림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 동기에 대해서 스스로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표시로 “야훼의 종”으로 불러준 것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스라엘은 그의 지도하에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었고, 지금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장본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과업을 이룬 사람입니다. ‘모세’도 이룰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무대에서 명예스럽게 사라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떠나는 그에게 이 백성이 선물한 명예의 훈장이 ‘야훼의 종’입니다. 그동안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여호수아’가 ‘모세’와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을까? 어떻게 ‘모세’가 누리던 그 영광과 명예를 그도 누질 수 있게 되었을까? 그가 처음부터 “야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세의 종”으로 출발했습니다(1:1). 그러나 바로 여기에 그가 누린 영광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가 섬기던 상관이, 그에게 끊임없이 인생의 조언과 충고를 해주던 선생이 다름 아닌 “야훼의 종”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성공의 비결은 “야훼의 종” ‘모세’의 “종”으로 열심히 충성스럽게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진면목을 알게 해주는 한 사건이 바로 “아말렉 전투”입니다(출 17:8-16): “모세가 여호수아에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아말렉과 싸우라”(출 17:9).
위대한 지도자를 만드는 하나님의 방식은 다소 독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가리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25:21). 하찮은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늘 크고 근사한 것을 쫒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소위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좀 더 큰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늘 스쳐지나가는 시시콜콜한 작은 일들은 무시해 버리며 살아갑니다. 아프리카의 불우한 어린 아이들은 사랑하지만 옆집에 사는 말썽꾸러기 아이는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기 위해서는 “침을 흙에 섞어 눈에 바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성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무려 여섯 번이나 아무 말 없이 그 성 주위를 도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나만’은 문둥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여섯 번이나 물속에 잠겼다 일어나는 그 귀찮은 사역을 먼저 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지만 평범하기 때문에 더욱 공들여 행하기 힘든 순종의 훈련을 거칠 때에만 비로소 큰일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힘든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섬기는 주인의 명예와 권위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김홍신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을 일컬어 위대한 사기꾼이라며 그의 입을 공업용 재봉틀로 기워버려야 한다고 발언하자, 당시 국민회의 의원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김홍신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하자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왜 이처럼 이들이 분노했을까? 그들에게 김 대통령은 단순히 자신들의 대통령이자 상관이 아니라, 정신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모독하는 데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점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룩한 예배 장소에서 온갖 비리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 주님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모세’를 향한 ‘여호수아’의 열심도 이 정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아무런 공증도 받지 않고 멋대로 예언을 말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민 11:24-30). 당장 그들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모세’에게 간청할 정도로 ‘모세’를 위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대단했습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에 대한 질투심으로 온 몸을 떨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야훼의 종”의 타이틀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단순히 모세의 반열에 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보다 더 탁월한 “야훼의 종”이 되었습니다(‘모세’보다 10년을 적게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왜냐하면 ‘모세’조차 할 수 없었던 사역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들이 “야훼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로 인하여 “야훼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이 백성은 오랜 노예 생활로 노예근성이 몸에 베여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에도 늘 과거를 돌아보며 불신과 원망으로 희망과 약속을 거부해 왔습니다. 법과 권위를 우습게 알고, 자신의 권리만 주장할 줄 알았지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고, 단합하고 일치하기보다는 마치 모래알처럼 사분오열되어있습니다. 도저히 하나의 국가로 함께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야훼의 종” ‘모세’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달랐습니다. 노예 같은 이스라엘을 설득시켜 한 마음, 한 믿음의 공동체로 그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백성에게 승리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해주었고, 그가 사는 날 동안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묘비명은 단순히 대리석 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의 삶이 곧 그의 묘비명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살아있는 ‘로고스’였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첫째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시켜주었고, 두 번째는 그들로 하여금 탁월한 “야훼의 종”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위대한 사역을 이룩해 놓은 것입니다. 참 지도자는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세워주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한 번 <여호수아>의 세 가지 핵심 단어를 상기해 볼 일입니다.
2. 세겜의 세 무덤
‘여호수아’의 탁월한 업적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것입니다. 그가 끼친 영향력은 단순히 그의 당대나 그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의 조상 ‘요셉’이나 ‘야곱’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요셉’은 ‘여호수아’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의 땅에 편안히 묻힐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황금기는 ‘다윗’이나 ‘솔로몬’ 시절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아는 장로들이 생존하던 시기입니다.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도록 해준 비결이 과연 어디에 있었습니까? 순종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에 충실하게 따른 결과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지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케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7-8). 책의 벽두에서 시작한 순종의 모티브는 마치 수미상관처럼 책의 마지막 두 절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인 한 행동을 통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두 절은 책의 결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적 주제를 절정으로 이끌어 올리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순종의 행동은 다름 아닌 족장들의 유해를 역사적인 성소 ‘세겜’에 묻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유언”(창 50:25)을 잊지 않고, 그의 유해를 이곳까지 옮겨와 장사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일찍이 한 제단을 세웠던 곳이며(창 33:19),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전에 제단을 세웠던 곳이기도 합니다(창 12:7). 그리고 최근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언약의 예배를 드리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수 24:1-28). 본문에 언급은 없지만 ‘여호수아’의 유해도 분명 이곳에 묻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여호수아’가 이 땅에 묻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나,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이곳에 묻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매장지가 이스라엘이 정복으로 뺏은 땅이 아니라, ‘야곱’ 즉 이스라엘이 값을 지불하고 산 땅이라고 강조하고 있음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땅은 우리 땅이다”(This land is mine). ‘세겜’에 있는 세 무덤은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여호수아’에게 자신의 신실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영원한 여호수아
<신약>에 와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히게도 그의 이름 역시 ‘여호수아’, 즉 예수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가져온 장본인이라면, 두 번째 ‘여호수아’는 <창세기>를 다시 쓰신 분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속 즉 재창조를 영원히 이루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공의 비결 역시 순종함에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8-10).
교훈과 적용
1. 본문이 <여호수아>의 대단원의 막이 될 수 있는 문학적이고도 신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2. ‘여호수아’에게 붙여준 새로운 타이틀, “야훼의 종”과 관련해서 묵상해 봅시다. 그가 “모세의 종”에서 “야훼의 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3. 본문을 통해서 이 책의 핵심 주제어 세 가지(땅과 지도자와 율법)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