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7과
제 27과: 끝까지 충성하라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24:29-33약 18분 분량
끝까지 충성하라
(24:29-33)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의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24:31).
아주 오래 전에 가수 ‘팻분’이 불렀던 영화 <Exodus>의 주제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This land is mine. God gave this land to me. This brave and this golden land to me...” 노래는 아주 감미로우면서도 장엄하지만, 가사는 “시온주의”(Zionism)를 표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는 확신입니다. 그것도 그냥 얻은 것이 아니고, 일찍이 그들의 선조들이 그 땅의 원주민들로부터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주장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장 때문에 지금도 그 땅에 피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성경>의 약속이 아니라면 이 땅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길만한 아무런 법적이고도 역사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그 땅에 살던 민족도 아니었고, ‘다윗’ 이후 ‘바벨론’ 유수까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 땅의 주인은 늘 다른 민족들이었습니다. 특히 ‘로마’가 그 땅을 강점한 이후 지난 이천 년 동안 그 땅의 주인은 이스라엘의 형제 ‘이스마엘’의 후손, 즉 ‘아랍’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후 최근까지의 중동 분쟁과 관련하여 비 유대 적이거나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다룬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흔히 미국에서 진보적 반체제 작가로 알려진 ‘노암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이 그 중 한 권이 될 것입니다.
이런 땅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무슨 조건은 없었습니까? 그리고 과연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까? 화자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세겜’에 쌓은 세 무덤에 관한 이야기로써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이야기는 이 책의 신학적 결론이자 절정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숙명의 삼각형”을 상기할 준비가 되어있어야겠습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29절에서 “이 일 후에”라는 지극히 통상적인 시간과 관련한 부사절로 시작하고 있어 이 구절부터 새로운 단락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절(32-33절)에서는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 본문의 단락은 31절에서 끝나는 것처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2절은 대조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어 전후의 내용을 상호 대조 비교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우리 말 <개역 성경>에는 이 점이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만, 두 내용을 잇는 접속사는 “이와 동시에”(at the same time)라는 의미를 가진 접속사입니다: 참고도서 1, 280쪽.
따라서 29-33절 전체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 단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을 언급함으로써(삿 1:1), <여호수아>의 마지막 단락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또한 29-33절의 본문을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간주하게 하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식과 배경. 본문의 문학적 양식은 일종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 정도로 간주할 수 있겠는데, ‘여호수아’를 비롯한 다른 세 사람의 영웅, ‘야곱’과 ‘요셉’과 ‘엘르아살’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진술(29절)은 형식상 <구약> 여러 곳에서 자주 도입하는 전형적 표현이기도 합니다(창 23:2, 19; 25:7-8; 35:28-29; 신 34:5). 참고: 창 35:19; 48:7; 49:33-50:13).
다만 29절의 진술에서 특기할 만 한 점은, ‘여호수아’의 죽음을 그의 생애보다 앞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개의 경우 수명을 먼저 언급한 연후에 죽음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5).
31절은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일종의 해석 내지는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어서 32절에서 <요셉 이야기>의 일부(창 33:18-19; 50:22-26)를 취한 다음,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 즉 ‘엘르아살’의 죽음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33절). 마지막 두 절은 구문론적으로 상호 도치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두 구절을 형식적으로 상호 연장선상에 두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본문은 소위 <세겜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건국의 영웅들이 묻혀 있는 ‘에브라임’ 산지 ‘세겜’에서 예를 표하고 기념 의식을 행하던 오래된 전승 말입니다. 그리고 ‘세겜’의 무덤이 하나가 아니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차례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겜’의 예배 전승이 여러 세대를 두고 축적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의 영웅들이 ‘세겜’에 묻혔다는 사실은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다시 한 번 <여호수아>의 핵심 주제어 셋을 떠올리게 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본문의 신학적 기능은 <여호수아>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여호수아:여호와의 종
‘여호수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 백성들은 이제 무사히 그 땅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위험에 대해서 사전 경고를 받았으며, 이를 피하기 위하여 언약에 참여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났으니 ‘여호수아’는 이제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퇴 식장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영예는 어떤 것일까요?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29절)
그것은 새로운 호칭, 즉 “야훼의 종”입니다. 그동안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습니다(1:1). 그가 죽어 받게 된 이 명예의 훈장은 ‘모세’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호칭이었습니다(참고. 1:1, 2, 7, 13, 15; 8:31, 33; 9:24; 11:12, 15; 12:6; 13:8; 14:7; 18:7; 22:2, 4, 5). 그가 물려받은 새로운 호칭은 그의 생전에 받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높여서 자칭 그렇게 불렀던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가 살아생전에 딱 한 번 스스로를 “주의 종”으로 부른 적은 있습니다만,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 중에 스스로를 낮추어 그렇게 불렀을 뿐입니다(5:4).
그가 죽은 후 그의 동료 백성들이 선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야훼의 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종이라고 하지만 그 신분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서나, 남을 지배하거나 남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붙일 수 있는 호칭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그의 사후 존경과 예우의 표시로 그렇게 불러주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에게 ‘여호수아’에게 최상의 예우와 함께 장사지내주었습니다. 장지(葬地)는 그가 일찍이 하나님에게 요청하여 얻은 그의 소유 땅이었습니다(참고. 19:5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30절)
이곳에서 ‘여호수아’의 매장지로 언급하고 있는 ‘딤낫 세라’는 앞에서도 등장한 바 있지만(19:50), ‘가아스’ 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삿 2:9). 이곳은 ‘다윗’의 30명의 영웅 중의 한 사람 ‘힛대’의 출생지로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만(삼하 23:30; 대상 11:32), 더 이상의 정보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묘(墓) 비문(墓碑文)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은 없지만, 지도자로서의 그의 업적은 비문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31절)
즉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야훼의 종”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야훼의 종”이 되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여호수아> 전체를 통해서 마치 합창처럼 반복해서 들려오는 신학적 주제가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참고. 22:5; 23:7, 16; 24:14, 15, 16, 18, 19, 20, 21, 22, 24). 그리고 역설적이긴 하지만, 바로 이점에서 ‘여호수아’가 ‘모세’를 능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모세’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매진해 왔지만, 그가 본 것은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과 반항이었습니다(참고. 신 31:27). 결국 그 자신도 약속의 땅 밖에서 생애를 마감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순종은 지속적이지 못할 것임을 이 구절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는 동안까지 만입니다. 그가 죽고 그를 아는 사람들도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반역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가 이를 보여줄 것입니다(삿 2:6-10).
2. 세겜의 세 무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백성들은 순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요셉’과 ‘야곱’과 제사장 ‘엘르아살’의 유해를 역사적인 성소 ‘세겜’ 땅에 장사지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들의 순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행동입니다. 에 묻고 있는 행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32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32-33절)
이스라엘은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으며(창 50:25), 그가 ‘여호수아’와 정확하게 같은 나이에 죽으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남긴 그 유언을 지금 수행하고 있습니다. 매장지는 ‘야곱’이 제단을 세웠던 그 장소이며(창 33:19), 추측컨대 이 장소는 또한 ‘아브라함’이 제단을 세웠던 곳이기도 합니다(창 12:7).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세겜’으로서 ‘여호수아’가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했던 거룩한 곳입니다(수 24:1-28). 그러나 이곳에서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 땅은 값을 치르고 산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세겜’을 자신의 땅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그들이 이 땅을 전쟁을 통해서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값을 치르고 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에서 ‘비느하스’의 역할이 적지 않음에도(참고. 22장), 이곳에서는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14:1; 17:4; 19:51) ‘비느하스’의 아버지 ‘엘르아살’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장지의 이름과 관련해서 ‘비느하스’의 소유라고 밝히고 있기는 합니다. 매장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2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실로’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여호수아: 야훼의 종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 모두 “그 땅”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약속은 듣고 받았으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이들이 그 땅에서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기껏해야 제단을 세우는데 필요한 한 평도 채 안 되는 땅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땅의 주민들로부터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들 족장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주변만 맴돌다가 사라져간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도자 ‘모세’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역시 그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아쉬움 가운데서 생애를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그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만 위대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여호수아입니다! 화자는 어떤 점에서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의 새로운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훼의 종”입니다. 지금까지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1:1)이었습니다만, 이제부터 그는 ‘모세’와 같은 서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에게 새로운 호칭을 선사했습니까? 그리고 언제 받은 것입니까? 이 새로운 호칭은 그가 살아있을 때 받은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높여서 자칭 그렇게 불렀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죽은 후 동료 백성들이 선사한 것입니다. 원래 ‘종’이란 말 그대로 아주 비천한 존재입니다(사도 ‘바울’도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부르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천한 신분도 그가 모시는 주인이 누군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얼마 전 대통령의 운전사가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사직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그 운전사가 여느 다른 운전사와는 그 격이 엄청나게 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정승의 개는 정승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야훼의 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입니다. 종이라고 하지만 그 신분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스스로 갖다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을 지배하거나 군림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그 동기에 대해서 스스로 잘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표시로 “야훼의 종”으로 불러준 것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스라엘은 그의 지도하에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었고, 지금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장본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과업을 이룬 사람입니다. ‘모세’도 이룰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무대에서 명예스럽게 사라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떠나는 그에게 이 백성이 선물한 명예의 훈장이 ‘야훼의 종’입니다. 그동안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여호수아’가 ‘모세’와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을까? 어떻게 ‘모세’가 누리던 그 영광과 명예를 그도 누질 수 있게 되었을까? 그가 처음부터 “야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세의 종”으로 출발했습니다(1:1). 그러나 바로 여기에 그가 누린 영광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가 섬기던 상관이, 그에게 끊임없이 인생의 조언과 충고를 해주던 선생이 다름 아닌 “야훼의 종”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성공의 비결은 “야훼의 종” ‘모세’의 “종”으로 열심히 충성스럽게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진면목을 알게 해주는 한 사건이 바로 “아말렉 전투”입니다(출 17:8-16): “모세가 여호수아에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아말렉과 싸우라”(출 17:9).
위대한 지도자를 만드는 하나님의 방식은 다소 독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가리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25:21). 하찮은 일에 열과 성의를 다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늘 크고 근사한 것을 쫒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소위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좀 더 큰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늘 스쳐지나가는 시시콜콜한 작은 일들은 무시해 버리며 살아갑니다. 아프리카의 불우한 어린 아이들은 사랑하지만 옆집에 사는 말썽꾸러기 아이는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기 위해서는 “침을 흙에 섞어 눈에 바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여리고’성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무려 여섯 번이나 아무 말 없이 그 성 주위를 도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나만’은 문둥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여섯 번이나 물속에 잠겼다 일어나는 그 귀찮은 사역을 먼저 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지만 평범하기 때문에 더욱 공들여 행하기 힘든 순종의 훈련을 거칠 때에만 비로소 큰일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힘든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섬기는 주인의 명예와 권위에 대한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김홍신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을 일컬어 위대한 사기꾼이라며 그의 입을 공업용 재봉틀로 기워버려야 한다고 발언하자, 당시 국민회의 의원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김홍신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하자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왜 이처럼 이들이 분노했을까? 그들에게 김 대통령은 단순히 자신들의 대통령이자 상관이 아니라, 정신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모독하는 데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점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룩한 예배 장소에서 온갖 비리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 주님은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모세’를 향한 ‘여호수아’의 열심도 이 정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아무런 공증도 받지 않고 멋대로 예언을 말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민 11:24-30). 당장 그들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모세’에게 간청할 정도로 ‘모세’를 위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대단했습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에 대한 질투심으로 온 몸을 떨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야훼의 종”의 타이틀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단순히 모세의 반열에 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보다 더 탁월한 “야훼의 종”이 되었습니다(‘모세’보다 10년을 적게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왜냐하면 ‘모세’조차 할 수 없었던 사역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들이 “야훼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로 인하여 “야훼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이 백성은 오랜 노예 생활로 노예근성이 몸에 베여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에도 늘 과거를 돌아보며 불신과 원망으로 희망과 약속을 거부해 왔습니다. 법과 권위를 우습게 알고, 자신의 권리만 주장할 줄 알았지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고, 단합하고 일치하기보다는 마치 모래알처럼 사분오열되어있습니다. 도저히 하나의 국가로 함께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야훼의 종” ‘모세’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달랐습니다. 노예 같은 이스라엘을 설득시켜 한 마음, 한 믿음의 공동체로 그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백성에게 승리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해주었고, 그가 사는 날 동안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묘비명은 단순히 대리석 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의 삶이 곧 그의 묘비명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살아있는 ‘로고스’였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첫째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시켜주었고, 두 번째는 그들로 하여금 탁월한 “야훼의 종”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위대한 사역을 이룩해 놓은 것입니다. 참 지도자는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세워주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었던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한 번 <여호수아>의 세 가지 핵심 단어를 상기해 볼 일입니다.
2. 세겜의 세 무덤
‘여호수아’의 탁월한 업적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것입니다. 그가 끼친 영향력은 단순히 그의 당대나 그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의 조상 ‘요셉’이나 ‘야곱’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요셉’은 ‘여호수아’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의 땅에 편안히 묻힐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황금기는 ‘다윗’이나 ‘솔로몬’ 시절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아는 장로들이 생존하던 시기입니다.
이 모든 성공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도록 해준 비결이 과연 어디에 있었습니까? 순종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에 충실하게 따른 결과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지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케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7-8). 책의 벽두에서 시작한 순종의 모티브는 마치 수미상관처럼 책의 마지막 두 절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인 한 행동을 통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두 절은 책의 결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적 주제를 절정으로 이끌어 올리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순종의 행동은 다름 아닌 족장들의 유해를 역사적인 성소 ‘세겜’에 묻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유언”(창 50:25)을 잊지 않고, 그의 유해를 이곳까지 옮겨와 장사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일찍이 한 제단을 세웠던 곳이며(창 33:19),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전에 제단을 세웠던 곳이기도 합니다(창 12:7). 그리고 최근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언약의 예배를 드리게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수 24:1-28). 본문에 언급은 없지만 ‘여호수아’의 유해도 분명 이곳에 묻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여호수아’가 이 땅에 묻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나,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이곳에 묻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매장지가 이스라엘이 정복으로 뺏은 땅이 아니라, ‘야곱’ 즉 이스라엘이 값을 지불하고 산 땅이라고 강조하고 있음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땅은 우리 땅이다”(This land is mine). ‘세겜’에 있는 세 무덤은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여호수아’에게 자신의 신실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영원한 여호수아
<신약>에 와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히게도 그의 이름 역시 ‘여호수아’, 즉 예수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가져온 장본인이라면, 두 번째 ‘여호수아’는 <창세기>를 다시 쓰신 분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속 즉 재창조를 영원히 이루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공의 비결 역시 순종함에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8-10).
교훈과 적용
1. 본문이 <여호수아>의 대단원의 막이 될 수 있는 문학적이고도 신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2. ‘여호수아’에게 붙여준 새로운 타이틀, “야훼의 종”과 관련해서 묵상해 봅시다. 그가 “모세의 종”에서 “야훼의 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3. 본문을 통해서 이 책의 핵심 주제어 세 가지(땅과 지도자와 율법)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내 인생의 성공의 비결도 여기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