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8과
언약의 두 얼굴(1): 믿음은 요새를 허물고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6:1-27약 32분 분량
8
언약의 두 얼굴(1):
믿음은 요새를 허물고
(6:1-27)
제 8과: 언약의 두 얼굴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6:20)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여리고’ 정복을 위한 전쟁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유월절” 축제를 벌이는 등 하나님 앞에 한가하게 예배와 제사를 드린 바 있습니다(5장). 전쟁터에 나갈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할례를 받은 것이나, 하나님의 ‘만나’가 중단된 것이 이상한 일이라면, “여리고 성의 함락”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받은 지시 사항 또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서> 6장은 군사 전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5장과 마찬가지로, 제의(祭儀)적인 것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그 전쟁이 무슨 고도의 심리전이 아닌 한은 말입니다. 요점인 즉은 ‘여리고’ 성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을 제대로 수행할 때에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6장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 5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하겠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승리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것뿐입니다. 즉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고 있는 제사나 예배는 보이지 않는 내적 본질에 대한 가시적이고 외적인 표현입니다.
‘팔머 로벗슨’ 박사는 언약과 관련해서 세 가지 특징을 꼽고 있습니다. 첫째, 언약은 “약정”입니다. 이 약정을 통해서 언약 당사자-하나님과 그의 백성-는 상호 구속을 받게 됩니다. 즉 상호 구속(속박)이라는 관계 속으로 두 당사자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피로 맺은 약정(또는 관계)”입니다. 이는 언약이 삶과 죽음이라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면 그에 대한 삶의 축복이 주어지지만, 파기하는 경우에는 계약 위반자는 죽음 외에는 그 구속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모든 언약체결과 관련해서 피가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할례; 쪼개진 시체 사이로 지나는 것; 등).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 9:22)는 선언도 바로 이 점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피로 맺은 약정”입니다. 언약은 계약 당사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도적으로 제정하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그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들어오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5장에서 이스라엘이 할례를 통하여 이 언약을 체결하고, 유월절 축제에 참가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출발하는 장면을 목도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제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행하신 바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동시에 미래의 축복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장과 7장은 언약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장이 언약의 빛이라면, 7장은 그 그림자에 해당됩니다. 6장이 <여호수아서>의 가장 밝은 곳이라면, 7장은 가장 어두운 곳입니다. 바로 이 점이 6-7장과 5장이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즉 언약이라는 주제로 이들 세 장은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언약체결(5장)
(2) 언약의 축복(6장)
(3) 언약의 저주(7장)
따라서 <여리고 이야기>의 독서 관점은 언약의 축복에 있으니만치, 이와 관련해서 핵심 단어나 모티브 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다른 모티브들은 없는지도 살펴볼 일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여리고 성 이야기>는 <요단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야기를 “두려움”의 모티브를 강조함으로써 시작하고 있으며,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5:1).
마지막을 ‘여호수아’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책 전체의 중요한 두 요소가 수미상관처럼 이야기의 범위를 결정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1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27절)
하지만 본문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역시 “반복”과 “모순”입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입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정확한 순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단락 구분도 다소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주제 하에 단락 구분을 해 보자면, 전체를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배경(1절)
2. 언약의 축복: 하나님의 약속(2-5절);
3. 언약의 이행: 믿음의 행위(6-21절)
4. 부록(22-27절).
양식과 배경. 이야기의 반복이 특히 두드러진 곳은 두 번째 단락입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 관해서 포괄적으로 요약을 한 다음, 세 번째 단락에 이르러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계획의 세부 내용을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세 번째 단락을 내용 별로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 번째 에피소드(6-11절): 첫째 날에 성을 한 바퀴 돌다
(2) 두 번째 에피소드(12-14절): 둘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의 여섯 바퀴 순회
(3) 세 번째 에피소드(15-20절상): 일곱째 날의 일곱 번째 순회
(4) 네 번째 에피소드(20하-21절): 성벽이 무너지고 주민은 멸망당함
본문의 또 다른 중요한 형식적 특징은 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명령과 이행”입니다. 이는 <여호수아> 전체를 관통하는 세 개의 중요한 핵심어 중의 하나인 “리더십”과 관련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양식은 시적 유사반복처럼 본문에서 네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함(3-5절)
‘여호수아’가 ‘야훼’의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전함(7절)
이스라엘이 그 명령을 수행함(8-9절)
“외치지 말라”는 ‘야훼’의 명령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전함(10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언제 외칠지를 가르침(16절)
이스라엘이 외침(20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를 파괴할 것을 지시함(17절상)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여리고’의 물품들을 파괴할 것을 지시함(18-19절)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그곳의 물건들을 파괴함(21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라합’을 구할 것을 지시함(17절하)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에게 ‘라합’을 구할 것을 지시함(22절하)
‘라합’이 구원받음(24-25절)
이러한 유사 반복의 형식을 보고 있노라면, 화자는 지금 전쟁에 관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중 예배를 실황중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배의 중요한 형식적 특징 중의 하나가 “선포와 응답(화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어느 누구도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세 등장인물 즉 하나님과 ‘여호수아’ 그리고 화자만이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회중 일부는 행진 중에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기는 하지만, 결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 번 화자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다른 것들은 대부분 화자의 관심 밖입니다. 예컨대, 이야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벽의 파괴”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처리하고 맙니다. <개역 성경>과 영어 <NIV>는 단 세 개의 단어로, ‘히브리’어로는 단 두 개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2) “the wall collapsed”(NIV); (3) “hm;/jh lPoTiw”(화팁폴 하오마).
자료와 편집. 본문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역시 “반복”과 “모순”이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본문 속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승들이 혼재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형식적 특징을 나름대로 설명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와 같은 형식적 특징들과 관련해서 제기할 수 있는 일련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스라엘이 한 편으로 완전한 침묵 가운데 성 주변을 돌면서(10절), 또 한편으로 나팔을 계속해서 불어댔다는 진술(8, 9, 13절)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2) 제사장들만이 나팔을 불되, 일곱째 날에만 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4-5절)?
(3) 여리고 성 주변을 돌며 행군할 때, 일반 백성(3절)과 무장한 군사(7, 9, 13절)와 후군(9, 13절)과 제사장들의 행군 순서나, 각기 맡은 역할들은 무엇이었을까?
(4)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대화중에 등장하는 지시 사항이나 명령들은 일련의 명령 체계를 보여주기 위함인가, 아니면 이들 명령을 받았던 대상이 다 달랐던 것인가? 우리는 앞에서 전자(前者)의 입장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5) 마지막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관한 진술은 왜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을까(16, 20절)?
(6) 성벽 파괴에 관한 진술은 왜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을까(21, 24절)?
이들 질문들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자료∙편집설이 알려져 있습니다. Butler, T. C. 66-70쪽(참고도서 1).
본문 속에 혼재하는 전승의 종류에서부터 그 전승들이 발전하고 편집되는 과정에 대한 이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다만 한 가지 본문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화자의 관심사는 “제의”(祭儀)와 관련한 것으로서, 이 전통이 <여리고 성 이야기>가 계승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리고 성의 함락”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여러 “삶의 자리”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기도 하고, 추가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기도 했을 것임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전승의 변천사를 일일이 다 가려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본문 속에 몇 가지 대표적인 전승들이 혼재해 있음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 전승>(27, 3/6-7, 2/6, 16/20절); (2) <라합 전승>(17, 22-23, 25절); (3) <성전(聖戰) 전승>(17-19, 21, 24절); (4) <언약궤 전승>(6, 11, 7, 12절); (4) <제의 전승>(제사장, 양각 뿔, 백성들의 함성, 칠일에 대한 언급 등).
이들 전승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여호수아 전승>일 것입니다. 본문 이야기는 그 결론을 다음과 같은 진술로 끝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27절). 마치 <여리고 성 이야기>의 목적이 ‘여호수아’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이 항상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백성이나 제사장에게 전달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나(참고. 3절), 거의 대부분 명령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달되고 있습니다(6, 7, 10, 11, 16, 17절). 그리고 <여호수아 전승>이 일련의 발전 과정을 겪었음을 보여주는 흔적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10-11절에 대한 <칠십인 역>의 번역에서는 ‘여호수아’의 주도적인 행동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함성을 지르는 장면”(16, 20절)에서 두 서술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두 번째 서술에서는 ‘여호수아’의 명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도 전승의 변천 내지는 발전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성전”(聖戰)의 개념은 “신명기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신 7, 20장), 고대 근동 사회에서도 이 개념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성전”(聖戰) 사상이 이야기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 아니지만, 적어도 신학적 “부록”으로 첨부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화자의 진술 역시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17-19, 21절).
<라합 전승>은 이 책의 2장의 주된 결론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집이 성벽 위에 있다는 진술(2:15)은 <여리고 이야기>의 결론과는 논리적으로 잘 부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벽은 ‘라합’이 구출되기 전에 모두 무너지고 함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라합’과 관련하여 6장에서 다소 다르게 드러나고 있는 진술(6:17, 22-23, 25)은 후대의 재해석 내지는 편집적 삽입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 추가적인 설명은 명령과 이행 그리고 약속의 성취와 관련해서 추가적인 강조를 더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언약궤 전승>은 다소 신비하고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이 전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성곽 주위를 맴도는 장면”이나(11절), “무장 군인에 대한 묘사”(6절), “제사장에 관한 언급”(7, 12절) 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 전승은 전쟁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만(민 10:35; 14:44; 삼상 4:3), <신명기>에서 이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단지 율법을 담고 있는 도구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신 10, 31장). 본문을 통해서 받게 되는 언약궤에 대한 인상은 이 전승이 비교적 초기의 것이라는 점인데, 언약궤를 전쟁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 경우 언약궤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앞서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인도자 되심을 상징하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본문에서는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앞서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집 전승>은 주변적인 것으로서 <칠십인 역>에서는 무시하고 있긴 하나,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전승은 <聖戰 전승>의 일부로서, 이 전승이 비교적 후대의 자료임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에는 “하나님의 집”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그들의 전승을 새롭게 해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새로운 세대에게 과거 전승을 들려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후대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 노획물은 “하나님의 집”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리고 이야기>와 관련해서 가장 압도적으로 본문을 지배하고 있는 전승은 <사제 전승>으로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적어도 네 개의 요소가 제의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제의 등장 그 자체입니다. 이들은 원래의 이야기 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상징물을 들고 다니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본문에서 보면 그들은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나팔을 들고 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는 아닙니다. 만일 이들을 이야기에서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고 해도 이야기 그 자체의 완성도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더 쉬울 것입니다. 사제들의 존재를 이야기 속에 포함시킨 것은 자료의 편집 결과 때문이 아니라, 사제들의 역할이 시대를 두고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갔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들의 역할은 그러니까 <여리고 이야기>를 단순히 전쟁 이야기에서 종교적이거나 제의적인 연극이나 드라마로 바꾸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공동체의 인기 있는 이야기에서 종교 행사로 바뀌었습니다. 이야기는 드라마로 각색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기억하고 예배드리는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게 된 <여리고 이야기>는 원래의 전쟁 전승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기억하고 들려주기 위해서 제의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게 된 것입니다.
<사제 전승>의 두 번째 요소는 “양각 뿔”입니다. 이것은 원래의 전쟁 전승에서는 후방에 포진해 있던 사제들의 손에 들려있었습니다만, 이야기에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드라마로 변하면서 극적 흥미를 위해 소리 내어 울려 퍼지는 나팔로 대체되었습니다. “양각 뿔”은 더 이상 단순히 전쟁의 신호를 전달해 주는 도구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드라마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계속 불어대야 했습니다.
<사제 전승>의 세 번째 요소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입니다. 이 역시 원래의 전쟁 전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원래 군사들의 함성은 공격 신호가 되기도 하고 적들을 놀래주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극 <여리고>에서는 바로 이 요소를 강화시켰고 다르게 변화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연극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함성은 승리의 순간을 드러내기도 하고 동시에 찬양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사제 전승>의 네 번째 요소는 “칠일”과 관련된 계략입니다. 이 역시 원래의 <여리고 전쟁> 이야기에서 전쟁의 한 계책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중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서, 이튿날의 행동 지침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처음부터 원래의 전승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 날의 행동 지침과 관련된 내용이 현재의 본문 속에서는 어딘지 흐름이 끊어진 듯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본문 속에서 “칠일의 작전”은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데 작전이라기보다는 “칠일의 제사” 또는 “칠일의 예배”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축제를 반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고, 다만 현재의 본문은 이 자료를 ‘길갈’에서의 “유월절”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5:1).
<여리고 이야기>는 이처럼 다양한 전승과 여러 세대에 걸친 편집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의 의도는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를 위한 승리의 교본(敎本)이나 ‘패러다임’을 마련해 주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은 아주 정교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지만(1-5절),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지도자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지도자는 전투 계획을 세우고(5-7절), 이 계획은 곧바로 순종을 불러옵니다(8-9절). 마지막 명령(10절)으로 이야기의 서두는 막을 내리고, 백성이 전투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잠잠히 하도록 주문하고 있습니다(11-16절). 이 계획은 여호수아가 계획한대로 정확하게 수행되고 있습니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 모든 행동이 일순 멈춤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락은 승리에 대한 간략한 선포와 함께 끝을 맞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단락은 전투 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승리한 후에도 순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1-25절). 단락의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와(26절) 순종에 따르는 축복(27절)에 대한 예를 제시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1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1절)
이 구절은 본문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이 선언을 통해서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이중적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동안 반복적으로 일관되게 사용해 왔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여리고’ 주민들의 태도와 행동을 연상해 봄으로써 이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행위로 말미암아 이들이 보였던 “두려움”에 대해서 일찍이 ‘라합’이 두 정탐꾼들에게 전해 준 것이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이들이 보였던 반응 모두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1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5:1)
이 모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그 땅 주민들의 두려움에 대한 반복되는 모티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가 전하려고 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 역설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지금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일견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그것입니다. 성문이 굳게 닫혀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암시가 그것입니다. 언약과 관련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언약의 축복(2-5절)
이어지는 네 절에서 화자는 언약의 축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2절)
이 역시 그동안 계속해서 반복해 온 모티브입니다. 여기서 동사의 시제가 중요합니다. 이미 성취된 완료형 입니다. 승리는 이미 이스라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여호수아’와 그 백성은 이 약속을 주장하고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투는 승리를 얻기 위해서 싸운다기보다는, 이미 성취된 승리 위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사실 그는 광야에서도(마 4:1-11), 그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도(12:22-29), 십자가 위에서도(골 2:13-15), 그리고 부활 및 승천에서도(엡 1:19-23),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십니다(히 1:3). 사도 바울도 외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이처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는 백성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는 것과 그 약속에 의지해서 순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위어즈비’ 목사님은, “약속을 믿는 것이 수표를 맡는 것이라면, 의지한다는 것은 그 수표에 서명한 다음 헌금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이어지는 ‘여리고’ 함락에 관한 하나님의 작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위한 작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인내와 순종을 시험해 보는 일종의 시험으로 간주하는 편이 더 옳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의 제사 즉 예배 그것입니다:
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6:3-5)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그의 제자 ‘빌립’을 시험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 6:5-6).
하나님의 ‘여리고’ 작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담은 작전이었기 때문입니다(사 55:8-9). 그리고 그는 세상적으로 볼 때 미련해 보이는 사람이나 계획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제사장의 양각 나팔은 히브리어로 ‘요벨’(jobel)이라고 하는데, ‘희년’(jubilee)이라는 단어의 어근이 됩니다. 따라서 이 나팔은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왕과 군대를 향해서 전쟁을 선포하기 위하여 불던 나팔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희년(禧年)을 알리기 위해서 불었던 나팔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승리를 선포하는 나팔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승리자처럼 살아야지 패배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찬양 하나를 부를 때도 승리자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리가 이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때, 그것은 엄청난 힘이 되어 우리의 운명과 체질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3. 언약의 확인(6-21절)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가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백성들의 믿음의 행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락이 어떻게 믿음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본문의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이 공히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형식적인 특징은 이야기의 반복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를 여섯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서 ‘여리고’ 작전을 점차적으로 확장시켜가고 있습니다:
(1) ‘여호수아’의 지시(6-7절)
(2) 백성들의 순종-진군행렬에 대한 요약적 묘사(8-9절)
(3) 진군방법에 대한 ‘여호수아’의 추가적인 지시(10-11a)
(4) 백성들의 순종(11b-15)
(5) ‘여호수아’의 지시(16-19절)
(6) 백성들의 순종(20-21절)
요약하자면 ‘여호수아’가 지시하고, 백성들은 이에 순종하여 따랐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7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히 11:30).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과 지도자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본문은 믿음과 관련해서 우리의 기존의 사고의 틀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단순한 맹신이 아닙니다. 이 백성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른 것이지 무조건 따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과거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고, 그들의 믿음은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하여 통계적 외삽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인내와 절제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아주 조직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무장군인-일곱 제사장-언약궤-후군의 순서), 한 주간동안 성 주위를 돌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나팔 부는 제사장을 제외하고 나면 모두 하나님의 개입을 기도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혹시 회의나 불평이 있었을 런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 역시 기다리며 기도하는 동안 잠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두 번 기도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끊기 있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믿음은 공동체적인 체험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공부의 주요 관심사는 개인 구원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을 공부하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마치 편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개인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혼자서 경천동지하는 믿음의 체험을 했다 하드라도, 그것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으면 그야말로 ‘람보’로 끝나고 맙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전서>에서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방언의 경우도, 그것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면 차라리 잠잠 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사야 말로 교회에 유익과 덕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늘 혼자서만 하는 기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구원이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일 뿐, 교회에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혼연일체가 되어 ‘여리고’ 성을 돌면서, 공동체적인 믿음의 체험, 즉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기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이래야겠습니다. 교회적인 기도의 응답에 대한 체험을 갖도록 합시다.
4. 부록(6:22-27)
네 번째 단락은 일종의 부록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여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몇 가지 추가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자기 앞에 놓인 일련의 전승들을 사용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첫째, <라합 전승>이 그것입니다: “라합과 그 가족을 구하라”(17b, 22-23, 25-26). 이 구절은 여기서 세 번이나 반복 등장하면서, 2장에서 미해결로 남겨두었던 과제에 대한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화자가 ‘여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반복해서 ‘라합’을 언급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원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들이었습니다(엡 2:11-12). 이들은 지금 진밖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을 봅시다(23절).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히 11:31), ‘라합’은 ‘살몬’과의 결합으로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마 1:5). 이스라엘은 민족적 혈통이 아니라, “순종(順從)의 혈통”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함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의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여리고’의 운명과는 정반대의 운명, 즉 선한 목적으로 쓰일 ‘나실’ 인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라합 전승>과는 정반대의 각도에서 조명하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헤렘’ 전승>이 그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되는 일종의 제사장적 구별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저주와 멸망을 위해서 구별되는 ‘헤렘’의 구별이 그것입니다. 일단 ‘헤렘’으로 구별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대속될 수 없습니다(레 27:28). 오로지 죽음과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처음으로 소유하게 되는 ‘여리고’와 그 안에 속한 모든 생명체가 바로 이러한 운명에 놓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여리고’의 어린아이나 가축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 봅시다.
첫째, 그들의 멸망은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은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완악하여 도무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다 소진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400년이 그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이후 40년 보여준 이스라엘의 행적은 추가적인 기회였습니다. 가장 최근에 그리고 바로 목전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목도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라합’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 성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복음의 나팔소리에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 “피리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눈물 흘리지도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가 필요했을까요? 더 이상의 자비가 필요했을까요?
둘째, 그들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0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쟁 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외국과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화평을 제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일 적이 이 제의에 응해 오면 화평조약을 맺어 그들과 평화롭게 지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섬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 땅은 적들이 아닌 이스라엘이 살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사는 주변 환경은 순결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변화를 유도해야 할 책임을 지닌 족속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잡다한 열방들과 어울려 살 때, 그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합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법입니다. 한 성도의 신앙의 친구가 누구인지 살펴보면 그의 신앙 상태를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순결한 신부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그분이 자기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함에 있어 누구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상이 비 인격체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신성불가침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직시하고,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리고’ 승리와 관련해서 화자가 마지막으로 활용하고 있는 전승은 <여호수아 전승>입니다. 그는 특히 이 전승을 강조하면서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마치 <여리고 이야기>의 목적이 ‘여호수아’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유명해지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구절은 이런 사람들을 향한 권면 같기도 합니다:
유명해 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순종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사역에 동참함으로써,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유명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믿읍시다.
교훈과 적용
<여리고 이야기>는 <여호수아> 전체적으로 아마 가장 유명한 텍스트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소돔과 고모라> 및 <노아 대홍수> 등과 함께 <구약>를 대표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이야기>도 다른 에피소드들과 마찬가지로 흥미를 넘어, 후대를 위한 교육적이고도 교훈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예배 시에 노래하고, 선포하던 전천후(全天候) 교회학교 교재의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과연 <여리고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순종의 제사
<여리고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주민 사이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드린 기이한 종교적 의식에 관한 이야기로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드린 순종의 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결론도 “전쟁의 승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기적”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은 칠일 동안 고함치고, 창검을 휘두르며, ‘여리고’ 주민과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닙니다. 정 반대로, 온 공동체가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앞세워, 침묵 가운데, 성 주변을 맴돌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을 때, 그처럼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여리고’ 성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예배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 일은 지극히 평범하고, 시시한 것이었으며, 가나안 주민들이 보기에는 기이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을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평범하고 하찮은 행위가 기적을 불러온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것에 충실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비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며 무슨 준비를 한 것도 아닙니다. 무슨 작전 회의 같은 것도 열지 않았습니다. 이전처럼 정탐꾼을 보낸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한 일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의 제사, 즉 예배를 드린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이점 교회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기능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예배란 과연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는 것입니다. 예배를 굳이 행위와 연관시킨다면, 그것은 믿음의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히 11:30)
오늘 내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입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리고의 기적>이나 <히브리서> 본문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 받는 자식이 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모님의 사랑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 외는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내가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언약의 하나님
이스라엘이 ‘여리고’에서 하나님 앞에 드린 단순한 예배가 이처럼 엄청난 기적을 낳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땅과 집과 재산과 과실 등-을 주신 언약의 주도자이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보다 먼저 이 모든 약속을 제정하시고, 그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며, 그리고 그 모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기적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아니면 무엇이 남아돌아 잉여의 유업을 이스라엘에게 주려하십니까? 이스라엘의 공로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크고 강한 나라였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직 그의 자비스러운 은혜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이 자비스러운 은혜의 약속에 끝까지 신실하셨습니다.
언약의 두 얼굴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이긴 하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순종은 축복을 부르고, 거부는 저주를 자초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순종의 제사 때문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저주는 무엇이며,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언약의 축복이 그 대상을 가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저주 또한 그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 유일한 잣대는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있습니다. 그 대상이 이스라엘이든 가나안 주민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신명기>와는 달리 <여호수아>는 ‘가나안’ 주민을 결코 퇴폐적인 종족들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정죄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하렘’으로 선택된 특정 민족이나 국가나 종족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리고’는 어떻게 해서 ‘하렘’이 되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신학과 신앙>에서 충분히 그 이유를 개진한 바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날에도 ‘하렘’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약 교회가 새 이스라엘로 탄생한 이후에도 ‘하렘’의 운명을 지닌 특정 민족이나 국가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공동체, 즉 교회는 교회와 국가를 한 대 묶는 특정 주권 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극단적인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정국가(神政國家)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신정국가 즉 “하나님의 나라”는 혈연이나, 인간의 의지나 뜻-모든 인간적인 요소-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거듭난 자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요 1:12-13). 교회는 지상의 모든 종속들과 민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6장과 8장에서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은 전쟁은 더 이상 반복되거나 재현될 수 없습니다. 즉 오늘날 더 이상의 성전(聖戰)은 없다는 말이다.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가릴 것 없이 성전(聖戰)을 이유로 다른 민족이나 종교를 억압하거나 진멸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그분의 가족이며 형제인지 묻습니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계속적으로 그리고 반복해서 궁극적으로 종말의 날에 ‘헤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이러한 ‘헤렘’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능숙한 말로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끊임없이 당면하고 있는 ‘헤렘’ 전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한 마디로 교회의 적은 특정 종교나,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당면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전쟁의 잔인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자 즉 ‘사탄’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 끝날 까지 성도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가 함께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후)
교훈과 적용
1. <여리고 이야기>는 <여리고 전쟁>이 아니라 <여리고 예배>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2. 본문을 통해서 다음의 용어들에 대해서 설명해 보고 상호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토의해 봅시다: 예배; 공동체; 승리; 여호수아.
3. 우리는 오늘날 ‘헤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도 ‘헤렘’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