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7과
길갈의 서약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5:2-15약 38분 분량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5:2a).
<요단 이야기>는 곧바로 <여리고 성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5:1과 6:1의 표현은 분명 그렇게 해도 충분히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서는 소위 <길갈의 서약> 의식을 담고 있는 본문이 필요치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만일 이스라엘이 이 의식을 생략하고 그대로 ‘여리고’를 공격했다면 틀림없이 실패로 끝날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전쟁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이 치루는 일종의 대리전인데, 대단히 안타깝게도 ‘요단’을 건넌 ‘여호수아’의 군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면 아무도 이스라엘로 부를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냥 열방 중의 한 족속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전쟁을 치르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이 되는 절차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 절차란 무엇입니까? 언약체결입니다. 이 언약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은 곧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 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화자는 바로 이 주제를 위해 세 가지 다른 이야기(또는 전승)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세 이야기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부드럽게 연결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위한 분위기를 창출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결의식 내지는 헌신예배의 분위기로서, 아주 거룩하고, 엄숙하면서도, 희망에 찬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삼국지의 ‘도원의 결의’를 연상시켜 주기도 합니다.
그 세 이야기란 (1) 할례 의식(5:2-9); (2) 유월절 예배(축제)(5:10-12); (3) 하나님의 환상(임재)(5:13-15)입니다. 그리고 이 세 이야기가 본문의 구조적인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 각각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위해서 기여하고 있는지 살펴 볼 일입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을까요? 즉 그들이 승리하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의 범위를 결정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본문의 시작과 끝에 두 개의 전환(轉換) 구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범위는 이 두 전이구절 사이에 있는 내용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은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두려움”이라는 모티브를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5: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6:1)
이 두 구절은 각기 <요단강 이야기>에 대한 결론과 <여리고 전투>에 대한 배경 진술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어, 내용 상 본문(5:2-15) 내용이 없더라도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본문을 이곳에 추가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이며 그 의도는 무엇일까?
화자는 이곳에서 일견 상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세 개의 전승을 결합시켜, 이들이 마치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진술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전승이란 “할례”와 “유월절” 및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이야기로서, 이 셋은 실은 그 주제에 있어서나, 지리∙역사적인 배경에 있어 상호 연관성이 다소 희박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신학적 주제에 있어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화자의 최대 관심사는 제의(祭儀)나 예배에 있고, 이는 곧 이 책의 핵심어인 ‘하렘’ 즉 “성전”(聖戰)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즉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요단 강 도강(渡江)”이나 “여리고 전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즉 거룩함에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리고 전투”를 앞둔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에게는 이 세 전승의 이야기는 특히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이 세 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본문의 단락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할례(2-9절)
2. 유월절(10-12절)
3. 하나님의 임재(13-15)
할례. 첫 번째 이야기의 주제인 할례와 관련해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여호수아’의 즉각적인 순종과(2, 3, 8절), “할례 산”에 대한 언급과(3절), 그리고 할례에 따른 고통과 기다림에 관한 언급(8절; 참고. 창 34:25) 등입니다. 이 백성이 할례를 행한 시기와 관련해서 화자는 단순히 “그 때에”(2절)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다소 막연한 표현으로서 정확히 언제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당시가 청동기 시대인 점을 감안하다면, 할례의 도구로서 부싯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은 의도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부싯돌이 아니더라도 할례는 그 자체로서 아픔과 상처의 회복을 기다려야 하는 아주 오래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제의의 한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전통을 그대로 오늘 다시 행하자는 말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충실하자는 권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할례가 필요한 것일까? “출애굽” 당시에는 이스라엘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할례를 받았겠으나(5절상), 광야에서 이들 모두는 불순종으로 죽어갔습니다(4절후, 6절).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만, 이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로 볼 수 없었던 것이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5절하, 7절하). 따라서 이들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다시 받아야 했습니다(2절).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여리고’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본문의 문학적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은 할례의 장소에 관한 기원론적 언급을 통해서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절). 하지만 여기서 할례의 장소로 “백성의 진중”(8절)이 아니라 ‘길갈’을 거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이 구태여 이 본문 속에 포함되어야 할 당위성을 찾는다면, ‘여호수아’ 공동체 즉 지금 ‘길갈’에 진치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아브라함 언약”을 계승할 수 있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예임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즉 할례에 관한 오래 된 전승에 포함되었을 내용, 즉 “부싯돌”에 관한 언급이나(2절) 할례의 후유증에 관한 언급이나(8절), 출애굽 당시의 할례에 관한 언급(4절) 등을 할례의 장소 ‘길갈’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세대는 진정 약속의 땅을 차지할 권리를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 두 번째 이야기는 그 땅에서 행한 첫 번째 유월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전승과 관련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길갈’과 관련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10절). 우선 동일한 구절을 다르고 있는 <칠십인 역>에는 ‘길갈’에 관한 언급은 없으며, 이 구절은 또한 4:19와도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치매”(4:19). 그리고 10절은 이어지는 11절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11절). 특별히 두 축제를 기념한 날짜와 관련된 이러한 모순은 아마도 후대의 편집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각기 다른 축제로 보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겔 45:21; 민 28:16; 레 23:6).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락이 실은 <출애굽-광야 생활 이야기>의 절정이라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결론이 그 땅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축제와 관련하여 더 이상의 상세한 언급은 없습니다. “출애굽”을 감행하기 전에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기념했던 이 백성은 이제 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유월절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땅은 정치∙군사적으로 아직 미정복의 상태로 남아있지만, 그 땅의 소산물은 이 백성이 유월절의 음식으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야훼의 임재.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은 그 주제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 있어 앞의 두 에피소드와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는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아닌 미완성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앞의 두 이야기에서 ‘여호수아’가 직접 등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이곳 ‘여리고’에서는(13절상) 그가 유일한 등장인물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 형식에 있어 <출애굽기: 3장>과 흡사합니다(특히 출 3:5와 본문 15절을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여호수아’와 그의 행동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한 신비한 인물 때문에 놀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를 보고 무엇이지 알아보기 위하여 다가갔던 것처럼(출 3:3), ‘여호수아’ 역시 그가 누구인지 다가가 묻습니다(13절하). 그는 ‘모세’와 달리 그 자가 왜 왔는지 먼저 물어봅니다(13절하). 그 사람은 대답 대신 자기가 왜 왔는지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14절상). 그런데 더 이상 이어지는 설명이 없고, 여기서 문장이 끊어져 버립니다. 그가 온 이유에 대해서 이어지는 설명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으니, 이 본문의 원래 내용이나 양식에 대해서 이런저런 논의가 많습니다. 원래의 전승에는 무엇인가 이보다는 더 긴 이야기를 담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혹시 화자가 강조하려는 바가 군대 장관의 추가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행동에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생략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여호수아’가 너무 민첩하고 신속하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는 바람에, 이 군대 장관이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할 겨를도 없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점 ‘모세’의 행동과 대비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밝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을 가렸습니다(출 3:6). ‘여호수아’는 충분히 먼저 경의를 표한 후에야 비로소 그의 추가 설명을 듣기를 청하고 있습니다(24절하). 그가 듣게 된 대답은 어떤 임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거룩함에 대한 추가 명령과 함께 그 장소가 거룩하다는 계시입니다(15절). 그리고 이야기의 결론은 ‘여호수아’가 이에 순종하여 그대로 행했다는 언급입니다(15절하). 이번 에피소드의 원래의 전승이 어떤 형태이었든, 현재 본문 속에서 기능하는 바는 순종에 대한 “시험”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창 17:22-27).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하나님 만나기를 그렇게 열망하고 있는 것일까요?
따라서 본문의 결론적인 언급은 화자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5절하).
결론적으로, 본문이 포함하고 있는 세 개의 독립적인 전승이 기능하고 있는 바는 그 땅에서 시대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화자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세 개의 전승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의 신학적 주제는 “신명기 역사관”에 입각한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상의 중심에 “유월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신 16;2; 왕하 23:21-23). 비록 <신명기> 법전에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할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야말로 초기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민족들과 구별 짓는 가장 독특한 표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삿 14:3; 15:18; 삼상 14:6; 17:26, 36; 31:4; 삼하 1:20; 창 34:14). 그리고 ‘여호수아’의 순종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할례”와 “유월절”과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세 전승 이야기는 지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나, 그리고 그 주제에 있어 크게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화자는 당대의 공동체를 위하여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솜씨로 이들 상호간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핵심 주제는 그 땅에 사는 이스라엘의 본질과 형식에 관한 것으로서, “순종”이 그 내면의 본질이라면, “제의”(祭儀)를 통한 거룩함이 내적 본질을 드러내는 외적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본질은커녕 그 형식에 대해서조차 한 번도 충실해 본 적이 없었음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그 정체성에 충실하자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할례(5:2-9)
이야기는 다시 하나님과 ‘여호수아’ 사이의 대화로 시작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2절)
이 명령의 핵심은 “할례를 행하라”는 것인데, “부싯돌”을 사용하라는 대목이 특이합니다. 할례 시 “부싯돌”을 사용하는 전통은 이스라엘에서는 상당히 오래된 제의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여호수아’ 당시는 청동기 시대로서 돌이 아니라 청동 기구들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대도 구태여 “부싯돌”을 사용하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오래 동안 지켜오던 옛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출애굽기>에서 부싯돌을 사용해서 할례를 행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출 4:25). 이스라엘은 할례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의식, 예컨대 “돌 제단”을 세울 때에도 쇠칼이나 정을 사용해서 다듬은 돌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출 20:25; 신 27:5; 수 8:31).
할례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성인식의 의미를 가지고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습니다만, 이스라엘의 할례는 이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를 받는 시기에서부터 그 방식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드러내는 종교적 의식이었습니다(창 17; 21:4; 출 12:43-49; 레 12:3).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행하던 할례는 외형적이고 육체적인 할례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만(참고, 렘 9:24-25),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의 요점은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외적 표현으로서, ‘아브라함’은 나이 99세에 할례를 받은 바 있습니다(창 17:24). 따라서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7:13-14). 즉 할례 곧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지요. 이점 <신명기> 학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특별히 중요했던 것이, 당시 ‘바벨론’ 군주들은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할례로써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주변 이방 문화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려 했습니다. 물론 <신명기> 학자들은 단순히 육체적 의식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고 말한 적은 없으며,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신 10:16; 30:6; 레 26:41; 렘 9:4).
지금 ‘여호수아’는 할례를 처음으로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오래된 이스라엘의 원래의 할례의 의미를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공동체를 <출애굽> 직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5절). 그리고 <출애굽기> 화자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받았던 할례의 기원을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할례(창 17)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출 12:43-49).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는 “할례 산”에서 이 과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3절)
“할례 산”은 직역하자면 “표피의 산(언덕)”으로서 그 장소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물론 화자는 이 모든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장소를 ‘길갈’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만(9절), 이 구절의 핵심은 할례의 장소를 기원론적으로 알려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 단락의 결론이나 핵심 주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세대가 새롭게 할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의 초기 전승은 2-4절과 7-8절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본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6절 및 9절은 후대의 교훈을 위한 편집적 삽입으로 여겨집니다. 예컨대, 5-6절은 4절과 7절 사이에서 두 절의 의미를 반복하고 추가해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4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4-7절)
즉 할례는 단순히 종교적 행사이거나 의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공동체에게 있어 할례는 “속죄”이거나 “구속”입니다. 즉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출애굽” 첫 세대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4절). 그러나 ‘이집트’를 빠져나오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도 “출애굽”을 해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도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은 불순종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세대에 속한 모두가 다 사라질 때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던 세대가 다 사라져 버렸으니, 할례 받지 못한 다음 세대 즉 ‘여호수아’ 공동체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이 점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화자는 “출애굽” 첫 세대를 “애굽에서 나온 백성”(![, 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는가 하면(4절), 동시에 불순종한 이들 무리를 가리켜 “애굽에서 나온 족속”(y/G, 고이)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6절). 그리고 ‘여호수아’ 공동체를 향해서도 같은 백성이 아닌 족속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또 그 모든 백성(y/G, 고이)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8절상). 화자의 의도인 즉은 ‘여호수아’ 공동체는 할례를 다시 받을 때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단순한 한 이방 족속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할례의 목적은 족속을 변화시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할례의 목적입니다: “너희는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y/G, 고이)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 욤)이로다 하리라”(신 4:6). 그러나 이스라엘은 늘 족속(y/G, 고이)으로 남기를 고집해 왔던 것입니다(신 17:14-20; 삼상 8:5).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할례 받지 못한 족속으로 그 신분이 바뀔 수 있을까? <신명기>적 인과응보의 사상이 그 해답입니다(참고, 신 27-28장).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축복과 저주라는 양 날을 가진 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축복을, 그리고 불순종은 저주를 불러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공동체는 할례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8절)
그러나 이 구절이 원래 할례를 포함하고 있는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초기의 전승에서 강조하고 있었던 바는 아마도 할례에 따른 고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창 34). 백성이 할례 후 “낫기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이를 암시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구절에서 “낫다”(hy:j, 하야)는 “살다” 또는 “살아있다”입니다. <시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병이 들었거나 상처가 난 상태는 불완전한 상태 즉 완전히 살아있는 상태가 아닌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시 33:19; 56:14). 할례에 따른 상처와 아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례로 인한 육체적 상처가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삶으로 회복해가는 것이라면, 영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할례의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단순한 “족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길갈’에 관한 기원론적 설명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절)
독자들은 “애굽의 수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수치”(hP;r]j, 헤르파)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이런 저런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당시 받아야만 했던 사회적 수치나 모멸감 등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도, 이스라엘의 수치가 정치∙군사적 방법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제의적인 방식 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현인 할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9절은 첫 번째 단락의 신학적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여기에 ‘길갈’에 대한 기원론적 설명을 추가함으로써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화자는 ‘길갈’을 “굴리다” 또는 “떠나가게 하다”는 동사 ‘갈랄’(ll'G;)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요단 이야기>(3-4장)의 핵심이 “돌무덤”이나 “제단”을 세우는 등의 제의적인 행위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곳 “길갈의 할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돌무덤”이나 “제단”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할례”도 행했습니다. 이 모두 후대를 위한 교육이자 교훈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길갈’은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거룩한 장소로 기능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유월절(5:10-12)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첫 번째와 연결되는 방식은 다분히 신학적입니다. 즉 두 번째 단락의 주제는 “유월절” 축제에 관한 것으로서, 원래 “할례”는 유월절 식사를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습니다(출 12:48후). <구약>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시기는 별도로 정해져 있습니다: 신 16:1; 출 12:4; 민 9:3; 레 23:5.
‘길갈’이 이스라엘의 제의와 관련해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장소라면, 화자는 이 두 번째 단락에서 ‘길갈’에서의 <할례 이야기>를 <유월절 이야기>로 곧바로 연결시킴으로써, 본문의 신학적인 통일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0-12절)
따라서 화자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켰는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두 번째 단락은 본문 비평이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문장과의 불일치나 모순되는 진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날짜가 정월 십일인가 아니면 십사일 인가?”(참고. 4:19; 5:10); (2) “유월절을 며칠 동안 지켰는가? 일주일인가 또는 하루인가?”(참고. 11절상).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그 땅의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달라진 생활 방식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그 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12절상)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화자가 두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단어 “소산물”(rWb[, 아부르)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11, 12절). 그리고 “볶은 곡식”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동사의 원형 “볶다”(hl;q, 칼라)는 아홉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레 2:14; 23:14; 수 5:11; 삼상 17:17; 25:18; 삼하 17:28; 룻 2:14). 이들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광야 생활 내내 먹어왔던 ‘만나’와는 분명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을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문맥 상 이스라엘이 먹은 소산물은 자신들이 직접 농사지어 추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그 땅에서 자라고 있던 일종의 야생 열매나 곡식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그냥 거두어 먹었을 것입니다. “무교병”(hX;m, 맛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교병”은 원래 여행용 간이 음식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아주 친숙한 음식입니다.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이 빵을 먹었다고 해서 이들이 유월절의 엄격한 규례에 따라 이 절기를 지켰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유월절 분위기는 엄격하고 딱딱한 규례로서의 절기 지키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발성과 흥겨움이 느껴지는 축제 그 자체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 땅의 주민들이 먹는 “정상적인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앞에 놓인 가나안의 넓은 땅을 바라보면서, 더 많고 풍성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 공동체”가 지킨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절기나 제의의 역사에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인 유월절을 지키면서 과거 조상들의 “출애굽”을 회상하고, 동시에 그 땅에서 난 소산물을 먹고 즐기는 축제의 성격을 가미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에게는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지키던 무교절의 전통은 아마 더 이상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기 절기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과 무교절은 각기 나름대로의 기원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출 12:21-27; 13:3-9), 어떤 곳에서는 무교절만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출 23:15; 34:18).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시기에 이 두 절기는 하나의 축제로 통합되어 한동안 지켜졌던 것으로 보입니다(신 16:1-8; 레 23:5-8). 이즈음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에 관한 성경 본문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유월절 이튿날에 무교병을 먹었다”(11절)는 언급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날에 ‘만나’가 그쳤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특별한 인도와 보호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아직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 그 땅에서 나는 풍성한 소산물들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의 요새들을 주기 전에 이미 그 땅의 소산물을 주심으로써,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 야훼의 임재(5:13-15)
세 번째 단락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한 에피소드로서, 처음 두 단락과는 다소 연관성이 멀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제의와 하나님의 임재는 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3-15절)
하나님의 임재는 칼을 든 모습의 장군의 현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오경>에서 그리고 있는 ‘여호수아’의 모습은 다소 성급하고 경솔하며, 나서지 말아야 할 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출 32:17; 민 11:28). 그는 지금 한 낯선 방문객의 방문을 받고서는 담대하게 맞서며,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왔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곳이 “여리고 근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이미 처음 단락에서 등장한 바 있고, 다음 에피소드의 주요 무대가 될 것이라 전후 문맥 상 부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만, 처음 두 단락에서(9절하, 10절상) 강조하고 있는 ‘길갈’과는 아무런 연결도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다소 특이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길갈’은 이 공동체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한 장소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야훼의 군대 대장”은 ‘야훼’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구약> 전체적으로 단 두 번만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11절, 단 8:11). 이 표현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자(使者)를 일컫는 표현으로 더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야훼의 사자”나 “하나님의 사자”라는 표현은 각기 88번 및 11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는 역할은 다양한데, ‘기드온’이나 모세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소명을 주기도하며(삿 6:11; 출 3:2), 또는 직접적으로 백성들을 바다에서 구원하기도 합니다(출 14:19; 민 20:16). “하나님의 사자”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동일 시 됩니다(삭 13:22). “하나님의 사자”는 때로는 군사적 영웅이 되어 하나님의 적들을 물리치기도 합니다(민 22:23; 삼하 24:16-17; 왕하 19:35).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이와 같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기대를 완전히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야훼의 군대 대장”은 아무런 소명도, 지시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화를 먼저 주도하고 있는 쪽은 ‘여호수아’입니다. “야훼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한 말이라고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신발을 벗어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했다”는 말로 이야기의 결말로 삼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진술도, 더 이상의 계시나 소명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의 순종의 한 행동만이 돋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야말로 화자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일 것입니다. 거듭 요약하자면 지금 ‘여호수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순종”일 것인바, 바로 이 두 요소가 마지막 단락의 핵심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훈과 적용
영화「써머스비(Sumersby)」중에서 ‘써머스비’로 행세하고 있는 주인공은 진짜가 아니라, 그와 꼭 같이 닮은 한 사기꾼입니다. 그는 진짜 ‘써머스비’를 감옥에서 만나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들어 알게 되고, 그가 죽은 후에 출옥하여, ‘써머스비’가 되어 귀향합니다. 목적은 한 가지, 이곳에 눌러앉아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땅과 재산을 가로채 달아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막상 와보니 별 것 없어서 큰 실망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집과 땅은 물론, 그의 아내까지 차지하여, 둘 사이에는 딸까지 생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동네에 담배농사를 도입하여 농가수입을 올려주어, 동네사람들의 영웅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물론 처음부터 이 사람이 가짜임을 알고 있었으나, 난봉꾼이자 무정했던 옛 남편에 비하면 너무나 자기를 한 여인으로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 역시 스스로도 진짜 ‘써머스비’로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이 여인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아주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검찰에서 그를 잡으러 온 것입니다. 죄목은 살인죄입니다. 재판 결과는 사형입니다. 물론 그가 살인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진짜가 죽기 전에 저지른 일입니다. 그가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써머스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증인도 그렇다고 증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의 아내마저도 그를 살리기 위해서 법정에서 그가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증언해 줍니다. 이 충격적인 증언에 모든 참석자들은 기겁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내 이름이 없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사형선고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 여인의 남편인 ‘써머스비’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의 옛 사람은 이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순간에 이미 죽어버렸고, 그는 진짜 ‘써머스비’가 되었으며, 또 그렇게 행세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바꾸라니 말도 안 됩니다. 그가 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이 여인의 남편이 아닙니다.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써머스비’로 죽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한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사기꾼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서는 ‘써머스비’만큼은 투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형 ‘에서’를 속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후로도 그의 삶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사기행각은 여전히 계속됐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도 없었고, 소망과 평안도 없었습니다. 늘 초조하고 쫓기는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 그리고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한 선언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싸움에서 이기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정체성은 “승리” 바로 그것입니다(그 승리를 어떻게 얻어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접어두고서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이스라엘이 되라. 그의 정체성에 충실하라”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가?” 또는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이스라엘 되기”입니다. 무엇입니까?
시인이나 문학가들이 홍진에 지친 붓끝을 새롭게 하고 자신의 삶과 문학을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종종 고행(苦行)을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예로, 시인 고은도 불교의 시작이자 중심지인 티벳트의 수미산을 향해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 한 구절을 남긴 바 있습니다: “벗들, 어디 가서 실컷 울부짖든지 미치든지 한 다음, 피투성이 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시작만이 구원입니다.” 문학가들이 하루하루의 시간이나 매체에 종속된 채 죽어가는 자신의 시나 문학을 위해 이처럼 고뇌하며 투쟁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그 영혼을 위해서 어찌 고민하며, 투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1. 다시 할례를 행하라(5:2-9)
그렇다면 이스라엘 돌아가야 할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첫째, 그들은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다시 할례를 행하라”(2절). 할례와 관련해서 화자는 세 가지 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다시”라는 강조가 그것입니다. “두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언약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오라는 재 헌신을 위한 초청입니다. 그리하여 열방처럼 남아있지 말고 참된 이스라엘이 되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연후에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할례를 다시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할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이유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문학과 역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애굽” 즉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였으나,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도 자유와 해방을 원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원하던 대로 되었습니다. 모두 광야에서 죽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새로운 구속, 즉 하나님을 향한 예배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나라를 변하여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 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신 4:6).
우리는 여기서 할례의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해서 잠시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7장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일방적으로 「그 땅과 후손」에 대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창 12:1-3). 이 축복은 사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쪼개진 시체 사이로 지나는” 환상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한 공식적인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창 15). 그러나 곧바로 그는 자신의 육신을 의뢰하는 신앙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는데,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갖게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창 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의 약속을 반복하시면서, 참여 여부를 묻습니다: “그런즉 너는”(17:9). 따라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자신의 것으로 확인하겠다는 믿음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 백성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38년 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민13-14장). 바로 여기에 지금 이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싯돌”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2-3절). 사실 ‘여호수아’ 시대는 청동기 시대로서 구태여 흉측스러운 돌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진정 무엇일까요? 사실 할례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성인식의 의미를 가지고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그것은 마땅히 이들과 구분되는 것이라야 합니다. 할례의 연령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방법도 그렇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아마 그의 공동체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가장 이스라엘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면 우리들의 옛 전통을 충실히 보존하고 따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했다 할지라도,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여리고’ 전투를 이기게 했던 그 옛 전통-부싯돌 할례-을 고수할 때만이 우리 역시 오늘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랑스러운 여호수아의 후예들이 아닙니까?”
지금 화자는 자신의 세대를 옛날의 그 전통으로 데리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여호수아’가 주변국가의 조롱과 멸시를 무릅쓰고 부싯돌로 할례를 행하여, ‘여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면 자기들 역시 그럴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권고와 권면일 것입니다. 그는 지금 다원화되고 세속화되어가는 ‘바벨론’ 사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를 들어, 침례교회에서 편리한 세례를 마다하고 굳이 귀찮고 힘든 침례를 고집하는 것이나, 교회마다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이나, 새벽기도를 한사코 강조하는 것 등이 다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선조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써, 역사를 두고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들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들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귀찮은 일이나 행사를 만날 때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나?”하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사랑한다고 하늘에서 말하지 않고, 귀찮게 시리 ‘예수 그리스도’로 태어나셔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증명)해 보이셨습니다(롬 5:9). 사랑은 정말 귀찮은 것입니다.
할례에 대한 강조점은 또 있습니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서 낫기를 기다릴 때에”(8절) 이것은 할례에 따르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 군대는 고통과 위험(예: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있을 수 있는 적의 침공)을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를 받았습니다. 흔히들 새롭게 시작할 때 “뼈를 깍는 아픔” 또는 “알을 깨는 고통” 등등의 표현을 씁니다. 할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살을 벗기는 고통입니다. ‘여호수아’가 고통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다면, 이후 이어지는 화자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헌신의 징표로서 이 할례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례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화자는 말합니다: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였다”(9절). ‘애굽’은 일종의 주변 환경입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조롱하며 기죽이는 어마어마한 현실의 벽입니다. 그들을 노예로 사로잡아 죽는 것이 두려워, 할 수 없이 순종하게 하던 바로 그 죄와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벗어 던졌던 그 피부껍질은 거짓과, 가식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할례의 고통을 감수했을 때 비로소 자유와 회복의 승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속 사람”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회복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가나안의 열매를 먹어라(5:10-12)
할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축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11절후).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두 번째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 선언은 실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자 두 번째 단락의 주제입니다. 이스라엘이라면 마땅히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는 화자의 진술은 이스라엘의 달라진 생활방식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그 땅의 소산을 먹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 다 출애굽의 ‘모티브’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출 12-14장). 하나는, 방금 강조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의 당당한 백성으로서 마치 선조들이 “출애굽” 전야에 할례를 행한 후에야 유월절 양을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참고. 출 12:43-51). 과거에 대한 회고와 감사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며 즐기는 기대와 희망찬 확신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지금 적진을 눈앞에 두고 한가하게 축제를 벌이고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아직 그 성이 함락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와 소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의 성만찬식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가 천국의 시식코너라고 언젠가 말한 바 있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오늘날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합니다(고전 5:7). 동시에 그의 부활을 통한 종말의 성취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우리는 침례도 받았고, 수시로 성찬식에도 참여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여리고’성의 현실은 굳게 닫혀 우리를 좌절시키고, 겁을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동안 잘 먹던 이전의 만나마져 끊어지고, 불필요한 고생을 사서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 때문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3. 네 신을 벗어라(5:13-15)
이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세 번째 주제로 넘어 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호수아’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도적 역할은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불붙는 떨기나무를 보고 했던 것처럼(출 3:3), 자기 앞에 난데 없이 나타나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세’와는 달리 먼저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곳에 왔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는 충분한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아니, ‘여호수아’ 자신이 그의 대답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즉 그자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그는 먼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조아립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지시를 내려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여기서도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모티브’가 그것입니다. 이 낯선 인물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봅시다: “이 땅은 거룩한 곳이라...네 신을 벗어라.” 지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과 함께 새로운 할례를 행하였고, 그 땅의 열매를 먹으면서 유월절 축제를 즐겼고, 또한 곧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일말의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없지 않습니다. 지도자는 늘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 두려움과 불안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내린 결정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운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 그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확신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전쟁”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즉 그가 수행하려고 하는 사역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도무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순종의 ‘모티브’입니다. ‘여호수아’의 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그대로 행하니라”(15절하).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출발점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할례는 무엇이며, 우리의 유월절 음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골 2:11,12). 그러나 이러한 외적 체험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우리의 육체를 의지하며, 신앙에서 실수하고 넘어지기가 일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영원한 내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직접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심으로써, 그의 구원의 역사를 스스로 이루어 가심을 우리는 압니다. 그는 바로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연습과 토의
1.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자가 본문에서 보여주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토의해 봅시다.
2. 본문이 정상적인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음을 확인해 봅시다(참고. 5:1; 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이 이곳에 위치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가 결단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