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빌라도의 법정(3):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8:40약 7분 분량
예수와 바라바
(18:38b-40)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는 ‘마리아’만큼이나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부 오래된 <성경 사본>들에서 ‘바라바’를 ‘바라바 예수’(Jesus Barrabba)로 부르고 있다 해서 특별히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번역본이나 사본에서 그를 ‘바라바 예수’가 아닌 ‘바라바’로 고쳐 부르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초대 교회 신학자 ‘오리겐’의 설명이 그럴 듯해 보입니다. 즉 ‘바라바’와 같은 악명 높은 강도에게 ‘구원자’를 뜻하는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바라바 예수’가 ‘바라바’로 바뀐 것은 순전히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정말 ‘바라바’의 원래 이름이 ‘바라바 예수’였다면, 그는 ‘나자렛 예수’(Jesus of Nazareth)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셈입니다. 결국 ‘빌라도’와 ‘유대’인 무리는 두 예수를 놓고 흥정을 벌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나자렛 예수’를 살려주고 대신에 ‘바라바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고 싶습니다. 그 동기가 자신의 양심의 요구에 따라 나온 것인지, 아니면 아내의 충고 때문이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군중 즉 세상은 ‘나자렛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아 ‘바라바 예수’를 살리기를 원합니다. ‘빌라도’가 어떤 선택을 하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두 ‘예수’는 참으로 기막히게도 같은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두 예수. 네 <복음서>가 한 결 같이 강도 또는 살인자로 낙인찍고 있는 ‘바라바’(요 18:40; 막 15:7; 눅 23:19; 마 27:16). 그가 어떻게 ‘바라바 예수’ 즉 구원자의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일까? 만일 그가 백성들 사이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혁명 전사(戰士)로 인식되고 있었다면, 그는 단순한 강도나 살인자가 아니라 ‘유대’ 민족의 영웅 내지는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왕국의 대의(大義)을 실현함에 있어 폭력이나 살인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수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무리가 그토록 큰 소리로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빌라도’가 이 백성의 요구대로 ‘바라바 예수’를 살려주면 어떻게 될까? 그가 진정 자신의 이념과 소명에 충실하다면, 그가 진정한 혁명가라면, 그는 풀려나자말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즉 다시 칼을 들고 살인과 폭력을 일삼으며 로마 제국을 골치 아프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국은 그를 잡으려 나설 것이며, 결국 그는 체포될 것이고, 다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혁명을 위한 그의 무력은 로마라고 하는 더 큰 무력에 의해서 제압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를 대신해 희생양이 되었던 ‘나자렛 예수’의 죽음은 적어도 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즉 ‘나자렛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그를 살리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바라바 예수’가 자신의 방식을 고수(固守)하는 한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이란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닌 타인과 세상을 향한 것입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세상과 타인은 거듭나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이들을 지배하는 제도나 관습이나 이념이나 사상을 모두 갈아엎어야 합니다. 이점 ‘바라바 예수’를 선택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만이 변화인가. 이와 같은 혁명은 과연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예컨대, ‘바라바 예수’가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과업을 수행했더라면 그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을까?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시도하는 혁명이 지나치게 혁명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가 바꾸려는 그 모든 것에서 자신만은 제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가 천하를 바꾼다 해도 스스로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면 혁명은 여전히 미완(未完)으로 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이사야>의 노래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노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과연 이와 같은 평화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린 양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와 어린 아이와 암소와 수소가 힘써 노력한 결과일까? 아니면 이리와 표범과 곰과 사자와 독사가 먹지 않아도 늘 배부르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닙니다. 이들 맹수들의 본성, 즉 식성(食性)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육식(肉食)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무슨 연고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들 맹수들은 자신들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더 이상 가련한 초식동물들에게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었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온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신 하나님께서 강보(襁褓)에 싸여 스스로를 방어할 아무런 무기(武器)도 힘도 없는 어린 아이로 태어난 것에 견줄 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자렛 예수’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시는 혁명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분의 방식은 우리와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칼과 창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한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평화가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자와 토끼가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만일 ‘나자렛 예수’께서 ‘가야바 예수’와 같은 감옥에 수감되어있었다면, 혁명의 방식을 놓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을까? ‘가야바 예수’가 세상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나자렛 예수’께서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을까? 뭐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는 방식대로 해보게. 먼저 뒤집어엎어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네라네.” 이는 그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거듭나야 해”(3:3).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참으로 신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의사(意思)와는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홀로 일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이 재판에서 ‘유대’인이 보여주고 있는 비극적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들을 살리러 온 생명의 주(主)를 죽이고, 살인자를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 이 모습 말입니다. 이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지금 이들 무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궤변(詭辯)일 것입니다.
왜 이 백성은 ‘나자렛 예수’가 아닌 ‘바라바 예수’를 원했던 것일까? 이 또한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이들은 ‘나자렛 예수’를 훨씬 더 위험한 인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할 수만 있다면 항상 덜 위험한 쪽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터, 그들의 선택을 나무랄 수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살인자이자 강도인 ‘바라바 예수’가 아무 죄도 없다고 ‘빌라도’가 판결한 ‘나자렛 예수’보다 덜 위험하다니!
그러나 사실이 그러합니다. 두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나 요구 사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라바 예수’는 나의 인생을 그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즉 자신의 혁명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내 인생을 이용하겠다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께서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요구하십니다. 내 인생을 통제하고 움직여야겠다고 말합니다. 누가 더 위험한 인물입니까?
그래서 ‘나자렛 예수’만 아니라면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도 외칩니다: “‘나자렛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 예수’를 우리에게 주소서.”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누구를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라바’가 풀려나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역사적으로 ‘나자렛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첫 번째 수혜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받은 수혜가 육체적인 것이었다면, 내가 받은 수혜는 전인적(全人的)인 것입니다. 그가 받은 수혜가 한시적인 것이었다면, 내가 받은 것은 영속적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분이 온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내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빌라도’처럼 어정쩡하게 ‘나자렛 예수’와 세상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원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