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네 번째 기적(1)-유월절에
김태정 목사약 8분 분량
6:1-4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어, 그 중요도에 있어 다른 기적 사건들을 능가했던 것 같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화자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심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요한’ 화자는 이 기적을 ‘유대’ 인들의 최대의 명절, 유월절과 연계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공관복음>의 기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오병이어”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요한’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큰 무리가 따르니. 한국인들에게 추석이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단순한 휴가가 아닙니다. 추석하면 떠오르는 따뜻하고 친숙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고향; 가족; 친구. 한국인들은 매년 귀성을 통해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이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은 단순한 명절 그 이상입니다. 해방과 자유, 그리고 민족자존과 독립 국가 건설을 성취한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가 언급하고 있는 “유월절”은 이처럼 밝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영광과 성공이 아니라, 좌절과 실패, 그리고 궁핍과 필요를 말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의 “유월절”이 아니라 “유월절” 이후를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다름 아닌 그들의 광야 생활입니다. 사막이나 광야에 무엇이 있으며 기대할 것이 무엇입니까?
나도 얼마 전 미국 여행 중에 차로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을 횡단해 본 적이 있어, 사막 여행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이 무엇이지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낮이면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다가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 전갈과 방울뱀과 같은 맹독 짐승들, 횡단 내내 마을이나 주유소 하나 없는 상황, 등등. 이스라엘 역시 홍해를 건너는 순간부터 이와 같은 사막, 아무 것도 없는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의지하고 기댈 만 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월절”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요한’ 화자가 “오병이어”라는 엄청난 기적 사건, 신약의 네 <복음서>가 모두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그 배경으로 “유월절”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 축제의 기간에 먹을 떡과 마실 물이 없어 수천 명의 무리가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그를 따라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국가나 종교의 무능과 무관심을 일견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일용할 양식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수천의 무리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들 무리를 “목자 잃은 양”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돌보지도, 돌볼 수도 없는 고아 같은 무리들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이 모습을 기적의 배경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전의 그 어느 시대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본 의식주는 말 할 것도 없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개되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우리의 삶을 앞으로도 더욱 향상시키고 발전시킬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가나 과학자 모두 진보를 말하고 희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조만간 더 이상 새로운 그 무엇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 시대가 도래 할 것만 같습니다. 적어도 과학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지금 우리는 제 2의 “빅토리아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성전에 나타나신다 해도 그분을 열렬하게 따를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모두들 희망과 발전을 말하고 있고, 풍요를 노래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바로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은 자국의 명운(命運)을 걸고 치열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래 산업에 필요한 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서 그랬다면, 이제는 첨단 신소재를 위한 희귀 자원 확보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대에 세계는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를 두려워했다면, 이제는 더욱 다양한 무기들로 인해 두려움은 더욱 증대되고 있습니다. “식량 무기화”, “희토류 금속 무기화”, “희귀금속 무기화”, 심지어 “지적 재산 무기화”, 등등 아주 다양합니다.
결국 희망과 진보는 역설적으로 우리 인류를 더욱 더 의존적이고 의타적인 존재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국가도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한 국가가 이러할 진대 개인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물질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일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어떻습니까? 매사에 활기 넘치고, 명랑하게, 자족하며,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시인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까?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까?
아니면 어디서 오는 지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는 불만과 좌절, 다른 사람을 향한 불평과 원망, 나 자신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자책감이나 분노, 그리고 공허감과 무기력, 등등으로 마치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라는 외부 세력에 의해서 타의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그 풍성한 삶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주님의 약속은 믿을 만 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 약속에 대한 나의 믿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그 약속을 성취시켜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풍성한 삶을 구가해 보려고 이룩해 보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힘써 한 일이란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내 속에서 몰아낸 것 밖에는 없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작가 ‘필립 얀시’(P. Yancy)도 젊은 시절, “아, 내 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절규하며 방황한 적이 있었다고 그의 책에서 쓰고 있습니다. <성경> 속의 그 하나님이 내 속에는 없다는 탄식입니다.
그가 왜 그토록 고민하며 방황했을까?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내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를 대신할 그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는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무리를 따라 나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이들 무리는 그 동기가 무엇이었든 (단순히 기적을 더 보고 싶다는 호기심만은 아니었으리라 짐작됩니다만), 그들의 필요를 정확하게 채워줄 수 있고, 또 채워주기를 즐거워 하는 대상을 따라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 화자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소개하는 두 번째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났을 때, 우리의 모든 재원(財源)이 다 소진(消盡)되었을 때, 우리의 실존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임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빌립보서>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리스도의 영광은 단순히 그분의 능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따르는 무리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예수님의 동기는 일관되고 한 결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동기에 대해서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막 6:34)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뿐만 아니라, 채워주고 싶어 안달하고 계신 분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무리의 배고픔을 자신의 배고픔과 동일시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쳐다보신 것은 얼마나 많은 무리가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가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수가 얼마이든 그 속에 허기지고, 상실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보살펴 주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함께 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히 4:15)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행여나 예수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분이 아무리 능력이 많고, 동정심이 많다 한들 무슨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자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 받기를 아예 포기하는 편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2차 대전 동안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데도, 그토록 애절하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완전히 잊고 계신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를 기억하실까? 혹시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홀로코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놓고 수없이 기도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어, 그분이 나를 완전히 잊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의 관심사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무리들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기진 이들 무리를 어떻게 먹일 것인가를 놓고 제자들보다 먼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나를 기억하실까? 혹시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홀로코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놓고 수없이 기도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어, 그분이 나를 완전히 잊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의 관심사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무리들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기진 이들 무리를 어떻게 먹일 것인가를 놓고 제자들보다 먼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처럼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보다 무리들의 필요에 먼저 반응하셨다면, 나 역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필요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고독과 외로움, 실망과 좌절, 허기와 갈증으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주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듯이, 오늘 나를 향해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