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께서 우시니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28-37약 10분 분량
설교를 위하여 긴 본문을 택했을 때 설교자는 크게 준비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 자체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한 두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고자 할 때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까지 덧붙여 말해야 하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전체의 길이는 그렇게 짧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본인은 단 한 절 즉 <성경> 전체적으로 가장 짧은 한 절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셨다”(35절)입니다.
그분은 왜 우셨을까요? 우리는 가진 자나 힘센 자의 눈물은 잘 믿지 않으려 합니다. “악어의 눈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나일’강에 사는 악어는 사람을 보면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도 <햄릿>이나, <오셀로>나 기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에서 이 전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기는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슬퍼서 흘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의학용어에도 얼굴신경 마비의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악어 눈물 증후군”(crocodile tears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환자들의 침샘과 눈물샘의 신경이 뒤얽혀 마치 악어가 먹이를 먹을 때처럼 침과 눈물을 함께 흘린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어의 눈물은 진짜 눈물이 아니라, 먹이를 잡아먹고 거짓으로 흘리는 눈물이라 하여 위선적인 행위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위정자(爲政者)가 흘리는 눈물이나, 강자(强者)가 약자나 패자에 대하여 흘리는 눈물 등이 악어의 눈물에 해당될 것입니다. 선거에서 이긴 정치가가 패배한 정적(政敵) 앞에서 흘리는 눈물 등도 이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물. 예수님의 눈물도 그야말로 악어의 눈물이었을까? 어쩌면 두 자매의 이웃들이 흘렸던 눈물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 관습 중의 하나가 우리의 오랜 장례 행습과 유사한 점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가급적 큰소리로 우는 것을 죽은 자와 유족(遺族)에 대한 예의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장례식에 가보면 상주(喪主)들이 조문객이 올 때마다 “에고, 에고”하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는 그냥 조용히 있다가도 누군가 오면 이렇게 곡(哭)을 하는 것이지요. 가족이 흘리는 눈물을 악어의 눈물로 감히 평가절하(平價切下)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이와 같은 태도는 분명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가족도 이러할진대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슬퍼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로부터 늘 인정머리 없다는 평가를 받는 본인의 솔직한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분은 ‘나사로’에 대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실 그분은 “나사로가 죽어 기쁘다”고까지 하셨습니다(15절)! 그런대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분은 단순히 슬퍼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이웃이 우는 모습을 보며,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치 “(말이) 콧김을 뿜어내듯”, 아주 격렬하게 반응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은 지금 극도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말대로, 그분께서 분노하시는 대상은 죽음과 그 배후에서 죽음의 권세를 지닌 ‘사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칼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지금 “투쟁을 준비하는 투사”로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한 판 극적 대결을 벌이기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놓고 슬픔과 분노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불의(不義)하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본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놓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슬픔과 분노를 함께 느끼셨는지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닌, 그냥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런 반응이 나와 버렸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는 ‘마르다’가 고백했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이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메시아’나, ‘헬라’인들에게 친숙한 최고의 신 ‘제우스’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그는 예수일 뿐인 것이지요.
너무나 인간적인. <성경>을 보면 ‘마르다’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아들”은 슬퍼하고 분노했던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여인의 뱃속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자랐으며,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지혜와 지식을 쌓아가야만 했습니다. 사막 길을 걸을 때는 목이 말라 ‘야곱’의 우물가에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여인에게 마실 물을 구해야만 했으며,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고 난 뒤에는 극도로 기진맥진해 있어 ‘사탄’으로부터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름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부활 이후에도, 그분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먹으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바람과 요동치는 파도조차도 배 안에서 곤히 자는 그분을 깨우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약해도 되는 것일까?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겠으며, ‘사탄’을 대적할 수 있을까! 주변에 몰려 있던 ‘유대’인들의 생각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절). 이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무기력과 동일시 한 것이었습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그저 속수무책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영웅이나 지도자는 이처럼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글에서 ‘하이에나’는 평소에는 감히 사자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사자가 혼자 있거나, 그가 늙고 힘없게 보이면, 이 녀석들은 득달같이 공격해 옵니다. 우리네 정치판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떡하든지 상대방의 허점이나 실수를 발견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사실 정치판은 맹수가 사는 정글보다 더 험한 세상이지요. 그러므로 적어도 정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완벽하고 완전무결해야 함은 물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냥 예수로 살아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흘린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는 연약했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창피하게도 그 같은 모습을 사람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저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분들은 모두 스스로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서민의 대변자로 자처합니다. 그리고 경쟁자를 향해서는 “차가운 얼음공주”, “기득권층의 대변자” 등과 같은 꼬리표를 붙입니다.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재래시장이나 독거 노인정, 고아원 등을 방문하고, 청년 실업자들을 만나고, 사회 정의를 외치고, 홍보용 사진도 넥타이를 맨 정장이 아니라 하나 같이 가벼운 와이셔츠 차림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도 이와 같은 것일까? 사실 그렇게 생각할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 하는 말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제 곧 엄청난 기적을 행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판에, 눈물은 무엇이며, 슬픔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면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당당해 하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모든 슬픔을 한 방에 날려버릴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사건이 곧 일어날 참인데, 그 무슨 눈물이 여기에 끼어들다니요!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분께서 진정으로 슬퍼하셨다는 것밖에는 달리 없어 보입니다. 불과 몇 분 후에 일어날 환호와 기쁨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고, 지금 당장 흘러내리는 눈물은 눈물대로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 그분의 성정(性情)이라는 말입니다. 내일 맛볼 즐거움을 생각하다보니 지금 당면한 슬픔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슬퍼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거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가슴이 따뜻한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동료인간의 슬픔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냥 슬퍼지더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곧 목격하게 될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기적을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보여줄 부활과 생명의 영광스러운 기적 때문에 슬픔을 참으신 것이 아니라,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의 기적을 일으켜 주십사고 간청하셨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기적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혼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동기를 엿볼 수 있으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목자 없는 양처럼 떠돌아다니던 그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고 <마가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막 6:34). 그럼에도 나는 이와 같은 기적들을 대할 때, 그 엄청난 결과에 도취되어 기적의 동기에 대해서는 자주 간과해 버립니다.
사랑 때문에. 즉 왜 그리스도가 예수가 되기도 하는지에 대해서 마음으로 크게 와 닿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놓고 우신 것은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무슨 계산이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음을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한 결 같이 인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36절).
“독생자”(獨生子)가 의미하는 바가 “스스로 드러냄” 즉 “진심” 내지는 “흉금”(胸襟) 일진대,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진심”을 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세 남매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은 예수, 즉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유대’ 공회가 그렇게 힘들어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즉 하나님의 진심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은 마음으로 통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도 ‘유대’ 공회만큼이나 힘들어 하기는 매 일반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힘들어했다면, 나는 반대로 “왜 그리스도가 예수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즉 나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과연 그분께서 나를 향해서도 동일한 진심을 지니고 계실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만나고 보고 있습니다. 교회를 지나칠 때마다, 누군가 전해주는 전도지를 볼 때마다, 정답은 판에 박은 듯이 나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적어도 내 기억이 미치는 한, 어릴 적에 부모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부모님 품에 안겨본 기억도 없습니다. 물론 나는 지금 내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요. 다만 우리네 어르신들은 사랑의 표현에 서툴렀을 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에 있어 나는 지극히 서툴고 힘들어해왔던 것이지요. 당연히 그리스도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심이 너무나 자주 전율(戰慄)로 다가오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분께서 나를 향해서도 동일한 진심을 지니고 계실까?” “내가 즐거워할 때 그분도 함께 즐거워하실까?” “내가 분노하고 슬퍼할 때 그분도 역시 같은 기분이실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가 정답을 말해 준다 해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느끼고 체험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것도 내 주변에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일을 통해서 말이지요.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서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