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일곱 번째 기적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38-44약 13분 분량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이 장면은 <나사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극적인 절정 내지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화자가 일곱 개의 <기적 이야기> 중에서 이 이야기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요즈음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기독교 신앙 서적에 이런 유의 책이 많이 알려져 있지요),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이야기는 <공관복음> 모두에서 소개하고 있으며(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누가복음>은 이에 더하여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습니다(눅 7:11-16).
‘요한’ 화자도 이들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는 이들 이야기 대신에 <나사로 이야기>를 예수님의 그 모든 기적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가던 시체가 되살아났다는 이야기의 내용도 그렇습니다만 (이 점에서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되살아 난 것과는 기적의 규모면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만), 기적의 시기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배치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 즉 <수난설화>와 연계시키고 있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 당국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던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원인도 바로 이번 일 때문이 아니었습니까(11:45-48)!
하지만 <공관복음>은 다르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유대’ 공회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던 것은 그분께서 성전에 들어가 한바탕 소통을 벌인 것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공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왜 <공관복음>은 이처럼 엄청난 사건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지 정말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나사로 기적”의 역사성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의문을 제기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작고한 유명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조차도 본문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나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중략) 주후 30 년경에 예수께서 한 시체를 실제 되살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죽어있는 자들에게 부활과 생명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에 여러 문제점들이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오래 전 그날 ‘베다니’에서 진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는 여전히 지금도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점이다(<요한복음>에 대한 그의 주석서 중에서).
그는 그날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오늘 나에게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실존주의적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견해로 인해서 그를 두고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으면 보리라. 불행하게도 ‘바클레이’는 그 엄청난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사도 ‘도마’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20:25).
그렇습니다. 서양 금언대로,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입니다. 동양에서도 똑 같은 주장이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사실 이 두 선언은 모든 과학적 탐구와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주장이나 선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거를 통해서 확인하고 증명하기 전에는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함부로 믿고 따라서는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기 위해서는 증거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증거들을 모으고, 수집하고, 분석한 연후에야, 어떤 결과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결과나 결론은 다른 누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같은 실험을 반복해도 매 번 같아야 합니다. 그럴 때, 가설(假說)이나 이론(理論)은 학설이 되고 사실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진화론은 이론이지 학설은 아닌 것입니다. 반복할 수도, 관찰할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소위 “귀납법적 방법론”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실험 과학”(operation science)은 귀납법적 방법론에 근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쉽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클레이’도 ‘도마’도 증거 없이는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경구는 결코 틀렸다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과학적 방법론에는 치명적인 한계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방법론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재적인 한계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한계가 그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한계와 관련해서, 과학적 방법론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관찰과 반복 실험이 가능한 것들에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볼 수도, 만질 수도, 관찰할 수도, 반복 실험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슨 수로 이들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요?
두 번째 한계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오류와 편견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과연 나는 내가 관찰한 것이 백퍼센트 정확한 것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나는 내가 본 것에 대해서 매번 정확무오하고, 공정하며, 객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이성(理性)은 오류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타락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나 신탁은 어떻습니까? 그 진위여부를 무슨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은 과학적 방법론의 대상도, 이성적 탐구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새로운 방법은 없을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대안이 그것입니다. 그분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뒤집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보리라”(40절).
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히브리서>도 같은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히브리서> 화자의 간증인 즉은 이전에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렇게 보기를 바라던 것들이, 믿음의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니 비로소 보이더라는 것이지요. 다시 강조하자면, 화자는 증거들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믿음은 나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에베소서>의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축복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믿는다”고 말하기보다는 “믿어진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믿어지지 않는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믿어진다는 사실이 축복이자 특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시체가 놓여있던 동굴 앞으로 가서, “나사렛아, 나오너라!”하고 외쳤을 때, 그가 하얀 세마포로 온 몸이 휘감긴 채 컴컴한 동굴로부터 서서히 걸어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이 장면을 목도하던 ‘마르다’와 ‘마리아’, ‘도마’를 비롯한 사도들, 그리고 수 없이 많은 무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충격과 경악으로 눈알이 뒤집혔겠지요. 나는 역사적 현장이 아닌, 한 낱 TV 드라마를 통해서 이 장면을 보았을 뿐인데도 당시 이렇게 되 뇌이고 있었습니다: “아, 저것이 바로 마지막 날 나의 경험이 되겠구나. 정말 예수 믿기 잘했네.”
<성경>의 어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을까? 태초에 창조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가 보는 창조 직후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은 바다”로 뒤덮인 세상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그 모든 것을 뚫고 비치기 시작합니다(참고. 창 1:2-3).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분해와 소멸과 혼돈과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가던 ‘나사렛’을 향하여, “나사렛아 나오너라”하셨을 때도 생명과 질서와 빛의 재창조가 장엄하게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감히 어느 누가, 어떤 피조물이 이 능력의 말씀에 저항하며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의 능력과 피조 세계의 즉각적인 순종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수 10:12-13)
“나사렛아 나오너라.” 이 짧고도 간결한 한 마디 말씀에 그 모든 자연 법칙들이 일순간 작동하기를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나사로’를 구성하고 있던 원소들과 화학물질들이 서로 연락하고 결합되고, 생명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가 다시 살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사망이 그 권능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세력이 패배하는 순간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희망하고 고대했던 내일 그곳에서의 부활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며칠 후면 ‘나사로’가 아닌 예수님 스스로 다시 한 번 이 엄청난 사건을 재현(再現)해 보이실 것입니다. 그가 보이실 부활은 ‘나사로’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사로’는 살아난 후 다시 죽어 마지막 날의 부활을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영원한 부활을 보이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해주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에 태초의 엄청난 창조의 순간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순간도 동일한 믿음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1-55).
그리스도의 믿음.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셨고, 그분은 그것을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련한 우리 ‘마르다’, 어찌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건만(39절상), 그녀는 불가하다고 말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다’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하).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무덤을 다시 파헤쳐 시체를 꺼내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오만불손(傲慢不遜)하며, 반사회적이기 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났습니다. 그들 모두 ‘나사로’가 살아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믿음 때문에 이와 같은 영광의 기적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마르다’의 믿음도, ‘마리아’의 믿음도, 이웃의 믿음도 아니라면, 과연 누구의 믿음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믿음 때문에 영광의 기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기도를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참고. 41-42절). 감히 어느 누가 이처럼 대담한 기도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철저하게 하나 되고, 친밀하며, 완벽한 믿음이 없고서야 말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은밀하게,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믿음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지요: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절).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믿음은 곧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중략)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또는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6-20)
기독교 삶은 믿음의 삶이며, 그러한 삶의 토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있다는 선언입니다(16절).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대한 헌신과 신뢰의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돌을 옮겨놓으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믿음”과 “돌을 옮기는 행위”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라면, 왜 예수님은 쓸데없는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 왜 쓸데없이 “돌을 옮겨 놓으라”(39절상)고 요구하시는 것일까? 선물이면 그냥 주면 될 것이지, 그 선물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요구는 왜 하시는가? 왜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왜 은혜와 요구가 양립하도록 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기적을 행함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꼭 누군가를 참여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같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하인들로 하여금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2:7-8). 왕의 신하도, 자기 아들이 죽어가니 와서 고쳐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아들이 살았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요구하셨습니다(4:50). ‘베데스다’ 연못가의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5:8).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을 향하여, “(무리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고 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는 더욱 황당한 요구를 하신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맹인의 눈가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서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참고. 9:5-6). 소경에 대한 요구치고는 너무나 가혹하지 않습니까? 그냥 고쳐주어도 될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 과연 우리의 참여나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복음은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비로소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들 질문에 대해서 속 시원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윌터 브루그만’의 말대로,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와 함께,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의지에 반(反)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일관성이 없으며, 때로는 상충(相衝)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성(理性)의 눈으로 바라볼 때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나 주권(主權)이 이성의 영역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우리가 “옮겨놓아야 할 돌”, 즉 “무지(無知)나, 오만(傲慢)이나 편견(偏見)의 돌”이 아닐까요?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요구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적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리의 순종이 기적의 필요조건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무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리의 의지에 반해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무리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요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고, 주(主)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4-35)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