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네 남편을 불러 오라(II)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8-3약 11분 분량
진단과 선고. <로마서>를 <신약>의 모든 서신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는 “죄”와 “칭의”에 대한 탁월한 논증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 세 장에서 “칭의”에 앞서 “죄”의 문제를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롬 1:18-3:31). 그는 죄에 관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즉 모든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 선언에 따르면, 성철 스님도, 법정 스님도, 이순신 장군도, 테레사 수녀도, 김수한 추기경도, 그리고 안중근 의사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도의 두 번째 결론은 무엇일까요?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3-18)
그의 두 번째 결론은 개개인의 죄질(罪質)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각인(各人)의 죄질을 논하면서 신체 각 부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 즉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부패하고, 타락하여 단 한군데도 온전한 구석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사도의 두 결론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각 사람은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타락하여 도저히 구제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의(名醫)의 진단은 그대로 수긍하고 받아들여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치료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축복과 은혜의 시작인 것이지요. 그러나 대개 그렇지 못합니다. 소극적으로는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에서부터, 적극적으로는 이런 저런 이유나 근거를 가지고 항변하고 반박합니다.
사도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크세 세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부류가 소위 “쾌락주의자”입니다. 쾌락주의자란 진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무신론자를 통칭하는 단어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가 진리를 알고 있느냐 또는 모르고 있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정도의 차이 뿐입니다. 사도는 쾌락주의자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로마서> 1:18-32 사이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쾌락주의자에게는 삶의 기준이 될 만한 가치체계가 없습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취합니다. 나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꾑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사도가 분류하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흔히 “윤리∙도덕 주의자”로 부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를 <로마서> 2:1-16 사이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시대에는 매우 수준 높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통칭합니다.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이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높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자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오히려 존경을 받아 마땅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그가 아무리 높은 “의”(義)의 수준을 세워놓았다 한들 결코 하나님의 완전함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보는 그 수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흠 없고, 점 없는” 완벽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1:19). 완벽주의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보다 현실적입니다. 즉 그는 자신이 세워놓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살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 높은 기준을 적용하려 애씁니다. 바로 여기에 도덕주의자의 억지와 위선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결국 도덕주의자는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사람을 심판하는 근거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야말로 높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다간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참으로 공명정대한 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을 만나볼 차례입니다. 그는 다름 아닌 종교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로마서> 2:17-29 사이에서 만나보게 되는데, 사도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반 요구와 기준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할례도 받았고, 제사와 예배도 드리며, 기도도 드리며, 일체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롬 2:17-19).
과연 이런 사람을 죄인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사도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종교인 역시 쾌락주의자나 도덕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이나 정죄를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가요? 사도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롬 2:25).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과 동일하며, 따라서 정죄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선언입니다. 사도는 이어서 강조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위선과 억지. 결국 “네가 어디 있느냐?” 또는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직면해서 모든 죄인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하나 같이 일관되고 한 결 같습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숨기는 것입니다. ‘아담’이 나무 잎으로 나신(裸身)를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듯이 말입니다. 다만 가면의 형태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이방인 무신론자의 가면은 “쾌락주의”요, ‘헬라’ 철학자의 가면은 “윤리∙도덕”이며, ‘유대’인의 가면은 “종교”일 것입니다.
‘수가’ 성 여인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은 무엇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 하고 있습니까? 이 여인을 단순히 쾌락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지나친 판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여인의 입장에서 다섯 번씩이나 결혼을 했어야 할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은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상해 등으로 남자들이 파리처럼 죽어가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과부는 구걸을 하거나 창녀가 되거나 아니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남편이 다섯이라면 이 여인은 남편을 잃을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살아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이 다섯 번 결혼을 했다 해서 죄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여섯 명의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인 스스로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17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여인의 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니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
지금 여인은 남편이 아닌 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죄입니다. 여인이 정말 꺼내놓기가 싫었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주제이지요.
여인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까? 아닙니다. 대화의 주제를 바꿉니다. 마치 권투선수가 상대 선수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듯, 예수님의 질문과 초청을 피하고 있습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보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가면입니까? 여인이 본능적으로 들고 나온 가면은 소위 “거대담론”(巨大談論), 즉 종교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배와 ‘예루살렘’을 들먹이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차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대담론은 누구나 좋아하는 주제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직접 가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흔히 이 시대 진보 인사로 대접받는 사람들의 단골 메뉴는 민주와 자유, 민족과 통일, 인권과 복지, 환경과 세계 평화 등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처럼 거대담론을 좋아할까? 그것들로 나를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진정한 자아를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은 위선으로 끝나지 않고 때로는 억지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최근 선거철을 맞아 느닷없이 모든 초등학생들에 대한 무상 급식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아주 형편이 어려운 일부 학생에게만 지급하는 현재의 무상 급식 제도는 수혜자들에게 일종의 수치심을 유발하므로 비교육적일 뿐만 아니라, 무상 급식은 헌법에 명시된 의무교육의 일환이니 마땅히 모든 학생들에게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제안을 싫어하겠습니까? 내 자식 공짜로 밥 준다는데. 기왕이면 교과서도, 교통비도, 교복도, 저녁까지 모두 무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필요한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면 될까요? 당연히 국민 세금에서 지출해야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자신의 월급에서 매달 십일조를 떼어서 옆집에 사는 불우한 이웃에게 주라고 하면 찬성할지 모르겠습니다.
거대담론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대의명분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누군가는 헌신을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좋아하는 거대 담론 중의 하나는 세계 선교 내지는 제자훈련일 것입니다. 신앙적 양심이 있는 자라면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서라도 거부해서는 안 될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나 또는 일대일 성경공부로 초청하기 위해서 먼저 관계 맺기를 시도해 본 적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그 일이 두렵고 힘이 들어, 이는 생략하고 세계 선교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나는 이전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 누군가 영적인 주제로 대화를 몰고 간다는 느낌이 들면 피상적 종교 문제로 주제를 바꾸거나 그 사람을 멀리했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했고, 두려움이 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믿고 헌신하게 되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거나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 기도 제목들이 이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대부분의 기도 제목들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피상적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거나 해 달라거나 하는 등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없습니다. 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간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두렵거나 또는 게으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강의실에서도 기록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하는 학생치고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 없습니다. 우리는 기록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사고와 논리를 구체화하고 정량화합니다. 객관적 지식이 주관적으로 내 속에서 육화(肉化)되는 것입니다. 간증 문을 한 번도 써보지 않는 성도, 결단과 헌신을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발표해 본 적이 없는 성도, 구체적인 기도 제목이 없는 성도. 그래요. 그는 계획과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멀어진 사람입니다.
초청. 이 여인은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끝까지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절).
여전히 여인의 주제는 종교적 문제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항거하고 거부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온화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라”(26절). 초청의 말씀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는 말씀입니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무엇이 그리도 아쉽고 부족하여 한사코 거부하고 거절하는 이 여인에게 이토록 포기하지 않는 관심을 보이시는 것일까요? 나에게도 이 말씀이 들립니까? 아니면 “수가 성 여인”처럼 그럴 듯한 주제로 귀를 막고 있습니까?
칠십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면서도 채워지지 않은 영혼의 갈증 때문에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를 썼던 이어령 선생은 회심 후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를 썼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 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방물이 그 위에 떨어질지라도
용서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느냐고
더는 걱정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