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3:8약 11분 분량
(Jn 9:18-33)
몇 년 만에 외국 생활에서 돌아온 아들 부부와 오래 만에 식사를 함께 하면서 내 아버지는 달라진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셔야만 했습니다. 첫 숟갈을 뜨기 전에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하는 아들 부부의 모습 말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내심 못마땅했지만 그나마 이 아들이 장남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유학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국내 유수 대학교에 직장이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거의 반년이 지나도록 집에서 무위도식(無爲徒食)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습니다. 참다못해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밥 먹을 때마다 기도하는 그 잘난 하나님이 어찌 네 직장하나 구해줄 수 없단 말인가?” 그분의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신 것이겠지요.
“도대체 당신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저들이 어쩌다가 골수 예수쟁이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까?” 누가 이렇게 내 아버지에게 물어본다면 그분은 무어라고 답하실 수 있을까? 아마도 아주 귀찮다는 듯이, “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내 아들에게 직접 물어봐.” 뭐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직접 물어보셨다 한들 속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 자신도 내가 어떻게 거듭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참고. 요 3:8)? 누가 바람을 보았으며, 누가 성령을 보았습니까?
이웃들. 이처럼 볼 수 없는 것을 보려는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자기네들 사이에서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종교 전문가에 물어보아야겠다며, 맹인이었던 자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옵니다. 참 딱하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본인으로부터 이미 대답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또? 그렇게도 할 일이 없었던지 말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에 관하여 무엇을 더 알기를 원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굳이 일의 본말(本末)을 알고 싶었다면 차라리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가 그 모든 일의 당사자였으니 말입니다.
오래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업 시간에 들은 강의 내용에 대해서 이해가 잘 안되면 선생에게 물어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일 것입니다. 모르는 것 있으면 질문 하라고 아무리 독려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수업이 끝난 후에 동료 친구에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이게 별 소용이 없는 일임을 곧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경이 소경에게 길 안내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이들 이웃이 무엇을 알고 싶어 이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전문가들. 이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역시 이미 이 사람을 불러 한 차례 심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소경의 이웃처럼 자기네들 사이에서도 이견(異見)이 분분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신학적으로 완벽합니다. 즉 누구든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 죄를 범한 것이 되니, 예수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론이 그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가 죄인이 맞기는 한데, 어찌 죄인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기들의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1);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시 146: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 29:18);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7)
“자가당착”(自家撞着)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진리를 찾는다고 하지만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피해만 자초하게 되었다”는 남당정의 시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지금 이들 ‘바리새’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지 않고 안다고 우기다가 자초(自招)한 결과 말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안다고 확신하며 우기고 있는 것일까? 대개 전문가들은 자신이 인지(認知)하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것들을 해석하고 판단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이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엉뚱한 폐해(弊害)를 낳기도 합니다.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 <패러다임 혁명>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 물리에서 고전물리학의 지식으로 현대 양자론을 해석하고 평가하려 했던 시도가 그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과학의 발전을 막은 자가 다름 아닌 과학자 자신이었던 것이지요.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들이 율법의 안경을 통해서 볼 때, 예수가 죄인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죄인이라”(24절).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절하). 일견 겸손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의 태도 같습니다. “불가지론”은 그야말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로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지론”이 극단으로 치우치면, “잘 모르겠다”가 아니라 “잘 몰라야한다” 또는 “알아서는 안 된다”가 됩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전문가라 자처하는 자들이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판단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참고. 막 6:3). 이들이 과연 겸손한 불가지론자인지, 아니면 그의 출생에 대해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인 불가지론자인지 말입니다. 그들의 말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가 죄인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이들의 발언은 바둑으로 치면 연거푸 결정적인 패착(敗着)을 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진실을 알고 싶었다면 마땅히 질문부터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검사가 죄인을 취조(取調)하는 것과 같습니다. 윽박지르고 위협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날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자주 보는 장면입니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일장 연설 내지는 훈계로 쓰고는, “내 생각은 이런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하고 묻습니다. 질문을 받은 자가 답변을 시작하려 하면 그는 자기 생각을 결론으로 마무리해버립니다.
여기서도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놓고서는 의례적인 질문을 한두 가지 던집니다: “그 자가 네 아들이 맞느냐?”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지?” 질문의 의도는 뻔합니다. 즉 “제발 네 아들이 아니라고 그래”이겠지요. 그래야 기적이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사람의 신뢰성을 무너뜨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의 간증은 거짓이야. 기적은 무슨...” 이렇게 되면 당연히 예수의 신뢰성도 함께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아, 인간이란!
소경의 부모. 그러나 부모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습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아들이 맞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맹인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대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자식이 눈을 뜨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주 능수능란하고 노련한 답변입니다. 이 장면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투우(鬪牛)와 투우사(鬪牛士)를 보는 것 같습니다. 목적과 결론을 정해놓고 투우처럼 달려드는 율법 전문가와 이를 교묘하게 피해 달아나는 투우사 같은 부모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멋진 풍자와 해학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과연 이들 부모가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을까?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모른다고 덧붙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냥 모른다고 하면 그만일 것을,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누가 해 주다니요? 아니 언제 누가 해주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다만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화자의 설명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 이러라”(22절).
이들 부모가 마음속으로부터 과연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두려워 스스로 말하지는 못하고 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보소서.”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멸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육체는 멸할 수는 있으나 영혼은 멸할 수 없는 종교 당국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부모는 그렇다 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무서워서야 되겠습니까? 다른 생각을 말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고, 축출하고, 왕따 시키는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서야 되겠습니까? 종교가 전제군주가 되어 온 나라를 획일적으로 몰아가는 나라가 되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국가, 우리 도시를 성시(聖市)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성도(聖徒)였으며, ‘예루살렘’은 성시(聖市)였습니다. 그런대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종교가 권력이 되어버리는 것 말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이 용납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은 퇴출되는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명목상의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이 부모처럼 말입니다. 이런 곳에는 창의성이 없고, 개발과 혁신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성전은 회칠한 무덤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과 비슷한 상황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주기도문”(Lord's Prayer)은 하나님의 뜻이 대한민국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이지,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제도나, 조직이나, 기관이라기보다는 이상(理想)이며, 정신(精神)이요, 운동(運動)이 아닐까요? 그래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정신이 대한민국을 뒤덮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기적의 당사자. 그런데 여기 공회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즉 기적의 당사자입니다. 그는 부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도 다른 것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25절).
이것이 그의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신앙의 토대와 기초를 이루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엉성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을 토대로 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모르는지 확실히 아는 것만큼 더 확실한 지식이 있을까요? 강의 중에 질문을 하라고 하면 많은 학생들이 “뭐가 뭔지 몰라서 질문을 못하겠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보면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얼버무려버립니다. 그 이유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큰 이유는 그나마 아는 것도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영역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지요. 컴퓨터 하드디스크 상에 비어있는 공간과 차 있는 공간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힌 후, 이제 그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즉 그의 체험을 들려줍니다. 설교나 훈계나 아닌 간증(干證) 말입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하).
과연 어떤 설교나 교훈이 이보다 더 강력할 수 있을까요? 이제 간증을 들으며 수세(守勢)에 몰린 쪽은 그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조롱과 해학으로 가득 찬 재판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으며, 재판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볼까요?
“내 간증을 다시 듣고 싶어 하는 걸 보니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나 보네”(27절)
“거 이상하군.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도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하니”(30절)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않고 경건한 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31절)
“창세 이후로 아무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준 자가 없거늘,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겠습니까?”(33절)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인정한 소경이 이처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학적 지식을 갖게 될 줄이야! 반면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안다고 기세등등(氣勢騰騰)하던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무지할 수 있다니! 참으로 기막힌 역전이요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이와 같은 반전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며 모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정의할 수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