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여인이 들은 복음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53-8:11상약 8분 분량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는 어딘지 수상하고 이해가 안 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우선 이야기는 일부 <성경> 사본에는 없다는 해설과 함께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후대에 추가로 삽입해 넣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을까? 무슨 의도로 했든, 본문의 위치가 초막절 관련 본문의 배경이나, 전후문맥의 내용과도 딱히 어울리지 않는데 왜 이 이야기를 이곳에 삽입했을까?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무대의 주인공인 여인입니다. 간음을 하다 붙잡힌 모양입니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요즘처럼 누군가 현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놓은 것도 아니고, 여인 스스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할 일을 미리 알려준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처럼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도 않고 그냥 길거리에서 애정 표시를 했을 리도 없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무신경했다고 말해야 할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누구나 가장 은밀하게 숨겨두고 싶어 하는 그 부분이 속수무책 노출되도록 내버려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우연히 노출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여인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답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재주로 간음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 현장에는 왜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이 여인을 붙잡았을까요? 문을 그냥 박차고 들어가 거의 알몸으로 있었을 여인을 그냥 낚아채 왔을까? 그렇다면 함께 불륜을 저지른 남자는 왜 안 보이는 것입니까? 어디 뺑소니라도 쳐버렸을까요? 아니면 일부러 놓아주었을까요? 아무튼 지금 무대 위에는 여인만 끌려나와 뎅그러니 꿇어앉아 있습니다.
죄를 더욱 죄 되게 함. 아무리 이것저것 생각해 보아도 여인이 무슨 함정에 걸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범행 현장에서 이처럼 꼼짝없이 붙잡힐 리가 없습니다. 요즈음에도 함정수사라는 것이 있듯이, 이 여인도 사람들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대개 함정수사를 통해 얻는 증거물들은 재판과정에서 증거자료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이 함정에 걸렸으니, 그의 잘못이 없다고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함정에 걸려든 것이든, 우연히 발각된 것이든, 여인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음행 의사를 분명히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무죄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여인의 죄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에 비해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은 솔직히 숨길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크고 작은 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의 화자는 두 죄악을 구별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가 돋보기로 확대해서 보여주려는 것은 여인의 죄악이 아니라, 살기등등해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입니다. 이들의 죄악을 심히 죄 되게 보이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인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비와 동정과 관용과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니, 도대체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가 왜 더욱 큰 죄로 보입니까? 이들 자칭 의인(義人)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의 사악한 권능과 본성을 의인화(擬人化)를 통해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죄가 얼마나 치명적으로 교활하고 사악한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0-13)
요약하자면 이것입니다. 즉 죄가 얼마나 사악한가 하면, 거룩하고 선하며 생명을 줄 계명을 이용해서,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역시 자신들의 목적, 즉 예수 잡아 죽이는 일을 위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인이나, 음행에 관한 하나님의 계명 모두 한 낱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이 여인의 음행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별 관심이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 싶다는 일념 앞에 한 여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나 인격이나 명예 등은 한 낱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 여인은 동료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도구 내지는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모습도 얼마나 이들과 유사한가! 나에게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자식이나, 친구는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인가 아니면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인가? 거룩한 소명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 개인적인 야망을 혹시 소명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에게 교회 부흥과 성장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교회의 성도들은 목회자 개인의 영달(榮達)이나 만족을 위한 도구인가 또는 그가 먹이고 보살피고 섬겨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 이처럼 거룩한 소명이 언제든지 끔찍한 해악으로 돌변할 수 있다니!
즐거움과 흥겨움의 초막절 축제가 아닌 게 아니라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소위 거룩한 소명 때문에 음모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있음을 봅니다. 이 여인은 그 소명의 제단 위에 바쳐지는 한 낱 희생양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죄 없는 자 돌로 쳐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이들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을까? 이들의 주장인 즉은, 그 여인은 율법의 요구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간음으로 입증이 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여인은 물론 상대방 남자도 함께 죽여야 합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2).
그런데 이 여인은 과연 유부녀였을까? 그렇다면 결코 죽음을 면할 수는 없는 노릇! 여인의 나이는 얼마였을까? 열두 살 아래였다면 처벌이 면제되겠지만, 열두 살 육 개월 이상이라면 역시 교살 형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가정이나 질문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대적자 들의 관심사는 여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만일 그냥 둔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단으로 몰릴 것이고, 그렇다고 죽이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로부터 비난과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함정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당국 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형 집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든 예수님이든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였다가는 로마 당국의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답변은 보석 같이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이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 아닌 그들을 향한 계시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눈을 바라보라는 계시 말입니다.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4-5)
정말 다행인 것은 이들 모두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았다는 점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고서는 하나 둘 씩 떠나가기 시작합니다(9절). 하지만 그들이 내려놓았던 그 돌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죄는 고백하지도 않은 채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나도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 이제 그 자리에는 자유롭게 된 여인만이 유일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여인과 예수님 두 사람만 남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필사적으로 알몸을 감추려고 예수님과는 감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담’이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잎으로 알몸을 가린 채 나무 뒤로 필사적으로 숨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에게 다가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던 것처럼,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절).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여인을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이 아주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제 곧 무엇을 하시려는지 암시를 받게 됩니다.
여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11절). 여인은 자신의 대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직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여인을 산의 정상으로 데리고 갑니다. 정상에 올라 산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한 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산의 정상, 즉 이야기의 극적 절정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11절).
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입니까! 이 여인은 지금 왜 자신을 정죄하는 자가 없는지, 왜 아무도 자기를 정죄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듣고 있습니다. 왜 아무도 이 여인을 정죄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왜 아무도 그녀를 정죄할 수 없습니까? 예수님조차도 말입니다. 답변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오늘 내가 들어야 할 복음도, 그리고 오늘 내가 선포해야 할 복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듣고, 선포해야 할 복음도 이것입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책하며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 모든 기적들, 즉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 죽어가던 소년이 살아난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요동치던 바다가 잠잠하게 된 기적, 바다 위를 걸은 기적 모두를 합친다 해도,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는 은혜의 말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한 말씀 속에 우리의 모든 소망과 우리의 모든 구원이 영원토록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시다.
그리고 찬양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