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여인이 살아야 할 복음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1-11약 6분 분량
얼마 전 한 제자의 주례를 맡았는데, 그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 이제 삼사 개월 후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는 삼사 개월 만에도 태어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제자의 신부 역시 본인의 제자였으며,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연예인 동정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도 이 제자처럼 연예인들의 혼전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서 마치 무슨 영웅적인 행위라도 한 것처럼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습니다.
혼전정사(婚前情事)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이처럼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혼전정사야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니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혼외정사(婚外情事)조차도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종의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럽 사회는 혼외정사(婚外情事)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가히 지상낙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못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언론에서 종종 보도되고 있습니다만, 주부들이 노래방을 출입하면서 외간 남자들을 상대로 성 매매로 돈벌이를 하는 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이전에 본인이 살던 대구시 수성구에 무려 사천 여개의 노래방이 있다고 하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구청에서 노래방과의 전쟁을 선포했겠습니까. 이처럼 문란하고도 난잡한 성적 타락이 비단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수년 전 미국 성공회에서 한 동성연애자를 교단 주교로 서임하여 교단은 물론 미국 사회 전체가 찬반 논쟁으로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동성애는 분명히 반성경적이라고 하는데 반해, 지지하는 쪽에서는 교회가 동성연애자들조차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무지 무엇이 진리인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만 해도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동성애 자체가 이미 합법화 되어버렸으며, 캐나다의 연합교단이나 미국의 한 장로교단에서는 동성애자를 아예 목회자로 인정하는 쪽으로 돌아서버렸습니다. 이들 국가에 있는 한인교회도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기도 합니다. 나는 이들 목회자가 <로마서> 1장 26-27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해 질 뿐입니다.
복음의 은혜. 이 여인은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와는 달리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그저 추측으로 가름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에 한껏 고무되어 다시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 여러 남자들을 전전하면서 화류계의 여왕으로 살아가다가 나이 60이 넘어서야 명예퇴직을 했다.
둘째, 예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아 근처 교회 회원으로 등록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때때로 옛 날 생각이 나고, 그 때마다 견딜 수 없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면서 살아갔다. 참고로 죽을 때까지 끊기 어려운 세 가지 버릇이 있다고 하는데, 노름과 사기와 바람피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셋째, “어찌 내가 개처럼 토한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보냐”하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이전의 생활과 결별을 한 채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동네에 재활치료 센터를 세워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갔다.
이들 중에서 은혜의 복음에 가장 가까운 생활 방식은 무엇일까요? 셋 모두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자비는 이 여인이 어떤 삶을 살든, 어차피 허용하고 관용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도 끊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이 아닙니까! 아닌 게 아니라, 본인도 성경공부를 할 때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배우는 상대가 <성경>을 모르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게 합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에 큰 흠집이라고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배우는 자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속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 걸려 넘어지기가 일쑤입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과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과는 도저히 조화가 안 됩니다. 우리의 ‘손 롱’군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홍수 이야기>를 읽다가 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홍수로 전 인류를 전멸시키셨습니까?” <요한복음>과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복음의 요구. 사도 ‘바울’은 복음은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여기서 구원은 단순히 살려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죽은 자를 살려줄 뿐만 아니라, 살아난 자가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은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능력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 무지한 자는 반대로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예수를 믿는 순간 바로 죽어서 천국 가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구원 이후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으니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의 요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들었던 “출애굽”의 복음은 그들이 단순히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이 아니라 광복(光復)을 맞이할 것이었습니다. 광복이란 말 그대로 빛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 즉 정체성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소명은 ‘야훼’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에 힘입어, 홍해와 광야의 연단을 거쳐 ‘요단’을 건너고, 약속의 땅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요구이고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로 치자면 “성령 충만의 삶”이 복음의 능력이자 복음의 요구이듯이 말입니다. 은혜가 진정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은혜의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의 생각과 태도가 달리 나타나야 합니다. 은혜는 용서와 자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의이기도 합니다. 은혜와 정의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바라시는 바는, 바로 이 세 번째 생활 방식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하). 회개를 전제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부터의 삶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여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회개할 능력도 없습니다. ‘칼빈’의 “철저한 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으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에 새롭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도 용서의 능력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실로 용서받은 자는, 가장 먼저 자신을 용서하며, 그리고 다시는 죄의 강력한 인력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이 여인을 항상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이제 자존심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발견하고, 꿈과 비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 스스로 먼저 찾아가 빛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전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나누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나누며, 그에게로 데리고 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을 나누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올바른 성문화(性文化) 교육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새 질서의 공동체로, 자유와 해방의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빛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나는 정말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복음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복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