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도마의 의심-이성과 신앙 사이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48약 13분 분량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는 아주 정교하면서도 예술적인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 주제를 아주 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은 직선적이며 진행적인 것으로서 부활절 새벽에 시작하여 이후 일 주일 동안의 일이 다섯 개의 막(幕)에 걸쳐 순서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는 나름대로 독립성을 지니고 있어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1) 프롤로그: 빈 무덤의 증거/부활절 여명의 사건(1-10절)
(2) 제 1막: 막달라 마리아와의 조우/부활절 아침의 사건(11-18절)
(3) 제 2막: 제자들과의 만남 /부활절 저녁의 사건(19-23절)
(4) 제 3막: 도마와의 만남/일주일 후의 사건/절정(24-29절)
(5) 에필로그: 믿음의 본질(30-31절)
오늘 우리가 읽어 볼 본문은 세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도마의 의심-회의주의와 신앙주의 사이에서>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합리적 의심
. 화자는 ‘도마’가 부활절 저녁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고 진술함으로써(24절), 그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도마’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니 그보다 더 궁금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신앙인이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도마’는 항상 그 이름 앞에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 그렇습니다. 그는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의심하는 자의 대표입니다. 화자 역시 숫자 3의 수사적 패턴을 통해서 ‘도마’의 의심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1) “내가 그의 손 못 자국을 보며”; (2)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3)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25절하).
이러한 반복이 주는 효과는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오는 “의심과 회의”라는 모티브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사도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니라(요 4:48).” ‘도마’의 의심도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화자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도마’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같습니다만, 이는 너무 불공정한 처사가 아닐까요? ‘도마’의 인간 됨됨이는, 그가 의심했던 그 순간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도마’에게는 감탄할 만한 면모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친구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제자들에게 그리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자, 일부 제자들은 반대한다. “거기서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8, 16). 필자는 이전에 그의 이러한 발언을 두고 조급하고도 비관적이며 위기를 앞에 두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설교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의 이 발언은 상습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도마’의 이 의심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계몽시대 이후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소위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인류의 최대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의심입니다. “이성과 합리”는 인간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유한 자산이자 자랑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철들면서부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되도록 교육받고 훈련받습니다.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객관적이고도 가치중립적인 자세는 학문하는 자의 전제 조건이기도 합니다. ‘도마’의 의심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까?”
“예수님은 정말 죽음을 정복하셨을까?”
“간절히 바라다보니 생겨난 착각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신들의 순진한 신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마치 오늘날의 많은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처럼 자신이 저지른 비리에 대해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의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도 이렇게 의심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도마’의 의심에는 의미심장함이 있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인간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우리를 책망하는 의심입니다. 세상의 믿음과 의심, 그 사이에 서 있는 의심입니다. 좀 어려운 용어를 빌자면 “신앙주의”와 “회의주의” 사이에 있는 그러한 의심입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 이 말에 핵심이 있습니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 바로 이 말이 ‘도마’의 믿음과 의심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기적을 대합니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기적의 소식이나 간증을 듣고, 읽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들 기적을 모두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내 안에서 여전히 주저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망설임과 유보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나는 말합니다: “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어.”
‘도마’가 믿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봅시다(요 20:25). “다른 제자들”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 말이다. 지난 수년을 함께 해 온 동료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니요! 그러나 잠간만, 이들이 누구입니까? 과연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 한 사람들입니까?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급함, 발 빠르게 도망치는 비겁함을 가진 불안정한 사람입니다. 어떤 일에 돌진해서 뛰어들었다가는 제풀에 나자빠집니다. ‘베드로’가 “예”라고 말하더라도, 행동으로는 “아니요”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습니까? 성급하고 화를 잘 내는 무모한 성품의 소유자들 아닙니까? 가련한 ‘사마리아’ 마을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누가 예수님 옆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 말다툼을 벌였던 속 좁은 라이벌입니다. 말은 더듬거리고 당황해서 뒤죽박죽이 된 설익은 증언을 숨도 쉬지 않고 쏟아 놓은 자들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사실이 이런대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는 이들의 간증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지금 회의(懷疑)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경신(輕信)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특히 교회 안에서 말이다. 과학주의 열풍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신비주의, 비합리주의, 신앙주의가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수많은 간증이나 책들을 통해서 이러한 행태들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도마’의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확인하지 않고는.” 이러한 의심은 믿음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표현입니다. 때로 의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감상이나 마술이 아닌 지식에 의존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사나 기적의 간증에는 일종의 향수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이나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저 많은 기적들에 대한 향수 말입니다. 그 때 일어났으므로 지금도 일어나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잘못된 신학이고, 비성경적입니다. 오늘 필자는 이점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누눈가 기적이 실제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신학적 및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히 조사하고, 규명하고,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씹어보고 구리인지 진짜 금인지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리고 특별한 목적도 없이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오른다든지(왕하 6:1-7),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든지,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결코 유익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뒤죽박죽입니다.
“회의주의”는 재미있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 철저히 조사하는 것,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자세하게 연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교회에는 “회의주의”가 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신앙주의”를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성경>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요. 내가 회의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성경을 믿지 않아요.” 이것은 “회의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反)회의주의 즉 “신앙주의”입니다. 탐구하고 면밀히 조사하고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외는 무조건 믿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게으른 자의 변명이고 책임 회피입니다. 정확한 “회의주의”는 증거에 접근하고, 매복하고, 단서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강바닥을 준설하고, 전화선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덫을 놓는, 사냥꾼이자 탐정입니다. “회의주의”자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 열정적입니다. 진정한 회의주의자는 믿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소원이 일으킬 수도 있는 최면에 빠지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테스트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마’는 진정한 회의주의자, 즉 합리적 회의주의자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불신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건한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의심했습니다. 그는 의심했고, 그래서 그의 믿음은 소문이나 희망적인 생각 이상의 어떤 것에 기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심과 믿음, 어느 쪽이든 교만과 섞이면, 그 혼합물은 독성을 갖는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자신의 의심을 자랑합니다. 둘 다 무서운 일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참된 의심의 수호 성자로 불릴 만합니다. 그의 믿음과 의심은 겸손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성의 한계. 그러나 우리가 ‘도마’를 “겸손한 불가지론자” 내지는 “합리적 회의주의자”로 부르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배하는 이성과 합리에 여기저기 엉성한 구멍들과 함정들이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합리의 한계와 함정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의 이성은 가치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이성은 항상 감성의 지배와 통제 아래 있어왔다는 사실입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역작「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의 이성은 전지전능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도마’는 이미 많은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동료 사도들의 증거 위에, 지난 3년 동안 자신의 체험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과 그 의미에 대해서 스승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웠습니다. 그가 특별히 머리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 하드라도, 원하기만 했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당위성에 대해서 충분히 논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증거들을 원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증거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그가 보는 앞에서 부활을 재현해 보이는 것일 텐데, 이것은 가당찮은 요구입니다. 과학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재현 불가능한 사건을 다루는 소위 기원과학의 영역이고, 또 하나는 실험과 반복이 가능한 그래서 귀납적인 추론이 가능한 소위 실험과학의 영역이 그것입니다. 그는 지금 재현 불가능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은 결코 믿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예컨대, <한국전쟁>을 다시 재현해 보이지 전에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만일 그가 원하는 증거들을 모두 얻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자신도 그렇게 확신했을 것입니다. 즉 부활한 예수님을 볼 수만 있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착각입니다.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도마’는 지난 3년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 왔지만, 한 번도 “제자 됨”의 풍성한 의미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움과, 불안, 초조 가운데 고민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전해 줄 수 없는 운명 가운데 살아 갈 수밖에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예) 내 제자 천 은우(소위 모태 신앙인). 이처럼 우리가 예수에 관한 모든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지식과 자료들을 다 소유한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계시와 은혜. 그렇다면 ‘도마’는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즉 그분께서 먼저 자신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왜 계시가 필요합니까? 두 가지로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이미 언급한 바대로, 우리의 이성은 타락했으며 완벽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로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찾을 수도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 때문입니다. ‘제임스 패커’가 그의 유명한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쓰고 있는 바처럼, 인격체 간의 만남은 단순히 상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馬)이나 나무 등과 같은 비 인격적 존재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즉 그분을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보여주셨다는 점에 있어서, 계시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평”(peace with God)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나타나실 때마다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19, 21, 26절). 다시 숫자 3의 패턴입니다. 여기서 ‘평강’은 ‘샬롬’입니다. 우리말로 단순히 “안녕” 정도의 인사말에 지나지 않지만, 이날만은 예외였습니다.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평강은 “화평”을 말합니다. 이것은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진노와 노여움을 스스로 푸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노를 혼자서 그냥 풀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대신 피를 보게 함으로써 진노를 푸셨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 즉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강은 단순히 정전 협정이나 “로마가 이룩해놓은 평화”(Pax Romana)가 아닙니다.
둘째,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를 가능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평화”은 두려움과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는 무겁고 어둠침침합니다. 사도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 문은 문자적으로는 고독과 두려움의 문입니다(19절). 그리고 보다 영적으로는 이성과 합리의 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찾아 오셔서 고독과 두려움과 어두움을 몰아내십니다.
‘도마’가 보고 만지고 싶어 했던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증거로 ‘도마’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인가? 상처였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로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주님은 죽음을 이긴 승리를 증명하십니다. 힘을 과시함으로가 아니라, 더 많은 장엄한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외치고 계신 듯합니다: “못 자국 난 구멍, 창에 찔린 자국으로. 보라,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계시와 예배. 도마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증거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까? 증거를 제시받음으로서 말입니다. 일견 그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예수를 만나서 만져 보고 확인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부활한 예수의 현존과 그의 말씀에 이미 압도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겠습니다. 그의 말씀에 압도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도마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아, 역시 예수는 부활했구나! 사실 확인입니까? 아닙니다. 화자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드러내려고 했던, 그러나 그 동안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암시해왔던,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감질나게 해왔던, 신학적 주제가 거대한 화산처럼 폭발해 나오고 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찬양과 경배입니다!!! 이 찬양은 세상을 향해서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아니고, 오직 그의 주, 그의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요 찬양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