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표적 2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5:1-9약 7분 분량
앉은뱅이를 일으키심
(5:1-9)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맞는 말입니까? 우리가 오래 동안 하도 많이 들어왔던 터라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은행이 망해가는 사업자에게 돈을 꾸어주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사업이 번창하여 대출이 필요 없는 사업가에 돈을 빌려주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경제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원리는 비단 인간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세속적 원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도 이를 지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성경>은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원리를 지지해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원리를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뱅이에게도 그대로 적용했습니까? 예수님께서 38년을 무기력하게 앉아있던 이 병자에게 “네가 스스로 일어나면 내가 돕겠다”고 약속했습니까?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은 이 질문에 대해서 무어라고 답하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신하의 죽어가던 아들이 살아난 기적은 우리가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기적과 쌍을 이루고 있는 이 기적은 지금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 결코 놓칠 수 없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처음 기적이 무대 뒤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이번의 기적은 무대 중앙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습. 기적의 배경 설명(1-5절)은 뛰어납니다. 사실적 묘사가 그렇고, 전체적으로 주제를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독자들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도입하고 있는 대조적인 이미지의 사용 또한 그렇습니다.
화자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상세하게 ‘베데스다’ 연못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설명을 통해서 마치 고속 촬영을 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만일 그가 화가라면 필경 사실주의 학파에 속해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나 주변 풍경 그리고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주 사실적이라, 마치 오래 전에 현장에 있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명절”; “예루살렘의 양문”; “베데스다 연못”; “다섯 행각”; ‘삼십팔 년 된 병자’; 등.
이와 같은 사실적인 표현들은 지금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나 전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꾸며낸 이야기나 전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이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임을 강조하려고 이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의도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그래서 무슨 일인가는 일어나야만 하는 그 세상의 모습, 즉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 다섯 절에서 이야기의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는 모습은 어둠침침하고 절망적입니다. 무대는 온통 “눈먼 자”, “저는 자”, 그리고 “혈기마른 자”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스스로 돕기는커녕 제대로 된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조적인 표현이나 단어의 사용은 또 어떻습니까? 예컨대, “‘유대’인의 명절”과 ‘예루살렘’에 관한 언급이 그 중 하나입니다. 이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가 언급했던, “‘유대’인의 결례”나 “여섯 개의 물 항아리”와 병행하는 대조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흥겨운 혼인 잔치에 “‘유대’인의 결례”나 “여섯 개의 물 항아리”를 대조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이곳에서 새 생명의 기적에 “‘유대’인의 명절”이나 ‘예루살렘’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과연 그가 무엇을 대조하려 함일까요? 그리고 숫자 “38”도 범상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떠올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유대’인의 결례”나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흥겨운 잔치에 무슨 기여를 했는가? ‘유대’인의 명절이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예배가 베데스다 연못가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는 일에 무슨 기여를 했단 말인가? 앉은뱅이가 38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었단 말인가? 도움은커녕 무슨 관심이라도 보였단 말인가?
연못의 물이 움직이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우성치는 이 세상에서... 무기력과 무관심, 그리고 무능과 무지. 이것이 화자가 생명의 기적에 대한 배경으로 채색해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은혜와 주권.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장면이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일어나야만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해주어야만 한다는 강렬한 바램입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그 무대 안으로 주님께서 걸어 들어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38년 동안 꼼짝없이 앉은뱅이로 살아오던 한 병자에게 머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도 그분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어찌 빛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들 모두는 한 결 같이 인생의 소망을 엉뚱한 곳에 두고 있었습니다. 요행수나 미신(迷信)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즉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맞으러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다리를 저는 자들이 어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도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혈기 마른 자 즉 손발이 마비된 자가 어찌 손을 뻗어 구원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먼저 오셨고, 그들 사이를 왕래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장 절망적인 한 병자, 38년 된 앉은뱅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의 믿음을 보고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왕의 신하처럼 주님에게 먼저 다가와 구원을 요청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달려갈 수 있는 자도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먼저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6절)?
사실 이 질문은 질문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는 복음입니다. 어둠을 가르고 비치는 한 줄기 섬광(閃光)입니다. 주님의 이 선언은 왕의 신하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는 선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무기력한 세상을 향해 던지시는 주님의 주권적인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어라 답했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정말 낫고 싶습니다. 저를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답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맥 빠지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가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합니다. 그는 지금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도 오랜 질병으로 아주 피폐해져 있는 듯합니다. 우울증에다 자포자기, 그리고 세상을 향한 원망과 적개심으로 내면세계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모두 그를 떠난 것처럼 보입니다. 회복되어야 할 관계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전혀 매력적이지 못한 한 병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은혜의 구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일방적으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말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이 능력의 말씀 한 마디에 그는 즉각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어가고 있습니다(9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생명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이 기적은 그 사람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말입니다. 신하의 아들은 어떻습니까? 그의 믿음으로 아들이 살아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로 살아났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리고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왜 하필 이 사람입니까? 왜 예수님은 공평하지 못한 것입니까? 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그냥 지나치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왜 이처럼 불공평한 것입니까? 그분은 정녕 불의하신 분인가요?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비칩니다. 그렇게 논리적이던 사도 ‘바울’도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비논리적인 억지로 우리의 입을 막고 있습니다.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4-18)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나는 결코 눈 멀 지도, 절지도, 그리고 혈기 마르지도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어. 그러니 하늘도 나를 도와주어야 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