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적에 대하여 (2)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5:36약 9분 분량
요 5:36
기적과 성경. 기적은 과연 <성경>에만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신론(有神論)적 세계관은 기적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다신론(多神論)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부터, 범신론(汎神論)에 바탕을 둔 힌두교, 불교, 뉴에이지(New Age),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그리고 유일신론(唯一神論)의 유대교나 기독교, 및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적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까지도 기적적인 행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 종교의 주장이나 가르침을 정당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기독교는 예수님의 기적을 말하고 있으며, ‘유대’교는 ‘모세’가 일으킨 기적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선지자 ‘마호멧’이 산을 옮긴 기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힌두교나 ‘뉴에이지’ 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매일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공언합니다. 힌두교의 ‘구루’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행하는 “공중부양”(空中浮揚)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뉴에이지’의 선지자로 자칭하는 ‘벤쟈민 크림’(Benjamin Creme)은 누구나 ‘그리스도’라 칭하는 영적 능력이나 예지(叡智)를 받으면 이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으며, 예수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그리스도’라 부르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인격적 실체가 아니라 비인격적 “능력” 또는 “기”(氣)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신론”이 말하는 기적은 초자연적인 개입이 아니라 우리가 설명할 수 없을 뿐이지, 단순한 자연법칙의 유출(流出) 내지는 산물(産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당연한 결론인 것이, “범신론”에서 궁극적인 실체는 자연 그 자체이지 어떤 초자연적인 실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떠한 초자연적인 기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연이 내고, 내가 곧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연주의(Naturalsim)나 과학주의(Scienticisim)로 무장한 무신론(無神論)만이 기적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을 아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성경>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화적 요소들을 다 걷어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 같은 작업을 “비신화화”(demythologizing)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 <신약>에서 기적으로 부르는 모든 사건들은 <성경> 기자들의 신화적 세계관의 발로일 뿐이며, 소위 “역사적 예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불트만’을 딱히 무신론자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신론(理神論) 자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튼 그에게 있어 기적이란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이며, 비역사적이고, 주관적이며,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허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결과일 뿐으로서, 그의 믿음을 증명하거나 진위여부를 가려낼 수도,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도 누가 무어라고 주장하든,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믿음의 결과이고 발로일진대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했든 아니했든 중요하지 않습니까? 기적의 진위여부를 가려내는 일이 정말 이처럼 아무 의미 없는 일일까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그는 기적은 역사적이며, 과학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학과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기적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기적과 관련한 본인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자, 출발점이며, 그 모든 논의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기적에 대해서 세 단어를 동원하여, 삼차원적이고도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기적을 입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말은, 초자연적이며 범상치 않은 사건이나 현상의 한 측면만을 일컬어 기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강조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세 단어는 (1) “능력”(power), (2) “기사”(이적)(wonder), 그리고 (3) “표적”(sign)입니다.
이들 세 단어는 기적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요소이기도 하면서 기적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각각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알아봄으로써, 기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기적을 “능력”으로 부르는 것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측면, 즉 기적의 강도나 규모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렘 10:12), 하나님의 통치(대상 29:12), 홍해의 기적(출 15:6-7; 민 14:17) 등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복음의 능력(롬 1:16),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逐邪)의 능력(마 11:20; 13:58; 눅 1:35), 그리고 때로는 사탄의 능력(눅 10:19; 롬 8:38)을 언급하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기적을 “이적”(異蹟) 또는 “기사”(奇事)로 부르는 것은 기적의 빈도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이나 현상이 아니라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기이한 일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때로 이 단어를 “표적”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구약>은 “출애굽” 당시 ‘이집트’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들을 “이적과 표적”으로 부르고 있으며(출 4:21; 7:3; 신 26:8), <신약>에서는 열여섯 번에 걸쳐 이 단어를 “표적”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 사역과 연관해서입니다(마 24:24; 요 4:48; 행 6:8; 14:3).
셋째, 기적과 관련한 세 번째 단어는 “표적”인데, 이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즉 이 단어는 기적의 목적을 함의하는 단어로서, <요한복음>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요 2:11; 6:2; 9:16; 11:47).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창문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적이 표적으로 기능하는 방식, 즉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창문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수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 즉 대리인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나 능력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출 3:12; 4:38)나, 사사(삿 6:17), 선지자(사 38:7; 렘 44:29)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며, 교회 시대에 이르러는 사도들(행 2:43; 4:16, 30; 8:13; 14:3),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직함을 모두 갖춘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부활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요 2:11; 6:2; 9:16; 11:47; 마 12:39).
기적의 가치. 그렇다면 “표적”으로서 기적이 왜 중요한가? 기적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하기 위함인가? 요술이나 마술처럼 무슨 즐거움을 주기 위함인가? 자신이 속한 종교나 세계관의 가르침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함인가? 초월적인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인가?
예수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기적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참고. 요 9:3). 그러니까 기적이 아무리 엄청나고, 불가사의하다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사건일 뿐이지 기적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으로 부를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은 항상 그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긴 강론을 수반하고 있으며, 이 강론에서 예수님은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화자가 기적을 “표적”으로 환언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표적은 말 그대로 기적에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목적이란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즉 믿음을 강하게 하고 또 자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믿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만 기적으로 인식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 즉 해석 체계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두 가지 양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는 그 자체로써 아무 것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다는 사실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역사(役事)도 있습니다. 그 역시 가공할 만 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금도 그는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으며(엡 2:2),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하여(고후 11:14), 마치 하나님 편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듭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기적과 사탄의 역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기적은 그야말로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서, 어떠한 수단이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명령이나 주문(呪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마귀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 <성경>은 마귀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몇 가지 표지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 (신 18:10-11)
(2) 점성술(신 4:19; 사 47:13-15)
(3)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딤전 4:1; 요일 4:1-2)
(4) 자칭 신이라 하는 자(창 3:5; 사 14:13)
(5) 우상숭배자(고전 10:19-20)
(6) 율법주의자와 금욕주의자(골 2:16-23; 딤전 4:1-3)
이들 표지판들이 기적과 ‘사탄’의 역사를 구분해 주는 중요한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하거니와 그 일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기적이라 부르는 일이 과연 성령의 열매와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판단해 보자는 것이지요. 대개 동기는 그 열매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가 기대하고 소망해야 할 가장 큰 기적이 있다면 무엇이 되어야만 할까요?
가장 비범한 자는 누구인가?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