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단 동편에서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32약 10분 분량
(40-42절)
독재정권이나 공산정권일수록 더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공화국, 인민, 민주주의, 등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북한의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모든 좋은 단어들은 다 망라되어있습니다. 과연 북한을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이 명칭은 북한의 현재 상황에 대한 해학적 표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북한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북한의 공식 명칭을 뒤집어 생각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소위 역발상(逆發想)의 좋은 사례가 되는 셈입니다.
‘예루살렘’도 그렇습니다. ‘살렘’ 즉 ‘샬롬’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도시, 거룩의 도시, 화해와 화평의 도시가 살의(殺意)와 음모(陰謀)와 증오(憎惡)와 감시(監視)와 통제(統制)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배가 있고, 설교가 있고, 성전이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빛이 아니라 어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빛은 오히려 어둠에 둘러싸여 그 광채를 잃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도시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거리는 활기가 넘쳐나고, 늘 새로운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실은 그 도시는 죽어있었습니다. 어둠이었고 적막이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근 삼 년을 쏟아 부은 ‘예루살렘’ 선교의 결과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 왔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피리를 불었으나 그들은 따라 춤추지 않았으며, 슬피 울었으나 그들은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참고. 11:17; 눅 7:32). 오히려 그분을 질시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낙담과 실의를 안고 ‘요단’ 동편이라는 무대 뒤편으로 쓸쓸히 퇴장해야 할 시점이 온 듯합니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곳에서 안식을 누릴 때가 온 것입니다. <전도서>도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분은 그동안 너무나 힘든 사역을 홀로 감당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활동을 접고 일상(日常)의 평범함으로 되돌아간다 해서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으며,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역의 짐을 내려놓고 그야말로 안식년을 누린다 한들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화자도 이에 동의라도 하듯, ‘요단’ 동편을 가리켜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침례로 시작한 예수님의 공적(公的) 사역이 이제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참고. 1:28-34). 사실 ‘요단’ 동편은 ‘예루살렘’과는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대도시의 분주함 대신에 시골의 한적함이, 젊음의 활기 대신에 노년의 무기력이, 꿈과 도전 대신에 상실과 무의미로 상징될 수 있는 곳이 ‘요단’ 동편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무슨 큰일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무슨 새로운 꿈과 비전을 펼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자원해서가 아니라 도망가듯 피해 간 곳에서 말입니다.
묵상의 시공. 내가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 한 후 잠시 서울에 머물 때가 있었습니다. 은평구 신사동이라는 곳인데 당시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곳에 간 첫 주일, 예배를 위해서 찾아간 교회가 목양 침례교회로서, 젊은 전도사가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들어서니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와 두 아이뿐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을 맞이하던 전도사 부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직장 때문에 이곳 대구에 온 이후에도 한 동안 십일조를 그 교회로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난데없이 당시를 회고하는 것은 당시 그 전도사가 내게 들려준 한 간증을 이야기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개척은 했으니 새벽 기도회와 수요 예배는 드려야 했는데, 예배당에서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분의 아내도 있었네요! 아무튼 이와 같은 경험이 훗날 그 전도사의 영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는 시간, 그분을 홀로 대면하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함께 하는 통성 기도, 예배를 위한 대표기도, 신앙 간증, 성경공부, 목장 교제, 이들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이들은 결코 하나님과의 독대(獨對)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만일 대체하려 한다면 내 신앙은 위선이고, 허위이고, 가식이며, 거짓입니다. 하나님과의 독대는 그분의 자녀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엄청난 특권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 홀로 있는 장소를 확보하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피 흘리기까지 합니까?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이 회심 후에 어디를 갔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했으며, 얼마 동안을 그곳에서 홀로 지냈는지 알고 있습니다(참고. 갈 1:17-18). 주일 예배에서 선포할 단 한 편의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가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적한 ‘요단’ 강 저편 광야에서 나라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위대한 설교자 예수께서는 과연 무엇을 하셨을까? 평범한 일상(日常)으로 되돌아 안식을 누리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분에게 일상과 안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늘 하던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화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지나치듯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거기 거하시니”(40절하). 이게 그가 전하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분이 그 해 겨울, 즉 생애의 마지막 6개월을 아무 생각 없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보냈을까? 그리고 그 이듬해 봄 마지막 유월절,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셨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의미 없는 시간, 의미 없는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특별히 ‘요단’ 동편의 그 장소와 그 시간은 그분에게 있어 큰 축복과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그런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정확한 주문은 상상하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해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체험해 보고 교회에서 간증으로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 내가 나의 소명(召命)에 충실할 때, 즉 내 인생의 목적에 충실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화자의 답변을 들어봅시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2절).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운명조차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와 종교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닌, 거칠고 무지한 촌구석 ‘베다니’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있어 안식이란 전적으로 무위도식(無爲徒食)이나 “무활동”(無活動)이 아니라, 정중동(停中動)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든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적”을 구현(具現)하면서 사셨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단 하나의 목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 각각에 각기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나와 <우리교회>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본능적으로 구현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라는 언급에 주목해야 합니다. 적은 무리, 작은 교회, 소그룹이 주는 유익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보다 친밀하고 개인적인 교제가 있고, 위로와 안식이 있으며, 영혼의 치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명의 사도들만을 상대로 깊이 있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하시기도 했지만, 우리가 보듯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 그 자체가 자랑이고, 덕(德)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웃으로 불과 몇 사람만 정해주셨더라면 얼마나 기분이 가볍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내가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으로 서너 사람이면 족하다고 지정해 주셨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오 년이고 십 년이고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태정아, 너는 교회 장로로서, 그리고 경북대학교 교수로서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교회일과 학교 일만 열심히 하면 돼, 그게 네 인생의 목표야”라고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고생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충실한 증인. 도대체 지금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진정 가치 있는 일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북한으로 전단을 날려 보내고, 주민들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알리려고 이런저런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친북 단체나 정치인이 보내는 눈길은 싸늘합니다. 그런 방식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는커녕 오히려 남북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논리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훗날 남북이 하나가 되었을 때, 북한 주민들이 오늘날 침묵하는 남한 사람들을 향해서, “그 때 당신은 왜 침묵하였소?”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친구나 제자나 가족 중에 어느 날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회심을 경험했을 때, 나에게 와서 왜 이전에 그렇게 가까이 지내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주거나 원망을 한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나도 같은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만 현재에 충실해지고 싶을 뿐인 것입니다.
복음의 씨를 지금 여기서 뿌리고 싶은 것입니다. 설령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일이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요단’ 동편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도 씨를 직접 뿌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뿌려진 씨가 추수할 때가 되었을 때, 가서 수확을 하신 것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발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씨를 뿌렸던 자는 침례 ‘요한’이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무슨 새로운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침례 ‘요한’에게 들었던 그 복음이 기억났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41절).
오늘 우리가 비록 슬픔으로,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서라도 씨를 뿌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기에 안성맞춤이거나 무르익은 때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내일은 영원히 내일로 남아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행여 내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 어느 누군가 울면서 씨를 뿌린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전도자의 신실하고도 정확했던 그 증거로 말미암아 오늘 나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말씀을 전하라”고 권고한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훗날 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과연 무엇일까요? ‘브루스 밀런’의 설명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부여받는 것에 대한 필수적인 표시로 여겨지던 사회에서 침례 요한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삶이 다른 차원에서 끼친 영향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떤 증인에 대해서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추천장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모든 설교자, 모든 교사, 모든 증인이 이와 같은 추천의 말을 듣기를 열망하기 바란다.
비전 2012. 하지만 대개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될수록 우리는 축소 지향적이 됩니다. 전도나 봉사 등과 같은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교회 내에서의 행사나 봉사, 개인적인 성경공부 등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나는 성경공부 시간에 여러분들이, “여태 이런 공부는 처음 해 보았다”느니, “다른 교회에서 다른 지도자들은 왜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느냐?”하며 흥분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정확하고 깊이 있는 성경공부는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만, 이것은 성경공부의 목적이 아닙니다. 제발 우리는 이런 식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교인이나 다른 목사가 <성경>을 어떻게 배우고 가르치든 우리가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고 깨달았으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결단이나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될 일입니다.
<성경>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이나 헌신의 주체는 “나”입니다. 그러므로 소감이나 깨달음을 나눌 때에도, 다른 지체를 향해서 설교를 하려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수업시간에 설교나 교훈은 선생이 하는 것이지 학생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헌신의 내용도 막연하게 가아니라, 구체적으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제발 그냥 열심히 살겠다든지, 범사에 감사한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살겠다든지, 어떤 일에 감사하다든지 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입각해서 헌신하는 연습과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 현장의 하나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매 주 예배 시간에 앞서 우리의 목적과 목표를 보고 읽습니다. 하지만 늘 구호에만 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과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올 한 해의 결의나 세부 실천 계획을 세웠습니까? 거창하게 말하자면 비전 2012 같은 것이 있습니까? 예․결산표 말고 말입니다. 동관목장 2012 비전이 있습니까? 교회 학교를 위한 올 해의 교과과정이나 담당 교사는 있습니까? 선교를 위한 실천 계획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