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9과
이삭과 블레셋
김태정 목사창세기 26:1약 48분 분량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26:1)
가족사를 소개할 때에는 부모에 관해서 먼저 진술한 다음에 자식의 이야기로 옮아가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정상적인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야곱 이야기>의 제 1막에서 주인공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가(25:19-34), 이곳 2막에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 이야기>가 굳이 필요하다면 이곳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말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이 이곳에 없다면 <야곱 이야기>의 첫 무대는 오히려 27장과 더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실수였을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이었을까? 의도적이라면 본문의 문학∙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일까?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과제는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과연 내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파악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서 주변의 다른 이야기들 즉 <야곱 이야기>와 <아브라함 이야기>와의 시적인 유사∙대조 반복을 파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한 예로써, 자식이 여러 모로 아비를 닮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 일 텐데도,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 하나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까? 이들 질문들이 본문을 읽을 때 유념해야 할 관전 포인트들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의 범위를 정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두 번째 기근을 알리는 첫 구절은(26:1)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언급한 바 있는 첫 번째 기근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만(12:10), 분명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브엘세바’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끝을 장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26:1)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26:33)
그리고 26장의 마지막 두 구절은(34-35절) ‘에서’의 결혼을 다루고 있는데, 이 내용은 오히려 27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야곱과 에서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다루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이렇게 볼 때 26장은 다음과 같이 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일곱 개의 에피소드는 다시 그 내용이나 무대 장소에 따라 일종의 시적인 유사 반복 내지는 동심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상호관련이 있는 장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장면 1과 5: 하나님의 약속
(2) 장면 2-3과 6: 이삭과 아비멜렉
(3) 장면 4와 7: 우물
즉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브엘세바’에서의 두 번째 약속은(장면 5) ‘그랄’에서 있었던 첫 번째 약속을(장면 1) 간단히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두 번의 거래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도, 나중에 이루어지고 있는 ‘브엘세바’에서의 두 번째 거래는(장면 6) ‘그랄’에서 있었던 첫 번째 거래를(장면 2-3)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물을 파는 이야기 역시 두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유사성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순환”과 “반복”의 구성(plot)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관성과 통일성. 그러나 이러한 반복과 순환의 구성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통일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치 두 개의 다른 전승이 결합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연히 이어지는 질문도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이 과연 처음부터 내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 단위였을까?” “또는 별도의 전승들이 함께 모인 편집적인 복합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견해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역사 비평적 연구가 활발하던 초기에는 후자의 견해가 상당한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전자의 입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내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써,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각 에피소드는 직전에 등장하고 있는 에피소드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1) 세 번째 장면(12-17절)은 처음 두 장면을 전제로 하고 있고; (2) 네 번째 장면(18-22절)의 이야기는 직전의 서술 16절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3)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의 평화 조약을 다루고 있는 여섯 번째 장면(26-31절)은 ‘그랄’에서 있었던 두 에피소드(장면 2-3)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Van Seters).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순환과 반복” 외에도 “직선과 점층”의 구성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긍정은 하면서도, 일부 추가적인 편집의 가능성에 대해서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 있었던 두 번의 <거래 이야기>(12-17절, 26-31절)가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우물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가 세부적으로 추가되면서 전체 이야기가 탄생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입니다(Westermann). 세부적인 편집의 가능성에 대해서 인정은 하면서도 이와는 반대의 입장도 있기는 합니다. 즉 <우물 및 여행 이야기>(17-33절)가 주된 이야기의 뼈대이고,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가하는 소위 <위협 이야기>(1-17절)가 추가로 삽입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입니다(Coats).
이런 세부적인 편집 가능성에 대한 일부 견해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적 통일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혹자는 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1-33절)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잘 짜인 한 편의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이야기는 ‘그랄’과 ‘브엘세바’를 두 축으로 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전반부의 내용을 자주 언급하고 상기시키면서 두 개의 주제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1) ‘이삭’과 ‘블레셋’; (2) ‘이삭’과 하나님(Blum). 사실 두 번째 주제는 첫 번째 주제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다소 뜻밖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주제는 결국 <아브라함 이야기>에 이미 등장한 바 있는 하나님의 언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이야기 속에 산재해 있는 일련의 핵심어들은 모두 하나의 주제를 바라보게 합니다. 본문의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는 셈이지요.
문학/신학적 기능. 그러나 본문의 내적 통일성 여부에 관한 논의보다 더 큰 질문은 본문이 <야곱 이야기> 전체적으로 주변의 다른 이야기들과의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아 본문은 <야곱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 관한 에피소드는(25:20-34) 곧바로 ‘야곱’의 속임수를 다루고 있는 27장으로 연결됨이 마땅할 것인데도, 본문에서는 이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오히려 이들의 아버지 ‘이삭’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점이 다시 과거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블레셋’ 인들이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있는 ‘리브가’를 미혼의 처녀로 여길 수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본문을 통해서 받게 되는 인상은 ‘이삭’이 쌍둥이 아들들 때문에 활동에 무슨 지장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하나님의 축복도 아직 받지도 않은 상태로서, 별다른 재산도 없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두 아들이 출생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Nicol). 당연히 우리의 관심사도 본문 이야기가 ‘이삭’의 생애 중에서 어떤 시기에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본문을 이곳에 위치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적어도 연대기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오히려 <야곱 이야기>의 첫 무대에 두거나 또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에 두는 것이 더 나을 듯이 보입니다.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많은 학자들은 Fishbane의 탁월한 연구 업적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 과에서 제시한 바처럼, 그는 <야곱 이야기>가 교차대구적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본문의 문학∙신학적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도표에 따르면, <이삭과 블레셋 이야기>(26장)와 <디나와 히위 이야기>(34장)는 대칭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체 <야곱 이야기>의 핵심 주제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37-50장)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 이야기의 두 번째 장면에 해당하는 38장은 핵심 주제와는 별 상관도 없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리브가의 약혼>(24장)과 <아브라함의 생애와 죽음>(25:1-6)을 다루고 있는 마지막 두 에피소드 역시 그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생애와 죽음을 먼저 다룬 후에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삭과 블레셋>를 다루고 있는 26장을 현대 독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곳에 두고 있는 것도 분명 의도적인 것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위 도표를 참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6장과 34장은 <야곱 이야기>에서 상호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6장이 없다면 25장과 27장은 연결이 보다 부드럽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34장 역시 33장과 35장 사이에서 흐름을 막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장은 공통적으로 일종의 幕間(interlude)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막간에서 혹시 공통되는 주제나 동일한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까?
두 장의 공통적인 ‘모티브’는 “속임수”와 그로 인한 “갈등”입니다. 26장의 전반부에서 ‘이삭’은 아내 ‘리브가’에 대하여 ‘아비멜렉’에게 거짓말을 합니다(7절). 그는 아내를 “누이”(תןהא, 아호트)라고 속였고, 그 결과 그의 아내는 이방인 즉 블레셋 족속과 “동침”(בכשׁ, 샤카브)을 당할 뻔 한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하여 후에 ‘아비멜렉’은 ‘이삭’을 비난하며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반면 26장의 후반부에서는 비난을 받는 쪽은 ‘아비멜렉’이 되는데, 이번에는 우물 문제로 ‘아비멜렉’의 목동들과 ‘이삭’의 목동들이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 ‘아비멜렉’의 목동들이 저지르는 불법 즉 계약 위반 때문입니다. 34장에서는 동일한 두 주제가 그 순서를 달리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번에는 이방인과의 “동침”(בכשׁ, 샤카브), 즉 그 땅의 ‘히위 인’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자(בכשׁ, 샤카브), 이에 ‘시므온’과 ‘레위’가 이들 족속과 거짓 화평 조약을 맺은 다음 이들이 안심한 틈을 타서 무참히 살해함으로써 “누이”(תןהא, 아호트)의 복수를 합니다. 이 두 이야기 속에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해서 두 장 사이의 유사 상관관계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단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번성하다(26:4; 34:12); (2) 살해하다(26:7; 34:25-26); (3) 가축 떼(26:14; 34:5, 23); (4) ‘르호봇’(26:22; 34:21); (5) 평화, 화평(26:29, 31; 34:21).
이처럼 별 상관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장이 주제나 용어 선택에 있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장에서 모두 족장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야곱 이야기>의 전체적인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서는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요?
우선 26장이 기능하고 있는 바를 살펴보면, <야곱 이야기>와 <아브라함 이야기>의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만 여덟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1, 3, 5, 15, 18(2회), 24(2회)절). <창세기> 나머지 부분에서 그의 이름이 도합 열다섯 번 등장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수임에 틀림없습니다. 단순히 이름뿐만 아니라, 내용이나 주제에 있어서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자는 지극히 신중한 자세로 <이삭 이야기>와 <아브라함 이야기>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26장이 현재의 본문에 위치하게 된 것이 단순한 실수나 일시적인 변덕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점은 각각의 이야기에 앞서 소개하고 있는 두 본문(25:19-34와 11:27-12:9) 역시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정당성을 가지게 됩니다.
두 이야기 사이의 상관관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이삭’이 우물을 놓고 ‘그랄’의 왕 ‘아비멜렉’과 벌이고 있는 갈등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두 에피소드는 반복적 해설 기법의 전형에 속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공부한 바 있습니다만, 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반복화”(recursion)를 통해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 두 이야기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공통점은 두 족장의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즉 26장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 관한 언급이 없으며, 20-21장 사이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대부분이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행적에 관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곳 26장에서 그들의 부모 ‘이삭’과 ‘리브가’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런 저런 발견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면, 25장과 26장은 분명 연대기적인 흐름에서만 본다면 서술의 순서가 뒤바뀐 것 같지만, 문학∙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의도적인 편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26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야곱 이야기>와 <아브라함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두 이야기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드러내 주는데 있습니다.
26장의 기능이 여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이야기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곱 이야기> 내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는 첫 장면부터(25:19-34) 어머니 뱃속에서 싸우는 쌍둥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긴장과 갈등이 요동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이곳에 이르자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고 분위기도 잠잠해지면서 잠시 막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두 아들과는 전혀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조용하고, 수줍어하며, 이웃과는 될 수 있으면 싸움과 분쟁을 피하려 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이런 아버지로부터 고약한 두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앞으로 있을 가족의 분열과 파괴를 예고해 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런 대조를 통해서 화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유약하여, 다투기를 싫어하는 ‘이삭’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아들 ‘야곱’이나 아내 ‘리브가’처럼 권모술수로 상대방을 기만하거나 이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들은 그를 따라 다녔으며(26:2-5), 이웃 ‘블레셋’ 족속의 횡포와 텃세에 밀려 이리 저리 피해 다니며 양보를 요구당하기도 했으나(26:12-21), 결국에는 그들이 먼저 찾아와 화평 조약을 맺자는 제의까지 받게 됩니다(26:26-32). 이들 주민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12, 28-29절). 그런데 왜 ‘야곱’과 ‘리브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토록 힘든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일까? 교묘한 거짓말과 속임수를 써가면서까지!
자료와 편집. 본문의 전승과 관련해서 학자들은 서슴없이 <야훼 전승>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방인 ‘아비멜렉’조차 하나님을 ‘야훼’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야훼 전승>, 특히 유사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의 행적(12:10-20)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내려지는 결론은, 시기적으로 본문 이야기가 세 번의 <아내-누이 이야기>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정 반대의 견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최근에는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훨씬 우세한 것이 사실입니다(Wenham). 특히 5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약속들은 후대 <신명기 전승>의 전형으로서, 왕정 시절부터 전해져 오던 <야훼 전승>에 대한 재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Blum).
신학과 신앙
1. 이삭과 하나님: 약속(1-6절)
첫 번째 무대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이삭’이 어떻게 ‘그랄’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받게 되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이삭’과 ‘블레셋’ 간의 상호 관계도 바로 이 약속에 근거하여 나타난 신비한 결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 언약”을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또는 확대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내용 중에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만 두 번이나 나타나고 있으며,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 또한 “아브라함 언약”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참고, 22:16-18). 화자는 두 언약 사이의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이야기의 배경 또한 유사하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 이르렀더니(1절)
그러나 이 구절은 여러 면에서 문제를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약속의 땅에서 이처럼 기근이 잦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 설정은 분명 직전의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상황과는 연결이 부자연스럽습니다. 25장과 26장의 불연속성에 대해서는 “문학과 역사”에서 이미 상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의 결말은 ‘야곱’이 장자 권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떡과 팥죽을 만들어 ‘에서’에게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면 상정하기 어려운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흉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야기의 일관성을 해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또 한 가지 미심쩍은 부분은 ‘이삭’이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가지 않고 인근 지역 ‘그랄’로 갔다는 언급입니다. 같은 ‘가나안’ 지역 내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이곳만은 기근을 면할 수 있었을까요? 의문은 또 있습니다.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우물을 놓고 ‘아브라함’과 갈등을 빚었던 그 ‘아비멜렉’과 과연 동일 인물일까(참고, 20장)? 본문 이야기 전체를 읽어보면 분명 그렇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도 “아브라함의 우물”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 사이에는 적어도 75년의 간격이 존재하며, 따라서 동일 인물로 보기에 무리가 많습니다.
이런 저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흉년을 연결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주었던 행동과 비교해 보라는 것이겠지요. 과연 ‘이삭’은 그의 아버지처럼 이집트로 내려갈 것인가? 그리고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것인가? 이런 질문들로 해서 이야기는 벽두부터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긴장은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약속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절)
이 장면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연상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2).” 동일한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이삭’에게 나타나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만일 1절과 2절을 연속적인 사건으로 본다면, 그가 이미 ‘그랄’로 옮기고 난 이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은 최소한 ‘그랄’임이 분명해 보이며, 이점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고, 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은 넓게는 약속의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랄’도 그 중 일부이긴 하지만 그 땅의 최남단에서 이집트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라 ‘이삭’에게는 최상의 선택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편 2절은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없는 새로운 명령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는 명령이 그것입니다. 왜 화자는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없는 이 새로운 명령을 추가하고 있는 것일까?
‘해밀턴’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일련의 흥미로운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V. Hamilton, 192쪽.
즉 만일 ‘이삭’이 ‘이집트’로 내려간다면 그의 아버지가 이전에 동일한 상황에서 저질렀던 것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근으로 찌든 그 땅을 버리고 물과 양식이 풍부한 ‘이집트’를 선택하는 것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취할 수 있는 당연한 선택일 것이기에, ‘이삭’을 향한 이런 사전 경고는 더욱 시의적절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롯을 기억하라”는 경구 외에 “이삭을 기억하라”는 경구가 추가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롯’이 ‘가나안’을 버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로움을 선택한 결과는 익히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시점이 약속의 땅에 기근이 창궐해 있었던 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는 더욱 멀게는 <에덴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먹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바 있습니다만, 그 역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해밀턴’이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답변들은 합리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교훈과 권면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답변은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3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2-5절)
하나님의 약속은 삼 중적(三重的)이며,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에 이은 확대로 볼 수 있습니다: 축복과 그 땅과 후손. 3절은 이 약속과 관련하여 새로운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이런 표현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아비멜렉’의 고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소개되긴 했으나(21:22),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물론 이어지는 <야곱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게 될 것이긴 합니다만(28:15; 31:3; 46:4).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보호와 성공에 대한 보장일 것입니다. 새로운 표현은 또 있습니다: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즉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 언약”을(17:7, 19, 21) “맹세”로 부르면서 그것을 재확인하고 계십니다. 아마 이곳에서 말하는 “맹세”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사건 직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맹세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16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니라(22:16-18)
4절과 5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어휘들이 결국 위에서 보는 바처럼 “아브라함 언약”으로부터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삭의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의 바탕 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삭’이 승계하고 있는 이 모든 언약의 축복과 약속들이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의 순종과 헌신에 대한 보상이었지, ‘이삭’ 자신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Wenham). G. Wenham, 190쪽.
‘해밀턴’은 이에 덧붙여, “이삭의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사이의 또 다른 차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경우 약속이 먼저 있었고(12:2) 성취가 뒤 따랐지만(24:1), ‘이삭’의 경우에는 먼저 성취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25:11) 약속이 뒤따르고 있음을 주목시키고 있습니다(26:3). 그러니까 ‘이삭’에게 이 약속은 미래에 이루어질 그 무엇이라기보다 이미 그가 누리고 있는 그 무엇이라는 의미입니다. 화자는 두 번에 걸쳐 ‘이삭’이 누리고 있는 “축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한 번은 그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을 때이고, 또 한 번은 본문에서처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3-5절 사이에서 과거와 미래의 시점이 어떻게 번갈아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삭’은 실은 자신이 이미 ‘기적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이삭과 아비멜렉(7-11절)
두 번째 장면에서 그리고 있는 에피소드는 여러 점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연상시켜주고 있으며(12:10-20; 20:1-18), 비교 연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유사한 주제와 동일한 모티브가 재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삭’은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로 이웃 이방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동기 역시 아름다운 아내를 가졌다는 동일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7절)
‘이삭’이 ‘그랄’로 옮겨갈 당시 자식들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이들이 오래 동안 그 지역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그곳 주민들이 부부인 줄 몰랐다는 사실로 미루어 ‘야곱’과 ‘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삭’의 눈에 비친 이들 주민은 의혹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이며, 이로 인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3절).”
그러나 언급한 바처럼, ‘이삭’이 염려했던 일은 상당기간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는 지레짐작으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8절)
‘아비멜렉’ 왕이 어느 날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로서의 행위 즉 껴안고 애무하는 행동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부부인 줄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행위와 관련해서 화자는 ‘이삭’의 이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껴안다”(קחצ, 차하크)와 ‘이삭’(קהצי, 이츠하크). 아무튼 이들이 부부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는 과정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와는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비멜렉’이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바로’ 왕과 ‘아비멜렉’ 왕에게 각기 역병과 꿈을 통해서 직접 알려주신 바 있습니다(12; 20장).
‘아비멜렉’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당연히 진노와 질책입니다: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9-10절)
‘아비멜렉’의 질책성 질문은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 이와 유사한 장면을 <창세기>의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3:13 4:10; 12:18; 20:9). 그가 던지는 두 질문 중에서 첫 번째는 거짓말을 한 동기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이며, 두 번째는 대답이 필요 없는 일종의 수사적이며 비난성 질책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아비멜렉’은 이전에 보여주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죄를 멀리하려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이삭’보다 윤리∙도덕적으로 한 수 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이삭’을 책망하고 훈계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주장하고 있듯이, 모든 족속이 ‘이삭’을 통해서 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처할 뻔 했다는 사실이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했다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두 번째 질문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법정에서의 논고를 연상시킵니다. 피고는 ‘이삭’이며 원고는 이방인 ‘아비멜렉’입니다. 이런 모습은 <야곱 이야기>에서도 다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훗날 ‘야곱’이 그의 삼촌 ‘라반’으로부터 훈계와 질책을 받는 장면이 그것입니다(31:26-31). 다만 ‘이삭’과 ‘야곱’이 피고로서의 변론 방식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삭’이 보다 간접적이며 완곡한 어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야곱’은 대화 상대를 직접적으로 거명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이삭);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야곱).
이 장면이 보여주고 있는 더욱 큰 역설은 ‘아비멜렉’의 명령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이삭’의 편에서 보자면 이는 해학이자 조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11절)
독자들은 이 명령을 통해서 ‘아비멜렉’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민감한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리브가’ 뿐만 아니라 ‘이삭’까지 단순히 만지거나 접촉만 해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범하다”(עגנ, 나가)는 “만지다” 또는 “접촉하다”는 의미로서 단순히 성적 접촉 이상을 뜻하며, 구약 전체적으로 약 150회 정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의적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부정한 것이나 신성한 것을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부정한 것과(예: 민 19:16, 민 19:22, 사 52:11) 거룩한 것을(출 19:13, 민 4:15, 참조: 레 12:4, 학 2:12-13) 만지는 것을 금하십니다. 하나님 백성들 또한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들이므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치는 것이나 접촉하는 것 또한 저주의 대상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렘 2:3).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자가 판단과는 달리 윤리∙도덕적으로 오히려 그를 능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중적이며 속임수까지 쓰고 있는 ‘이삭’까지 보호해주는 아량과 자비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아내까지 스스럼없이 위기에 몰아넣는 무자비한 행위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설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관한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이 그것인데, ‘이삭’을 보호해 주고 있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 왕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삭’의 두려움과 자가 판단이 얼마나 부질없고 근거 없는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이삭과 아비멜렉(12-17절)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보면 골치 덩이를 제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전에 ‘바로’ 왕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했던 것처럼 이 부부를 추방해 버리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야만 아무도 이들을 범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다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것처럼 이들이 역내에 그냥 살며 생업에 종사하도록 허용합니다. 그 결과 ‘이삭’은 엄청난 수확을 얻게 됩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12절)
‘가나안’ 대부분의 지역이 기근으로 황폐해 있고, ‘이삭’ 자신도 바로 그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갈 계획으로 이곳까지 왔는데, 그 땅에서 농사를 통해서 백배를 수확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이집트’로 내려 갈 필요가 없었으며, 하나님의 축복이 현실적인 영역에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24:1; 25:11). ‘아비멜렉’도 이를 보고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축복이 오히려 그와의 갈등을 야기하여 종국에는 그곳으로부터 쫓겨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점이 두 번째 에피소드와 대조를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가 ‘이삭’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면,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 축복이 반대로 긴장과 적개심을 유발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두 구절은 이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13-14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에 대한 더 포괄적인 증거가 됩니다만, 이런 축복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그랬고, 앞으로 ‘야곱’이 겪게 될 긴장과 적대감의 단초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이웃의 시기심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이전에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고 무효화 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15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15-16절)
‘아브라함’ 시절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만, 그가 이를 따지자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일이라며 순순히 물러났으며 우물의 사용권을 놓고 후손 대에 이르기까지 유효한 계약을 맺은 바 있습니다. 그런대도 보다 소극적인 ‘이삭’은 계약 위반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쫓겨나고 맙니다. 이유는 그가 단순히 강성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훗날 ‘이집트’의 ‘바로’ 왕이 ‘야곱’의 후손들에게 했던 말도 이와 같습니다(출 1:7, 20). ‘이삭’은 순순히 물러났고,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쳤습니다(17절). 이 장면 또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처럼, <출애굽> 사건을 예시하고 예표해주고 있습니다.
4. 이삭과 우물(18-22절)
네 번째 에피소드는 간단한 세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9-20, 21, 22절). 이 세 장면 모두 우물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첫 두 장면에서는 ‘이삭’이 억지로 우물을 양보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반면, 세 번째에서는 되찾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세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주는 일은 구약에서 자주 만나는 이야기 서술 기법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장면은 과거 ‘아브라함’ 당시 있었던 사건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삭’이 ‘그랄’에서 쫓겨나기 전의 상황입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18절)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우물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을 세 번씩이나 연결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이삭’을 추방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에 대한 부당한 행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랄’ 사람들은 따라 다니면서 그를 괴롭힙니다: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19-21절)
광야에서 샘물과 관련하여 ‘야곱’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쓰라린 경험을 세 번이나 거친 바 있고, 그 때마다 본문에서처럼 그 기원과 관련한 이름들을 붙여주고 있습니다(출 15:22-27; 17:1-7). 세 번째로 옮겨 간 곳에서 더 이상의 괴롭힘은 없었고, 비로소 ‘이삭’은 그곳에서 우물을 팔 수 있었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2절)
이 우물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위치보다 ‘이삭’의 고백일 것입니다. 마침내 평화를 찾은 그가 비로소 기억해 내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번성하라”(הבר, 라바흐)는 하나님의 명령은 <창세기> 1-11장 사이에서는 여러 번 등장한 바 있지만, <족장 이야기>에서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생육하라”(הרפ, 파라흐)는 명령은 “번성하라” 명령과 함께 항상 짝을 이루어 나타나는 것이 상례인데, ‘이삭’을 향해서만 세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습니다(4, 22, 26절). ‘이삭’의 이런 고백은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언약의 갱신에 대한 기대를 낳게 하고 있습니다.
5. 이삭과 하나님(23-25절)
‘브엘세바’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 일은 이야기 벽두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향해서 주신 약속을 재확인하고 요약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23-24)
다만 한 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칭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볼 때 이런 호칭은 하등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26장 전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가 ‘이삭’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이삭’에게 복을 준다는 언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삭’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25절)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을 세우고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덧붙여 그가 또 새로운 우물을 파는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발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다시 한 번 갈등과 충돌을 자초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6. 이삭과 아비멜렉(26-31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년간의 분쟁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는 행복한 결말입니다. ‘이삭’과 ‘블레셋’ 사이에 상호 불가침의 계약이 성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계약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배경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정확한 재판(再版)입니다(참고, 21:22-34). 이전과 동일한 장소 ‘브엘세바’에서, 동일한 계약의 당사자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이 등장하고 있으며,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아비멜렉’의 친구 ‘아후삿’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모티브 또한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21:22; 26:28):
26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26-28)
그러나 ‘그랄’에서 몇 차례 당한 경험이 있는 ‘이삭’으로서는 이들의 거래 제의에 다소 냉소적이며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고분고분 피해 다니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았던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발로인지는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아비멜렉’의 대답은 어딘지 비굴하고 아첨하는 태도가 역력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이삭’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먼저 계약을 제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의는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비멜렉’은 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그가 이전에 ‘이삭’에게 베풀었던 호의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 ‘이삭’과 그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11절):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29절)
비로소 ‘이삭’의 의심과 경계심이 풀어진 듯합니다. 그들은 계약을 체결하고 식사를 함께 나눕니다. 고대 근동에서 계약 당사자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는 행위는 계약 체결에 필요한 요식 절차였습니다만(31:54; 출 24:11), 대개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손님들에게 식사를 먼저 대접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로 미루어 두 당사자 간에 불신과 소외감이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0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30-31)
7. 이삭과 우물(32-33절)
32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32-33절)
이 마지막 장면은 ‘이삭’과 ‘아비멜렉’의 역할 사이에 반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물을 발견한 쪽은 ‘이삭’의 하인들이었습니다만 그 때마다 포기하고 쫓겨나야 했습니다(18-21절). 그의 하인들은 다시 한 번 우물을 찾아냈으며, 이번에는 ‘이삭’이 ‘아비멜렉’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우물의 이름을 ‘세바’ 즉 “언약”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삭’은 하인들이 팠던 우물들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들을 그대로 사용해 왔습니다(18절).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 ‘브엘세바’ 역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맺은 “언약의 우물”에서 따온 이름입니다(21:25-31).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물을 얻었다”는 하인의 보고는 단순한 보고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우물 속에는 물이 있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 이런 표현은 불필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이야기 전체를 흐르는 일관된 신학적 주제 즉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기근을 만나 ‘이삭’은 ‘브엘세바’를 떠나 ‘이집트’든 어디로든 가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랄’에 머물라고 명령하셨고, 번성에 대한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아버지의 족적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승리를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진화론의 대 전제는 적자생존입니다. 자연은 적자(嫡子)만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모두 소멸됩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매년 약 5만 여종에 달하는 생명체들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변하는 지구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에서도, 운동에서도, 학문에서도, 예술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단순히 이 원리를 적용할 뿐만 아니라 미화시키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문화나 예술이라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각종 대회나 행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적자를 가려내어 포상하고 칭송합니다. 이 세계에서 2등은 필요 없는 듯 보입니다. 경쟁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끼십니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이 대원칙을 인위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해보자는 인간의 이념적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결과는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의 대 법칙을 바꾸어 보겠다고 나섰지만 결과는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겠다는 시도와 다름없었습니다. 열린 우리당이 집권 4년 만에 바닥을 기는 지지도를 받게 된 것도 그 당의 의장까지 지낸 한 인사가 고백했던 바대로, 이런 잘못된 평등주의를 붙들고 씨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쟁이 없는 곳에 노력이 없고 노력이 없는 곳에 발전이 없습니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여러 매체나 통계를 통해서 확인되는 바로는, 2000년대에 들어 한국 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는 주요 타 종교와의 경쟁력에서 가장 매력 없는 종교로 낙인찍혀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존하기에도 급급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체질적으로 “경쟁”이라든지 “세계화” 등과 같은 용어들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단어들이 세속적이며 인본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재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삭과 야곱.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도 이런 진화론적 주장에 동조하고 계신 것일까? “야곱”의 일생을 관찰해 보면 결론은 “그렇다”로 내려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그는 경쟁의 귀재(鬼才)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계략을 꾸미거나 거짓이나 권모술수를 동원하기까지 합니다. 가족이나 친척도 경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물질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얻어냅니다. 그가 성공에 이르는 길을 유심히 살펴보면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에게 하나님은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성공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런 자를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랑하셨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의 형 ‘에서’가 처음부터 경쟁의 상대가 될 수가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세상은 ‘에서’처럼 단순하고 고지식한 사람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떻습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그늘에 가려 크게 빛도 보지 못하고 평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래야 <창세기> 전체에서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전부입니다. 그나마도 그가 주도적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하고 개척해 가는 적극적인 인물로서가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떠밀리다시피 살아가는 인물로 비치고 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다른 사람과의 마찰이나 싸움을 싫어하며, 주도적으로 자기 것을 챙기기 보다는 차라리 양보하고 물러서는 편을 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가 잘 사는 것을 시기하여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면서 우물을 놓고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오는데, 그 때마다 그는 다른 곳으로 피해 다닙니다(17-22절). 어떻게 이런 사람으로부터 ‘야곱’같은 아들이 태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는 체질적으로 “자연 선택”의 법칙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삭과 아브라함.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칙, 즉 “초자연적 선택”에는 적합한 사람일까? 화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이삭’을 그의 아버지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전에 그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약속을 잊고 ‘이집트’로 피신해 간 적이 있습니다(12:10-20). 당시 화자는 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행동을 평가하도록 초청한 바 있습니다.
이제 똑 같은 상황, 즉 또 다른 기근이 찾아왔고 ‘이삭’은 이를 피해 ‘이집트’와 접하고 있는 남쪽 ‘그랄’로 내려갑니다. 적어도 표면 상 아직 ‘이집트’로 내려가지는 않았으니 그 아버지보다는 나은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삭’이 ‘이집트’로 내려갈 생각이 없었을까? 많은 주석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현현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절). 단언컨대 ‘가나안’ 전 지역에 기근이 들었다면 ‘그랄’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텐데, ‘이삭’이 단순히 ‘그랄’에 정착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이동해 갔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그의 마음을 읽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명령을 풀어 설명해 보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이삭아, 그냥 그 땅에 있어라. 네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이집트로 내려가서 화를 자초하지 말고.” 왜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는 ‘이집트’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같은 상황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 즉 “초자연적 선택”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행보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불신의 행보만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전에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두 번씩이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집트’의 ‘바로’ 왕과 ‘블레셋’의 ‘아비멜렉’ 왕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낭패와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12:10-20; 20:1-18). 하나님의 언약이 위기에 빠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라’가 이방인의 아내가 될 뻔 했으니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약속을 받고 난 뒤의 일이라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이삭’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도 역시 아버지가 받았던 것과 똑 같은 축복과 약속을 이미 받아놓은 상태에서 같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보다 더 많은 확신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축복에 더하여,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까지 덤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3절). 그러나 현실은 늘 미래보다 가까운 법, 아무리 희망 찬 장미 빛 공약도 눈앞에 닥친 두려움을 이길 수는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삭’의 잘못을 들추어낸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비멜렉’입니다.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창문 사이로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8절). 이점이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른 것이지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꿈에 ‘바로’나 ‘아비멜렉’ 왕에게 나타나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 하고 있을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항상 먼저 들추어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때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세상 사람들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개입하셔서 질책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불신자들이 그렇게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었을 때 그것을 밖에 내다버리고 발로 짓밟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아브라함’이 이방인 왕들로부터 호된 비난과 훈계를 받은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이들로부터 엄청난 선물까지 얻게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기는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아비멜렉’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동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10절). 이뿐 아니라 ‘아비멜렉’이 백성들에게 령을 내려 이삭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윤리∙도덕적으로도 ‘이삭’보다 한 수 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이삭’은 인격적 자질에 있어서나 신뢰성에 있어서나 “초자연적 선택”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차라리 ‘아비멜렉’이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삭과 하나님. 그런대도 하나님께서는 어쩌자고 ‘아비멜렉’이 아닌 ‘이삭’을 그의 선택으로 삼으셨을까? 자신의 이름에 도움은커녕 큰 낭패를 끼칠 이런 자를 말입니다. 그가 ‘가나안’의 변두리 ‘그랄’까지 내려왔으면서도 머뭇거림이 없이 계속 남하하여 ‘이집트’까지 가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직접 나타나셔서 약속의 땅에 머물라고 말하셨고, 그에 대한 엄청난 보상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에게 하셨던, “축복과 땅과 후손”에 관한 삼중 적 언약과 맹세를 말합니다(3-4절). ‘이삭’이 무슨 자격으로 이 엄청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 아버지 때문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5절). ‘이삭’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이런 기적이 과연 그에게 일어날 것인가? 그가 그 약속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과연 성취될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일까? 이런 질문들은 적어도 ‘이삭’만은 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탄생 자체가 곧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의 기적도 그가 직접 체험한 사건입니다. 그는 기적의 증거들을 찾기 위해서 역사나 성경을 뒤적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아 축복을 이미 누리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이 아니라 “이미”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과연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실 것인가에 관한 해답은 그동안 그분이 어떻게 해주셨는가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랄’에서도 어김없이 ‘이삭’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삭’은 ‘이집트’가 아닌 메마른 ‘그랄’에서 농사의 수확을 백배나 거둘 수 있었고, 양과 소와 하인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12-14절). 언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까? 그가 마지못해 ‘그랄’에 머물기는 했으나 여전히 두려움과 불신으로 이웃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랄’조차도 하나님의 최선의 선택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곳은 원래 ‘아브라함’이 살던 가나안의 중심 지역이 아니라, 이집트와 접한 약속의 변방에 위치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삭’은 소위 “최선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대도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란 게 늘 이런 것인가요?
늘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이 계속해서 ‘그랄’에 머무는 것이 싫은 것일까요? 축복이 화가 되어 돌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너무 번성하자 ‘블레셋’ 사람들의 두려움과 시기심이 발동하게 되고 횡포를 부리기시작합니다. 이들은 이전에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무시하고 우물을 덮어버립니다. 그 지역에서 우물은 곧 생존입니다. 이 일로 ‘이삭’이 ‘그랄’을 떠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근처 골짜기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우물을 팠으나 분쟁은 여전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우물의 이름을 “다툼”이라는 의미의 ‘에섹’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이삭’은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만 이 역시 다툼으로 말미암아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그 우물을 “대적하다”는 의미의 ‘싯나’로 명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점점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가나안’에 가까이 다가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 이상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을 정도로 ‘그랄’에서 멀리 떨어진 한 곳에 우물을 파서, “넓다”는 의미의 ‘르호봇’으로 명명합니다.
그러나 이곳 역시 그가 정착해야 할 곳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다시 옮겨간 곳은 이전에 아버지가 살던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라는 언약의 우물을 의미합니다. 여러 우물을 전전한 끝에 마침내 그가 살아야 할 집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삭’에게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현현인 셈입니다. ‘이삭’은 다시 한 번 위로와 함께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이번에도 역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덕분에 그저 무상으로 받게 되는 축복입니다(24절). 그는 이곳 약속의 땅에서 이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이삭 이야기>의 행복한 결말입니다(25절).
그러나 화자는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고, 부록을 마련함으로써 이야기의 행복한 여운을 계속 이끌어가고 싶은 듯합니다. 문학적 crescendo라고나 할까요. 다름 아닌 ‘이삭’과 ‘아비멜렉’사이의 불가침 평화조약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26-31절). 이전에 ‘이삭’에게 횡포를 부리며 쫓아내던 자가 이번에는 제 발로 걸어와 조약을 맺자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힘없이 이리저리 밀리고 쫓겨 다니던 약자가 어느새 지역의 강자로 부상하게 된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이 그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가 자연의 적자(嫡子)가 될 수 있었을까? ‘아비멜렉’이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29절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적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아브라함’도 이와 꼭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삭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신학적 윤회를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이삭’의 종들이 ‘브엘세바’의 우물가에서 외치는 환호는 뮤지컬 <이삭 이야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대 합창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32절).
영원한 브엘세바. 수천 년 뒤 ‘사마리아’의 한 여인도 ‘야곱의 우물’ 가에서 영원한 ‘브엘세바’를 만난 기쁨으로 같은 환호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 역시 ‘이삭’과 마찬가지로 체질적으로나 유전적으로 자연이 선택할 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세상의 학교에서 “왕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나 역시 이런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거래에서 ‘이삭’처럼 늘 손해만 본다는 생각입니까? <시편>이나 <전도서>나 <욥>의 기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도 이런 세상의 부조리였습니다. 이들 모두 한 결 같이 깊은 좌절과 회의와 원망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다가 급기야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번성하고 더 오래 살며, 지혜로운 자나 무지한 자나 죽기는 매 일반이며, 의로운 자가 핍박을 받으며, 큰 소리 치는 자가 이기고 마음 약한 자는 늘 양보하고 손해만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이삭’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삭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1-2)
예수님께서도 이점을 산상 수훈에서 분명하게 밝히신 적이 있습니다: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5,9)
이곳에서도 주님의 약속은 미래형으로 주어지고 있으나, 실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자들이며, 내세에 대한 약속과 성령의 인침을 이미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이미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온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화평케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탁월함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탁월한 삶을 살 수 있는 자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브엘세바’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내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임재 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확신 가운데 전 우주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화자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나는 정녕 어디에 있습니까? ‘이집트’입니까? ‘소돔’의 ‘롯’처럼 말입니다. ‘그랄’입니까? 그래서 ‘아비멜렉’보다도 못한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브엘세바’입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처럼 세상과 온 우주를 향하여 환호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제목을 크게는 <이삭 이야기>로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창세기> 내에서의 본문의 위치가 갖는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기능을 설명해 봅시다.
2. ‘이삭’을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자신의 아들 ‘야곱’과 비교 연구해 봅시다. 특히 “언약”의 주제와 연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집트’입니까? ‘그랄’인가요? 아니면 ‘브엘세바’입니까? 이들 각 지역에 산다는 것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