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7과
이스마엘의 계보
김태정 목사창세기 25:12-18약 12분 분량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25:1)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이스마엘의 계보>는 <창세기>에서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계보입니다. <창세기> 11장 이후 나타나는 여섯 계보는 짧은 것과 긴 것이 번갈아 나타나고 있는데, <이스마엘의 계보>는 <셈의 계보>(11:10-26)와 <에서의 계보>(36:1-43)와 함께 전자(前者)에 속하며, 나머지 <데라의 계보>(11:27-25:11)와 <이삭의 계보>(25:19-35:19) 및 <야곱의 계보>(37:1-50:26)는 후자(後者)에 속합니다. <창세기> 화자는 항상 짧은 계보를 긴 계보에 앞서 소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후자에 속한 인물은 주지하다시피 선택 된 백성입니다. 예를 들어 <가인의 계보>가 <셋의 계보>에 앞서 등장했고(4장), <에서의 계보>가 <야곱의 계보>에 앞서 소개되고 있으며(36장), 이곳에서도 <이스마엘의 계보>가 <이삭의 계보>에 앞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배열에는 화자의 신학적 의도가 담겨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짧은 계보가 <창세기> 전체의 주제와 무관하다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이스마엘의 계보>를 통해서도 언약과 관련한 내용들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마엘’에 대해서 그의 부모에게 하신 약속들이 있습니다. ‘하갈’에게는 그녀의 자손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16:10, 12). ‘아브라함’에게도 “이스마엘이 열두 두령을 낳을 것”이며 “그를 큰 나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7:20). 이런 약속들이 본문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12절제목
(2) 13-16절‘이스마엘’의 열두 아들
(3) 17절‘이스마엘’의 생애와 죽음
(4) 18절‘이스마엘’ 족속의 영토
자료와 편집.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자료 비평적 연구에 따르면, 첫 세 단락은 <사제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계보의 시작을 알리는 12절의 표현이 그렇고, 두 번째 단락 역시 족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서 두 번째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열두 명의 아들에 대한 목록은 다른 <사제 전승>으로 알려진 17:20의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17:20)
그리고 ‘이스마엘’의 생애와 죽음을 다루고 있는 세 번째 단락(17절) 역시 전형적인 <사제 전승>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의 기원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야훼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내용 상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야훼 전승>인 16장의 내용에 대한 성취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16:12)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거주하였고),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25:18)
이와 같은 상호 연관성 때문에 ‘궁켈’ 등은 25:18의 내용이 실은 16장 전체의 결론으로 <야훼 전승>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웨스터만’을 포함한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즉 18절은 16절에 바로 연결되며, 따라서 <야훼 전승>의 일부로 간주하기에는 증거가 충분치 않으며, 오히려 후대 사제 기자의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 18절 후반과 16:12절 후반은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동일한 <사제 전승>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18절을 이처럼 작성된 시기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6:12절 후반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거주하다”는 18절 전반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한편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다”는 표현은 18절 후반에서 사용하고 있어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8절을 16장의 <야훼 전승>과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그 논지가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본문 첫 번째 단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12절상)-은 16장이나 21:9등과 같은 <야훼 자료>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오히려 더 가깝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직전의 이야기(25:1-11)와 마찬가지로, 본문의 편집 형식은 야훼 기자가 <사제 자료>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해설로써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사제 전승>이 <야훼 전승>의 상자 속에 담겨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목(12절)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12절)
새로운 계보의 시작을 알리는 이와 같은 ‘톨레돗’의 전형은 <창세기> 전체적으로 열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2:4; 5:1; 6:9; 10:1; 11:10, 27; 25:19; 36:1; 37:2). 이 짧은 한 구절은 지나간 <아브라함 이야기>에 등장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회고시켜주고 있습니다(16장; 21:9-21). 이런 연결 고리를 통해서 새로운 계보 역시 <창세기>의 일부로서 포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이스마엘의 12 아들(13-16절)
화자는 ‘이스마엘’의 열 두 아들을 거명하면서 단락을 일종의 수미상관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13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16절)
이 두 절 안에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화자는 이런 형식을 통해서 이들을 ‘야곱’의 열 두 아들과 병행관계에 놓고 있으며, 동시에 이들 역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처럼 일종의 부족 동맹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이들 모두는 흔히 ‘아랍’ 족속으로 확인되기도 합니다.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입니다(13절). 동일한 이름이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는데(28:9; 36:3), ‘에서’가 그의 누이와 결혼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느바욧’은 7세기 경 ‘아수르바니팔’에게 정복당한 ‘나바야티’ 족속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사야>에서도 이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사 60:7). 또는 ‘느바욧’을 더 잘 알려져 있는 ‘나바티안’ 족속과도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아들은 ‘게달’입니다. 그는 장자 ‘느바욧’과 함께 <역대기>와 <이사야>에 거명되고 있습니다(대상 1:29; 사 60:7). 또한 이 족속 역시 ‘아랍’의 한 부족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사 21:16-17; 42:11; 렘 2:10; 49:28; 겔 27:21; 시 120:5). 성경 외의 문헌에서 ‘게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곳은 주전 7-8세기 경의 ‘아시리아’의 비문에서입니다. 그리고 ‘그달’이라 불리는 족속은 ‘바벨론’과 ‘요단’ 동편 사이의 사막 지역에서 살고 있었으며, 이들 족속의 세력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는 ‘산헤립’ 시대로부터 주전 4세기경까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앗브엘’은 이곳 외에 <역대기>(대상 1:29)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티글랏빌레셋 3세’(주전 745-727)가 ‘시나이’ 반도 북쪽 지역에 살고 있는 ‘이디바일’이라 불리는 한 족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밉삼’은 <역대기>(대상 4:25)에 따르면, ‘시므온’ 족속의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혹자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발삼’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미스마’ 역시 <역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시므온’에서 유래한 한 족속으로 학인할 수 있습니다(대상 4:25-26). ‘데마’의 동쪽 160마일에 ‘예벨 미스마’로 불리는 한 지역이 있는데, ‘미스마’와 ‘아랍’ 족속과의 연계성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두마’(대상 1:30)는 <이사야>에서(사 21:11-12) ‘두마’와 관련한 신탁을 읽을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에돔’에 속한 한 족속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산헤립’이 ‘아두맛’이라 불리는 사막의 한 요새를 정복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페트라’ 동쪽에 ‘두맛 알 간달’이라 불리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잠언>에 ‘맛사’의 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잠 31:1). 그리고 <티글랏빌리셋> 연대기에서는 ‘마사’로 불리는 한 성읍을 언급하면서 이 이름을 ‘데마’와 기타 여러 ‘아랍’ 족속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하닷’(대상 1:30)과 관련해서는 ‘데북’ 북쪽의 ‘엘-하닷’ 개울을 연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데마’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 여러 다른 이름과 연계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시바’(욥 6:19); (2) ‘드단’(렘 25:23); (3) ‘두마’, ‘드단’, ‘게달’(사 21:14). ‘데마’는 또한 ‘에일랏’의 남동 250 마일에 있는 한 사막의 이름으로서, ‘아라비아’에서 ‘지중해’를 경유하여 ‘바벨론’에 이르는 무역로 상의 중요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아시리아’ 시대에는 ‘데마’는 ‘티글렛-빌리셋’ 3세에게 많은 조공을 바쳤으며, 이후 ‘바벨론’ 왕 ‘나보디누스’는 그의 아들 ‘벨사살’이 ‘바벨론’을 통치하는 동안 이곳에 살기도 했습니다.
‘여둘’은 <역대기>에서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의 두 지파가 정복한 여러 족속 중에 하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대상 1:31; 5:19). 아마 그는 ‘안티레바논’에 살았던 ‘이투리안’ 족속의 시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비스’ 역시 <역대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만(대상 1:31; 5:19), 그와 관련된 더 이상의 정보는 찾을 수 없습니다.
‘게드마’(대상 1:31)는 어원 상 동쪽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나, <창세기> 15:19에서 언급하고 있는 ‘겐’ 족속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또는“동방 사람”(창 29:1)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화자는 이들 열두 명이 모두 ‘이스마엘’의 아들임을 다시 한 번 언급한 후, 두 단어를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 특유의 생활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촌(רצח, 하체르)과 부락(הריט, 티라)대로 된 이름이며...”(16절상). 요약하자면 이들을 마을을 이루어 정착된 장막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단어의 상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히브리’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두 명의 아들은 각 족속을 대표하는 우두머리 내지는 부족의 시조였다는 점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과 병행을 이루기 위한 화자의 의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이스마엘의 생애(17절)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17절)
한 족장의 생애를 개괄하는 위의 표현은 <창세기>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기도 합니다(25:7-8; 35:28-29; 49:33).
4. 후손과 영토(18절)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18절)
이 구절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어디서 살았는지를 요약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이스라엘’ 동남의 광야였습니다. ‘하윌라’는 ‘아라비아’와 ‘시내’ 산 북쪽 ‘술’ 광야를 포함하는 지역임이 분명합니다(16:7; 20:1). ‘앗수르’는 ‘시나이’ 반도에 거주하던 한 부족의 이름이기도 합니다(10:22; 25:3).
이 구절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은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분명 16:12절에서 인용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만, 훗날 ‘이스라엘’과 이들 후손 간의 적대적 관계를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적용
짧고도 간단한 ‘이스마엘’의 계보는 그의 생애와 열두 아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거주지 및 ‘베두인’으로서의 생활 방식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독자들의 궁금증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비록 암시적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이웃 ‘이스마엘’ 족속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이들은 평화 시에는 열심히 무역 로를 개척하는 등 우호 공존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37:25), 때로는 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삿 8:24). 화자가 <이스마엘 이야기>를 전해주는 입장도 따라서 일종의 정신분열적 증세에 가까운 것입니다. 때로는 이들을 ‘이스라엘’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 묘사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두 민족 간의 적대적인 갈등과 긴장이 태생적이고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통해서 기원론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이 두 민족 간에 얽힌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제반 문제들을 밝혀내어 알려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데에 있습니다. 본문은 그 자체로서 일견 단순한 역사적 사실 보고서로서 이런 목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입니다만,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스마엘’은 ‘가인’이나 ‘함’, 그리고 ‘에서’ 등과 함께 하나님의 구속사에서는 주류에 들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에 속하지 못한 족속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세우시고 성취해 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이 우선 이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17:20)
‘하갈’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덧붙이신 바 있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16:12)
본문을 통해서 이 두 약속이 모두 그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봅니다(25:16, 18).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하는 이런 조그만 약속조차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이어지는 <이삭 이야기>를 읽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해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다면, 약속의 씨앗 ‘이삭’에 대해서는 더 무엇을 논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연습과 토의
1. 본문을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말과 연계해서 읽어봅시다.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두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신학적 주제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의 역사에서 ‘이스마엘’의 존재는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 무슨 약속을 하셨으며, 화자는 이에 대해서 어떤 기분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은 어떤 인상을 받습니까?
3. <성경>의 약속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