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시내 모처의 한 작명소 건물 입구에 다음과 같은 경고성 구호가 걸려있습니다: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 이름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는 일반인의 인식에 경고를 주는 메시지임에 틀림없습니다. ‘위어스비’(W. Wiersbee) 목사님도 “이름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나오는 ‘줄리엣’의 독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책 2막에서 ‘줄리엣’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 로미오, 이름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우리가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향기는 여전히 달콤해요. 당신도 로미오라고 부르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완전할 것입니다. 로미오 이름을 버리세요. 그 허망한 이름 대신 나를 가지세요.”
‘줄리엣’의 독백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요? 자기는 ‘카플렛’ 가문에 속해있고, 사랑하는 ‘로미오’는 원수 가문인 ‘몬테그’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이름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로미오’가 설령 다른 이름의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그는 자기의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상기 내용은 ‘위어스비’의 <창세기> 강해 「순종하여라」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위어스비’, 76쪽.
그러나 <성경>은 이름에 대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경험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밤새 씨름한 뒤에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고(32:24-32), 갈대 ‘시몬’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반석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았으며(요 1:40-42), 예수님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받았습니다(마 1:18-25).
우리는 본문에서 새로운 네 이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엘 샤다이’; ‘아브라함’; ‘사라’; ‘이삭’. 이들 각 이름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거나 또는 이전의 이름이 새롭게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바뀌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이름, ‘이스마엘’은 16장에 이어 이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 이름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아브라함 이야기>는 이곳에서 분수령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야기는 12장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마치 음악에서 영광스러운 crescendo를 맞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가 조금씩, 보다 상세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상승곡선을 그려왔습니다. 그러한 상승곡선이 마침내 이곳에 이르러 한 편의 길고도 정교하게 꾸며진 하나님의 연설을 통해서 그분의 계시는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나 음성은 점차 그 빈도가 줄어들면서, 약속의 내용 또한 특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 이전에 그분이 하셨던 약속이 하나씩 가시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브람’을 부르면서 세 가지를 약속하셨는데, 땅과 후손과 그리고 언약의 관계가 그것입니다(12:1-3). 사실 언약 속에 그 모든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7장이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 이야기>의 신학적 절정에 해당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 세 가지 약속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추적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상기해 봅시다.
우선 땅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한 땅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셨는데(12:2), 조금 후 “이 땅”으로 구체화 되드니(12:7), 이후 ‘아브람’이 동서남북으로 눈을 들어 바라볼 수 있는 땅, 즉 “보이는 땅”이 되고(13:15), 다시 “애굽 강에서부터...유브라데까지 이르는 땅”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비록 화자나 독자 모두에게 이 땅은 말할 것도 없이 ‘가나안 땅’을 의미하지만, 화자는 8절에 가서야 비로소 이 점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8절)
두 번째로 후손과 관련해서는 ‘아브람’이 처음에 받은 약속은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12:2). 그리고 그의 후손이 “땅의 티끌”만치 많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13:16), 이어서 유사한 약속 즉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15:5). 얼마 후에 ‘아브람’은 드디어 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는데, 그의 후손이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이 때 함께 받게 됩니다(16장).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약속도 이곳에서 듣게 되는 새로운 약속 때문에 오히려 하찮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은 단순히 한 나라의 조상이 아니라, 수많은 나라의 조상이 될 것이며, 여러 왕들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젊은 여자 노예를 통해서 태어난 한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이 90이 된 늙은 아내를 통해서 태어나게 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약속 때문입니다(4-6, 15-17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약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고 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할 것”이라는 다소 막연하게 들리는 약속을 하신 바 있습니다(12:3). 그러던 것이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서 자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드러내십니다(15장). 그러나 이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과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삼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7:7).
이 위대한 약속을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징표를 남기고 있는데, 하나는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새로운 이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할례 의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람’ 자신과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 머무는 모든 나그네와 노예들과 그의 후손 모두에게까지 미치는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의식이 될 것입니다.
단락과 구조. 이 두 사건이 지니는 의미가 <창세기> 내에서 각별하다는 점은 본문의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본문 내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길고도 정교한 다섯 번에 걸친 “하나님의 연설”이 그것입니다. 본문은 구조적으로 16장과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프롤로그: ‘아브라함’의 나이에 대한 언급(1절상)
제 1막: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1절하-22절)
제 2막: ‘아브라함’이 할례를 집행함(23절)
에필로그: ‘아브라함’의 나이에 대한 언급(24-27절)
우선 가장 두드러지게 닮은 점으로 16장에서처럼(1, 16절), 서론과 결론에서 주인공 ‘아브라함’의 나이를 언급하는 것으로써 이야기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요 장면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또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제 1막에서, 하나님의 말씀(또는 연설)이 다섯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고(1절하-2, 4-8절, 9-14절, 15-16절, 19-21절), ‘아브라함’의 질문이 두 번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17-18절). 한편 16장에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제 2막의 내용, 즉 천사와 ‘하갈’의 대화에서는 천사의 연설이 네 번(8절상, 9절, 10절, 11-12절), 그리고 ‘하갈’의 이야기가 두 번(8절하, 13절)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여호와께서...이르시되”/“여호와의 천사가...이르기를”-은 현대 독자들에게는 일견 불필요한 반복일 수 있으나, <창세기> 본문에서는 각 등장인물의 대화나 연설을 다섯 번 또는 네 번 등으로 구분하고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17장에서는 제 2막이 제 1막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짧습니다만, 그러한 차이는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참고로 16:7-14와 16:15를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6:13-21과 6:22도 함께 흥미롭게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를 일종의 교차대구적 형식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A아브라함의 나이 99세(1a)
B 야훼께서 나타나심(1ba)
C 야훼께서 이르시기를(1bb)
D 첫 번째 말씀(1bc-2)
E 아브라함이 엎드림(3a)
F 두 번째 말씀(이름을 바꿈, 민족들, 왕들)(4-8)
G 세 번째 말씀(9-14)
F1 네 번째 말씀(이름을 바꿈, 민족들, 왕들)(15-16)
E1 아브라함이 엎드림(17)
D1 다섯 번째 말씀(19-21)
C1 야훼께서 말씀을 마치심(22a)
B1 야훼께서 그를 떠나 올라가심(22b)
A1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및 이스마엘의 나이 13세(24-25)
또 한 편으로 본문의 구조가 시적 평행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A야훼께서 언약을 세우려 하심(1-2절)
B 아브라함이 엎드림(3a)
C 열방의 아버지 아브라함(4b-6)
D 야훼께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심(7)
E 언약의 징표(9-14)
A1야훼께서 사라에게 복을 주심(16)
B1 아브라함이 엎드림(17-18)
C1 열방의 어머니 사라(19)
D1 야훼께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심(19b, 21a)
E1 언약의 징표(23-27)
이 같은 형식은 <성경>에서 아주 흔하게 만나는 것이고(2-3장, 4장, 6-9장, 18-19장, 22장, <요셉 이야기>), 평행 반복적인 구성은 상대적으로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전혀 낯선 구조는 아닙니다(참고, 15장, 18-19장).
아무튼 본문의 구조가 이처럼 복잡하지만 아주 치밀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만 보아도, 화자가 이를 통해서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차대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내용이 “할례”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어느 한 부분을 임의로 제거하거나 수정하게 되면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가 허물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그렇다면 본문은 하나의 자료로 구성된 것일까? 이상의 구조 분석을 통해서 볼 때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적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본문을 이루는 요소가 하나 이상의 출처를 가진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비평적 연구를 전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자료비평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본문을 <사제 문서>로 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주된 신학과 본문 여기저기에서 등장하고 있는 특징적인 어휘들 때문입니다. 할례나 언약 의식 등을 다루고 있는 본문은 분명 사제 기자의 주된 관심사임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고, 이에 덧붙여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어휘들을 살펴보면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름으로 “전능자 하나님”(El Shaddai)도 등장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사제 문서에 독특한 표현들인 “언약을 두다”(또는 세우다)(2, 7절),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라”(20절), “이 날에”(23, 26절) 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을 사제 문서로 간주하는 것은 다른 <사제 문서>로 확인되고 있는 구절들에서 유사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9:1-17; 28:3-4; 35:11-12; 48:3-4).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본문의 편집에 관한 이야기, 즉 “이들 <사제 자료>들이 어떻게 현재의 본문으로 확정되었을까?”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편집의 역사나 과정이 어떠했든 17장을 현재의 위치에 자리매김 함에 있어 상당한 주의와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 17장은 마치 앞뒤의 이야기를 연결해주는 고리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17장의 모든 이야기는 그보다 앞선 내용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이야기는 17장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로써,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는 이야기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데도, 17장 이전에서는 이 두 사람을 거명할 때 한결같이 옛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에 반해서, 17장 이후부터는 이 두 사람에 대해서 항상 새롭게 바뀐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써, ‘아브라함’이 ‘사래’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난 뒤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20절)하며 간청하는 장면에서도 화자는 16장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전개시켜 가고 있습니다. 한편 ‘이삭’이 태어나고 할례를 받는 장면이나(21:1-5),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22장), 이방인 ‘세겜’ 족에게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하는 장면(34장) 등은 모두 17장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러한 편집 작업에 관여했을까?”가 됩니다. Wenham은 그가 ‘야훼 기자’라고 주저 없이 말합니다. 참고도서 2, 18쪽.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제 1절이 그가 제시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17:1)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순히 ‘야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문장의 동사 역시 <야훼 자료>의 특징적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참고, 12:7; 18:1; 26:2, 24).
본문에 대한 역사적 질문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정리가 되는 듯합니다. 이 중 하나는, 본문 속에 <사제 자료>의 특징적인 단어나 어휘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이들 자료는 ‘야훼 기자’의 편집적인 손길에 힘입어 현재의 본문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Westermann은 이런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서 오히려 반대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17장은 대체적으로 사제 기자가 ‘아브라함 전승’을 토대로 작업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17장의 내포저자(내지는 화자)가 ‘야훼 기자’라는 사실은 16장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흔히 <야훼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16장이 17장과는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18-19장 역시 17장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은데, 이 두 장 역시 <야훼 자료>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기적으로 <야훼 자료>가 <사제자료>보다 앞선다는 기존의 속설과는 달리 오히려 <사제 자료>가 <야훼 자료>를 앞서고 있다는 정반대되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는 셈입니다. 각 자료들의 편집 시기와 관련해서 <서론> 부분에서 상술한 바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사제 자료>의 기원에 대해서도, 이것이 순수한 자료인지 아니면 단순한 편집의 결과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17장을 15장과 비교해 보는 것도 본문의 역사와 관련해서 유익한 연구가 될 것입니다. 즉 17장은 내용상 15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학자들 사이에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Hamilton도 17장이 <사제 문서>라는 데에는 이의를 달지 않으나, 동일한 언약 의식을 다루고 있는 15장의 <야훼 문서>에 비해 시기적으로 후대의 작품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8:4-15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17:15-22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원 자료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17장은 <야훼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15장과 함께 공통적으로 ‘언약의 약속’과 ‘언약 의식’에 관해서 다루고 있어 손쉽게 서로 닮은 점들을 찾아낼 수 있기는 하지만, 두 장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들이 더 많은 관계로 단순히 17장이 15장에 근거하여 새롭게 수정한 작업의 결과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17장과 바로 이어 등장하고 있는 18장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본문의 역사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18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분명 17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9-15의 내용, 즉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방문하여 이듬해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자 ‘사라’가 이를 듣고 혼자서 속으로 웃고, ‘야훼’께서 이를 지적하자 ‘사라’가 황급하게 웃었던 사실을 부인하는 이야기는 분명 17장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장에서 화자는 ‘아브라함’이나 ‘사라’ 등과 같이 바뀐 아름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17장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면 충분히 설명 가능한 부분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소식에 ‘아브라함’이 크게 놀라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있는 점, 또한 화자가 17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사전에 익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설명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내년 이맘때에”(17:21) 등과 같은 특정 표현들을 이곳에서도(18:10, 14) 거듭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17장의 화자에 대한 결론은 단 하나, ‘야훼 기자’가 그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서막: 침묵(1절상)
‘아브람’의 나이 99세.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도 어언 13년이 흘렀습니다(16:16).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분수령을 이룬다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화자는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게도 ‘아브람’의 나이를 언급하는 것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1절상)
그러나 화자의 의도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십삼 년 동안 ‘아브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의 아내 ‘사래’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
대답은 “아무 일도 없었다”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현이나 기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있었다면 가족 구성원 사이에 갈등과 긴장의 세월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브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더 다행스러운 일이며, 그 역시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습니다.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받은 ‘이스마엘’이 태어났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며, 더 이상 무슨 새로운 약속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이스마엘’이야말로 ‘아브람’의 유일한 소망이자 약속의 씨가 될 참이었습니다. 그가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성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비련의 여주인공 ‘사래’는 어떻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볼 때, 이 여인은 ‘아브람’에게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더욱 희미해져갈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도 아내에 대해서 포기한지 이미 오랩니다. 그러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멀리 사라질 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굴욕과 분노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점차 현실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체념과 냉소로 살아가는 법을 체득했을 것입니다. 정말 긴 세월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녀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보낸 400년처럼 말입니다. 사정이 이런 식으로 발전해가면 세상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믿음의 백성들을 놀리게 마련입니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3-4).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갈등하고 의심하며 불평하는 것을 봅니다.
2. 제 1막: 현현(1절하-22절)
첫 번째 말씀(1절하). 그러나 긴 침묵과 어둠의 세월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무대 장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침묵과 어둠을 가르고 ‘야훼’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1절상).
긴 밤뒤에 오는 새벽은 더욱 밝게 느껴지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며, 오랜 세월 침묵하던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나타나실 때 그 약속은 더욱 빛나는 것일까요? <시편>도 하나님께서 종종 사용하시는 이런 극적인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하나님 자신도 ‘아브람’ 앞에 나타나셔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절하)
전능자 하나님, 즉 ‘엘 샤다이’는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성경>의 모든 독자들도 처음으로 듣게 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네 개의 새로운 이름 중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라고 언급한데 이어서 곧바로 하나님을 전능자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는 화자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구약> 전체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분 자신의 고유한 이름 ‘야훼’(또는 ‘아도나이’) 대신에 ‘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쓰고 계십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라기보다는 당시 ‘가나안’의 보편적인 신 ‘엘’(El)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샤다이’는 그냥 수식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샤다이’의 어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늘 이 단어는 후손에 대한 약속을 언급할 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혹자는 이 단어가 “산”(山) 또는 “젖가슴” 등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산”이란 결국 일종의 “젖가슴”처럼 땅이 솟아올라 생긴 것이라고 볼 때, 이 두 단어가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이 어린 아이에게 절대적인 포근함과 큰 힘을 발휘하는 근원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에게 “산”의 의미 역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로 알려지기는 훨씬 뒤의 일로서, 족장들에게는 하나님은 늘 ‘엘 샤다이’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3). ‘멜기세댁’은 야훼 하나님을 ‘엘-엘리온’(El-Elyon)(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19-20)으로 알았고, ‘하갈’은 그분을 ‘엘-로이’(El-Roi)(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 16:13)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모든 하나님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다름 아닌 ‘모세’에게 계시해 주신 ‘야훼’ 하나님이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절; 참고 16:13).
나름대로 상상해 봅시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하)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반응 즉 책임을 수반합니다. 책임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특징인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두 가지 요구 사항을 담고 있는 이 명령은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보여주는 것으로서, 실로 엄청난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명령과 관련해서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5:22; 6:8-9). 그리고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라는 칭호도 받았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나 완전하게 사는 것이 아무 죄 없이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느 인간도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될 것입니다. ‘위어스비’ 목사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나뉘지 않고, 책망할게 없고, 진실 되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완전하다는 것은 “온전하고 흠이 없다”는 의미로서, <출애굽>이나 <레위기> 등에서는 온전하고 흠 없는 희생 제사와 연관하여 쓰고 있습니다(출 12:5). ‘바울’ 사도라면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라고 했을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걸을 수 있는 비결은 진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이어 곧바로 핵심 주제로 나아가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2절). 문자적으로 언약을 “주다”(give)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명령과 함께 약속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구조적으로 볼 때, 그분이 처음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셨던 말씀과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1-2).
이 말씀은 마치 조건 절처럼 들립니다. 즉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산다면 하나님은 언약의 축복을 내리실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아브람’이 그 명령에 얼마나 순종하는가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하고나 언약을 맺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언약을 맺었다 하드라도, 나중에 그 사람이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보일 때는 자동적으로 폐기 처분되어버립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이 언약의 약속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람’에게 하셨던 자기저주의 언약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15:17-18)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약속을 제쳐두고 다시 새로운 언약을 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말씀의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선 본문의 최대 관심사는 언약을 “수립” 또는 “확정”하는 일입니다(7, 9, 21절). ‘노아’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9장). 하나님의 언약은 특징 상 늘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하시지만, 반드시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대응과 이를 확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언약이 15장의 그것과는 다른 점입니다. ‘아브람’이 보여주어야 할 반응은 바로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
그리고 이어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시행하는 것도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15장에서 “언약”은 단 한 번 등장하지만, 17장에서는 13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2절; 4절; 7절(두 번); 9절; 10절; 11절; 13절(두 번); 14절; 19절(두 번); 21절. 이 중에서 첫 네 번과 마지막 세 번은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담고 있는 것에 반해, 중간 여섯 번의 말씀은 이에 대응해서 ‘아브람’이 보여야 할 행동 즉 할례에 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됩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하나님의 요구는 아주 엄청난 것이지만, 동시에 큰 혜택과 축복을 수반하고 있기도 합니다: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2절). 바로 이 약속이 본문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그리고 화자는 이 선언을 통해서 앞으로 ‘아브람’의 이름 또한 바뀌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3절)
그는 엎드렸습니다(3절). ‘모세’는 광야에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를 원망하며 대들자 충격으로 땅에 엎드린 바 있습니다(민 14:5; 16:4). ‘요압’ 장군은 ‘다윗’ 왕 앞에서 감사의 표시로 땅에 엎드려 왕에게 절을 하였습니다(삼하 14:22). 그러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경우는 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레 9:24; 수 5:14; 7:6). ‘아브람’이 땅에 엎드린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이유였을 것입니다. 겸손하게 엎드려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자발성의 표시인 것이죠. Hamilton은 아브람의 이런 행동을 이전에 그가 하나님 앞에 보였던 불평에 가까운 행동과(15:2-3) 비교하고 있습니다. Hamilton, 463쪽.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아브람’은 그동안 성숙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달라진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후손’에 관한 것입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후손에 관해서 언급하신 후에 하늘의 별들만큼 후손의 수가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만(15:4-5), 이곳에서는 반대로 무수히 많은 후손에 관해서 먼저 언급하신 후에(17:2, 4) 구체적인 ‘약속의 씨’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17:16).
두 번째 말씀(4-8절). 땅에 엎드려 있는 ‘아브람’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당연히 첫 번째 말씀의 핵심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만, 그가 그동안 들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내용을 새롭게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세 번에 걸쳐 다시 언급하시면서(4, 7절), ‘노아’의 언약에서 그랬던 것처럼(9:11, 16), 이번에도 그 언약을 체결하고 동시에 영원한 언약으로 확정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이 영원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브람’만이 언약의 상대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의 후손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7-8절). 그러나 이 언약의 수혜자는 단순히 그의 후손들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차원의 언약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세 번에 걸친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4-6절).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절)
그러나 ‘아브람’이 이 선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을 리가 없고, ‘이스라엘’ 역시 그들의 역사 내내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지하게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약속은 진정 오늘 나의 것입니까? 즉 나는 과연 ‘아브람’의 후손입니까? 만일 ‘아브람’이 그냥 ‘아브람’으로 살다 갔다면 나는 결코 그의 후손이 될 수도 없었고 이스라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엡 2:13). ‘아브람’이 의미하는 바는 그냥 ‘존귀한 이스라엘의 아버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아브라함’, 즉 ‘열방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4-5절), 엄격하게 말하자면 “열방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브라함’(ם)이 아니라 ‘아브하몬’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다만 화자는 본문에서 이 이름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을 구성하고 있는 두 자음(רב; 브라)과 유사하거나 똑같은 발음을 가지는 다른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일종의 언어의 유희(word play)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언약”(תירב; 베릿트); “번성하다”(הבר; 라바, multiply); '“번창하다”(הרפ; 파라)(우리 말 <개역성경>에서 이 단어는 “생육하다”로 번역되어 있음(창 1:28)); ‘심히’(ךאמ ךאמב; 비메오드 메오드).
그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그의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도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브라함’은 ‘아담’이나 ‘노아’처럼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아담’이나 ‘노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담’이나 ‘노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만(1:28; 9:1, 7),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로, ‘노아’는 죄의 결과로 모두 실패했습니다. 최근에는 ‘아브람’과 ‘사라’ 역시 자신들의 계획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려 했지만 역시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습니다(16장).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직접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2절);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6절)
그리고 이 언약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언약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7절)
이 언약이 영원한 언약이라는 점에서 15장에서 언급한 언약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만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네 번에 걸쳐 언약의 요구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앞에서 행하라”; “완전하라”; “내 언약을 지켜라”; “할례를 행하라”.
우리는 이들 명령을 언약의 조건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이고, 그분은 스스로를 이 언약 속에 구속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의 헌신을 전제로 언약을 세우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충성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받은 소극적인 창조의 언약 곧 “동산 중앙의 과일은 따먹지 말라”는 명령과 유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의 첫 번째 이야기 곧 <에덴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영원한 소유 곧 가나안 땅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8절)
땅에 대한 약속도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13:15; 15:18), ‘가나안’을 언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 땅 역시 영원한 언약의 일부로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은 전쟁터이며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분쟁 지역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한 이 땅은 이스라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문제는 여기서 “누가 이스라엘 인가?”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설령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만을 지칭한다 하드라도(이런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긴 하지만), 이들이 이 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는 언제이며, 그 땅에서 쫓겨난 때는 언제인지, 그리고 소위 신구약 중간 시기라는 역사적 암흑기를 거친 후에 ‘이스라엘’ 최후의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땅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두면 좋을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9-14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일방적인 약속은(3-8절) 그것으로 끝입니까? 2-7절의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매 절마다 “내가...하겠다”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아브라함’은 그저 듣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즉 너는”이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세 번째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9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2절)고 하셨을 때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17장 가운데서 가장 길고,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구조적으로도 교차대구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문학과 역사).
하나님의 약속이나 언약이 아무리 일방적인 것이긴 해도 허공에다 대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반응이나 대응이 필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보일 때 이 언약은 확인되고 효력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브라함’의 편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행동 지침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누구이며, 어떻게 행해야 하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화자는 이들 질문에 대해서 히브리 특유의 서술 방식을 따라 해답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즉 종합적인 선언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그 내용을 풀어가고 발전시켜가는 방식이 그것입니다(우리는 이곳에서 언약과 할례가 번갈아 가며 각각 여섯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라(10절)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11절)
집에서 난 자나...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라(12절)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연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절)
여기서 할례는 단순히 ‘아브라함’ 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모든 후손이나 이방인과 그의 후손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언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후손들의 경우에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게 될 테지만 ‘아브라함’ 당대의 경우 이미 성인이 된 자들도 다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할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언약의 표징(sign)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거부하는 자는 당연히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당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행하던 할례 의식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할례는 유럽이나 중앙 및 동아시아권을 제외하고는 세계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어온 하나의 의식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던 대부분의 족속들은 이 의식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중에는 ‘이집트’, ‘가나안’, ‘아랍’ 족들이 있습니다(참고, 렘 9:25-26).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던 족속 중에서도 ‘블레셋’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수시로 “할례를 받지 못한 족속”으로 일컫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삿 14:3), 이들은 예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히윗’ 족속으로 불리는 ‘세겜’ 족 역시 같은 부류에 속합니다(창 34:2, 14). 그리고 ‘아브람’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할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살던 고향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족속들 역시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에스겔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겔 32:21-24). ‘이스라엘’ 외의 족속들이 할례를 시행한 것을 두고 그 의미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만, 고대 작가 ‘필로’(Philo)는 당시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인식해 오던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정도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감염 방지를 위한 예방적인 목적; (2) 종교적 성화의 목적; (3) 출산율 제고를 위한 목적; (4) 출산과 사고(思考)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 이어서 두 가지 정도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이 자신의 정욕을 버리고 생각을 통제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 (2)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온갖 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목적.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견해들이 추가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 준비를 위한 것이라든지, 성년식이라든지, 또는 신에 대한 헌신의 표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남자가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의식으로 볼 수 있고, 때로는 주술적인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질병과 액운을 방지할 수 있다는 믿음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이 마지막 두 가지 의미가 이스라엘의 할례 의식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의하면 할례를 통해서 언약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자격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남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17:10-11), 이를 거절하는 자는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17:14). 이에 관해서는 <레위기>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레 7:20-21; 17:4).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 된다는 말(11절)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Wenham은 <구약>에서는 세 가지 정도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Wenham, 23쪽(참고 도서 2).
첫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확신시켜주기 위한 일종의 증거물로서의 기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은 ‘바로’ 왕과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출 7:3-5).
둘째, 예를 들어 선지자들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이상한 행동들은 그들이 예언하는 상황을 그대로 닮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겔 4:3).
셋째, 무엇인가를 기억시켜주고 회상시켜주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누룩이 없는 빵을 먹음으로써 출애굽 사건과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출 13:9; 신 6:8; 11:18).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출 31:13). 그리고 “놋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로 삼은 것”도 역시 과거 이스라엘이 행했던 잘못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민 16:40). 그러나 무엇보다도 할례와 가장 가까운 언약의 징표로서 무지개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9:12-17). 알다시피 무지개는 하나님과 온 인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약속으로서 다시는 물로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9:14-16).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무지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할례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나게 한다는 점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할례는 오히려 무지개의 징표보다는 유월절이나 안식일 등의 징표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든 의식에는 이스라엘 편에서 수행해야 하는 일련의 책임과 행동 양식을 규정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
몸의 일부에 행한 할례는 마치 문신처럼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7, 13, 19절). 그리고 할례가 신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히 외적인 표시로서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믿음과 헌신의 발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이점 형식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질타하는 ‘모세’의 메시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다른 참고 구절: 신 30:6; 렘 4:4.
‘아브라함’이 믿음과 순종의 표시로써 받아들였던 할례를 훗날 그의 자손들은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즉 할례가 마치 이스라엘을 위한 무슨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했다는 말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제 2막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말씀(15-16절). 이곳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세 번에 걸쳐서 이어오던 말씀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약속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15절).
처음 두 번의 말씀에서(1-2절; 4-8절) 핵심은 엄청나게 많은 후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의 말씀에서(15-16절; 19-21절) 핵심은 한 특별한 아들, ‘이삭’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아들, ‘이삭’이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그 아들을 낳아 줄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먼저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12:2-3), 수차례에 걸쳐 후손에 대해서도 약속을 하셨습니다만,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화자는 ‘사래’가 나이가 많다는 점을 한 두 차례 언급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사래’가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추측하도록 유도하기는 했습니다만, 한 번도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화자는 ‘사래’가 자신의 방법대로 ‘하갈’을 통해서 어머니가 되어보겠다고 시도를 하다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된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16장). 이 일로 ‘아브라함’은 한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 아들이 수많은 후손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 또한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처음으로 그토록 기다려왔던 이야기의 진정한 여주인공 ‘사라’의 이름을 듣게 됩니다. 그것도 그동안 익숙했던 이름 ‘사래’가 아니라, 새 이름 ‘사라’입니다. ‘사래’(י, Sarai)와 ‘사라’(ה, Sarah)가 과연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아마 두 단어 모두 비슷한 발음을 지니는 것으로서 후자가 전자에 대한 방언의 일종일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Hamilton, 참고도서 3). ‘사라’는 ‘왕비’ 또는 ‘여주인’ 등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일찌감치 바뀌었는데, 어찌 여자 주인공의 이름 또한 바뀌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짝이 없이 홀로 서있던 이야기의 한 기둥이 드디어 짝을 만나 나란히 서게 된 것입니다. 구조분석에서 살펴본 바처럼(문학과 역사), 두 번째 말씀과 네 번째 말씀은 상호 교차대구의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15절은 6절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보니 ‘사라’는 하나님이 그동안 계속해서 강조해 오셨던 “나의 언약”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였습니다! 그녀는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누리게 될 그 모든 약속과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약속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까? 아니면 의심하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또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였을까요?
‘아브라함’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화자는 세 가지 각도에서 그의 충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습니다”(16절상). 구약에서 이런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참고, 3절), 놀라움이나 경탄 내지는 감사를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시 앞에 엎드린 두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3절);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17절상). 다만 두 경우에서 차이가 있다면, 전자의 경우에는(3절)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는 동안 그는 꿇어 엎드린 채 아무런 대꾸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가 질문을 먼저 던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그가 듣고 있는 약속이나 명령 하나하나마다 놀랍고 충격적이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사래’에 관한 이 새로운 약속, 그녀의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들은 특히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은 곧바로 믿음과 순종으로 이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웃고 있습니다:
(그리고)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17절상)
바로 이 점이 ‘아브라함’의 행동과 관련하여 화자가 보여주고 싶은 두 번째 반응입니다. 그는 지금 즐거워 웃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 역시 나중에 이 약속을 들었을 때 웃었습니다(18:12-15).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기막힌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웃음을 통해서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웃었다”(קהציו)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그리고 이삭”과 같은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수사적으로 일종의 아이러니 또는 역석이라고나 할까요.
세 번째로 그의 충격을 보여주는 방식은 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17절하)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런 의심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어느 누군들 ‘아브라함’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보다 실용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절하) 이전에도 그는 이와 비슷한 제안을 하나님 앞에 드린 적이 있는데, 그에게 자식이 없었을 때 데리고 있던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15:2).
인간적으로 볼 때 ‘이스마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 역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 아들과 함께 벌써 13년을 함께 생활해 왔고,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했습니다. 그동안 쏟아 부었던 그 모든 정성과 사랑을 하나님은 버리실 것인가? 그 청년에게는 장래가 없다는 것인가?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은 자기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잘못을 행한 쪽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닌가!
다섯 번째 말씀(19-21절).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차례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생산 능력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구심, 그리고 아들 ‘이스마엘’의 장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염려와 소망에 대해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말씀에서 마치 노래하듯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신탁은 정교한 대칭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A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19절상)
B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19절중)
C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20절)
B' 내 언약은 ...이삭과 세우리니(21절상)
A'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21절하)
‘아브라함’의 의심을 질책이라도 하듯,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심중을 훤하게 꿰뚫고 계셨다는 사실을 이 강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키십니다. 축복과, 후손과, 열두 방백과, 그리고 큰 나라가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응답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엄청나다해도, 정작 언약의 당사자는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이삭’만이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아브라함’은 아들에 관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살아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그 절망을 하나님께 아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년 이맘 때쯤 다른 사람 아닌 늙은 ‘사라’를 통해서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들의 이름도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통해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게 될 것이라는 소식 말입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그 내용이나 범위에 있어 <아브라함 이야기>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여 왔습니다만, 특히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삭 이야기>에 이르러 긴장과 서스펜스를 더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떠나 올라가셨습니다(21절). 이런 표현은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대개 하나님께서 말씀을 멈추거나 또는 사라졌을 때 이어지는 새로운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 상례입니다만(참고, 18:33; 35:13) 여기서는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3. 제 2막: 할례(23절)
하나님께서 떠나신 후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후 ‘아브라함’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단 한 줄로 이루어진 화자의 설명이 그 대답입니다. 이 한 절은 그 자체로서 전체 이야기의 두 번째 막을 구성하고 있으며, 다섯 번에 걸친 하나님의 긴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는 제 1막에 비해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짧고도 간단한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무엇인가 급박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년 이 맘 때에” ‘사라’가 낳게 될 ‘이삭’과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하셨으니(21절), 아브라함 편에서는 하루라도 속히 이 일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이 날에” 그 모든 해야 할 일을 다 해버립니다. 그는 단순히 급하게 그 모든 일을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는 그 모든 사람들의 목록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화자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23절)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할례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했는데, 언약과는 상관없는 ‘이스마엘’이나 종들마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 에필로그(24-27절)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듣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누가 언제 할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긴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이야기의 에필로그로 삼고 있습니다:
24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26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24-27절)
다만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나이가 왜 이곳에서 중요한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 날에” 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강조함으로써 이 사건이 인류의 역사에서 한 전환점을 이루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 날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은 “그 날에”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간 사건이나(7:13), “그 날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사건에(출 12:17, 41, 51) 버금가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감상하기 위해서 위에서 든 예문들을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훈과 적용
동급생에 비해서 나이가 서너 살이 많은 한 학생이 나에게 찾아와 고민이라면서 털어놓은 것이 있는데, 그의 나이가 졸업할 때쯤이면 30이 가까워 취업하는데 불리함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입 사원 모집 공고를 보면 연령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그 학생의 고민에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직장인도 나이에 관해서 고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직급별 나이 제한이 있는가 하면, 별별 희한한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나이 40만 되어도 직장에서 퇴출을 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입니다. 그나마 대학을 졸업하자 말자 곧바로 취업을 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에 분명합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이런 심정으로 그의 노년을 보내고 있었을까요? 그의 나이 이제 99세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일뿐입니다. 더 이상 기대해야 할 꿈이나 희망이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그르치는 헛된 일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개입이 있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엘샤다이. 그렇습니다! 화자는 번뜩이는 기지와 이야기 솜씨로써, ‘아브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그의 나이 99세에 일어났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절상). 화자는 이곳에서 ‘아브라함’의 나이와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를 절묘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그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에 대해서 들으면서 앞 장에서 읽었던 <이스마엘 이야기>를 또한 회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 어언 13년, 이 기간 동안 ‘사래’의 불임증은 더욱 치유불능으로 굳어져갔고,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도 ‘이스마엘’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으며, 당연히 ‘아브람’도 ‘이스마엘’이야말로 유일한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 시점에 ‘엘 샤다이’ 즉 전능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처럼 ‘엘 샤다이’가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아브람’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을 다루고 있는 16장과 17장은 그 형식에 있어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있습니다만, ‘이스마엘’은 ‘이삭’과는 그 격에 있어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마엘’의 경우 그의 출생을 예고해주는 자는 단순히 ‘여호와’의 사자에 불과하며, 그것도 ‘하갈’을 통해서입니다(16:9-11). 그러나 ‘이삭’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엘 샤다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그분의 전지전능하심, 특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28:3; 35:11; 48:3).
그러나 이 엄청난 하나님의 계시에는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에녹’이나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5:22; 6:9),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하). 하지만 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무죄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실현 불가능한 명령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만일 이것이 하나님과의 정직하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것은 가능해 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바울’ 사도는 이런 생활이야말로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걸을 수 있는 비결은 진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명예로운 백성일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2절).
사실 이 약속은 ‘아브라함’ 편에서 보자면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번에 걸쳐 들어오던 것이었습니다(13:16; 15:5). 다시 말하자면 이런 약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의 행위를 전제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엘 샤다이’의 절대주권적인 은혜가 돋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에는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에녹’이나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5:22; 6:9),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하). 하지만 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그야말로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실현 불가능한 명령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만일 이것이 하나님과의 정직하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것은 가능해 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바울’ 사도는 이런 생활이야말로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걸을 수 있는 비결은 진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명예로운 백성일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2절).
사실 이 약속은 ‘아브라함’ 편에서 보자면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번에 걸쳐 들어오던 것이었습니다(13:16; 15:5). 다시 말하자면 이런 약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의 행위를 전제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엘 샤다이’의 절대주권적인 은혜가 돋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전부터 들어오던 그 언약을 왜 이곳에서 다시 언급하시는 것일까? 그것도 생전에 처음 들어보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 ‘엘 샤다이’를 거명하면서까지.
이 질문은 17장의 핵심 주제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즉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과 약속의 후손이 과연 누구일 것인가에 관해서 새로운 내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자(고후 3:16), 동시에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직분, 새로운 탄생에는 그에 걸 맞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새로운 언약의 내용,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 ‘아브람’ 역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게 된 시점입니다.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를 지닌 ‘아브람’은 단순히 큰 민족의 아버지로만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12:2). 그는 ‘아브라함’, 즉 많은 무리의 아버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희망 사항을 담아 붙여준 이름이었지만, 새로운 이름 ‘아브라함’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그분의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의지와 약속을 담아 붙여준 이름입니다. ‘노아’는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라”(1:28; 9:1)는 명령만 받았을 뿐이지만, ‘아브라함’은 동일한 명령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와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라”(6절).
바로 이점이 달라진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자신이 주신 명령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공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참고, 빌 4:13). 그뿐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때로 중단되고 좌절을 겪기도 했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비로소 실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민족과 왕들이 그를 통해서 출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6절).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으로서 그의 후손 대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7절).
영원한 것은 또 있습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그의 이름과 함께 거명하고 있는 그 땅, 즉 ‘가나안’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8절상). 그동안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왔습니다만, 이제부터는 그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절). 이 말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자 인류의 구원자이신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민족도 누릴 수 없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말합니다. 바로 이 관계로 인해서 하나님은 앞으로 계속해서 이 나라를 인도하고 섭리해 가실 것입니다(출 6:7; 신 29:13; 렘 24:7; 32:38; 겔 11:20; 34:24; 슥 8:8).
“이처럼 가슴 벅찬 약속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아브라함’이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반드시 듣는 자의 책임 있는 반응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너는”(9절). 책임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라고 일찍이 선언한 바 있습니다만, 우리가 대답해야 할 가장 궁극적인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야 할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에 비하면 실로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서,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남자 권속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10절). 그러니까 할례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자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징표임이 처음부터 분명해 집니다: “이것이 나와 너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11절).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할례는 새로운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다른 민족들도 그 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의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아브라함’의 편에서 보자면, 할례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이 그에게 전가해 준 ‘의’에 대한 ‘믿음’의 표시에 있습니다(롬 4:9-12). 즉 그는 할례를 받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을 믿고서 그분의 ‘의’를 받았습니다(창 15:6). 그러나 이 징표는 세월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이에서 그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유대 민족은 이 의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할례를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신다는 보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신약 시대에 들어서도 ‘유대’ 의식에 따라 할례를 행한 ‘유대’인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을 들 수 있을 것이고(눅 2:21), 침례 ‘요한’(눅 1:59-60), 사도 ‘바울’(빌 3:5), 그리고 ‘디모데’ 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는 영원한 구원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4:9-12). 예컨대, ‘바울’ 사도는 진정으로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빌 3:3). ‘바울’ 사도는 적어도 두 번에 걸쳐 할례든 무 할례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7:19; 갈 5:6). 사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배경도 할례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옛 본성과 옛 생활의 정욕들을 이길 수 있게 하는 영적 수술을 시행하셨습니다. 할례는 육체의 일부를 제거할 뿐이지만, 참된 영적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것이며(골 2:11), 죄악 된 본성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할례는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는 회심의 순간에 시행됩니다(고전 12:13). 이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아울러 그분에 할례에도 참여한 자임을 알려줍니다(골 2:11-13). 그러므로 신약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의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사라. 이제 이어지는 이야기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보드라도, 대화 대신에 ‘아브라함’의 순종의 행동 즉 그가 어떻게 할례를 행했는가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되면서 긴장은 극적으로 고조되고, 갑자기 새로운 한 이름 ‘사라’가 등장합니다. ‘사라’입니다(15절). ‘사래’와 ‘사라’ 사이에는 의미 상 특별히 다른 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래’사 ‘사라’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그녀의 달라진 신분과 위상 때문입니다: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16절).
이 얼마나 멋진 한 쌍의 약속입니까! 이제 비로소 ‘사라’가 하나님의 큰 구원 계획을 이루는 중요한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결점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하와’와 마찬가지로 ‘유대’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머니가 될 참입니다(벧전 3:1-6).
이삭. 이 폭탄과도 같은 선언 앞에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땅에 엎드립니다(참고. 3절). 그러나 이번에는 놀라움이 아니라 웃고 있습니다(17절). 그가 왜 웃고 있는지 우리의 전지전능한 화자는 다 알고 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지극히 당연한 생각입니다. 세상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이 나이에 느닷없이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면 뭐라 할까? “저 노인네는 정말 말릴 수가 없단 말이야”하며 비웃지 않을까? ‘위어스비’ 목사님은 ‘아브라함’이 기뻐서 웃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본문의 분위기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이 팔십 여섯이 되도록 존귀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자가, 열국의 아버지는커녕 겨우 한 아들의 아비로 살아온 그가, 이제 와서 이름을 바꾸겠다고?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데?
‘아브라함’은 단순히 의심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진정한 속내가 무엇인지 드러내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무슨 새 아들을 얻기보다는 잘 자라고 있는 ‘이스마엘’이나 언약의 아들로서 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18절).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관례를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고작 이제 성년으로 접어든 아들, 지난 13 년 동안 함께 살아왔던 그 아들을 결코 버릴 수 없다는 아버지의 측은지심도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노년에 낳은 이 아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이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이 웃든 말든 하나님은 새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십니다. <성경>에서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받은 최초의 아이는 ‘이스마엘’이고(16:11), 두 번째가 ‘이삭’입니다. <성경>은 두 소년이 각기 다른 태생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마엘’은 육체로 난 것을 대표하고 있고, ‘이삭’은 성령으로 난 것을 대표하고 있습니다(갈 4:21-31).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이삭’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삭’이 없이는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이삭’이 없이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채워주십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20절). ‘아브라함’의 불안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속 시원한 대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이스마엘’은 여전히 ‘이스마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는 새로운 이름을 주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그만이 새로운 이름을 받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위어스비’ 목사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당신의 인생에 ‘이스마엘’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은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이 계획하시는 것이 최선의 것이다. 당신이 소중하게 간직해 온 꿈을 포기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있지만, 하나님이 내신 길이 언제나 올바른 길이다.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즉각적인 순종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화자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 ‘이스마엘’과 그 집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전능자의 은혜가 필요한 부분은 없습니까? 나이나 환경 등의 이유로 전능자의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늘 꿈만 꾸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2. 본문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신학적 절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 봅시다.
3.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두 가지 큰 사건은 무엇이며, 각각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본문에는 네 이름이 등장하며, 이들 이름은 본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거나 이전의 이름이 새롭게 바뀐 것입니다. 각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봅시다. 그리고 나머지 이름 ‘이스마엘’은 왜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