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8과
소돔과 고모라
김태정 목사창세기 18:1-19:38약 125분 분량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3절).
<성경> 지식이 거의 전무한 사회에서조차도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 그 이상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소돔 이야기>는 <대 홍수 이야기>와 짝을 이루면서, 이야기 자체가 전해주려는 교훈적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포악한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반응이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성애조차도 마다않는 사악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역사적 고발이라는 반응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정작 화자 자신이 전하려고 했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즉 <소돔 이야기>가 넓게는 <창세기> 전체, 좁게는 <아브라함 순환>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며, 다른 에피소드들과는 신학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특히 직전의 이야기 <할례의 언약>(17장)이나 직후의 이야기 <아비멜렉 이야기>(20장)와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소돔 이야기>를 읽으면서 풀어가야 할 숙제입니다.
<창세기>를 흐르는 큰 주제 중의 하나가 언약이라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땅; (2) 후손; (3) 국가나 민족들에 대한 축복(창 12:1-3).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도 예외 없이 이들 요소가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등장인물들의 독백이나 대화, 그리고 화자 자신의 해설 등을 통해서, 이들 언약의 핵심 내용들이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점진적으로 성취되고 있으며, 앞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18:1)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표현으로서, 무슨 새로운 언약의 약속을 기대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12:7; 17:1). 그러나 이야기는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방문객을 지극 정성으로 접대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가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은 단순히 손님 접대용이 아니라, <레위기>의 기준에서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용 음식이라는 사실을 현명한 독자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6-7절).
이는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섬겼다는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참고, 히 13:2). ‘아브라함’도 식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그에게 전해주고 있는 놀라운 소식이 그의 접대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라’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며(이전까지 ‘사라’는 ‘사래’로 통했습니다), ‘사라’가 일 년 후에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듣고 믿을 수 없다면서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만 웃고 있는 ‘사라’를 나무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이지만(참고, 17:19), 이전과 비교하여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아브라함’ 혼자가 아니라 ‘사라’도 그 소식을 함께 들었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이 웃었다는 사실은, ‘이삭’이 의미하는 바가 “웃음”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들 부모는 하나님의 약속을(부지불식간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확인했다는 뜻을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가 “내가 웃지 않았습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조차 ‘이삭’의 이름에 대한 일종의 “철자 바꾸기”(anagram)로서 화자의 수사적 기법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이야말로 18장의 핵심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더불어 민족이나 국가들에 대한 축복 또한 이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함께 ‘소돔’ 성을 바라보며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18:18). 이러한 축복 속에는 당연히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더 이상 친밀할 수 없는 언약의 관계 또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8:19). 하나님께서 하실 그 모든 일을 ‘아브라함’이 알게 되고 지켜보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나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어지는 긴 대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소돔’을 멸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구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려 여섯 번에 걸친 간구와 중보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처럼 친밀하지 않고는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간구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모세’나(출 32), ‘사무엘’이나, ‘예레미야’ 등과 같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처럼 단순히 동족만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이방인 ‘소돔’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대한 기도가 단순히 둘 사이의 친밀함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습니다. 그 이상의 약속 즉,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의 세 번째 요소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만일 ‘소돔’을 멸한다면 이 약속은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실 ‘소돔’은 그동안 여러 차례 멸망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곳 왕과 주민들은 이전에 ‘아브라함’으로부터 큰 신세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동방 왕들과의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두 도시의 왕들을 구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들과 노획물까지 다 돌려준 적이 있습니다(14장). 그 때 ‘소돔’ 왕이 보였던 태도는 배은망덕한 것이었습니다(14:21). ‘롯’ 역시 삼촌의 장막을 떠나 그곳으로 가버린 것을 보면, ‘소돔’ 땅은 배신자들의 땅으로 불려 마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런 도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아브라함’은 간구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단 열 명의 의인도 없겠느냐는 것이 그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희망은 부질없었습니다. 천사들이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맞이해 준 사람은 단 한 사람, 그 도시의 원주민이 아닌 이민자 ‘롯’뿐이었습니다. ‘롯’은 이들에게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환대를 해주었습니다. 싫다하는 천사들을 억지로 집 안으로 끌어들여 음식을 대접하고 잠자리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평가할 가지조차 없습니다. 무례와 무시를 넘어 강탈과 성폭행의 음욕까지 채우려했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말입니다. ‘롯’이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허겁지겁 내놓은 기막힌 중재안, 즉 그의 두 딸을 대신 차지하라는 요청은 보기 좋게 묵살당하고 맙니다. 화가 난 폭도들은 이제 ‘롯’마저 죽일 기세로 덤벼듭니다.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천사들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롯’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던 폭도들은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조금도 다를 바 없음이 ‘롯’의 두 사위를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임박한 멸망을 예고하며 그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장인의 제의를 한 마디로 미친 소리로 규정해버립니다. 실로 그 도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돔’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이 살아서는 안 되는 언약 밖의 ‘할렘’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이런 신학적 주제와 더불어,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지적 능력과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다양한 측면에서 일련의 교훈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교훈조차도 주된 신학적 주제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어떤 교훈들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문학과 역사
단락과 구조. <창세기> 18-19장은 하나의 이야기로서 통일성을 갖추고 있으며,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내 개의 막(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막이삭의 출생에 관한 예고(1-15절)
(2) 제 1막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구(16-33절)
(3) 제 2막 롯과 그의 가족이 소돔을 탈출함(19:1-29)
(4) 결말롯과 두 딸(30-38절)
이들 네 개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이야기로서 내적통일성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요 주인공들이 이 네 장면 전체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그렇고, 19장의 주인공 ‘롯’도 18장에서 이미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구를 통해서 암시되고 있으며, 18장의 주인공 ‘아브라함’ 역시 19장에서 그 이름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화자는 이 두 장에서 각각 ‘아브라함’과 ‘롯’을 의로운 영웅으로 부각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두 에피소드를 비교해 보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내적 통일성에 더하여 본 이야기가 <창세기> 전체적인 구조와 외적통일성도 가지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즉 화자는 단순히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 즉 <대 홍수>의 심판과도 비교해 볼 것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주제 내지는 동일한 모티브를 두 이야기를 통해서 쉽게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세상의 “심판과 멸망”, 그리고 “한 의인과 그 가족의 구원”에 관한 신학적 메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동일한 메시지는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을...기억하사(8: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19:29)
그리고 두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 또한 아주 흡사합니다. 즉 두 경우 모두 의인(주인공)의 탈출과 악인들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정교한 교차대구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으며(6:9-9:17//18:16-19:28), 이어서 이야기는 주인공이 만취(滿醉)하고, 그 자식들이 취한 아버지를 상대로 저지르는 악행을 묘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9:20-27//19:30-38).
이처럼 <소돔 이야기>와 <노아 이야기>는 하나의 설화로서 유사한 기법을 도입하고 있어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소돔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아브라함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서 충분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소돔 이야기>는 그동안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다루었던 일련의 에피소드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라든지, ‘롯’이 ‘소돔’으로 이주를 한 사실이라든지,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12:1-3)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할 만 한 것은 18-19장과 17장과의 관계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이름,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17장의 에피소드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장과 18장 모두 ‘야훼’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으며(17:1; 18:1), 한 아이가 출생할 것이라는 예고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으며(18:14; 17:21), 그 형식 또한 일종의 교차대구를 따르고 있습니다(아래 내용 참고).
이제 18-19장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분석해 볼 차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18:16-19:29) 역시 전체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정교하게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로 볼 수 있는데, 모두 11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모두 24시간 안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에 아이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삭’의 출생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이를 재확인하는 것과(18:1-15), 그리고 마지막에 ‘롯’의 후손 ‘모압’과 ‘벤암미’의 출생에 관한 기사가(19:30-38) 그것입니다. 이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홍수 이야기처럼 일련의 장면들이 대칭적으로 연결되어 해설과 대화 그리고 독백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서 보았듯이(2-3장, 6-9장, 17장), 이번에도 전반과 후반이 마치 거울상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즉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그 형식에 있어 서술의 방식을 취하면서 등장인물들이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 ‘소돔’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하나님의 독백(monologue)으로서 ‘아브라함’과 ‘소돔’에 관한 그분의 생각과 계획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 번째 장면은 이와 병행하는 장면으로서 실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대화(dialogue)로 이루어진 세 번째 장면에서는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으며, 이와 병행을 이루고 있는 아홉 번째 장면에서는 ‘롯’이 ‘소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시 장소는 ‘소돔’ 외곽의 한 지역입니다. ‘롯’과 하나님간의 대화가 훨씬 짧은 것이 사실이지만, 두 대화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롯’이 만일 ‘소알’로 피하도록 조처해 주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은(19:1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켜 줍니다(18:25). 두 장면에서 공히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며(18:26; 19:21), 멸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동일한 동사(השׂע)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18:17, 25, 29, 30; 19:22).
네 번째와 여덟 번째 장면은 주제와 형식에 있어 유사합니다. 형식에 있어서는 두 장면 모두 서술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네 번째 장면에서는 천사들이 ‘소돔’에 도착하는 것을, 여덟 번째 장면에서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른 장면에서는 이들을 단순히 “두 사람”이라고만 소개하던 것을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그들이 “천사”(ךאלמ)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가며 보이고 있는 동일한 태도나 행동 양식에 관한 것인데, 간청과 이를 마지못해 따르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하면서 그 점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19:3)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19:16)
다섯 번째와 일곱 번째 장면 역시 그 형식에 있어 해설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용은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롯이 나가서”(6, 14절), 사람들과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간구하였으나 모두 우습게 여기고 듣지 않았습니다(9, 14절).
여섯 번째 장면은 이야기의 중심 무대가 되는 곳입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 ‘소돔’의 멸망에 관해서 처음으로 밝히면서 ‘롯’으로 하여금 그곳을 떠나도록 제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칭구조의 중심 장면은 <홍수 이야기>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8:1; 참고 3:6).
이야기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소돔’의 운명에 관해서는 암시만 되어왔지만, 이제 비로소 명시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는 마치 필름이 되감기듯 그동안 진행해 오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대칭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무대의 장소 또한 그러합니다: ‘마므레’에서 시작한 이야기가(장면 1-3), ‘소돔’ 입구로 나아가다가(장면 4), ‘롯’의 집 어귀에서 잠시 머문 다음(장면 5), 중심 장면이 되는 ‘롯’의 집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장면 6).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는 이곳에서부터 정확하게 역방향으로 진행되는데, 무대는 ‘롯’의 집 어귀로 옮겨가기 시작하면서(장면 7), ‘소돔’ 입구를 되돌아(장면 8), 도시를 떠난 후에(장면 9), 다시 ‘마므레’에서 끝을 맺고 있는 것을 봅니다(장면 11).
이러한 장치는 <에덴 이야기>에서 보았던 무대의 이동과 아주 흡사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곳에서 이야기가 처음에 동산 밖 한 장소에서 시작하여, 동산 안으로 들어오다가, 핵심적 사건이 되는 배신과 타락이 동산 중앙에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무대는 서서히 그 중앙에서 시작하여 동산 밖으로 빠져 나오면서 ‘아담’과 ‘하와’가 동산 밖으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노아 이야기> 역시 주인공 ‘노아’가 방주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서 홍수 끝에 방주를 빠져 나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습니다. <에덴 이야기>와 <노아 이야기>의 「문학과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소돔 이야기>의 일부는 아니지만 외곽 구조 역시 이야기의 대칭 구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화자는 이삭의 탄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의 서두에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여(18:1-15), ‘롯’의 후손인 ‘모압’과 ‘에돔’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음으로써(19:30-38),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후손의 출생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 쌍을 이루게 하며,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대칭 구조를 더욱 보강하고 뚜렷하게 해 주는 효과를 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두 에피소드는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여러 쌍의 대칭 동심원의 가장 밖에 있는 한 쌍의 괄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소돔 이야기>를 <대 홍수 이야기>를 조금 더 상세하게 비교해 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우선 신학적 주제와 관련하여 그 유사성을 찾아본다면, 악인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 이어지는 내용은 그렇게 살아남은 의인조차도 심판 후에 술에 취하여 자식들로 말미암아 다시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에서 핵심 내용은 모두 그 형식에 있어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의 세 가지 ‘설화 기법’(반복; 현재화; 예시화)에 대해서 서론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이 두 이야기는 반복의 기법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유사한 수사적 기법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두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함께 나가니라(18:16)
노아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니(6:9)
그리고 의로운 ‘노아’와 마찬가지로(6:9; 7:1), ‘아브라함’ 역시 가족들에게 공의를 가르치고 있으며(18:19), ‘소돔’이 멸망을 당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의인들 때문이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화자는 ‘롯’에 대해서 한 번도 의인이라 지칭하지는 않지만,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적어도 상대적으로 ‘소돔’ 사람들에 비해서 ‘의인’임에는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두 이야기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또는 독백과 관련한 표현이 그것입니다. ‘소돔’에 관한 그분의 생각과(18:17-21), 홍수에 관한 계획을 말할 때(6:5-8), 핵심 단어로서 동일한 동사 ‘파멸’(תחשׁ)를 사용하고 있습니다(6:13, 17; 9:11, 15; 18:28, 31, 32; 19:13, 14, 29).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는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천사들이 그들의 손을 뻗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19:10) 행동은 “노아가 손을 뻗어 비둘기를 방주 안으로 받아들이는”(8:9) 행동과 아주 흡사합니다. 천사들이 ‘롯’을 집 안으로 이끌어 들인 후에 문을 잠거 버리는 행동은(19:10)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 안으로 들인 후에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7:16). <홍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노아’에게 방주를 건설하도록 경고한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셨던 것처럼(6:13-21; 7:1-4), <소돔 이야기>에서도 천사들이 저녁에 ‘롯’에게 찾아와 (19:12-13) 다음 날 아침에 그곳을 떠나도록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19:15-16). 멸망 후에 살아남은 자들의 구성원 또한 좋은 비교가 됩니다: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 ‘노아’와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자부들. 홍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땅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지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어”(6:8)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롯’ 역시 ‘소돔’을 빠져 나오면서 ‘소알’만은 남겨둘 것을 천사에게 간구했는데 그것은 그가 “주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9:19). ‘소돔’을 멸망시키면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셨는데(19:24), 이 표현 역시 ‘노아’ 홍수에서 비를 내리신 것과 동일한 단어임에 분명합니다(רטמ; 7:4; 19:24).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내보내셨더라”(19:29)는 표현은 분명 “여호와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8:1)는 표현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처럼 두 이야기는 그 내용이나 형식 및 수사적 기법에 있어 닮은 점이 너무 많아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돌릴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서론에서도 소개한 바처럼 화자는 일종의 ‘반복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두 설화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어떤 통일된 체계를 마련해주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자료와 편집. 본문의 <문학과 역사>에 관한 연구와 관련하여 이제 우리의 남은 관심사는 18장과 19장의 상관관계, 특히 자료와 전승에 관한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소돔 이야기>(18:16-19:29)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18장과 19장이 각기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여 나름대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찾아와 이야기를 건네는 방문객의 신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18장에서는 ‘마므레’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이야기를 건네는 분은 ‘야훼’ 하나님인데 반해, 19장에서는 ‘소돔’에 사는 ‘롯’을 찾아온 자는 두 천사라고 언급하고 있어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 천사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물론 <소돔 이야기>에서 그 배경 역할을 하고 있는 18:1-15의 본문을 통해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마련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이곳에서 천사들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이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두 에피소드에서 밝히고 있는 시간을 비교해 보면 18:1-15 역시 전체 이야기의 한 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18:1에서 밝히고 있는 시간은 “대낮”이고 19:1에서는 “저녁 때”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는 적어도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내용상의 일관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18장과 19장이 전체적으로 갖는 문학적 병행 관계일 것입니다(참고. 도표). 두 이야기에서 병행관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역시 방문객을 접대하는 장면과(18:1-8; 19:1-3), 두 도시를 위해서 간구하는 장면입니다(18:23-32; 19:18-22). 그렇지만 두 본문에서 이들 두 장면 외에도 병행관계를 보여주는 곳은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돔 이야기>는 그 형식에 있어 17장이나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칭 구조 + 병행 구조. 다시 말하자면 전체적으로는 대칭 구조를 취하면서, 내부적으로 다시 각각 두 개의 병행되는 이야기 쌍을 이루고 있는 그러한 구조를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17장은 <사제 전승>, 그리고 18-19장은 <야훼 전승>으로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이야기는 그 형식에 있어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흔히 17장을 <사제 전승>, 그리고 18-19장의 대부분이 <야훼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서로 다른 전승에 속해 있으면서도 상호 문학적인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제 전승>으로 분류되고 있는 19:29만 제외하고 나면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야훼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점을 인정한다 하드라도, 여전히 본문의 문학적 일관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야훼 전승> 내에서조차도 등장인물들의 수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방문객들을 때로는 사람들이라고 했다가 천사들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중 한 방문객을 ‘야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이들 방문객을 단수형으로 묘사하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복수형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장 내에서 문학적 일관성을 지니는 단위들만 별도 구분해서 본문을 새롭게 구성해 보려는 시도가 없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을 때조차도 여전히 이야기의 흐름은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은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청(또는 중보)은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었던 이 대화를 읽으면서 받게 되는 느낌은(18:23-32), 한 국가나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 한 개인이 역할이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런 사상은 주전 7세기 후반이나 6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과 같은 선지자들이 주로 발전시켰던 사상으로서, ‘야훼’ 기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라는 견해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반박할만한 다른 근거도 없지는 않습니다. 주전 20세기경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도 이미 이런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구약의 <지혜서>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에 근거한 교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문학적 일관성과 관련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두 장은 전체적으로 통일되고 일관되는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으며, 자료의 성격 역시 보다 오래된 <야훼 자료>에 속하는 것이지 후대의 편집적 삽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Wenham, 44쪽.
우리는 이 점을 본문의 형식과 구조 분석을 통해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마지막 진술(19:29)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는 이야기 내용 전체를 요약하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앞에서 사용해오던 하나님의 이름 ‘야훼’ 대신에 ‘엘로힘’ 하나님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자들은 이 구절만을 따로 떼어 내어 <사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대로, 이 구절은 <소돔 이야기>와 <홍수 이야기> 사이의 병행 관계를 연상시켜주기 위한 문학적 장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19:29와 8:1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형식적 유사성을 제외하고 나면 이 구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모두 18-19장의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1. 프롤로그(1-15절)
심판과 멸망이라는 심각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서막의 분위기는 이와는 동떨어진 목가적이고 전원적입니다. 숲으로 어우러져 있는 ‘마므레’의 한 장소에서 주인공 ‘아브라함’이 낯선 방문객들을 환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있는 첫 번째 장면과(1-8절), 방문객들이 ‘아브라함’의 정성이 담긴 환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임박한 ‘이삭’의 출산에 대해서 재확인해 주고 있는 두 번째 장면(9-15절)에서 그러한 분위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임박한 대 멸망에 대해서 아는지 모르는지 등장인물 모두 아주 한가롭고 여유롭기만 합니다.
장면 1: 환대(18:1-8). 전지전능한 화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을 찾아 온 세 사람의 방문객 중 한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밝혀둡니다: <개역 성경>은 “여호와께서...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쓰고 있으나, “여호와께서...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번역함이 옳습니다. 이처럼 고유명사 대신 대명사를 쓰고 있는 이유는 <소돔 이야기>가 분명 앞의 이야기와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1절)
당연히 ‘아브라함’은 이런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 구절은 물론 화자 자신의 해설임에 분명합니다. 17:1에서도 화자는 하나님의 현현과 관련해서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2절)
이야기 속의 주인공도 알아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독자들에게 먼저 알려주고 있는 화자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적어도 기능적으로 볼 때 그의 해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셔서”,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하셨다는 22:1절의 해설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화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언급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과연 그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일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 손님들이 누구인지 그 신분을 정확하게 알아맞힐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맞아들이는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식보다는 마음가짐(attitude)과 그에 걸 맞는 행동(action)을 보겠다는 것이겠지요. 이점이 화자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해석적 초점도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중간고사에서 과연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게 될 것인가?” 현명한 독자라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 그렇게 힘든 작업이 아님을 이내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 짧은 단락 곳곳에 화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황묘사에서부터 주인공의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친절하게 일련의 표지판들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본즉(18:1하-2상)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곳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정황 묘사가 꼭 필요한 것일까? 아마 화자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한낮의 더위를 피해 이제 막 오수(午睡)를 즐기려고 앉았습니다. 바로 이때, 즉 햇볕이 너무 뜨거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을 이 시간에,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씩이나 그를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리고 그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화자는 이례적으로 아주 장황하게, 그리고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이들 방문객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습니다. 주인공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몰랐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졸고 있었기 때문이었거나, 또는 이들 방문객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들은 때로 홀연히 나타났다가는 다시 홀연히 사라지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입니다(삿 6:11-21). 모르긴 해도 전자(前者)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우선 화자는 ‘아브라함’의 태도(attitude), 즉 그가 손님을 맞이함에 있어 얼마나 정중하고 예의바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하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18:2하-3)
2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의 재회를 그릴 때 <창세기> 화자가 자주 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29:13; 33:4). 3절의 표현 역시 <성경>의 기준에서 볼 때 이례적으로 장황하고도 공손한 것입니다. 이는 왕이나 귀족 등과 같이 신분이 높은 사람을 대할 때 상대를 향해서 쓰는 표현이기도 합니다(23:12; 37:9; 42:6). ‘아브라함’이 손님을 항해 부르는 호칭, “내 주여”는 “선생님이시여”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문자적으로는 ‘아도나이’ 즉 하나님을 부를 때 쓰는 용어로서(MT 사본),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는 “주 여호와여”(또는 전능하신 주여)라는 의미로 통하고 있습니다(15:2, 8). 그리고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에서는 이곳과 <홍수 이야기>에서만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아가 (여호와 앞에)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찾아 온 손님은 세 사람이었지만, 실제 3절에서의 대화 상대는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 “내 주”입니다. 이는 4-5절에서 ‘아브라함’이 대화의 상대를 ‘당신들’로 부르고 있는 것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화자는 3절에서 일련의 수사(修辭)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들 방문객은 단지 지치고 피곤하여 도움이 필요했던 여행객에 불과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환대를 아끼지 않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본능이자 본성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의 설명은 계속됩니다. ‘아브라함’은 지치고 목마르며 배고픈 여행객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4절-5절상)
‘아브라함’이 제공하려고 하는 떡 몇 조각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의 도움일 뿐이라는 지적에 대해서 혹자는 흥미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떡 몇 조각은 ‘아브라함’이 제공하려는 큰 대접의 일부일 뿐이다. 만일 처음부터 그가 의도했던 바를 모두 다 밝혀 버린다면, 손님들이 크게 부담감을 느껴 분명히 그냥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에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가 제공할 접대의 일부만 이야기했을 것이다.” Wenhem, 46쪽(참고도서 1).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대화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4절하)
달리 번역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당신들이 여기 오신 이유가 바로 이 일, 즉 이 종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For this why you have come, for your servant's benefit.”(Wenhem, 33쪽).
‘아브라함’은 지금 그가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즐거움이 되며, 그래서 유익이 되기도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수사적으로 역설이자 일종의 예언에 해당합니다. 실제 이 접대로 말미암아 그는 나중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받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친절한 배려는 단순히 수사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운전자가 자동차의 변속 기어를 갑자기 바꾸듯, 오수를 즐기려다 말고 벌떡 일어나, 태양이 작열하는 대낮 속을 급하고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는 그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급히 장막으로 가서; 아브라함이 또... 달려가서; 그가 급히 요리 한지라(6-8절)
‘아브라함’의 나이와 지위를 생각해 보면 이런 행동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나이 99 세의 족장이 하인을 시키지 않고, 노구(老軀)를 이끌고 직접 음식 장만을 하느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사라에게 가서...떡을 만들라 하고; 7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송아지를 잡아; 8젖과 우유와...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6-8절)
이뿐만 아니라,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뒤에 서서 지켜보면서 섬기고 있습니다. 오늘날 고급 식당에서 종업원이 식탁 주위에 서서 손님의 다음 주문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켜 줍니다:
나무 아래에 서서 모셔 서매(8절하)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환대하였다고 화자는 덧붙이고 있습니다:
6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떡을 만들라 하고; 7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6-7절)
한 ‘스아’가 대략 8리터 정도이므로 24리터의 분량에 해당하는 가루로 떡을 만들었으며, 고기 역시 양이나 염소 한 마리면 족할 것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았으니 세 사람의 식사 분량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 ‘사라’에게 가져다 준 ‘고운 가루’는 하나님의 성소 안에 두는 ‘화제물’(cereal offerings)로만 쓰는 것이고(레 24:5),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역시 그 질(質)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희생 제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나 탁월한 ‘헤세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세드’가 무엇입니까?
장면 2: 보상(18:9-15). ‘아브라함’이 무슨 보상을 바라고 손님을 접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베푼 ‘헤세드’는 즉각적으로 보상의 연쇄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첫 수혜자는 아내 ‘사라’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대화가 시작되면서 방문객들은 비로소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찾아왔는지, 그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화자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주제, 즉 ‘언약’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요약해 봅시다.
두 번째 장면에서 관심의 주인공은 ‘사라’입니다. 비록 손님들이 식사하는 동안 내내 장막 안에 있어야 했지만, 그녀는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9-10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하등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오던 터이기 때문입니다(참고, 17:15-21). 당연히 놀라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다릅니다: 이곳에서는 17장에서와는 달리 아들 ‘이삭’의 이름은 거명되지 않았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출생과 관련하여 ‘사라’ 역시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으며, 이 단어는 이곳에서 네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절)
이 웃음은 단순한 실소가 아니라, 깊은 절망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일종의 한숨 섞인 비웃음으로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폴 존슨’은 ‘사라’의 웃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웃음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보여주었던 씁쓸하고도 달콤한, 슬프고도 역설적이며 심지어 냉소적인 웃음을 미리 맛보는 사건이었다.”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I」.김한성 역. 서울: 살림, 2005.
화자 역시 ‘사라’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꼭 같은 말로 화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11절). ‘사라’가 나이 90이나 된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17:17), 이 구절에서 제공하고 있는 정보는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17장과 18장이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창세기 내에서 90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며, 특히 ‘사라’는 아주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여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2:11; 20). 따라서 이곳에서 새롭게 더해주고 있는 정보는 그녀의 ‘생리가 끊겼다’는 것인데, 현대 독자들에게는 당연한 이 사실이 아마 원 독자들에게는 그렇게 자명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화자의 이 설명은 ‘사라’ 자신의 한숨 섞인 자조와 함께 독자들로 하여금 ‘사라’의 처지를 이해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사라’의 임신과 관련하여 초자연적인 개입, 즉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3절)
이 질문은 ‘아브라함’을 향한 것이지만, 실은 ‘사라’를 향하고 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상)
‘사라’는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웃은 적이 없다고 부인해 보았지만(15절상), 통하지 않습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사라’는 더 이상 버티기보다는 그분이 진정으로 ‘야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사라’가 과연 믿음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받아들였는지 여부에 관해서 <신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히브리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히 11:11, <개역성경>). 이 구절은 마치 ‘사라’의 믿음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즉 본문의 주어는 ‘사라’임), ‘헬라’어 일부 사본에 따르면 주어가 ‘사라’가 아닌 ‘아브라함’으로 번역하고 있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로써, NIV 번역본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By faith Abraham, even though he was past age-and Sarah herself was barren-was enabled to become a father because he considered him faithful who had made the promise“(히 11:11, NIV).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영어 번역본은 같은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Through faith also Sara herself received strength to conceive seed, and was delivered of a child when she was past age, because she judged him faithful who has promise”(AV). 그러므로 단순히 <히브리서> 11:11만 가지고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2. 제 1막: 중보(16-33절)
장면 1: 소돔을 바라봄(16절). ‘아브라함’의 봉사는 자기 가족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의로운 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게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중보의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헤브론’ 언덕 위에 서면 멀리 사해(死海) 건너편으로 ‘소돔’이 내려다보입니다. 식사를 마친 천사들이 일어서 그곳을 뚫어지게 응시합니다(16절상). 우리말 <개역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18:16상). 그러나 올바른 번역은 다음의 예에서 보듯이 천사들이 소돔을 내려다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They looked down toward Sodom(18:16a, NIV)
‘소돔’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18:16-19:29) 전체적으로 11개의 장면이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으며, 첫 장면(18:16)은 마지막 장면(19:27-28)과 함께 ‘아브라함’이 그의 장막을 떠나면서 ‘헤브론’ 언덕 위에서 ‘소돔’을 내려다보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 비로소 방문객들의 진정한 관심사가 ‘소돔’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베어나고 있으며, 분위기는 서서히 긴장국면으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따라 일어났다가 그곳을 함께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장면 2: 소돔 유감(17-21절). 하나님은 독백을 통해서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이 일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절)
대홍수 시에 ‘노아’도 멸망에 관해서 가장 먼저 정보를 제공받은 인물이었습니다(6:5-13).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남보다 먼저 안다는 것은 분명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노아’처럼 선지자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참고, 암 3:7).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에 관해서 많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분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화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어지는 진술에서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21절)
만일 ‘아브라함’이 앞질러, “주님, 언제 소돔을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고 물으신다면, 그는 선지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의 관심사도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9절)
공의와 정의는 구약윤리의 핵심이면서, 언약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쌍무적인 계약의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예: 출 19:4-5). 이 언약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지고 있는 의무는 좁게는 ‘할례’에서 시작하여(17:9-14), 가장 포괄적으로는 ‘쉐마’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신 6:4-7).
장면 3: 중보(22-33절).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까?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길고도 지루하기까지 한 세 번째 장면에서 이점을 보게 됩니다. 세 번째 장면은(18:22-33) 아홉 번째 장면과(19:17-22)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각 장면에서 두 주인공 ‘아브라함’과 ‘롯’의 끈질긴 하나님과의 씨름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과연 그는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그는 서둘러 ‘소돔’을 위하여 변론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구하려는 일념에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 마주 서서 무려 여섯 번에 걸쳐 ‘소돔’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야기에서 ‘반복’은 자주 볼 수 있는 수사적 기법이지만, 본문에서처럼 여섯 번에 걸친 반복은 지극히 예외적인 것으로서 이야기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대화체로 이루어진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간구와 하나님의 대답이 매번 유사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단어나 표현 방식 또한 짝을 이루듯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용서하리라”(24, 26절); (2) “멸하시리이까”/“멸하지 아니하리라”(28절); (3)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27, 31절); (4) “노하지 마시옵고”(30, 32절); (5) “내가 만일...찾으면”(26, 28, 30절); (6) “멸하지 아니하리라”(28, 31, 32절); (7) “...명으로 말미암아”(29, 31, 32절).
독자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중보의 기도를 만나게 됩니다. ‘모세’나 ‘사무엘’이나 ‘이사야’와 같은 위대한 중보자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 모두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중보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역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브라함’의 요청을 무시하지 않고 일일이 끝까지 응답하고 계십니다.
처음 ‘아브라함’은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함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23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그 성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이까. 25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3-25절)
이 질문은 하나님의 윤리에 대한 도전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지혜자들이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님은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8, 9). ‘아브라함’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일견 ‘소돔’에 있을지도 모르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과연 의롭고 합당한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는 심판자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근거로 소돔에 의인 50명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50명 때문에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26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갑자기 공손해지면서 대화의 주제도, “소돔에 살고 있는 의로운 사람들마저 과연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인가”에서 “그 의인들 때문에 그 도시가 과연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주제가 다소 넓어진 셈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는 <성경> 독자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50명에서 시작한 의인들의 숫자를 마지막 10명까지 줄여가면서,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기를 원합니다. 처음 세 번의 간구에서는 50명에서 다섯 명씩 줄여가다가(50 ⇒ 45 ⇒ 40), 나머지 세 번의 간구에서는 보다 과감하게 열 명씩 줄이면서 30명에서 20명, 그리고 10명까지 내려갑니다. 그 때마다 ‘아브라함’의 태도가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니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27절)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30절)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31절)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32절)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만, 혹자는 묻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열 명 이하로 더 내려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이 더 이상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대화를 중단시킨 쪽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33절)
화자도 이런 질문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롯’ 외는 그 도시에 의인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보여주고 있습니다(19:9). 시편 기자나 ‘바울’ 사도도 이 점에 충분히 동의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 롬 3:10).
여섯 번의 간구 내내 ‘아브라함’이 들은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의인들이 몇 명이 있든지 상관없이) 내가 이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왜 10명을 끝으로 간구를 중단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혹자는 10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즉 ‘소돔’에 살고 있는 ‘롯’의 가족이 그를 포함해서 그의 아내, 두 아들과 두 자부, 그리고 두 딸과 두 사위, 도합 10명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완수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하나님의 친구’였으며(대하 20:7; 사 41:8; 약 2:23),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들보다 더욱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간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족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친구라는 호칭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과 ‘나사로’뿐입니다(요 11:11).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서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요 15:15).
3. 제 2막: 소돔 탈출(19:1-29)
장면 4: 환대(19:1-3). 네 번째 장면은 천사들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는 ‘롯’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그들이 다시 소돔을 떠나는 여덟 번째 장면(19:15-16)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또한 서막의 첫 번째 장면, 즉 ‘마므레’에 있는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이야기와도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1절)
화자가 이 장면을 첫 번째 장면에 비해서 다소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어, ‘롯’이 이들 방문객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브라함’보다 못하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손님들을 접대하는 점에 있어서 롯은 ‘아브라함’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참고, 18:3-5):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19:2); “롯이 간청하매...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19:3). 아주 공손하고 예의바르며, 단순히 식사뿐만 아니라 잠자리까지 기꺼이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의 제의를 거절하자, 강제로 그들을 집 안으로 맞아들이기까지 합니다.
다만 화자는 이곳에서 유사한 표현을 다시 길게 반복해서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면 되겠습니다.
오히려 처음 이야기와 구별되는 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롯’을 방문하는 천사들이 셋이 아니라 둘이라는 점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 자신은 그곳에 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18:16-22). 이런 차이에 대해서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대하듯이 ‘롯’에 대해서는 그렇게 친밀하게 사귐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롯’은 비록 신자이긴 했으나 그의 생활은 주께서 그를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하실 만한 생활이 아니었다. 세상과 구별된 신자만이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사귐을 갖는다.” ‘위어스비’, 99쪽.
아무튼 이 장면에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천사들을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구약에서 ‘성문’은 중요한 공공장소로서, 장로와 같은 마을 지도자들이 회의나 집회를 주재하며 법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롯’은 비록 그곳 토박이는 아닐지라도(19:9),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의문은 남습니다: “왜 그 자리에 ‘롯’만 있었을까?”; “왜 다른 장로들도 함께 방문객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당시 ‘롯’ 외는 아무도 없었을까?”; “이것이 ‘소돔’의 인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롯’은 그 도시의 외톨이였을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이들 의문 중 일부는 해소할 수 있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천사들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롯’의 집을 찾아갔고, ‘롯’만이 그들에게 필요하고도 적절한 환대를 해주었다는 점입니다.
차이는 또 있습니다. 천사들은 처음부터 ‘롯’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거나, 또는 그 집에서 묶을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롯’이 예의를 갖추어 천사들을 집으로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거리에서 밤을 새겠노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9:2). <구약>의 관례에서 볼 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결례이자 무례입니다. 참고, 24:23, 54; 삿 18:2; 19:4-20.
이런 점들 때문에 이어지는 이야기에 대해서 우려 섞인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사들이 셋이 아니고 둘이 찾아온 점이나, 오직 ‘롯’만이 성문 앞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에 더하여, 천사들 또한 ‘롯’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장면들이 모두 이러한 우려를 더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왜 천사들은 ‘롯’의 초청을 거절하며 거리에서 밤을 보내겠다고 우기는 것일까?”; “무엇이 두려워 ‘롯’의 집에서 지내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날 저녁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조사해 볼 무엇이라도 있었을까?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해 볼 일입니다.
천사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롯’은 두렵기만 합니다. 그들이 거리에서 밤을 보낸다면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할렘’ 거리를 밤중에 혼자 걸어 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롯’은 두려운 나머지 이들의 “팔을 붙잡아 비틀어 잡아끌면서” 말립니다. 이 표현은 2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간청하다”를 사실에 가깝도록 해석한 것입니다(Wenhem, 54쪽).
이에 천사들이 마지못해 응하여 ‘롯’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긴장된 분위기를 다소 완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사를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3절)
장면 5: 소돔 사람(4-11절). 일찍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살 수 없어 이곳 ‘소돔’으로 옮겨 왔을 때, 화자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고 복선을 깔아둔 바 있습니다(13:13). 그 구체적인 사례가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다섯 번째 장면은 일곱 번째 장면에서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무대 장소는 ‘롯’이 살고 있는 집 밖이며, 각 장면에서 ‘롯’의 제안은 그의 이웃과 사위들에 의해서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 사례는 앞에서 제기한 바 있는 우려 섞인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왜 천사들이 ‘롯’의 집으로 들기를 주저했는지, 그리고 ‘롯’은 왜 한사코 이들을 자기 집에서 머물도록 강요했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적어도 손님 접대에 있어 ‘롯’은 ‘소돔’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헌신적입니다. 지극한 환대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롯’은 그의 손님들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습니다! 따라서 ‘롯’이 이들의 경고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는 화자의 선언을 확인해 봅시다. 그는 이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소돔’에 사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소돔’ 사람이 사악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돔 사람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4절)
다시 말하자면 그 도시에 이민자 ‘롯’을 제외하고 나면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강조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곧 밝혀지겠지만, ‘롯’이 이곳을 떠나고 난 후 ‘소돔’ 전체는 멸망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염려하던 것, 즉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죄악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이 굶주린 사자처럼 무엇을 외쳐댔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집단 혼음에다 동성 간의 관계를 합창하듯 주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문제는 ‘소돔’ 인들이 ‘롯’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과연 “성 관계”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상관하다”는 ‘히브리’어로 ‘עדי’(yada)로서 영어의 know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서, <구약> 전체에서 1058번 등장하는 중에서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뜻으로 열다섯 번 정도가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창 4;1, 17, 25; 19:5, 8; 24:16; 38:26; 민 31:17, 18, 35; 삿 11:39; 19:22, 25; 삼상 1:19; 왕상 1:4). 그런데 이 구절에서도 그런 뜻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단순히 “알고 지내다” 정도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의 이런 행위가 왜 죄악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그 요구가 단순히 요청의 수준을 넘어 지나치게 무례하고 과격하여 나그네에 대해서 결례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롯’의 대답은 이런 식의 해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두 딸이 있노라...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8절).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이 “성 관계”가 과연 “성폭행”이라는 수단을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약>에서 이 단어가 그런 의미까지 내포해서 사용된 적은 없습니다(보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 ‘밀턴’의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4, 34쪽).
오늘밤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5절).
친절하고 예의바른 ‘롯’이 과연 이 세상의 주문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손님에 대한 예우와 접대는 동방 세계의 최대의 덕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롯’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 온 손님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으며, 만일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는 뒤로 문을 닫고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 색욕에 굶주린 군중과 홀로 맞서고 있습니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보호하겠다는 단호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6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6-7절)
지금 그는 부지불식간에 두 방문객 사이에서 중보자(또는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뒤에는 두 천사가 있고, 앞에는 이들을 덮치려고 미쳐 날뛰는 ‘소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어떤 중재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그가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정도일 것입니다. 이리 같은 군중들을 향하여 호통을 쳐서 쫒아 보내든지, 아니면 그들 요구를 들어주든지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윤리적 요구”를 따르든지 또는 소위 “상황윤리”를 선택하든지 일 것입니다.
다른 제 3의 선택은 없을까요? ‘롯’이 선택한 길이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써, 두 방문객을 동시에 만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8절)
아주 절묘한 선택입니다.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모두를 만족(내지는 구원)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티브, 즉 남자들을 위하여 여자들을 희생 제물로 삼는 이야기는 이곳이 처음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바로’ 왕이 두려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왕에게 바쳐 자신의 위기를 모면한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창 12). 유사한 이야기는 <사사기> 19장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롯’이 취한 이러한 선택은 적어도 두 가지 관점에서 <소돔 이야>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중보(내지는 대속)의 개념입니다. 18장에서 중보자가 ‘아브라함’이라면 19장에서는 ‘롯’의 두 딸이 이에 해당됩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롯’의 식구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면, ‘롯’의 두 딸이 대속의 제물로 희생된다면 두 천사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보상(내지는 보응)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은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 ‘이삭’의 출생에 관한 계시를 받은 것과 같이, ‘롯’ 역시 역설적이긴 하지만 일종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 보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딸로부터 받게 될 보상 즉 보복입니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롯’의 두 딸은 지금 당장은 아비의 결정에 대해서 아무런 의견이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자신들의 기회가 왔을 때 지금 그들이 받았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 줄 것입니다. 아비를 취하게 만든 다음, 이전에 그가 ‘소돔’ 사람들에게 제안했던바 그것을 다른 사람 아닌 아비에게 고스란히 되갚아 주는 일을 말합니다(30-38절). 이전에 힘없는 피해자들이 이제는 가해자의 신분으로 인생 역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롯’의 유순한 제의에 더욱 분개하며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너는 물러나라.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9절)
‘롯’은 그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는 꽤나 성공한 사람이었을 텐데도, 원주민들의 태도는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이 자신의 잣대로 그들의 행위를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루려고 하는지라(9절)
‘롯’은 두 손님을 구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그를 구해줄 수 있을까? 그가 구원하고자 했던 두 천사입니다: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10절)
이 장면은 마치 ‘노아’가 손을 뻗어 비둘기를 방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모습과 흡사합니다(8:9). <소돔 이야기>와 <대 홍수 이야기>가 여러 면에서 병행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노아’가 비둘기의 지혜나 능력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두 천사 역시 ‘롯’의 지혜와 능력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천사들은 몰려든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버렸습니다: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11절상)
일종의 강렬한 빛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들 눈먼 자들이 ‘롯’의 문을 한사코 찾으려고 더듬거리고, 비틀거리다가, 저희들끼리 부딪히고 넘어지는 모습은 심각한 이야기에 일말의 희화적(戱畵的) 요소를 더하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바벨탑 이야기>의 모티브를 연상시킵니다. 즉 하나의 언어로 말하고 떠들던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 직후에 마치 낮선 외국인들을 대하듯 서로 말이 통하지 않자, 온갖 손짓 발짓을 해가며 의사소통을 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는 모습은 ‘소돔’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이런 엄청난 충격을 당하고도 집에 돌아갈 생각은 않고 여전히 ‘롯’의 집 문을 찾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인생의 고난들은 때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회개로 이끄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때로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암 4:6-12).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돌이켜 회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돔’의 영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름 하게 하는 화자의 수사적 침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소돔’에는 의인 다섯 명은 고사하고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며,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된 것도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결과였음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회개하는 것조차 임의대로 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면 6: 멸망의 예고(12-13절). 이야기는 여섯 번째 장면에서 대칭 구조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소는 ‘롯’의 집안입니다. 두 방문객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왔는지를 드러냅니다. <노아 이야기>와 마찬가지로(6:13-21), ‘롯’이 듣게 되는 중심 메시지는 임박한 심판 즉 세상의 멸망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구원은 항상 동전의 양면으로 다가옵니다. 심판은 “들을 귀”를 가진 자에게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소돔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심판과 함께 하나님의 긍휼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천사들의 질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의문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마치 ‘롯’과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롯’의 아내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으며,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두 딸이 언제 결혼을 해서 남편을 두게 되었는지, 그리고 ‘롯’이 사위까지 챙겨야 할 책임은 없었을 것 같은데 이들을 다른 가족보다 앞서 언급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누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절)
화자는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에 천사들과 대화중에 제기했던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무차별적으로 대하시는가?”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추가 다수의 악한 무리 쪽으로 기울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의로운 무리 쪽으로 기울어야 할 것인가?” “그분의 심판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대답을 마련해 보시기 바랍니다.
장면 7: 비웃음(14절). ‘롯’이 가장 먼저 달려가서 천사의 예고를 들려준 사람은 아내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딸도 아닌 사위들이었습니다(그들이 ‘롯’의 딸들과 이미 결혼을 했는지 아니면 앞으로 할 사람들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화자가 왜 하필 이 두 사람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만, 아마도 이야기의 대칭적 구조를 위한 수사(修辭)적 의도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곱 번째 장면과 다섯 번째 장면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서, 두 장면에서 모두 ‘롯’의 심각한 경고가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배척당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를 조롱하는 자는 각기 ‘소돔’ 사람과 그의 사위들입니다.
이 무리가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모습은 울어야 할 때와 웃어야 할 때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전 3:4). 이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을 위하여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울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박장대소하며 ‘롯’과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훗날 ‘사라’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사위는 영락없이 ‘소돔’의 다른 불의한 무리를 대표하는 자들일 뿐임을 화자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우습게 여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신약에서도 여러 차례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장면 8: 구출(15-16절). 드디어 ‘소돔’에 운명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그러나 이 새벽은 ‘소돔’을 위해서가 아니라 ‘롯’을 위한 것입니다. 천사들은 황급하게 ‘롯’을 깨웁니다:
서둘러라. 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떠나거라(15절)
그러나 ‘롯’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16절). 사위들에게는 ‘소돔’을 떠나야 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해밀턴’은 이런 그를 가리켜 “지시는 잘 내리면서 정작 자신은 지시받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자”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왜 ‘롯’은 떠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소돔’에서 누리고 있는 그 많은 기득권 때문일까?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 그리고 부. 이러한 ‘롯’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평가는 오히려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본문 중 어느 곳에도 그가 세상의 불의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고통 받았다는 언급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베드로’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드라도, ‘롯’은 싱거운 소금이었고, 어두운 등불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사위들조차도 그의 말을 우습게 알았다는 사실이 이들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얽매이기 쉬운 것으로 말미암아 타협하고 양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종말이니 하나님의 심판이니 하면서 외쳐댔으니 아무도 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조차 구원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그리고 아무 관심도 없는 그의 가족까지 덤으로 챙겨주십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15절)
이 장면은 다시 한 번 <홍수 이야기>를 연상시켜 줍니다만, 화자는 ‘베드로’와는 달리 ‘롯’이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에 대해서 경고하셨고(6:13-21), 그로 하여금 방주를 준비하게 하셨으며(7:1-4), 그와 그의 가족들을 방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7:7). 두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태도나 행위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노아’는 그 모든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데 반해 ‘롯’은 불순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유는 다른데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만(29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긍휼(compassion)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긍휼)를 더하심이었더라(16절)
‘노아’나 ‘롯’ 모두 똑 같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자였습니다만, ‘노아’는 순종으로 그리고 ‘롯’은 불순종으로 일관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두 사람 모두를 ‘의인’으로 부르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공평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장면 9: 소알(17-22절). 독자들의 불평이나 의구심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출해 내십니다. 그것도 강권하면서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17절)
그러나 여전히 ‘롯’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합니다. 산으로 도망가는 대신 근처 조그만 ‘소알’이라는 도시로 피하고 싶어 합니다. ‘소알’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 ‘롯’의 모습은 ‘소돔’을 위하여 간구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동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위대한 중보의 기도였던 것에 비해, ‘롯’의 기도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 불과합니다. 거인 ‘아브라함’과 왜소한 ‘롯’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18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18-20절)
불쌍한 ‘롯’은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이제 곧 죽게 되었는데도, 산으로 도망치라는 천사의 명령을 거부하며, 한가하게 피신할 장소를 놓고 천사들과 논쟁과 흥정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토록 ‘소알’에 집착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소알’은 가깝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합니다. 왜 ‘소알’로 가면 살고 산으로 가면 죽는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롯’이 ‘소알’로 가고 싶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는 ‘소알’이 작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알’은 ‘작다’는 뜻입니다. 작고 미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롯’의 짐작이었습니다. 과연 작은 곳이 안전할까? 너무 작아서 하나님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에서 제외되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죄악상이 너무 미미하여 하나님께서 그 정도쯤은 그냥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음일까요?
‘롯’의 문제는 또 있습니다. 산으로 도망치면 재앙을 만나 죽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 있던 ‘롯’에게 산지 생활은 분명 힘든 삶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만, 그는 지금 하나님의 능력을 임의로 제한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소돔’을 멸망시킬 하나님께서 이왕 그를 구출해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롯’이 어디에 가서 살든, 어떻게 살아가든, 그분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이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롯’의 기도가 의인의 기도치고는 이처럼 한심하고 철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이 소원대로 들어주고 계십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고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21-22절)
하나님께서 ‘롯’이 그곳으로 도망할 때까지는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롯’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이기에 이처럼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일까?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인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던 자인가? 무엇으로 ‘롯’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장면 10: 멸망(23-26절). 암시와 예언으로만 그쳤던 파멸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즉 ‘롯’이 ‘소알’로 피신하자마자(23절),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백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24-25절)
화자는 이 엄청난 사건을 시적인 유사반복을 통해서 단 두 절로 짧게 처리해 버림으로써 심판의 효과를 오히려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도시가 어떻게 멸망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오직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도시가 지진 등과 같은 자연적인 천재지변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 결과라는 점입니다(2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심판의 규모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이전에 이 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회고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
‘롯’이 식구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이주해 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 즉 가축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남기지 않고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멸망과 함께 전해오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도망치던 와중에 불타는 ‘소돔’을 뒤돌아 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가 왜 뒤를 돌아보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소돔’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는지, 또는 단순히 강렬한 빛과 소음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호기심으로 돌아보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행동과 그 결과였음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듯합니다. 즉 그녀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17절)는 천사들의 명령을 기억하지 못했고, 따라서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멸망하고 있는 ‘소돔’과 운명을 함께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롯’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는 것도, 그가 단순히 아내를 잃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유유 부단함으로 자신은 물론 딸들마저 ‘소돔’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다시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장면 11: 소돔을 바라봄(27-28절). 마지막 장면은 첫 번째 장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아브라함’의 모습이 다시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멀리 ‘마므레’ 언덕에 서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소돔’과 ‘고모라’ 평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위로 아침 공기와 함께 자욱하게 치솟아 오르는 재와 연기도 함께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27-28)
지금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할까? 추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내 조카 롯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의 식구들은? 아마도 모두 다 죽었겠지. 하나님께 그렇게도 애원했건만... 그 도시에 단 한명의 의인도 없었단 말인가?”
요약(29절). 이어지는 구절은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에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9절)
‘롯’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정작 ‘아브라함’ 본인은 이 소식을 들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롯’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요?
<소돔 이야기>는 <대홍수 이야기>와 시적인 유사 병행의 관계에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실 때에 “노아를 기억하신 것”처럼(8:1),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신 것”도 이러한 관계를 연상시켜 주는 언급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문자적으로 병행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롯을 기억하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하나님께서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요지인 즉은,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의인으로 구원을 받아 마땅했지만, ‘롯’은 그러한 특혜를 누리지 못했고, 삼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는 계속해서 묻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롯’입니까?
바로 여기에 <소돔 이야기>가 독특하게 강조하려는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홍수의 끝에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향기를 받으시고 영원한 약속, 즉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8:20-22). 그러니까 ‘노아’가 드린 제사는 세상을 위한 중보의 제사 내지는 대속의 제사가 된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기도는 ‘롯’을 살리는 중보의 제사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세 천사들을 만나 음식을 마련해 준 것을 빗대어 하나님께 드린 제사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전에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물었던 질문의 요지는 이러합니다: “단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도시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18:22-32)?”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렇다고 대답하셨고(18:22-32), 이제는 행동으로써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 5:1).
물론 <성경>은 구원이나 심판의 문제에서 이처럼 인류의 결속성 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반대로 순전히 개인적인 책임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돔 이야기> 만을 통해서 볼 때, 중보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교훈받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야고보’ 사도의 충고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하). 다시 한 번 자문해 봅시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인가 아니면 롯인가?”
4. 에필로그: 그 토한 곳으로(30-38절)
<롯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여러 면에서 <노아 이야기>의 마지막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주인공의 과음과 술 취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술 취한 아버지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나, 자식들의 범죄 행위가 후대에 까지 미치는 결과 등도 유사합니다.
그러나 닮은 점만큼이나 차이도 많이 있습니다. 아마 술 취한 정도로 따지자면 ‘롯’이 ‘노아’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롯’은 그의 딸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취해 있었으나 ‘노아’는 즉각적으로 ‘함’의 잘못을 알아차렸습니다. 자식들이 잘못한 정도에 대해서도 차이가 분명 있습니다. ‘함’의 경우 그 행위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즉흥적이고 고의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롯’의 두 딸의 행위는 의도적이고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술 취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지 않은 행동은 근친상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노아 이야기>에서는 잘못한 자식은 막내아들이었지만, <롯 이야기>에서는 큰 딸이 범죄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롯 이야기>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모압’이나 ‘암몬’ 족속 사이에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로 간주한다면, ‘롯’의 두 딸은 이들 족속의 영웅적 어머니 상으로 그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롯’의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는데 “아버지로부터 낳았다”는 의미이고, 한편 작은 딸은 아들의 이름을 ‘암몬’이라 하였는데 “내 백성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 두 이름 중 어디에도 두 딸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질책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혹자는 화자가 두 딸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시아버지에 ‘유다’와 근친상간을 범한 ‘다마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동정적인 입장입니다. 즉 남편을 잃은 과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지요. <신명기>에 따르면(신 25:5-10), 과부가 남편의 형제 중의 한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롯’의 두 딸도 그들의 남편(또는 약혼자)을 잃었으니 다소 이례적이긴 하지만, 남편의 다른 형제들이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와 관계를 해서라도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는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두 딸의 행위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화자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두 해석 중 어느 한 쪽을 택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소돔’의 멸망 후에 ‘롯’이 ‘소알’을 떠나 산의 동굴에서 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30절)
이전에 천사가 산으로 피신하라고 했을 때 ‘소알’로 가고 싶다고 하던 그가 결국에는 순응하여 산으로 올라갔으니 칭찬받을 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가 산으로 간 이유가 ‘소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롯’의 동기는 믿음과 순종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산으로 가라고 할 때는 ‘소알’에 가고 싶다고 하다가, ‘소알’에서 살도록 허락을 해주니 이제는 산으로 올라가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갑자기 이곳이 두려워졌는지 알 길은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보장이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점입니다(참고, 21-22절). ‘롯’은 그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신,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들어가 살고 있는 산속 동굴은 <구약>에서 흔히 무덤이나(25:9) 또는 도망자들이 숨어사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수 10:16; 삼상 13:6). 한 때 그는 엄청난 가축 떼와 재물과 하인을 소유하고 있었던 대부호였습니다. 가축 떼가 너무 많아 ‘아브라함’과 결별하여 기름지고 풍요한 ‘소돔’ 땅으로 이사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13:8-11). 가진 그 모든 것들을 보다 굳건히 지킬 뿐만 아니라, 더욱 늘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만,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관계들도 다 끊어져 버린 외톨이로 이 캄캄한 동굴 속에 내던져진 것이지요. 더 이상 잃을 것도 비참해 질 것도 없습니다. 보는 이의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에게 처음 보였던 그런 동정심 말입니다. 과연 화자도 같은 심정일까요?
이 시점에서 ‘롯’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유독 유혹에 약하며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삼촌과의 분쟁이 있었을 때 ‘요르단’ 계곡의 풍요함에 이끌려 그를 떠났으며,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과 관계하겠다며 덤벼들었을 때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혼한 두 딸을 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으며, 천사들이 임박한 ‘소돔’의 멸망을 전하며 피신하라고 했음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은밀하고도 강력한 유혹은 다름 아닌 그의 두 딸로부터 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큰 딸은 그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에 관계를 가지고 맙니다:
31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우리가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하고(31-32절)
큰 딸의 말과 행동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즉 31절과 32절 사이의 인과 관계가 분명치 않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늙어 딸을 위해서 남편을 구하러 나다닐 여력이 없다는 뜻인지, 또는 더 이상 지체하면 딸들과 관계를 가지기에는 너무 늙어버릴 것이라는 뜻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아무튼 배필 될 사람이 그 땅에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까운 ‘소알’에 과연 남자라고는 하나 없고 여자들만 살고 있었을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적 과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딸은 결혼할 남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듯합니다.
만일 이 딸이 단순히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할 목적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잠 31:6-7). 그러나 화자는 이들의 동기가 다른 데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32절). 이 구절에서 화자는 이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도 단순히 남편이 아니라 후손임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큰 딸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지 두 형제가 연 이틀 동안 번갈아 가며 아무 어려움 없이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33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5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33-35)
이 일이 벌이지는 동안 당사자 ‘롯’은 일종의 의식불명 상태였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순전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그에게 잘못을 물을 수는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수동적인 모습과는 달리 딸들이 보여주고 있는 적극적이고 교활하기까지 한 모습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애처로운 역설로 다가옵니다.
불과 얼마 전 ‘롯’은 ‘소돔’의 폭도들에게 천사들 대신 두 딸을 취하라는 제안을 한 바 있으며, 그의 딸들은 수동적인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천사들은 ‘소돔’의 폭도들로부터 ‘롯’과 그의 딸들을 구출해 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이 사라진 지금, 역할은 완전히 반전되어 당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방관자였던 그의 딸들이 돌변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저 수동적으로 타의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이전에 폭도들에게 내놓았던 그 제안, 즉 두 딸을 폭도들에게 천사들 대신 취하라고 했던 그 제안이 다른 사람 아닌 자기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지요.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어느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며, 명예를 지켜주어야 할 딸들이 앞장서서 자신들은 물론 아버지의 명예마저 실추시키고 있는 모습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는 ‘롯’과 두 딸의 이런 기막힌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주관적 논평을 가함이 없이 그저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이야말로 오히려 독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두 족속, ‘모압’과 ‘암몬’이 시작됩니다:
36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37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38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36-38)
<창세기> 화자는 종종 이스라엘 주변 족속들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에 관심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참고, 10장; 25:12-18; 36:1-43).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두 족속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써 <소돔 이야기>를 끝맺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6)
교훈과 적용
1. 환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가진 본성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심결에 습관처럼 쓰는 용어들이 있는데, ‘희생’이나 ‘봉사’가 그것입니다. 당신은 혹시 친구나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아브라함’과 ‘롯’이 그들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환대와 봉사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즐겁게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같은 환대라 하더라도 ‘롯’의 경우는 뉘앙스가 사뭇 달라집니다. 동기나 행동에서 볼 때 ‘아브라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를 찾아온 방문객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그가 알아맞혀야 할 정답은 이들 손님들이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맞아들이는가에 있습니다.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바도 이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지식보다는 마음가짐(attitude)과 그에 걸 맞는 행동(action)을 보겠다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관심사도 과연 ‘아브라함’이 믿음의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게 될 것인가?”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 그렇게 힘든 작업이 아님을 이내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상황 묘사에 이르기까지 친절하게 일련의 표지판들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정황묘사란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곳에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18:1하). 이런 정황 묘사는 꼭 필요한 것일까요? 아마 화자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아침에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한낮의 더위를 피해 이제 막 오수(午睡)를 즐기려고 앉았습니다. 바로 이때, 즉 햇볕이 너무 뜨거워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을 이 시간에,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씩이나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럴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이전에 없던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반시간 정도 낮잠을 자지 않으면 머리가 혼미해 지고 하루 종일 피곤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식사 후 사무실 소파에 누워 막 잠을 자려는데 누가 찾아왔습니다. 이럴 때 느끼는 기분은 어떠할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는 또 있습니다. 밤늦게 잠자리에 드는 순간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경우는 대개 이렇게 합니다: “에이, 귀찮은데 그냥 못 들은 척 하지.”
‘아브라함’은 이런 경우 어떻게 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동방에서 손님 접대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로 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요 2장). ‘아브라함’은 “(졸린)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18:2상). 그리고 그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화자는 이례적으로 아주 장황하게, 그리고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화자는 ‘아브라함’의 태도(attitude), 즉 그가 손님을 맞이함에 있어 얼마나 정중하고 예의바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오래 만나보지 못했던 이산가족이라도 됩니까? 아니면 무슨 왕이나 하나님이라도 됩니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들이 무슨 큰 선물을 가져오기라도 했습니까? 모두 틀렸습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들은 단지 지치고 피곤하여 도움이 필요했던 여행객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본능적인 친절함과 따뜻함으로 이들을 가족처럼, 왕이나 주인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면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본능입니다. 혹시 성령의 열매를 기억하십니까?
그의 따뜻한 가슴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치고 목마르며 배고픈 여행객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4-5절상). 더욱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손님 접대가 자신에게도 유익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4절하). 달리 번역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당신들이 여기 오신 이유가 바로 이 일, 즉 이 종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마치 앞으로 무슨 좋은 일이 그에게 일어날 줄을 훤하게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물론 그가 알았을 리는 없었겠습니다만, 결과는 그렇게 드러나게 될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본능은 행동(action)하는 본능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은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약 2:14-17). 그의 친절은 단순히 수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위어스비’ 목사는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영적 지도력에 관한 일련의 지침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지침은 다음 구절들을 통해서 마련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치 운전자가 자동차의 변속 기어를 갑자기 바꾸듯, 오수를 즐기려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 급하고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급히 장막으로 가서; 아브라함이 또... 달려가서; 그가 급히 요리 한지라”(6-8절).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까짓 나그네 하나 대접하는 일이 이렇게 시급한 일입니까?
오늘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이처럼 신속하게 내 일처럼 처리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아무 보수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대표적인 무리가 이 나라 공무원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흔히 공무원을 국민의 공복(公僕)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공무원은 공복이 아니라 감독하고, 다스리고, 통제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 “공무원 여러분, 제발 국민 좀 도와주세요”라는 사설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유아원을 설립하려고 구청의 담당 공무원을 상대하면서 겪은 통탄할 이야기를 토대로 쓴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사업 신청서를 들고 갔더니, 서류가 미비하다 하면서 돌려보내기를 무려 일곱 번인가를 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이러이러한 절차와 서류가 필요하니 그렇게 준비하라고 상세하게 알려주면 될 것을 가지고 그렇게 골탕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대개 공무원의 의식 수준을 평가해 보면 관련 법규를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선 안 된다고 해놓고 봅니다. 그래야 나중에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처럼 민원인의 일을 자기 일같이 신속하고도 바쁘게 처리해 주는 날이 대한민국이 일등국가가 되는 날일 것입니다. 혹시 내가 이런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까?
두 번째 지침으로 삼을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나이와 지위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는 지금 혈기 왕성한 청년이 아니라 나이 99이나 된 노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집안에 하인들만 수백 명을 거느린 가부장이자 족장입니다. 그냥 앉아서 지시만 해도 남녀 하인들이 다 알아서 해 줄 텐데, 그 노구(老軀)를 이끌고 직접 음식 장만을 하느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6사라에게 가서...떡을 만들라 하고; 7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송아지를 잡아; 8젖과 우유와...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6-8절)
그리고 이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뒤에 서서 섬기고 있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나무 아래에 서서 모셔 서매”(8절하). 특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숙연해 지기까지 합니다.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 고급 식당에서 종업원이 식탁 주위에 서서 손님의 다음 주문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켜 줍니다. 혹시 최근 내 교회 지도자로부터 이처럼 눈물겨운 환대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예배나 봉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 즉 재물이나 은사나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서 그 점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가인’은 풍성한 수확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진정 자기 자신을 드리지 못한 예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최상의 CEO가 되는 자격 요건으로 부하 직원을 잘 다스리거나 지시할 수 있는 능력을 꼽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CEO 자신의 “역할 모델”(role model)입니다. 보고 따라할 모델이 없다면 그 조직은 중구난방이 되거나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많은 제자 훈련이나 성경공부를 통해서도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필경 이 점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점에서 훌륭한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아브라함’이 있다면 우리의 앞날은 희망적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처리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업하고 협력했습니다. 바로 이점이 영적 지도력에 관한 세 번째 지침으로 삼을 만한 것입니다: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떡을 만들라 하고; 7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요리한지라”(6-7절). 그는 ‘사라’로 하여금 떡을 굽게 하였고, 하인으로 하여금 고기를 요리하게 했으며, 버터와 우유도 다른 하인들이 가져오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혼자서 여러 사람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의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동기부여를 했을 것입니다.
협력과 분업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치명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나 성경의 예를 통해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성벽 재건을 위해서 ‘느헤미야’가 보여주었던 모범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겠죠. 이 점 교회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고자 할 때 반드시 참고해 두어야 할 지침일 것입니다. 소위 소명을 받은 목회자 부부나 또는 한 두 명의 동료로 하여금 그 일을 탈진하기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기보다는, 처음부터 일단의 무리가 팀을 이루어 협력해 가도록 한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경우, 모 교회는 개척에 필요한 제반 영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이런 교회가 우리 주변에 있습니까? 알고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예를 들어봅시다.
아직도 밝히지 않은 중요한 지침이 한 가지 더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넉넉함과 후덕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누어 주는 일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떡을 만들라 하고; 7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6-7절). 사실 이만한 분량은 세 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입니다. 오리(五里)를 가자고 했는데 십리를 가준 것과 같습니다. 겉옷을 달라했는데 속옷까지 벗어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법적․도덕적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기꺼이 떠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은 반드시 ‘나오미’를 따라가야 할 필요가 없었고, ‘보아스’는 ‘룻’을 위하여 ‘기업 무를 자’를 자청하고 나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헤세드’라 부릅니다. 이들이 보여준 ‘헤세드’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헤세드’는 속성상 연쇄작용을 불러일으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족속”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탁월하기에 세상이 감당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지적 탁월함일까요? 돈 버는 재주일까요? 우리가 ‘룻’이나 ‘보아스’처럼 ‘헤세드’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나는 희생하고 봉사하는 일에 있어 넉넉하고 대범합니다. 내가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숙여지고 가슴이 저려오는 오는 것도 그분들이 나에게 베푼 그 희생과 봉사 때문입니다. 무슨 대가나 보수를 바라셨을 리가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행한 일에 대가나 보상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 일을 두고 희생이나 봉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든지 수고했다든지 하는 등의 인사치레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점은 보수를 받는 당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을 뿐이기 때문에, 주는 자에게 대해서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구원의 문제에까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보고 구원을 해주셨다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는 것이죠: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롬 4:4).
전원주택이 좋아서 교외로 이사를 나왔더니, 얼마 전 시청에서 호화주택이라 하여 수천만 원의 세금을 부과해버렸습니다. 필자가 사는 단지 내 대부분의 주택이 모두 해당이 되어서 주민들은 부랴부랴 대책위를 구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민원을 제기하고, 관계 요로에 사람들을 만나는 등의 봉사를 하도록 위임을 했습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 부당한 세금은 안 내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그동안 수고한 사람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감사와 위로의 말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주민들이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여 돈을 거두어 전하자는 제의가 있었고, 필자도 입맛이 씁쓸했지만 따라 돈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거두는 와중에 주민 운영위원장이 자기도 수고를 했으니 수고비를 받아야겠다고 우겨서 그 사람도 포함시켜주었습니다. 더 한심한 일이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필자가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가르쳤던 ‘그리스도’인 부부인데, 이들도 수고비를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비록 대책위에는 안 들어갔지만, 알게 모르게 요로에 사람들을 만나 수고를 했으니 자기들도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정에게도 혜택이 돌아갔습니다. 며칠 뒤,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다른 ‘그리스도’인 부부가 찾아와서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면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주민들 간에 공동체를 위해서 한 일에 대해서 보수를 바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사람은 그동안 함께 공부하던 동료 ‘그리스도’인 부부를 향해서 비난과 원망을 퍼부어대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 기분이었습니다. “너희를 가르치는 자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는 ‘바울’의 권면도 이들에게는 무색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부부는 가르치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나누기는커녕 오히려 나로부터 수고비를 받아간 셈입니다. 짙은 배신감과 함께 허탈감이 밀려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필자 역시 지난 2년 동안 공동체 운영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공금 한 푼 쓰기는커녕, 임기가 끝나면서 거금을 희사까지 했는데도, 감사는커녕 공금횡령의 의심까지 받았던 사실을 기억할 때 정말이지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탁월하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행한 희생이나 봉사에 대해서 금전적인 보수나 수당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세상과 우리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내가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그런 류의 보상이 아니라, 따뜻한 격려나 위로의 말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물론 이런 말 듣지 않아도 크게 개의할 바는 아니지만, 만일 금전적 보수와 감사의 인사말 중에서 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보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다릅니다. 자기 일을 알아주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한사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또 그 대가를 바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에 아주 초연하고 초월한 자들입니다. 내가 최근 베푼 넉넉한 호의나 봉사나 희생의 사례가 있었다면 나누어봅시다.
이처럼 남을 환대한다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체질이요 본능과 같은 것이며, 무슨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행함에 있어 아무리 사소하고 시시한 일이라도 정성을 가지고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아브라함’이 손님들에게 베푼 호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화자는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빵을 만들기 위해 ‘사라’에게 가져다 준 ‘고운 가루’는 하나님의 성소 안에 두는 ‘화제물’(cereal offerings)로만 쓰는 것이고(레 24:5),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역시 그 질(質)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희생 제물에 해당하는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보상을 바라고 손님을 접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베푼 ‘헤세드’는 즉각적으로 보상의 연쇄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을 봅니다. 그 첫 수혜자는 다름 아닌 아내 ‘사라’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대화가 시작되면서 방문객들은 비로소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찾아왔는지, 그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화자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주제, 즉 ‘언약’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요약해 봅시다.
두 번째 장면에서 관심의 주인공은 ‘사라’입니다. 비록 손님들이 식사하는 동안 내내 장막 안에 있어야 했지만, 그녀는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9-10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야 이 소식은 하등 새로울 것도 없겠습니다만, ‘사라’는 다릅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했습니다. 억지로 참느라고 무진 애를 썼지만 속까지야 속일 수 없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절).
이 웃음은 단순한 실소가 아니라, 깊은 절망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일종의 한숨 섞인 비웃음으로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화자 역시 ‘사라’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꼭 같은 말로 화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11절).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이는 그 일은 불가능하다는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번에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사라’에게 묻고,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인지라 대답도 직접 마련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3-14절상).
그렇습니다. 그분은 ‘엘 샤다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예를 찾기 위해서 멀리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처음 보는 자가 자기 이름을 이미 알고 있고, 장막 뒤에서 혼자 속으로만 웃고 있는 것도 훤하게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웃은 적이 없다고 부인해 보았지만(15절상), 통하지 않습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사라’는 더 이상 버티기보다는 그분이 진정으로 ‘야훼’ 하나님이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입니다: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위어스비’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 봉사하는 남편은 자기 가족, 특히 아내에게도 봉사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가정에서 복의 샘이 된다.” 만일 ‘사라’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이 손님들에게 베푼 봉사와 희생의 결과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사랑과 희생에 관해서 ‘스콧트 펙’ 박사가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유익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그의 손님들에게 유하기를 청하면서, 그들이 온 목적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접대와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왔으며, 이는 결국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므로(5절하), ‘사라’가 접한 황홀한 소식은 ‘아브라함’의 예언이 일차적으로 성취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었느니라”(히 13:2). 내가 천사를 대접해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2. 중보
‘아브라함’의 봉사는 자기 가족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의로운 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게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중보의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소돔’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려 오신 하나님께서 그 도시가 멸망당하지 않기를 원하시면서, 동시에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도시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올리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하나님! 이 얼마나 모순된 하나님의 모습입니까?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순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일그러진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과 내 모습 또한 일그러져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누구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렸습니까?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이는 친구나, 이웃이나, 또는 가족은 아닙니까? 그분들이야말로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신 계시라고 믿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든, ‘아브라함’은 지금 이 사람들 때문에 처음으로 ‘소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방문객의 생각을 헤아려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늘 이처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과 일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매일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으며, 그분의 마음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 말해 봅시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분의 신비한 계획에 대해서 남보다 앞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신령한 자라 일컫는 자들은 늘 이런 식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정보를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과 인격을 알고 배우는 것입니다. 다가올 종말에 관해서도, 그분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그분의 생각도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21절).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그 도시를 언제, 어떻게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 도시에는 온갖 종류의 악이 마치 공기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시며, 즐기며, 권유하며,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 옛날 아벨의 억울한 피가 복수를 요구하며 울부짖었던 것처럼(4:10), 지금도 그러하구나. 내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하랴? 그 옛날,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며 나를 향해 기어 올라올 때, 내가 내려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던 것 것처럼(11:7), 지금 소돔에 내려가 보아야겠구나. 아브라함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럴 때 ‘아브라함’이 앞질러, “주님, 언제 소돔을 멸할 계획이십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는 선지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 때 이런 철없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행 1:6). 그러나 선지자는 임박한 멸망을 선포하러 온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려고 온 자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동시에 애끓는 사랑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죄악을 뿌리 뽑고, 진리와 사랑을 심으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동시에)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이점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9절).
공의와 정의는 구약윤리의 핵심이면서, 언약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쌍무적인 계약의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예: 출 19:4-5). 이 언약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지고 있는 의무는 좁게는 ‘할례’에서 시작하여(17:9-14), 가장 포괄적으로는 ‘쉐마’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신 6:4-7).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그는 서둘러 ‘소돔’을 위하여 변론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롯’을 구하려는 일념에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 마주 서서 무려 여섯 번에 걸쳐 ‘소돔’을 위한 위대한 중보의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성경>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 ‘아브라함’은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함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5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3, 25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윤리는 심각하게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신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나님께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기에 ‘아브라함’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소돔’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과연 의롭고 정당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에게 낯선 항변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늘 제기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복음의 메시지는 늘 죄와 심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며, 따라서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과 수치심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나 내 조상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건 내 자신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배후에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저항심리가 깔려있습니다. 즉 그분이 불의하거나, 공평하지 못하거나, 또는 너무 심하다는 것이겠지요. 화자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던지는 질문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일언지하에 배척하면서 논쟁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함과 같으니라”(롬 3:4).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논리가 아니라 긍휼로 ‘아브라함’의 항변에 대응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근거로 ‘소돔’에 의인 50명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50명 때문에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26절). 우리의 경험 상, 상대가 순순히 내 논리를 받아들일 때, 다소 맥이 빠지고 당황스럽기조차 합니다. 당황한 나머지 대화의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립니다. ‘아브라함’ 역시 이 순간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공손해 지면서 대화의 주제를 슬그머니 바꾸고 있습니다. 즉 “소돔에 살고 있는 의로운 사람들마저 과연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인가”에서 “그 의인들 때문에 그 도시가 과연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주제가 다소 넓어진 셈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50명에서 시작한 의인들의 숫자를 마지막 10명까지 줄여가면서 새롭게 바뀐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처음 세 번 간구하는 동안 50명에서 다섯 명씩 의인의 숫자를 줄여가다가(40명까지), 나머지 세 차례의 간구에서는 더욱 과감하게 열 명씩 줄이면서 30명에서 20명, 그리고 10명까지 내려갑니다. 그 때마다 ‘아브라함’의 태도가 참으로 흥미롭게 변하고 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니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32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27-32절).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만, 혹자는 묻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열 명 이하로 더 내려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더 이상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대화를 중단시킨 쪽은 하나님이었습니다(33절). 화자도 이런 질문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롯’ 외는 그 도시에 의인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보여주고 있습니다(1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차례에 걸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의인들이 몇 명이 있든지 상관없이) 내가 이 성을 멸하지 아니하겠다.”
‘아브라함’은 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하나님의 친구였으며(대하 20:7; 사 41:8; 약 2:23), 이스라엘의 어느 선지자들보다 더욱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간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동족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친구라는 호칭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과 ‘나사로’뿐입니다(요 11:11). 나는 진정하나님의 친구입니까(요 15:13-15)?
3. 소돔 탈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건축자’로 비유하면서, 그리스도가 닦아둔 하나님 나라의 터 위에 무엇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서 각별히 조심해야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1-15)
많은 사람들이 ‘롯’이야말로 불 가운데서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대표적인 사람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소돔 이야기>가 처음은 아닙니다. 천사 ‘루시퍼’에 대한 심판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홍수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는 흔합니다(벧후 2:4-5).
그러나 <소돔 이야기>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이야기의 중심에 ‘롯’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를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분명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없겠으나,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의 역할 뿐입니다. 그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도 원했고, 결국에는 그가 얻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1-22)
과연 ‘롯’이 어떻게 살았기에 후대의 사람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요? 손님 접대를 소홀히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결코 삼촌에게 뒤지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소돔’ 사람들의 무례함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천사들이 그곳을 찾았을 때 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롯’ 혼자 뿐이었습니다(19:1). 그리고 천사들은 처음부터 ‘롯’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거나, 또는 그 집에서 묶을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는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집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관례에서 볼 때, 무례한 쪽은 ‘롯’이 아니라 방문객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려 섞인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사들이 셋이 아니고 둘이 찾아온 점이나, 이들을 환대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오직 ‘롯’만이 성문 앞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에 더하여, 이제는 천사들이 롯의 초청마저 거절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의 염려는 더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천사들은 ‘롯’의 초청을 거절하며 거리에서 밤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일까? 무엇이 두려워 ‘롯’의 집에서 지내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날 저녁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조사해 볼 무엇이라도 있는 것일까? 우리의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해 볼 일입니다.
천사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롯’은 두렵기만 합니다. 그들이 거리에서 밤을 보낸다면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할렘’ 거리를 밤중에 혼자 걸어 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죠. ‘롯’은 이들의 안전이 너무 걱정스러워 이들의 ‘팔을 붙잡아 비틀어 잡아끌면서’ 말립니다. 이에 천사들이 마지못해 초청에 응하여 ‘롯’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긴장된 분위기를 다소 완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3절).
이만하면 ‘롯’의 손님 접대에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인 문제인가? 일찍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살 수 없어 이곳 ‘소돔’으로 옮겨 왔을 때, 화자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고 복선을 깔아둔 바 있습니다(13:13). 그 구체적인 사례가 이제 처음으로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례는 우리가 앞에서 제기했던 우려 섞인 질문에 대한 해답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천사들이 ‘롯’의 집으로 들기를 주저했는지, 그리고 ‘롯’은 왜 한사코 이들을 자기 집에서 머물도록 강요했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적어도 손님 접대에 있어 롯은 소돔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헌신적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롯’ 역시 그의 환대에 대한 일종의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을 봅니다. ‘롯’은 그의 손님들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롯’이 이들의 경고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를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라는 화자의 선언을 확인해 봅시다. 그는 이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소돔’에 사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소돔 사람이 사악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19:4). 다시 말하자면 그 도시에 이민자 ‘롯’을 제외하고 나면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강조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롯’이 이곳을 떠나고 난 후 ‘소돔’ 전체는 멸망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염려하던 것, 즉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죄악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이 굶주린 사자처럼 무엇을 외쳐댔는지 알아보면 됩니다: “오늘밤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19:5). 그렇습니다. 집단 혼음에다 동성 간의 관계를 합창하듯 주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친절하고 예의바른 ‘롯’이 과연 이 세상의 주문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손님에 대한 예우와 접대는 동방 세계의 최대의 덕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특히 파키스탄이니 터키 등의 이슬람 국가들을 방문해 보면 이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롯’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 온 손님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으며, 만일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는 뒤로 문을 닫고 용감하게 밖으로 나가 색욕에 굶주린 군중과 홀로 맞서고 있습니다(6절).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보호하겠다는 단호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그는 부지불식간에 두 방문객 사이에서 중보자(또는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뒤에는 두 천사가 있고, 앞에는 이들을 덮치려고 미쳐 날뛰는 ‘소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어떤 중재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그가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정도일 것입니다. 이리 같은 군중들을 향하여 호통을 쳐서 쫒아 보내든지, 아니면 그들 요구를 들어주든지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윤리적 요구를 따르든지 또는 소위 상황윤리를 따르든지 일 것입니다. 이것 말고 제 3의 선택은 없을까요?
‘롯’이 선택한 길이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써, 두 방문객을 동시에 만족시키려 시도하고 있습니다(8절). 이 얼마나 절묘한 선택입니까!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모두를 만족(내지는 구원)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티브, 즉 남자들을 위하여 여자들을 희생 제물로 삼는 이야기는 이곳이 처음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바로’ 왕이 두려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 왕에게 바쳐 자신의 위기를 모면한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창 12). ‘롯’이 취한 이러한 선택은 적어도 두 가지 관점에서 <소돔 이야기>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연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중보’(내지는 대속)의 개념입니다. 18장에서 중보자가 ‘아브라함’이라면 19장에서는 ‘롯’의 두 딸이 이에 해당됩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롯’의 식구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면, ‘롯’의 두 딸이 대속의 제물로 희생된다면 두 천사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보상’(내지는 보응)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은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 ‘이삭’의 출생에 관한 계시를 받은 것과 같이, ‘롯’ 역시 역설적이긴 하지만 일종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 보상이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딸로부터 받게 될 보복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듯이 ‘롯’의 두 딸은 지금 당장은 아비의 결정에 대해서 아무런 의견이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자신들의 기회가 왔을 때 지금 그들이 받았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습니다. 아비를 취하게 만든 다음, 이전에 그 아비가 ‘소돔’ 사람들에게 제안했던바 그것을 다른 사람 아닌 그에게 고스란히 되갚아 준 것입니다(30-38절). 이전에 힘없는 피해자들이 이제는 가해자의 신분으로 인생 역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롯’의 계획은 성공했습니까? 비록 딸이긴 하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담보로 이웃을 구원하려했던 ‘롯’의 계획은 성공했습니까? “너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짓을 하다니” 불호령 같은 설교 대신에 유순한 말로 타협과 양보를 선택했을 때(자신이 양보한 것은 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음욕에 불타 미쳐 날뛰는 소돔 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고분고분 돌아갔습니까?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롯’의 말에 더욱 분개하며 길길이 날뜁니다. ‘롯’이 ‘소돔’ 사회에서 정치․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아마도 그는 그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는 꽤나 성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민자에 대한 원주민들의 태도는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 경험입니다. 미국에서도 대통령만큼은 미국 출생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다고 합니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롯은 자신의 잣대로 감히 ‘소돔’ 사람들의 행위를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가르치려 했다는 것입니다(7-8절). ‘소돔’ 사람들의 질문은 뭐 이런 것이겠죠: “도대체 네가 무슨 권리와 자격으로, 우리가 너의 손님들과 성 관계를 맺는 것은 악한 짓이고, 네 딸들과 그렇게 하는 것은 괜찮다고 판단하는가?” 돼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순하게 양보하는 듯 했지만 실은 건방진 태도가 이들 가슴 속에 내재해 있던 적개심에 불을 붙인 셈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아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9절).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 ‘롯’은 두 손님을 구하려다 이제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그를 구해줍니까? 그가 구원하려 했던 두 천사입니다: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10절). 이 장면은 마치 노아가 손을 뻗어 비둘기를 방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모습과 흡사합니다(8:9). 우리는 앞에서 ‘소돔 이야기’가 여러 면에서 ‘대 홍수 이야기’와 병행을 이루고 있음을 살펴 본바가 있습니다. 노아가 비둘기의 지혜나 능력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l 이 두 천사 역시 말할 것도 없이 ‘롯’의 지혜와 능력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사들은 몰려든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버렸습니다(11절상). 무슨 강렬한 빛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둠 속에 빠지게 된 것은 그들의 눈만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소경 됨’은 영적인 소경을 말하고 있습니다(사 6:10; 요 9). 그러니까 이들 ‘소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롯’의 두 사위 역시 마찬가지로 구원의 초청에 눈먼 자들이었습니다(14절).
이들 눈먼 자들이 ‘롯’의 문을 한사코 찾으려고 더듬거리고, 비틀거리다가 저희들끼리 부딪히고 넘어지는 모습은 심각한 이야기에 일말의 희화적(戱畵的) 요소를 더하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측면에서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왜 이들은 이런 충격적인 재앙을 당하고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고 한사코 ‘롯’의 집 문을 찾기에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고난이나 재앙 앞에 잠시 멈추어 지난 일을 돌아보고 정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가던 길을 한사코 고집할까? 인생의 고난들은 때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회개로 이끄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때로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암 4:6-12). 그러나 이들 ‘소돔’ 사람들 중에 아무도 돌이켜 회개한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이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의인은 없고 한 사람도 없는 ‘소돔’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메시지는 ‘들을 귀’를 가진 자에게는 ‘구원의 메시지’가 됩니다. 이것이 <소돔 이야기>의 또 다른 주제가 될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묻습니다: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누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절). 천사들의 이 질문과 명령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처음 물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고도 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무차별적으로 대하시는가?”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추가 다수의 악한 무리 쪽으로 기울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의로운 무리 쪽으로 기울어야 할 것인가?” “그분의 심판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흥미롭게도 구원의 복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가족은 ‘롯’의 아내도 아니고 딸들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인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우리 인생에는 웃어야 할 때가 있고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웃어야 할 때 웃는 것이 마땅하며, 울어야 할 때에는 마땅히 울어야 할 것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울 수가 없고, 장례식장에서 웃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위는 지금 그 것이 헷갈리고 있습니다. ‘사라’가 그러했고, 이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을 위하여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울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박장대소하며 ‘롯’과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두 사위도 영락없이 ‘소돔’의 다른 불의한 무리를 대표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이들은 똑똑하고 지혜 있는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 더욱 어리석고 우습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18).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들의 지혜로 복음을 우습게 여기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듣는 자들이 깨달아 돌이켜 구원을 얻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혹시 내 주위에 ‘롯’과 같은 친척은 없습니까? 혹시 내가 ‘롯’처럼 ‘소돔’에서 도망쳐 나와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이며, 내 시계는 몇 시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24시 입니까 아니면 25시를 향하고 있습니까?
드디어 ‘소돔’에 운명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25시가 아닌 새벽이 오고 있는 것이죠! 이 새벽은 ‘소돔’을 위해서가 아니라 ‘롯’을 위한 것입니다. 천사들은 황급하게 ‘롯’을 깨웁니다: “서둘러라. 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떠나거라”(15절). 그러나 ‘롯’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16절). 사위들에게는 ‘소돔’을 떠나야 된다고 말하던 그가 정작 자신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해밀턴’은 이런 그를 가리켜 ‘지시는 잘 내리면서 정작 자신은 지시받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자’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왜 ‘롯’은 이처럼 소돔을 떠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가 ‘소돔’에서 누렸던 그 많은 특권과 특혜들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 그리고 부. 그러나 그가 소돔 사람들로부터 결코 얻어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얼음을 녹일 수 없거든 얼음 속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요나’는 얼음 속에 들어가 ‘니느웨’의 얼음을 녹인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롯’은 ‘소돔’이라는 얼음을 녹인 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 얼어붙어 숨도 못 쉬며 오히려 고통 가운데 살아간 자였다고 베드로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
글쎄요, 본문 속에 그가 세상의 불의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고통 받았다는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런 평가는 오히려 과장된 것으로 들립니다. 설령 그가 ‘베드로’의 말대로 의롭게 살았다고 하드라도, 그는 싱거운 소금이었고, 어두운 등불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사위들조차도 그의 말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평소에 얼마나 우습게 살았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는 ‘얽매이기 쉬운 것’으로 말미암아 타협하고 양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종말’이니 ‘하나님의 심판’이니 하면서 떠들어 본들 누가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롯’이 ‘소돔’ 사람들부터 얻지 못했던 것은 바로 ‘(선한) 영향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사람조차 구원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가? 그것도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그리고 아무 관심도 없는 그의 가족까지 덤으로 챙겨주시는가?: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15절). 이 장면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홍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됩니다만, <창세기>의 화자는 ‘베드로’와는 달리 ‘롯’이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유는 다른데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만(29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긍휼’(compassion)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긍휼)를 더하심이었더라”(16절). ‘노아’나 ‘롯’ 모두 똑 같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자였습니다만, ‘노아’는 순종으로 그리고 ‘롯’은 불순종으로 일관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 두 사람 모두를 ‘의인’으로 부르고 있으니,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도무지 공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함과 무한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든, 우리의 행동이 어떠하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입으면 그만이란 말입니까? ‘소알’을 위해서 간구하는 ‘롯’의 모습에서 이전에 ‘소돔’을 위하여 간구하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만, 두 사람의 동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야말로 위대한 중보의 기도였던 것에 비해, ‘롯’의 기도는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기도에 불과합니다. 거인 ‘아브라함’과 왜소한 ‘롯’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소알’은 ‘작다’는 뜻입니다. 작고 미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롯’의 짐작이었습니다: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18, 20절). 우리의 불쌍한 ‘롯’은 그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이제 곧 죽게 되었는데도, 산으로 도망치라는 천사의 명령을 거부하며(18절), 한가하게 피신할 장소를 놓고 천사들과 논쟁과 흥정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토록 ‘소알’에 집착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소알’은 ‘가깝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합니다. 누구나 갑작스러운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엄청난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지 사흘도 채 못 되어 ‘수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으며(출 15:24), ‘신’ 광야에서는 옛 노예시절을 그리워하기까지 합니다: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출 16:3).
‘헨리 나우웬’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이동”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동이란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해외선교처럼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이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나 지위 등의 이동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일에는 그렇게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높고 편한 곳에서 낮고 힘든 곳으로 내려올 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 따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변화와 이동이 두려운 것입니다. 생활도 변해야 하고, 태도도 변해야 하며, 이웃도 돌아보아야 하는 등 바뀌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누가 이런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롯’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19절). 왜 ‘소알’로 가면 살고 산으로 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롯’이 ‘소알’로 가고 싶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는 ‘소알’이 작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작은 곳이 안전할까요? 너무 작아서 하나님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에서 제외되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죄악상이 너무 미미하여 하나님께서 그 정도쯤은 그냥 봐주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음일까요? 하기야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는 인간의 죄를 크고 작은 여러 유형으로 분류해놓고 그에 따라 적절한 배상과 보상의 원리를 마련한 바 있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작고 소소한 죄들보다 크고 엄청난 죄악들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작은 죄들은 괜찮고 큰 죄는 곤란한 것입니까? 살인이나 간음은 안 되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등은 괜찮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죄가 있고, 허용할 수 없는 죄가 있는 것입니까?
‘롯’의 문제는 또 있습니다. 산으로 도망치면 재앙을 만나 죽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산은 멀고 험합니다. 분명 힘든 삶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흔히들 신앙생활을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렇게 멋대로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소돔’을 멸망시킬 하나님께서 이왕 그를 구출해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롯’이 어디로 도망치든, 그 후 어떻게 살아가든, 그분의 관심사 밖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즉 산에서 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주님도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롯’은 이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그의 기도는 의인의 기도치고는 너무나 한심하고 철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마저 받아들이십니다: “네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그리로 속히 도망하라...”(21-22절). 덧붙여 하나님은 ‘롯’이 그곳으로 도망할 때까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22절). 도대체 ‘롯’이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고 싶은 일도 못하는 것일까! 그가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였습니까? 혹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던 자였습니까? 무엇으로 ‘롯’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긍휼,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가져볼 만합니다: “롯이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군. 결국 하나님은 그의 모든 요구 조건을 다 들어주었으니 말이지. 그가 ‘소알’에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구먼.”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 하나님은 그냥 묵인하고 계십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시내’ 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보고 계셨으며,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셨으며, ‘고메르’가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작은 아들이 집을 떠나 멀리 이국땅에서 허랑방탕 살아가는 동안에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소알’에서 소소하고도 미미한 작은 죄악들을 행하면서, 멋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조차도 그분은 그 때마다 일일이 개입하고 간섭하며 가로막지 않습니다. 그냥 지켜보십니다. 그것도 “어디 두고 보자”는 식의 복수심으로 가득 찬 냉혹한 가슴이 아니라, 찢기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지켜보십니다. ‘누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집나간 작은 아들 이야기’에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격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격적’이란 말은 무엇입니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암시와 예언으로만 그쳤던 파멸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즉 ‘롯’이 ‘소알’로 피신하자마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23절). 도시의 멸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는 화자의 관심사 밖입니다. 오직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이 사건이 지진 등과 같은 무슨 자연적인 천재지변이 아니라, ‘야훼’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 결과라는 점입니다(24절.
심판의 규모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이전에 이 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시 회고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 ‘롯’이 식구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이주해 들어왔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즉 가축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25절). 지금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모든 것들, 가지고 싶은 그 모든 것들 역시 어느 날엔가 이들처럼 다 사라져버리겠죠.
이 멸망과 함께 전해오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도망치던 와중에 불타는 ‘소돔‘ 성을 뒤돌아 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왜 뒤를 돌아보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소돔‘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는지, 또는 단순히 강렬한 빛과 소음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호기심으로 돌아보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행동과 그 결과였음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듯합니다. 즉 그녀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17절)는 천사들의 명령을 기억하지 못했고, 따라서 지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하고 있는 ‘소돔’과 운명을 함께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롯’에게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는 것도, 그가 단순히 아내를 잃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유유 부단함으로 자신은 물론 딸들마저 ‘소돔’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다시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때,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눅 17:32). 그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 날이 바로 이와 같을 것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노아’나 ‘롯’의 시절처럼 세상 사람들은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팔며, 심고 거두고 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시대에 겉으로는 이 시대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팔며, 심고 거두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주님의 이 경고를 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이 아니라 ‘소돔’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결국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억하며 살아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면, 그가 우리의 길을 평탄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잠언서 기자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소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브라함’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멀리 ‘마므레’ 언덕에 서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소돔’과 ‘고모라’ 평야, 그리고 아침 공기와 함께 자욱하게 치솟아 오르는 재와 연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내 조카 롯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의 식구들은? 아마도 모두 다 죽었겠지. 하나님께 그렇게도 애원했건만... 그 도시에 단 한명의 의인도 없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구해주셨습니다(29절). ‘롯’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소식을 들었어야만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실 때에 ‘노아를 기억하신 것’처럼(8:1),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당사자가 ‘롯’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롯을 기억하셨다’고 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롯입니까?
4. 그 토한 곳으로
비오는 날 울어대는 청개구리에 관한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소돔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고 있노라면 ‘롯’이 바로 그런 개구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으로 피하라고 했을 때 ‘소알’ 평원으로 가고 싶다했고, ‘소알’에서 살도록 허락을 하니 이제는 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순종하기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필자 역시 늘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기는 ‘롯’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화자는 ‘롯’이 ‘소알’을 떠나는 이유가 그곳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0절상). 왜 갑자기 이곳이 두려워졌을까요? ‘헨리 모리스’ 박사는 흥미로운 추측을 전하고 있습니다: “혼자 살아남은 롯을 소알 주민들이 크게 반겼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혹시나 하나님의 진노가 소알에까지 미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하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여전히 그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신,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알’에서 살도록 분명히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 다시 산으로 피신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삼촌 아브라함에게로 갔더라면...그 거룩한 공동체로 돌아가기만 했더라도...” 바로 이점이 우리가 애석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는 일이죠.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와 같았던 삼촌 밑에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소돔’으로 떠나 온 것도 아니고, 서로 가진 재산과 가축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다투다가 ‘에덴’동산과도 같았던 이곳을 먼저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삼촌의 양보로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 번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죽을 뻔 했던 것을 삼촌이 와서 살려주었을 때에도 삼촌을 따라 가지 않고 그냥 이곳에 눌러앉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잃고, 이제 다시 삼촌의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은 도망자들이나 숨어사는(수 10:16; 삼상 13:6) 무덤과도 같은(25:9) 산속 동굴이었습니다(30절). 이 캄캄한 동굴 속에서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태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너무나 기막히고 한심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진짜 기막힌 일, 즉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이제 곧 벌어지게 됩니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두 딸의 주도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만, 그 애비를 닮았음인지 항상 친절이 지나친 것이 문제입니다. 캄캄한 동굴도 오히려 밝다고 생각했음인지, 어느 날 밤에 큰 딸은 그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에 관계를 가지고 맙니다. <소돔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 역시 <대홍수 이야기>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성이 많습니다. 두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의 만취 사건과 그의 자녀들이 그런 아비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롯’의 경우 두 딸이 보이고 있는 행동은 <다말 이야기>(창 36장)와 <룻 이야기>와도 문학적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 세 이야기에서 모두 딸이 그 아비(또는 아비 벌되는 친척)와 근친상간을 행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이야기>와 <소돔 이야기>에는 유사성만큼이나 그 차이점 또한 다수 발견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Wenham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2, 60쪽).
그 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 없으니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31-32절). 아버지의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딸이 갸륵한 마음에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아무 남자도 없기 때문에 부득이 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웃 ‘소알’에 과연 아무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모두 여자들만 살고 있는 것입니까?
이처럼 늘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이런 과장법이 톡톡히 한 몫을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셨느니라”(3:4). ‘롯’의 큰 딸도 그 땅에 남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합리화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조자 내지는 공모자를 구합니다. 뱀이 그랬고, ‘하와’도 그랬습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늘 혼자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큰 딸 역시 마찬가지로, 동생에게도 같이 해 보라고 권했고, 동생은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동안 ‘롯’은 정말 의식불명이었을까? 아무리 술에 골아 떨어졌기로서니 말입니다. 아무튼 그는 딸들이 벌이는 이 난장판을 수동적으로, 타의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이전에 폭도들에게 내놓았던 그 제안, 즉 두 딸을 폭도들에게 천사들 대신 취하라고 했던 그 제안이 다른 사람 아닌 자기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그래서 그 명예를 가장 존중해 주어야 할 그 딸들이 앞장서서 아비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는 모습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화자는 ‘롯’과 두 딸의 이런 기막힌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주관적 논평을 가함이 없이 그냥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침묵이야말로 그의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두 족속, ‘모압’과 ‘암몬’이 시작됩니다. <소돔 이야기>를 이처럼 주 족속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끝맺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6).
우리의 일생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꼭 같은 조건을 가지고 인생을 함께 시작했으면서도 나중에 보면 전혀 다른 처지나 환경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특히 어렵고 딱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왜 자신의 처지가 지금 이렇게 되었는지 반문해 보곤 합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롯’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소금이 서서히 그 짠 맛을 잃어간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매 순간마다 취한 잘못된 선택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이죠. 당시에는 크게 잘못된 것 같지도 않았던 조그만 죄들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의 지금 처지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결과와도 같습니다.
이런 ‘롯’을 두고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곳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1-22). ‘히브리서’ 기자도 비슷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 6:4-6).
‘롯’은 이 일 이후 성경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만, ‘롯’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이야기를 마칠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묵상한 바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자기 자녀들을 자유롭게 응답하도록 내버려둔다. 즉 자녀들이 자유롭게 집에 머물 수도 있고, 집을 떠날 수도 있고,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신적인 사랑을 강압적으로 베푸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빛 가운데로 행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이 자유롭게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탕자를 사랑하며 그에게 자유를 주셨듯이, 하나님은 그들이 안전하게 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동안에도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이야기의 어느 곳에도 ‘롯’이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다는 언급은 없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용서하셨고,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6-8).
하나님은 ‘롯’을 어두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의인이라고까지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의인으로 불릴 수 있다면, 누군들 그럴만한 자격이 없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놀랍고도 신비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일들조차도 그분의 선한 계획을 이루어가는 밑그림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훗날 ‘모압’ 족의 한 여인 ‘룻’을 통해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롯’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법과 불법이 판을 치는 ‘소돔’에서, 비록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턱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롯’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선지자 ‘엘리야’와 동일한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왕상 19:18).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란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진 빚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 뿐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그분은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할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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