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라반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은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여 년을 노예처럼 일했으나, 결국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명의 아내와 자식들을 거느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재물과 가축들까지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공의 이면에는 떳떳치 못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재산 취득 과정을 보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에서 말하는 소위 공정거래법 위반에 해당할 수도 있는 위법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또는 공무원으로 치자면 그가 공직 기간 중에 접하게 된 정보를 이용해서 재산을 쌓은 행위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외삼촌의 머슴으로 일하면서 양이나 염소들에 관하여 쌓은 지식이나 정보를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에피소드 역시 ‘야곱’의 기질의 일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좋은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야곱’이 얻는 성공은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서,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쪽은 ‘야곱’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외삼촌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이며, 간교하며, 술수에 능한 ‘라반’이 자신의 꾀에 속아 스스로 걸려 넘어졌으니 아주 고소하고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그가 당한 수모는 자업자득의 면이 더 강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두 사람에 대한 화자의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화자가 누구 손을 들어주든 그것이 이번 에피소드의 주제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번 이야기에도 화자가 두 주인공의 태도에 대해서 윤리∙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물론 일부 암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어 보입니다. 무엇일까요?
다음의 구절이 이 질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30:43). 더 나아가 이 구절은 <아브라함 이야기>나 <출애굽>의 중요한 모티브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를 통해서 본문의 결론과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내 봅시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야곱-라반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는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라는 해설로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라헬이 요셉을 낳자말자”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분명한 시작과는 달리 그 끝이 어딘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요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부 구절들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30:43)
그가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31:1)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31:2)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31:3)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 하도다 그러할 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31:5)
대부분의 학자들은 30:43에서 이야기가 끝나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Delitzsch는 이야기가 31:3까지 연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견해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이 구절은 뒤따르는 인간의 대응이 없어 이야기의 끝으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30:43을 마지막으로 31:1에서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된다고 보는 견해에도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고유대명사가 아닌 일반 지시대명사 “그”로 시작하고 있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1:2에서 다시 고유대명사 ‘야곱’이 등장하고 있어, 만일 31:1과 31:2의 순서를 바꾼다면, 31장을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Westermann). 이처럼 두 절의 순서를 바꾸어 놓으면 이야기의 흐름은 다소 자연스럽게 보이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성경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31:1을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기보다는 한 이야기의 결말로 보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31:5는 내용상 31:2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31장 3절보다는 2절로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일 것입니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물론 31:1을 <야곱-라반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에 포함시킬 때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30장 전체의 내용과는 다른 새로운 주제 즉 ‘라반’의 자식들의 ‘야곱’에 대한 질시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 에피소드 속에 포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이러한 기법이 전혀 낯선 것은 아닌 것이, 하나의 이야기는 종종 그 다음 이야기를 예고함으로써 마무리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 4:25-26은 5장을 예고하고 있으며, 6:1-8은 6:9-9:29의 이야기를 예고해주고 있고, 32:3-3은 32:4-33의 내용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유사하게 한 이야기의 끝에 그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누군가 언급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한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함으로써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따라서 31:1을 이번 에피소드의 마지막 구절로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이야기는 결국 두 개의 긴 무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막: ‘야곱’과 ‘라반’의 협상(25-36절)
제 2막: ‘야곱’이 자신의 가축 떼를 돌봄(37절-31:1)
다시 제 1막은 ‘야곱’과 ‘라반’ 사이에 오가는 여섯 번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대화의 처음과 끝에 화자 자신의 해설을 수미상관 식으로 겻들이고 있습니다. 이 두 번의 해설은 서론과 결론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해설: ‘요셉’의 탄생에 관한 언급(25절상)
(2) 대화 1: ‘야곱’이 ‘라반’에게 떠나고 싶다는 뜻을 전함(25하-26절)
(3) 대화 2: ‘라반’이 품삯을 미끼로 ‘야곱’을 저지함(27-28절)
(4) 대화 3: ‘야곱’이 ‘라반’을 어떻게 번성케 했는가를 상기시킴(29-30절)
(5) 대화 4: ‘라반’이 재차 품삯을 미끼로 ‘야곱’을 저지함(31절상)
(6) 대화 5: ‘야곱’이 품삯 대신 장차 태어날 비정상 가축을 요구함(31하-33절)
(7) 대화 6: ‘라반’이 동의함(34절)
(8) 해설: ‘라반’이 ‘야곱’을 저지하기 위하여 모든 비정상 가축을 제거함(35-36절)
서론과 결론에서 해설을 제외하고 나면 여섯 번의 대화는 각기 두 등장인물이 번갈아 대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전체적인 대화를 통해서 볼 때, ‘라반’이 다시 한 번 그 지략에 있어 ‘야곱’을 능가하고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제 2막에서 ‘야곱’은 이를 극적으로 반전시킴으로써, 그동안 당해왔던 수모와 속임수를 일시에 되갚아주고 있습니다. 제 2막은 다시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야곱’이 얼룩무늬 있는 가축을 증식시킴(37-40절)
(2) ‘야곱’이 건강한 가축을 획득함(41-42절)
(3) 결론과 전망(43:31:1)
본문은 <야곱과 라반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을 전후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없이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야곱’이 ‘라반’의 목동으로 일하게 되었는지, ‘라반’의 두 딸과는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왜 ‘야곱’이 무일푼으로 살고 있는지, ‘라반’은 왜 이런 술수를 꾸미고 있는지 등에 관한 정보는 <야곱과 라반 이야기>의 앞선 에피소드를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이야기는 ‘야곱’이 ‘가나안’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26절; 참고. 27:44-45). 이번 이야기는 또한 앞으로 소개될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기도 한데, 예컨대 ‘야곱’이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31-33장).
이 외에도 본문은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들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반’이 ‘야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언급과 유사한 표현들이 <창세기>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예: 1:28; 12:2; 17:16; 22:17; 24:1; 26:12; 27:4, 7, 10, 19, 23, 25, 27, 29-31, 33-34, 38, 41; 28:1, 3, 6; 32:1, 27, 30). 그리고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 또한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에서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1) “섬김, 봉사”(26, 29절; 참고. 25:23; 27:29, 40; 29:15, 18, 20, 25, 27, 30; 31:6, 41); (2) “품삯”(28, 32, 33절; 참고. 29:15; 30:16, 18; 31:7, 8, 41). 그리고 본문의 끝에 소개하고 있는 ‘야곱’이 획득한 “많은 수의 양떼와 가축과 노비”에 관한 언급은 <아브라함 순환>에서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12:16). 결국 한 가지 분명해지는 사실은 본문의 에피소드는 현재의 문맥으로부터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창세기> 전체의 구성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그토록 오래 동안 이용만 당해오던 ‘야곱’이 마침내 상황을 역전시키면서,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은 본문 속에 두 개의 자료 즉 <야훼전승>과 <엘로힘 전승>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본문은 전적으로 <야훼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두 개의 자료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야훼전승>: 25, 27, 29-31, 32절상, 35-43절
(2) <엘로힘 전승>: 26, 28, 32절하, 33-34절
그러나 두 자료의 구분은 그렇게 간단치는 않아 보입니다. 예컨대, 다른 전승으로 분류되고 있는 일부 구절들은 그 출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실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구절들을 쌍으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25//26절상: “가게 하시되”// “가게 하소서”
(2) 26절하//29절상: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 28//31절상: “내가 그것을 주리라”// “내가 무얷으로 네게 주랴”
이처럼 동일한 내용이 중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구절들을 동일한 전승으로 취급한다면, 이들은 모두 <엘로힘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사용하고 있는 구절은 27절과 30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무슨 특별한 이론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 반복으로 보이는 구절들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전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웨스터만’(Westermann)은 본문이 대부분 <야훼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형식에 있어 ‘바벨론’의 계약이나, 다른 <야훼전승>에 속하는 “막벨라 계약 이야기”(23장)와 유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 이야기에서 ‘야곱’이나 ‘라반’이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들을 가려내는 것과 관련해서(32-33, 35, 40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고도 길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조차도 이들 주인공들이 보여주고 있는 교묘한 술책이나 천재적인 가축 증식 기술 등은 이야기의 전개 상 꼭 필요한 부분이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제 1막: 협상(30:25-36)
해설 1(25절상). 새로운 이야기는 화자의 해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용 상 이 해설은 앞선 에피소드와의 연결을 꾀하고 있기도 합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25절상)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야곱’의 첫 사랑 ‘라헬’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야곱-라반 순환>에서 전환점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라헬’을 처음 만난 이후 20년이 흐른 뒤입니다(31:38). 사실 이 기간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어림잡은 수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하여 ‘레아’와 결혼한 이후 7년을 기다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야곱’은 ‘레아’를 통해서 여섯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게 되는데(29:31-30:21), ‘야곱’이 ‘라헬’과 결혼한 이후 한동안 ‘레아’가 임신하지 못한 기간까지 합친다면, 이 7년은 지나치게 짧은 기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야곱과 라반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29:31-30:21)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7년 안에 다 이루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화 1(25하-26절). 이 장면에서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의중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25하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25하-26절)
‘야곱’은 지금 부탁이나 청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편에서 먼저 공세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이전에 ‘아브라함’의 하인이 ‘라반’의 동생 ‘리브가’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24:54, 56).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라반’은 ‘야곱’이 떠나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기 위하여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야곱’이 가려고 하는 곳은 그의 고향, 즉 “나의 땅”으로서, 그가 약속으로 받게 될 “그 땅”을 말합니다(28:4, 13). 따라서 그는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그의 처자 모두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합니다(26절). <출애굽>에 따르면(출 21:3-6), 하인이 6년을 섬긴 후에 그 주인을 떠나려고 할 때 주인이 그에게 준 아내나 자식들은 두고 떠나야 합니다. 만일 그 하인이 아내나 자식들과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냥 주인집에 머물러 살 수도 있습니다. 이 규례를 ‘야곱’의 경우에도 적용해야 할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지금 ‘야곱’은 세 번에 걸쳐 그가 ‘라반’을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섬기다”는 단어는 분명 “노예로 섬기다” 또는 “하인으로 일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라반’의 조카이지 하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부유한 친척의 하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던 것 같으며, 친척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노예들에 비해서 더 후한 보상을 바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참고. 레 25:35-36). 더구나 ‘라반’은 ‘야곱’을 조카가 아니라 단순한 하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32:43). 법적인 문제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야곱’은 지금 자신의 몫을 챙기고 싶은 것이며, 자신의 자유는 물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가 외삼촌에게 상기시켜주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대화 2(27-28절). ‘라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동양 식 특유의 정중하면서도 교활함 그것입니다:
27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28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27-28절)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입니다. 그는 아첨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이 표현은 실은 지위나 신분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말할 때 쓰는 표현인데(예: 18:3; 19:19; 33:10; 47:29; 50:4), ‘라반’은 지금 조카이자 하인인 ‘야곱’에게 격에 맞지도 않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부자가 된 것도 ‘야훼’께서 ‘야곱’을 통해 축복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라반’의 이 말은 미사여구이긴 하지만 진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족장 이야기>에서 단골 메뉴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로 인하여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이며(12:3; 22:18; 28:14), ‘라반’의 경우도 그 한 예가 될 것입니다(예: 14:19-20; 21:22-23; 26:12-16, 28-29; 39:5, 23).
만일 ‘라반’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야곱’을 순순히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붙잡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굴러들어온 복을 누가 내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 문제를 이제 정중하게 외교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사실 ‘라반’의 편에서 보자면 ‘야곱’에게 더 이상 빚진 것은 없습니다. ‘야곱’이 ‘라반’과 맺은 약정은 두 딸과 결혼하는 대가로 14년간의 노력 봉사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피차간에 수행해야 할 의무 사항이 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두 아내 외에 더 이상 무엇인가 요구하고 싶다면, 다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대화 3(29-30절). ‘야곱’이 이에 넘어갈리 없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삼촌을 압박해 들어갑니다. 그는 단순히 귀향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참고: 신 15:12-18):
29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29-30절)
‘야곱’의 주장은 이런 것이겠지요: “당신도 인정했듯이, 나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 말은 오히려 과소평가 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내가 처음 올 때 당신의 변변치 않던 가축의 수가 지금 얼마나 늘었는지 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진정 당신이 나 때문에 이처럼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사실이 빈 말이 아니라면,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나에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요구는 단순히 처자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겠다는 요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화 4(29-30절). ‘라반’이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야곱’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습니다: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31절상)
아주 합리적이고 열린 마음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처음부터 그가 암시했듯이 ‘야곱’에게 작별 선물을 줄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대화 5(31하-33절).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야곱’은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요구 조건을 제시합니다. ‘라반’이 거절하지 못할 조건임에 틀림없습니다:
31하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32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33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공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31하-33절)
양과 염소 떼 중에서 양은 대부분 흰색이며, 염소는 대개 검거나 짙은 갈색입니다.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은 극히 드뭅니다. ‘야곱’은 바로 이런 것들을, 자신의 몫으로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라반’으로 하여금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하는 요구 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처음부터 이들 얼룩진 가축들을 골라내고 나면 나중에 얼룩진 것들이 태어날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더욱 안심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골라낸 얼룩진 떼 중에서 혹시 흰색 양이나 검은 색 염소가 태어난다 하드라도 이들은 모두 ‘라반’에게 돌려준다고 하니 그야말로 꽃놀이 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라반’으로서는 잃을 것이 거의 없지만,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얻을 것이 거의 없는 요구 조건입니다. 이제 ‘라반’이 할 일이라고는 처음부터 얼룩진 것들을 골라내는 일하고, 수시로 ‘야곱’의 가축 떼를 살피면서 혹시라도 흰색 양이나 검은 염소가 발견되면 그 즉시 골라내는 일 밖에 없습니다.
대화 6(34절). 아니나 다를까! ‘라반’은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보이는 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34절)
‘야곱’이 협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령 있다 하드라도 당시 목동들이 일반적으로 받았던 수당, 즉 새로 태어난 가축들의 20%에 해당하는 수보다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입니다.
해설 2(35-36절). 화자는 그의 두 번째 해설에서 ‘라반’과 ‘야곱’이 협상을 마치고 각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5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36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35-36절)
‘야곱’이 가축 떼들 중에서 얼룩진 것들을 골라내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32절), ‘라반’은 스스로 나서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한 그가 ‘야곱’이 자기를 속여 무언가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들 얼룩진 가축 떼를 ‘야곱’이 돌보는 흰색 양과 검은 색 염소 떼가 있는 곳으로부터 사흘 여행 거리나 되는 먼 곳으로 이주시켜 자기 아들들로 하여금 돌보게 합니다. 실로 이중 삼중의 안전조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라반’이 지금 취하고 있는 안전조치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야곱’에게 오히려 유리한 안전조치가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이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계획을 방해받지 않고 수행해 갈 수 있었으며, 나중에 그 계획이 성공했을 때 삼촌으로부터 손쉽게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31장).
제 2막: 승리(37절-31:1)
선택과 증식(37-40절). ‘야곱’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얼룩 양이나 염소를 늘려가는 상세한 방법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적어도 두 가지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얼룩무늬가 있는 가축들을 우선적으로 증식시키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가 사용한 방법은 양이나 염소들이 교미(交尾)를 할 때 얼룩덜룩한 나뭇가지 속살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새끼들이 그와 같은 색깔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37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37-39절)
푸른 나무 가지 껍질을 벗기면 흰색과 함께 얼룩덜룩한 색깔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들이 교미를 할 때 이 껍질 벗긴 나무 가지를 그들 앞에 두게 되면 태어나는 새끼들 역시 같은 색깔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가 하필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를 택했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참고로 “백양나무”의 일종인 “신풍나무”(הנבל, 리브네)는 “희다”(ןבל, 라반)는 단어와 유사한 발음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곧 ‘라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화자의 언어의 유희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언어의 유희는 ‘야곱’의 이름과 관련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분사 형 단어 “줄무늬의”(דקע, 야코드)는 두 개의 자음과 두 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야곱’의 이름과 그 발음이 유사합니다.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이 세 종류의 나무는 껍질을 벗긴 줄기가 흰색이 아닌 얼룩덜룩한 색을 띄고 있어 ‘야곱’의 계획에 잘 들어맞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의 실험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화자는 아주 다양한 무늬의 새끼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야곱’이 거둔 성공을 절정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39절).
분리와 보존(41-42절). 이렇게 증식한 얼룩무늬 양과 염소들은 나머지 흰 양과 검은 염소들로부터 구분하여 건강하게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얼룩무늬 가축들을 증식시키기 위해서 ‘야곱’이 사용한 이 첫 번째 방식은 오늘날의 유전공학적 지식에서 보면 터무니없고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만, 이 두 번째 원리는 그런대로 과학적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40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40-42절)
이러한 원리는 흔히 유전의 법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튼튼하고 건강한 어미가 건강한 새끼를 낳는다는 믿음입니다(41-42절). 이 원리를 조금 확대하면 얼룩얼룩하고 점 있는 것들로부터 역시 동종의 새끼들이 태어나는 사실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대개 혼혈 종들이 아주 튼튼하고 건강한데, 원래 유전적으로 열성이었을 털의 색깔들은 이들의 교미를 통해서 발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반점이 있고 얼룩덜룩하지만 건강하고 튼튼한 자신의 양과 염소 떼들을 단일 색깔을 지녔지만 약한 ‘라반’의 양과 염소 떼로부터 분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론과 전망(43절-31:1). ‘라반’과 ‘야곱’의 시합은 ‘야곱’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43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1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43절-31:1)
‘야곱’의 승리는 정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듯합니다(28:14; 30:30). 화자가 이곳에서 ‘야곱’의 성공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성공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했던 그 표현과 아주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12:16).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타국 ‘이집트’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그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처럼, 그 역시 타향 ‘밧단-아람’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제 처음 그가 이곳에 올 때와는 달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처럼 이야기의 결론은 다음 이야기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비 작업이 이야기의 결론에 덧붙여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야곱’의 사촌 형제들의 반응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곱’의 성공은 이들의 손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분노와 좌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바로 이 장면의 분위기가 다음 에피소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라반’으로부터 탈출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이번 에피소드에서도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반복되는 한 유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약속의 땅”이 아닌 타지(他地)에서 재산과 부를 모았다는 사실입니다.
교훈과 적용
협상.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야곱’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어왔던 숙원 즉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본능적 욕구가 다시 불붙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가 이곳 ‘밧단-아람’으로 온 목적이 이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이 오래 전에 그를 이곳으로 떠나보내면서 요구했던 대로, 외삼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며, 아버지가 예측하고 약속한 바대로 한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28:2-3). 적어도 ‘야곱’에게 있어 ‘라헬’이 진정한 아내이며, 그가 낳은 ‘요셉’이야말로 진정한 아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지금이야말로 그 땅, 즉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유업으로 얻게 될 “약속의 땅”(28:4, 13-16)으로 돌아가야 할 최적의 때가 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기를 보호하고 후손들을 주심으로써, 다른 약속들도 다 이루셨으니, 이제 남은 “그 땅”에 대한 약속도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가 외삼촌에게 그 땅을 “내 고향, 나의 땅”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도 단순히 그가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그는 이 순간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25절).
그러나 그 땅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곳을 떠나오는 일보다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떠날 때는 독신이었으나, 이제는 대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록 간교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외삼촌이긴 하지만, ‘야곱’이 그를 위해 14년을 머슴으로 노력 봉사를 해주었으니 친족으로 인정도 해주었고, 자기 딸들을 아내로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야곱’은 외삼촌의 승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외삼촌은 이 조카를 순순히 보내줄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정중하게 그의 요청을 은근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를 보내지 않기 위하여 아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너를 통해서 나에게 복을 주신 것을 내가 안다느니” 또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등등의 감언이설이 그것입니다(27절). 지금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래 사람인지 구분이 모호한 상황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내리셨다”는 말은 결국 그를 보낼 수 없다는 칭찬 아닌 칭찬은 결국 ‘야곱’을 보낼 수 없다는 완곡한 거절 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라반’은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품삯도 계산해 주겠다고 선수를 치고 나옵니다(28절). 어떻게 보면 이 제의는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 이 제안은 아무런 새로울 것도 없으며, 아무 것도 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처음부터 ‘라헬’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14년을 봉사하겠다고 계약을 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 기간이 다 지났고, ‘라헬’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갚아야 할 아무 빚도 없습니다. ‘야곱’은 이제 아내를 데리고 떠나면 그만이고, ‘라반’ 역시 그의 딸 외는 추가로 무엇을 더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없으니, 그냥 떠나보내면 그만이었습니다. 물론 <신명기>의 규례에 따르면, ‘라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3-14).
‘야곱’은 외삼촌의 제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을 그가 그동안 어떻게 그를 섬겨왔는지를 회상함으로써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29-30절). ‘야곱’의 항의는 결국 다음과 같이 들립니다: “저의 두 아내는 다른 사람이 아닌 외삼촌의 딸이 아닙니까?”
그의 이런 항의에 ‘라반’도 내심 당황했거나 또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태도가 다소 달라지면서 새로운 제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31절상). 그러나 ‘야곱’은 그의 외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결코 무슨 대가를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무엇을 달라는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새로운 제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라반’은 조카의 제안을 듣고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정도로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조건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이 제안을 들어주면 ‘야곱’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내어 놓는 제안이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라반’의 양과 염소 떼 중에서 앞으로 태어날 것들 중에서 점이 있거나 희끗희끗한 것들은 자기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합니다. 혹시 지금의 무리 중에서 몇 마리가 있어 이들 간에 교배가 이루어져 태어날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이들을 지금 미리 제거해 버린다면 그나마 가능성도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들 점 있는 것들을 미리 제거한 상태에서 유전적으로 순종들만으로 시작하겠다고 먼저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산의 천재 ‘라반’이 어찌 이런 제안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점 있는 것들이 앞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전적으로 우수한 종자들만 더욱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쪽에 내기를 걸어 죽을 때까지 그냥 이곳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런 제안을 어찌 ‘라반’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거래는 즉각적으로 성사됩니다(31-34절).
그러나 혹시 꾀 많은 조카가 속임수를 쓸지도 모르니, 점 있는 무리들은 지금 미리 구별해 내어 멀리 보내어버립니다. 이제 ‘야곱’에게 남은 것은 순종들 즉 흰 양들과 검은 염소들뿐이며, 이들은 계약에 따라 모두 ‘라반’의 것입니다(35-36절). 만일 ‘야곱’이 그의 소유가 될 점 있는 종자들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새로운 육종법을 개발해 내어야 할 것인데, ‘라반’이 보기에는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만일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다면 이 계약에 선뜻 동의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승리. 그러나 ‘야곱’은 ‘라반’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을 해버렸습니다. 그가 관찰한 사실은 껍질의 일부만 벗겨져서 얼룩덜룩한 나무 가지들을 흰색 양들이 교미를 할 때 그들 앞에 갖다 놓으면 나중에 검은 반점이 있는 양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염소의 경우에는 껍질이 다 벗겨져서 흰색을 드러내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갖다 놓으면, 흰색 반점이 있는 염소들이 태어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들은 계약에 따라 모두 ‘야곱’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었습니다(37-40절). 그러나 ‘야곱’은 이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양이나 염소 중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것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여, 반점을 지닌 것들이 순종들보다 오히려 더 튼튼하게 되도록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소유를 더 늘어갔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라반’의 것들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화자는 ‘야곱’이 거둔 통쾌한 승리와 성공에 대해서 예의 범상치 않은 표현으로 거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43절).
왜 화자의 이 결론이 범상치 않다는 것입니까? 이야기의 결론이 한 마디로 사필귀정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낭패를 만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자기를 찾아온 조카를 돕기는커녕 처음부터 속이고, 이용하면서 ‘야곱’과 그의 딸들 사이에 온갖 갈등과 분란을 일으켰으며, 지난 14년 동안 그를 노예처럼 착취하며 부려먹은 것도 부족하여 계속해서 그를 노예처럼 붙잡아두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이 능구렁이 같은 ‘라반’이 마침내 임자를 만나 그 조카에게 마침내 굴욕적인 한 방을 얻어먹게 되었다는 결론은 한 마디로 시원함과 통쾌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야곱’이 교활한 ‘라반’처럼 무슨 거짓이나 사기를 쳐서 이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충실하게 거래의 조건을 따랐을 뿐입니다. 오히려 ‘라반’이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졌을 뿐입니다. 화자는 <시편> 기자의 말을 인용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시 7:15).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간섭한 덕분임을 강조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욥 5:13)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
혹시 지금 누군가에게 속아 손해와 낭패를 당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너무 억울하여 치를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간교한 자를 미워하고 배척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약. 그러나 화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인생의 지혜를 주고자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 한 편의 에피소드도 역시 “아브라함 언약”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네 사람의 여인을 통해서 훗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열두 명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야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라반’도 인정하였고(27절),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듯이(30절),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통해서 맺으신 언약을 이루고 계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화자는 이를 강조라도 하려는 듯이 두 번에 걸쳐 “번성케 하다”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30, 43절). 이러한 표현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대해서도 그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크게 번성케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 중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참고, 28:14). 이 표현은 지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창세기>에서는 이 세 구절에서만, 그리고 <출애굽>에서 단 한 번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출 1:12). 이전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그랬고(12:16), 그의 후손이 훗날 역시 ‘이집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야곱’도 객지에서 크게 번창하고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28:15; 참고. 39:3-5, 21, 23). 그리고 ‘야곱’을 통해서 ‘라반’이 큰 복을 누리게 된 것도(27, 30절), <창세기> 두고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나게 해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3; 22:18; 26:4; 28:14). ‘야곱’이 열두 명의 아들을 두게 된 것도 바로 이 약속의 성취로 볼 수 있는 바, 아직 남아있는 약속은 바로 “그 땅”에 대한 부분입니다.
바로 이 땅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야곱'이 “나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야기는 활력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라반’이 이해하든 않든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외삼촌, 아직 이 언약이 내게 이루어지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나로 떠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소서.” 따라서 ‘라반’은 지금 아주 가치 있는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다는 심정에서 조카의 이 요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그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먼 훗날 ‘이집트’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이 떠나기를 요청했을 때, 거부했던 그 일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반 모형”(反 模型, anti-type)인 셈입니다. ‘바로’ 왕 역시 가치 있는 노동력을 제공해 주던 이스라엘이 떠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떠날 수 있도록 해준 사건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었습니다. 열 번에 걸친 재앙이 그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경우에도 그분은 기적적으로 개입하셔서 ‘야곱’의 소유를 번성시키셨으며, 외삼촌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가 어떤 계획이나 속임수나 술수를 부린다 해도,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거나 중단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계획을 세우나,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거둔 이 승리가 바로 그것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점을 <로마서>에서 극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계시록>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만, 바로 그 죽음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마귀의 모습을 영화 <Passion of Christ>는 극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고, 여전히 앞으로 올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하에 영원히 안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야기의 교훈에 대해서 두 주인공 ‘야곱’과 ‘라반’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얻는 것 같으나 잃으며, 잃는 것 같으나 얻을 것이라는 금언이 이 경우 적절할까요?
2. 간혹 주변에 ‘라반’과 같은 직장 동료나 지인은 없습니까? 즉 사전에 모든 조건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 놓고, 계약을 맺자 거나, 또는 거래하자는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모르고 계약을 맺었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은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