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창세기: 역사와 문학과 신학>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으로서, <우리교회> 회원과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성경공부 보조 자료로 만든 것입니다.
개인적인 묵상과 교회 내에서의 성경공부를 위해서 <창세기> 연구를 시작한 것이 1999년이었으니, <창세기> 시리즈를 마칠 때까지 도합 12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산천도 변한다는 십 년의 세월보다 이 년이 더 흘러 지나간 셈입니다. 이 기간 동안 본인 개인적으로도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처음 교재를 쓰기 시작할 당시만 해도 <창조침례교회>를 개척하여 대전의 침례신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40대 초반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은퇴를 앞둔 60대 초반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이후 두 번의 교회 개척과 도중하차(途中下車) 등을 거치면서, 처음의 열정과 꿈과 희망들이 실패와 좌절과 허무와 냉소로 바뀌는 것도 체험해보았고, 자연스럽게 <성경>을 대하는 태도나 관점 또한 많이 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리즈를 마치고 난 이후 세 권의 책을 다시 읽어보면서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재의 전체적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시리즈를 관통하는 일관성을 지니려고 노력했다는 점 또한 밝히고 싶습니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형식 등에 대해서는 <창세기(1)>에서 소상히 밝혀두었으므로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본 교재는 본인의 창조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는 본인의 묵상을 위해서, 그리고 일반인이나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집필한 것이니 만치, 대부분 저명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참조했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두어야겠습니다(참고: <창세기(1)>). 말할 것도 없이 이와 같은 <창세기> 여정이 본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은혜와 축복이었음도 함께 밝혀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을 마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홀가분합니다.
모쪼록 본 교재가 <창세기>를 보다 잘 이해하고 깨닫는데 좋은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자: 김태정
제 10 幕
야곱의 계보: <요셉 이야기>
(37:2-50:26)
단락과 범위. <창세기>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계보의 시작과 끝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계보는 이러하니라(37:2)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50:26)
형식과 구조. 알다시피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야곱’이 아니라 ‘요셉’으로서, 이야기의 내용만을 근거로 했을 때 열 번째 계보의 적절한 제목은 <요셉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이삭의 계보>가 그 내용에 있어 <야곱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점은 <창세기> 화자가 다른 계보에서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이야기 구성상의 원칙이라는 점을 앞에서 수차례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이야기>는 별개의 독립된 이야기 단위가 아니라 <야곱 이야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더 정확하게는 <야곱 이야기>의 속편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야곱-요셉 이야기>로 볼 때, <야곱 이야기>는 제 1부, 그리고 <요셉 이야기>는 제 2부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두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 등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본 교재의 제 8막 서론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요셉 이야기>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다른 <족장 이야기>들에 비해 가장 짜임새가 있고 일관성이 있어, 한 편의 단편 소설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아홉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위 도표), 이중 두 쌍으로 이루어진 여섯 개의 에피소드는 마치 두 개의 연이 시적 반복을 이루고 있는 형식입니다: ABC 및 A'B'C'.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상의 원리는 직선적이며 진행적인 것으로서 <오경>의 주제가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주제란 다름 아닌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시작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12:1-3). 이 언약의 핵심은 “땅”과 “후손”과 “축복”에 관한 것으로서, 특히 후손에 관한 부분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서 기근으로 멸절의 위기에 내몰린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어떻게 구제하고, 구원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요셉’과 같은 인간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요셉’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섭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사실 ‘요셉’의 역할은 이야기의 벽두에 그의 꿈 이야기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는데, 꿈의 내용인 즉은 그의 형제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물론 이 꿈은 42-47장 사이(A'B'C')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47장을 <요셉 이야기>의 결론으로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38장의 <유다와 다말 에피소드>와 48-50장에 그리고 있는 <야곱과 요셉의 말년>에 관한 본문은 원래 <요셉 이야기>에 속하지 않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화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예컨대, 37장에 등장하는 ‘요셉’의 꿈 이야기와 그 꿈이 성취되는 것에 관한 본문39-47장(ABCA'B'C') 간의 상호 관계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세 개의 에피소드(A/B/C)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A)에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사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39:1-20). 두 번째 에피소드(B)는 그가 죄수의 신분이긴 하지만 옥중의 사무 책임자의 자리를 맡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39:21-40:23),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C)는 이집트의 국왕 다음으로 높은 총리 자리에 오르는 이야기로서(41:1-57), ‘요셉’이 이집트 내의 식량 배급을 포함한 모든 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개의 에피소드는 음악적 crescendo의 기법을 통해서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개의 에피소드(A'/B'/C')는 또 다른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봉우리들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A')에서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절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42:1-38), ‘요셉’의 꿈이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B')는 ‘요셉’ 형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에 관한 이야기로서, 이번에는 형들이 ‘벤야민’을 대동하고 있으며, 마침내 ‘요셉’이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C')에서는 ‘야곱’을 포함한 ‘요셉’의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오고 있으며, ‘요셉’은 아버지와 극적 해후를 하게 됩니다(46:1-47:31). 따라서 만일 <요셉 이야기>의 주제를 ‘요셉’의 꿈의 성취에 관한 것으로 국한한다면,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47장이 적절할 것이며, <유다와 다말 에피소드>(38장)나 <야곱과 요셉의 말년>에 관한 본문(48-50장) 등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화자는 마지막 계보의 제목을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계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37:2). 다시 말하자면 화자의 관심사는 ‘요셉’ 한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모든 자식들에 있습니다. <이삭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삭의 계보>(25:19)는 ‘이삭’의 두 아들 즉 ‘야곱’과 ‘에서’ 모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야곱’의 모든 자식들에 대한 화자의 관심사를 잘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야곱의 유언”(49장)으로서, 우리는 이곳에서 ‘야곱’이 임종 시에 그의 모든 자식들에게 축복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요셉 이야기> 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의 절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 국가의 잉태에 관한 단서를 보게 되는데, ‘유다’와 ‘요셉’ 지파가 주축을 이룰 남쪽 유다 왕국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대부분 ‘요셉’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요셉 이야기>, 특히 ‘요셉’이 무대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세 개의 에피소드(A/B/C)(39-41장)에 앞서서, 38장 한 장을 온전히 ‘유다’와 관련한 이야기로 채운다고 해서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개의 에피소드(A'B'C')(42-46장)에서 ‘요셉’이 ‘유다’와 함께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으며, 나머지 인물들 즉 ‘야곱’이나 ‘르우벤’, ‘시므온’, ‘베냐민’이 조연(助演)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37-50장 전체를 통해서 화자의 관심사는 ‘요셉’ 한 사람이 아니라 ‘야곱’의 모든 자식들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열 번째 계보를 단순히 <요셉 이야기>로 명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 25-50장 사이에서 36장을 제외하면 모든 이야기는 ‘야곱’의 일대기에 관한 것입니다. 전체 본문은 그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의 죽음과 매장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5:21)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50:14)
앞에서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화자는 <야곱 이야기>를 제 1부와 제 2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야곱 이야기(1)>-“이삭의 계보”(25:19-35:29); (2) <야곱 이야기(2)>-“야곱의 계보”(37z:2-50:26). 당연히 이 두 부분이 하나의 이야기로 통일성을 갖게 하는 요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야곱’의 유언 중에서 ‘르우벤’에 관한 언급(49:3-4)은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했던 사건(35:22)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유언(49:5-7)은 ‘디나’의 사건(34:25-31)을 기억나게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유언(49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이전에 이들이 탄생할 당시의 이야기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참고, 29:31-30:24). 이들의 탄생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연관된 이름을 가진 아들들은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요셉’이었습니다만(29:32, 33, 35; 30:24), 이곳 <요셉 이야기>에서도 이들은 주요 인물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 이야기> 전반부에서 ‘레아’와 ‘라헬’의 갈등(29-31장)이 나중에 그 자식들과 ‘야곱’ 사이에 전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만(34; 35:22), 후반부에 이르러는 부모와 자식들 간의 갈등은 ‘요셉’과 그의 이복형들 사이에 더욱 그 골이 깊어지고 있으며(37장), 급기야 ‘요셉’이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창세기>의 나머지는 화해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화해의 이야기는 47:12에서 절정을 맞고 있기는 하지만, ‘요셉’의 형들 사이에 일말의 두려움이나 의구심이 깨끗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사후 ‘요셉’의 복수가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두려움에 대해서 ‘요셉’은 다시 한 번 달래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50:14-21). 그러므로 <야곱 이야기>(25:19-50:26)는 전체적으로 한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구성상의 또 다른 특징은 아래에 보는 바처럼 교차대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형원. 「복음과 실천」(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94), p. 378; Vincent L. Tollers; John Maier eds., Mappings of the Biblical Terain: The Bible as Text(London: Bucknell University Press, 1990), pp. 215-232.
이 구조에 따르면 <다말과 유다 이야기>가 이곳에 있어야 당위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비평이나 편집비평에 따르면 이 본문은 잘못 위치한 본문의 전형입니다.
즉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에는 두 여인 ‘다말’과 ‘보디발’의 아내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 여인들의 상대역으로 각기 ‘유다’와 ‘요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여인의 음란성과 음란한 두 여인을 상대하는 두 남자 주인공의 행위가 좋은 대조를 이루게 하는 것도 화자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 연구에 의하면, 이야기의 주된 자료는 <야훼 전승>과 <엘로힘 전승>이 37-45장 사이에 대략 비슷한 정도로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에는 <사제 전승>도 일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야훼 전승>과 관련해서 일부 수정된 견해가 있기도 한데, 이중 일부가 후대에 소위 <르우벤-엘로힘 전승>으로 불리는 자료가 일부 보충되었다는 견해입니다. 보다 최근에는 <요셉 이야기>의 핵심 부분 즉 37장이나 39-45장을 순수한 <야훼 전승>으로 보고, 나머지 이야기는 후대에 <사제 전승>과 <야곱 이야기>로 보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자료와 편집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는 각 본문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제 41과: 이집트로 팔린 요셉
41
요셉: 이집트로 팔려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7:2상)
문학과 역사
범위와 구조. <요셉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 ‘야곱’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7:2). 이러한 형식은 <창세기>의 다른 족장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이미 친숙한 것이 되어있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 이야기>가 그의 아버지 ‘데라’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고, <야곱 이야기> 역시 그의 아버지 ‘이삭’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요셉 이야기>의 시작으로 간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37:1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지난 에피소드의 결론이 되어야 함을 지난 과에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내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과에서 다루게 될 37:2-36의 본문 또한 그 안에서 작은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충분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38장의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37:36과 39장 사이에 특별하게 끼어든 하나의 막간으로 간주할 때,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서의 37장의 기능은 더욱 뚜렷해진다 할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시작은 <야곱 이야기>의 첫 시작과 비교해 보는 것도 두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함에 있어 유익할 것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제목에 이어 이야기 주인공들의 나이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후 이들이 부모와 다른 형제(들)를 떠나 이십여 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게 했던 두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표 참고):
<요셉 이야기>의 경우 주인공과 나머지 형제들 간의 갈등은 이야기의 벽두에서부터 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화자의 진술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그를 미워하여”(37:4, 5, 8). 그리고 37:11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형제 사이의 갈등에 관한 이러한 진술들이 <요셉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나머지 이야기의 구조를 아래 여덟 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처음과 두 번째 장면을 하나의 장면으로 처리할 수도 있겠으나, 두 장면에서 주인공이 있는 장소가 다르다는 점에서 별도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와 네 번째 장면 역시 한 개의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르우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단락으로 구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모든 장면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바는, 각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에 따르면, 본문은 세 개의 자료 즉 <야훼 자료>, <엘로힘 자료> 및 <사제 자료>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궁켈’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료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본분 중에 본문 중에 일련의 표현이나 단어들이 중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요셉’의 아비의 이름을 ‘야곱’으로 부르는가 하면(34절) 이스라엘로 부르기도 한다든지(3, 13절), ‘르우벤’과(21-22절, 29-30절) ‘유다’(26절) 모두 ‘요셉’을 구출하기 위하여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렸다고 하기도 하고(25, 28절),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렸다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28, 36절).
그러나 오늘날 ‘궁켈’의 이와 같은 자료비평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본문이 갖는 내적 통일성이나 일관성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료 간의 미미한 차이는 해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사안들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이 받아들이기로는 본문은 하나의 자료에서 유래한 것이며, 중간 중간에 요약 내지는 일부 확장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볼 때, 위에서 제시한 문단 구분도 나름대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매 장면마다 서술과 대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다른 자료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게 되면 이야기의 내적 통일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2절의 경우만 하드라도, 이를 다른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이야기의 내경 내지는 서론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다만 본문을 하나의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할 때, 이를 <야훼 자료>로 볼 것인지 아니면 <엘로힘 자료>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본문이 구성이나 형식에 있어 <야곱 이야기>의 25:19-27:45의 본문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야훼 자료>로 간주하는 편이 더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목(2절상)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2절상)
<창세기> 37장 이후의 대부분의 기록은 ‘야곱’이 아니라 그의 아들 ‘요셉’에 관한 것이지만, <요셉 이야기> 역시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주인공의 아버지의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그리고 이야기의 제목이 37:1이 아니라, 37:2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셉 이야기>의 범위와 단락이 자동적으로 결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요셉: 밀고자(2절하-11절)
<요셉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주인공 ‘요셉’과 나머지 형제들 사이의 갈등과 그 원인에 대해서 묘사함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으로 전체 이야기의 배경 내지는 서막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먼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반감이나 미움의 두 가지 원인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요약해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2하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2-4절)
화자가 ‘요셉’을 언급하기는 그의 출생에 관한 언급이 있은 이후(30:23-24) 이곳이 처음입니다. 다만 ‘야곱’의 아들들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이 한 번 등장한 바 있기는 합니다(35:24).
그날 이후 지금까지 십칠 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베일에 가려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 중 가장 막내이긴 했습니다만, 형들과 함께 가축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쳤다”는 구절은 문맥상 “그의 형들을 돌보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으므로, 이럴 경우 이 구절은 그야말로 <요셉 이야기>에서 탁월한 서론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V. Hamilton). 즉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훗날 그가 성인이 되어 하게 될 일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나중에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백성들을 돌보고 양식을 제공해주는 등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동생이 형들을 돌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양을) 치다”(h[;r, 라아)는 “다스리다” 또는 “통치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예. 삼하 7:7). 흥미롭게도 ‘요셉’의 형들조차도 그를 힐난하면서 이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8절상).
이곳에서는 특별히 ‘빌하’의 두 아들(‘단’과 ‘납달리’) 및 ‘실바’의 두 아들(‘갓’과 ‘아셀’)과 더불어 가축을 돌보았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나머지 형제들 모두를 다 포함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에 따르면 ‘요셉’은 형들이 양을 치러 나갔을 때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추후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첫 번째 원인은 그가 형들의 비리(?)를 일일이 아버지 ‘야곱’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입니다. 이복형제들 사이의 갈등이나 ‘야곱’의 편애 등에 대해서는 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는 터이긴 하지만, 그가 왜 밀고자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에게 전한 이야기가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거짓 보고였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다만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들의 잘못을 말하다”는 표현은 일종의 중상모략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고. 시 31:14; 렘 20:10; 겔 36:3; 민 13:32; 14:36, 37). 만일 ‘요셉’이 아버지에게 이처럼 거짓 보고를 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분노와 미움은 더욱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된 두 번째 원인은 아버지의 편애(偏愛) 때문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편애하였으면 그에게 “채색 옷”(.!ySiP' tn<toK, 케토네트 파심)을 만들어 줄 정도였습니다(3절). 이 옷이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옷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케토네트 팟심’은 원래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 외투’를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만(창 37:23, 32), <칠십인 역>이나 <벌게이트> 등에서 “채색옷”(키토나 포이킬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Hamilton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Hamilton, V. 407-408쪽.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준 것이라면 이를 바라보는 나머지 형제들의 심사는 보지 않아도 훤합니다. 우리는 <족장 이야기>에서 편애의 문제가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였으며,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이 이제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형들이 그를 미워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화자는 세 번에 걸쳐 그들의 미움을 언급함으로써(4, 5, 9절), 이들의 미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야곱’이 ‘레아’를 미워하였다고 두 번이나 언급한 바 있는데(29:31, 33), 이제는 ‘레아’의 자식들이 ‘라헬’의 자식 ‘요셉’에게 그 미움을 되돌려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화자는 왜 이곳에서 ‘야곱’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까? “얍복강 사건” 이후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후에도 두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뀐 후 늘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두 이름을 번갈아 사용해야 할 무슨 특별한 상황이나 배경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요셉 이야기> 내에서 화자는 한 이름을 다름 이름보다 선호해서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관찰할 수는 있습니다. 첫째, 전체적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더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31회); 이스라엘(20회). 이렇게 볼 때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를 때 오히려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 내에서 ‘야곱’은 역사적인 한 개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라면 이스라엘은 때로 민족이나 국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46:8; 47:27; 48:20). 세 번째, 이스라엘을 한 개인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에서조차도 지파 내에서의 위치 즉 족장으로서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함인 것처럼 보입니다(43:6, 8, 11; 46:1; 48:2). 반면 ‘야곱’은 종종 연약한 인간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할 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37:34; 42:4, 36; 47:9). 이런 사실은 두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야곱’은 “속이는 자”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에서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야곱’이 새 힘을 얻는 경우에 그를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45:28; 48:2). 마지막으로, ‘요셉’이 등장하고 있는 장면에서는 이스라엘보다는 ‘야곱’을 선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37:3, 13; 46:29, 30; 48:2, 8, 11, 14, 20, 21; 50:2).
아무튼 ‘요셉’이 형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따돌림은 대부분 아버지의 편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는 있으나, 그가 자초(自招)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 위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요셉’이 자초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의 “꿈 이야기” 때문입니다:
5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5-11절)
이 “꿈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세 쌍의 “꿈 이야기” 중에서 첫 번째 쌍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참고. 40:1-41:36), ‘요셉’ 자신이 꾼 유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이 꿈이 예고하는 바는, 훗날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는 ‘요셉’에게 찾아와 그가 누구인지 모른 채 머리 숙여 양식을 구걸하기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42:6; 44:14). ‘요셉’의 꿈은 나중에 ‘이집트’ 왕 ‘바로’의 두 번에 걸친 꿈과 마찬가지로, 이 두 번의 꿈 역시 실은 하나의 꿈으로 볼 수 있습니다(41:25).
결국 동일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요셉’의 가족들이 어느 날 그에게 모두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미래에 성취될 동일한 한 사건을 두고 두 번에 걸친 “꿈 이야기”를 통해서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41:32). 이러한 사실은 두 번의 꿈이 묘사하고 있는 배경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의 꿈이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바로’의 꿈은 풍년과 흉년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 이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상천하지(上天下地)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두 번의 꿈에서 차이를 찾아낸다면, ‘바로’의 꿈에 대해서는 ‘요셉’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공식적인 해석 즉 해몽(解夢)을 해주고 있습니다만(40:8; 41:16, 25, 28), ‘요셉’ 자신이 꾼 꿈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5-11절). 이런 점에서 볼 때, ‘요셉’의 꿈이 과연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과대망상적인 부풀리기를 한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의 형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당연히 후자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요셉’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 댄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5, 8절). 이 표현은 ‘요셉’의 이름에 대한 일종의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더욱 미워하였다”다는 직역하자면 “미움을 더하였다”(פוֹי, 요시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평범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노래하듯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7절은 두 번에 걸쳐 “보라”(hNEh, 힌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반발과 분노를 격동시킬 뿐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해와 달”(즉 부모)조차도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9절), “열한 개의 별”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에 미루어, ‘요셉’이 꿈을 꾼 시기가 아직 “벤야민”이 태어나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아니면 상이한 자료가 혼재해 있는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형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버지조차도 분노하며 그를 꾸짖기에 이릅니다(10절).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이 장면에서 ‘요셉’이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는 정도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형들이 그를 “매우 시기했다”(an:q, 카나)는 것은 그를 “미워했다”(5, 8절)는 것보다 더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 동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폭력을 수반할 정도의 강력한 미움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동사로 사용하고 있으며(민 25:11, 13), 하나님에 대해서도 “시기하는 하나님”으로 십계명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출 20:5). <민수기>에서도 간통이 의심되는 아내를 남편이 “시기심”으로 죽이거나 처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별도의 조사 절차를 마련하고 있으며(민 5:11-13), <잠언서>는 “시기심”이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잠 14:30; 23:17; 24:1, 19). 이처럼 강력한 단어를 ‘요셉’의 형들이 가졌던 감정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이들이 ‘요셉’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 감정을 처리하게 될 것인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분노와 질책은 ‘요셉’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잠잠하게 함으로써 형들의 미움으로부터 다소라도 보호해 주기 위한 포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11절). 오히려 ‘야곱’은 아들의 꿈이 진정 하나님의 계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아들들이 그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셉’을 그 형들이 있는 곳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요셉: 노예(12-35절)
이곳 제 2막에서는 서막에서 잉태되어 내연(內燃)하고 있던 갈등과 분노가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해 나오는 전체 과정이 여덟 개의 장면에 걸쳐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이곳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건을 기점으로 와해의 길을 걷게 되고, 향후 20년을 그러한 상태로 남아있게 됩니다.
장면 1: 요셉이 형들을 찾아 나섬(12-14절). 그리고 그 단초는 ‘요셉’의 형들이 ‘예루살렘’에서 ‘세겜’으로 앙 떼를 치러가면서 은밀하게 나누던 대화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12절)
‘세겜’은 이들 형제가 여동생 ‘디나’의 일로 대학살을 자행했던 곳입니다(34:24-30). 그런데 이제 이들이 다시 그곳에서 동생을 잡아 죽일 모의를 도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낸 것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13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13-14절)
그러나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습니다. 왜 ‘요셉’은 처음부터 형들과 함께 양을 치러 가지 않았을까? 그가 가기 싫어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겜’이 너무 위험한 동네라 그 아비가 그를 함께 딸려 보내기가 두려웠을까? 혹은 형들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그를 혼자 나중에 보낼 수는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통해서 추측해 보건대, ‘요셉’이 형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야곱’은 그의 아들들과 양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더 염려가 많았습니다. 이 본문에서 “평안”을 뜻하는 ‘샬롬’(שׁלום)이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야곱’의 이런 염려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즉 그가 염려하는 바는 아들들이나 양들이 도적이나 강도들의 위험으로부터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야곱’에게 있어 ‘세겜’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진실로 염려해야 했던 점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이나 위협이 아니라, 가족 내부에 상존해 있는 위험과 위협이었습니다. 화자는 이점을 여러 번에 걸쳐 암시한 바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이 그를 심히 미워하고, 시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4, 5, 8, 11절). 따라서 우리는 ‘야곱’이 ‘요셉’을 그 형들을 찾으라고 내보낼 때, 열일곱의 이 소년이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떠나 위험한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을 보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장면 2: 요셉이 세겜에서 길을 잃음(15-17절). 염려는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세겜’에 있는 ‘요셉’을 발견하게 됩니다:
15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15-17절)
그는 이제 그의 유일한 보호자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양처럼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으며, 낯선 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헤브론’에서 이곳 북쪽 ‘세겜’까지 80 킬로미터를 올라왔지만, 형들이 있는 ‘도단’까지 가려면 다시 북쪽으로 2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만 했습니다. 그가 형들을 만나기 위해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곧 만나게 될 운명의 순간과는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의 긴장은 점점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장면 3: 형들이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밈(18-20절). 장면은 바뀌어 형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형들의 눈을 통해서 ‘요셉’이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의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18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18-20절)
형들이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동생을 죽일 음모를 “꾀합니다”(lk'n, 나칼). 이 동사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아닙니다만, 한 번도 긍정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단어이기도 합니다(예. 시 105:25). 동생이 멀리서부터 가까이 오기 전에 그렇게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진술을 통해서 볼 때, 이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멀리서 이 동생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형들이 ‘요셉’을 향하여 “꿈꾸는 자”로 부르고 있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여서라도 그 꿈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를 살해해도 그 꿈이 여전히 이루어질까?” ‘요셉’을 향한 형들의 적개심이 이처럼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처럼(4:8, 14), ‘에서’가 ‘야곱’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27:41, 42), ‘요셉’을 살해하려 하는데, 이 모두 불법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금언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이들은 불법적인 살인에 이어 거짓말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들이 나중에 아비 앞에서 이 거짓말을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옷을 본 ‘야곱’이 스스로 그렇게 단정해 버립니다(37:33).
장면 4: 르우벤이 개입하다(21-22절). 이 짧은 장면은 ‘르우벤’이 뜻밖에 개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21-22절)
추측컨대 ‘르우벤’은 ‘요셉’에 대한 살해 계획을 나중에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 계획에 찬동하지 않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가장 맏형으로서 일말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전에 아버지의 첩 ‘빌하’와의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무언가 속죄라도 받고 싶어 했을까요?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화자는 그의 명령을 직설화법으로 담아냄으로써, 맏형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피를 흘리지 말라”;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후자의 표현은 일종의 관용 어구로서 종종 “살해를 품은 기습 공격”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예. 삼상 22:17; 24:6; 26:23; 창 22:12).
‘르우벤’은 명령에 이어 다른 계획을 내놓습니다. ‘요셉’을 죽이는 대신 “광야 구덩이(굴)”에 내버리자는 것입니다. 화자는 그가 왜 이런 제안을 내놓고 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중에 혼자 몰래 와서 ‘요셉’을 구해주기 위함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르우벤’ 자신은 이를 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요셉’이 구출된다면 나중에 다른 형제들이 이를 알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었을 때 이들이 자신에게도 ‘요셉’에게와 같은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요? 나도 ‘요셉’처럼 외톨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런 모험을 감행하기로 작정했을까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복원하고, 더 나아가서 신뢰와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기를 원했을까요?
사람을 직접 죽이는 일과 그를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뜨려 죽도록 내버려 두는 일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법 형식 논리로만 보자면 후자의 행위가 죄 질에 있어 다소 가벼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벨’의 피를 땅이 받고 그 땅이 ‘가인’에게 피의 복수 즉 저주를 내리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4:10). 만일 ‘요셉’을 구덩이에 내버려 둔다면 그의 “핏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며, ‘르우벤’의 교묘한 제안은 다른 동생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면 5: 요셉을 팔아넘김(23-28절). 이 장면에서 행동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요셉’이 마침내 형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고, 형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집어던지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겨버립니다. 이 장면은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형식 상 화자의 진술이 먼저 있은 다음 담화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번에 담화의 주인공은 ‘유다’입니다.
등장인물들의 거침없는 행동은 음악에서의 ‘스타카토’처럼, 화자가 동원하고 있는 일련의 연속적인 동사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벗기고”; “잡아”; “던지니”.
23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24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23-24절)
‘요셉’을 대하는 이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칠기도 합니다. 이들은 마치 짐승의 가죽을 벗기듯 동생의 특별한 채색 옷을 벗기고 있습니다(참고. 레 1:6).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요셉’의 “채색 옷”에 주목함으로써,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고 있는 각별한 총애와 이와 대조적으로 형들로부터 받고 있는 미움을 대조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가 각별한 사랑과 은총으로 만들어 입힌 그 옷을 형제들이 난폭하게 벗기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덩이가 “비었고”, “물이 없었다”고 소개함으로써 ‘요셉’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다면 오래 버티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텅 비고, 메마른” 구덩이는 훗날 ‘가나안’을 덮친 7년 동안의 기근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한편 이 모든 일을 당하는 동안 과연 ‘요셉’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화자는 유난히 이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는 형들의 자비를 간구하며 애걸했습니다(42:21).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았고, 범죄 현장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을 정도로 잔인하고 냉정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25절상)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동생의 절규가 들려오는 구덩이 주변에 모여 앉아 아마 ‘요셉’이 가져왔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이 형들의 비정함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들이 동생의 절규에 귀를 막고 있는 대신 눈으로 본 것은 있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25절하)
화자는 그들이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낙타에 여러 가지 상품들을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인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스마엘’ 족속입니까 아니면 ‘미디안’ 족속입니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 두 호칭이 같은 이야기 내에서 번갈아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마엘’ 사람들은 이 구절 외에도 다른 곳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만(27, 28절, 39:1), 또 다른 곳에서는 이들을 ‘미디안’ 상인으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28, 36절). 이처럼 동일한 대상을 두고 상이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아주 다양한 이견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로 자료 및 편집 비평에 바탕을 둔 연구 결과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추측과 가정에 근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은 이들 상인들에 대해서 이 두 이름을 번갈아 사용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더 나아 보입니다(G. Wenham). <창세기> 화자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는 한 번은 ‘미디안’ 사람이 ‘요셉’을 ‘보디발’에게 팔았다고 하고 있는가 하면(37:36), 다른 곳에서는 ‘보디발’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샀다고 진술하고 있기도 합니다(39:1). <사사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이스마엘’과 ‘미디안’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미디안)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 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음이라”(삿 8:24). ‘이스마엘’과 ‘미디안’이 결국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히브리’ 식 이야기의 특징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 통상 그 사람을 두 번은 고유명사로 부른 다음에 일반 대명사로 부르게 됩니다. 예컨대 28절에서 처음으로 ‘미디안’이 등장하고 있는데, 같은 구절 내에서 그를 지칭할 때 역시 동일한 고유명사를 사용해야 할 것인데, 대명사 그들로 바꾸어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28절). 여기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린 자가 ‘미디안’ 사람이라면 같은 고유명사를 반복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그들”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요셉의 형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개역 개정>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미디안’과 ‘이스마엘’을 서로 다른 대상으로 봅니다. 따라서 이들이 선호하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린 자는 ‘미디안’ 사람들이며, 이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이름이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라면, 이 둘 사이에 무슨 특별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이스마엘’이 보다 일반적으로 “약대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미디안’은 이들이 속해있던 구체적인 지파나 족속을 의미했던 것일 수 있습니다. 또는 ‘이스마엘’이 보다 넓은 지파 연합을 지칭했다면, ‘미디안’은 그 속에 포함된 한 족속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로 ‘이스마엘’의 계보에 일단의 유목 지파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창 25:13-17).
이들의 등장은 적어도 ‘유다’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제안하고 있는 바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6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26-27절)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처음 제안했던 자는 ‘르우벤’입니다만, 그의 계획은 실은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둔 것에 불과합니다. 과연 이들 형제가 ‘요셉’을 그곳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죽일 것인가? 또는 ‘요셉’이 그곳을 도망쳐 나와 아버지 ‘야곱’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게 될 것인가? 따라서 ‘유다’의 제안은 동생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으며, 피의 복수는 면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창 4:10). 어디 그뿐입니까? 경제적인 유익도 생기는 일입니다. 일견 ‘유다’는 ‘르우벤’보다 더 고상한 동기를 지닌 듯합니다: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27절하). 그러나 그 역시 동생을 구출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그의 제안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또 다른 구덩이에 집어 던져 넣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혈육을 팔아 금전적 유익을 챙기는 행위는 사형에 처해야 할 정도의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1:16; 신 24:7).
결국 ‘요셉’은 은 이십 세겔에 팔립니다: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28절)
이 금액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나 고대 바벨론 사회에서 오세에서 이십 세까지의 남자 노예의 가격입니다(참고. 레 27:5). 참고로 목동으로 고용되었을 때 일 년 치 임금이 대략 8 세겔 정도였다고 하니, 이들 형제들은 ‘요셉’의 몸값으로 상당한 보상을 챙길 수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김으로써, 사실상 그를 영원히 없애버렸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요셉’의 꿈을 이루는데 일조(一助)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장면 6: 르우벤의 등장(29-30절). 이 모든 거래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르우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이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29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29-30절)
아마 그는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자는 제안만 해놓고서는 어딘가로 떠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와서 동생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옷을 찢는 등 통곡과 비통 등 ‘요셉’을 향한 연민의 정을 쏟아내고 있습니다(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그의 이런 행동은 조금 뒤 그의 아버지 ‘야곱’이 보일 행동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33-34절). ‘르우벤’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염려에 찬 그의 말, “나는 어디고 갈까”는 바로 이런 염려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장면 7: 요셉의 옷을 야곱에게 보임(31-33절). 그러나 ‘르우벤’과는 달리 다른 형제들의 가슴은 냉혈한의 그것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는 그래도 아버지의 반응을 생각해서 짐짓 슬픈 내색을 지으며 동생이 짐승에게 물려갔다고 거짓말을 할 생각도 있었으나(20절), 정작 동생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구태여 표정 관리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이들은 염소의 피를 묻힌 동생의 옷을 다른 사람을 시켜 아버지 앞에 보내는 것으로 보고에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감정 따위는 이제 별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태도입니다:
31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그의 채색 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31-32절)
이들이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서 사용한 ‘요셉’의 옷과 염소의 피는 이전에 ‘야곱’ 자신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했던 바 있는 바로 그 도구들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27:9-17). 다만 ‘이삭’과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삭’이 그 아들 ‘야곱’의 위장복(僞裝服)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에 비해,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7:23).
‘야곱’은 금방 ‘요셉’의 옷을 알아보았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33절)
바로 이 대목에서 두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연결점을 갖게 됩니다. 젊은 자식들이 늙은 아버지를 속이는 범죄를 저지르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했던 것에 비해, ‘야곱’의 자식들은 그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지금 ‘야곱’이 내지르고 있는 세 마디의 단말마적인 절규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이야기는 이 장면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참고. 삼하 18:33).
장면 8: 야곱의 애곡(34-35절). 마지막 장면은 ‘야곱’이 죽은 아들을 위하여 오래 동안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34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34-35절)
이러한 행동은 상(喪)을 당한 자가 보여주는 당시의 일반적이고도 공식적인 관습입니다(삼하 3:31; 왕상 20:31-32; 욘 3:5; 창 50:10; 삼하 19:1-4; 에 4:3; 출 33:4; 사 61:3). 대개 부모가 돌아갔을 때 조문 기간은 한 주간 정도 걸렸으며(창 50:10), ‘모세’의 경우에는 한 달이 걸리기도 했습니다(신 34:8). 그러나 ‘야곱’은 그의 자녀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위하여 애곡하기를 멈추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울 작정이었습니다. “스올에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구약>에서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음침하고도 불쾌한 장소이며(사 14:14-20), 친척들이 나중에 죽어서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삼하 12:23). 이러한 ‘스올’ 역시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암 9:2), <시편>의 시인들은 ‘스올’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고 있으며, 또한 ‘스올’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미래에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시 16:10; 30:3; 49:15).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악인들이 가는 ‘스올’에 자신도 함께 가기를 기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절망과는 달리 화자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36절)
친위대장의 역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보디발’은 아마 왕궁 감옥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40:3-4; 41:10, 12). 참고로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장군 ‘느부갓네살’도 같은 호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요셉: 사계절의 사나이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한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우리는 이런 자를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축구 선수로 비유하자면 모든 포지션을 거뜬히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구약>에서 ‘바울’에 버금가는 또 다른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를 찾아내고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요셉’입니다. ‘요셉’을 이렇게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즉 그 역시 ‘바울’만큼이나 인생의 온갖 영욕(榮辱)을 다 겪은 인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당시 근동 사회가 보여주고 있던 거의 모든 사회적 계층의 스펙트럼을 살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의 가장 총애 받는 아들이자 미래의 상속자로 출발하였으나, 타국의 노예로 전락하였다가, 감옥에 갇히는 등 죽음의 위기를 거치면서, 종국에는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어 국왕 다음가는 권좌에 올라, 그 나라는 물론 자신의 가족과 민족의 구원자가 됩니다. 그는 사랑과 미움, 총애와 질시, 시험과 신뢰, 출세와 추락 등 인생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인생의 그 모든 역경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인생의 부귀와 영화 또한 그를 거만하고 목이 곧은 자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아주었습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나, 대중 앞에서나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였습니다.
아마도 <구약>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통 털어 ‘요셉’만큼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 역시 다른 인간들처럼 흠이나 약점이 없을 수 없겠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화자는 그에 관해서 한 번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요셉 이야기>와 주인공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그를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지는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신약>에서 중요하게 자주 언급하는 인물은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될지언정 ‘요셉’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에서 ‘요셉’만큼 대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도 없습니다만, <신약>은 그의 말을 한 번도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그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경우란 단 네 번에 불과합니다. <신약>에서 ‘요셉’을 거명하고 있는 네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요한복음>(4:5)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의 여인 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수가’ 성 우물가 근처의 땅을 ‘야곱’이 ‘요셉’에게 준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음(하지만 <창세기>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음); (2) ‘스데반’ 집사가 공회 앞에서 유대 역사를 회고하면서 ‘요셉’과 관련한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함(행 7:9-14); (3) <히브리서> 11장에서 <구약>의 믿음의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포함하고 있음(히 11:21-22); (4) <계시록>에서 종말의 때에 요셉 지파에 속한 일만 이천의 하나님의 종에 관한 언급 중에 등장함(계 7:8).
예수님도 ‘요셉’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에 대한 인물 평가를 하기 위하여 참고할 만한 아무런 <신약>적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료라고는 결국 <요셉 이야기> 그 자체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모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설득력 있는 ‘요셉’에 대한 이해는 그를 그리스도의 모형(模型)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 해석의 원리에서 볼 때 전형적인 “모형론적 해석”(좁게는 기독론적 해석)으로서, <신약>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만, 두 인물의 사이에는 나름대로의 유사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유사성들이 있는지 열거해 봅시다(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팡세>의 작가 ‘파스칼’이 그의 책에서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요셉’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의 고전(古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총애하는 한 아들, 아무런 흠도 잘못도 없는 그를 형들에게 보냈으나, 형들은 그를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겨버린다. (그러나) 바로 이 일을 통해서 그는 자기 형제들은 물론, 이방인과, 온 세상의 구주(救主)가 된다. 만약 형들이 그를 배척하지 않았거나, 죽이려고 모의하지 않았거나, 결국 그를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죄 없는 ‘요셉’은 감옥에서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예수님 역시 두 명의 다른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두 명의 죄인들은 외형상 아무런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살아남게 될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한 사람은 택함을 입었다는 이유로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동일한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야만 했다. 요셉은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예언을 해 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은 그 예언을 행동으로 성취시키셨다. ‘요셉’은 살아남게 될 죄수에게 나중에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예수님으로부터 낙원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죄수는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중에 임할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리스도인의 모델. 이처럼 ‘요셉’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흥미롭고 매력적이긴 하나, 오늘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교훈을 주기에는 미흡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위한 “역할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요셉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있다면 ‘요셉’ 자신의 인격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단순히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는 것을 뛰어 넘어,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게 한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낸다면, “일관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믿음”; “정의에 대한 일관된 신념.” 그러니까 그가 거둔 승리는 단순히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승리를 거두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믿음은 그로 하여금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경우를 만나든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일관된 믿음은 그로 하여금 타협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라”는 그 흔한 금언도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집트’인으로 살 수도 있었습니다.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한들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좀 했기로서니 누가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같은 교회 식구이겠습니까? 목장 리더이겠습니까? 어차피 피장파장 아닌가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소명과 책임이 무엇인지 알았고, 아는 바대로 행동했습니다. 누가 보건 보지 않건, 손해가 되건 안 되건, 감옥에 갇혀 있건 총리 자리에 있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단순히 꿈꾸는 신앙인에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된 ‘요셉’은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타인의 질시와 미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은밀한 성적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을까?
어떻게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한 마디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실로 참된 신앙인의 역할 모델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누구의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까?
2. 하나님: 섭리와 언약
<요셉 이야기>의 인생관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낙관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여러 시대를 두고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족장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만, <아브라함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를 비교해 보자면 두 이야기 모두 열네 장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길이에 있어서는 <요셉 이야기>가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가 <창세기> 속에 있는 이유는 단순히 흥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을 찾아내어 ‘요셉’을 위대한 “사계절의 사나이”로 만들어 준 자가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이야기의 진정한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요셉’이 위대한 “사계절의 사나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누가 그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을까? ‘바울’은 그 비결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애 내내 그를 지켜주신 것처럼, ‘요셉’의 110 년의 생애동안 단 한 번도 그로부터 눈을 떼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한 행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를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섭리”(providence), 그리고 다소 경직된 표현을 빌자면 “예정”(predestination)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통상 그렇듯이 신비하고,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칠 년 동안의 대 기근으로부터 그 나라와 수백만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을까? 만일 ‘바로’ 왕이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왕의 신하들 중에서 누군가 왕의 꿈을 제대로 해석을 해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과 함께 동료 죄수로 감옥에 있던 자가 ‘요셉’을 왕에게 천거해 주지 않았다면? ‘요셉’이 감옥에서 동료 죄수들의 꿈을 해석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이집트’로 팔려오지 않았더라면? 형들의 미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그를 편애하지 않았다면? 그가 채색 옷을 입고 형들이 가축을 돌보고 있는 곳으로 가지만 않았다면? 질문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인공 ‘요셉’의 고백에 따르면, 이 모든 일들이 선하든 악하든, 크든 작든, 중대하든 시시콜콜하든, 마치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인생에서 결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 같이 의미 없는 일이란 없다는 것이지요. 주변적인 사건들,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 짜증나는 일들, 슬프게 하는 일들, 절망하게 하는 일들조차도 나의 이야기, 즉 <요셉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서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거장(巨匠)다운 솜씨를 발휘하셔서 아름답게 녹여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도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간증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에서 그처럼 쓸데없고, 불필요한 일들조차 함께 섞어 ‘요셉’이라는 걸작품을 만들어내셨을까요? 한 마디로 그분의 “언약”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요셉 이야기>가 단순히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아닌 <족장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창세기>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가 특별히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해서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를 보게 됩니다. 땅과 후손과 축복과 관련한 성취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요셉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을 떠나 이집트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수 세기 후에 ‘야곱’의 후손들이 이곳을 떠나 ‘시내’ 산을 거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야곱’의 후손은 열둘에서 칠십으로 늘어나고, 점차 더욱 큰 무리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가 끝날 때까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큰 나라”(12:2)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12:2)는 약속은 ‘요셉’이 무명의 노예 신분에서 왕 다음가는 권좌에 올라 그 땅의 유명인사가 됨으로써 일부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드러내 주는 극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 때조차도 함께 했음을 화자는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39:2, 3, 21, 23).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언약” 중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2:2)는 축복에 대한 약속 또한 ‘요셉’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를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보디발’이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39:3). 그러나 이것은 약과입니다. 훗날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각국 백성이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다”(41:57)는 사실에서 그의 가족은 물론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요셉 이야기>가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가 아니라 반대로 언약의 후퇴 내지는 퇴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 미래에 구속의 땅이 될 ‘이집트’로 내려가는 모습에서 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분적인 성취는 부분적인 미성취를 뜻하기도 합니다. 마치 절반의 성공이 절반의 실패를 의미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가고자 했을 때, <족장 이야기>에서는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셨다는 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46:3-4). ‘야곱’에게 하나님의 이 약속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것은 그가 취하게 될 행동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임종 시에 조상의 무덤이 있는 ‘맥벨라’ 동굴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49:29-30). 마찬가지로 ‘요셉’도 그의 형제들에게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50:25). 이처럼 <창세기>는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를 다루고 있으나 동시에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 여전히 미해결의 숙제가 많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는 속편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라는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오경>의 나머지 책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요셉 이야기> 그 자체에만 주목해 볼 때 하나님의 섭리는 이야기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주인공 ‘요셉’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3. 야곱과 아들들: 자유와 책임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섭리”임에는 틀림없지만, 또 하나 중요한 주제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무엇일까요?
“인간의 책임”입니다. 만일 <요셉 이야기>에서 이 두 번째 주제를 무시해 버린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역사와 인생을 주관해 가신다면, “누가 그 뜻을 대적할 수 있겠으며 대적한들 어찌 허물할 수 있겠습니까(롬 9:19)?” 누가 ‘이집트’의 ‘바로’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가롯 유다’를 비난할 수 있겠으며, ‘야곱’과 ‘요셉’의 형들을 야단칠 수 있겠습니까? 그들 모두는 무대의 조명이나 장치에 불과한 자들로서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롯 유다’가 정해진 각본에 따라 은 이십 냥에 주님을 팔아넘긴 것처럼, ‘요셉’의 형들도 같은 은 이십 냥에 동생을 팔아넘긴 것 역시 정해진 각본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저 우리 인생이 할 수 일이란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운명론자가 되어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맡기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학자 ‘브루그만’(Bruegger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나 계획과 함께, 또는 이들을 통해서, 또는 이들을 거슬러서 역사하신다.” 즉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책임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가롯 유다’는 하나님의 정해진 뜻과는 상관없이 응분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나 ‘요셉’이나 그 형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만 했을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사도는 지금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들입니다.
<요셉 이야기> 역시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의 심각한 결과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편애는 시기와 미움을 낳고 종국에는 살인에 버금가는 친족 유기라는 끔찍한 범죄에까지 이르는 것을 봅니다. 비록 살인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한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은 이십 년이 흐르도록 방치된 채 한 가정을 분열과 해체 직전까지 몰아갔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일차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화자는 먼저 ‘야곱’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주된 원인 제공자로서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편애가 문제였습니다. 만일 그가 여러 자식들 중에서 한 아들만 유난히 편애하지만 않았어도 형제들 사이의 갈등과 원한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야곱’ 역시 편애의 희생자라는 전력(前歷)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 염소 털과 형의 옷을 가지고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이, 이번에는 그의 아들들이 보여주는 염소 피와 옷을 보고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인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부모의 편애가 빚은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형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해 이십 년을 객지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뼈저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 명의 아들들 중에서 유독 ‘요셉’만을 편애함으로써, 이전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요셉’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이전에 그의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타의에 의해 형들을 떠나 이십 년을 객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한 가정을 향한 저주의 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습니까? 혹시 그가 책임 질 일은 없습니까? 그는 정녕 이 모든 일과 전혀 무관하게 살았습니까?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은 듯합니다. 화자는 ‘요셉’에 대해서 ‘야곱’에 대해서만큼 단도직입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서막을 통해서 ‘요셉’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친다든지”(2절하), 비록 아버지의 심부름이긴 하지만 “형들의 동정을 살피러 그들이 양을 치며 일하고 있는 먼 ‘도단’까지 채색 옷을 입고 온다든지”(14-17절) 하는 등의 일로 형들의 시기와 분노를 자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4절). 형들이 그를 결정적으로 죽이려고 모의하게 만든 것도 그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하던 당시 근동 사회에서 ‘요셉’이 들려주는 꿈의 내용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무례한 것이라 형들은 물론 그의 아비까지 분노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10-11절). 사실 그의 꿈은 훗날 진실로 하나님의 예언이었음이 밝혀지겠지만, 가족의 반응은 이 꿈의 성취 여부와는 상관없습니다. 화자는 ‘요셉’이 거짓말을 했다거나, 형들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했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언행은 다소 경솔하고 진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가 열일곱 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정도의 실수쯤은 얼마든지 지나쳐 버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의 형들은 이조차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요셉’의 형들의 책임이 가장 무겁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필자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비정함이나 잔인함에 있어 이들은 실로 ‘가인’의 후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가인’이 동생을 향한 살의(殺意)를 행동으로 옮겼다면, 이들은 살인 미수에 그쳤다는 점뿐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에 있어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인’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계획하고 수행했지만, 아홉 명의 형들이 한 동생을 죽이려고 모의한 적은 비단 <성경>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그 어디에도 전례를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멀리서 오고 있는 동생을 보고 죽이려고 했고, 그들의 아비에게는 짐승이 그를 물어갔다고 거짓을 말할 참이었습니다. 다행히 가장 맏형 ‘르우벤’의 개입으로 ‘요셉’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동생이 도착하자말자 그를 때려 눕혀, 그 꼴 보기 싫은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 속으로 집어 던져버립니다. 그리고는 살려 달라 애원하는 동생의 절규를 들으면서 구덩이 어귀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다가, 때마침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그를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겨버렸습니다. 그들은 동생을 생물학적으로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죽음을 맞게 한 셈입니다.
무엇이 ‘가인’과 이들 ‘가인’의 후예로 하여금 종족 살인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했을까?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창 37:11, 행 7:9). 이것이 그 모든 죄악의 뿌리였습니다. <잠언서>는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잠 14:30), <야고보서>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약 3:16)고 말합니다. “시기심”이라는 뿌리는 필경 “미움”의 싹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화자는 세 번에 걸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4, 5, 8절). 나무의 싹은 그 상태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 이야기>에서나 <요셉 이야기> 모두에서 그 열매는 “살인”(또는 살인 모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시기심이 그를 삼키기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그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형들은 시기심을 억제하기는커녕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으며, 그를 죽이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혹시 내가 시기하는 동료는 없습니까? ‘가인’과 ‘요셉’의 형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일입니다. 나를 시기하는 동료는 없습니까? ‘요셉’을 바라 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마지막으로 <요셉 이야기>가 나의 책임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장차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아마도 지금 당장은 대답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말대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드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개척자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계획하고 시도해 보고자 할 때, 우리는 열심히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그 일이 커고 중요할 때에는 우리의 간구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실패가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패가 더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획했던 일이 실패로 끝날 경우 자칫 그 일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으로 결론내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실패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없던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모두 실패한 자들입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듣고 돌이켜 회개한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실패나 성공의 의미는 우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일, 즉 진정한 성공은 우리가 원래 계획했던 일이 성공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만,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성령 충만을 우리에게 주실 주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로 하여금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뜻과 함께, 또는 우리의 뜻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신비하게도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사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게 하신” 구체적인 예가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2. ‘요셉’의 인격적 특징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도 토의해 봅시다.
3. “하나님은 나와 함께, 또는 나를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나의 의지에 반하거나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4.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결단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나의 이야기>에서 다음 한 주의 삶이 어떻게 한 부분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각오를 피력해 봅시다(구체적으로).
제 42과: 다말과 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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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과 유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7:2상)
“유다와 다말” 이야기도 “디나의 수치”(창 34)만큼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감추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후자(後者)가 종교를 앞세운 이스라엘의 야만적 폭력을 다루고 있다면, 전자(前者)는 명예를 앞세운 거짓과 위선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 모두 이스라엘과 이방인 간에 벌어진 것으로서, 여인이 이야기의 핵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전자가 이방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면, 후자는 이스라엘 여인이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에서,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창 26장)에서처럼,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경외하고 신뢰함에 있어서는 이스라엘보다는 오히려 이방인 한 수 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볼 때,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분명 문학적 일탈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디나 이야기>나 <이삭과 아비멜렉 이야기>가 <야곱 이야기>에 포함될 수 있는 신학적 당위성이 있는 것만큼 본문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과연 본문이 <요셉 이야기>에 포함됨이 마땅한가? 그렇다면 어떤 문학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가? 즉 어떤 설화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족장 이야기>의 다른 내용들과 어떤 신학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더 나아가 <창세기> 전체의 주제와는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들 질문들이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요셉 이야기>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창세기> 내에서 그 단락과 범위가 뚜렷한 한 편의 문학 단위로서, 전체적으로 여섯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 하지만 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요셉 이야기>와는 내용 상 아무 상관도 없어 보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순조로운 진행에는 오히려 본문이 없는 편이 더 낫습니다(즉 37장은 39장으로 더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38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의 축복”을 담고 있는 49장이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 필요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처럼 일견 불필요하게 보이는 일단의 에피소드들이 <요셉 이야기>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야곱 이야기>에서도 발견한 바 있습니다. 예컨대, <야곱 이야기>의 열 세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고 있는 “이삭과 블레셋” 이야기(26장)나 이와 교차대구를 이루는 열두 번째 에피소드인 “디나와 히윗” 이야기(34장)는 <야곱 이야기>의 전체 구성에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해당 본문의 문학과 역사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참고. 28과 & 29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에피소드는 <야곱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에 독특한 기여를 하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도 <요셉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선 “다말과 유다” 이야기가 느닷없이 이곳에 등장함으로써 일종의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볼 때, <요셉 이야기>의 이어지는 내용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오게 되는 과정이라든지 또는 ‘가나안’에 남아있는 그의 아버지 ‘야곱’이나 다른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인데, 화자는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8장은 ‘요셉’이 그의 가족으로부터 상당히 오래 동안 동안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유다’는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며, 이들이 장성하여 결혼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38장이 보여주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문학적 기능으로 볼 때, 본문은 ‘요셉’ 가족사(家族事)에 대한 음악적 “대위법”(對位法)에 해당하며, 대위법(對位法)이란 2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동시에 결합시키는 작곡상의 기법으로 “대위법”이라는 말은 “한 점과 다른 한 점”(point counter point)에서 생긴 것이며, 여기서 “점”은 “선율”을 가리킨다. 따라서 선율 대 선율의 관계가 바로 대위법이다.
수사학적(修辭學的) 기능으로 보자면 흔히 “예변법”(豫辨法)적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리한 독자라면 본문을 통해서 <요셉 이야기> 전체에 대한 보다 넓은 조망(眺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등에 대해서 예견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분명하고 뚜렷한 예를 한 가지 들 수 있겠습니까? 다음 두 장면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5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38:25-26)
32그의 채색 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37:32-33)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사필귀정(事必歸正) 내지는 하나님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대가로 자식들로부터 속임을 당하게 되며, ‘유다’ 역시 이전에 아버지 ‘야곱’을 속인 대가로 며느리 ‘다말’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의 경우 모두 등장인물들이 속임수에 사용한 것은 염소와 옷이었습니다.
이 두 장면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좀 더 일반화 시켜보자면, 불의(不義)는 바로잡아지며, 과실을 저지른 자는 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은(38:26) 훗날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장면과 좋은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신학적 주제는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선택과 유기”(選擇과 遺棄)에 관한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항상 형제들 중 나이 어린 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보다는 ‘아벨’, ‘에서’보다는 ‘야곱’, ‘르우벤’보다는 ‘요셉’, 그리고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을 선호하신 것처럼, 이곳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유지되고 있는 사례가 두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다’의 세 아들 ‘엘’과 ‘오난’과 ‘셀라’ 중에서 막내만이 살아남는 것을 볼 수 있으며(3-11절), ‘다말’이 쌍둥이 ‘세라’와 ‘베레스’를 해산할 때에도 ‘세라’의 손이 먼저 나왔으므로 그를 형으로 불러야 할 것이나, 실질적으로는 아우 ‘베레스’가 형의 손을 들이고 먼저 태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27-30절). 그리고 ‘베레스’가 훗날 ‘다윗’의 조상이 되며, 다윗 또한 ‘이새’의 막내아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 자가 적통을 이어간다는 <창세기>의 모티브는 당장 <요셉 이야기> 내에서도 두 번에 걸친 ‘요셉’의 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은 물론 그의 아비조차도 요셉에게 머리를 숙이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이 두 번의 꿈은 결국에는 그 꿈이 성취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강력한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가 <요셉 이야기>의 다른 내용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대목은 없습니까? 두 인물 ‘야곱’과 ‘유다’를 비교해 봄으로써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을 때 두 사람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땅을 치며 통곡했던 것에 비해(37장), ‘유다’가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38:7-10) 어떻게 했는지에 관해서 화자는 의도적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냉혹한 그의 일면을 보여주려 함이 아닐까요? 사실 ‘르우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팔면 돈이 된다는 제안을 한 자도 ‘유다’였습니다. 어쩌면 ‘요셉’의 죽음에 관해서 그들의 아비 ‘야곱’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꾸미는 일에도 그가 주도적으로 간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슬픔을 표하기는커녕, 나중에 며느리 ‘다말’을 불태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같은 <요셉 이야기> 내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유다’를 만나기도 합니다(44:18-34). 즉 훗날 이집트에서 그들의 또 다른 이복동생 ‘벤야민’을 볼모로 두고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유다’는 ‘요셉’의 죽음으로 큰 슬픔을 당한 아버지 ‘야곱’에게 다시 한 번 상심을 줄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대신 인질로 잡혀 있겠다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며느리가 행음했다하여 죽이려 했으나 다말의 항변을 듣고 충격에 빠져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바 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38:26). 결국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이처럼 달라진 ‘유다’의 모습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의 각 <족장 이야기>는 주인공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점 ‘르우벤’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의 첩과 간통을 할 정도의 패륜을 저질렀던 그가 ‘요셉’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형제들을 설득하며 아버지를 배려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 자신은 어떻습니까? 형들의 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던 열일곱의 철부지였던 그가 복수가 아닌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는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요셉 이야기>는 그 제목이 함축하고 있듯이 “요셉의 족보”가 아니라 “야곱의 족보”를 다루고 있으므로, 이런 점에서 본다면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38장은 전체 이야기에서 전혀 무관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는 단순히 ‘요셉’ 개인이 아니라 ‘야곱’의 가족사(家族事)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 이야기>가 ‘요셉’이 아닌 가족의 다른 구성원을 다룬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은 본문이 <창세기>의 주제와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본문은 땅과 후손과 축복을 다루고 있는 “아브라함 언약”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38장에서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후손”에 관한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代)를 이을 자손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유다’의 장자 ‘엘’은 일찍 죽고 없고, 그의 동생 ‘오난’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가야 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허나 정작 과부 ‘다말’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갖고 싶어 합니다. 두 남편을 불의의 죽음으로 먼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시동생 ‘셀라’와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반대로 좌절을 겪자 이번에는 그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탄생시키고 맙니다. 과연 ‘다말’의 이런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신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한 이방 여인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결단과 의지는, 윤리∙도덕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인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말’은 38장 에피소드의 여주인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멜기세댁’(14장)이나 ‘아비멜렉’(26장)처럼, 이방인으로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분별해 내고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 여기려 했던 영웅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아브라함 언약”이 ‘다말’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점에서 ‘다말’은 ‘룻’의 영적 조상이자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훗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며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룻 1:16). ‘여리고’의 기생 ‘라합’ 역시 같은 반열에 속하는 자로서, 이들 세 여인이 모두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자료와 편집.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이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과는 다른 구전 형태의 양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야훼 자료>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웨스터만’(Westermann) 등은 이런 견해에 반대를 표하면서 후대의 첨가 또는 삽입으로 보고자 합니다만, 그 근거는 다소 희박합니다. 본문을 후대의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보는 데에는, <요셉 이야기> 내의 다른 본문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데 실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삽입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연대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곳이 가장 적절한 위치로 보이며, 문맥상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더욱 본문의 자료를 <야훼 자료>로 인정함에 있어 무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유다의 결혼(1-5절)
에피소드의 첫 번째 단락은 ‘유다’와 ‘가나안’ 여인의 결혼, 그리고 세 아들의 탄생에 관한 화자의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1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1-5절)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선 이 결혼에 관한 화자의 입장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듯싶습니다.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만, ‘유다’가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 동침하였다”고 진술함으로써 이 결합이 정식 결혼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신부의 이름조차 거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설사 이 결혼이 부모의 승인 하에 이루어진 정식 결혼이었다고 해도, <오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아들 ‘이삭’이 ‘가나안’ 여인과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24:3), ‘이삭’과 ‘리브가’도 그들의 아들 ‘에서’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그래서 ‘야곱’이 이런 결혼은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27:46-28:1). 그렇다면 ‘야곱’은 아들 ‘유다’의 결혼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반대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결혼을 강했습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편애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므온’ 역시 이방인 여인과 결혼했으며(46:10), ‘요셉’ 또한 이집트의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41:45). 결국 ‘유다’의 결혼은 다른 형제들의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한 예고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8장은 적어도 22 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연대 계산을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37:2; 41:46-47; 45:6. 즉 요셉은 17 세에 이집트로 와서(37:2), 30 세에 총리가 되었으며(41:46), 그 때부터 7 년 동안의 풍년과(46:47), 2 년 동안의 흉년이 있은 후(45:6),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이 <요셉 이야기>의 다른 에피소드들과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유다’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직후에(“그 후에”, 1절상) 다른 형제들을 떠나 ‘헤브론’에서 ‘아둘람’으로 내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헤브론’ 은 해발 3040 피트에 위치한 도시로서 ‘가나안’ 남부 지역에서는 지리적으로 가장 높은 지역에 하당하므로, 이곳으로부터 북서쪽의 ‘유대’ 구릉지의 ‘아둘람’ 으로 내려갔다는 표현은 적절해 보입니다(참고. 삼상 22:1; 믹 1:15).
‘유다’가 왜 가족을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가 사는 근처로 거처를 옮겼는지 화자는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일로 아비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피신이었을 수도 있고, 충동적인 행동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의 행동 역시 충동적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즉 그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보고(ha;r, 라아), 취하여 동침하니”(jq'l, 라카흐)는 <창세기>에서 불법적이고 탐욕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친숙한 표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6; 6:2; 12:15; 34:2; 삿 14:1-2). 화자는 ‘유다’의 행동을 이런 방식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또한 여자의 이름 대신에 그녀의 아비의 이름만을 거명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 자가 나중에 ‘다말’을 ‘유다’에게 소개해 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나는 과정은 짧고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3-5절). 첫 아들 ‘엘’(r[)은 “지키다”는 의미이며, 둘째 아들 ‘오난’(@n:/a)은 “강하다”, “힘세다”를 의미하며, 막내아들 ‘셀라’(hl;v)는 “청원”, “요청”의 의미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유다’는 ‘아둘람’에서 다시 ‘거십’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동일한 이름으로 <성경> 어디에도 이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여호수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나안’ 중부의 ‘악십’과 동일한 지역일 수도 있습니다(수 15:44).
2. 다말의 결혼(6-11절)
두 번째 단락은 ‘다말’(종려나무)을 이야기의 여주인공으로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나안’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아마 ‘아둘람’이나 또는 ‘거십’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하겠습니다. ‘유다’는 첫 아들 ‘엘’을 위하여 이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6절)
‘유다’가 며느리를 직접 선택하고 있는 이 장면은 흥미로운 데가 있습니다. 즉 자기는 멋대로 여자를 취하여 결혼을 했음에도, 그 자유를 아들에게까지 적용해 주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Hamilton).
아무튼 장자 ‘엘’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화자는 그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7절)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를 제거하셨다는 것으로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엘’은 <창세기>의 여러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다른 많은 비운의 첫 아들(‘가인’, ‘이스마엘’, ‘르우벤’, 등)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정확하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악하다고 해서 집단이나 개인을 이처럼 직접 죽이신 일은 “대홍수”나 “소돔과 고모라 사건”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엘’은 하나님께서 직접 죽이신 첫 인물로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죄가 심각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의 죄목을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 대목이 화자의 관심사는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핵심은 ‘엘’은 죽어 마땅하지만, ‘다말’은 이와 무관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엘’의 죽음과 관련해서 화자의 의도적인 침묵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유다’가 슬퍼하고 애곡했다는 언급이 없는 것이,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 ‘야곱’이 보여주던 행동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참고. 36:34-35). 여기서 침묵의 역설은 무엇입니까?
아마 ‘유다’에게 더 큰 관심사는 가계를 잇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관례에 따라 둘째 아들로 하여금 장자의 기업을 무르게 할 참입니다. 즉 죽은 형을 대신하여 동생이 미망인 형수와 결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8절)
이 장면은 썩 마음에 내켜하지 않는 둘째 아들을 설득하고 있는 아비의 은근하면서도 강압적인 모습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아우의 본문을 다하라”고 하는 것이나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는 명령 등이 불의의 죽음을 당한 형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법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왜 ‘유다’는 여기서 다말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지 않을까? 왜 그는 아들에게 “‘다말’과 결혼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형수에게로 들어가라”고 다소 애매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꺼림직 해 하는 둘째 아들의 기분을 살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난’이 형수와의 결혼을 싫어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고엘’ 법”에 따르면, 죽은 형을 대신하여 동생이 미망인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은 물론 자식에게 물려줄 모든 유산마저도 형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난’은 이처럼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9절)
형수와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성관계는 가졌으나, 형수가 임신하는 것이 싫어 자의적인 피임법을 선택했습니다(그는 단순히 즐기기만 했을까요?). 이 구절이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바는, 그가 이렇게 한 것이 한 번이 아니고 매번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10절)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다”는 다른 말로 “그가 여호와에게 반항하다(대들다)”에 가깝습니다. 사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대위임령”(1:28; 8:17; 9:1, 7), 즉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우습게 여기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언약 속에 “동성애”라든지 ‘오난’이 시도하고 있는 자의적(自意的)인 “피임법”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오난’의 행위가 특별히 괘씸한 것은 <족장 이야기>에서 후손과 관련한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17:6, 20; 28:3; 35:11; 참고. 15:5; 22:17; 26:4; 32:13)을 무위(無爲)로 돌리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38:8-9절 사이에서 후손 즉 “씨”가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오난’의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했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내버려 두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유다’가 보인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다시 한 번 침묵의 역설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슬픔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선 듯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막내아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11절)
두 아들이 죽었으니 이번에는 세 번째 아들을 며느리와 결혼시켜야 했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로 하여금 친정집에 가서 막내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것을 두고 ‘유다’가 “고엘의 법”을 계속 지킬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으나,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유다’를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의 명시적인 진술이나 의도적인 침묵에 따르면, ‘유다’는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슬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연속적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나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3. 다말의 임신(12-19절)
지금까지 ‘다말’의 역할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다’와 그의 두 아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거나 따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동한 경우란 시아비의 말을 따라 친정 아비 집에 “가서”, “머문” 것이 전부입니다(11절하). 그러나 이 장면에서 ‘다말’은 완전히 딴 사람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타인이 저지르는 불의(不義)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피해자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격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유혹하기 위하여 그녀가 취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은 도발적이다 못해 파괴적이기까지 합니다:
12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당시 창녀의 복장이 따로 있었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유다’에게 ‘다말’의 복장은 행동은 창녀로 보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고혹적이고 도발적이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이를 보고 걸려 넘어가고 맙니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15절)
며느리에게 청상과부로 오랜 세월을 수절(守節)하도록 강요했으면서 정작 자신은 성적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다말’의 유혹에 걸려 넘어가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희극적이기까지 합니다:
16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16-18절)
‘유다’는 ‘다말’을 보자말자 단도직입적으로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편에서 보자면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구약>은 창녀와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매우 어리석은 짓으로 규정하고 있으며(잠 7), 특히 며느리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패륜적인 행위로서 율법은 이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20:12). 이렇게 볼 때 화자는 <구약>의 기준에 서서 ‘유다’를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장면에서 끊어졌던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대화가 이곳에서 다시 재개되고 있는데(16-18절), 대화의 분위기와 내용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상거래 하듯 합니다. 은근한 사전 뜸들이기를 모두 생략하고 ‘유다’는 단도직입적으로 ‘다말’에게 잠자리를 같이 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가 하면, ‘다말’은 이에 응대하면서 ‘유다’에게 대가와 담보물을 요구하는 등, 당시 근동 지방의 전형적인 상거래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담보물은 일종의 신용카드에 버금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흥정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행동은 약속이나 한 듯 일사천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유다’가 담보물을 ‘다말’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가고”, ‘다말’이 “임신하다”는 표현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 결혼 이후 지금까지 오직 ‘유다’의 후손을 갖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던 ‘다말’의 목적이 이렇게 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속임수를 통해서 말입니다.
4. 유다가 다말을 찾음(20-23절)
네 번째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유다’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신의와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찬구 ‘아둘람’을 통해서 이전에 ‘다말’에게 약속했던 염소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Gunkel & Westermann):
20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20-23절)
그러나 화자가 보여주려는 ‘유다’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로 해학적입니다. 무엇이 해학적입니까? 진실로 지켜야 할 중대한 약속, 즉 며느리 ‘다말’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으면서, 창녀와의 하찮은 약속은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그의 위선적인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막내아들이 장성하면 며느리와 결혼시켜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만, 그가 충분히 장성했음에도 전혀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반면 창녀에게 염소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가서 준해주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통해서 전달하려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수치”(zWB, 부즈)를 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23절). 그가 창녀와 관계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그를 조롱할 것이라는 두려움인 것이지요. 그의 친구도 ‘유다’의 이런 심정을 알고 있는 듯, 동네 사람들에게 단순한 길거리의 창녀가 아니라 “성전의 창녀”(hv;deq, 케데샤)를 찾고 있다고 완곡어법을 사용하면서 수치를 피해가려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들은 당시 이방 신전에서 종사하던 “여 사제”로 불리던 자들일 것인데, 평범한 거리의 창녀들보다는 급이 다르며, 보다 존대 받던 사회적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보이는 위선적인 행태 중의 하나는 추악하고 부끄러운 일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담그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그 일에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고고한 체 하는 것이지요. 지금 ‘유다’의 모습이 영락없이 이런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을 명예를 중시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것이 화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유다’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는 것입니다만(23절상),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삼 개월 후면 모두가 알게 될 일입니다(참고, 24절).
5. 다말의 伸寃(24-26절)
이야기는 이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내 ‘다말’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유다’로부터 잘못했다는 고백을 받아내는 장면이 바로 그 절정입니다:
24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24-26절)
과연 석 달 후에 ‘유다’는 ‘다말’이 “행음”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24절). 이 정보는 분명 사실입니다. ‘다말’은 실질적으로는 과부이지만, 법적으로는 ‘셀라’의 약혼녀입니다. 따라서 다른 어느 누구와도 성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사실상 행음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비록 불공정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며느리를 처단함에 있어 법적으로 아무 하자는 없다 하겠습니다( 22:23-24). <신명기>는 ‘다말’의 경우처럼 정혼한 자가 간음을 행했을 때 돌로 쳐 죽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신 22:21). 그러나 “불로 태워 죽이는” 행위는 도를 넘은 것입니다. 다만 이 규정은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레 21:9).
위기의 순간을 맞아 ‘다말’은 비장(秘藏)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불의하고 불공정한 법 집행자 시아버지에 맞서 진실을 밝힙니다(25절). ‘유다’는 마침내 ‘다말’의 무죄를 그리고 자신의 유죄를 받아들입니다(26절).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에피소드가 전체 <요셉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를 예고하고 대변해주는 순간입니다. 어떻게요?
6. 후손의 탄생(27-30절)
이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의 결론이자, 또 다른 관점에서 <요셉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를 확대 내지는 이어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27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27-30절)
신학적 주제라 함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쌍둥이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의 탄생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25:24-26). 두 경우 모두 쌍둥이 형제는 서로 먼저 나오려고 경쟁하고 있으며,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창세기>의 오랜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경우에서 보면 먼저 손을 내민 자는 ‘세라’로서 그가 형이 되어야 마땅하나, 그 손을 도로 들이며 ‘베레스’가 먼저 나옴으로써 모두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페레스’가 의미하는 바가 ‘페레츠’($r<P), 즉 “헤치고 나오다”로서 그의 탄생과 관련한 극적인 사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한편 ‘세라’(jr'z, 제라흐)는 분명치는 않지만, “빛이 비춤” 또는 “여명”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교훈과 적용
1. 유다: 사람의 아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모범 답안은 “예수님을 보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말과 유다 이야기>에서 인간의 또 다른 모습, 즉 또 다른 의미에서 “가장 인간적인”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다름 아닌, 이야기의 한 축을 이끌어가고 있는 남자 주인공 ‘유다’입니다. 화자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말고(37장) 왜 느닷없이 ‘유다’를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 다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39장) ‘요셉’이 다시 등장하고 있으므로 차제에 두 사람을 비교해 보는 것도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즉 시험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약속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지금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또 한 사람은 ‘가나안’에서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강제로 팔려 왔으며, 또 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여자의 “성적 유혹”(性的 誘惑)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유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은 인생에서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만, 다른 한 사람은 오히려 더 큰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이 유혹을 거부할 자유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각기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극과 극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할 수 있다면, ‘유다’는 철저한 “인간의 아들”로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유다’를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으로, 그리고 ‘요셉’을 광야에서의 예수님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다’가 “성적 유혹” 앞에 걸려 넘어졌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을 가지고 “인간의 아들”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를 이렇게 부를 만한 더 많은 훈장들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별명은 그의 인격을 총체적으로 대변해주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보이스’(James M. Boice) 목사님은 ‘유다’의 잘못을 세 가지로 지적하면서, 각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죄질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간파하고 있습니다.
금지된 결혼. 우선 그의 첫 번째 훈장은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은 ‘유다’가 ‘가나안’에 간 것이 “그 때 이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만(1절),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추측컨대, ‘요셉’의 일로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를 피해 옮겨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친구들을 사귀었고, ‘수아’라 불리는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이 결혼이 특별히 잘못된 것입니까? <족장 이야기>에서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에 대해서 화자나 족장들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이곳에서도 화자는 ‘유다’가 결혼한 상대가 누구인지 언급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듯 단순히 “‘수아’의 딸”이라고만 소개하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여자가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수아’의 딸이 죽었다”라고만 언급하고 있습니다(12절).
그리고 이 결혼은 부모의 사전 승인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유다’의 행동과 관련한 세 개의 동사가 이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보고, 취하여, 동침하니”(2절). 우리는 이 세 개의 연속적인 행위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조(元祖)가 누구인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원죄(原罪)의 시조 ‘하와’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유다’는 ‘하와’를 따랐으며, 이후 “대홍수” 시대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던 바를 따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지라”(6:2).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법인데, 훗날 ‘삼손’은 적어도 결혼의 문제에 관한 한 ‘유다’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유다’의 결혼 생활은 과연 행복했을까?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두 아들과 아내를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두 아들이 죽은 것은 자연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다고 화자는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7, 10절) 그의 가정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합니다. 요약하자면 ‘유다’가 여자를 바라보는 태도는 ‘삼손’과 마찬가지로 충동적이었고, 즉흥적이었으며, 말초적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런 결혼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오경>에서처럼 빈번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이점에 있어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더 이상의 군소리가 필요 없는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개의 멍에를 두 소가 메고 갈 때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이성교제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데이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친구로 그냥 사귀는 것인데... 전도도 해야 하고...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이미 결혼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지 않는 자와 이혼해야 합니까? 특히 그 배우자가 나의 신앙을 이유로 핍박하고 괴롭히는 데도요?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버린 약속.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한 자가 사람들 앞에서 신실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라면, 사람과의 약속이나 언약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유다’의 두 번째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며느리 ‘다말’에게 했던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그 약속을 의도적으로 무시했거나 또는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가 받을 두 번째 훈장은 직무유기 또는 책임회피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내용인 즉은 이러합니다. 첫 아들 ‘엘’이 무슨 잘못인지 몰라도 하나님의 진노로 죽은 후에(7절), ‘유다’는 둘째 아들 ‘아논’을 ‘다말’과 결혼시켜 대(代)를 잇게 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마저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을 자초하고 맙니다(10절). ‘아논’이 형수를 통해서 형의 아들을 갖는 것을 싫어하여 자의적인 피임을 선택했기 문입니다(9절). 화자가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죽이셨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10절), ‘‘수혼’’(嫂婚)은 당시 사회적인 관례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법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수혼’’(嫂婚)이란 남편의 형제를 의미하는 라틴어 ‘레비르’(levir)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혼한 남자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 생존한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해야 하며, 또 이때 출생한 자녀는 죽은 형제의 자녀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관습은 유대인을 포함해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여러 민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이 법을 함께 거주하고 있는 형제에게까지 적용시키고 있습니다(25:5-10). 그러나 이 법이 <성경> 속의 명문 규정으로 정착된 것은 <족장 시대> 이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아들의 죽음에 대한 ‘유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막내아들 ‘셀라’로 하여금 대를 이어갈 것처럼 보입니다. 며느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있어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하니’’(11절상).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말’은 시아버지의 이 말을 진정성이 담긴 약속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곧바로 이어서 ‘유다’의 의도는 정 반대였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막내마저 죽을까 두려워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버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11절하). 사실 그는 며느리를 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둘째 아들처럼 ‘‘수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둘째 아들처럼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닌가요?
‘유다’가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또는 ‘‘하나님 때문에 오는 두려움’’입니다. 두 아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버렸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잘못된 방식을 택했습니다. 두려운 하나님의 보호 속으로 피신하는 대신 오히려 거부하고 저항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자고 제안하던 것과는 딴 판입니다(21:22-23).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것과도 대조가 됩니다. 그리고 ‘‘정복전쟁’’ 당시 연전연승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두려워 하나님의 보호를 자청해왔던 ‘기브온’의 선택과도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참고. 수 9장). ‘유다’가 선택한 방식은 ‘아도니세덱’을 비롯한 ‘가나안’의 여러 왕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대적하고 저항하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권위에는 굴복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참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두 아들이 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고민한 흔적도 없고, 하나님에게 물어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전에 그가 이방 여자와 결혼할 때에 하나님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나님에게 물어보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믿고 따랐습니다. 결과는 ‘다말’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순리를 역리로. <로마서>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직무유기나 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고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범하게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롬 1:21-32). ‘유다’가 받게 될 세 번째 훈장은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에서 오래 살면 살수록 더욱 이방인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방인보다 더 이방인 같은 행동을 서슴없이 행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월이 한참이나 흐르도록 ‘유다’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 ‘다말’은 ‘셀라’의 아내가 되어 그를 통해서 자식을 낳는 대신,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서 스스로 아이를 갖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녀는 우선 과부의 복장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또는 신전 창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에나임’ 마을 어귀(또는 신전)에 앉아 ‘유다’가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14절).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유다’가 그녀를 보고 창녀로 알고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청합니다. ‘다말’은 화대(花代)를 요구하고, ‘유다’는 염소를 약속합니다. ‘다말’이 담보물을 요구하자, ‘유다’는 그 보증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건네줍니다(요즘으로 치자면 인감도장을 주었다고나 할까요). 일을 끝낸 후 ‘유다’가 돌아가 친구를 통해서 약속한 염소를 주려고 그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더 이상 공개적으로 그녀를 찾는 일을 그만두게 합니다. 그가 창녀와 관계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23절). ‘다말’이 일반 창녀의 신분을 하고 있었는지 또는 당시 흔하게 볼 수 있던 신전(神殿) 창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유다’가 이런 여자와 성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분명 금기시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의도적으로 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줄도 알면서 말입니다.
사필귀정. 그러나 그가 숨기고 싶은 사실은 이내 드러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삼 개월 후 ‘다말’의 배가 불러 온 것이지요. 과부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게 뭐가 잘못이란 말입니까? 남편이 죽고 없으니 새 결혼을 한다 해서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과부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는 그렇지만, 법적으로는 ‘셀라’와 정혼한 사이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순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 돌로 맞아 죽임을 당할 운명입니다.
이 소식이 시아버지 ‘유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다말’을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유다’의 냉혹하고 잔인한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법 집행관이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는 지금 다른 모습을 보여줌이 마땅할 것입니다. 즉 ‘셀라’가 장성하면 결혼시켜 주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떠올리며, “아, 불사. 내 불찰이었구나.” 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줌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회는커녕 며느리를 불로 태워죽일 생각을 하고 있으니 처벌치고는 과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이지요.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자신의 가증스러운 범죄를 들었을 때 ‘다윗’ 왕이 보인 반응도 이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이래저래 체질적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나는 어떻습니까?
마침내 ‘다말’이 죽음 일보 직전에 입을 엽니다. 비장(秘藏)의 카드를 꺼내든 것입니다. ‘유다’가 화대(花代)에 대한 담보로 맡겨 두었던 세 가지 증거물을 그에게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서 이야기는 절정을 맞이하면서 극적인 반전(反轉)을 이루고 있습니다. 피의자가 재판관을 향해서 진실, 즉 재판관의 비리와 치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25절). ‘유다’는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충격에 빠지는 듯 했으나, 입술을 깨물고는 ‘다말’의 무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26절). 피의자가 재판관으로, 재판관이 피의자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바로 그것입니다.
2. 다말: 믿음으로
이방 여인. <구약>이 천지창조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다면, <신약>은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마 1:1-17). 이 족보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네 여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다말’입니다. 두 번째 여인은 그 유명한 ‘여리고’의 기생 ‘라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압’ 여인 ‘룻’입니다. <구약>은 이 여인의 이름을 딴 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그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지만 “우리야의 아내”로 소개하고 있는 ‘히윗’ 족속 ‘밧세바’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지만 족보에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만, 예컨대, <창세기>의 대부분의 족보에 여인의 이름은 없습니다(창 5, 10, 11, 36, 46). 다만 <창세기> 4장에서 예외적으로 ‘라멕’의 아내들과 딸들을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계보는 가인의 후예들에 관한 것입니다. 기타 <역대상>(1-4장), <에스라>(2, 8, 10장), <느헤미야>(7, 11, 12장), <민수기>(3장), <룻>(4장), 그 어디에도 여자의 이름은 없습니다.
더욱 이례적인 것은 이들 여인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네 사람 중 셋은 자신들이 속해 있던 당시 사회의 윤리∙도덕적 잣대로써도 지탄받아 마땅한 죄 많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굳이 예수님의 족보에 여인이 포함되어야 한다면, ‘사라’나, ‘리브가’나 ‘레아’ 등과 같은 족장의 아내들이라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대도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성경>이 어떻게 이런 추잡한 여인들을 거룩한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세 여인은 몰라도 ‘다말’을 포함시킨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노릇입니다. ‘다말’은 ‘라합’처럼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밧세바’의 경우처럼 최고 권력자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잠자리를 같이 한 것도 아닙니다. 또는 ‘룻’처럼 어려운 가계를 꾸려가기 위해 ‘보아스’의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법적으로 “가계 무를 자”로서 ‘룻’과 결혼을 하드라도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라합’은 ‘다말’의 쌍둥이 아들 중 하나인 ‘베레스’의 후손인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습니다(마 1:3-6; 룻 4:18-21). 그리고 ‘밧세바’는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다말’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녀는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신분을 감춘 상태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마치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가계를 잇기 위해 그를 취하게 한 후 차례로 관계를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말’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다말’이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말’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이방이었거나 죄인이었기 때문에 포함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방인이었고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될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가 구원의 족보 속에 포함될 수 있었을까요?
믿음으로. <신약>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신약>은 ‘다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라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를 통해서 일말의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유명한 믿음의 장(章)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라합’은 ‘여리고’의 모든 주민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며, 성문을 걸어 잠그고 저항하고 있을 때, 반대로 하나님의 품속으로 도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녀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과의 전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호와 화평을 선택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녀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수 2:9-13).
그녀는 다른 주민들이 보는 것과 꼭 같은 것을 보았고, 꼭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무엇이 ‘라합’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싸우게 하는 대신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며 피신하게 만들었을까? “믿음”입니다. 어떤 종류의 믿음을 말합니까?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룻’과 ‘밧세바’도 이런 믿음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된 것일까요? 그렇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모압’ 여인 ‘룻’은 남편을 잃은 후 시어미 ‘나오미’의 권유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새 남편을 만나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헤세드’의 선택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헤세드’의 선택이란 현실적으로 볼 때 어리석은 선택을 말합니다. 하지 않아도 될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선택을 말합니다. 현실의 삶에서 지금까지 그녀가 보고 체험한 하나님은 실망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룻 1).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큰 손해를 자초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믿었습니다. 만일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만, 그녀 역시 두려움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룻’ 역시 ‘라합’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다말’은 어떻습니까? 그녀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을까요? ‘아브라함’과 ‘야곱’의 언약이 가리키고 있는 땅과 후손과 축복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다말’의 믿음에 대해서 그 어떠한 언급도 찾을 수 없습니다만, 그녀의 행동은 이를 증거하고도 남습니다. 그녀는 약속 밖의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아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처럼 땅에 헌신짝처럼 내 팽개친 하나님의 언약을 ‘다말’은 선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역시 ‘헤세드’의 선택이라 해야 할까요? ‘라합’이 현실적인 손실을 감수했다면, ‘다말’은 천륜(天倫)에 반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말’은 오히려 ‘유다’를 조롱하고 정죄했습니다. ‘유다’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38:26). ‘유다’의 고백인 즉은 ‘다말’이 자기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윤리∙도덕적인 선택이 아니라 신학적인 선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선택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드는 영예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의 족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그 속에 포함될 수 있었습니까? 나의 영적 부모는 누구였습니까?
3. 하나님: 오직 은혜로
일을 아니 할지라도. 필자가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하던 때였습니다. 거의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한 부부가 과일을 사들고는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그곳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롭고 적적해서 처음 한 동안 그 사람들이 오는 것이 반가웠습니다만, 점차 갈수록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에 조용히 좀 쉬고 싶은데 우리의 그러한 기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찾아오는 그들의 무례함이 싫었고, 또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상식을 가진 자라면, 그리고 필자처럼 “의로운 지성인”으로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라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그리스도들인 스스로가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들렸습니다. 필자는 기독교란 참으로 편리한 종교로구나 생각하면서 그 부부와 종종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이란, 한 직원이 출근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쌓은 실적도 아무 것도 없는데도 매달 빠뜨리지 않고 월급을 지급해주는 정신 나간 사장님과 같았습니다. 그 직원의 입장에 보자면 그야말로 고맙기 그지없는 사장이겠지만, 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일만하는 동료 직원들에게는 불공평하기가 짝이 없는 사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라면 누가 이런 회사에 근무하고 싶겠습니까? 이런 회사는 게으른 자의 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런 천국과도 같은 회사가 있다고 합니다. 현대 자동차 영업부에 근무하는 한 친구가 아주 화가 나서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차 한 대 팔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뛰어 다니는데, 한 달 내내 차 한 대 팔지 않고도 월급은 자기와 비슷하게 꼬박꼬박 타가는 동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노조(勞組)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오히려 비웃기까지 합니다. 누가 자기더러 열심히 차를 팔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회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회사의 사장님은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자 원칙 아닙니까? 그리고 무엇인가 잘못했으면 응분의 대가를 받게 해야만 조직이나 나라나 할 것 없이 질서와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강변했던 것이지요. 당신이나 잘 믿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평을 하는 자는 필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이런 것입니다. 그 힘든 “모세의 율법”을 자신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요해 놓고서는, 지옥 불을 태울 쓰레기에 불과한 저 이방인들에게는 그저 아무 값없이 오직 은혜로 구원을 주신다고 하니(엡 2:8-9), 역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정의 자체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용돈 한 푼 주면서도 집안 청소를 시킨다든지 차를 씻게 하는 등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면서, 구걸하러 온 거지에게는 아무 군소리 없이 선뜻 거금을 던져주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불합리가 필자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아니 감동시켰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참석한 성경 공부에서 필자는 다음 구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바로 그 놀고먹는 회사 직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챙겨주는 사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필자가 그 부부와 논쟁하며 씨름하던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라고 따지던 그 일이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수긍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하나님의 불합리와 불공정(不公正)과 불의(不義)가 이번에는 “은혜”라고 하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결국 필자와 필자의 아내는 그 부부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모습은 우리 가슴속에 늘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이런 불합리나 불공정한 처사는 바로 잡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비난을 듣지 않을 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만일 채권자(債權者)가 채무자(債務者)의 빚을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제 삼자로 하여금 대신 빚을 갚게 한다면, 공정한 처사가 아닐 것입니다.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의 편에서야 한량없이 고마운 노릇이지만, 빚을 대신 떠안게 된 제 삼자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빚을 갚아야 하며, 빚을 변제해 줄 요량이라면 그냥 해 주면 될 것이지 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느냐 이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채권자가 정말 공평무사(公平無私)하려면 자신이 직접 그 빚을 떠안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빚을 갚게 하느라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신 떠맡게 하신다면, 우리야 고마운 일이지만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이 예수님이 되는 방식을 통해서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을 해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심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self-substitution),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만족에 대한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충분하고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 자신뿐임을 안다면, 어느 누구도 그분이 일하신 방식에 대해서 불평과 항의를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칼빈’(J. Calvin)은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irresitable grace)라고 말합니다. 이제 ‘다말’과 관련해서 이전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해 봅시다: “어떻게 거룩한 예수님의 족보에 ‘다말’과 같은 패륜아가 포함될 수 있을까? 어떻게 지옥의 불쏘시개에 불과한 이방인이 포함될 수 있을까? 어떻게 남자도 아닌 여자가 포함될 수 있을까? 어떻게 시아비와 며느리의 불륜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가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될 수 있을까?”
이 족보는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 더럽고 추악합니다. 이 족보의 색깔은 백로(白鷺)의 순백이 아니라, 까마귀의 검정색입니다. 우리의 옛 시인은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만, 이 두 색은 전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백로의 역설은 그가 까마귀 곁에 있을 때 더욱 빛나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법이 많은 곳에 구속과 처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구속과 처벌이 많은 곳에 사면과 용서는 더욱 큰 빛을 발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족보는 희망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이 족보 속에 원하기만 한다면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여인이나, 죄인이나, 파렴치한이나, 패륜아나 구분이 없습니다. 그 족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 족보는 또한 도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그분의 백성에게 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도 아니고,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신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무엇에 대한 도전입니까? 자만(自慢)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했으며, 그들의 월급은 노동에 대한 당연한 대가였으므로 사장님에게 전혀 미안할 것도 감사할 것도 없는 모범 직원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버지의 엄청난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며, 집나가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생과는 상종도 하기 싫어하는 장남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세상 어누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섬기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당연히 이런 나를 축복하고 유산을 물려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도전입니다. 양식(良識)과 지성을 가지고 윤리∙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필자에 대한 도전입니다.
또 다른 도전은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족보는 절망과 두려움에 대한 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모범 시민에게는 사면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자에게는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깊이 체험해 본 자라야만, 희망을 바라고 구원을 고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왜 그분이 필요하십니까? 고백해 봅시다.
연습과 토의
1. “다말과 유다” 에피소드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요셉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전후 에피소드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본문의 문학∙신학적인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유다’를 ‘요셉’과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 차이나 공통점이 있을까요?
3. 당신은 ‘다말’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4. 나도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다면, 나의 영적 부모는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나의 영적 자식은 누구입니까?
제 43과: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43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39:1-20)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39:6)
<요셉 이야기>의 두 번째 에피소드가 <요셉과 Mr. 보디발>이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세 번째 에피소드는 <요셉과 Mrs. 보디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 내용에 있어 첫 번째 에피소드에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이집트’에 팔려온 ‘요셉’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37:36; 39:1).
하지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처음부터 “형통한 자”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의 주인 미스터 ‘보디발’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주인의 배려로 그야말로 승승장구입니다. 하지만 미세스 ‘보비달’은 이런 ‘요셉’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결국 무고하게 감옥에 갇힘으로써 ‘요셉’의 인생은 급전직하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의 기상도(氣象圖)는 맑음과 흐림의 연속입니다. ‘가나안’에서 한 번, 그리고 이곳 이집트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그가 처음 누렸던 맑음은 순전히 아버지의 총애 때문이었고, 이후 겪어야만 했던 흐림은 자신의 탓이었다면, 이집트에서의 맑고도 희망 찬 출발은 자신의 공로 즉 성실과 근면과 전문성 덕분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다만, 이제 다시 찾아온 흐림은 순전히 타인의 탓 즉 악녀 미세스 ‘보디발’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이번에도 자신의 탓이 더 큽니다. 그가 이번에 당하는 고초는 다름 아닌 그가 고집했던 의로움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이야기에 대한 표면적인 신학적 진단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주제나 교훈은 없을까?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드러내고 있는 설화적 특징은 무엇인가? 예컨대, ‘요셉’이 지금 겪고 있는 어두움의 세월이 예표해 주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더 넓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화자가 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도입하고 있는 문학적 수사(修辭)는 무엇인가? 그리고 본문은 <족장 이야기> 특히 “아브라함 언약”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이들 질문들이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독서 감상법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세 번째 에피소드의 문학적 단위, 특히 단락의 끝을 결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학자들마다 이견이 분분합니다.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세 가지 견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9:1-23; (2) 39:1-20절상; (3) 39:1-20. 논의의 핵심은 결국 39장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볼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세 절(39:21-23절)을 다음 단락에 연결시킬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첫 번째 견해를 채택하여 39장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본다면, 나름대로 유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표현이 수미상관을 이루면서 이야기의 구성을 대칭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39:23)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마지막 세절은 ‘요셉’이 옥에 갇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앞 이야기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40장의 내용에 대한 서막 내지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기법은 <창세기>의 여러 이야기에서 익히 보아오던 ‘히브리’ 식 이야기 기법의 단골 메뉴이기도 합니다.
한편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Gunkel 및 Coats) 두 번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39장은 20절에서 두 개의 장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구절을 기점으로 이야기를 둘로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근거해서 두 이야기를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9:1-20상; (2) 39:20하-40:23: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요셉이 옥에 갇혔으나(20절)
이렇게 구분했을 때, 각 이야기의 구성 요소는 “해설”(exposition)에 이은 “서술”(narration)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이야기는 마치 시적 반복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즉 첫 번째 장면에서 “해설”에 해당하는 부분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39:1-6이며, “서술”은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 즉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과정과 ‘요셉’이 옥에 갇히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39:7-20절상). 그리고 두 번째 장면의 “해설”은 옥에 갇힌 ‘요셉’에 관한 내용이며(39:20절하-23), “서술” 부분은 감옥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는 나머지 내용입니다(40:1-23). 그리고 각 이야기는 “해설”에서 “서술”로 그 양식을 바꿀 때, 공통적으로 “그 후에”(이 일 후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39:7, 40:1).
한편 이어지는 41장의 이야기, 즉 ‘바로’ 왕의 꿈과 ‘요셉’의 해몽에 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당연히 세 번째 장면으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세 번째 장면이 앞선 두 장면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해설”이 없이 곧바로 “서술”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 이년 후에”(41:1상).
이 두 번째 입장에 따르면, ‘요셉’의 일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을 다루고 있는 전체 이야기(39:1-41:57)는 결국 세 개의 에피소드(또는 세 개의 장면)로 나눌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히브리’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서술 방식이기도 합니다. 세 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되는 방식을 보면, 대개 첫 두 이야기가 서로 비슷하게 전개되다가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면서 극적 반전을 이루어내고 있습니다(참고. 창 14:1-16; 레 8-10; 민 22-24). 예컨대, 첫 두 이야기에서 화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는 진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그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것에 대해서 그렇게 진술하고 있으며(39:2-6), 두 번째 장면에서는 그가 왕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에 대해서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39:21-23).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희망에 대한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맙니다. 첫 에피소드의 결론은 ‘보디발’이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며(39:21-23),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은 왕의 관원장이 ‘요셉’과의 약속을 잊어버렸고, ‘요셉’은 그냥 감옥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40:23).
이제 세 번째 에피소드는 지난 두 번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는 언급도 없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곧바로 사실적 서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만 이년 후에”(41:1상). 그러나 세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은 뜻밖에도 지난 두 번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실패와 절망이 아니라, 성공과 희망입니다. 그가 거둔 성공은 단순히 이전의 성공을 되찾은 수준, 즉 단순히 한 부자 관리의 집사나 왕의 감옥의 책임자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화자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는 ‘바로’ 왕(41:38) 다음으로 높은 권세를 가진 그 나라의 제 이 인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에피소드의 나머지 내용은 그 양식에 있어 “해설”로 볼 수 있으며, 그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앞의 두 에피소드와 무리 없이 연결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단락 구분과 관련해서 세 번째 견해는 무엇인가? 위 두 번째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는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을 20절로 볼 것인가, 아니면 20절을 둘로 구분할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굳이 세 번째 견해를 채택해야 하는 당위성을 찾는다면, 20절 후반에 대한 ‘히브리’ 문장의 구문(構文)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옥에 갇혔더라”(20절하). 즉 이 문장의 주어는 고유 명사 ‘요셉’이 아니라 대명사 “그”로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기 보다는 앞 이야기의 결론으로 봄이 더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에피소드는 다시 고유명사 ‘요셉’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21절상). 이 세 번째 견해에 따라 본문의 단락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3막의 세 장면은 매 장면마다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고 있는지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12절), 두 번째 장면에서는 ‘보디발’의 아내가 집안의 하인들에게 직접 고발하고 있는 대화를 통해서(14-15절),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간부(奸婦)가 자신의 남편에게 모함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17-18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 번에 걸친 의도적인 반복을 통해서 이 여인이 어떤 인물인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자료비평 진영의 공통적인 입장은 39장 전체가 <야훼 자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서막: 요약(1절)
세 번째 에피소드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에서 일탈하는 듯하다가, 다시 이야기의 본류(本流)로 돌아오면서 첫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1절)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지난 줄거리에 대한 요약입니다만, 같은 사건을 다소 다른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곳에서는 ‘요셉’이 수동태 문장의 주어로 등장하면서 무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을 여러 차례 “애굽 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1, 2, 5절), 이는 아마도 ‘요셉’의 노예 신분과 대조를 이루기 위한 의도로 보이며, 더 나아가서는 훗날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을 예고해 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보디발’(rp'yfiwOP, 포티파르)은 ‘이집트’어로 “(태양 신) ‘레’(Re)가 준 자”라는 의미인데, 그의 직책 “시위(친위) 대장”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치 않습니다. “내시”, “요리사”, 또는 “경호원”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 ‘해밀턴’(V. Hamilton)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V. Hamiton, 458쪽.
그리고 화자는 ‘바로’가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2. 제 1막: 요셉의 형통(2-6절)
제 1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이 어떻게 주인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형통과 성공, 즉 신분 상승을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첫 번째 신분 상승은 여느 노예들처럼 들이나 밖에서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대신에 주인의 집 안 일을 하도록 허용되었다는데 있습니다(2절). 다음으로 그는 “주인의 마음에 들어”(우리 성경은 그가 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번역하고 있음), 주인의개인 비서 내지는 “가정 총무”로 승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주인의 모든 소유와 소유물을 돌보고 주관하게 되었습니다(4-5절).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단순히 ‘요셉’의 성공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그 성공의 배후 내지는 원인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2절)
이곳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사실은 <요셉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이례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곳 39장을 제외하고 나면(모두 8회 사용), 다른 곳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3회에 불과합니다(38:7, 10; 49:18). 그리고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화자가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요셉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라는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2, 3, 21, 23절). 화자의 이러한 의도와 쌍을 이루는 신학적 주제가 등장인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요셉 이야기>의 거의 결말 부분에서 ‘요셉’이 그의 가족들에게 한 고백적 간증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45;5-8; 50:17-21). 그런데 이곳에서 ‘요셉’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가 아니라 ‘엘로힘’입니다. 요약하자면, 화자의 서술과 주인공 ‘요셉’의 직접적인 대화가 마치 공명을 이루듯,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로 꼽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벽두에는 화자가 먼저 이를 서술하면(39-41장),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45:5-8; 50:17-21) 주인공 ‘요셉’ 자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동일한 주제를 메아리로 맞받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9장은 <요셉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일뿐더러, 후대의 첨가로 볼 수는 없습니다.
‘야훼’께서 족장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비단 ‘요셉’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이삭’에게도 그리고 ‘야곱’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셨는데(26:3, 24, 28; 28:15, 20; 31:3), 결국 이런 표현은 <야곱 순환>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서도 이런 표현은 이곳에서 두 번, 그리고 다음 단락(39:21, 23)에서 두 번 더 보게 될 것인데, 역설적으로 이런 표현은 앞으로 주인공에서 닥칠 시련과 환란을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주인공이 겪게 될 온간 시련이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편이 되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암시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과연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은 그의 주인 ‘보디발’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낱 노예에 불과한 ‘요셉’을 단순한 육체노동자가 아니라 집안일을 맡아보는 자신의 개인 비서 내지는 집안의 총무로 삼기에 이릅니다: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3-4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요셉’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인도 ‘요셉’ 때문에 덩달아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5절)
이 구절이 예고하고 암시해 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 가정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면, 훗날 ‘요셉’이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온 나라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단어, “축복”(&r'B, 바락)은 <창세기>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로서, 화자가 이곳에서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는 것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닙니다(참고. 창 1:22; 12:2-3). 즉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의 온 족속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부분적이긴 하나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디발’은 아예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다 맡겨버리기에 이릅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 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6절)
이 표현은 5절보다 더욱 강력한 것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보디발’이 ‘요셉’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 다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포기하고) 밖으로 나가매”(12절). 결국 6절의 이러한 표현은 앞으로 닥칠 ‘요셉’의 운명에 일말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 하였더라”는 표현은 ‘보디발’의 아내를 지칭하는 일종의 완곡어법(婉曲語法)일 수도 있겠습니다만(잠 30:20),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잠 30:20).
보다 정확하게는 “보디발 자신의 개인 사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자가 “요셉의 용모가 아름답고 빼어나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이런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은 ‘요셉’과 그의 어머니 ‘라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창 29:17). 아들이 어머니를 닮아 아름답고 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이 역시 앞으로 닥칠 주인공의 운명에 불길한 복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이어지는 에피소드에 대한 일종의 전조(前兆)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제 2막: 奸婦의 유혹(7-10절)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이야기(7-20절)를 두고 흔히 주전 13 세기 ‘이집트’에서 전해오던 <두 형제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인 즉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형의 아내가 자기 시동생과 성관계를 갖자고 유혹합니다. 시동생은 크게 화를 내며 이를 거절하면서, 이 일을 형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형수는 오히려 동생에게 겁탈을 당했다고 하며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편을 부추겨 소 떼들을 몰고 들에서 돌아오는 동생을 잡아 죽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소들이 이 사실을 동생에게 사전에 알려주고, 그는 달아나게 됩니다. 형은 동생을 쫓아갔으나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악어들로 가득 찬 강이 가로 놓이게 되고, 동생은 형에게 큰 소리로 자신의 무죄함을 외칩니다. 형은 동생의 말을 믿고 쫓기를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를 처단합니다.
‘궁켈’(Gunkel)에 따르면, 고대 영웅 이야기에는 영웅이 여인의 유혹을 거절하는 유사한 모티브들이 꽤나 알려져 있는지라 본문 이야기 역시 이러한 ‘이집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두 이야기 사이에는 “외간 남자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부정(不貞)한 아내”의 모티브 외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제 2막은 비교적 긴 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아름답고 빼어난” ‘요셉’과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유혹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짧고 은근한 여자의 유혹과 이를 거절하는 ‘요셉’의 긴 설명이 그것입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7절)
여인은 말보다 훔쳐보는 것을 더 오래 동안 한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나와 함께 자자”는 지극히 간결하고 퉁명스러운 한 마디 뿐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간결한 표현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즉 이 여자는 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말로 ‘요셉’을 유혹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셉’의 말은 길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8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이 집에서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 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8-9절)
‘요셉’의 말은 그 내용에 있어, 실은 화자가 앞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는 것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극적 요소에 있어서나 주제에 있어서나 아주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핵심 강조어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all); “다”(anything); “집”; “집안”(참고. 3-6절). ‘요셉’은 그가 거절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주인의 큰 신뢰에 대한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6절). 둘째, 그것은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셋째,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간음을 큰 죄악으로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만(20:9; 시 51:6), 이는 근동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여인과의 대화중임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로 일반적인 ‘엘로힘’ 하나님 대신에 지극히 ‘유대’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 간음에 관하여 보이고 있는 거부의 태도나 자세는 <오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적 입장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참고. 잠 6-7장). 지혜문학에서 간음을 불법으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를 금하셨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그것이 사형에 준하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참고. 레 20:10; 신 22:22). <잠언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해서 간음을 금하고 있습니다: (1)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기 때문에(6:32); 상처와 능욕과 부끄러움을 받기 때문에(6:33); 남편으로부터 분노의 복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6:34); 남편이 어떤 보상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6:35). 그나마 사형에 준하는 처벌과 관련해서 <잠언서>에서 경고하고 있는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잠 7:23).
그러나 여인의 유혹은 끈질깁니다. 그녀는 매일같이 유혹을 쉬지 않았으며, ‘요셉’의 태도 또한 고집스럽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 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10절)
여인은 여러 말로 ‘요셉’을 유혹하였겠으나, 화자는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처리함으로써 이 여인의 음심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와 동침하자”(7, 12절). 그리고 ‘요셉’의 긴 거절의 변(辯)을 이 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둠으로써, 극적인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8-9절).
4. 제 3막: 요셉의 치욕(11-20절)
‘요셉’이 동침은커녕 이 여자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하자, 여인의 인내는 바닥이 마고 마침내 어느 날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단 하루 만에 존경과 흠모의 대상에서 멸시와 저주의 대상으로 급전직하 하게 되고 마침내 감옥에 갇히는 수욕을 당하게 됩니다. 제 3막은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세 개의 짧은 장면을 통해서 차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면 1. 첫째, 화자는 실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1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려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11-12절)
‘요셉’은 여느 날처럼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출 20:9-10). 그리고 그 집안에서는 아무도 나중에 증인이 될 만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여인은 아주 노골적으로, 그리고 거칠게 ‘요셉’의 옷을 “붙잡으며”(cp'T, 타파스) 동침을 요구합니다. 이 동사는 폭력을 수반한 행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예: 신 9:17; 22:28; 왕상 11:30).
그녀는 단순히 애원하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공격적으로 ‘요셉’을 밀어붙이고 있는 중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자면 이 여인은 지금 남자의 옷을 잡아 벗기고 있는 중이며, 남자의 상반신이나 하반신은 아마 반나체(半裸體)로 드러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옷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옷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 겉옷이나 또는 上衣 등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옷을 “내버려두고”(bz“[, 아자브) 그곳을 도망쳐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다른 곳에서 이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에게 위탁하고(bz”[, 아자브)”(6절). 이 동사가 6절에서 ‘요셉’을 향한 ‘보디발’의 신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12절에서는 ‘보디발’을 향한 ‘요셉’의 충성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그의 생애에서 두 번째로 타의에 의해 옷이 벗기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험은 그의 형들에 의해서였습니다(37장). 처음의 옷은 아름다운 채색 “옷”(tn<toK, 케토네트)이었으나 이번에는 분명 단순한 “옷”(dg,B, 베게드)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다시 한 번 더 옷을 벗을 일이 있을 것인데,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그의 형들을 돌려보내면서 각자에게 “옷”(hl;m]c, 시믈라) 한 벌 씩을 준 경우를 말합니다(45:22).
장면 2. 두 번째 장면은 남자로부터 퇴짜를 당한 여인이 과연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3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갔느니라(13-15)
여인은 우선 집안의 하인들을 향하여 ‘요셉’에 대한 고소와 고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고소는 “악의와 허위에 가득 찬 선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요셉’은 황급하게 그 집을 빠져나오느라, 동료 하인들에게 일의 전후사정을 제대로 설명할 틈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랬다면 지금 이 여자가 집안 하인들의 동정심을 얻기 위하여 이처럼 사악한 거짓말을 해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이방인 ‘요셉’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자신의 남편 ‘보디발’을 향한 비난도 아울러 쏟아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 남자를 집안에 끌어들인 남편의 행위가 처음부터 정신 나간 짓이었다는 것이지요(14절). 왜 그런가? 여인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요셉’이 나를 희롱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희롱하게 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여인이 자신과 하인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일종의 동료의식 내지는 연대감을 갖게 하려는 교활한 술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어서 사실을 백팔십도 뒤집어, 자신의 행위를 ‘요셉’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즉 ‘요셉’이 먼저 “나와 동침하자”고 요구했으며, 자신이 능욕당하기 직전에 고함을 치며 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14-15절). 지금 여인의 진술을 들어보면(14-15절), 앞서 화자가 진술했던바 내용이나 표현과 대동소이합니다만(12-13절), 그 순서가 완전히 뒤집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뻔뻔한 거짓말에 더욱 무게를 싣고 정당화하기 위한 계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인의 뻔뻔한 거짓말은 다른 표현에서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셉’이 그의 옷을 “여인의 손”(12절)에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말하는 대신, “내 곁에”(15절)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말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인은 한 문장의 전치사 하나만을 살짝 바꿈으로써도,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기 위해서 먼저 옷을 벗어던졌음이 분명하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면 3. 여인의 무고(誣告)는 세 번째 장면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남편을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16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16-20절)
여인의 간교함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에서 ‘요셉’을 고발하는 일에 소위 민족적이거나 인종적인 정서를 이용해서 ‘이집트’인 하인들을 부추겼다면, 이번에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자극해서 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에 “이방인 종이 우리 ‘이집트’인을 희롱하려한다”(14절)는 것이 여인의 상투적인 선동의 수법이었다면, 이번에는 “종이 주인의 아내를 희롱하려 한다”(17절)면서 악의적인 선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한 술 더 떠서, 남편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주기를 바랐음인지, ‘요셉’을 처음 데려온 사람이 다름 아닌 남편임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17절). 그러나 하인들 앞에서 남편을 비방하던 때와는 그 강도에 있어 훨씬 부드러운 모습입니다. 남편을 지나치게 자극하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인의 복수극은 성공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남편은 격노하고, ‘요셉’을 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처벌이 생각보다는 가볍습니다. 대개 성폭행을 한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는 것이 관례인데(신 22;23-27), ‘요셉’이 노예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혹시나 그가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했게 때문이거나, 또는 주인이 아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곳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훈과 적용
1. 乘勝長驅
야훼께서 함께 하시므로. 대한민국에서 TV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소위 “막장 드라마”의 모든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속설(俗說)이 있습니다. “막장”이라 함은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갔다”는 의미인데, 이는 드라마 작가나 감독들이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서 온갖 극적 요소들을 억지로 무리하게 집어넣어 시청자들의 말초적인 감성을 자극한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이들 작가나 감독들이 즐겨 사용하는 막장 요소들은, 예컨대 출생에 얽힌 비밀, 불치병, 고부간의 갈등, 불륜, 지나친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도,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의 상승을 통한 인생 역전과 통쾌한 복수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청자들도 이런 드라마를 저질스럽다고 비난하면서도 계속 보고 즐깁니다. 그래서 작가나 감독들이 시청률 때문에 “막장 드라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마치 마약 주사의 빈도나 강도를 점점 더 자주, 그리고 더 세게 하는 것과 같아서 일종의 자해극(自害劇)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막장 드라마”와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리 인류가 본능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데렐라’적 자수성가(自手成家)의 모티브가 바로 그것입니다. 비천(卑賤)에서 영화(榮華)로, 굴욕에서 영광으로 변신하고 있는 ‘요셉’의 인생 역전 이야기는 흥미롭고 극적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요셉’의 성공을 단순히 자수성가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매사에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열심히 일하는 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인격과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화자는 그의 성공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야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의 주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즉 39장에서 화자는 이 주제를 일곱 번에 걸쳐 반복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중 네 번이 제 1막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선 제 2절에서 화자는 ‘요셉’이 ‘이집트’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오게 된 것 자체가 ‘야훼’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형통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어지는 3절에서, 그의 주인 ‘보디발’이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으며, 또한 ‘야훼’께서 그의 범사에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화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한 결과는 ‘보디발’의 집에도 큰 축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점, 즉 ‘요셉’의 성공은 ‘보디발’에게도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은 <요셉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 주제로 꼽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common grace)를 말합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 Luther)도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온갖 축복은 단순히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라반’이 그의 조카 ‘야곱’에게 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30:27).
우리가 ‘루터’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약>에서도 그 예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그를 태운 배가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었으나, 그와 함께 탄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된 것도 그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 27:24-26)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즉 의인들 때문에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일까요? 그러나 ‘루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살던 독일 제국이 만일 종교개혁을 통한 복음의 부흥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주 비참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라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나라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바꾸어 놓았으며,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한 학교와 병원의 설립, 문맹과 질병의 퇴치, 일제 치하에서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 한국 전쟁 이후 토탄에 빠진 나라의 빈민과 고아들을 위한 구제 활동 등등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대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는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있는 것이 역사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적어도 한 사람의 이방인, 즉 ‘보디발’만은 이 반열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혜안(慧眼)을 가진 자로서, ‘요셉’의 성공이 결코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3절).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보디발’과 같은 한 이방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매사에 그를 형통케 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을 두려워하며 그와 그의 후손들로 더불어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내 주변에 ‘보디발’이나 ‘아비멜렉’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그것은 아닙니까?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주인의 은헤를 입어. 앞서 언급한 바처럼 ‘보디발’은 현명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멜기세댁’이나 ‘아비멜렉’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먼 훗날 ‘여리고’ 성의 ‘라합’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를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자를 축복하고, 같은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 모두는 줄을 잘 섰습니다. ‘보디발’은 어떻습니까? 한 노예가 자기 집에 온 이후로 만사형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을 내리시는 줄을 알았고, 그래서 ‘요셉’의 하나님을 칭송했습니다(3-4절). 예수님 역시 어릴 적에 사람들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은 바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지혜와 키가 자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듯이, ‘요셉’ 역시 주인의 신뢰와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일일 것입니다. 그가 ‘이집트’에 팔려온 것이 열일곱 살 때였으며, 삼십에 ‘바로’ 왕 앞에 섰으며(41:46), 그보다 이년 전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41:1). 그러니까 그의 신뢰는 11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뢰란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지만, 그것을 얻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교훈해 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요셉’이나 예수님이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인정을 먼저 받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성공의 전제 조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성공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며,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높임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지혜로운 채무자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셉’의 성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출발은 결코 순조롭지도,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이집트’에 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언어도, 풍습도, 문화도, 그리고 그 흔한 인맥도, 모든 것이 불리한 여건이었습니다. 동료 노예들의 따돌림도 결코 견디기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외국에 유학을 나가 그 나라 학생들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고등학교 졸업자가 같이 입사한 대학 졸업자들보다 더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서울이 아닌 중소 도시에서 타지 인이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박지성이 그가 속한 구단에서 방출되지 않고 동료 선수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연봉으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대답은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연법칙과도 같습니다. 자연법칙은 항상 일관되며, 우연이나 요행이 없습니다. 성공에 이르는 길도 그러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가 일깨워 주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고 정주영 회장도 자신의 성공은 결코 기적이 아니라고 그가 쓴 책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인격과 전문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인격이란 함은 인내와 성실함과 일관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주인을 마치 하나님 섬기듯 십일 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창세기>의 ‘노아’와 같습니다. 주변의 조롱과 모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려 백이십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고, 융통성 없기로 말한다면 그를 따를 자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5-8)
두 번째로, 전문성이라 함은 일과 업무에서의 탁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自國의 역사 뿐 아니라, ‘이집트’의 역사에도 능통했습니다. 치수(治水)와 농사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영이나 행정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즉 그는 전문 경영인(CEO)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를 그냥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먼저 우리의 존재와 참 모습을 비춰주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전에 전혀 관심이 없던 것들에 대해서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것이 역사든, 과학이든, 정치든, 사업이든, 그리고 신학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열정과 목표의식이 생겨납니다. 영성이다, 소명이다 하는 거창한 언어로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성령님의 활동일 뿐입니다. 나는 그저 그분의 동기 유발에 반응만 하면 됩니다. 전문인이 되는 길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냥 이전에 살던 방식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새로운 자아, 아니 진정한 자아의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
2. 유혹
우는 사자처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요셉’의 청소년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승승장구하게 되는 비결이 바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비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으며, ‘보디발’이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였습니다. 누구든 인격에 있어서나 전문성에 있어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또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 ‘라헬’을 닮아 용모 또한 빼어났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듯이, ‘요셉’을 보고 반하지 않을 여자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격과, 전문식견과, 준수한 용모, 그리고 든든한 배경!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명예와 부와 권력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이 남자를 마다할 여자가 있다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남자를 누가 그냥 놔두겠습니까? 가장 먼저 그를 탐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주인 마나님이 집안의 준수하고 건장한 남자 종(從)을 유혹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라마의 흔한 소재로서 특별할 것도, 크게 놀랄 일도 아닙니다. 유혹은 그 형태만 달리할 뿐이지 우리 모두에게 매일처럼 닥치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하)
불가항력의 유혹. 지금 ‘보디발’ 여사는 어쩌다 충동적으로 ‘요셉’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음욕(淫慾)이 가득했으며, 이전에도 수시로 남편 몰래 이런 불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요셉’을 오래 동안 은밀히 지켜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호기(好期)를 만나자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당당하게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요구하고 나섭니다(7절). 유혹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집요했습니다. 여인은 날마다 ‘요셉’에게 간청을 했고(10절),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급기야는 집안에 아무도 없는 어느 날 ‘요셉’의 옷을 억지로 잡아끌며 동침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11-12절).
혈기 왕성한 청년에게 농염(濃艶)한 여인의 유혹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인이나 도적질 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것입니다. “성적 유혹”(性的 誘惑)은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유혹이 강력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다말’의 유혹 앞에 노출된 ‘유다’와는 격이 다릅니다.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듯이, ‘다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지만 ‘요셉’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다’가 ‘다말’의 유혹을 거절한다 해서 크게 낭패 볼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축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릅니다. ‘보디발’ 부인은 권력과 돈의 상징입니다. 만일 이 여인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미래는 성공을 향해서 더욱 쾌속 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만일 거절한다면 성공은커녕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는 여자의 원한을 사게 될 것이고 원수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절대 이 여자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명성과 명예마저 모두 빼앗겨 버리고 싶지 않다면 주인 마나님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집안에는 자신과 Mrs. ‘보디발’ 외는 아무도 없는 상황, 그야말로 완벽한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누가 이처럼 강력한 블랙홀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도망쳐라.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강력한 유혹과 싸웠습니까?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블랙홀은 그 중력이 무한대에 가까워 그 어떤 것도 그 속으로 다 빨아들이고 맙니다. 따라서 그 속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근처에 가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유혹에 대처하는 최상의 방법도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요셉’의 경우 적어도 처음 몇 번은 유혹에 맞서 싸우려고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여인을 설득하는 것이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8-9절). ‘요셉’은 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주인의 큰 신뢰에 대한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것은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셋째,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셉’이 말해주는 사실을 몰라서입니까?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몰라서 ‘아담’을 유혹했으며, ‘아담’ 역시 이를 몰라서 ‘하와’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까? 안타깝지만 대개의 경우 죄와 사탄의 강력한 중력(重力)에 노출될 경우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역(逆) 추진체가 아예 작동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히려 유혹을 은근히 즐긴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할까요?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와 관련해서 ‘터키’(Turkey)의 한 금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게으른 자는 오히려 스스로 사탄을 유혹한다.”
‘요셉’은 물론 게으른 방관자는 아닙니다. 분명하게 죄를 죄로 인식했고, 유혹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여인을 설득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면서 유혹에 빠져들지 않으려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블랙홀에 빠져들지 않는 최상의 길은 아예 그 근처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 역시 결국 그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12절). 집요하게 옷소매 붙잡고 매달리는 여인을 뿌리치고 옷까지 벗어준 채 도망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내 체온으로 얼음을 녹일 수 없다면, 얼음이 나를 얼릴 것입니다. 얼지 않기 위해서 얼음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간구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요셉’ 역시 이 기도를 열심히 주문처럼 외우면서 그 집을 도망쳐 나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투 공동체. 그런데 그가 Mrs. ‘보디발’로부터 도망쳐 나와 어디로 갔을까요? 숨을 만한 도피성이라도 있었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는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에 살고 있으며, 그의 이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홀로 광야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혼자서 세상과의 힘든 싸움을 수행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기도의 주체, 즉 전쟁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우리”임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입니다. ‘죤 스토트’ 목사님도 이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구원시키지 않고 교회에 보내지 않으시며, 교회에 보내지 않고 구원시키지 않으신다.” 요약하자면 홀로 사는 성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길버트 빌지키언’ 박사는 <공동체 101>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꿈은 공동체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시편>도 공동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시 133:1). 교회는 도피성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요셉’이 혼자서 그 힘든 유혹을 이길 수 없어 도망친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죄와 사탄의 강력을 쳐서 이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3. 의(義)의 대가
고난과 수치. 수년 전 필자는 형제들과 함께 ‘캄보디아’를 방문했다가 공항에서 참으로 황당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입국 수속을 해주는 한 직원이(우리나라로 치면 법무부에서 파견한 직원이었을 것입니다) 입국심사를 빨리 해주는 대가로 급행료를 요구해서 우리 모두가 거절하였더니, 그는 고의로 우리 일행을 입국자들이 선 줄 맨 뒤로 보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애교 섞인 보복 정도로 봐 줄 수도 있겠으나, 입국 후에 안 사실입니다만 우리 중 한 사람의 여권에서 입국신고서를 살짝 빼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중에 출국을 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뒤 출국할 때 결국 돈 얼마를 그 심사관에서 쥐어주고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오지 말아야지.”
이처럼 정당하지 못한 유혹을 거절한 대가는 대개 보복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대한민국도 한 때 부패 공화국으로 불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발표되는 각국의 부패 지수를 보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 예로써, 우리는 지금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줄줄이 지난 정권에서 저지른 부정과 비리로 감옥에 가는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수도 없이 봅니다. 그러나 이들이 감옥에 가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유혹을 거절한 대가가 아니라,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간 대가라는 점이 필자 일행이 ‘캄보디아’에서 겪었던 수난(受難)과는 판이하다 할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겪고 있는 수치와 수난도 요부(妖婦)의 정당하지 못한 유혹을 거부한 대가입니다. 의(義)의 대가인 셈입니다.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그가 지금 받고 있는 대우는 부당하며 억울합니다. <시편>도 그의 고초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시 105:18).
사실 ‘요셉’은 주인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칭찬과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아내의 잘못은 남편이, 또는 남편의 잘못은 그 아내가 가장 나중에 알게 된다는 냉소가 있습니다.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경우만 보드라도 이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자신의 아내가 받은 뇌물에 대해서, “모른다”, 또는 “기억나지 않는다” 등으로 일관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불쌍한 ‘보디발’이 노 전 대통령처럼 자기 아내가 한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아내의 정숙함과 현숙함에 대해서 아무 의심 없이 지내고 있었을까? 과연 그의 아내가 집안의 다른 남자를 유혹한 것이 ‘요셉’이 처음이었을까?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여인의 유혹이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기며, 공개적이고, 공세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로 미루어 집안의 다른 노예들도 이전에 이와 유사한 유혹을 수시로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디발’ 역시 아내의 이런 바람기에 대해서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런 일은 숨기고 싶어 합니다. 사실 이런 유의 범죄는 소위 하층 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화이트 컬러 범죄”이든 “블루 컬러 범죄”이든 범죄이기는 매 일반일 것입니다. 다만 ‘보디발’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본문은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9절). 그러나 분노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에게, 왜 화를 냈을까요? ‘요셉’에 대해서 일까? 아니면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데에 대해서 화가 난 것일까? 그가 진정으로 아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아내를 겁탈하려 했던 ‘요셉’을 잡아 죽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를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일을 수습하고 마는가? 그것도 일반 범죄자들의 감옥이 아니라, 특별한 감옥 즉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아마도 정치 수용소가 아니었을까?)에 말이지(20절).
좌절과 의심. ‘보디발’의 생각을 추측해 보는 것은 이야기의 본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의 생각일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시편>은 ‘요셉’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고통이 어찌 육체적인 것뿐이었겠습니까?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분노, 억울함, 좌절, 허탈, 배신감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이런 결심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의의 유혹을 거절한 대가가 이런 것일진대, 다시는 孤高하게 살지 말아야지.” ‘요셉’은 그를 유혹하던 요부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내의 말만 믿고 아무런 조사도 해 보지 않고, 다짜고짜 자기를 감옥에 처넣은 그의 주인 ‘보디발’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그는 전심점력으로 섬기던 “하나님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요셉’은 ‘보디발’ 만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디발’을 극진하게 섬긴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고, 하나님은 그 대가로 그를 감옥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분노하는 “하나님의 불의”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대가가 이런 것이라면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선이 선으로 보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악으로 되갚음을 받는 세상이라면,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집트’의 감옥에서 ‘요셉’은 이런 생각으로 절망과 비탄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침례 ‘요한’조차도 감옥에서 좌절과 의심으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이런 질문은 결코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요셉’은 왜 이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 왜 그가 섬기던 두 주인 ‘보디발’과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 침례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 이 질문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긴 합니다만, 현재 그가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먼저 예언했고,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그가 이런 질문을 할 때에는,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뭐 이런 하소연 아니겠습니까? “주님,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빨리 이 고통을 끝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4-6)
주님의 요지인 즉은, ‘요한’이 겪고 있는 수난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의인,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주님의 대답이 침례 ‘요한’에게 당장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기도의 응답은 받은 셈입니다. 약속과 희망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은 <이사야>(53장)가 예언하고 있는 “고난 받는 종”의 모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나 ‘욥’이나 ‘예레미야’를 들 수 있다면, <신약>에서 예수님을 대표적 인물로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당하는 아무 이유 없는 억울한 처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장차 올 영광.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억울함과 고난은 일상의 양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약속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희망의 약속은 단순히 미래의 영역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켜주는 훌륭한 인생의 막자사발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나님의 연단은 단순히 한 개인에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고난 받는 종”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족장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이 일시 중단된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처럼(39:2), 이집트에서 복을 내리시고, 이를 통하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50:20). <잠언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로마서>는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 있습니까? 왜 그런 고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고난도 없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나 단어는 무엇입니까? 이야기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표현은 없습니까?
2. 본문의 교훈을 나름대로 이끌어내 봅시다. “제자도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는 어떻습니까? 이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본 훼퍼’ 목사님이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3. 본문의 설화적 특징이 “미래화”라고 한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4. 나는 죄와 ‘사탄’의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나름대로의 처방을 나누어봅시다.
제 44과: 요셉의 감옥
44
요셉의 감옥
(39:21-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40:23)
희망과 좌절이 ‘요요’(yoyo)처럼 교차하는 우리네 인생에서, 이번 에피소드 역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깊은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합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대가로 부당하게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긴 했지만, 빼어난 성품과 식견으로 감옥에서 다시 한 번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요셉’은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 그 자체입니다. 특히 함께 수감된 왕의 최 측근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해 주게 되고, 이 중 한 사람은 그가 예언했던 대로 이전의 지위로 복직되었을 때, ‘요셉’은 더욱 출옥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부풀어했습니다. 하지만 장미 빛 꿈도 잠간, 그는 철저하게 잊혀 진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전에 주인에 대한 그의 충성과 호의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동료 수인(囚人) “술 맡은 관원장”에게 베푼 호의는 후사(厚謝)가 되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다시 절망과 좌절과 배신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화자의 진술은 과연 일관성이 있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요셉’이 잘 나갈 때에만 그저 해보는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번에는 하나님마저 ‘요셉’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던져보는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변덕스러운 분인가요? 이 본문에서 교훈으로 이끌어내어야 할 핵심어들은 많습니다: “희망과 좌절”; “헌신의 대가”; “의인의 고난”; “하나님의 의”; “언약.” 이들이 본문에 대한 독서 관점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대부분의 학자들은 40장 전체를 <요셉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39:21에서 네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며, 본 연구도 이에 따라 단락 구분을 한 바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의 범위에 관해서는 39과에서 이미 다룬 바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앞 과에서 Wenham의 견해에 따라 두 에피소드의 범위를 결정한 바 있으므로, 네 번째 에피소드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결정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단락을 구분하면 흥미롭게도 네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는 아래에서 보듯이 아름다운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 번째 에피소드를 보다 상세하게 단락 구분을 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요셉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도 세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 즉 “‘요셉’의 주인이 그를 감옥에 넣었다”(39:20)는 진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를 연결시켜주고 있는 것은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예컨대, 앞 이야기 중에서 39:2-6 사이에서 등장한 바 있는 일련의 관용적인 표현들이 39:21-40:4 부분에서 메아리처럼 반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표현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39:2/39:21)
(2) ‘요셉’이 주인(간사장)의 은혜를 입음(39:4/ 39:21)
(3) ‘요셉’이 형통하게 됨(39:2, 3/ 39:23)
(4) ‘요셉’이 주인(간사장)을 섬김(39:4/40:4)
(5) ‘요셉’에게 매사를 맡김(39:4/40:4)
(6) 맡기다/위탁하다(39:4/39:22)
(7) ‘요셉’이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아니함(39:6/39:23)
<요셉 이야기>에서 꿈도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곳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사람의 동료 수인(囚人)들이 꾼 두 번의 꿈(40:8-19)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바 있는 ‘요셉’ 자신이 꾼 두 번의 꿈(37:5-10)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이는 다시 다음 에피소드에서 등장할 ‘바로’ 왕의 두 번의 꿈(41:1-32)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동료 수인들의 꿈을 해석해주는 ‘요셉’의 능력은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바로’ 왕의 신비한 꿈을 해석해 주는 능력을 예고해 주고 있다는 점이 더욱 특기할 만합니다. 특히 ‘요셉’이 함께 수감된 왕의 두 관원에서 꿈을 해몽해주면서 했던 말,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다”(39:15)는 지나간 두 에피소드를 함축적으로 잘 요약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에 따르면, 39:21-23의 본문은 <야훼 자료>이며, 나머지 40장 전체는 대체적으로 <엘로힘 전승>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0장 내에서도 <야훼 자료>의 색채나 적어도 편집적인 손길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40:1);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40:3). 이들은 내용 상 이미 <야훼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39장의 에피소드를 전제로 하고 있거나 참고하고 있습니다(참고 39:21-23). 그리고 40:1에서 사용하고 있는 “범죄하다”는 용어는 <야훼 자료> 특유의 단어로서, 이어지는 3절이나 5절과 내용 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39장과 40장은 여느 때처럼 <야훼 자료>와 <엘로힘 자료>가 보여주는 차이보다는 오히려 유사성을 더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궁켈’(Gunkel)은 39장과 40장이 서로 다른 자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두 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요셉’에 관한 진술이 상충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39:20-23 (“야훼 자료”)에서는 ‘요셉’이 감옥에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에 반해, 40:47 (“엘로힘 자료”)에서는 친위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39:22에 따르면 ‘요셉’이 옥중 죄수들을 감독하고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으나, 40:4에 의하면 수감된 두 관원들을 돌보는 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야훼 자료>에 속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요셉’이 노예로 팔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37:27), <엘로힘 자료>에서는 그가 납치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40:15).
그러나 이런 차이들은 지극히 미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상이한 자료로 구분할 근거로써 충분치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차이들은 이야기 구성상의 기법으로 달리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주목한 바처럼, 세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가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고 있으며, 39-41장 사이에서 등장하고 있는 세 개의 에피소드가 마치 세 폭의 병풍처럼 연결된 하나의 파노라마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각각이 상이한 자료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야훼 자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Wenham).
신학과 신앙
1. 요셉의 형통(39:21-23)
우리는 위에서 39-41장의 구성상의 특징이 마치 세 폭의 병풍처럼 연결된 하나의 파노라마 식 이야기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본문은 병풍의 두 번째 화폭으로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진술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언급입니다. 두 에피소드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39:21)
“야훼께서 인자를 더하셨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것으로서, 그분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도 바로 그분의 신실하심에 기인한 것입니다(참고. 창 24:12, 14, 27). 이렇게 본다면 감옥에서 ‘요셉’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다시 한 번 ‘요셉’의 인격이나 자질이 이곳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39:22)
지난번에는 ‘보디발’이 그에게 가정의 모든 업무를 다 관장하게 했던 것처럼(39:4), 이번에는 간수장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간수장 역시 ‘보디발’처럼(39:6), ‘요셉’을 신뢰하였고, 그가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업무를 다 그에게 맡겼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39:23)
2. 두 관원장의 수감(40:1-4)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 두 관원장의 꿈과 ‘요셉’의 해몽에 관한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요셉’의 상대역이 ‘보디발’의 아내였다면, 이곳에서는 이들 두 사람이 될 것입니다.
1그 후에 애굽 왕의 굴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그들은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40:1-4)
이야기는 “그 후에”라는 막연한 시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아마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의미합니다(참고. 15:1; 22:1; 39:7; 48:1). ‘요셉’이 감옥에 갇힌 이후 이들 새로운 죄수들이 수감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수감 생활을 포함해서 노예로 살았던 기간이 도합 13년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37:2; 41:46).
“술 맡은 자”의 업무는, 그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11절), 단순히 술병의 마개를 따서 먼저 시음(試飮)을 해보는 것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리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수시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등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지위로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직책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느 1:11-2:8). “떡 굽는 자”에 대한 ‘이집트’ 단어도 있습니다만, 아마 왕궁의 식사 시종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 두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9장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 문제가 화자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화자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연(助演)의 역할은 ‘요셉’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요셉’이 “그가 섬기는 주인(‘보디발’이든 ‘야훼’이든)에게 범죄 하지 않기 위해”(39:9) 억울하게 수감된 것이라면, 이들 두 관원은 “그들이 섬기는 주인(‘바로’)에 대하여 범죄를 저질러”(40:1) 수감된 것입니다. 주인에 대하여 불충하기는 미세스 ‘보디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화자는 이들 모두를 실명(實名)으로 거론하지 않고 지위나 직책으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왕은 진노하여 두 범죄자를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있는 옥에 보냅니다. 화자는 이 감옥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라고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39:20). 감옥이라고 해봤자 친위대장의 집에 딸린 공간이니 오늘날의 가택연금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감옥은 감옥입니다. ‘요셉’이 이곳을 지하 감방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15절), 그 환경이 아주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친위대장은 ‘요셉’으로 하여금 이 두 사람을 “돌보도록”(dq'P, 파카드) 지시를 내립니다. 이 동사는 이전에 ‘요셉’이 그의 주인 ‘보디발’을 섬긴다는 의미로 사용한 바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수감된 지 꽤나 시간이 흘렀을 것 같은데 여전히 요셉의 지위는 처음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그에 대한 간수장의 신뢰가 변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물론 ‘보디발’이 여전히 친위대장으로 있다면 그의 천거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전에 ‘보디발’을 섬기던 그 경험으로 이제는 새로 수감된 고위 관원을 돌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수장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요셉’은 다시 한 번 ‘이집트’의 고급 관리와 접촉하게 됩니다. 이 새로운 관계가 훗날 그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그 자신 외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3. 두 가지 꿈(5-19)
세 번째 단락은 본문의 중심 장면에 해당됩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꿈과 해몽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은 먼저 꿈에 관한 두 관원과 ‘요셉’의 대화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5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5-8절)
두 사람이 걱정하는 바는 단순히 그들이 꾼 꿈 때문만은 아닙니다. 둘이 동시에 같은 날 밤에 다른 꿈을 꾸었는데, 그것도 수감 중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두렵기만 한 것입니다. 이들이 ‘요셉’과 함께 수감된 자들이라는 화자의 불필요한 설명이 이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영어(囹圄)의 신세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꾼 기이한 꿈을 해몽해 줄 사람도 없는 현실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요셉’ 아침에 그들을 찾아옵니다. 시중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내 이들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묻습니다. 무슨 근심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이와 똑 같은 질문을 ‘느헤미야’도 받은 바 있습니다(느 2:2). 물론 이 경우는 근심하는 자와 질문하는 자의 지위가 역전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즉 왕이 “술 맡은 관원” ‘느헤미야’에게 근심의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아주 역설적이며, 대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섬기는 노예의 태평스러움과 섬김을 받는 두 상급자의 불안과 전전긍긍이 그것입니다. 노예가 상담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급자가 내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의 따뜻한 마음과 염려가 이들의 가슴을 열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염려로 계속 마음을 닫고 있었다면 자유의 몸이 되어 이전의 지위로 회복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잠에 관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믿음은 잠을 통해서 망자(亡者)나 신(神)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꿈은 신들이 주는 일종의 선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한 해몽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꿈을 꾸는 자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길조(吉兆)든 흉조(凶兆)든 나름대로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만, 정확한 해석은 전문가에게 의존했습니다. 이들에게 꿈의 해석은 전문 지식인의 소관으로서 아주 복잡한 과학기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관원이 염려했던 것도 감옥에서는 이들 전문인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좌불안석이었고 절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있어 꿈은 지식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적 영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불안해하는 두 관원에게 하는 말이 바로 그의 이러한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그는 나중에 ‘바로’ 왕 앞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41:16). ‘요셉’의 이러한 태도는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는 관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형태의 신비적 주술(呪術) 행위를 거부하고 오직 선지자의 예언만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인정하는 입장을 말합니다(신 18:10-22).
“해석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요셉’의 대답은 이런 점에서 고대 근동의 꿈에 관한 일반적인 믿음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화자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진술 중의 하나로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일정 형태의 교리나 신조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낱 노예에 불과한 자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는 이러한 진술은 두 관원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고, 의심조차 해 보지도 않았던 꿈에 관한 충격적이며 지극히도 대조적인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몽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실 수 있는 은사라는 점입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며, 그에 관한 계시를 받은 자만이 그 미래를 해석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화자는 두 관원의 꿈 중에서 “술 맡은 자”의 꿈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9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2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9-13절)
그리고 두 꿈이 갖는 우화적 성격을 비교해 보아도 “술 맡은 자”의 꿈이 덜 우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만 “(포도나무의) 세 가지” 만이 우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즉 “세 가지”는 “삼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포도를 따고 그 즙을 바로의 잔에 따르는” 행위도 이 사람의 일상적인 업무가 아니라면 우화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꿈에서 등장하고 있는 지배적인 수사는 숫자 “3”의 모티브입니다: “세 (나무) 가지”; “세 단계의 포도 성장 및 수확 과정 즉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는 과정”; “술 맡은 관원의 세 번의 행동, 즉 포도를 따고, 즙을 짜서, 바로에게 바치는 행위.” 포도의 성장과 생산에 관한 과정을 기술함에 있어서나, 술 맡은 관원의 연속적인 일련의 행위를 기술함에 있어서나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이 세 개의 동사로만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요셉’의 예언이 조만간 성취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설명은 간단했고 신속했습니다. 삼일 후에 술 맡은 관원은 원래의 지위로 회복될 것이었습니다(12-13절상). 여기서 “머리를 들어 올린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수를 헤아리다” 즉 인구조사를 하다는 의미입니다(민 1:2; 4:2). 두 번째는 “자신 있게 행동하다”는 의미입니다(삿 8:28; 시 24:9). 하지만 이곳과 <열왕기하>(25:27)에서 의미하는 바는 사뭇 다른 것이, “친절하게 대해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19절).
해몽을 통해서 동료 죄수들에게 호의를 베푼 ‘요셉’은 이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이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14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4-15절)
그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해석해 준 꿈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은 모두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해서 <창세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기억하다”(8:1; 9:15; 19:29; 30:22; 출 2:24); “은혜를 베풀다”(24:12, 14; 출 20:6); “건져내다”(15:7; 출 20:2). 결국 ‘요셉’의 이 간청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납치되어왔다”고 말하고 있는데(문자적으로는 “도둑을 맞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감정들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형들은 그의 자유를 “훔쳤으며”, 그를 노예로 팔아넘겼는데, 이는 출애굽>(21:16)에 따르면 사형에 이르는 범죄 행위임에는 분명합니다.
‘요셉’의 희망 찬 꿈 해석에 고무를 받은 사람은 정작 당사자인 “술 맡은 자”가 아니라 “빵 굽는 자”입니다. “술 맡은 자”의 반응에 대해서는 화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빵 굽는 자”는 거침없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을 기대하며 ‘요셉’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6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16-17절)
그의 꿈 내용으로 볼 때 이전에 그가 누리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다만 “흰 떡”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요셉’은 이 사람의 꿈에 대해서도 해석을 해주고 있습니다:
18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18-19절)
다만 이번에는 그의 태도가 다소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판이한 꿈의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빵 굽는 자”가 자신의 꿈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길조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흉조로 받아들일 것인가? 자신의 죽을 운명도 모른 채 자신의 미래도 “술 맡은 자”의 그것처럼 희망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셉’이 설명해주는 꿈 해석은 그 자체만을 볼 때, 두 가지 생각을 다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의 꿈 해석은 비관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술 맡은 자”의 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의 “세 가지”나 “세 광주리”나 모두 사흘을 의미하며, 두 경우 모두 왕이 “머리를 들어줄 것”이라는 해석은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꿈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평행선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요셉’은 그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행위는 형벌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극형에 속하는 것입니다(신 21:22-23; 수 10:26). 이는 공개적인 처형 방식일 뿐만 아니라, 처형 이후에도 나무에 한동안 그대로 매달아 두어 사람들이 시체를 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후에도 영혼의 안식이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빵 굽는 자”의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이었습니다. “새들이 그의 고기를 뜯어 먹을 것”이라는 언급은 무시무시하면서도 동시에 이 사람의 운명에 관한 ‘요셉’ 자신의 확신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4. 꿈의 성취(20-22절)
‘요셉’의 꿈 해석은 과연 정확했습니다. 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실시한 대사면으로 두 사람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20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20-22절)
화자가 그동안 수차례 언급했던 바대로, 과연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39:20). 이 단락에서 화자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요셉’ 자신의 진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13, 19절).
5. 잊혀 짐(23절)
그러나 이 시점에 어느 누구도 ‘요셉’의 신통력에 대해서 ‘바로’ 왕에게 진언(眞言)하는 자는 없어 보입니다. 전직으로 회복된 “술 맡은 자”도 ‘요셉’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절)
화자는 이점을 시적 동의 반복을 통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더라.” ‘요셉’은 철저하게 잊혀 진 존재가 되었으며, 다시 처음의 절망적인 상황 즉 ‘보디발’의 진노로 처음으로 옥에 갇히던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 있게 된 것입니다(39:20).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이 년을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41:1).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그를 잊은 듯합니다.
교훈과 적용
1. 다시 乘勝長驅
야훼께서 함께 하시므로. 대부분의 대중가요는 후렴 구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보나 가사가 반복되는 곳을 말합니다. 이는 오페라의 ‘아리아’(aria)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페라 <요셉 이야기>에서도 각 에피소드가 이와 같은 후렴 구절과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이야기> 중에서 39-41장의 구조가 병풍 구조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가나안’의 구덩이에서 구출되어 ‘이집트’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와 그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무집사로 승승장구하는 장면까지를 오페라의 제 1막이라 한다면, 제 2막은 두 번째 구덩이 즉 ‘이집트’의 감옥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전체 <요셉 이야기> 중에서 39-41장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이들이 연결되는 방식은 마치 세 폭의 병풍으로 이루어진 파노라마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각 에피소드는 그 자체적으로 일종의 U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U자형의 바닥에서 오페라 제 2막은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다시 상승곡선을 그릴 것이라는 점은 화자의 다음과 같은 해설이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39:21상)
즉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언급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요셉’을 어떻게 대하든, 어떤 자리에 두든 하나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도대로 되돌려놓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브루그만’의 표현을 빌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의 의사에 반해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엘 샤다이’이십니다.
간사장의 은혜를 입어. 아니나 다를까. ‘요셉’은 이전에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호의를 입은 것처럼, 이곳 감옥에서는 간수장의 은혜로 다시 그 신분이 달라질 것입니다. 간수장 다음가는 책임과 권한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동료 죄수들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감옥 내의 제반 행정 업무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를 두고 성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분 상승을 해 본들 감옥은 감옥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신분은 죄수일 테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언제 자유인으로 출소를 하게 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성공에 앞서 성품을. 그의 성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성공에 이르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요셉’의 성공 이야기에서는 젊은 시절의 감옥 생활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감옥이 그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일까?
미국 ‘뉴욕’(New York) 주에 있는 ‘스토니브룩’(Stony Brook) 고등학교의 교훈(校訓)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Character before Career.” J. M. Boice. <Genesis>, vol 3. p 941.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성공을 이루기 전에 성품을 기르자”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격이 성공을 이루어내는 것이지 성공이 인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이 교훈에 가장 근접하는 동양의 가르침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의 대학에 나오는 그 유명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금언일 것입니다. 이 교훈을 누구보다 먼저 적용했어야 할 한 사람을 찾아본다면, ‘패리스 힐튼’(Paris W. Hilton)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수, 영화배우, 패션모델 등 아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이미 십대에 미국의 호텔 재벌 ‘힐튼’가의 상속여로서 온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인생을 시작했습니다만, 어릴 적부터 마약 복용, 문란한 성생활 등 갖가지 기행과 추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결국 상속 녀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성공이 성품보다 먼저 찾아온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서 “치국평천하”의 성공을 누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었다면 “수신제가”를 통한 인격의 도야(陶冶)가 아니었을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패리스 힐튼’처럼 십대에 산의 정상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십대에 산 아래에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이 그의 첫 수련장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성숙을 위한 첫 번째 시험은 이전에 그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부당하고 억울한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온 그 형들에 대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복수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닥쳐온 두 번째 큰 시험이 있습니다. 타협에 대한 유혹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세스’ ‘보디발’로부터 오는 은밀하고도, 끈질긴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지극히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당히 눈감아주면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유혹의 블랙홀로부터 탈출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보상이나 훈장이 아니라, 감옥입니다. 이전보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우리 사회의 통념 상 감옥은 인격의 성숙을 위한 훈련장 치고는 그렇게 권할 만 한 곳이 못됩니다. 감옥은 범죄자를 개과선천으로 이끌어주기보다는 죄질이 더 나쁜 범죄자를 양산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처음부터 범죄자로 투옥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이곳에서 ‘욥’의 아내처럼 원망과 분노로 하나님을 욕하며 그를 떠날 수도 있거나, 또는 침례 ‘요한’처럼 실의와 의심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대도 감옥은 그를 약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감옥 생활을 결코 즐거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이곳에서 그는 더욱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해 간 것처럼 보입니다.
함께 투옥된 동료 죄수(왕의 고위 신하들)들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그들과 나누는 대화가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 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40:8).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인격적 성숙을 보여주는 장면은 또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자나 깨나 자기 생각만 하고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고 있습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40:6-7). 바로 이것이 성숙한 자와 미성숙한 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항상 받으려는 자와, 베풀 준비가 되어있는 자의 차이 말입니다. 이는 신앙인의 경우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중보의 기도만 하더라도 항상 내 가족, 내 친지가 늘 우선순위에 올라와 있다면 나는 여전히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먼저”일 것입니다. 항상 나와 내 가족을 돌보는 일에 온 시간과 재물과 은사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적절히 균형 감각을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비록 여건이 여의치 않다 해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감옥은 ‘요셉’에게 전혀 무익한 도장이었다기보다는 반대로 인격적 성숙을 향해서 승승장구해 갔던 곳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감옥에서 오히려 형통하게 된 자는 ‘요셉’ 외에도 ‘예레미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기에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해서 시종일관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바벨론’이 곧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설교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바벨론’의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이 ‘유다’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내오자 ‘바벨론’이 두려워 일시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으며,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기호에 맞게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강상태를 맞아 ‘예레미야’는 사역을 일시 중단하고 자신의 분깃을 받으려고 ‘베냐민’ 땅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렘 37:12).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바벨론’에 항복하고 망명을 신청하러 가는 것으로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뒤집어씌운 혐의는 일종의 간첩혐의 내지는 국가반역죄일 것입니다. 항상 ‘예루살렘’에 대하여 부정적인 메시지만을 선포하던 그를 간첩혐의로 체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은 옥에 갇힌 그를 왕궁으로 몰래 불러내어 나라의 운명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과연 ‘바벨론’이 공격을 멈추고 돌아갈 것인지, 그리고 ‘예루살렘’에 과연 평화가 올 것인지에 관해서입니다.
16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17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렘 37:16-17상)
이 장면은 마치 옥에 갇힌 ‘바로’ 왕의 두 관원이 ‘요셉’에게 근심하며 그들이 꾼 꿈에 대해서 물어보는 장면과 교차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왕이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예레미야’의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예레미야’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마 그는 자신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 네 사역은 결국 실패로 끝난 거야. 누구 한 사람 네 설교에 귀 기울여 들어준 사람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다시 그 동일한 설교를 왕에게 들려줄 텐가? 그만두게나. 정 하고 싶다면 적당히 좋은 말로 상대 기분이나 맞추어주게나.” 그러나 정작 그가 들려준 대답은 이전과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왕을 실망시키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렘 37:16-17)
감옥은 이 선지자를 약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으며, 그 성이 멸망하는 날까지 즉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날까지 한 결 같이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삼손’은 어떻습니까? 그도 감옥에서 비로소 육체적 능력이 회복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인 ‘들리라’의 배신으로 힘의 원천이었던 머리털을 빼앗겨 버린 후 감옥에서 절치부심(切齒腐心)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힘을 얻어 통쾌한 복수를 펼친 일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그의 마지막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감옥은 이처럼 ‘삼손’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감옥에서 연단을 받아 형통을 경험한 성도는 <구약>에만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가 왜 그곳에 감금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계 1:9).
그런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예수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계 1:13-16). 이는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 것이나,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에 버금가는 체험입니다. ‘밧모’섬의 감옥은 사도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담대하고 강인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감옥의 연단”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감옥에 있는 그를 더욱 힘 빠지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사도가 감옥에 있는 동안 복음을 더욱 열심히 증거하고 다녔다는 사실입니다. 이자들의 동기는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갈수록 ‘로마’ 당국의 박해가 더욱 심해질 것이며,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더욱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사악한 동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만 사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로 ‘빌리보’ 교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 1:15-17)
‘예레미야’나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은 ‘요셉’처럼 감옥에서 나와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는커녕 모두 순교로 인생을 마감했지만, 이들 모두 ‘요셉’의 경우에서처럼 감옥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이끄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떤 성공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일로 마음고생하며 시간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2. 꿈과 해몽
우연의 필연. 영화 <바벨>은 지구 한 쪽 편에서 우연히 일어난 지극히 미미한 한 사건이나 개인의 의사 결정이 그 반대편에서 전혀 상관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 방식이 시종일관 우연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영화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연”은 이야기꾼들만 즐겨 사용하는 도구는 아닙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는 “우연의 필연”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상황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돌연변이에 이은 자연선택”으로 진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돌연변이는 그냥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필연이라는 것이지요. 한 때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던 대중가요 “만남”에서도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로 시작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나 과학에서나 또는 우리네 인생에서 우연이 자주 등장하면 흥미나 사실성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연”에 관한 <성경>의 화자들의 입장은 어떠할까요?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성경>의 화자들에게도 우연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있다면 “하나님의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연이란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룻 이야기>에서 화자는 ‘룻’과 ‘보아스’의 그 운명의 만남을 “우연히” 이루어진 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신비한 방식에 대한 화자의 표현일 뿐, 그 일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10:29).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로는 상황이나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또는 활용하시기도 합니다. 예컨대,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했을 때, 바다에 광풍을 일으키면서까지 ‘요나’가 종국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요나’가 ‘다시스’에서 돌이켜 ‘니느웨’로 가게 될 때까지 그에게 일어난 일연의 사건들도 “우연의 사슬”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요셉’의 경우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다만 그는 ‘요나’와는 달리 충실하게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 삼십에 이를 때까지 그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필연의 고리들. 이 시점에서 그동안 ‘요셉’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다시 한 번 회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연쇄 고리의 출발점은 “아버지의 편애”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는 “형제들의 시기와 증오”를 낳게 됩니다(37:3-4). 또 다른 고리가 있는바, ‘요셉’이 꾼 “두 번의 꿈 이야기”입니다. 그가 형들에게 들려준 이 꿈 이야기는 더 큰 증오와 시기를 낳게 하였습니다(37:8). 미움은 살의(殺意)를 낳고, 살의는 다시 구체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땅속 동굴에 내버려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냥 보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잔인하고 무정한 ‘유다’의 마음까지 간섭하셔서 그로 하여금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동생을 팔아넘기게 함으로써, ‘요셉’의 생명을 구출해내십니다(37:26-27). 즉 이번에 ‘요셉’을 살려낸 것은 “‘유다’의 탐욕”과 ‘미디안’ 상인들의 “우연한 출현”이었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위해서 자신의 역할을 단순히 수행하는 중에 만들어진 “필연의 고리”들입니다. 이런 상황을 <잠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요셉’도 바로 이 계획과 관련해서 훗날 그의 형들에게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하나님의 “필연의 고리”는 ‘이집트’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고, 그의 호의를 입어 그 집안의 총무 집사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정상(頂上)의 자리도 잠간, ‘미세스’ ‘보디발’의 모함으로 다시 한 번 지하 땅굴 속으로 내던져 집니다. 이번에는 ‘이집트’의 감옥입니다. 이 마지막 상황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해도, 불필요하고 악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선이 악으로 되갚음을 받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시고 계시며, 이 상황에서도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사람과 하나님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부지런히 섭리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40:1-4)
왜 하필 이 때 두 관원장이 왕의 진노를 사서 투옥이 된 것일까? 왜 간수장은 다른 사람도 아닌 ‘요셉’으로 하여금 이들을 시중들게 했을까? 우리는 이들 질문에 일일이 답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들이, 이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요셉 이야기>의 주변적인 무대장치며, 조연이라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연이 왕이든 죄인이든 가리지 않고 오직 주인공 ‘요셉’을 위하여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관원장의 꿈은 어떻습니까(참고. 40:9-11, 16-17)? 이 또한 또 다른 필연의 고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꿈의 내용이나 의미는 차치(且置)하고서라도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우연치고는 아주 지나치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너무나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또 꿈 이야기인가! 꿈 이야기가 아니면 <요셉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꿈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요셉’은 고사하고, 정작 꿈꾼 당사자 자신들의 미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어 보입니다. 두 꿈에서 공히 등장하고 있는 “3”이라는 숫자를 포함해서, 포도송이나, 흰 떡, 광주리 등이 도대체 두 사람의 운명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앞으로 정반대의 운명에 놓이게 될 것임을 무슨 재주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귀신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40:8하). 이 답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꿈의 해석이 하나님에게 달렸다는 말은, 꿈의 실질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그분께서 그 결과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달리 말하자면, 두 관원장의 경우 그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꾼 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바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해몽은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았던”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꿈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예컨대, 내가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씨름하며 고민하는 중에 어느 날 꿈을 꾸었다면, 십중팔구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하였으니, 사소한 꿈 하나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꿈의 내용이 두 관원장의 경우처럼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할 때 물어볼 상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요셉’과 같은 소위 영성(?)이 충만한 성도라도 주변에 있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이 꿈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은 오히려 더 깊어만 갑니다. 두 관원 장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꿈의 해석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대 심리학자들의 주장대로 꿈은 단지 무의식 상태의 욕구나 좌절을 반영할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꿈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수단이나 통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꿈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현현(顯現)의 한 수단이긴 했습니다만, 그나마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로서 꿈이 등장하고 있는 곳은 <구약>의 경우 <요셉 이야기>와 <다니엘>에서 일곱 차례, 그리고 <신약>의 경우 <마태복음>에서 여섯 차례가 전부일 정도로 그 비중이 지극히 미미하다 하겠습니다. 그나마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방식은 영원히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오늘날 참되고 믿을 만 한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Sola Scriptura)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요셉’의 말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의 선언이나 실은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즉 “우연의 필연”이 어떻게 우리 삶에 작동하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굳이 알아야 할 그분의 뜻이 있다면 <성경>을 통해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 나의 순종을 요구하는 그분의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대로, “I am who I am” 즉 과거나 미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지금 오늘의 하나님으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MC인 송해 선생이 한 젊은 MC로부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오히려, “금중에서 가장 중요한 금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인 즉은 황금도, 천금도, 순금도, 아닌 “지금”입니다. 지금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여 즐겁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후 5:16). 지금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은 무엇입니까? 힘든 상황이 나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에서 내가 보기에 아무 의미도, 유익도 없어 보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의미 없는 사람들, 의미 없는 만남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 인생의 조연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 각각이 “하나님의 필연”을 이루는 연결 고리가 될 수도 있음을 자각해 보셨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염려와, 불만과, 원망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꿈이 아니라 적절한 말씀들을 찾아 적어 봅시다.
3. 의(義)의 대가
잊혀짐. 매일 평균 33명이 이유도 모르는 질병으로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며, 그 질병은 자살입니다. 우리나라는 자살률에 있어 OECD 국가 중에서 10년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자살 예방 5개년 종합대책”까지 세웠는데, 정작 몇 년이 지난 후 그 정부의 최고 수장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범민련 남측 의장을 맡기도 했던 강희남이라는 목사가 여든 아홉의 나이로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유서에 이 한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목사라는 자가 한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친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 판에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고 하면서 죽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왜 자살을 할까? 인기 절정에 있는 연예인들이 자살을 택하면서 남긴 유서를 보면,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연예인의 경우 인기가 떨어지고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이 그 주된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절망의 끝에 자살을 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살은 역설적으로 희망에 대한 강력한 표출이기도 합니다. 즉 자살로 절망을 끝낼 수 있다는 왜곡된 희망일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의 메시지가 옳다면 자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죽음 이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지난 번 이야기에서 ‘요셉’이 행한 의로운 행동에 대한 대가가 감옥행 즉 “고난과 수치”였다면, 이번 이야기에서는 “망각” 즉 “잊혀짐”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참고. 23절). 그가 감옥에서 섬기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준 대가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후사(厚謝)가 아니라, “잊혀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요셉’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성경> 기록의 행간(行間)을 읽을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의 심중을 헤아려 보자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과연 ‘요셉’은 심중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우리의 영웅, 사계절의 사나이,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 ‘요셉’도 지극히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심지어 지금의 처지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갔을 대화를 상상해 봅시다:
요셉: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다”(14-15).
관원장: “아무렴. 물론이지. 내가 어찌 이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 자네같이 성실하고 재능 있는 자를 내가 어찌 그냥 감옥에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아무 걱정 말게. 내가 나가는 대로 금방 자네를 왕에게 천거하여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줌세.”
과연 꿈은 그대로 실현되었고, “술 맡은 관원장”은 왕의 은혜를 입어 출옥하여 이전 지위로 회복되었습니다만,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절).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41:1).
만 이년! 그렇습니다. 만 이년이 그냥 흘러가버렸습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고, 그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는데도 말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나 있을 법한 내용이 실제 일어난 것이지요. ‘요셉’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허망함? 배신감? 쓰라림? 그리고 그의 선택은?
영혼의 쇠사슬. 다른 것은 몰라도 <시편> 기자는 그의 상태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시 105:18). 시인은 정확하게 누가 이런 상태에 놓여있는지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감옥에 갇힌 자라면 누구나 이처럼 자유의 박탈과 억압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상태에 대한 묘사일 뿐입니다. 실은 그의 영혼이 지금 이런 어둠의 세월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매일 같은 음식, 매일 보는 똑 같은 좁은 공간, 매일 반복되는 똑 같은 작업 등등. 단조로움은 우울증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처음 한 동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기다림과 부푼 희망으로 온갖 장밋빛 상상의 날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겠지. 그가 왕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을 거야. 꿈을 해석해 주는 내 실력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겠지.” 감옥 문이 열릴 때마다, 마치 조건 반사를 보이듯 그쪽으로 달려갑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실의에 빠져가는 자신을 오히려 달래면서 “술 맡은 관원장”의 약속이 성취되길 기다립니다. 이처럼 늦어지는 것은 그가 내 약속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의 행동은 굼뜨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만 해도 감옥 문이 열릴 때 행여나 하는 기대로 달려 나가곤 했습니다만, 점차 그의 걸음은 느려지기 시작하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냥 앉아서 그 문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호의를 입은 관원장은 ‘요셉’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망각의 세월은 이년이나 흘렀습니다. 당연히 희망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영혼은 단조로움과 일상의 사슬에 묶여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크게 바랄 것도 없고, 더 이상 낙담할 그 무엇도 없습니다. 인생이란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 될 참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어찌 ‘요셉’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겠습니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년이 아니라 더 긴 세월을 이런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어쩌면 다음 달에 월급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 회사 사정이 올해보다 내년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내년에는 진급이 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이번 부탁 한 번만 들어주면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다는 실없는 약속에 대한 희망. 한 해가 지나고 다시 한 해가 저물어도 기다리던 그 좋은 시절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희망은 좌절을 낳고, 좌절은 원한과 앙심의 쇠사슬이 되어 내 영혼을 꽁꽁 묶어버립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지루하게 끝도 없이 이어갈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내 처지를 기억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같은 처지일 테니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인생이 고해(苦海)가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의 영혼은 어땠을까? 정말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채 감옥에서 지내면서 행여나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 이년은 그의 인생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고해의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고해의 세월이었을까?
환난, 인내, 그리고 연단. 요즘 미국 대학교 졸업식의 축사 내용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꿈과 도전을 말하는 대신 인내를 말한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대공황”(the Depression) 이후 처음으로 맞는 경제위기와 실업 대란 앞에서 꿈과 도전은 어쩌면 공허한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최근 우리나라 어린이 사이에서 A형 간염 보균율이 매우 높다는 통계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된 위생 상태와 풍요로운 식단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계 수치를 접하는 우리는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당국은 그 원인을 아이들의 “저항력의 결핍”에서 찾고 있습니다. 치열한 전쟁 경험이 없는 장군이나 병사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몸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온갖 질병과 대항하면서 만들어진 각종 항체가 없으니, 조그만 질병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인 것 같습니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도 이 병을 유발하는 특정 세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병입니다.
땅이 척박하고 메마른 곳에서 자란 포도나무에서 더 좋은 포도주가 생산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이년은 모두에게 잊혀 진 이년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환난은 그의 영혼에 백혈구를 생산해주었으며, 단단한 면역체계를 형성해주는 기간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를 더욱 성숙하고 완숙한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기간이었습니다. 백전노장(百戰老將)은 한 두 번의 전투 경험으로 얻어지는 타이틀이 아닙니다. 승리와 패배를 수 없이 거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김연아 선수는 지금까지 적어도 삼만 번은 빙판 위에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해서 그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3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 함은(롬 5:3하-5절상)
환난이 외부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질병이라면, 인내는 그와 대적해 싸우는 항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단”(dokimh, 도키메)은 “인정받은 자질 내지 품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질병과의 치열한 전투 후에 완성되는 일종의 면역체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연단이 소망이 이루며,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선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난이 단순히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을 성숙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단은 분명 훌륭한 덕목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소망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일까? 소망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잊지 않고 이루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흔히 인간을 망각의 존재라고 합니다. 아무리 슬픈 기억도, 아무리 기쁜 기억도 세월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집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연극에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아무리 슬퍼도 남편 따라 죽는 아내 없고, 아내 따라 죽는 남편 없으며, 자식 따라 죽는 부모 없고, 부모 따라 죽는 자식 없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금방이라도 따라 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면 견딜 만 해 집니다. 망각 때문입니다. 눈물겹도록 고마운 은혜를 입어 평생 잊을 것 같지 않지만, 이 역시 세월이 지나면 기억의 밖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독을 말하려 한다면, 외로움을 말하려 한다면, 무려 120년을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웃음마저 실은 관심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세인의 관심마저 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가 배를 만들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은 도무지 그를 기억조차 못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내버려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그렇게 살았다면, ‘노아’는 감옥 밖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셉’이 불과 이 년을 그렇게 살았다면 ‘노아’는 12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실로 잊혀 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창 8:1상)
하나님은 ‘노아’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노아’를 잊으신 적이 없었으며, 인류를 향한 그분의 완벽한 계획을 이루어가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억”과 관련해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도적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노아’와는 달리 애초에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던 자였습니다만, 죽어가면서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그 도적은 십자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한 고독과 상실감을 느꼈을 테지만,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기억하셔서 그를 함께 데리고 낙원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도적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소망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쳐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 “다 괜찮아 질 거야. 힘내” 등과 같은 격려의 말은 별 소용이 없다고들 합니다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셉’에게 해 줄 수 있는 권면이 있다면, 부질없는 인생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부질없는 인생을 믿다가 여의치 않았을 때 내게 돌아오는 것은 분노와 원망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권면은 우리의 일생에 이웃의 돌봄이나 관심이나 배려 등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늘 격려나 위로나 칭찬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다만 내 미래나 운명을 사람의 손에 의탁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사업이나, 정치나, 기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서 학연이나 지연 및 혈연 등과 같은 것에 기대어 소위 “줄서기”가 일상화 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풍토에서는 <이사야>의 권면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사회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만, 우리는 믿음과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기억”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요셉의 감옥”으로 부를 수도 있을 본문 에피소드는 직전의 에피소드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연관성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요셉’과 “감옥”과 “하나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지금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은 없습니까? 있다면 무엇이며,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4. 에피소드를 통해서 최소한 한 가지의 구체적인 적용 점을 찾아내봅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작업이 될 것입니다).
제 45과: 요셉으l 왕궁
45
요셉의 왕궁
(41:1-57)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41:40)
<요셉 이야기>는 이제 세 번째 순환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십삼 년이라는 실망과 좌절과 배신의 세월이 마침내, 그러나 갑자기 종말을 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롭고도 극적인 변화는 ‘요셉’이 감옥에서 왕의 존전(尊前)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극적이고 놀라운 변화는 이처럼 외적인 것에 있기 보다는, ‘요셉’의 성품과 인격의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버릇없고, 경솔하며,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십대의 철부지가 아닙니다. ‘이집트’ 전역에서 그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혜와 명철로 가득 찬 현인(賢人)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눈물과 한숨의 계곡이 영혼의 성숙을 위한 수련장이자 대장간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외적인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전에 겪었던 두 번의 신분 상승의 변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가 겪었던 신분 상승의 변화란 외국인 노예에서 고관의 집사로, 그리고 감옥의 죄수에서 동료 고관 죄수의 개인 비서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맞이하고 있는 세 번째 변화는 죄수에서 총리가 되어 왕 다음 가는 권력과 위엄과 위용을 갖추고 그 나라를 통치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집트’ 식 이름과 ‘이집트’인 아내를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신분에 걸 맞는 의관(衣冠)을 갖추고, 어디든 행차할 때마다 권력 순위 제 이 인자의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사람들은 그의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물렀거라, 물렀거라”는 고함을 듣고 머리를 땅에 박고 입맞춤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변화 즉 철부지 십대에서 현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예컨대, 그는 권력을 단순히 행사하고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편애를 등에 업고, 아버지가 만들어준 채색 옷을 입고, 형제들 사이를 뽐내면서 돌아다녔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왕의 총애를 업고, 왕의 수레를 타고 백성들 사이를 돌아다니지만, 국가적 대재앙을 극복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현자로 부르는 것은 그가 가진 지식이나 예지(叡智)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태도와 자세 때문입니다. 어떤 태도입니까?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이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요셉’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극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 있습니다. 그가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며, 그의 역할과 의도가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요셉’을 버릇없는 십대 망나니에서 한 나라의 최고의 현자로 변화시켰으며, 그를 통해서 세상이 구원을 얻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의도입니다. 그는 ‘요셉’이 이처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바로’를 끌어들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자로,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하여 살아가던 그에게 요상한 꿈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여 감옥에 있던 ‘요셉’에게까지 구조를 요청하게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과 관련해서 더 큰 의도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처럼 ‘요셉’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의 진정한 의도를 이루기 위한 조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이야기의 중요한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가 그를 어떻게 호칭하고 있는지를 앎으로써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38절 참고). 그에 대한 찬사는 실은 <성경>이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에 대한 자격이나 조건에 걸 맞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요셉 이야기>의 “위대한 막간”(39-41장)은 41장에서 결론을 맞고 있습니다. 가족과 헤어져 낯선 땅에 노예로 팔려와, 그 땅의 고위 관리들의 호의를 입어 두 번씩이나 성공의 기회를 잡는 듯했으나, 두 번 모두 좌절로 끝나고 마는 비극적 결말이 지난 두 번의 에피소드의 결론이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디발’의 호의로 출세의 길이 열리는 듯했습니다만, 결국은 감옥행으로 끝나고 맙니다(참고. 39장). 두 번째 에피소드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간수장의 호의 및 전직 고위 관리였던 두 죄수들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써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는 듯했으나, 그의 호의는 무시되고 다시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참고. 40장).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 역시 다소 불길한 가운데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전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이야기는 예의 그 친숙한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사”라는 전조(前兆)에 가까운 표현이 없이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점은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셉’이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나와 ‘바로’의 왕궁에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왕은 그를 그 나라의 제 이인자로 임명해준다는 사실이 이를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의 이야기 전달 방식에 근거해 볼 때, 이 사실이 앞으로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다름 아닌 기근을 만나 ‘이집트’로 몰려든 원근각지(遠近各地)의 많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요셉’에 관한 이야기로서, ‘가나안’에 머물러 있는 ‘요셉’의 가족들도 ‘이집트’를 방문하게 되는 계기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구조는 아래 표와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이 표에 따르면 41장은 우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꿈에 대한 서술(1-13절)
(2) ‘요셉’의 꿈에 대한 해석(14-46절)
(3) 꿈의 성취(47-57절)
그리고 처음 두 부분(1-46절)은 마치 시(詩)의 두 연(聯)이 유사반복을 이루듯(ABC A1B1C1)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A: 꿈
B: 해석
C: 요셉-왕의 호출
A1: 꿈
B1: 해석-올바른 해석
C1: 요셉-왕의 선택
특히 ‘바로’ 왕이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단락(A1)은 화자가 왕의 꿈을 서술하고 있는 단락(A)을 거의 있는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1장의 에피소드가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과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을까? 즉 <요셉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예컨대, 우선 14절은 감옥에 수감된 ‘요셉’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이전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39:20-40:23). 특히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이 감옥에서 ‘요셉’과 만난 일과 그가 자신의 꿈을 해몽해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장면은(41:9-13) 이미 지난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참고. 40:1-23). ‘바로’의 두 번의 꿈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미 “한 쌍의 꿈”은 <요셉 이야기> 전체의 중요한 모티브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왕의 두 번의 꿈(41:1-36)은 ‘요셉’이 꾼 두 번의 꿈(37:5-11)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동시에 직전의 이야기에서 소개한 바 있는 왕의 두 관원장의 꿈(40:5-19)과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이들 두 관원장의 꿈을 성공적으로 해석해 주던 장면은 이미 이어지는 또 다른 꿈, 즉 ‘바로’ 왕의 두 번의 꿈도 성공적으로 해석해 줄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지난 이야기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내용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흉년에 주변의 모든 족속들이 그에게 양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를 찾게 될 것에 대비해서 식량을 축적해 두는 장면은(41:55-57) 그의 형제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 나라를 찾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42-44장). ‘요셉’에게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태어났다는 언급(41:50-52)은 그 자신의 출생과(37장) 수감(39-40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장차 소개할 내용 즉 ‘야곱’이 이들을 축복하면서 이스라엘의 강성한 두 지파로 삼는 장면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48장; 49:22-26). 이처럼 41장은 전체 <요셉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용해되어 충분히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웨스터만’(Westermann)이 주장했던 바처럼, 원래 별도의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로 볼 이유는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웨스터만’ 자신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만, 41장은 <요셉 이야기>에서 핵심 기능을 하고 있으며,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요셉 이야기>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에 따르면, 1-32절의 내용은 40장과 함께 순수한 “엘로힘 자료”입니다. 그러나 41장의 나머지 부분(33-57절)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나머지 내용 역시 “엘로힘 자료”에 속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Dillmann, Driver, Speister), 또 다른 학자들은 “야훼자료”와 “엘로힘 자료”가 섞여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Gunkel, Skinner, von Rad, Schmidt). 두 자료가 섞여 있다는 주장은 이 부분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상수의 불일치”나 불필요하게 보이는 “반복적 서술”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궁켈’이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상충되는 진술과 그에 따른 자료 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33절(E)과 34절(J)의 불일치: 33절에서 ‘요셉’은 왕에게 ‘이집트’를 다스릴 감독관으로 한 사람을 천거하고 있는 반면, 34절에서는 복수(複數)의 감독관들을 추천하고 있는 점
(2) 54절(E)과 55-56절(J)의 불일치: 54절은 흉년이 ‘이집트’에는 미치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55-56절에서는 ‘이집트’ 역시 기근을 겪고 있음
(3) 35절상/48절(J)과 35절하/49절(E)의 불일치: 전자(前者)는 “양식을 거두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반면, 후자(後者)는 “양식을 쌓아두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
이처럼 내용이 상호 모순되거나 불일치되는 진술 외에도,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부분도 있는 것이, 특히 ‘요셉’의 신분 즉 지위가 상승되는 것과 관련된 진술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소위 “공시비평”(共示批評)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차이보다는 오히려 상당한 정도의 내적 통일성을 지닌다는 것이 현대 비평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본문 중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과 ‘야훼’가 공히 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러한 차이를 자료의 차이에서 찾기보다는,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배경이나 상황의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에서 ‘야훼’ 대신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16, 25, 28, 32, 38, 39, 51, 52절) 이야기의 배경이 ‘이집트’라는 이방 지역으로서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야훼’가 아닌 ‘엘로힘’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중간에 간혹 하나님을 ‘야훼’로 호칭하는 것은(39:2-5, 21-23), 화자 자신의 입장이나 서술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왕의 꿈(1-7절)
첫 번째 장면은 화자 자신의 진술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가 꾼 두 번의 꿈 이야기를 제 삼 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꿈은 세 번째 장면에서 ‘바로’ 왕 자신이 직접 ‘요셉’에게 설명할 때 다시 한 번 소상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1-7절)
“만 이 년 후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를 연결해주는 전이 구절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즉 “빵 굽는 관원 장”이 죽은 지 이년이 흘렀고, “술 맡은 관원 장”이 왕의 은총을 회복하여 이전의 자리로 복직된 지 이년이 흘렀으며, ‘요셉’은 여전히 감옥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충분히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암시해주는 진술로 보입니다. 왕이 자신의 생일을 맞아 특별 사면을 단행한 것이라면, 그가 두 번의 꿈을 꾼 것은 아마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생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습니다. ‘이집트’ 같은 고대 근동 국가에서 ‘바로’의 존재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거의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것이라, 그의 꿈도 단순한 꿈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계시와 맞먹는 그 무엇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번에 꾼 한 쌍의 꿈은 이전에 그가 꾸었을 여러 다른 꿈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임이 이어지는 단락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만, 내용 자체가 괴기하고 ‘판타지’(fantasy) 요소마저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꿈에서 왕이 본 것은 두 무리의 “일곱 마리 암소”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암소”는 단순히 농사짓는 소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이집트’ 국가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시 대양”, 또는 ‘이시스’(Isis) 신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숫자 “일곱” 역시 고대 사회에서 행운 내지 불운과 연관된 범상치 않은 숫자입니다. 왕이 본 “암소” 무리는 두 무리로서, 먼저 나타난 한 무리는 일곱 마리의 “아름답고 살진” 것들이며, 두 번째 나타나 이들을 잡아먹은 또 다른 무리의 일곱 마리는 “흉하고 파리한” 것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나타난 이들 일곱 마리의 암소들은 외관상 “흉하고 파리할” 뿐만 아니라, 더욱 끔찍하게도 육식(肉食) 짐승으로서, 먼저 나타난 일곱 마리 “아름답고 살진 암소”들을 모두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 꿈의 ‘판타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 놀라 깨어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가 다시 잠이 들어 꾼 두 번째 꿈 역시 그 충격에 있어 첫 번째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곡창지로서 이집트에서 곡식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나, 이번에도 두 무리의 “일곱 이삭” 중에서 나중에 나타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먼저 나타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 무리를 집어삼켜버린 것입니다! 봄과 가을에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동풍”은 모든 식물들을 순 식간에 말려 죽여 버릴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도 여러 곳에서 이 바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겔 19:12; 사 40:7-8; 마 6:30). ‘이집트’에서는 사막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오지만, “동풍”은 이스라엘 독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입니다.
이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바로’는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현실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깨어난 후에도 그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꿈은 잠에서 깨어나면 잊어버리는 데도 말입니다.
2. 왕의 해몽가들(8-13절)
두 번째 장면은 왕의 번민하여 자기 꿈을 해석해 줄 사람들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8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8-13절)
왕이 지난 이 년 동안 꿈을 꾼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입니다만, 이번처럼 그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번에 꾼 꿈은 이전에 그가 꾸었을 여러 다른 꿈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화자는 그가 “불안하여 번민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표현을 <다니엘>에서도 읽을 수 있는바, ‘느부갓네살’이 그가 꾼 기이한 꿈 때문에 드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단 2:1, 3).
왕은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점성가들과 현인들을 불러 모아 꿈의 해석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도 제대로 해석해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과연 이들이 왕의 꿈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까? 왕의 꿈은 ‘요셉’의 꿈처럼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한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요셉’의 꿈의 경우 그의 형들이 그 꿈에 대해서 듣자 말자 이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 점성가들도 왕의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챘으나 짐짓 모른 체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상스럽지 못한 징조를 왕에게 고하였다가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정직보다는 외교적 수사(修辭)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꿈의 의미를 해석해 주었으나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왕이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드디어 ‘요셉’에게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 장”이 마침내 왕 앞에 나아와서 그의 지난 체험과 더불어 ‘요셉’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9-13절)는 40장에서 이미 화자가 소개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죄(들)를 기억한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죄란 일차적으로 왕을 진노하게 했던 그 죄임에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요셉’의 부탁을 기억해내면서 갖게 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 “죄”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의 오랜 기다림이 마침내 그 빛을 보게 될 참입니다. 노예에서 죄수로 그리고 마침내 왕의 부르심을 받을 순간이 온 것입니다. 이처럼 극적인 변화를 의도적으로 강조라도 하려는 듯, “술 맡은 관원 장”은 ‘요셉’을 그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친위 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해몽가(14-46절)
세 번째 단락은 본문의 절정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45:1-15의 본문과 함께 <요셉 이야기> 전체의 절정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무명 씨 ‘요셉’에서 마침내 왕의 오른 팔이 되는 과정을 이 단락은 담고 있습니다.
왕의 호출. 그 첫 장면은 왕이 감옥에 있는 ‘요셉’을 호출해 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14절)
이 장면은 ‘요셉’의 신변상의 변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자가 이 문장에서 동원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보내어... 부르매... 급히 내놓은 지라.” “감옥” 역시 그의 극적인 변화를 대변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단어는 “구덩이”(r/B, 보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전에 ‘요셉’의 형들이 그를 내버린 바로 그 구덩이와 같은 단어이며(37:20, 22, 24, 28-29), ‘요셉’ 스스로도 자신이 갇혀 있던 감옥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40:15). 그러니까 수치와 모멸을 상징하는 이 장소가 존귀와 명예를 상징하는 왕궁이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할 것입니다. ‘요셉’은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이 제사나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도 같은 행위가 요구되고 있습니다(35:2; 출 19:10, 14; 레 14:8-9).
왕의 꿈. ‘요셉’과 왕의 첫 대면은 다소 논쟁적인 질문과 답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5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5-16절)
왕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요셉’의 능력에 대한 자신의 기대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그러한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말입니다. ‘요셉’ 또한 왕에게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즉답을 피한 채, 왕이 가진 정보가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면서 이를 수정해 주고 있습니다. 즉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면서, 동시에 왕에게 일말의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렸다고 했으니 당연히 정확한 해석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존의 권리와 신적인 능력을 지닌 한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가장 비천한 노예이자 죄수로부터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받고 있는 이 장면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 장의 꿈을 해석해 줄 때였습니다.
이제 왕은 안심하고 꿈의 내용을 ‘요셉’에게 밝힙니다. 이처럼 ‘바로’ 왕이 ‘요셉’을 대하는 태도는 훗날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대하는 태도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로’와는 달리 자신의 꿈에 대해서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인지 ‘다니엘’에게 꿈의 해석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꿈의 내용부터 알려달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단 2). 그런데 ‘바로’가 ‘요셉’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는 첫 번째 단락(1-7절)에서 화자가 소개한 바 있는 내용과는 다소 다릅니다.
17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18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17-24절)
즉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일곱 마리의 살찐 암소와 또 다른 일곱 마리의 야윈 암소에 대한 진술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한 쌍의 이삭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왕은 야윈 암소나 가늘고 마른 이삭에 대해서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일곱 마리의 마른 암소에 대해서 “내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가 하면(19절), 이들 마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먹어치운 후의 모습에 대해서도 “먹기 전의 모습과 같고 여전히 흉하더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21절). 아마도 그의 꿈에 대해서 상당히 겁먹은 듯한 모습입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왕이 두 번의 꿈을 꾸었음에도 그 꿈들에 대해서 말할 때 한 번의 꿈인 것처럼 단수형, “나의 꿈”이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17, 22절; 참고 15절). 아마 그는 두 가지 꿈 모두 자신의 미래에 대한 동일한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래서 ‘요셉’의 해석을 경청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해몽.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해주고 있는 이 장면은 그동안 <요셉 이야기>에서 그 자신의 이야기로서는 처음으로 가장 긴 대목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분명하고 또한 단언적입니다. 그의 해석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꿈의 해석(25-32절); (2) 왕이 취해야 할 행동 강령(33-36절). 우선 그 첫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25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25-32절)
‘요셉’의 해석은 네 가지 요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두 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25-26절). 둘째, 일곱 암소와 일곱 이삭은 일곱 해를 의미하는 것이다(26-27절). 셋째, 일곱 해의 풍년 뒤에는 일곱 해의 흉년이 따를 것이다(29-31절). 넷째, 같은 꿈을 두 번씩이나 꾼 것은 그 일이 신속하게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32절).
이처럼 ‘요셉’은 이 꿈을 하나의 유비 즉 ‘알레고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암소나 이삭을 땅의 소출과 연관시키는 것은 ‘이집트’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해석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주전 2 세기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한 문헌에 따르면, 주전 2600년 경 칠년의 풍년에 이은 칠년의 흉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인지 또는 후대의 거짓 기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만, ‘이집트’나 고대 근동 지방에서 칠년에 걸친 흉년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길가메쉬 서사시>나 <우가릿의 아캇트 서사시>에서도 칠년 동안의 흉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다윗’의 선지자 ‘갓’도 칠년의 흉년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삼하 24:13).
꿈의 기원과 관련해서 ‘요셉’은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신적인 기원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8절). 당연히 꿈의 해석도 “예언적 신탁”의 양식을 띠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라) 일곱 해의 큰 풍년이 오리니”(29절). <족장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이 예언자 내지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15:1-21; 18:17-33; 20:17; 27:27-29; 48:15-49:27), ‘요셉’ 또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닙니다. 특히 이곳에서 그는 ‘나단’ 등과 같은 왕궁 예언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삼하 7).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풍년보다는 뒤이어 올 흉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풍년을 언급하는 장면은 단 한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는 반면(29절), 이어지는 흉년에 대해서는 다섯 문장에 걸쳐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30-31절). 꿈을 경고나 위협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서는 ‘요셉’이나 ‘바로’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셉’은 ‘바로’ 자신이 했던 말을 일부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라”(31절하). 지난 날 ‘가나안’에서의 극심한 흉년이 ‘아브라함’을 ‘이집트’로 내몰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야곱’ 가족을 이곳으로 내몰게 될 것입니다(43:1; 47:4, 13). 흉년에 관한 ‘요셉’의 언급은 벌써부터 드라마의 다음 장면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두 번의 꿈이 의미하는 바는 의미심장합니다. ‘요셉’도 언급하고 있는 바처럼(32절),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표현은 여러 가지 경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일이 확실하게 드러나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우를 의미할 때나(신 13:14; 17:4), ‘다윗’의 왕조의 굳건함을 강조할 때나(삼하 7:26), 또는 달과 같은 천체의 변함없는 운행을 의미할 때(시 89:37),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두 번의 꿈이 의미하는 바는 또 있습니다. 즉 “그 일이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문맥에 따르면, 그 일은 다가올 흉년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요셉 이야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수년 전 ‘요셉’ 자신이 꾼 두 차례의 꿈이 성취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그에게 나아와 절을 하는 그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도 속히 이루실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다시 한 번 이 장면은 다음에 전개될 에피소드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이 꿈을 해석해 줌으로 인해서 조만간 국가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단락은 ‘요셉’의 해몽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왕이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한 조언입니다:
33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33-36절)
그는 단순히 꿈을 해석해 주는 자가 아니라, 왕이 취해야 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조언까지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조언은 신학적으로 적절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von Rad). 즉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그 일을 반드시 신속하게 이루실 것이라면, 그 일에 적절히 대비하는 일이야말로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부언하자면 하나님의 예정은 수수방관 지켜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정에 적절히 대응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왕에게 주는 첫 번째 조언은 우선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선택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라는 것입니다(33절). <구약>에서 “명철과 지혜”는 훌륭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신 1:13; 왕상 3:12; 잠 10:13; 14:33). 왕이 취해야 할 두 번째 행위는 “감독관”(dyqiP, 파키드)들을 임명하는 것입니다(34절). 감독관, 장관, 행정관, 또는 타인을 감독하는 부하 관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키드’는 ‘파카드’(dq'P)에서 유래했으며, <구약>에서 이 단어는 13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선택하는 것과 “감독관들”을 선택하는 것이 서로 상충되거나 무의미한 반복 진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둘은 서로 다른 직책을 말하는 것으로서, “감독관들”이란 그보다 더 놓은 지위에 있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행정적으로 수행하고 돕는 자들로 보면 될 것입니다(G. Wenham). 이들이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은 곡식의 수확과 보관 및 분배 등에 관한 일이었을 것입니다(34-36절). ‘요셉’이 왕의 행동을 촉구하는 표현 중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이같이) 행하사”는 앞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언급할 때 사용한 그 동사와 동일하다는 점에서(참고. 25, 28, 32절),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본받아 그대로 행동을 취하라는 충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의 선택. 왕은 ‘요셉’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안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왕은 ‘요셉’의 해석이 밝고 낙관적인 것이 아니라 어둡고 비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자신이 받았던 느낌도 역시 그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7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37-41절)
왕이 ‘요셉’을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요셉’의 제안한 해결책 때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의 제안대로 한다면 재앙과 역경을 극복하고 나라의 장래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은 그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로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영”(!yhila> j"Wr, 루아흐 엘로힘)을 언급하기는 이곳이 두 번째입니다(참고. 창 1:2). “하나님의 영”은 ‘브살렐’과 같은 성막 건축 기술자를 감동시킨 바 있으며(출 31:3; 35:31), ‘기드온’이나 ‘삼손’은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며(삿 6:34; 14:6), ‘사울’이나 ‘다윗’ 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왕이나 지도자들에게도 임하기도 했습니다(삼하 10:6; 16:13; 사 11:2; 단 5:14). <상경>은 “지혜”도 “하나님의 영”이 주는 하나의 은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를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도 ‘요셉’처럼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을 찾아보라는 요청으로서, 왕이 그를 선택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왕은 결국 ‘요셉’을 “총리”로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직책이나 지위와 관련해서 본문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는, “총리”(vizier)가 분명해 보입니다. 40-41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처럼 그가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사실 또한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41절은 40절의 내용에 대한 반복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만, 41절은 구문론 상으로나 그 내용에 있어 40절과는 불가분 의존적인 관계에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은 그에게 왕 다음가는 권력을 위임함으로써, ‘이집트’를 총리하게 하였으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도록 했습니다(문자적으로 “입 맞추도록” 함).
‘요셉’의 취임 장면은 <성경> 그 어디에도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화려하고 장엄한 것으로서, 다음 두 절은 이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42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42-44절)
이처럼 화려한 취임식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의 유품들을 통해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왕의 인장”은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요셉’의 권위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마포”(vv, 셰쉬)는 ‘이집트’ 단어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궁 관리들은 속이 드려다 보이는 최고급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성막”의 장막이나 제사장의 옷을 세마포로 만들었습니다(출 26:1; 39:27). 왕이 그의 종이나 신하들을 치하할 때 그들의 목에 “금사슬”을 걸어주는 장면을 고대 ‘이집트’의 많은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총리를 임명할 때에도 이와 같은 의식을 거행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왕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요셉’의 꿈 해석과 현명한 조언에 대한 보답이자 치하(致賀)의 표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왕은 그에게 또한 “버금 수레” 즉 제 이 인자를 상징하는 수레를 하사했습니다. “수족을 놀릴 수 없다”는 표현은 “꼼작할 수 없다” 또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은 ‘요셉’에게 총리의 지위에 걸 맞는 모든 위엄과 정치권력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사실상 ‘이집트’의 지배 계층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45절)
즉 그에게 ‘이집트’ 식 이름을 하사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헌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집트’ 이름을 주는 일에 대해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새로운 이름 ‘사브낫바네아’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요세푸스’는 이를 “숨어있는 탐험가”(hiding discover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대 주석가들은 1889년 Steindorff가 제안한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가 살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런 뜻의 이름은 노년(老年)에 부부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아이에게 붙여주는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Vergote; Kitchen).
‘요셉’은 ‘이집트’ 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사제의 딸로서 그 이름은 ‘아스낫’이며, ‘이집트’어로 “네이트 여신에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이 사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이제 ‘이집트’ 사회에서 소위 ‘로얄 패밀리’로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a)은 ‘카이로’ 북동쪽 16 킬로미터에 위치한 지역으로 태양신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음 구절이 ‘요셉’의 정치적 권력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6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즉 그가 ‘이집트’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지위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약관 삼십이었다고 하니, 그가 십칠 세에 이곳으로 노예로 팔려왔으니 십삼 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은 그야말로 고통과 수치와 실의와 좌절의 무명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그의 지나간 세월을 회고해 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살 던 그 시절을 회고해 주면서 이제 곧 있을 가족과의 감격적인 재회와 그리고 그의 꿈이 성취되고 있음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4. 꿈의 성취(47-57절)
하지만 ‘요셉’의 꿈이 성취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바로’의 꿈이 현실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두 장면에서 차례로 보여주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장면은 41장을 마무리 짓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칠년의 풍년. 먼저 네 번째 장면(47-52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칠년의 풍년에 대한 기술입니다.
47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47-52절)
그런데 이 단락은 칠년 동안의 풍년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요셉’의 활동이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자는 이곳에서 칠년 동안의 풍년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단 한 구절로 아주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는 반면(47절), ‘요셉’의 활동이나 자녀 출생과 같은 그의 가족사에 오히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칠년 동안의 흉년에 대한 비교적 긴 설명과 비교하면 다소 불균형한 진술이라 하겠습니다.
첫 칠년 동안 소출이 “심히 많았다”($m,q, 코메츠)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한 웅큼”을 의미합니다. “곡식이 손에 가득하다”는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은 자신이 왕에게 조언한 그대로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35절). 풍년 동안 쌓아둔 곡식의 양이 심히 많아 “바다의 모래”와 같았습니다. 이 표현은 <족장 이야기>에서는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 후손의 수와 관련해서 ‘아브라함’ 언약(22:17)이나 ‘야곱’ 언약(32:12)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어지는 세절(50-52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의 출생에 관한 언급은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또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훼스터만’(Westermann)의 주장, 즉 이 세 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하는 일종의 편집적 삽입이라는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겠습니다.
첫 칠년은 국가적으로 뿐만 아니라, ‘요셉’ 개인적으로도 아주 풍성한 기간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자녀의 출산은 풍년과 함께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입니다(신 28:4). 그의 첫 아들 ‘므낫세’(hV,n"m)가 의미하는 바는 본문의 설명대로 “잊어버리게 하다”인데, 한 아들의 출생은 이처럼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과거지사 전부를 잊어버리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내 아버지의 온 집 일”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가족을 잊어본 적이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몽매(夢寐)에 그리던 그 가족을 이제 곧 만나게 될 것임을 그의 독백이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아들, ‘에브라임’(!yIr"p]a)은 원래 “비옥한 땅” 또는 “방목지” 등을 의미하는바, 이는 앞으로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으로 물려받게 될 땅에 대한 적절한 묘사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곳에서 아들의 이름과 연관 짓고 있는 의미는 ‘히브리’어 동사 “생육하다”(hr;P) 또는 “풍부하게 결실을 맺다”로서 이는 <창세기>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창 1:22, 28; 8:17; 26:22; 35:11). 특히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그렇습니다(17:6, 20; 28:3; 48:4).
‘요셉’이 이제 겨우 아들 둘을 낳고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소 어색합니다만, 그의 말 속에서 다소 예언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훗날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가장 크고 강성한 지파 중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3:17).
아무튼 ‘므낫세’이든 ‘에브라임’이든 두 이름 모두에서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감사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므낫세’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느낄 수 있다면, ‘에브라임’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이름 모두에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약속,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39:2-6, 21-23). 따라서 두 아들의 이름 속에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이 드러나 있다 하겠습니다.
동시에 ‘요셉’의 표현대로 그가 “수고한 땅” 즉 “고난의 땅”은 <출애굽>이나(3:7, 17; 4:31) <신명기>에서(26:7)에서 “이집트의 구속” 즉 노예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요셉’이 이곳에서 경험한 바는 훗날 이스라엘이 겪게 될 운명을 예고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칠년의 흉년.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일곱 해의 흉년에 관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칠년 동안의 흉년은 아주 친숙한 것입니다. 예컨대, ‘이집트’ 남쪽 ‘수단’ 지역에서 적절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북쪽 ‘이집트’에서는 약 삼 개월 간의 홍수 시기에 ‘나일’ 강이 범람하지 않으며, 범람이 없으면 ‘이집트’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지역에서도 기근은 흉작을 불러옵니다. ‘수단’과 지중해 의 전 지역이 동시에 가무는 경우는 그리 흔치는 않습니다만, 본문은 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서 ‘이집트’는 물론 주변 모든 나라들이 최악의 상황은 모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3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53-57절)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화자는 흉년의 심각한 피해를 강조하려는 듯,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반복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근은 ‘이집트’는 물론(55-56절) 주변 모든 나라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주고 있습니다(54, 55절). 화자는 ‘이집트’와 주변 각국에 미친 광범위한 기근의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두 지역을 교차대구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A 각국(54절)
B 애굽 온 땅(54절하, 55절)
B' 온 지면, 애굽 땅(56절)
A' 온 세상(57절)
이처럼 세계적 기근에 대한 다섯 번에 걸친 반복과 두 번에 걸친 “기근이 심하다”는 표현을 통해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근과 관련해서 이와 유사한 표현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왕하 25:3; 렘 52:6).
화자가 기근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있는 바는, 그것이 ‘요셉’이 예고했던 그대로 일어났으며(54절), 그가 비축해둔 양식을 ‘이집트’ 백성에게 공급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이전에 해석해 주었던 왕의 꿈이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또 한 가지 꿈이 이십여 년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은 ‘요셉’ 자신의 꿈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각국이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다”고 함으로써, 그의 꿈 또한 곧 성취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요셉’이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비상 구호의 역할은 ‘이집트’에서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 문헌에서 기근 시 동료 시민들에게 비상식량을 원조해주는 사람의 이야기들이 꽤나 알려져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왕의 꿈
꿈. 오늘날 꿈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꿈은 어떤 간절한 희망이나 또는 두려움이 투영된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 문학에서 꿈은 그야말로 “헛된 망상”, “부질없는 생각” 등에 대한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이 덧없고 부질없다는 의미에서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부르는가 하면, 인생에서 한 때의 부귀영화를 “남가지몽”(南柯之夢)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남가지몽”은 중국 당나라의 순우분(淳于棼)이 술에 취하여 홰나무의 남쪽으로 뻗은 가지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괴안국(槐安國)으로부터 영접을 받아 20년 동안 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서양의 한 민요도 인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어가세, 저어가게, 또 저어가세 우리 인생의 배를
가만히, 가만히, 물결을 따라
유쾌하게, 유쾌하게, 유쾌하게, 또 유쾌하게
인생은 한낱 꿈인 것을
이 노래 역시 인생을 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꿈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꿈에 대해서 더욱 냉소적입니다. 그들은 “꿈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루 밤 새에 많은 꿈을 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대부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필자도 지난밤에 꿈을 꾸다 크게 웃으면서 깨어난 기억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내가 왜 웃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꿈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시편> 기자는 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20). 시인은 이곳에서 악인을, “무시하고 멸시해도 괜찮은 꿈”에 비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그런데 <요셉 이야기>는 유독 꿈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그것도 무시하고 잊어버려도 괜찮은 꿈이 아니라, 한 개인은 물론 국가나 민족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가 꾼 두 번의 꿈도 그렇습니다. 화자는 이들 두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라”(41:25). 그리고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이들 꿈은 <창세기>를 관통하는 “언약” 즉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통로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요셉’은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의 왕이나, 그의 두 고위 관리(“술 맡은 관원 장과 ”빵 굽는 관원 장)들은 이 언약과는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니 “족장의 언약” 속에 그를 포함시킬 수 있다 해도, ‘이집트’의 이방인들을 그 속에 포함시킬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무대의 등장인물로 이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을 이루는 방식 또한 썩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꿈이 이야기의 중요한 도구로 등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쉽고도 간단한 방법을 두고 이처럼 복잡한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까?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작가나 연출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할 때, 어떤 소재(素材)를 사용할 것인지, 어떤 인물들을 등장시킬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구성할 것인지 등에 관해서 독자나 청중들에게 묻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나 연출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우연처럼 보이는 그 모든 사건이나 에피소드조차도 필연이라는 고리를 통해서 연결시켜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나 <출애굽 이야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출애굽>이 <요셉 이야기>의 “반 모형”(反 模型; anti-type)으로 볼 때, 두 이야기 모두에서 ‘바로’가 중요한 인물로 무대 위에 등장한다 해서 크게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두 이야기에서 두 왕이 맡은 역할이 정 반대입니다. 한 사람이 악역(惡役)을 맡고 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선하거나 중립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화자는 왕이 꾼 두 번의 꿈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고 있으며, 꿈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왕 자신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기에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들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화자는 ‘요셉’의 발언을 통해서 왕의 꿈이 아무 의미 없는 우연한 “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25절).
물론 왕 자신은 그 사실을 알 리도 없고, 또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흉흉한 꿈이라는 기억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꿈의 내용은 알되 그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자기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왕 주변의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기에 그의 번민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일견 ‘바로’의 꿈은 훗날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비슷한 면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 경우에도 왕의 꿈을 이해하고 해석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바로’와는 달리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했으며, 그러니 다른 사람이 그의 꿈을 해석해 줄 수 없었음이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바로’의 문제는 꿈의 내용이 아니라 꿈의 의미를 해석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통상 하나님의 계시가 갖는 특징이 이런 것일까요? 애매모호하고, 아무도 알 수도 없고, 언제 성취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신비한 그 무엇 말입니다. 가장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정의하자면 이런 입장은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시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역설적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그분을 온전히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을 모두 다 파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 ‘바로’의 신하나, 점성가나, 현자나, 또는 마술사들 중에서 아무도 그가 꾼 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없다는 진술은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의 마음을 텅 빈 상태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왕의 마음만 꿈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하나님. 바로 여기에 ‘요셉’을 선지자로 부를 수 있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을 선지자로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족장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영웅이며 동시에 선지자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때로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 언약을 ‘요셉’을 통해서 이어갈 차례입니다. 바야흐로 ‘요셉’의 인생 역전 제 3막이 전개되려는 순간입니다.
왕이 감옥에 있는 그를 급하게 불러내고 있습니다. 무명의 한 ‘히브리’ 인 죄수가 절대 권력자 ‘바로’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무대의 중앙으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듯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요셉’만큼 극적인 인생의 반전을 경험한 인물도 없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나이 삼십에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인생의 山戰水戰을 다 겪었습니다.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우리네 경구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이 경구를 적용해 보자면, “잘되면 내 탓, 못되면 하나님 탓”이 아닐까요? 대개 우리는 갑자기 역경을 만나게 되면 실망에 빠져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으로 생각하거나, 더 심하면 실망은 분노로 바뀌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상황이 호전되면 그렇게 열심히 찾던 하나님은 내 안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면서 그 모든 변화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버립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하나님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인생이 ‘요요’(yoyo)처럼 변화무쌍하다면, 그에 대한 나의 대응 방식 또한 ‘요요’와 같이 一喜一悲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감옥에서 불려나오며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의기양양하고 있었을까? “그러면 그렇지”하고 말입니다. 화자는 그가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갔다”라고만 전하고 있습니다(14절하). 그를 지키던 간수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로서의 고요함과 담담함, 그리고 겸손함을 엿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태여 이런 설명이 아니더라도, 지난 십 수 년 동안의 역경을 거치면서 ‘요셉’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왔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한 번도 하나님을 잊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이 년 전 왕의 “술 맡은 관원 장”과 “빵 굽는 관원 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그가 했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 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40:8).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에 우연이란 없으며, 아무 의미 없는 일이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이 도움을 주었던 그 일이 이번에는 자신을 도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려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고 ‘요셉’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하고 계신다 하겠습니다. ‘요셉’에게 신세를 졌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한 사람도 ‘요셉’을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기억을 되살려 놓은 것입니다. 그가 왕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9-1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혹시 ‘요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왕이 그에게 꿈에 대해서 설명하며,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고 말하자 ‘요셉’은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절). 그는 왕에게 그저 “예, 그렇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집트’의 잡다한 신들 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왕에게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그의 분노를 자초하는 것은 아닐까? 꿈을 해석하는 신령한 능력을 과시하면서,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생의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물실호기(勿失好機)를 맞아 과연 어느 쪽이 확률적으로 더 나은 선택일 것인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으로 돌릴 것인가? 적어도 확률적으로 볼 때,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손해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은 더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요셉’이 이런 선택을 앞에 두고 흔들렸다거나 갈등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단호했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지존의 왕과 滿朝百官이 나열해 있는 화려하고 장엄한 왕궁에서 일개 죄수가 그들 모두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시여, 그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은 이 나라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나라의 잡다한 신들도, 당신 앞에 나열해 서 있는 저 많은 신하들도, 저 모든 점술가도, 현인들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이신 나의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가슴이 뛰고 심장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역시 큰 감동과 함께,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는 과연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내가 너를 구하겠고, 내가 너를 높이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왕과 하나님. 하나님만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역시 그렇습니다. 그에게 ‘요셉’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요 예언자였습니다. 경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38절하).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곧 “성령”을 이르는 말로서, <성경> 전체적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후 <출애굽> 등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출 31:3-5; 35:30-31), <신약>의 “오순절” 날에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그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행 2:1-21). 그리고 이 사건은 <요엘>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기도 합니다(욜 2:28-32).
“바벨탑의 반역”이 있었을 때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셔서 인간들의 영을 혼미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지혜와 명철로 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이 자기에게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혜와 명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임을 직감했습니다. 이방인 ‘바로’에게도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39:2, 3, 21, 23). 나는 어떻습니까?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들과 한 통속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생각이나 행동과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말입니다. 아니면 나를 별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까?
역경과 환난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합니까? 인생이 내 계획대로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인생들이 나를 속이고 배반하며 돌아설 때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을 때는 또 어떻게 합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까요? 정말 그분이 나를 항상 기억하고 계실까요? 언제 어디서나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계실까요?
그렇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환난 날에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난 날에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늘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면, 하나님 역시 나를 발견하고 기억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고, 제자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여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고 장장 150일에 걸친 대홍수를 끝낸 것은 ‘노아’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이 혼란과 격동과 어두움이 아니라 질서와 절제와 평안 가운데 지낼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기억하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2. 총리 요셉
성공의 비결. 나이 열일곱에 노예로 팔려와 서른에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니 변신도 이만한 변신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다윗’도 홍안(紅顔)의 소년 시절 선지자 ‘사무엘’의 점지를 받은 후 실제 왕으로 등극하기 까지 13여 년을 도피와 방랑 가운데 보냈으니, 두 사람이 忍苦의 세월을 보낸 기간은 거의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되는 과정이나 비결도 유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요셉’이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頂点)에 서게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앞에서 그 비결을 ‘요셉’의 인격에서 찾은 바 있습니다. 환난을 통하여 형성된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의 비결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셨고, 항상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가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그의 평소 말과 행동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는 “그가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이방인 ‘바로’였습니다. 그는 ‘요셉’으로부터 자기나 자기 신하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요셉’이 환난과 역경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 번도 하나님으로부터 눈길을 돌린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역경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그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김홍신 작가가 쓴 <인생사용 설명서>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산을 오르거나 다리를 다쳤을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편합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거나 다리가 완쾌되었을 때는 지팡이가 오히려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가 의도했던 교훈은 다른데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글을 ‘요셉’의 성공 이야기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낮은 자리에 있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가난할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를 의지해서 사회적인 성공을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단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고 나면, 지위가 올라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하나님도 서서히 귀찮고 짜증스러운 존재가 되어갑니다. 하산 시에 지팡이가 귀찮게 여겨지듯 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참석하던 성경공부나 기도회도 점차 소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일 예배도 수시로 빠지게 됩니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자녀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점차 관심이 멀어져 갑니다. 점차 세속적이 되어갑니다. 부요가 가난을, 풍요가 빈곤을 가져오게 된 것이지요.
이는 비단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자신의 조국 미국도 그렇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J. M. Boice, 971쪽.
그의 진단에 따르면, 한 때 미국은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경건한 국가였습니다. 물론 미국이 처음부터 기독교 국가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 제국들에 비하면 신대륙이 기독교 정신에 충일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양대 세계 대전 전후만 하더라도 유럽 정치가들은 “미국이 위대한 것은 미국이 선하기 때문이다”고 시인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고, 이후 미국은 번영과 함께 쇠락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번영이라 함은 세상적 번영을 말하고 쇠락이라 함은 영적 쇠락을 말합니다. 미국은 적게 가졌을 때, 오히려 더 자주 하나님과 교회를 찾았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좇아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시간적 여유가 늘어갈수록 하나님은 미국인들의 삶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져만 갔습니다. 공공장소에서의 기도는 사라지고, 학교는 세속적 인본주의의 溫床이 되었으며, “주의 날”(the Lord's day)은 소위 “슈퍼 선데이”(Super Sunday)가 되어 하나님이 아니라 온갖 스포츠나 연예 공연 행사가 경배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몰아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기독교 국가는 고사하고 도덕적인 국가로 인정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낸 결과일 것입니다. 그 자리에 정부와 국회와 법원이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리와 실용과 합법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할 때, 윤리나 도덕이나 선함도 함께 그들의 삶에서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북극해의 빙하 덩어리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루아침에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하우스’(Barnhouse)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서 한 예화를 들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국가에서 주화(鑄貨)를 제조할 때 오늘날처럼 자동 공정을 거쳐 일정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수작업(手作業)으로 이루어졌는데, 금이나 은을 녹인 물을 틀에다 부은 후에 왕이나 신의 형상을 새긴 주형(鑄型)을 찍어 눌러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주화 하나하나마다 형태나 함량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알고 함량이 더 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주화는 가려내어 날카로운 칼로 여분의 금이나 은을 벗겨내어, 새로운 주화를 만들어내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위조 주화를 각 가정마다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불법 행위가 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터라 이를 막기 위하여, ‘아테네’ 시의 경우 약 백년의 기간 동안 무려 팔십여 개에 달하는 규례를 제정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고대 주화를 전시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박물관에서 이러한 함량 미달의 주화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당시 이런 행위가 얼마나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관행을 사도 ‘바울’도 알고 있었던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여기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동사 “버림을 당하다”(ajdovkimo", 아도키모스)는 위에서 예로 든 “함량 미달의 금속” 내지는 “공인받지 못한 화폐”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들 화폐는 정상적인 상거래에서 사용될 수 없으며, 모아서 재공정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도 자신도 훗날 함량 미달의 주화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언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고난의 시기일까 아니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을 때일까? 타협과 양보는 고난의 시기에서보다는 오히려 번영과 번성의 시기에 더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자극이 있는 곳에 분투가 있고, 환란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만, 풍요와 무위도식이 있는 곳에 오히려 절망과 우울증이 싹틉니다. 한 개인이 영적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 교회가 그렇게 되고, 국가가 그렇게 됩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전혀 고려치 않으며, 법정은 시시비비를 가려 정의를 세우는 곳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터로 변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한 사람 때문에 이집트는 조만간 사상 유례 없는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셉’ 자신은 자만이나 독선에 빠져들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초지일관이었습니다. 그가 출세의 정점에 서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면 이러한 진단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51-52절).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요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가 역경에 빠져 있든, 순항하고 있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셉에게 가라.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눈에 보이는 역할 모델 즉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인생의 스승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현자들의 한 결 같은 충고이자, 현재 이야기에서 ‘바로’ 왕의 충고이기도 합니다. 그 좋았던 칠년의 황금기가 끝나고 동일한 기간의 흉년이 닥쳤습니다. ‘요셉’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름 한 철 베짱이처럼 흥청망청 놀고먹던 사람들이 추운 겨울을 맞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왕에게 와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입니다(55절상). 왕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요셉에게 가서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55절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칠년의 풍년”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칠년의 흉년”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류는 때로 태평성대를 구가한 적도 있기는 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일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소위 “빅토리아의 전성기”를 거치기도 했고, 이차 세계 대전의 終戰 이후 2009년의 미국 발 “금융 대란”이 있기 까지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 한 곳이었으며, 번영과 풍요는 계속 이어지고 발전해 갈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가 꾸었던 첫 번째 꿈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빅토리아의 전성기”의 낙관론은 이후 계속된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서 산산조각이 났으며, 소위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변되던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끔직한 두 번째 꿈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악몽은 단순히 경제적인 위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인류에게 닥친 위기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구폭발, 식량부족, 전 세계적인 기아와 기근, 지구 온난화, 자원의 고갈, 핵전쟁의 공포. 어느 한 가지 심각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혼돈과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사기>가 진단하고 있는바 그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 또한 그들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예정하신 일도 아닙니다. ‘바로’ 왕 시절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어 온 나라와 족속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아구스도’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온 인류가 구원받도록 예비하셨습니다. 절망에 빠져 다가오는 백성들에게 ‘바로’가 “요셉에게 가라”고 충고한 것처럼,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예수에게로 가라”고 충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요 6:35). 영적 기근으로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하).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골 1:19). ‘요셉’이 양식을 찾아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값을 받고 팔았다면, 예수님은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저 주실 것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야기는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하였다”는 언급으로 끝맺고 있습니다(57절). 오늘도 그 때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기근이 나를 덮치고 있습니까? 예수에게로 가서 그가 이르는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자기에게 오는 하인들에게 ‘마리아’도 그들에게 충고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예수님께 내 모든 문제를 아뢰고,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3. 기억과 망각
1953년 7월 27일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을 무슨 특별한 날로 기념하는 행사도 없습니다. 이 날은 6·25 전쟁 휴전 일입니다. ‘오바마’(Obama) 미 대통령이 이 날을 “한국전 참전용사 휴전일”로 지정함에 따라 2009년 7월 27일 워싱턴 DC의 백악관을 비롯한 미전역의 연방정부 건물 등에 일제히 성조기가 조기(弔旗) 게양됐습니다. 백악관과 연방의회 의사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됐으며, 인접한 다른 연방정부 건물도 모두 성조기가 반기(半旗)로 내려졌습니다. 이날 6·25 전쟁 휴전 56주년 기념식이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탑에도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됐습니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이런 일을 가능케 하도록 백악관과 미 의회의 문을 두드린 이는 20대 재미교포 ‘한나 김’(Kim)과 그녀가 1년 전에 시작한 모임 “리멤버 7·27”입니다. 6·25 참전용사 출신의 ‘찰스 랭겔’(Rangel) 연방 하원 세입위원장이 “한나 김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일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 역할이 컸습니다. 미 하원에서 ‘낸시 펠로시’(Pelosi) 의장 다음가는 영향력을 지닌 ‘랭겔’ 위원장은 그의 정성에 감동해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을 발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은 참전용사들이 흘린 피의 중요성을 어느 나라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입니다. 6·25 종군 기자였던 ‘데이비드 할버스탐’(Halberstam)이 출간한 719쪽 분량의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이 주목받은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겠습니다.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고 예우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삐딱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한나 김’은 2006년 1월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동료들과 435명의 하원 의원 실을 모두 방문하고, 백악관 관계자들을 접촉하고, 끊임없이 이메일과 팩스를 보내 협조를 요청하여, 이 일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운 ‘한나 김’과 “리멤버 7·27” 회원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6·25 전쟁은 종전(終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정전(停戰) 중입니다.
이처럼 한 개인이든 국가든 반드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동일한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기 위함입니다. 물고기는 기억력이 불과 4초를 넘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끼를 물려다 낚시에 걸려 입이 찢어지는 혹독한 체험을 하고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미끼를 물러 다가온다고 합니다. 아마 그냥 즐기자고 한 이야기 같습니다만,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일을 망각하는데 대한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음으로 해서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온 나라에 큰 낭패와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계속 모아둠으로써 온 집안에 악취가 가득하게 되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억과 망각”은 각각 나름대로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서도 “기억하라”와 “잊어라”는 권면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기억과 망각”에 관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만, 화자는 이를 위하여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의 결혼과 두 아들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50-52절)를 마치 괄호로 처리하듯 잠시 언급하면서, 주의 깊은 독자로 하여금 이 주제에 관한 교훈을 이끌어내 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망각의 유익. 우선 ‘요셉’의 큰 아들 ‘므낫세’(hV,n"m)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잊어버리다”입니다. ‘요셉’은 큰 아들의 탄생을 계기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홍신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영혼의 쓰레기”입니다. 원한과 분노와 복수심으로 얼룩진 과거를 말합니다.
고 직한 선교사님은 한국판 <Christianity, Today> 2009년도 8월 호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아쉬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노무현은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가진 상처와 쓴 뿌리를 치유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통령이라는 명예와 권세를 얻었어도 온전한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내적 치유란 없다.”
‘요셉’은 이점에서 故人과 다르다 하겠습니다. 그는 썩어서 악취가 나는 영혼의 쓰레기, 즉 원한과 분노와 좌절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수시로 들추어내어 자기 연민을 위한 안주거리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권좌에 오른 뒤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습니다. 총리가 된 뒤에 ‘보디발’의 아내 생각이 왜 나지 않겠습니까? 불러다 요절(腰折)이라도 낼 법도 한 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치유하시도록 허용했습니다. 과거는 그야말로 과거지사로 흘려보내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는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근평 씨가 국회의원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변의 권유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부추김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고, 그를 부추기는 자들의 저의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를 이용해서 정치적 이들을 챙겨보자는 것일 텐데, 만일 그가 출마를 하게 된다면 그 동기는 분명 이들과는 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가 출마를 하든 않든 순전히 본인의 자유의사에 달린 것이겠지만, 만일 그가 당선되었을 때 보여줄 행보가 적이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이런 것입니다. 즉 과연 그가 아버지처럼 분노와 적개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억울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대변하고 신원(伸寃)해 줄 수 있을까? 세상을 바꾸고 싶은 지도자가 되려 한다면, 우선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자라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일로 인해서 미움과 원한과 저주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는 교훈하고 있습니다.
‘루이스’(C. S. Lewis)는 그의 책 <The Great Divorce>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지옥에서는 망각과 용서가 없는 곳입니다. 즉 사람들은 이곳에서 쓰라린 과거지사를 하나도 잊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들의 내면세계 역시 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머리가 온통 버려야 할 쓰레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다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으며”, 이들 모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참고. 고후 5:17).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과거지사를 깡그리 잊을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단순한 수사적 과장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이 망각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말입니다. 우리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붉은 물체를 붉은 색 투명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면 흰색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피를 통해서 인간의 붉은 죄악을 바라볼 때, 흰색으로 비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야 할 과거지사는 쓰라린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조차도 지옥의 쓰레기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 11:5-6)
현재의 삶, 현재의 모습, 현재의 상황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불만과 원성을 가지고 과거로 되돌아갑니다. 그 좋았던 시절 말입니다. 소위 “마늘과 부추” 신자(信者)가 되는 순간입니다. 결혼 생활 내내 첫날밤의 흥분과 감격만을 회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늘 동일한 간증,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간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 역시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스라엘은 ‘이집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의 세계에서 살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고, 현재는 마음껏 즐기며, 그리고 미래는 설렘으로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기억의 유익. 이 모든 망각이 주는 유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억해야 할 그 무엇은 없습니까? ‘요셉’의 작은 아들 ‘에브라임’(!yIr"p]a)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작은 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52절).
악덕 기업가의 좌우명이 있다면 “채무는 잊고 채권만 기억하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좌우명은 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신세 진 사람, 내게 크게 도움을 준 사람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금방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손해를 끼쳤거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잘되지를 않는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일방적인 도움은 대개 독(毒)이 되어 돌아옵니다. 도움을 받는 자가 감사하기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남한과 북한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특히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시절 실로 천문학적인 경제 지원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으로부터의 감사는커녕, 원자핵을 포함한 군사적 위협이나 양측 간의 갈등과 불신은 오히려 더 심화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미국만큼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많이 해 준 나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았던 나라치고 반미(反美)로 돌아서지 않은 나라가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개인이든 국가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를 잊으려 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성경>도 이를 알고 곳곳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신 32:18). ‘이사야’는 어떻습니까?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 도다”(사 17:10). <예레미야>에서 이 주제는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렘 3:21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렘 13:2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렘 18:15상). 이스라엘의 이러한 기억상실증에 대해서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겔 23:25).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영광이 “헛되며, 헛되다”고 회고했던 ‘솔로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장탄식은 ‘솔로몬’이 아니라 ‘요셉’에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선한 의도와 의로운 삶은 보상은커녕 늘 부당한 대우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인생이 “헛되며, 헛되다”고 탄식했을 법 합니다. 훗날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이 아들의 인생이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니라, 실로 풍성한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22요셉은 무성한 (포도)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49:22-25)
‘요셉’의 인생은 <시편> 1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의인의 삶과 그에 따른 축복을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요셉’은 큰 아들의 출생을 통해서 쓰라린 과거와 화해하고 용서하였으며, 작은 아들의 탄생을 통해서 풍성한 오늘과 희망 찬 내일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연습과 토의
1. 꿈과 계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요셉’의 성공 비결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망각의 유익과 기억의 유익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내가 잊어야 할 과거는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과거는 무엇입니까? 기대해야 할 미래는 무엇입니까?
4.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으며, 지금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제 46과: 요셉 가족의 이집트 방문(1)
46
요셉 가족:이집트 방문(1)
(42:1-38)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42:6)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야기는 이제 ‘이집트’의 ‘요셉’에게서 ‘가나안’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습니다. 나이든 ‘야곱’은 양식을 위해 자식들을 ‘이집트’로 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제들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양식을 위해서 원근각처에서 모여든 수없이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들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조만간 두 당사자들 모두에게 20년 전의 쓰라린 과거를 기억나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 감상의 일차적인 과제는 우선 37장과의 비교 연구에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점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자기에게 머리 숙여 절하고 있는 형들을 바라보며 이전에 그가 꾸었던 두 꿈을 기억합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하던 첫 번째 꿈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던 두 번째 꿈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소 당황스럽습니다. 첫 번째 꿈은 성취된 것 같은데, 두 번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절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열 명밖에 없으며, 나머지 한 개의 별과 해와 달 즉 ‘베냐민’과 ‘야곱’과 그의 아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서있는 자들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했던 자들입니다.
“내 동생과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을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떻게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신분을 밝히면 형들이 사실을 말해줄까? 이들이 여전히 나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다소 잔인한 방법이긴 하지만, 형들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 씌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합니다. 형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혐의를 부인하며 자백한 사실은 ‘베냐민’과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과연 형들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동생과 아버지를 어떻게 ‘이집트’로 오게 할 수 있을까?
궁리 끝에 그는 ‘시므온’을 인질로 붙잡아 두고 나머지 형제들을 돌려보내기로 작정합니다. ‘시므온’은 이전에 자기를 노예로 파는 일에 주모자 역할을 했던 자입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를 인질로 삼아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들 형제들에게 이십 년 전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함으로써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려는 것입니다. 즉 이십년 전에 자기를 ‘이집트’에 팔아넘겼던 것처럼 이번에는 ‘시므온’을 이곳에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구출하러 올 것인가에 관한 선택입니다.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은 비단 두 상황만이 아닙니다. 곤경에 빠진 피해 당사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 역시 그러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금 이십 년 전 유사한 상황에서 ‘요셉’이 어떻게 했는지 이곳에서 처음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42:21).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지금 그의 형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그야말로 인과응보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7:2);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야곱’이 듣는 보고 내용은 어떻습니까? 이 또한 이십 년 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가장 핵심적이며 충격적인 내용은 빠뜨린 채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파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십 년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파악하고는 절규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베냐민을 또 빼앗아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 그 때나 지금이나 이들 형제들에게 절규하는 아버지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진실을 말하는 순간 아버지의 충격은 더욱 커질 것이며, 그들의 원하는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실로 진퇴양난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과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 이들이 ‘요셉’이나 ‘야곱’에게 정직하게 이전의 잘못을 시인한다 해도 과거의 결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더욱 ‘야곱’의 충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며, 설령 애비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간다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는 것 외는 달리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기고, ‘시므온’까지 팔아넘긴 이들이 ‘베냐민’마저 ‘이집트’로 데려가 돈을 받고 넘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으며 비교적 자유스럽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형들을 통해서 쓰라린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을 때 북받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으며, 자기를 팔아넘긴 그 형들이 자기 계획대로 ‘베냐민’을 과연 데려올지 자신이 없습니다. 과연 그의 두 꿈이 이루어질 것인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감상의 이차적인 과제는 37장과의 비교 연구를 뛰어넘는 보다 큰 주제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언약” 내지는 “섭리”일 것입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야기 속의 인물들 모두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요셉’은 그의 꿈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형제들 역시 지금 그들에게 닥친 일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과응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상황인식은 아직은 불확실할 뿐입니다. ‘요셉’이 지금 목격하고 있는 상황은 그의 두 꿈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의 형제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자의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그에게 있어서, ‘요셉’이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온 그 많은 방문객들 중에서 자기 형들을 즉각적으로 알아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가 꾼 두 번의 꿈을 해석하며 천명했던 대 원칙, 즉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라”(41:32)는 원칙이 ‘요셉’ 자신이 꾼 두 번의 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요셉’이 어릴 때 꾼 꿈은 일종의 예언적 꿈으로서, 다른 모든 예언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참고. 신 18:22; 사 8:16-17; 41:22; 히 2:3). 그러므로 어느 독자도 ‘베냐민’이나 ‘야곱’이 조만간 ‘이집트’에 오고 말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요셉’의 형들이 보여주고 있는 뉘우침의 모습은 언젠가 모든 가족이 용서와 화해의 극적 결말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징조이기도 합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제 42장에서 ‘야곱’ 가족사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참고. 37:2). 지난 이십년 동안 ‘야곱’은 그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 ‘요셉’을 잃은 슬픔을 안고 나머지 열한 명의 아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십년 동안 ‘요셉’은 온갖 풍상과 질고 끝에 마침내 ‘이집트’ 최고 수반의 자리에 올라, 지난날들을 회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51절).
화자는 ‘이집트’에서 ‘요셉’의 삶과 경력을 세 개의 막(幕)에 걸쳐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각각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39:1-20; 39:21-40:23; 41:1-57). 제 1막에서, ‘요셉’은 ‘이집트’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총무이자 수석 비서가 되었으며, 제 2막에서는 궁중 내 감옥의 죄수들 중에서 수석 총무가 되었고, 그리고 제 3막에서 마침내 한 나라의 총리로 등극하게 됩니다. <창세기>의 이어지는 이야기도 세 개의 막(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각 장면은 ‘야곱’ 가족의 세 번에 걸친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요셉’을 미워했던 형들에 관한 이야기이며(42:1-38), 두 번째 방문은 이들이 막내 ‘베냐민’을 대동한 여행이며(43:1-45:28), 그리고 세 번째 방문은 이들 모두와 ‘야곱’까지 포함된 것입니다(46:1-47:12). 이 세 장면을 통해서 이야기는 음악에서의 “점점 더 세게”의 기법처럼 장면이 진행될수록 극적인 감동이 그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 첫 번째 이야기는 다섯 개의 장면으로 구분되며, 약간 변형된 동심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5절을 하나의 독립된 장면, 즉 “이집트 여행”으로 간주한다면, 이러한 동심원적 구조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즉 첫 장면(1-4절)과 마지막 장면(29-38절)의 등장인물은 ‘야곱’과 그의 자식들이며 배경은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 모두 ‘베냐민’을 보내기 싫어하는 ‘야곱’의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4, 38절), 행여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야곱’의 태도와 관련된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 내에서 이 두 구절과 44:29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장면(6-17절, 18-24절)은 ‘야곱’의 아들들의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는데, 두 장면 모두 ‘요셉’과의 대면을 다루고 있으며, ‘요셉’이 이들을 아주 철저하게 심문하고 조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당연히 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특히 37장과 41장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야곱’이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가야만 하는 상황은(1-3절) 41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일곱 해 흉년에 관한 내용(41:54-57)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한 나라의 총리로서 그의 형들로부터 절을 받고 있는 장면 역시 앞의 이야기로부터(41:41-50)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형들로부터 절을 받으면서 ‘요셉’이 지난 날 그가 꾼 꿈을 생각하였다는 언급(6, 9절) 역시 지난 날 그의 “꿈 이야기”(37:5-11)를 기억나게 합니다. ‘요셉’과 그 형들의 대화중에 형들이 오래 전에 죽은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나(13절), 이 일에 대해서 자신들의 과오를 뒤늦게나마 뉘우치고 있는 모습(21-22절) 또한 지나간 이야기(37:14-36)를 기억나게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옥에 가두는 모습은(17절), 마치 지난 날 자신이 겪었던 고초를 되돌려주고 싶다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참고. 39:20-40:23).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야곱’의 비통한 절규(36-38절)는 그가 아들 ‘요셉’을 잃은 슬픔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37:33-35). 더 나아가서 이 장면은 구성 상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이집트’로 불러 내리려는 요셉’의 의지는 그를 한사코 보내기를 거절하고 있는 ‘야곱’의 태도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베냐민’을 오도록 하기 위해서 ‘시므온’을 감옥에 인질로 붙잡아 두기까지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시므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베냐민’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지독한 편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42장은 <요셉 이야기>의 핵심 부분이지만, 이 부분을 하나의 독립적인 별개 전승으로 다루어서는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자료와 편집. 42장에 대한 자료비평의 입장은 크게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1) 본문의 기본 골격은 “엘로힘 자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만 27-28절, 및 38절 만이 “야훼자료”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다; (2) 여러 “야훼자료”들이 본문 전체에 흩어져 있는 양상이다(예: 2-3절상, 4절하, 5, 7, 9절하, 10-12, 27-28, 38절).
後者의 입장이 근거하고 있는 바는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 바 문학적 반복(doublet)입니다. 즉 주로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야훼 자료”는 ‘히브리’ 문학의 특징 상 동일한 내용에 대한 반복적 서술이 자주 등장할 수 있다는 데 근거한 것입니다. 예컨대, 27-28절의 내용 즉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여러 자루 중 하나를 풀어보는 이야기는 35절에서 여러 자루를 한꺼번에 풀어보는 이야기에 대한 전형적인 반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8절을 “엘로힘 자료”가 아닌 “야훼 자료”로 구분하는 것은 이 구절에서 42장의 주요 등장인물 중의 하나인 ‘시므온’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는 43:1-10의 본문에서도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참고로 두 번째 방문 이야기(43-44장)는 “엘로힘 자료”에 속하는 첫 번째 방문 이야기에 병행하는 “야훼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그렇게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두 곳에서(38절, 43:1-10) ‘시므온’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는 것은 자료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야곱’이 ‘시므온’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므온’은 ‘레아’의 아들이지 ‘요셉’이나 ‘베냐민’처럼 ‘라헬’의 자식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43장은 논리적으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42장의 마지막 구절(38절)에서 볼 수 있는 ‘야곱’의 비통한 외침은 하나의 에피소드의 결론으로 삼기에 충분하며, 이는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기법이기도 합니다(예: 27:45; 29:14; 30:24; 34:31; 37:35; 45:28). 그리고 두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자루를 풀어보는 이야기”(27-28절; 35절)도 반드시 동일한 이야기의 반복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첫 번째 장면에서 조성된 긴장과 서스펜스가 두 번째 장면에 이르러 극적인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즉 ‘가나안’ 귀향길에 형제 중의 하나가 자루를 풀어보고 그 안에 돈이 든 것을 발견하였으니 그가 절도 혐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염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 집에 돌아와 각자의 자루를 풀어보니 모든 자루 속에 돈이 다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앞으로 있을 두 번째 방문에서 절도죄로 체포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 이 두 사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두 사건의 선후를 놓고, 두 번째 기록(35절)이 후대의 편집적 삽입이라고 하는가 하면(Redford, Westermann), 반대로 이 구절이야말로 원 이야기의 핵심 부분인 것이 ‘야곱’이 이를 통해서 ‘시므온’이 팔린 것으로 단정 짓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5절에 이어 36절에서 그의 절규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장면에 대한 자료비평적 입장이 어떠하든 42장은 이전 장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서 단일 전승으로서 <요셉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야곱의 독촉(1-4절)
첫 번째 장면에서 ‘야곱’이 이야기의 주요 인물로 다시 등장하고 있으며(화자는 그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면서 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자식들을 ‘이집트’로 내려 보내는 일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1-2절)
‘야곱’은 지금 자식들의 우유부단(優柔不斷)함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왜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느냐는 것이겠지요. 이 단락에서 ‘가나안’에도 기근이 들었다는 화자의 언급은 없습니다만, “온 땅에 기근이 덮쳤다”는 앞 이야기의 진술(41:57)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두 이야기의 연결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야곱’이 여전히 가장으로서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의 이런 모습은 이전에 그의 딸 ‘디나’가 ‘세겜’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을 때 보여준 우유부단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도 사실입니다(참고. 34:31). 하지만 이야기의 끝에 가면 그는 다시 한 번 특유의 유약함을 보여주게 될 것인데, 아들 ‘베냐민’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이집트’로 재차 보내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입니다(36-38절).
“서로 바라보다”(ha;r, 라아)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대로 이해하자면, “싸움에서 서로 노려보다”는 의미일 것입니다만(왕하 14:8; 대하 25:17, 21), 이곳에서도 과연 그러한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집트’에 양식이 많이 있다는 사실, 즉 ‘야곱’이 알고 있는 정보를 자식들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 본문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만약 자식들이 이 사실을 정말 몰랐다고 한다면, ‘야곱’은 그들을 ‘가나안’으로부터 구출해주는 구원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편 ‘요셉’은 ‘이집트’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또 다른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이를 예고라도 하듯 화자가 ‘야곱’의 자식들을 “요셉의 형”으로 부르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보여줄 이들의 역할을 암시해 주는 진술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3절)
그러나 ‘야곱’의 아들은 ‘요셉’을 제외한다 해도 열한 명입니다. 그런데 왜 열 사람인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가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양식을 가져오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우리는 다음 절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4절)
‘야곱’ 자신은 너무 늙어 가지 못했을 것이며, 막내아들 ‘베냐민’은 왜 보내지 않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편애”의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에게 진정한 아내는 ‘라헬’이며, 진정한 아들은 당연히 ‘요셉’과 ‘베냐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애비의 권위에 순종하여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2. 요셉과 형제들: 첫 대면(5-17절)
두 번째 장면은 ‘요셉’과 그 형들의 첫 번째 대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요셉’과 그의 형들을 여러 각도에서 대조적으로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대조적인 모습은 무엇보다도 ‘요셉’과 형들이 처해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온 땅의 지배자로, 그의 형들은 양식이 필요해서 도움을 받고자 찾아온 수없이 많은 무리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상황에 처해 있는 상대가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상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서, ‘요셉’이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반면에 그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이러한 차이를 바탕으로 형들의 본심, 즉 그들이 아직도 이십년 전과 같이 무정하고 잔인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새로운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일종의 전이구절로써 두 장면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5절)
화자는 이곳에서 비로소 ‘가나안’에도 기근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내용 상 앞 단락의 마지막 구절(41:57)에 연결됨이 마땅하며, 42:1-4과 함께 읽을 때, 누가 그리고 왜 ‘이집트’에 내려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들 일행 중에 ‘야곱’과 ‘베냐민’이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요셉’이 자기를 찾은 형들의 방문 목적을 시험해 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들을 “‘야곱’의 아들들”로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로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슨 특별한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만, 다른 곳에서 ‘이집트’ 방문과 관련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선호하고 있는 점은 주목해 볼 만 합니다(참고. 43:6, 8, 11; 45:28; 46:1, 2, 29, 30; 47:27; 45:21; 46:5, 8; 50:25). 하나의 조그만 씨족 내지는 부족으로 ‘이집트’를 찾는 이들의 모습은 먼 훗날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양식을 구걸하기 위해 몰려오는 ‘셈’족의 한 무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있었다”는 표현은 “반(反) 출애굽”의 모티브로서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은 기근을 피하여 그 땅으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12:10; 26:1).
두 번째 단락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장면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6절)
이 장면은 ‘요셉’의 “꿈”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의 꿈이 일부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요셉’의 두 직책을 그의 “두 번의 꿈”과 연계시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의 정치적인 직함은 “총리”(fyLiv, 샬리트)이며, 경제적인 직함은 “양식을 파는 자”(ryBiv]M'h, 함마샤바르)입니다. 동시 ‘샤바르’(rb'v)는 ‘셰베르’(rb,v,: 양식, 곡식)에서 유래했으며, “곡식을 사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20회 등장하고 있으며, ‘칼’형과 ‘니팔’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칼’형에서 이 단어는 “곡식을 사다”는 의미이며(창 42:2; 42:7; 43:2, 4); (2) ‘히필’형에서는 “곡식을 팔다”는 의미입니다(창 42:6; 신 2:28; 잠 11:26; 암 8:5-6).
그의 형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는 장면에서, ‘요셉’의 첫 번째 꿈 즉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이 그 앞에서 절하는”(37:9) 꿈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형들이 곡식을 위하여 그를 찾아오는 장면에서, 두 번째 꿈 즉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 절하는”(37:7) 꿈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V. Hamilton). V. Hamilton, 519쪽.
‘요셉’ 자신도 ‘바로’가 꾼 두 번의 꿈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정하셨으며, 속히 행하시리라는 징조”라고 해석해 준 바도 있기에(41:32), 이 장면 역시 동일 선상에서 이해한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자리에는 ‘요셉’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해와 달”, 그리고 ‘베냐민’ 즉 “열 한 별” 중의 하나가 빠져 있다는 점에서 “요셉의 두 번의 꿈”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꿈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지나간 일들을 다시 회상해 볼 수 있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지나간 일들이라 함은 피차 기억하기 싫은 과거지사로서, 20년 전 ‘가나안’에서 ‘요셉’의 형들이 저질렀던 그 일을 말합니다(참고 37장). 화자는 이를 일련의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7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7-8절)
이 두 구절이 37장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지는 다음 두 구절과의 비교를 통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32그의 채색 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알아)보소서 하매, 33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37:32-33)
화자는 두 본문에서 동일한 단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요셉’의 형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본문의 핵심어는 “알아채다”, “인식하다”, “주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나카르’(rk'n)입니다. 이 단어는 7-8절 사이에서 처음에는 ‘히필’형으로, 다음에는 ‘힛트파엘’형으로, 그리고 다시 ‘히필’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알았으나”, “모르는 체 하고”; “알아보지 못하더라.” 이 단어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38장)에서도 사용된 바 있습니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 하였더라”(38:25-26).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모른 체하다”(התנכר, 핫나카르)는 37:18에서 사용한 바 있는 동사 “(죽이기를) 꾀하다”(התנכל, 핫나칼)와는 마지막 철자만 다르다는 점에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로, 두 자음 ר과 ל는 각기 영어의 R과 L에 해당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과거의 일을 다시 들추어내는 화자의 의도는 상당히 암시적으로 보입니다. 혹시 ‘요셉’이 그답지 않게 자신의 신분을 숨겨가면서까지 형들을 시험하고, 심문하는 등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려 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형들이 그런 식으로 대접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서 自業自得이라는 점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화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요셉’의 인격에 대한 단세포적인 접근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격이란 양단 논리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자의 침묵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하겠으며,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통해서 다양한 ‘요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는 앞으로 있을 형제들 간의 세 번의 극적인 대화중에서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9절)
마치 정치 청문회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실은 전체 대화의 핵심은 그들 사이에 놓인 본질적인 혈연의 문제를 포함해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과거사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대화가 갖는 역설은 ‘요셉’이나 일반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요셉’의 형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요셉’이 형들에게 씌우고 있는 “간첩죄” 혐의가 그것입니다. 간첩 이야기나 간첩 혐의를 씌우는 이야기 등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출애굽>의 배경에도 이스라엘이 주변국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바로’가 있으며(출 1:9-10), ‘암몬’ 왕 ‘하눈’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다윗’이 조문객을 보내자 자기 나라를 염탐하러 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삼하 10:3).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온 것이 군사적 기밀을 알기 위한 것이므로 그를 죽여야 한다고 간언하고 있습니다(삼하 3:25).
‘요셉’은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죄목(罪目)은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틈”(hw:r][, 에르와)은 문자적으로 “수치”, “나체”, 또는 “헐벗음” 등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이 표현 역시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는데, 이전에 그는 “옷이 찢기고 벌거벗긴 채” 동굴 속에 던져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37:23-24). <구약>에서 “나체”는 “수치”를 의미하며, “누가 누구의 나체를 본다”는 표현은 “성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며, 특히 그 상대가 가족인 경우에 근친상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레 20:17). 참고로, ‘함’은 아버지 ‘노아’의 나체를 본 죄로 저주를 받은 바 있기도 합니다(창 9:22).
혹시 ‘요셉’은 자기 형들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이와 같은 근친상간의 패륜과 맞먹는 것이었음을 암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답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의 화자는 아주 이례적으로 등장인물의 속마음까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요셉’이 이전에 꾼 꿈을 생각하면서 형들을 추궁하고 있다는 설명이 그것입니다(9절상). 적어도 이 진술에 따르면 ‘요셉’은 지금 감정 조절에 실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일견 균형을 잃고 있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들 ‘므낫세’를 낳고는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했고(참고. 41:51),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낳고는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참고. 41:52). 과거를 용서하고 현재에 만족해했던 그가 형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쓰라린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를 분노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즉각적으로, 그리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10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10-11절)
이들의 자기 변론은 네 개의 짧은 반박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문장은 접속사나 관계 대명사로 연결됨이 없이 독자적인 기능을 하고 있어, 이런 방식의 구문(構文)을 ‘asyndeton’이라 합니다. 예: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I came, I saw, I conquered); “웃고 악수하고, 헤어지라”(Smile, shake hands, part).
마치 일련의 목소리가 상호 공명을 이루어 반박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네 개의 문장은 구조적으로 부정문-긍정문-긍정문-부정문의 교차대구를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처음과 마지막 문장은 동일한 자기부인(自己 否認), 즉 “우리는...아니니이다”는 시적 수미상관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 선언”의 효과를 절정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며 인정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간첩이 아니며, 곡물을 사러 왔을 뿐이며, 다 한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확실하다”(“정직하다”)(כן,켄)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후 아버지 ‘야곱’에게 했던 거짓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37장의 에피소드를 회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들의 주장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마치 망치로 대못을 박듯 종전의 주장을 세 번에 걸쳐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12절); “너희는 정탐꾼들이라”(14절);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16절). ‘요셉’은 왜 이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그가 심문하는 방식은 마치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식의 뒤집어씌우기 입니다. 피의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 고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처음 한 두 번은 강력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다가도 끝내 항복하고 맙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수사는 여전히 여러 나라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하).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의 형들은 이번 방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까지 술술 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정직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13절)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싶어 ‘요셉’은 그토록 집요하게 형들을 추궁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는 고도로 숙달된 고문 전문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형들의 고백에서 그가 관심을 가질 만 한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되었는데, 막내에 관한 내용입니다. 형들이 이복동생인 자신에게 그토록 몹쓸 짓을 했다면, ‘베냐민’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까? 아직 사실 유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궁금증은 일단 풀렸으며, 남은 일이 있다면 진실 여부를 가려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는 이미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형들의 고백을 짐짓 듣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같은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14절)
그러나 이 구절은 13절과는 논리적으로 연결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즉 막내에 관한 이야기와 간첩 혐의가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장면을 ‘요셉’이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일시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북받쳐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은 형들의 진술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기 위하여 하나의 시험을 고안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시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15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15-16절)
시험 문제는 막내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또한 맹세 또는 언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이 표현은 전형적인 히브리 식 언약,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계심으로 맹세하노니”(삼하 15:21)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만, 어떻게 이런 표현이 본문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바로’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것은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자신이 제출한 시험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조치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17절)
즉 형들을 감옥에 가둔 조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수감시키다”(#s'a, 아사프)는 문자적으로, “모으다” 또는 “거두어들이다”는 의미로서, 다른 곳에서 같은 의미로 수차례 사용한 바 있는 단어 ‘나탄’(@t'n)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참고. 40:3, 4, 7). ‘아사프’는 ‘요셉’과 발음이 유사하여 이곳에서 또 한 번 언어의 유희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리하여 그가 가두었다”는 발음은 “그리하여 요셉이”의 발음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요셉’의 이 조치는 보복성이 짙은 행동임에 분명합니다. 이전에 자신이 ‘이집트’의 감옥에 갇힌 것도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형들 때문이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그 형들이 빚을 되갚아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형들의 편에서 보자면, ‘요셉’이 정말 자기들을 간첩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음에 분명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삼일”이 주는 의미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도 아들 ‘이삭’을 바치는 일과 관련해서 삼일 간의 시험을 거친바 있습니다(22:4).
3. 요셉과 형제들: 두 번째 대면(18-24절)
‘요셉’과 형들의 두 번째 대면은 단순히 여백 채우기 수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등장인물 모두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요셉’의 경우, 형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보다 훨씬 신사적이며, 동정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형들의 안녕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또한 처음 계획도 바꾸고 있습니다. 원래 ‘베냐민’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모든 형제들을 감옥에 가두었으나, 이번에는 ‘시므온’만 남겨두고 모두 가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다시 한 번 “가나안에서 있었던 일”(37장)을 기억나게 해줍니다. ‘요셉’의 형들 역시 지난 시절 처음에는 ‘요셉’을 땅 굴속에 쳐 넣어 죽이려 하였으나, 생각을 바꾸어 지나가는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생명은 보존시켜 준 바 있습니다.
변화는 형들에게 더욱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난 시절 ‘요셉’에게 행했던 일을 두고 반성하고 후회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도 자신들의 지난 잘못 때문일 것이라는 고백도 쏟아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형들을 이처럼 변화시켰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 화해(和解)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우선 ‘요셉’의 태도변화 즉 그의 두 번째 계획부터 살펴볼 차례입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18절)
형들을 옥에 가둔지 사흘 만에 ‘요셉’은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설명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어 두 번째 계획으로 나아가게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혹시 형들을 옥에 가둔 것이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형들을 두렵게 만들어 자신들의 지난 행적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혹시 열 명 중에 아홉은 남겨두고 한 명만 돌려보내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아예 나타나지도 않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반대로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아홉을 양식과 함께 돌려보내면 더 많은 양식을 보낼 수 있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요셉’이 무슨 생각으로 처음 계획을 바꾸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의 동기는 아주 지고(至高)하고 순수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너희는 생명을 보전하라.” 그는 간첩 혐의자들을 살려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형들에게 이 말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며, 그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약속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담보이자 보장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극적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요셉’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형들의 모습과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요셉’의 모습 말입니다!
대조는 이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족장들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과도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족장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족장들은 훌륭한 역할모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만나면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을 내팽개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서,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20:11; 참고. 12:12), ‘야곱’도 ‘세겜’ 땅에서 ‘디나’ 문제로 이방인들의 복수를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34:30). ‘요셉’의 소명은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일임에 틀림없지만(45:7; 47:25; 50:20), 그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가는 종교적 책무는, <구약>에 따르면,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 1:7; 전 12:13; 레 19:14; 신 6:2, 13).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을 ‘요셉’이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욥 29:12-13; 잠 31:20).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19절)
이어서 ‘요셉’은 왜 그들을 방면하는지 처음으로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있습니다. 돌아가서 막내를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20절)
하지만 열 명 중에서 누가 남을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요셉’이 의도하는 바는 이들에게 그가 받았던 고통을 단순히 되갚아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시 년 전에 그들이 저질렀던 일을 돌아보도록 하려했던 것이 아닐까요? 과연 그의 의도는 그대로 적중되고 있습니다.
21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21-22절)
이들의 대화는 단순히 이전에 있었던 일(37:12-30)을 다시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요셉’이 형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었는지를 새롭게 알게 됩니다. 당시 일을 기록하고 있는 37장은 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준 바가 없습니다. 다만 당시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추측해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은, 그가 울면서 형들의 선처를 애걸했다는 점입니다. ‘요셉’이 겪었다는 “마음의 괴로움”(hr;x, 차라)은 일단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 예컨대 출산의 고통이나 적의 침공을 받고서 느끼는 극단의 공포심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35:3; 신 31:17; 왕하 19:3). 지금 형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을 ‘요셉’이 당시 겪었던 그 고통과 극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동시에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의 섭리, 즉 인과응보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합니다.
‘르우벤’도 그들의 고통에 쐐기를 박듯 한 마디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다.” <창세기>는 살인한 자가 받게 될 “피의 복수”에 대해서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창 9:5). ‘르우벤’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형제들 중 아무도 장자인 자기에게 ‘요셉’의 일에 관해서 정확하게 알려준 것 같지는 않으며, 그 역시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유괴 당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해도, “유괴죄” 역시 살인죄에 맞먹는 중형(重刑)으로서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습니다(출 21:16).
‘르우벤’의 이 말은 ‘요셉’에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지금 처음으로 ‘르우벤’은 나머지 형제들의 음모에 가담하거나 공모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르우벤’이 아닌 둘째 형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요셉’이 ‘라헬’의 둘째 아들 ‘베냐민’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레아’의 둘째 아들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두고 싶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Sternberg).
이 모든 형제들 간의 대화가 ‘요셉’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설마 ‘요셉’이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통역관을 그들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23절)
‘요셉’과 형들의 두 번째 대면은 단순히 여백 채우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다루고 있다고 이 단락의 벽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요셉’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고(24절)
그의 눈물입니다. 감격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줄줄이 이어질 여러 차례의 눈물, 즉 ‘베냐민’과의 극적인 상봉에서 흘리게 될 눈물(43:30),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해서 인질로 남겠다고 자원하고 나설 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흘리게 될 눈물(46:29), 그리고 아버지 ‘야곱’을 포함한 온 가족의 상봉에서 흘리게 될 그 모든 눈물의 서막에 해당하는 눈물이기도 합니다. 이제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는 등 여전히 형제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여전히 형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형들의 회개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대 화해는 궁극적으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4. 가나안 귀환(25-28절)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요셉’ 형제들을 다루고 있는 이 짧은 단락은 전체 이야기에 신비감과 함께 극적 요소를 더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의 속마음에 대해서 더 깊은 통찰을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선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행동 때문입니다.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25절)
왜 그는 각 사람의 자루에 돈을 넣게 한 것일까? 형제들에 대한 배려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형들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우려 함일까? 이십 년 전 형들이 돈을 받고 기꺼이 자기를 팔아넘긴 그 상황을 재현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즉 이번에도 이전에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형제 ‘시므온’과 돈 중에서 후자를 선호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여러 가능성 중에서 굳이 한 가지 만을 선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요셉’의 의도는 아주 복합적이었을 것입니다(Westermann).
‘요셉’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나중에 자루 속에 돈이 든 것을 발견하고 형제들은 두려움으로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27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28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27-28절)
그들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 위에 임했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일을 ‘요셉’이 일부러 꾸민 짓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매사를 하나님의 개입으로 받아들이게 했을까? 무엇이 이 뜻밖의 사태를 하나님의 진노로 받아들이게 했을까? 추측컨대, ‘요셉’과의 두 번째 대면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양심이 되살아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Wenham). 형제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문자적으로 “정신이 나가다”입니다.
5. 귀환 보고(29-38절)
마지막 장면은 ‘가나안’ ‘야곱’의 집입니다. 이야기는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귀환 보고를 하고 있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29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30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31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32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33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34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29-34절)
이 장면을 보다 흥미롭게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보고 내용과, 동일한 내용에 대한 화자 자신의 진술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6-24절). 그리고 동시에 이들 형제가 오래 전에 ‘요셉’의 옷을 아비에게 보여주면서 보고했던 내용(37:32-35)과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있어 ‘시므온’을 ‘이집트’에 남겨두었다는 사실은 이전에 ‘요셉’을 잃었던 그 일이 재현되는 것과 사실상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42:36).
이 장면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그 사람, 그 땅의 주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30, 33절). ‘요셉’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를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들은 결국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요셉’의 꿈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 내용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에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혐의를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가족사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다고 아버지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만, 화자의 진술 내용은 이들의 보고와는 사뭇 다릅니다.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가족에 관한 내용을 먼저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11절 참고).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민감한 사안, 즉 ‘베냐민’에 관한 내용을 털어놓았다는 점은 가능한 한 가장 마지막에 슬쩍 언급하고 지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가나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요셉’ 앞에서 진술하였다고 ‘야곱’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요셉’과 대면 중에는 그 순서를 바꾸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가장 나중에 슬쩍 언급함으로써 듣는 이의 충격을 완화시켜 보려는 상투적인 의도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의 내용을 바꿀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보고 내용에서 아예 빼버릴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그들이 삼일 동안 구금을 당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19, 24절). 또한 ‘시므온’을 두고 온 점에 대해서도 그가 인질로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간청에 못이겨 영빈(迎賓)의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그들 모두를 죽이겠다는 ‘요셉’의 경고(20절)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하지도 않았던 약속, 즉 그들이 이 나라에서 마음대로 “왕래하며 무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꾸며내기도 합니다(3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자루에서 돈을 발견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야곱’의 의심과 두려움을 완화시켜보려는 이들의 노력은 과연 성공을 거두었을까? 그렇지 못합니다. 자식들의 보고를 듣는 내내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뭐라 하든, ‘시므온’이 함께 오지 않았어. 그리고 이제 ‘베냐민’마저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화자는 ‘야곱’의 이러한 반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전에 일견 일탈(逸脫)과도 같은 한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앞에서 일차 언급한 바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루에 든 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35절)
이 구절은 구문 상 34절과는 일정 시간이 흘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자루에 든 돈을 발견하고 ‘야곱’은 물론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미 앞에서 적어도 자기들 중 한 사람의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27-28절). 그런데 왜 이 장면에서 다시 놀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본문의 관계를 자료비평적인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참고. “문학과 역사”), 보다 최근의 자료비평 진영의 입장은 35절을 단지 27-28절에 대한 요약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보다 흥미로운 견해는 ‘야곱’과 그의 자식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놀라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Sternberg). 즉 ‘야곱’의 자식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로 인정한 바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크게 임할 것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는 자루 하나가 아니라 모든 자루 속에 다 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놀라고 있는 이유는 분명치가 않으며, 그래서 더 끔찍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므온’이 사라진 자리에 돈이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야곱’의 판단입니다. 어딘지 수상쩍고 수수께끼 같은 자식들의 보고, 난데없는 돈다발의 출현, 이 정황들을 곰곰이 분석해 볼 때, 점점 확실한 그 무엇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아이들이 ‘시므온’을 노예로 팔아넘긴 것이 분명해. 이놈들은 지금 일부러 놀라는 척 하고 있으며 무엇인가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해.”
그러나 이런 생각을 그대로 발설하기에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일일 것입니다만, 화자는 ‘야곱’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오고갔을 것이라는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
‘야곱’이 그의 자식들을 비난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자식들에 대한 그의 의심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튼 현재 자식들에 대한 그의 의구심은 이전에 ‘요셉’이 죽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아닐 수 없습니다(참고 37장). 그 당시 그는 자식들의 보고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야곱’과 그의 자식들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은 이전에 ‘요셉’과 그의 형들 사이에 있었던 것만큼이나 깊고도 넓다 하겠습니다. 당시 분열과 대립의 피해자가 ‘요셉’과 ‘야곱’ 자신이었다면, 이번에는 ‘야곱’ 혼자 그 모든 아픔과 상처를 다 감당해야 할 판입니다. 그의 울부짖음은 이전에 ‘요셉’을 덮쳤던 그 운명과 지금 ‘시므온’에게 덮친 그 운명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요셉도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야곱’의 비난은 타당한 것이고 이해할 만합니다. 그리고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이 그러한데 어느 아들이 감히 나서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반박할 수 있겠으며,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르우벤’의 반응은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화가 난 모습이며, 그의 제안은 무모하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37절)
어쩌면 그의 제안은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두 아들을 담보로 맡겨두겠다는 태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야곱’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어떻게 ‘르우벤’의 두 아들 즉 자기 손자들을 잡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손실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나 보상이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제안은 ‘롯’의 제안과 흡사합니다. ‘롯’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 집에 묵고 있는 손님을 해하려 하자 대신 그의 두 딸을 주겠다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19:8). 지극히 관대하지만 동시에 아주 어리석은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한 생명을 살리는 대가로 두 생명을 죽이겠다는 발상입니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이는 무모한 발상이며 감정의 과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이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의구심만 더 키웠을 뿐입니다. ‘야곱’은 어쩌면 이들이 ‘요셉’은 물론 ‘시므온’까지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단호히 ‘르우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38절)
그는 ‘르우벤’ 뿐만 아니라 이들 형제 모두에게 울부짖듯 말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그의 두 아들을 희생시킬 용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야곱’은 ‘베냐민’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베냐민’을 “너희들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내 아들”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라헬’과 그의 두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편애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의도했던 아니든 간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양식이 더 필요하며, 나머지 자식들이 ‘이집트’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베냐민’만은 보낼 수 없습니다. ‘야곱’에게 있어 ‘시므온’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베냐민’이 형들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베냐민’ 없는 인생은 지옥의 삶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절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20년 전에 ‘요셉’을 잃었을 때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35:37)고 절규하던 모습을 기억나게 해줍니다. ‘요셉’이 없는 지금 ‘베냐민’은 그에게 있어 사실상의 첫 아들인 셈입니다. 대 화해를 위해서 아직도 넘어야 할 산, 즉 회개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의 절규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하나님과 양심: 기근
해 시계. 도대체 양심이란 무엇일까? <성경>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인간이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정부는 1811년 이후부터 “연방 양심 재단”(the Federal Conscience Fund)이라는 것을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익명의 기부자들이 보내온 범칙금을 바탕으로 조성된 것인데, 범칙금이라고 하는 것이 정부가 부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양심에 따라 부과하여 납부한 것으로서 그 종류도 각양각색입니다. 예를 들어, 한 군인이 전역하면서 기념품으로 몰래 들고 나온 담요에 대해 훗날 양심의 가책을 느껴 보낸 담요 값이라든지, 우표를 붙이지 않고 보낸 편지에 대해서 나중에 보낸 우표 값이나, 누락된 세금, 그리고 한 과부가 우연히 죽은 남편의 책을 뒤적이다가 그가 정부 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나중에 되갚은 공금 등이 있습니다. 현재 양심 재단에 모인 돈 액수는 수백만 불에 이른다고 합니다.
양심을 소재(素材)로 한 문학 작품도 不知其數입니다. 유명한 <햄릿>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주인공 ‘햄릿’은 극중에서,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삼촌 ‘클라우디우스’(Claudius) 왕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를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양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쉐익스피어’의 또 다른 원작 <리차드 3세>의 가장 사악한 주인공 ‘리차드 3세’조차도 때로는 양심의 문제로 다음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 양심은 수천 개의 혀를 가지고 있구나
그 모든 혀들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한 결 같이 나를 악당이라 저주하고 있구나
<리차드 3세>, 5장 3막
그러나 그는 양심의 고발에 굴하지 않고, 그에 대항하여 이겼노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양심아, 물러가라. 리차드가 돌아왔도다”(5장 3막). “리차드가 옛날로 돌아왔다”(Richard's himself again)는 표현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보다 폭넓게는 “실망, 공포, 질병 등에서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과연 양심이란 무엇일까?” ‘햄릿’이나 ‘리차드 3세’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양심을 “해 시계”로 부르기도 합니다.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지만,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시계 말입니다. 한 밤중에 성냥불을 켜서 “해 시계”를 보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대중없습니다. 밤 아홉시가 되기도 하고, 자정이 되기도 합니다. 양심은 마치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정치적 입장과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형편이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충고는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양심은 사람의 잘못된 행위를 고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변명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스’ 목사님은 양심은 마치 서커스의 곡예부리는 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개가 조련사의 호각에 따라 매 번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데서 착안한 비유로 보입니다. 즉 호각을 한 번 불면 두 발을 들고 일어섰다가, 두 번째 호각 소리에는 주변을 맴돌다가, 세 번째 호각 소리에 드러누워 죽은 체 하는 등, 시시각각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 본문은 바로 이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핵심 주제는 아닙니다만, “야곱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이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라면, ‘요셉’의 형들은 먼저 자신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 내지는 “양심의 고발”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가해자의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양심의 고발”은 회개를 위한 첫 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복음을 들려주기 전에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 시계”가 어떻게 다시 재깍거리며 작동할 수 있을까? 빛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양심이 어떻게 “고발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지난 세월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 즉 동생을 팔아넘긴 사실을 놓고 얼마나 후회하고 뉘우쳤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놓고 얼마나 씨름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십중팔구 ‘리차드 3세’처럼 양심을 묻어놓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 스스로 빛 가운데로 걸어 나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의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이들은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려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구원이 필요한 영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 잠자는 양심이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이들은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까? 어떻게 말을 달리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서커스 조련사가 개를 훈련시킬 수 있을까? 당근과 채찍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둘을 적절히 번갈아 가며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만, 이번에 그분의 손에 드신 것은 당근이 아니라 채찍입니다. “기근(饑饉)의 채찍”입니다.
그분께서 ‘야곱’을 통해서 울리시는 첫 번째 경고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참고. 1-2절). ‘야곱’의 질책은 익살스럽기조차 합니다. 이들 형제들이 서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다는 표현이 그렇고, ‘애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들 형제들이 “애굽의 풍요”에 대해서 들었을 때 보인 반응이 이처럼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일시에 쳐다보는 장면이 익살스럽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양 속담에, “교수형 집행인의 집에서 밧줄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이들이 “애굽의 풍요”에 대해서 들었을 때,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내심 깜짝 놀라 서로를 응시했다는 것이겠지요. ‘야곱’의 질책이 그들의 잠자던 양심을 일깨웠나 봅니다. 그들이 한 행동, 즉 지나가던 상인들을 통해서 동생을 팔아넘긴 그 나라의 이름을 이십 년 전만에 다시 들었을 때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그동안 아비에게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왔던 그 이름을 이제 다른 사람 아닌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듣게 되었을 때, 각자의 양심은 화들짝 놀라 깨어 일어나 서로의 양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르우벤’을, ‘르우벤’은 ‘시므온’을, 그리고 ‘레위’는 ‘스불론’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집트래, 이집트 말이야.” 양심은 이제 이들 모두를 겁에 질려 떨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 이들이 ‘이집트’에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을 보면서, 양심이 아직 완전히 죽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집트’를 언급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역시 ‘리차드 3세’처럼 깨어난 양심을 다시 깔아 뭉긴 채 나머지 인생을 지금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첫 번째 채찍이 바로 “기근”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나안’에서 자족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황금 연못”을 떠나 새로운 연못 즉 ‘이집트’를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집트’가 어떤 곳입니까? 그들이 가장 가기 싫은 곳입니다. 이들 모두는 한 결 같이 다음과 같이 되 뇌이고 있을 것입니다: “왜 하필 이집트람.” 그곳에 누가 있습니까? 그들이 노예로 팔아넘긴 ‘요셉’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를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가 혹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고민조차도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나안’은 물론 ‘이집트’에서조차 몇 년 채 계속된 가뭄으로 곡식은 물론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곳에 그냥 눌러 앉아 있어도 죽기는 매 일반입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서양 속담에 “궁(窮)하면 하지 않을 수 없다”(Needs must when the devil drives)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마귀가 내몰면 어쩔 수 없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결과입니다. 따라서 속담도 다음과 같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Needs must when God drives.”
하나님께서 이들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방탕한 여인 ‘고멜’의 경우 역시 하나의 고전적인 예로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다만 ‘고멜’의 경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이 자연적인 재앙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멜’은 남편 ‘호세아’를 내버리고 연인을 따라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호 2:5).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갈구했던 이 모든 것들을 제공해 준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남편 ‘호세아’였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하지만 바람난 여자가 이를 알 리가 없습니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9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1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2:9,11-1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근 대신 채찍을 드신 것입니다. ‘호세아’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아모스’ 선지자도 역시 환난과 기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6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9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6-7, 9-10)
이처럼 온갖 종류의 재앙이나 환란이 하나님의 채찍으로 제대로 기능했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이스라엘이 제대로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경고를 경고로 받아들이지 못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기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실은 영적인 기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데서 오는 기근이었습니다. 왜 듣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입을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입을 닫으셨을까? 그들이 듣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훈계와 질책을 듣기 좋아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신화(神話)가 하나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서점가에 넘치는 수없이 많은 자기 개발 관련 책이나 상담심리 관련 책들이 한 결 같이 이 신화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채찍대신 당근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러한대도 왜 하나님은 당근 대신 채찍을 즐겨 사용하시는 것일까? 왜 이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주는 대신 싫어하는 것을 주려했던 것일까?
아무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바대로 해주셨습니다. 즉 그분의 입을 닫아버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 떡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만, 떡만으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떡이 없어도 영원히 살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신 8:3)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 5:39)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구했습니다.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구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애타게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 때문에 목말라 합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 때문입니까?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것 때문입니까?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과 양심: 말씀
곤장과 돌멩이. 흔히 <돌아온 탕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3-20상)
이 탕자 역시 ‘고멜’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초하여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환난을 통해서 회개에 이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만나고 있는 환난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그가 회개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채찍”은 물질적인 환난 즉 배고픔이었습니다. 탕자는 이 배고픔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배고픔과 같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환난이 늘 같은 효력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곤장이나 돌멩이”의 體罰이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육체적 상처는 아물고 나면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심한 충격 요법을 필요로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바로 이와 같은 두 번째 충격 요법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배고픔 때문에 ‘이집트’로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라면 말입니다. 이들이 필요한 양식을 얻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허기를 채우고 나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더 강력한 충격 요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6-7절). 이 장면에서 특기할 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요셉’이 형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태도, 즉 “가혹한”(hv,q, 카셰) 언사(言辭)입니다.
한낱 “엄한 소리” 즉 “가혹한 언사”가 어떻게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될 수 있을까요? 영어 권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곤장(棍杖)과 돌멩이는 내 뼈를 부수지만
말로는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네
하지만 이 노래 가사는 틀린 것입니다. 우리네 속담은 이와는 다르게 말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양 빚을 갚는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 말의 위력을 간파한 지혜의 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깊고도 오랜 상처를 남기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언어적 폭력일 것입니다. 그래서 비평이나 비난은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고 진실을 담은 것이라 해도, 당하는 자의 편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좌절감과 함께 적개심마저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때로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필자는 중학교 재학 시절 한 국어 선생님이 수업 시간 중에 나를 나무라면서 내 아버님을 인격적으로 모독했던 사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항상 그 때 수업시간에 받았던 수치심과 증오심도 함께 되살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언어의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비수같은 말. 그래서일까요?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수단에 앞서 “말씀”의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아주 자상하게 우리를 좌불안석(坐不安席)하게 만들면서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위력과 관련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요셉’이 형들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사용한 더 큰 충격 요법, 좌우에 날선 칼은 다름 아닌 비정하고도 가혹한 “언어의 칼”이었습니다. 그것도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일종의 추측성 혐의입니다: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9절하).
혹자는 ‘요셉’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양식을 구걸하러 온 형들에게 도움은커녕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형들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 너무 가혹하고 비정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요셉’이 형들을 보자마자 자기 신분을 밝히고 무조건 도움을 주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는 너무 감상적이고 순진한 태도는 아닐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요셉’을 통해서 더 큰 일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요셉’의 형들은 보통이 넘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아주 마음이 단단하고 강퍅한 자들입니다. 단순히 물질적 도움 얼마를 받았다고 해서 감지덕지(感之德之)하여, 지난날을 뉘우치고 돌아설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분하에 천문학적인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는데도 적화통일의 꿈을 버릴 것이라고 징후는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들 형제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수 년 전, ‘디나’가 ‘세겜’ 족 추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을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누이동생의 복수를 한답시고 동네 전체를 살육하고, 약탈해버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비열한 기만술로 그렇게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아버지 ‘야곱’조차도 아들들의 행위를 일컬어 악취와 구역질이 난다고 했겠습니까(34:30). 형제 중의 장남 ‘르우벤’이라는 자는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간통을 했습니다(35:22). 셋째 아들 ‘유다’는 어떻습니까? 며느리 ‘다말’을 창녀인 줄 알고 잠자리를 같이 하여 아들까지 낳게 했습니다(38장).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합심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37장). 이런 사람들이 곤장 몇 대 맞았다고 해서, 배고플 때 식량 지원 얼마 받았다고 해서, 뉘우치고 돌아설까요?
이제 우리의 관심을 ‘요셉’에게로 돌려봅시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족장 이야기>에서 족장들은 단순히 족장이 아니라, 군사적 영웅이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라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요셉’ 역시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를 혼자 내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늘 그와 함께 하셨고, 그와 대화하셨으며, 그를 보호해 오셨으며, 그를 죄 짓는 자리에 두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형들과 대면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요셉’의 “과격하고 가혹한 언사”는 복수심에 불타서 터져 나오는 ‘요셉’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탁(神託)으로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요셉’의 언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가 비정하다거나 가혹하다는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견해가 지니고 있는 감상적이고도 낭만적인 태도를 배격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화자가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요셉의 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9절).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요지인 즉은 지금 이 대면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따라서 ‘요셉’의 “가혹한 언사”도 원래 대본에 없는 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원 대본에 없는 돌출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제어하지 않았다면, 즉 그가 일순간 하나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뜻에 따랐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결코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파악했으며, 따라서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햄릿의 쥐덫. 형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고 ‘요셉’의 억지 주장에 무엇인가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과거지사를 떠올렸을까요? 마치 살인자가 체포된 후, 현장 검증을 통해서 과거 살인 행적을 재연할 때, 이전에 그가 저질렀던 끔찍한 범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리한 독자라면, ‘이집트’ 왕궁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 장면이 이십여 년 전에 ‘가나안’에서 보았던 한 장면과 ‘오버랩’되고 있음을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37장). 그 때 ‘가나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세겜’에서 양 떼를 치던 형들이 자기들 앞에 화려한 채색 옷을 입고 우쭐거리며 다가오는 ‘요셉’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필경 자신들의 비행(卑行)을 아버지에게 알려줄 “정탐꾼”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어 ‘요셉’이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9, 14절). 이 얼마나 극적인 아이러니입니까! 형들이 자신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일 때, ‘요셉’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가 형들을 찾아 온 것은 단순히 형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지금 형들 역시 똑 같은 모습으로 자신들을 향한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을 뿐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10-11절).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 속에 내던졌고, 마찬가지로 ‘요셉’은 지금 그 형들을 감옥 속에 가두어버립니다(17절).
너무나 가혹하고, 부당하며, 억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일이 메마른 땅처럼 단단한 형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감옥에 갇힌 후에야 비로소,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들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뉘우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절).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쉐익스피어’의 <햄릿>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이 희곡은 양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 때문입니다. ‘햄릿’이 그의 삼촌이자 새로운 국왕의 죄악상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사용한 방식이 지금 ‘요셉’이 사용하고 있는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할 것입니다. ‘햄릿’은 삼촌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를 독살했음을 믿고 있으며, 복수를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립니다. 과연 그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틀림없을까? 심증은 있으되 물증이 없습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진실을 말해줍니다만, 여전히 그는 망설입니다. 만일 내가 틀렸다면 어쩌지? 만일 그가 아무 죄가 없다면 어떡하지? 마침내 그는 한 연극을 계획하게 됩니다. 연극의 내용인 즉은 그의 아버지가 꿈속에서 알려준 삼촌의 범죄 사실을 배우들로 하여금 무대 위에서 재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연극 제목을 “죄 덫”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 연극을 통해서 삼촌의 양심을 사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과연 왕은 연극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왕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와 외칩니다: “나에게 빛을 다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 내 죄악이 역겹고, 그 냄새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형제를 살인한 이 죄악 위에,
태초의 저주가 있을지니
<햄릿> 3장 3막
지금 ‘요셉’과 그의 형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 장면 역시 그 의도에 있어 <햄릿>의 “쥐 덫”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이들은 제 삼자로서가 아니라, 마치 살인자가 훗날 현장 검증에서 자신의 범행을 재연하듯, 하나님이 기획하고 연출하신 이 희곡을 직접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클라우디우스’처럼 마침내 회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상처와 달리 부당하고 억울하게 입은 마음의 상처는 평생 우리를 괴롭힙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나, 예배 시에 설교를 통해서나, 학교에서 선생님의 질책을 통해서나, 또는 동료의 무심코 내뱉는 말 등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럴 경우 대개 우리는 발끈 화를 내거나,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성숙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나 ‘햄릿’의 삼촌처럼 나를 돌아보아 회개케 하는 영적인 “쥐덫”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주시는 것은 그 자체로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토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대항하거나 반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3. 하나님과 양심: 고독과 채찍
피상성의 질병.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 <영적 성장의 지름길>에서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 중의 하나가 ‘피상성’(皮相性)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경박스러움도 결국 ‘피상성’이라는 단어 하나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피상성”이란 한 마디로 “대충대충”과 사촌간입니다. 반대로 치열함이나, 끈기나, 일관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 현대인들은 이처럼 피상성의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일까? 왜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사랑을 함에 있어서나, 업무 처리를 함에 있어서나 끈기와 치열함으로 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끝내고 마는 것일까? 이는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일종의 미덕쯤으로 여기는 우리네 문화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들은 한꺼번에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고, 제한된 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등의 부담을 늘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도 현실입니다. 예컨대, 여러 작품에 겹치기 출연하는 연예인일수록 인기나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대충대충 살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도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특히 두려움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랑에 빠져 나 자신을 완전히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또는 나의 사랑이 보상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과거 사랑의 상처를 크게 입은 사람일수록 더욱 크게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처음부터 기피하게 됩니다.
영적생활에서 피상성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어떤 목적이나 구체성이 없는 기도, 구체적인 적용이나 결단이 없는 예배나 설교, 체계적인 연구나 묵상이 없는 <성경> 읽기, 구체적 책임이나 돌봄이 없는 성도간의 교제 등일 것입니다. 영적생활 역시 일상생활의 한 부분 내지는 연장이라고 할 때, 사람들이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피상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우리네 경구가 결코 과장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떤 형태의 훈련이 가장 적합할까? 이들 질문에 대해서 흥미롭게도 두 가지 상반되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작은 공동체 훈련” 즉 소위 말하는 “소그룹 운동”일 것입니다. 대형 교회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작은 공동체 운동”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소그룹”인가? 이곳에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자신을 드러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계속해서 자신을 숨긴 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서 이 모임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갈등 가운데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계속 남아서 모임의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입니다. 사실 건강하고 활기 찬 모임이라면 참석하는 개개인에게 이러한 선택의 도전에 직면하도록 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목장은 과연 살아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만날 때마다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국(時局)이나 세상이나 타인에 관한 겉도는 이야기로 나에게 쏟아지는 도전을 피해가려 합니까? 이런 점에서 소그룹 지도자의 기술과 책임이 막중하다 할 것입니다.
고독의 훈련. 영적 피상성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처방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에서 말한 첫 번째 것과는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것으로서, “공동체 훈련”이 아닌 “고독”(孤獨)의 훈련일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 훈련”이 수평적 관계, 즉 인간 상호간의 피상성을 깨부수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면, “혼자 있기”는 수직적 관계, 즉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관계를 허물기 위한 것입니다.
“고독”이라! 이것은 훈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자아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그분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혼자 있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사람들은 서로 깊이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하고, 심지어 미워하기까지 하면서도 늘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 합니다. 그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혼자 외롭게 남겨져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고 두렵습니다. 신경 정신과 의사들이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에게 권하는 충고 중의 하나도 “절대 혼자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울증 환자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환자를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고독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거니와 “고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이나 성장을 원하는 자라면 홀로 하나님과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를 사로잡는 그 모든 잡다한 일상이나 사람들, 심지어 가족마저 떠나, 그분하고 단 둘이 독대(獨對)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어쩌다가 한 번이 아니라,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필자도 힘이 닿는 한, 거의 매일 하루의 십일조를 따로 떼어서 하나님과 보내고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과 성경 연구를 통해서 그분을 만나고, 대화하고, 간구하고, 또 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자 말자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3년을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은 이후 그의 삶의 진로를 정함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요한’은 ‘밧모’라 불리는 섬에서 하나님과 홀로 지내면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계시를 만나게 됩니다. ‘모세’ 역시 ‘시내’ 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홀로 지내면서 율법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고래 뱃속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리고 ‘엘리야’는 홀로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분명하고 똑똑하게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고독의 사역. 그렇다면 ‘요셉’의 형들에게도 이와 같은 “홀로 있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를 위해서 감옥만큼 더 적절한 장소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세 번째 단락의 장면은 ‘이집트’ 감옥입니다. 이 감옥 속에 ‘요셉’의 형들이 내던져져 있습니다. 이들이 겪어야 할 고초가 아직도 더 남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근이라는 자연적 재앙에 이은 가혹한 정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양심이 여전히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옥에 홀로 남겨졌을 때, 비로소 자신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고독”이 그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자신들의 죄를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단순히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에도 자신들이 동생에 대해서 한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죄책감은 느꼈을 터이지만, 그 때마다 애써 양심의 고발을 억누르고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기간은 단지 삼일에 불과했는데도, 어쩌면 이 기간 동안 이들 각자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해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요셉’ 앞에 섰을 때,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이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 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 값을 치르게 되었도다”(21-22절).
물론 이 대화는 이들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고받던 대화는 아닙니다. 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요셉’ 앞에 서서 그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일입니다. 곡식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도 좋으나 형제 중 한 사람은 인질로 남겨 두고 가야 한다는 조건부 석방 소식이 그것입니다. 이들이 지금 고통스럽게 쏟아내고 있는 양심의 고백이 이전과 무엇이 다릅니까? 비로소 내면의 소리를, 양심의 고발을, 입으로 소리 내어,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다른 ‘이집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과오나 범죄에 대하여 이토록 공개적으로 간증하도록 만들었을까요? 다소 과장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독의 훈련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독대(獨對)하는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시련 때문이든, 기도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든, 아니면 습관 때문이든, 고독의 훈련은 신앙인의 양식(糧食)이자 호흡입니다. 그리고 독대를 통해서 그분으로 하여금 잠자는 내 양심을 일깨우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만일 고독의 훈련이 여기서 끝나면, 깨어난 양심은 이내 잠자리로 되돌아가버립니다.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공개적인 간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공동체 모임이나 예배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배나 작은 공동체 모임이 진실로 역동적이고 치유의 능력이 있으려면, 바로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공개적인 결단과 간증의 헌신을 하도록 촉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수 년 동안 함께 예배를 드려오면서, 본인이 이점에 대해서 항상 강조하고 촉구해왔지만, 제 아내의 경우 단 한 번 그렇게 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헌신의 간증을 드린 분이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성경공부 후에도, 침례를 받은 후에도, 예배를 드린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결단이나 의지 표명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일까요? 부끄럽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이럴 진대 어떻게 새롭게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헌신과 결단을 촉구할 수 있겠습니까?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습관을 고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고쳐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회개해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까? 공개적으로 선언하십시오! 결단하고, 간증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걸어가십시오! 그리하여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독의 훈련이 주는 유익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을 그저 눈감고 기도하는 정도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묵상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묵상은 기도뿐만 아니라, 독서를 포함하며, 더불어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분주한 가운데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또는 길을 걸어가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별도의 시간과 장소를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마치 십일조를 드리듯 의무사항으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하루의 일과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놓아야 할 사역이자 일과입니다. 참고로,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특별한 장소와 시간을 구분해 놓았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루의 아침과 저녁; 일주일의 하루; 한 달의 처음과 마지막 날; 한 해의 네 절기; 등등.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마음대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오래 동안 교직에 몸담아 오면서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절대 다수가 대학생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절대적인 지식의 양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지성인으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문∙사회∙철학 분야의 지식은 말 할 것도 없고, 전공 지식도 해가 거듭할수록 발전과 진보를 보여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저학년 때 배운 것은 고학년이 되면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할 정도입니다. 꾸준한 반복과 연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도 별로 좋지 않으면서 노력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나마 가지고 있는 지식마저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공부는 단순히 지식만을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우수한 학생의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식의 분량은 독서 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늘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학습 능력입니다. 학습 능력이란 함은 이해력, 논리와 추론 능력, 즉 습득한 지식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학습 능력 또한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반복과 훈련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 매일 묵상은 기도와 <성경> 읽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매주 당면하는 설교나 <성경>공부 준비를 위해서라도 다른 여러 책들을 함께 읽어야 하며,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은 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기록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한 것을 읽고 또 읽으면서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칩니다. 감히 말할 수 있거니와, 필자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이런 훈련을 통해서 사고력과 논리력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교수로서, 목사로서, 가르치는 소명에 즐겨 순종하다보니 그것이 본인에게 큰 배움의 기회로 기능해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필자는 최근 들어 <욥>의 한 구절을 수시로 되뇌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이 약속은 비단 영성의 영역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 예로, 필자의 경우 이제 대학에서 정년을 몇 년 남기지 않은 시점임에도 연구 활동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왕성하고 번성해 가고 있는 것을 그것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독대도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시편>은 여러 곳에서 “야훼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섰을 때, 그분 역시 우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집트’ 감옥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과 마주 앉아 변론한 것도 바로 이를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그분은 나와도 이처럼 변론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4. 하나님과 양심: 은혜와 회개
요셉의 두 얼굴. 위대한 진리는 대개 양면성 내지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20세기 초 과학계를 놀라게 했던 “빛의 이중성”에 관한 발견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빛은 입자(粒子)이면서 동시에 파동(波動)이기도 하다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발견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비친 ‘요셉’은 어떻습니까? 다음 모습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앞에 서서 결박하고”(24절). 그는 울고 있습니다. 감격과 사랑의 눈물입니다. 형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형들의 회개에 가까운 고백과 간증을 듣고 흘리는 용서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혼자 무대 뒤에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돌아와 형들 앞에 다시 앉았을 때, 그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심문관으로 돌변합니다. 그들 중 하나를 끌어내어 결박해 버립니다. ‘지킬’과 ‘하이드’의 두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형들에게는 ‘요셉’은 일관되며 전혀 모순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렵고 무서운 존재일 뿐입니다. 자신들이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일 뿐인 것이지요. ‘요셉’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용서하고 싶어 하는 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이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역시 두 얼굴을 가지신 분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죄와 불순종으로 찌들어져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두려운 심판관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나에게 닥치는 갖가지 시련이나 환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매”가 아니라, 因果應報나 또는 自業自得에 따른 가혹한 처벌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습니다.
뜻밖의 횡재.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베푸는 “호의”(好意)나 “자비”(慈悲)는 어떻습니까? ‘요셉’이 형들의 자루에 넣어준 돈 말입니다. 당시 ‘바로’의 왕궁이 있던 ‘멤피스’는 지금의 수도(首都) ‘카이로’입니다. 이곳에서 ‘야곱’이 살고 있던 ‘가나안’의 ‘헤브론’까지는 대략 400 킬로미터로서 걸어서 적어도 3주는 족히 걸릴 거리입니다. 곡식이 든 자루를 나귀 등에 가득 싣고, 먼 귀환 길에 오른 이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이제는 살았구나.”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을까? 하지만 ‘시므온’을 남겨두고 오는 것이 미안하고, 어딘지 불안하다다는 느낌이었을까? 그래도 원하던 곡식까지 얻어 이렇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자비를 베풀어준 ‘이집트’ 총리가 그저 고맙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이들 모두는 이제 더 이상의 충격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뜻밖의 횡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뜻밖의 횡재”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누군가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곡식 자루를 풀었더니 그 속에서 돈이 나온 것입니다. 그 돈은 그들이 곡식을 사려고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 돈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뜻밖의 횡재”, 그들은 좋아라고 환호했습니까? 정 반대였습니다: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28절하).
도대체 왜 이들이 이처럼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흥미로운 발견 하나 지적합시다. 이들이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을 거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29장에서 <야곱 이야기>가 처음 시작된 이래, ‘요셉’을 제외한 ‘야곱’의 나머지 자식들이 하나님을 거명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자연의 재앙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에도, 낯선 ‘이집트’ 총리 ‘요셉’으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수모를 당할 때에도, 간첩죄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에도, 그 모든 일들을 단 한 번도 하나님과 연관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참으로 달라진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생애에 이제 무엇인가 하나의 극적 전기가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첫째, 이들은 “뜻밖의 횡재”를 “횡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간에 묻는 질문,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는 질문이 아니라, 실은 한탄과 절망이 섞인 울음인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의 지난 잘못을 결코 잊지 않고 되갚으시는구나!” 이들의 생각은 과연 옳은 것입니까? 주변 정황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찾아온 “뜻밖의 횡재”가 횡재가 아니라, 정말 죄에 대한 처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루 속에 든 돈은 ‘요셉’이 그들에게 베푼 선물이자 은혜였습니다. 그야말로 값없이 주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참고. 43:23). ‘요셉’은 그 돈으로 형들을 공포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떨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잠언서>에서도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잠 28:1)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잠언에도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말합니다. 빛에 대한 어둠의 반응이 바로 그러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둘째, ‘요셉’의 형들은 횡재를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재앙이 단순히 “자연의 인과응보”에 따라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운명의 여신”이 장난을 친 것도 아니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그 일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야훼’께서 직접 간섭하고 섭리한 결과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상황 인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인식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른 자를 그냥 두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여 대가를 치르도록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해서 <레위기>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레 26:36).
자비와 회개. 하나님의 이런 속성을 안다면,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이들 형제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자신들에게 베푼 ‘요셉’의 호의를 어찌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루 속에서 돈을 발견하고 모두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설령 이들이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값없이 주는 선물”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가르침 중의 하나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가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공짜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없습니다. 대개는 사라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에 대해서는 값을 치르지 않고 살아갑니다. 공기, 태양, 잉태와 탄생,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 등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습니까? <성경>을 제외한 그 모든 세상 철학이나 종교는 한 결 같이, “하나님의 호의(好意)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현혹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르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복음은 우리에게 찾아온 “뜻밖의 횡재”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아무 보상도 없이 자루 속에 돈을 넣어준 것처럼 말입니다.
왜 ‘요셉’은 형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을까? 왜 곡식에 더하여 돈까지 얹어주었을까? 왜 용서에 더하여 은혜까지 덧입혀 주었을까?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만일 조금이라도 무슨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은혜는 결코 은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과연 무슨 의도가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사랑과 은혜에 무슨 목적이 있고 의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은 어딘가 불완전하며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설명해 보려는 부단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랑을 ‘에로스’(eros),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 등의 범주로 나누어 이기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펙’(M. Scott. Peck) 박사님은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면서, 모든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M. Scott Peck. <아직도 가야할 길>. 신승철 이종만 역. 서울: 열음사, 1991.
우리는 이 정의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에는 정신적 성장이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목적이 있다고 하면 탐탁치 않게 여깁니다. 둘째, 사랑은 하나의 순환적 과정입니다. 타인을 성장시킴으로써 결국 나 자신을 성장시켜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을 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이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사랑이 하나의 순환적 과정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가는 것이므로 사랑은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도 됩니다. 타인의 정신적 발달에 기여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인류에 기여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없으며, 또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자가 타인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로 훈련시킬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는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노력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것도 무척 힘든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펙’ 박사님의 정의에 따르면, ‘요셉’ 역시 의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는 ‘요셉’의 의도와 관련해서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그렇습니다. 형들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조건이자 동시에 사랑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과연 ‘요셉’의 의도는 성공을 거두었습니까? 채찍이 아닌 따사로운 햇볕이 그들의 외투를 벗겼습니까? 아니면 그의 의도는 묵살되었거나 경멸을 받았습니까? 적어도 한 가지 점에 있어 그들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비록 자신들의 지난 과오에 대하여 ‘요셉’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야곱’에게는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33-34절). 일어난 모든 일을 낱낱이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아버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보기는 그들의 생애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큰 주제인 “화해”를 향한 첫 걸음인 것을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본문 이야기의 마지막에 ‘르우벤’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더욱 진일보 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이 ‘시므온’을 ‘이집트’에 붙잡아두고 있고, ‘베냐민’마저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야곱’이 절망하며 울부짖을 때, 그는 장남으로서 ‘베냐민’의 무사귀환을 약속하면서, 그 담보로 자신의 아들을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37절).
가족 간의 화해, 아버지와의 화목을 위해 아들을 내놓는 ‘르우벤’의 행위는 하나의 상징 내지는 비유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내놓은 아들은 일종의 ‘peace child’ 즉 “화목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화해를 위해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롬 5:1).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화목제물”을 내놓아야 할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원래 전쟁 중에도 지는 약자 즉 지고 있는 편이 먼저 화평을 제안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도저히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을 주도하셨고, 화목제물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신비와 자비와 사랑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와 화목하셨는데도 여전히 내가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여전히 화목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내가 겪고 있는 기근은 없습니까?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나 학대는 없습니까? 죽음보다 두려운 외로움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셉’과 그 형들을 살펴봅시다.
5. 다 나를 괴롭게 함이로다
필자가 잘 아는 동료 교수는 개인적으로 능력도 많고 실력도 있습니다. 아마 여러 조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면, 훌륭한 연구 성과들을 많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분입니다. 미국 유학 당시에도 그는 유명 대학에서 수학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의 지도교수가 훗날 노벨상을 받기도 했던 유명한 교수로부터 좋은 훈련도 받은 바 있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젊은 나이로 모교 교수로 부임하여 열정과 꿈을 가지고 교육과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 환경이 그의 의욕을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알다시피 지방대학 연구 환경이라는 것이 아주 열악할 뿐만 아니라, 연구비 수혜도 만만치 않으며, 더욱 그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의 연구실에 입학해 들어오는 대학원생의 자질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수준도 될까 말까 하는 지적 수준밖에 가지지 못한 대학원생들을 가르치며, 연구를 수행하려하니 제대로 된 연구 논문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그래도 참고 가르치려 했으나, 점차 해가 갈수록 지치고 짜증만 납니다. 이러는 동안 그는 서서히 의욕도 열정도 식어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 원인과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와 주지 못하니 연구가 계획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노와 원망과 질책을 학생들에게 쏟아 냅니다. 연구실 밖에서 동료 교수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수시로 자기 학생들에 대한 비난을 쏟아냅니다. 이 모든 불행은 내 탓이 아니라 그들 탓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을 두고, “똑똑한 내 탓이 아니라 못난 학생들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방금 말한 교수보다 더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연구뿐만 아니라, 신경 써야 할 교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큰 꿈과 의욕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갔고, 매 주일 예배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헌신과 간증이 이어지는 등 교회는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금방이라도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처음의 열기는 식어지고, 성장은 멈추면서, 나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하였고, 잘못된 원인을 교인들에게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주 열심인데, 교인들이 영 움직여 주지 않고 열의가 없다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태도는 필자의 설교에 반영되기 시작했는데, 설교의 내용도 처음 시작할 때의 격려와 희망과 꿈에서 점차 비난과 원망과 냉소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정이 식은 교인들을 자극하고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혹시 나는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내 인생의 불행이 내 탓이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주변 환경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삶은 苦海다. ‘예루살렘’ 성문 곁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요 5:5). 그는 무려 삼십팔 년을 그 연못가에 누워 기적이 일어나 자기의 병이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못의 물이 솟아오를 때, 누군가 자기를 들어 그 물속으로 집어넣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동안 아무도 그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자신이 먼저 기적의 수혜자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비정한 사람, 냉혹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기본 전제가 이랬습니다. 그의 마음의 창문에 비친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 병자와 똑 같습니다. 그의 절규를 들어봅시다: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하). 아무도 내편을 들어주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자식들이 그토록 바라던 좋은 소식은커녕 雪上加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가지고 온 곡식 자루 속에서 돈이 나오지를 않나,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고 오지를 않나, 애지중지하던 막내 ‘베냐민’을 ‘시므온’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지를 않나, 주변이 온통 원수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절상).
사실 ‘야곱’은 지금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가장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삶은 고해(苦海)다.” 석가(釋迦)는 사해(四海) 가운데서 삶을 가장 큰 苦海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이란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것이 악한 “세상” 때문에 비롯된 것이든(참고. 요 15:19), “육체의 정욕” 때문에 비롯된 것이든(참고. 갈 5:19-21), 또는 그야말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의 소행이든(벧전 5:8),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원수들임에 분명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스럽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의 절규는 진실을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면. 그러나 그가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주변에 온통 원수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모두”가 그를 해롭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모든 일에” 하나님도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 그렇습니다. 그는 이전에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나타나셨던 “벧엘의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족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3-15)
그가 지금 “벧엘의 하나님”을 잊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분께서 다시 나타나셔야 하겠습니까? 다시 새로운 약속으로 ‘야곱’을 달래주어야 하겠습니까?
‘야곱’은 어쩌면 “벧엘의 하나님”을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실 “모두”가 그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침묵을 불평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나는 정말 제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대 정말 힘이 듭니다. 왜 나는 제대로 살려고 하는데, 세상과 사람들은 온통 나를 대적하고 있습니까? 나는 제대로 하는데 왜 세상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까? 왜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까? 정말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 이 세상에 정말 나와 같은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까?”
칠천 명의 남은 자들. 나는 어떻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능력과 용기를 갖춘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기도로 이스라엘의 온 땅에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가 하면,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에서도 기도로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여 이들이 세운 제단을 모두 불태워버렸고, 이 일 후에 거짓 선지자들 모두를 도륙해 버렸으며, 다시 그의 기도로 기근이 끝났습니다.
이와 같은 영웅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분이 한껏 고무되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까? 용기백배하여 더욱 왕성하고 활기찬 사역을 이어갔습니까? 기적과 능력이 계속 그와 함께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호렙’ 산의 한 동굴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의 왕 ‘아합’과 사악한 왕비 ‘이사벨’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자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입니다.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든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목숨을 연명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부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14)
그의 불평의 요지인 즉은, “나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내편이 되어줄 주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세상과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불평입니다.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는 ‘야곱’의 원망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그 유명한 “칠천 명의 남은 자”들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강조인 즉은 ‘엘리야’와 같은 자가 무려 “칠천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와 같은 자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 즉 “소수의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the faithful minority)이라는 자신의 메시지로 삼고 있습니다(롬 9:27).
나는 어떻습니까? 오늘 나도 주님과의 “좁은 길” 여정에서 ‘야곱’이나 ‘엘리야’처럼 항상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두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할 그 칠천 명을 남겨두셨습니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없다면,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가 다시 제자를 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모두 나를 괴롭게 할 뿐이로다”고 외치는 오늘의 ‘야곱’이나 ‘엘리야’에게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34누가 정죄하리요?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대답은 무엇입니까?
37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창세기>나 <족장 이야기>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본문으로부터 이끌어 낸 일련의 설교-하나님과 양심-들은 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2.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에게 사용한 일련의 채찍들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어떤 채찍들을 어떤 순서로 사용하셨을까요?
3. “고독”을 하나님의 은사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나는 그것을 은사로 체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각자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은사를 나누어봅시다.
4.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으며, 지금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제 47과: 요셉 가족의 이집트 방문(2)
47
요셉 가족:이집트 방문(2)
(43:1-45:28)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43:15)
‘요셉’ 형제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을 담고 있는 본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론이라기보다는 <요셉 이야기>의 절정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가 <창세기>의 한 부분으로서 충실히 기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서 세부 주제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요셉의 꿈”과 관련된 것으로서, 가족 간의 “용서” 내지는 “화해”입니다. 본문을 <요셉 이야기>의 절정으로 규정하는 것도 바로 이 주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즉 ‘유다’가 이복동생 ‘베냐민’을 위하여 대신 인질이 되기를 자청하고 있으며, ‘요셉’은 이에 감동하여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장면은 배다른 형제들이 오랜 갈등과 불신을 끝내고 마침내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내는 극적인 절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언급하거니와 <창세기> 내의 모든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전체적인 이야기 틀 안에서 이해하고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족장 이야기>를 대하는 가장 우선적인 감상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의 상호관계나 심리적 변화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특정 에피소드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즉 왜 그 이야기가 그곳에서 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창세기>의 전체적인 틀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일 것입니다. 본문 감상 역시 이러한 순서에 따라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열두 족장의 아버지인 ‘야곱’으로 시작해서 ‘야곱’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벽두에,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자식들을 ‘이집트’로 다시 보낸 사람도 ‘야곱’이며(43:2), 말미에 “내가 죽기 전에 내 아들 ‘요셉’을 보러 가리라”고 결정한 자도 그입니다(45:28). 그는 여전히 한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매사의 주도권과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자입니다. 즉 그는 이전에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베냐민’만을 ‘라헬’의 유일한 아들로 여겨 그에 대한 총애와 편애를 숨기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요셉’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고(44:27-30), 나머지 자식들에 대해서는 불신과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43:6; 54:26). 물론 자식들의 강권에 못 이겨 ‘베냐민’이 ‘이집트’ 여행에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는 해줍니다만, 이 역시 나름대로의 계산과 기대에 따른 것입니다. 계산이라 함은 ‘베냐민’을 보내되 많은 선물도 함께 딸려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선물이나 뇌물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입니다. 이전에 그의 형 ‘에서’로부터 극적인 “용서”와 “화해”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뇌물 덕분이었습니다. 기대라 함은 그가 그동안 인생의 위기 때마다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번에도 그가 준비한 선물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람” 즉 ‘이집트’ 총리의 자비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43:11-14), ‘베냐민’을 보내는데 합의를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자식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역시 과거 속에 살고 있을까? 그들의 애비 ‘야곱’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입니다. 모두는 아니라 해도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유다’만큼은 달라져 있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의 아버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지난 날 그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털어놓지 않고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문제에 대해서도 ‘야곱’을 완전히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아직도 과거에 저질렀던 죄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지요. ‘요셉’이 자신들을 심하게 다룬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참고. 42:21). 그들의 양심의 가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점차 고조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일차 여행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각자의 곡식 자루에 돈이 든 것이나, 두 번째 여행에서 ‘요셉’이 초대한 점심 식탁에서 나이 순서대로 앉게 된 사실 등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銀盞)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충격은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유다’는 자신들이 저지른 집단적인 죄를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들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44:16). 이는 마치 자신들이 그 은잔을 훔쳤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가 고백하고 있는 죄악은 이전에 그들이 ‘요셉’에게 저질렀던 바로 그 죄악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위하여 탄원을 하는 자리에서 이처럼 자신들의 지난 잘못까지 들추어내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뉘우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베냐민’이 ‘야곱’에게 의미하는 바는 이전에 ‘요셉’이 ‘야곱’에 대해서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있어 마치 유일하게 남은 유복자와 같은 존재였으며, 두 사람은 마치 삶과 죽음의 고리로 연결된 것 같았으며, 당연히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는 ‘야곱’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며, ‘요셉’을 기꺼이 노예로 팔아 그 대가로 돈을 챙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37:27).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동생 ‘베냐민’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가로 기꺼이 노예를 자청하여 나서고 있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44:33-34)
진정으로 회개한 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만 아니라면 이보다 더 극적인 회개의 예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37장에서 잠시 소개하고 있는 그의 어린 시절만 아니라면 ‘요셉’은 이상적인 인물의 전형(典型)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실함과, 근면함과, 현명함과, 활기참과, 그리고 신앙적인 경건함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적어도 그가 형제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요셉’은 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의도적으로 함정을 파서 형제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혐의로 투옥시키려 드는 무자비한 독재자의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요셉’의 형들의 눈에 비친, 다분히 의도된 것이지 그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라는 점은 화자나 독자 모두 익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형들 앞에서는 짐짓 엄하고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시로 혼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42:24; 43:30), 형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마침내 그들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대성통곡을 하기에 이릅니다(45:1-2, 14-15). “용서”와 “화해”의 눈물이 마치 봇물 터지듯 흘러내리는 장면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피해자의 몫이라면, 회개와 뉘우침은 피해자의 몫이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용서”와 “화해”가 <요셉 이야기>의 표면적인 주제, 즉 ‘요셉’의 “꿈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화자의 관심사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보다 큰 주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화자는 이미 일찍부터 이 주제에 대해서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즉 ‘요셉’이 노예로 있을 때에나 감옥에 갇혔을 때조차도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39:2, 21, 23). 동일한 주제를 이제는 ‘요셉’ 자신의 입으로 직접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네 번에 걸쳐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45:5, 7-9)
더 나아가 ‘요셉’의 청지기를 통해서도 강조점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43:23). 이 청지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주인 ‘요셉’의 명령으로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했을 텐데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형들을 향해서 ‘요셉’은 다시 한 번 동일한 주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처럼 <요셉 이야기>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무대 위에 등장하고 있는 그 모든 인간 주인공들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는 무대 밖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비단 <창세기>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나 화자들의 대 전제이기도 합니다. 아래 두 본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5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6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사 10:5-6)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 26, 30)
25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5, 28)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역사와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능력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겠으며, 병자를 낫게 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중보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의 그 모든 주인공들이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연극에서 맡은 역할만을 충실하게 연기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 못지않게 “인간의 책임”을 꼭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셉’의 형들이 증오심으로 그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결코 정당화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가족 간의 증오심과 편애는 ‘요셉’으로 하여금 ‘이집트’에서 부당한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장장 22년에 걸쳐 고통과 비탄에 잠겨 살게 하였으며,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잊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기억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42:21);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44:16상).
온전한 용서와 화해는 ‘유다’가 “대속적 희생”(代贖的 犧牲) 즉 ‘베냐민’의 석방을 위하여 대신 인질이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는 등 온전히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형들이 행한 악을 선으로 바꾸시면서 까지 그분의 선을 이루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없었던 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련의 긴 장치를 통해서 말입니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아수르’ 왕을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로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수르’ 왕 역시 교만과 거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사 10:12)
<아모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읍을 치신 것과 똑 같은 이유로 열방들의 성들을 치실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암 3:14)
예수님은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그분의 제자 ‘가롯 유다’에 대한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될 것입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눅 22:22)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신비한 영역 속에 남아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나 의사나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통해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마치 기계가 작동하듯 무심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고백하였듯이, 그분의 언약은 항상 ‘헤세드’ 즉 자비와 긍휼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45:5, 7)
더 나아가서 ‘헤세드’의 언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그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주변 모든 민족들 즉 양식이 없어 ‘이집트’로 몰려든 열방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요셉 이야기>의 일차적인 주제가 “회개”와 이에 따른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에 있습니다만, 이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그분의 섭리였다는 이차적인 주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 언약”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고, 너는 열방의 축복이 될 것이라”는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장치였다는 심층적인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43-45장)은 ‘야곱’ 자식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으며, <요셉 이야기>의 한 절정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42장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 일곱 개의 장면이 동심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도표):
또한 본문은 구조적으로나 그 내용에 있어 42장과 아주 흡사합니다:
이 도표에서 보듯이, 두 번째 ‘이집트’ 여행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중요한 고비마다 첫 번째 여행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예. 43:27, 29; 44:19-23), 둘 사이의 비교를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참고: 두 이야기를 비교할 수 있는 본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43:1-2//41:57-42:2; (2) 43:3-8//42:12-20; (3)43:11-12//42:25-28, 35; (4) 43:14-15//42:19, 24, 36; (5)43:16//42:7; (6)43:18//42:28, 35; (7) 43:20-23//42:25-28; (8) 43:23하//42:24; (9)43:26, 28//42:6; (10)43:27-28//42:11; (11) 43:29//42:13, 15; (12) 43:30-31//42:24; (13) 43:33//42:28, 35; (14) 44:1-12//42:25-28; (15) 44:14//42:6; (16) 44:16//42:21; (17) 44:17//42:19; (18) 44:18-23//42:10-20; (19) 44:24-31//42:29-38; (20) 45:1//42:24; (21) 45:3//42:13; (22) 45:4-5//42:21-22; (23) 45:21-23//42:25.
이뿐 아니라 본문 중에는 <요셉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와도 연결될 수 있는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 구절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 43:11‘’37:25; (2) 43:26//37:7, 10; (3) 44:19, 28//37:3, 33; (4) 44:31//37:35; (5) 45:4-5//37:27-28; (6) 45:6//41:26-30; (7) 45:8-9//41:38-46.
이로 미루어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에피소드는 세 장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43:1-45:28), <요셉 이야기> 내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문학 단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43-44장을 하나의 단위로, 그리고 나머지 45장을 별개의 단위로 구분하기도 하나, 이는 이들 세 장이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구조적이고 수사적인 특징을 무시하고 단지 자료적 특징만을 고려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참고로 45장은 <엘로힘 자료>, 그리고 43-44장은 <야훼 자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에 따르면, ‘요셉’ 형제들의 ‘이집트’ 여행은 원래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즉 두 번째 여행 이야기(43-44장)는 <야훼 자료>로서, 실은 <엘로힘 전승>에 속한 첫 번째 여행기(42장)에 대한 “야훼 버전”(J version)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훼’ 기자는 45장에서 일부 수정을 거쳐 <엘로힘 전승>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이들 주장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보다 최근에는 다른 견해들이 제시된 바 있습니다. 예컨대, 42장과 45장은 <엘로힘 전승>에 속하는 초기 <요셉 이야기>이며, 여기에 43-44장의 <야훼 자료>가 첨가된 것이라는 주장을 말합니다(Redford). 이와는 정 반대의 주장도 있습니다. 즉 43-44장이 초기 <요셉 이야기>에 속했던 것이고, 42장과 45장이 후대의 첨가라는 것입니다(Schmitt).
하지만 이들 자료비평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42-45장을 관통하고 있는 통일성과 일관성입니다. 사실 자료비평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일관성에 있기보다는, 각 본문들 사이에 있지도 않은 차이나 또는 내적 모순을 과대하게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42-45장 사이에 흐르는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예컨대, 두 번의 ‘이집트’ 방문은 모두 실제적인 것이며, 이야기의 긴장과 절정을 고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두 번째 여행은 첫 번째 것을 전제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42장과 43장에서 형제들을 대하고 있는 ‘요셉’의 태도는 아주 다르며 대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화자는 42장과 43장이 불가분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43:1-14)
본문 이야기의 첫 장면은 이야기의 배경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그 기능에 있어 지난 에피소드 첫 장면과 병행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곧 있을 ‘이집트’ 방문을 앞두고 가족 간에 있었던 대화에 관한 것입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야기의 분량 즉 대화의 내용이 이전보다 훨씬 더 길고 상세하다는 것인데, 참고로 (1) 42:1-2과 (2) 43:1-14의 두 본문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서 극적인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느리고 완만하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예의 그 친숙한 ‘가나안’ 땅에 닥친 “기근”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1절)
이 같은 표현은 <족장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아브라함 이야기>의 벽두에서(12:10), 그리고 직전의 에피소드에서(41:57) 이미 관찰한 바 있습니다. 이어서 이야기의 초점은 그 땅에 내린 기근에서 ‘야곱’ 가족과 그들 사이의 대화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2절)
여기서 “그들”이라 함은 말할 것도 없이 ‘야곱’과 그의 자식들로서, 화자는 이들을 삼인칭 “그들”로 총칭(總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직전의 에피소드와 연결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난 번 ‘이집트’ 방문에서 가지고 온 양식 모두를 다 “먹었습니다”(lk'a, 아칼). 문자적으로 이 단어는 “끝내다” 또는 “해치우다”는 의미로서, “(기근이 그 땅을) 망하게 했다(hl;K, 칼라)”(41:30)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동사입니다. 먹을 것을 모두 소진한 ‘야곱’ 가족의 현재 상황을 기근이 덮친 그 땅의 상황에 비유하고 있는 화자의 수사(修辭)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야곱’은 자식들을 채근하기 시작합니다. “양식을 조금 사오라”는 그의 어조는 마치 ‘이집트’가 금방이라도 다녀올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듯한 태도입니다. 혹시 ‘야곱’은 ‘이집트’의 최고 실력자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시므온’을 풀어주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잊은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식들을 다시 사지(死地)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정말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면, 지난 번 방문에서 자식들이 사온 양식이 풍부해서 그 일을 잊을 정도로 오래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충분히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자식들의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 이번에도 다시 양식을 구하러 떠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희망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에 불과했습니다. ‘유다’가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애비에게 상기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3-5절)
‘유다’는 지금 형제들의 대변인 역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에게 ‘요셉’이 제시한 조건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조건은 ‘야곱’도 모르지 않습니다. 이전에 큰 아들 ‘르우벤’을 통해서 이미 들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42:29-35). 그러나 ‘야곱’이 ‘르우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참고. 42:37-38). 그는 이미 장자로서의 신뢰나 지위를 상실한 지 오래였습니다(참고. 35:22; 49:4). 그렇다면 둘째 아들 ‘레위’가 맏아들 노릇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셋째 아들 ‘시므온’은 지금 ‘이집트’에 잡혀있는 상황에서, 아버지와 그렇게 나쁜 관계에 있지 않는 ‘유다’가 장자의 역할을 자임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바꾸려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아버지를 설득시켜야겠다는 그의 마음은 대화의 처음과 끝에 ‘요셉’이 위협적으로 제시한 조건을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는 데서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3, 5절; 참고 42:15, 20).
‘야곱’이 순순히 응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당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더 똑똑해지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6절)
‘야곱’이 겉으로는 자식들이 저지른 무분별한 행동을 나무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실은 ‘베냐민’을 보내기 싫어 시간 끌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나머지 형제들이 모두 합심해서 ‘유다’를 지원하고 나섭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몰랐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7절)
마치 ‘요셉’의 교묘한 유도질문에 걸려 넘어갔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시계 바늘을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려보면 ‘요셉’이 지금 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야곱’과 ‘베냐민’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42:10-16). 오히려 그들 스스로 자원해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 이들이 묻지도 않은 정보를 술술 진술하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씌워진 간첩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기에도 이 사람이 자신들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유다’가 아버지의 부성애(父性愛)에 호소하며 결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들의 애비 ‘야곱’이 자신들에게 ‘이집트’에 가서 양식을 구해오라고 요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8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 하리이다. 9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8-10절)
자기 요청을 들어주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8절)는 말은 이전에 ‘야곱’이 자식들을 ‘이집트’로 가라고 재촉하면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42:2). ‘유다’는 똑같은 말로 애비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결정에 그의 손자들을 포함한 온 가족의 목숨까지 걸려있음을 강조하면서,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겠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즉 ‘베냐민’이 나중에 그들과 함께 돌아오지 못할 경우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실현 가능할 것인지는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이 제안은 실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1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2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15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잠 6:1-2, 11, 15). <잠언>의 이와 같은 경고는 비록 그 경우가 다른 것이긴 하지만 <창세기>의 다음과 같은 “피의 보복”에 대한 경고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만일 ‘유다’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할 경우 그의 아비 ‘야곱’은 ‘유다’에게 그 책임을 물어 생명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유다’는 분명 한 평생을 동생 ‘베냐민’에 대하여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유다’도, 그의 애비 ‘야곱’도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을 상황에서 ‘유다’는 더욱 ‘야곱’의 결단을 재촉하고 있으며,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지체하지 않았더라면 그동안 두 번이나 갔다 왔을 것이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재촉에 마침내 ‘야곱’은 결심을 굳히고 이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전에 그가 형 ‘에서’를 만나러 갈 때 당면했던 것과 유사한 위기 앞에서(32-33장), 그는 자신의 결단과 하나님의 섭리에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11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1-14절)
그의 “결단”이라 함은 사전 계획과 의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가 준비한 예물을 말합니다. 흉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의 아름다운 소산”들을 마련해 보냅니다. 이들 선물 목록은 그가 ‘에서’를 만날 때 준비했던 것에 비해서는 훨씬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의도는 이전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32:20). 마찬가지로 이번 예물도 총리의 환심을 사기 위한 뇌물성 선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의 재촉에 못 이겨 마지못해 ‘베냐민’을 이들 예물과 함께 딸려 보내기는 하지만, 그를 보내기 싫어하는 마음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예물들을 언급한 후에 마지막으로 ‘베냐민’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13절).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은 예물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비록 아주 짧기는 하지만 그의 기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를 이전에 형을 만나기 전 드렸던 기도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32:9-12). 두 경우 모두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으며,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지칭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전능자”(yD'v la, 엘 샤다이)는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도 수차례 등장한 바 있습니다(17:1; 28:3; 35:11; 48:3,; 49:25).
그러나 ‘야곱’은 자신이 드리는 기도에 큰 확신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는 믿음의 기도라기보다는 포기나 감상에 더 가까운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감상은 이전에 그의 어머니 ‘리브가’를 연상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전에 그녀의 장자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일 게획을 꾸미고 있을 때, 이와 같은 자포자기적인 감상을 내보인 일이 있습니다(참고. 27:45).
2. 이집트 도착(15-25절)
두 번째 장면에서 이야기의 진행은 다소 완만하게 진행되면서 긴장감은 오히려 더 상승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셉’이 그 형들을 환대하는 장면은 화자가 첫 번째 여행에서는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으로서, 융숭한 환대가 오히려 더 거북하고 불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특히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일말의 죄책감에 시달려 온 형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초조하게 ‘요셉’이 준비한 점심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두 번째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15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16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15-16절)
‘요셉’이 성대한 점심 식사를 준비하라고 시킨 것은 동생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요셉’의 행동이 지나치게 과분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저 내심 바라기는 한 시라도 빨리 ‘시므온’을 데리고 양식과 함께 떠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신학자 ‘해밀턴’(V. Hamilton)은 ‘요셉’이 청지기로 하여금 짐승을 잡는 등 성대한 점심 식사를 준비시키고 있는 이 장면을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눅 15:23). V. Hamilton. 549쪽.
돌아온 둘째 아들이나 ‘요셉’의 형제들이나 굶주림에 찌든 모습으로 상대방의 자비를 바라며 나아오고 있는 모습이나,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베풀고 있는 아버지나 ‘요셉’의 모습은 아닌 게 아니라 대동소이하다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주인의 명을 받은 청지기가 이들 형제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17-24절). ‘히브리’ 식 이야기의 전형을 따라 우선 화자는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했다”고 먼저 요약한 후, 다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23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17-24절)
형제들은 완전히 달라진 청지기의 환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방문 때에 그들이 받았던 의심과 적대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자신들이 함정 속으로 끌려들고 있으며, 결국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될 정도였습니다. 위기 상황을 반전시켜보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들은 청지기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건네 봅니다. 그리고 지난 번 방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최고의 예의를 갖춘 것이었지만, 동시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곡식 자루에서 발견한 돈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형제들의 설명은 화자가 그리고 있는 같은 장면에 대한 서술에 비해 지극히 절제되어 있고 간략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돈은 훔친 것이 결코 아니며 다시 그 돈을 가지고 왔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돈 뿐만 아니라 “양식 살 다른 돈”도 더 가지고 왔음도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들 듣고 난 청지기의 반응은 독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독자들은 형제들의 곡식 자루에 돈을 넣은 자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자신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는 형제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돈을 자루에 넣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지기의 이러한 진술은 그가 의도했던 아니 했던 <요셉 이야기>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고 있으며, 조금 뒤 ‘요셉’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우리는 이곳에서 한 ‘이집트’인 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형제들을 ‘요셉’의 집으로 데리고 가 목욕을 하게하고 말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 그들이 받는 대접이 진심임을 보여주며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비로소 경계심과 두려움을 풀고 안심하는 모습입니다. 청지기의 안내를 받아 목욕 재개하고 가지고 온 예물을 정돈 하는 등 ‘요셉’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25절)
3. 두 번째 대면(26-34절)
세 번째 장면은, 지난 이야기의 세 번째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참고. 42장), ‘요셉’이 그 형들을 대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장면에서 모두 형들이 동생인 ‘요셉’ 앞에 부복(俯伏)해 있습니다.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26절)
다시 한 번 두 형제들 사이의 달라진 위상(位相)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힘과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즉 동생은 자기 앞에 부복해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나, 형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전에 ‘요셉’이 형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였다”고 화자가 기록한 바 있습니다(42:9). 하지만 꿈의 내용과는 다소 달랐습니다. 그의 꿈에 따르자면 그의 부모와 열한 명의 형제들이 와있어야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열 명의 형들만이 그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열한 명입니다. ‘베냐민’이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부모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만나자 물어보는 질문도 바로 부모에 대한 안부입니다. ‘요셉’이 처음 대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 꿈을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형들을 대하는 ‘요셉’의 태도는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 ‘요셉’은 형들에게 아주 매몰차고 엄하게 대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아주 은근하고 다정한 모습입니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27절)
형들은 그의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가 왜 자신들의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28절)
형들로부터 원하던 대답을 들은 ‘요셉’은 곧바로 한 낯선 인물, 즉 첫 대면 때에는 없었던 새로운 한 인물 위에 눈이 머뭅니다. 다름 아닌 ‘베냐민’입니다. 화자가 이 순간을 얼마나 극적으로 포착하고 있는지를 감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29절)
즉 화자는 ‘요셉’이 “눈을 들어 ...보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이제 곧 펼쳐질 장면이 아주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임을 예고해 주는 대목입니다(참고. 13:10; 18:2; 22:4, 13; 33:1, 5; 37:25). 그가 눈을 들어 본 것은,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입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보게 된 것은 그토록 몽매에 그리던 ‘베냐민’이었다는 강력하고도 극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화자는 ‘요셉’이나 그의 형들을 “그 사람” 및 “그들”로 지칭해 왔을 뿐, 이들 사이의 혈족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베냐민’에 대해서만큼 “자기 어머니의 아들”이니 “자기 동생”이니 하는 수식어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과 ‘베냐민’ 사이의 관계가 어떤 정도인지를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속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실을 형들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가 과연 ‘베냐민’이 맞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냐민’을 실명(實名)으로 지칭하는 대신, “너희 작은 동생”, “이 아이”, 그리고 “소자”(@B, 벤) 등으로 부르면서 그의 신분을 계속해서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은가 봅니다. 적어도 그의 형들 앞에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동생을 향한 끓어오르는 사랑과 연민을 주체할 수가 없어 황급하게 그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북받치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30절)
‘베냐민’을 향한 ‘요셉’의 마음은 마치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두 경우 모두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왕상 3:26; 호 11:8; 애가 5:10). 혼자 방으로 들어가 울고 있는 ‘요셉’의 모습은 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의 외면의 모습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분을 형제들에게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이러는 동안에 형들은 잘못된 판단이긴 하지만 잠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만 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31절)
지난 번 방문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이 남자의 태도 때문입니다. 거듭 회고해 보건대, 그 때만 해도 식사는커녕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 자신들을 간첩으로 몰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그가 이번에 태도를 돌변했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 식사를 하려고 준비시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 사람들은 외국인과 식사를 하는 것을 혐오했다 합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32절)
이날 차려진 식단도 ‘이집트’인들의 이런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부정을 입음이라”는 매우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데, “가증스럽게 여기다”(hb'[e/T, 토에바)는 뜻입니다. 때로 이 단어는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종교 행위 등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레 18:22, 26, 29). ‘이집트’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또 다른 관습들은 “목축”(46:34)이나 “야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출 8:26) 등이 있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식단에 나누어 일정 거리를 두고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위한 식단; 그의 형제들을 위한 식단; ‘이집트’인들을 위한 식단.
‘요셉’이 형제들과 따로 떨어져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은 이곳이 처음은 아닙니다. 오래 전에 ‘가나안’의 ‘도단’ 광야에서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내던져진 채 형들이 식사하는 것을 절망 가운데 지켜보아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37:25).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완전히 역전된 상태에서 형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패배자로서가 아니라 승리자로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형들이 먹을 것을 빼앗고, 자기를 구덩이 속에 던져 넣은 것처럼, 형들에게 똑 같이 복수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별도의 식단이긴 하지만 자신들을 위해서 식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란 형들은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을 나이 순서로 자라에 앉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측컨대 ‘베냐민’이 ‘요셉’ 식단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도록 배치했을 것을 보입니다.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33절)
그들은 충격 가운데 서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여기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충격을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요셉’은 다시 한 번 특별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34절)
‘베냐민’을 향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다섯 배나 더 많은 음식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날 ‘요셉’ 자신이 아버지를 편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형들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의 친 동생을 향한 각별한 애정의 표시였을까?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요셉’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특별히 연회장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모두들 먹고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4. 체포(44:1-13)
‘요셉’의 형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해 가는 동안, ‘요셉’은 그의 청지기들과 함께 이들을 체포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지난 번 첫 번째 방문 때와 흡사한 모습이지만(42:17), 이번에는 훨씬 상세하고 세부적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습니다.
1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2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3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1-2절)
적어도 1절에 따르면 ‘요셉’은 아주 관대한 모습입니다. 각자의 자루에 양식을 넘치도록 넣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양식의 대가로 가지고 온 돈도 되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수상한 점은 그가 쓰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속에 넣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하필 ‘베냐민’을 선택하고 있는지 당장은 알 길이 없습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서로 자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식도 얻었겠다, ‘시므온’도 풀려났겠다, 그리고 ‘베냐민’도 여전히 곁에 있겠다, 그들이 이곳에 목적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4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6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4-6절)
“선을 악으로 갚는다”는 비난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가장 큰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타격이기도 합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해주던 그 주인이 이런 식으로 비난을 하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갑작스러운 일격에 어안이 벙벙해 있는 그들에게 청지기는 은잔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형제들의 충격을 극대화 하고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마치 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은잔에 물이나 포도주를 넣어 점을 치는 일은 잘 알려진 풍습이었겠습니다만, <성경>은 이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습니다(레 19:26; 신 18:10). 청지기가 은잔으로 점을 친다고 언급한 것은, 그것이 ‘요셉’에게는 매우 귀중한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럼 중요한 물건을 훔쳤으니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혐의에 대해서 형들은 극렬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7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7-9절)
이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혐의가 불가하다는 증거로 그들이 되가지고 온 돈을 제시합니다. 이 돈은 첫 번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요셉’이 슬쩍 이들의 자루에 넣어주었던 그 돈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죄를 증명할 증거를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모하기까지 한 서원을 자청하고 나섭니다. 만일 훔친 자가 있으면 그는 죽을 것이며 나머지는 노예가 될 용의도 있다는 서원입니다. 그만큼 자신들의 무죄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이야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노예 생활과 죽음은 이전에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그 일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즉 그동안 ‘요셉’이 당했던 그 모든 고초를 자신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공평한 제안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즉 이들이 이전에 그를 희생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을 희생물로 내어놓을 것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청지기의 말이 그의 의도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모두를 노예로 삼으라는 제안은 무시한 채, 은잔을 훔친 그자만을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10절)
형제들은 기꺼이 청지기의 수색을 허락합니다.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싶은 열망에서입니다.
11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12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11-12절)
그런데 이 장면에서 두 절은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이 “급히” 자루를 내려놓았다는 언급과 청지기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차례로 한 사람씩 조사를 했다는 언급이 주는 대조를 말합니다. 화자는 이런 대조를 통해서 이 장면에 긴장감을 더해주고 싶은 듯합니다.
이 장면은 이전에 ‘라반’이 ‘야곱’을 쫒아와 수색하던 모습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의 가족을 데리고 ‘라반’으로부터 도망쳐 나올 때, ‘라반’이 자기가 아끼던 물건 ‘데라빔’ (가족의 수호신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조각품)을 찾았습니다만(참고. 31:23, 25, 33, 35), ‘라헬’의 장막 속에 숨겨든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요행히도 들키지 않았습니다만, 그녀의 아들 ‘베냐민’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의 자루 속에서 은잔이 발견된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가 그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도 모른고 만일 훔친 사람이 있다면 죽음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의 형들이 그때와 비슷한 저주를 자신들에게 돌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건이 ‘베냐민’의 자루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13절)
화자는 그들의 말 대신 그들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더 크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요셉’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옷을 찢고 슬퍼한 사람은 ‘야곱’ 뿐이었습니다만(37:34), 이번에는 모든 형제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이처럼 한 마음이 되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이전에 ‘요셉’을 ‘이집트’로 파는 일에 공모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을 데리고 자원해서 ‘이집트’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그들이 서원했던 바대로(9절) ‘이집트’의 종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5. 요셉이 자신을 드러냄(44:14-45:15)
이 장면에서 <요셉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데, 동생을 위한 ‘유다’의 눈물겨운 호소가 그 계기를 마련한 셈입니다. 즉 그의 호소는 ‘요셉’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마침내 ‘요셉’이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장면에 들어 ‘요셉’의 형제들 중 ‘유다’가 돋보이고 있는 것도 그의 이러한 역할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14절)
이 구절은 ‘유다’가 이 단락에서 맡게 될 중요한 역할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이 여전히 연회장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형제들이 아주 신속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이들이 땅에 엎드린 것은 단순히 존경 이상의 굴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과시함으로써, 형제들을 더욱 압박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15절)
즉 자신을 신통력을 가진 점쟁이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말한 것도 없고 독자들 모두 이들 형제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할 아무런 수단도, 능력도 없이 위협 앞에 속수무책 떨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재판관의 정의가 아니라 자비를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를 ‘유다’의 하소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16절)
그는 지금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들의 유죄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집트’ 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고백은 단순히 이번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전에 그들이 저질렀던 모든 잘못들을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 저질렀던 죄악이라 함은 ‘요셉’에 대한 것이며,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도 첫 번째 방문 시에 그들이 당했던 혹독한 시련 때문이었습니다(42:21-23). 따라서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도 지난 잘못에 대한 당연한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다시 한 번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들의 진심을 알 수 없습니다.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는 지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 형제들을 이십이 년 전에 자신들이 겪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17절)
즉 이전에 자기를 버려두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베냐민’을 내버려두고 그들의 애비에게로 되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일견 관대한 ‘요셉’의 제안은 ‘유다’의 하소연에 직면하게 됩니다. 오히려 연설에 가까운 ‘유다’의 하소연은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연설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감동적입니다. 그의 연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단순히 요약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의 기분을 거스를 만 한 일체의 이야기들은 생략한 채,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서 더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입장을 다소 누그러뜨릴 것으로 기대했던지, ‘유다’는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열네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연설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8-29절과거에 대한 회고
30-32절‘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결과
33-34절‘유다’가 자신을 내놓음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상당히 공식적이며 의례를 갖추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주여”;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 우리 아버지.” 하지만 연설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직접적인 대화로 그 형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34절).
회고. ‘유다’는 먼저 ‘요셉’에 대해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찬사와 예우를 갖춤으로 그의 회고담을 위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18절)
특히 ‘요셉’이 ‘바로’ 왕과 같다는 그의 말은 ‘요셉’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을 용서하고 방면할 수 있는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유다’는 자신들의 첫 번째 방문에 대한 회고로 나아갑니다.
19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21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22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23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19-23절)
하지만 그는 이 부분에서 ‘요셉’이 그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감옥에 가둔 일이나,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둔 사실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했던 ‘요셉’의 명령조차도 “내가 그를 보게하라”는 훨씬 온건한 표현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이 표현은 “돌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참고. 렘 24:6; 39:12; 40:4). 반면에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나이와 ‘베냐민’에 대한 그의 애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노인이요”;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떠나면 그가 죽겠나이다.” 하지만 ‘유다’가 지금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언급하면서 ‘요셉’에게 자비를 간구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들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를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베냐민’을 향한 아버지의 그 사랑이야말로 ‘요셉’이 ‘베냐민’을 풀어주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계속해서 ‘가나안’ 집에서 아버지와 그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 ‘야곱’의 편에 서서 그의 감정이나 기분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4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25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24-29절)
‘유다’의 연설에는 다소 과장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야곱’이 그들에게 했다는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실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물론 이 말은 ‘라헬’ 외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던 ‘야곱’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야곱’이 이를 명시적으로 천명한 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유다’는 아버지의 속내를 자신의 말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이어서 ‘야곱’이 ‘요셉’이 없어진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28절). 이제 ‘요셉’은 처음으로 지난 날 자신이 팔리고 난 후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게 됩니다.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이어온 아버지의 비탄과 슬픔, 그리고 “그가 찢겨 죽었도다, 찢겨 죽었도다”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절규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절규는 비단 ‘요셉’ 뿐만 아니라 그의 나머지 형제들 역시 지금까지 들어왔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상되는 결과. 이제 ‘유다’는 ‘베냐민’이 함께 돌아가지 않았을 때 그들의 아버지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예단하고 있습니다.
30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 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30-32절)
그는 ‘야곱’이 했던 말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즉 그의 아버지가 자식을 보지 못하면 슬퍼 스올로 내려가게 될 것이라는 호소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언급을 덧붙여,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묶여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희생의 결단. 그리고 마침내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하여 볼모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섭니다. 자기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며 그의 심정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33-34절)
‘유다’의 감동적인 연설로 이야기는 절정에서 일순 긴장감으로 멈추어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연설은 나머지 형제들이나 ‘요셉’에게 각기 다른 반향을 끼치면서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날에 대한 참회의 고백이 나머지 형제들에게는 더욱 큰 낭패와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이지만, 반대로 ‘요셉’에게는 더 이상 형제들을 시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감동으로 다가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요셉’이 느끼는 한에 있어서, 이들 형제들은 이제 이전에 자기를 대하던 태도에서 돌변하여, 진심으로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을 대해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마침내 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1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45:1-2)
그는 이전에도 형제들을 만났을 때 두 번이나 운 적이 있습니다만(42:24; 43:30), 형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드러내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대화를 이제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문은 곧바로 궁중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었습니다.
눈물은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는 법, 돌변한 ‘요셉’의 태도는 형제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요셉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3절)
‘요셉’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만 않았더라도, 형제들은 “내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니이까?”라는 질문은 다소 뜻밖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유다’는 시종 자신들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요셉’의 주된 관심사가 가족과의 재회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의 연설을 통해서 ‘요셉’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것도 바로 이 문제, 즉 자식을 잃었을 때 아버지가 겪게 될 충격과 고통을 염려하는 ‘요셉’의 심중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너무 놀라서 할 말조차 잊는 형들에게 ‘요셉’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4절)
하지만 형들은 더욱 큰 충격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다름 아닌 그들이 ‘이집트’에 판 ‘요셉’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들의 충격과 공포를 감지한 듯 서둘러 형들을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에서 시작하여, 일이 그렇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고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해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4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5-8절)
‘요셉’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결국 <요셉 이야기>의 거대한 신학적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즉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으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그곳으로 먼저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야기>의 각각의 에피소드는 이 거대한 주제와 연결되면서 모자이크의 부분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보고 싶은 일념에서 형들과 재회의 감격을 나누는 일(14-15절)은 뒤로 미룬 채부터, 형들로 하여금 속히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첫 말도, 마지막 말도 모두 그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오년 동안의 흉년 기에 좋은 방목지와 거처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약속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9-13절)
‘요셉’이 언급하고 있는 ‘고센’은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왕궁이 있는 ‘멤피스’나 ‘아바리스’ 근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요셉’이 가족과 수시로 왕래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훗날 ‘모세’가 ‘바로’와 “출애굽”을 놓고 담판을 벌이던 곳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이 땅을 제공해 주겠다고 하면서, 그 땅에 닥치고 있는 흉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는 것은(참고. 6절), 그의 아버지가 오기를 주저할까봐 안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흉년이 들면 가난한 자는 자신들의 땅을 저당 잡히기도 하고 심하면 가족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노예로 팔기도 했으며,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굶어죽기도 했습니다(참고. 47:13-26).
‘요셉’은 거듭해서 형들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하는 약속은 통역인과 같은 제 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 아닌 그들 모두가 증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12절). 증인 중에 ‘베냐민’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행여나 ‘야곱’이 다른 자식들의 말은 믿지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처음부터(3절) 끝까지 ‘요셉’의 최대 관심사는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 있습니다.
마침내 감격의 포옹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요셉’과 ‘베냐민’ 만이 울었다고 전합니다.
14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절)
나머지 형제들은 여전히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기뻐할 준비가 아직 안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기쁨을 나누기에는 아직도 이들은 정서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마침내 그들도 입을 열고 맙니다. 그리고 이십이 년의 긴 단절의 벽이 허물어 내리고 있습니다(37:4).
6. 이집트를 떠남(16-24절)
여섯 번째 장면은 ‘바로’ 왕이 ‘요셉’의 형들을 접견하고, 이들에게 더 관대한 약속을 제공해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6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17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18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20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16-20절)
‘바로’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해 오는 것에 대해서 환영하고 동의하고 있습니다(참고. 41:37).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센 땅에 자기와 가까이” 머물기를 원했습니다만, 지금 ‘바로’는 더욱 관대한 모습입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을 줄 것이며, 가장 기름진 수확을 먹을 것이며, 온 나라의 땅의 좋은 것이 그들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8절).
그는 단순히 약속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도움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 가족을 데리고 올 운반 수단까지 제공하고 있습니다(19절). ‘요셉’은 형제들에게 단순히 “빨리 돌아가라”고만 했습니다만, ‘바로’는 “수레를 타고 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아버지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것에 비해, ‘바로’는 “자녀와 아내”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왕은 아주 사려 깊고 친절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왕도 ‘요셉’처럼 이들이 행여나 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와도 좋다고 말하면서, ‘이집트’ 온 땅의 좋은 것들이 모두 그들이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20절).
‘요셉’은 왕의 지시에 따라 형제들에게 양식과 수레와 갈아입을 옷을 줍니다.
21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22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21-22절)
‘요셉’이 마련해 준 “옷”(hl;m]c, 시믈라)는 일종의 겉옷 즉 외투나 망토 같은 것으로서 밤중에 담요 대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출 22:27). 고대 근동 지역에서 “베옷” 즉 “세마포”(@ydis, 사딘)는 상당히 좋은 선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만(삿 14; 왕하 5),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옷”은 일종의 화해의 징표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요셉’의 형들이 그를 팔아넘기고 그의 “겉옷” 자락을 아버지에게 보여줌으로써 비극의 단초를 마련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베냐민’을 향한 각별한 애정 표시가 두드러집니다. 지난 번 식사 때처럼(43:34) 그에게 다섯 벌의 옷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돈도 추가로 더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도 선물 보내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23절)
이 선물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바로’ 왕이 약속했던 “그 땅의 모든 좋은 것”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암 나귀는 우유를 제공해 줍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내면서 ‘요셉’이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주는 당부가 하나 있습니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24절)
“서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라가즈’(zg'r)로서, “떨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격노(분노)하다”, “흥분하다”, “동요하다” 등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신학자들은 이 문장의 의미를 단순히 형제들 간에 돌아가는 길에 지난 일을 놓고 서로 “싸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잠언서>의 한 구절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잠 29:9).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 단어는 “두려움”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어(축 15:14), 많은 ‘랍비’ 학자들도 이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은 형들에게 노상에서 강도 만날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양식과 재물을 나귀 등에 잔뜩 싣고 가는 그들이 강도를 만날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장래 문제 즉 ‘이집트’에 돌아와 살면서 닥칠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해석은 반드시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7. 귀향 보고(25-28절)
마지막 네 절에서 그리고 있는 형제들의 보고 장면은 이전에 우리가 보았던 두 번의 보고 장면과는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십이 년 전 이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후 그들의 애비에게 돌아와 ‘요셉’의 겉옷을 보여주었을 때,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37:33-35). 그리고 첫 번째 ‘이집트’ 방문에서 ‘시므온’을 남겨두고 돌아온 자식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요셉도 없어졌고...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42:36-38). 이제 세 번째 보고를 들을 차례입니다.
25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27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25-28절)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28절) 그는 지금 단순히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26절), “(심장의 고동이) 멈추어 섰습니다”(gWP, 푸그). 자식들로부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다시 “기운이 소생하게” 되었습니다(27절). 그의 마지막 언급은 이야기의 절정에 걸 맞는 승리의 환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훈과 적용
1. 하나님과 양심: 궁핍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사기>의 문학적 구성은 직선적이기보다는 전형적인 “순환과 반복”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위하여 열세 개의 에피소드가 마치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듯 차례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러 구성을 두고 이들 열세 개의 에피소드가 “신학적 윤회”(輪回)를 이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학자 ‘테리 홀’(T. Hall)은 그의 책 <Bible Panorama>에서 이 윤회를 다섯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아래 그림에서처럼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순환의 매 단계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모두 ‘S’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견은 아주 재치 있고 통찰력 넘치는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그림은 <사사기>의 신학적 주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변치 않는 두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철학자 ‘헤겔’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두 본성이 있는바, 선한 하나님의 본성과 악한 인간의 본성이 그들이다.” 따라서 <사사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일관성”에 관한 한에 있어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열세 번에 걸쳐 이 순환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고난의 원인이나 목적을 한사코 알기를 원하지만, 적어도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겪는 비참한 노예 생활, 즉 고난은 순전히 자신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즉 정해진 절대적인 규범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신 즉 “양심(?)의 법”에 따라 행동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은 주변 이방 족속의 침공입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간구와 기도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구원의 감격은 잠시, 이내 망각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구원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마치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국가적 환란은 물론 자신들이 자초한 결과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그분의 백성을 위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채찍이자 몽둥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음을 그동안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배운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의 잠자는 양심을 일깨우고, 가족 구성원간의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사용하신 채찍도 다름 아닌 궁핍과 환란이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계속해서 일관되게 그렇게 해오셨습니다.
첫 번째 채찍은 그 땅에 기근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궁핍입니다. 이로 인해 이들 형제는 고향에서의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떠나 이국땅으로 양식을 구하러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이 이들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더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채찍인 셈이지요. 즉 형제들은 ‘요셉’을 만나긴 하지만 동생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생은 형들에게 ‘가나안’의 첩자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형들은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만, 그들이 ‘가나안’에서 누리던 명성과 존경이 이곳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대우를 여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터라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가 하나님의 두 번째 채찍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하셨음인지 세 번째 채찍을 그들에게 더하십니다. ‘요셉’이 형들을 모두 감옥에 구금시켜버린 일이 그것입니다. 육체적 감금과 고통 그리고 고독의 시기를 거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얼마나 오래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은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좌불안석, 전전긍긍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자신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시기도 이때쯤일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내 양심의 가책이 시작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 시작된 것이지요. 감옥 안에서 서로를 쳐다보며 이렇게 고백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고백은 자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회개로 볼 수가 없다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모두들 “우리 탓”이라고 하지, “내 탓”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편리한 고백입니까? “우리가 범죄했다”는 말은 실은 “아므도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나도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암시입니다. 설령 잘못이 있다 해도 그 일로 나 혼자 처벌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크게 두려워 할 일도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잘한 것은 “내”가 한 일이고, 못한 것은 “우리”가 한 것으로 돌려대는 데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의 고백에는 더 심각한 한계가 있습니다. 고백의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정작 고백을 듣고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할 ‘요셉’이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용서와 화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가해자들끼리 모여, “우리가 범죄했다”고 백번 고백을 해본들 무슨 의미와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피해 당사자 ‘요셉’에게 이 고백을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예물을 제단에 가지고 갈 정도로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교제 속에 있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아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고난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정도는 단순히 “인과응보” 수준이지 “하나님의 인과응보”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일까요? 하나님은 또 다른 채찍을 꺼내 보이십니다. 네 번째입니다. 이들은 유여곡절 끝에 양식을 겨우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여관에서 자신들의 양식 자루에서 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돈은 이집트에서 곡식을 사기 위해 그들이 가지고 간 돈입니다. 따라서 양식을 살 때 마땅히 지불했어야 할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그들 자루 속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들은 아연실색합니다. ‘이집트’ 총리가 자신들을 도둑으로 몰 것이 뻔합니다. 인질로 남겨두고 온 ‘시므온’을 데려오는 일은 고사하고, 나중에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가는 자신들마저 다시 사로잡힐 것이 뻔합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터져나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28절하).
하지만 그들의 양심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을 불렀지만 무엇인가 행동을 취하기 위해 불렀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괴롭고 힘들어서 엉겁결에 한 번 불러보았을 뿐입니다. 그들의 양심은 이미 아주 딱딱하게 굳어있고 꽉 막혀 있었습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혈관 속에 노폐물이 오래 동안 쌓이면, 혈관 벽이 돌처럼 굳어져서 나중에 가위로 혈관을 잘라내려고 해도 잘리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형들의 양심이 지금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의 양심은 이제 웬만한 일로는 끄덕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래 동안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버려 둔 결과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더 이상 그 문제로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요셉’에게 저지른 그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먹을 것이 있고, ‘이집트’와 그 나라 총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위협적인 현실이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요?
어느 때까지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귀찮고 성가시게 해야 할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다름 사람 아닌 ‘야곱’ 즉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하나님은 다시 ‘야곱’의 삶에 채찍을 들고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라기 보다는 “계속해서 일관되게”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전보다 더 심하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양심에 내성(耐性)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병도 육체의 병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치료하다 그만두면 이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우리네 속담도 이런 체험에 근거를 둔 경고로 보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첫 번째 채찍은 이번에도 자연적 재해 즉 기근(饑饉)입니다. 당연히 이전보다 더 심한 기근이었을 것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43:1).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기근이 그 땅을 다 삼켜버리고”, 또는 “기근이 그 땅을 다 먹어 치워버리고”입니다. 언제라고요?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양식을 “다 먹어치운 후”입니다. 여기서 화자의 해학(諧謔)에 가까운 수사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즉 기근이 이들을 다시 덮친 것은 그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행복의 조건이 다 소진된 이후였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찾기 위한 일체의 노력이나 시도가 먹혀들지 않을 때였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인도나, 아프리카나, 중국 내륙을 덮치고 있는 기근이 얼마나 극심하고 대규모적인 것인지 둘러보면 당시 그 땅의 기근의 정도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극심한 기근을 보내신 것일까요?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2-13)
변화를 위하여. 올림픽 기록이 깨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인생의 각종 고난이나 궁핍은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시는 것도 “변화”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가’ 성 여인의 삶에 개입하신 것도 그녀의 삶에 “변화”를 보고 싶어 하신 때문입니다. 과연 여인은 변했습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참고. 요 4:26-29).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분이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인생의 질고 앞에 ‘야곱’과 그의 자식들은 과연 변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 적어도 두 사람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다’의 변화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지난 번 에피소드에서 ‘르우벤’의 변화를 목도한 바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이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는 것에 대해서 ‘야곱’이 반발하자 ‘르우벤’이 개입하여 자기 자식들을 담보로 남겨두겠다고 서원하는 장면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42:37). 물론 ‘르우벤’의 말은 과장된 것으로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려면 할아버지가 손자를 죽이겠습니까? 이점을 감안한다 하드라도 ‘르우벤’의 당시 심정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처럼 동생 ‘베냐민’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 ‘유다’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8-9절).
‘유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요. 자식들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마음이 굳은 자 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난생 처음으로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각오를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유다’의 이러한 모습은 나중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텐데, 동생 ‘베냐민’이 ‘요셉’의 잔을 훔쳤다는 누명을 받았을 때 그의 방면을 위해서 호소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44:1-34).
그러나 가족 구성원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 더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야곱’ 자신입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베냐민’을 결코 ‘이집트’로 보낼 수 없다고 했던 그가 아닙니까! 그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 했습니다. 오히려 불평으로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원망했습니다: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43:6). 사실 그동안 그는 하나님과 힘든 씨름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전에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경들이 인생의 경륜으로 작용했으며, 이들을 통해서 마침내 교훈을 체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그리고 인내가 연단이 되어” 지금 그가 처해있는 새로운 역경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훔쳐봅시다:
11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1-14절)
우리는 여기서 의미심장한 두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전능자 하나님”(엘 샤다이)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 이름이자 언약의 이름이며, “전능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호소와 간구를 드리고 있는 이름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고 난 이후 옛 이름이 다시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야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얍복’ 강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만, 이후에도 새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전 이름으로 더 자주 등장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새사람 이스라엘로서보다는 옛 사람 ‘야곱’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일 것입니다.
그렇던 그가 마침내 새사람으로서 현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일까요? 화자는 갑자기 새 이름으로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진정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전능자 하나님”으로 다가와야 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마지막 선언이 이러한 생각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에스더’의 결단을 보는 듯합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로다.”
나의 이름은.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내 앞에 닥친 이런저런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과 힘든 씨름을 벌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얍복’ 강에서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내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즉 “언약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힘든 씨름도 그를 내 속에서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더욱 힘차게 붙들어서, 하나님이 ‘엘 샤다이’ 즉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욥’이 그의 세 친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친구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에게 직접 말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친구들이 신학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다면 그는 신학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역경이나 궁핍의 이유나 목적을 알고자 한다면, 나는 ‘욥’의 친구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문제의 해답을 찾기는 고사하고 번번이 실망과 좌절로 끝나고 맙니다. 설령 답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해도 역경을 헤쳐 나가는 데에는 그렇게 큰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지요. 내 몸에 난 조그만 상처는 때가 되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까지 고통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이점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장장 13년에 걸친 도피와 망명의 괴로움을 즐거운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부활과 영생의 엄청난 약속이 현실의 고통을 즐거운 체험으로 바꾸어주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떠한 고난에도 함께 아파하시며, 그분의 이름은 “엘 샤다이”이며, 내 이름은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2. 하나님과 양심: 바람이 아닌 햇빛
스웨덴에서 열린 학회 참석 길에 ‘노르웨이’의 빙하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한 지역에 이르렀을 때, 때마침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계곡 아래 호수 속으로 떨어지는 장관을 목격하는 행운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격했던 것은 빙하의 일부가 아니라, 겨우내 쌓였던 눈 덩어리가 녹아 떨어져 내린 것이라는 관광 안내자의 설명이었습니다. 사실 빙하는 그야말로 만년설로서 잘 녹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빙하가 녹을 때에는 마치 얼음이나 유리가 갈라질 때 나는 “쨍”하는 아주 기분 나쁜 소리가 먼저 들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12초 후에 그렇게 떨어져 나온 거대한 빙하 덩어리는 호수 위로 떨어지고, 곧이어 주변 수천 평방미터는 물바다가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며 녹기를 거부하던 만년설도 삼사백 년 전부터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인은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지구 온난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나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 양심의 모습이 빙하와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즉 내 양심이 죄와 허물이 두꺼운 빙하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빙하는 수만 년에 걸쳐 쌓였다고 하는데, 이제 겨우 육십여 년에 불과한 죄와 허물의 벽은 빙하보다 더 단단하고 요지부동이라 깨끗하고 순수한 양심을 좀처럼 드러내 주지를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양심도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죄와 허물이 그 위를 덮고 또 덮어서 거의 아사 직전에 이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환경이 주는 재해나, 인간이 주는 핍박 등에 대해서 웬만해서는 끄덕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 빈도가 잦아지고 강도가 더해질수록 내심 두려움이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이 그에 비례하여 커 갔던 것은 숨길 수 없었나 봅니다. 양식을 얻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이집트’로 내려오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떨고 있습니다.
요셉의 파티. 이와 같은 상황, 즉 두려움과 죄책감에 떨며 불안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요셉’이 베풀어주는 궁중 잔치가 기능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를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빙하를 녹이려는 햇빛으로 비유할 수는 없을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햇빛 말입니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바람과 햇빛”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고 말입니다. ‘노르웨이’의 만년설을 녹아내리게 하는 것이 겨우내 불어대는 찬바람이나 눈보라가 아니라(이들은 오히려 빙하를 더 두껍게 할 뿐입니다), 봄철 따뜻한 햇빛 이듯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 형제들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입고 있던 죄와 허물의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순수하고 깨끗한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추상같은 채찍보다는 햇빛 같은 은혜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요셉’이 베풀고 있는 이 잔치가 바로 그런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들고 계셨던 채찍을 내려놓고 당근을 주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그동안 사용하신 하나님의 채찍이 효과가 없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며, 그분은 모든 것을 협력시켜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지난 10여 년의 세월동안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놓고 채찍이나 당근의 양자택일을 하려는 무익하고도 소모적인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양자택일에 구애받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셉’ 형제들에게 당근을 주신 적이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이들 형제가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처음 왔을 때, ‘요셉’은 이들에게 양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되돌려주었습니다. 곡식 자루 속에 돈을 넣어준 것이지요. 하지만 귀환 길에 형제들은 이 돈을 곡식 자루에서 발견하고는 혼비백산 놀랍니다.
왜 ‘요셉’은 형들이 가지고 온 돈을 되돌려 보냈을까요? 무슨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야기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는 없습니다. 비록 형들은 이 일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벌벌 떨고 있습니다만(42:28), ‘요셉’은 그야말로 이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무슨 음모니 공작이니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본문 이야기 여러 곳을 통해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요셉’의 청지기가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즉 형들이 두 번째 여행에서 ‘요셉’의 청지기에게 지난 번 귀환 길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먼저 고백합니다. 그러자 청지기는 짐짓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하나님께서 그 돈을 자루에 넣어주신 것이며, 그리고 돈은 이미 받았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43:23). 돈에 관한 한 이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청지기는 이들을 안심시킨 후에 ‘시므온’을 그들 앞에 데리고 옵니다(23절). 그동안 ‘시므온’은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것이 뻔합니다. 바로 이것이 ‘요셉’의 진심을 알 리가 없는 형제들이 짐작할 수는 전부일 것이겠지요. 그리고 자신들도 곧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갑니다. ‘시므온’은 노예로 팔려가지 않았고, 총리는 약속대로 그를 형제들 앞에 다시 돌려보냅니다.
여전히 ‘요셉’의 진심에 대해서 궁금한가요? 청지기는 이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당나귀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줍니다(24절). 당시 이러한 행위는 손님에 대한 극진한 존경과 예우의 표시입니다. 즉 청지기는 이들을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요셉’도 같은 마음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먼저 안부를 묻습니다. 형들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물어봅니다(27절). 그리고 ‘베냐민’을 가리키며 그가 ‘베냐민’이 맞는지 물어봅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하자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줍니다(29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북받치는 감정을 자제하면서, 은근하고도 애틋하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그토록 알고 싶었던 소식 하나 하나를 확인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 무슨 의도나 음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베냐민’을 확인하는 순간 참고 참았던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 방으로 가서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30절).
한참을 울었을까요? 얼마 후 돌아와서는 충격에 빠져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잔치를 열어줍니다(31절). 그것이 잔치든 단순한 점심 식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그들 모두 ‘가나안’에서 기아(饑餓) 직전까지 내몰린 바 있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을 두 번째 찾아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집트’의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의 기분은 어떨까요? 여전히 총리의 진심을 알지 못한 채 두려움과 의구심으로 좌불안석(坐不安席)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무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거지? 이와 같은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화자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을 다음과 같은 해설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34절).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냥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총리의 호의를 그냥 있는 그대로 즐겼습니다. 그들에게 이처럼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푸는 자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햇빛을. 그렇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다른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교훈입니까?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common grace)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 6:26)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마 6:30)
하지만 지구상에 살아가는 절대 다수의 선남선녀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누가 따뜻한 해를 비추는지, 누가 마른 땅에 비를 내리는지, 누가 공중의 새들을 거두는지, 누가 들풀을 자라게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즐길 뿐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처럼 말입니다.
‘요셉’의 파티는 그가 형제들을 위하여 베풀어 준 것이지 형들이 그에게 베풀어준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호의를 입은 사람이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식사 대접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파티는 그야말로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상식을 벗어난 대접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무슨 신세나 빚을 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분은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심심하고 외로워서,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광과 찬송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빚을 져서 소위 “보편적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식사를 대접해야 할 쪽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라고요! 그런 점에서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는 “보편적”이 아니라 지극히 비정상이며, 비상식적이라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더욱 비상식적인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그분을 대적하고 거부하며 미워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비정상적인 “보편적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누구나 개죽음을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서는 혹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나마도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義士)를 의사로 부르는 것도 그분의 죽음이 대의명분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분의 선택이 정말 용기 있는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죽음은 대의명분과는 거리가 한참 먼, 소위 개죽음이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동기를 단순히 ‘헤세드’라는 한 단어로 압축하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너무나 신비하고, 경이로울 뿐입니다.
돌이켜 회개에 이르도록. 정말 그분은 왜 날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찬송가 143장) <관계중심 전도>라는 책에서 저자는 그가 가르치던 한 학생이 수업 시간 중에 간증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학생은 직장에 늘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어느 날 자기 것과 똑 같은 오토바이가 주차장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오토바이에는 거울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가 주차장에 와서 보니 자기 오토바이의 거울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오토바이가 세워진 장소로 가보니 그 오토바이에 아침에는 없던 거울이 달려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그 거울을 다시 뽑아냈지만 그래도 화를 참을 수 없어 그 오토바이에 물을 뿌려놓고는 돌아왔습니다. 그런다고 오토바이가 고장 나는 것은 아니지만 시동을 거는데 적어도 30분은 족히 걸렸겠지요. 그런데 그는 집에 돌아와서는 영 마음이 편치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내 친한 친구처럼 대해야 해. 그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 있어. 내 거울을 훔친 것을 보니 그가 거울이 필요한 것이 분명해.” 그래서 그는 가게에서 자기 것과 똑같은 거울을 사서 그 사람 오토바이로 가서 꽂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쪽지를 남겼습니다. “당신이 내 거울을 훔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 오토바이에 물을 뿌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때문에 저는 예수님이 나의 그러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쪽지에는 자기 이름과 연락처도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사람이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제 평생 수없이 도둑질을 했어도 이런 반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제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날 밤, 그 사람은 이 친구 아파트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레미제라블>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 ‘장 발장’이 훔쳤던 은촛대를 그에게 선물로 되돌려 준 신부님 이야기 말입니다. 그는 도둑에서 훗날 파리 경찰 대장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도 이와 같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요셉’의 형제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모습이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어야 할 이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있다니요! 그것도 ‘요셉’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요셉’을 능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들이 어디서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회개나 간증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 모습은 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 신애를 실족시켜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그 뻔뻔한, 자칭 그리스도인 살인자와 영락없이 닮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셉’의 형제들과는 다릅니까? 이들 형제들은 정말이지 ‘이집트’ 총리가 자신들의 동생인 줄을 꿈에도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도 오래 전에 지은 죄라 회개할 기회도, 상대도 지금으로서는 찾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나마 핑계할 근거라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들에게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시는 등 “보편적 사랑”을 베푸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다 알고 있을까요?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 부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그래서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들만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시 14:1)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도무지 핑계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러나 잠간! 이 사람들의 무지(無知)에 내가 일조한 책임은 없습니까?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둔 내 책임 말입니다. <로마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런 나를 향해서 이렇게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나도 이 세상의 무지에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나, 제자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것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게으름이나 무관심에 대해서도 오래 참고 계시는 줄 어찌 모른다는 말입니까?
나는 정말 회개한 자입니까? 우리는 <로마서> 2장 4절을 좀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일견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비와 인자를 베푸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는 자비의 결과인 것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햇빛이 비취니까 얼음이 녹는 것이지,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 햇빛이 비취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자비와 인자는 하나님의 본성이자 체질입니다. 빙하를 녹이는 햇빛이자 죄와 허물을 벗겨내는 능력이자 힘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비를 맛본 사람이라면 돌이켜 회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회개는 믿음이고, 결단이고, 간증이며, 행동입니다. 어떠한 주저함도,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내 안에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면, 여전히 주저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부끄러운 그 무엇이 있다면, 지금 당장 헌신하고 앞으로 걸어 나오시기를 촉구합니다.
3. 하나님과 양심: 햇빛의 조건
“6∙25 전쟁” 60 주년을 맞아 국내 한 신문사에서 이 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체험담과 회고담을 기획 연재한 바 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도 이 신문사에 체험담을 보낸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 신문사의 기자가 추기경에게, “천주교에서 용서란 어떤 의미입니까?”라고 묻자, 그분께서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제가 종교인이니까 조건 없이 용서해줘야 한다는 대답을 기대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용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도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건이 있습니다. 죄의 인정, 잘못했다는 자기반성,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는 뉘우침, 공개적 자백, 그리고 보상입니다. 집안에서 꼬마가 아무도 안 보는데 꽃병을 깼다고 합시다. 우선 자기가 깼다고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뉘우친 후, 가족들에게 고백하고, 꽃병을 새로 마련하는 단계라고 보면 되지요. 이 다섯 가지 요건을 다 포함한 것이 고해성사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는 대상에게 용서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상대가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테고요.
“6∙25 전쟁”과 관련해서도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불의한 공격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도 불의한 공격입니다. 불의한 공격자가 용서받으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다시는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는 대상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렇습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휴전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향해서 저질러왔던 수없이 많은 만행들, 예컨대, “1∙21 무장공비 침투”(1968), “아웅산 폭탄테러”(1983), “KAL기 폭파”(1987), “강릉 잠수함 침투”(1996), 그리고 “천안함 폭파”(2010) 등, 어느 것 하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6∙25 전쟁”이 남침(南侵)이 아니라 북침(北侵)에 의해서 저질러 진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오고 있으며, 당연히 “천안함 폭파”도 남한과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것은 더욱 황당하게도 남한 내에서조차 이에 동조하는 정신 나간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상당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이 같은 상대에게 햇빛, 즉 용서와 화해가 의미가 있을까?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바람이 아니라 햇빛을 계속해서 보내주어야 할까? 민족의 이름으로, 평화공존을 이유로 지난 10여 년간 남한에서 보내준 당근과 햇빛은 과연 기대하는 성과를 거두었을까? 김정일과 그의 추종자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외쳐대는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의 제단 앞에 회개의 번제물을 바치기라도 했던가? 그것이 비단 악어의 눈물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오만(傲慢)과 기만(欺瞞). 우리는 지금 ‘요셉’의 형제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이들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날 분에 넘치는 식사 대접을 받으면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한 번 화자의 묘사를 들어봅시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34절). 그저 마냥 즐거워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으로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총리가 이전에 요구했던 대로 막내 ‘베냐민’을 이번 방문 길에 데리고 가기는 합니다만, 과연 자신들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줄 것인가? 그들이 간첩이 아니며, 자신들이 말한 그 모든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것인가? 인질로 잡아두었던 ‘시므온’을 풀어줄까? 과연 우리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이처럼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안위를 염려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마 모두들 양손을 벌여 어깨를 으쓱하며 서로를 향해서 눈짓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거봐,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잖아. 그가 우리의 과거를 낱낱이 알 리가 없지.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거야. 울고불고 하며 지난 잘못 들추어 낼 필요가 없는 것이지. 우리 신분이나 가족에 대해서 그 정도 밝힌 것만 해도 어딘데. 그리고 가지고 온 선물이나 돈이 얼만데. 고백은 무슨.” 파티가 끝나고, 다음날 아침 원하는 곡식을 나귀 등에 싣고 성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이처럼 확신에 차있었으며, 의기양양하기까지 했습니다. ‘시므온’도 돌려받고, 동생도 인질로 남겨두지도 않았고,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무사히 귀환 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던 일말의 죄책감도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까? 정말 햇빛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 채 서산으로 넘어가는 것일까? 만일 ‘요셉’ 형제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오만한 생각이며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 대해서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요셉’ 형제들은 번제단(燔祭壇)을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는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참고. 히 9:22). ‘베냐민’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 모두는 양의 피를 그 제단 위에 뿌린 후에 성소 안으로 들어갔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히려 희희낙락했습니다. 혹시 알고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의 양심은 여전히 두꺼운 빙하 속에 갇혀있어 햇빛만으로 녹아 나오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충격요법이 특효약입니다. 심장 박동이 꺼져가는 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듯이 말입니다.
무너지는 자아. ‘요셉’이 마침내 그 카드를 꺼내든 것입니다. 회심의 일격을 가하기 위함입니다. ‘베냐민’의 곡식 자루 속에 은잔(銀盞)을 몰래 넣도록 조치를 한 것이지요. 아무 것도 모르고 득의만만(得意滿滿)하게 돌아가고 있는 형제들 앞에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떨어집니다. “왜 도적질을 했느냐?” “왜 선을 악으로 갚느냐?” 청지기의 호통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며,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억울한 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극렬하게 거부하고 반발합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7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7-9절)
정말 당당하고 도도(滔滔)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청지기를 몰아붙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누군들 이러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그 물건을 훔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도적이라고? 내가 살인자라고? 내가 죄인이라고? 어림없는 말씀!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다는 것이야? 내가 뭐 살인을 했어, 도적질을 했어, 남에게 피해를 주었어? 나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몰아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요셉’ 형제들이 ‘요셉’의 청지기를 몰아세우듯 말입니다. 어느새 나도 그들처럼 “자칭 의인”(self-righteous)이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죄입니다. 하나님은 은잔을 훔친 것과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가지고 나와 논쟁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이런 저런 잘못된 모습을 놓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대드는 그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아세우는 그 태도가 죄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죄하다는 그 태도가 유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만만한 나를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실까? 그대로 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더욱 기고만장할 것이 뻔합니다. 지금 형제들의 모습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만일 그들 중 누구라도 은잔을 훔쳤다면 그자는 죽게 될 것이고, 나머지 모두는 노예가 되겠다는 서원 말입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서원입니까? 하지만 청지기는 이들의 서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잔을 훔친 자만 데리고 가겠다고 합니다(참고. 10절).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요? 문제의 은잔이 발견된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베냐민’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냐민’에게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형제 사이의 문제에 있어서 ‘베냐민’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우려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가 말입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흠이 없고 죄가 없는 그에게 말이지요. 아버지 ‘야곱’이 극진히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말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 ‘요셉’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이끌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이 장면은 가족 간의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는 마지막 관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나아온다면 말이지요.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형제들의 반응을 통해서입니다. 즉 이들이 이전에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베냐민’을 이집트에 내버려두고 떠나는지, 아니면 그를 구하러 나아올 것인지를 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형제들은 ‘베냐민’를 버리고 떠나지 않고 그를 구하러 함께 이집트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노예로 바치기 위해서 이집트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모두들 마치 자기가 은잔을 훔친 것처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옷을 찢고” 슬퍼하는 모습이 이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13절). 이전에 ‘요셉’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옷을 찢고 슬퍼한 사람은 ‘야곱’ 뿐이었습니다만(37:34), 이번에는 모든 형제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이처럼 한 마음이 되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이전에 ‘요셉’을 ‘이집트’로 파는 일에 공모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베냐민’을 데리고 자원해서 ‘이집트’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그들이 서원했던 바대로(9절) ‘이집트’의 종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장면입니까? 특히 ‘유다’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이십 년 전에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자고 제안했던 그가 아닙니까! 그렇던 그가 이제 ‘베냐민’을 위하여 노예가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의 죄가 그들 모두의 죄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16절)
사도 ‘바울’은 ‘아담’의 범죄가 곧 나의 범죄이며, 인류 전체의 범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인류의 결속성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유다’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야곱’의 열두 형제는 열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변화입니까? 누가 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하던 자의 자아(自我)를 깨부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죄로 찌든 양심을 드러내도록 한 자가 누구입니까?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빛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이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라나 개인이나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고 회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칙은 먼저 잘못을 시인하고 밝히는 자가 항상 손해 보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사코 잘못을 숨기고 억지 주장을 부립니다.
세상의 진실은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지는 것이야말로 이기는 것입니다. 무겁고 힘든 그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진정 인생의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흠 없고, 죄 없는 ‘베냐민’을 통해서 형제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고자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화해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베냐민’과 자신을 동일시했을 때 ‘요셉’의 용서를 이끌어낼 수 있었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분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4. 유다의 연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연설이나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우리네 격언입니다. 특히 서양 세계에서 이를 더 중요하게 간주하였으며, 특히 명연설은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그 감동을 이어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서양 문학은 명연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컨대,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대국민 라디오 연설 중에 행한, “피와 땀과 눈물”에 관한 연설이라든지, 그보다 앞선 미국 남북 전쟁 당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그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케티스버그’의 연설, 그리고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로 유명하게 된,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물어라”는 연설문,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킹’ 목사의 연설, 또한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의 고별사 중에 등장한 바 있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 등의 연설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면서 감동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창세기> 화자가 44장 절반을 할애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유다’의 연설 역시 명연설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화자가 44장의 절반을 ‘유다’의 연설로 할애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유다’의 연설이 <요셉 이야기>의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연설은 ‘요셉’을 감동시키고도 남았습니다.
時宜適切. 왜 ‘유다’의 연설이 그토록 감동적입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이유를 연사 자신과 그리고 그가 처해 있는 현재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다’가 이전의 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다’가 어떤 인물입니까? 이십이 년 전에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을 주도했던 당사자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베냐민’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고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유다’가 ‘요셉’을 팔아넘기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를 두둔하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즉 ‘유다’가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던 것은 그의 생명을 구해주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를 죽이자고 하는 마당에 그를 죽이기보다는 노예로 팔아서 목숨이라도 부지하게 하자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성경> 본문이 전해주는 내용과는 다소 다릅니다. ‘요셉’을 살려주고 싶어 했던 자는 ‘유다’가 아니라 ‘르우벤’이었습니다(참고. 37:21-22). 그리고 ‘유다’가 ‘요셉’을 살려두고자 했던 동기도 실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26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37:26-27)
‘유다’의 동기는 경제적인 데 있었습니다. 즉 아무런 경제적 유익도 없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그를 살려두어 노예로 팔아 이득을 챙기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음흉하고 위선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물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베냐민’을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주 긴박하고 절박함이 절절이 베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연설이라기보다는 호소나 간구에 더 가깝다 해야 할 것입니다. ‘아테네’ 언덕에서 한가하게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철학자의 연설도 아니고, 짐짓 즉흥연설로 보이려고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수사(修辭)로 가득 찬 정치인의 연설도 아닙니다. 연사(演士)는 마치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아무 사전 준비도 없이 심중에 있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돌변하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의 위기가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해보는 질문입니다. 최근 수 년 동안만 해도, 가뭄과 굶주림, 억울한 누명과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바로 직전에는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들이 그와 나머지 형제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닥친 환난은 이전 것들에 비하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큰 어려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왜 이처럼 ‘유다’가 돌변하고 있는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동생 ‘베냐민’을 그토록 위하고 챙기게 되었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아무튼 지금 그의 모습은 절박하며, 그동안의 자존과 자신감은 다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연설을 내용에 따라 구분해 보면 대략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상대를 추켜세우면서 자기 말을 들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으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주의 귀에 한 말씀 아뢰게 하소서...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18절). 이는 상대의 마음을 여는 적절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면 시작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총리가 이전에 그들을 어떻게 대해주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족 관계라든지, 동생에 대해서라든지, 그의 지금 형편 등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었던 질문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19-23절). 형제들은 대부분의 질문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주었으며, 총리는 이들 정보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총리의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상대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소개하는 비법 중의 하나가 상대로부터 긍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총리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언급하고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가 계속 자기 말에 동의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어서 ‘유다’는 총리가 모르는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즉 지난 번 여행에서 돌아가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입니다. ‘요셉’으로서야 알 재간이 없겠습니다만, 총리 자신이 그 이전에 이들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형제들이 집을 돌아갈 때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요구한 사실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알렸다는 사실이나, 그 요구를 받고 아버지 ‘야곱’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슬퍼했다는 사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이 죽어버릴 것이라고 절규했던 일 등을 알려줍니다(27-29절). 지금 ‘유다’는 막내아들을 놓고 비탄에 잠겨있는 늙은 애비의 심정을 그려 보임으로써 듣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총리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을까요?
넷째, ‘유다’는 이제 한 가지 곤경(困境)을 다루고 싶어 합니다. 그 곤경이란 ‘베냐민’이나 자신들의 목숨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남아있는 늙은 아비의 목숨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연설의 백미(白眉)에 해당되는 부분이라 본문을 인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30-31절).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동생을 살리려 간구하는 동안 어느덧 ‘유다’ 자신도 그의 늙은 아버지를 깊이 동정하고 사랑하게 된 모습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 이전에 ‘야곱’과 그의 혐오스러운 자식들 사이에 이미 화해의 대 서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유다’는 자기 개인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유다’에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베냐민’을 살리려고 발 벗고 나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연설의 말미에 두는 조심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밝히는 개인적인 이유란 아버지와 맺은 약속을 말합니다. 즉 만일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는 아버지에게 영영 큰 죄를 짓게 되며, 자기 목숨을 대신 취해도 된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고 말합니다(32절). 그래서 ‘베냐민’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하면서 최후의 진술을 마칩니다(34절). 그리고 이 최후의 진술은 ‘요셉’을 향한 마지막 압박이기도 합니다.
이제 공은 ‘요셉’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가 처음에 의도하고 바라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무엇을 계획했던, 어떤 결과를 기대했던, 지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이 ‘베냐민’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하고 변론하고 있는 이 상황. 그리고 ‘유다’조차도 ‘베냐민’만 무사히 풀려난다면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며 자청하고 나서고 이 상황 말입니다.
모세의 연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연설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를 죽여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의사(意思)를 담은 연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와 유사한 감동적인 설교나 명연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 첫 번째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을 즈음 그는 산 정상에서 사십 일을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듣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출애굽” 이후 이곳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하나님의 분노를 샀습니다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듯싶습니다. ‘모세’가 머물던 산 정상은 구름과 연기와 천둥과 화염으로 뒤덮여, 이를 바라보던 백성들은 처음 한 동안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냉소적으로 변하면서, 그들의 하나님 ‘야훼’를 버리고 ‘금송아지’ 신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출 32). 그들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최근의 생생한 기억보다 그보다 오래 된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더 기억하며, 그들에게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찬송을 들어봅시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아론’조차 이 예배에 동참하기에 이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역설입니까! 지금 산 정상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율법을 ‘모세’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대제사장을 포함한 온 백성이 송아지를 향하여 난장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장면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극적 대조를 위해서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십계명의 일부를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2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2-5)
굳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더라도 그분의 실망과 분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성의 진영으로 돌아온 ‘모세’의 행동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새긴 돌 판을 던져 부셔버리고는 대제사장 ‘아론’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그리고는 ‘레위’ 지파를 시켜 이 반역에 참여한 자들을 모두 쳐 죽이라고 명하는데, 이 때 죽은 자들의 수가 삼천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이스라엘 백성의 약 1.5%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적어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모세’는 그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을 처벌하였고, 백성들의 충성심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되돌려 놓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모세’는 단순히 백성의 최고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모두에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백성들의 죄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진노 가운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반역한 백성을 멸할 준비를 하면서 말입니다. ‘모세’가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밤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립니다.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위하여 신원(伸寃)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장면은 이튿날 아침 그가 하나님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1-32)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동시에 자기 백성이기도 합니다. 이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다’가 지금 ‘베냐민’을 위하여 간청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각오는 ‘모세’나 ‘유다’가 유일한 인물은 아닙니다. 민족의 불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각오 또한 그에 못하지 않습니다. ‘모세’처럼 반역적이고 불순종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각오입니다.
1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 9:1-4)
그리스도의 영. ‘유다’나 ‘모세’와 ‘바울’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요? 이들 모두가 형제나 민족을 위해서 보여주고 있는 헌신이나 각오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들 모두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입니다. ‘유다’는 진정 거듭난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진정 거듭났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군가를 위하여 전심전력 기도하고 있습니까? 내가 대신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간청하고 있습니까? 헌신하고 결단합시다.
5. 나는 요셉이라
모든 이야기에는 절정이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어지간한 독자라면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서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서 주변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듯이, 이야기의 절정에서 그 주제나 저자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게 됩니다. <요셉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이야기의 절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야기의 주인공 ‘요셉’의 편에서 보자면, 그가 형제들 앞에서 마침내 자기가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마치 화산 폭발로 거대한 용암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듯, ‘요셉’은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을 일시에 분출시키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함께 느껴 봅시다: “요셉이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1-3절).
이 장면을 이야기의 절정으로 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실 이야기 전체적으로 볼 때, 지금 이 장면보다 더 극적인 순간들이 여럿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순전히 형식적인 면에서만 볼 때, 이야기의 반(反) 절정은 바로 직전의 에피소드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요셉이야기>는 일곱 개의 작은 에피소드가 동심원적 구조 내지는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으며, 직전의 에피소드 즉 “형들의 체포” 장면이 교차대구의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셉이요”하며 외치는 이 장면은 신학적 주제의 기승전결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절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주제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일대 전환을 이루고 있습니까?
<요셉 이야기>를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은 그 주제가 어떻게 절정에 이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알리는 방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type)으로 그리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즉 가족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요셉’이야말로 인류의 구원자로 자신을 드러내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우리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향해서, “내가 그라”고 밝히고 계신 주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이스’ 목사님은 몇 가지 관점에서 ‘요셉’이 어떻게 예수님의 모형이 될 수 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점을 이곳에서 소개하는 것도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알아보다. 첫 번째 유사성은 ‘요셉’이 그의 형들을 먼저 알아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실은 보편적인 세태(世態)를 반영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개 학생이 선생을 찾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대학원도 이와 같습니다. 한심스럽게도 요즈음 학생들은 어떤 교수가 조금이라도 인건비를 더 많이 주는지, 어떤 연구실이 더 편한 곳인지, 졸업 후 취업은 어떤 분야가 더 유리할 것인지를 곰곰이 저울질 해 본 다음에 지도교수를 결정합니다. 특히 지방대학의 경우 대학원 입학생의 수가 늘 정원보다 미달이다 보니 주도권은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생이 먼저 선생을 평가해 본 다음에 자신의 지도교수로 결정하고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목자가 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선택하는 것 말입니다. 양이 목자를 선택하게 되면 처음부터 기독교 교육은 싹수가 노란 것입니다. 왜일까요?
물론 오늘날에도 예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이나 다른 예술 분야에서는 대가(大家)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 몇 년이고 참고 견디며 심지어 인격적 모독까지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 연예 기획사를 보십시오. 가수나 연예인이 되겠다고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며 기획사 간부나 사장의 눈도장을 받으려 안달입니다. 심지어 성(性) 상납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에서 목자 예수님의 선택은 세태의 흐름과는 정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양들의 자질과 형편과 인품을 아셨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양들이 그분을 알아보기 전에 그들을 알아보셨습니다. ‘요셉’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베냐민’을 보는 순간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르우벤’이나 ‘유다’나 ‘시므온’이나 ‘레위’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형제들은 그가 누구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화자도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42:8).
이는 마치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가 진정 누구인지, 왜 세상에 왔는지 모르던 것과 같습니다. 어찌 예수님의 형제들뿐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4, 15)
‘다윗’의 고백인 즉은 하나님이나 주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형제들을 바라보는 ‘요셉’이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그의 형들은 지난 날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서로 간에 나누고 고백했지만, 그들이 아닌 어느 누가 자신들의 잘못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밝히 드러낼 수 있을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잘못을 공공연히 밝혀 치부를 드러내거나 또 화를 자초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들 외에는 누가 그들의 은밀한 비밀이나 죄악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것도 어제 오늘이 아니라 이십 년 전에 한 일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도 ‘요셉’처럼 나의 모든 잘못들을 다 알고 계실까요? 내가 아무리 그들을 감추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사랑하다. ‘요셉’을 ‘그리스도’와 나란히 비교해 싶은 동기는 또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먼저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먼저 사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나중에는 형들도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지금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고 또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이십 년 전에 형들은 오히려 그를 증오했으며,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실제 죽었을 것으로 믿고 지금까지 지내왔을 것입니다.
다만 최근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이것이 지난 날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부분적이긴 하지만 과오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끼리 있을 때만의 이야기이지, 그렇다고 해서 ‘요셉’을 그리워한다거나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죽어버린 동생을 사랑할 수도 기회도 없을 테니까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형제들하고만 있고 싶은 마음에서 주변의 시종들로 하여금 물러나 있도록 명령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고독한 이방인이었고 방랑자였습니다. 언감생심 어찌 가족들을 만나리라고 기대라도 했겠습니까! 그토록 그리던 가족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난날을 회개하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동안의 그리움은 이제 연민과 사랑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울고 계신 그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눅 13:34)
형제들을 향한 ‘요셉’의 연민의 정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시는 주님의 그것보다 어찌 더 깊고 크다 할 수 있겠습니까?
떨리는 구원. ‘요셉’의 형들이 그의 눈물을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제는 살았구나 하며 환호(歡呼)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들은 동생의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을 받았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요셉’을 예수님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세 번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요셉’의 형들에게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장치였음을 이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지금 이 순간 ‘요셉’의 눈물을 보면서, 비로소 그 모든 일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구나!”
그래서요? 상황이 전보다 나아졌습니까? 이제는 살았구나 하며 안도했습니까? 정 반대입니다.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습니다. 모르고 살았던 그 세월이 훨씬 더 나았다는 말입니다. 이전에 ‘요셉’에게 저질렀던 그 모든 일에 대한 보복을 지금 받는구나, 이제는 죽었구나 하며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순간 그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아니라 심판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는 말이지요. 왜 구원이 이처럼 환호나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죄가 비로소 죄로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까?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밤이 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던 그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환호하며 즐거워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베드로’는 환호하며 날뛰는 대신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하면서도 같은 편지 안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의 구원이 값을 매길 수 없다 해서,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는 당연한 보상 같은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두려움과 자책으로 떨지 못하는 자식은 아직 제대로 된 자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비 오는 날만 되면 울어대는 개구리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죽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나는 얼마나 헤아리고 있습니까? 전율하며 떨고 있습니까? 닭이 세 번 우는 것을 듣고 몸부림치며 울었던 ‘베드로’처럼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가롯 유다’처럼 자신이 한 일을 놓고 비통해 하며 치를 떨어 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가 감사와 감격의 시간으로 다가옵니까? 아니면 월요일 아침의 학교 조례 시간만큼이나 따분하고 지루합니까? 정말 복음에 빚진 자로 여기고 세상을 향해 그 복음을 선물하려고 안달하고 있습니까?
예수께로 가까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나의 대답이 “그렇습니다”가 아니라면 나는 아직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그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그들을 알아보았으며, 형들이 그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사랑하였으며, 형들이 구원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구원을 베풀었으며, 형들이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그들을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4절)하며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도 이와 같습니다.
두 사람의 초청 방식 또한 유사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를 알리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물린 것처럼 예수님의 부르심 또한 이와 같습니다.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내 영혼을 향해서, 내 양심에 대고, 들릴 듯 말 듯, 나와 단 둘이 독대하시길 원합니다. 분주하고, 시끌벅적한 가운데서는 그분의 음성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알 수 있듯이, 주님의 부르심도 이와 같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흥집회나 대중 기도회 또는 통성기도회와 같은 요란한 방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조용하고 은밀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바람 소리 가운데 ‘야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조용한 골방을 찾습니까?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드리는 대표 기도가 전부입니까? 하나님은 언제 내 기도에 귀 기울고 들으실 것 같습니까?
짐작컨대 ‘요셉’이 그 형들을 부를 때, 열한 명의 이름을 일일이 다 불렀을 것입니다. 나중에 보게 될 것입니다만, 그는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고, 형들과도 입 맞추며 안고 울었습니다(14-15절).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어떻게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심도 이와 같습니다. 그분이 부르시는 이름은 내 선조도 아니고, 내 이웃도, 내 가족도 아니며, 이순신 장군도 아닙니다. 그분은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그는 주님에게 되물었습니다. 왜 다른 친구들은 부르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의 음성이 들립니까? 지금 당장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당장 앞으로 걸어 나와 그분의 형제가 되고 친구가 되는 특권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요셉’이 그 형들을 부를 때,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하고 밝혔듯이, 예수님 또는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 즉 그의 형제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종이 아니라, 그의 친구로 부르고 있습니다(요 15:15).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6. 하나님이 나를
한 번은 캐나다에 있는 둘째 녀석과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교회를 옮겨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한인 교회에서 ‘캐나다’인 교회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잘 한 결정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이 되라”는 경구가 있듯이, 그 나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에 가서 교제의 폭도 넓히고, 보다 폭넓은 신앙의 경험을 쌓는 것이 앞으로의 신앙생활에도 훨씬 도움이 되겠기에 동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교회는 작게는 서너 명에서 많아야 일이백 명 정도의 이민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성장보다는 현상 유지에 더 급급한 실정입니다. 선교나 지역 봉사 등의 활기 찬 기독교 사역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니, 늘 기존 신자들끼리의 교제나 기도회 등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침체되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런 교회가 갖는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모이기를 자주하고, 상호 부조나 교제가 깊어진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학우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를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회다 뭐다 하면서 이런 저런 교회 모임에 늘 참석하라고 하니 질렸나봅니다. 사실 교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모임이 기도회 아니겠습니까? 아마 이런 모임들이 그에게 너무 근본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툭하면 하나님 이야기, 기도 응답 이야기, 헌신과 결단 이야기만 해대니 기가 질릴 것은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말입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다고 간증해대는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십니까? 상대의 기분을 생각지도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 이야기를 해대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같이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합니까? 아니면 기가 질려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심정입니까?
범사에 하나님이. ‘요셉’의 간증을 들으면서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요셉’이야말로 말끝마다 하나님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는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열일곱에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온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 초지일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요셉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봅시다. 우선 ‘보디발’의 아내가 잠자리를 함께 하자고 유혹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이 하나님 때문에 간부(姦婦)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감옥에 갇혀있던 ‘바로’ 왕의 두 관리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다시 하나님 이름을 입에 올립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 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40:8).
이뿐만이 아닙니다. 나중에 왕의 꿈을 해몽해주면서도 역시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41:16);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41:25);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41:28);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41:32).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지을 때도 예의 하나님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41:51-52).
<창세기> 거의 끝 무렵에 형제들을 앞에 놓고 자기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지사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미래지사까지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50:24-25).
말끝마다 하나님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거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무슨 광신자도 아니고, 최근에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죽는 날까지,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 이야기 일색입니다. ‘요셉’이 우리 교회 식구라면, 내가 속한 목장 식구이거나 나의 목자라면,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정말 피곤하고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그 밑에서 그를 섬기고 있었을 부하들의 고충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런 상관이나, 목자나, 목사 만나면 정말 힘듭니다. 나는 도무지 할 이야기가 없는데, 상대는 말끝마다 하나님의 은혜니, 하나님의 섭리니, 기도의 응답이니 하고 설쳐대면 영적으로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말끝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리는 ‘요셉’의 모습은 본문(45:5-9)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짧은 다섯 절 안에서 네 번에 걸쳐 하나님을 반복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간증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이...나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가 겪은 그 모든 일들이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일들의 궁극적인 원인은 결국 하나님이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태도이며 간증입니다.
악과 고통마저. 이처럼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때, 무슨 유익이 그에게 있었습니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이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온갖 악한 일들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그에게 쏟아져 내렸습니다. 형제들의 미움과 배척, 노예 생활, 유혹과 감금, 배신감과 고독, 등등.
따라서 그의 고백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악한 일들을 그에게 쏟아 부었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과 고통의 창조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악한 사람들의 악한 계획도, 사악한 자들의 사악한 행위마저도 말입니다. <욥기>에서 ‘욥’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하도록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범죄하는 순간에는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그냥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왜 그를 말리지 않으셨을까?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과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을 “섭리”(攝理)라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이나 고통의 창조주는 아니지만,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궁극적인 통제와 책임을 지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고백도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선(先)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그렇다면 ‘요셉’이 간증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께서 ‘요셉’의 고통과 섭리를 한데 버무려서 이루어내신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분이 모든 것을 합력시켜 이루어내신 일이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대략 세 가지 정도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즉 그를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로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9절). 다름 아닌 ‘이집트’ 총리입니다. ‘요셉’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애굽 전국의 주(@/da, 아돈)”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the Lord”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지칭하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노예에서 그 나라의 주인이 되었으니, 신분상승의 예로서 이보다 더 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얻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그가 ‘이집트’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가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내려가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겸손이라는 양식을 먹고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대개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겪었던 광야 40년의 세월, ‘다윗’이 보내야 했던 질시와 인고의 13년의 세월이 모두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격은 그냥 형성되는 것은 아닌 가 봅니다. 인생의 고해(苦海)를 항해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도구 중의 하나가 인내(忍耐)일 것인데, 인내는 인격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인내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토양은 다름 아닌 환난(患難)일 것입니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선언으로 이 교훈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롬 5:3하)
그러니까 내가 온전한 자아와 인격을 갖기 위해서는 환난을 거치는 길 외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요셉’을 “애굽 전국의 주”로 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섭리가 이루어내실 두 번째 일은 애비와 형제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은 ‘요셉’이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불러낸 것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들 모두를 ‘이집트’로 불러낸 것은 이들로 하여금 번성하고 번창하게 만들어 큰 민족과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래 전에 이미 약속하신 것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요셉’ 가족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내어 목숨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절)
셋째, 하나님의 관심사는 ‘요셉’과 그의 가족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 열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내실 세 번째 일은 열방에 관한 그분의 계획입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절).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생명이 누구의 생명을 말하는 것인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 주변에 살던 여러 족속들이 극심한 기근을 겪었으며, 이들 모두 ‘이집트’로 몰려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한 사람의 고난을 통해서 그의 가족은 물론 온 민족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그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그 답입니다.
반복되는 역사. <로마서>는 이스라엘도 ‘요셉’과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롬 11:11-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의도하시지는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실패와 좌절과 고난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방을 구한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원대하고 심오한 하나님의 섭리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유명한 “종의 노래”를 통해서 오래 전부터 이를 예언한 바 있습니다: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2-5)
여기서 “그”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 중 어느 누구도 이 노래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지칭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인격과 사역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노래를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 노래가 자신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적용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해석이 가능했을까요?
<전도서>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와 ‘모르드개’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악한 ‘하만’의 간계로 ‘페르샤’ 왕국에 살고 있던 모든 이스라엘이 멸절의 위기를 만났을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찾아가 그 유명한 도전으로 왕비 ‘에스더’의 영혼을 일깨웁니다.
13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 4:13-14)
우리가 알다시피 <에스더>에는 하나님 자신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이 말속에 역사와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에 대한 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개인과, 나라와, 우주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잣대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것이 그의 안경입니다. 그는 이 안경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심은”하고 확신합니다.
어떻게 입만 열었다 하면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까? <잠언서>는 “너는 범사에 그(하나님)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서>는 “항상 기뻐하라...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 18)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매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매사에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 무슨 비결이 없을까? 무슨 신비한 체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서양 속담에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Easy come, easy go)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부자 3대 못간다”는 경구가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신비한 체험이나 비결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래갑니까? 우리네 속담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습관입니다. 습관은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그리고 습관은 체질이 됩니다. 우리가 체질을 운명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요셉’과 ‘모르드개’와 예수님 모두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심은”하며 꿈과 비전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111 사역”입니다.
헌신을 위하여.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내 상황은 어떻습니까?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당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답답하고 막막하기만 합니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게 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왜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인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요셉’의 안경을 쓰고 있습니까? ‘모르드개’의 도전을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두신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제 내가 답할 차례입니다. 결단하고 헌신합시다. 그리고 고백하고 간증합시다.
7. 요셉의 날
나라마다 국경일이나 기념일이 있습니다만, 사람 이름을 기념하는 날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본인이 기억하기로는 전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에는 사람 이름을 기념하는 날이 상당 수 있습니다. 미국에 특히 이런 기념일이 많은데, 최근에도 미국 LA 의회는 2010년 8월 7일을 “김연아의 날”로 선포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정말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영광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우리 정부가 이 날을 제정한 것도 아니고 외국 정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그녀만큼 크게 국위를 선양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어린 여학생이 이룩한 업적과 성과는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LA 시민들이 김연아를 기념한다면 분명 그녀가 이룩한 기념비적인 업적을 기릴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그녀를 앞섰던 어떤 선수도 이루지 못한 그 업적을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날 날은 많겠지만, 지금 본문 속에 그리고 있는 이 장면, 이 순간 역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이 감격적이고 격동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절). 형제들이 구원을 받고, ‘야곱’의 가족 모두가 이집트로 이주하는 전기가 마련되는 역사적 순간입니다.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출애굽”에서 시작된다고 한다면, 이 장면은 “반(反) 출애굽”을 알리는 서막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 날을 기념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는 어떻습니까? ‘이집트’ 역시 그네들의 역사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했을 위대한 재상(宰相) ‘요셉’을 기려 이날을 “요셉의 날”로 제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요셉’이 단순히 자기 가족들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주변 모든 민족들을 구원해 냄으로써 ‘이집트’의 위대함을 만방에 드러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입니까? 이스라엘이든 ‘이집트’든 ‘요셉’을 기념해야 할 이유가 모두 자신들의 이름을 만방에 알려주었기 때문입니까? 감사의 표시로 말입니다.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 기억해야 할 사실도 이것이 전부입니까? 언젠가 한 TV 방송국에서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에서 연습 중 넘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 선수가 오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무려 4만 번인가를 빙판 바닥에 쓰러졌다고 언급하면서, 제대로 성한 구석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그녀의 몸도 함께 비춰주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녀의 영광은 온통 상처뿐인 영광이었습니다.
‘요셉’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스라엘이든 ‘이집트’든 “요셉의 날”에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들이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과거사가 아니라, ‘요셉’ 의 생애를 돌아보는 것, 특히 그의 몸에 남겨진 “영광의 상처”를 되돌아보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환란에서 연단으로.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감격적인 장면으로 되돌아가보아야 할 것입니다.
14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절)
친동생 ‘베냐민’ 뿐만 아니라, 나머지 이복형들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껴안고, 입 맞추며, 눈물 흘리고 있는 ‘요셉’을 보며 갖게 되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이십년 만에 가족을 만나는 기쁨의 눈물일까요?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요셉’의 눈물입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시에 특히 북쪽 가족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실로 처연(凄然)하고 처절(凄切)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단순한 재회의 기쁨이 아닙니다. 매우 절제되고 통제된 감정의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그들이 흘려내는 눈물 속에는 지나간 수십 년 동안 겪어왔던 고통과 좌절이 뒤섞여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나 형제들과 생이별하여 생지옥과도 같은 낯선 동토(凍土)에서 억압과 감시 하에서 꼭꼭 누르고 숨겨왔던 두려움과 외로움과 서러움의 눈물이 그렇게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요셉’의 눈물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 말입니다. 나이 불과 열일곱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이국으로 노예로 팔려왔을 때 그가 겪었을 심적 충격을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겪었을 충격은 문화 충격과 언어 충격까지 겹쳐 실로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충격은 또 있습니다. 정직함과 신실함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모함과 배신과 투옥이었습니다.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사회적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이년을 감옥에서 홀로 지낼 때 그의 유일한 친구는 고독과 절망이었습니다. 그 이년 동안에 잠시 소망의 빛이 비추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 때는 다름 아닌 같은 감옥에 왕의 고위직 신하 두 사람이 투옥되었을 때입니다. 이들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해주고 이들로부터 곧 풀려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보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빛도 잠시. 그는 다시 잊혀 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런 상태로 영원히 지하 어두운 감옥에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이전보다 더한 절망감과 외로움이 그를 죽음보다 더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월이 전혀 무익했을까? “우연”이 그를 재상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겠습니다. 실로 환난은 인내를 낳았고, 인내가 연단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여기서 “연단”이라 함은 ‘헬라’어로 “품성”이나 “인격” 또는 “인정받은 자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진정한 자아를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참고 견디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진정한 자아가 형성되고, 성숙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곰과 호랑이가 겪어야 했던 인내와 연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곰은 인내하여 새로운 연단 즉 환웅(桓雄)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인내하지 못하여 그냥 원래의 짐승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야수(野獸)의 본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말입니다.
훗날 ‘이집트’의 후손이든 ‘이스라엘’의 후손이든 “요셉의 날”을 기념할 때, 주인공 ‘요셉’이 겪었던 환란과 인내, 그리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운명이 된 인격을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복이 아닌 용서. 후대가 “요셉의 날”에 기념해야 할 또 다른 기억은 무엇입니까? 역설적입니다만 ‘요셉’의 망각 즉 “기억 상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첫 아들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고 있는 것만 보아도 우리는 이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41:51).
우리는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잘못된 과거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시효 만료되어 해체되었습니다만, 과거사위원회에서 한 일도 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과거사를 들추어내어 벌 줄 자는 벌주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만든 위원회였습니다. 이런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과거사 정리는 자칫 미움과 보복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요셉’이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망각의 강 속으로 흘러 보낼 때 함께 흘러 보낸 것이 바로 증오와 보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사전에서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이라든지 와신상담(臥薪嘗膽) 등과 같은 그 유명한 중국의 고사 성어가 자리할 여지가 없었다 하겠습니다. 다시 재회의 장면으로 되돌아가 봄으로써 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동생 ‘베냐민’을 얼싸 안고 우는 것이야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만, 나머지 형제들과도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정한 용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지요. ‘요셉’이 이렇게 했을 때 나타나는 형들의 반응에 대한 화자의 묘사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더니.” 비로소 ‘요셉’의 진심을 파악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정말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을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언론을 통해서 해외 입양아들이 고국을 찾아와 과거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이들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자기를 고아원에 버린 그 부모를 미워하기는커녕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하고 말입니다. 이들이 부모를 찾는 것은 그들을 찾아내어 과거사를 따지고 앙갚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만나서 ‘요셉’처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성한 모습, 자랑스러운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입양아들은 자신의 혈육의 부모들보다 훨씬 더 큰 그릇으로 성장해 있는 것입니다.
‘요셉’ 역시 이들 입양아들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 ‘야곱’보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보다 더 큰 그릇으로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 이야기>의 끝에 “야곱의 예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만, ‘야곱’은 임종 시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독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만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와 분노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49:6-7)
‘야곱’은 죽는 순간까지 이 두 아들이 이전에 ‘세겜’에서 ‘디나’의 일로 저지른 잔학한 복수극을 기억하고 용서할 수 없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37장). 그런데 우연찮게도 이 두 형제는 ‘요셉’을 팔아넘기는 일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자들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훗날 “모세의 축복” 속에도 ‘시므온’ 지파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습니다(신 33). ‘모세’ 역시 역사를 통해서 그의 악행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지금 이들 모두를 끌어안고 용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야곱’이나 ‘모세’는 ‘요셉’과 비교가 될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날. 다만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그를 능가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팔아넘긴 제자 ‘가롯 유다’마저 받아들였고, 마지막 성찬 때에는 떡 한 조각을 떼어 그의 입에 넣어주는 등의 각별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마지막 배신의 날 밤에 ‘유다’가 로마 병정들을 데리고 와서 누가 예수인지 일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볼에 입맞춤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은 결코 그의 뺨을 돌리지 않고 허용했습니다.
나를 찾아오셨던 분도 바로 이 주님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알지 못하였을 때나, 알고 난 뒤에나,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배반하고 거부하고 등을 돌렸습니다만,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내 속에서, 그리고 나와 함께, 또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하여, 울며, 기다리며,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날”을 제정하여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면, 무엇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까요? 성탄절입니까? 부활절입니까? 주님께서 직접 그분의 제자들에게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대답해 봅시다.
8. 왕의 好意
<요셉 이야기>에서 ‘바로’ 왕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 특히 그가 꾼 두 차례의 꿈은 이야기의 극적 반전을 이루게 했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본문에서 보다시피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을 하는 기틀을 그가 마련해 준 셈입니다. 그가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고서는 결코 내릴 수 없는 결정임에 분명합니다. 그는 ‘요셉’의 심중을 꿰뚫고 있었고, ‘요셉’의 마음이 곧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만일 신하들이 “요셉의 날”을 제정하자고 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 질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대뜸 <에스더>에 등장하고 있는 ‘페르샤’의 왕 ‘아하수에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 역시 ‘모르드개’라 불리는 한 신하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이름을 높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 때문에 암살의 위기에서 구사일생 벗어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왕은 자신의 구상을 최측근 신하 ‘하만’에게 드러내며 그 방안을 타진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자는 왕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 인줄 알고 한껏 들떠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줍니다:
7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8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9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 6:7-9)
착각도 자유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가히 예술적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왕이 자신이 아닌, ‘모르드개’에게 이와 같이 행했을 때 그가 받았을 충격과 실망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지엄한 약속. 만일 누군가가 ‘바로’ 왕에게 “요셉의 날”을 제정하자고 하며, 왕이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하수에르’ 왕과 같은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조치와 그에 따른 약속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17-18절).
왕의 말은 곧 법이고, 고로 그의 약속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다름없습니다. ‘요셉’이 그동안 왕과 ‘이집트’를 위해서 한 일에 비하면 이 같은 조치는 일견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인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금 왕으로부터 이 같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대우는 고사하고 당장 처형을 받아 마땅합니다. 왕이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왕의 오른 팔 ‘요셉’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넘긴 자들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다니요! 당장 잡아다가 요절을 내야 하지 않을까요?
왕의 인품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대목은 또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가나안’에 있는 그들의 모든 가족을 불러내려 ‘이집트’에서 함께 살게 하는 데에는 솔직히 정치적인 부담이 없을 수 없습니다. 현재 ‘요셉’의 정치적 지위나 영향력을 지금보다 더욱 강화시켜줄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입지나 권위는 약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독재자는 자신을 이을 제 2인자의 존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위 차세대 주자가 자기보다 대중들의 인기를 더 끌게 되면 가차 없이 그를 숙청해 버리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동생에게 권력을 승계시키려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북한이나 ‘쿠바’에서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바로’ 왕이 자신의 혈육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요셉’에 대해서 이와 같은 독재자 특유의 시기심이나, 경계심을 보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요셉’과 함께 기뻐하고 있으며, ‘요셉’의 소원을 자신의 소원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데려오고 싶은 ‘요셉’의 마음이 곧 자기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대신해서 그들을 데려다 그 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한 지역에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가족이 이주하여 살게 될 ‘고센’ 지역은 ‘나일’ 강 하류에 위치한 곳으로서, 우리가 알다시피 토지가 비옥하고 풍요로운 곳입니다. 이제 7년의 대 기근이 끝나고 나면 아마 ‘이집트’에서 지상 낙원으로 변하게 될 땅이 바로 ‘고센’인 것입니다. 이 땅을 ‘요셉’의 가족을 위해 내놓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에 대한 보장. 왕의 약속은 결코 빈 말이 아닙니다. 미래의 약속에 걸 맞는 가시적인 보장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페르샤’의 ‘아하수에르’ 왕이 ‘모르드개’에게 해 준 것처럼, ‘바로’는 이들 가족에게 약속과 함께 하사품(下賜品)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옷이며, 수레며, 말이며, 양식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오라... (중략) 또 그들에게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중략)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19-23절).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수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보잘 것 없는 소달구지가 아닙니다. 왕의 부와 권력에 대한 최고의 상징입니다. 오늘로 치자면 최고급 자동차나 점보 비행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무도 왕 외에는 그와 같은 수레를 소유한 자가 없었습니다. 중동의 최고 권력자가 시골 ‘가나안’에 살고 있는 한 촌부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서 자신의 수레를 보내고 있다! 청와대에 계신 대통령이 남산면 시골에 살고 있는 나를 초청하기 위해서 대통령 전용기를 대구 비행장에 착륙시키는 행위에 맞먹는다 하겠습니다.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사실 이들은 그냥 걸어와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그렇게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것이지요.
왕이 왜 이처럼 쓸 데 없는 짓을 한 것일까? 왜 이와 같은 과소비를 한 것일까? 왜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짓을 한 것입니까? 아들과도 같은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요셉’을 사랑하였고, 그를 존귀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아까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왕의 동기는 그야말로 ‘헤세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행여나 ‘야곱’이 의심하여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들이 살아있으며,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있다는 자식들의 보고를 어찌 순순히 믿을 수 있을까요?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보듯이, 아닌 게 아니라 ‘야곱’은 자식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왕의 염려는 단순한 기우(杞憂)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전용기 ‘점보’ 비행기에 가득 선물을 실어 함께 보낸 것도 행여나 ‘야곱’이 의심하여 오기를 거부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왕은 정말 ‘요셉’을 사랑하였고,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던 가 봅니다.
간절한 부탁. 그래도 여전히 왕은 불안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왕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재차 다짐을 받고 싶습니다: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라”(20절). 무슨 말입니까? ‘가나안’과 그곳에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아무 미련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무거운 가방이나 짐들을 고생스럽게 들고 다니지 말고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지니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흥미롭게도 <신약>에 이에 대응되는 유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솔직히 여행에서 지나치게 무거운 가방은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하는 경우라면 무거운 가방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짐”은 사전적 의미 외에도, “부담” 또는 “장애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그분의 제자들이 ‘가나안’의 그 모든 불필요한 짐들을 다 벗어던져버리라고 애절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중략)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주님의 말씀인 즉은 여행에 필요한 가방까지 다 던져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에 왜 가방이 필요 없겠습니까? 가방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가방이 나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내가 가방의 주인인 것이지 가방이 내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집이나 재산이 왜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것들이 나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나를 소유한다는 말은 내가 그것들에 집착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공의 조건들로 “인맥”(person)이나 “지위”(position), 그리고 “재물”(possession)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만, 이들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나를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소유하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면, 항상 만족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 내 속에 없으면, 그냥 좋거나 아주 좋은 것들로는 만족할 수가 없도록 우리는 설계되어 있습니다. 최고급 세단에 디젤유를 넣게 되면 차는 덜커덩거리다가 얼마 못가 망가지게 되지요. 내 인생이 늘 힘겹고, 불만족스러운 것은 그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신호를 신체 감응 장치가 보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넘치는 잔. ‘바로’ 왕은 ‘야곱’이 그동안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소유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을 가지고 그의 가족을 왕궁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냥 말로만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온갖 진기한 선물로 가득 찬 그의 전용기를 보냅니다: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21-23절).
온갖 진기한 선물은 ‘야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품 옷과 맛있는 음식에다 그야말로 그들의 잔이 넘칠 정도입니다.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무려 다섯 배나 더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형제들이 이를 두고 이전에 ‘요셉’에게 보였던 시기심이 다시 발동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잔이 넘치는 판에 다른 사람의 잔이 좀 더 넘치는 일 따위는 이제 크게 개의할 일도 못됩니다. 동생과 화해도 했겠다, 자신들의 이전 죄도 용서받았겠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오늘 내 잔(盞)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로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들이 부럽고, 탐이 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혹시 갖지 못한 것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내 잔이 흘러넘치고 있음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왜 사랑하나. ‘바울’ 사도의 말인 즉은, ‘야곱’과 그 자식들이 왕으로부터 무슨 선물을 얼마나 받았건, 우리가 만왕의 왕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이 그토록 큰 호의를 ‘야곱’에게 베푼 것은 순전히 ‘요셉’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호의와 특혜를 주신 것도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바로’ 왕은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18절). 하지만 예수님은 이보다 다한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우리는 그 땅에서 하나님의 산해진미를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두 왕이 제시하는 엄청난 약속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만이 아닙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은 지금 ‘가나안’에 살고 있는 동안 벌써 온갖 진기한 선물들을 이미 받았다고 서술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요 10:10하).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 덕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미래에 우리가 누릴 천국에 대한 보장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중략)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중략)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중략)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5, 7-8, 13-14)
‘바로’는 또한 ‘야곱’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고 속히 ‘이집트’로 내려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20절).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바로’는 ‘야곱’에게 여행에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수레와, 당나귀와, 의복과, 양식 등등. 우리 역시 그러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인즉 이를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마 6:11). 그분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나의 신분이 이와 같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9. 복음의 不可思議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까 염려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즉 다음날 일어나지 못할까 염려되어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밤에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은 다음 날 아무 일 없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 즉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술을 앞두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수술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 여부에 상관없이 불안하고 긴장이 됩니다. 이는 의사를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수술 중에 마취가 깰까 봐 걱정이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불안한 것입니다. 이러한 불안과 염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의사나 현대 의술에 대한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수술을 앞둔 내 기분과 감정이 나의 믿음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감성, 신앙과 불신.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부활을 지지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을 의심하는 나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감정들이 수시로 나의 믿음에 반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술의 경우를 다시 예로 들자면, 수술을 앞두고 내 속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날 것이라는 나의 “이성(異性)과 믿음”이 한 편을 이루고 있다면, “감정(感情)과 기분”이 반대편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성이 믿음을 지지해주고 있다면, 감성이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동안 우리가 공유해 왔던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믿음과 이성이 서로 대척점에 서있다고 인식해 왔습니다.
교부 ‘터툴리안’도 이점을 분명하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철학과 종교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신학과 신앙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루이스’(C. 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정반대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즉 이성과 믿음은 오히려 한 편에 서있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한 편에 서서, 감정이나 느낌(즉 기분)에 대항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옳은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인정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기분이나 느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기분이고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훈련이 필요할 것인데, ‘루이스’는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공동체 생활이 그 답이라고 말합니다. 감정이나 느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믿음은 인위적이며 의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도 믿음과 느낌은 상충되는 영역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진리나 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우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지만 그나마도 마음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합니다. 내 감정을 속이는 일만큼 더 쉬운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吉兆가 아닌 凶兆를. 이처럼 믿음은 이성의 영역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그 때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좌지우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늘 우울하고 슬픈 사람은 좋은 소식을 믿기보다는 나쁜 소식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긍정의 힘을 믿기 보다는 절망하고 좌절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런 모습은 굳이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하드라도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일종의 질병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 있어 ‘야곱’은 우리의 대변자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누굽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씨름을 통해서 하나님마저 손들게 했던 투사요 전사(戰士)입니다. 영적(靈的)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라면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믿음에 따라 일관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요요’(yoyo)처럼 감정과 기분이 요동쳤고, 그 때마다 믿음 또한 오르락내리락 파도타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절망의 계곡에서 신세를 한탄하며 자기 연민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그의 자식들이 첫 번째 ‘이집트’ 여행에서 ‘시므온’을 인질로 남겨두고 돌아와서 ‘베냐민’을 데려가야 되겠다고 했을 때 그가 무어라고 했습니까?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야곱’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길조(吉兆) 즉 좋은 소식보다는 흉조(凶兆) 즉 나쁜 소식을 더 쉽게 믿으려한다는 것입니다. 예는 또 있습니다. 자식들이 ‘요셉’이 입던 옷에 염소 피를 발라 들고 왔을 때, 그는 대뜸 이렇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이 찢겼도다”(37:33). 아니, 어떻게 제대로 확인 한 번 해보지도 않고서 이처럼 확신에 가득 찰 수 있을까! 자식이 정말 짐승에 물려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있는지 사람들을 시켜 조사 한 번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처럼 쉽게 단정해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포기했고, 나쁜 소식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즉 더 쉬운 쪽을 선택했습니다. 포기하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대개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다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을, 즐거운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을 더 쉽게 믿게 되지요. 어차피 인생이라는 것이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중에 실망을 덜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일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체념하거나 우울한 소식을 믿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일 것입니다. ‘야곱’도 험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체질적으로 이렇게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물론 그의 인생이 꼬이게 된 데에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일 때부터 그의 인생은 역경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도망자로 삼촌 ‘라반’의 집에 노예로 살면서도 그는 속고, 속이는 일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초래한 일로 생명의 위기를 넘겨야 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삼촌의 추격을 받을 때에도 그랬고, 형 ‘에서’를 만나러 갈 때에도 그랬습니다. 삼촌을 피해 도망가는 중에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형의 보복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얍복’ 강가에서 밤새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의 형은 그를 너그럽게 맞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분에 넘치는 제안, 즉 함께 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남을 쉽게 믿지 못하는 그는 형을 떠나 ‘세겜’으로 떠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행한 결과입니다. 이곳에서 노후를 좀 편안하게 보내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딸 ‘디나’의 문제로 ‘세겜’ 족들의 원한과 보복이 두려워 다시 한 번 방랑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번 꼬인 ‘야곱’의 인생은 계속 꼬이기만 했습니다만, 그가 겪은 고통은 아들 ‘요셉’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다른 사람들 때문에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무슨 일을 만나든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고 순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관된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신앙이 무엇인지 배워도 한 참을 배워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일관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일관된 신앙이 아니라 기분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훗날 ‘이집트’ 왕을 만난 자리에서 나이를 묻는 왕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나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불과 백삼십 년 밖에 살지 않았는데도 온갖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기 연민이나 신세 한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지금 무슨 격식이나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는 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게 지엄(至嚴)한 왕 앞에서 보일 태도입니까? 아니 누가 그렇게 살라고 억지로 시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자기는 그냥 선하게 살려고 했는데,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괴롭혔다는 말입니까? 그의 믿음은 정말 별 볼일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복음을 의심함. 이런 그에게 자식들이 들려주는 길조 즉 복음의 소식은 이것입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26절). 이 무슨 충격적인 복음입니까! 그의 믿음과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분고분 복음을 받아들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26절하). 아니나 다를까! 길조보다는 늘 흉조를 믿고 살아왔던 그가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는 속으로 이렇게 되 뇌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가 없어! 나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가 없어!”
아, 통재라! 불행하게도 ‘야곱’의 이성적 판단 능력은 이미 마비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굴곡 된 삶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처럽 보입니다.
오늘 세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복음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엠마로’로 가던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며칠 전 ‘예루살렘’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직접 체험한 것이라고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이 비극적 종말을 고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유월절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어두운 골방에 모여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마리아’가 그들에게 달려와 복음을 전했을 때, 즉 “주께서 살아나셨다. 그가 여전히 살아계시다”고 외쳤을 때, 한 줄기 섬광이 그들의 어두운 영혼을 갈라놓았습니까? 그들이 이 여인의 말을 믿었습니까?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까? 다시 살아나신 주를 보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까? 아닙니다. 각자 짐을 챙겨 원래의 생업(生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그렇지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들 왜 이럴까? 복음이 그냥 좋은 소식이 아니라, 가장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너무 좋아서 믿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한 번도 경험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수석입학이나 수석졸업의 영예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수석 하는 기분이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다. 마라톤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 기분을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인지 그것을 받아보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동안 복음이라는 선물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롬 1:4)는 가장 좋은 소식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빌 2:9-10) 하셨다는 가장 좋은 소식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인가 이스라엘인가. 나는 어떻습니까? 나 역시 ‘야곱’처럼 “험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입니까? 그래서 체질적으로 기대보다는 체념을, 소망보다는 포기를, 좋은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을, 약속보다는 상황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평생을 ‘야곱’으로만 살아가지는 않은 듯합니다. “아들이 살아 총리가 되어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그를 보리라 하니라”(28절).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러 ‘야곱’의 이름이 다시 언약의 이름 ‘이스라엘’로 바뀌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가 “하나님이 다스림”, 내지는 “하나님이 통치하심”이라면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의 만남 이후 그를 이스라엘로 불러주었습니다만, 그는 여전히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돈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화자가 다시 그를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 마침내 그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어떻게 그가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고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자식들로부터 개인적인 간증이나 고백과 더불어 ‘요셉’이 그들에게 부탁한 그 모든 말을 다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들이 과연 어떤 말들이었는지 그의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들이 살아있다”는 복음의 소식은 단순히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들도 함께 왔습니다. 수레와 그 위에 실은 각종 다양한 선물들이 그 증거입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우울하고 침울하기만 하던 ‘야곱’의 구겨진 얼굴이 마침내 환하게 펴지는 순간입니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야곱’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식과 만족과 감사보다는 불평과 한탄과 자기 연민으로 하루를 맞고 또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마치 사막의 전갈처럼 내 몸속의 독기를 뿜어낼 그 누군가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부활의 간증과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수레”와 각양 선물들, 즉 부활의 증거들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주의 날”보다 더 확실한 증거의 “수레”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날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부활의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약 1:17)을 확인하고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내가 족하도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그를 보리라 하니라.” 오늘 나는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그리스도의 날을 제정하여 기념한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은 무엇입니까? “고독”을 하나님의 은사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나는 그것을 은사로 체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각자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은사를 나누어봅시다.
2. ‘요셉’과 ‘야곱’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인생을 바라보는 자세나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며 흥미롭습니다:
‘요셉’: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야곱’: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 괴로움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까? 그 대책은 무엇입니까?
3.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으며, 지금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제 48과: 이집트 방문(3)
48
이집트 방문(3)
(46:1-47:31)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6:3)
이야기의 구성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셉’ 형제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절정이라고 한다면, 이곳 여덟 번째 에피소드는 오히려 반(反) 절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본문은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야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노예의 땅이자 “출애굽”의 땅이 될 ‘이집트’로 “반 출애굽”을 단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함께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 ‘야곱’의 결정은 올바른 것이었을까? 그의 결정은 실수가 아니었을까? 사백년 후에 빠져 나올 그 땅을 왜 들어가고 있을까?” 화자는 이 문제를 어느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해서 결정적인 답변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즉 화자는 이 여행이 ‘야곱’ 개인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환상(幻想) 즉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이야기 벽두에서부터 밝혀놓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야곱’에게 환상의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요셉 이야기> 전체적으로 처음이자, <창세기>에서는 마지막인 셈입니다. 계시의 형식은 일종의 구원 신탁(神託)으로서,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그에게 확신시켜주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3절).
이와 같은 신탁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연상시켜주는 것으로서, 이제 ‘야곱’을 통해서 성취하실 것입니다: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3-4절). 이 약속의 마지막 부분은 특히 이번 세 번째 여행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이번 여행이 한시적인 것이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의 종착지는 ‘가나안’이지 ‘이집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신탁을 받은 ‘야곱’의 지금 모습은 <구약>의 다른 선지자와 어깨를 겨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절 그의 모습과도 전혀 딴 판입니다. 예컨대, 형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축복을 빼앗아내던 시절이나, ‘얍복’ 강에서 천사와 싸워 그의 인정을 받아내던 당시의 ‘야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식들이 전해주고 있는 복음의 소식, 그리고 그 복음을 확증이라도 해주듯 ‘이집트’ 왕이 보내온 엄청난 선물들을 보고서야 ‘이집트’로 내려가겠다는 결심을 굳힙니다만, 여전히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의 마음과 육체는 심히 떨리고 연약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그 많은 약속들은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진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6, 8).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먼 미래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집트’로 따라 내려간 그의 자손의 수가 칠십 명(이는 완전수이자 거룩한 숫자 아닙니까!)에 이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12:2; 46:3). 이들 칠십 명의 이름들은 훗날 이스라엘을 이루게 될 주요 족장이나 부족들로서, <창세기>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될 첫 번째 세대가 될 자들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이들 이름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다음 이야기로 초점을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 첫 장면이 아들 ‘요셉’과의 감격적인 재회입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아들의 모습에 ‘야곱’은 마치 꿈을 꾸듯, 환상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는 장면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마침내 두 사람은 얼싸안고 하염없이 울고 또 웁니다. 살아있는 아들의 모습, 다시 살아 돌아온 아들의 모습은 ‘야곱’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죽음에 관한 그의 태도마저 바꾸어 놓아버렸습니다. 이전에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 그가 외쳐대던 절규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음부로 내려가게 하는도다”(참고. 37:35; 42:38).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그 죽음마저 이제는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46:30하). ‘요셉’의 부활로 ‘야곱’은 이제 죽음마저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요셉’보다 더 큰 ‘요셉’, 즉 그리스도의 부활로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벧전 1:3; 빌 1:21-26).
‘야곱’에게 있어서야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만, ‘요셉’은 다릅니다. 지금 그는 다른 문제를 걱정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부모를 포함한 대가족을 ‘이집트’로 이주시켜 아무 걱정 없이 살게 해줄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가족이 한꺼번에 외국에서 몰려들 때, 이를 바라보는 ‘이집트’인들의 심사가 결코 편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제들을 불러 왕을 대면하러 갈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은 그저 목축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이집트’에 무슨 직업이나 양식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가축을 먹일 방목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46:31-34).
‘요셉’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형제들의 말에 안심을 했음인지 이들에게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방목지 즉 ‘고센’에 있는 땅에 살도록 허용을 해줍니다(47:1-6). 그 뿐 아니라 형제들 중 일부로 하여금 왕궁 소유의 가축을 관리하도록 임명하기도 합니다. 이 대목에서 화자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고 있지는 않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임에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요셉’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덕분인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39:3, 21, 23).
이어지는 장면은 왕이 ‘야곱’을 접견하는 자리입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실은 ‘야곱’이 왕을 접견하고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는 ‘요셉’의 부축을 받아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축복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47:7). 왕은 정중하게 ‘야곱’의 나이를 물어봅니다. ‘야곱’은 이미 130 살이 되었으며, 아들 ‘요셉’이 그 나라 최고의 지위에 올라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세월동안 아주 험악한 시간”을 보냈다고 대답합니다. 인생을 달관한 철학자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만, 사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법도 합니다. 인생은 무엇이며, 성공은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월 동안 그가 경험한 굵직한 사건들만 해도, 부모와의 생이별, 불행한 결혼 생활, 그리고 최근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의 이별, 등등 결코 순탄하지만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예언자이자 선지자입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바로’ 왕을 축복하고 왕궁을 떠납니다(47:7-10).
왕이 ‘야곱’에게 베풀어준 호의(好意)(47:11-12)는 왕 자신은 물론 그의 백성들에게 그대로 되돌아 올 것인즉, 이에 대해서는 ‘이삭’이 일찍이 예언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펼치고 있는 구호정책이 그것입니다. 물론 현대 독자들의 눈에 비친 그의 구호정책이란 것이 백성을 향한 선정(善政)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착취(搾取)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돈이나 땅과 가축 심지어 자유마저 팔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선한 통치자가 아니라 아주 간교한 악덕 사채업자나 다름없습니다. 백성의 어려움을 최대한 이용하여 왕실의 배를 채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화자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의 관습이나 법에 따르면, 부자가 가난한 자를 그냥 구제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하다면 가난한 자의 친척이 그를 돕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요셉’이 자신의 정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친척의 땅을 사주고 그를 하인이나 종으로 삼음으로써 도와주도록 하고 있습니다(레 25:13-55). <구약>에서 이러한 행위를 자비라 부릅니다. ‘이집트’ 백성이 ‘요셉’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47:25). 따라서 우리가 ‘요셉’의 행위를 평가할 때 이러한 맥락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가 자신의 몸이나 땅을 부유한 친척에게 팔아넘기고 그의 노예가 된 자도 희년이 되면 자유인이 되고 그 땅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바로 이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땅을 자신의 것으로 영구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다릅니다. 그는 ‘이집트’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하였고, ‘바로’의 꿈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충실하게 수행한 것뿐입니다(42:36). 그러니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요셉’은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 것입니다(참고. 28:14; 12:8; 18:18; 22:18; 26:4).
‘야곱’의 여행이 그의 개인적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것이니만치, 화자는 이야기의 말미에 다시 한 번 반복 강조하고 있는 바, 이번 여행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위로 돌리게 될 것이 아니라, 실현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번창하게 될 것이었습니다(17:6; 28:3; 35:11). ‘아브라함’이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 그가 죽기 전에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문제에 집착했던 것처럼(24:1-9), ‘야곱’ 역시 임종 시에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집트’가 아닌 약속의 땅에 묻어주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 즉 “내가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46:4).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그토록 온갖 계책과 술수로 평생을 일관하던 ‘야곱’이 이제 임종을 맞아 궁극적인 소망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46-47장)은 ‘야곱’과 그의 온 가족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집트’ 방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 두 방문이 양식을 구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문이었다면, 이번 방문은 그곳에 오랜 기간 동안 정착하기 위한 방문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방문은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내용 상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입니다. 대신에 ‘요셉’이 ‘야곱’의 유골을 묻기 위하여 훗날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당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집트’ 방문 기록에서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야곱’으로 하여금 ‘이집트’로 가라고 독려하는 환상(46:2-4)
(2) ‘야곱’과 함께 여행에 동참하는 그의 온 가족의 명단(46:8-27)
(3) ‘이집트’를 엄습한 대 기근의 결과(47:13-26)
이들 새로운 내용은 이번 방문이 얼마나 중요한 여행이 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이라 해서 이전의 에피소드들과 유사한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세 번의 방문 모두 ‘야곱’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면(42:1-2; 43:1-14; 46:1), 각 에피소드는 ‘요셉’과 그의 가족이 만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42:6-24; 43:26-45:15; 46:28-47:12), ‘야곱’이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42:38; 45:28; 47:29-31).
본문의 단락 구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와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Wenham의 견해를 따랐습니다(도표 참고). 도표에서 보듯이 본문의 구조 역시 느슨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선 처음과 마지막 단락은 언약과 그 성취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두려워 말라”(46:3; 참고. 15:1; 21:17; 26:24; 35:17)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 참고. 12:2; 17:6, 20; 18:18; 21:13, 18)
(3)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참고. 28:15, 20; 31:3)
(4) “나는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참고. 26:24; 28:13; 32:10)
(5) “내가 다시 너를 불러내리라”(46:4; 참고. 15:14; 12:1, 7; 13:15)
(6)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참고. 35:11; 16:16, 20; 28:3)
(7) “내가 내 열조와 함께 누우리라”(참고. 23:1-20; 25:8-1035:29)
두 번째와 여섯 번째 단락은 모두 길고, 그 내용에 있어서 이야기의 주된 흐름에서 다소 이탈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야곱’의 자손들의 목록이라든지(46:8-25) ‘요셉’의 활동에 관한 서술 (47:13-26) 등이 그러합니다.
이어서 세 번째와 다섯 번째 단락은 ‘야곱’이 ‘요셉’과 ‘바로’ 왕을 만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짝을 이룬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단락은 구조의 중심축으로서, ‘바로’ 왕이 ‘야곱’의 자식들로 하여금 그 땅의 가장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지나간 이야기들에 대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첫 단락은 ‘요셉’이 그의 애비로 하여금 ‘이집트’로 내려오도록 초청했던 사실과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특히 5-7절에서 ‘야곱’의 ‘이집트’ 여행과 관련해서 동원하고 있는 표현이나 묘사는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 그리고 있는 이주(移住) 이야기와 아주 흡사하다 하겠습니다(참고. 12:5; 31:18; 36:6).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12:5); “그 모은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 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31:18);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36:6).
또한 이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야곱’의 자식들이나 아내들의 이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도 <창세기>의 이전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익히 숙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29:31-30:24; 34:1-31; 35:16-21; 41:45, 50-52). 더 나아가 ‘요셉’의 신변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라든지, ‘바로’ 왕과의 관계라든지, 또는 그가 기근에 대처하는 방식(46:29-47:26) 등을 볼 때에도 그가 이전에 왕의 꿈을 해몽해주던 장면이나 왕이 그를 최고 감독자로 임명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41:15-57). 결론적으로 본문은 <요셉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면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전체 이야기의 구성이나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본문은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 진영은 본문 내에 존재하는 자료의 특성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야곱’ 자손의 목록(46:6-27)이나 시간이나 연수에 관한 언급(47:27-28) 등은 전통적인 “사제 자료”에 속한다고 하겠는데, 주지하다시피 “사제자료”의 관심사는 족보나 연대기 등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왕과 대면하는 장면(47:7-11) 역시 “사제 자료”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그 이유는 그 내용이 이미 앞에서 ‘요셉’이 왕에게 소개했던 사제적 내용(47:1-6)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환상(46:1-5)에 관한 내용은 자연스럽게 “엘로힘 자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 즉, 이곳에서 ‘야곱’이나 ‘야훼’ 하나님 대신에 “엘로힘 자료” 특유의 문학적 상수(常數)인 ‘이스라엘’이나 ‘엘로힘’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언급은 “엘로힘 자료”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한 “꿈”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대체적으로 “야훼 자료”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예: 46:28-47:6, 12-26, 29-31). 그리고 본문의 최종 편집도 “야훼 저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요셉 이야기>는 세 번의 “이집트 여행”을 다루고 있으며, 이중 본문은 마지막이자 절정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전체의 여행의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최종 편집자의 입장에서 볼 때, 결론적인 강조를 위해서 일견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 반복적인 내용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현현에 관한 언급이라든지(46:1-5), 열두 지파의 목록(46:6-26)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편집 방식은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 보는 바처럼, “야훼 자료”의 전형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야곱’의 임종에 관한 언급(47:29-31)은 “야훼 자료” 특유의 서술로서, 이어지는 이야기 즉 48-50장에 대한 서곡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도입 부분, 즉 하나님의 현현에 관한 언급(46:1-5)도 <창세기>에서 “야훼 자료”의 전형으로 인정받고 있는 다른 현현에 관한 서술들(12:1-3; 15:13-16; 26:23-25; 31:11-18)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 내에서 자료의 최종 편집은 “야훼 저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는 족보 등과 같은 “사제 자료”들을 함께 포함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현현(46:1-4)
첫 장면은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중에 그가 본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관한 것입니다. 이에 걸맞게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문학적 상수들(용어나 표현 등)도 <구약>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내용들도 추가되고 있습니다(추후 설명 참고).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1-4절)
‘야곱’의 이번 여행은 옛날 ‘아브라함’이 고향 ‘우르’를 떠났던 그 여행이나(12:1-3), 형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떠나던 그 사건(28:1-22), 또는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던 그 사건(31:3-54)만큼이나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 경우마다 하나님의 현현이 그 여행을 가능하게 했고 촉발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번 현현의 장소는 ‘이삭’의 거처 ‘브엘세바’입니다(참고. 26:23-25). 따라서 이번 현현을 대하면서 이전의 그 모든 현현 사건들이 연상된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 역시 ‘야곱’에게 하나님의 현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으며, 특히 그가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인이 없이 그 땅을 떠난다는 것은 곧 불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의 현현은 단순히 ‘야곱’의 인생에 있어 단순히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만이 아닙니다. <족장 이야기> 전체적으로 이번의 현현은 이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다음 번 현현은 ‘모세’ 시대에 이르러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현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절정을 맞고 있으며, 이전의 그 모든 극적인 현현 사건으로부터 일련의 모티브들을 이끌어내고 있음을 봅니다(예, 15:1-21; 17:1-12; 22:1-18).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야곱’으로 하여금 그동안 그가 들었던 그 모든 약속들과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그 모든 약속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과 관련해서 화자는 ‘야곱’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다른 곳에서도 ‘이집트’ 여행과 관련해서 화자가 즐겨 사용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참고. 42:5). 그의 출발지는 그가 살던 ‘헤브론’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37:14), 그가 희생제사를 드렸던 ‘브엘세바’는 ‘헤브론’ 남쪽 40 여 킬로미터 지점으로서, 그 땅의 실질적인 남쪽 경계를 지칭하면서 흔히 사용하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24:2).
이곳에서부터 ‘이집트’에 이르기까지는 초목이 거의 없는 사막이 펼쳐진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도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할 것입니다(참고. 31:54). 이제 사막을 건너야 하는 본격적인 여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필요로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족장들이 제단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12:7, 8; 13:18; 22:9; 26:25; 33:20; 35:1, 3, 7).
제사와 관련해서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일반적인 제사를 총칭하는 단어입니다만, 좁게는 “화목제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레 3장), 이는 대개 서원이나 또는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는 이 두 가지 동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희생제사는 간혹 신탁(神託)이나 예언의 전조(前兆) 내지는 예비적 단계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민 23:1, 14, 29; 시 50:5; 사 6:6).
아닌 게 아니라 그날 밤에 하나님의 현현이 임합니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문학적 상수들은 ‘야곱’을 선지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야곱아”;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이 한 밤중에 환상 가운데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예언적 메시지를 받는 장면이 그것입니다(15, 18장). 또한 ‘야곱’을 두 번씩이나 다급하게 부르는 대목도 <아브라함 이야기>의 절정, 즉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황급하게 두 번씩 부르던 장면과 중첩(重疊)되고 있습니다(22:11). ‘아브라함’ 역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반응했으며, ‘사무엘’도(삼상 3:4-10), ‘모세’도 역시 그러했습니다(출 3:4).
하나님의 현현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엘, la)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엘로힘, !yhiOla)이니.” 이 표현은 <야곱 이야기>에서는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28:13; 31:5, 29, 42, 53; 32:10), 지나간 순간들을 회고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만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출애굽 이야기>를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모세’가 현현을 체험하는 순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구원의 신탁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외에 또 하나의 친숙한 표현은, “두려워 말라”입니다(예. 사 7:4).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나(15:1) <이삭 이야기>에서(26:24) 모두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인데, ‘야곱’은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달리(12:10-13), ‘이집트’로 내려가는 문제를 놓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아들의 초청을 받아 놓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그는 환상을 보기 전에 이미 ‘이집트’를 향하여 출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그가 ‘이집트’로 내려가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던 것은 방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자식을 보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 발생하는 일견 모순되고 상충되어 보이는 현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고민과 혼란스러움을 아시는지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즉 “그 땅”을 떠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고, “큰 민족과 나라”에 대한 언약은 ‘이집트’에서도 계속 이루어질 것임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3절하). 후손에 관한 이 약속은 세 가지 “아브라함 언약” 중의 하나로서 후손에 관한 약속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참고. 12:2; 17:20; 18:18; 21:18). 다만 이전의 약속에 비해 새로운 점이 있다면, 나라와 후손에 관한 약속이 “그 땅”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는 다짐도 족장 언약에서 또 다른 친숙한 주제, 즉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참고. 26:24; 28:15, 20; 31:3, 5, 42; 39:2-3, 21, 23). 이 동일한 약속은 훗날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다시 한 번 들려줄 것입니다(출 3:12; 수 1:5).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다짐, “내가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는 앞선 다짐에 대한 강조 내지는 확약이 담긴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야곱’이 ‘가나안’에 묻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15:13-16에서 보았던 것처럼, “출애굽”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 다짐의 말씀은 다시 한 번 과거의 언약을 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출애굽”을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출 3:8, 17).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독특하게 새롭게 선보이는 하나님의 현현은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절)는 예언입니다. 이 약속은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현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새로운 대목입니다. 이 약속은 ‘야곱’이 ‘요셉’이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서, 늙고 쇠약한 ‘야곱’으로서는 아마 가장 듣고 싶어 했던 약속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이집트 여행(46:5-27)
여행. 두 번째 장면은 상대적으로 깁니다. 이는 ‘이집트’를 향한 ‘야곱’의 여행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장면 대부분은 ‘야곱’의 후손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만, 첫 세절의 설명은 여행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5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5-7절)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부 용어들은 <대홍수 이야기>에서도 사용한 바 있어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1) “들어가다”//“들이다”(a/B, 보)(6-7절; 6:18-20)
(2) “후손들”//“씨”([r'z, 제라)(6-7절; 7:3)
한편 6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즉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여행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표현과 아주 유사합니다(참고. 12:5; 31:18; 36:6). 이와 같은 병행관계 내지는 대응 관계를 통해서 이들 이야기들이 신학적으로 짝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야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은 마치 ‘노아’가 홍수를 피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든지,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라든지, ‘야곱’ 자신이 ‘가나안’으로 이사한 것, 또는 ‘에서’가 ‘에돔’에 거주하며 지냈다든지 하는 등등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야곱’에게 보낸 “수레”(5절)는 앞에서 ‘바로’ 왕이 일찍이 ‘요셉’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한 것으로서, 그는 이것을 ‘야곱’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45:19, 21; 45:27).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두 번씩 언급하고 있는 “자손”(6-7절)은 <족장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칠십 명의 자손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셨으며, 훗날 먼 미래에 이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시킬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3-4절).
여행자들. 두 번째 장면의 나머지 부분은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칠십 명의 자손들의 목록입니다. 이 목록은 <오경>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출 1:5; 신 10:22). <성경>에서 숫자 “칠십”은 때때로 큰 무리나 가족을 나타내기 위한 완전수로 사용하고 있기도 한데(참고. 출 24:1, 9; 삿 8:30; 12:14), <창세기> 10장에서도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이 칠십 개의 나라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족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록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목록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처럼 아주 오래된 것으로서, 따라서 목록에 나타나고 있는 이름들은 이스라엘 부족이나 지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이름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Wenham). 그렇게 보는 데에는 각 이름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의미에 따라 크게 세 무리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아마 자식이 태어날 때 부모가 지어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세 무리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짐승의 이름; (2) 신체의 일부를 나타내는 이름; (3) 하나님이나 그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이름. 그리고 이 목록이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은 이들 이름 속에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 대신에 ‘엘’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사기>와 같은 오래 된 책에서도 나란히 이 목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 이름은 ‘야곱’의 자손 개개인의 이름으로 보이며, 이중 33 명은 ‘레아’로부터, 16 명은 ‘실바’에게서, 열네 명은 ‘라헬’로부터, 그리고 일곱 명은 ‘빌하’에게서 난 자손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최종 편집자는 이들 이름이 정확하게 ‘이집트’로 이주해 온 ‘야곱’의 자손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지했을 것인데, ‘엘’과 ‘오난’(14절) 등은 ‘가나안’에서 이미 죽었으며(38:7, 9), ‘요셉’의 아이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났음을(41:50-52)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후대 독자들을 위함인지 목록 중간 중간에 이에 관한 사실을 주석으로 덧붙여 놓고 있습니다(12, 20, 26-27절). 이렇게 볼 때,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자손은 도합 66 명이었습니다(26절). 그러나 만일 ‘디나’를 그 무리 속에 포함시키고(15절), ‘요셉’의 ‘이집트’ 여행을 ‘야곱’의 여행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면, 전체적으로 70 명이 ‘야곱’과 함께 ‘이집트’를 방문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27절).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목록에 등장하고 있는 각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개괄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목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역시 ‘야곱’의 장자와 그의 아들들입니다.
8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9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8-9절)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며(29:32; 30:14; 35:22-23), 흥미롭게도 ‘야곱’의 장손(長孫)과 ‘아담’의 장손이 동일한 이름 ‘에녹’을 지니고 있습니다. ‘르우벤’의 둘째 아들 ‘발루’(aWLP)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헤스론’은 ‘유다’의 손자의 이름이기도 한데(46:12), 그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갈미’는 ‘아간’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한데, “포도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원래 어떤 장소 또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약어(略語)로 추측하기도 합니다(참고. 사 5:7).
둘째 아들 ‘시므온’의 자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10절)
‘시므온’의 장자 ‘여무엘’(laeWmy)의 의미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날”로 이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야민’(@ymiy)은 “행운” 또는 “오른 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핫’(dh'a)의 의미 역시 분명치 않은데, 그의 이름이 <민수기>(26:12)나 <역대기>(대상 4:24)와 같은 병행 목록에는 빠져있어, 그가 일찍 죽었거나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야긴’(@ykiy)은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참고: ‘여호야긴’(왕하 24:6); ‘야긴’과 ‘보아스’(왕상 7:21).
‘스할’(rj'x)은 색깔과 관련된 단어로서 아마 “흰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울’(lWav)은 이곳 외에도 37-38절에서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또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아들 ‘레위’의 세 아들은 11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11절)
그의 첫 아들 ‘게르손’(@/vr]G)은 “종”(鍾) 또는 “거기 나그네가 됨” 등의 의미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핫’(th;q)은 ‘우가릿’어 ‘아카드’과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만, 역시 그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혹자는 “집회” 또는 “순종”을 의미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므라리’(yrir;m)는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단어가 ‘마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면 “쓴”, “쓰라림” 등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의 다섯 아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12절)
이들 다섯 아들 즉 ‘엘’과 ‘오난’, ‘셀라’, ‘베레스’, 그리고 ‘세라’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참고. 29:35; 38:3-4, 29-30; 46:9). ‘베레스’의 두 번째 아들 ‘하물’(lWmj)은 “남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레아’가 직접 낳은 다섯 번째 아들은 ‘잇사갈’입니다(30:18). 물론 ‘잇사갈’의 출생 이전에 ‘레아’와 ‘라헬’의 두 여종으로부터 다른 자식들이 먼저 태어났습니다만, 화자는 이들보다 ‘레아’의 자식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13절)
‘돌라’([l;/T)는 “벌레” 또는 “진홍색” 등을 의미하는데, 후자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에 유래에 대해서는 이 족속이 후에 염료 사업에 종사하게 된 것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부와’(ha;WP)는 “염료 식물”의 일종으로서, 이 역시 이 족속이 염료 무역에 종사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욥’(b/y)은 ‘야숩’ 즉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다”의 약어로서, “또 다른 자식을 허락하다”는 의미입니다. ‘시므론’(@/rm]v)은 어떤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며, “파수” 또는 “감시”를 뜻하는 ‘사마리아’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은 ‘스불론’(@WlWbz)이며, 그의 세 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14절)
‘세렛’(dr<s)은 “두려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분명치 않으며, ‘엘론’(@/lya)은 “상수리나무”를 의미합니다. ‘얄르엘’(lael]j]y)은 “하나님을 기다림” 또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다음은 ‘레아’가 낳은 여섯 아들과 그 후손 33명에 관한 요약입니다.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15절)
‘레아’의 딸 ‘디나’는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디나’는 이곳 외에도 30:21에서 등장한 바 있는데, 그를 이곳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34장에서 ‘디나’ 이야기를 다룬 바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은 ‘가나안’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목록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유다’의 손자 ‘헤스론’과 ‘하물’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이들 역시 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목록(16-18절)은 ‘레아’의 몸종 ‘실바’에게서 난 자손 열여섯 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자손은 각기 자신들의 몸종 ‘실바’와 ‘빌하’가 낳은 자손들보다 그 수에 있어 두 배에 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레아’의 자손의 수가 33명(15절)인데 그녀의 몸종 ‘실바’의 자손은 16 명(18절)이며, ‘라헬’의 자손이 14명인데 ‘빌하’의 자손은 7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바’의 첫 번째 아들은 ‘갓’으로서(참고 30:11), 그로부터 7 명의 자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16절)
‘갓’의 첫 아들의 이름은 ‘시뵨’(@/yp]x)으로서, “지켜본다”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나 분명치 않습니다. ‘학기’(yGij)는 “(하나님의) 축제”의 준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축제의 절기에 낳은 아들은 특별히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수니’(ynIWv) 역시 “운 좋은 날”, “기분 좋은 날”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분명치 않습니다. ‘에스본’(@/Bx]a)은 ‘아랍’어 ‘아사바’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용맹스럽다”, “노동하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리’(yri[)는 “주의 깊은”, “조심스러운”을 의미합니다. ‘아로디’와 ‘아렐리’는 모두 그 의미가 분명치 않습니다.
‘실바’의 둘째 아들은 ‘아셀’(30:13)로부터도 7명의 자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17절)
‘임나’(hn:m]y)는 “큰 행운” 또는 “하나님의 분깃” 등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스와’(hw:v]y)와 ‘이스위’(ywIv]y)는 서로 번갈아 사용되던 이름 같은데,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닮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브리아’(h[;yrIB)는 “탁월하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세라’(jr'c)는 ‘엘세라’의 준말로서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으며, “번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헤벨’(rb,j)은 “친구” 또는 “동무”를 뜻하며, ‘말기엘’(laeyKil])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의미입니다.
‘실바’의 자손은 이처럼 도합 16 명으로서, ‘레아’의 자손 33 명의 절반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18절)
세 번째 목록(19-22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라헬’의 후손들로서 ‘요셉’과 ‘베냐민’ 및 그들의 자손들입니다.
19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20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21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롯이니, 22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19-22절)
‘라헬’로부터 ‘요셉’과 ‘베냐민’이 탄생한 이야기와 ‘요셉’의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30:24; 35:18; 41:50-52).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면, ‘베냐민’이 ‘이집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매우 어린 나이였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이 때 이미 열 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목록은 원래 다른 목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화자는 이를 이곳에 포함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합니다.
‘벨라’([l'B)는 “어린 낙타”를 의미하고, ‘아스벨’(lBev]a)의 의미는 분명치 않으나, 혹자는 “긴 윗 입술”을 의미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게라’(ar;G)는 “신의 기념품”에 대한 약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아만’(@m;[}n)은 문자적으로는 “즐거움”을 의미하는데, 이 역시 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히’(yjIIa)는 ‘아히’ 또는 ‘아히람’의 약자로서 역시 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스’(var)와 ‘뭅빔’(!yPim)에 대해서는 본문 파괴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훕빔’(!yPij)은 그 의미가 불분명하며, ‘아롯’(D]r]a)은 “곱사”를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역시 분명치 않습니다.
이어서 ‘라헬’의 몸종 ‘빌하’의 후손들로서 도합 일곱 명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23단의 아들 후심이요 24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서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명이라(23-25절)
‘단’과 ‘납달리’는 30 장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참고. 30:6, 8). ‘후심’(!yviWj)의 의미는 명확치 않습니다. ‘야스엘’(laex]j]y)은 “하나님이 그에게 분깃을 허락하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다”는 의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니’(ynIWG)는 “메추라기” 등과 같은 날짐승을 뜻합니다. ‘예셀’(rx,y)은 ‘엣짜렐’의 준말로서 “하나님이 빚어 만드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렘’은 “하나님이 (어미에게 한 아들을) 보답하시다” 또는 “하나님이 (죽은 아이를) 대체시키셨다”는 의미의 단어에 대한 준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록의 마지막은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칠십 명의 자손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의 목록입니다.
26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며느리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이집트에서 요셉에게서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합이 칠십 명이었더라(26-27절)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70” 명은 문자적 숫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완전수로 이해함이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숫자가 의미하는 따라서 ‘야곱’의 모든 식구가 그와 함께 여행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가족이 마침내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냈음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3. 야곱과 요셉(28-34절)
세 번째 단락에서 화자는 첫 번째 단락에서 시작한 ‘야곱’의 여행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야곱’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되고, 그의 평생소원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야곱’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30절). 아들과 아버지의 이와 같은 극적 만남은 전체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데, ‘야곱’의 고백이나 ‘요셉’이 눈물 흘리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정작 이야기는 오히려 절정에서 내려가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내용은 짧고 서술 방식 역시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하기만 합니다. ‘요셉’은 오히려 이제 곧 있을 또 다른 만남, 즉 그의 형제들과 ‘바로’ 왕과의 대면을 더 걱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이제 곧 있을 왕의 접견에 대해서 사전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있는 모습니다.
이 장면에서도 여전히 ‘유다’가 가족의 재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43:3-10; 44:14-34).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28절)
흥미롭게도 이전에 ‘요셉’을 ‘이집트’에 팔자고 제안하여, 부자(父子)간에 생이별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유다’가 이번에 재회를 하는 일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참고. 37:26-27). 아마 ‘유다’의 기별을 들은 ‘요셉’이 ‘고센’으로 아버지를 맞으러 오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29절)
그런데 ‘요셉’이 수레를 갖추어 그 아버지를 맞으러 올라온다는 기사는 쓸데없는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참고. 22:3), 이번 여행이 그만큼 중요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혼자 수레를 끌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왕의 행렬에 버금가는 위엄과 규모를 갖춘 여행이었습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맞이하다”(ar;q, 카라)는 항상 일반 백성을 접견하는 왕의 행차에 대해서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번의 만남은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분명 그러한 측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29절 후반의 문장,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의 주어가 분명치 않습니다. 혹자는 ‘야곱’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요셉’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요셉’이 얼마 전 ‘베냐민’을 안고 울었듯이(45:14), 이제 그 아비를 만나 다시 한 번 동일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목을 안고 울고 있음을 시사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은 얼마동안을 그렇게 붙잡고 울었을까요? ‘야곱’의 입에서 마침내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절)
이전에 우울한 절망적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리라”(37:35; 42:38; 44:39)며 습관처럼 내뱉던 절망의 한숨이 이제 ‘시므온’의 노래(눅 2:29)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여행의 목적은 달성되었고, 이제 평안히 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가족의 안위와 정착입니다. ‘바로’ 왕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도 좋다는 윤허를 내린 바 있으며(45:16-20), 이제 그들이 도착했다는 통보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31절)
가족의 정착을 위해서 ‘요셉’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던 부분은 가족의 생업입니다. 즉 가족 모두 목축업에 종사하는 목동들로서, 이번 여행에 가축들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왕에게 그렇게 말할 것이고, 식구들이 왕을 알현할 때에도 그렇게 말하도록 사전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32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32-34절)
‘요셉’은 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염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왕에게 자신의 진심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즉 가족들을 각종 정부 관리 등으로 특채하는 등의 권력 남용의 비리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의 형들은 어릴 적부터 가축을 치는 유목민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것임을 왕에게 확신시켜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이집트’로 내려올 때 가축들을 끌고 왔다고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아무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왕을 안심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방목을 할 땅 정도라는 점만 설득시키면 될 것입니다.
이정도면 왕은 분명 그들에게 ‘고센’ 땅에 정착하도록 허락을 해 줄 것입니다(34절). 이전에 왕이 이들 가족을 초청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정착해 살라고 지정해 주지는 않았습니다만(45:16-20), ‘고센’에 대한 언급은 ‘요셉’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45:10).
‘고센’을 언급하면서, ‘요셉’은 목축업에 대한 ‘이집트’ 인의 혐오감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는데(34절), 정말 ‘이집트’ 인이 그러하다면, ‘요셉’이 왜 그토록 ‘고센’ 땅을 강조했는지 선뜻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집트’ 문헌에는 목축업에 대한 ‘이집트’ 인의 혐오감에 대해서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특정 직업이 아니라, 정착 민족으로서 유목민족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이런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짚시’ 족들에 대해서는 대개 호감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셉’이 기대했던 바도 바로 이와 같은 유목민족에 대한 혐오감을 역이용하여 왕으로 하여금 ‘고센’과 같은 제국의 변방에 이들 유목족속들이 살도록 허용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적중하게 될 것입니다.
4. 야곱의 자식들과 왕(47:1-6)
왕이 ‘요셉’의 형제들을 알현하고 있는 이 장면은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는 곳으로서, 왕은 이들에게 ‘이집트’에서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줍니다. 왕의 알현답게 ‘요셉’은 먼저 형들의 이름을 왕에게 소개한 다음, 이어서 왕과의 알현이 끝납니다. 왕은 높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새로 이주해 온 이들을 어떻게 대접해 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요셉’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요셉’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46:31-32), 왕에게 형제들의 도착을 알립니다.
1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1-2절)
그의 형제들이 ‘고센’ 땅에 있다는 사실은 그냥 흘러버리듯 지나가는 말로 해버립니다. 의도인 즉은 형제들이 그냥 그곳에서 살도록 윤허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형제들 중 다섯 명만 왕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시켜주는 이유도 그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이 예견한 대로 왕은 그들의 직업에 대해서 물어보며, 형제들은 이미 동생으로부터 받은 지침에 따라 각본에 있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3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4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3-4절)
그리고는 아주 공손하게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가나안’에 닥친 심각한 기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거류하고자 왔다”는 이들의 설명은 아마도 ‘요셉’이 써준 각본에는 없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시에 상당히 함축적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들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15:13),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여행을 긴 억압의 세월로 인식하며 회고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이민자로 살았던 자신들의 경험 때문에, 훗날 그들 가운데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 필요를 마련해주라는 율법의 요구를 받기도 합니다(예. 출 22:21; 23:9; 레 19:34; 신 10:19). 아무튼 이들은 ‘요셉’보다 더 상세하게 그들이 ‘고센’ 땅에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왕에게 간청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적중했고 간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고센’ 땅 중에서 가장 좋은 곳에 정착해 살 수 있도록 윤허를 내리고 있습니다.
5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5-6절)
더 나아가 왕은 이들에게 왕의 가축을 관리하는 일까지 맡깁니다. 이 직업은 ‘이집트’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서, 예컨대 람세스 3세는 삼천 명 이상의 외국인들을 고용하여 그의 가축 떼를 돌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의 가축을 돌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정식으로 이 나라의 정부 관리로 채용되었음을 뜻하며, 동시에 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왕에게 직접 아뢰었으나 왕은 자신의 명령을 ‘요셉’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의례적인 것으로서, 제국의 대왕이 자신의 결정을 칙령을 내리고자 할 때 그의 최고 신하 즉 총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 결정은 형제들이 떠난 후에 이루어진 일일 것이며, 사사로운 명령이 아니라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왕의 명령으로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5. 야곱과 왕(7-10절)
왕은 ‘요셉’ 형제들을 알현한 후에 ‘야곱’을 알현합니다. 형제들과의 만남이 공식적이며, 다소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번 장면은 보다 친밀하고 느긋한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이나 ‘야곱’의 답변 태도 등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7-10절)
‘야곱’은 그의 자식들이 왕에게 자신들을 소개할 때, “주의 종”(3절)이라는 표현 대신 그냥 자연스럽게 “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9절). 또한 ‘야곱’의 자식들이 왕의 호의나 선처를 간청하였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왕이 ‘야곱’의 호의를 입고 있는 형국입니다. ‘야곱’이 그를 축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을 만날 때 한 번, 그리고 왕궁을 나올 때 한 번입니다(7, 10절). 그리고 왕은 그냥 존경의 표시로 ‘야곱’의 나이를 물어보았습니다. 왕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야곱’의 나이가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돌아온 ‘야곱’의 답변은 왕의 공손한 질문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총리를 아들로 둔 아비의 답변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불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내 나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고달픈 세월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험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냉소에 가까운 답변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 늙고 병약하여 남의 부축을 받으며 왕 앞에 와서 서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지금 더 이상 남의 축복을 가로채는 자가 아니라, 축복을 근원이자 복을 빌어주는 자입니다. 단순히 그의 가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바로’ 왕을 포함한 온 땅의 모든 족속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바로’ 왕도 ‘야곱’의 이와 같은 신분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 그와 그의 자식들을 공경과 예우를 다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당연히 그로부터 축복을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28:14).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축복의 성취는 ‘요셉’의 기근정책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47:11-27).
6. 구원자 요셉(11-27절)
여섯 번째 장면은 그 길이에 있어 두 번째 장면(46:5-27)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이야기의 진행과는 무관한 긴 내용의 일탈(逸脫)을 꾀하고 있으며, 이들 내용은 원래 전후 문맥을 이루는 내용과는 상관없는 별도의 전승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들입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 46:8-25의 본문 즉 ‘야곱’의 후손들의 목록과, 이곳 여섯 번째 장면의 13-26절에서 다루고 있는 “구제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본문의 전후에 두 기사(記事)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요셉’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한 일에 관한 것입니다. 즉 앞의 기사(11-12절)를 서론이라 한다면, 뒤의 기사(13-26절)는 요약 내지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혹자는 13-26절의 본문이 원래 별도의 전승에 속한 것으로 후대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언제 본문 속에 삽입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본문을 <야훼 전승>으로 간주하고 있기는 합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기근의 결과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긴 했습니다만(예. 41:56), 이제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기근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펼치는 구제정책은 다름 아닌 “야곱 언약”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4). 따라서 이 단락에서 ‘요셉’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점은 지극히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그에게 와서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라고 감사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요셉’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두 번씩이나 설명하던 모습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렇게 볼 때 13-26절의 본문은 <창세기>의 핵심 단락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 역시 처음부터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11절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11절)
이 구절은 일견 ‘요셉’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바로’ 왕의 명령(47:6)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비록 미미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로’의 칙령에서 다소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사유재산 즉 영구적으로 거주할 곳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이들 형제가 단순히 이민자 이상의 권리를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이들에게 ‘고센’이 아닌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명칭은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라암셋’ 근처의 ‘고센’ 땅에 대한 후대의 이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일종의 유사반복으로서, ‘요셉’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약속한 것들을 이루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12절)
이제 13-26절 사이에서 ‘요셉’의 본격적인 구제 활동을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단락은 그 길이에 있어 여섯 번째 장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의 구제정책을 보여주는 주된 목적은 당시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으며, ‘이집트’가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는 기근의 심각성을 세 단계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이집트’ 백성이 자신들이 가진 돈으로 곡식과 교환함(13-14절)
13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13-14절)
(2) ‘이집트’ 백성이 가축을 담보로 곡식을 구함(15-17절)
15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16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17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15-17절)
(3) ‘이집트’ 백성이 그들이 가진 땅과 자신의 몸을 팔아 곡식을 구함(18-26절)
18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19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20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21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22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23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18-26절)
이리하여 결국에는 제사장들을 제외한 모든 ‘이집트’ 백성들이 왕실의 소작인이 되어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쳐야 했으며(24-25절), 이러한 상황은 화자 당대에까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26절).
바로 이 대목이 성서고고학자들이나 ‘이집트’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곳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이집트’ 역사에서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극심한 기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치세(治世)에 관한 기록이나 연대기도 있을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요셉’의 치세와 관련한 연대기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없다 하더라도,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 역사적 근거를 가진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점과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Wenham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도서 1, 448쪽).
7. 야곱의 임종(28-31절)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장면은 ‘야곱’의 임종에 관한 것입니다. 여섯 번째 장면 마지막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언급함으로써(27절), 언약의 중요한 한 요소가 이미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언약의 나머지 요소, 즉 “그 땅”에 관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이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28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28-31절)
혹자는 이 장면이 다음 에피소드(48-50장)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우선 이 장면과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시간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 후에”(48:1).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창세기>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보아왔듯이, 이 단락의 문학적 기능은 일종의 전이구절입니다. 즉 현재 단락에 대한 요약적 마무리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다음 단락에 대한 예고 내지는 배경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법은 <창세기> 화자에게 친숙한 것으로서,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직전의 이야기는 그 마지막을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예고 내지는 배경이 될 만 한 내용으로 마무리한 바 있습니다(예. 4:25-26; 5장; 6:5-8; 6:9-9:29).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장면은 나머지 장들(48-50장)에 대한 서론 또는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야곱’이 ‘요셉’에게 요구하고 있는 행동, 즉 아들이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넣어 맹세를 시키고 있는 내용은 자신의 유골을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 묻어달라는 요청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임종을 맞아 그의 하인더러 그 손을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넣어 아들 ‘이삭’의 배우자에 관한 맹세를 받아내는 장면이 그것입니다(24:1-9). 두 이야기 모두에서 서원(誓願)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족장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이삭 이야기>(27:1-40)에서는 다소 다릅니다. 즉 ‘이삭’은 마지막 유언을 임종 시가 아닌 죽음을 한동안 앞둔 어느 시점에 ‘에서’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27:41).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세기>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요셉’이 그 형들에게 자신을 ‘가나안’에 묻어줄 것을 맹세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으로 미루어 볼 때, 일곱 번째 장면은 이번 에피소드의 결론으로서 별개의 장면으로 다루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야곱아, 야곱아!
<계시록> 21장은 온갖 상징과 은어들을 다 동원하여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보석의 이름만 해도 우리가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진기한 이름들이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곽(城郭)의 기초를 꾸미고 있는 보석의 종류만 해도 열두 가지나 됩니다: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 그리고 열 두 개의 성문은 모두 진주로 되어 있으며, 성에 이르는 길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 주위로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매 달 열두 가지 열매를 맺으며, 그 나무 잎들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재(藥材)입니다. 더욱 달콤하고 황홀한 소식은 그곳에는 저주가 없고, 눈물이 없으며,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영원히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소식은 나도 그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3하-5)
이것은 단순히 삶에 지친 인생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아닙니다. 실제 존재하는 시공(時空)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만 한 번도 경험 해 본 적이 없는 시공이기에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며,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탓도 있겠지요.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보증수표인 것입니다. 이 보증수표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아보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 ‘이집트’의 ‘바로’ 왕이 보낸 온갖 진기한 선물과 그의 전용 마차와 마부와 말들 역시 왕 자신이 ‘요셉’을 통해서 ‘야곱’과 맺은 약속에 대한 보증수표일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야곱’에게 ‘이집트’가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버금간다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야곱’과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야곱’은 우리가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그 보증수표를 직접 눈으로 목도하고, 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집트’의 영광과 황홀함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에 그러한 호사(豪奢)를 언감생심 단 한 번이라도 누려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요.
사실 ‘야곱’ 당시 ‘이집트’는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의 발상지답게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수학, 천문학, 수리학, 농학, 건축, 의학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학문과 예술의 총본산이자 용광로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들었으며, 도시는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성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으로 오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야곱’에게 ‘이집트’는 약속의 땅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가족이 ‘이집트’에서 더욱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집트’는 이방인의 땅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온갖 종류의 신들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 땅은 그야말로 온갖 신들의 총 집합소로 볼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타락한 종교의 완벽한 예로 꼽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더구나 ‘이집트’는 ‘아브라함’ 이후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사라’가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창 12:10-20). ‘야곱’도 이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훗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장래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나그네가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그의 자손을 괴롭힐 것이라고 예언하신 바도 있습니다(창 15:13).
그래서 ‘야곱’은 지금 두려운 것입니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기는 가야 할 것 같은데 두렵고 떨립니다. 그리고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지난 이백여 년을 지켜온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결정이 아닙니다. ‘야곱’의 당시 나이 이미 130입니다(참고. 47:9). 이 나이에 무슨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으며, 무슨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겠다고 나서겠습니까? 이제 곧 삶을 마감할 나이에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벧엘’에서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이곳이 그분께서 약속하고 지정해 주신 “그 땅”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굳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분의 언약은 이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입니까? 이런 저런 의문과 의심을 품은 채, ‘가나안’의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온 가족을 이끌고 내려오긴 했습니다만, 정말 국경을 넘어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되돌아가야 합니까?
이와 같은 때에. 이와 같은 때에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가장(家長)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목장의 목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곱’은 역전(歷戰)의 용사입니다. 이전에도 이처럼 두려워 떨던 때가 있었습니다. 형을 속인 대가로 그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그랬고, 그로부터 이십 년 후 그 형을 다시 만나야 했을 때 ‘얍복’ 강가에서 역시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번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두 번씩이나 체험한 바 있습니다. ‘브엘세바’ 국경에 서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인생의 위기 때마다 버릇처럼 해오던 그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1절). 기도와 예배입니다! 그는 이제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아가면 그분은 반드시 나타나시고 응답하신 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히브리서>도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야곱’은 바로 이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이전에 ‘벧엘’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 구성원들로 하여금 “집안에 있는 모든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꿔 입도록” 했을 것입니다(참고. 35:1-7). 둘째, 감사입니다. 무엇보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자기들을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구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간구해야 할 내용인 즉은 이번 이사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분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으며, 그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힘주어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28:12-15). 그러기에 지금 ‘이집트’를 떠남에 있어 하나님의 그 약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재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야곱’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감당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분을 찾는 이에게 상을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셔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이 무슨 빚이라도 졌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분 스스로 먼저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과 언약입니다.
나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먼저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기도의 용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올 때 모두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기에 그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을 압박하고 밀어붙였습니다. ‘느헤미야’를 그 대표적인 인물로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느 1). 그는 하나님에게 마치 그분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잊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 1:9하).
얼마나 효과적인 기도입니까!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분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약속하신 그 무엇이 있습니까? 그분의 기억을 환기시켜드립시다. 그리고 그분을 밀어붙입시다. ‘아멘’입니까?
두려워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처럼 용감무쌍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얍복’ 강에서 ‘야곱’이 했던 것처럼 그분을 심하게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행여나 기도하다 ‘야곱’처럼 환도 뼈라도 부러질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분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나 할까 반신반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입니다.
‘야곱’ 역시 이전에 한 번 하나님을 이겨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경험을 믿고 한 번 밀어붙여보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번에도 황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나아오십니다. “야곱아, 야곱아” 하시면서 말입니다(2절). 마치 잠결에 ‘야곱’의 고함소리를 듣고 놀라 벌떡 일어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니면 이제야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깜짝 놀라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놀라시던 그 모습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사울’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항상 우리를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참된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요 10:3),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4). 그분은 언제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주신 적이 있으며, 나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야곱’은 즉각적으로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부르시는 분이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니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3절). 하나님이 나의 할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라면, 마땅히 나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나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존재임을 믿습니까?
‘야곱’의 하나님은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내용인 즉은 ‘야곱’이 어디로 가든 하나님께서도 그와 함께 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 동일한 약속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계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3-4절상).
‘이집트’가 두렵고 위험한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야곱’과 그의 후손은 앞으로 힘든 시기를 거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겠고, 육체적으로 노예가 되어 고달픈 세월을 보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재확인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때로는 가깝고 쉬운 길을 두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을 택하시기도 합니다.
‘야곱’이 그 모든 여정을 다 마치고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까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이후 무려 사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이스라엘을 잊지 않고 지금의 출발지에 다시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4절하).
끝까지 충성하라. 이제 우리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브엘세바’의 예배가 어떻게 끝났는지 물어볼 차례입니다. ‘야곱’ 공동체가 교회에 모여 회개했고, 자신을 청결하게 드렸으며,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기도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셨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이집트’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배가 어떻게 끝이 났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셨다면,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순종하여 내려갔습니다: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 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곧 그의 모든 자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6-7절).
우리가 무슨 동기로, 무슨 목적을 가지고, 무슨 기도와 간구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러 나아오든, 주님의 약속과 응답은 한 결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 하리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 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 39).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을 살도록 하시며, 죽음의 통로를 반드시 통과하도록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그리고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14:1-2)
2. 칠십 명
이름들. 잘 알지도 못하는 집안의 족보를 읽는 일은 여간한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족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이 족보임에 틀림없습니다.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기까지 나열되어 있는 그 이름들을 일일이 읽어 내려가는 일은 고역임에 분명합니다. 이들 이름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흥미는 고사하고 무슨 의미조차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족보(族譜)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말은 “족보에도 신학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간 그의 후손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두 칠십 명입니다. 이들 이름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족보가 처음 등장하고 있는 곳은 <창세기> 제 4장으로서, 우리는 이곳에서 ‘가인’의 후손 여덟 명에 대한 목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 5장에서는 ‘아담’의 계보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가인’의 계열이 아닌 ‘셋’의 계열로서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도합 십대에 이르는 후손들의 이름을 읽게 됩니다. 더 나아가 제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햄’과 ‘야벳’의 후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 홍수 이후 전 지구상에 흩어진 인류의 조상들입니다. 이어서 제 11장에서는 ‘셈’의 아들 ‘아르박삿’을 통해서 태어난 후손들로서 ‘아브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나중에 <창세기>의 중간쯤에서 ‘이삭’의 아들 ‘에서’로부터 태어난 자손들과 왕들과 족장들의 목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36장).
지금까지 언급한 다섯 장을 통해서 통틀어 약 이백 명의 이름들이 등장한 바 있으며, 이제 이곳 46장에서 다시 칠십 명의 이름을 더 만나게 됩니다. 과연 이들 옛 이름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하필 칠십 명입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듯이 이름을 잘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서 타인과 만나고, 교제하며, 또 인격적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또한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에게 나아갑니다. 이점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을 하나님 자신이 직접 붙여주었던, 또는 부모가 지어주었든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 이름을 통해서 기억하고 또 부르신다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그리고 ‘고레스’ 왕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3).
이렇게 볼 때, ‘야곱’의 후손으로 등장하고 있는 칠십 명의 이름들도 오늘 우리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에게는 중요하고 의미 깊다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에게 있어 이들은 단순히 물건이나, 추상적인 개념이나, 집단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닮은 인격적 존재로서, 그분과 대화하고 꿈과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천천히 확실하게. 그렇다면 화자가 70 명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들 이름이 증거하려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토끼와 거북 이야기>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날 여러 형태로 패러디가 되어 원래의 교훈과는 영 다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만, 본래의 교훈은 단 한 가지, 즉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가 승리한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교훈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영어 금언이 하나 있습니다: “Slow and steay wins the race.” 이 잠언이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칠십 명의 이름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후손들의 숫자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책에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점과 관련해서 이미 앞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참고. <신학과 신앙>.
우선 칠십이라는 숫자에 주목해 봅시다. 이들 칠십 명의 이름들은 오늘 우리가 단숨에 읽기에는 그 숫자가 많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야곱’의 후손치고는 아주 미미하고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불러내실 때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 12:2). 그리고 얼마 후에 그를 장막 밖으로 불러내어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다시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창 17:4). 그리고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확장되고 확대되고 있습니다: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7-18)
하나님의 이 약속이 그로부터 기백 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요? ‘아브라함’이 첫 아들 ‘이스마엘’을 낳을 때 그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아들 ‘이삭’은 그보다 더 나이든 백 살 때였습니다. ‘이삭’은 그의 나이 60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수백 년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전부입니다. 물론 ‘야곱’의 대에 이르러 12명의 아들이 태어나고, 그들로부터 손자들이 태어나서, 가족을 “두 떼”(32:10)로 나눌 정도로 후손의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 사실입니다. 칠십 명까지 늘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 있은 이후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215년이나 걸렸습니다. 한 나라는커녕 한 고을도 이루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큰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로부터 430년이 흐른 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어른만 60만을 이룰 정도로 이미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자녀들 숫자까지 합친다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수백만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 토끼의 뜀박질이 아니라 거북이의 걸음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느리지만 쉼 없고 확실한 걸음 말입니다. 그분은 기초를 다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사람에서 칠십 명이 되는데 걸린 시간이 215년이었는데, 그 후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에 칠십 명이 수백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방식은 적어도 영적 영역에 있어서는 표준 모델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조급하고, 인내하지 못하며, 쉽게 잘 포기해버리는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모델은 없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생을 이제 막 출발하려는 젊은이나, 또 늘 시작은 하나 제대로 한 번도 무엇인가 이루어내지 못한 사람 모두 가슴 깊이 새겨두어야 성공 방정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왜 거듭난 자 즉 “위로부터 태어난 자”는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 합니까? 갓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 품속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영적 신생아도 반드시 교회의 품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교회는 어머니 품속과 같다는 것이지요. 어머니는 자식을 낳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하게도 낳은 자식을 장성한 자로 키웁니다.
<성경>의 모든 책들이 한 결 같이 교회를 향해서 말하고 있음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지요. 특히 <신약>의 모든 <서신서>들이 한 결 같이 강조하고 있는 바도 다름 아닌 “성숙과 성장”입니다. 거듭남이나 태어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교회의 성숙보다는 양적 성장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에는 시간과 인내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지속적이고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이집트로. 그리고 또 한 가지,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야곱 교회”처럼 말입니다. 화자는 칠십 명이 모두 하나 같이 ‘야곱’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갔다고 전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46:7, 27). 이들 모두에게 ‘이집트’ 여행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만, 모두가 가장(家長) ‘야곱’의 결정을 따라 함께 행동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지난 이야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말이 한 가족이지 도저히 가족이라 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며 지난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습니다. 분열하고 갈등하며, 그리고 때로는 무관심과 서로에 대한 의심으로 일관하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몰아닥쳤을 때에는 각자는 자기 살 길을 찾느라, 가족의 해체(解體)는 더욱 가속화되고 심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이집트’로 가기로 마음을 모은 것입니다. 이 결정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이백여 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는 사실도 그러하려니와,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떠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더욱 불가능한 선택으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 땅을 떠날 것인가?”
기로의 순간에 ‘야곱’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찾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온 가족을 대동하고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1절). 사실 조금 직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섭리의 손길을 펼치신 바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언약의 증거들을 보내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이집트’의 ‘바로’ 왕이 보낸 왕의 전용기와 각종 진기한 선물을 말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야곱’은 왕의 약속과 그 보증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보증은 더 큰 보증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즉 왕 중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믿음과 신뢰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떠나기로 작정했고, 이곳 ‘브엘세바’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의 최남단 ‘브엘세바’에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이 예배에 한 사람 빠짐없이 참석했을 것이며,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진지하지 않았던 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는 난생 처음으로 하나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절하고 애절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위한 기도이긴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 모두를 위한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하나가 되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했던 그 이상의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무려 400년 이후의 일, 즉 “출애굽” 이야기까지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노인이나 젊은이나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예언자가 되었으며, 장래 일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꿈과 이상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마다 가족마다 다른 꿈과 이상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된 하나님의 꿈과 이상이자, 하나님의 꿈과 이상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래야 할 것입니다. <신약>은 기막힌 은유(隱喩)를 사용하여 교회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기관(organization)이 아니라 유기 생명체(organ)라고 말합니다. 만일 교회가 조직이나 기관이라면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바대로 그 조직에 속할 수도 있고 탈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한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옮겨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한 몸 또는 한 가족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가족은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고, 가족과 함께 살아갑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있어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거나, 형제나, 또는 자매가 됩니다. 부부 간에는 이혼이 있을 수 있으나 혈연관계는 그 어떠한 법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한 몸이라면 신체의 각 부분은 한 몸에 항상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받아 각기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합니다. 모든 지체가 항상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목표를 가지고 한 길을 여행하는 동반자임에 분명합니다. 때로 몸의 일부가 사고로 절단되거나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만, 설령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내 새로운 신체의 한 부분으로 이식되거나 접합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브엘세바’의 예배를 통해서 ‘야곱’ 교회는 이제 하나의 가족으로, 한 몸으로, 새롭게 진용을 갖추어 ‘이집트’라는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제 그들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야곱’ 교회를 개척하시는 목적이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사역을 위하여 그들은 ‘가나안’으로부터 ‘이집트’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개척교회는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먼 훗날 하나님께서 다시 ‘가나안’ 개척교회를 하라고 하실 때, 그만한 역량과 의지를 갖출 수 있을까? 그들이 없는 동안 다시 이방의 땅이 되어버릴 이곳을 빛의 자녀로, 하나님의 군대로, 그리고 심판자로 침노해 들어올 수 있을까?
가나안의 평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동안 ‘야곱’ 교회가 ‘가나안’에서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 상상해 보면 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이제 ‘헤브론’을 떠나 ‘이집트’로 옮긴다고 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교회로 달려와 담임 목사 ‘야곱’의 옷소매를 붙잡고 울며 하소연했을까요?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떠나야 된다고 했을 때, 멀리 ‘브엘세바’에 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을까요? 아니면 교회가 사라졌으니 ‘헤브론’ 지역 땅 값 올라가게 되었다고 더 좋아들 했을까요? 자기들만 알고, 자기네들끼리만 뭉쳐 살던 얌체 족속들이 사라져 속이 후련하다고 했을까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근처에 교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이사를 가는지 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살고 있었을까요?
내 미래는 내 과거의 행적을 통해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게 감사할 제목이 없다면, 내일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내 소명과 직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내일도 그것을 찾아 구하러 다닐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없다면, 내일도 그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죽기 살기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내일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나의 주님과 대화를 놓쳤다면, 내일도 그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좋은 소식을 누군가와 나누지 않는다면, 내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꿈이 없다면, 내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무슨 목표를 가지고,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제대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꿈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그 꿈을 과연 이룰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면 그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사역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정적이라면, 지금 당장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리고 지금 당장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그냥 살아갈까요? 아니면 함께 기도하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우리의 ‘이집트’ 사역을 설계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할까요? 목표는 원대하되 행동은 구체적이고 세부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단순히 설교의 마무리를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결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이집트’로 내려가야 합니다! 채비를 합시다!
3. 再會: 야곱과 요셉
부모님의 교육열로 인해서 내 형제들은 일찍부터 시골의 부모님 곁을 떠나 도시에 살고 있는 친척 집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시골에서 마산, 부산, 그리고 서울로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 년에 두 번씩 방학이 되면 모두 시골집으로 돌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나도 역시 당시 칠원 초등학교에서 3 학년까지만 다니다가 마산에 학교로 전학을 해서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큰 어머니 집에서 지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살았으니 얼마나 어머니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하루는 하도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학교도 빼먹은 채 몰래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고향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집 근처에서 내려 집이 있는 골목 어귀로 들어서며 골목 안자락 끝에 있는 집 대문을 향해서 걸어가며 나는 흥분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곧 어머니를 볼 수 있다는 기대였겠지요. 집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며, “엄마”하고 부르며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도 당연히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겠거니 하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속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반가움보다는 놀라는 표정이 더 역력했습니다. 특히 그 때 안방에 누워계시던 아버님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시고, 학교는 어떡하고 지금 이 시간에 집에 왔느냐며 호통을 치시면서 나를 당장 되돌려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계시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와 보시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트럭에 실려 다시 마산으로 혼자 돌아와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얼마나 서러워 울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내 어머니도 속으로 많이 우셨겠지요. 아마도 그 때 그 경험 이후로 나는 세세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자제하고 억제하는데 익숙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움. 그리움은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부모님과 친구들을 떠나 객지에서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나,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그리움과 고독의 맛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데에 이력이 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밴쿠버’에 유학을 가서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는 둘째 아들 녀석도 요즈음도 가끔 우리더러 그곳에 이민 와서 같이 살자고 합니다. 가족이 그리운 것이지요. 온 가족이 함께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답니다. 이처럼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인 듯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수시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본 적 있습니까?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된 적은 없었습니까?
‘요셉’은 어땠을까요? 모르긴 해도 <시편>의 고백대로, 매일 밤 그리움의 눈물로 침상을 띄었을 것입니다. 나이 열일곱에 노예로 팔려와 이름도 없는 노예로 겪었을 온갖 인생 역경도 역경이지만,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역경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을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고향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살던 그 좋았던 시절,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호의호식하던 그 시절, 눈에 아른 거리는 동생 ‘베냐민’의 모습 등이 떠올라 어려움은 그 무게를 더했으리라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총리가 되었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왕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까지 두어 행복한 가정까지 두었음에도 그리움은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그리움을 훔쳐볼 수 있습니다. 첫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 풀이하자면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입니다. 그의 말대로 지난 과거의 모든 좋았던 그 시절과 고난을 다 잊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즉 첫 아들을 보니 지난 그 모든 과거가 새록새록 그리움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역설 아닌 역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 풀이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입니다. 그가 비록 ‘이집트’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등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잃어버린 좋았던 그 시절을 잊을 수는 없다는 또 다른 역설일 것입니다.
그는 지난 20 년을 정말 외롭게 살았으며, 지금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노예를 어느 누가 다정하게 내 가족처럼 감싸주었겠으며, 한 나라의 총리를 어느 누가 쉽게 다가가 친구처럼 신변 잡담을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에게는 동창도, 고향 친구도, 부모 형제도 없습니다. 그는 정말 가족이 그리웠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자기를 그토록 사랑해주던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이 더욱 그립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두 번째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그들에게 물어보았던 것도 아버지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43:27). 나중에 마침내 형제들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 밝히는 자리에서도 가장 먼저 아버지의 소식을 물어봅니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이까”(45:3).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형제들을 재촉합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 올라가서 아뢰기를...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 오사...나와 가깝게 하소서...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45:9-11). 우리는 그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 년만의 해우가 아닙니까!
재회. 이처럼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던 그가 형제들이 기근 때문에 양식을 구하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감옥에 가두어야 했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에게 복수를 하려 함이 아니라, 형들 역시 차가운 감옥에서 자기가 겪었던 고독과 외로움의 세월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심장이 녹고 양심이 되살아서 그들의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고백하게 하려함이었습니다. 과연 ‘요셉’의 의도는 적중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42:21).
나중에 동생 ‘베냐민’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거나 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43:30). 이처럼 그는 다정다감하고 심장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여왔던 그리움은 그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던 불쏘시개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형들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갑고 무뚝뚝하게 복수의 일념에 불타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45:14-15). 이러한 그가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의 목을 얼싸안고 한 참 동안 울었다”(46:29)는 사실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눈물을 훔치려 하지 쏟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특히 남자라면 더욱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교육까지 받아가며 자라왔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 서툰 장애자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쳐다보며 환희의 찬송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대개 하늘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거나, 아니면 가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왜입니까? 감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가요?
그러나 <성경> 속의 인물들은 같은 동양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인데도 우리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이며 솔직합니다. 그들은 슬픈 일이 있으면 크게 울었고, 기쁜 일이 있으면 반대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다윗’만 하더라도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었을 때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감정에 보다 솔직하고 충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베토벤 작곡의 “song of joy”를 서로 마주보며 한 번 불러보는 것이 어떨까요?
환희. 이날의 재회에 기뻐 눈물 흘렸던 자는 ‘요셉’ 만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도 있습니다. 이십 년 만에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애타게 아들을 그리워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절).
그는 지금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한(恨) 맺힌 인생을 살아왔는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 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불행을 항상 남의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했으며,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개 한이 많은 사람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예컨대, 잠시 후 ‘바로’ 왕을 만나게 될 텐데 그의 나이를 묻는 왕에게 불손하게도, “나이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한을 여지없이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사라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회의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이 없다”는 말은 오랜 세월 가슴에 품어왔던 쓰라린 맹독(猛毒) 같은 한을 다 날려 보냈다는 말입니다. 비록 과장이긴 하겠지만, 얼마나 기뻤으면 “지금 죽어도 좋다”고 까지 환호하겠습니까!
부모인 내가 ‘야곱’처럼 환호할 수 있다면 어떤 경우일까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소리 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간절히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의 성공 아니겠습니까! 세상적인 성공은 말 할 것도 없고, 신앙적이고 영적인 성공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부모의 염원을 잘 모릅니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환호하게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를 가슴 아프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욕되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부모를 인생의 실패자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습니까? 자식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면, 나 역시 ‘야곱’의 환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야곱’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야곱’처럼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부모에게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야곱’은 이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편애와 무관심으로 자녀들을 화나게 했고, 무관심으로 자녀 교육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그와 같을 수 없습니다. 자식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면, 내가 성공한 부모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성공한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에게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에베소서>의 권면을 깊이 묵상하며 실천해 가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자식과 함께 얼싸안고 기쁨의 열매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야곱과 왕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도 있다고 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정치인이 되는 일이 그렇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정치에 대한 냉소에서 나온 말이긴 하겠습니다만, 일단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략(謀略)과 술수(術數)가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정직과 신뢰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기독교 인 정치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들 합니다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또 하나 정치판에서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제 2인자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흔히들 제 2인자가 되는 일은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2인자는 공식적으로는 차세대 지도자가 될 사람이지만, 자칫 제 일인자의 눈에 벗어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입니다. 이는 부모 자식 간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선의 역사에도 이와 같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정치가. 그러나 ‘요셉’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동시에 현명하고, 지혜롭고, 신중하고, 거룩한 정치가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돋보이고 있는 곳이 바로 본문 이야기입니다(46:28-47:12). 그가 가족들을 ‘이집트’로 초청하여 정착해 살 수 있도록 하기 까지 기울이고 있는 노력이나 사전 준비 작업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신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가족들을 만나 앞으로 그가 할 일에 대해서 미리 알려줍니다. 앞으로 왕을 만나게 될 것이며, 왕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사전 교육을 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신 먼저 왕에게 가서 가족들이 왔으며, 현재 ‘고센’에 임시 머물고 있다고 아룁니다. 다음으로, 그의 형제들 중 다섯 명만 골라 왕을 알현(謁見)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왕에게 ‘이집트’에 정착을 윤허해 줄 것을 간청하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를 왕에게 알현시킵니다. 마침내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 ‘라암셋’에서 살아도 좋다는 왕의 윤허를 받아냅니다(47:11).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킴에 있어 ‘요셉’은 어느 누구 한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의 가족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 같지 않고, ‘이집트’ 사람들의 원성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왕의 신하들에게 불안이나 염려를 심어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는 실로 영적 분별력과 정치적 지혜를 골고루 갖춘 자의 하는 일이 이와 같은 것이라는 역할 모델을 잘 수행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야곱의 축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러 번의 만남을 볼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절정은 역시 왕과 ‘야곱’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늙고 남루한 한 ‘히브리’ 촌로(村老)와 사치와 화려와 절대 권력의 상징 ‘바로’의 만남은 그 자체로서 극적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둘이 만나는 장면을 화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47:7-10)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야곱’이 왕을 축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왕을 알현할 때 한 번, 그리고 왕을 만나고 나오면서 또 한 번입니다. 이 축도(祝禱)는 단순히 의례적인 인사가 아닙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내려주는 축복입니다.
이 장면이 주는 대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무엇보다도 축도를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지금 누가 누구를 축복해 주어야 합니까? 불쌍한 나그네, ‘이집트’ 인 모두가 혐오하는 떠돌이 목동이 ‘이집트’ 신의 아들 ‘바로’ 왕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닌가! 오백여 명에 달하는 왕자와 공주, 그리고 이삼백 명에 이르는 왕비를 거느린 절대 강자 ‘바로’가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분명 두 사람의 역할이 전도(顚倒)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히 7:7)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지금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는 그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축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서 복을 주옵소서”(창 14:19).
우리가 이 원리를 ‘야곱’과 ‘바로’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면, ‘야곱’이 왕을 축복해 주고 있는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화자의 의도인 즉은 ‘야곱’이 왕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이 정해놓은 지위나 서열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왕도 이점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가 아무런 거부감이나 저항감 없이 ‘야곱’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야곱’에게 나이를 물어보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47:8). ‘야곱’은 자기 나이 백삼십이라고 답합니다(47:9). 세상에서의 나이를 따져보아도 ‘야곱’이 왕보다는 훨씬 연장자(年長者)로서, 축복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암시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도 ‘야곱’이 가진 그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만나는 사람을 축복하고 축도해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 세상이 우리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한 앉은뱅이가 그들에게 구걸을 하려 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행 3:6). 그렇습니다. 나는 “복음의 보배”,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고후 4:7).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4:6). “생명에 이르는 냄새(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2:16).
야곱의 증거. 내가 이웃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으로 이보다 더 큰 보배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세상과 이웃을 축도하고 축복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나 아닌 어느 누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축도는 예배 마지막에 목사가 하는 것이 원칙 아닌가요? 왜 하나님의 백성은 이상하게도 <성경>을 신뢰하기보다는, 전통이나 관습이나 느낌이나 사회통념이나 전설이나 신화를 더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소위 평신도들의 모임이 늘 축도나 축복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으로 끝나는지 모를 일입니다. 왜 목장 모임의 마지막에 목자는 양들을 위한 축도로 끝내지 않는 것일까? 왜 양들은 목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 그를 위해 축도해 주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무지이고, 완고함입니다. 더 나아가 자의식(自意識)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답변에서 이와 같은 자의식의 결핍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일견 매우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의 겸손함은 ‘이집트’ 왕을 기분 좋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왕께서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말속에 진실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인생을 나그네 길로 비유한 것은 올바른 인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언약이 내 생전에 모두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게 되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참고. 히 11:13-16).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이처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그가 정작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다소 어둡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그의 자의식이 결핍된 것이 아닐까 하는 평가를 내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백삼십이라는 자신의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고 있으며, 그 짧은 세월에 비하면 겪어온 세월이 험악했다고 말함으로써, 일견 자신에 대한 연민(憐憫)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도취(自己陶醉)만큼이나 부정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자기연민이 자신을 파괴하는 질병이라면, 자기도취는 타인을 파괴하는 질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를 해주었을 그가 겨우 이정도 증거밖에는 할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운 대목으로 남습니다.
더 나은 증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야곱’보다 더 나은 증거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감성과 기분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나의 이성과 믿음이 나에게 무엇이라 말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이면 될 것입니다. <성경>이 나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을 축복하고 축도해 줄 책임과 권리를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사도이며,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부족합니다. 이것을 단지 믿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당장에 말입니다.
5. 요셉과 기근
과연 ‘요셉’을 경건한 정치가나 유능한 행정가로 부를 수 있을까요? 그가 유능한 행정가일지는 몰라도 경건한 정치가로 부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야비한 독재자 내지는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안토니오’를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전형적인 악덕 상인의 행태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펼치고 있는 구호정책을 유심히 살펴보면 백성을 향한 선정(善政)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착취(搾取)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땅에 기근(饑饉)이 와서 칠 년이나 계속되자, 가난한 자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돈이나 땅과 가축 심지어 자유마저 팔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선한 통치자가 아니라 아주 간교한 악덕 사채업자나 다름없습니다. 백성의 어려움을 최대한 이용하여 왕실의 배를 채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이 이러한대도 여전히 그를 선한 정치인, 유능한 행정가로 부를 수 있을까요? 그는 오히려 북한의 김정일이나, ‘나치’의 ‘히틀러’, 또는 구(舊) 소련의 ‘스탈린’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통치자 요셉. 아닌 게 아니라, ‘요셉’에 관해서 이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로 가득 찬 책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브린크’(John T. Brink)라 불리는 한 사업가는 그의 책『이집트의 요셉과 그의 국가 경영』에서 ‘요셉’을 아주 혹평하고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그의 평가는 <창세기> 47장의 “요셉과 기근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이야기에서 ‘요셉’은 지나칠 정도로 미화되어 있으며, 그를 <성경>의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포장하기 위한 음모마저 엿보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나 유대교 진영에서 “기근 이야기”는 너무 민감한 내용이라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이를 상세하게 잘 다루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요셉’은 아주 약삭빠르며 권력 지향형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그 꿈을 해석해주고 다가오는 국가적 재난에 대비할 지혜를 갖춘 경영인을 준비하도록 조언해 줄 준비를 미리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수법은 독재자들이 취하는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수순(手順)이라는 것입니다. 즉 첫째, 마치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잘못된 정보를 흘립니다. 다음으로 임박한 국가적 재난을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적절한 인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브린크’의 주장인 즉은, ‘요셉’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국가 경제를 통제하고 이를 통해서 재난을 조장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도 ‘요셉’이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41:44).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요셉’은 모든 정보를 통제했고, 여론을 조작했으며, 당연히 국가 생산성은 떨어지고, 경제는 쇠퇴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린크’가 가장 크게 ‘요셉’을 비난하고 있는 대목은 ‘요셉’의 소위 구제금융 정책에 관해서입니다. 그는 이 정책이 무기력한 백성을 착취하는 아주 사악한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범죄 행위로 규정합니다. 그는 심지어 훗날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가 되게 된 것도 ‘요셉’이 지금 ‘이집트’ 백성을 노예로 전락시킨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브린크’는 ‘요셉’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 그는 정말 <창세기> 47장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요? 예컨대, 그는 ‘요셉’이 강제 인구분산 정책을 폈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다음 구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47:21). 아닌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수도 이전이나, 인구 분산을 통한 도시의 재정비 등과 같은 국가적 사업은 독재자가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고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활용하는 방식이기는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방 토후 세력의 발효를 막고, 전통이나 혈연에 기반을 둔 기성(旣成)세력의 결집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성경> 이해 수준은 실로 한심한 수준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새롭고 정확한 번역은,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노예로 삼았다”(예: RSV; NIV; NEB; Jerusalem Bible)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비인간적 처사이며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요? 이와 같은 인식 역시 <구약>의 관습이나 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즉 ‘요셉’의 구호정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구약>에서 말하는 구제법(救濟法)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에 따르면, 부자가 가난한 자를 구제해 줄 때 아무나 나서서 그냥 도와주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하다면 가난한 자의 친척이 그를 돕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요셉’이 자신의 정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친척의 땅을 사주고 그를 하인이나 종으로 삼음으로써 도와주도록 하고 있습니다(레 25:13-55). <구약>에서 이러한 행위를 자비라 부릅니다. ‘이집트’ 백성이 ‘요셉’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47:25). 즉 이 백성은 ‘요셉’을 향하여 원성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요셉’의 정책을 평가할 때 이러한 맥락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자가 자신의 몸이나 땅을 부유한 친척에게 팔아넘기고 그의 노예가 되었다 하더라도, 희년(禧年) 즉 50년이 되면 자유인이 되고 그 땅도 되돌려 받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바로 이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땅을 자신의 것으로 영구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다릅니다. 자신의 것으로 취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집트’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하였고, ‘바로’의 꿈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충실하게 수행한 것뿐입니다(42:36). 그러니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 즉 “땅 위의 모든 족속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 것입니다(참고. 28:14; 12:8; 18:18; 22:18; 26:4).
청지기 요셉. ‘요셉’은 실로 경건한 정치가였으며, 유능한 경영인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고 그의 사후(死後) 여러 세대에 걸쳐 다른 왕들이 통치할 때에도 나라는 강성했으며, 풍요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이점에서 ‘요셉’은 오늘날의 독자들로부터도 거룩한 청지기로 칭송을 들어 마땅할 것이며, <성경>도 그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셉’의 통치를 통해서 일련의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 권력은 타락하고 독재로 흐르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을 독재자로 규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요셉’이 끝까지 선한 청지기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으며, 그 또한 매사를 하나님께 하듯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만 보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왕들은 독재자나 부패한 왕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정국가(神政國家) 이스라엘이 그 역사상 진정으로 신정국가(神政國家)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민주인민공화국” 북한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민주인민공화국”이 되어 본 적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권력이 부패하고 절대 권력화 하기 쉽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권력이 한 개인이나 조직이나 또는 당(黨)에 편중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요셉’이 통치하던 시대에 백성들이 그 앞에 나아와 감사하며 종이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고 있습니다만(참고. 47:25), 이와 같은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것으로서 오늘 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정치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둘째, ‘요셉’의 통치로부터 얻게 되는 두 번째 경계나 교훈은 “사유재산 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사유재산(私有財産) 제도는 중요한 성경적 원칙이며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큰 축복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십계명”에서도 “이웃의 재산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5).
혹자는 초대교회에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참고. 행 2:44-45)다거나, 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의 소유를 판 돈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을 놓고(참고. 행 5:1-11),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음 구절이 이를 증거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행 4:4). 본문에서 ‘요셉’이 ‘이집트’ 모든 백성들의 재산과 심지어 신체적 권리마저도 국가에 귀속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만, 이 역시 지극히 제한적인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어느 정부나 국가도 <요셉 이야기>를 근거로 개인의 재산이나 신체를 제한하거나 국유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교훈은 정치가 ‘요셉’의 일관성과 관련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통치 내내 흔들리지 않은 자세와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로마서>는 그의 통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6. 이집트와 이스라엘
공정치 못한 하나님. 하나님은 과연 모든 사람에게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집트에 거주하게 된 이스라엘에 관한 언급을 읽을 때는 더욱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27절). 왜 이 구절이 하나님의 공평(公平)하심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기근(饑饉)의 결과를 놓고 볼 때, 두 민족 즉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서로 상반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닥쳤던 7년 동안의 기근으로 ‘이집트’ 모든 백성은 재산과 땅을 잃어버리고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 반면(25절), 굴러들어온 이방인 ‘히브리’ 족속은 그 땅의 주인으로 정착하여,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27절).
엇갈린 운명은 그뿐 만이 아닙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7절). 이 말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거주하는 동안 유례가 없을 정도의 인구 증가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그 땅에 거주하던 430년 동안 칠십 명에서 수백만으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땅의 주인 ‘이집트’ 족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이스라엘의 인구 증가가 ‘이집트’ 인들의 근심거리가 될 정도였으며, 이에 ‘바로’ 왕이 직접 나서 가혹한 인구 감소 정책을 펼쳤으며, 마침내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는 명을 내리기 까지 합니다(출 1). 이스라엘이 이처럼 억압과 차별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게 된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편애(偏愛)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이 공평무사(公平無私) 해야 한다는 일종의 신화(神話)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부모가 자기 자식을 다른 아이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며 공정하지 못한 처사입니까? 부모가 가업이나 유산을 다른 자식이 아닌 친자식에게 물려준다 해서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멀었다고 비난합니까?
사람들은 툭하면 하나님의 선택(選擇)이나 예정(豫定)을 윤리․도덕적인 차원으로 격하(格下)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거듭남” 즉 “새 생명의 탄생”에 관한 것입니다. 윤리나 도덕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남의 자식이 아무리 착하고, 선하며, 거룩하다 할지라도 내 자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아무리 망나니짓을 해도 내 자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제쳐두고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분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능적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보다 더 건장해서도 아니고, 더 거룩하기 때문도 아니며, 힘이 더 세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자식으로 선택해서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육신의 부모 사랑과 차이가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내가 낳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意志)로 이스라엘을 선택했으며, 사랑하겠다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이지적인 선택”이라는 ‘스콧트 펙’(S. Peck) 박사의 말도 이런 점에서 타당하다 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스라엘이 ‘이집트’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를 관통하는 핵심 어구(語句)로서, 책 전체를 통해서 적어도 열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견 명령처럼 들리는 이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의지를 담은 “언약”입니다. 언약이라 함은 “피로 맺은 약정”을 말합니다. 즉 사활(死活)이 걸린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모든 생명을 가진 생명체와 더불어 세우신 언약입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과 땅의 짐승들을 향해서 처음 이 언약을 세우셨으며(1:22), 다음 날 즉 여섯째 날에는 인간과 더불어 같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1:28). 우리는 이 언약을 “창조 언약”으로 칭할 수 있을 것이며, 일명 “창조 명령” 또는 “문화명령”으로도 부른다고 배운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언약”은 대홍수 이후에도 계속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홍수 이후 배에서 나온 모든 생물과 ‘노아’와 그 가족들과 더불어 같은 언약을 세우십니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중에 번성하라 하셨더라”(9:7).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대홍수를 일으켰던 바로 그 문제입니다. 즉 “죄”가 다시 세상에 들어온 것이지요. 정말 신기한 것은 홍수에서 살아남은 단 여덟 명의 의인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가족은 다시 홍수 이전의 상황, 즉 “생육과 번성”이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적대적인 악조건의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 가족이, ‘야곱’ 가족을 지배하던 ‘이집트’라는 환경에 놓이게 된 것과 같은 처지에 노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할 때, ‘이집트’ 즉 “죄”도 함께 번성해 가게 될 것입니다.
“문명과 문화가 과연 죄의 결과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들이 죄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특히 인류가 자랑하는 과학과 기술 및 예술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해 갔습니다만(참고. 창 10:10-12; 11:1-9), 그 본질은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항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멕의 노래”가 그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그의 노래는 무자비한 피의 복수를 정당화하고, 자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의 복수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즉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배로 되갚아 주는 것입니다. ‘라멕’이 자랑스럽게 노래하고 있는 바처럼, 자신에게 단순히 상해(傷害)를 입힌 자를 살인으로 되갚아주는 것입니다.
과연 이와 같은 문화 속에서 생명이 번성하고 번창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언약이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피조물의 정상적인 관계조차도 왜곡되고 변질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즉 “창조언약”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약속 외에도,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죄의 결과는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하나는 피조물에 대한 선한 청지기, 즉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를 포기하고 무자비한 착취와 지배로 나아간 것이고, 또 하나는 정반대로 피조물을 경배하고 두려워하는 숭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참고. 롬 1:25).
특히 “바벨탑 사건”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은 완전히 무위로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해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냄으로써 다시 “창조의 언약”을 이어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약간 다른 어조이긴 하지만 동일한 그 언약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17:2);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17:6).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긴 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언약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그리고 끊어질 듯 말 듯 그 맥을 겨우 이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죽했으면 ‘아브라함’ 스스로 하나님을 돕겠다고 나섰겠습니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마엘’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었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마저 사후(事後) 허용(許容)하는 방식으로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언약”의 수혜자 속에 포함시켜주셨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17:20).
그러나 정작 약속의 씨앗은 ‘이삭’ 단 한 사람뿐이었으며, 다시 그로부터 단 두 명의 아들 ‘야곱’과 ‘에서’가 나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적통(嫡統) ‘이삭’이 단 두 명의 아들을 낳을 동안에, 그의 배다른 형 ‘이스마엘’로부터는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나서 그야말로 왕성하게 퍼져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일견 약속 밖의 후손들이 “언약”의 축복을 더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르긴 해도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스마엘’과 ‘에서’에 이르기까지 대략 이백여 년의 기간 동안에 후손들은 수천수만에 이르렀을 것인데(참고 25:12-18; 36장), 같은 기간 동안 ‘야곱’의 후손은 겨우 칠십여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참고. 46:27).
오늘 우리도 ‘야곱’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교회나 기독교인의 수는 항상 소수(小數)이거나 열세(劣勢)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출세, 명예나 부(富)의 축복도 언약 밖의 백성들이 더 많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심정은 ‘모짜르트’를 바라보는 ‘살르에르’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솔직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이 누리는 그 “축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답답할 정도로 느립니다. 내 생전에는 기도가 결코 응답받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나안이 아닌 이집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언약과 축복이 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믿어야 합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들이 너무 열악하고 형편없어 보이는데도 나는 과연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에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27절).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불과 칠십 명의 무리에서 수백만의 인구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장소 ‘가나안’이 아니라, 모든 조건이 열악하고 적대적이었던 이곳 ‘이집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벧엘’에서 ‘야곱’에게도 그의 조상들에게 들려주었던 것과 꼭 같은 “언약”을 들려주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35:11). 그 약속이 ‘가나안’이 아닌 ‘이집트’에서, 그리고 지금 당장이 아닌 무려 43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질 줄을 그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참고로 우리나라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는 요즘처럼 우리가 제법 먹고살 만 한 때가 아니라, 못 먹고 힘들던 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육과 번성”은 단순히 물리적인 숫자에만 국한되는 약속은 아닐 것입니다. “인격과 영혼”의 “생육과 번성”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매사가 그러하듯, 인생의 교훈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뼈에 사무치도록 배우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첫 사례를 ‘아담’의 반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창조의 언약”을 받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그가 그 언약의 축복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배우게 된 곳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던 ‘에덴’ 동산이 아니라, “반역” 이후 동산에서 쫓겨난 동방의 땅, 즉 “가시와 엉겅퀴”가 온 몸을 찔러대던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땅을 치고 한탄하며, “언약”의 소중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승리를 거둔 곳이 완벽한 ‘에덴’ 동산이 아니라, 황량한 ‘유대’ 광야였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한 것은 항상 정치적인 억압이나 경제적인 궁핍이 함께 하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지난 60-70 년대에 그랬고, 중국 교회도 공산 치하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지금도 성장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집트’나 ‘시리아’, ‘터키’ 등과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 왜 교회가 “생육하고 번성”은커녕 쇄락하고 도태되어가고 있습니까? 이들이 ‘이집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 신약 교회가 “생육과 번성”을 거듭하기 위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그 옛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귀 기울이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자면, <신약>의 “창조 언약”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이것입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우리는 영적 자식을 계속 낳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계속 살아남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처음 태어난 상태 그대로 아직 기저귀를 찬 채, 똥오줌 못 가리고 누워만 있습니까? 지금 우리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나안’입니까 아니면 ‘이집트’입니까?
7. 야곱의 마지막 날들
죽을 날이 가까우매. 내 나이 육십이 지나고 직장에서 정년퇴직이 가까워 옴에 따라 평소에 없던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정년 이후의 삶과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한 상념(想念)이 그것입니다.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해서야 내 하기 나름이겠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을 것이며, 그래서 다소 우울하고 침울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도 같은 심정이었던 가 봅니다. <시편>에 ‘모세’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기도문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0, 12)
흔히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들 합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한 호언(豪言) 내지 허세(虛勢)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허나 우리의 ‘모세’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무상과 그 허무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니다(참고. 10절).
그러나 그는 거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인생은 칠십부터야”하며 허세를 부리고 있지도, 그렇다고 “인생은 허무해”하며 장탄식(長歎息)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허무와 절망을 하나님에게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즉 인생의 한계를 알고, 그로부터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참고. 12절).
우리 누구나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 정도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가 원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객관적 지식으로부터 지혜가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닐진대, 지혜를 구하고 있는 ‘모세’의 태도는 그 자체로써 이미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지식이 있다 해서 누가 이처럼 겸손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유한하며, 따라서 우리가 해 아래서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부질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대 실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획한다는 것들이 실은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동안을 위한 것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26, 28, 31)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기까지 하다는 암시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그 점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잠간 만요! 주님께서 어쩌면 그렇게 한가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의식주 문제를 어찌 가볍다 하시는지요? 요즘 하루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기나 하는지요? 새나 백합화나 들풀들이 무슨 노후 걱정이 있겠으며, 자녀 등록금 적정을 할 필요가 있겠으며, 은행 빚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새도, 꽃도, 들풀도 아니거든요! 그런대도 이 모든 것들이 한낱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이생의 걱정거리라니요! 너무 심하신 말씀 아닌가요?”
그분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알아. 네가 무엇을 늘 걱정하며 살아가는지. 하지만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지. 지식은 걱정을 낳겠지만 지혜는 준비를 하는 것이지. 지혜는 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말이다.” 아무 준비 없이 생명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분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지금 ‘야곱’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보렴. 그는 지금 ‘이집트’에서 평생 구하고 원하던 것들을 대부분 다 얻은 셈이지. 재물이며, 자손이며, 노후의 보장하며,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말일세. 그런데 그가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땅에서 영원히. 그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자신에게 성취되지 않고 남아있는 하나님의 언약, 즉 “그 땅”에 관한 그분의 약속입니다. ‘이집트’에 내려온 이후 ‘야곱’의 최대 관심사는 “그 땅”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서 돌아가기는 이제 무망(無望)하게 되었으니, 죽어서라도 그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아들 ‘요셉’에게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30절). 여기서 조상의 묘지는 ‘가나안’의 ‘막벨라’ 동굴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왜 “그 땅”에 묻히고 싶어 했을까? 그에게 조상의 묘가 있는 ‘가나안’의 ‘막벨라’ 동굴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어디에 묻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전능자 하나님께서 어디든 계시지 않겠는가? 이처럼 죽어서 어디에 묻히는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소망은 단순히 조상의 선산(先山)에 묻히고 싶다는 죽어가는 한 늙은이의 부질없는 소망도 아니며, 묘지를 잘 쓰면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미신 때문도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그 땅”은 “미래의 땅”이고 “역사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와 동행하고 대화하셨으며, 그와 그의 후손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은 결코 과거 추억의 땅으로만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땅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땅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땅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지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그 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다름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 내린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시공(時空)”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망라하고 있으며,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의 가치나, 위치나, 지위는 내가 이루어낸 그 무엇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해주신 지위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즉 내 존재의 가치는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소망도 바로 그 통치 안에 자신의 미래를 영원히 맡기겠다는 믿음의 발로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선지자요, 현자(賢者)요, 믿음의 영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얻기를 원했던 “지혜로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앞둔 자의 지혜로움이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만도 아니고, 인생무상과 부질없음을 깨닫는 것만도 아니며, 그래서 마음을 비움으로써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자 함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마음”이란 버리고 비우는 마음이 아니라, 도리어 채우고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이 결코 가볍다거나 부질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의 강조는 “먼저”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란 먼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것을 말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한 통계 조사를 보면 평화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연평도 무력 도발 사건 이후 국민들의 대북 인식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보다 수개월 전에 발생했던 천안 함 피격 사건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영 딴판입니다. 응답자의 절대 다수가 북한의 행동을 규탄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전쟁은 싫다는 응답 또한 거의 비슷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은 싫다는 것이지요. 이는 평화라고 하는 지고(至高)의 가치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나 신념의 결핍에서 오는 모순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는 “전쟁이 싫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이고, 전쟁에 임할 때는 임전무퇴(臨戰無退)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각오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는 그동안 6․25 사변 이후 육십여 년의 휴전 상태를 거치면서 평화가 저절로 오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살아온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하나님의 나라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 나라를 가꾸고 지키는 것이 모든 일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가치라는 것입니다. ‘웹스터’(Webster) 영영 사전에서 “제자”에 대한 정의를 보면, “제자란 스승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자”로 되어있습니다. 나는 과연 그분의 제자입니까? 나는 무엇을 대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까? ‘야곱’처럼 나의 영원한 미래, 즉 “그 나라”를 대비하고 있습니까?
조상들과 함께. ‘야곱’이 “그 땅”에 묻히기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30절상). ‘야곱’의 이 말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동의적(同意的) 표현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열조에게로 돌아가다”는 은유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창세기> 화자는 그가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쓰고 있으며(25:8), ‘이삭’이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35:29).
하지만 “열조에게로 돌아가다”는 표현의 이면(裏面)에는 “열조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 가다”는 암시가 내포되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하자면 ‘야곱’도 <신약>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과연 <구약>의 백성들도 “부활”을 믿고 있었는지 <성경>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여러 곳에서 <구약>의 인물들이 “부활”을 어렴풋하게나마 믿고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참고. 삼하 12:22-23; 시 49:10-15; 시 73:23-26; 욥 19:25-27). <구약>과 “부활 사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헌들이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본문들을 통해서도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본문에 대한 독서와 연구를 권하는 바입니다.
‘야곱’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즉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는 약속이 단순히 자기 생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까지도 계속 유효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우리가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 즉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히 13:5; 수 1:5하)는 약속이 우리 생전뿐만 아니라 영원히 유효할 것으로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하나님의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낙담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야곱’의 일생에 대해서 아주 주목할 만 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즉 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마쳤다는 전언(傳言)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이 장면을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위로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39-40)
우리는 받았으나 그들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셨던 더 좋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까지 여전히 이루지 못하고 남겨두어야 했던 하나님의 약속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구조를 일곱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교훈과 적용을 위해서 각 단락으로부터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처음 두 단락이 교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 ‘야곱’에게 ‘이집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내가 만일 ‘야곱’이라면 “이집트로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3. 본문 47:27을 묵상하고 깨달음을 나누어봅시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지 토의해 보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마련해 봅시다.
4.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에 대응되는 구절을 <신약>에서 찾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면 “새 이스라엘” 교회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5. 우리 교회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을지 실천 방안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다음 한 주를 위한 구체적 실천 계획과 방안을 놓고 기도합시다.
6. <히브리서> 11:39-40을 먹고, 되새김 해봅시다. 그리고 나눕시다.
제 49과: 요셉과 야곱의 죽음
49
요셉과 야곱의 죽음
(48:1-50:26)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49:33)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50:26)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창세기>의 마지막 세 장(48-50장)은 <요셉 이야기>의 절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反) 절정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절정은 주인공 ‘요셉’이 형들을 만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대목과(45장), 아버지와의 재회(46-47장)에서 이미 맞이한 바 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들려주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에 관한 기술은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거나, 아니면 진부한 멜로드라마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세 장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창세기> 화자의 의도나 목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화자의 주 관심사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에 있고, 언약의 중심에는 삼중적인 약속, “땅”과 “후손”과 그리고 “축복”이 있습니다. 화자는 에피소드의 첫 장(48장)을 “축복”에 관한 이야기로 장식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주인공 ‘야곱’이 일생에 걸쳐 추구하고 있는 “축복”입니다. 이제 인생의 종말을 맞아 그가 추구해 왔던 그 모든 축복이 완결을 고하고 있는 듯합니다. 과거를 회고하며 선언적으로 뿜어내고 있는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48:3).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대했던 이상으로 복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48:11).
‘야곱’의 회고는 “그 땅”에 대한 약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그의 선조들은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이미 받은 바 있다고 말합니다(48:4). ‘막벨라’의 동굴 매장지하며(49:29-32; 50:13)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세겜’ 땅(48:21-23)도 모두 그 약속에 포함된 것이라는 언급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은 어떻습니까? 그는 이미 열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두 명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양자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셉’도 많은 손자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48:12-20; 50:23).
이처럼 “아브라함 언약”은 ‘야곱’과 ‘요셉’에 이르러 대부분 성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 두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바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맞이하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약속의 성령”으로 인(印) 치심을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엡 1:13-14).
<족장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요셉’ 모두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로 그리고 있습니다만, 이들 중 ‘야곱’만큼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상세하고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는 족장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에서 ‘야곱’을 능가하는 선지자는 ‘모세’가 유일하다 하겠습니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장래에 대해서도 이들이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48:19). 그리고 4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미래 즉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각 지파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바, ‘유다’와 ‘요셉’ 지파는 크게 흥하게 될 것이고(49:8-12, 22-26), ‘르우벤’과 ‘시므온’ 지파는 쇠하게 될 것이며(49:3-7), ‘잇사갈’과 ‘단’과 ‘갓’의 세 지파는 압제 하에 지내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49:14-19). ‘야곱’의 긴 축복의 예언은 ‘요셉’ 지파가 훗날 어떻게 막강한 지파로 성장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언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49:24-26).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그려준 ‘야곱’은 이제 다시 한 번 자신의 매장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묻힐 곳은 다름 아닌 선조들의 묘지입니다(참고. 49:29-32; 47:29-30). 그의 아들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위해서 왕의 장례식에 버금갈 정도로 ‘이집트’에서 가장 거창하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한 것이나, 온 ‘이집트’ 백성들로 하여금 ‘야곱’을 위하여 무려 칠십 일 동안을 애곡하게 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후 ‘바로’ 왕의 허락을 받아 그의 시신(屍身)을 마차에 싣고, ‘야곱’의 모든 자손들은 물론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전의 모든 원로들과 그 땅의 모든 원로들이 따르는 가운데, ‘요단’ 강 건너 편 ‘아닷’ 마당이라는 곳에 이르러 다시 칠일 동안을 모두 애곡하게 한 다음, ‘막벨라’ 밭 선조들의 매장지에 그를 장사지냅니다.
이처럼 ‘야곱’의 장례식과 관련해서 화자가 동원하고 있는 어휘나 표현들, 그리고 장례 행렬이 거쳐 지나갔을 경로 즉 홍해를 지나 ‘여리고’ 인근의 ‘가나안’ 남동쪽으로 향하는 경로는 훗날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택했던 경로를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결국 이 장례식은 직접적으로는 ‘야곱’ 자신이 기대했던 그 땅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 멀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성취를 예고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요셉’ 자신이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50:24).
이렇게 해서 좁게는 <요셉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축복”과 “그 땅”과 그리고 “후손”에 대한 이야기 전개는 크게는 <창세기> 전체의 주제, 즉 “족장언약의 부분적인 성취”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족장들의 인간적인 결함이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 성취를 기대라며 살아갔던 “믿음의 용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1-22)
<요셉 이야기>는 이렇게 “족장 언약”에 관한 부분적인 성취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창세기>가 전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요셉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창세기>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이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형제들 간의 갈등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봉합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요셉’의 관대함에 기인한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45장). 하지만 과거는 쉽게 잊혀 지지 않는 법,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요셉’ 형들의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요셉’이 행여나 복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형들은 처음으로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를 구합니다(50:17). 그리고 이전에 했던 바처럼 다시 ‘요셉’ 앞에 엎드려 종이 되기를 자원하고 있습니다(50:18).
이에 ‘요셉’은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그 모든 고초에 대해서 형들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들어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적 진술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참고. 45:5-8).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한 계획마저도 선한 목적을 위해서 활용하신다는 사상은 실은 <성경>의 보편적인 전제이기도 합니다(예: 잠 16:9; 19:21). 과연 ‘요셉’은 악한 형들 때문에 고초를 당한 ‘요셉’을 통해서 세상은 구원을 얻고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참고. 12:3). 이는 좁게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만, 넓게는 이 또한 <성경>의 기본 전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시편>의 많은 애가(哀歌)들이 의인의 고난을 통한 세상의 구원을 간구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시 22, 40, 140편).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그리고 부활만큼 이와 같은 구원의 원리를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없다 하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지만 이와 같은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은 ‘유다’ 지파를 향한 ‘야곱’의 축복 속에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물론 이 예언은 ‘다윗’ 왕국의 출현으로 일차적으로 성취된 바 있습니다만, <시편>과 <예언서> 모두는 더 위대한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예언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 중 왕”이요, “만유의 주”이시며,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무릎 꿇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7:9);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신약>의 나머지 책들 모두는 한 결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 ‘메시아’의 비전을 더욱 심화시켰고 확대시켜준 바 있습니다. ‘요셉’은 그 옛날 그의 형들에게 유언으로 남겨주었던 약속을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50:24)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창세기>의 마지막 세 장(48-50장)에서 긴 <야곱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제 1부가 25장에서 시작되었다면, 제 2부는 흔히 <요셉 이야기>로도 불리고 있는데 37장에서 시작한 바 있습니다. 본문을 이야기의 대단원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하나의 새로운 에피소드로서 문학적 통일성을 갖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에필로그’ 즉 대단원답게 그 출발을 “이 일 후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특유의 표현으로서 항상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의 기능을 해왔습니다(참고. 46-47장). 그리고 ‘요셉’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대단원의 결말로 적절한 진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50:26). 특히 각각의 <족장 이야기>는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유언을 하나의 전형(典型) 장면으로 도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은 임종이 임박했을 때 자식들을 불러 그들을 축복해주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24장에서, <이삭 이야기>에서는 27장에서 이 장면을 볼 수 있고, 이제 이곳에서 ‘야곱’의 임종 장면은 48:1-49:32 사이에서, 그리고 ‘요셉’의 경우는 50:24-26 사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모든 장면에서 ‘야곱’의 임종 장면이 가장 특기할 만한데, 그것이 가장 길고 상세하다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로서 그의 유언은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 각 지파의 미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유언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자신을 ‘가나안’에 묻어달라는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 전체의 미래가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서 펼쳐질 것임을 예고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이 땅”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자, 내가 죽을 때 돌아갈 땅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화자는 ‘야곱’의 유언을 통해서 “이 땅”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 땅”은 미래 언젠가 이스라엘의 땅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긴 임종(臨終) 장면에 이어 두 개의 짧은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역시 하나님의 언약이 미래 어느 날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즉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용서를 구하려 하자, ‘요셉’은 이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인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요셉’의 고백은 결국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표현을 달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땅의 모든 족속이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 말입니다(참고. 12:3; 22:18).
마지막으로, ‘요셉’의 죽음에 관한 간략한 언급을 읽게 되는데, 그 역시 아버지 ‘야곱’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야곱’과는 달리 이스라엘 모든 족속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체 이야기는 일곱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단락 구분에서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야곱’의 매장지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의 기법을 도입하여, ‘야곱’이 ‘가나안’에 있는 조상들의 묘지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48:7, 21; 49:29-32; 50:5-14). 둘째, ‘야곱’ 후손들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는 이번에는 이에 관한 내용을 두 개의 장면에 걸쳐 가장 길게 다룸으로써 그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48:8-49:28).
본문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은 이곳에서 ‘야곱’에 의한 “임종 축복” 장면이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번은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한 것이고, 또 한 번은 ‘야곱’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소 기이한 서술 방식은 <족장 이야기>에서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닙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을 ‘이삭’의 경우에도 볼 수 있는데(27:1-28:5), 이곳에서 ‘이삭’은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눈이 먼 상태에서 차남 ‘야곱’을 장남 ‘에서’보다 앞서 축복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야곱’을 저지하려 했던 것처럼, ‘에서’ 또한 아버지 ‘이삭’을 향해 항변했으나, ‘이삭’은 개의치 않고 장남을 향한 축복, 즉 두 번째 축복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임종” 장면이 이와 같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야곱’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간증이 그것입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48:3-4).
‘야곱’의 고백은 앞선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을 연상시켜주는 한 예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앞선 다른 에피소드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들을 모두 참고하고 있거나 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참고로 다음 본문들을 함께 비교함으로써, 이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48:5와 41:50-52; 29:32-33; (2) 48:7과 35:9, 16-19; (3) 48:9와 41:50-52; (4) 48:11과 37:33-35; 45:28; (5) 48:14와 27:27-28; (6) 48:15와 13:17; 17:1; 26:3; 28:15, 20-21; (7) 48:22와 34:25-29; (8) 49:3과 29:32; (9) 49:4와 35:22; (10) 49:5와 29:33-34; (11) 40:5-7과 34:25-31; (12) 49:8과 29:35; (13) 49:13과 30:20; (14) 49:14와 30:18; (15) 49:16과 30:6; (16) 49:19와 30:11; (17) 49:20과 30:13; (18)49:21과 30:8; (19) 49:22와 30:24; (20) 49:27과 35:18; (21) 49:29-32와 23:2-20; (22) 49:31과 25:9; 35:29; (23) 50:1과 46:29; (24) 50:4와 47:1; (25) 50:5-6과 24:3, 37; 47:31; (26) 50:8과 45:10; 46:28, 34; 47:1, 4, 6; (27) 50:9와 41:43; (28) 50:13과 23:2-20; (29) 50:15와 27:41; 37:18-35; (30) 50:17과 31:36; (31) 50:18과 44:14, 16; (32) 50:20과 45:5, 7-9; (33) 50:21과 45:11; 47:12; 37:35; 34:3; (34) 50:24와 48:21; 50:5; 22:16; 26:3; 35:12; (35) 50:25와 24:3, 37; 47:31; 50:5-6.
이와 같은 유사 반복은 <창세기> 전체를 흐르는 주제의 일관성에서 찾아야 할 것인 즉, 언약과 그 성취를 보여주려는 화자의 의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그동안 등장했던 그 모든 에피소드들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대단원의 막을 내림에 있어 적절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완성과 성취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일부 자료비평 학자들은 본문 속에 세 개의 전승이 혼재해 있다고 믿습니다: (1) 야훼 자료(49:1하-28절상; 50:1-11, 14); (2) 엘로힘 자료(48:1-2, 8-22; 50:15-26); (3) 사제 자료(48:3-7; 49:1상, 28하-33; 50:12-13). 그런데 48-50장 사이에서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으며, ‘야곱’(흔히 엘로힘 전승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이스라엘(흔히 야훼 전승에서 사용하는 이름)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이름 또한 번갈아 나타나고 있는 점 등에 기초하여, 후대의 자료비평 학자들은 본문을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세 장(48-50장)이 <요셉 이야기>와 <야곱 이야기>를 적절히 사제적 관점에서 재편집한 사제 전승이 혼성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웨스터만’(Westermann)은 48:1-2, 8-12, 및 50:1-14 등은 <요셉 이야기>의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는 반면, 48:3-6, 49:1하, 28-33, 50:12-13 등의 본문은 <사제 전승>에서 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 외의 다른 구절들(48:7, 13-22; 50:15-26)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블룸’(Blum)은, 본문과 27 장과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48-50 장의 더 많은 부분이 <요셉 이야기>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예. 48:1-2, 8-14, 17-20; 50:1-11, 14-21). 그리고 여기에 일부 <사제 전승>과 다른 요소들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코트’(Coats)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47:28-50:14 사이의 내용은 일관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 “야곱의 축복”(49:2-27)이나 <사제 전승>의 일부 자료(예. 48:3-7)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50:15-21의 본문이 일종의 요약으로, 그리고 마지막 단락 50:22-26은 색인(索引)으로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 Coats는 이야기의 서사(敍事) 구조를 <야훼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Coats 주장은 각 <족장 이야기>들이 그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전체적으로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니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 외에는 크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Coats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는 점은 <창세기> 내에서 유사한 편집 작업을 보이고 있는 다른 병행 본문들을 비교 조사해 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삭 이야기>(27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임종 축복” 장면이 이들 본문 속에 공통적인 전형(典型) 장면으로 항상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삭 이야기>에서 유사한 구조는 또 있습니다. 즉 족장 ‘이삭’의 “임종 축복”이 ‘야곱’과 ‘에서’에게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인데(2727-28//28:2-6), ‘야곱’ 역시 한 번은 그의 두 손자에게, 그리고 또 한 번은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축복을 해주고 있습니다(48//49장). 그리고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야곱 이야기 I/II>와 유사한 편집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도표 참고).
‘요셉’과 관련된 마지막 두 개의 에피소드, 즉 ‘요셉’이 형제들을 안심시키는 장면과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50:14-26)를 단순히 편집적 삽입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슈바이처’(Schweizer)가 통찰력 있게 관찰한 바대로, 이 부분은 오히려 <요셉 이야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즉 아버지 ‘야곱’을 향한 ‘요셉’의 사랑이 그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연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자식들을 결속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이 동생이 지난 일을 놓고 복수를 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에서’가 그의 아버지 ‘이삭’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동생 ‘야곱’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참고. 27:41-45). 지금이야말로 ‘요셉’이 새로운 화해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이 부분을 제거한다면 <창세기> 50장의 절정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다 해도 원래의 <요셉 이야기>를 없애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화해의 장면은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족장 언약”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마지막 단락에서, “요셉이...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라는 화자의 언급은 <야곱 이야기>의 결말로서 아주 적절한 진술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이삭 이야기>가 ‘이삭’의 아들 ‘에서’의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도표 참고).
이 모든 형식적, 구조적 특징들을 통해서 볼 때, 48-50장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 단위로 취급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원래의 전승들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컨대, <사제 자료>(48:3-7; 49:28하-33; 50:12-13)로 분류할 수 있는 “야곱의 축복”은 원래 별도의 전승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자료를 <사제 전승>으로 분류한다면, 23장이나 25장에서 볼 수 있는 이와 유사한 자료들 역시 같은 전승에 포함시켜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들 자료가 처음부터 <사제 전승>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현재의 본문 역시 그 출처가 불분명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23:1-20이나 35:9-14의 본문들이 <사제 전승>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48-50장의 최종 편집자가 이들을 별도의 전승이 아닌 <사제 전승>으로부터 직접 가져왔을 수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유언. 지금까지 48-50장 전체에 대한 <문학과 역사>를 개괄해 보았습니다만, 흔히 “야곱의 유언” 또는 “야곱의 축복”으로 알려져 있는 본문 49:1-27은 보다 상세한 역사․문학적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히 족장의 “축복”만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저주”도 함께 포함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야곱의 유언”은 시적(詩的)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족장 이야기>의 유언에 비해 가장 길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부분의 출처나 배경 및 용도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48-50장 단락 전체적인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고 있어 오히려 없는 편이 더 나아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이 <창세기> 내에서 기능하는 바가 무엇이며, 다른 족장들의 “임종 유언”과 어떻게 다르며, 그리고 그 출처와 배경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현재의 본문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앞선 자료비평적 연구에서 지적한 바처럼, “야곱의 유언”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그것이 원래 다른 별도의 전승에 속해 있었으며, <창세기> 내에 들어오게 된 것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예컨대, ‘롱에이커’(Longacre)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이 단락이야말로 <요셉 이야기>에서 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적으로 핵심이자 절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유언”은 이스라엘의 “계보”를 시와 노래로 들려주고 있으며, 그 속에는 미래 두 국가 즉 ‘요셉’ 지파로 이루어질 북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로 이루어질 남쪽 ‘유대’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잉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25절로 된 유언 중에 열 개의 절이 ‘유다’와 ‘요셉’에 관한 내용이며(8-12, 22-26절), 이는 상대적으로 다른 열 지파에 비해 더 많은 분량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유다’ 지파는 ‘요셉’ 지파를 제외하고 나면 ‘야곱’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핵심 지파임에 분명합니다(참고. 37:26-27; 38:1-26; 43:3-10; 44:14-34; 46:28). 하지만 이와 같은 ‘롱에이커’(Longacre)의 주장에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즉 한 지파에 대해서 많이 그리고 상세하게 다룬다고 해서 그 지파가 다른 지파에 비해서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논리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지요. 만일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요셉 이야기>에서 단지 이름만 등장할 뿐인 ‘르우벤’과 ‘베냐민’(37:21-22, 29-30; 42:22, 37; 48:5; 42:24, 36; 43:23)에 대해서도 “야곱의 유언”은 다섯 절이나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마땅히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반면 <요셉 이야기>의 다른 곳에서 단지 계보 목록에만 등장할 뿐인 ‘스불론’과 ‘잇사갈’, ‘단’,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 지파들은 이곳에서 여덟 절을 할애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설명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유언”이 <창세기>의 다른 내용들과 일정 부분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첫째, ‘르우벤’에서 ‘베냐민’에 이르는 유언의 순서는 대개 이들이 태어난 순서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참고. 29:32-30:24; 35:18). 물론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루게 될 것입니다.
둘째, ‘르우벤’과 ‘시므온’과 그리고 ‘레위’에 대한 ‘야곱’의 저주는(참고. 4-7절) 34장과 35:22에서 다룬 바 있는 에피소드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언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네 인물은 ‘르우벤’과 ‘시므온’, ‘유다’, 및 ‘요셉’으로서, 이들 이름은 출생 시에 거룩한 이름 ‘야훼’와 관련해서 설명이 있었던 이름들입니다(29:32-35; 30:24). 즉 화자는 이들 네 사람의 이름을 출생 시부터 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창세기> 29-50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은 화자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49장에 이르러서는 이 점을 간파할 수 있게 합니다.
“야곱의 유언”(49:1-27)이 48-50장 전체 내용과 일관성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즉 “야곱의 유언”은 “임종 유언”에 대한 일종의 전형으로서, 그 내용이나 그것이 나타나는 순서에 있어 <아브라함 순환>이나 <야곱 순환>에서 보는 바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참고. 22:15-25:10; 35:9-14). 여기에 덧붙여, <야곱 이야기>에서 보는 두 족장 ‘이삭’과 ‘야곱’의 임종 축복 장면 역시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는 바가 있는데, 두 경우 모두 두 번에 걸친 축복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28:2-6). <창세기> 외의 책에서 보듯이, “야곱의 유언”과 유사한 유언 장면은 <사사기>의 “드보라의 노래”(삿 5:14-18)와 “모세의 축복”(신 33:2-29)을 들 수 있을 것인데, 특히 “모세의 노래”는 열두 지파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곱의 유언”과 아주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창세기> 내에서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곳을 찾는다면, “노아의 유언”(9:25-27)을 들 수 있을 것인데, 이곳에서 ‘노아’는 먼저 ‘함’에 대한 저주로 시작하여 다른, 두 아들에 대한 축복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야곱’ 역시 세 아들에 대한 저주에서 그들의 과거 행정을 문제 사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유언이 일치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어쨌든 두 경우 모두 죽어가는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야곱의 유언”에서 각 지파를 향한 유언의 순서를 보면, 대략 자식들이 태어난 순서와 일치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첫째, ‘레아’의 자식들을 ‘르우벤’에서 ‘잇사갈’까지 언급한 다음, 두 몸종에서 태어난 자식들인 ‘단’에서 ‘납달리’까지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라헬’의 자식들 즉 ‘요셉’과 ‘베냐민’의 순서입니다(참고. 29:32-30:24; 35:18). 그러나 예외도 있는 것이, ‘레아’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의 경우 ‘스불론’을 ‘잇사갈’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이 순서는 30:17-20에서 보는 출생의 순서와는 다릅니다). ‘스불론’을 ‘잇사갈’보다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아마도 ‘스불론’의 운명이 ‘잇사갈’보다느 나을 것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참고. 49:13-15). 그리고 두 몸종의 자식들에 대한 순서 역시 출생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 이곳에서의 순서는 ‘단’에서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로 이어지고 있는데 반해서, 이들이 실제 태어나기는 ‘단’, ‘납달리’(‘라헤’의 여종 ‘빌하’의 자식들), ‘갓’과 ‘아셀’(‘레아’의 여종 ‘실바’의 자식들)의 순서입니다(참고. 30:5-13). 이들의 순서와 관련해서 ‘사르나’(Sarna)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교차대구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A) ‘단’‘빌하’의 아들
(B) ‘갓’‘실바’의 아들
(B) ‘아셀’‘실바’의 아들
(A) ‘납달리’‘빌하’의 아들
하지만 ‘딜만’(Dillmann)은 다소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나타나는 순서는 이들 지파가 훗날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그들의 정착지를 순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1) ‘단’(수 19:40-48); (2) ‘갓’(민 32:33-36); (3) ‘아셀’(수 19:24-31); (4) ‘납달리’(수 19:29-39).
“야곱의 유언”에 대한 전승과 관련해서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것이 별도의 전승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만, 전통적인 견해는 그 반대의 상황 즉 이 단락은 처음부터 전체 본문에 속해있었던 하나의 시(詩)로서,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이지만, 유언의 내용과 분량은 지파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예컨대 ‘르우벤’과 ‘레위’와 ‘시므온’과 ‘유다’ 및 ‘요셉’ 지파에 대한 내용은 긴 반면, 나머지 지파들에 대한 유언의 분량은 비교적 짧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 지파의 이름이나 동물의 이름에 빗대는 등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섯 주요 지파에 대한 긴 유언의 분량은 전체 분량의 2/3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좁게는 각 지파 간에 상호 연결 고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넓게는 <창세기> 전체의 문맥과도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언을 말하는 자는 ‘야곱’ 자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이며(참고. 49:3-4, 6, 8-9, 25-26), 그가 말하는 내용은 지파 간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이들 지파는 <야곱 이야기> 전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야곱의 유언”은 하나의 동일한 자료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각 지파 별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다른 지파들, 즉 ‘갓’과 ‘아셀’, 그리고 ‘납달리’에 대해서 적용해 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야곱의 유언”은 현재 본문에 있는 내용과 형태 그대로 바라볼 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본문 속에서 ‘야곱’의 주된 관심사는 그의 후손들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유언의 배경에 대해서는 확신하기가 어려운 것이, 예컨대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랑 상을 차리리로다”(20절)는 언급은 아마도 원래의 배경이나 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게 어떤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추측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의 유언”은 처음부터 하나의 자료로서 상당 부분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자료의 발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료의 편집과 관련해서 대체적인 인식은 “야곱의 유언”이 처음 본문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야훼’ 기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편집의 시기는 언제 였으며, 그 이전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원래 전승의 용도와 관련한 ‘군네웨그’(Gunneweg)의 견해에 따르면, “야곱의 유언”은 <신명기> 33장에 보는 바처럼, 모든 지파들이 모여 모종의 언약 조인 행사를 주관할 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49장보다는 <신명기> 33장이 더 잘 어울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49장은 <신명기> 33:2-5의 본문과는 달리,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며, 매번 국가적 행사가 열릴 때마다 세 지파들에 대한 저주(49:3-7)를 낭독한다는 사실을 상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족장 이야기>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전통, 즉 임종 시 족장이 유언을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모습을 통해서 볼 때, “임종 유언”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 아닌 ‘야곱’ 자신으로 비롯되었을 것 가능성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 즉 편집의 시기는 언제였을까? 유언의 내용 중에서 세 지파들에 대한 저주는 그들의 과거 행적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본문 속에 이들 내용이 포함된 것도 그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언의 내용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하는 편집의 시기는 사사 시대일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사사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지파들이 여전히 현존하고 있던 때로서, 예컨대 ‘스불론’ 지파나(13절) ‘잇사갈’ 지파(14-15절),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 지파들(5-7절)이 있었을 것이며, ‘유다’(8-12절)와 ‘요셉’(22-26절) 지파는 상대적으로 더 큰 세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이르는 동안 ‘레위’ 지파는 이미 제사장 지파가 되어 다른 지파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었을 것이며(<창세기>에서는 ‘레위’ 지파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이미 ‘유다’ 지파에 흡수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 따르면(19:10-16), ‘스불론’ 지파는 <창세기>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49:13), 해안 지역이 아닌 내륙 지역을 할당받았습니다. 그리고 ‘잇사갈’ 지파는 <사사기>에 의하면(참고. 삿 5:15), 약소한 지파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다’ 지파에 관한 예언 중,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겠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윗’ 왕국과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이 예언은 ‘다윗’이나 ‘솔로몬’ 왕의 재위 시에 그러한 의미로 본문 예언 속에 새롭게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축도(1)-에브라임과 므낫세(48장)
첫 장면의 핵심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불러 축도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의 두 손자가 어떻게 그들의 삼촌 격인 ‘야곱’의 나머지 아들들과 어깨를 나란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동생인 ‘에브라임’이 형인 ‘므낫세’보다 먼저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화자는 “이 일 후에”라는 표현으로 첫 장면을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족장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참고. 15:1; 22:1, 20; 39:7; 40: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1절)
‘야곱’은 이제 최후를 맞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그가 “병들었다” 함은 늙어 병이 든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회복의 가망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족장 이야기>에서 통상 그러하듯이 이제 모든 자식들이 모여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도 없지도 않았던 것이, ‘이삭’은 임종 시에 큰 아들 ‘에서’만 조용히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27:1-4).
‘이삭’이 죽음이 가까웠을 때 자식들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하고 눈이 멀었던 것처럼, ‘야곱’ 역시 늙고 병이 들어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이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삼상 4:9; 왕상 20:22). 누군가 그에게 와서 아들 ‘요셉’이 왔다고 일러줄 정도가 된 것도 그의 현재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2절)
죽어가는 족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듯 노인은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옛 기억을 더듬으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3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4절).
당연히 그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성취에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되살려내고 있는 언약은 ‘벧엘’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루스’는 ‘벧엘’의 옛 이름입니다(28:19; 35:6). 그가 하나님을 ‘엘 샤다이’ 즉 “전능자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벧엘’에서의 경험을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35:9, 11).
이십여 년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바로 그 언약을 말하는 것이지요(35:9-13).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마지막 남긴 유언(28:3-4)도 함께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즉 “땅과 후손과 축복”입니다. 그가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그 언약의 일관성과 영속성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바라보고자 함일 것입니다.
물론 ‘이집트’는 “그 땅” 속에 포함될 수 없으며, 이곳에 영원히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불러 축복하고 있는 ‘야곱’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5-7절)
그는 이 두 손자가 자신의 두 아들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은 자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일종의 입양(入養)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같은 일은 고대 근동사회에서 흔히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유의해 볼 점은 ‘야곱’은 지금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첫 아들 ‘므낫세’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야곱’이 조금 후에 보여줄 행동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참고. 14-20절). 입양이 곧바로 ‘야곱’의 기업을 물려받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훗날 ‘유다’나 ‘베냐민’ 등과 같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반열에 포함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제 ‘야곱’의 눈길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향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8절)
그런데 이 질문은 정말 뜻밖이고,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에 ‘요셉’이 그들을 데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2절), ‘야곱’ 자신도 이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5절). 그런데 지금 다시 이들이 누구냐고 물어보고 있다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불필요한 반복 내지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단락 속에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전승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3-7절의 본문은 <사제 전승>에서 취한 것이며, 1-2절과 8-12절의 본문은 <엘로힘 전승>나 <야훼 전승>에서 온 것이라는 설명이 그것입니다(8절을 2절에 곧바로 연결하여 읽어보면 이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은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한 것으로서, 어떻게 3-7절의 <사제 전승>이 최종 편집과정에서 삽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7-9절의 내용은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참고. 22-24장, 35장), 이처럼 반복되는 유사병행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본문 7-9절이나 22-24장, 그리고 35장에서 유사병행의 관계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아내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자식의 결혼에 대한 언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점에 대해서는 <문학과 역사>에서 도표를 통해서 비교한 바 있습니다.
혹자는 ‘야곱’의 불필요해 보이는 질문에 대해서 다른 설명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즉 입양에 필요한 재확인의 절차라는 설명이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것으로서, ‘야곱’은 이 때 이미 눈이 멀어 제대로 사물을 식별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 ‘이삭’도 마지막 순간에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구별하지 못하고 ‘야곱’에게 “네 아들아 네가 누구냐?”하고 물은 바 있습니다(27:8). 다시 한 번 <족장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라기보다 <족장 순환>으로 불러야 할 당위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질문에 대해서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다시 거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손자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5절). 대신 ‘요셉’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9절)
<성경>에서 자식은 항상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요셉’의 이와 같은 설명은 다수 진부한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만,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족장들에게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대 ‘요셉’의 설명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손자들을 확인한 다음 ‘야곱’은 그가 하려는 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축복하는 것인데, “축복”이라는 단어는 ‘야곱’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37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27:1-28:9; 48-49). 그 자신이 아버지의 임종 시에 축복을 받기 위해 그토록 안달했던 것처럼, 이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축복을 손자들에게 전수해 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야곱’이 두 손자를 향해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가 눈이 멀어 앞을 잘 보지 못해서 확인 차 물었던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습니다. 화자는 10절에서 보다 분명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10절)
‘야곱’의 눈이 어두웠다는 사실은 조금 후 ‘요셉’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될 것인데, 아버지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혼돈했을 때 이를 바로잡아주려고 했던 그의 반응이 바로 그것입니다(17-19절). 그는 분명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자기의 두 아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야곱’이 두 손자에게 입맞춤을 하는 장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족장 순환>의 유사병행을 만나고 있습니다. 다음 장면을 10절과 비교해 보면 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6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27:1, 26-27상).
두 손자를 축복하는 ‘야곱’은 흥분과 감격으로 두 손이 떨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들 ‘요셉’에게 들려주는 고백적 간증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절)
그는 정말 아들이 죽었다고 확신했습니다(37:33-35; 42:36; 45:2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랄 수 있는 가장 터무니없는 소망까지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즉 아들을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자식들까지 보게 되었으니 이 어찌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아버지의 고백을 들은 ‘요셉’은 양손으로 두 아들을 이끌어 ‘야곱’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위치로 데려옵니다.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13-14절)
그런데 두 아들을 데리고 오는 ‘요셉’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양손에 잡은 두 아들을 ‘야곱’에게 데려다줄 때 두 팔이 서로 엇갈리게 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즉 큰 아들 ‘므낫세’가 더 큰 축복을 받아야 하겠기에 왼손으로는 그를 이끌어 ‘야곱’의 오른손을 향하도록 하고, 오른손으로는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이끌어 ‘야곱’의 왼손을 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이, 영예와 축복의 손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1:29; 시 110:1; 마 25:33; 히 1:3).
하지만 ‘요셉’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야곱’ 역시 그의 두 팔을 벌리되 서로 엇갈리게 하여 두 아들을 축복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의 오른손은 작은 아들 ‘므낫세’를, 그리고 왼손은 큰아들 ‘에브라힘’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작은 아들이 큰아들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야곱’의 이와 같은 행위는 그 자체로서 이미 ‘에브라임’의 미래의 위상을 예고해주는 것입니다. 즉 그는 ‘야곱’의 손자가 아니라 아들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가 ‘요셉’을 축복해 주고 있는 모습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절)
지금 ‘야곱’은 마치 노래하듯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축복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그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제의에서 읊조리는 축도와도 같이 들립니다. 사실 그의 축복은 훗날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요셉’은 순간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실수를 한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저지하여 고쳐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에서’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되돌리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참고. 27:34-36). 그러나 한 번 발한 축복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참고. 민 23:20; 롬 11:29). 그리고 ‘요셉’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이점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답변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7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17-18절)
즉 ‘야곱’은 축복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아들이 큰아들 제치고 축복의 자리에 든 예는 <성경>에 무수히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1) ‘가인’과 ‘아벨’(4:1-8); (2) ‘베레스’와 ‘셀라’(38:27-30); (3) ‘야곱’과 ‘에서’(27장). 이중 ‘야곱’과 ‘에서’의 경우가 가장 극적이고 대표적인 것이지만, 이번의 경우와 다소 다른 것은 ‘이삭’이 작은 아들 ‘야곱’을 축복한 것은 의도적이 아니라 ‘야곱’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실수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받은 축복이 합법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야곱’의 의도적인 축복에 대해서야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요셉’이 화를 내며 저항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요셉’이 매우 화가 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기뻐하지 아니 하여”(17절상). 하지만 ‘요셉’은 ‘에서’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에서’는 나중에 아버지에게 격렬하게 대들어(27:34-36) 자신을 향한 축복을 받아내긴 했습니다만, ‘요셉’의 시도는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19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19-20절)
‘요셉’의 시도를 비웃기라고 하듯 ‘야곱’은 두 아들의 엇갈린 운명에 대해서 더욱 단호하고 명확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큰아들은 한 민족을 이룰 것이나, 작은 아들은 큰아들보다 더 큰 자기 될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화자 역시 독자들을 위하여 이점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20절하).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언약과 병행하는 것입니다(참고. 17:4-6).
‘야곱’은 비록 ‘이집트’에서 죽을 것이지만, 그는 이미 ‘요셉’에게 자신을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고 요청한 바 있습니다(47:29-31). 이제 다시 한 번 그 점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21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21-22절)
‘요셉’에게 주려는 그 땅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야곱’은 그 땅의 일부가 자신의 것임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땅에 대한 ‘야곱’의 이와 같은 언급은 그 땅에 대한 그의 집착을 암시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상당히 ‘이집트’화 되어있었을 아들 ‘요셉’에게 그가 살아야 곳은 ‘이집트’가 아니라 그 땅이라는 점을 재확인시켜주기 위함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2. 축도(2)-열두 지파(49장)
서론. 49장에서 등장하는 ‘야곱’의 축도는 그의 나머지 아들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두 절은 소위 “야곱의 언약”에 대한 서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1-2절)
서론의 기능은 ‘야곱’이 들려줄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을 것인지를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불러 이르다”는 표현이 이를 확인해주는 것으로서, ‘이삭’이 그의 임종 시에 ‘야곱’을 “불러 일렀으며”(28:1), 그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3:9; 22:11, 15; 출 19:3).
그리고 “후일에”라는 표현 역시 예언적 메시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종종 종말론적인 의미 즉 “마지막 날에”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사 2:2). 이곳에서는 그냥 단순히 “먼 장래에”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미래 일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르우벤. 이어지는 두 절은 장남 ‘르우벤’에 관한 예언입니다.
3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3-4절)
위에서 보듯이 ‘르우벤’에 관한 예언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것입니다. 저주는 그가 행한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인데, ‘노아’ 역시 세 아들 중 ‘함’에 대해서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대신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9:25). <창세기>에서 장자가 자신의 잘못으로 장자권을 박탈당하는 경우를 여러 번에 걸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예: ‘가인’; ‘이스마엘’; ‘에서’; ‘엘’). ‘르우벤’의 죄악은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입니다(35:22). ‘야곱’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야곱’은 <창세기>에서 가장 강경한 어투로 아들의 비리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마치 생전에 이 아들에게 무엇인가 처벌을 내리고 싶었으나 두려워 못하고 있다가 임종이 가까워서야 그를 향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형국입니다(‘다윗’과 ‘요압’의 경우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왕상 2:5-6).
‘야곱’은 먼저 ‘르우벤’이 장자로서 지니고 있는 영예와 특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3절). 고대 근동에서 장자는 단순히 부모의 자랑이나 기쁨의 대상 그 이상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보듯이(25:31-32; 27장), 장자가 된다는 것은 부모의 유업을 이어받는 등 각종 특권과 지위를 지니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신명기>에서 보듯이, 장자는 나머지 아들들에 비해서 두 배의 재산을 상속받게 됩니다(신 21:15-17). 그뿐 아니라 장자의 유업은 첫 번째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두 번째 부인의 장남에게는 결코 양도할 수 없습니다. 장자가 이처럼 부모에게 중요한 존재라 마치 곡식의 첫 열매처럼 하나님에게 드리도록 되어있었습니다(참고. 축 13:2; 34:20). 나중에 이 독특한 지위는 ‘레위’ 지파가 갖도록 법으로 규정되기도 했습니다(민 3:45-51). <성경>은 여러 곳에서 “첫 열매”(tyvioar, 레쉬트)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으며(신 21:17; 시 78:51; 105:36),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핵심 단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레 2:12; 23:10; 민 15:20; 18:12; 신 18:4; 26:10).
이런 맥락에서 ‘르우벤’의 소명(召命)이나 지위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야곱’은 그를 향하여,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실은 <구약>에서 “전능자 하나님”(엘샤다이)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욥 13:11; 31:23; 출 15:2). 장자가 갖는 거의 신적인 지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가장 비열하고 비속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 지위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를 향한 또 다른 수식어, “물이 끓음 같다”는 표현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명사형 단어 “끓음”(zj'P, 파하즈)은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와 유사한 명사형 단어가 <예레미야서>에 등장하고 있으며(렘 23:32), 동일한 어근을 지니는 분사형 단어가 <사사기>(9:4)와 <스바냐>(3:4)에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거짓 선지자, 즉 자신의 상상력으로 거짓 예언을 만들어내는 자를 지칭하며, <사사기>에서는 무지막지한 살인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번역본에서 다양한 번역을 내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오만방자(傲慢放恣)하다”, <벌게이트>에서는 “내뿜다”, 그리고 <탈굼>에서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다”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의 행동은 물이 끓는 것처럼 예측과 예상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4절에서 언어의 유희를 볼 수 있는데, ‘르우벤’이 “월등하지만” 결코 “월등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 그것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세 번에 걸쳐 그의 “탁월함”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의 죄악에 대해서도 세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습니다: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침상에 올랐었도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단어는 “더럽히다”는 동사로서, 의미하는 바는 거룩한 대상을 불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이 동사를 사용하는 용례는, 안식일을 더럽히는 경우, 성소를 더럽히는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 희생 제물이나 제사장 직분을 더럽히는 경우 등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출 31:14; 레 21:12; 19:12, 8; 21:9).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야곱’의 ‘빌하’와의 결혼은 거룩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레 19:29; 히 13:4).
‘르우벤’에 관한 이 예언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르우벤’은 요단 동쪽에 정착한 이후(민 32)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져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파에서 어떠한 선지자나 왕이나 사사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시므온과 레위. 이들 두 지파에 대한 예언은 직전의 ‘르우벤’에 대한 것만큼이나 난해하고 까다로워서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도 사실입니다.
5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5-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내용을 <야곱 이야기>의 배경 내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해석의 폭이 제한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야곱’이 저주하고 있는 ‘시므온’과 ‘레위’의 행위가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시므온’과 ‘레위’가 주도했던 “세겜의 살육”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34장). 예컨대,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는 언급은 그 사건과 연계시키지 않고는 달리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사건이 없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형제”라는 언급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야곱 이야기> 내내 열두 지파는 모두 한 아버지 ‘야곱’의 자식들로서 혈육의 “형제”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이들 두 사람을 형제로 칭하고 있는 구절은 오히려 문자적 해석을 자제해야 할 대목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시므온과 레위는 한 통속”이라는 암시가 아닐까요?
이들 형제에 대한 저주의 내용은 이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물론 ‘야곱’이 말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성격상 신탁(神託)에 가까운 것으로서 ‘야곱’의 선지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가? 흔히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 땅의 48개 성읍에 ‘레위’ 지파가 흩어져 살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참거. 수 21). 그 때 ‘시므온’ 지파도 ‘유다’ 지파의 구역 안에 일정 부분 거주지를 할당받은 바 있습니다(참고. 수 19:1-9; 15:32-42). 하지만 이런 식의 정착을 두고 이들이 지파들 사이에 흩어지고 나누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형제가 더 이상 공모(共謀)하여 함께 일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분리될 것이라는 예언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예컨대, <민수기>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 ‘비느하스’가 ‘시므온’ 지파에 속한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5:7-14). 물론 이 같은 사건이 두 지파가 분리되는 한 예가 될 수는 있겠지만, 7절의 예언은 이보다 더 깊은 암시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이들 지파의 능력이나 영향력이 다른 지파들에 비해 일찍 쇠퇴하고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여러 곳에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민 1:23; 26:14; 대상 4:38-43; 대하 15:9; 34:6). <신명기> 33장에는 ‘시므온’ 지파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단락의 보다 직접적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르우벤’으로부터 장자의 지위와 지도력을 박탈한 상황에서, ‘야곱’은 그 지휘권을 차남이나 삼남에게 전가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입니다.
유다. 당연히 “장자의 축복”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다’에 관한 예언 역시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유다’ 지파의 탁월성이나 지도력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 분명합니다만, 세세한 부분에 이르면 해석이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여타 지파들에 관한 예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다의 축복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8절‘유다’의 우월성에 대한 예고
9절사자와 같은 ‘유다’
10-12절유다의 지도력
불과 다섯 절에 지나지 않는 내용 속에 아주 다양한 상징이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자”; “당나귀”; “지팡이”; “포도나무”; “포도주”; “우유”. 이들 상징이 ‘유다’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혹자는 이들 이미지는 앞선 다른 형제들의 예언에서처럼, 실제 ‘유다’의 과거 행적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유다’는 이전에 “사자”처럼 동생 ‘요셉’을 물어뜯었으며(37:33), 며느리 ‘다말’에게 “지팡이”를 징표로 건네준 바 있고(38:18, 25), 그의 “(숫) 나귀”(ryI[, 아이르)는 그의 아들 ‘엘’((r[, 38:6-7)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빨겠다”(11절)는 것은 ‘요셉’의 옷이 피로 물들었음(37:31)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같은 해석은 참으로 천재적인 ‘알레고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확신을 주기에는 미흡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유다’에 대한 예언은 축복이 아니라 비난과 저주로 이해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야곱’의 칭찬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다(hd;Why,예후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hd:y,야다)이 될지라 네 손(dy, 야드)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8절)
따라서 ‘유다’에 대한 예언이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단락 전체를 여러 자료들의 복합물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지나친 독단은 금물인 것이, 다른 형제들에 대한 예언에서도 짐승을 포함하는 다양한 상징이나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유다’에 대한 예언과 관련해서 화자는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일련의 단어들을 통해서 언어의 유희(遊戱)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찬송”; “손”. 유사한 언어의 유희가 11, 16, 19, 20, 및 22절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관련해서 “찬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지난 날 ‘레아’가 그를 낳았을 때 했던 말, “이번에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한 인간을 찬송하는 일이 <성경>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로서, <성경>에서 인간을 찬송하는 경우가 단 세 곳에 불과합니다: 욥 40:14; 시 45:17; 49:19.
아마도 지도자로서 그의 업적에 대한 칭송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는 예언은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한 것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참고. 37:7, 9; 42:6; 43:26; 43:28).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는 원수에 대한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서(참고. 출 23:27; 삼하 22:41), 혹자는 이 구절이 원래 다음과 같은 이행 시(二行 詩)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네 손은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발은 시체의 등을 밟을 것이로라
만일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12절에 등장하고 있는 “눈과 이”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생각해 볼 만한데, 이는 <출애굽>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발에는 발”(21:24)을 연상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 대한 일련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자”입니다. 그는 지금 먹이 감을 맹렬하게 낙아 채어, 그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서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그 누구라도 뚫어지게 노려보며 엎드려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9절)
이와 유사한 이미지가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에 대해서나(민 23:24; 24:9), ‘갓’과 ‘단’ 지파들에 대해서나(신 33:20, 22), 이스라엘의 적들의 선지자들에 대해서(나훔 2:11-12)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만 하더라도 사자에 대한 언급은 백 회 이상 등장하고 있으며, <성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삿 14:5; 왕상 13:24-25), 고대 근동 지역에서 매우 친숙한 짐승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들은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서 사자를 사냥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비문(碑文)이나 또는 왕실 조각품 등에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중동 지역에서 사라진 것은 십자군 운동 이후부터였으며, 1950년 이후에는 아라비아 사막이나 ‘유프라데스’ 상류 지역에서 간혹 발견되기도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윗’ 왕의 군사적 승리를 ‘유다’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사자”는 ‘메시아’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유다’에 대한 이미지는 약간 바뀌고 있습니다만,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
“규”과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입니다(참고. 민 24:17; 시 45:6; 슥 10:11; 민 21:18; 시 69:7). 이 구절 하나만 가지고 ‘유다’가 단순히 지파의 우두머리가 될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8절에 따르면, ‘유다’가 다른 모든 지파들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발 사이에서”라는 표현은 의미가 분명치 않아, 많은 논의가 있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그 기준에 사이에서”로 해석하는가 하면, 또 다른 자는 “지팡이를 두 발로 지팡이를 세워놓고 기대어 앉아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그럴 듯한 입장은 ‘유다’의 후손과 관련한 완곡어법이라는 것입니다. 즉 지도자가 ‘유다’의 후손들 중에서 계속 나올 것이라는 예언으로서, <성경>에서 “발”은 종종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의미하는 완곡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참고. 신 28:57; 삿 3:24; 삼상 24:3; 사 7:20).
“실로(hloyv)가 오시기까지”는 <성경> 전체적으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분분했으면, ‘웨스터만’(Westermann)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서조차도 해석 상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약 30마일 지점의 ‘에브라임’ 경내(境內)에 위치해 있던 성읍이며, 주로 종교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군사 작전기지는 부차적이었다. 그러나 ‘실로’가 여기서 이 성읍을 의미하는지 또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확정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 구절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라 할지라도 <신약> 어디에도 이에 대한 암시가 없습니다. 이 구절이 어차피 ‘유다’에 대한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만치 오히려 ‘메시야’의 모형인 ‘다윗’에 관한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로’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네 가지 가능한 추론이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실로’의 자음(字音)이 ‘아카드’어 ‘셀루’(顧問, counselor)와 연관 지우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둘째, ‘실로’를 지명(地名)으로 간주하여 “‘실로’가 올 때까지”(until shiloh comes)로 번역하는 것입니다(KJV, NASB 등). 또는 “그(유다-다윗)가 ‘실로’에 올 때까지”로 번역하는 것입니다(NIV). 이 경우 예언이 의미하는 바는, ‘유다’ 지파가 자신의 경내를 넘어 세력을 확장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셋째, 이 해석은 <칠십인 역>이나 <탈굼> 등과 같은 고대 역본들에서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소라> 본문에 이르러 일부 수정을 꾀하고 있습니다. 즉 ‘실로’가 의미하는 바를 “그것이 속하는 자에게”로 보고, “그가 자기 자신의 것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until he comes into his own) 또는 “그가 그것이 속한 자에게 올 때까지”(until he comes to whom it belongs)로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쿰란>에서는 이 구절을 장차 올 ‘다윗’의 후손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참고. 겔 21:27).
넷째, ‘쉴로’를 구성하고 있는 자음(字音)을 ‘쉐이’와 ‘로’로 양분(兩分)하여, “조공(朝貢)이 그에게 전해지기까지”라고 보는 입장입니다(NRSV 등).
이들 네 해석 중 어떤 입장을 받아들이든, 한 가지 어렴풋하게나마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사실은 ‘다윗’ 왕조의 출현과 이스라엘 제국의 성립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차적인 성취가 ‘다윗’ 왕국의 출현에서 이루어졌다면 궁극적인 성취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백성이 그에게 순종하리로다”에서 “백성”이 복수형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를 뛰어넘는 모든 열방을 의미하는 표현일 것입니다(참고. 17:16; 출 15:16; 신 32:8).
‘유다’에 대한 이미지는 다시 한 번 바뀌고 있습니다. 처음 두 번의 것과는 다소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당나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11절)
“사사 시대”에 당나귀는 타는 말이나 노새 등을 의미합니다(참고. 삿 10:4; 12:14). <스가랴>는 예루살렘 왕의 행차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여기서 선지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왕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그 땅의 풍요로움입니다. 그 땅이 먹을 것으로 풍성한 나머지 그 땅의 지도자는 더 이상 자기 나귀에게 먹일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그 날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첩자들이 보고한 바대로(민 13:22-24), ‘유다’ 지파가 차지하게 될 땅은 그처럼 포도를 재배하기에는 탁월한 곳이 될 것입니다.
11절 후반의 노래,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또한 그 땅의 풍요로움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그 땅의 소산 즉 포도 수확이 너무 많아 포도주를 짜기 위해 포도를 밟은 자들의 옷에 단순히 포도즙이 묻을 정도가 아니라(참고. 사 63:1-3), 그들의 옷이 포도즙으로 완전히 젖게 될 것이라는 상징인 것입니다. 혹은 포도주로 옷 씻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포도주의 소산이 넘치고 넘친다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 전체적으로 미래의 축복의 황금시대는 포도 등을 포함한 온갖 곡식의 풍성한 수확과 연결되고 있습니다(참고. 레 26:5; 시 72:16; 사 25:6; 욜 2:24; 암 9:13). 이 구절 또한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한 상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다’에 대한 예언은 그의 외모에 대한 이미지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2절)
지도자의 눈과 이를 각기 포도주와 우유로 그리고 있는데, 그의 준수함이나 아름다움과 관련한 이미지일 것입니다(참고. 삼상 9:2; 16:2). 하지만 이 구절 역시 왕의 통치 하에 누리게 될 풍요로움-많은 포도주와 우유-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예. 출 3:8, 17; 민 13:27; 신 6:3). ‘아랍’ 잠언에도, “포도주로 인하여 붉게 되다”를 부유함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우유와 포도나무로 풍요로웠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습니다(사 7:21-23).
스불론. <창세기>에서 ‘스불론’과 ‘잇사갈’를 언급할 때, ‘잇사갈’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스불론’이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13절)
‘스불론’에 대한 묘사 역시 다른 형제들의 경우처럼 짐승에 관한 상징을 동원해서 언어의 유희를 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불론’은 ‘자발’(lb'z;)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높은 거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30:20). 이 단어를 짐승에 대한 비유로 연결시키려 한다면, ‘딜만’(Dillmann)이 묘사한 바처럼, ‘스불론’의 모습은 사람이나 짐승이 높은 데로 내려 앉아 그 얼굴은 바다를 바라보며 등은 ‘시돈’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거주하다”(@k'v, 사칸)를 짐승이 거주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신 33:20; 욥 37:8; 사 13:21).
역사가들은 ‘스불론’에 관한 묘사 중에서, 그가 “해변에 거주한다”는 것이나 “그곳이 배 매는 해변”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어려움을 토로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에 따르면(수 19:10-16), 이 지파는 해변이 아니라 내륙 지역을 할당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도(신 33:19) ‘스불론’과 ‘잇사갈’이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라”고 언급함으로써, 이들 지파가 해변 가에 거주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스불론’ 지파는 바다로 진출했거나, 지파 중의 일부가 바다 무역을 통해서 ‘페니키아’ 족속에 고용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본문이나 <신명기>(33:18-20)에서 말하는 거주는 영구적인 정착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거주하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베두인 족속처럼) 천막 안에 거주하다”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예. 9:27; 16:12; 25:18), “구름이 장막이나 산 정상 위에 내려 앉다”는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예. 출 24:16; 사 8:18).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는 거주는 영구적인 정착이 아니라 일시적인 거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돈’은 한 지역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페니키아’ 전체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경계가 시돈까지”라는 말도 이 지파가 ‘시돈’도 차지했다기보다는 지파의 경계가 ‘시돈’까지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이 지파의 거주가 ‘페니키아’ 해안 근처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잇사갈. ‘잇사갈’에 대한 예언은 상대적으로 분명해 보입니다. ‘야곱’은 이 지파가 땅의 비옥한 곳에 거주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의 이웃 즉 ‘가나안’ 족속의 노예로 살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14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14-15절)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특히 구체적인 역사에서 이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이곳에서도 다른 지파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짐승에 대한 상징이 또 등장하고 있습니다. “건장한 당나귀”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강한 뼈(!r,G, 게렘)를 지닌 당나귀”란 뜻으로, 이 역시 지파의 이름에 대한 언어의 유희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레아’는 ‘잇사갈’을 “보상” 또는 “댓가”를 뜻하는 단어 ‘사카르’(rk;c)에 연결시킨 바 있습니다(참고. 30:18). 하나님께서 그녀의 억울함을 보상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야곱’은 보다 경멸적인 태도로 ‘잇사갈’을 품군이 아닌 노예로 그리고 있습니다.
“양 우리”(tP;v]m, 미쉬파트)는 본문과 <사사기>(5:16)에서 단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로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자들은 “경계”, “울타리” 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당나귀가 양의 울타리 사이에 앉아 있는” 상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알 길은 없습니다.
이 지파가 거주하게 될 땅은 “보기 좋고 아름다운 토지와 쉴 곳”으로서, 추측건대 ‘갈릴리’ 호수 남서 지역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수 19:17-24). 그리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다”는 표현은 <출애굽>에서 ‘이집트’의 압제 아래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묘사하면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출 1:11; 2:11; 시 81:6).
과연 ‘잇사갈’ 지파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와 같은 노예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 보낸 ‘메기도’ 왕의 한 서신에 따르면, “슈넨 지역에서 부역을 감당하고 있는 야부와 누립다 출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슈넨’은 ‘잇사갈’의 땅의 일부입니다(수 19:18). 그리고 ‘야부’는 인접한 ‘스불론’의 땅입니다(수 19:12).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에 근거해서, 혹자는 일단(一團)의 ‘스불론’ 사람들이 ‘이스르엘’ 평원의 동쪽 지역으로 와서 점령해 살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단. ‘단’은 ‘야곱’의 두 아내가 아닌 시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역시 다른 지파에서 보듯이, 그에 대한 예언도 지파의 이름과 관련한 언어의 유희를 포함하고 있으며(16절), 짐승에 대한 비유 또한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17절).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예언의 말미에 “주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하필 이곳에서 “주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으며, 과연 이것이 ‘단’을 향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16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6-18절)
‘단’(@D)의 이름은 “심판”을 뜻하는 단어 ‘딘’(@yD)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런 점에서 “그가 백성을 심판하리라”는 예언은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라헬’이 그의 출생 시에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시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30:6). 그렇다면 그가 심판할 “그의 백성”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혹자는 ‘단’ 지파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이스라엘로 간주합니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이는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는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근거에서입니다(참고. 신 32:36; 시 135:14; 시 72:2). 다시 말하자면, ‘단’의 승리로 이스라엘 전체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단’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되”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힐 것이라는 언급이 다소 당혹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단’의 후손은 항상 이스라엘의 일부로 인정받아온 터에 굳이 ‘야곱’이 그 사실을 언급할 필요는 무엇인가? 혹시나 이 자파가 다른 지파들에 비해서 그 힘이나 세력이 약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사사기>는 이 지파가 자신의 원래 소유였던 ‘가나안’의 남서 지역을 떠나 북쪽으로 이주를 강요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단’ 지파의 승리는 다른 큰 지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전체에 큰 유익을 끼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작지만 큰 힘을 지닌 ‘단’에 대한 비유로 “뱀과 독사”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치명적인 독을 지는 이들 앞에서는 아무리 큰 짐승이라 할지라도 맥없이 쓰러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의 다리를 물러 쓰러뜨리는 일쯤은 대수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필 ‘단’을 “독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일까? ‘야곱’의 예언은 거의 대부분 ‘가나안’ 정착 시기 즉 <사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때, ‘단’에 관한 예언 역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탈굼>은 “독사”가 곧 ‘삼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중세의 ‘유대’ 학자들도 대부분 <탈굼>의 이와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삼손’은 자신이 가진 힘과 이런 저런 계책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블레셋’을 쳐부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고. 삿 13-16). 훗날 이 작은 지파는 북쪽으로 이주하여 ‘라이스’에 정착하게 됩니다(삿 17-18). <사사기>에서 ‘단’ 지파의 역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학자들은 ‘단’에 관한 본문의 예언을 ‘삼손’과 그의 지파와 연계해서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 주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만, 본문의 예언을 <사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삼손’의 행적과 연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는 ‘야곱’ 자신의 일인칭 예언이자 기대를 담은 기도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사용하고 있는 마지막 본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도문이 왜 느닷없이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바벨론 유수”나 그 이후 이후에 이루어진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보기도 합니다.
이 견해가 사실을 반영하든 그렇지 않든 과연 이 기도문이 현재의 본문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야곱’은 이 지파가 곧 겪게 될 어려운 시기를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이 지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15:11-12). ‘삼손’의 영웅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단’ 지파는 자신들이 부여받았던 기업을 떠나 북쪽으로 밀려날 운명을 곧 맞이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은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쇠락하고 타락해 가는 시대였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야곱’의 예언과 기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갓.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갓’에 관한 예언 역시 하나의 말장난입니다. 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히브리 단어 중 네 개가 동일한 두 자음(子音) ‘가드’(dG)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갓(dG)은 군대(dWdG, 게두드)의 추격(dWG, 구드)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dWG, 구드)하리로다(19절)
지리적으로 ‘갓’이 차지할 지역은 ‘요단’ 동편 즉 ‘암만’과 ‘요단’ 강 사이로서(참고. 민 32; 수 13:24-28), 적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항상 최전방을 담당했던 지파가 될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은 바로 이점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매 전쟁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이라는 점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임을 후반 절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기>에서도 ‘갓’ 지파의 군사적 위용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대상 5:18; 12:8).
아셀. ‘아셀’은 ‘실바’의 두 번째 아들로서,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레아’가 그의 탄생을 “기뻐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야곱’은 지파의 이름에 걸 맞는 예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20절)
이 지파가 누리게 될 풍요로운 삶을 예고해 주는 듯합니다. 이 지파가 거주하게 될 땅은 ‘갈멜’ 지역으로부터 북쪽 땅을 가로지르는 비옥한 토지가 될 것입니다(수 19:24-31; 신 33:24-25). 당연히 그들에게 먹을 것이 풍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파는 정착 초기부터 ‘가나안’ 족속이나 ‘블레셋’ 족속과 더불어 살았으며, 당연히 이들과는 무역을 통해서 왕래가 잦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의 수라상”이 의미하는 바도 이들 이방 왕들에게 이와 같은 진미들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아셋’을 향한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또는 질책으로 보아야 할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납달리. ‘납달리’는 ‘빌하’의 두 번째 아들입니다(30:7-8). 이 지파가 거주하게 될 땅은 ‘갈릴리’ 호수 주변의 ‘요르단’ 계곡 서북쪽 지역입니다.(수 19:32-39). 이 지파에 대한 예언은 그 자체로서 하등 복잡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만, 이 간단한 구절을 놓고 적어도 세 가지 다른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21절)
‘납달리’에 대한 예언에서 다시 짐승에 대한 비유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암사슴”이 그것입니다. “암사슴”(hl;Y;a, 아이얄라)은 목이나 발 등의 아름다운 자태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 <성경>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잠 5:19; 삼하 22:34). 하지만 <칠십인역>이나 일부 번역본에서 이 단어를 “상수리나무”를 뜻하는 ‘엘로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하반절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21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는 Wenham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1).
우리가 <한글 성경>의 번역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이 구절의 전반부에 대한 가능한 해석은 ‘납달리’가 아름다운 새끼를 낳는 자유로운 암사슴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나중에 이 암사슴은 자신의 자유를 보다 정착된 생활 스타일과 맞바꾸게 될 것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이 지파는 광야 유목 생활을 접고 ‘하솔’과 같은 마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이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편 가능한 해석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이 지파가 ‘가나안’의 생활 방식에 순응해 갔다는 비난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참고 삿 1:33). 따라서 앞선 ‘앗셀’ 지파의 경우처럼(20절), 이 구절은 칭찬이거나 또는 가벼운 질책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요셉’에 대한 예언 또는 축복은 ‘야곱’의 예언 중 가장 길고 복잡합니다. 그래서인지 학자들에게 이 부분은 일종의 악몽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갖가지 기발하고 천재적인 해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 대해서도 Wenham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2절‘요셉’을 포도나무 또는 당나귀로 비유함
23-24절‘요셉’의 성공적인 자기 방어
25-26절‘요셉’에 대한 포괄적인 축복
우선 22절은 번역본에 따라 다음 두 가지 다른 번역을 내놓고 있습니다. <탈굼>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은 ‘요셉’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는 번역을 채택하고 있으며, 다른 일부 번역본(JPS, NAB, NIVmg 등)은 ‘요셉’을 “당나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두 번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은 들 망아지, 샘 곁에 있는 들 망아지, 언덕 위에 있는 들 나귀다.
어느 쪽을 택하든 나름대로 해석상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前者)의 번역을 후자(後者)에 비해서 더 선호할 수 있는 근거를 알아 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의인을 “물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하는 일은 <구약>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관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예. 시 1:3; 92:13-15; 렘 17:7-8). 그리고 <창세기>는 ‘야곱’의 자식들 중에서 ‘요셉’을 가장 의로운 아들로 그리고 있으므로, 그를 포도나무로 비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후자의 번역을 선호하는 근거는 “무성한 가지”(또는 들 망아지)를 두 단어의 합성어 즉 ‘벤’(@B)(아이 또는 자손을 의미함) + ‘파라’(hr;P)(풍성하게 열매 맺음)로 해석하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같은 구절의 마지막 문장도 이와 같은 이미지를 받아들여서,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또는 “들 나귀가 언덕 위에 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요셉’을 들 망아지로 비유한 것은 그의 아들 ‘에브라임’(!yIr"p]a)에 대한 언어의 유희이거나(참고로 ‘에프라임’은 충성한 결실을 뜻함), 또는 이와 유사한 발음 ‘파라오’에 대한 언어의 유희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파라오’의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두 절(23-24절)은 ‘요셉’ 지파가 자신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3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23-24절)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학대”와 “적개심”이 <사사기>에서 다루고 있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만(삿 6:3), <구약> 어디에도 그 사건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은 ‘유대’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요셉’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숱하게 겪어야 했던 질시나 배척에 관한 비유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중상비방”(重傷誹謗)은 때로 화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렘 9:3, 8; 잠 25:18; 26:18-19).
이와 관련해서 ‘요셉’의 생애에 대해서 다시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르우벤’이나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축복의 예언 속에서도 그들의 생애에 대해서 49장 벽두서부터 비교적 길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면(참고. 1-3절), 이곳 예언의 말미에 ‘요셉’에 관해서 긴 지면을 할애한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적개심을 가지다”는 “복수하다”는 의미로서 이곳과 50:15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24절의 요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요셉’에 대한 공격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모호함이 있다 하겠는데, 이는 이 노래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그렇게 흔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활은 굳세며
그의 손과 팔은 민첩할 것이라
이와 같은 해석은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서, 드러내고 있는 이미지는 ‘요셉’이 그의 적들을 맞아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이미지가 그런대로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만, <창세기> 안에서 ‘요셉’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근거 없는 비난이나 공격에 대해서 이처럼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는 장면은 찾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 즉 ‘요셉’은 괴로움을 당하나 정작 그를 괴롭히는 자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다 적절한 이미지는 이 문장 속의 대명사 “그”가 ‘요셉’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공격하고 있는 궁수(弓手)들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활이 굳세다”는 그 궁수의 지치지 않는 용기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그 유연함을 잃다”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즉 활이 그 탄력을 잃을 정도로 공격이 치열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초기 <칠십인역>에서도 활은 ‘요셉’의 활이 아니라 그의 대적자들의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활은 단단해져 부러져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든, 이곳에서도 ‘요셉’의 이름에 대한 언어의 유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지파에서 이와 같은 단어의 유희를 발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참고. 8, 13, 16, 19절), ‘요셉’에 대한 예언에서는 간과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민첩하다”의 발음이 ‘요셉’과 비슷하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24절 하반에 등장하는 “야곱의 전능자”는 오랜 전부터 사용해 왔던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참고. 시 132:2, 5; 사 49:26; 60:16), 이와 곧바로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호칭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는 다소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야곱의 전능자”에 대한 시적 유사반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개역성경>과 <개역개정성경>만 해도 번역이 전혀 다릅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개역>)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개역개정>)
우리가 어떤 번역을 취하든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는 서로 다른 두 호칭 즉 “이스라엘의 반석”(삼하 23:3; 사 30:29)과 “이스라엘의 목자”(시 80:1)를 합성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는 이 표현은 ‘벧엘’에서 ‘야곱’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그가 ‘하란’으로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를 인도하고 보호해주었던 하나님을 기념하여 ‘벧엘’에 세운 기념비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28:10-22; 35:1-15).
25-26절은 ‘요셉’에 관한 마지막 축복의 예언으로서, 내용상 앞선 두 절(23-24절)의 반복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25-26절)
25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두 호칭, “네 아버지의 하나님”과 “전능자”(yD'v, 샤다이)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전능자 하나님”(엘 샤다이)를 시적 유사반복을 위해서 두 행에 걸쳐서 분리해서 부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능자 하나님”을 두 행으로 분리해서 부르고 있는 곳은 본문 외에도 몇 번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참고. 민 24:4, 16; 욥 8:3, 5).
<창세기>는 “전능자 하나님”을 ‘야곱’의 생애와 관련해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데(참고. 28:3; 35:11; 43:14; 48:3), 이곳에서 ‘야곱’의 축복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와 연계해서 사용하고 있는 점은 나름대로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축복”은 족장 언약의 핵심 단어로서, <창세기>에서만 무려 88여 회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두 절은 마치 불꽃놀이의 대미(大尾)를 보는 것처럼 “축복”과 관련한 단어의 어근을 여섯 번이나 펼쳐 드러내면서(동사 한 번, 명사 다섯 번), ‘야곱’의 축복은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축복은 그동안 ‘야곱’이 경험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고 초월하는 그런 것들이 될 것입니다.
축복의 내용은 인간의 그 모든 활동 영역를 망라하는 것으로서, 이 모두 하나님의 호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하늘”(!yIm'v, 샤마임)로부터 비가 내리고, “깊은 샘”(!/hT, 테훔)에서 솟아나는 물은 땅을 촉촉이 적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할 것이며(3:17-19), 여인의 “태”(!j'r, 라함)와 “가슴”(dv, 샤다임)은 다산(多産)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대조 3:16). 위에서 보듯이 흥미롭게도 25절에서 풍요와 다산의 축복과 관련해서 동원하고 있는 네 단어, “하늘”과 “깊은 샘”과 “태”(자궁)와 “젖먹이”(유방)는 모두 두운법(頭韻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서 화자는 남성과 여성의 활동 영역을 균형 있게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녀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완벽하고 총체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애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에 집착하며 살아온 ‘야곱’이 이제 이 장면에서 자신이 누렸던 그 축복에 대해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토록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제 아들 ‘요셉’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는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 즉 구별된 자(ryzIn, 나시르)로 부르고 있습니다. 유사한 표현이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신 33:16; 애 4:7).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요셉’ 지파에서 왕이 배출된 적은 없으므로, 따라서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로 부르는 것은 ‘요셉’ 개인에 대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자였습니다. ‘이집트’에서만 하더라도 그는 분명 그 땅의 통치자였습니다.
베냐민. 이제 마지막으로, 간략하나마 막내아들 ‘베냐민’에 관한 예언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27절)
하지만 그에 관한 예언은 그동안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알고 있는 ‘베냐민’에 관한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놀라울 정도의 대조적인 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이복형들 틈에서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했던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그를 지금 이곳에서 “물어뜯는 이리”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사기>에서 그리고 있는 ‘베냐민’ 지파의 군사적 행동을 예견한 듯한 예언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기>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사 ‘예후’가 이스라엘을 ‘모압’족으로부터 구원하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으며(삿 3:15-30), 같은 책에서 ‘시세라’와의 전투에 ‘베냐민’ 지파가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가 하면(삿 5:14), ‘기브아’에서는 오히려 다른 지파들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이스라엘을 내전 상태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삿 19-21).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베냐민’ 출신입니다(삼상 10-14). 하지만 이 구절에서 왕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구절의 전승은 아마도 이스라엘 왕국 출현보다 더 이전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화자 자신의 추가적인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야곱’의 언약으로서, 내용인 즉은 미래에 관한 ‘야곱’의 예언을 재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8절)
즉 ‘야곱’은 처음부터 자식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는 말로 임종 예언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1절). 축복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열두 지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임종과 유언. 49장의 나머지 다섯 절(29-33절)은 ‘야곱’의 임종과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입니다. 유언의 주된 관심사는 “그 땅”에 관한 것입니다.
29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29-32절)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서 예언했던 그가 이제 다시 한 번 자신의 매장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매장지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이로써 세 번째입니다(47:29-31; 48:21-22).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가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확신시켜주신 바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46:4). 이 약속의 절반은 이미 성취되었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 즉 ‘요셉’이 이제 곧 자신의 눈을 감길 것인 즉, 남은 관심사는 그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족장의 매장지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법적 권리를 강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23:17-20; 25:9-10; 50:13).
하지만 ‘야곱’이 그곳에 묻히고 싶은 것은 단순히 법적인 권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감상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즉 그곳에는 그의 아내 ‘레아’가 묻혀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31절하). ‘레아’는 여섯 아들의 어머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이 이곳에 묻혀있다는 말은 앞 이야기를 통해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레아’와 ‘리브가’도 함께 묻혀있다는 언급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리브가’와 ‘레아’는 그들 생전에 가족 구성원간의 불화를 조장했던 인물이었는데도, ‘야곱’은 죽어 그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소회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는 가족 구성원간의 용서와 화해가 없이는 불가능함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장지에 관한 유언을 끝으로 ‘야곱’은 숨을 거둡니다. 화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언어의 유희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 발을 침상에) 모으다”(#s'a, 아사프)는 ‘요셉’에 대한 언어의 유희입니다.
‘요셉’과 ‘야곱’의 이별 장면은 <구약> 그 어디에도 비견되지 않은 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야곱 이야기>의 주된 흐름으로 일관해 왔던 두 사람의 간의 결속과 관계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이제 곧 열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보내면서 애곡하고 애통하는 장면은 단순히 이별을 슬퍼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 즉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6:4)라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앞으로 다른 모든 약속들도 분명하게 성취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장례와 애곡(50:2-3)
<구약>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방부 처리를 하는 이야기는 ‘야곱’과 ‘요셉’의 경우뿐입니다(26절). 그만큼 이 두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가 각별하다 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길고 복잡했습니다. 뇌와 내장과 피를 모두 들어내고, 그 속에 향을 넣고, 시신을 말린 다음, 헝겊이나 세마포를 쌉니다. 통상 이 과정은 일주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2그 수종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2-3절)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일이 사십일이나 걸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이후 칠십 일 동안 애곡 기간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백십 일이 걸린 셈인데, 연속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아론’과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이 삼십일을 애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민 20:29; 신 34:8), 사십일은 칠십일 속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4. 왕의 윤허(50:4-6)
‘이집트’의 장례 관례에 따른 모든 필요한 절차를 다 치른 후, ‘요셉’은 이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47:29-31), 즉 그를 ‘가나안’에 장사지내기 위한 절차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4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4-6절)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흥미롭게도 ‘요셉’의 태도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전에 그의 가족이 ‘고센’ 땅에 정착하는 문제를 놓고 ‘바로’ 왕과 직접 대화하고 요청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매우 정중하게, 그것도 직소(直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혹시 상중(喪中)이라 왕에게 직접 나가지 못하고 대신 사람을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에게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하고 애원하는 모습에서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여나 왕의 심기를 다치게 할까 보아서 그에게 전하는 말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즉 ‘야곱’이 그에게 당부했던 내용 중에서, “나를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47:30)는 말은 의도적으로 슬쩍 빼버립니다. 행여나 ‘이집트’에 대한 ‘요셉’ 자신의 충성심이나 헌신도를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신에 그는 ‘야곱’이 이전에 묘지를 이미 마련해두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장사지낸 후에 자신은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했던 그렇지 않던 그가 사용하고 용어, “올라가다”(hl;[, 알라)는 이곳 50장에서는 아주 핵심적인 단어로서(6, 7, 9, 14, 24-25절),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의 탈출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하겠습니다(예. 출 1:10). ‘야곱’이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 묻히고 싶다고 고집한 것도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나안’으로 향으로 ‘야곱’의 장례 행렬은 이스라엘의 미래 “출애굽” 사건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50:24-25; 출 13:19).
5. 야곱의 매장지(50:7-14)
장례 행렬은 귀인의 장례답게 장엄하고 거창합니다. 마치 죽은 왕을 위한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장례식 중에서 가장 거창한 것입니다. 하기야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창세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로서의 그의 위상을 놓고 볼 때, 이와 같은 대우는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7-14절)
그를 위하여 동원되고 있는 사람들과 가축들과 그리고 군마와 마병들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의 모든 신하”; “바로 궁의 원로들”; “애굽의 모든 원로”; “요셉의 온 형제들과 그의 집”; “병거와 기병.” 흥미롭게도 이든 대부분의 단어들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예. 출 10:7; 11:3; 10:9-10, 24; 14:9, 17-20; 12:38). 다만 한 가지 지금과 그 때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온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렬을 돕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어린 아이들은 여전히 ‘고센’ 땅에 남아 ‘이집트’의 보호 아래 있지만, 그날에는 이 상황이 완전히 역전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온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탈출을 반대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녀들이 함께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요셉’은 약속대로 장례 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옵니다.
6. 요셉의 용서(50:15-21)
이어지는 장면은 <요셉 이야기>의 ‘휘날레’라고 부르는데, 내용으로 볼 때 그렇게 불러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야곱 이야기>를 일관되게 관통해 왔던 형제들의 갈등과 긴장이 마침내 이곳에서 완전히 해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15-21절)
이 대목은 <야곱 이야기>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였던 “용서”와 “대화합”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요셉’은 처음부터(45장 이후부터)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원했습니다만, 형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죄책감으로 늘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죽고 난 지금, 그들은 동생이 복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죄책감은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 날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아버지 ‘이삭’이 죽기를 기다렸던 것처럼(참고. 27:41), ‘요셉’ 역시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이곳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형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바 있기도 합니다(42:21-22).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가 죽고 난 지금 그들의 처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요셉’의 용서를 받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필사적이며 처절합니다. 우선 그들은 직접 동생에게 찾아가 자비를 구하기보다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자신들의 심정을 전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을 들먹입니다. 즉 아버지가 죽기 전에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을 용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용서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성경>에서 죄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핵심 단어들을 모두 동원하고 있습니다: “허물”; “죄”; “악.”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 아버지의 하나님처럼 행동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형들의 간청에 대한 ‘요셉’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울었다”입니다. 그가 운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만(참고. 42:24; 43:30; 45:14-15), 지금 흘리는 눈물에 무슨 각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형들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 용서를 구하고 있기 때문일까? 형들이 가지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가 복수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버지의 유언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지난 시절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기억이 살아났기 때문일까? 그 형들이 지금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나간 그 모진 세월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 눈물은 ‘요셉’이 아니라 이들 형들이 흘려야 할 눈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회오(悔悟)와 참회의 눈물 말입니다.
보냈던 사람이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형들은 이제 ‘요셉’ 앞에 직접 나아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왕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18절).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참고. 37:7, 9, 42:6; 43:26, 28). ‘유다’는 처음 ‘요셉’ 앞에 끌려 왔을 때,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44:16).
‘요셉’은 다시 한 번 이들을 안심시키며, 이전에 그가 처음 자신을 드러내면서 했던 말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참고. 45:5-11). 쓸데없는 걱정 말라는 것이지요. ‘야곱’이 ‘이집트’에 오기 전에 그들에게 했던 약속을 이번에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심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 말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까지 맡아 길러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제 마침내 이야기는 결말에 이릅니다. 내용은 ‘요셉’의 여생과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언급으로 <창세기>는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대단원의 결말이자, 미완의 결말이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서곡이기도 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22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22-26절)
7. 요셉의 최후(50:22-26)
<창세기>의 마지막 단락은 ‘요셉’의 여생에 관한 간략한 기록과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먼저 ‘요셉’의 일생에 관한 간략한 기술은 그 형식에 있어 ‘야곱’에 관한 기술과 짝을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22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37:1)
이렇게 볼 때 22절은 우연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편집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나이 “백십 세”는 이집트에서는 이상적인 나이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라는 표현은 단순히 ‘요셉’에 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전체 족장 이야기의 마무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장면은 모든 가족의 화해와 타협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불화 가운데 헤어져야 했으며,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역시 평생을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가족 간의 불화와 분열로 말할 것 같으면 앞의 두 경우보다 훨씬 더 심했을 텐데도, 결국에는 하나의 가족으로 연합하고 일치하여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 삼자의 중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뉘우침과 피해자의 용서를 통해서 내적 변화가 이 모든 연합과 일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백십 세까지 살았습니다(수 24:29). 혹자는 ‘요셉’의 나이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즉 각 족장의 나이를 추적해 보면 흥미로운 한 가지 패턴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브라함’의 나이는 175세(= 7 x 52), ‘이삭’은 187세(= 5 x 62), ‘야곱’은 147세(= 3 x 72), 그리고 ‘요셉’은 110세(= 1 x (52 + 62 + 72))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은 (7, 5, 3, 1)로 이루어진 패턴의 계승자이자, (52 + 62 + 72)의 합에 해당하는 나이를 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숫자가 어떤 의미를 갖든 손자와 증손자를 보면서 오래 살았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함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가 의미하는 바는 ‘에브라임’을 포함한 3대,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증손자까지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요셉’의 스라에서 양육되었다는 말은 ‘요셉’의 양자로 입양되었음을 의미합니다(참고. 30:3). ‘마길’은 ‘므낫세’ 지파의 일원으로서(대상 7:14-17), <사사기>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지파이기도 합니다(삿 5:14).
한 족장의 최후의 관심사는 항상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습니다. ‘요셉’ 역시 그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약속의 성취에 관한 언급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음을 봅니다(참고. 24:1-7; 28:1-4; 47:29-31)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4-25절)
이 두 구절의 기능은 이중적입니다. 한 편으로 <족장 이야기>의 주제를 마감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남은 후손이 그의 유해를 훗날 그 땅에 묻어달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있습니다(참고. 출 13:19). 여기서 “그의 형제들”이나 “이스라엘 자손”은 넓은 의미에서 ‘요셉’의 친척들이거나 후손들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형들이 그보다 더 오래 살 수는 없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최종 구절은 다른 <족장 이야기>의 마지막과 특이하게도 다른 장면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남은 자들이 유언대로 약속을 실천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후손들이 그의 유골을 이집트에서 입관하였다는 언급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26절)
여기서 관(棺)에 대한 언급은 <구약>을 통 털어 이곳이 유일한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야기는 이것으로 결말이자 동시에 미완(未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장면은 ‘요셉’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출 1:3).
교훈과 적용
1. 임종 유언(1)-위대한 유산
어느 새 내 나이 환갑도 훌쩍 지나 예순 셋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들어 부쩍 은퇴 후의 삶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한 번은 먼저 은퇴한 교수 한 분을 우연히 만나, 퇴직을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물었더니 지금부터 잘 노는 연습부터 하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다른 취미나 특기가 없는 나로서는 이분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장수(長壽)가 축복이라고 합니다만, 나로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장수하면 뭐합니까! 딱히 소일거리가 없고, 또 있다 해도 함께 할 가까운 친구가 없다면 장수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부터 가볍게라도 만나 시간 보낼 수 있는 친구관계라도 많이 만들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만, 생각대로 될지 의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어왔습니다만, 친구로서 관계 맺은 경우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대학교 교수라는 직업이 사람들을 만나고 상대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만, 주로 만나는 대상은 학생들로서 그들은 가르치는 대상이었지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집사로 지내던 시절, 남전도회 활동 등을 통해서 믿음의 친구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내 관심사는 항상 청년이나 학생이었고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동료 집사님들이나 장로님들과의 교제는 자연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난 뒤에는 교회에서 나는 더욱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역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교인들과 친구로서 교제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점차 내 혼자만의 세계에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내가 은퇴 이후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요즘 들어 하루에 적어도 한 두 번은 꼭 이런 생각에 빠져 지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무엇을 하며 여생을 보내야 하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성경>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사도가 처형당하기 전에 마지막 2년을 ‘로마’에 있는 한 집에 가택 연금 상태로 있으면서 어떻게 여생을 보냈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가 머무는 곳이 교회였고, 그 자신이 곧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 이거야! 여기에 길이 있었구나. 나도 여생을 이렇게 보내면 되겠구나.”
나는 지금 마음에도 없는 괜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거룩한 척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정말 이 두 구절에서 큰 감명과 위안을 받았습니다. 나는 휴대폰 메모 수첩 속에 기도 제목 네 가지를 입력해 두었습니다. 이 중 첫 번째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로부터 영감(靈感)받은 것입니다. 즉 내가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교회가 되고, 내가 곧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일이 내 소명이자 내가 받은 은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야곱의 여생. ‘고센’에서 보낸 ‘야곱’의 여생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30 년 동안 ‘가나안’과 ‘하란’에서 살았던 그 치열했던 세월에 비교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속이고, 속고, 도망치고, 쫓고,... 경계심과 긴장을 한 번도 늦출 새도 없이 살아온 그가 이처럼 편안한 나날을 보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주변에 그를 속이고 괴롭히는 자도 없고, 아들과 딸들, 손자와 손녀들이 한 마을에 모여 풍요롭고,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특별히 바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은퇴 이후의 삶이 모두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주변에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없다는 것만 빼고 나면 완벽한 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은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주님, 그저 이 행복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 만을 바랄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여생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면, 그를 “살아있는 교회”로 부르기에는 어딘가 미진(未盡)한 부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법! 그의 육체는 이제 몰라볼 정도로 수척하고 쇠약해져서 침상에서 앉고 서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병까지 얻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수도(首都) ‘라암셋’에 있는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소식을 전하기에 이릅니다. 이번에는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이전에 ‘야곱’이 이들 손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요셉’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은 아마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맞이하는 이스라엘. 주변에 근심스런 눈빛으로 둘러 앉아 있는 자식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안간 힘을 쓰며 겨우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앉기는 했지만 손과 발은 떨리고 있으며, 눈마저 쇠약해져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더 이상 이 노인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물려줄 유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물려줄 유산은 대기업의 회장님이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회사가 아닙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물려주는 파탄 직전의 나라도 아닙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이 그의 아들 목사에게 물려주는 담임목회자 자리도 아닙니다. ‘야곱’이 남겨줄 유산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는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의 순서를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의 유산. 왜 이 장면이 ‘야곱’의 생애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하는 것일까? 교회는 실은 아무 수식어가 필요 없는 단어입니다. 그 모든 좋은 수식어를 다 함축하고 있는 존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교회”를 굳이 정의해 보자면, 그 반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죽어서 말하지 못하는 교회”의 반대가 “살아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교회”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야곱’이 마지막 안간 힘을 쏟으며 자식에게 남겨주려는 유산이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죽으면서 영원히 남겨놓은 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의 이름은 한 나라와 한 민족과 교회의 이름이 되어 그날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야곱’의 혈연의 후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새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기에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아닙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래서일까? ‘야곱’은 지금 ‘이스라엘’보다 더 중요한 한 이름,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간증은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3절);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절).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처음 하나님을 입에 올린 것은 앞을 잘 못 보는 아버지를 속일 때였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라”(27:20). ‘야곱’이 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벧엘’에서 꿈을 꾸고 난 후였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회고 한 바 있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6-17). 그리고 그로부터 두 장(章) 뒤에 아내 ‘라헬’이 자식이 낳지 못하여 그에게 투정을 부리자 화를 불같이 내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30:2).
이처럼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한다 해서,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를 가든 늘 함께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더 많이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언제까지 이런 모습, 즉 ‘야곱’으로 살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마침내 변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식에게 들려주고 있는 마지막 고백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의 유산.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물려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 즉 보배는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식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유산인 것이지요.
내 휴대폰 메모 수첩 속에 입력해 둔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바로 이 유산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겨놓으신 유산 중에 일억 원의 장학 기금이 있습니다. 평생 정부 도정업(搗精業)을 하시면서 푼푼히 모아두신 것인데, 당신의 고향 출신 자녀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장학금으로 쓰라고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네 형제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지금까지 계속 그 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도 두 아들과 두 며느리와 마주 앉아 내 두 번째 기도제목을 나누려 합니다. 내 아버지 즉 그들의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무엇을 남기셨으며, 나는 또 그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그리고 그들은 또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특별히 물려줄 재산도 없고, 또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기에,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서 선교나 장학 재단을 설립하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재단 이름도 하나 정해두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유산입니다. 덧붙여 자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기금을 계속 늘리면서 사업을 지속하고 확대해가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내가 그들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간증은 무엇인가? 우리교회는 미래의 신입회원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나를 본받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이 교회가 계속 존속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자랑할 만 한 전통이나 유산은 무엇일까?
2. 임종 유언(II)-위대한 예언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우스>에 ‘테베’(Thebes)의 눈먼 예언자 ‘테레시아스’(Tiresias)가 등장합니다. ‘트로이’에서 고향 ‘이타카’(Ithaca)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는 죽음의 땅에서 ‘테레시아스’를 만나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묻습니다. ‘테레시아스’는 그에게 몇 가지 예언을 들려줍니다. ‘포세이돈’이 ‘폴리페무스’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라는 사실과,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말 것과, 태양의 신 ‘헬리오스’(Helios)의 섬에서 그의 짐승들을 먹지 말 것 등입니다.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은 선원들은 모두 전멸하고 오직 ‘오디세우스’만 살아남습니다. ‘테레시아스’의 예언은 적중했으며, 그의 다른 예언들도 모두 적중했습니다. 그는 비록 눈은 멀었지만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래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미래의 일을 어떻게 그처럼 정확하게 알아맞힐 수 있었을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모두가 볼 수 있는 그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전’이란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나는 무엇을 봅니까? 나는 남이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오히려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마음이 너무 많은 일로 분산되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 신화>에 ‘테레시아스’가 있다면, <창세기> 48-49장에는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 역시 인생 만년에 이르렀고, 나이 147에 임종 직전에 와있습니다. 이제 시력(視力)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왔으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48:10). 직역하자면 그가 두 손자를 알아보는데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 역시 그의 아버지 ‘이삭’의 만년과 너무나 흡사한 과정을 겪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야곱’은 시력은 잃었지만, 시력을 가진 자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미래였습니다. 그도 ‘테레시아스’처럼 미래를 볼 수 있었으며,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고 증거 할 수 있는 예지력(叡智力)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이야기는 ‘야곱’의 위대한 유산에 이어 위대한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의 미래에 관한 예언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야곱’의 예언은 두 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예언의 대상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긴 신탁(神託)이 49장에,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관한 짧은 신탁이 48장에 각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스라엘의 지파 수를 열둘이라고 합니다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열세 지파입니다. ‘요셉’을 포함해서 ‘야곱’의 아들은 모두 열둘입니다만, ‘요셉’ 대신에 그의 두 아들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 자신은 열두 지파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두 아들을 통해서 사실상 모든 명예와 영광을 다 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땅을 기업으로 물러 받은 지파만을 놓고 볼 때는 ‘레위’ 지파가 제외되므로, 지파의 수는 열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할 것입니다. 참고로 ‘레위’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관한 ‘야곱’의 예언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다른 자식들을 위한 예언에 비해 아주 각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할까? 첫째, 그의 예언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축도”(祝禱)라는 점에서 아주 각별합니다. 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위한 기도 중에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15절).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강력한 믿음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도 ‘야곱’이 믿음으로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1:21상).
둘째, ‘야곱’의 예언은 그 속에 공식 “입양”(入養) 절차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각별합니다: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16절). 여기서 입양이라 함은 아들로 입양한다는 의미이며, 이 절차를 통해서 이들은 정식 상속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절차는 이전에 ‘야곱’이 ‘요셉’에게 이미 약속했던 사항이기도 합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5-6절).
셋째, ‘야곱’의 예언은 축도 속에 “번성”(繁盛)에 관한 약속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합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6절). “번성”은 “족장 언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으며(12:2; 15:5; 17:2; 22:17), ‘아브라함’의 임종 시에 ‘이삭’에게 재확인하셨으며(26:4), 이후 ‘벧엘’에서 ‘야곱’에게 거듭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28:14).
이처럼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도”와 “입양”과 그리고 “번성”에 대한 약속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역대기>는 이 질문에 대해서 아주 흥미로운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역대기>가 선언하고 있는 바는, 즉 ‘요셉’의 두 아들이 ‘야곱’의 장자 ‘르우벤’을 제치고 “장자권”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선언과 부합하는 내용은 <창세기>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고 있는 장면은 ‘이삭’이 장자 ‘에서’를 제치고 둘째 아들 ‘야곱’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전수(傳受)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에브라임이 먼저. 하지만 두 아들 모두가 장자권을 물려받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부분이 ‘야곱’ 예언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눈 먼 아버지에게 데리고 올 때, 그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순서, 즉 큰 아들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 편에,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왼쪽 편에 앉게 합니다. 그의 의도대로라면 ‘야곱’은 양 팔을 곧바로 뻗어 두 아들을 축복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큰 아들에게 장자권이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팔을 엇갈리게 하여 그의 오른 팔이 ‘에브라임’을 향하게 하고, 왼 팔이 ‘므낫세’를 향하게 하여, 오히려 작은 아들에게 장자권이 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이를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의 기분은 편치 않았으며, 눈 먼 아버지가 실수한 줄 알고 바로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만류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19절).
지금 이 자리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야곱’이 지금 늙은이 특유의 옹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어지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하지요. 아닌 게 아니라 ‘야곱’의 아버지 ‘이삭’도 늘그막에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지 그는 작은 아들 ‘야곱’이 아니라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일견 ‘이삭’의 선택은 지극히 정당해 보입니다. 장자에게 장자권을 주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볼 때, ‘야곱’이나 ‘이삭’은 자신의 뜻을 기어코 관철시키려 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고집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삭’이 큰 아들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이고 외모중심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큰 아들에 대한 편애(偏愛)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가정적이며 나약해 보이는 작은 아들 ‘야곱’보다 남자답고 용맹스러운 큰 아들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고집은 하나님의 예언조차 무시할 정도였습니다. 일찍이 그의 아내 ‘리브가’가 뱃속에 ‘야곱’과 ‘이삭’을 잉태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25: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사코 큰 아들을 선택하려 했으며, 나중에 실수로 ‘야곱’에게 장자권을 물려주고 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와서 울며불며 하소연하자 그에게도 다시 복을 빌어줍니다(27:37-40). 이처럼 ‘이삭’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여 싸우려 했으나 결과는 실패였으며,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야곱’에게 속았다는 충격과 분노뿐이었습니다(참고. 28:33).
‘야곱’이 어찌 이 사건을 기억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적어도 장자 권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으리라는 다짐을 수없이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 당연히 장자 권은 장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택의 순간에 작은 아들에게 장자 권을 빌어줍니다. 하지만 그의 완고함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른 완고함이고 고집불통이었다고 본인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20절). <히브리서>도 같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을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그렇습니다. ‘야곱’의 선택은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 시절의 ‘이삭’은 유순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질은 점차 완고해져갔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나이는 오히려 어려지고 유치해져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야곱’은 인생 대부분을 자신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에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만, 만년(晩年)에 이르러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성숙에 이르게 되고, 임종의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철들자 환갑이라”는 우리 네 경구가 그에게 꼭 들어맞는다 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나이는 지금 얼마쯤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로. ‘이삭’이 자기의 뜻을 따라 큰 아들 대신 작은 아들을 선택한 것이나,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큰 아들 대신에 작은 아들을 선택한 것이나, 선택은 선택받는 자의 행위가 하니라 전적으로 선택하는 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아버지의 축복을 원했다면 차라리 형이 먹을 죽 속에 독극물을 넣어 그를 독살해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몰래,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켰습니다. 하나님이 단 한 순간도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는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15-16절상).
그렇습니다. 그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인 즉은 그 모든 일의 깊은 근원에는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나 ‘야곱’이 누구를 더 좋아하든, 어떤 의도이든, 그리고 그 결과가 의도했던 대로 드러나든 않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들을 합력시켜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됨.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을 물려받았을 때 이처럼 겸손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에브라임’이 형을 제치고 장자권을 받았을 때도 이처럼 겸손했을까요? 두 사람 다 나중 된 자들이 아닙니까!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의 선택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복음일 뿐만 아니라, 그 선택이 나이와 순서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요셉’이 장자라서 대국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장자라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장자였습니까? ‘다윗’은 어떻습니까? ‘르우벤’은 장자라서 큰 축복을 받았습니까? 모두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를 제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은 이 모든 자질구레 한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내가 너무 늙어서, 내가 너무 무식해서, 내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선택이 장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우습게 아는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3. 임종 유언(III)-위대한 중보
“사제” 또는 “제사장”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는 ‘폰티펙스’(pontifex)인데, 본래 뜻은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잭 헤이포드’,「경배」조이선교회출판부. 112쪽.
사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역할은 정확하게 이와 같은 것입니다. 즉 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단순히 한 개인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도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출 19:6상).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 말은 지금 ‘야곱’은 선지자이자, 제사장으로서 아들 ‘요셉’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향한 축복의 예언을 들려주었으니, 이제 ‘요셉’을 포함한 자신의 열두 아들에게도 들려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요셉’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일러두어야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가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가나안’의 ‘세겜’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땅을 특별히 ‘요셉’에게 선물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요셉’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실은 ‘요셉’에게는 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야곱’이 ‘요셉’에게 들려준 말입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21절). 특히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유언은 그가 평생 살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간증이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동행은 중심 사상을 이루고 있음을 압니다. 오래 전 형을 피해 집을 떠나 ‘벧엘’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이 이와 같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28:15).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 ‘하란’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서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하신 말씀도 동일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1:3). 그리고 바로 두 절 뒤에 ‘야곱’ 자신도 그의 두 아내에게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느니라”(31:5). 그리고 ‘세겜’에서 딸 ‘디나’의 일로 온 가족이 큰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식들과 함께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자고 하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35:3).
이처럼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은 공기나 햇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분과의 동행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습관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이 마지막 순간에 자식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48:21). 이 마지막 간증은 간증이라기보다는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원하는 축도나 중보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의 임재를 확인시켜주셨고, ‘야곱’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결코 공허한 약속이 아님을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제 그 체험을 아들에게 전수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1:3).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31:5; 35:3).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48:21).
이들 약속을 이처럼 펼쳐 놓았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해 달리는 열차와도 같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시간의 굴레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마치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나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개개 풍경의 연속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다면 나는 전체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풍경들이 한 폭의 그림 속에 다 들어와 있는 형국인 것이지요.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시간의 창조주께서 시간 밖에 계시므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과연 그분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 끝 날까지 인류와 함께 계실 것인가?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없을까? 이것은 과연 참담한 질문인가?
‘아브라함’이 죽을 때 ‘이삭’이 곁에 있었고, ‘이삭’이 죽을 때 ‘야곱’이 침상 머리에 있었으며, ‘야곱’이 죽을 때는 ‘요셉’이 침상 곁에 있었으며, ‘요셉’이 죽을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족장들을 통해 이어갔습니다. 족장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신실하실 수 있도록 힘써 도왔다고 말한다면 참담한 말이 될까요?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는 누가 곁에 있었습니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울’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가 알고 있었던 모르고 있었던 간에 ‘스테반’은 제사장의 직책을 그에게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즉 ‘스테반’은 ‘사울’을 복음의 후계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훗날 ‘사울’은 사도가 되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엘리야’가 죽을 때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뒤를 이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여줄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세상과 함께 계시도록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교회, 즉 <우리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마 28:19)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있기는 합니다. 나는 빠지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면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는 그 나라에 합당치 못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대단히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 열 명 중에 여덟 명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통계 조사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당부와 명령에 대해서 거의 요동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아주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사업가의 좌우명은 이런 것입니다: “줄 돈은 잊어버리고 받을 돈만 기억하자.” 이런 기업가 정신으로 사업을 하면 세상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당대에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많은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난과 욕설을 퍼부어댑니다. “도대체 기업이 사회에 대해서 빚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기업주가 이런 식의 질문을 그가 속한 사회에 대고 던진다면 그는 필경 뭇매를 맞아 맞아 만신창이 될 것이 뻔합니다. 그 기업 제품 불매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입니다. 과연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합니까?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복음에 빚진 자”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말입니까? ‘스데반’이 아닐까요? 신약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너무 많은 빚을 안고 있습니다. 처음 복음의 빛이 이스라엘에 비추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먼저 이방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교회는 이스라엘에 빚진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이었고, 사도들 역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 13:8).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9). 나는 누구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기도합시다.
4. 임종 유언(IV)-나중 될 자, 르우벤
나는 여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두 누나와 형님 한 분을 두었으니 남자로 치면 차남인 셈입니다. 여섯 명 중의 넷째 정도 되면 집안에서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적에 장남에 대한 심한 투기와 반항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 부모님께서 너무 형만 싸고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나 친척들도 항상 내 형에게만 관심을 쏟지 나에게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내 어머니를 부를 때조차도, 장남의 어머니로 부르지 나의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 것도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습니다. 장차 애를 낳게 되면 절대 장자는 낳지 않고 차남부터 낳겠다고 말입니다.
장자의 특권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러 했을진대 이스라엘에서야 오죽 했겠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적자(嫡子) 중의 적자를 꼽으라면 단연 ‘르우벤’입니다. 그는 ‘야곱’의 첫 번째 아내 ‘레아’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면서, 동시에 열두 아들 중의 장남이기도 합니다. 당시 장남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은 각별했으며, 유산 분배만 하더라도 나머지 형제들이 물려받는 것보다 갑절을 더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직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잘났건 못났건 상관이 없습니다. 이삭’이 그랬고, ‘야곱’도 그랬습니다. 물론 그는 첫째는 아니었습니다만 야비한 속임수로 그것을 형으로부터 탈취했습니다.
출생의 특권. 그리고 이제 ‘르우벤’이 장자(長子)의 특권을 물려받게 될 참입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어떤 모습일지. 설마 빨리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누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탕한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나누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런 관습법에 의거해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아버지가 죽고 나면 대부분 형에게 유산이 다 돌아갈 터이니, 그전에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미리 챙겨두어야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장자의 특권은 단순히 물질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의 특권은 영적인 특권까지도 망라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자의 영적인 특권을 이스라엘이 이방족속에 대해서 가지는 특권으로까지 확대해석했습니다. 과연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동료 이스라엘이 거절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이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이스라엘은 “먼저 된 자”였으며, 이방인은 “나중 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택한 족속이었으며, 열방에 대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었습니다(출 19:6).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의 절규를 들어볼까요?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롬 3:1)
장자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이 무엇이냐는 절규입니다. 그는 대답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입니까! 비록 오늘날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불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순전히 혈통에 따른 특권입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그 모든 특권과 약속을 가지고 태어나며, 심지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마저 그들의 혈족입니다. 혈통으로 말하자면 이에 버금가는 혈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독교인 부모를 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모태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나가고,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인 친구들과 교제하며, 기독교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 등 말입니다. 다른 세상적인 축복은 이에 비하면 정말 초라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 영적 축복은 그 자체로써 영혼의 구원을 담보해 주지는 못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으며,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영원한 저주에 빠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어도 영생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생을 끝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대 교단 중의 하나인 한 장로교단이 2009년 말 현재 전체 280만 교인 중에 대학․청년부 소속 교인이 16만 명 즉 5.8%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그런대로 교회 출석은 빠짐없이 했습니다만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거의 90% 이상이 교회를 떠난 결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나갔다는 한 대학생이 나와 <성경> 공부에서 만나고 있는데, 아직까지 교회의 의미, 교회 출석하는 의미, 더 나아가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아직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출생이나 혈통의 특권은 그 자체로써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함을 반증해 주는 사례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 자체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복음의 능력과는 거리가 한 참 먼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지적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탁월한 인생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무난한 삶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흥분된 삶 말입니다.
상실한 특권. ‘르우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야곱’은 그가 출생의 특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라”(4절). 하지만 그의 출발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형제들을 압도하였다고 ‘야곱’은 말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3절). 슬프게도 그의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이 미약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기막힌 언어의 유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가 이런 식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적어도 표면상 드러난 이유만 보자면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반인륜적인 죄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간통을 저지른 죄를 말합니다(참고. 창 35:22). ‘야곱’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절하).
‘르우벤’의 편에서 보자면 한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하고 저지른 실수였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애비는 이 일을 한 평생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치심과 모멸감과 분노가 얼마나 깊었으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이 순간까지 기억해 두었다가 옛날 그 일을 문제 삼아 장자의 특권을 빼앗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범죄는 단 한 번에 그치긴 했어도 치명적인 범죄였습니다. 따라서 설령 그가 훗날 거듭나고, 아버지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해도, 죄의 결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요?
단 한 번의 범죄로 자신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두고두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은 ‘르우벤’이 유일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아담’과 ‘하와’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했던 장본인들입니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범죄, 즉 하나님에 대한 반역죄로 그들이 누리던 그 모든 특권들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포함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범죄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모든 인류에게 항구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한 개인의 범죄에 대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워두신 것처럼 보입니다. 다소 완화된 형태이긴 하나 십계명에서 그 원칙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오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의 교훈을 떠올리게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네 구원을 이루라”(빌 2:12하).
하지만 <에스겔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다시 말하자면 한 개인의 범죄는 그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지 연대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르우벤’의 잘못을 그의 자자손손(子子孫孫)에 이르기까지 지우는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르우벤’의 잘못이 이것뿐이었을까? 단 한 번의 범죄뿐이었을까? ‘아담’과 ‘하와’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던 것일까? ‘에서’도 단 한 번의 실책으로 그 모든 장자의 특권을 영원히 상실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들은(백번 양보해서 실수라고 치더라도) 실은 그보다 더 심각한 원인의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 모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일까요?
<잠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기서 “경외하다”는 “두려워하다” 또는 “어렵게 여기다”를 의미합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자세가 없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 대상이 육신의 아버지이든 하나님이든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는 ‘에서’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히 12:16하). 또 ‘야곱’은 장자 ‘르우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49:4상). 두 사라 모두 마치 끓는 물처럼 늘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으며, 즉흥적이며, 항상 말초적이며 본능이 가는대로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러니 가치관의 혼란 속에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예컨대, 그들은 이빨을 먼저 닦고 밥을 먹었습니다. 겉옷을 먼저 입고 내의를 입었습니다. 머리를 먼저 감고 염색약을 발랐습니다. 반찬을 먼저 다 먹고 밥을 먹었습니다. 하루가 다 지난 후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졸리는 눈으로 잠시 <성경>을 읽습니다. 결국 이들의 장자 명분은 하나님께서 뺏기 전에 이미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먼저 될 나중 된 자. 과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 털어 ‘르우벤’ 지파에서 왕이나 선지자나 사사가 나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 땅을 점령해 갈 때, ‘르우벤’ 지파는 장자의 체통을 벗어던지고 ‘요단’ 동편에 그냥 주저앉아 살겠다고 간청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너무 기막히게 좋아보였던 것이지요. ‘롯’이 바라보던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위어스비’ 목사님은 ‘르우벤’ 지파를 “경계선 신자”로 칭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 교회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늘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경계 선상에서 살고 싶어했으니까 말입니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일찍이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습니다.
적어도 ‘르우벤’의 나중과 관련해서 더 이상 보탤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는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이 미약하였습니다. 처음 되었으나 나중 된 자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던 한 무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굽니까?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렇습니다. 나중 된 “우리”입니다. 나중 되었으나 처음 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자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18-21)
5. 임종 유언(V)-난형난제, 시므온과 레위
후한(後漢) 말의 학자 진식(陳寔)은 덕망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두 아들 진기(陳紀), 진심(陳諶)과 더불어 세 군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기의 아들 진군(陳群)도 역시 뛰어난 수재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진군이 어렸을 때 어느 날 진심의 아들 진충(陳忠)과 놀다가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논하였는데 서로 자기 아버지가 낫다고 하여 결말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물으니, “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아우가 낫다고 하기도 어렵구나.”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습니다. 난형난제(難兄難弟)는 바로 이 일화에서 유래한 고사성어(故事成語)입니다.
만일 후대 사람들이 ‘야곱’에게 ‘시므온’와 ‘레위’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탁월한가라고 물었더라면, ‘야곱’ 역시 진식과 동일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탁월함은 진기나 진심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폭력과 배반의 명수(名手)라는 점에서 난형난제였습니다.
원래 형제란 서로 의지하고, 어려울 때 힘을 합쳐 이를 극복해 가는 등 상부상조의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사악하고 못된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조장함으로써, 서로를 파괴하고 파멸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자들입니다. 오죽 했으면 아버지가 마지막 임종 시에 덕담(德談)은 고사하고 유언이라고 내놓은 말이 비난과 저주 일색이었겠습니까!
폭력과 배신. 애비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무슨 말입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로 그들은 폭력의 도구로다”(5절). 사악한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자식을 두고 이런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간혹 못된 자식을 둔 부모가 검찰에 자식을 고발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야곱’은 온 세상을 향해서 두 아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있는 듯합니다. 검사의 논고보다 더 지독한 판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들 형제가 아버지로부터 이와 같은 고발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맏형 ‘르우벤’처럼 씻을 수 없는 과거의 범죄행적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직후 ‘세겜’에서 저질렀던 야만적인 폭력과 가증스러운 배신의 행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무시무시한 살육(殺戮) 잔치에 원인을 제공한 자는 물론 ‘세겜’ 족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누이동생 ‘디나’를 겁탈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디나’가 먼저 그 자를 유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성폭력은 큰 죄악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죄악은 훗날 ‘다윗’의 아들 ‘암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가볍다 할 수 있겠습니다.
‘암논’은 그의 배다른 누이 ‘다말’을 흠모하여 그녀와 억지로 잠자리를 함께 하였으나, 사후에 곧바로 그녀를 집밖으로 내쫓아버립니다. 이런 그의 행위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일어나 가라하니”(삼하 13:15). 하지만 ‘세겜’은 달랐습니다. 그는 ‘디나’를 정말 사랑했으며, 자신의 잘못에 다소 무감각했던 것은 사실이나 ‘디나’와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야곱’에게 와서 결혼 승낙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들은 혼수와 예물은 물론 두 족속 간에 통혼(通婚)하며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자는 제의도 했습니다(참고. 34:8-12).
‘시므온’과 ‘레위’의 사악함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가나안’의 ‘세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악함입니다. 자신들의 누이가 겁탈당한 것에 심한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그들은 곧바로 복수를 계획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세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34:14-17)
이들 형제는 자신들의 복수극에 종교적 전통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다 전혀 지킬 의도가 없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종교를 살육과 배신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 동네를 도륙(屠戮)했으며, 그들의 재산과 가축까지 약탈했습니다. 나중에 이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4:31).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을 창녀처럼 취급하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화자는 이들의 행각을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25제 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34:25-29)
이들의 행동을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해 보자면, “기습”과 “살육”과 “노략질”에 더하여 “거짓”과 “배신” 등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세상을 향해서 저지른 행위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두 아들에게 그들의 행위가 “추악한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행위하고 질타한 바 있습니다(34:30).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당시 자신의 신변상의 안전만을 염려했던지 부랴부랴 온 가족을 데리고 ‘세겜’을 떠나 ‘벧엘’로 피신해 버렸습니다.
저주의 예언. 그랬던 그가 왜 지금 와서 지난 일을 꺼내고 있는 것일까? 아들의 범죄를 문제 삼으려 했다면 그 때 했어야지 왜 임종이 가까운 지금에 와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일까? 이제 아무 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이제 비로소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일까?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6-7절)
그의 유언은 두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심판과 예언입니다. 우선 심판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을 두 아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 심판입니다(6절). 이전에 그가 두 아들에 대해서 “추악한 냄새”가 난다고 질타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냄새나는 두 아들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또는 “내 호적에서 너희 놈들을 파내버리겠다” 등과 같은 저주에 가까운 선포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과연 어떤 부모가 범죄 한 자식에 대해서 이처럼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식을 더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예언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7절). 그의 예언은 마치 “바벨탑의 저주”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의 반역자들”에 대해서 혼돈과 무질서로 온 지상에 흩어버렸던 것처럼, 이 두 아들과 그 후손들도 약속의 땅에서 모여 살지 못하고 흩어져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실 악한 세력은 모이도록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범죄자가 감옥에서 출소하고 난 뒤에 개과천선(改過遷善) 하지 않고 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이전에 한 감방에서 사귄 동료 범죄자들로부터 배웠거나 또는 그들과 공모(共謀)한 결과입니다.
과연 ‘야곱’의 예언대로 이 두 지파는 그 땅에서 자신들의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시므온’의 경우 <여호수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9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수 19:1, 9)
즉 ‘시므온’은 다른 지파들처럼 자신들 만의 기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의 땅에 얹혀 사는 신세가 된 것이지요. <역대기>에서도 다시 한 번 이 점을 역사적 사실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대상 4:28-33). 그러나 <역대기>는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즉 ‘시므온’ 지파의 분화(分化)나 흩어짐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9그들이 그들의 양 떼를 위하여 목장을 구하고자 하여 골짜기 동쪽 그돌 지경에 이르러, 42또 시므온 자손 중에 오백 명이 이시의 아들 블라댜와 느아랴와 르바야와 웃시엘을 두목으로 삼고 세일 산으로 가서(대상 4:39, 42)
‘레위’ 지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땅에서 흩어져 살았으며, 아예 자신들의 기업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제사장 직분을 맡아 48개의 “레위 성읍”에만 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다윗’ 시대에 이르러 이 지파 역시 더욱 세분되어 각기 다른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예컨대, ‘다윗’은 삼십 세 이상의 ‘레위’인 삼만 팔천 명을 뽑아서, 이들 중 이만 사천은 성전에서 섬기게 하고, 육천은 관원과 재판장으로, 사천은 문지기로, 그리고 나머지 사천은 찬양대로 섬기게 했습니다(대상 23:2-5).
저주가 아닌 축복. 다른 형제들이 다 나누어갖는 부모의 유산을 나는 갖지 못한다면, 당사자는 물론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축복이 아니라 저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장은 저주로 보이는 것조차도 결국에는 축복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한 지역에 모여 살지 못하고 다른 형제들의 땅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땅 온 지역을 오가며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해야 했으니 피곤하고 고달프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맡은 직분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지극히 명예로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지파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2그들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기업을 가지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으니라(신 18:1-2)
이 지파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것을 다 가졌던 것입니다! 그 땅의 주인인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산으로 받았으며, 하나님에게 바치는 그 땅의 모든 첫 소산을 자신들이 가져갔습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 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지도자와 영웅들이 모두 ‘레위’ 지파에 속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레위’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아론’ 역시 그러합니다. <역대기>는 그와 후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이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하게 하여 영원토록 심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고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으로 축복하게 되었느니라”(대상 23:13).
‘비느하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역시 특별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세 번째 대제사장으로서, 십구 년간에 걸쳐 그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민수기> 25장에서 그리고 있는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웃 ‘모압’ 족속 여인들과 성적 타락과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로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만 명이 죽어나가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장의 수령들을 잡아 목매어 달아 처형하면 진노를 푸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이에 ‘비느하스’는 ‘시므온’ 지파의 한 두령이 ‘미디언’ 여인과 그의 막사에 들어가는 것을 뒤쫓아 가서 창으로 두 사람의 배를 꿰뚫어 죽여 버립니다. 역병은 그쳤고,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거룩한 질투를 칭송하며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12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2-13)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사십년을 섬긴 ‘실로’의 제사장 ‘엘리’, ‘느헤미야’와 함께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 재건에 공헌한 학사 ‘에스라’, 그리고 “침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레위’ 지파가 낳은 영웅호걸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주가 반드시 저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에 내린 저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역시 각별한 방식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지파는 알다시피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던 관계로 ‘여로보암’의 반역으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배교의 무리 이스라엘에 포함되지 않고, ‘유다’에 남아 정통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멸망을 맞게 되지만, 남쪽 ‘유다’ 왕국은 그보다 135년 뒤인 주전 586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이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the Holocaust)을 두고 지난날 그들의 선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주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자신들에게 돌리라고 외쳐댔던 것에 대한 성취 내지는 보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점쟁이나 사이비 예언자들이 그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계(家系) 내린 저주를 끊어야 한다며, 부적(符籍)을 사거나 거액을 들여 굿을 벌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는 내 조상도 아닌 죽은 이웃 처녀의 원혼(冤魂)까지 풀어주어야 노총각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위협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
이는 모두 거짓이고 사기(詐欺)일 뿐입니다. <성경>이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그리고 설령 조상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저주는 한시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미국 작가 ‘어빙 윌리엄’은 체벌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초리로 맞을 때는 그것을 든 사람에게 가까이 갈수록 아픔은 덜하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다른 해결책을 찾지 말고 꾸짖지 아니 하시고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충고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6. 임종 유언(VI)-형제의 찬송, 유다
‘야곱’의 유언은 이제 ‘유다’를 향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의 심정은 어떨까? 이미 세 형에 대한 예언을 들은 그로써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지레짐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자 ‘르우벤’은 족장의 지위를 잃어버렸고,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 가운데서 흩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자기 차례를 맞고 있는 ‘유다’. 자기에게는 어떤 모진 예언이 떨어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 그는 아마 지난 날 자신이 저지른 죄악들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느라고 분주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은 며느리 ‘다말’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요셉’을 ‘이집트’에 팔자고 제안했던 자가 바로 자기입니다(37:26-27). 세 형에 비해서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그가 무슨 상급이나 칭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주와 심판이 아니라 그야말로 완벽한 삼박자(三拍子) 축복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1)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8절); (2)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9절); (3) “그 옷을 포도주에 빨리로다”(11절). 이들 축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들 축복을 하나하나 보다 상세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의 찬송. 그 첫 번째가 “형제의 찬송”입니다. ‘유다’는 음성학적으로나 어원(語源)에 있어서나 ‘히브리’어로 “찬송”(hd:y, 야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 ‘레아’가 그를 낳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유다’로 지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29:35)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의 예언 중에 하나님에게나 어울리고 합당한 단어 “찬송”을 ‘유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8절). 그의 예언에 따르면 ‘유다’는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많은 왕들과 지도자들이 배출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한 인간이 이처럼 형제들로부터 “찬송”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탈취하여 인간에서 돌린다는 말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대신 인간을 찬송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영광을 인간에게 돌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 가지 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찬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누군가 이루어놓은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고 찬송할 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감사를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궁극적으로 찬송은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바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드리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면류관은 영광과 존귀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에게 드리고 있는 면류관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 구절에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앞의 두세 장(章)에서 일곱 교회를 지칭할 때마다 반복해서 등장했던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그리고 이 표현과 함께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축복과 다스리는 권세와 권능”에 대한 약속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그들의 영적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칭송받고 있는 자들은 이들 성도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곧바로 그들이 받은 면류관을 하나님 발아래 내려놓음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유다’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통해서 찬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이웃이나 가족이나 친구가 나를 칭송하며 자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는 일을 칭송하며 그 업적을 기립니까? 이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며, 하등 문제 될 일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백수의 왕. 바로 이 점에서 ‘유다’는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 ‘유다’가 받을 축복은 그뿐 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자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9절). 사자를 흔히 백수(百獸)의 왕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유다’는 형제들 중에 가장 뛰어나고 탁월한 왕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루이스’(C. S. Lewis)의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사자 ‘아슬란’도 여기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은 마치 ‘유다’가 ‘르우벤’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장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려 이상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장자가 된다는 것은 두 가지 특권을 물려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가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새 족장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도 두 번째는 재산상의 특권으로서, 장자는 나머지 형제들이 물려받는 모든 유산의 갑절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이 모든 특권이 ‘유다’가 아니라 ‘요셉’ 지파에게 돌아갔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1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물론 ‘요셉’은 이미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만,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 중에 사사와 같은 국가적 지도자들이 속속 배출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자의 명분을 물려받았다 해서 통치권 즉 왕의 지위까지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이점을 그의 예언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지위는 ‘요셉’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가 물려받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백수의 왕 사자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 이를 가리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요셉’의 꿈, 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그에게 절하는 꿈이 성취된 것은 사실이지만, 긴 안목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고개 숙여 절을 하게 될 대상은 ‘요셉’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가 될 것입니다. ‘유다’는 ‘메시아’가 올 때까지 이스라엘 왕들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유다’로부터 나왔습니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물론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지만, 사실 상의 첫 번째 왕은 ‘유다’ 지파의 ‘다윗’으로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은 ‘보아스’와 ‘룻’의 후손 ‘제시’의 막내아들인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사십 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위대한 왕으로 불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는 실로 여러 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국가 기관을 처음으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서민 목동 출신으로서 힘써 일하는 자들의 대변자를 자임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뛰어난 음악가였으며, 군인이자 왕이었고 제사장이었으며 동시에 예언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시편>을 ‘다윗’이 <시편>이라 부르겠습니까! 그를 이어 왕이 된 ‘유다’의 후손들 중 그보다 뛰어난 왕은 사실 상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를 능가할 수는 없었지만 그 역시 뛰어난 왕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이스라엘이 영광의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그의 이름을 딴 ‘솔로몬 성전’을 지었는가 하면, 적어도 <성경>의 세 권의 책을 기록하였으며, 그의 지혜를 능가할 자가 없었을 정도입니다. <열왕기>는 그의 지혜와 관련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9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30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31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왕상 4:29-31)
‘다윗’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쇠퇴와 영적 타락을 겪어갑니다만, 그나마 남쪽 ‘유다’ 왕국의 왕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왕들이 “악한 왕”으로 불리던 시기의 ‘유다’ 왕들 중에는 ‘아사’, ‘여호사밧’, ‘우시야’, ‘요담’, ‘히스기가’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나름대로 선정(善政)을 베푼 왕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참고. 왕상 15:11; 22:43; 왕하 15:34; 18:3).
‘다윗’과 ‘솔로몬’ 이후 가장 뛰어난 왕을 꼽는다면 ‘요시아’ 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여덟 살에 재위에 올라 삼십일 년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 되었을 때 제사장들이 궁중 서가에서 오래 동안 잊혀졌던 <성경>을 발견하게 되는데 왕이 그 책을 읽고서는 그의 나라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그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자복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성전을 새롭게 하고, 우상들을 섬기던 신당(神堂)들을 부수고, 점쟁이와 무당들을 몰아내고, 유월절을 부활시켰습니다.
<성경>은 ‘요시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도 ‘유다’ 지파의 명성과 명맥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갑니다. 이 시기에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스룹바벨’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포로기 이후 남은 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 총독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등장하고 있으며, 두 번째 성전이 그의 이름을 따서 “스룹바벨 성전”으로 불리고 있는 것도 그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학개서>도 그의 이름과 함께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각별한 신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을 이어 많은 지도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비우드’; ‘엘리아김’; ‘아솔’; ‘사독’; ‘아님’; ‘엘리우드’; ‘엘리아살’; ‘마단’; ‘야곱’.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양부 ‘요셉’도 ‘유다’의 후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이보다 더 뛰어난 가계(家系)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풍요와 번성. ‘유다’가 누리게 될 세 번째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야곱’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1-12절)
세 쌍으로 이루어진 유사반복의 노래는 매우 상징적이고 암시적이긴 하지만, 한 마디로 “풍요와 번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유다’가 “형제의 찬송”이 되어 영광을 누릴 것이고, 백수의 왕 사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인 즉, 당연히 예상되는 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예언이 있은 지 사백년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에 대해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신 8:7-9).
이 약속은 ‘야곱’의 노래가 상징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유다’가 차지할 땅은 너무나 풍요로워 그 땅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자의 나귀와 포도원을 가질 것이며, 포도즙으로 옷을 빨 정도로 포도원의 소출이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풍요 속에 포도주에 취한 눈동자는 충혈 되어 몽롱한 상태가 될 것이며, 이빨은 우유처럼 하얗게 될 것입니다.
왕 중 왕. 형제의 찬송, 백수의 왕 사자, 그리고 풍요와 번성. 이 모든 축복들은 왕 중 왕이신 ‘메시아’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빌 2:11).
또한 <계시록>은 ‘유다’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로 칭하고 있습니다(계 5:5). ‘야곱’은 ‘유다’를 향하여,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할 때까지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빌 2:9), 그리고 “그 앞에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빌 2:10). 예수 그리스도는 백수의 왕 사자로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돌아다니는 “우는 사자” 즉 마귀 또한 발아래에 정복했습니다. 그분은 진정 “왕 중 왕”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유다’ 지파가 누리게 될 “풍요와 번성”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인 즉, <야고보서>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오늘 나에게도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까?
7. 임종 유언(VII)-스불론과 잇사갈, 축복의 위기
첫 네 아들들에 대한 유언과 예언을 마친 다음 ‘야곱’의 눈길은 ‘스불론’과 ‘잇사갈’로 향하고 있습니다. 왜 ‘스불론’과 ‘잇사갈’일까? 이 두 아들은 ‘레아’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아들입니다.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은 후 ‘야곱’은 두 사람의 첩(捷) ‘빌하’와 ‘실바’를 두게 되는데, ‘잇사갈’과 ‘스불론’은 출생 순서로 보자면 각기 아홉 번째와 열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첫 네 아들에 대해서는 출생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유언을 남겨주었습니다만, 이 두 아들에 와서 왜 그 순서를 어기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 가능한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만(참고. <문학과 역사>), 그냥 단순히 생각해 보면 이들 두 아들은 다른 네 아들과 함께 ‘야곱’의 침상에 가장 가까이 둘러서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대로 아이들을 지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의 후손 중에서 특별히 이름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특별히 기억할 만 한 지도자도 없습니다. 다만 ‘스불론’ 지파 중에 사사(使師) ‘엘론’이 그나마 기억할 만 한 인물이며(삿 12:11), ‘잇사갈’ 지파 중에는 사사 ‘톨라’가 있기는 합니다(삿 10:1-2). 그 외에 두 지파를 통 털어 <구약> 전체적으로 28 명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대개 열두 명의 형제 중 아홉째와 열 번째라 하면 가장 주목을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식일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은 그 출생 순서답게 그저 그렇고 그런 생활을 보낸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편에서 보자면, 특별히 주목받을 만 한 것도 없는 무사(無事)하고 안일(安逸)한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안에서 시돈까지. 두 지파에 대한 예언이 단 세절에 그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절을 기초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오히려 부담이 되고 억측으로 끝날 소지가 많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에는 교훈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축복에 관한 교훈이 그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축복의 위기(危機)라고나 할까요.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일 것인 즉, 축복에는 위험과 기회라는 두 얼굴이 있음을 ‘스불론’과 ‘잇사갈’ 두 지파에 대한 예언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선 ‘스불론’의 후손이 차지하게 될 거주지에 관한 예언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메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13절). ‘야곱’의 예언 중에서 다른 어느 지파에 대해서도 이처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거주지를 거명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훗날 열두 지파의 땅은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지파가 차지하게 될 지역은 그 자체로서 나머지 지파들에 비하면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가의 거주지와 그 경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
‘스불론’에 대한 예언 속에 “해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해서 이들이 장차 뱃사람이 될 것이라고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만, 이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될 거주지는 그들에게 큰 자산(資産)이자 특권이 될 수 있다는 암시는 분명해 보입니다. 예컨대, <신명기>는 이들 두 지파가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라”(신 33:19)고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누리게 될 물질적인 축복과 특권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처럼 남다른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인가? 일반인들에게 물어보면 그것은 운명적이며 태생적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주변에서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은사나 사회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뛰어난 예술가, 운동선수, 대재벌의 자식, 천재적인 과학자, 등등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노력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일반인들의 기대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세간의 비난과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축복이 도리어 욕이 되는 순간이지요.
나에게는 혹시 남에게는 없는 은사나 자산은 없습니까? 나에게도 무엇인가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유익이나, 모범이나, 영향력은 없습니까? 그 축복이나 특권이 무엇이든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산물이며 선물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 축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책임 또한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소위 달란트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마 25:21, 23).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축복이 어떻게 저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들이 그 특권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물을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축복이 저주가 되고 욕이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가진 자가 나누려 하지 않을 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그가 가진 것이 재물이든 재능이든 말입니다. 또한 전혀 어울리지 않은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도 세상은 그를 임명권자와 함께 싸잡아 비난을 합니다.
‘야곱’의 예언 속에도 이와 같은 경고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불론’은 해안 지역에 살면서 해외 무역 등으로 아마 큰돈을 벌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지파에 비해서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축복이 마냥 축복으로만 남게 될까? 축복에 따른 위험이나 위기는 없을까? ‘야곱’은 이곳에서 그 위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 미치리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시돈’이 어떤 곳입니까? 한 마디로 사악한 도시였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사악한 왕비 ‘이사벨’이 ‘시돈’ 출신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스라엘의 왕비로 오면서 섬기던 우상들을 가지고 왔으며, 이로 인해 그녀는 물론 왕과 온 나라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시돈’이 이스라엘에 끼친 영향은 ‘소돔’과 ‘고모라’가 ‘롯’에게 끼친 영향력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훗날 ‘스불론’의 후예들이 ‘시돈’까지 교제와 활동 영역을 넓혀갈 때 맞게 될 위기는 자칫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과 그의 아내가 겪어야 했던 파멸일 수도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은사를 숨겨두거나 오용(誤用)했을 때 말입니다. ‘롯’은 당시 그가 누리고 있던 사회적, 금전적 특권들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전혀 사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를 찾아온 두 천사와 관계를 하겠다며 그의 집으로 쳐들어온 지역 잡배들을 훈계하여 돌려보내기는커녕, 자기의 두 딸과 대신 관계하라며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가 전하는 종말의 복음을 두 사위조차 우습게 알고 믿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짠 맛을 잃은 소금이었고, 침대 밑에 숨겨둔 등불이었습니다.
왜 그가 이렇게 되었을까? 거룩한 공동체 ‘아브라함’ 교회에 살지 않고, 홀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틈에서 뒤섞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개척하러 떠났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했으며, 세상은 이런 그를 자기편으로 삼았습니다. ‘시돈’에서 ‘스불론’ 또한 그와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었습니다.
건장함과 게으름. “축복의 위기”는 ‘잇사갈’이라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동생 ‘스불론’과 공동 운명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는 “건장한 당나귀”로 태어났습니다(14절). 흔히 영어권에서 당나귀는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의 상징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부자나 귀족들이 가끔 타고 다니던 아주 귀하고 값비싼 교통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삿 10:4; 12:14). ‘다윗’ 왕 시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나귀에 술과 음식을 싣고 와서는, 당나귀는 왕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짐승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삼하 16:1-2). 이렇게 볼 때, ‘잇사갈’을 “건장한 당나귀”에 비유한 것을 두고 하찮게 여기거나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당나귀가 지닌 강점이나 장점들을 통해서 ‘잇사갈’의 태생적 축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당나귀는 강인함과 견고함의 상징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잇사갈’의 모습이 딱 이런 것입니다. ‘잇사갈’은 ‘스불론’과 함께 사사 ‘드보라’와 ‘바락’을 도와 ‘가나안’ 족속들과의 위험한 전쟁에 나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삿 5:15-18). 당시 일부 지파들이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수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들을 차출했을 때 ‘유다’와 ‘단’ 지파를 제외하고는 ‘잇사갈’ 지파보다 더 많은 장정들을 내놓은 지파는 없었습니다(민 26).
‘잇사갈’ 지파의 장정 수는 나중에 더 크게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6장에서 보여주는 숫자는 64,300 명이었는데,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87,500에 이르고 있습니다(대상 7:5). 이들 숫자가 전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잇사갈’은 이스라엘의 충성스럽고 믿을 만 한 지파였음에 분명합니다.
하나 인생이 용맹스러움과 충성스러움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일까요? ‘야곱’은 ‘잇사갈’에게도 약점이 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습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14-15절).
그렇습니다. ‘잇사갈’은 건장하지만, 게으르고 꿈이 없습니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보기 좋은 것들에 만족하며 새로운 모험이나 개척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힘은 있으나 제대로 발휘하려 하지 않으며, 재능은 있으나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결과가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떻게 현실로 나타났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잇사갈’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수시로 외적의 침입을 목격해야 했으며, 결국에는 주전 732년 ‘티글렛-블레셋’이 이끄는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북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푯대를 향하여. ‘야곱’의 예언은 여기까지입니다만, 그가 주고자 했던 교훈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 그것일 것입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사도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알고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과거의 구원에 안주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나를 아는 것만큼 나도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달려가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곳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옥입니다. 만일 기독교 역사에서 자신이 행한 과거의 업적을 바탕으로 여생을 편히 보낼 자격을 갖춘 한 사람을 뽑는다면 단연 사도 ‘바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달려갈 길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사도의 간절한 소망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있어서 은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죽는 날이 은퇴의 날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공생에 시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슬프게도 ‘스불론’과 ‘잇사갈’은 눈앞에 펼쳐진 너무 좋은 것들을 보고 너무 일찍 은퇴를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의 갈릴리. 이 두 지파가 차지했던 지역은 훗날 “이방인의 갈릴리”로 불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 ‘유다’만 제외하고 모두 이 지역 출신들입니다. 이 지역은 예수님 당시까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침공하여 다스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는 ‘사마리아’와는 달리 본연의 모습이나 색깔을 쉽게 잃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스불론’과 ‘잇사갈’의 후예가 없으리라는 법이 없겠지요.
‘잇사갈’이 처음 이 아름답고 비옥한 땅을 물려받아 현실에 만족하며, 꿈도 비전도 없이 살아가다, 결국 자유를 빼앗기고 외세의 노예 신세로 전락하여 살아왔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의 상황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그들의 영혼마저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불론’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 역시 해상 무역을 통해 온 세상으로 나아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할 것이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들의 후예들에게 예수께서 ‘갈릴리’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함께 사시다 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 옛날 ‘야곱’이 그들의 선조들에게 유언을 남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유언인 즉은 이것입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혹시 ‘갈릴리’는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마치 내가 다 이룬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불론’과 ‘잇사갈’의 후예들처럼 말입니다.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 현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대위임령”은 우리가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기회입니다. 그것은 명령이자, 약속이며, 또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누리시길.
8. 임종 유언(VIII)-남이 아닌 단, 갓, 아셀, 납달리
아버지 ‘야곱’의 임종 유언을 듣고 있으면서 가장 불안해했을 자식들은 누구였을까? 추측컨대, ‘단’과 ‘갓’과 ‘아셀’ 및 ‘납달리’ 네 지파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야곱’은 이들 네 아들을 차례로 거명하며 유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치 한 사람에게 말하듯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들이 이처럼 전전긍긍하며 아버지의 유언을 듣고 있었을까? 신분 즉 출생 성분이 나머지 형제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적자(嫡子)가 아니라 서자(庶子)들입니다. 그들은 정식 부인 ‘레아’와 ‘라헬’의 자식이 아니라, 그들의 시녀였던 ‘빌하’와 ‘실바’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단’과 ‘납달리’는 ‘빌하’가 낳았으며, ‘갓’과 ‘아셀’은 ‘실바’의 소생들입니다. 아들이라 해서 다 같은 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보듯이, ‘이스마엘’은 ‘이삭’의 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의 어머니 ‘하갈’과 함께 아버지 ‘아브라함’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들 네 자식들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유산은 고사하고, 호적 상 아들로 인정받기도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 네 아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하겠습니다.
공정사회 이스라엘. 그러나 이들의 불안함과는 달리 ‘야곱’은 예상을 깨고 이들 네 자식들에 대해서도 공명정대(公明正大)한 모습입니다. 그들이 자유자의 아들이든 노예의 아들이든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누구든 출생이나 신분의 차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에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유다’에 관한 예언보다는 그 길이에 있어 짧고 간단합니다만, 이들의 미래에 관한 예언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결코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점 ‘단’에 관한 예언을 통해서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단’에 관한 예언은 ‘단’ 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한 나머지 세 지파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16절).
‘단’은 그 출생 성분에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한 지파에 속해야 함을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를 ‘레아’나 ‘라헬’의 자식들과 같이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머지 세 지파들에 대해서도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맡게 될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야곱’은 그가 외적과의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정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16절). 그리고 그가 수행하게 될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17절).
우리는 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 ‘단’에 대한 이와 같은 예언 역시 부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에 등장하고 있는 일단의 짐승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각 짐승들이 가진 장점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해석 상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잇사갈’을 “건장한 당나귀”로 비유한 것에 대해서도 당나귀의 장점만을 부각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14절). 마찬가지로 지금 ‘단’을 “뱀”으로 비유한 것도, 이 짐승이 지닌 지혜와 신속함 그리고 효과적인 공격 방법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함”을 가르친 바 있습니다.
혹시 ‘단’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에 자유와 정의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삼손’일 것입니다. 그는 이십여 년을 이스라엘을 통치한 사사였습니다(삿 13-16). 하지만 그는 지혜로운 사사로서보다는 오히려 힘과 용맹스러운 사사로 더 잘 기억되고 있습니다. 힘과 용맹스러움에 있어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던 것이, 맨 손으로 사자와 싸워 찢어 죽여 버릴 정도였습니다. 적과의 전쟁에서도 한 번은 뱀과 같은 기습으로 적을 덮쳐 한 번에 천 명을 죽여 버렸습니다.
‘삼손’은 또한 그의 죽음에 있어서도 유별났습니다. 자신이 가진 힘의 비밀을 요부(妖婦) ‘들릴라’에게 알려준 대가로 그 모든 힘을 상실해 버리고, ‘블레셋’ 족속에게 붙잡혀 눈이 뽑히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인생을 끝내지는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다시 머리카락이 자라고, 힘이 되돌아왔을 때, ‘다곤’ 성전에서 그를 비웃던 ‘블레셋’ 인들을 성전과 함께 전멸시키고 장렬한 최후를 장식합니다. <사사기>는 그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야곱’의 예언이 이와 같은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그의 장렬한 죽음이 이스라엘에 비록 잠시나마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언급하면서 아예 ‘단’의 이름을 빼버리고 있습니다(대상 1-7). <계시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5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계 7:5-8)
그의 이름이 빠진 것을 놓고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단’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먼저 우상숭배에 빠진 지파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참고. 삿 18:30). 아닌 게 아니라 <아모스>는 이에 대해서 ‘단’을 질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암 8:14)
이와 같은 평가에 근거해서 일부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단’을 말세에 등장할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억측이며 다분히 이단적인 해석임에 분명합니다. 우상숭배로 치자면 다른 지파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단’의 이름이 <계시록>이나 <역대기>에서 지파 목록에서 빠져있기는 하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서 적어도 열여섯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단’ 미래나 운명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추측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아모스>가 말하고 있는 ‘단’의 죄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의 경계로 삼을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관한 경계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사사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숭배 대상은 그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구원. 그런 점에서 ‘야곱’이 예언 중에 마지막 숨을 내쉬며 외치는 간구는 시의적절(時宜適切)하다 하겠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사실 이 기도는 본문의 흐름에서 일탈(逸脫)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자식들을 앞에 놓고 예언을 말하는 중에 느닷없이 이와 같은 개인적인 기도문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과 관련해서 일단의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단’이 뱀과 같은 지혜와 파괴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영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진정한 희망은 일개 사사의 영웅적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사이신 ‘야훼’ 하나님에게 달려있음을 동시에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는 왜 이 시점에 ‘야훼’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아무리 뱀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해도, 뱀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태초의 한 사건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유혹과 반역이 그것입니다. 뱀은 유혹과 반역의 대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지만(3:14),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곧바로 이어서 그에게 그 유명한 소위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셨습니다(3:15).
혹시 ‘야곱’이 예언 중에 이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간구는 예언과 절묘한 공명(共鳴)을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유다’를 위한 예언 중에서도 ‘메시아’를 암시하는 단어 ‘실로’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10절). 그가 지금 간구하고 있는 “주의 구원”은 ‘히브리’어로 ‘예슈아’ 즉 ‘예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에 관한 언급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야곱’이 지금 이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어느 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주의 구원”을 기대하고 고대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 22:20) 하며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세 예언들. 이제 나머지 세 지파, ‘갓’과 ‘아셀’과 ‘납달리’에 대한 예언은 어떻습니까? 각 지파마다 한 절 씩만을 할당하고 있을 뿐이니 가장 짧은 예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갓’ 지파 역시 ‘단’과 마찬가지로 용맹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갓(dG)은 군대(dWdG, 게두드)의 추격(dWG, 구드)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dWG, 구드)하리로다”(19절). 앞에서 본 바처럼 ‘갓’에 대한 이 예언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로서, 반복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말바굽 소리에 대한 의태어(擬態語)입니다.
이 지파는 ‘가나안’ 정착 시에 일찌감치 ‘요단’ 강 동쪽에 자리 잡은 두 지파 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땅은 흔히 ‘길르앗’으로 통칭되는 곳으로서 땅이 풍요롭고 목축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만, 동시에 ‘암몬’이나 ‘모압’ 같은 외적들의 침입을 수시로 감수해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예언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갓’은 이와 같은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용기와 의지로 외적을 퇴치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다윗’ 시대에 있었던 일을 한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대상 12:8)
이 지파는 이처럼 한 때는 군사적으로 강했고 용맹스러웠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들은 ‘요단’ 동쪽의 나머지 지파와 함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찌감치 사라져버릴 운명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스라엘 교회 안에서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늘 이방 족속과 잦은 접촉과 싸움과 교류를 하는 동안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축복의 양면성”을 보게 됩니다. 축복은 위기라는 교훈 말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다고 얼른 차지한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유념하고 조심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하겠습니다. ‘롯’의 운명을 뒤쫓아 간 것이지요.
‘앗셀’는 어떻습니까? ‘앗셀’은 행복 또는 행운을 뜻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지파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 물질적으로 더 부유하고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20절). ‘스불론’이 해안 지역에 거주하면서 해양 무역을 통해서 큰 이득을 취했다면, ‘앗셀’은 이에 더하여 거주하는 땅도 비옥하여 더 큰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함께 많은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사사기>는 ‘아셀’이 이웃하는 형제 지파가 외적들과 싸우고 있는 동안 이를 못 본 체 자신만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을 나무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삿 5:17-18). 옆집이 불타고 있는데 내 집이라고 온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요?
하지만 ‘앗셀’ 지파 중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의 구원을 기다리던 “충성스러운 소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여선지자 ‘안나’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녀는 결혼 칠년 만에 과부가 되어 나이 팔십이 넘도록 ‘예루살렘’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에 할례를 받으러온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자입니다(눅 2:36-39).
‘납달리’에 대한 예언은 그 자체로서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언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성경>에서 ‘납달리’ 후손으로 유일하게 알려진 인물로 ‘바락’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는 사사 ‘드보라’와 함께 ‘가나안’의 왕 ‘야빈’과 맞서 싸운 바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장군이긴 하지만 동시에 ‘드보라’와 함께 아름다운 “드보라의 노래”를 지은 공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삿 5). 이런 점에서 볼 때, ‘야곱’의 예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납달리’가 “아름다운 소리”를 발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말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21절).
아름다운 그 말씀.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아름다운 소리”는 ‘바락’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은 비록 ‘납달리’의 후손은 아니지만, 공생애의 많은 부분을 ‘납달리’에서 보냈습니다.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2-16)
‘납달리’ 뿐만 아니라 ‘가나안’ 온 땅에 울려 퍼졌던 예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진실하며, 믿을 수 있는 위대한 “그 말씀”이었습니다. 한 때 그를 체포하려 했던 병사들조차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요 7:46)
우리는 그의 고백에 한 마디 더 거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인생이 아닐까요?
9. 임종 유언(IX)-무성한 나무, 요셉
우리는 흔히 <성경>의 저자(著者)는 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이는 <성경> 저작 과정에서 초자연적인 측면과 자연적인 측면이 동시에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상)이라는 <디모데후서>의 선언은 <성경> 저작의 초자연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를 어떻게 감동시키시는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 영감설”(聖經 靈感設)에는 여러 가지가 알려져 있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 저자는 기계적으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단순히 필경사(筆耕士) 노릇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저자의 지적, 사회적 배경이라든지 심지어 그 사람의 취항이나 기질까지 저작 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스며드는 것을 허용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을 “역동적 영감설”이라 부릅니다.
그래서인지 예컨대, <로마서>에서 느끼는 감동이 다르며, <베드로서>에서 맛보는 감동이 다릅니다. ‘야곱’의 위대한 임종 예언도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요셉’을 향한 그의 예언 속에는 이 아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과 애착이 다른 어느 아들에 대한 예언에서보다 더 많이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모든 형태의 축복을 ‘요셉’에게 모조리 전수해 주고 싶은 심정인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만 무려 여덟 번에 걸쳐 “축복”이라는 단어가 봇물 터지듯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언의 분량도 ‘유다’에 대한 예언과 함께 가장 길고 많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심정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에게 ‘요셉’이 누굽니까?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라헬’의 장남이 아닙니까! 그러나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이복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어린 시절을 온갖 고초가운데서 살아온 아들입니다. 이 아들에 대해서 어찌 미안함과 애틋함이 없겠으며, 그를 볼 때마다 먼저 간 아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아들에게 무엇을 준다 한 들 아까울 것이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요셉’은 이미 그 모든 세상의 축복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위나 명예, 그리고 물질적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생육하고 번창하라”는 창조의 언약도 그를 통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컨대, <신명기>는 그의 후손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신 33:17하). 즉 그의 후손이 큰 나라와 큰 민족을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요셉’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협력시켜 선을 이루시고 마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격이나 성품과는 상관없이 그 일을 이루어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환란을 통해 인내를 배웠으며, 인내는 연단을 이루어냈으며(즉 인격과 체질을 형성했으며), 연단은 그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말끝마다 “내 하나님께서”를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달고 다녔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야곱’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그를 “풍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하며 현재 ‘요셉’이 누리고 있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22절). 그리고 그가 이처럼 풍성함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비결이 하나님 때문이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23-24절).
하지만 ‘야곱’은 ‘요셉’을 단순히 “풍성한 포도나무”로 그리고 있지 만은 않습니다. 그가 강력하고 지치지 않는 힘을 지닌 “궁수”(弓手)이기도 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적절하면서도 상반되는 두 상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궁수(弓手)가 과연 ‘요셉’을 지칭하는 것인지 또는 그의 대적자들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해석상의 논란이 없지는 않다고 앞에서 논의한 바 있습니다: 참고. <신학과 신앙>.
굳센 활과 강건한 팔이 상징하는 바는 ‘요셉’이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역경의 세월에 그가 인내하며 이루어낸 그의 강인한 인격입니다. 형들의 질시와 미움 그리고 살해의 음모, 타국에서의 노예생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간계(奸計), 그리고 모함에 이은 투옥까지 삼십 년의 세월이 그 속에 녹아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세월을 한탄과 원망과 그리고 세상을 향한 적개심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 모든 질고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모습이 마치 한 마리 온순한 양과 같이 보이지는 않았을까요? “풍성한 포도나무”가 드러내고 있는바 상징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저 땅에서 올라오는 수액만 빨아먹는 수동적이고 온순한 포도나무 말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이집트’에서 옮겨다가 새 땅에 심은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시 80:8-16; 사 5:1-7; 렘 2:21; 겔 15:1-8; 19:10-14; 호 10:1). 즉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만 무성한 나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경우는 다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풍성한 포도나무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절).
‘야곱’의 노래는 ‘요셉’만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손들도 역시 그러하리라는 예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열다섯 명의 사사 중에서 다섯 명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기드온’(다섯 번째 사사); ‘아비멜랙’(여섯 번째); ‘야일’(여덟 번째); ‘에바다’(아홉 번째); ‘사무엘’(열다섯 번째). 그리그 그 유명한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출신입니다. 그는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을 그 땅에 정착시킨 위대한 지도자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실로 ‘요셉’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위한 “풍성한 포도나무”였습니다.
야곱의 전능자. 자식에게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모든 축복을 쏟아 부어 주고 싶은 애비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실현 여부는 그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의 이어지는 노래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노래 후반은 온통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 “네 아버지의 하나님”; “전능자”(24-25절).
아들의 성공 비결이 다름 아닌 이들 이름 때문이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노래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야곱’이 과연 이들 이름 하나하나마다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로 부름으로써 자신과의 각별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엘 샤다이’ 즉 “전능자”로 부르고 있긴 합니다만(참고. 시 132:2, 5; 사 49:26; 60:16), 특별히 <창세기>는 “전능자 하나님”을 ‘야곱’의 생애와 관련해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참고. 28:3; 35:11; 43:14; 48:3).
“축복” 역시 족장 언약의 핵심 단어로서, <창세기>에서만 무려 88여 회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히 이 마지막 두 절에서 마치 불꽃놀이의 대미(大尾)를 보는 듯합니다. “축복”이 “전능자 하나님”과 함께 폭죽처럼 터져 나오면서 ‘야곱’의 임종 유언이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축복은 그동안 ‘야곱’이 경험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고 초월하는 그런 것들이 될 것입니다. 즉 인간의 그 모든 활동 영역을 망라하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하늘”(!yIm'v, 샤마임)로부터 비가 내리고, “깊은 샘”(!/hT, 테훔)에서 솟아나는 물은 땅을 촉촉이 적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할 것이며(3:17-19), 여인의 “태”(!j'r, 라함)와 “가슴”(dv, 샤다임)은 다산(多産)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대조 3:16). 흥미롭게도 ‘야곱’이 풍요와 다산의 축복과 관련해서 동원하고 있는 네 단어, “하늘”과 “깊은 샘”과 “태”(자궁)와 “젖먹이”(유방)는 모두 두운법(頭韻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서 화자는 남성과 여성의 활동 영역을 균형 있게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녀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완벽하고 총체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애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에 집착하며 살아온 ‘야곱’이 이제 이 장면에서 자신이 누렸던 그 축복에 대해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토록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제 아들 ‘요셉’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는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 즉 구별된 자(ryzIn, 나시르)로 부르고 있습니다. 유사한 표현이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신 33:16; 애 4:7).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요셉’ 지파에서 왕이 배출된 적은 없으므로, 따라서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로 부르는 것은 ‘요셉’ 개인에 대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자였습니다. ‘이집트’에서만 하더라도 그는 분명 그 땅의 통치자였습니다.
참 포도나무. 하지만 <신약>에서 ‘요셉’보다 뛰어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요 15:1-17). 그는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로 칭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 역시 ‘요셉’처럼, 그의 성공 비결이 자신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 때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서 천명하고 계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농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어찌 농부가 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분은 늘 하나님 안에 상주(常駐)하셨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스승의 성공 비결이 이러하다면, 그 스승을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의 성공 비결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 즉 임종 유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4, 8, 16)
10. 임종 유언(X)-물어뜯는 이리, 베냐민
꺼질 듯 말 듯, ‘야곱’의 숨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막내아들 ‘베냐민’을 향한 유언을 마치기 전까지는 그는 결코 죽을 수 없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Spurgeon) 목사님도 ‘야곱’의 임종 장면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일을 완수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위로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감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는 누구도 그를 해치거나 목숨을 앗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요한복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유대’ 공회가 그를 잡아 제거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음이니라”고 설명합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주인공 ‘야곱’은 반면교사(反面敎師)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위대한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그는 일생 동안 제대로 한 번도 탁월한 삶을 살았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을 위대하게 만들어놓고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즉 임종의 자리에서 비로소 위대한 예언자와 따뜻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식 하나하나를 놓고 신탁(神託)을 들려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역설도 바로 여기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즉 우리 인생이 아무리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종말을 이처럼 멋있게 장식할 수 있게 한다는 역설 말입니다. ‘야곱’의 임종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이유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성숙했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더욱 가까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예언만 하더라도,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단순한 “예언”(豫言) 아니라, 그들의 과거 행적을 토대로 미래에 대한 경고와 교훈을 담은 선지자적 “예언”(預言)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자식들의 인격적 특징을 짐승이나 다른 사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유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여섯 아들에 대한 유언과 나머지 여섯 아들에 대한 것인데, 처음 여섯 아들은 ‘레아’의 자식들로서 관심의 초점은 ‘유다’였습니다. 나머지 여섯 명의 아들은 두 몸종이 낳은 네 아들과, ‘라헬’이 낳은 두 아들로서 이곳에서 관심의 초점은 ‘요셉’입니다. ‘유다’와 ‘요셉’에 관한 유언이 가장 길다는 점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작은 거인.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아들 ‘베냐민’에 대한 유언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단 한 줄로 처리해 버리고 맙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27절). 있으나 마나 한 유언처럼 들립니다. ‘요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요셉’에 대해서 하늘과 땅에 있는 축복이란 축복은 모두 주고 싶어 하던 그가 ‘베냐민’에 대해선 달랑 한 줄로 그치고 말다니, 차별도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베냐민’은 지파의 크기에 있어서도 다른 지파에 비해 아주 작고 미미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야곱’은 이 유언을 마치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 시시한 것하고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다고 중요하지 않거나, 또는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키가 크다고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숫자가 많다고 큰 일을 이루는 것도 아닌 것과 같습니다. ‘베냐민’은 형제 중에서 막내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지파였습니다. 하지만 ‘베냐민’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사자(獅子)라면,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입니다. 사자가 백수(百獸)의 왕이라면, 이리는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맹렬합니다. ‘단’이 뱀처럼 적을 기습 공격하여 치명적인 독을 뿜어냈다면, ‘베냐민’은 이리처럼 용감무쌍하게, 맹렬하게 하나님의 적을 공격하고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결코 지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노래를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27절).
<시편>도 ‘베냐민’의 이와 같은 탁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24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7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시 68:24, 27)
‘베냐민’은 작지만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졸병이 아닌 장군으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실로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레위’나 ‘유다’ 그리고 ‘요셉’ 지파를 제외하고 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베냐민’ 지파만큼 걸출한 지도자나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지파도 없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자랑하고도 남을 ‘에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使師)입니다. ‘사울’은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의리의 사나이 ‘요나단’, ‘사울’ 왕의 용맹스러운 군대 사령관 ‘아브넬’, 그리고 ‘페르샤’의 왕비 ‘에스더’의 삼촌으로 이스라엘을 멸족 위기에서 구한 ‘모르드개’ 등이 모두 ‘베냐민’ 출신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이스라엘의 ‘롤 모델’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무용담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사사 ‘에훗’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이 ‘모압’ 족의 지배하에 있을 당시의 사사였습니다. 당시 ‘모압’의 왕 ‘에글론’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해제 당한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왼손잡이 ‘에훗’은 작은 칼을 오른 쪽 허벅지 옷 속에 숨겼습니다. 왕의 호위병들이 그가 왼손잡이 임을 알았던지 아마 오른 손은 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음인지, 오른쪽 팔과 다리는 그냥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모험을 감수하고 그는 왕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를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를 죽인 후 곧바로 빠져나와 ‘에브라임’ 언덕에 있는 요새로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규합하여 ‘모압’을 칩니다. 이 전쟁에서 장군들만 만 명을 죽이고 ‘모압’을 이스라엘의 수하에 팔십 년 동안을 굴복시켰습니다(삿 3:12-30).
우리는 여기서 ‘베냐민’의 또 다른 영웅 ‘요나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울’ 왕 재위 시에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은 ‘블레셋’이었습니다. 한 번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무기를 모두 빼앗겨 버리고, 칼과 창을 가진 자라고는 왕과 ‘요나단’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농기구나 도끼 등으로 적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블레셋’은 이처럼 열세에 놓인 이스라엘이 그들과 싸우러 나아오는 것을 보고 조롱하며 놀려댑니다: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삿 14:11). 하지만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요나단’의 용맹과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삿 4:12).
過如不及. 실로 ‘베냐민’은 ‘야곱’의 예언대로 “물어뜯는 이리”였습니다. 한 번 물었다 하면 절대 놓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豫言) 만은 아니라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경고와 교훈을 담은 선지자적 “예언”(預言)도 담고 있다 했습니다. 이리에게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용맹스러움과 맹렬함이 있기는 하지만, 파괴적인 난폭함이나 잔인함도 함께 드러나기도 합니다. 용맹이 과하여 교만이 되고, 힘이 과하여 잔혹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힘과 용기가 적절한 통제를 받지 못하면 과여불급(過如不及)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겪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내란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치른 “베냐민의 전쟁”을 말합니다. 도대체 ‘베냐민’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머지 모든 지파들이 그를 응징하려 했다는 말인가? <사사기>는 마지막 세 장(19-21장)을 할애하면서까지 “베냐민의 전쟁”에 얽힌 사연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에게 ‘베들레헴’ 출신 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행음을 하고 남편을 버리고 친정아버지 집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마음 좋은 남편은 그녀를 찾아가 겨우 설득하여, 장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데리고 집을 향해 돌아옵니다. 귀향 길 첫날 저녁에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서 한 친절한 노인을 만나 그 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밤중에 성읍 불량배들이 몰려와 나그네를 내놓으라고 위협합니다. 그와 관계하겠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집 주인은 결코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자기 딸과 이 여인을 대신 내어줄테니 그들과 관계하라고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이들은 막무가내입니다.
이를 보다 못한 ‘레위’인 남편은 집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며, 그에게 화가 미치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음인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줍니다. 폭도들은 밤새 돌아가며 이 여인을 능욕하고는 새벽이 되어서야 놓아줍니다만, 여인은 결국 죽고 맙니다. 남편은 여인이 시체를 당나귀에 싣고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가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남편은 첩의 시신(屍身)을 열두 마디로 동강내어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에 한 동강 씩 보내어 반응을 촉발시키고자 했습니다. 그의 의도는 적중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분기탱천(憤氣撐天)하며 ‘미스바’에 모여 악행을 저지른 ‘베냐민’을 심판하기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열한 지파 동맹은 먼저 ‘베냐민’ 지파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합니다만, ‘베냐민’은 이를 거절합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열한 지파 편에서 보자면 응징과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전쟁은 처음에는 ‘베냐민’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습니다. ‘베냐민’이 사만 명의 연합군을 격파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세는 역전되어, 이번에는 연합군이 ‘베냐민’의 성읍들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도륙해버렸습니다. ‘베냐민’은 이 전쟁으로 멸족(滅族)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불과 육백 명만이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대재앙은 여태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열한 지파는 자신들의 행위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음인지 살아남은 육백 명에게 아내를 맞이하게 해줌으로써 지파의 명맥을 이어가게 해줍니다(삿 21:17). 이렇게 해서 ‘베냐민’은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으며, 훗날 다시 일정 부분 이전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리의 두 얼굴. 이처럼 한 사람의 기질(氣質)은 은사나, 시간이나, 축복이나, 땅의 기업처럼, 늘 위험과 기회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봅니다. 이리의 야성(野性)과 용맹을 지닌 ‘베냐민’은 작은 거인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의 병기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면, 야성과 용맹이 지나쳐 불의(不義)의 병기가 되어 타인은 물론 자신마저도 멸망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용맹스러운 ‘베냐민’의 후손을 또 한 사람 만납니다. 그 이름 ‘사울’입니다. 자신이 속한 지파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된 ‘사울’ 왕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했겠습니까! 그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열심이 지나쳐 종교적 광신도가 되어있었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도 스스럼없이 행하던 그였으니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 기질을 가진 자인지를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로 기록될 수 있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그도 함께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그분의 은혜로 거듭나게 된 것이지요. 거듭난 이후 그의 기질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거세당한 짐승의 수컷처럼 온순한 양이 되었을까? 식물인간처럼 살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야성과 용맹을 갖춘 ‘베냐민’의 후손입니다. 괴물 같은 불의의 병기가 그리스도를 위한 의의 병기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 스스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광스러운 기회는 무엇입니까? 은사나 기질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남은 물론 나까지고 파괴하고, 공격하고, 비난하며, 죽이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울’이 되어 그리스도의 병기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11. 야곱의 임종
마침내 열두 아들 모두를 향한 유언을 마치고, 이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해야 할 시점이 왔습니다. 이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야곱’은 결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일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작이 있는 모든 곳에 끝도 있는 법,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그의 죽음을 놓고 이렇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속임수의 달인이었다 해도 죽음이 그를 모르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의 눈먼 아버지 ‘이삭’은 속일 수 있었을 지라도 사망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분노한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수는 있었을지라도 무덤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황야에서 밤을 지새울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이제 곧 사망의 음침한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싸워 이기기도 했지만, 이제 그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놓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늘 그와 함께 하셨고, 그의 모든 길을 인도하셨으며, 모든 위기와 한란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손을 떠나, 이제 마지막 원수의 손에 떨어져 무시무시한 복수의 칼날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일 것입니다. 죽음에도 무슨 종류가 있고, 차별이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즉 단순한 임종(臨終)이 있는가 하면, 선종(善終) 즉 선한 마무리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종교적 위인이나 성자(聖者)의 죽음을 선종(善終)이라 칭합니다. 그가 살아온 위대한 삶을 두고 내리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인 셈입니다.
하늘의 도성. 혹시 ‘야곱’의 죽음도 단순한 임종이 아닌 선종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일생은 치열했고 파란만장(波瀾萬丈)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목숨을 걸 정도의 열정과 신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일생을 본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 모델로 더 적절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종의 의미를 재정의(再定義) 한다면, 즉 선종을 그가 살은 인생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마지막 순간만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라면, ‘야곱’의 임종을 단순한 임종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가 지나간 세월동안 추구했던 가치들이 대부분 이 땅에 속한 것이었다면, 이제 마지막 순간에 드러내고 있는 그의 소망은 하늘에 속한 것 즉 “하나님의 나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조상들에게 돌아가리니”(29절상).
물론 “조상들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죽는다”의 표현의 완곡어법에 불과하며, 이를 두고 ‘야곱’이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절하 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이 어디에 묻힐 지에 대해서도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에 묻히든 ‘가나안’에 묻히든,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곳에 묻히고 싶은 것입니다.
전에도 그는 ‘요셉’에게 같은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 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47:29-30). 이는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조상들과 함께 연합하고 싶다는 소망과 믿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요? 참고로 <창세기> 화자는 ‘이스마엘’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가 자기 백성들에게 돌아갔다고 쓰고 있습니다만(25:17), 그가 묻힌 곳은 ‘막벨라’ 동굴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을 비롯한 우리의 족장들이 과연 부활 소망을 지니고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히브리서>는 오늘 우리를 위한 교훈을 주기 위함인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9-10)
이 구절은 ‘아브라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만, 믿음의 백성 모두를 향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이 진정 부활에 대한 소망을 피력했든지 아니 했든지 상관없이 그의 임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위대한 마감 즉 선종이라 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가 오늘 새 이스라엘 즉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권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하지만 세상은 이와 같은 생각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아니 무지(無知)하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모르니 배척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그에 속한 사람들이 철저하게 세상과 동화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땅에 살면서 하늘을 생각하는 우리를 조롱합니다. 종교라는 마약에 취한 자라든지, 또는 죽음의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하여 헛된 망상을 꾸는 자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의 믿음도 삶도 모두 헛된 것이 되겠지요.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실재(實在)하고 있음을 애써 믿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도. “위에 것을 생각하라”고 해서 땅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공상가나 몽상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야곱’이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야말로 치열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내일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너무 지나친 권고일까요? ‘야곱’이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도 그가 묻힐 땅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일까요? 그는 자신이 묻힐 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29-32절).
조상들에게 돌아가면 그만인 그가 굳이 이 땅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땅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 땅에 나그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이 땅에 그렇게 집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땅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야곱’의 자식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 땅이 약속의 땅이긴 했지만 값을 주고 사야했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샀던 것입니다. 이 무슨 모순된 태도입니까! 약속을 믿었으면 그냥 그 땅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이지 돈을 주고 사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그 땅을 사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야곱’의 간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땅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산 것이니 우리의 소유가 되어야 함을 주지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의 관심사는 항상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살다가, 돌아가신, 이 지구에 있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관심사가 ‘막벨라’ 동굴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온 지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고백했던 대로 이 우주에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한 영역이 한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우리가 이 땅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신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즉 “어떻게 선종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가 하늘의 도성(都城) 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이는 분명 도피적이고 염세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지금 ‘야곱’처럼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 그분 앞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충격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까? 아니면 환희(歡喜)와 만족으로 서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우리에게 지혜자의 충고를 남겨놓은 바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늘 죽음을 묵상하고, 죽음에 즈음해서는 생명을 묵상하라.” 본인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우리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몸부림칩니다. 마치 이전에 한 번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죽음이 이토록 생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늘 죽음을 묵상하며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음을 바라보며 절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 앞에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바울’ 사도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8)
죽음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절망시킬 때, 생명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을 기억합시다!
12. 애곡할 때와 기뻐할 때
그동안 이런 저런 초청이나 소식을 많이 접하며 살아왔지만, 나이 들면서 부쩍 자주 접하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주변 지인(知人)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싫던 좋던 장례식장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이전 젊었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뭐라 할까 내 자신도 이제 죽음의 문턱에 아주 가까이 와있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젊었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입니다. 그 때야 고인(故人)이 된 분들과 나와의 나이 차이가 적어도 한두 세대는 넘어, 죽음이 그렇게 심각하게 와 닿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고인과 나이 차이가 이제 불과 십여 년 안팎이거나 때로는 나의 동료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굳이 잊으려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의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등등 온갖 상념(想念)에 빠져 있는 내 모습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과연 정상인지 아닌 지조차 헷갈리기도 합니다.
죽음을 잊음. 지난 시절 내 모습을 그려보면 이는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영국 가수 ‘메리 홉킨스’가 오래 전에 부른 유명한 노래 “Those were the days”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친구여, 그 때는 정말 좋았지. 우리는 그 시절이 끝도 한도 없을 줄 알았지.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며 살 수 있을 줄로 알았지.” 나도 지난 세월을 이런 자세로 살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머리로야 인생에 누구나 종말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가슴으로는 애써 거부하고 잊으려 했던 것이지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른 바 “탈현대 사회”(postmodern society)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라는 종교단체가 운명하는 신문,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에디’(M. B. Eddy)라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신문이야 설립자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더라도, 과연 누가 “생각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의 존재 자체를 아예 거부하려는 태도는 이와 같은 범신론 계열의 종교단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즉 종교나 세계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업주의에 물든 현대 사회와 문화도 그 공모자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문화는 오히려 죽음을 잊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온갖 종류의 신무기들을 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건강보조식품, 성형수술, 찜질과 목욕, 체육 시설 등. 이들 모두 활기차고 건강한 젊음을 유지하는데, 즉 죽음을 잊게 하는 필수적인 무기라고 선전하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죽음을 잊게 하려고, 이를 대체할 만 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에도 가히 천재적입니다. 보험회사가 만들어낸 “생명보험”이라는 단어가 그 한 예입니다. 사실 이 보험의 이름은 “사망보험”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보험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현실을 완화시키거나 축소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 대신에 “서거(逝去)하였다”, “영면(永眠)하였다”, “별세하였다”, 또는 “숨을 거두었다” 등으로 고쳐 말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의 경우라면 “소천(所天)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에 대한 표현도 달라집니다. 죽은 자는 “고인”(故人)이나, “사랑하던 사람”으로 바뀌고, 그는 “시체 보관소”가 아닌 “영안실”(永安室)에 안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광고도 “죽음 알림”이 아니라 “부음”(訃音)으로 전해집니다.
이처럼 많은 은유(隱喩)나 상징을 가진 단어가 죽음 말고 또 있을까? 왜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많은 수식어를 헌정(獻呈)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태도는 마치 죽은 자를 방부처리하고 얼굴에 화장(化粧)을 해놓아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는 역설적으로 죽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까?
우리의 이와 같은 모습 뒤에는 여러 요인들이 아주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큰 것처럼 보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시그먼드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가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음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장 두려워하는 실재(實在)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더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더욱 부인하고 거부하고 싶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상 세계 즉 영화나 TV 드라마 등에서 죽음의 융단포격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죽음이 일상사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려는 욕구 역시 비례해서 늘어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역설은 그것을 무시할수록 더 절망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찾아왔을 때 나타나는 반응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놓고 대부분의 유족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죽음을 잊고 살다가 정작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이를 맞는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죽음을 잊으려 하다가 부활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죽음을 환영함. 이처럼 죽음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려는 “탈현대 사회”의 모습과는 달리, 이를 운명처럼 즐겁게 수용하려했던 모습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보여주고 있었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당시 ‘아테네’ 사회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이단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죄목으로 당국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가까워오자 제자들과 지인들이 몰려와 한사코 안 된다고 하면서 말렸습니다만, 그는 오히려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스스럼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독배(毒杯)를 마시고는 죽었습니다. 사라져 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지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죽는 일을 즐거운 일로 생각하게 했을까? ‘소피스트’(Sophist) 철학자로서의 자기 논리와 확신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는 영혼불멸설을 신봉하는 자로서, 선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유한하고 썩을 수밖에 없는 육체 속에 갇혀 있으므로, 죽음만이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혼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자 구원자가 되는 셈입니다. 지고(地高)의 자유는 결국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태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결국 이것은 자살을 조장하거나 부추기는 그야말로 혹세무민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백번을 양보해서 그의 생각이 맞다 치더라도, 그 자신은 평화롭게 죽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은 유족이나 친지들이 겪어야 할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스타 제자 ‘플라톤’(Plato)은 그의 저서 <파이도(Phaedo)>에서 스승이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를 지켜보던 모두가 큰 슬픔에 잠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항거함. 이와 같이 죽음을 깡그리 잊고 사는 사회도, 그렇다고 죽음을 영혼의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대안으로 환영하는 사회도, 모두 건강한 사회라 보기 어렵습니다. 잊을 수도 없고 즐겁게 맞이할 수도 없는 상대라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것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우리는 결코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는 죄와 율법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소지한 채 우리를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를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거부하고 항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실재하지만, 이미 패배했고 무기력한 식물인간처럼 누워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죽었다”는 선포이자 실증(實證)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항상 인식하되, 또한 거부하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인 듯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에 항상 기억하라는 것일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부활하였고 또한 앞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거부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동시에 소망을 가지고 기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말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울었습니다(50:1). 하지만 소망 없는 자처럼 절망하거나 비탄에 빠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울어야 할 때이지만, 울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과 당부를 존중했으며, 자신이 했던 약속을 지키려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해(遺骸)를 ‘가나안’ 땅 조상의 매장지 ‘막벨라’ 동굴에 안치했습니다(13절). 그리고 훗날 자신이 죽을 때에도 그를 같은 곳에 묻어달라고 남은 자들에게 당부할 것이었습니다(25절).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와 같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는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슬픔의 순간에도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고하고 있습니다(참고. 살전 4:18).
하지만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대우(待遇)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그를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극진한 예를 다하여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말입니다. 지금 그는 온갖 예를 갖추어 아버지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사십일에 걸친 방부처리, 칠십일 동안의 애도와 추모 기간, 그리고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장엄한 장례 행렬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예를 다 갖추어 죽은 자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추모식이 당시 이집트백성들에게 어떻게 비추었을까? 무슨 깨달음을 주었을까?
공동체가 함께. ‘프리센’ 목사님은 “장례식이 뜸할수록 찬된 영성을 형성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장례식이 마치 북극성 같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통해 현재 서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목적지로 방향을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은 “우리는 장례식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을 추스린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 “장례식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잣대를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말입니다. 장례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였으며 사랑스러운 남편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잘 돌보았고, 교회에서 젊은 여성들의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테레사 라이소트’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죽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늘 함께 겪는 경험입니다. 계속되는 의식과 예배를 통해서 임종은 물론 그 이후까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 두 죽음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를 죽게 했던 그 죽음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또한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13.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어린 딸이 자기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 내려오던 오래된 도자기를 실수로 그만 깨어버렸습니다. 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가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고했습니다. 아이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딸을 부드럽게 안으며 괜찮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끼는 가보라도 자식보다 더 귀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아이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를 제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자기가 저지른 일이 너무 엄청나서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그날 저녁에 퇴근하여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다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지난 일이고 다 용서하였으니 다시는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녀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렇지, 나는 어제 이미 용서받았지.”
그러나 소녀의 확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출근하는 아버지를 향해서 다시 용서를 빕니다. 정말이지 아주 소심하고 마음 착한 딸인 듯합니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정색을 하며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고 이릅니다. 딸도 죄송하여 그러겠노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조금 후 다시 소녀는 자신의 생각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다시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아버지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내가 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 내 딸은 너무 착해! 내가 몇 번이고 용서했다고 했는데도 계속해서 용서를 구하고 있으니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이제 그만하면 되었으니 정말 용서해 주어야지!” 뭐 이런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 딸과 똑 같은 수준에 있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이 딸의 문제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려 했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왜 자기를 무조건 용서해 주는지를 이해하려 했다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오, 통재라!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려 하다니! 그것은 이해가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사실 나도 지난 시절 이와 같았습니다. 아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시큰둥했습니다. 그래도 체면상 어쩔 수 없이 대답 정도는 해야겠기에, 나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글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가 과연 그분을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내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실은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분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들려주는 작은 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를 졸라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챙겨 집을 떠나 모든 것을 다 탕진한 후에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가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요? 다시 돌아가면 아버지가 반갑게 무조건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여전히 작은 아들로 받아 줄 줄로 생각하며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대가와 보복을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굶어죽은 것보다야 낫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하인이라도 좋으니 그 집에 빌붙어 생계라도 해결하자는 속셈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그렇게 사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무조건 용서해 줄 것이라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지난 시절 단 한 번도 아버지와 그렇게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자신 한 번도 아버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는 그에게 다만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두려운 보복. ‘요셉’의 형들이 이 작은 아들과 꼭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동생이 그들과의 두 번째 상봉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 후에 왜 그렇게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지난 죄악을 모두 일소에 부치고 무조건 용서해 주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경쟁과 시기, 음모와 잔재주 등으로 잔뼈가 굵은 그들의 사전에 조건 없는 용서라는 단어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이 베푸는 호의(好意)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고, 대가성(代價性) 없는 정치 헌금이 있을 수 없듯이, 그들에게 용서란 낯설고 생소한 단어일 뿐입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늘 ‘요셉’의 의도나 진심을 헤아리느라 바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동생의 진심을 밝혀내려 했지 그 진심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전도나 봉사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가 이면(裏面)에 감추고 있는 진정한 의도를 읽으려 한다는 점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우리의 문제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더 힘들고 어렵다는 점 말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용서가 위로나 위안이 아니라, 부담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요셉’은 그동안 몇 번에 걸쳐서 형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두려움은 가시기는커녕 ‘야곱’이 죽은 후에는 더욱 큰 공포로 짓눌려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의 유언을 들먹이며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자기들을 용서해주라는 유언을 그들에게 남겼다는 것이지요(16-17절).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조금 전 비유로 들었던 딸의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을까요? 진심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섭섭함이나 답답함을 넘어 화가 치미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심하면 보복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례를 비유로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왕의 아들의 결혼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왕은 자신의 초청을 거절한 백성들과 그 동네를 진멸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마 22).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화자는 그가 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7절).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과 측은함에서 흘리는 눈물이었겠지요! 눈물을 흘리기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심, 즉 “독생자”를 믿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그분은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눅 13;34-35)
형들 앞에 선 ‘요셉’의 모습이 ‘예루살렘’ 앞에 선 그리스도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예루살렘’에 보내신 것처럼, ‘요셉’을 그 형들에게 보냈던 것처럼 보입니다. 두 경우 모두 용서라는 코드를 그들의 유전자 속에 심어주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사실 ‘요셉’의 형들이나, ‘예루살렘’이나, 도자기를 깨뜨린 그 딸이나, 한 결 같이 AIDS(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듯이 ‘에이즈’란 무슨 특별한 유전질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병균에 대항하는 항체(抗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 모두는 용서받는 일에 지극히 서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가 오히려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니 늘 “왜?”하고 묻습니다. 용서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고 두려운 것은 아닐까요?
두려워 말라. 물론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요셉’의 형들의 경우만 해도 두려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흉이자 원인 제공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어려워하기 보다는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내 속에 용서에 감응할 수 있는 센서가 아예 없거나, 또는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한 번도 진정한 용서를 받아본 적도 없고, 나 역시 진정으로 용서해본 경험도 없습니다. 나나 세상이나 항상 용서에 전제조건을 달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동생이 형을 용서하겠다는 데, 아버지가 자식을 용서하겠다는 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겠다는 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아무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분의 음성을 듣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 ‘요셉’이 형들에게 들려주는 그 위대한 용서의 음성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절). ‘요셉’은 형들로부터 마치 다짐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두 번씩이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복수는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지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행여나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목도하게 됩니다. 형들의 자식들을 맡아 길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장면이 그것입니다(21절). 약속의 보증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인데,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분에 넘치는 ‘헤세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로마서>는 이보다 더 큰 ‘헤세드’가 있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자식들을 맡아 길렀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의 용서를 아무 두려움 없이 믿을 수 있다는 담보이자 증거라는 말입니다. <로마서>는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복음의 가장 놀라운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거나,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다 거나, 우리와 화목하셨다 거나,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절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형님이 되셨다는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뻔뻔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아무 겁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우리의 요청을 아뢸 수 있다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요한일서> 역시 한 목소리로 합창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여전히 그분의 용서가 의심스럽습니까? 여전히 그분의 용서가 두렵습니까? 지금 미워하고 있는 그 누군가를 용서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4. 요셉 교회, 요셉 목사
얼마 전 TV 뉴스에서 공중 화장실에서 거주하고 있는 어린 세 형제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서 그 후유증 때문인지 정신 장애 증상이 생긴 상태이고, 이들 어머니는 그 때문인지 아이들을 내버리고 가출하고 없습니다. 잠은 공중 화장실에서 해결하고, 끼니는 백화점 등을 돌아다니면서 공짜 시식 코너 같은 곳에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은 어떻게 지내는지 기자가 물었더니 화장실 벽에 걸려있는 온풍기를 틀어놓고 언 손을 녹인다고 합니다. 부모가 얼마나 무심했던지 세 아이들 모두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아서 동 사무소나 기타 복지단체 같은 곳에서도 도와줄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 아이는 법적으로 무국적자들입니다. 대한민국에 이처럼 부모들이 내다버린 아이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가족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지요.
누가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까요? 누가 이들에게 복음(福音)이 되어야 합니까?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국가나 정부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답을 한 사람의 원조(元祖)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계몽시대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일 것입니다. 그는 저서 <민약론(民約論)>에서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분위기로 보면 아주 혁명적이고 누구나 귀가 솔깃했을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라면 그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목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소위 보편적 복지 논쟁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루소’라는 사람은 생전에 여성 편력이 대단하여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만나는 여성들마다 그의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나중에는 ‘루소’ 자신도 누가 자기 아이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가 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한 집에 모두 같이 살아야 하는데 그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일까? 그는 국가를 생각했습니다. 가정 대신 국가가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결국 자기가 할 일을 국가가 대신 좀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이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결국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그 원대한 이상(理想)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귀찮고, 힘이 들고, 돈이 드는 일이니 내 대신 정부나 국가가 맡아서 해달라는 것이지요.
요셉의 복음. ‘요셉’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처음 형들에게 비친 그의 모습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생 앞에서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 떨었습니다. 동생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때 그들은 더욱 크게 떨었습니다. 그들이 지난 날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형들의 지난 잘못도 용서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형들에게 몇 번이고 거듭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두려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이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요셉과 화평”(peace with Joseph)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만, 그들의 현실에서 “요셉의 평강”(peace of Joseph)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요셉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만, 그것이 내면화 되고 육화(肉化)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의 복음”이 여기까지라면, 안타깝지만 그의 복음은 온전한 복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한 것이 “요셉 복음”의 전부였을까? 아닙니다. 산의 정상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요셉 복음”의 절정은 용서와 화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절정은 이것입니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21절중).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의 진수(眞髓)를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요셉’ 앞에 선 형들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였으며, 멸망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진노를 그분의 아들 예수님에게 전가하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和睦) 즉 화평(和平)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판관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義人)이라는 판결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요셉’의 형들처럼 여전히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심판자가 아니라,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평”(peace with God)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평강”(peace of God)을 자동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왜 그럴까? 단순히 원수에서 친구가 되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은, 따지고 보면 어디까지나 사회적이고 법적인 변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재판관이 한 강도를 무죄방면(無罪放免) 했다고 해서, 그 재판관이 강도와 가까운 친구가 되겠다거나, 사랑하는 연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도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기까지 라면, 즉 단순히 용서하고, 무죄방면(無罪放免)하고, 구원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라면, 복음은 완전한 복음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동생으로부터 몇 번이고 용서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이 여전히 떨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재판관이 이 강도의 아버지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정은 이전에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신약> 곳곳에서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나니”(롬 8:15-16).
여기서 성령은 양자의 인격입니다. 원수가 갑자기 양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새로운 인격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형님으로 부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물론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자란 사람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에 호감보다는 불쾌감을 더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가 갖는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친밀함과 자애로움일 것입니다. 나도 참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인데, 내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더지도 자기 자식은 끔찍이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난 번 ‘밴쿠버’ 방문 시에도 그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둘째 아들 녀석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가엽고, 측은해 보이는지 속으로 눈물을 좀 흘렸습니다. 오래 만에 우리를 만나 그런지,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편지 않다는 등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공항에서 우리를 바래다주고 홀로 되돌아가는 녀석을 보면서 울컥 눈물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도 바로 이런 아버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요셉 교회, 요셉 목사. ‘요셉’이 전하는 복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이제 ‘야곱’ 공동체 즉 ‘야곱’ 교회의 맏형이 되고, 목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야곱’이 방치해두었던 가족 공동체, 즉 가정 교회를 회복하고 새롭게 개척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 즉 “계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의 계보가 이러하니라”(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도합 열한 개의 계보 중에서 “하늘과 땅”의 계보를 다루고 있는 첫 번째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도 결국 가족 즉 교회에 관한 이야기이며, 교회가 없이는 복음도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구 사회를 거치는 동안 가족의 의미나 가치가 <구약>에서 가르치고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버렸습니다만, <신약>의 복음은 이를 다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사람들이 학교나 직장 또는 결혼 등을 통해서 이동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가족은 해체되고 그 전통과 역사 또한 단절되어가는 이 시대에 “신약 교회”의 이상과 정신은 더욱 각별하다 하겠습니다.
‘요셉’의 소명도 이것입니다. 즉 “요셉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며, 그리고 자신이 “맏형”이 되는 교회를 이루겠다는 선언입니다. ‘루소’가 그 자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야곱’이 방치해 두었던 그의 후손들을 맡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며, 기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가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화자는 잠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50:22-23). 그는 실로 소명이 시키는 바대로 열정적으로 살다 간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요, 사도로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자기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참고. 요. 19:27). 그리고 부활 후에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주문하기도 했습니다(요 21:15-17).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유대’ 국가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제자가 맡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요청은 ‘베드로’로 하여금 제자가 아니라 선생이 되라는 것이고, 자식이 아니라 부모가 되라는 것이며,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제자로 부르실 때부터, 이 같은 계획과 꿈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와 우리 교회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약간 다르게 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교회에서 서 동관 목자와 김 태정 목자가 떠나고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대답이, “아, 그야 다른 교회로 옮기면 되지”라고 한다면, 우리 교회는 앞날이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날 것이 분명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사 입히고, 교육을 시키는 것은 자녀들이 어린 아이로 남아있지 않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부모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식의 소명은 부모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근심은 자식이 자라지 못하고 늘 지진아(遲進兒)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식을 부모는 평생을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며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실패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근심의 자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와 <우리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약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5․8 기도 제목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였습니다. 이 기도를 성취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전략은 <동관 목장>의 네 양(洋)이 모두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 안에 <순애 교회>, <필연 교회>, <혜영 교회>, <재진 교회>가 세워지면 됩니다.
우리의 목자 장이자 맏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소명을 이루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중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셨던 사역,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사역이 곧 나의 사역임을 늘 일깨워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헌신하고 결단합시다.
15. 이집트의 관(棺)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 이들은 1950년 <6․25 사변>을 일으킨 장본인들입니다. 김일성이 주범이라면 나머지 두 사람은 공범들입니다. 이 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범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독재자였으며, 거짓과 배신의 명수(名手)였으며, 공포정치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죽음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갔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미이라’가 되어, 죽음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모습으로 화려한 관 속에 누워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속의 ‘바로’ 왕처럼 말입니다.
누가 이들을 이처럼 박제품(剝製品)으로 만들어놓았을까요? 그들의 추종자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임종 시에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이라도 했을까?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아서 죽어서도 계속 통치하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들이 무엇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 했든, 이들 세 ‘미이라’가 오늘날 관광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정작 본인들이 가장 들려주기 싫어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이 한 결 같이 두려워하는 그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죽음 말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죽음 말입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은 죽은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떠한 절대 권력도 죽음을 이길 권력은 없다는 것을 이들 ‘미이라’는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풀은 말라 죽고, 꽃은 시드는 것으로 그만이지만, 이들의 죽음은 그렇지 못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말씀은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심판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을 대비하고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 있는 ‘요셉’의 관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의 죽음 이후 출애굽에 이르기까지 사백여 년의 세월 동안 그 땅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죽음을 이길 왕후장상(王侯將相)은 없음을 교훈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사실 <창세기>는 죽음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부터, 질서와 생명과 희망과 약속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창세기>는 이렇게 끝이 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가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거룩하다고 환호하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는 갖가지 기이한 생명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창조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벗었으나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결말을 짓고 있습니다(창 2).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누리던 그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과 영광과 존엄도 그를 결코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구원한 ‘요셉’이었지만 정장 그 자신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참고. 마 27:42).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그 관은 그렇게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시대와 이후 사백년을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말입니다. ‘모세’의 노래가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시 90:10-11)
실패할 수 없는 약속. 그의 노래는 허무와 무의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간절한 소망도 함께 담겨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마찬가지로 ‘요셉’의 관 역시 죽음의 필연이나 권능만을 우울하게 증거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라, 약속과 희망 역시 실패할 수 없음을 함께 증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약속과 희망이란 원래 믿는 자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겠지요. ‘에덴’ 동산도 원래 그렇게 출발했던 것입니다. 약속과 희망과 생명과 활력의 동산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에덴’ 동산에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도 ‘하와’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본인은 ‘하와’가 뱀의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불신했다는 사실에 더 방점(傍點)을 두고 싶습니다. 알다시피 불신의 결과는 전 우주적이었습니다. 만물의 지배자, 통치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그가 죄와 죽음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지요.
‘하와’가 끝까지 불신 가운데 살다 갔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오늘날에도 충실한 ‘하와’의 후예들은 끊임없이 나타나서는 세상을 혼미하게 합니다. 아마 이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가장 열렬한 ‘하와’의 후예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만들어진 신>을 쓴 ‘리차드 도킨스’와 <시간의 역사>의 저자 ‘스티븐 호킹스’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구”일 뿐이며, 우주는 창조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지옥이나 천국도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믿든 어디까지나 본인의 자유이겠지만,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한 마디 할 때마다 마치 선지자나 구세주를 만난 듯 열광하고 그들의 주장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환호하며 응답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아, 불신이란 이렇게 쉬운 것을! ‘요셉’의 관도 무려 사백여 년을 한 자리를 지키면서, 그 앞을 지나치는 수 없이 많은 후손들에게 동일한 약속을 증거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오직 믿음의 자손들에게만 의미 있게 다가갔을 것이리라! ‘요셉’의 관이 들려주었던 약속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었던 그 약속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5:13-14).
이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는 사람은 그동안 “약속의 땅”에서 살아왔던 ‘요셉’의 형들이 아니라, 이방의 땅, 약속 밖의 땅, 이집트에서 살아온 ‘요셉’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50:24-25).
그가 들려주는 약속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반복해서 들어왔던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가 그 약속이 “하나님의 맹세”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들려주던 그 약속,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반복했고, 아버지 ‘야곱’이 반복해서 들려주던 그 약속을 후손들에게 다시 반복했고, 사백년 동안을 그렇게 한 결 같이 반복해갔던 것입니다.
구름 같은 증인들. 아무런 기념비조차 없었기에 사백년 동안의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허물어지고, 낮아져서 누구의 무덤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을 그 무덤. 하지만 그 무덤은 그냥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은 결코 예루살렘을 잊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역사의 민족이라는 증거입니다. 역사가 없는 민족, 있어도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6․25 사변>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미국 정부는 아직도 이 한반도 어딘가에 묻혀있을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유해는 극진한 예를 다하여 그들의 국립묘지에 옮겨 그 이름을 그들의 역사에 남깁니다.
우리나라도 참으로 모진 근대사를 겪어오는 동안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이와 같은 전쟁 유해를 발견하는 일에 거의 무관심하게 지내왔습니다만, 다행스럽게 우리의 의식 수준이나 역사의식도 많이 향상되어 전쟁 유해를 발굴하는 일과 유가족을 찾아 보상하는 일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의 관”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일에 하나의 기념비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요셉’의 관, 즉 하나님의 약속은 대를 이어가며 전해져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감당했는지 알 수 없으며, 그들의 이름을 더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사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증거로 <창세기>가 끝나고 곧바로 이어지는 책, <출애굽기>에서 한 부부의 이름 ‘암람’과 ‘요게벳’을 만나게 됩니다(출 6:20). 이들 부부는 ‘모세’와 ‘아론’의 부모로서,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가르치고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 당대에 ‘요셉’의 유훈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요셉’의 마지막 유언은 이루어졌습니다.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는 그 유언 말입니다.
<신약>은 이상할 정도로 ‘요셉’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유일하게 그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그리고 ‘암람’과 ‘요게벳’과 ‘모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 11:23-24)
‘요셉’의 관은 위대한 시작의 책 <창세기>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요셉’의 관은 없습니다. 있다면 “빈 무덤”의 증거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백년의 어두운 세월 동안 무수한 증인들을 통해서 ‘요셉’의 관을 보며 희망의 역사를 이어갔던 것처럼, 새 이스라엘 교회도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빈 무덤”의 증거를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우리는 죽음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나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우리 또한 그 부활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1-57)
연습과 토의
* 아래 질문들에 대해서 별도 노트북에 나 자신의 답변을 기록한 다음 지체들과 나누어봅시다.
1. ‘야곱’이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겠습니까? 나는 내 자식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줄 계획입니까? 그 계획으로 일환으로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두 족장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임종 시에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각자의 평소의 모습과 비교해 봅시다. “자라간다 또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두 족장의 선택은 어떤 점에서 닮았으며, 어떤 점에서 대조적입니까? 그리고 두 선택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야곱’이 후손에 대해서 지고 있는 책임과 특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또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에 대해서 지고 있는 독특한 책임과 권리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지고 있는 독특한 책임과 권리는 무엇입니까? 나는 성전이고 또한 교회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독특한 권리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과연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음 구절들을 상호 비교하며 논의해 봅시다: 창 48:21; 출19:6; 행 1:8; 마 28:19-20; 벧전 2:9.
4. ‘요셉’은 “요셉 교회”의 목자요 목회자였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5. ‘이집트’에 있는 ‘요셉’의 관에 대해서 묵상해봅시다.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토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