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임종 유언(1)-야곱의 유산
김태정 목사창세기 48:1-11약 9분 분량
어느 새 내 나이 환갑도 훌쩍 지나 예순 셋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들어 부쩍 은퇴 후의 삶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한 번은 먼저 은퇴한 교수 한 분을 우연히 만나, 퇴직을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물었더니 지금부터 잘 노는 연습부터 하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다른 취미나 특기가 없는 나로서는 이분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장수(長壽)가 축복이라고 합니다만, 나로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장수하면 뭐합니까! 딱히 소일거리가 없고, 또 있다 해도 함께 할 가까운 친구가 없다면 장수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부터 가볍게라도 만나 시간 보낼 수 있는 친구관계라도 많이 만들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만, 생각대로 될지 의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어왔습니다만, 친구로서 관계 맺은 경우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대학교 교수라는 직업이 사람들을 만나고 상대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만, 주로 만나는 대상은 학생들로서 그들은 가르치는 대상이었지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집사로 지내던 시절, 남전도회 활동 등을 통해서 믿음의 친구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내 관심사는 항상 청년이나 학생이었고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동료 집사님들이나 장로님들과의 교제는 자연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난 뒤에는 교회에서 나는 더욱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역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교인들과 친구로서 교제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점차 내 혼자만의 세계에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내가 은퇴 이후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요즘 들어 하루에 적어도 한 두 번은 꼭 이런 생각에 빠져 지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무엇을 하며 여생을 보내야 하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성경>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사도가 처형당하기 전에 마지막 2년을 ‘로마’에 있는 한 집에 가택 연금 상태로 있으면서 어떻게 여생을 보냈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가 머무는 곳이 교회였고, 그 자신이 곧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 이거야! 여기에 길이 있었구나. 나도 여생을 이렇게 보내면 되겠구나.”
나는 지금 마음에도 없는 괜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거룩한 척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정말 이 두 구절에서 큰 감명과 위안을 받았습니다. 나는 휴대폰 메모 수첩 속에 기도 제목 네 가지를 입력해 두었습니다. 이 중 첫 번째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로부터 영감(靈感)받은 것입니다. 즉 내가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교회가 되고, 내가 곧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일이 내 소명이자 내가 받은 은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야곱의 여생. ‘고센’에서 보낸 ‘야곱’의 여생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30 년 동안 ‘가나안’과 ‘하란’에서 살았던 그 치열했던 세월에 비교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속이고, 속고, 도망치고, 쫓고,... 경계심과 긴장을 한 번도 늦출 새도 없이 살아온 그가 이처럼 편안한 나날을 보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주변에 그를 속이고 괴롭히는 자도 없고, 아들과 딸들, 손자와 손녀들이 한 마을에 모여 풍요롭고,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특별히 바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은퇴 이후의 삶이 모두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주변에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없다는 것만 빼고 나면 완벽한 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은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주님, 그저 이 행복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 만을 바랄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여생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면, 그를 “살아있는 교회”로 부르기에는 어딘가 미진(未盡)한 부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법! 그의 육체는 이제 몰라볼 정도로 수척하고 쇠약해져서 침상에서 앉고 서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병까지 얻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수도(首都) ‘라암셋’에 있는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소식을 전하기에 이릅니다. 이번에는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이전에 ‘야곱’이 이들 손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요셉’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은 아마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맞이하는 이스라엘. 주변에 근심스런 눈빛으로 둘러 앉아 있는 자식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안간 힘을 쓰며 겨우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앉기는 했지만 손과 발은 떨리고 있으며, 눈마저 쇠약해져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더 이상 이 노인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물려줄 유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물려줄 유산은 대기업의 회장님이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회사가 아닙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물려주는 파탄 직전의 나라도 아닙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이 그의 아들 목사에게 물려주는 담임목회자 자리도 아닙니다. ‘야곱’이 남겨줄 유산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는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의 순서를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의 유산. 왜 이 장면이 ‘야곱’의 생애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하는 것일까? 교회는 실은 아무 수식어가 필요 없는 단어입니다. 그 모든 좋은 수식어를 다 함축하고 있는 존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교회”를 굳이 정의해 보자면, 그 반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죽어서 말하지 못하는 교회”의 반대가 “살아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교회”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야곱’이 마지막 안간 힘을 쏟으며 자식에게 남겨주려는 유산이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죽으면서 영원히 남겨놓은 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의 이름은 한 나라와 한 민족과 교회의 이름이 되어 그날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야곱’의 혈연의 후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새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기에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아닙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래서일까? ‘야곱’은 지금 ‘이스라엘’보다 더 중요한 한 이름,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간증은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3절);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절).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처음 하나님을 입에 올린 것은 앞을 잘 못 보는 아버지를 속일 때였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라”(27:20).
‘야곱’이 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벧엘’에서 꿈을 꾸고 난 후였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회고 한 바 있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6-17).
그리고 그로부터 두 장(章) 뒤에 아내 ‘라헬’이 자식이 낳지 못하여 그에게 투정을 부리자 화를 불같이 내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30:2).
이처럼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한다 해서,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를 가든 늘 함께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더 많이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언제까지 이런 모습, 즉 ‘야곱’으로 살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마침내 변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식에게 들려주고 있는 마지막 고백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의 유산.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물려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 즉 보배는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식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유산인 것이지요.
내 휴대폰 메모 수첩 속에 입력해 둔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바로 이 유산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겨놓으신 유산 중에 일억 원의 장학 기금이 있습니다. 평생 정부 도정업(搗精業)을 하시면서 푼푼히 모아두신 것인데, 당신의 고향 출신 자녀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장학금으로 쓰라고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네 형제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지금까지 계속 그 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도 두 아들과 두 며느리와 마주 앉아 내 두 번째 기도제목을 나누려 합니다. 내 아버지 즉 그들의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무엇을 남기셨으며, 나는 또 그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그리고 그들은 또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특별히 물려줄 재산도 없고, 또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기에,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서 선교나 장학 재단을 설립하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재단 이름도 하나 정해두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유산입니다. 덧붙여 자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기금을 계속 늘리면서 사업을 지속하고 확대해가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내가 그들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간증은 무엇인가?
우리교회는 미래의 신입회원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나를 본받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이 교회가 계속 존속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자랑할 만 한 전통이나 유산은 무엇일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