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인의 하나님
김태정 목사창세기 4:10-16약 11분 분량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듸 없어 냇가의 안자시니
져 물도 내 안 같아여 우러 밤길 녜놋다
이 시는 어린 단종이 폐위(廢位)되어 영월로 유배될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서 호위 책임을 맡았던 왕방연(王邦衍)이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노래입니다. 어린 왕을 유배지에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흐르는 시냇물에 이입(移入)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흐르는 시냇물 소리마저 유배(流配)의 애절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신하가 유배지에서 이전에 누리던 왕의 총애와 사랑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이나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이 이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유배나 귀양은 당시 사형(死刑) 다음으로 중한 형벌이었던 모양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감옥에 가두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굳이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격리시키는 이유를 우리는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이나, 고통이나, 불편함, 그리고 그리움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형벌. 유배란 결국 사회적 죽음으로서, 고대 ‘유대’ 사회에서도 공동체로부터 추방은 죽음 다음으로 큰 형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담’이나 ‘가인’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로 받은 형벌은 유배나 귀양에 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법정 판결과 비교하자면, 감형(減刑) 없는 무기징역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다시는 낙원의 동산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가인’은 평생 홀로 배회하여 외롭게 떠돌이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서 홀로 수감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인생을 창살 없는 감옥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는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동산 밖에서, 하나님과 유리(遊離)된 나 자신만의 삶을 말하는 것일진대, 그 자체로써 감옥이라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거의 무제한으로 누리던 자유와 특권을 송두리째 박탈 당해버렸으니, 두 사람에게는 이전의 삶을 기억한다는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먼 훗날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 망향가(望鄕歌)를 부르며 슬픔에 잠겨있던 이스라엘 실향민들을 떠올려 보면, 지금 ‘가인’의 처지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그 좋았던 시절이 기억이 나서 더 서럽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를 버리고 집 나간 작은 아들도 같은 서러움과 멸시를 당했는데, 그 역시 그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내 집이 있었고, 내 아버지가 있었고, 내 형제가 있었고, 공동체가 있었으며, 예배가 있었고, 찬송이 있었으며, 성경공부가 있었으며,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가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주인이었고 주인의 아들이었지,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아, 자유란 그처럼 엄청난 선물이었던 것을 이전에는 미처 몰랐구나! 그 영광의 주님을 내가 몰랐구나!
‘가인’과 ‘아벨’은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마치 이북 출신 부모님을 둔 이남의 자식들처럼 말입니다. 또는 이민 간 부모를 둔 자녀들처럼 말입니다. ‘아담’이나 ‘하와’에게 ‘에덴’을 향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 깊고 깊어져 고치기 어려운 질병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움이 그들의 병이었습니다. 그리움이 더할수록 지난날 자신들이 저지른 그 행동이 더욱 후회스럽고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아,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오랜 외국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한 자매님이 그 긴 세월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이 그리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남편도 곁에 있었고, 그 세월동안 세 자녀를 두었음에도 무엇이 그토록 그리웠던 것일까요? 본인의 아내도 늘 그리움의 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남편인 내가 있고,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남편이 있었으나 그는 늘 타인이었습니다. 학교와 교회 일로 주변에 있기는 했으나, 내 속에 들어오지는 않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 아들이 어렸을 적에는 그나마 그들이 위안이 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들도 결혼을 해서 떠나버렸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때로 우울증을 낳기도 하고, 또 때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로 화산처럼 폭발하기도 합니다.
‘하와’도 혹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친밀하기만 했던 남편과의 관계는 타락 이후 분리와 분열을 겪으면서, ‘아담’은 곁에는 있으되 실은 없는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동거는 하였으되 별거의 상태로 접어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네가 남편을 원할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도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 부부 사이에 그리움이 해결되지 못하면 그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대답은 당신의 몫입니다.
‘가인’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항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는군요. 두 번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이렇게 나를 저 광야로 내몰다니요. 너무합니다. 너무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외로움과 그리움의 어두운 그림자를 상상하며 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인의 항변. 왕의 아들이자, 부모의 구원자이며, 세상을 구속하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가인’이 광야로 내 쫓긴다는 사실. 단종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에게 가해진 형량은 그가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거운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가인’은 판결이 부당하다며 항소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항소를 들어봅시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내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절).
피해자가 아니라 피의자가 항소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만듭니다. 잔혹한 살인자 서진환을 연상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최근 한 주부를 성폭행하고 무참하게 살해한 장본인입니다. 그가 법원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자, 상고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형량이 너무 무겁다는 것입니다!
살인자가 살인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얼마 전 제주도 올레 길을 산책하던 한 여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강성익 역시 법정에서 지금 ‘가인’과 비슷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형량이 너무 무겁다면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것이 그것입니다. 원래 배심원제도를 도입한 배경에는 판사의 판결이 지나치게 가벼워, 배심원단의 일종의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판결을 보다 엄하고 무겁게 내리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실제 그동안 배심원단이 내린 평결을 통계적으로 분석해보니 오히려 판사의 선고보다 더 가볍게 나왔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나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강성익은 1심 재판에서 사형이 아닌 2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배심원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등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 동정심을 유발한 것이 형량을 낮게 받은 이유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에 분개한 쪽은 피해자 유족입니다. 유족의 분노인 즉은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더 죽여야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느냐며 재판관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피해자들보다 더 분노한 사람은 피의자 강성익이었습니다. 그는 형량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자 재판관을 향해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불의한 판결. ‘아벨’이나 ‘아벨’의 유족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들 역시 하나님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하며, 불공정하다고 주장할까요? ‘아벨’의 유족이 기대하는 공정한 심판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번 살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했을까요?
<구약>에서 “기업을 무르다”는 말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뜻입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고엘 법”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제도는 살인자에 대한 피의 복수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복수를 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척일 것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규례에 의하면, ‘가인’은 사형(死刑)을 면할 수 없습니다.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참고. 창 9:6; 민 35:16). 그런데 ‘가인’의 경우는 참으로 일이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계획적으로, 아주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동생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복수를 해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이 동생을 죽어버렸으니 난감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호자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가해자로 돌변하는 경우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한데, ‘가인’이 그 원조(元祖)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가인’의 대꾸가 참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무슨 내 아우를 지키는 목자(牧者)라도 되라는 말씀입니까?”
이 질문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가인’은 지금 자기 입으로 “고엘 법”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그 법의 제정자인 하나님에게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할까? 과연 그에게 무어라 답해주어야 할까?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복수를 해주어야 할 형이 오히려 동생을 죽여 버렸으니, 누가 억울한 ‘아벨’을 위하여 피의 복수를 해 줄 것인가? ‘아담’과 ‘하와’? 아니면 다른 형제들? 하나님이 직접 나섰습니다. 어떤 처벌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사형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 정해놓은 형량(刑量)에 의하면 말입니다. 그런대 실제 판결 내용은 사형이 아닌 귀양 즉 유배(流配)입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절하). 그냥 살려둔 것입니다!
살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특별한 조치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5절). ‘가인’이 정확하게 무슨 표를 받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는 상징적으로 ‘아담’에게 입혀주신 “가죽 옷”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행여나 누군가 ‘아벨’을 위한 “피의 복수”를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막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비록 솜방망이 처벌이긴 해도 하나님 자신이 이미 처리한 사항이니,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다른 어느 누구도 다시 그의 죄를 묻지 말라는 의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부분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한 그 법을 스스로 어기고 있습니다!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라, 아예 그 법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도, ‘아벨’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고 있다고 해놓고서는 정작 판결은 엉뚱하게 해버렸습니다. 이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누구보다도, ‘아벨’이 그 판결에 만족하고 수긍할 수 있을까요? 의롭고 공정한 판결을 해주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을 그와 그의 유족들이 과연 이 재판을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서진환이 무기징역 형을 받자, 살해당한 여인의 남편이 도저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다면서 상고(上告)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아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이 남편보다 더 억울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하나님이 내린 판결이니 어디 상고할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호소는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자나 강간을 당한 여인이 도움을 외치는 절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와 공평이 어디 있느냐? 정말 억울해서 못살겠다. 살인자가 그냥 길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다니!” 억울한 자를 신원해 주는 하나님인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음부도 그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집어삼켜 버렸다고 말합니다(10절). 이는 그 땅도 더럽게 오염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피가 묻은 사람이나, 땅, 혹은 물건은 다른 무엇보다 더 더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생명이 그 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레 17: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오염된 땅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자를 도피성에서 따로 살게 하는 것도 그 땅의 나머지 부분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억울하게 당한 자를 신원(伸寃)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시 34:19).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 판결로 그분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은 듯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그분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원함. “가인 재판”을 방청하면서, 우리는 ‘마이클 샌더스’가 물었던 질문, 즉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방청객들에게 이 재판은 정의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판결에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벨’과 그의 유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인’조차도 불만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떠했을까? 재판 결과에 흡족해 했을까? 그들의 아들 ‘가인’이 귀양길을 떠나는 것을 고소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애틋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아들을 떠나보냈을까? 그들의 첫 아들이자, 자신들과 세상의 ‘메시야’가 될 수도 있었을 그 아들, 동생의 ‘고엘’이 되었어야 마땅한 그 아들을 말입니다. 누가 이들 부부의 참담한 심정을 감히 이해라도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우리는 “가인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정의롭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어떠합니까? 과연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억울함을 신원해 줄 수 있을까? 가족이나 동족으로부터 극심한 질시와, 편견과, 조롱과, 오해 속에 살다가 끝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그의 억울함을 누가 신원해 주어야 하는가? 과연 이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아무 잘못도 없는 그 아들을 죽음에 내주었던 아버지의 행동은 과연 정의로운 것이었던가? 그 아버지의 억울함은 누가 보상하고, 신원해주어야 합니까?
십자가 사건은 정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스캔들이었습니다. 법과 정의가 넘치는 곳에 처벌과 사망이 넘쳐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정의롭고 공평하기만을 바랍니까? 그래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나로 인해 죽어야 했던 아들과, 그 아들을 잃어야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어야 할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