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과
B. 권면(2)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5:13-6:10약 26분 분량
방종에 대하여
(5:13-6:10)
<갈라디아서>에서 제 3부, 즉 “권면”의 내용과 구성에 관해서는 제 3부의 서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은 이중적이라고 언급한바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율법주의”와 “명목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방임주의”(또는 “율법폐기론”)입니다. 전자(前者)가 “유대주의”라는 외부의 적이라면, 후자(後者)는 보다 교묘한 것으로서 교회의 태동기부터 신자(信者) 개개인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었던 내부의 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가 실질적인 위협이었다면, 후자(後者)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상존(常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려는 시도라면, 후자(後者)는 그 자유를 개인의 탐욕을 위한 무책임한 “방임주의”로 몰아가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 제 3부는 이들 두 신학적 오류에 대한 지침과 훈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1) 권면 I(4:12-5:12): “유대주의”에 대한 경고와 권면
(2) 권면 II(5:13-6:10): “방종”에 대한 경고와 권면
두 번째 권면도 첫 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서 상투적인 서신의 관례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자유의 헌장(憲章)을 반복 선포하면서 후치사(後置詞) “그러므로”(ϒάρ)의 사용과(번역되지 않음) 함께 짧은 부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ϒάρ) 굳건하게 서서...”(5:1);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ϒάρ) 그 자유로 기회를 삼지 말고...”(5:13).
(2)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λέϒω δέ, 레고 데)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5:16): 이런 표현은 상투적으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는 내용들을 하나의 자료로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3:17; 4:1).
(3) 새로운 시작이나 전환이 있는 곳에서 등장하는 “형제들아”의 호칭: “형제들아...”(5:13); “형제들아...”(6:1). 비교를 위해서 서신의 다른 곳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11; 3:15; 4:12, 28, 31; 5:11; 6:18.
(4) 강조를 위하여 유사한 의미를 갖는 두 접속사 ἄρα(아라)(“그러므로”, “따라서”)와 οὖν(운)(“그러므로”, “따라서”)을 동시에 연결해서 결론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 “그러므로(ἄρα οὖν)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5) 하나의 단락임을 구분할 수 있도록 처음과 끝을 수사적 수미상관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이 단락부터 사도의 권면은 “자유”가 “방종”으로 흐를 위험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자유가 율법의 구속을 받아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기회”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 줄 처방약은 이 단락에서(5:13-6:10) 핵심어로 등장하고 있는 세 단어, “사랑”과 “섬김”(서로 종노릇함)과 그리고 “성령”입니다. 이 세 단어는 마치 사람에게 있어 세포와 조직을 유지시켜주는 골격과도 같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랑의 주제가 이 단락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 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사도가 방종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하); (2)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5:14); (3)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5:19-21); (4)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5:22-23); (5) “우리가 선을 행하되...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9-10); (6)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너희는 온유한 심정으로...”(6:1); (7)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6:2); (8)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6).
이처럼 서신의 나머지 부분이 온통 사랑과 섬김의 주제로 가득 차 있지만, 이러한 생활의 근간은 다름 아닌 “성령의 삶”인 것을 이 단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령에 관한 언급이 사랑이나 섬김이라는 단어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단락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하)는 서두의 권면도 “성령을 따라 행하라”(5:16상)는 권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행하는 삶”은 (1) 소위 “육체의 욕심”으로부터 신자를 보호해 줄 것이며(5:16-17), (2) 율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5:18), (3) 다양한 성령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을 맺게 할 것이며(5:22-23), (4) 성령의 인도를 체험하게 될 것이며(5:25상), (5) 자만하지 않게 할 것이며(5:26), (6) 범죄한 자를 회복하게 할 것이며(6:1상), (7) 자신의 책임을 질 뿐 만 아니라 타인의 무거운 짐도 함께 지게 할 것이며(6:2, 5), 그리고 (8) 영생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사도가 이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은 그 성격 상 일상생활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행동 강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우리는 앞에서 ‘디벨리우스’가 이런 견해를 제시한 첫 인물이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갈라디아’ 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때, 서신의 주제 “복음의 자유”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자유를 위협하는 두 번째 요소인 “방종”에 대한 처방전으로서의 기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5:13-6:10은 4:12-5:12와 함께 권면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바, 각 단락의 주제는 (1) 유대주의에 대한 반박과 (2) 방임주의에 대한 예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9과: 권면(2): 사랑/섬김/방종
19
사랑과 섬김과 성령
(5:13-18)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
문학과 역사
5:13-6:10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들은 상호 관련이 없는 일반적인 행동강령들을 의미 없이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둔 구체적인 것들이라는 점을 앞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단순히 “유대주의”의 주장들 즉 “율법주의”와 “명목론”에 걸려 넘어진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의 은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만 아니라, “복음의 삶”을 사는데도 실패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복음의 자유”를 “방종”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유혹과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주의”가 신학적 오류라고 규정한다면, “방임주의”는 일종의 신앙적 오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방임”이 무슨 신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자유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나 태도에 있어 이기심이라든지, 교만이나 무시라든지, 자기중심적인 생활 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류에 대한 적절한 처방전 역시, 그가 “유대주의”라는 신학적 오류를 공박할 때 강조했던 것처럼 “성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성령의 임재와 행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2)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이 단락에서 사도는 “기독교 방종”과 관련하여 서신의 나머지 부분을 관통하는 두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1)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 (2) “성령을 따라 행하라”(16절). 이 두 권면은 서로 독립적이거나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동기와 행위라는 인과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 예의 그 친숙한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라는 선언입니다. 특히 이 선언에서 접속사 “그러므로”가 기능하고 있는 바는, 첫 번째 권면이 두 번째 권면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행함”은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행위”의 바탕이자 토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머지 모든 권면들은 결국 이 두 권면을 보다 심화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선언/권면/경고(13-15절)
사도는 “기독교 방종”에 대한 권면을 시작하면서, 그가 직전의 단락에서(5:1-12) “유대주의”를 경고하면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복음의 자유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비교를 위해서 두 단락의 서두를 병행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5:1상)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5:13상)
두 구절에 차이가 있다면 구문론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앞 단락의 문장은 능동태로서 주어는 3인칭 단수형, 그리고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인데 반해서, 이곳에서의 문장은 수동태이며 주어는 이인칭 복수형입니다. 문장의 태(態)와 관련해서 두 문장은 의미론적으로 아주 미미하기는 하지만, 강조하려는 바가 다른 듯합니다. 즉 전자가 ‘그리스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비록 생략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조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두 문장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13절은 접속사 “그러므로”(ϒάρ)를 수반하고 있어, 13-18절 전체 내용을 앞 단락의 내용(5:1-12)과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접속사는 5:1절상에서 언급한 바 있는 “자유의 주제”를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다시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5:1상에서 자유에 관한 선언이 있은 후로 5:1절하-12 사이에서 내용이 다소 다른 곳으로 일탈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12절의 “냉소”로부터는 다시 돌아와 이전의 주제를 이어갈 필요는 있었을 것입니다.
두 문장에서 모두 “자유”의 품사는 여격(일종의 간접 목적어)입니다. 그런데 여격에는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는 여격과 목적이나 목표를 수반하는 여격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만, 13절에서는 후자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이 “자유”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선언에 이은 권면은 무엇입니까? 상호 대조되는 두 권면이 한 번은 부정문으로 또 한 번은 긍정문으로 번갈아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13절중)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자면 “그 자유를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자유”는 바로 직전에 진술한 바 있는 자유를 말함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기회”는 원래 “출발점” 또는 군사 용어로 “작전 본부” 등을 의미합니다만, 이곳에서처럼 “동기” 또는 “기회” 및 “구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참고. 롬 7:8; 고후 5:12; 11:12; 딤전 5:14).
그렇다면 “육체(σάρξ, 사르크스)의 기회”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단락 이전까지 이 단어는 주로 단순히 “혈육을 가진 인간”(1:16; 2:16) 또는 문자 그대로 “육체”(2:20; 4:13-14, 23, 29)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기는 합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이 경우 이 단어는 다소 윤리적인 함축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6:12-13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문자적인 의미로서의 “육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를 제외하면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육체”가 함축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들입니다. 예컨대, 인간의 타락하고도 부패한 본성, 죄악 성 등과 연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두 번째 권면은 무엇입니까? 긍정문으로 시작되는 다음과 같은 권면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하)
이 두 번째 권면은 분명 첫 번째 것과 반명제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표현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든지 또는 “사랑으로 종노릇” 하든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당연히 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그러나”로 시작하는 두 번째 명령문은 기독교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다시 한 번 반대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명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윤리∙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도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이점 사도 ‘바울’이나 “유대주의자”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주의자”에게 기독교인의 윤리∙도덕적 책임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충실하게 잘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기독교인의 윤리∙도덕적 책임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간에는 “성령의 인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랑”과 관련해서는 이전에 두어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사랑”과 관련해서 본 서신 내에서 두 곳을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는 5:6에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는 구절과 멀리는 2:20에서 고백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한 구절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와 관련해서는 16절 이후부터 언급하게 될 것인데, 16절에서 예의 그 친숙한 “(따라서) 내가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이 두 강조점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명령은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이 이중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가 가진 자유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1:10),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그토록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강조해오던 사도가 이제는 다시 “종노릇하라”고 하니 역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나란히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과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과 차별이 있음을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적인 동기와 외적인 구속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율법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의 노예가 되는 것은 일방적이고, 억압적이며,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은 자발적이며, 자유스러운 행동으로 실패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폐기처분되어야 마땅한가? 예수님께서는 그가 오신 것은 율법을 폐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5:17). ‘바울’ 역시 그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4절)
그의 이 말은 충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그렇게도 “율법주의”를 비방하고(예: 3:6-14), 율법의 한시적인 역할만을 인정했던(3:23-4:7) 그가 이처럼 태도를 돌변할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열심히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그가 정면에서는 율법을 공격하면서 뒤에서는 그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의 진정한 의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왜 이처럼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까?
이런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된 바 있습니다만, 보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 롱거넥커(R. N. Longerneck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R. N. Longernecker, 242쪽.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구절이 명령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사도는 이곳에서 율법을 행해야 한다든지 또는 완성해야 한다든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율법의 완성”은 기독교 생활의 결과인 것이지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14절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며, 그것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며 성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의 초점은 <로마서>(13:8-10)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드러내는 그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윤리∙도덕적 책임에 대한 동기가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결과는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자유에 대한 선언과 권면에 이어 다시 한 번 쓰디 쓴 냉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형식에 있어 앞 단락에서 했던 것과 같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절)
이것은 조건적이긴 하지만 경고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상징은 분명합니다. 짐승들이 서로 물고 뜯다가 결국에는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싸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고” “뜯는” 동사는 모두 현재형으로,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멸망하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결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서로 싸우는 상대는 누구입니까? 교회 내에서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와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며 “방종”으로 흘러간 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냉정하고도 무자비한 태도나 자세를 지칭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나을 듯합니다.
2. 권면과 약속(16-18절)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는 첫 번째 권면이 기독교의 윤리∙도덕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권면에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이는 첫 번째 권면에 대한 바탕이자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16절)
바로 이러한 “성령의 역할”이야말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기독교 윤리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라는 형식을 빌어 앞에서(13절하-14절) 언급했던 “사랑”의 주제를 이제 그가 이곳에서(16-18절) 전개하려는 “성령”의 주제와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16절의 선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 권면-“성령을 따라 행하라”; (2) 약속-“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그리고 이 구절은 이어지는 단락(5:17-24)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 질 것이며, 이후 다시 한 번 권면에 이어(5:25), ‘갈라디아’ 교회의 현 상황에 곧바로 적용될 것입니다(5:26-6:10).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성령과 함께 걸어라”입니다. 이 동사는 <바울 서신>이나 <요한 서신> 등에서 “행동하다” 또는 “삶을 살다”는 의미로 자주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 롬 6:4; 8:4; 13:13; 14:15; 고전 3:3; 7:17; 고후 4:2; 5:7; 10:2, 3; 12:18; 엡 2:2, 10; 4:17; 5:2, 15; 빌 3:17, 18; 골 2:6; 3:7; 4:5; 살전 1:12; 4:1, 12; 요일 2:6; 요이 4, 6; 요삼 3-4.
따라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방종의 삶”이나 또는 “율법적인 삶”과는 구별되는 삶의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현재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명령문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이 취해야 할 행동 방식에 대한 권면으로서, 이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그렇게 살도록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이전에 그들의 삶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고(3:3-5),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살아왔습니다(5:5). 그들이 회심 당시나 “유대주의”의 교리를 듣기 전에 이러한 “성령의 체험”을 했다면, 이제부터 “사랑의 종노릇”을 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성령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권면과 함께 약속이 따라 옵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물론 이 문장의 주어는 “너희” 즉 ‘갈라디아’ 교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두 존재는 “성령 하나님”과 “육체”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인격적 존재인데 반해 후자는 일종의 준 인격적 존재로 의인화 하고 있음을 봅니다. 성령과 육체가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싸우고 있는 이 상황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사도가 들려주는 약속인 즉은, 우리가 성령에 따라 행하면 육체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구절에서 이중 부정문을 사용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다시 한 번 성령과 육체를 대비시키면서, 이 둘이 서로 어떻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류의 처지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7절)
<헬라어 성경>은 이 구절에서 “그러므로”(ϒάρ, 가르)를 사용함으로써, 16절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더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육체와 성령을 대조시킴으로써 윤리적 이분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비단 <바울 서신>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 서신>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상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요한’의 이분법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서, 우주적 이분법이나 인류학적 이분법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18절은 무슨 새로운 사상이나 대조되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3-17절의 내용에 추가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 서두에 “그리고”(δέ, 데)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 하리라(18절)
사도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그의 두 권면 즉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와 “성령에 따라 행하라”를 “유대주의”의 “명목론”에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사도의 이러한 결론은 다소 기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와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5:1-6에서 마지막으로 다룬 바 있으며, “자유와 방종”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본문(5:13-18)과는 주제에 있어 다소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둘이 아니라 “자유와 율법”에 관한 주제 하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동일한 교인들에게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유와 율법”의 문제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유대주의”의 이분법적인 주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1) 율법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2) 육체가 원하는 대로 방종함으로써 이전의 이방인의 생활로 되돌아 갈 것인가. 따라서 사도가 자유와 관련하여 율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단순화 된 것입니다. 제 삼의 길은 없을까요? “율법 아래에” 살지 않으면서 동시에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것도 아닌 삶의 방식은 없는 것일까요?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이것은 중도나 중용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율법에 좇아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중도를 걷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은 이 둘을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대안이자 제 삼의 길이기도 합니다.
교훈과 적용
자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유를 위하여 부름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결단이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령의 행위”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를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3:2).
따라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받은 자유를 부당하다거나 과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움츠러들게 해서도 안 됩니다. 자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자유가 몇몇 특권층의 전유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아”라고 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13절상).
그러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 자유는 심히 훼손되고, 왜곡되어 있으며, 억압받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표현대로, 마치 위험한 짐승을 동물원의 철장 속에 가두어 놓고 안전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처럼, 기독교 자유를 특정 공간이나 형식이나 체제 속에 가두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시도는 기독교회사에서 끊임없이 있어왔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교단의 이름으로, 예배의 이름으로, 그리고 전문가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유보하거나 담보해 버린 채 스스로 노예로 살아가려 합니다. 간혹 불평도 하긴 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독교 자유가 주는 넘치는 에너지와 흥분과 때로 위험하기까지 한 상상력은 항상 남의 이야기이거나 저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나는 진정 자유로 인한 흥분과 스릴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무엇이든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자유의 본질 속에는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예. 자유가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또한 자유의 위험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의 위험에 대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하). 그는 자유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기회라고 말합니다.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는 두 가지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기회란 자유를 “육체”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윤리∙도덕적인 영역과 관련된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온갖 죄악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곧 이어서 이들 죄악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그 예를 열거하고 있습니다(5:17-21).
자유가 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유를 가지고 종이 되라고 하니 그렇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니 더더욱 견딜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날 소위 성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종이 된다든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우며 가장 꺼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즉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데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독재자들이 가장 바라는 바가 역설적으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원하는 자유란 거의 방해 받지 않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런 자유를 원합니다. 아무런 제약이나 제한도 없는 그런 자유를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러한 자유를 방종이며 육체의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자유의 가장 큰 역설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종이 아니라 그 관계에 있어 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사도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바울’이 자유에 대해서 전문가라면,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해서 전문가입니다. 그는 사랑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요일 4:19),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라고(요일 4:17)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가르침에 착안하여 사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은 내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가 아니다. 사랑은 묵상하거나 토론하는 어떤 이상이나 추상적인 것이나 순수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거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 199쪽.
‘바울’ 역시 이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을 진정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우리는 그의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함으로써 율법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율법은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기독교 생활의 결과인 것이지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며, 그것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며 성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우리가 어떻게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할 수 없다” 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나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그 자유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결단이나 의지로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딜레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16절). 원어에 충실하자면 “성령과 함께 걸어라”가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가 아니라, 그저 어떤 행동을 받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을 때, 말을 들을 때, 사랑을 받을 때, 인도하심을 받을 때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주 소극적으로 들립니다. “성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 마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솜털 같은 구름 위에 앉아 구름이 가는대로 실려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느 날 갑자기 날개가 달려 하늘로 날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초 신령한 황홀경에 빠져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는 상태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방향도 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과 지혜와 성경과 전통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소극적이며 수동적으로 “인도를 받는 일”은 항상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성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 전하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만이 “육체의 탐욕”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은 “율법에 좇아 사는 삶”도 아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도 아닙니다. 중도나 중용의 삶을 의미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율법에 좇아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중도를 걷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은 이 둘을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대안이자 제 삼의 길인 것입니다.
토의 문제
1. 기독교 복음을 위협하는 두 가지 신학적 오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2.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은 앞선 단락(5:1-12)와 어떻게 구별되고 있으며, 그 분위기나 톤은 어떻습니까?
3. 본문 이후 서신의 전체에 대한 두 가지 개괄적 권면이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밝혀내고, 이 둘의 기능과 둘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