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교회 목장
김태정 목사요 19:26-27약 47분 분량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은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교회에 대한 일반적이고 총괄적인 이야기는 앞 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종합 계획 또는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엡 1:9-10). 그러므로 교회는 우주 만물과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하신 그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엡 1:3-6). 그리고 교회의 사역은 다름 아닌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점도 살펴보았습니다. 즉 우리가 맺고 있는 전 인격적인 관계와 관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필자는 앞 과에서 이를 “관계의 십자가”로 나타낸 바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가 있다면 이 사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고, 성숙시킬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진리란 그저 급진적이고도, 과격하게 실천해야 하는 법입니다. 원래 급진적이라든지 과격이라든지 하는 단어들은 부정적인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들을 진리나 예수님과 연관해서 사용할 때에는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 바뀝니다(예. 요 8:32).
따라서 교회의 조직이나 기능도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알기 쉬운 이미지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는 가정이다; (2) 교회는 학교다; (3) 교회는 군대다. 이를 다시 그림으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장에서는 교회 <목장>에서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교회 성장에 관한 전문가들이 한 결 같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 모델이 다름 아닌 <가정교회>입니다.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에 관해서는 여러 책에서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들 내용들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요점만 소개할 것입니다. <가정교회>의 사역과 방법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 서적들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도서 목록).
<가정교회>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지닌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방식을 취하셨고, 초대교회가 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행 2:42-47; 롬 16:2-16; 고전 16:19; 공 4;15). 이 모델은 또한 교회 성장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모델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의 놀라운 성장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정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성도 간의 “책임과 사랑”이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때로 <셀 교회>(cell church) 또는 <메타교회>(meta-church)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만, 그 추구하는바 이상과 정신은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교회> 또는 <교회 목장>이라고 할 때,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두 가지 특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셨던 새로운 가정으로서의 교회의 탁월성을 말합니다. 교회의 탁월성이라 함은 기존의 피상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끝까지 책임지는” 새롭고도 탁월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특징으로는 각 <가정교회>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부속 기관이나 구역 조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독립(개척) 교회로서 교회의 제반 사역 즉 예배와 교육과 선교를 담당하며, 전체 교회는 각 <가정교회>들이 동일한 이상과 정신 하에 모인 일종의 연합체를 이루고 있는 형식을 말합니다.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
먼저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정합시다. 교회가 하나님의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고전 3:16; 벧전 2:5; 엡 2:19, 22). 그것이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가정은 어떤 곳입니까?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편안함과 안식, 격려와 화해가 있습니다. 모든 고독과 소외감이 사라집니다. 서로 이기려는 경쟁이 없으므로 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고, 비밀이 보장되며, 상호 협력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교회>의 <목장>이 이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두 목장을 역할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나오미 목장>과 <신약>에서 <예수님 목장>(또는 <사도 목장>)입니다. 이 두 목장은 각각 10년과 3년 씩 걸려 탁월한 관계의 사역에 모두 성공한 목장입니다. 이 두 목장의 특징을 말해 본다면 한 마디로 ‘헤세드’의 관계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의 ‘헤세드’와 수평적으로는 목원 상호간의 ‘헤세드’로 충일했던 목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헤세드’의 특징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필자의 <룻기> 강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헤세드’란 한 마디로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말합니다(요 13:1). 우리의 <목장> 역시 이 ‘헤세드’를 모든 관계의 근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 간의 사이는 피상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탁월한 사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0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46-50; 막 3:30-35; 눅 8:19-21)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따르다 보면 이전의 관계는 소홀해 지고, 단절되며,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교회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주님 안에서 새로운 가족의 관계로 맺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예수님의 혈연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가정으로부터 제외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한다면 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완전히 성취되는 역사의 종말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 이 땅에서도 매일처럼 다반사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요약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순간부터 새로운 가족관계가 이 땅에서도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말씀은 다분히 혁명적이고 이단적이기까지 하여 덜컹 겁이 납니다. 복음을 위하여 집이고, 부모 형제고 뭐고 할 것 없이 모두 버려야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보다 더 심한 말씀도 하고 계십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4-37)
예수님 때문에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가 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종교도 이 정도 되면 사회악으로 치부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과연 기독교가 그런 종교입니까? 교인들끼리 모여 세상 등지고, 기존의 혈연관계를 다 무시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래도 모든 것 다 버리고 따라갈 정도로 복음 즉 주님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내가 대답할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예수님은 그분의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장의 한 목원(양)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실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장의 목자가 임종 시에 그의 가족을 자신의 목장의 양에게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장의 궁극적인 결과이자 본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마음에 일말의 거리낌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가정교회> 즉 <하나님의 가정>과 <혈연의 가정>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붉은 색 원: 혈연의 가정; 푸른색 원: 하나님의 가정):
첫 번째 관계는 소위 “독립형”으로서, 교회와 가정은 각기 고유한 영역으로서 서로 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교회 일 때문에 가정이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되며, 마찬가지로 가정사 때문에 교회 일이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 견해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불편부당하게 보이지만 실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그런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관계는 “종속형”으로서, 다시 그 입장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희생시켜서라도 나머지 한 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두 가정을 서로 적대관계에 둠으로써,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견해는 “포괄형”으로서,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정>과 <혈연의 가정>은 서로 적대적이거나, 배척하지 않으면서,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과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예수님 목장>은 이미 각자의 <혈연의 가정>을 포용하고 용해시킬 정도로 그 관계가 믿음과 사랑으로 충일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교회의 내용
<목장> 또는 <가정교회>가 이처럼 탁월한 하나님의 가정이라면, 마땅히 그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용서; (2) 비밀; (3) 후원.
1. 용서
우리는 어차피 피장파장의 죄인들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소위 공주병이나 왕자 병에 걸려 있으며, 피해의식이나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기보다는 참지 못하고, 비난하며, 돌아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목회자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하고 냉정합니다. 목회자의 잘못은 용서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필자가 처음 섬기던 <창조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수석 목자였던 본인이 양들을 비난하고 윽박질렀는가 하면, 본인의 양들은 돌아 서서 자기네들끼리 목자인 저를 비난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수년 동안 이어갔습니다. 그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이런 일은 어느 교회든 항상 시한폭탄처럼 내재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돌아서 버리면 혼자서 살아야 합니다. 혹시나 해서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시도해 보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곳에서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제대로 관계를 맺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혼자서 변하는 경우란 거의 없기 때문에, 한 번 피상적인 사람은 영원히 피상적인 사람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꾹 참고, 기도하며, 용서하고, 이해하는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미운 사람도 가련해 보이기도 하고, 정도 들고, 그리고 그 정 때문에 이전에는 하기 싫었던 일도 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찾아가서 지난 감정 다 털어놓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 또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일흔에 일곱 번 씩 용서해 주라는 주님의 말씀도 우리의 인내심에 대한 충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상호 간에 충고나 질책이나 심지어 비난이 필요할 때조차도,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 속에서 상대방을 위한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 쉬운 일은 별로 성취감도 없습니다. <가정교회> 안에서 이런 기적이 가능해지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은혜와 훈련입니다. 은혜는 초자연적인 부분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항상 “성령충만”을 간구하고 기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훈련은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지속적인 사귐과 만남의 훈련을 통해서, 인격으로 형성되고, 인격은 체질이 되고 운명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책임지는 사랑에는 용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또한 질책과 훈계를 포함합니다. 예컨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개인적인 책임 사항들, 즉 111사역이나 기타 목자로부터의 지시사항을 번번이 태만히 하거나, 무시하는 가족은 분명히 질책과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질이겠거니 하며 적당히 덮어두면 절대로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잘못을 스스로 알아서 고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질책과 교정은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행하는 것이 당장은 피차 가슴이 아프지만, 훨씬 효과적입니다. 미루어 두었다가 나중에 잊을 만 했을 때 그 문제를 끄집어내면 오히려 반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며, 그동안 <목장>에는 쓴 뿌리가 자리 잡고, 잡초가 무성하게 번지기 시작하여 감당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잘못을 지적 받은 당사자는 반성과 함께 새로운 각오와 헌신을 피력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며 사는 것이 생활의 한 패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훈계가 싫어 무단가출할 수도 있습니다만,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요 8:3-11). 주님은 그 여자를 무조건 용서해 주셨지만, 이후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그 여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만일 주님의 용서를 믿고 계속해서 창녀 생활을 계속했다면, 아직 진정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비밀.
<가정교회>의 모임이 매번 어딘지 공허하고 피상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하는 근본 요인은 결국 서로 간에 깊은 신뢰가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는 성도가 자신의 고해가 신부의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간다면 다시는 그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드러내기 싫은 상처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예수님 앞에서 완전히 해결 받지 못한다면, 가족은 물론 예수님마저 제대로 신뢰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적 치유의 기적이 <가정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나마 우리가 이 기적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성공적인 상담의 핵심이 상담 내용에 대한 비밀 보장에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장> 안에서 드러난 일은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원칙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따라 <가정교회>의 질적 수준이 달려 있습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구역예배 정도의 수준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피상적인 모임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3. 후원
가족 구성원은 상호 후원과 격려를 먹고 삽니다. 여기서 말하는 후원이란 정신적, 물질적 후원 모두를 말합니다. 무조건 한 편이 되어 주고, 또 실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 목장의 구성원을 모두 열 사람으로 잡는다면, 열 가정에서 한 사람 정도의 문제(경제적이든 무엇이든)를 해결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성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목장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교회 전체 차원에서 도움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혹시 <우리교회>에 너무 열성적으로 출석하느라 집에서 쫓겨나 학교에도 다니지 못할 처지에 빠진 학생이 있다면, 교회는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나는 이에 대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한심이의 답변: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목장의 지체가 매주 아이 돌보는 문제로 예배에 참석하기 어려울 때 같은 목장의 목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교회>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학업 장애를 겪고 있을 때, 목장은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목장 모임이 너무 달콤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이 때 멀리 사는 지체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가정교회의 조직과 기능
<가정교회> 즉 <목장>의 구성은 일반적인 가정과 똑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와 그리고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상적인 가족의 수는 8-10 명 정도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함께 힘을 모아 사역을 함에 있어서나, 부실하지 않은 ‘헤세드’를 맛봄에 있어서나 적절한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목장의 상한선을 10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1. 조직
<가정교회>의 구성은 모두 교회 회원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아래처럼, 목자, 부목자, 그리고 목원들로 구성됩니다:

2. 목자
목자는 <가정교회>의 부모이지 성경 교사는 아닙니다. 성경 교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성경만 가르치면 되지만 목자는 자나 깨나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처럼 목원들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목자 자신이 직접 주 안에서 낳고 기른 양과 목자의 사이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다”(고전 5:15)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도 이런 까닭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아무나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자식을 아무 보상도 없이 매일처럼 맡아 기를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의 자식에게는 사실 큰 소리 칠 이유도 없고, 세세한 관심도 기울여 지지도 않고, 또 함께 아파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 자식을 딴 부모에게 억지로 맡겨서도 안 됩니다. 억지로 맡겨 놓으면 좀 하다가 힘들면 집어치워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목장은 전체적으로 공중분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정말 성숙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 삼는 일을 자신의 평생의 소명으로 알고 헌신하는 자라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하는 자라야 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영혼에 대한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또한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는 하나님의 걱정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살아갑니다(요 4:35; 마 6:33). 즉 그는 누가 무어라 해도 <성경>의 원리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라야 합니다. 목자는 교회의 교사나 행정 사역과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그런 사역들이 영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목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맡은 자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어려움이나 시험 등은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보고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물어보며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막중한 목자의 사역을 잘 감당하려면, 말할 것도 없이 기도와 성경공부가 그의 취미이자 특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그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하게 됩니다(합 3:17-19). 예컨대, 목자는 자기연민의 유혹에 빠지기보다는 양들에 대한 연민으로 함께 아파하며, 사랑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주고 싶어 하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철저히 순종의 본을 보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그의 목자에게 순종하지 못하면서 목원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자의 금과옥조(金科玉條)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개인적 소명
이것은 비단 목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목자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관심사, 즉 제자 삼는 일입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 가르치는 은사가 있건 없건 상관없습니다(거듭 말하지만 목자는 교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목자 혼자서 끝도 한도 없이 죽어라 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삼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즉 나와 같은 사역자를 양육하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일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상 위임령”(至上 委任令)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제자 삼는 일은 (1) 가서, (2) 침례를 주고, (3)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때까지 계속 확인하고, 점검하고, 간섭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보다 더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제자가 간섭이 싫어 튀어 나간다면 할 수 없습니다만, 이 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기독교 선교 사역은 나와 나의 제자 당대에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2) 목원과의 관계
그러나 사람은 남의 말을 쉽게 듣거나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목자가 진짜 잘 하는지 못하는지를 방관자처럼 지켜보기도 합니다. 그 진의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목자와 경쟁을 하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목장의 다른 양들을 부추겨 목자에게 대항을 하려고도 합니다. 목자의 결함을 들추어내어 사기를 저하시키기도 합니다. 목자가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 지시도 하려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목자를 위해서 모든 좋은 것들을 나누지도 않습니다. 기도도 당연히 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 양의 종교 생활의 경력이 길면 길수록 더 심합니다. 그동안 인생과 교회 생활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나름대로도 인생철학이라는 쓰레기가 가득 쌓여, 좀처럼 남의 말을 듣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우물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슬프게도 나이마저 들었으니 생각이 아무리 뻔해도 몸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니 순종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래서 목자가 성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의 양은 자신이 직접 전도하여 양육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신에 대해서 너무 간섭이 심하다 싶으면 금방 저항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모자를 벗게 해야 하는데, 어렵더라도 목자가 먼저 모자를 벗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이 따라 모자를 벗든 않든 계속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요 13:1; 벧전 5:2-4):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3) 목자와의 관계
목자에게 요구되는 또 한 가지 수직적인 관계의 요소는 나의 목자에 대한 순종입니다. 내가 나의 목자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내 목원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목원들 중에서 나의 목자에 대한 불평이나 원성이 있을 때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해서 당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아론’이 그렇게 하다가 혼쭐이 났습니다(출 32장). 그는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 ‘모세’의 편에 서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백성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동생에게 돌을 던져댔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나의 목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4) 동료 목자와의 관계
대개 열심히 사역하는 목자들에게 약한 부분이 바로 이점입니다. 혼자서 열심히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동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고, 때로는 쓸데없는 오해와 시기마저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황야의 무법자” 또는 ‘람보’로 부릅니다. 목자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팀 사역을 원하는 것이지 ‘람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힘든 사역으로 인해서 쉽게 지치고 피곤해 집니다. 이럴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경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목장의 목원들로부터 어떤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 받았을 때도, 내가 직접 해결해 주려고 나서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그 목원이 속해 있는 목장의 목자에게로 가도록 조언해 주어야 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중간에 끼어들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서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료 목자들과 ‘헤세드’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3. 부목자
부목자는 예비 목자 또는 인턴입니다. 그는 목자가 하는 모든 사역을 순종하고, 도우면서 목원의 수가 10명이 넘어설 때 새로운 목장을 담임하게 됩니다. 새로운 목장을 개척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는데, 첫째는 기존의 목자가 새로 들어온 목원들과 함께 새로운 목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부목자가 나머지 목원들의 목자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이와는 반대되는 경우로서, 부목자가 새로운 목원들을 데리고 나가 새 목장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두 방식 모두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우리교회>는 어느 한 방식을 고집하기 보다는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절충방식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명심할 일은, 우리가 어느 방식을 택하든 부목자는 목자가 하는 것을 열심히 따라 배워야 합니다. 새로 들어온 목원이 있을 경우, 목자의 승인 하에 그에게 이 교회의 기초 훈련 고재를 가르치는 것 등이 부목자의 사역 중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괜히 뒤에서 뒷짐 지고 휘파람 불며, 목자가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고소해 하거나, 자신은 더 잘 할 수 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때로 목자를 제쳐두고 목원들을 상담한담시고 그들의 마음을 도둑질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목자가 되면 필경 같은 지경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습 기간 중에 교만하게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목자가 되면 이전 목자보다 더 헤매다가, 힘들면 “에라, 때려치우자”하며 나자빠집니다. 한 마디로 부목자는 목자의 그림자가 되어야 합니다. 괜히 목자의 약을 올린다든지 화를 내게 한다든지 등의 일도 물론 절대 삼가야 할 부분입니다. 만일 부목자가 목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거나, 계속해서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면 그는 해당 목장으로부터 일정 기간 근신 내지는 제명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본인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까짓 것 제명당하면 대수랴, 교회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다른 교회와 새로운 지도자를 또 찾아 나서야 하는 수고를 겪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계획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늘 이렇게 살다가 그는 제대로 신앙의 발전이나 성숙을 경험하지도 못한 채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4. 목원(양)
목원은 <가정교회>의 자녀들이며, 동시에 보다 먼 내일의 목자 후보생입니다. 자녀들이 자라서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배운 것은 없어도 본 바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원은 자녀로서 두 가지 관계를 몸에 익혀야 할 것입니다. 목자와의 관계와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입니다. 목원의 금과옥조도 위에서 말한 목자의 그것과 대동소이합니다만 각별히 다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1) 동료 목원과의 관계
목장 내의 다른 목원들에 대한 ‘헤세드’의 관계, 즉 절대 용납과, 절대 비밀 보장과, 그리고 상호 후원의 원리를 준수해야 합니다. 내가 속한 목장 말고 다른 교회나 다른 목장에 더 가까운 친구가 많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당시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목장 내 동료 목원과의 관계에 있어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컨대, 두 목원의 관계가 그들 자신의 목자보다 더 돈독할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상담자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해서는 안 되고 그저 함께 아파하거나 또한 함께 기뻐함이 마땅할 것입니다(롬 12:15).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상담자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상담자의 문제에 아무런 대안 없이 함께 침잠해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상호 간에 상담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나누게 될 때, 긍극적인 대안이나 해결점에 도달하기 전에 반드시 그들의 목자와 상의를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두 사람만의 일로 묻어 두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경우 목장 내의 진정한 교제가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목장 내의 진정한 교제가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2) 목자와의 관계
순종과 신뢰의 관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지 목자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거나 의심이 가드라도, 절대로 같은 목장의 동료 지체들과 당을 지어 수군거리거나 중상모략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특별히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목원은 그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위에서 목자의 사역과 관련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목원은 단순히 목자로부터 교과서적인 지식만을 배우는 자가 아닙니다. 그가 시키는 바를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목자에게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더라도, 다른 목자에게 가서 상담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목자의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당신의 사정을 잘 들어준다고 좋아할 슈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일종의 마음 도둑질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목자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든 두 사람에 사이에 먼저 대화로 해결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의 목자가 알지 못하는 사역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소영웅주의입니다. 혹사 내가 속한 목장보다 더 가까운 교제나 사역이 있다면, 내가 속한 곳은 그곳이지 내 목장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목자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목자에게 서약이 필요하듯이, 목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목자에 대해서 순종의 서약을 받습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별도 서약서 양식을 첨부하였습니다. 이러한 서약이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서약서에 언급되어 있는 바처럼 반복적이고, 악의적인 불순종은 그를 목장에서 제명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의 사역
<가정교회>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내용은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가정교회>란 한 마디로 개척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관련해서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라는 점입니다. 그 관계에서 네 가지 기본적인 사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배; 교제; 교육; 선교.
이 사역은 누가 행합니까? 그 주체는 개인도 아니고 전체 교회도 아닙니다. 그 주체는 목장입니다. 교제도 목장 중심으로, 선교도 목장 중심으로, 그리고 예배 사역(침례나 주의 만찬 등)도 원칙적으로 목장 내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치 각 교회가 매 년 사역을 위한 예산을 세우듯, 각 목장 역시 매년 사역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지 목장의 교육 사역과 관련해서는 일관성과 지속성을 위해서 교회학교에서 별도의 계획에 따라 전 교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할 것입니다. 단 그 때에도 목자의 승인과 위탁 하에서 할 것입니다. 교회학교의 교과과정은 별도의 <교회학교> 장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1. 교제
교제는 <가정교회>의 목장 모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사역일 뿐만 아니라, 목장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앞에서 다루어왔던 모든 내용들도 실은 이 부분을 위한 서론에 불과합니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와 지체들 사이의 관계를 시험하는 잣대가 바로 목장 모임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즉 내가 이 목장 모임을 얼마나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쓰는 가입니다.
목장 모임을 우습게 알면서, 교회와 지체를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속한 회원들의 헌신도는 바로 이 목장 모임의 참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주일 예배와 성경공부에는 참석을 못하더라도 목장 모임에는 참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장 모임에 참석은 않고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계는 제대로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교회 회원으로 인정되기는 어렵습니다. 본 교회 회원이라면 마땅히, 그가 목자나, 부목자나, 또는 목원 증의 한 위치에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배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교회의 무기력함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새벽 예배; 수요 저녁 예배; 금요 철야 예배; 주일 낮 예배; 주일 오후 예배; 성탄 이브 예배; 성탄 예배; 송구영신 예배; 신년 예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예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감격과 흥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지는 체험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예배의 참석이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 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성도 개개인의 수평적인 교제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제만 남게 되어, 성경 공부나 기타 교제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토의에 참가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이 심각하게 결핍될 것입니다. 그저 묵묵부답 듣기만 하면 됩니다.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오로지 하나님과 대화하면 됩니다. 고민이 있어도 그저 혼자서 하나님하고만, 즐거움이 있어도 역시 하나님과만 대화하면 됩니다. 오직 예배, 그리고 예배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전인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목장의 교제 사역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한 개인은 실질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연마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며, 사랑이 한낱 감상이나 낭만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아주 실질적인 사역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한 개인은 회원들끼리 때로는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며, 실망하기도 하면서 비로소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갑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단지 이렇게 착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나는 이 교회를 사랑해”; “나는 다른 성도를 사랑해”; “나는 언젠가는 멋진 사역을 할거야.”
이런 생각은 실은 자기기만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손에 물 한 방물 묻히지 않고 속세를 내려다보며 교회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탁상공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장이라고 하는 현실에 내려와서, 손에 물을 묻히고, 발을 담그고, 분노로 몸을 떨기도 하고, 실망으로 머리를 숙이기도 하며, 수치와 모욕으로 몸 둘 곳을 몰라 하기도 하는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조금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매일 상상 속의 사랑, 상상 속의 선교, 상상 속의 희생을 그리는 것은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목장의 사역에 동참해서 내가 가진 재물과 시간과 은사를 기꺼이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목장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제의 사역이 이처럼 중차대하므로, 교제와 관련하여 좀 더 언급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1) 교제의 근거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여러 종류의 모임이나 단체에 가입하여 위로받고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한 마디로 교제(코이노니아 즉 나눔)란 하나님을 나누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교제가 다른 사이비 교제들과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복음은 선포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제를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9빌 2:1; 고후 13:14; 엡 4;4-6).
2) 교제의 위험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결코 깨어질 수는 없겠습니다만(요 10:28-29), 교제의 기쁨을 깨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교제의 기쁨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가 되므로 회원 모두가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16, 21)
죄는 사탄과 교제하는 것으로서, 주의 교제에 참예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모순이라는 점을 사도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순과 불합리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러므로 너의 중에 악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교회의 분명을 말할 것도 없고, 신자 개개인의 생명마저도 담보받을 수 없다는 심각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위의 경고는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즉 매일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교제 속으로, 더욱 성숙한 인격적 관계 속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3) 교제의 책임
따라서 우리 모두의 책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약 5:16). 그렇지 않으면 목장 모임은 늘 위선과 거짓과 피상성의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가증스러운 것이지요. 우리가 위선자를 싫어하듯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히 목자는 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목원 중에 누군가가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때, 반드시 지적하고 책망해 주어야 합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다 같은 죄인들인데 꾸짖고 말고 할 것이 뭐 있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정죄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는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음식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잘못하는 목원을 꾸짖고 나무라야 하는 성경적 근거는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딛 1:13)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목자가 바로 잡아주어야 할 범죄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 등과 같은 소위 큰 죄악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소한 직무유기와 같은 것들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나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한다든지, 목장 모임에 이유 없이 불참하는 것이라든지, 사소한 얌체 행위, 잦은 책임 회피와 이에 대해서 아무런 사후 설명이나 사과도 않는 행위, 목자에 대한 반복적인 불순종 행위 등을 일컬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행위들이 목장 내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데도 어느 누구도 아무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모일 때마다 희희낙락 하고 있다면, 그 목장은 없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 목장이 아니고 일종의 친목계 수준의 모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유념합시다. 통회하는 죄의 고백과,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한 고백이 없는 교회는 사탄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피차 죄를 고백하는 것은 순수한 교제를 유지하게 하며, 서로 필요와 근심, 시험과 환난을 이해하며,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롬 14:13, 19; 살전 4:18; 5:11; 히 3:13; 10:25.
4) 교제의 빈도
가족들이 만나는데 무슨 횟수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만(행 2:46), 모두가 가장 편리한 날과 시간을 정하되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야 합니다. 가능하면 모임 시간은 수시로 바꾸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목장 모임과 경쟁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모임도 없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다른 모임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잡아두는 헌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모임 시간에 늦거나 사정이 생겼다고 빠지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리고 혹시 모임에 늦거나 빠지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목자나 동료 목원 중의 한 사람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두어야 겠습니다. 내 한 사람 편리한대로 하다가 다른 지체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걸핏하면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목장 모임 자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을 것인데, 이런 일을 절대 없어야 하겠습니다. 성령 목자가 하지 않으려 해도 목원들이 일치단결해서 반드시 모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지정된 날에 모임이 불가할 경우에는 그 주간 중의 다른 만나도록 해야지, 다음 주로 넘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5) 교제의 장소
<가정교회>이니만치 각 가정을 돌아가며 만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의 특징적인 교제의 방식이었으니 말입니다(행 2:42-47; 롬 16:3-16; 고전 16:19; 골 4:15). 그러나 목장 모임이 정착되고, 안정될 때까지 목자의 가정에서 한동안 모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목자는 항상 앞서 보여주는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며, 어떻게 이끌어 가는 지는 보여주며, 헌신과 희생의 감동을 보여주어야 예비 목자가 나중에 그대로 보고 따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원칙은 아닙니다만, 대략 1년 정도는 목자의 가정에서 모임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이 기간은 대체적으로 새로운 목장을 개척하는 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목자는 새 목장이 분가해 갈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목장 모임을 갖도록 합시다.
우리가 목장 모임을 가정에서 갖는 것은 성경적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교회 예배당이 따라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으로 가정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이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크게 손해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회원들이 예배나 교제를 위해서 자신의 집을 열어줄 수만 있다면, 그 여력으로 교회는 나머지 사역들을 아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회원이라면 즐거이 자신의 가정을 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목자 모임을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모인다면, 모임을 갖는 해당 가정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장의 크기가 8명 정도 수준이라면 2개월에 한 번씩 돌아가며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니 큰 부담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목장 모임이 무슨 큰 잔치를 여는 행사가 아니니 식사는 되도록 간단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는 것도 피해야 할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목장 가정에서 계속 만나야 하는 경우라면, 각 가정이 음식 한 가지 씩을 준비해 가는 것도 목자 가정의 부담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목장 모임 자체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때로 시내나 야외나 기타 적당한 장소를 택하여 즐거운 모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나 연극도 함께 관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교제의 범위
모임은 교회 회원 중심을 원칙으로 합니다. 비회원들이 수시로 드나들게 되면 깊이 있는 교제가 어려워집니다. 회원들 상호간에도 깊이 있는 대화가 어려운 판에 낯선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목장 모임은 일종의 가족회의입니다. 가족회의를 가족이 아닌 이웃이 참여한 가운데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목장이 전도 사역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비회원들을 초청할 경우에는 회원들의 사전 준비와 기도를 충분히 한 다음에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다녀간 사람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관계 맺기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장 내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일대 일로 만나 성경공부나(목장 용 교재가 별도 있습니다) 기타 돌봄을 유지해 가야 할 것입니다. 목장의 전도나 선교 사역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습니다.
7) 교제의 진행
목장 모임은 무슨 특별한 형식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 웃다가, 울다가, 더러 싸움도 하다가, 돌아가기 전에 열심히 기도 한 번 하고, 그러다가 헤어지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매주 아무 형식이 없이 만나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매일처럼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다 아무 목적도 없이, 의미도 없이 세상 사람들 친목회 하듯 만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대개 여러 교회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음의 방식을 따라 진행할 수 있도록 목자는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 형식이 없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실은 목자의 사전 준비가 더욱 철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 부분에 관한 다른 예들은 <가정교회>나 <셀교회>에 관한 고전적인 책들을 통해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는 모임 시간을 대략 3-4 시간 정도 되도록 운영하면 됩니다. 그러나 목장 모임을 서둘러 마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필경 모임은 피상적으로 흘러갈 우려가 높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관례로 굳어지게 되면 만날 때마다 빨리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으로 교제가 아주 산만해 집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나 근심, 그리고 두고 온 일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의 모임이 피상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목장 모임이 3시간이 지나도록 헤어지기 싫다면 분명 성공적인 목장입니다. 이 경우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먼저 가도록 배려를 해주고, 남은 사람들끼리는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너무 이상적인가?) 매주 이렇게 되기가 어려우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이라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훈련도 필요하지 않을까 희망도 해 봅니다. 현대인들은 늘 무엇인가에 쫓기며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임이 있는 날 저녁에 혹시 예수님께서 오실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함께 밤을 새워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목사의 희망 사항).
아무튼 교제의 진행은 고정된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날그날 성령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진행하면 될 것입니다(물론 무질서가 성령님의 임재나 충만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대략적인 순서는 여느 교회에서처럼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배와 찬양(15-20분)
① 처음 만나 간단한 인사와 일상적 대화를 나눕니다.
② 그리고 찬양 인도자의 인도에 따라 간단한 기도에 이어,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너 곡 정도의 찬양을 함께 부릅니다.
③ 유의사항: 이 때 다소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열심히 불러야 다른 사람들도 힘을 내어 부르게 됩니다. 이 시간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과 다른 지체들에게 열어주는 시간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2) 지난 주 회고(30-40분)
① 각자 돌아가며 지난 한 주 동안의 개인적인 111사역이나 설교 내용 등을 중심으로 중요한 깨달음이나 체험들을 나눕니다: 감사 제목; 도전과 대응; 상처나 분노; 좌절과 실의; 실족과 범죄 등.
② 개인적인 회고를 할 때 경건 일기장을 중심으로 가볍게 읽는 기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되,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도록 목자는 잘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일 인당 5-10분 정도).
③ 유의사항: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때로 자신을 여는 문제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억지로 하도록 부담을 주기보다는 언젠가 자발적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배려가 필요할 것입니다.
(3) 주제 토의(1시간 정도)
① 112 사역과 관련된 주제들 중에서 목자나 또는 목원이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토의할 수 있습니다.
② 기독교 윤리나 시사성을 띤 사건이나 정보
③ 목원의 당면 신상 문제
④ 토의의 결론은 가급적 구체적인 적용이 가능한 영역으로 서로 메모를 해 두어 다음 주에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헌신과 결단(20-30분)
다음 한 주 동안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나눕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경건 일기장의 월별 사역 계획표에 기록해 두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목자에게는 이 점 필수적입니다.
① 반드시 측정이나 평가가 가능한 기도제목이나 계획을 기록해야 합니다: 전화하기; 독서; 만나기; 봉사; 방문; 초청 대상; 여행; 놀이; 문자 보내기; 연구; 등등.
② 유의사항: 기도 제목의 특징은, “내가 여차여차 행하겠사오니, 하나님 응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로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도를 드려야지, 다음과 같은 소극적이며 측정 불가능한 기도는 곤란합니다: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날로 새롭게 되도록 해 주십시오”; “더욱 헌신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③ 목자는 이들 기도 제목이나 계획들을 반드시 적어두었다가 다음 주 모임에서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5) 마침 기도(20분 정도)
① 계획에 대한 합심 기도
② 목장의 사역, 목자나 목원 상호 간이나, 초청 및 구원 대상자를 위한 중보의 기도.
2. 선교
목장은 교제 사역의 결과로서 기대되는 열매가 선교사역입니다. 목장의 선교사역과 관련해서 다른 장에서 다시 상세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지만, 선교란 한 마디로 복음 전도와 봉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선교가 우리 삶의 중심에 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 위임령” 또는 “지상위임령”으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른 채 헷갈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고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물고기 물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왜 매일처럼 자기 자신의 일에 매달려 고민하고, 죽을 쑤며, 괴로워하고, 외로워할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있지 않으니, 하고 한 날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전도를 하지 않고 회원들끼리만 모이다 보면, 이 목장은 필경 시들해 집니다. 그뿐 아니라 서서히 내부적으로 갈등과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화끈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탄생이 없는 곳에서는 목장은 서서히 영적인 실버타운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였다 하면 하나님 나라 일보다는 신변 잡담이나 과거의 무용담이나 늘어놓다가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도 위로나 도전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자니 오히려 내적 갈등만 더해갑니다. 이런 증상이 더 오래 지속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더 이상 두렵거나 떨림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목장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선교의 사역을 목장의 궁극적인 목표로 인식하고 뭉쳐야 합니다. 우리의 적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목장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뭉치게 됩니다. 목장은 모일 때마다 초청과 전도에 관한 대화가 활기 있게 나누어져야 하고 대상자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목장은 어떤 방식으로 선교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듯이 관계 중심의 선교입니다. 어지간한 방법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다 써먹어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먹히지를 않습니다. 그저 주위에 친구나 친척들을 상대로 해서 범위를 서서히 확대해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복음의 제시이든, 개인적인 간증이든, 생할 속의 전도이든 시작이 반입니다.
다만 혼자서 이 모든 사역을 수행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즉 혼자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가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특별히 발군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서 그 모든 것들을 수행해 가다 보면 금방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어차피 목장 중심의 선교 사역을 강조하고 있으니, 사역을 분담해서 각자 은사대로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 돌아가며 대상자를 향하여, “와보라” 사역만큼 더 강력한 수단도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구체적인 사역 방법에 대해서는 일곱 단계로 이루어진 <새삶 씨리즈 교재>가 있으므로 목장에서는 가르치는 은사를 지닌 목원이 대상자를 상대로 함께 공부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배
세 번째 사역인 예배는 목장 모임에서는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가장 뒷 부분에 두었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목장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사역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침례와 주의 만찬이 그것입니다. 이 두 의식은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주님의 계명입니다. 침례가 일회적으로 입교 의식이라면, 주의 만찬은 계속되는 의식입니다. 이 두 의식의 상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다른 과목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그 절차만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1) 침례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침례를 받을 특권과 책임을 지닙니다. 그리고 침례자는 피 침례자의 목자이거나 또는 그를 전도하여 양육한 다른 지체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의 조화나 질서를 위해서나 교단 내에서의 다른 교회와의 형평성의 문제를 고려해서 교회의 담임 목사가 침례자가 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므로 목장 단독의 침례식은 삼가되, 꼭 필요한 경우라면 반드시 교회 담임 목사의 사전 승인을 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자 중심으로 이를 목장용 교재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주의 만찬
교회 전체적으로 일 년에 서너 번 의식을 행하기는 하지만, 원한다면 각 목장에서 수시로 행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유의할 점은 반드시 목자의 인도에 따라, 그 의미와 절차를 충분히 숙지한 후에 엄숙하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은 물론 공동체적인 죄의 고백과 재 헌신의 결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자(부목자) 서약서
서약자:
본인은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사모하고 열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딤전 3:1), 본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정신을 나의 것으로 삼아, 목자(부목자)가 되기를 헌신하며 다음과 같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엄숙히 서약합니다:
1. 본인은 본인과, 본인의 목자와, 본인에게 맡겨진 목원들과, 그리고 교회의 영성을 위하여 111사역을 포함한 제반 훈련과 선교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겠습니다.
2. 본인은 목장의 목원들을 보살피고 인도하는 일을 나의 삶의 최우선으로 삼겠습니다.
3. 본인은 나의 목자에게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4. 본인은 동료 목자들과 하나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목자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으며, 동료 목자들이나 본인의 목자가 모르는 혼자만의 사역을 하지 않겠습니다.
5. 본인은 목장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겠습니다.
6. 본인은 나의 목자에게 행하는 공식적인 보고 사항 외는, 목장 내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비밀을 지킬 것입니다.
7. 본인은 다른 목장의 목원들을 위한 개인적인 상담에는 응하지 않겠습니다.
목원 서약서
서약자:
1. 본인은 목장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겠습니다.
2. 본인은 목장 모임에 관련된 제반 원칙들을 준수하겠습니다.
3. 본인은 교회의 제반 훈련과 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예: 십일조 등).
4. 본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또 다른 제자를 삼아 나와 같은 동역자가 되게 하는 일이 나의 인생의 목표임을 알고 헌신하겠습니다.
연습과 토의
1. 교회가 가정이라는 성경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2. <가정 교회> 또는 <목장>의 본질에 대해서 아는 바대로 논의해 봅시다. <구약>과 <신약>에서 각기 성공적인 목장을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3. <가정교회>의 구성원, 목자, 부목자, 및 목원의 자격과 책임 및 권리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목장>의 세 가지 사역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사역은 무엇입니까?
5. <목장> 모임에 수시로 결석을 하는 등 불성실한 목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함이 옳을까요?
6. <목장>의 효과적인 선교 사역의 방법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참고도서
아래 도서들은 <가정교회>나 우리교회의 <목장>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중요한 참고자료들이므로 꼭 읽어두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특히 전체 일곱 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삶> 시리즈는 목장의 훈련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누구든 목장에 소속된 자는 목장 내의 다른 목원이나 목자의 도움을 받아 이 과정을 마치도록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1.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0): 준비』.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2.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1): 안내』.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3.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3): 실천』.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4.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4): 전도』.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5.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5): 후원자』.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6.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2): 셀인턴』.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7.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2): 셀리더』.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8. 최영기, 『가정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서울: 두란노, 2008.
9. 이남하, 『별난 교회』.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10. 이남하, 『교회 훈련 및 셀 목회』. 서울: 기독교한국침례회 교회진흥원, 1996.
11. Huttenlocker, K. 『하나님의 가정으로서의 교회』. 황을호 역. 생명의 말씀사, 1988.
12. MacArthur, J.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이춘이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6.
13 쟝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찬성 역. 서울: 성바오로, 1995.
14. Gilbert, L. 『팀 사역』. 채수범∙황석호 역. 서울: 도서출판 프리셒트, 1995.
15. Hull, B. 『모든 신자를 제자로 삼는 교회』. 박영철 역. 서울: 요단, 1993.
16. Hull, B. 『목회자가 제자삼아야 교회가 산다』. 박경환 역. 서울: 요단, 1994.
17. Hull, B. 『제자삼는 자 예수 그리스도』. 박경환 역. 서울: 요단, 1994.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