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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사역: 관계의 사역
김태정 목사마 16:18-19약 14분 분량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우리는 앞에서 교회는 새로운 삶의 방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대안(代案)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공을 초월하는 인류의 영원한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아닌 여러 제도를 통해서 인류의 복지나 안녕을 추구해 보려고 시도해 왔습니다만, 그 때마다 결과는 제도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을 뿐입니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이 가정을 떠나 여행을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 여행 초기에는 집을 떠나는 즐거움이나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만, 점차 시일이 경과할수록 피로감이 쌓이고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 전체로 확대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늘 불안하고, 피곤하며, 고달픈 것은 우리가 원해 있어야 할 그 집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야곱’이 이십여 년의 세월을 보냈던 ‘하란’처럼 경쟁과 불신과 소외감과 고독이 왕 노릇 하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족끼리는 경쟁이 필요 없습니다. 절대 용납과 절대 비밀이 보장됩니다. 절대적인 지지와 위로와 후원이 있습니다. 눈물과 함께 아파함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러한 혁명적인 삶의 방식을 구현하라고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 과에서는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의 본질과 사역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라면, 교회의 사역은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둘을 혼돈하기도 하는데,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런 저런 교회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 먼저 말하려 합니다. 그러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사역에 대한 설명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과에서는 우선 교회의 본질이나 정의(定義)를 알아본 후에 교회의 사역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교회란 과연 무엇입니까? 교회의 정의와 관련해서 교과서적인 설명이나 답변들을 이곳에서 다시 인용하기보다는 쉽고도 간단한 이해를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우리는 여기서 두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교회”(ejkklhsiva, 에클레시아); (2) “천국”(basileiva, 바실레이아). “교회”와 “천국”에 대한 영어 번역은 각각 church와 kingdom of God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와 “천국”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우선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아야겠습니다.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그 영역 이란 사람의 마음일 수도 있고, 우주 전체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회의원 개개인을 입법기관 즉 국회로 부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있고, 동시에 내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이거나 또는 하나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며, 또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교회를 창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부분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우리가 가 보지도 않았고,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 방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가장 완벽한 대답은 “교회에 와보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예: 마 13, 22장). 예수님의 소위 “산상수훈”(山上垂訓)도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 방식에 관한 강의입니다(참고, 마 5-7장). 이 부분을 읽어보면 이 세상의 상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혁명적인 삶의 방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를 “혁명적인 삶의 방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한 교부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칼빈’(J. Calvin)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교회의 본질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의 태도 또한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시키지 않고 교회에 들여보낸 적이 없으며, 반대로 교회에 들여보내지 않고 구원시킨 적이 없다.” 모두 교회에 관한 통찰력 넘치는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세속화나 다원화나 그리고 상대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믿겠으나 교회는 나갈 수 없다는 태도나, 또는 교회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런 무지는 비단 이런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크게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지난 한 세대동안 개인 경건운동의 영향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배우게 된 까지는 좋았으나, “나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교회의 하나님”이나 또는 “우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크게 퇴조해 버렸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공동체 의식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고,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나, 또는 <시편>에서 개인적인 간구나 고백을 드릴 때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 외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 우리 하나님”입니다. “주기도문”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교회의 이미지
<성경>은 이러한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어렵고도, 신학적인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나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러 그림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 (2) 그리스도의 몸(또는 군대); (3) 성령의 전(피조물); (4) 믿음, 소망, 사랑의 교제. 교회론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는 본 <우리 교회> 교육과정(교과과정 100) 속에 포함되어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들 각각은 교회의 모습에 대한 다른 표현들이긴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한 결 같이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들 표상들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더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 네 가지 표상들 중에서 처음 세 가지에 대해서만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교회에 대한 첫 번째 비유는 교회 즉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고후 6:16; 롬 9:25-26). 이 표상은 가장 초기의 것이며,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을 제외하면 이 표상은 <신약> 전체에 걸쳐 두루 나타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이스라엘간의 연속성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나 집회(히브리어: 카할)를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의미의 민족 또는 백성(히브리어: 암)을 뜻합니다. <신약>의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동일시 하려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를 통해서 떠올리게 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이방 지역 ‘갈대아’의 ‘우르’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한 이방인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그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신 것이지, 기존에 있던 한 국가를 입양해서 그분의 백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교회에 대한 두 번째 비유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엡 1:22-23; 롬 12:3-5). 이 비유와 관련하여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하여 다음 교재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1) Hodgson, P. C. 「교회론의 새 지평」. 박근원 역. 서울: 도서출판 진흥, 1996; (2) 김태정. 「회중교회를 위한 요한복음의 이해」. 석사학위 논문.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6.
이 비유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는 교회는 단순한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영광의 대표자가 되시며, 우리는 각 지체로서 한 머리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이 비유는 교회 내 지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개 교회 간의 일체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라톤 경주에서 영광의 면류관은 선수의 머리 위에 올려주는 것이지, 팔이나 다리에 걸쳐주지 않듯이, 우리 역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엡 6:10-17). 이 비유 또한 영적 전투와 성도 간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나가서 싸우는 군대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피조물. 우리는 또한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우리가 “성전”(聖殿)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성령님은 오순절 사건에서 보듯이 교회를 있게 한 장본인입니다. 사실 “공동체”(community)라는 단어도 “세우다” 또는 “강하게 하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뮤니오’(munio)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성령의 피조물에는 “성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세우신 것들 중에는 이 외에도 실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사역과 관련해서 떠올릴 수 있는 세 가지 핵심 피조물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가정(벧전 2:5; 엡 2:19, 22)
(2) 하나님의 학교(엡 4:10-12; 신 6:4-6; 마 28:19-20)
(3) 하나님의 군대(엡 6:10-17)
사실 가정과 학교와 군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국가와 민족을 지탱시켜주는 핵심적이고도 기본적인 기관이자 조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가정으로, 학교로 또는 군대로 부르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이들 세 호칭은 결국 하나님의 소명, 즉 교회의 사역을 규정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사역
처음 교회를 세울 때 간여하셨던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교회에 생명력을 제공하고 계시며,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십니다. 교회의 사역을 논하기 위하여 우선 다시 한 번 <마태복음> 본문(16:18-19)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또 한 쌍의 동사에 주목하게 됩니다: “메다”; “풀다”.
무엇을 메고 무엇을 풀 것인가? 이 두 동사는 불가분 동일한 한 단어를 목적어로 갖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관계”입니다.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마태복음> 16:18-19의 본문은 엄밀하게는 교회 내에서 치리(治理)와 관련한 문제로서, 선교적인 차원과는 다소 동떨어진 본문입니다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는 끊어져 있는 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를 “관계의 사역”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이 관계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치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공동체 안에서 이 관계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관계가 끊어진 사람을 “죽은 자”로 규정했으며, 평화 또는 평강으로 이해되고 있는 “샬롬”도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관계가 제대로 된 사람을 “의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참고. 창 2:18). 직장이나 학교나 교회에서나 이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죽을 맛입니다. 외롭고 괴롭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교회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미국 이민사회에서도 한국 교민들은 미국인 교회에 잘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이 뿐만 아닙니다. 다른 피조물 특히 자연세계와의 관계도 있습니다. 남극 대륙 상공에 엄청난 양의 오존이 파괴되고, 유해한 자외선이 마구 유입되어 지상의 생명체와 한경에 큰 위협이 되고 있으며,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수십 년 안에 북극해가 열릴 것이라는 경고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은 인간이 주변 세상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던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환경과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환경 친화적인 정책과 비전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위 두 가지 관계 외에도 한 가지 남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만,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중요한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본이자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역을 논할 때, 이 세 가지 관계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맺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관계로부터 세 가지 사역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배 사역
(2) 교제 사역
(3) 선교 사역
이 세 관계의 사역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십자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아래 그림 참고), 성공적인 사역이란 결국 교회가 이 세 가지 사역을 어떻게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수행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소위 “관계의 십자가”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사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올바른 예배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 침례, 주의 만찬, 찬양, 감사, 기도 등이 예배의 행위 속에 모두 포함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을 때에만 이런 사역들이 제대도 드러나게 됩니다. 예컨대, 예배가 별로 흥미가 없거나 즐겁지가 않다든지, 찬양이 하기 싫다든지, 별로 기도할 것이 없다든지, 간증이나 고백이 없다든지, 하는 등이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볼 일입니다.
교제 사역. 교회 내의 지체들과의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올바른 교제로 나타납니다. “교제”(코이노니아)란 “나누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나눌 것인가? 우리가 모일 때, 가장 우선적으로 나누어야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그분의 인격과 그분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시간(time)이나 재물(treasure)이나 은사(talent) 등이 있을 것입니다.
선교 사역. 선교 사역은 세상을 향한 관계 맺기로 볼 수 볼 수 있습니다. “로잔 언약”에 따르면 선교는 봉사와 복음 전도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면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펼칠 수 있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위대한 두 명령, 즉 “지상 명령”(the Greatest Command)과 “지상 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지상 명령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 22:37-39; 막 12:29-31; 눅 10:27)
(2) 지상 위임령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분한 모근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마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들 명령들은 모두 하나 같이 “관계의 사역”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이란 결국 관계의 사역입니다. 참고로, “관계의 사역”에 대한 무지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다음 구절을 통해서 리트머스 테스트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무엇을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까? 금방 떠오르는 생각은 대개 무슨 사역이나 전도나 봉사 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는 일에 죽도록 충성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요 13:3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점과 관련해서 오늘날의 교회를 위해서 좋은 역할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행 2:42-47). 우리는 이어지는 두 장에서 관계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시켜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연습과 토의
1.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마 16:18-19를 중심으로 토의해 봅시다.
2.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교회의 네 가지 표상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이들 표상들로부터 교회의 사역에 대해서도 논의해 봅시다.
4. 관계의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