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의 제 2부는 편의 상 “서언”(序言)으로 분류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계시록>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서언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도 인위적인 구분 방법으로서 본 교재에서는 ‘아우네’(D. E. Aune)의 구분 방식을 따랐습니다(참고 도서 1). 서언은 그 양식이나 내용에 따라 다시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제목(1:1-2)-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2. 지복(Beatitude)(1:3)
3. 서신의 규칙(1:4-5c)
4. 송영(1:5d-6)
5. 두 가지 예언(1:7-8)
본 교재에서는 이들 다섯 부분을 각기 별개의 장(章) 또는 과(課)로 구분하여, 다른 교재의 방식을 따라 (1) 문학과 역사, (2) 신학과 신앙, (3) 교훈과 적용, (4) 연습과 토의의 순서로 연구할 것입니다.
제 1과: 제목과 지복
1
제목과 지복
(1:1-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1: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1:3)
<계시록>의 첫 번째 문장은 초기 유대 작품들이나 그리스-로마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제목의 기능을 합니다. <계시록>은 <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파피루스 두루마기에 기록되었으며, 따라서 책의 제목도 고대의 문학 풍습에 따라, 첫 번째 문장에서 발췌하되 가능한 한 가장 짧은 단어나 구로 압축하여 저자의 이름과 함께 두루마기의 맨 끝 부분에 삽입하여 “부제”(副題)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두루마기가 서적(즉 코덱스)의 형태로 발전되면서, 부제(subscription)가 책의 맨 앞으로 옮겨져 “표제”(表題; superscription)가 된 것입니다. <계시록>의 가장 초기 형태의 부제는 “요한의 계시”(Revelation of John)였을 것이라는 동의가 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부 영어 번역본에서는 이를 “요한에게 준 계시”(Revelation to John)으로 바꾸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1:1에 나오는 “계시”라는 용어는 <계시록>의 문학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기록할 당시 저자의 계시 경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도 “요한의(또는 요한에 의한) 계시”라고 보는 것도 타당할 것입니다.
책의 제목(1:1)은 계시가 ‘요한’에게 전달되는 단계들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책 전체에 대한 신적(神的)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계시의 궁극적인 출처는 하나님 자신이며, 그분이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 ‘요한’에게 전달하셨습니다. 고대 묵시록들은 종종 계시의 전달자로 천사 등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이점은 <계시록>과는 다소 긴장 관계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계시록>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한 언급은 이곳 서언과 17:1-18, 그리고 종언(終焉)(21:9-22:6)에서만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모순 때문에 <계시록>이 단일 작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편집과정을 거친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환상들이 상호 간에 어떤 일관성이나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 편집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한편 3절의 “지복”(至福)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번의 지복들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참고. 14:13; 16;15; 19:9; 20:6; 22:7, 14). <계시록>에서 숫자 7은 완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고 있습니다. 대개 이 지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선포할 때나, 또는 마칠 때 사용하는 하나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읽고 지키다” 또는 “듣고 순종하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자/편집자는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작품이 소리 내어 읽혀지도록 의도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유대 회당에서 예배 시에 <오경>이나 <예언서> 등을 낭독하는 관례가 있었던 만큼, <계시록> 역시 같은 방식대로 낭독하라는 권고는 이 책이 <구약>의 다른 책들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구조. <계시록> 1:1-3은 앞의 개론에서 본 바처럼,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 제목(1-2절); (2) 지복(3절).
여기서 두 단락의 문학적 관계는 다소 불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연속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불연속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두 단락이 보여주고 있는 연속성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특징들 때문입니다. 첫째, 두 단락 모두에서 종말의 긴박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1절의 “반드시 속히 될 일”과 3절의 “때가 가까움이라”는 두 표현이 그렇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면서 상호 밀접한 어구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2절);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2절); “이 예언의 말씀”(3절). 셋째, 두 단락 모두 3인칭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 두 단락 사이의 불연속적인 긴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계시의 최종 형식이나 양식과 관련된 것으로서, 첫째 단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분의 종들에게 “보여진” 것이며, 천사의 중개로 ‘요한’에게 “지시되고”, ‘요한’ 자신이 “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두 번째 단락(3절)에서는 “예언의 말씀” 즉 계시가 갑자기 기록된 작품, 즉 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째, 두 단락에서 등장인물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즉 1-2절에서 등장인물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의 종들”, “그의 천사”, 그리고 “(그의 종) 요한”입니다만, 3절에서는 그저 막연하게 “읽는 자”, “듣는 자들”, 그리고 “지키는 자들”이라고만 합니다. 만일 이들이 1-2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그의 종들”과 같은 인물이 아니라면, 두 단락은 분명하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두 개의 다른 단락을 연결시키는 방식은 고대 문학에서 유사한 예들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서언 전체적으로 볼 때, 제목과 지복은 3인칭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만, 이어지는 4절부터는 1인칭의 보고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때문에 서언 부분의 저자와 나머지 부분의 저자가 서로 다르다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고대 묵시문학에서 이와 같은 형식은 그 예를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참고. 렘 1:1-3). 아래 두 예를 통해서 <계시록> 1:1-3과의 문학적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1) <에녹 1서>
에녹의 축복의 말
그 축복의 말에 따라 에녹은
재앙의 날에 존재할 택함을 받은 의인들을 축복했다.
이 재앙의 날은 모든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해진 날이다.
그리고 에녹은 대답하여 가로되
주님께서 그 눈을 열어 주신 의인이 있다.
그 의인은 하늘의 거룩한 환상을 보았으니
천사들이 내게 보여주신 그 환상이다.
그리고 나는 천사들에게 모든 일을 들었고,
내가 본 바를 깨달았으나,
내가 깨달은 바는 이 세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에 대한 것이다.
(예 2) <솔로몬의 증거>
예루살렘에서 다스렸고 공중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영들을 복종시킨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증거. 솔로몬은 이 영들을 통해 성전의 모든 장엄한 역사들을 이루었다. 이 증거는 영들의 권능이 인간들을 적대한다는 사실과 이 마귀들이 어떤 천사들에 의해 좌절되는지를 이야기 해준다. 솔로몬에세 이 권세를 주신 주 하나님,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에게 영광과 능력이 영원토록 있사옵나이다. 아멘.
위 두 예에서 보듯이 책의 제목은 3인칭으로, 그리고 책을 생각하게 하는 사람은 1인칭으로 되어있습니다. <계시록>의 서언과 나머지 부분이 연결되는 방식과 아주 흡사한 관계인 것입니다.
문학 양식. 수차례 언급한 바처럼, <계시록>의 첫 번째 문장은 제목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작품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목을 포함하고 있는 도입문장은 유대문학이나 기독교의 다른 계시문학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렘 1:1-2; 겔 1:1-3; 암 1:1; 에녹 1서 1:1; 신 33:1).
그리고 3절을 포함하여 일곱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지복은 그 형식에 있어 전형적인 “생략 삼단논법”(enthymeme)을 취하고 있습니다. “생략 삼단논법”은 다음 예문에서 보듯이 전제절과 귀결절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소크라데스는 죽는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이다”(이 문장에서 생략된 전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일곱 개의 지복이 하나씩 따로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연속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예. 마 5:3-12의 9개; 눅 6:20-23의 4개). 이곳 <계시록>에서 나타나고 있는 지복이 독특한 것은 모두 3인칭 단수-“읽는 자”와 3인칭 복수-“듣는 자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으며, 전달 과정 자체에 대한 축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추후 본문 연구를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목(1:1-2)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1:1-2)
책의 제목은 서사시(敍事詩)의 전형적인 서두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독자들은 계시와 관련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즉 계시의 궁극적인 출처, 그 계시의 중재자, 계시의 수신자, 그리고 계시의 최종 보고자 등에 관한 정보들을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되는 전 과정이 이 제목 속에 다 들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a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jApokavluyi" jIhsou' cristou). 한글 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정보는 계시의 중재자(또는 매개자)에 관한 어구(語句)입니다. 여기서 “계시” 또는 “폭로”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계시록>에서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이 사실이 함축하는 바는 1:1-3이 문서 편집의 마지막 단계에 책의 맨 앞에 삽입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묵시”(黙示)로 규정하지 않고, “예언”(1:3) 또는 “예언의 책”(22:7, 10, 18-19)으로 칭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와 “묵시”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서도 책의 저자가 익명(匿名)이 아니라 ‘요한’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1-5 사이에서만 세 번 등장할 뿐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등장할 뿐입니다), 이 같은 이름은 책머리에 처음 나오는 이름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그리스도는 주격(主格)이 아니라 속격(屬格)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직접 계시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중재된 계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어구(語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b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사. 즉 하나님이 계시의 궁극적인 원천이며, 작인(作人)이자, 신자들에게 전하시는 분이라는 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다소 다르게 표현되긴 했지만 <요한복음>에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참고. 1:18; 8:28; 12:49-50; 14:10; 17:8, 14). 이 모든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b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다음으로 계시의 수신자들과 그 성취(“반드시 속히 될 일”)에 관한 언급입니다. 수신자들은 “그 종들”(toi'" douvloi" aujtou)입니다. 여기서 수식 대명사 “그”(aujtou)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기보다는 문맥 상 하나님 자신을 일컫습니다. 즉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dou'lo")은 <계시록>에서 14회 등장하는데, 3회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6:15; 13:16; 19:18), 나머지 11회는 다소 은유적인 의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나(15:3), ‘요한’ 자신이거나(1:1), 예언자들이거나(10:7; 11:18), 또는 일반적으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1:1; 2:20; 7:3; 19:2, 5; 22:3, 6). 이 중에는 기독교 예언자들을 의미하는 곳도 한두 번 있기도 합니다(1:1; 22:6). 저자가 <계시록>이 교회에서 회중들을 위하여 큰 소리로 읽히도록 의도했다면, 종들은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왕의 신하나 병사를 “종”으로 불렀는데(삼상 18:5, 30; 19:4; 삼하 14:19-20, 22), 이는 고대 근동의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곳에서처럼 하나님의 종을 지칭하기도 했으며(창 50:17),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종 야곱”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일반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사 48:20). 그리고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기독교인 일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고전 7:22; 갈 1:10; 엡 6:6; 골 4:12). 물론 그리스도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하나님의 종”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벧전 2:16).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성경>에서 종이나 노예는 반드시 비천한 존재를 뜻하는 용어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계시의 성취와 관련된 표현, “반드시 속히 될 일”에 대해서는 해석 상 난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즉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이며, 그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계시록>이 처음 알려진 이후 20여 세기가 흘렀음에도 아직도 인류의 역사는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속히”(tavcei)는 두 가지 의미로 다르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이내”(또는 “곧”)으로 번역할 수 있거나(영어의 quickly가 이에 해당함), 또는 “빠르게”(또는 “신속하게”)(영어의 fast가 이에 해당됨)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속히”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본문에 대한 해석도 사뭇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한 해석 중 어떤 것을 받아들이든 여전히 남은 문제는 그 일이 이미 일어났는지, 아니면 아직도 미래의 일로 남아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관해서 ‘마이클 윌콕스’는 이 구절을 반드시 미래주의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에 관한 그의 주석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도서 7.
이 말은 기독교 이전의 묵시에서 사용하던 말을 미묘하게 변형시킨 것이다. <다니엘>의 계시 “후일에”(단 2:28) 될 일에 관한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기독교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말세도 실제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행 2:16, 17; 3:24). “속히”라는 말은 “갑자기”(“이내” “곧”)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언된 사건들이 일어날 때는 신속하게 일어나겠지만, ‘요한’ 시대 훨씬 이후까지 아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계시록>의 많은 부분은 오늘날까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갑자기”라는 번역은 1절의 문맥 상 몹시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그 구절은 현 상태로 볼 때 분명 먼 미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에 나온 “후일에 될 일”이 <계시록>에서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로 대체된 것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 즉 이전에 먼 미래의 일이었던 사건들이 당면한 현실로 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말은 “때가 가깝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때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종말의 도래를 알리는 여러 사건들이 시작되는 때인가? 종말에 대한 일종의 예시(豫示)로, 당면한 고통 또는 핍박의 위기가 올 때인가? ‘요한’은 이에 대해서는 즉시 듣지 못한다.
그러나 ‘다니엘’이 후일에 될 일들을 말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 살펴볼 만하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꿈이었다. 꿈에서 그는 큰 신상의 형태로, 바벨론 제국부터 시작해서 세게 제국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 중 마지막 제국 시절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단 2:4)라고 ‘다니엘’은 설명한다.
그리고 이제 ‘요한’은 그 후일이 도래한 것을 보았다. 하나님 나라의 설립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는 약속은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다. 그 성취는 위기가 아니라 과정이다. 또한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사건들은 절정에 이르면 빠르게 전개되겠지만, 과정 그 자체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때부터(12:10), 최종적으로 승리할 때까지(11:15) 복음 시대 전체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다니엘’이 미리 보았던 이 후일에 일어날 일을 바로 지금 ‘요한’의 눈앞에서 천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로 “때가 가까웠다.” 그의 편지가 아시아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이르는 순간 그들은 “이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깊은 독자들은 언제나 그 일이 당면한 일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그것은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이 세상 나라와 주님의 나라 간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실상을 보여줄 수 있다.
결국 ‘윌콕스’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즉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다니엘’이 오래 전에 예언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진행 중에 있으며,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1c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제목의 나머지 부분은 계시가 전달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계시가 그리스도를 거쳐 이제 천사에게, 그리고 ‘요한’에게로 전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문자적으로 볼 때, 여기서 천사는 그리스도와 ‘요한’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천사는 분명히 그리스도와는 구분되는 별개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바, 예컨대, 천사가 ‘요한’이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하자 이를 꾸짖고 있습니다(22:8). 더욱 분명한 것은 천사에 관한 예수님 자신의 언급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22:16a).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는 예수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천사를 사자(使者)로 받아들인다면(참고. 1:20; 2:1, 8),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를 전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 계시가 ‘요한’에게 전해졌습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수동태로 “보내어 알려졌다”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표현은 “표적”(sign)을 드러내다는 뜻으로서, 상징과 이미지로 가득 찬 이 책의 성격과도 잘 부합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시록>을 미래 역사에 대한 문자적인 예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반드시 일어날 일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풀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헬라어 원문 그대로 번역하자면, “이제 그가 본 모든 환상,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증거하는”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자”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이 둘은 결국 동등한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 자신이 본 전부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가 자신을 <구약>의 여러 예언자 반열에 속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고. 호 1:1; 욜 1:1; 렘 1:2, 4, 11).
2. 지복(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3절)
이 구절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축복 가운데(14:14; 16:15; 19:9; 20:6; 22:7, 14) 처음 등장하는 것입니다. 지복의 대상은 “읽는 자”와, 교회에서 이를 “듣는 자들”과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지복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매우 흡사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1:28). 회중 앞에서 <성경>을 읽는 행위는 오래된 유대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느 8:2; 눅 4:16; 행 13:15). <성경>을 읽는 자는 회중 가운데서 특별히 낭독에 관해서 일정 부분 유능함이나 유창함을 지닌 자를 뽑았는데, 이 같은 사람은 고대 사회에서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후대 교회에서 <성경> 낭독을 담당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놓았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한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그것이 적어도 두루마리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 앞에서 유창하게, 큰 소리로, 정교하게 읽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묵시록들이 공개적이 아닌 사적인 공간에서 은밀하게 읽혀졌다는 사실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듣는 자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언의 말씀이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회중이 지켜야 할 일련의 윤리․도덕적 내용도 담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요한’ 자신이 그의 예언의 말씀을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듣는 이들이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어구가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또 한 번 등장합니다(22:10). 하지만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그 때”(oJ kairo;“)는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유대적 전통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인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rovno”)와는 달리 종말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때”는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22:7, 20)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언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지켜 순종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계시록>의 “부제”(副題, subscription)와 “표제”(表題; superscription)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2. <계시록>의 제목과 지복을 구분해 봅시다.
3. <계시록>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 토의해 봅시다.
제 2과: 서신의 규칙
2
서신의 규칙
(1:4-5c)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 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1:4-5c)
문학과 역사
서론. <계시록>의 중요한 양식 중의 하나가 “서신”(epistle)임을 알았습니다. 이 단락에서 서신으로서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양식적 특징은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서신의 규칙”(epistolary prescript)이라 함은 이 단락이 서신으로서 갖추고 있는(또는 갖추어야 할) 형식적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서, 1:4-5c은 의례적인 “서문”(prescipt)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신의 전형(典型)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락과 구조. 헬라어 원문과 한글 사이의 구문 상의 차이로 인해서 해당 구절의 순서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단락 구분에 있어 해당되는 구절의 순서 또한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글 성경의 순서에 따라 단락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서신의 서문(1:4-5c)
1) 발신자: 요한(4a)
2) 수신자: 아시아의 일곱 교회(4b)
3) 문안 인사(4c-5c)
(1) 기원(祈願)(4c)
가. 은혜
나. 평강
(2) 호의(기원)의 궁극적 원천(4d)
가. 하나님으로부터
(a) 이제도 계신 분
(b) 전에도 계셨던 분
(c) 장차 오실 분
나. 그 보좌 앞 일곱 영으로부터
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a) 충성된 증인(5a)
(b)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분(5b)
(c)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5c)
서문의 구조는 위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서간이나 <신약>의 <서간서>들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발신자; (2) 수신자; (3) 문안 인사. 문안 인사의 경우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바, 첫째는 은혜와 평강이고, 두 번째 요소는 은혜와 평강의 궁극적인 원천입니다. 그 원천은 다시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과, 일곱 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이 문안 인사 부분이 전통적인 그리스의 서신이나 기독교 서신들의 문안인사와 현저하게 다릅니다. 전통적인 개인적인 그리스 서신의 경우 문안은 단순히 “인사”(caivrειν; greetings), 때로는 “가장 다정한 인사”(πλείστα caivrειν)를 포함하고 있는 정도이며, <신약>에서 이와 같은 문안인사는 <야고보서>(1:1)와 <사도행전>(15:23; 23:26)에서 삽입된 편지의 문안인사로 세 번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적인 차이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며 그 궁극적인 원천에 관한 표현으로서, <신약>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의 경우에는 다음 세 가지 표현 중의 하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유형: 단순히 기원(祈願)만 나오는 경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1:1b; 벧전 1:2b; 유2).
(2) 두 번째 유형: 한 가지 신적 원천만을 사용하는 경우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 1:2b).
(3) 세 번째 유형: 두 가지 신적 원천을 사용하는 경우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b;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살후 1:2; 딤전 1:2b; 딤후 1:2b; 딛 1:4b; 몬 3; 벧전 1:2; 요이 3).
<계시록>의 문안인사가 독특한 것은 “은혜와 평강”의 궁극적인 원천을 밝힘에 있어, 세 가지 이상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신약>의 <서신서>들의 문안인사를 자신의 방식대로 수정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호칭을 시적 형식을 갖추어 공식화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 첫 번째가 하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는 “하나님” 또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르는 대신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 호칭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에 관한 호칭입니다. 이 역시 세 가지 요소로 나타내고 있는데, 예수님의 생애에서 세 가지 중심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사건은 예수님의 지상 생활, 부활, 그리고 종말론적인 승리ㄹ르 말합니다(참고로, ‘요한’은 여기서 <바울 서신>에서 만나는 전형적인 호칭 “주 예수”는 생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혜와 평강의 세 번째 원천으로 특이하게 “그 보좌 앞 일곱 영”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해당 구절 해석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배경. 일부 학자들은 <서신서>의 전형적인 문안인사,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가 예배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혹자는 <계시록>의 경우도 이 같은 예배적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예컨대, ‘바니’(Vanni)는 1:4-8이 다음과 같은 예배의 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
4b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회중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설교자
7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회중
그러하리라 아멘
설교자
8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처럼 이 단락을 예배의 대화로 인식할 때, 이곳에 존재하는 문학적 불일치의 문제(예. 갑작스러운 인칭의 변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3절의 경우에서 인도자(또는 설교자)와 회중이 존재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발신자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4a)
서신의 표제(標題)는 발신자의 이름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신자에 관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간결하고 호칭이나 권위에 대한 아무런 주장이 없다는 점입니다(참고. 롬 1:1-6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장황한 소개를 덧붙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수신자
그리고 서신의 수신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입니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모두 포함한 표제는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로서 동사와 목적어가 빠진 고대 헬라 서신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계시록>에서 숫자 일곱이 지니는 상징이 아주 각별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계시록> 내에서 이 숫자는 54회 나옵니다), 일곱 교회가 수신자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할 것입니다. 혹자는 여기서 일곱이 의미하는 바는 보편적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요한’의 메시지의 신적인 기원이나 권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왜냐하면 일곱은 주로 우주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하늘의 실재(實在)들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는 “유럽”과 함께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를 이루는 두 부분 중의 하나로서, 둘 다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단어를 로마의 속령(屬領)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행 2:9). 그리고 <일리어드>에서는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에 있는 ‘리디아’의 작은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후(약 주전 750-500년) 그리스에는 유럽외의 지역, 즉 오늘날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소아시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총 인구 백만 명에 이르는 50개 이상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3. 문안 인사
기원.(祈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4b). <개역성경>에는 이 구절이 1:5에 나옵니다.
이는 전형적인 기독교의 인사말로서, 통상적인 ‘유대’식 인사와 ‘그리스’식 인사를 결합한 표현입니다. 즉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평강은 “샬롬”이며,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cavri")입니다. 이와 같은 관용적 표현이 사도 ‘바울’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합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기원의 궁극적 원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미암아”(4c). ‘요한’은 “은혜와 평강”의 궁극적 원천으로 먼저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서신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만,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대개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요한’도 <계시록>에서 하나님을 “나의/그의(예수의) 아버지”로 부르고는 있습니다만(1:6; 2:27; 3:5, 21; 14:1), 이곳 인사말에서는 의도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생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신에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매우 정교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전통적인 기독교 인사말을 변형시킵니다. 이 독특한 어구는 어순을 달리한 채 이 곳 외에 이 책에서 두 번 나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1:8);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4:8c).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이 호칭에 새로운 수식어를 덧붙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로 부르고 있다(16:5).
“지금 계시는 이”(oJ w[n)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대중적인 호칭이었습니다. 헬라 단어, ‘온’(w[n)은 동사 “있다”(또는 “이다”)의 ‘에이미’(eijmi)명사적 분사형입니다.
이 어구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부르시는 ‘히브리’어 호칭, ‘아세르 아하야 아하야’(hy<h]a, rv,a} hy<h]a,;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의 <칠십인역>의 번역, ‘에고 에이미’(영어의 I AM)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는 최초의 저자로서, <계시록>에서 네 번 사용하고 있으며(1:4, 8; 11:17; 16:5), 이 중 두 번은 기도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11:17; 16:5).
그렇다면 ‘요한’은 책의 서두에서 왜 이 이름을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을까? 자신이 전하는 계시의 권위와 신뢰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호 온’(oJ w[n)이 그를 보내셨다고 말함으로써 백성들이 그를 믿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곳에서처럼 세 가지 시제(時制)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식은 <호머> 등과 같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는 아주 보편적이었다고 합니다(참고 도서 1, 359쪽).
기원의 두 번째 원천은 “그 보좌 앞 일곱 영으로부터”입니다. 이 어구의 해석과 관련해서 우선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요한’은 “일곱 영”을 지칭하며 그 앞에 관사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어구가 친숙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구약>에는 복수 형태로 “하나님의 영들”이라는 어구가 등장하지 않으며, 대신 단수 형태의 “하나님의 영”이 94회 등장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구약>에서 “영들”이라는 복수 형태는 천사에 대해서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