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6과
죽음 앞에서
김태정 목사시편 4약 16분 분량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1절)
기독교나 유대교의 예배에서 예배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기도나 예배를 통해서 지존자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거룩함 만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아무 때나 경솔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시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이 시는 대체적으로 “확신의 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시 4, 5, 11편). 특히 5-11절의 내용이 이점을 지지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가 과연 확신의 시인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은 것이, 서두에 나오는 시인의 말(1절)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이거나 또는 위기로부터 구원받은 것과 비슷한 보호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기도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절)
만일 시의 제목으로 등장하고 있는 “믹담”(!T;k]m)이라는 단어가 “비문”(碑文) 또는 “비문의 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단어가 “쓰다” 또는 “새기다”를 뜻하는 동사 '카타브'(כתב)에서 파생하였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 시가 위기로부터 구원을 받은 일을 기념하는 기념비에 새겨 넣은 비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동지방에는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정확하게 분석함에 있어 제기되는 또 하나의 어려움은 2-4절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 때문입니다. 지금 예배자(시인)는 자신을 참된 예배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을 두고 있으며, 그들과의 상상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이 번역이 옳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흔히 선지자들이 맹렬하게 비난하는 소위 “혼합주의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동시에 이방신들 즉 “거룩한 자들”, “강대한 자들”(3절)도 숭배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다른 사람들” 즉 친구나 친지는 위기에 처한 시인이 직면하고 있는 유혹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강대한 자들”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더 나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두 신은 하나의 신보다 더 많은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유혹을 거절하고, 확신을 가지고 유혹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가운데서만 도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배경과 역사. 이 시를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면, 시의 배경은 개인적인 즉 비제의적(非祭儀的)인 상황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저작 연대나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시편> 제 1권에 나오는 여섯 개의 '믹담' 시들은 모두 <다윗의 시집>에 속합니다. 이들 여섯 편중에서 네 편(956, 57, 59, 60편)은 그 제목에서 '다윗'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사건들과 동일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이 시를 '다윗'의 시라고 언급하고 있기는 하나(행 2:24-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16편의 내용 속에는 저작 연대나 저자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서론(1절)
(2) 친구의 말(2-4절상)
(3) 확신의 노래(4절하-11절)
신학과 신앙
1. 서론(1절)
앞에서 밝혔듯이 서두에 등장하고 있는 시인의 기도는 그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어떤 특별한 위기와 관련되어 있거나, 아니면 최근의 위기를 통해서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미래에도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인이 처한 위기는 두 가지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는 “죽음의 위험”입니다(음부, 10절). 그는 아마 최근에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는 위기로부터 오는 “유혹”입니다. 즉 혼합주의적 신앙에 굴복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친구들의 말 속에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은 그의 내면으로부터 이 유혹에 굴복하고 싶은 강력한 유혹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2. 친구의 말(2-4절상)
유혹의 말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두 번째 단락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지적한대로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해석상의 어려움은 2절의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의 동사 '아마르트'(T]r]m'a)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동사의 원형은 '아마르'(rm'a:)로서, “이야기하다”, “생각하다”(마음으로 말하는 것), “의도하다”, “명령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 동사의 용례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선 일반적인 해석은 동사를 일인칭 단수형으로 보는 경우로서, '아마르트'의 어미(語尾)에 '요드'(י)를 회복시켜 '아마르티'로 바꾸는 것인데, 이 경우 문장의 주어는 시인 자신으로서, 그 의미는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가 됩니다. 반면 본문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에는 본문의 주어는 2인칭 여성(또는 남성)이 되며, 이 때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시인의 견해(1절; 4절하-11절)와 그가 대화하고 있는 상대자의 견해(2-4절상)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능한 해석은 “당신이 여호와께 아뢰되”가 됩니다.
따라서 약한 기초 위에 너무 많은 것을 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상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소개한 번역을 토대로 추측해 본다면, 시인은 지금 한 친구의 말을 회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친구는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거나, 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유혹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혐오스러운 유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지금 두 세계의 것을 원하는 일종의 “혼합주의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방 신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나의 강대한 자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의 신앙은 아주 실용적이며 탄력적입니다. 이런 친구는 유혹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중적인 보호를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혐오해야 할 어떤 상징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분명히 십계명의 제 1 계명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위기 시에 이중적인 안전장치를 가지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고통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4절상).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 외에 또 다른 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3. 확신의 노래(4하-11절)
시인은 두 신을 갖는 것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입장과 친구의 입장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4하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친구는 두 주인을 섬기려 했지만, 시인은 한 주인은 부인하고 다른 한 주인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친구와는 달리 거짓 신들에 대한 예배에 참여하거나 거짓 신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만 그의 산업이고 잔입니다.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입술만이 참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잔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호세아>에서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호 2:17).
이어서 시인은 자신의 삶의 체험을 돌아보며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지금까지 시인의 삶은 그야말로 행복했습니다. 그동안의 삶을 “약속의 땅”에 대한 은유로 묘사할 정도입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 그는 이 구역이 “아름다운 기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땅의 소유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충만한 인생을 경험하게 했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 하나님의 “훈계”였습니다(7절상).
그런데 이제 시인은 지금 그에게 닥쳐온 위기(또는 최근에 그가 겪은 특정한 위기)로 주의를 돌리고 있습니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상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위기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구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죽지 아니하리라”로 번역할 수도 있어, 시인은 지금 죽음의 위기 앞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시인이 갖는 확신은 “야훼께서 그의 앞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8절). 달리 말하자면 그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시인의 순종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시 119:30). 시인의 또 다른 확신은 하나님의 그의 “오른 손”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있습니다(8절). 야훼 하나님의 오른 손은 시인을 흔들리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두려움 속에서 그를 굳세게 잡아줍니다. 시인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가 임박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삶으로 회복되었다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9하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결론 부분에 대한 해석은 이 시의 첫 도입 부분과 연계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즉, “메시야적인 해석”이나 “종말론적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신약>에서 이 부분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 시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시인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자신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의 생명은 요절하여 음부에 떨어질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확신을 가지고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하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알게 하셨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시인으로 하여금 내세(來世)를 경험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기쁨으로 말미암아 충성해지는 현세에서의 충만한 인생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위기와 유혹
누구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 태연할 수는 없고, 절대 절명의 순간에 어떤 절대자를 찾기 마련입니다. 언젠가 필자가 잘 아는 외국에 사시는 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그분의 처제를 병문안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여성분은 몹쓸 병에 걸려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복음이라도 들을 기회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친구 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간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잠시 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습니다만, 환자나 그 가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만족 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구원해 줄 또 다른 이름을 찾고 있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이 분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든 죽음의 위협 앞에 자기 생명을 구해줄 수만 있다면 그 이름이 무엇이든 도움을 요청하고, 그 앞에 기꺼이 무릎 꿇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일종의 거래로서, 거래의 당사자가 악마라 할지라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티브를 담은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허다합니다.
지금 이 시인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지금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지금 음부의 문턱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참고. 10절). 그런데 그가 당하고 있는 위협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죽음과 함께 찾아온 또 다른 위기는 “친구의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라는 유혹이 그것입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바치라는 것이지요. 그 신 또한 힘이 아주 막강하고 강대합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친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전형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지금 양 다리를 걸치고 두 세계의 것을 원하는 일종의 “혼합주의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방 신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나의 강대한 자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의 신앙은 아주 실용적이며 탄력적입니다. 이처럼 위기는 항상 유혹과 함께 오는 것 같습니다. 유혹은 위기를 제거해 주는 대가로 타협을 요구합니다. 이 유혹은 뿌리치기가 결코 쉽지 않으며, 은밀하고도 아주 강력합니다.
세상사에서 이중 보험을 드는 일은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권장 받아 마땅합니다. 모든 재산을 한 곳에만 투자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파스칼'이 말한 대로 일종의 천국 보험을 드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면, 종교를 두 개 이상 가지고 있는 것도 무익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놓고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취한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친구의 제안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을 텐데도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두 신을 모신다는 것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4절상). 두 신을 섬기는 일이 왜 괴로움을 더하는 것인지 그 이유는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통해서 이를 체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친구는 두 주인을 섬기려 했지만, 나는 한 주인만을 섬기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친구와는 달리 거짓 신들에 대한 예배에 참여하거나 거짓 신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만 그의 산업이고 잔이라고 노래합니다(4절하-5절).
이처럼 은밀하고도 끈질긴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과연 어디서 왔을까요? 이 역시 지나간 삶의 체험을 통해서 습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난 삶이 그야말로 꿀처럼 달고 아름다웠다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6절). 그로 하여금 이처럼 풍성한 인생을 경험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훈계”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7절상).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금의 위기에서 그를 구원해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독한 무신론자 '도킨스'(R. Dawkins)는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현대 사회가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신론자의 진단인데도 슬프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 책에서 <성경>과 기독교 하나님에 대해서 수많은 억지와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데도 별다른 비난은커녕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것도 오로지 그런 무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로버트슨'(D. A. Robertson) 목사도 <만들어진 신>을 반박하기 위하여 쓴 그의 책 <스스로 있는 신>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라고 떠들어대는 많은 사람들이 실은 <성경>에 얼마나 무지한지 모른다고 통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을 더 잘 알고 더 깊게 배운다면 이런 무신론적 책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8절). 달리 표현하자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시인이 갖는 확신은 “야훼께서 그의 앞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8절). 그는 임박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삶으로 회복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9-11절).
위기와 극복
이 결론 부분에 대한 해석은 이 시의 첫 도입 부분과 연계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즉, “메시야적인 해석”이나 “종말론적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시인은 지금 내세(來世)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충만한 인생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시가 성격상 '메시야'적인 것도 아니고 종말론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 아니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에서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 시를 그런 방식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약> 화자들이 보이고 있는 <구약>에 대한 해석학적 특징은 “그리스도론적”이거나 “종말론적”인 것으로서, 이 시 역시 그러한 해석학적 범주 속에 넣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의 설교에서 이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였고(행 2:25-28), 사도 '바울' 또한 '안디옥'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 시를 인용하면서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행 13:3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행 2:25-28)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행 13:35)
이들의 해석은 현대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알레고리적 해석”이 분명하지만, 아무튼 이들은 이 시의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대조적인 개념도 새롭게 도입하고 있습니다. 즉 시인은 임박한 죽음 앞에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충만함을 알았습니다.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임박한 죽음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죽으러 나아가셨습니다. 시인에게 있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시인은 확신을 가지고 죽음의 위협에 대항해 일어섰습니다. 예수님은 확신을 가지고 죽음의 요새로부터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음부에 버리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음부에서 구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때 이른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죽음의 위기를 넘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나자로'가 죽음에서 되살아나긴 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부활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부활은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를 듣던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그들 모두는 죽었습니다만). 우리 모두는 이 시인처럼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과 공포 가운데 살아가고, 때로는 확신을 가지고 이들을 통제할 수도 있지만,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의 새로운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65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시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음부의 세력은 영원히 정복되고, 사망의 쏘는 것은 사라지게 됩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를 통해서, 그 배경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시인에게 닥친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며, 유혹은 무엇입니까?
3. 시인이 위기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4. 이 시가 겪어온 해석상의 발전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이 시를 '메시야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 역시 이 시를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