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2과
두 가지 말
김태정 목사약 9분 분량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함 같도다(6절)
시인은 이 시에서 두 종류의 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첨과 칭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아름답고 순수한 것일수록 더 손상되거나 악용되기가 쉽습니다. 사랑도 그렇고 모든 인격적 관계 또한 그러합니다. 지금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내용과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이 시는 장르에 있어 “개인적인 애가”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만, 5절을 대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예배자들을 향해서 주는 신탁으로 간주한다면, 아마 성전 예배 시 “공동체적인 애가”의 기능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이 시가 공동체적인 애가로 기능했을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 구약성경>에서 2절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 “나를 도와주소서”라는 번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어떤 특별한 행사에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행사였는지는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배경과 역사. 이 시의 저작 연대나 저작자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이 그리고 있는 악인들의 모습이나 무죄한 고난자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과 연관시키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평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의 저작 연대가 왕정 시대 이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뚜렷한 반복과 대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인이 특별히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말”에 관한 것입니다. 즉 인간의 악하고 아첨하는 말과 하나님의 순수하고 참된 말씀이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에 따라 시의 구조도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악한 사람들의 허황된 말(1-4절)
(2)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5-8절)
신학과 신앙
1. 사람들의 허황된 말(1-4절)
시의 첫 단락은 “도와 달라”는 간청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리고 곧 이어 그러한 간청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한 편으로는 선한 사람들이 땅위에서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악한 사람들이 날뛰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이전에 '엘리야'야 느꼈던 것처럼, 자신이 이 땅에 남은 최후의 의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참고, 왕상 19:10). 시인은 신실한 자를 더 이상 주위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볼 수가 없어도, 악한 사람들은 볼 수 있었고, 그들의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2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의 말은 “거짓”과(2절, “공허”; “헛됨”), “아첨”(2-3절, “치레하는”)의 말이며, “두 마음”(2절)으로 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악의 본질이 행동이 아니라, 말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도와달라고 절규하게 만든 것은 바로 말로 인해서 비롯된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알맹이는 없으면서도 듣기 좋은 말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참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듣기 좋은 말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무죄한 자들의 삶을 위협하는 말도 했습니다. 그들은 “두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했습니다. “두 마음”은 흔히 영어의 은유에서 발견되는 “둘로 나누어진 마음으로” 즉 “확신을 갖지 못한 마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중적인 기준을 말합니다. 즉 그것은 기만과 위선을 암시합니다. 그들에게 안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비록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이 허황된 말을 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 세력이나 영향력을 가지려 하기 때문입니다(참고. 약 3:6-12):
4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그러나 이들의 궁극적인 죄는 “교만”입니다. 그들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그들은 스스로 아무도 그들을 주관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그들의 혀로 하나님의 종들을 억압합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들의 말이 근절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5-8절)
시인은 갑자기 악한 자들의 말(4절)을 하나님의 말씀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며 두 번째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5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이 말은 예언자나 제사장이 했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하나님은 “일어나려는” 자신의 의도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자들” 때문에 일어나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종을 “안전하게”(בישׁע, 베예솨) 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단어는 시인이 기도의 첫 머리에 사용한 단어인 “돕다”(הושׁיע, 호쉬아)의 다른 형태로서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암시해주고 있는 바는, 기도가 응답을 받은 직접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구원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두려움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빛을 내셨던” 것과 마찬가지로(신 33:2에서도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합시다), 이번에도 다시 자신을 계시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다음 그분의 말씀의 본질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6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들의 말(2-4절)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합니다. 그 순수함은 금속의 제련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 은유의 다른 용례에 관해서는 11:45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금이나 은처럼) 본질적으로 귀중합니다. 이 은유에 따르면, 정련과 정제를 해도 불순물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구절이 시사하는 바는 인간의 말은 온통 불순물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은과 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첨과 허위라는 불순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확신 가운데서 시인은 자신의 확신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7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참되며, 믿을 수 있습니다(6절). 이제 그분의 구원과 보호가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은 여전히 종횡무진하고 있고, 그들의 비천한 말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되듯이 존경과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8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그렇다면 시인의 확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확신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고 믿을 만 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의 말씀
이차 대전 중에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사용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아들만 한 장소에 모아놓고 육 개월 동안 일체의 말도 없이 먹을 것만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기는커녕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실험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정상적인 인간 생활에서 말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만합니다. 우리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일 때, 눈을 맞추기도 하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속삭이는 모습을 봅니다. 그 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어머니의 이런 행동은 아이의 성장과 정신적 안정에 치명적으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끊임없이 누군가와 말을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말은 인간들이 상호간에 의사를 소통하는 기본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역시 말이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할 것입니다. 종교적 언어가 상당 부분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말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주셨습니다. 말을 통해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 '로고스'의 성육신 사건도 하나님의 자신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합니다. 죽어 사흘이 지나 단순한 유기물로 부패해 가던 '나자로'가 살아난 것도 예수님도 말에 반응한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오해 없는 대화를 위해서는 그분의 말이 갖는 특징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합니다(6절). 전혀 불순물이 없습니다. 불순물은 허위와 아첨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말 역시 순수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말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아름답고 순수한 것일수록 손상되거나 악용되기가 쉽습니다. 순수하거나 선할수록 불순해지고 부패해 지기가 쉽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서>가 보여주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참고. 호 1-3장). 인간관계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도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는 특히 정치 분야에서 이 "말'이 얼마나 악용되고 있는지 일상 생활에서 보고 있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들 자국이연전연승하고 있다는 광고를 쉴 세 없이 내보냅니다. 시인은 이러한 세상에서 말이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가치와 무가치가 전도되었고, 진실이 아첨으로 둔갑했으며, 말과 생각 중에 겸손과 교만이 그 자리를 바꾸어 버린 것을 보고 있습니다. 혀에 담긴 은사가 교만한 인간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비뚤어진 목적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악한 말의 존재를 알리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채찍질과 거짓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부득이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불순한 말의 힘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신빙성을 깊이 묵상할 때, 시인은 자신이 간구했던(1절) 확신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7절). 인간의 악한 말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시인은 적들에게 그 악한 말을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세상은 그가 확신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거짓과 아첨을 내뿜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진정 매일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으로 대화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시 12편의 장르와 형식적 특징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이 시에서 두드러진 이미지나 상징은 무엇입니까?
3. 이 시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고통의 내용이 무엇이며, 왜 그가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