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3과
목자의 시
김태정 목사시편 23:1약 21분 분량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1)
모든 시편 가운데 이 시만큼 잘 알려진 시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들 이 시야말로 서정시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 하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로써, 일인칭 대명사가 이곳에서 17번이나 등장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가 많은 시입니다. 시인은 4-5절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독백 즉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과 근동 지방의 역사나 문화 및 지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이 시가 지니고 있는 간결함과 보편적인 특성은 번역 상의 벽을 극복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송하는 시로 남아 있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즉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것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는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시인은 만족과 마음의 평화, 감사함과 신뢰,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신 등과 같은 느낌들이 이 시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감상 포인트는 시의 구조나 형식 외에, 풍성한 수사적 비유나 이미지 등을 발견해내는데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떤 것이며, 시의 장르 구분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시 23편은 짧고 또 본문이나 번역 상의 문제가 별로 없는 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양식(樣式)이나 그 배경과 역사를 결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이 시의 장르를 조금씩 다르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신뢰(또는 확신)의 시”; 또는 “감사의 시”; “왕의 시”.
단락와 구조. 이 시의 구조 또한 확실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개 아래 두 부분으로 나누는 데에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1) 목자로서의 야훼: 1-4절
(2) 만군의 야훼: 5-6절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분석조차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첫 번째 단락의 네 절이 거룩한 목자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겠습니다만, 나머지 두 절(5-6절)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마지막 두 절은 야훼에 대한 이미지가 목자에서 만군의 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모두가 이 견해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목자로서의 야훼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5-6절 사이에는 야훼에 대한 수사적 비유 즉 은유가 전혀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희생 제사에 관해서는 더욱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경과 역사. 이 시의 양식이나 구조에 관한 문제는 결국 이 시의 배경을 밝히는 문제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배경에 관한 문제 역시 극도로 다양한 견해가 알려져 있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즉 시의 배경과 관련한 스펙트럼의 한 쪽 끝에는 이 시를 지극히 개인적인 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끝에는 이 시는 성전 예배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내용 중에 희생제사와 감사 의식이 포함되어 있는 점이 그 증거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이 시가 '바벨론' 포로 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목자의 비유는 “출애굽”에 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고향과 성전으로부터 유리된 채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에게 일말의 소망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자는 견해입니다.
이처럼 시의 배경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는 이 시를 설명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문제점이 많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이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그 본래의 의미나 배경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견해들 중에서 일부는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다른 견해들 즉 이 시가 “왕의 시”라든지 또는 “바벨론 포로” 시에 만들었다든 등의 해석은 증거가 불충분한 것들입니다. 물론 이들 견해들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고 가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간단한 견해를 채택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즉 본 시를 어떤 의식이나 감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확신의 시”로 간주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데에는 5-6절의 내용이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배경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시가 어떤 공동체의 제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시가 후대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시로서 기능을 수행했겠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시로서의 역할 또한 수행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시의 구조와 제목 또한 다음과 같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1) 거룩한 목자(1-4절)
(2) 장차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릴 감사에 대한 기대(5-6절)
신학과 신앙
1. 거룩한 목자(1-4절)
시의 첫 네 절은 다양한 비유와 이미지들을 광범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자”;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 “골짜기”; “지팡이”; “막대기”; 등.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중에서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단어는 “야훼”는 시 전체의 주제를 결정해주고 있으며, 마지막 절에서 마치 수미상관을 이루듯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
“야훼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의 양 떼에 속해 있는 한 마리의 양입니다. 이 서두 진술은 시 전체에서 그려내고 있는 지배적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은유는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는 자의 관계를 묘사할 때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그려내고 있는 요지는 “보호”와 “예비”라는 상호 관련된 영역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목자가 그려내고 있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은유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양을 어떻게 쳤는지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그가 말하는 것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목자는 한여름 가뭄 중에 푸른 초원으로 가는 샛길과 샘물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무엘서>는 '다윗'이 양떼를 공격하는 사자와 곰을 어떻게 죽였는지 보여주고 있듯이(삼상 17:34-36), 목자는 그의 양떼가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바위투성이의 산에 나 있는 좁은 길 또한 양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황과 양들이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목자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이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가적인 은유가 이 시 전체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첫 두 절에서, 그리고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에 대한 언급에서 목자의 생활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 뒤를 잇는 해석에서 시인은 일부 상징들과 용어들이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시를 목가적 은유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목자가 되신 결과 시인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도다”는 진술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자가 공급해 주는 것은 단순히 물과 양식뿐만이 아니라, 안식과 편안함, 자비와 선함 등 매우 광의적이며 일반적인 영역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이 그의 목자가 되신 한에 있어서 영육 간에 궁핍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출애굽” 이후의 광야 생활을 회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신 2:7). 이 문장에서도 시 23편과 동일한 동사 '하세르'(חסר)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가 목자의 은유에 영향을 미친 실례가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구절(2-3절)은 목자의 비유를 더욱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진술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목록입니다. 이 목록에 포함된 하나님의 배려는 일견 식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들은 일차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물과 풀은 양의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것들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양은 “푸른 초장” 위에 누워있으며, “물가”를 걷고 있습니다. 이 두 묘사는 이 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주요한 개념은 휴식과 원기 회복으로서, 이곳은 일종의 오아시스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침 일찍 거친 초원에서 양떼를 몰기 시작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풍성하고 달콤한 초원으로 인도하여, 마지막에는 정오의 휴식을 위하여 풀이 우거진 푸른 초장의 그늘진 곳으로 데리고 가는 관습이 있습니다. “쉴 만하다”는 것은 그 이미지가 평화로운 휴식의 분위기에 어울릴 뿐만 아니라, 양은 빠르게 흐르는 시냇물에서는 물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두 이미지는 비단 양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차원으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 어디에서도 목가적 세계, 즉 풀이 많고, 물이 고요하면서 즐겁게 흐르고, 시원한 그늘이 부르고, 휴식과 정적이 있는,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세계를 그립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바람이며, 인간의 영혼과 상상력에 깊고도 심오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이상향”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설은 본문을 지나치게 '알레고리'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의 원래 의도라기보다는 초대교회에서 그렇게 확대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도 <출애굽>의 모티브를 연상할 수 있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초장”(נאות, 네아우트)은 “성결한 처소”(נוה, 나와: 출 15:13)를 연상시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결한 처소”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목표였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인도하다”(נהל, 나할)가 <출애굽>에서도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출 15:13). “쉴 만 한 물가”(מנחות, 메누후트: 문자적으로는 “평온의 물”; 의도적으로 복수형을 사용함)는 광야에서 방랑할 때 언약궤와 관련된 “쉴 곳” 또는 “평온”(מנוחה, 메누하)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민 10:33).
하나님의 섭리는 3절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제 1행(行)은 회복, 혹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양떼에 대한 묘사에서 시인 자신의 묘사로 옮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 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이 용어는 인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목가적 언어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 단어는 “생명”의 힘을 수반하고 있으며, 육체적 활력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목가적 이미지를 사용한 결과 인간과 관련되는 내용이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은 육체적 회복, 정신적 복구,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에 의한 구원 등을 의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3절에서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2행) 역시 <출애굽>과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시편>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106:8). 이처럼 <출애굽기>의 흔적들은 시인이 지금 기대하고 있는바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보호하시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자기에게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3행)는 진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적∙도덕적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란 근본적으로 양과 같은 짐승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어휘이므로 당연히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울서신>에서는 물론 <성경> 전체적으로 정확한 이해를 요하는 개념입니다. 흔히 이 개념은 주로 윤리∙도덕적 규범이나 이상과 관련해서 “공의”(justice) 또는 “의로움”(righteousness) 등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 “체데크”(이 단어는 흔히 '멜기세댁' '사독', '사두개' 등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음)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어는 원래 “관계”의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는 “한 한간이 지니고 있는 어떤 속성이나 특질”이 아니라,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한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 정도로 이해함이 더 정확합니다. 즉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를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은 그가 그의 백성들과의 언약에 충실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다시 회복되시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은 항상 “언약에 대한 신실함”과 밀접한 관계를 지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구원 행위와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시 31:1; 35:24; 51:14; 65:5; 71:2, 15; 98:2; 143:11; 사 45:8, 21; 46:13; 51:5, 6, 8; 62:1-2; 63:1, 7). <로마서>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 바로 이러한 개념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행위를 지칭하기도 하고, 그분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칭의”(justify; δικαιουν) 역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분의 행위로 볼 수 있거나 또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선언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인간의 의란 결국 무엇이며, 유대인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의의 길”을 문학적으로 번역한다면, “올바른 길” 내지는 “똑바른 길”이 될 것입니다. 시인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목자가 그의 양떼를 양 우리에서 목초지로 몰고 갈 때에 위험한 길과 반대되는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의 이미지는 시인이 여행이라는 모든 문학의 오랜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도 여행의 모티브가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매우 깊은 어두움” 또는 “완전한 어두움”으로서, <출애굽>에서 볼 수 있는 “깊은 어두움을 통한 방랑”과 결부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렘 2:6). 또 한편으로는 <욥기> 등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의 위협”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욥 10:21-22). 그러나 이 구절을 문학적 비유로 받아들인다면, “음침한 골짜기”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양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소일 것입니다. 골짜기와 어두움은 악과 위험의 원형적 이미지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이 시에서는 드물게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4절은 시인이 인생에 대한 현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인생에서 불행한 일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주장하는 바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닙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인은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확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서 시작되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변화는 시인은 이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더 이상 삼인칭(야훼, 그)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한글 개역판>에서는 감지하기 어려우나, 영어 번역판에서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23:4). <한글 개역판>은 2인칭 “you”를 모두 3인칭 “주”로 번역하고 있어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의 정해진 패턴에서 일탈(逸脫)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아마도 어두움과 위험에 대한 시인의 위기위식이 절망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고, 그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하도록 유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대화는 이어지는 절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것은 분명 목자가 일하는 실제 상황에 대한 언급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여러 가지 용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랑에 빠진 양을 구출할 때에나, 우리로 들어갈 때 등에 대어 숫자를 셀 때에나, <레위기>에서는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레 27:32).
또는 다른 짐승들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곤봉으로 사용할 때 등입니다. 이러한 목자 이미지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시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서적 반응 즉 편안함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Readers' Digest>(LXXVII, 183-184)에서 '바스코' 목자는 4절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실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으며, 스페인에서 '달마티아'(유고슬라비아 남서부 지방)에 이르는 지역의 목동들 중에 그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사해에 이르는 '여리고' 도로의 남쪽에 있으며, 산악 지방을 통과하는 좁은 골짜기다. 기후 및 방목 조건에 따라 양떼는 해마다 계절별로 먹이 때문에 이 골짜기를 통해 이동하게 된다. 이 골짜기를 지나는 여행에는 위험이 따르는데, 그것은 골짜기 바닥에 높이가 3-4 미터나 되는 도랑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단한 바위 위로 걷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나 좁은 곳이 많아서 양 한 마리가 몸을 돌릴 수 없을 정도이며, 양떼가 도랑을 만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양떼를 몰고 아침 시간에 골짜기 위로 올라가서 저녁 무렵에 내려오는 것이 목자들의 불문율이다. 골짜기 중간쯤에는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깊이가 3-4미터 되는 도랑이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도랑의 저쪽은 이쪽보다 높이가 30센티미터 정도 높습니다. 따라서 양은 높이 뛰어서 그 길을 넘어가야 한다. 목자는 도랑 앞에 서서 양떼들을 어르거나 강제로 뛰어 건너게 한다. 미끄러지거나 떨어지는 양이 있으면 목자의 지팡이가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옛날 식으로 구부러진 이 지팡이로 큰 양은 목에, 작은 양은 가슴 부분에 걸쳐 구하게 된다. 이 음침한 골짜기에는 수많은 들개들이 먹이를 향해 짖고 있다. 지팡이를 던지는 데에 능숙한 목자는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2. 미래에 대한 기대(5-6절)
이제 5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목자의 비유가 손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주인으로 변하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여기서 손님은 시인 자신입니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구절은 마지막(6절) 구절과 함께 인간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인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름으로 머리에 바른다”는 것은 의식적인 기름부음이 아니라, 오히려 근동지방에서 관례적으로 행해오던 여행자들에 대한 환대 행위를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과 관련해서 상정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상황은 “보복에 대한 포상법전”일 것입니다. 즉 이 법전에 따르면, 피의 복수를 피하여 도망하는 자는 추격자에게 붙잡히기 전에 어떤 사람의 천막에 들어가면 안전하였습니다. 그 천막 안에서 그는 집 주인의 환대를 받고 안전하게 보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면제의 특권은 1박 2일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도망자는 보복자와 다시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아마 시인은 하나님의 배려를 바로 이런 포상법전의 배려와 비교하고 있는 듯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시의 주요 이미지는 목자와 양에서 주인과 손님의 이미지로 변하고 있으며, 이 시의 나머지 부분과 통일성을 이루게 됩니다. 즉 이런 이미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가적인 세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구절이 목자가 양을 돌보는 행위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통일성은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시인은 앞에서는 어떤 인간적인 것을 언급하려고 동물의 심상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뒤에서는 양의 환경을 그리기 위해서 인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을 위한 초원을 발견하면 목자는 그들에게 비유적으로 상(床)을 베푸는데, 그곳은 동물의 적들이나 유해한 식물들 앞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생활에 익숙하다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매일 밤 양이 우리로 들어갈 때 목자는 양들이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 살핍니다. 상처가 있는 양이 있으면, 상처 부위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줍니다. 각각의 양 우리에는 물을 가득 담은 큰 그릇이 있습니다. 목자는 두 손으로 들어야 정도의 큰 바가지로 이 물을 퍼서 양들이 마시게 하고 또 열이 있는 양은 물속에 코를 담글 수도 있습니다. 넘치는 잔의 이미지는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수준에 적용할 때 그것은 단정치 못한 주인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절은 양을 치는 조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인간의 이미지를 사용했다면, 여기에 나오는 집은 양 우리를 가리키기 위해 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가정 또는 집이 주는 이미지는 안전함일 것입니다. “내 평생에”라는 표현은 “영원히”와 대응되는 표현입니다. 이 마지막 절의 동사는 미래 시제입니다. 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잔치가 상반 절에서는 미래의 잔치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이며, 하반 절에서는 실제 시인이 참여한 감사의 잔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제 6절에서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 시편 전체 전체에 걸쳐 퍼져 있는 <출애굽>과 광야의 언어는 “인자하심과 선하심”이라는 용어 속에서 완성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보호하시고 “만나”를 먹여주셨던 것처럼, 이 시인의 평생을 같은 방식으로 보호해주셨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시인은 감사하면서, 미래에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게 될 날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모두가 인정하듯이 시 23편만큼 시대를 두고 사랑받고, 잘 알려진 시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가 매력을 갖는 것은 부분적으로 간결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에 있으며, 이들 특징은 또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의해서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시가 지닌 문학적 탁월성일 것입니다. 그 한 가지는 시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사고와 감정이 실은 모두가 가장 열망하고 사모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평화와 위로, 안전, 배려, 자유,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것들을 동경합니다. 동서고금 및 남녀노소 막론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 시가 매력이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목가적 관습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휴식과 만족이 있는 푸른 초원의 세계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인간의 영혼에 강하게 호소하는 힘이 있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늘 시골의 전원주택을 꿈꾸는 현대인의 모습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은 인간의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 시가 주는 감동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포괄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서도, 길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으며, 빛과 그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으며, 푸른 초원과 어둡고 위험한 골짜기를 동시에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둘 다 이야기하고 있으며, 육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에 대해서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림자를 피하지 않고 하나님이 배려해 주시는 승리로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가 문학적 우수하다는 점은 풍부한 은유와 이미지, 다양한 의미, 구체성과 현실성, 그리고 통일성과 균형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시가 이처럼 아름답고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신약>에서 인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복음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라고 말하셨을 때, 그의 유대인 청중들은 이내 이 시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시를 통해서 예수님의 비유에 친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위격(位格)에 관한 암시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 시나 <시편>의 다른 시에서 목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23편을 구속의 복음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시켜준 것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신약>의 다른 기자들도 예수님의 이런 해석을 보강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4)
이 시편에서 <출애굽>의 메아리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목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속의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가 기독교회에서 특별히 널리 알려져 있고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이 시의 문학적 탁월성이나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해 봅시다.
2. 시의 단락 구분과, 형식과, 수사적 기법(비우나 상징)에 대해서 연구해 봅시다.
3. 이 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주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4. 이 시를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