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저녁 기도(04)
김태정 목사시편 3약 15분 분량
(Ps 4)
서론적 질문들
<성경>에 대한 두 극단적인 태도는 아예 <성경>을 읽지 않고 오직 초 신령한 영적 계시를 기대하며 살거나, 또는 <성경> 속에 모든 해답이 있으므로 <성경>만 읽으면 된다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 두 극단이 가져올 수 있는 오류와 폐해는 무엇입니까?
이 시는 또한 “아침 기도”(시 3편)와 함께이며, 시공을 초월하는 성도의 보편적인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이 시의 제목을 “저녁 기도”로 부르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과연 이 시는 저녁에 하나님에 대한 묵상 시로 적절한 것입니까? 그리고 이 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적용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문학과 역사
양식. 이 시는 시 3편과 마찬가지로 그 장르에 있어 “개인적인 애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통하여 비탄으로부터 벗어나는 “확신의 시”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의 처음과 마지막 두 구절을 비교함으로써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8절)
배경. 이 시가 원래부터 공식적인 예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시의 6절을 제사장이 한 말로 볼 수도 있겠으나, 문맥 상 그런 해석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어떤 특별한 삶의 자리에 결부시키기에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를 “궁중 시”로 분류하려는 시도 역시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할 것입니다. 혹자는 7절을 근거로 이 시가 “비”를 간구하는 기도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7절에 대한 다소 의심스러운 번역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7절에 대한 해석 참고):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절). 따라서 이 시의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시는 초기 <다윗의 시문>에 포함되었을 것이며, 나중에는 음악 지휘자의 수집 본에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 시를 정규적이고 공식적인 예배의 한 부분으로 사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일인칭으로 노래하고 있으나, 여러 회중들이 사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의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현악에 맞춘 노래”라는 언급과 <시편> 가운데 두 번 등장하고 있는 ‘셀라’라는 용어는 분명 예배 중에 회중이 이 시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전체에서 이 시의 위치, 즉 “아침 기도”(3편) 바로 다음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를 정기적인 저녁 예배 시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저녁 기도문으로 기록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저녁에 이 시를 사용하는 관례를 정착시키는데 일조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8절).
형식과 구조. 이 시의 구조는 다소 각별합니다. 비록 운율의 조화와 균형은 없으나, 시인은 동일한 단어나 또는 동일한 어근(語根)에서 파생한 단어들을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매우 뛰어난 시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치드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베카리)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쉐마)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베카리); (이쉐마)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마쉬카브); (레바브)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체데크); (비트후)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라빔)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레브)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라부)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에쉬크바)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베타흐)
이와 같은 다양한 쌍의 단어들은 일련의 수사학적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1) “강조”(신뢰하다; 안전히); (2) “대조”(심중/마음; 자리/눕다); (3) “포괄”(부르다; 의; 듣다).
이처럼 동일한 한 쌍의 단어나, 또는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한 쌍의 단어들이 시편 전체에 걸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의 구조를 결정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시의 구조를 결정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요소는 내용이나 의미가 모호하고 윤곽이 뚜렷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셀라’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는 부분을 기준으로 구조를 분석해 보면 시 3편의 구조처럼 다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1-2절; (2) 3-4절; (3) 5-8절
그러나 이런 구조는 의미상의 진전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적 진행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는 일차적으로 “포괄”을 이루고 있는 한 쌍의 단어를 토대로 구조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1-3절)'
(2) 주님의 대한 신뢰(4-5절)
(3) 신뢰와 확신의 기도(6-7절)
(4) 평안한 안식(8절)
신학과 신앙
1. 하나님(1-3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 세절에서 드러나는 여러 쌍의 유사반복의 병행법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또한 이 세 절은 내용적으로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파악해 봅시다.
시인은 지금 마음속에 고통과 번민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부당하게 죄인으로 고소를 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무죄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평안한 마음을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자들은 시인이 “인생들”로 묘사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권세나 영향력을 지닌 자들입니다(베니이쉬). 이들은 헛된 것들과 거짓 된 것들을 추구하면서 시인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에도 계속 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데, 이들의 비난과 공격이 집요하고 근거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의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께 붙여지는 수식어는 대개 기도자의 내적 동기나 심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으며, 기도의 배경에 대해서 시사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은 시인의 내면세계를 읽을 수 있겠습니까? 즉 시인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는 지금 자신이 무죄하다, 즉 의롭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해 있는 억울함을 해결해 주시기를 간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모든 적들에게 대해서, “얼마나 오래 동안인가?”라고 물으면서(2절), 적들의 비난이 얼마나 무익하고 헛된 것임을 일깨워주려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훼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을 택하신 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3절). 여기서 “경건한 자”(dysij, 하시드)는 하나님의 ‘헤세드’(הסד)를 체험한 자이거나 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배운 자를 가리킵니다. 시인의 적들이 깨달아야 할 사실은 그들이 괴롭히는 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미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적들에게 물은 바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계속 거짓을 말하는가? 너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이제 그는 자신이 물었던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따라서 그는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1절)라는 말로 시작한 기도를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 주께서 들으시리이다”(3절)라는 확신에 찬 말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적들이 시인에게 가한 공격이나 비난의 내용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시인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2. 신뢰(4-5절)
첫 번째 행(行)에서 대적자들을 향해서 질문을 했던 시인은 이제 그들을 향해서 질문과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위로와 격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명령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는 크게 분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노를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라. 너희는 악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악한 생각을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그냥 잠자리에 누워 잠잠하라. 그 잠자리에서는 아무 해악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생들”을 향해서 소극적인 권면만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5절). “의의 제사”는 단순히 제의적인 제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예배 즉 참된 회개와 참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마음속에 뿌리 깊이 내리고 있는 악을 근절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도(6-7절)
시인의 신뢰와 확신은 기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앞에서는 대적자들의 말을 인용하였으니(2절), 이번에는 다소 소심하고도 무기력한 불가지론자들을 대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확신에 찬 기도는 적의 공격을 무너뜨릴 수 있겠으나, 의혹과 의심은 적의 공격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곳에서 시인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듯이 보이나 실은 이 의문은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출애굽” 이후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출 14:10-14; 민 13:1-14:4). 현실은 너무나 광폭하고, 적의 위협은 실제적이고 가시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너무 멀리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내부의 공격 앞에서 시인은 대제사장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속의 의혹을 걷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배 시에 다음과 같은 축복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그는 이 말씀을 기억해 내며, 보다 간략한 형태로 바꾸어 자신의 기도로 삼고 있습니다. 그 옛날 그 땅에서 조상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었던 “풍성한 결실과 새 포도주”보다 더 큰 마음의 기쁨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가 간구하는 가장 큰 기쁨은 충성한 추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빛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쁨입니다.
4. 신뢰(5-6절)
시인이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그동안 그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로 인하여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잠을 이룰 수 있게 해준 것이 시인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켜주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 신뢰의 말은 그가 아침에 일어나 한 말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전날 밤에 이미 잠들었으며, 하나님께서 지난 밤 동안에 그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이 경험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또 다른 날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잠 못 자게 하고, 불평하게 했던 그 적들은 이제 아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6절)
적들은 시인을 항하여 악의에 가득 찬 말만 하였을 뿐만 아니라(2절), 그를 포위하여 전쟁을 벌일 준비까지 하고 있습니다만(7절), 이런 위기의 절정에서조차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그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하고 조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안식(8절)
무겁고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평안으로 기도를 끝맺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그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님으로서 그를 보살펴 주고 계시지만, “인생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적들의 공격과 비난으로 잠 못 이룰 때, 평안과 수면을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자신이 적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적들을 향하여 “침상에 누워 잠잠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자신이 평안한 마음으로 침상에 누워 잠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적용
보편적 경험: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대적자들이 어떤 비난과 공격을 가하고 있는지, 제대로 한 가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이 시를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즉 이 시인이 지금 당면한 위기는 일차적으로 그 자신의 것일 수도 있으나,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 시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럼 점에서 이 시가 “저녁의 기도”로서 “아침의 기도”(3편) 다음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의 생애 중에서 지금 이 시인이 겪고 있는 날들을 수없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억압과 고통: 이 시는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회개의 시는 아닙니다. 참회의 시는 <시편>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만, 시 4편은 그 반대입니다. 즉 이 시는 회개의 시가 아니라, 오히려 무죄한 자의 고뇌와 아픔을 반영해 주는 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매우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누구나 같은 경험을 수없이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이를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1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2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3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전 4:1-3)
전도자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기도 한데, 압제와 억압을 받는 자의 고통은 두 방향에서 옵니다. 하나는 고통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고통을 더욱 가중시켜주는 것으로서, 고통의 시기에 아무 위로자나 해방자가 없다는 절망감입니다.
지금 전도자의 절망이 냉소와 회의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살아 있으며 억압 받는 자보다 죽은 지 오래 된 자가 더 복되다고 하겠습니까! 압제와 불의가 지속적으로 횡행하는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냉소가 판을 칩니다. 아무리 경건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침례 ‘요한’도 감옥에서 이런 회의와 의혹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정의로운 곳도 아니고, 하나님도 정의롭지 못하며, 정의롭다고 해도 무능력 하거나 또는 이 세상의 악고(惡苦)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입니다. 저 유명한 ‘버트란트 러셀’도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그의 수필집에서 바로 이 악고의 문제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해결책: 시 4편은 이런 잘못 된 압제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을 마련하고 있습니까? 이론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단순히 기도라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나를 비난하거나 억압하는 자들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점에서 이 해결책은 바른 것입니다. 또한 비난과 압제로 번민과 의심이 아무리 크게 일어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이 그로 하여금 잠을 이룰 수 있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 해결책은 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로써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외적인 환경이나 적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의 태도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나를 향한 비난과 억압으로 번민하고 의심하던 내 마음이 변화되어, 그것들을 수용하고 감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음은 이전보다 잠잠하고 평안해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시 4편은 모든 성도들의 기도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기도는 참으로 기막힌 영혼의 치료제라 할 수 있습니다.
교훈: 우리는 이 시에서 또 다른 한 가지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 시가 억울하게 압제를 당하는 자들의 것이라면, 그 압제자 중의 한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누구나 자신이 당하는 압제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압제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합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국회 안에 설치되어있는 소위 을지로 위원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위원회는 국회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갑(甲)의 횡포로부터 을(乙)을 보호하자는 의도에서 설치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위원회에 소속되어있는 국회위원 자신들이 갑 행세를 하다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보좌관 수당을 착취한다든지, 또는 자기 자녀들을 유관기관에 취업 청탁을 한다든지, 심지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압제나 고통은 무슨 신비한 우주적인 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동료 인간들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으로 부지중에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내가 선생이거나, 설교자이거나, 직장의 상사이거나, 기업주이거나, 국회의원이거나, 인허가 권을 진 공무원이거나, 또는 부모일 때, 이런 잘못을 저지를 개연성은 매우 높아지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최근의 사례들은 우리나라야 말로 실로 갑의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사악한 갑들을 향해서 온갖 비난과 욕설을 퍼부어댑니다. 사회 부조리를 한탄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압제와 고통에 대해서도 과연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받는 압제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하나님의 신원(伸寃)을 간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스스로 자문해 볼 일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