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김태정 목사빌립보서 3:12-21약 16분 분량
빌(3:12-21)
적어도 나에게 있어 영화 「타이타닉」의 압권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여주인공 ‘로즈’가 지난 70년 동안을 고이 간직해 왔고, 침몰한 그 배의 탐사의 원인이 되었던 그 추억의 16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아무 미련 없이 북대서양의 깊은 바다 속으로 집어 던져버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70 년 만에 비로소 그녀의 영혼은 참된 자유를 얻어, 영원한 첫 사랑 ‘잭’의 품에 진정으로 안기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결단은 그가 침몰한 그 배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취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즈’가 그 다이아몬드를 지니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결코 그 다이아몬드의 원래 주인, 그가 그토록 싫어했지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강요로 결혼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에 대한 추억도 함께 지니고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도 탐사 팀에게 고백했듯이, 자기에게 참된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던 ‘잭’에 대한 도리가 아닙니다. 첫 사랑은 한 사람 밖에 없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제 그녀는 기억 속에 ‘잭’만을 가지기 위해서 그 다이아몬드를 버린 것입니다. 무려 7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만 말입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로즈’와 유사한 한 농부와 보석 상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마 13:44-46). 이 영화보다는 덜 극적일지는 몰라도, 이곳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들 역시 그들이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취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버리는 것을 봅니다.
이 농부는 밭을 갈다 보화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숨겨두고 집에 돌아가 그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버렸고, 보석상인은 그가 찾던 진주를 발견하고는 역시 다른 소유를 다 팔아 이 진주에 투자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결단이니 헌신이니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에 투자할 줄 아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당연한 프로들의 장인정신에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 가치를 발견하고도 몇 년씩이나 머뭇거리는 것이 이상하고 어리석은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농부나 보석상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은혜인가? 사도 ‘베드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마지막 저녁 식사 후에 그분을 따라 가겠다고 졸라댑니다: “왜 지금 내가 당신을 따를 수 없나이까”(요 13:37).
그의 행동은 일견 칭찬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동기는 진정 순수한 열정과 지식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자를 알아보고는 단번에 모든 것을 다 바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였고, 그 날 이후 그를 열심히 쫓아 왔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자기 의지나 뜻대로 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디서 실패를 했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신앙은 결단이나 헌신만으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전 생애를 걸고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4:11).
그가 죽도록 갖고 싶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일까요? 이 구절만을 놓고 볼 때, 그런 것처럼 들립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의 열정은 ‘베드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배경.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목표를 향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의 생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전 생애를 걸어서 알고, 또 갖고 싶었던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를 알고 소유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은 바로 이 한 사람을 소유하고 얻고 싶다는 사도의 간절한 바람이 시적 고백과 찬송으로 어우러진 곳입니다.
사도가 원래 <빌립보서>를 쓴 목적은 ‘빌립보’ 교회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를 이끌고 있던 두 지도자-‘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과 분열; 이단과 잘못된 가르침의 침투.
왜 교회에서는 분열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도 처음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소위 열심히 사역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사람들은 잘못된 가르침에 쉽게 넘어가며 흔들리는 것일까?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처방은 무엇일까?
그는 처방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작정합니다. 복음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일련의 처방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어떻게 하셨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신다”는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은혜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빌립보’ 교회에서 복음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새롭게 들을 이야기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오래되고, 진부한 이야기를 처방 대신 들려주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의 이야기 즉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가?”를 들려주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즉 율법의 행위들을 먼저 들려줍니다(3:1-11).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개인적 자질과 업적 등을 아주 자랑스럽게 열거하고 있습니다(3:4-6).
왜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극적인 대조를 위해서입니다. 즉 그가 이룩한 그 모든 것들조차도 자기가 알고 싶어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그는 말합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것을 잃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내 인생의 최대의 목표입니다. 그를 따라 죽고, 또 부활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도 바로 그를 더욱 온전히 더 잘 알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1. 푯대를 향하여(12-16절)
따라서 이어지는 단락(12-16절)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그가 지닌 그 모든 것을 다 잃고 그리스도를 과연 얻었단 말인가?” 어느 극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서 다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답변도 이와 같습니다. 그의 요지인 즉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는 너무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 내 생애를 다 바쳐 알려고 해도 결코 완전히 다 파악했다고 말 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알기를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그를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 경주를 하는 자처럼 목표지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를 더 잘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의 상은, 나의 完走에 대한 보답은 그러므로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입니다. 나에게 다른 상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이 바로 나의 인생의 목표이고, 또한 상급입니다(12-16절)
알고 싶은 것을 알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갖게 되는 그 자체가 노력에 대한 보답이고 상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에게 있어 “이미 다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이야말로 이단이요 그리스도의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주의”가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육체를 자랑합니다. 율법과 종교적 의식(즉 할례 등)을 통해서 완벽해 질 수 있다는 교만이요, 거짓된 자랑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영지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지식을 통해서 이 땅에서 영혼이 완전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지식을 이미 소유했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미래의 부활도 이들에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전해 질뿐이며, 그것은 부활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에게 있어 이 땅에서의 “구원의 확신”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감정을 경계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누가 그의 이러한 가르침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다 얻었다! 우리는 이미 이루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제 죽어서 그곳에 가는 일만 남았다!” 이런 가르침이 훨씬 더 매혹적이고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렇게 가르쳤다는 말입니까? 조금 전에 언급한 바 있는 “유대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오죽했으면 사도가 이들을 “개”로 지칭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는 참된 목회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바 지식과 감정을 양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반복해서 전해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의 가르침이 배척 받고 거부당한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완전히 다 알았다든지, 또는 그를 더 알 필요가 없다든지, 알고 싶지 않다든지 하는 등의 생각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곳에서 부인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얻지 못했으며 무엇을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구원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까? 마지막 상급입니까?
이상하게도 이 두 동사의 목적어가 본문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추측을 난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어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보다 자연스러운 번역은 이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다 파악했다는 말도 아니고, 또 그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다 소유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관한 한 아직 아는 것이 지극히 미미한 수준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그렇다면 그의 목표지점은 어디까지입니까? 즉 왜 그가 이토록 달리기를 마다하지 않으려 합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만큼, 즉 그리스도가 그를 파악하고 있는 것만큼 그를 파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이 구절의 의미가 온전하게 다가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욕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아는 것만큼 나도 그를 알고 싶다. 그리스도를 조금 아는 것으로는 감질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사람이나 비밀이 있는데 조금 밖에 알지 못할 때 속이 타고 감질이 납니다.
13절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써는 이 구절의 감정과 느낌을 도저히 맛 볼 수 없겠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욕망은 과거의 잘잘못에 연연해 있을 수가 없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는 부끄러운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회심 이후 자랑할 만한 업적도 무수히 쌓았습니다(고후 11:16-12:15).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 앞에 왕년에는 잘 나갔다느니, 모태신앙이라느니, 등등의 갈비탕 우려먹는 소리는 먹혀들 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 소진된 사람들이 하는 말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옛 시인도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망대를 짓다 만 사람의 수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눅 14:28-30).
14절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쓰러져 있다는 것은 예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14절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무엇이냐를 놓고 오해하기 쉬운 곳입니다. 사도에게 있어 그 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 자체입니다. 열심히 전 생애를 다 바쳐 추구한 결과 얻게 되는 대가가 경기의 끝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올림픽 경기의 한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경기에서는 매 경기가 끝날 때마다 경기의 집행자가 월계관을 가져와서 승리자의 머리 위에 씌워 주면서 그의 가족사항이나 출신 가문 등에 대해서 큰 소리로 소개를 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 사도는 ‘아이러니’와 함께 점잖은 권면을 그의 ‘빌립보’ 친구들에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무슨 말입니까? “정말 당신들이 진리를 온전히 깨달은 자라고 한다면, 내가 방금 말한 바처럼 행하고 살아라, 즉 그 진리를 더욱 알기 위해서 힘써라.” 이 구절의 역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라면 마치 그를 만나지 못한 자처럼 그를 열심히 찾고,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신학자 ‘크리소스톰’은 말합니다: “완전한 자의 특징은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이 되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가고 있느냐에 있다.”
그리고 진정으로 신앙이 성숙한 자라면 신앙의 행습에 있어서나, 방법에 있어서 설령 차이가 있다고 해도 웬만한 것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15절의 나머지 구절이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서 나타내시리라.”
그러한 차이는 무슨 논리나 합리적인 설명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종할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쉽게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따라서 그저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단합이나 일치이지 사소한 견해의 차이를 극대화시키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사도는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16절).
진리에 대해서 나름대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있고, 지적 수준도 다를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정도도 다를 것이며, 신앙의 색깔도 다를 수도 있겠지만, 오직 한 마음으로 단합하고, 일치하며, 상호 협력하는 정신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교회는 민주주의 하는 곳이 아니라, 올바른 권위에 대한 순종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교회에서 많이 아는 자가 많을수록 단합보다는 분란과 소요가 더 많은 것을 종종 봅니다. 국회처럼 말입니다. 은혜가 소진되었을까요?
나는 왜 부활을 원합니까? 나는 왜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까? 그곳에 가면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곳에 가면 예수님을 일대 일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까?
2. 나를 본받으라(17절)
그러한 순종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앞서 가는 자들이 순종의 본을 보여주면 됩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17a).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노래를 수십 번 부르는 것보다 단 한 번의 헌금이 더욱 힘 있는 간증이 될 것입니다. 이제 17절에서 사도의 경고가 권면으로 바뀝니다. 그것도 예를 통한 권면입니다. 성숙이 어떻고, 완전함이 어떻고 아무리 말로 설명해 보았자 百聞이 不如一見입니다. 시청각 교육 밖에는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는 감히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가 이렇게 건방지고 교만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요즈음 어느 선생이, 어떤 목회자가 감히 이런 권면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사도는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신앙적으로 완전하다고 믿고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본받고, 어떻게 본받으라고 합니까? 7-1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이러한 삶은 유대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처럼 이 땅에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는 혹시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지리적으로나 신앙의 체험에 있어서나) 혹시 달리 생각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당신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신 같은 사도나 그렇게 살 수 있지요.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있지 당신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죠. 당신은 사도이고 목회자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는 재차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17b). 무슨 말입니까? “그곳에 여러분들 중에서도 나를 따라 나처럼 살아가는 신앙의 지도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쫓아 살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눈을 그들에게 고정시키십시오.” 누군가 교회에서 좋은 권면을 듣기만 하고, 볼 수는 없다면 그 교회는 이단들의 집단이라고 했습니다. 또 보고도 따라오는 자가 없다면 그 교회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나는 과연 어떤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악화가 되어 양화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들처럼 더러운 누룩이나 아니면 행악당 입니까? 정반대이기를 간절히 소망합시다.
이제는 그가 왜 눈물을 흘리며 반복해서 그처럼 간절하게 권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17절). 교육의 효과는 그저 반복, 또 반복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이처럼 눈물이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볼 때 17절은 그 자체로써 하나의 단락이 되고 있는데, 앞선 단락과 뒤에 오는 단락을 연결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결과로 본다면 18-19절은 원인이 되는 곳입니다.
3. 행악 당을 좇지 말라(18-19절)
무슨 말입니까? 이런 누룩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3:2에서 그들을 개 또는 행악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십자가의 원수로 부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유대주의자요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즉 자칭 다 이루었다는 자들입니다. 예로써, 유대주의자들은 먹고 마시는 결례(제사법이나 음식 규례)를 마치 신처럼 숭배하는 자들이며, 수치스러운 할례를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이 땅에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희망은 바로 여기, 그리고 오늘, 내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미래에, 보이지 않는 것에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바로 이 점을 결론으로 강조하고 싶은 듯합니다. 20절에 이르러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와 함께 그 동안 말해오던 것과는 전혀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갑자기 천국의 시민권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4. 우리의 시민권(20-21절)
바로 이런 점에서 마지막 두 절은 앞의 단락과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근거가 됩니다. 사실 이 단락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부르던 일종의 그리스도 찬양 시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날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것 아니네....”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보아도 앞의 단락과 어딘지 연결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왜 이러한 찬양 시가 그의 설교의 마무리로 필요할까요? 그는 지금 소위 완벽주의자들과의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늘 땅의 일을 생각하며 사는 자들에게 꼭 해주어야 할 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위를 보고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각 나라 대사관들은 이 나라에 자국의 문화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자국의 문화와 언어 및 관습들을 소개하고자 함입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은 비록 외국에 나와 살고 있지만 자기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외국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입니다. 신약 당시 로마 총독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들 역시 외지에 나가있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로마의 법과 관습과 문화를 심어놓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알려지기로는, 당시 빌립보와 예루살렘은 그들의 자치 구역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 두 도시는 로마의 영토에 불과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인즉, 따라서 빌립보 교인들은 외국에 잠시 살고 있는 로마 총독이나, 미국 대사나, 또는 문화원 직원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천국의 문화나 관습이나 법이나 제도를 보여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특권을 바탕으로, 그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왜 부활을 원합니까?
나는 왜 천국에 가고 싶어 합니까?
그곳에 가면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일대 일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