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과
마태복음 개관
김태정 목사마태복음 28:16-20약 69분 분량

<마태복음>은 <신약>의 첫 번째 책이다. 동시에 <구약>과 <신약>의 가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과연 이 책이 <신약>의 첫 번째 책으로서 적절한가?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마태 화자는 “천국의 복음” 이야기를 <구약>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킴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끼친 영향은 비단 기독교 신앙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로 지대하다.
예컨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ain)은 시공을 뛰어넘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윤리ㆍ도덕적으로 엄청난 도전을 주고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른바 “대 위임령” 내지 “지상 선교명령”(the Greatest Commission)(28:16-20)은 기독교회를 향한 가장 중요한 사명 선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명령은 실은 첫 번째 인류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창 1:28)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창세기> 1:28의 말씀을 “문화명령”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렇게 볼 때,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대 위임령”(또는 “지상명령”)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 명령은 이스라엘의 쉐마(신 6:4-5), 즉 하나님의 “가장 크고 으뜸 되는 계명”(the Greatest Command)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적용 사례 중의 하나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도 <마태복음>이 <구약>과 불가분의 연결 속에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모든 책들이 그러하듯, <마태복음> 역시 한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공동체(즉 교회)의 작품으로, 공동체가 당면한 제반 실존적인 문제에 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으며, 어떤 상황(삶의 자리)에 있었을까? 책의 신학적 특징으로 어떤 것들을 꼽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책은 과연 “반유대주의”(anti-Judaism)나 “반시온주의”(anti-Sionism)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가? 이들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이 개론서를 통해서 설명될 것이다.
<마태복음>의 문학
1. 양식
한 문학 작품의 양식(樣式, form)은 저자의 저작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의 독특한 양식은 이 책에서 강조하려는 바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복음. 복음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해설이자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마태복음>은 “복음”으로 불러 마땅하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말하는 전기(傳記)나 일대기(一代記)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고대적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이 책이 그레코-로망 식의 전기라는 인식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태복음>은 나머지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하여 “케리그마”(kerygma)의 형식으로 선포해놓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복음의 핵심,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또 다른 양식적 특징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다음에 제시하는 일련의 양식적 특징은 복음의 양식과 반드시 병행한다고 볼 수는 없더라도, 결코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드라쉬(Midrash). <마태복음>의 양식적 특징 중의 하나로 “미드라쉬”를 꼽는다. 이 단어는 “찾다”, “구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שׁ(다라쉬)에서 유래한 명사다. 일단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양식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유대 문헌에서 미드라쉬는 특별히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을 뜻한다. 이 단어의 의미를 <마태복음>에 적용하여 좀 더 확장하자면, “역사 이야기”(historical narrative)의 형식을 취한 예수님에 대한 교육적이고 신학적인 해설로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좁은 의미에서 볼 때, 미드라쉬는 구체적인 <구약> 인용 사례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역사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마태복음>을 <마가복음>에 대한 미드라쉬, 즉 “확장된 설명(해설)”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역대기>가 <열왕기>에 대한 해석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태 화자는 일부 <구약>을 인용하면서 일종의 미드라쉬 즉 해설 내지는 재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그 어떠한 역사적 이야기도 화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예수님에 관한 <유아 설화, 幼兒說話>에서 화자는 여러 차례 <구약>을 인용하고 있어 이야기의 문체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 자신이 임의로 이야기를 창작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와 해석적 역사 기록은 분명 다른 영역에 속하긴 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소설 내지는 신화에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성구집(聖句集, Lectionary). 혹자는 <마태복음>을 하나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 예배 시 사용하는 일종의 독서집(讀書集) 내지는 성구집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 책의 내용은 유대 절기에 따라 예배 시에 낭독할 수 있도록 시기별로 적절한 내용을 편집해 놓은 것이다. 오늘로 치면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독문 모음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교리집(敎理集, Catechesis). <마태복음>을 교리문답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의 문학적 구조와 관련해서 앞에서 소개한 바처럼, 다섯 번에 걸친 예수님의 강론 모음이 책 속에 있기는 하다.
2. <마태복음>과 <구약>
<마태복음>에서 직접적으로 <구약> 본문을 인용하고 있는 사례는 대략 60여회가 넘는다. 이 수치는 다른 <복음서>보다 두 배 이상에 달한다. 이는 <마태복음>의 주 관심사인 “천국의 복음”이 <구약>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점과 관련해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이른바 예언의 성취로서 <구약>을 인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은 인용 사례는 물론 화자 자신의 <구약>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취”와 관련하여 화자가 <구약>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례는 대략 10회 정도다(도표 참고):

<구약> 인용의 또 다른 사례는 “기록되었으되”라는 표현으로서, 이 역시 <구약>의 성취와 관련된 다른 표현이다: (예) 2:5; 11:10; 26:31.
그러나 화자의 이와 같은 <구약> 인용 사례는 현대독자들에게는 자의적이고, 비합리적인 해석의 전형(典型)이 아닐 수 없다. 즉 <성경>으로부터 의미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위해 무리하게 <성경> 본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proof text)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일부 본문은 화자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이나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구절들이다.
이와 같은 해석적 입장은 넓게는 우화적 해석, 그리고 좁게는 그리스도론적 해석의 한 범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화(寓話)란 일종의 확장된 은유로서, 본문의 문자적 의미나 원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집착하지 않고, 본문의 이면적 의미들을 자유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마태’ 화자가 과연 “천국 복음”과 관련해서 <구약>을 이처럼 우화적으로나 또는 그리스도론 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신의 창조적인 해석인지 또는 다른 문헌이나 자료들의 도움을 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 방법은 문자적 해석과는 정 반대의 극단에 서있는 해석 방법으로서, 초대교회 이후 오늘날까지 <성경> 해석에 여러 형태로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해석 방법이기도 하다. <구약> 해석의 역사와 방법론에 관해서는 별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태’ 화자의 해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석적 무리에도 불구하고 수용해야 할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그 해석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약>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감동”(感動)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화적 해석, 내지는 그리스도론적 해석과 관련해서 유념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도 <신약>의 화자들처럼 <구약>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 독자들의 <구약> 해석은 반드시 <신약>에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이 아무리 그리스도를 드러내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를 지지해 주는 해석을 <신약>에서 발견할 수 없다면, 그 본문이 의미하는 문자적 해석의 범위를 넘어서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전체 해석적 틀 안에서 주해적 해석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예컨대, <창세기>의 요셉이나 이삭, 또는 <시편>의 일부 본문들이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해석의 정도(正道)는 아니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구약>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구약>이 <신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약>을 해석할 때, 항상 마태 화자처럼, “약속과 성취”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유혹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함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3. 구조
한 마디로, <마태복음>의 문학적 구조에 관한 한 어떠한 일치된 견해나 입장도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만큼 이 책에는 너무나 다양한 구조적 특징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 구조 하나 만으로 책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사실 상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래에 제시하는 몇 가지 구조적 특징들이 바로 그 이유이다.
다섯 번의 강론. 책의 구조를 가장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다섯 번에 걸친 예수님의 강론이다. 각 강론은 한 결 같이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7:28; 11:1; 13:53; 19:1; 26:1). <마태복음>은 <요한복음>에서처럼 (1) 강론(discourse)과 (2) 이야기(narrative)의 두 양식(樣式, form)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다(도표 참고):

그러나 두 복음서에서 차이가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두 양식 간에 어떠한 연결을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강론들은 마태 화자 자신의 편집으로 보이며, 그 목적은 교훈이나 교리를 위한 것이다. 다섯 차례의 강론은 각기 그 앞에 선행(先行)하는 다섯 개의 이야기 군(群)들을 두고 있다(예. 3-4장; 8-9장; 11-12장; 14-17장; 19-22장). 이러한 형식이 책의 전체 구조를 결정하고 있다(도표):
혹자는 이 다섯 번의 강론은 <오경>의 다섯 권의 책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새로운 율법의 수여자 즉 두 번째 모세로 그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세를 예수님의 예표(豫表, typology)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시편>도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위 도표에서 보듯이, 다섯 차례의 강론은 다섯 개의 선행하는 이야기 군(群)들을 가지고 있지만(예. 3-4장; 8-9장; 11-12장; 14-17장; 19-22장), 이를 근거로 책이 다섯 개의 기본 골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은 책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일부 내용들은 이 구조 속에 포함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담고 있는 23장은 뒤이어 등장하는 종말에 관한 강론(24-25장)의 일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위 도표를 구성하는 다섯 차례의 강론 외에도 상당한 분량의 강론이 11장에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구조 속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나 수난 이야기가 있을 자리가 없다. 따라서 위 도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조는 책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적 구조이지 기본 구조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두 번의 전환점.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두 개의 큰 전환점이 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4:17)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두 구절 모두 “이 때로부터”라는 어구(語句)로 시작하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이 이와 같은 표현이 책 전체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두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체를 세 개의 설화 모음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예수 그리스도: 탄생과 준비에 관한 이야기(1:1-4:16)
(2) 예수 그리스도: 말씀과 기적 사역(4:17-16:20)
(3) 예수 그리스도: 수난과 부활 이야기(16:21-28:20)
이들 세 이야기는 책의 전체적인 구조를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접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이 두 구절이 단락 구분을 해주는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인 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두 번째 단락의 시작인 4:17을 첫 번째 단락의 4:12-16에서 별도로 떼어놓는다든지, 또는 16:21을 그 이전의 구절들과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다.
교차대구적 구조. <마태복음>이 다음과 같은 대칭적 교차대구(交叉對句)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화자 자신이 그와 같은 구조를 의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같은 주장을 하는 근거는 각 단락의 문학적 양식이 이야기와 강론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상호 대칭관계에 있는 단락끼리 내용이나 분량에 있어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는 부분도 있으나 이 같은 구분은 다분히 작위적(作爲的)이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자에 따라 대칭의 중심이 되는 본문이나 전체 단락의 숫자도 달라서 어떤 통일된 입장을 찾기가 어렵다. 예컨대, 혹자는 13장이 아니라 11장을 대칭의 중심에 놓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전체를 일곱 개의 단락으로 보고 13:1-16:20의 본문을 그 중심에 놓기도 한다.
다른 요소들. 마태 화자는 책의 중간 중간에 예수님의 사역을 요점 정리하듯 일련의 구절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마치 길에 이정표(里程標)을 세워놓은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책 속에 적어도 일곱 개의 그러한 표지판이 등장하고 있다:
(1)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4:23-25)
(2)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9:35)
(3)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11:1)
(4)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14:35-36)
(5)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5:29-31)
(6)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19:1-2)
(7)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21:14)
이들 모든 구절들이 한 결 같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관한 것이며, 처음 두 본문은 특별히 천국 복음에 관한 선포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화자가 책 전체의 큰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들 본문을 삽입했는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하겠다.
위의 일곱 개의 표지판에서 보듯, 화자는 유난히 숫자 일곱을 선호하는 듯하다. 예컨대, 그는 일련의 유사성이 있는 내용들을 일곱 개로 모아 한 개의 군으로 만들고 있다. 예컨대, 주기도문이 일곱 개의 기도문(내지는 간청)으로 이루어져 있다든지(6:9-13), 제 13장이 일곱 개의 천국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님의 족보도 일곱 개의 세대가 두 번 등장하고 있다(1:1-7). 이외에도 화자가 좋아하는 숫자는 3이다. 예수님의 전체 족보를 세 개의 세대로 나눈 것이라든지(1:1-17), 경건의 행태를 세 가지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6:1-18),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도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21:28-22:14).
화자의 뛰어난 수사적(修辭的) 기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 일종의 이중 반복의 기법도 그 중 하나다. 즉 그는 자신이 참고로 한 원래의 자료(예. <마가복음>)에 있는 내용의 일부를 두 배로 수정하여 전하고 있다. 예컨대, 귀신들린 두 사람(8:28-34)이나 두 맹인(20:29-34)에 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가복음>에는 각기 한 사람씩이다(참고. 막 5:1-20; 10:46-52).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는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의 증거능력을 더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마치 그가 한 사람이 아닌 두세 사람의 증인을 요구하고 있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마태 화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처럼 아주 다양한 수사적 기법을 동원하고 있는바, 교차대구나 반복이나, 수미상관이나, 심지어 시(詩)의 사용 등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분명 다양한 문학적 자질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책의 구조는 역설적으로 더 복잡하고 분석이 어려워진 느낌도 든다. 혹자는 책 속에서 여러 구조적 패턴이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 가지 패턴으로 구조 분석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또 하나 이 책의 구조를 분석함에 있어 유념해야 할 사실은 <마태복음>은 전체적으로 <마가복음>의 개요(槪要)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12장 이후에 그러한 모습을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태 화자는 어쩌면 어떤 통일된 구조적 원칙을 자신의 책 속에 도입할 의도가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있다면 다만 이야기와 강론을 번갈아 전하고 있으며, 그나마 이들이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제 별로 정리해 놓았다는 느낌이다.
이 사실을 토대로 엘리슨(D. A. Allison)은 책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4. 내용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마태복음>의 구조 분석과 관련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 구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앨리슨(D. C. Allison)이 제안한 바 있는 구조, 즉 책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narrative)와 강론(discourse)의 두 양식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는 구조를 바탕으로 내용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4.1. 제 1부-이야기: 서론(1-4장)
제 1부의 문학적 양식은 “이야기”이다. 주 내용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에서의 <공생애>의 시작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1) <출생과 유년 이야기>(1:1-2:23); (2) <공생애의 준비>(3:1-4:11); (3) <갈릴리 사역>(4:12-25).
1. <탄생과 유년 이야기>
예수님의 계보(1:1-17).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 이어서 이 계보는 아래에서 보듯 세 개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데, 각 족보는 14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이 같은 세대 수는 아마 마태 자신의 계산에 따른 것일 것이다):
(1) 아브라함-다윗
(2) 다윗-바벨론 포로
(3) 바벨론 포로-예수님
이 족보에서 가장 특기할 만 한 사항은 그 속에 네 여인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3, 5, 6절).
탄생 이야기(1:18-2:2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성령”에 의한 것으로, 기적적인 사건이라 할 수밖에 없다(18절). 그분의 탄생과 관련한 세 번째 단락은 서술 방식에 있어 앞선 두 개의 단락과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즉 처음 두 단락에서는 무미건조하게 이름들만 등장하고 있는 것에 반해, 마지막 단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한 일련의 이야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혈연의 아버지가 아니라 법적 아버지이다.
(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들의 탄생을 예고한다.
(다) 하나님의 계시가 꿈의 형태로 나타난다.
(라) 아들의 두 이름: 예수와 임마누엘
(마)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절).
(바) 이방인 현자들이 등장하여 예수님을 예배한다.
(사) 새로운 왕의 탄생에 대해서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헤롯 왕.
(아) 예수께서 다윗의 성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2. 공생애 준비
이어지는 두 장(3-4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한 준비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크게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1) 침례 요한의 사역
(2) 예수님의 침례
(3) 광야의 예수님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했던 선지자이다.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푼다. 특기할 만 한 일은 예수님도 그로부터 침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자 말자 성령님께서 그분에게 임하셨으며, 곧바로 그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로 이끌리어 가서 그곳에서 사탄의 유혹에 직면한다.
마태 화자는 침례 요한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가) 요한의 메시지-“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나중에 예수님도 사역의 벽두에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나) 예수님의 침례에 대한 요한 주저함-그는 자신이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우겼으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답변하신다.
이들 세 개의 중요한 에피소드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바, 가르치는 일과 기적을 베푸시는 일이다.
4.2. 제 2부-강론: 산상 수훈(5-7장)
두 번째 단락은 그 양식에 있어 강론으로서, 다섯 차례의 강론 중 그 첫 번째이다. 특별히 이 단락의 내용은 이른바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으로 불린다. 이곳에 등장하는 내용은 <누가복음> 제 6장에 등장하는 내용과 대동소이하나, <마태복음>에서 특기할 만 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 단락은 다섯 차례의 강론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2) 강론의 주제는 제자도와 하나님의 나라(천국)이다.
(3) 강론의 초점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성취한 예수님에게 맞추어져 있다.
(4)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가르침은 상호 반명제(反命題; antitheses)의 관계로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예수님은 율법 교사나 바리새인들이 지니고 있는 <구약>의 “의”(義; righteousness)에 대한 이해를 틀린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교정해주신다. 그리고는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얻기 위해서 의를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요구하신다(6:1-18).
(5) 강론은 일련의 경고와 도전으로 마무리된다. 경고라 함은 거짓 종교에 대한 것이며, 도전이라 함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하여 듣는 이는 모래 위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7:13-27).
4.3. 제 3부-이야기: 공생애 사역(8-9장)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놀랍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놀랍고도 권위 있는 갈릴리의 기적 사역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8-9장). 기적의 내용은 주로 치유와 축사(逐邪)와 기타 초자연적인 기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4.4. 제 4부-강론: 두 번째 강론(10:1-11:1)
두 번째 강론의 핵심은 단기 선교를 위해 열두 제자를 불러 파송하며 권위와 함께 주신 일련의 선교 지침을 담고 있다. 선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접경 지역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한한다(10:5, 23).
4.5. 제 5부-이야기: 대적자들(11:2-12:50)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분을 의심하거나,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정체에 관하여 부정적인 질문들을 하기 시작한다. 먼저 현재 감옥에 갇혀있는 침례 요한에서부터, 바리새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가 하며, 귀신의 우두머리 바알세발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험담한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난에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공세에 반응한다.
4.6. 제 6부-강론: 하나님의 나라(13장)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강론은 예수님의 세 번째 강론으로서, 모두 여덟 개의 비유(parable)가 등장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독특한 비유는 다음과 같다:
(1) 가라지 비유
(2) 잃어버린 보화
(3) 진주의 비유
(4) 고기 잡는 그물의 비유
(5) 제자 된 서기관의 비유
4.7. 제 7부-이야기: 공생애 사역(14-17장)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사역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두 개의 기적, 즉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과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이 마치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듯 짝을 이루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일련의 에피소드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중 절정을 이루는 순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이에 예수님은 그를 반석으로 칭찬하며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예고하시며, 이에 제자들은 당혹하고 실망한다. 이 대목이 공생애의 전환점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전환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후부터 주님의 공생애는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 사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예컨대, 유대인 예식을 비판하는가 하면, 한 이방인 여인의 놀라운 믿음에 관한 이야기와, 이방 지역에서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으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8. 제 8부-강론: 교회와 하나님 나라(18장)
이 단락은 예수님의 네 번째 강론을 담은 곳이다. 강론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에 관한 것이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인가에 관해서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결국 교회에서 교인 상호 간의 관계나 태도에 관한 강론으로 연결된다. 제자들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실족하는 형제를 대하는 문제, 용서와 화해의 문제 등이 강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4.9. 제 9부-이야기: 수난의 시작(19-23장)
수난의 시작은 곧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부터 이야기의 배경은 갈릴리에서 유대로 바뀌며, 예수님은 제자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향하여 나아간다. 유대 당국과의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들로 규정하고, 임박한 심판에 대하여 이들에게 경고하신다.
4.10. 제 10부-강론: 임박한 심판과 구원(24-25장)
이 단락은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을 담고 있다. 특기할 만 한 사항은 강론 중에 나타나는 일련의 비유들인데, 현명한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에 대한 비유, 양과 염소에 관한 비유 등이다.
4.11. 제 11부-이야기: 수난과 부활(26-28장)
책의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후의 만찬; 체포; 심판; 죽음; 부활. 마태가 전하는 <수난 이야기>는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1) 가롯 유다에 관한 언급인데,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자책감으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7:3-5).
(2) 로마 총독 빌라도의 아내에 관한 언급으로서, 그녀는 악몽을 꾸어 남편에게 “이 의로운 사람”에 대해서 아무 상관도 말라는 조언을 한다. 과연 빌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도 없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손을 씻음으로써, 그의 죽음에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27:19-26).
(3) 역설적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소서”(27:25).
(4)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일어난 일련의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27:51-53).
(5) 유대 당국은 예수님의 무덤을 돌로 인봉하고, 경비병을 두어 지키도록 요청한다(27:62-66).
(6) 안식 후 첫날 지진이 나며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자, 경비병들은 놀라 혼비백산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꾄다(28:2-15).
(7)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되돌아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28:9-10), 갈릴리에서도 나타나셔서 그분의 제자들을 만나신다(28:16-20). 이 장면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으로서 그 장면을 재현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으며;
(나) 제자들은 그분을 경배하였고;
(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그 유명한 대 위임령 즉 지상선교명령을 말씀하셨다(28:19-20).
(라) 그리고 그분은 세상 끝날 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의 이름, ‘임마누엘’에 걸 맞는 약속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의 역사
1. 자료와 편집
<마태복음>은 <공관복음>의 나머지 두 책과 상당부분 공유하는 내용이 많다. 예컨대, <마가복음>의 90%가 <마태복음>에서 나란히 등장하고 있으며, 그 형태나 형식도 비슷하다. 그러나 동시에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는 없는 내용도 상당량 포함하고 있는데, 이중 일부 내용이 <누가복음>과 일치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의 강론이나 예수님의 유아 시절 이야기 등이 그렇다.
두 자료 설.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마태복음>은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저작물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자료를 토대로 한 편집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견해가 이른바 “두 자료 설”이다. 하나는 <마가복음>이며, 다른 하나는 <Q 자료>를 말한다. “두 자료 설”에 대한 찬반 여부가 다양하게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긴 하나, 현재까지 이 견해를 뒤집을 만 한 다른 이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자료 설”의 견해에 따르면, 마태 화자는 <마가복음>을 토대로 자신의 이야기의 골격을 취하고, 그가 가진 <Q 자료>를 이용해서 마가의 자료를 보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자료 설”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소개한 참고 도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천국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편집적 작업을 거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 화자는 자신의 가진 자료를 취사선택하는 일에 있어 탁월한 신학자이자 문학적 대가임에 분명하다. 예컨대, 그의 이야기 서술은 <마가복음>에 비하면 상당히 절제되어있고, 간략하며, 동시에 덜 수려하다(참고. 8:28-34; 막 5:1-20). 그리고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하나의 큰 주제 아래 통합하는 기술도 뛰어나다. “산상수훈”의 단락이 그렇고, “천국의 비유” 모음도 그렇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융합 작업을 통해서 자신만의 신학을 도출해 내고 있다.
예를 들면, 5:17-20에서 마태는 <Q자료>에서 취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있는데(5:18), 이 문장을 그 단락 속에 포함시켜 자신의 것으로 탄생시키고 있다. 특히 17절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강조하기 위함이고, 20절에는 “의”(義)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함이다.
2. 독자
과연 누구였을까? <성경>에 대한 종합비평에서 원 독자나 원 저자는 더 이상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며, 오히려 내포저자 및 내포 독자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야 한다(참고로 본인의 <요한복음> 연구의 서론에서 이 주제를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가장 만족스러운 가설에 따르면,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도가 된 소위 유대ㆍ기독교인들이었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중요한 요인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책 전체에 걸쳐 <구약>의 성취와 관련한 언급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으며, <구약> 본문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메시아 시대의 도래로 해석하고 있다.
(2) 예수님도 율법에 충실했으며, 의(義)에 대하여 강조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3) 일련의 논쟁거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그 형식에 있어 전형적인 랍비적 전통을 따르고 있다(예. 이혼에 관한 가르침을 담은 19:3-9).
(4)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변증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님의 탄생을 놓고 비윤리적인 사생아라는 등의 논쟁을 잠재우기 위한 동기로 볼 수 있다. 또한 “부활 이야기”도 역시 그러한데,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도 유대인들 사이에 소위 “도난설”(盜難設)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참고. 28:12-15).
물론 <마태복음>의 독자가 유대ㆍ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되어있었거나, 또는 순전히 이방인들을 위하여 이방인이 저작했을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구약>의 성취나,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당시 아마도 바울 사도의 영향을 받았을 반 율법주의적(反律法主義的) 경향에 맞서기 위하여 율법을 강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책 내용 중에 이 책이 이른바 이방인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언급은 없다.
독자와 관련한 또 다른 가설은 처음독자나 최종 편집자가 팔레스타인 유대인이 아니라, 둘 다 헬라적 배경을 가진 유대인이거나 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책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그렇고, 독자들이 이방인 기독교에 가깝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비록 <마태복음>이 그 대상을 유대ㆍ기독교인들로 삼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어느 특수 계층의 독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옛 언약과 연장선상에 있는지 또는 그것과는 단절을 하고 있는지 여부가 이방인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면, 유대인 기독교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즉 유대인 기독교인도 마태 화자가 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삶의 자리-마태 공동체
<마태복음> 연구에서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는 이 책이 지니는 독특한 성격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상황, 즉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관한 연구다. 이 책이 지니는 독특한 특징이라 함은 무엇보다 “보편주의”(universalism)와 “배타주의”(particularism) 사이의 긴장관계, 그리고 이로부터 수반되는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문제를 어떻게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를 말한다.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어떻게 규정하든 중요한 사실은 책 안에 상충(相衝)되어 보이는 다양한 자료들을 어떻게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보편주의와 배타주의. <마태복음>의 배타적 특징은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아 선교사로 보낼 때,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모든 마을로만 가라고 준엄하게 명령하신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5-6). 그분의 태도는 한 이방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15:24).
화자나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 이방인을 위한 선교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였을 텐데,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은 충격적이고 자기모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대 교도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씀이 적어도 초대 교회에서는 복음의 보편성보다는 그 반대로 교회의 배타적 측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한편 이와는 정 반대의 입장, 즉 보편주의적 입장이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예수님의 족보에 룻이나 라합 등의 이방인 여인들이 포함되어있고(1:5),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 시에 찾아와 경배를 드리는 장면이 있으며(2:1-12), 로마 백부장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극도의 칭찬을 보내고 있고(“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8:5-13), 이방들이 그분의 이름을 바라리라는 언급이나(21:12), 또 세상을 “(선교의) 밭”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습(13:38), “가나안 여인과의 대화”(15:21-28), “포도원 농부에 관한 비유”(21:33-43),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비유”(22:1-10),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로마 백부장에 관한 언급(27:54)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국 복음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그 유명한 지상선교명령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28:19).
이스라엘과 교회. 위에서 다룬 배타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의 긴장은 불가분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문제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마태복음>이 처음부터 유대적 색채와 친 유대적인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반 유대적인 기사들이 책 속에 다수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아 교회, 즉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겠다는 언급들이다.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후(8:5-10),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가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8:11-12). 그리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어떤가! 비유의 끝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2-43). 이 비유와 완전히 일치하는 또 다른 비유는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다. 그곳에서도 비유의 결론은 “초청받은 자는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사실이다(22:14). 여기서 초청받은 자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다.
반 유대적인 언급은 이것만이 아니다.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심판에 관한 언급도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게서 갈릴리의 사역을 마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11:24).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 악한 세대”로 부르셨고(12:45), <이사야>에 있는 심판의 신탁(6:9-10)도 <마태복음>에서 유일하게 인용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 사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에서 보듯이 초청을 받은 자는 합당한 자들이 아니었다(22:8).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이렇게 탄식하신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23:38). 그리고 이스라엘 스스로도 이 저주가 자신들 위에 내려지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비극적이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7:25). 이 책이 결국 반 유대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주장에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할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쫓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들어올 자는 누구인가? 다음과 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3:16-17). 이 자들이 누구인가? 새로운 공동체 즉 교회다!
이처럼 <마태복음>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은 고통스럽지만 명백하고 단호한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이 둘이 상호 대립적 긴장 속에 있음을 반영하는 어구들이 있다: “그들의 회당”(4:23; 9:35; 10:17; 12:9; 13:54), “너희의 회당”(23:34); “그들의 서기관”(7:29); “오늘날 유대인”(28:15). 이들 모두는 유대인이나 유대 전통에 대한 경멸적 표현으로서, <요한복음>에서 그냥 단순히 유대인이라고만 칭하고 있는 것과 뚜렷한 대비를 보이고 있다.
마태공동체의 상황. 위에서 밝힌 대로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거의 대부분 유대ㆍ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그들은 주변 세계와 갈등과 긴장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갈등의 대상은 한 편으로는 그들이 원래 속해있던 유대 공동체의 동료 유대인 형제ㆍ자매들이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 내의 이방인 기독교인 형제ㆍ자매들이었다. 한 때 동료였던 유대인 형제ㆍ자매들에게 이들은 일종의 변절자요 배신자들이다. 이방인들과 한 통속이 되어 조상들의 종교와 전통과 모세의 율법을 저버린 자들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ㆍ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자신들은 이방인과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들이야말로 참된 유대인임을 드러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 내 이방인ㆍ기독교인들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이 역시 만만찮은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유대 혈통을 가진 자로서 유대의 관습과 법을 계속해서 지키려는 그들의 행태는 동료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분명 신학적인 문제를 야기 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하나 됨에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아무런 연속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유대ㆍ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쉽게 옛 언약의 폐기를 주장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래저래 유대ㆍ기독교인들은 교회 내에서 동료 이방인ㆍ기독교인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가야 했을 것이며, 신학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복음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쌓아가야 했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마태복음>의 원 독자들이 처해있었을 상황이다. 즉 이들은 이전에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땅에 선구자 내지는 개척자로 서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땅은 두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사이에 있는 땅”(the land inbetween)이다. 그러나 그 땅은 무인고도(無人孤島)가 아니다. 이전에 살던 그 땅과 불가분 연장선상에 있는 땅이다. 이 같은 연속성을 바탕으로 이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들은 교회 밖의 유대인을 향해서는 새 언약에 대해서 말해주어야 하며, 교회 내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향해서는 옛 언약을 말해주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두 무리에게 공히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 즉 복음이다. 특별히 이방인 선교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가 그렇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대인 불신자들을 위한 이야기가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 같은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따라서 예수는 단순히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즉 옛 언약을 성취하신 이스라엘의 진정한 메시아임을 확인시켜주어야만 했다. 그가 온 것은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의 <성경>을 계승할 수 있으며,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신시켜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 불신자를 위한 메시지가 그토록 절실했다면, 이 책에서 드러내고 있는 배타주의적 색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오신 첫 번째 목적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신실하시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단절이 아니라 연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히 이방인 신자가 교회 안에서 늘어가고, 유대인 사이에서 기독교란 결국 이방 종교라는 당혹스러운 인식이 쌓여가는 상황에서, 유대인은 이방인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처음부터 해야 할 역할이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유대ㆍ기독교인들의 존재가 바로 이점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소위 신실한 “남은 무리”(the faithful ramnant)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태 화자는 이들을 “참된 이스라엘‘로 규정하고 있다 하겠다. 그는 유대주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그것이 완성되고 성취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오래 기다려온 메시아 예수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 안에서 볼 수 있는 배타주의적(유대주의적) 색채를 띤 어록들은 이 책의 독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역사적 잔재들이 아니며, 또한 당시 마태 공동체의 선교 사역의 범위를 한시적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제한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들도 아니다. 이들 배타주의적 어록들은 어쩌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사역과는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특별히 공동체 안의 유대ㆍ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 어록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시며, 따라서 유대ㆍ기독교적 신앙도 올바른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게만 보냄을 받았다면, 이스라엘은 사실상 복음에 반응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공동체 안에서 유대ㆍ기독교인 독자라면 고통스럽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공동체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유대ㆍ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믿지 않는 유대인 형제ㆍ자매들과는 분리되었거나, 심지어는 적대적인 무리로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즉 자신들이야말로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로서,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교에 대하여 적대적인 무리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유대ㆍ기독교인들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혹독한 저주나 심판의 말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회당”이나 “서기관”을 “그들의 회당”이나 “그들의 서기관”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을 향한 저주나 심판의 말은 비단 이 책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외치던 신탁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고 새롭게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은 누구일까? 유대ㆍ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 백성이라고 인식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자신들과 동일시했다(참고. 10:23; 23:34).
결론적으로, 마태 화자의 공동체는 “유대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공동체였다. 비록 공동체 회원들은 “후자가 전자를 성취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믿지 않는 유대인 형제ㆍ자매들과는 완전히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대ㆍ기독교인들은 두 영역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 하고 있었던 바, 한편으로는 불신자 유대인을 향해서 유대ㆍ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동질성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도전이 마태 공동체 안에서 유대ㆍ기독교 공동체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으로서, 이 책 안에서 드러나는 긴장과 갈등을 설명해 주고 있다.
“새 술과 새 부대”의 관계에 대해서 <마태복음>이 <공관복음>의 나머지 두 책에 없는 내용을 추가로 더하고 있는 이유도 이 같은 배경 하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9:17). 즉 여기서 마태 화자가 추가로 더한 부분은 “둘 다 보전되어야한다”는 대목이다. 둘이라 함은 새 술과 새 부대이다. 새 술은 복음이며, 새 부대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해석하고 완성시킨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목도하는 바는 마태 화자의 복음의 이중성에 대한 강조다. 즉 복음은 혁명적으로 새로운 것이지만, 동시에 율법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상호 단절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다음 구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13:52).
4. 반 유대주의
<마태복음>의 개론에서 이 주제를 상세하게 다루는 것은 적절치는 않지만, 다만 이 책이 반 유대주의적인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교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대해서 앞 단락에서 살펴본 바처럼, 이 책은 아닌 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나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행태와 관련해서 스스로 “위선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참고. 6:1-18).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로부터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21:43),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22:8).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위선자들로 매도하신다(23장).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지옥의 자식”(23:15), “어리석은 맹인”(23:17), “맹인 된 인도자”(23:24), “뱀”, “독사의 새끼들”(23:33),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23:28), 등으로 부르고 있다. 유대인들을 향한 최악의 비난은 그들을 예수님을 죽게 한 장본으로 그리고 있는 장면이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7:25).“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는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 표현이 반 유대주의적 정서를 대변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 표현은 유대인이 유대인들에 대하여 쓴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동료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이와 같은 독설을 쏟아내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다소 과장된 언어는 고대 근동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사적 논쟁의 한 전형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만으로 이 책이 반 유대주의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신약>의 어떠한 유대ㆍ기독교인도 기독교가 반 유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천국의 복음을 믿고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일은 유대적 소망이 성취되는 시작으로 보았을 것이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무리”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책에 등장하는 적대적인 어휘나 언어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이 책이 반 유대적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특히 지난 세대에 있었던 유대인 대학살을 목도한 우리 세대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기독교는 <마태복음>의 일부 적대적인 구절들을 그와 같은 대 참사에 대한 증거 본문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특별히 이 책의 역사적 상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책은 일 세기에, 유대인이 동료 유대인들을 향해서, 유대 특유의 수사적 기법으로 썼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안의 어떤 구절도 이후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증거본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와 유대 회당 사이에 있었던 비극적 관계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책의 본문이 정학하게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신약>의 다른 곳에서 반 유대주의를 교정해 줄 수 있는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예컨대, 사도 바울만 하더라도 동료 유대인들을 향해서 가혹하리만치 독설을 퍼부어대지만, 여전히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으로 인정하고 있고(롬 11:28), 그들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롬 11:12, 15, 23-24, 26, 29, 32).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1:22),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왔으며(15:24), 또한 그분께서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꾸짖으면서도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다정함으로 회개하지 않는 이 백성을 위하여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23:37-39).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 율법과 선지자를 두 개의 명령, 즉 지상명령(至上命令)으로 요약하고 있는 책도 다름 아닌 <마태복음>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
5. 시기와 출처
시기. 책의 저작 시기와 관련해서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는 교회와 유대 회당(synagogue) 사이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깨어진 때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기인 주후 85-90년 보다 이전의 시기, 즉 복음이 쓰여 질 당시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예루살렘 멸망(주후 70년)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이른바 야브네(Yavneh)의 결의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거의 없으며, 야브네(또는 얌니아) 종교회의는 <구약>으로 알려진 <히브리 성경>을 최종 확립한 회의로 알려져 있다.
이 회의가 교회와 회당 간의 관계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된 사건으로 간주하기도 어렵다. 둘 사이에 분리와 경쟁과 적대감은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유대인을 향한 선교도 그 회의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이 책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이미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24:2). 그러나 이 언급은 예수님의 감람산 강론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분의 강론이 앞날에 대한 예언(豫言)의 성격도 띠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자주 회자(膾炙)되는 본문은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다(22:1-14). 특히 이 비유에서 왕은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고 오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며, 군대를 보내고 동네를 불태워버린다는 내용이 문맥 상 어울리지 않으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그 사건을 사전에 예고했다고 생각할 수 있거나, 또는 그 일이 실제 일어난 후에 후대의 편집자가 그 대목을 추가로 삽입해 넣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가지고 <마태복음>의 저작 시기가 주후 70년 이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인 것이지 실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수사적 과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주후 70년 이전에 완성되었다는 견해에 반대되는 입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마가복음>과의 연관성 문제이다. 즉 이 책이 <마가복음>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주후 60년대 후반에 저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저작 시기는 일러도 70년 이후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마태복음>이 <마가복음>과 1-2년의 시차를 두고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한들 무슨 큰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마태복음>에서 드러나고 있는 교회와 회당 간의 갈등에 대한 것이다. 즉 교회와 회당이 70년 이전부터 그토록 첨예하게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 또한 근거가 없는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남은 세 번째 문제는 이 책이 드러내고 있는 일련의 신학적 주제들, 즉 기독론(11:27-30), 종말론(16:18-19; 18:15-20), 삼위일체적 관용구(28:19) 등이 70년 이전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세련되어있고 체계적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직신학적 교리들은 바울 서신들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한편 <마태복음>이 70년 이전에 완성되었다면, 책 속에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를 염두에 둔 본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마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편집적 삽입으로 보이는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일과 제단에 두는 일(5:23-24); (2) 성전 세에 대한 논쟁(17:24-27); (3) 성전을 두고 맹세하기(23:16-22). 이들 본문 모두가 예루살렘 멸망 이후 거의 무정부 상태를 반영하는 구절들로 보기보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에 둔 구절들로 보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 한 후라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도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게 비칠 수밖에 없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4:20).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책의 저작 시기와 관련된 두 가지 입장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이며 빈약한 증거들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어느 쪽을 책하든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며, 단정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출처. 이 문제 또한 저작 시기에 관한 문제만큼이나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복음서가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산물로 인식해 왔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든 그는 단지 교회에서 유포되던 내용들을 모아서 최종적으로 정리한 편집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타당해 보인다.
교부들은 이 책이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방을 그 출처로 보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예컨대, 제롬(Jerome)은 그 지역을 구체적으로 유대 땅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책의 출처를 팔레스타인으로 두는 것은 일리가 있기는 하다. 책 내용 중에 번역 없이 아람어를 삽입하고 있는 점(5:22; 6:24; 27:6)이나, 유대 관습을 전제하고 있는 점, <구약>을 인용할 때 본문이 이중언 어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점, 헬라어에서보다는 셈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설 형태를 문학적인 의도에서 채택하고 있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리아를 책의 출처로 보고 있는데, 다음 두 가지 요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1) 거의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지방이 파괴되었던 주후 70년 이후를 저작 연대로 채택하고 있는 점.
(2) 안디옥을 책의 출처로 주장한 스트리터(Streeter)의 영향.
첫 번째 요소는 너무 주관적이고, 두 번째 요소가 더 중요한다. 물론 스트리터의 영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디옥이 갈릴리 지방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첫 번째 중심 도시였고 실제 그곳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소위 세계도시로서의 안디옥이 갖는 특성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유대ㆍ기독교적인 신학 특성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예컨대, 유대적이면서 동시에 이방인 선교를 강조하고 있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2세기 초에 이크나티우스(Ignatius)가 안디옥의 감독이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시리아 외에도 알렉산드리아, 가이샤라, 에데사, 보니시아 등도 후보 지역으로 거론된 바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지리적 출처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으며, 그리고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6. 저자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원 저자를 알 수 없는 익명(匿名)의 작품이다. 이 책의 이름, “마태에 의한”(kata Maqqaion)은 2세기경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 무렵부터 교회 내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마태를 책의 저자로 인식한 듯하다. 이 책 안에서 마태를 저자로 보게 하는 유일한 단서가 한두 군데 있기는 하다. 마태를 레위로 바꾸어 부른다든지, 그가 “세리”(the tax collector)라고 설명을 덧붙이는 등의 사례가 그것이다(참고. 9:9; 10:3). 어떤 이유에서든 책의 화자(話者)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명된 마태가 레위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듯하다. 이는 그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의 이름이 마태보다는 이전의 이름 즉 레위로 알려지는 것을 더 선호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책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있다. 즉 저자에 관한 한, 확실하지도 않은 전승을 그렇게 의존해도 괜찮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부에 상관없이 저자에 관한 전통적인 인식은 그동안 별 도전을 받지 않은 채로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마태의 이름이 <사도행전>(1:13)에서 단 한 번 등장하는 것을 빼고는 <복음서> 외의 문헌에서는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그는 열두 사도 중에서도 특별히 지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저런 점으로 미루어, 그가 이 책의 저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마태가 책의 저자가 아닐 것이라는 강력한 주장은 이 책이 대부분 <마가복음>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진정 그가 책의 저자라면,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가 어떻게 책의 주요 내용들을 <마가복음>에 의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마가는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자가 아니지 않는가! 전승에 따르면 <마가복음>은 주로 베드로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다면 마태는 결국 베드로의 설교에 의존하여 책을 썼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과연 마태가 그리스어로, 그것도 보다 발전된 후기의 시각으로, 복음서를 쓸 수 있었을까? 이 점은 더더욱 자신할 수가 없다. 마태를 책의 저자로 보는 전통적인 입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책의 내용 중에 마태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자료(전승)들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그는 세리로서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사료들을 일부 보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예컨대, 다섯 번에 걸친 강론의 배경을 이루는 전승들이라든지, 인용문 등이 이에 속한다. 나중, 에 마태의 제자(또는 제자들)가 이들 자료들을 번역하고, 더 나아가 <Q 전승>이나 <마가 전승>과 결합하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형태의 책은 보다 광범위한 수정과 편집의 결과로 탄생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진 최종 형태의 책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책의 저자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꼽는 견해도 있지만 이 역시 단언할 수는 없다. 이 견해에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의 저자로 이방인을 꼽는 근거로 책 중간 중간에 유대인의 관습이나 전통에 다소 무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예컨대, 이 책에서 드러나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 기독교인도 유대인들에 대해서 이와 같은 적개심을 얼마든지 드러낼 수는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적개심은 유대인 저작권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또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별개로 취급하여 한 문장 안에서 반복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참고, 21:1-9). 이방인이라 이 둘이 같은 것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동의반복에 도입하고 있는 수사적 기법일 뿐이다(참고, 슥 9:9).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한 언급은 어떤가(예. 16:1, 6, 11-12)? 두 집단은 엄연히 다른데도 이방인 저자가 이에 대하여 무지해서 마치 같은 집단인 것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이 두 집단이 예수님에 대적하는 일에 있어 하나로 뭉쳐 공통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줄 뿐이지,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 무지한 결과는 아니다. 오늘날 이방인 저작권을 인정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책의 저작권 문제와 관련해서 추론해 보자면, 특별히 예수님의 강론이나 더 나아가 일부 이야기 등은 그 출처가 마태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일차 자료들을 마태의 제자(또는 제자들)가 오늘날 알려진 복음서의 형태로 편집을 하였을 것이며, 최종 편집은 헬라파의 한 유대 기독교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최종 편집 과정에서 의도했던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신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동료 유대인 기독교 형제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새로우면서, 동시에 이전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리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신학
<신약> 전체가 그러하지만, 네 <복음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책의 주제이자 주인공은 다른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마태복음>은 과연 그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마태복음>은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을 <마가복음>으로부터 취하고 있어, 당연히 신학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동시에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각색 및 재편집하고 있는지를 관찰해 봄으로써, <마태복음>의 각별한 신학적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찰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이 아닌 또 다른 제 삼의 자료를 참고하였을 것이므로, 이를 통해서 <마태복음>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신학적 입장을 엿볼 수도 있다. 이 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마태복음>의 신학적 주제를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나라(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定意)한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시공(時空)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언제, 어떻게 임할까? 이 질문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한 마디로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중성(또는 양면성)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미”라 함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지금 여기에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책의 곳곳에 등장하고 있는 “천국 복음”(the gospel of kingdom)이라는 표현이 이점을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참고. 4:23; 9:35; 24:14). 천국복음이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시작했다는 좋은 소식을 말한다. <마태복음>은 책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현실로 임재 해 있음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화자(話者)는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적 표현으로서 실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대한 완곡적인 표현이다(실제 “하나님의 나라”는 12:28, 19:24, 21:31, 43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마태 화자에게 있어 왕국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그는 이 단어를 어느 다른 <복음서>에서 보다 더 빈번하게 하용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에 비하면 무려 세 배 정도나 더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침례 요한의 경우아 마찬가지로(3:2), 예수님의 메시지도 천국에 관한 것이다(4:17). 이는 또한 후에 제자들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10:7). 사실상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어떤 형태로든 이 주제와 불가분의 관계 하에 있다. 물론 이 천국이 존재하는 방식이 제 13장의 천국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전혀 예기치 않게 와서 신비한 영역으로 남아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들 중에서 아직도 미래의 일로 남아있는 것도 있는데, 예컨대 악인에 대한 심판이 그것이다(13:36-42, 47-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3:16-17). 마태 화자도 수시로 이른 바 신조나 신앙고백의 형태로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성취”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 이곳에서 성취된 것이 사실이나, 여전히 “아직” 성취될 일로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이는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2. 기독론
“예수는 누구인가?” 앞서 밝힌 바처럼, 마태의 기독론은 다른 그 어떤 신학적 주제보다 더 중요하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여타 주제들, 즉 구약의 성취나, 율법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 제자도,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는 어느 것도 그 의미가 분명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론에 관한 한 마태는 <마가복음>의 이해를 뛰어넘고 있으며,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마가복음>의 고백이<마태복음>에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로 바뀐다(참고. 막 8:29; 마 16:16).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마태복음>의 기독론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가장 핵심이 되는 호칭은 “하나님의 아들”(uiJo;" tou' qeou')이다. 이 호칭은 직접적으로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기도 하지만(예. 8:29; 14:33; 16:16), 그와 같은 의미로 암시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부르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서(1:23), 그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구약>에서 “나는 야훼라”(출 3:14)는 의미의 유명한 헬라어 표현, “에고 에이미”(ejgw eijmiv; It is I)를 자신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으며(14:27),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도 그분의 정체성을 암시해주고 있다(18:20; 28:20).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 마태 화자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대략 23회에 걸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그분의 “아버지”로 지칭하고 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비한 정체성과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고백으로 인식되고 있는 대목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다(16:16; 11:27). 이와 같은 고백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16:7; 11:27; 13:11).
마태의 기독론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중요한 호칭은 “인자”(人子; Son of Man)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는 일종의 대응 관계에 있는 호칭이기도 하다. 즉 전자가 본인이 타인을 향해서 부르는 일종의 공식적인 호칭이라면, 후자는 타인이 그분을 향해서 부르는 개인적인 고백을 담은 호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호칭은 그분의 재림과 종말의 심판과 관련해서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상 마지막 날에는 인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중요한 호칭은 “주님”(kuvrio“; the Lord)은 하나님의 아들과 유사한 이름으로 주로 제자들이 그분을 부를 때 사용하던 이름이다. 또 다른 호칭인 “그리스도”(Cristov”; Christ)와 “다윗의 아들”(Son of David)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호칭인데, 이 둘 모두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들 호칭 역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보조적인 호칭임에 분명하다. 그 외의 여러 호칭들, 즉 “아브라함의 아들”, “오실 자”, “랍비”, “목자”, “종” 모두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미들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즉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론의 한 표현이 있는 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 자체이다.
3. 의와 제자도
“의”(義)(dikaiosuvnh, 디카이오수네)는 네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또 다른 핵심 단어 중의 하나이다. 예외적으로 <누가복음>에서 단 한 차례 등장한다(1:75).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윤리적 요구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윤리적 요구는 그리스도의 제자도(弟子道)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이 단어가 일곱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중 상당수가 바로 제자도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른 경우에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리고 일부 몇몇 사례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경우 “의”는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3:1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6)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3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이 구절은 두 경우 모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연관된 파생어 “의로운”(dikaios, 디 카이오스)은 이 책에서 17회 등장하는데, 이 회수는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횟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이 단어의 정의와 기준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의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능가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결국 의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요청에 준하는 것이다(7:21; 12:50; 21:31).
이 책은 특별히 제자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제자”(maqhthv", 마데테스)는 다른 어느 <공관복음>보다 <마태복음>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으며(73회), 그 동사형 “제자 삼다”(maqhteuvw, 마데튜오)는 네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다(13:52; 27:57; 28:19). 마태 화자는 제자를 “하나님의 아들들”(uiJoi; qeou', 휘오스 데오)로 칭하지만, 때로 겸손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형제들”(ajdelfov", 아델포스)로 더 자주 부르기도 하고(12:49-50; 18:15, 21, 35; 23:8; 25:40; 28:10), 가장 독특한 호칭으로 “작은 자”(mikrov", 미크로스)가 있기도 하다(10:42; 18:6, 10, 14). 제자란 스승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는 자일진대, 당연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며(10:38-39; 16:24-26), 고난을 참고 견디며(5:10-12; 10:16-25; 24:9-13), 종이나 어린아이처럼 겸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20:26-27; 23:11-12; 18:1-4).
4. 율법과 은혜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율법에 충실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7-18). 책 전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의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은 다름 아닌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해설해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대-기독교인 청중을 위해서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하여 <마가복음>보다는 다소 덜 과격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예컨대, 장로들의 유전과 관련한 두 <복음서>의 본문(마 15:1-20; 막 7:1-23)을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에서는 단지 “손 씻는 문제”만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다”는 결론은 아예 없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칙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입장을 같이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3:2-3), 그들이 모세의 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데의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서조차 예수님은 율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9:10-17; 15:1-20), 율법의 조문(條文)을 뛰어넘고 있다. 그분은 율법의 정신을 꿰뚫어보고 계신 것이다(참고. 5:31-42; 12:1-14; 15:11; 19:3-9). 이와 같이 율법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분의 정체성과 사역 때문인 것이다. 즉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해석에 관한 한, 그분에 필적할 수 없으며, 동시에 모세의 계승자는 유대 회당이 아니라 유대-기독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울 서신들에서 강조하고 있는 “반 율법주의”와 의도적으로 대척점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태의 성향 즉 그의 유대-기독교적인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새로운 법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의 참된 의미, 내지는 의도된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참고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로운 가르침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전혀 그러한 표현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에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천국 복음의 맥락 가운데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다른 의로운 삶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예컨대, <산상수훈>에서 축복이 율법에 앞서 등장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의를 행해야 한다는 준엄한 요구(예. 5:19-20; 7:21-27; 25:31-46) 는 항상 은혜에 대한 강조를 수반하고 있다(예. 5:3-12; 9:12-13; 10:7-8; 11:28-30; 18:23-35; 20:1-16; 22:1-10; 26:26-28). 이처럼 천국의 은혜와 율법의 요구가 역동적인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은혜가 율법에 앞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5. 교회론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ejkklhsiva)는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하고 있다(16:18; 18:17). 제 16장에서 예수님의 신분과 관련해서 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있은 후에, 그 위에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베드로 한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16:19), 교회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18:18-19). 교회의 권위는 곧 교회의 사역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 즉 교회의 특권이자 사역의 본질은 신자들이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태복음>은 한편으로 “교회 복음”으로 불러 마땅하다 하겠다. 이미 책 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예수님의 주요 강론도 교회 교육을 위한 것이다. 베드로는 기독교 지도자의 전형으로서, 제자들과 그들의 경험은 마태 당시의 공동체를 섬김에 있어 역할 모델이 되었다.
<마태복음> 속에는 당면한 문제에 관한 지시나 교훈도 있다. 이 공동체는 아마 내부 분열이나, 배교나, 기타 불법의 문제를 겪고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화자의 처방은 교회는 참된 교인과 이른바 “쭉정이” 교인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예. 13:29-30, 47-50; 22:11-14). 그는 또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준엄한 경고를 주고 있는데, 이들은 실은 양의 탈을 쓴 이리들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치는 일종의 영적 은사주의자들이다(7:15-23). 이들의 특징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악한 행위로 악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참된) 순회 선지자들에게는 친절과 호의를 베풀 것을 권고하고 있다(10:41). 동시에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교만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피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23:8-12), 이들 역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이다. 화자는 반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모두 그가 속한 교회의 필요 때문인 것이다.
6. 종말론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비해 특별히 종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흔히 “감람산 강론”(마 24-25)으로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종말론 강론은 분명 <마가복음>(13장)의 그것에 비해 길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을 더하고 있다. 새로운 내용은 주로 종말의 심판에 관한 것들이다: (1) 열 처녀의 비유(25:1-13); (2) 최후의 심판(25:3-46). “감람산 강론” 외에도 마태 특유의 종말론 강론을 발견할 수 있다(예. 13:24-30, 36-43; 20:1-16; 22:1-14). 그러나 마태의 종말론 강론에는 묵시(黙示)적인 색채가 묻어나오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파루시아”(parousiva)가 <마태복음>에만 등장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24:3, 27, 37, 39).
그런데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신약> 전체에 등장하는 종말에 대한 강론은 항상 그 첫 번째 목적이 무슨 미래에 관한 정보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임박한 심판에 대비하여 교회로 하여금 상응하는 행동을 취하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도 “감람산 강론”은 종말론 그 자체의 신학이 아니라 항상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함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교회는 내일 그곳에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어떻게 율법의 의를 이루며 살아야 할 것인가?” 미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약속은 그런 점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자 조건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7. 구속사
<마태복음>은 역사, 특히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가? 학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세대를 구분하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 가능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스라엘-예수 그리스도-교회; (2) 이스라엘-예수 그리스도.
이 같은 차이는 <마태복음>의 구조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마태복음>에서 교회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면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교회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한 새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반면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가 교회에 있다고 본다면, 전자(前者)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는 일종의 전환기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면 필수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연습과 토의
<마태복음>을 깊이 있게 공부하기 전에 책 전체에 대한 조망(鳥網)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조망이라 함은 마치 새가 공중에서 숲을 내려다보며 숲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는 일을 말한다. 아래에 제시한 몇 가지 질문은 <마태복음> 전체에 대한 조망을 갖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 복음(福音)은 그리스어로 ‘가스플’(gospel), 즉 “좋은 소식”(the good news)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복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 친구에게 복음을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복음을 어떻게 정의(定意)내릴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복음을 정의해 보자. 그리고 복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나에게 필요한지 설명해 보자.
2. <신약>에서 복음서로 불리는 네 권의 책이 있다: 흔히 <공관복음>으로 부르는 세 권의 책,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이 있고, 다른 한 권의 책 <요한복음>이 있다.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 나는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과연 복음서란 어떤 성격의 책인가? 일부 학자들은 <신약>에서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역사서로 분류하고 있다. 복음서는 과연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역사책일까?
3. <창세기>와 <마태복음>은 각각 <구약>과 <신약>의 첫 번째 책이다. 이들 두 책이 각기 그와 같은 위치를 지닐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창세기> 제 1장과 <마태복음> 제 1장은 각기 시작에 관한 진술로 책을 열고 있다. 두 곳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 바, “계보”가 그것이다. 이를 영어 번역본에서는 geneology로 번역하고 있다. 이들 두 장은 각기 어떤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가(참고. 창 2:4 및 마 1:1)?
4. 침례(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역의 제 일성(一聲)은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다. 천국(天國)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다른 말로서, 그리스어로 ‘바실레이아’로 부른다. 나 자신의 말로 천국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참고로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일곱 가지 비유(parable)를 들어 “천국”에 관하여 설명하신다.
5. <마태복음>에서 천국과 함께 등장하는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다. 교회(‘바실레이아’)가 그것이다. 나 자신의 말로 교회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특히 천국과 교회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답변은 위하여 <마태복음> 16:17-19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6. 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28:19-20)을 암송할 수 있는가? 이 두 구절을 흔히 “대 위임령”(大 委任令) 또는 “지상 선교명령”(至上宣敎命令; the Greatest Commission)이라 부른다(이를 지상명령과 혼돈하지 말 것). 여기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대상은 무엇일까? 참고로 <마태복음>은 제 1장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그 마지막 장에서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하고 있는 세계인으로서의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한 책들
1. D. Wenham & S. Walton, Exploring the New Testmant 2nd ed.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1.
2. D.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Matthew 1-13. Word Books, Dallas, Texas, 1993.
3. D. A. Carson & L. Morris (노진준 번역), 신약 개론. 서울: 은성(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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