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3과
바리새/서기관을 향한 화
김태정 목사마태복음 23:13-33약 16분 분량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13절상)
흔히 우리나라에는 원로(元老)가 없다고 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에 빠져있을 때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지혜를 들려줄 국가적인 스승이나 어른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 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나 경제 지도자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아닌 가 여겨집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고 봉사했던 자들이 아니라, 반대로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 국가나 민족을 희생시켰던 자들로 기억에 남아있는 경우가 더 많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각 나라는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학교와 연구소, 기업과 정부 가릴 것 없이 구태와 타성을 벗어던지고 변혁과 구조조정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의 한 신문사에서도 특별 연속 기획으로 ‘살기 좋은 나라’를 위한 지상토론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당연히 국가의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난 20세기 벽두에 저질렀던 실패를 교훈삼아, 21세기에는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 분야에서 국가 발전을 저해하거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각종 제도나 조직, 인습이나 사고 체계들을 과감히 개선하고 혁파해야한다는 의견들이 지상토론회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이처럼 다양한 해법들의 핵심은 결국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양성과 전문성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국가의 미래가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갈구했던 이른 바 정의로운 사회가 전제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꿈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위한 지도자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도덕성과 책임성을 갖춘 지도자를 가진 국가나 공동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모세’나 ‘여호수아’를 사모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쫓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봉사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언제쯤이나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동과 서로, 그리고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갈라진 이 민족을 하나로 묶어 위대한 국가 건설을 주도해 갈 것인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여호수아>의 제 2부를 시작하면서 ‘모세’가 정복하여 나누어주었던 ‘요단’ 동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화자도 마음속에 이러한 꿈과 소망을 품고 자신과 회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하며, 무슨 꿈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수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후 뿔뿔이 흩어져 그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이방의 노예로 전전긍긍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실까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할 모세와 여호수아를 닮은 영웅은 언제쯤이나 나타나겠습니까?
문학과 역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일곱 번의 “화”(禍)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은 23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13, 15, 16, 23, 25, 27, 29절)
예수님께서 이들을 상대로 직접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僞善)에 대해서는 23장의 첫머리에,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3절하)고 언급한 바 있지만, 일곱 번에 걸친 “화” 선언은 구체적인 예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처음 두 번의 경우(13, 15절)는 4절에서 이미 선언한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며,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경우(25, 27절)는 5-7절에서 선언한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경우(29절)는 절정에 해당되는 심판이자 저주로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과 같은 반열에 놓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일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화” 선언(29-33절)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23장 전체에 대한 절정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23장에 이르러 예수님의 공생에 사역에 관한 내용은 끝이 나고 곧바로 이어지는 24장부터 하나님의 심판, 즉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중심으로 종말론적인 강론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동일한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는 11장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일곱 번의 “화” 선언의 출처에 대해서는 흔히 <Q 전승>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화자는 이들을 창조적으로 취사선택 및 수정 보완하면서 현재의 본문으로 완성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인데, 자신이 강조하는바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한곳에 모아놓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로, <누가복음>에서는 병행되는 “화” 선언이 여섯 번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 <마태복음>의 일곱 번의 “화” 선언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형식과 구조. 일곱 번의 “화” 선언은 전체적으로 아주 정교한 구조와 형식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화자의 문학적 솜씨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대칭과 대조, 그리고 시적 유사병행과 대조병행, 및 교차대구 등을 들 수 있을 것인데, 화자는 각 선언을 한 쌍씩 짝을 이루어 그 효과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선 각 선언은 세 번째 것을 제외하면 모두 동일한 공식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선언은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로 시작하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일부 선언들은 또 다른 호칭들을 추가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17절); “맹인들이여”(19절); “맹인 된 인도자여”(19절); “눈먼 바리새인들이여”(26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33절).
일곱 번의 선언 가운데, 첫 여섯 번은 그 내용에 있어 각기 한 쌍씩 짝을 이루고 있으며, 일곱 번째는 전체 선언의 절정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1) 처음/두 번째 선언(13-15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 및 교인들
(2) 세 번째/네번째 선언(16-24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3) 다섯 번째/여섯번째 선언(25-28절)-형식주의의 문제
(4) 일곱 번째 선언(29-33)-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거부하는 문제
이들을 내용 별로 다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들을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함(13절)
(2) 교인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함(15절)
(3) 맹세나 서원에 관한 궤변론적인 해석(16-22절)
(4) 중요한 것은 버리고 시시콜콜한 것을 취함(23-24절)
(5) 겉을 깨끗이 함으로써 내적 청결의 필요성을 감춤(25-26절)
(6) 표면적인 거룩함으로 이면적인 부정함을 감춤(27-28절)
(7)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배척함(29-33절)
첫 두 번의 선언은 그 길이에 있어 비슷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유사성이 거의 없다 하겠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 번째 선언(16-22절)은 상당히 길고, 많은 유사병행 구조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형식으로, 본문에 편집되기 전에 독립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유사병행 구조의 예는 두 번에 걸친 서원과 관련된 궤변적인 양식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것은 성정과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고, 또 한 번은 제단과 제단 위에 있는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두 번 모두 각기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나란히 소개되어 있고(16, 18절), 이어서 수사적인 질문이 이어지고 있는데(17, 19절) 이 두 질문 또한 유사병행의 관계로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질문은 각기 “어리석은 맹인들이여”(17절)와 “맹인들이여”(19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두 번 등장하고 있이 구조화자는 서론에서(8-12절) ‘모세’가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게 할당해 준 땅 전체를 길게 개괄하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들 질문은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만, 암시하고 있는 바는 결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궤변을 저주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결론적인 선언(20-22절)은 모두 동일한 단어,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는데, 20절에서는 제단과 관련된 맹세에 대해서, 21절에서는 성전과 관련된 맹세를 다시 언급하고 있으며(그런 점에서 16-22절의 문장은 일종의 교차대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2절에서는 앞에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문제를 새롭게 추가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구문론 적으로 볼 때 일종의 유사병행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네 번째 “화” 선언(23-24절) 역시 대칭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바리새인들이 강조했던바 십일조의 세 예물 “박하”와 “화양”과 “근채”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23절상). 그리고 이어서 “이것도 행하고”와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도 대조병행을 이루는 문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23절하). 그리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와 “낙타는 삼키는도다”(24절) 또한 대조병행을 이루는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와 같은 대조병행의 구조는 다섯 번째 선언(25-26절)에서 “겉”과 “안”을 대비시킴으로써 더욱 고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잔과 대접” 그리고 “탐욕과 방탕”이 각기 두 번씩 등장하고 있습니다. 잔의 겉과 안을 “깨끗이 하라”는 권면(26절)은 문장의 처음과 끝에 교차대구적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선언(27-28절)은 두 번의 대조병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번에도 “겉”과 “안”에 대한 대비를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8절은 27절을 반복하고 있는데, 유비의 대상이 무덤에서(27절) 보다 직접적으로 대화의 상대인 바리새인들로 옮아가고 있습니다(28절). 이 두 절이 대조병행의 관계를 보이고 있다면, 각 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짝을 이루어 유사병행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27절의 “아름다움”은 28절의 “의로움”과 동의어로, 그리고 28절의 “외식과 불법”은 27절의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선언(29-33절)은 나머지 선언들에 비해서 뚜렷하게 병행구조의 특징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29절에서 이러한 요소를 볼 수 있기는 합니다: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결론적으로 화자는 기존의 전승들을 모으고 편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적자들을 향해서 아주 강력한 비난과 저주를 쏟아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교훈과 적용
성욱이의 고민
나는 누군인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 앞으로의 진로는?
1. 먼저
먼저 물어야 할 질문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우선 순위가 있다
군대 간 사람이 하고 한 날 집 걱정만 하고 있다면?
외국에 유학 간 사람이 늘 고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면?
2. 그의 나라와 그의 의란?
3. 명령은 무엇이고 약속은 무엇인가?
약속의 범위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34절에 그리고 있는 사람이 되도록 부르신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다. 논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 것이 되지 못하니까 늘 우리 속에 한숨과 안타까움이 베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무슨 사람이 되든, 완전한 만족이 없는 이유가 실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듯이 말이다.
본문에서 한 묶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곱 번에 걸친 “화” 선언은 심판과 저주를 담고 있어 듣는 모든 이에게 불쾌함이나 두려움을 갖게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팔복”의 강론(5-7장)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할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화” 선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11:21; 18:7; 24:19; 26:240, 본문에서처럼 한곳에, 그것도 동일한 양식으로, 한 묶음으로 모아놓은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저주의 신탁을 한 묶음으로 모아놓는 일이 <구약>에서는 전혀 생소하지는 않습니다(예: 사 5:8-22; 합 2:6-20).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시골 교회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런저런 이유로 그 교회를 그만두고 떠났습니다. 교회는 그 교회의 부목사를 만장일치로 담임목사로 받아들이기로 의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교회가 의결한 사항을 그 교회가 속해있던 노회에 통보해서 승인을 받으려 했더니, 부목사가 담임목사가 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이유인 즉은 만일 부목사를 담임목사로 세우게 되면 이런 일이 전례가 되어, 혹시 앞으로 교회 내에서 교인들이 부목사와 한 통속이 되어 담임 목사를 쫓아내는 일도 있을 수 있으므로, 승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굳이 부목사를 담임목사로 세우고자 한다면, 그가 다른 교회에 가서 담임목사로 시무한 경력을 갖춘 다음에 이 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할 수 있다는 것이 노회법이라고 합니다. 그동안에 이 교회는 노회가 임시로 파송한 목사를 담임 목사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나마도 이 목사는 이 교회의 전임 목사가 아니라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가 있기 때문에, 매주 와서 설교나 심방 등의 목회 사역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 교회의 대소사 간의 행정적 의결 사항이 있을 때에만 와서 소위 당회장 역할만 하고 갑니다. 그리고 올 때마다 이 교회는 교통비를 포함한 사례비를 꼬박꼬박 이 임시 담임목사에게 지불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노회법에 따르면, 개 교회는 자신의 담임목사를 임의로 결정할 수도 없고,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릴 수도 없습니다. 재정적인 지출도 이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부목사 사례비와 한 번 씩 오는 임시 담임목사를 위한 사례비가 그것입니다. 이런 일이 종교개혁 당시도 아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단의 무리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 가장 정통적이고 보수적이라는 한 장로 교단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어라 하실까요? 그 교단에 대해서, 그 노회법에 대해서, 그리고 수시로 와서 사례비를 받아가는 그 목사에 대해서... 이들이 지금 본문에서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저주를 말씀하신다. 화자는 강도의 깊이나 정도를 더하기 위하여 한 곳에 이 모든 저주들을 모아놓은 것 같다. 마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집중 강의를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서, 위선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 율법을 가르치기는 하나 자신은 행하지는 않는 자,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기는 하나 자신은 그것들을 움직이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 선생님, 아머지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자, 존경과 칭송을 듣기 좋아하는 자, 항상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 천국에 자신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 한 사람의 교인을 만들기 위해서 온 나라를 돌아다니지만, 정작 그가 교인이 되면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 소경으로 남을 이끄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왜곡하며 가르치는 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 그리고 살인자.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단순한 건강 검진을 위해서 병원에 갔다가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는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이제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할까? 청천벽력이라는 말 외는 달리 적절한 말이 없을 것이다. 암이라는 단어는 구제 불능 또는 회복 불능과 거의 동의어가 아닌가!
그런데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영원한 저주가 아닐까? 특히 나 같은 신앙인으로 자처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내가 살았다고 하나 실은 죽은 자라고 한다면 그 심정은 어떠할까? 내가 곧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런 진단을 해준다면 화를 내며 무시하면 그만이겠으나, 다른 사람 아닌 예수님께서 직접 나를 마주 대하면서 이 진단을 해 주신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 앉혀 놓고 하시는 말씀이, “네가 사람들 앞에서는 그저 거룩하게, 그럴 듯하게 모양을 내고 살아가고 있으나, 나를 속일 수는 없어”라고 말씀하신다면 내 기분이 어떨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항변이라도 해야 할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좀 낫다고 해야 하나? 건강 진단의 경우라면 혹시 의사의 오진이 아닐까 해서 다른 병원을 찾을 수는 있겠으나, 내 영혼과 내 속 사람에 대한 진단은 예수님 외는 달리 찾아가 오진 여부를 가려내 달라고 하소연 할 상대가 없지 않은가?
주님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이 무엇일까? 바리새인인가? 서기관인가? 아니면 유대인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저주하지 않으신다.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진정으로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위선과 가식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를 받아 죽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척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위선 때문에 교회는 그 탄생의 고고를 울리는 순간에 죽음의 비보도 함께 들어야 했던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그 거짓된 모습을 숨기려고 애쓰는 순간, 이미 회칠한 무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교회 공동체 앞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나아올 수는 없다.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척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고통일 뿐만 아니라(왜냐하면 나 아닌 모습으로 내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세상에 두 사람의 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나를 향해서, “너는 이미 죽은 자이다”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형 선고를 받을 수야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나를 죽었다고 하는데, 내가 살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담과 화와처럼 말이다. 그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후에도 생물학적으로는 무려 구백여 년을 살았겠지만, 그들의 일생은 실은 질곡과 고통과 아픔과 갈등과 시기와 미움으로 점철되어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암 환자가 회복을 위해서는 모든 가능한 치료를 다 받아야 하듯, 영혼의 병 역시 그러할 것이다. 누구나 혼자서 스스로를 치료할 수는 없다. 공동체 없이 자신의 영혼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스스로 선생으로, 아비로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질병을 고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환자이면서도 환자인 줄도 모르고 의사로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말 회개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공동체가 어떻게 병원이 될 수 있을까? 인격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서이다. 진정한 관계의 사역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혼자서 병을 고칠 수 없듯이, 피상적인 관계 또한 병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진정한 관계 형성의 첫 걸음은 위선과 가식의 가면을 내려놓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혼자 있을 때 그렇게 하자.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선다는 것은 혼자 있을 때 진정한 내 모습을 찾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찾아 나서자. 내가 나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나를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용서받지 못할 회개라면 할 필요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위선과 거짓의 가면을 내려놓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또 누가 필요한가? 공동체 식구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시켜보면, 목장 모임에서 자신의 잘못, 혼자서는 도무지 고쳐지지 않은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결함들을 드러내놓고 회개하고 도움을 구해야 한다. 목장의 가족들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역시 절대적인 용납과 이해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공동체가 이런 능력이 없으면, 목장이 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목장 모임은 위선과 거짓의 회칠 한 무덤일 뿐이다. 용서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아무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드러내 놓지 않을 것이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면, 수술 전의 마취에 자신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교회의 어느 지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면할 수 있겠는가!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