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사랑하라
김태정 목사누가복음 10:36-37약 9분 분량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할 수 없습니다만, 어느 여름밤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밤늦게 집으로 오는 중에 집 근처 길가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자가 어찌 왕래하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시골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놔두고 갈 수 있으랴”하는 일종의 의협심(義俠心)이 작동한 결과라 해 둡시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술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을 흔들어 깨워 집이 어딘지 물어보았습니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어디까지 좀 데려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태우고 그가 말하는 장소로 가기 위해서 차를 되돌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오자 그는 횡설수설하며 다시 얼마를 더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두어 차례, 결국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그자를 차에서 끌어내려 길바닥에 내려놓고는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자를 왜 근처 파출소에 데려다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날이 여름이 아니라 아주 추운 겨울밤이었다면 그는 아마 동사(凍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다면 나는 심각한 직무유기(職務遺棄)를 한 셈이 됩니다. ‘캐나다’와 같은 북반구 나라에서는 한 겨울 고속도로 상에서 차가 고장 나는 경우가 잦은데, 이 경우 운전자가 지나가는 차들에 대해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운전자가 이를 거절하고 그냥 지나치면 처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에 의한 살인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이었다면 이럴 경우 어떻게 했을까? 그는 ‘유대’인보다 더 ‘유대’인다운 의로운 이방인이었습니다. 필경 그는 술 취한 그 행인을 차에 태워 근처 여관에 데리고 가서, 숙박을 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숙박비 외에 별도로 얼마간의 돈을 더 지불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추가로 지불한 돈은 이 사람의 다음날 아침 식사비와 택시비입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그는 떠나면서 여관주인에게 휴대폰 전화번호를 남깁니다. 혹시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기에게 곧바로 알려달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말 이런 그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율법교사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논리적이며, 상상력도 풍부합니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변호사나 판사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판결을 내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지닌 장점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아주 경건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영적 지식에 목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갈구하고 있었으며, 믿음의 삶을 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겠습니까! 누가 그것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겠으며, 누가 그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삶, 죽음이 없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에게 그것은 천국, 또는 무지개 너머에 있는 횡재(橫財)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영생은 또한 그 횡재를 지금 여기서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은 우리가 숨을 거둔 순간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삶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그 달콤함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지만 이 율법교사의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을 내가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의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해주셨습니까? 우리의 탁월한 선생님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교사들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학생들에게 정답에 밑줄을 그어 주입(注入)하지 않습니다. 이 율법교사도 초등학생처럼 다른 누군가가 정답에 이르는 열쇠를 쥐어주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 대답이 자기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학생에게 되묻습니다. 질문에 답변으로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으로 대응하고 계신 것이지요. 학생 스스로 그 속에서 대답을 찾아보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하고 되묻습니다. 질문은 참으로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학생이 수업시간에 원하는 대답은 인터넷 몇 군데를 뒤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과서나 참고서 몇 권을 열심히 찾아 읽으면 그가 원하는 대답 그 이상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뇌는 독서하는 가운데 상상하고, 계발되고, 창조성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는 지난 수십 년을 매일 수 시간을 율법 독서와 연구에 몰두해왔을 것입니다. 과연 그의 대답은 완벽 그 자체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이것이 그가 스스로 찾아낸 정답입니다.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쉐마’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지상명령(至上命令)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학생을 칭찬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이 학생은 자신이 발견한 정답에 만족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하고 돌아갔습니까? 그가 정말 알고 싶어 했던 것은 이게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옆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 매일 성전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구걸하고 있던 맹인, ‘실로암’ 연못가에 모여 있는 수많은 환자들, 매일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있는 삼십만이나 되는 학생들, 무려 육십여 년을 삼대에 걸친 폭정과 압제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운 좋게 그 지옥 같은 속에서 탈출은 했으나 여전히 타국을 전전하며 몸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는 탈북 여인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수없이 많은 어린 아이들,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 등등.
“아니, 이들 모두가 내 이웃이라고? 내가 그들 모두를 도와야 한다고? 맙소사.” 그야말로 “못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모두를 도와주다간 얼마 안 가 탈진해 죽고말겁니다. 이것이 율법교사의 생각입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렇다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누가 내 이웃이 아닙니까?”입니다. 이웃의 한계를 좀 정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나도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술 취한 그 사람을 길가에 내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사람이 내 이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그 사람을 돌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일이 아주 복잡하고 크게 되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정치․사회 전체적인 문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솔직히 세상에는 무책임한 부자만큼이나 무책임한 가난한 자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들 불우한 자들에게 돈 몇 푼 쥐어준다 해서 그들의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가르쳐야 하며, 국회나 정부는 이를 위해서 법을 만들고, 교육 기관을 세우고, 봉사자들을 모집하고, 별도의 예산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문제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려 합니다. 이처럼 무슨 일에든지 일단 조건을 정하려 하면 모든 일들이 복잡해져버립니다. 이 율법교사는 이웃에 대해서, 모든 이웃을 항상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 실제로 얼마나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분명히 정해주시면 ‘쉐마’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묻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분명한 정의나 더 깊은 논의나 이해가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서 이해하고 인식하고 느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즉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에 관해서 무엇을 행하는가라는 것이 비유의 핵심일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이 똑똑한 변호사에게 묻습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 대답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 세 사람, 즉 무관심한 두 교인과 이교도 ‘사마리’안 인 가운데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는가?” 예수님의 질문에는 오직 단 하나의 간단한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변호사는 정답을 제시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행한 사람이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이 변호사의 질문에 올바르게 대답을 한 것입니까? 그가 물었던 질문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즉 “당신은 누구의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명령을 제한하고 국한시키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변호사로 하여금 어떻게 살 것인지를 스스로 택하게 하셨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더 많이 실천하고 더 많이 행동하라는 것도,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로서, 여기서 몹시 분주하고 바쁜 ‘마르다’는 게으른 여동생 ‘마리라’를 비난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많이 행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신에 사랑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사랑을 행하는 것은 혼동해서는 안 됨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공부는 정말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성경 공부에서 배우는 “문학과 역사”, “신학과 신앙”, 모두 좋은 것입니다만, “교훈과 적용”과는 다른 것입니다. 배우는 것과 행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 중 오직 하나만이 영생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만이 삶의 충만함으로 인도할 것이며, 나로 하여금 생명과 사랑에는 끝이 없음을 믿게 해주고,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행함으로써, 내가 살아있음을, 내 삶이 더욱 풍성하게 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입니까? 우리 교회가, 아니 내 삶이 일상의 무미건조함과, 따분함과, 무의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올해 벽두에 반드시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선교는 말이 아닌 행동일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