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5과
제 5과: 라합의 고백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2:1-24약 27분 분량
라합의 고백

(2:1-24)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24)
‘할리우드’에 “스타의 거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명예의 전당으로서, 미국에서 명성을 날렸던 스타들의 손이 보도블록 위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KBS 홀에도 이와 유사한 명예의 전당이 있어, 그동안 KBS 연극대상을 받은 연예인들의 흉상이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명예의 전당이 있습니다. 물론 연예인들이 아닌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이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그 전당은 다름 아닌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이곳에 오늘 본문의 여주인공 ‘라합’이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함께 당당하게 안치되어 있습니다(히 11:31). <야고보서>는 이 여자를 ‘아브라함’과 함께, 그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입은” 대표적인 예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약 2:25). 그래서 그녀는 이방여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은 말할 것도 없고, 창녀라는 명예롭지 못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지위, 그것도 예수님의 선조족보에 들게 되는 영예를 안게 된 것입니다(마 1:5-6). ‘라합’ 외에 ‘다말’과 ‘룻’도 이 족보에 등장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 모두 자랑스럽지 못한 경력을 가졌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남자를 유혹하는 데 일가견을 가졌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은 마치 ‘라합’의 믿음이나 무용담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담대한 고백이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2:11)!” ‘라합’과 관련한 가장 초기의 전승은 혹시 그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그녀의 직계 후손들이나, 또는 순전히 억측이긴 하지만 후대의 ‘팔레스타인’ 창녀협회(?) 같은 단체가 무슨 “여리고성의 축제”같은 정기적인 기념행사에서 예배나 제사의 일부분으로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거나, 무용담(saga)의 양식을 빌어 그들의 영웅을 미화했을 법도 합니다. 마치 오늘날에도 “황진이 사당(祠堂)”과도 같은 특정 여인의 사당을 지어 공적을 기리고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이 시대에도 그런 행사가 있었을 법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추측해 보자면, 이야기의 원제목은 <여리고 요새와 라합>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과연 화자의 관심사는 ‘라합’을 본문의 주인공으로 삼아 <라합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일까? 화자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며, 본문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일까? 이 점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숙제는 그 내용보다 양식이나 자료 분석에 더 많은 논의나 연구가 있어왔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지 본문의 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과 배경. 본문의 배경은 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싯딤’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아직 ‘싯딤’의 옛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싯딤’은 ‘요단’강으로부터 약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화자의 관심은 ‘요단’을 건너는 것에서(1:11) ‘여리고’를 정탐하는(2:1)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본문의 내용도 화자의 이러한 관심사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이야기의 도입부는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할 스파이를 임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1절), 그들이 돌아와 정탐 결과를 보고하는 것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23-24절). 그리고 이어지는 3장은 1장의 주제를 이어받아 다시 “요단 도강”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2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 단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표적 양식비평학자 ‘궁켈’(Gunkel)은 <라합 이야기>를 전형적인 “원인론적 무용담”으로 간주합니다. 주인공의 여행의 모티브, 그가 여행 중 낯선 곳에서 용기 있는 한 여인의 환대와 보호를 받게 되는 모티브 등이 본문 이야기 속에도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화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6:25)
‘와그너’(Wagner)는 본문의 양식과 관련해서 ‘궁켈’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전형적인 <스파이 이야기>의 양식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 스파이의 차출 또는 호명(呼名); (2) 임무 부여와 파송; (3) 임무 수행과 신탁의 확인; (4) 귀환 및 보고; (5) 땅에 대한 야훼하나님의 약속의 확인-완료형의 문장; (6) 결론-진군 및 땅의 정복. 이러한 구분에 잘 들어맞는 본문은 다음 예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민 13-14; 신 1:19-46; 수 14:7-8; 삿 18; 민 21:32-35.
그렇다면 이들 <스파이 이야기>의 배경 즉 삶의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와그너’는 성전(聖戰)을 앞둔 제사 의식을 상정(上程)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제사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음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며, 보다 포괄적으로는 <여호수아> 1-6장 전체를 포함하는 소위 ‘길갈’의 유월절-무교절 축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Wilcox). 그러나 1-6장 전체를 하나의 제의적 상황으로 보려는 시각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일단의 학자들은 2장의 <라합 이야기>를 서론과 결론을 지닌 독립적인 양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는 양식비평에만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 단계에 걸친 편집의 과정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적 연구에 대한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원론적으로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본문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도 광범위한 연구 결과는 Butler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Butler, 29-31쪽.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원래의 <라합 무용담>은 <여호수아서> 2장과 6장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색과 수정 등을 거치면서 핵심 주제가 일부 추가되기도 하고 변모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의 최종 편집자로 알려져 있는 “신명기 학자”들의 편집적인 손길을 거치게 되면서, <신명기> 특유의 역사∙신학적 관점들이 자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본문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그 점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라합의 고백과”, 이 고백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두 정탐꾼들의 보고”가 바로 그것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9절)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4절)
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핵심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주다.” 이 동사야말로 1장과 2장을 이어주는 핵심 고리입니다. 이해를 위하여 제 1장을 다시 간략하게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장은 그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와 격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1-9).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그리고 위로와 격려는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유사들과 백성들에게 전달되었고(1:10-15), 이를 전해들은 모든 백성들은 이에 호응하여 순종의 결의를 다지면서, ‘여호수아’에게 동일한 약속과 격려를 되돌려 주고 있습니다(1:16-17).
공동체는 이제 믿음과 비전에 있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은 진정 새롭게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곧 “거룩한 전쟁”(하렘)을 시작하게 될 하나님의 교회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필수적인 요소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 동일한 비전, 그리고 동일한 생활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으로의 약속과 위로, 아래로는 회중들로의 헌신과 격려가 있으니 그냥 진군 명령만 내리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야기를 <요단강 도강>(3장) 이야기로 이어가지 않고, <라합 이야기>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제자리걸음을 하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라합 이야기>가 기능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야기의 절정을 발견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단락과 범위. 이야기의 절정은 구조 분석을 통해서 비교적 용이하게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바처럼 본문은 문학적 양식에 있어, <스파이 이야기>에 속합니다.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듯이, <스파이 이야기>는 대략 여섯 개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위 내용 참조), 이 구성 요소에 따라 본문의 단락은 자연스럽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성의 절정은 어디일까요?
(1) 스파이 차출 및 호명(1절상)
(2) 임무부여와 파송(1절하)
(3) 임무수행(2-22절)
(4) 귀환 및 보고(23-24)
신학과 신앙
1. 차출과 파송(2:1)
오래 전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 역할을 수행했던(민 13-14장) ‘여호수아’는 이제 자신의 지도력에 근거하여, 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하면서, 은밀하게 ‘여리고’에 관한 전략 정보를 수집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
이야기의 중심 무대는 ‘여리고’입니다. 이 도시는 흔히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된 요새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주전 8000-7000년), 고고학적 발굴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어느 다른 도시들보다 더 많이 이루어진 지역이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지역이기도 한데, 해발 250 미터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리고’에 얽힌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 및 <라합 이야기>와 관계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T. C. Butler, 32-33쪽.
화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두 명의 정탐꾼을 “남자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리고’의 왕도 이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2:3).
이들은 또한 “젊은이들”로 부르기도 합니다. 두 번째 호칭은 정탐꾼들의 나이를 강조하기보다는, ‘여호수아’의 측근 세력에 속한 자들의 군사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Hamilton). Hamilton, V. P. <역사서 개론>.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5.
이 구절을 통해서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싯딤’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장소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머물렀던 마지막 장소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을 아직 이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곳은 ‘요단’강으로부터 약 7마일 정도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장소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에 빠져든 바 있습니다(민 25:1-3).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곳 ‘싯딤’(음행의 도시)로부터 파송된 두 명의 정탐꾼은 ‘여리고’를 정탐하는 중에 한 창녀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점은 전쟁 전에 ‘여리고’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내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의 결정은 일견 믿음과 배치되는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앞에서 그에게 거의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증하신 바 있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라”(1:5절). 무엇 때문에 정탐이 필요하겠습니까? 믿음과 행동은 서로 배치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책임을 부정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훈련을 불필요하게 합니까?
두 정탐꾼은 “기생”(혹은 창녀)(hn:z, 자나)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됩니다. 일부 증거에 의하면 ‘라합’은 창녀가 아니라 여관 주인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나’를 창기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창기”에 해당하는 ‘아람’어 “여관 주인”은 술집이나 여관을 매춘 장소와 연결시키는 완곡어법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창녀 집인가?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창기의 집에 머물고자 했던 정탐꾼들의 결정은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창기의 집은 그들에게 적절한 은신처를 제공하며,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사실 창기들은 외부인들에 대하여 더 동정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이며, 고객들의 비밀을 지켜 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Hamilton).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화자의 역설적 표현이 익살스럽습니다: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후); “두 사람이 눕기 전에”(8절상). 창녀와의 동침을 암시하는 아주 아슬아슬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화자의 이런 표현은 오히려 한가롭게만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질 것이지만 독자들이 우려할 만 한 상황은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참고)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8절).
2. 임무수행(2:2-22)
정탐꾼 차출과 파송에 이어 세 번째 단락은 임무 수행에 관한 이야기로서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라합’은 모범적인 한 개인으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명의 정탐꾼들과 비교할 때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능한 어릿광대 같거나 아니면 신기할 정도로 짝이 잘 맞는 정탐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기는 여리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샐 틈 없는 경비망 덕택에 수상한 자의 침입을 확인을 할 수는 있었으나, ‘라합’의 거짓말에 넘어가 그들을 잡아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돌아가고 맙니다:
2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2-7절)
특히 ‘여리고’ 왕과 그의 수색대를 따돌리는 ‘라합’은 훗날 그를 닮은 <성경>의 다른 여인들을 연상케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히브리’ 남자 신생아들은 다 죽이라는 ‘바로’ 왕의 명을 어기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너무 빨리 태어나서 미쳐 손을 쓸 수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이집트의 한 산파나(출 1:15-19), 또는 ‘드라빔’이라는 아버지의 수호신을 숨기고서는 월경 때문에 낙타 안장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아버지를 속인 ‘라헬’을 들 수 있습니다(창 31:35). 특정 남자를 다른 남자들로부터 구한 여인을 예로 들자면 ‘미갈’이 있는데, 그녀는 자신의 계략으로 ‘다윗’을 ‘사울’로부터 구했습니다(삼상 19:11-17). 또한 ‘압살롬’ 지지 세력의 추격을 받던 친(親) ‘다윗’ 계열의 ‘요나단’과 ‘아히마스’를 숨겨준 익명의 여인도 있습니다(삼하 17:15-20).
아마 이 사건과 가장 비슷한 이야기는 <소돔 이야기>일 것입니다(창 19). 두 이야기는 공히 밤중에 일어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 <창세기: 19장>: “날이 저물 때에”(1절); “경야하리라”(2절); “그들의 눕기 전에”(4절); “이 저녁에”(5절); “그 밤에”(33절)
(2) <여호수아:2장>: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 “이 밤에”(2절);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 쯤”(5절); “성문을 닫았더라”(7절); “두 사람이 눕기 전에”(8절).
두 이야기에서 닮은 점은 또 있습니다. 두 명의 사자(使者)가 특정 개인과 그의 가족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모두 멸망당하게 될 도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창 19:1; 수 6:17, 25). 처음에 ‘롯’을 찾아온 그 사자들은 “거리에서”(bjor, 레호브) 경야하겠다고 말합니다(창 19:2). 여기서 ‘레호브’는 ‘라합’과 음가(音價)가 매우 비슷하여 마치 언어의 유희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 두 에피소드의 차이를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소돔 이야기>에서 ‘롯’은 우유부단하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며, 가족 구성원들조차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라합’은 진취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구원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신 결과 ‘롯’을 구원하신 것처럼(창 19:29), ‘라합’을 기억하신 결과 그녀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라합’의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9절)
그녀의 고백은 훗날 홍해 구원을 겪은 후에 ‘모세’와 이스라엘이 부른 영광송의 한 부분을 교차대구의 방식으로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출 15:15하)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출 15:16상)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수 2:9)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수 2:9)
화자가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호수아서> 특유의 모티브, “담대하고 강하라”입니다: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0-11절)
‘여호수아’는 정보 수집을 위하여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삼중적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이스라엘 회중들로부터; 이방인 라합으로부터.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바는 또 있습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 간의 대화를 주목해 볼 일입니다:
12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12-22절)
대화의 내용은 2장의 핵심 주제는 아닙니다만, ‘가나안’ 주민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파멸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초지일관 이 전쟁을 거룩한 전쟁, 즉 하렘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가나안’ 주민들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적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가 본문 중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 오고간 계약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전문(前文): 너희 하나님 야훼는...(11절)
(2) 머리말: 우리가 들었음이라(9-11절)
(3) 규정: 내게 맹세하고(12-13절)
(4) 약속(18-20절)
(5) 맹세(15-17절)
(6) 언약의 징표: 창문에 걸기로 한 붉은 줄(18, 21절)
‘라합’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 언약을 맺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제 성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12-13절). 두 정탐꾼이 언약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징표를 제공해 줍니다(14절). ‘라합’의 창문이 연해 있는 성벽에 매달려 있는 붉은 끈이 그것입니다(15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이 붉은 줄을 창가에 내걸어 두라는 것입니다. 친숙한 출애굽 유월절의 모티브입니다. 누구든 이 언약을 어기고 집 밖에 나가있거나, 아니면 이 줄을 치워버리는 날에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17-21절).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집행자라는 점입니다. ‘라합’은 계약 조건을 받아들입니다(21절).
3. 귀환과 보고(1:23-24)
정탐꾼들은 무사히 귀환하여 임무 수행에 관한 보고를 올립니다:
23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23-24)
이 부분은 <스파이 이야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파이의 보고 내용 때문입니다. 이들이 보고하고 있는 내용은 실은 ‘라합’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동안 반복해서 등장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담대함. 이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이자, 격려요, 위로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래 가자” 뿐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차출과 파송
약 사십년 전에 그 자신 정탐꾼이 되어 ‘가나안’을 살피러 간 적이 있었던 ‘여호수아’가 이제는 이스라엘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정탐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정탐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것입니다. 손자병법에도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 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전쟁에서 유일한 대안은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탐꾼을 보내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반응일까? 하나님은 수차례에 걸쳐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던가? 내가 밝는 그 모든 땅이 다 내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당할 자가 없다고까지 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대도 수고스럽게, 아니 불경스럽게 정탐꾼을 보내야 할까?
이 당연한 질문들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믿음과 탐색,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훈련은 상호 대척점에 서 있는 반명제의 개념들이 아니라, 오히려 동전의 양면처럼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쌍들입니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보내는 문제 사이에 하등 모순이나 갈등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위해서 전략을 수립하는 일은 오히려 하나님을 곤란에 빠뜨리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그는 아직 이 성이 기적적으로 그냥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점을 꿈에도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그냥 앉아 기다린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믿음이 역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망대를 짓는 자의 무계획을 오히려 나무라시고 계십니다. 무계획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탐꾼 두 사람이 처음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믿음의 행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 처음 찾아간 곳이 창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이런 곳입니까? 모르긴 해도 이들은 이런 곳이야말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민심을 가장 잘 파악하려면 택시를 타라는 말이 있듯이, 창기의 집이야말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민심 파악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온갖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특별히 주목을 받지 않고 그 성 안에 잠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창녀들은 대개 범죄자들이나 도망자들에게 후한 법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창기의 집에 숨어드는 정탐꾼들에 대해서 화자의 묘사는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거기서 유숙하더니”(1절후); “두 사람이 눕기 전에”(8절상). 성적(性的) 암시를 줄 수 있는 아주 아슬아슬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자들의 상상력은 이런 것이겠지요: “과연 이들이 ‘라합’과 하루 밤을 보냈을까? 만일 그랬다면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서 이 무슨 망발인가?” 그러나 화자는 이런 상상은 단순히 기우(杞憂)에 불과함을 나중에 알려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대목은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성전”(聖戰) 즉 ‘하렘’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전쟁의 승리가 멸망당하기로 되어 있는 ‘가나안’ 인,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더러운 한 창녀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외모나, 신분이나, 지위나, 과거의 행적에 의존하지 않음을 시사해 주려는 것이겠지요.
2. 임무수행
성의 경비는 철통같았고, 정보망 또한 막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의 수색대가 두 정탐꾼들이 언제, 무슨 경로를 통해서 잠입했는지 이내 파악하고 ‘라합’의 집에 들이 닥칩니다. 그들은 정탐꾼들의 투항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예의 그 번뜩이는 유머감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삼엄한 경비망에 비해 대조적으로 너무나 허술한 수색대의 순진함과 어리석음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정보 수집에는 빨랐지만 일개 창녀의 기지에 찬 거짓말에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라합’의 집을 제대로 수색도 해보지 않고 그냥 떠나가 버립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 전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정탐꾼들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라합’의 놀라운 고백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라”(9, 11절).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가? 그 땅에 관한 지식, 하나님의 인격과 계획에 관한 믿음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신앙고백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이자, 여인이요, 창녀인 ‘라합’의 신앙고백을 빌어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
혹시 이런 것은 아닙니까?: “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창녀와 사귀어도 무방하구나. 그리고 거짓말을 좀 해도 괜찮겠구나.” 그렇다면 나의 지적 수준은 평강공주의 남편의 그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정보 수집을 위해서 보낸 두 정탐꾼이 가지고 온 정보는 그 지역의 형편에 관한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번에는 그 약속을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이 아니라, 이방인 창녀 ‘라합’이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세 번째로 “담대하고 강하라”는 메시지를 듣고 있는 셈입니다. ‘여호수아’의 반응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과연 하나님의 것이로구나. 싸울 필요도 없는 것으로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로구나. 정말 하나도 겁낼 필요가 없구나. 오히려 적들이 지금 혼비백산 두려워 떨고 있구나!” 지금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간의 대화를 주목해 볼 일입니다(12-21절). 대화의 내용은 2장의 핵심 주제는 아닙니다만, ‘가나안’ 주민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파멸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초지일관 이 전쟁을 거룩한 전쟁, 즉 하렘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가나안’ 주민들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적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가 본문 중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합’은 지금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 두 정탐꾼과 언약을 맺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성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12-13절). 두 정탐꾼은 언약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징표를 제공해 줍니다(14절). ‘라합’의 창문이 연해 있는 성벽에 매달려 있는 붉은 끈이 그것입니다(15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이 붉은 줄을 창가에 내걸어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출애굽” 유월절의 모티브입니다. 누구든 이 언약을 어기고 집 밖에 나가있거나, 아니면 이 줄을 치워버리는 날에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17-21절).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집행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2-3)
이처럼 우리는 세상은 물론 천사들까지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먼저 언약 맺기를 요구하고 있는 ‘라합’ 역시 이점에 있어 지혜를 겸비한 자라 아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두 정탐꾼이 제시하는 언약의 조건을 받아들였고(21절), 가족의 다른 구성원도 이를 받아들이도록 요청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처럼 항상 개인적이라 ‘라합’ 혼자서 대표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 위험하기까지 한 이 모험을 그대로 지켜야 했고, 실제 이 집 식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 성의 경찰 요원들이 다시 들이닥쳐서는 이전에는 없던 웬 붉은 줄인가 하고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도 귀찮게 물어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성 안에 살던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고의로 배제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붉은 줄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20절). 하나님의 선택은 이처럼 배타적입니다. 그렇다면 성의 멸망이나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대 왜 하나님은 이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약하고 완악한 쪽은 이들 거민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 역시 ‘라합’이 본 것을 보았고, 들은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배워서 마음이 녹고 정신이 혼비백산했습니다(9-11절).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혼비백산하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라합’처럼 반응하여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감사치도 않았습니다(롬 1: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의 정욕대로 불순종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가(롬 1:24), 그들의 머리 위에 더 큰 진노를 쌓아가셨습니다. 무려 40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들은 실로 핑계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신비한 섭리의 방법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3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롬 11: 11).
3. 귀환과 보고
두 정탐꾼의 귀환 보고는 이야기의 절정이자 결말입니다. 이들이 보고하고 있는 내용은 실은 ‘라합’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동안 반복해서 등장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담대함. 이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이자, 격려요, 위로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래 가자” 뿐입니다. 이들이 40년 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듣고 이처럼 행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래 동안 고민하고, 기도하던 문제가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화자는 이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라합’의 고백이나 두 정탐꾼의 보고를 통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전쟁을 위해서 정탐꾼을 보내는 ‘여호수아’의 행동을 중심으로 믿음과 행위, 은혜와 훈련, 약속과 책임 등에 관해서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