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7과
모세를 회상하며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3:8-33약 26분 분량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13:8)
흔히 우리나라에는 원로(元老)가 없다고 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에 빠져있을 때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지혜를 들려줄 국가적인 스승이나 어른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 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나 경제 지도자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아닌 가 여겨집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고 봉사했던 자들이 아니라, 반대로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 국가나 민족을 희생시켰던 자들로 기억에 남아있는 경우가 더 많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각 나라는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학교와 연구소, 기업과 정부 가릴 것 없이 구태와 타성을 벗어던지고 변혁과 구조조정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의 한 신문사에서도 특별 연속 기획으로 ‘살기 좋은 나라’를 위한 지상토론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당연히 국가의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난 20세기 벽두에 저질렀던 실패를 교훈삼아, 21세기에는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 분야에서 국가 발전을 저해하거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각종 제도나 조직, 인습이나 사고 체계들을 과감히 개선하고 혁파해야한다는 의견들이 지상토론회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이처럼 다양한 해법들의 핵심은 결국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양성과 전문성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국가의 미래가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갈구했던 이른 바 정의로운 사회가 전제되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꿈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위한 지도자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도덕성과 책임성을 갖춘 지도자를 가진 국가나 공동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모세’나 ‘여호수아’를 사모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쫓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봉사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언제쯤이나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동과 서로, 그리고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갈라진 이 민족을 하나로 묶어 위대한 국가 건설을 주도해 갈 것인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여호수아>의 제 2부를 시작하면서 ‘모세’가 정복하여 나누어주었던 ‘요단’ 동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화자도 마음속에 이러한 꿈과 소망을 품고 자신과 회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하며, 무슨 꿈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수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후 뿔뿔이 흩어져 그 정체성마저 상실한 채, 이방의 노예로 전전긍긍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실까요? 우리를 저 땅으로 데려가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할 모세와 여호수아를 닮은 영웅은 언제쯤이나 나타나겠습니까?
문학과 역사
문법적으로 본문은 앞선 8절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새로운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 화자가 왜 ‘요단’ 동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장황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책의 제 2부(13-19장)를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눈다면, 서론(또는 배경)에 해당하는 첫 번째 단락에(13:1-7) 이어, ‘요단’ 동편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와(13:8-33) ‘요단’ 서편 땅에 대한 긴 이야기가(14-19장)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원리는 12장의 형식과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기자는 그 땅을 언급할 때 ‘요단’의 동과 서를 별도로 취급하지 않고 나란히 연결시키고 있는데(12:1-6; 12:7-24), 이처럼 반복되는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화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고 간단해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네 개의 단락 중에서 처음과 마지막 단락이 서론과 결론의 기능을 하면서 마치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가운데 두 개의 단락은 나름대로 독특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서론(요약)(8-12절)
(2) ‘그술’과 ‘마아갈’과 ‘레위 인’(13-14절)
(3) 요단 동편 지역(15-31절)
(가) ‘르우벤’의 영토(15-23절)
(나) ‘갓’의 영토(24-28절)
(다) ‘므낫세’의 반 지파의 영토(29-31)
(4) 결론(32-33절)
화자는 서론에서(8-12절) ‘모세’가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게 할당해 준 땅 전체를 길게 개괄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남쪽의 ‘아르논’ 강에서부터 북쪽의 ‘헤르몬’ 산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다시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이르기까지 일곱 개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가) ‘아르논’ 강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 성읍(9절상)
(나) ‘메드바’에서 ‘드본’까지 이르는 ‘모압’ 평지의 남북(9절하)
(다) ‘에스본’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으로부터 뺏은 땅으로서 ‘암몬’과 ‘요단’을 잇는 동서의 지역(10절)
(라) ‘헤스본’과 ‘야르묵’ 강에 이르는 ‘길르앗’ 땅(11절)
(마) ‘야르묵’ 강에서 ‘헬몬’ 산에 이르는 ‘그술’과 ‘마아갓’ 사람의 땅(11절); (6) ‘레바논’ 땅에 있는 ‘헬몬’ 산 북쪽 경계(11절)
(바) ‘그술’과 ‘마아갓’ 땅의 동쪽 경계에 해당하는 ‘바산’ 땅. ‘바산’은 ‘옥’ 왕국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북으로 ‘아스다롯’과 남으로 ‘에드레이’의 두 도시에 도읍을 두고 있었습니다(11-12절상).
두 번째 단락은(13-14절) 두 가지 점에서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술’과 ‘마아갈’ 사람들에 관한 언급이 그것인데, 이들은 화자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적의 수중에 남아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땅의 분배와 관련해서 왜 이 두 지역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이외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레위’ 인에 관한 언급으로서, 이들 역시 ‘요단’ 동편 지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족속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본문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 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13절).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14절)
세 번째 단락이야말로 본문의 중심 내용으로서(15-33절),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차지한 지역입니다. 이 단락은 다시 각 지파가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따라 세 개의 작은 단락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가) ‘르우벤’의 영토(15-23절)
(나) ‘갓’의 영토(24-28)
(다) ‘므낫세’의 반 지파의 영토(29-31)
그리고 각 단락을 언급할 때마다 ‘모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형식상의 특징을 통해서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15절)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24절)
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29절)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32-33절) 전체 내용에 대한 요약내지는 결론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32절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 마치 합창의 후렴처럼 ‘레위’ 인에 관한 언급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단 동편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32절),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33절)
이곳에서도 ‘모세’의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화자는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일정한 형식상의 반복을 유지하고 싶은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언급하자면, 각 세부 단락은 ‘모세’가 각 지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언급으로 시작한 다음, 그 지역에 대한 추가 설명이 따르고, 각 지역을 보다 세부적으로 설명하는 방식 역시 일정한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각 지파의 땅의 경계를 언급하고, 이어서 지역 내 도시들을 망라한 다음,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함께 소개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르우벤’의 경우 그 경계는 ‘아르논’ 골짜기와 ‘아로엘’의 남쪽 끝에서 시작하여 ‘메드바’ 평지(16절), 즉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그 평지에 있는 ‘헤스본’과 모든 성읍들이라고 소개한 다음(16절하), 그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성읍들을 차례로 망라하고 있습니다(17하-20절). 그리고 각 도시들은 평지 내에 있으며 옥 왕국의 성읍들이라고 재차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 있으며(21절), 아울러 이들 성읍들에 대한 정복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21하-22절). ‘갓’의 지역을 언급하는 방식은 보다 다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지역의 경계는 ‘야셀’과 ‘길르앗’의 모든 성읍들이라고 소개하면서(25절상) 각 지역을 다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으로는 ‘암몬’ 땅의 절반 ‘암몬’의 수도 ‘랍바’ 앞에 있는 ‘아로엘’까지이며(25절하), 남으로는 ‘헤스본’에서 시작하여 ‘라마미스바’와 ‘브도님’까지이며(26절상), 북으로는 ‘마하나임’에서 시작하여 ‘드빌’까지 이며(26절하), 그리고 서쪽으로는 ‘르우벤’에게 할당하고 남은 ‘시혼’ 왕국의 땅으로서 ‘요단’에서부터 북으로 ‘긴네렛’ 바다까지입니다(27절). 마지막으로 ‘므낫세’ 반 지파의 경우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그 땅이 ‘마하나임’에서 북으로 ‘바산’ 왕 전 지역과 그 속에 포함된 ‘야일’까지 이른다고 설명한 연후에(30절), 이어서 그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후기처럼 덧붙이고 있습니다(31절). 이렇게 볼 때 31절은 21절하-22절과 형식상 병행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지역은 각 지파별 기업이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단지 ‘므낫세’ 반 지파의 소유에 대한 언급에 이르러 약간의 형식상의 변형을 꾀하고 있기는 합니다.
‘본문의 역사’ 즉 전승과 관련하여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보다 상세한 설명은 Butler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Butler, C. T.(참고도서 1, 158-160쪽).
신학과 신앙
1. 서론(8-12절)
<여호수아서>의 두 번째 중요한 주제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여호수아’가 따라야 할 지표나 모델은 무엇인가? 서론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8절)
이 선언은 땅을 나눔에 있어 따라야 할 대원칙으로서, 나머지 구절들은 부차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9-12절). 즉 과거 요단 동편 땅을 나눌 때 이스라엘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했던 것처럼, ‘요단’ 서편의 땅을 나눌 때도 그대로 적용하면 될 것이라는 시사입니다.
2. 그술과 마아갓(13-14절)
두 번째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첫 번째 단락의 교훈과는 정 반대 편에서 공동체가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 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13절)
이 책에서도 그렇고 이어지는 책 <사사기>에서도 그러하듯이(삿 1:19-36), 메아리처럼 반복해서 울려오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술’과 ‘마아갓’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모세’의 탁월한 지도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어찌된 영문인지 이 두 지역만은 미해결의 문제로 그냥 남겨두고 살아가고 있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서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통치 하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삼하 3:3; 10:6-14).
일을 하다말고 중단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여호수아’의 사후에 이스라엘을 큰 낭패 지경으로 몰아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삿 2-3).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더 이상 사역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그를 이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이 두 지역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도자를 향한 이러한 경고는 이 책이 끝나는 동안 계속적으로 들려오다가 <사사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삿 1-3).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 문제를 안고 살다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사기>의 첫 부분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태도를 나무라고 심판하려는 신학적 의도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런 암시를 느낄 수 있는 것이, 화자는 ‘갓’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차지한 땅이 기껏 ‘암몬’ 자손이 살던 땅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경은 야셀과 길르앗 모든 성읍과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와(25절)
후대를 위한 교훈으로 ‘그술’과 ‘마아갓’을 공동체 회중들에게 상기시켜주는 일은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어서 ‘레위’ 지파를 언급하는 것은 다소 뜻밖입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14절)
굳이 추측해 보자면, 내친 김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모두를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전에 ‘모세’를 통해서 주신 명령을 사항을 충실하게 따라야 함을 강조하고자 함인 듯싶습니다(민 18:20-24; 신 10:6-9; 18:1-5). 즉 ‘모세’의 가르침에 따르면,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사제로서 필요한 양식은 직접적인 경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단으로부터 공급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당연히 ‘레위’의 사역은 농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이러한 특별한 책임과 특권 때문인지 이들은 자신들만의 땅을 갖지 못하고 여러 지파들의 땅에 흩어져서 살도록 명령받고 있습니다(21장).
3. 요단 동편(15-31절)
1) 르우벤의 영토(15-21절)
주지하다시피 ‘요단’ 동편의 땅은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경우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일한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장자 ‘르우벤’의 영토에 관한 언급입니다:
15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16그들의 지역은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골짜기 가운데 있는 성읍과 메드바 곁에 있는 온 평지와, 17헤스본과 그 평지에 있는 모든 성읍 곧 디본과 바못 바알과 벧 바알 므온과(15-17절)
‘르우벤’이 취한 ‘모압’ 땅은 주로 ‘요단’ 남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경계를 긋자면 ‘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북으로 ‘헤스본’에 이르고 있습니다(17절). 그렇다고 해서 ‘르우벤’이 남북으로만 좁게 뻗은 지역을 차지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동쪽 변방에 해당하는 성읍들은 거명한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북에 걸쳐서 산재해 있는 여러 성읍들 중 ‘메드바 평지’(16절)에 관해서는 이미 9절에서 언급한 바 있고, 알다시피 ‘헤스본’은 ‘시혼’ 왕국의 도읍지였습니다(10절; 12:2). ‘시혼’은 ‘아르논’과 ‘얍복’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21:39; 민 32:37; 대상 6:81), 이 왕국의 땅의 대부분이 ‘르우벤’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헤스본’은 또한 여러 개의 위성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던 바, 그중 하나가 ‘아르논’ 북쪽에 위치한 ‘갓의 드본’으로 불리는 성읍으로서, 이는 ‘갓’ 족속이 이 도시를 요새화했다고 해서 부른 이름입니다(민 32:34).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서 이 지역은 다시 ‘모압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사 15:2; 렘 48:18, 22),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르우벤’ 족속은 일찍부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음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바못바알’은(17절) ‘바알의 산지’라는 뜻으로 ‘메드바’ 근처에 있었고, ‘발람’이 이곳에 올라 이스라엘을 저주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민 22:41). ‘벧바알므온’은(17절) ‘바알메온’으로 부르기도 하는데(민 32:38), 오늘날의 ‘마인’에 해당됩니다(렘 49:34). ‘르우벤’의 영토에 관한 언급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야하스와, 그데못과, 메바앗과, 기랴다임과, 십마와, 골짜기 가운데 산에 있는 세렛 사할과(18-19절)
‘야하스’는 ‘시혼’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가 패배를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데못’은 문자적으로 ‘동쪽 마을’이라는 뜻으로서, ‘시혼’ 왕국의 동쪽 경계에 가까운 ‘드본’으로부터 북으로 7.5 마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신 2:26). ‘메바앗’은 나중에 레위의 성읍이 된 곳으로서(21:37; 대상 6:79), 이 역시 동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렘 48:21). ‘르우벤’의 또 다른 도시로 거명하고 있는 세 성읍이 있는데, ‘기랴다임’과 ‘십마’와 ‘세렛사할’이 그들입니다(19절). ‘기랴다임’은 르우벤이 정복하여 요새로 삼았으나(민 32:37), 이 역시 후에 다시 ‘모압’의 땅이 되어버립니다(렘 48:1). ‘십마’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헤스본’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은 포도 재배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사 16:8-9; 렘 48:32). ‘세렛사할’은 본문에서 ‘골짜기 가운데 산에 있는’ 지역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요단 골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르우벤’의 나머지 영토는 다음과 같습니다:
20벧브올과 비스가 산록과 벧여시못과, 21평지 모든 성읍과 헤스본에 도읍한 아모리 사람 시혼의 온 나라라. 모세가 시혼을 그 땅에 거하는 시혼의 방백 곧 미디안의 귀족 에위와 레겜과 술과 훌과 레바와 함께 죽였으며, 22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23르우벤 자손의 서편 경계는 요단과 그 강가라. 이상은 르우벤 자손의 기업으로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과 촌락이니라(20-23절)
‘벧브올’(20절)은 ‘모세’가 고별 연설을 행한 곳이며(신 3:29), 또한 ‘발람’이 ‘브올’ 산 정상에서 예언을 발했던 곳이기도 합니다(민 23:28). 그리고 이곳은 ‘싯딤’으로부터도 그리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스라엘이 여기서 ‘모압’의 신 ‘바알브올’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민 25:1-3; 민 4:3). ‘비스가의 산록’에 대해서는 12:3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며, ‘벧여시못’은 문자적으로는 ‘초원지대’라는 뜻으로서, 아마 오늘날의 ‘사해’ 북방 근처에 있는 ‘텔 엘아제메’로 생각됩니다(참고 12:3).
2) 갓의 영토(24-28절)
‘갓’ 지파는 ‘요단’ 동편의 남북에 걸쳐 ‘르우벤’과 ‘므낫세’의 중간 지역에 자리 잡았습니다(민 32:33-36). 이 지역을 언급하는 방식 역시 ‘르우벤’의 경우와 유사합니다(15절).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고, 그 가족을 따라 그 땅을 나누어주었다는 표현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24절) ‘갓’은 레아의 종 ‘실바’를 통해서 태어난 ‘야곱’의 아들입니다(창 30:10-11). 이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요셉’의 예언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으며(창 49:19; 신 32:20-21), ‘에스겔’은 이들이 그 땅의 최 남방 지역을 훗날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겔 48:27-28).
‘갓’ 지파는 ‘요단’ 계곡의 동쪽 지역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으로 ‘길르앗’ 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면서 ‘얍복’ 강의 동쪽 한계까지 미치고 있었고, 북으로는 ‘요단’ 계곡이 ‘갈릴리’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부터 동으로 ‘마하나임’과 ‘라못-길르앗’까지 미쳤습니다:
그 지경은 야셀과 길르앗 모든 성읍과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와(25절)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명은 개별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길르앗’과 마찬가지로 ‘야셀’도 한 지역이자 동시에 그 지역의 도시의 이름이기도 합니다(민 32:1, 3). 두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지역은 ‘길르앗의 모든 성읍’으로서 ‘길르앗’의 남쪽 지방을 의미합니다. ‘길르앗’의 북쪽 지방은 ‘므낫세’ 지파에 속해있습니다(31절). 그리고 ‘암몬 자손의 땅 절반’은 ‘암몬’ 땅의 서편 경계로서 ‘아르논’ 강과 ‘얍복’ 강의 중간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 땅의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의 힘이 미치지 못한 지역입니다(신 2:19). ‘랍바 앞의 아로엘’. ‘랍바’는 ‘암몬’의 수도로서 요단에서 동으로 22마일 떨어져있는 오늘날의 ‘암만’에 해당됩니다만, ‘아로엘’이 ‘랍바’의 동쪽인지 또는 서쪽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로엘’은 ‘르우벤’ 지파의 땅에 속해있던 동일한 이름의 지명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두 절에서는(26-27절) 먼저 지역 내 여러 도시들을 일별한 다음, 이 지파의 서쪽 경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26헤스본에서 라맛 미스베와 브도님까지와 마하나임에서 드빌 지경까지와, 27골짜기에 있는 벧 하람과 벧니므라와 숙곳과 사본 곧 헤스본 왕 시혼의 나라의 남은 땅 요단과 그 강 가에서부터 요단 동편 긴네렛 바다의 끝까지라(26-27절)
두 절은 각각 남에서 북으로 나란히 두 번씩 이 지역 내 도시들을 개괄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헤스본’에서 ‘얍복’에 있는 ‘마하나님’까지이고, 또 한 번은 이와 나란히 ‘요단’ 골짜기의 남북을 따라 ‘벧 하람’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사본’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길르앗 라못’으로 부르기도 하는 ‘라마 미스바’는 도피성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20:8). 그리고 이웃에 있는 ‘브도님’은 오늘날 ‘키르벧 바네’이며, ‘마나하임’은 오늘날에도 그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한 곳입니다만, 아마도 ‘갓’ 지파와 ‘므나세’ 지파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30절). 이 지점에서 곧바로 ‘드빌’까지 연결됩니다. ‘얍복’ 강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두 도시가 있는데, 남쪽에 있는 두 도시는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벧 하람’과 ‘벧 니므라’이고, 북쪽으로는 ‘숙곳’과 ‘사본’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8절에서 이 영토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수미상관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 그 가족대로 받은 성읍과 촌락이니라(28절)
3) 므낫세 반 지파의 영토(29-31절)
‘므낫세’ 반 지파의 땅에 대한 개괄적 언급은 앞의 경우와 그 서술 방식이 동일합니다.
29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에게 그 가족대로 주었으니, 30그 지경은 마하나임에서부터 온 바산 곧 바산 왕 옥의 전국과 바산 경내 야일의 모든 고을 육십 성읍과, 31길르앗 절반과 바산 왕 옥의 나라 성읍 아스다롯과 에드레이라 이는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자손에게 돌린 것이니 곧 마길 자손의 절반이 그 가족대로 받으니라(31절)
이곳에서는 ‘므낫세’의 후손으로 ‘야일’과 ‘마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30-31절), <사사기>의 기록에 의하면(삿 5:14), ‘요단’ 서편 땅에 정착한 후손은 ‘마길’ 자손으로 보입니다. 이 지파가 차지한 지역은 ‘갓’ 지파의 북쪽 경계, 즉 ‘마하나임’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26절 참조). 그리하여 ‘옥’ 왕국의 ‘바산’ 전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야르묵’ 강에서 ‘헬몬’ 산까지 뻗어있습니다. 참고로 ‘바산’을 ‘옥’왕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참고: 12:5). ‘야일의 모든 고을 육십 성읍’이라함은 이 족속들이 모여 살던 일종의 천막촌들로 추측이 되며, 이 모두 ‘바산’의 지역내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므낫세’의 또 다른 후손 ‘마길’ 족속의 땅은 당연히 ‘야일’ 족속보다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길르앗 절반’과 ‘옥’ 왕국의 도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가 바로 그 지역입니다. ‘마길’이 ‘길르앗’을 정복하는 이야기는 <민수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민 32:39-40).
교훈과 적용
1. 서론(8-12절)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바뀌면 기존의 정책이나 정책의 우선순위에 큰 변동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념이나 정강 정책을 달리하는 정권이 새롭게 들어서면 변화는 개혁이나 혁명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기도 합니다. 전임자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작용한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미국에서 ‘클린턴’ 대통령에 이어 ‘부시’ 정권이 들어섰을 때, ‘부시’ 정권의 정책 기조가 ABC (Anything But Clinton)로 불릴 정도였다고 하니, 변화나 차별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도 이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차별성이 지나치다 보면 역사의 단절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모세’에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어떠했습니까? 특히 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여호수아’가 보여주어야 할 리더십은 어떤 것입니까?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아니면 기존의 지표나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따르지 말아야 할 교훈이라도 있었습니까? 서론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은 요단 동편에서 그 기업을 모세에게 받았는데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8절)
즉 과거 ‘요단’ 동편 땅을 나눌 때 이스라엘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했던 것처럼, ‘요단’ 서편의 땅을 나눌 때도 그대로 적용하면 될 것이라는 시사입니다. 이 선언은 땅을 나눔에 있어 따라야 할 대원칙으로서, 나머지 구절들은 부차적인 설명에 불과합니다(9-12절). 더 나아가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리더십에 대한 교훈은 시공을 초월한 것으로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교과서 삼아 충실하게 그 뒤를 좇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었고, 지도자가 달라졌다고 해서 이전의 약속들이나 원리들을 개혁하고 갈아 치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정치 분야에서 비일비재 합니다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모세’가 세워놓았던 원리는 하나님의 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하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1:6-8), 이 백성들 또한 순종과 헌신의 서약을 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1:18). 바로 이 점 ‘요단’ 동편에서 살게 될 지파들에게는 각별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 일까요?
만일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도자가 아니라면, 그에 이르러 역사의 단절이 생긴다면, 새 지도자가 나타나서 새 시대에 걸 맞는 개혁을 한답시고 ‘모세’가 했던 이전의 약속들을 폐기 처분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결속성은 지도자의 결속성에 있고, 이것은 결국 한 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의 땅이 이스라엘의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며, 서편의 땅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원리 위에서 출발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본받아야 할 교인과 본받지 말아야 할 교인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디서 살든 그들의 교과서로 삼아야 할 모범이 있다면 탁월한 하나님의 종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이만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을 탁월하다고 하는지 새삼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의 제 1부를 통해서 알 수 있었고, 제 2부에 들어서도 계속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용기 있는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행정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하나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 자들입니다.
2. 그술과 마아갈(13-14절)
그러나 교회에는 항상 본받을 만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받지 말아야 할 교인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아닐까요? ‘워어즈비’ 목사님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경계선 신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에 있는 일종의 완충 지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원이기는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늘 끊임없이 이방인의 군사적인 위협과 세속적인 문화의 유혹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삿 3; 10-11; 삼상 11:11; 14:47; 삼하 10-12. 결국 이 지파들은 이러한 적들의 이러한 위협과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고 맙니다(대상 5:25-26).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하나님과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적들을 몰아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종교적인 유혹에 굴복하고 말 것인가? 이러한 선택은 한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사는 동안 내내 직면해야 했던 문제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다른 지파들에 비해 일찌감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롯’이 그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는 순간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당위성과 현실 사이에서의 선택은 그렇게 간단하지 만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들 경계선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공동체의 관심사보다는 내 개인의 관심사가 늘 앞서며, 공동체의 유익보다는 나의 유익이 늘 앞서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 ‘그술’과 ‘마아갓’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늘 해야 할 일은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서 공동체를 괴롭히고 또 괴롭힙니다. 그 자신은 물론 지도자와 공동체 전체를 무기력하게 하다가 급기야는 허물어버립니다. 나는 어느 편입니까? 공동체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입니까? 공동체의 기도가 나의 기도이기도 합니까? 지도자의 근심이 나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3. 요단 동편(15-32절)
‘르우벤’의 영토는 주로 ‘모압’으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 화자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세’를 쫓아 그곳에 사는 ‘시혼’의 왕과 ‘미디안’의 귀족들뿐만 아니라(21절),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마저(22절)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21모세가 시혼을 그 땅에 거하는 시혼의 방백 곧 미디안의 귀족 에위와 레겜과 술과 훌과 레바와 함께 죽였으며, 22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21-22절)
이들의 행동은 아주 <여호수아> 전체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어,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찬할 만합니다.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즉 전투를 치른 후 그들의 선택에 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열심히 싸워 그 땅을 차지하고 보니, 딴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지체들과 함께 계속 싸워 언약의 땅으로 들어갔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곳에 눌러앉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넓은 평지가 목축지로서 아주 적합해 보였을 것입니다. ‘롯’이 이전에 탐을 냈던 곳이기도 하지요.
명색이 ‘야곱’의 장자로서 양보와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먼저 그 좋은 땅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영 체통이 서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가 늘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 교회는 장래가 뻔합니다. 이들이 땅의 중심도 아닌 변두리 지역에서 공동체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변두리 시민으로서 살아가기로 작정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일말의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명분이나 명예보다는 실리를 택한 것이지요. 이 점에 있어 그들은 ‘롯’이나 ‘에서’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이 운명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롯’이나 ‘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극으로 끝났다고 말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다른 지파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 그릇 죽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나,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삼촌을 버린 ‘롯’의 비극적 운명과 동일한 종말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요단’ 서편입니까 아니면 동편입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화자와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연상해 봅시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3. 나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