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는 선지자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9:8-17약 10분 분량
본인이 대구에 처음 와서 출석했던 교회가 현재 범어동에 위치한 “아멘교회”로서, 당시는 개척한지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작은 교회였습니다. 목사님도 삼십대의 젊으신 분으로서, 교회 부흥에 관해서 의욕이 넘치던 분이었으며, 나도 그 점이 좋아 그곳에서 대학-청년부를 맡아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교회가 조그만 건물 이층에 전세 들어 있던 터라 특별히 청년부 모일 곳이 없어 주일 오후면 우리 집에서 모였으며,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교회 청년부뿐만 아니라, 경북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우리 집에서 별도 성경공부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아내는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 돌보랴, 매주 열 서너 명 되는 친구들 저녁 식사 마련해 주랴 어려움이 여간 아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많이도 힘들고 고달팠을 것입니다. 그 덕분인지 청년부는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교회 목사님은 신바람이 나서 길목에 영어 성경공부 안내 현수막을 달아 우리 모임을 더욱 널리 알리려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내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훗날 목사나 전도사 또는 목사 사모가 된 제자들이 여럿 나오기도 했습니다.
내가 당시 그렇게 열심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그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철저하게 신봉하였고,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모 교회였던 미국의 ‘버클랜드’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배운 것을 이제 이곳 대구 땅에서 가르침으로써, 내가 배운 것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가고 있었습니다.
모임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새롭게 믿음을 시작한 사람은 교회 예배 시간에 서로 간증을 하려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권장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정 예수를 만난 자라면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여태까지 어둠 속에 지내다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새로우며, 신기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청년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역시 무엇이든 젊을 때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훈련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운명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새 포도주가 부글부글 끓어 넘쳐 포도주 자루를 터뜨리는 것이지, 묵은 포도주는 아무리 담아두어도 넘치는 법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새 신자들은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들은 쉽게 반응하며, 쉽게 결단하고, 헌신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새 신자를 만들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와보라!”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나는 지금도 늘 이런 경험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나를 새롭게 해주고, 내 믿음을 굳건히 해주며, 내 지식을 더욱 깊이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시시콜콜한 고민을 할 틈이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된 친구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큰 기쁨이고 자극이 됩니다.
맹인의 이웃.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자루에 담아두면 그 자루가 터질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참고. 막 2:22). 아니나 다를까! 나와 새롭게 변화된 청년들을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였겠습니까? 예수를 전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같은 교회 식구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신앙의 연륜이 꽤나 오래된 집사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왜 교회 놔두고 집에서 성경공부 하느냐?” “교회에서 무슨 분파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냐?” 등등의 불평이 줄을 잇기 시작합니다. 미움과 질시가 발동한 것이지요.
혹시 나는 이와 같은 미움과 질시를 받아본 적은 없습니까? 동료 교회 지체들로부터 말입니다. 만일 없었다면 죄송하지만 나는 참으로 한심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맹인의 이웃처럼 말이지요. 이 사람과 그의 이웃은 지금 각기 다른 이유로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기쁨과 환호로, 그의 이웃들은 투기와 질시로 말입니다. 아,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지금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안고 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이 사람을 연상해 봅시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그 아래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합니다. 아, 이것이 성전의 모습이었구나! 아, 내가 지난 시절 속절없이 앉아있던 거리의 모습이 이러했구나! 하늘이 저렇게 생겼구나! 저것들이 양과 염소란 말인가! 내 부모님들은 어떤 모습일까? 집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의 눈앞에 전개되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신기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의 이름과 의미가 무엇인지 일일이 다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한 시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달라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일념뿐입니다.
그러나 오, 통재라! 그의 이웃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연히 아무런 감동과 감흥이 없습니다. 새로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인생이란 그저 무미건조한 무성(無聲) 흑백 영화에 불과합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또한 오늘 같을 뿐이겠지. 늘 보는 그 성전, 늘 만나는 그 사람들, 늘 듣는 따분한 그 설교, 늘 반복되는 일, 대망의 그리스도가 오면 어쩔 것이며, 안 온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경이 눈을 뜨자 말자 처음 만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친절하고 다정한 이웃들이 선물과 면류관을 들고 자기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답고 포근한 꽃밭이 아니라, 가시와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보니 그동안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劣惡)한 상황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눈을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환난의 도구. 나는 정말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내가 두고 온 아름다운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 내가 거듭나 처음 간증을 하던 그리운 내 모(母)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예배는 얼마나 즐겁고 감동적이었던가! 설교 시작 전에는 꼭 누군가 간증 문을 들고 나와 읽었으며, 설교 후에는 늘 십 수 명씩 재 헌신이나 믿음의 결단을 하겠다고 강단 앞으로 나오던 그 장면! 그리고 회중석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모두들 기쁨과 감격과 부러움으로 이들 모습을 바라보고 박수치고 격려해주던 모습! 그들은 정말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가! 나를 전도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찾아주던 집사 부부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 성경공부와 친교를 나누던 아름다운 지체들! 나는 그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 다 때려치우고 이곳에 그냥 눌러앉아 살아?”
내가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과 같은 그곳, 나의 ‘갈대아 우르’였던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덴’의 동쪽과도 같았던 이곳 대구 지역의 교회와 교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내가 태어난 그곳 교회에서 어린 아이로 받아먹기만 하고 있지 않을까?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계속해서 모유(母乳)만 빨아먹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점차 모유가 맛이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질문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핍박을 피하여 뿔뿔이 각 지역으로 흩어지지 않았더라면, 기독교 선교가 가능했을까?
이야기 속의 맹인도 이웃으로부터 집중적인 질문 공세를 받지만 않았어도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간증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할 기회가 있었다 해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11절)는 말 외에는 할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그가 알고 있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의 간증은 지극히 짧고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간증은 충분히 강력하고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간증은 복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복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소개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는 한 가장 짧게 정의해 봅시다. 더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증거 내용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더 강력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가정이든, 기본이 튼튼하면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마 7:23-27). 그의 간증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기본에 충실하면 응용과 적용이 가능해집니다. 기본이 부실하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8-23)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환난이나 박해가 닥치거나, 또는 세상의 재물이나 유혹이 왔을 때, 쉽게 쓰러져 버립니다. 대개 내가 간증이나 전도를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상대방의 조롱이나 박해나 멸시가 두렵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력한 증거는 반드시 환난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 즉 세상이 나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 말입니다.
하지만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될 수가 없을 진대(마 10:29), 복음 전도에 내가 만날 환난이나 핍박도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가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직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 기본체력을 튼튼하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모가 부모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자녀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강력하고 효과적인 복음 전도는 강력하고 집중적인 저항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차가 빨리 달릴수록 바람의 저항이 커지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요? 바람의 저항이 커진다고 차를 멈출 수야 없겠지요.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한 더 힘 있게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숙의 도구. 하나님께서 이웃의 조롱과 멸시를 허용하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이 맹인은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이 그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웃과의 논쟁을 통해서, 그리고 뒤에는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을 듣고 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는 선지자니이다”(17절).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심문을 통해서 그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참고. 33절).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영혼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38절).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났던 그 기적이 마침내 이 사람에게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 여인이 한 ‘유대’인 남자에서 “그 선지자”를 거쳐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만난 것처럼, 이 남자 역시 그분을 만난 것이지요. 하지만 ‘유대’인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반쪽짜리 지식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자”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3:2). 기적의 이면(裏面), 즉 표적을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심판관과 심문자로 앉아있는 ‘바리새’인들은 불행하게도 ‘니고데모’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사마리아’ 여인이나 맹인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처음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의심합니다(16절). 그리고 기적에 의문을 제기하다가(18절), 예수님을 죄인이라 칭합니다(24절). 더 나아가, 그 출생을 알 수 없는 무식한 자라고 단언합니다(29절).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 소경으로, 그리고 죄인으로 선고받기에 이릅니다(41절).
이야기 속의 두 주인공의 운명이 어쩌면 이렇게 엇갈릴 수 있을까요?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었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겨 버렸으니 말입니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이처럼 갈라놓았을까? 나는 지금 어느 쪽인가?
담대해야 할 이유. 내가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단순히 교회 부흥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 부흥은 전도의 결과인 것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인생에 소금과 빛을 뿌려주겠다는 강렬한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선물이 되겠다는 욕구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저 사람의 인생이 주님에 의해서 재창조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나 충동이 없으면 복음 증거는 사실 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동기는 때로 저항과 조롱과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장과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는 사생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