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21-24약 7분 분량
본인이 오래 전 박사 학위 과정 중에 있을 때, 내 지도교수께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화학은 머리보다는 손과 발이 부지런해야 하는 거다.” 이 말씀을 어찌 화학에만 국한할 수 있겠습니까! 이공계열의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선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오랜 과학․기술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구미(歐美) 제국들은 이 원칙에 충실해 왔기 때문에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지금 전국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리나, 화학이나, 생물 등과 같은 자연과학 분야의 교육에서 실험과 실습은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학생들은 이들 과목을 교과서로 배울 뿐입니다. 손과 발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보다 경제적인 원인이 가장 크다 할 것입니다. 실험을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장비나, 장치나, 시설이나, 재료 등에 필요한 돈 말입니다. 학교나 나라나 재정이 충분치 않습니다. 하지만 실은 이보다 더 큰 원인이 있습니다. 학부모나 학교가 이를 원치 않습니다. 왜일까? 대학입시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머리 싸매고 달달 외우는 공부를 해야 되는데, 한가하게 실험이나 하면서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 자연과학 과목에서 소리와, 냄새와, 색깔과, 감촉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컨대, 화학 원소들은 오직 주기율표 안에만 있을 뿐입니다.
대학이라고 형편이 나을까? 중고등학교 시절에 못 해본 실험과 실습을 이공계 대학에 오면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을까? 그렇지 못합니다. 본인이 속해있는 화학과에서도 대부분의 화학 과목들을 순전히 책으로 가르치고 배웁니다. 물론 실험 시간도 있기는 하지만, 실험실이라고 가보면 썰렁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수나 학생도 실험에 대하여 교실 수업에 비해서 별다른 흥미나 관심이 없습니다. 중고등 학교 시절에 제대로 해 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잘 하지도 못합니다. 과학은 그저 따분하고 지루할 뿐입니다. 온갖 수식과 외워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수준과, 관심으로 대학원이나 기업에 가면 잘할 수 있을까?
본인도 이런 수준으로 삼십여 년 전에 박사 학위를 따겠다고 외국 유학을 가지 않았겠습니까! 결과는? 처음 한동안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습니다. 실험실에 불을 내는 등, 참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사고도 많이 저질렀지요. 내 지도교수께서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았을까요? 그동안 과학을 순전히 머리로만 해온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손과 발은 그냥 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내 눈과, 코와, 귀는 있기는 했으나 실상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체험과 관련한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보기로 하지요. 나는 꿀맛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있을까? 오렌지 맛이 어떠한지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에게 무어라 대답해주어야 할까? 질문은 또 있습니다. 농사를 책으로 지을 수 있을까? 운동을 책으로만 가르칠 수 있을까? 자동차 운전 매뉴얼이 나를 대신해서 운전을 해줄까? 교과서나 선생님이 내 대신 공부를 해줄 수 있을까? 병원이나 의사가 내 병을 대신 감당해 줄 수 있을까? 진열대 위의 식품들이 내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교회나 목사가 내 대신 신앙생활을 해줄 수 있을까? <성경>이 내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
하나 같이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있음을 압니다.
약속.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나 지금이나 늘 듣는 이로 하여금 당혹스러움과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강의를 평가절하 하거나, 도전적인 질문으로 일관합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될 일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처럼 힘든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지요. 마치 바퀴벌레가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달아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고약한 냄새를 내뿜거나 독침을 쏘면서 달아나듯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왜 이처럼 항상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가르침을 수용할 의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용할 의사가 없으니, 일견 거룩한(?) 신학적 질문들로 그분을 평가절하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식의 질문 말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맞아?” 이에 대해서 그분은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7:17).
무슨 말인가요? 이 문장은 조건 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려 하면”.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보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손과 발로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신학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고, 생생해진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는 예비 어머니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출산을 통해서 진정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지요. 머리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말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 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조만간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인데,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게 될 것은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입니다(19절).
세상은 볼 수 없고 제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제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새로운 관계, 즉 한 차원 높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 화자에게 있어 “알리라”, “보리라”, “살리라”는 실은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사도들은 이를 이해했을까? 다시 한 번 “오해”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유다’가 대표주자로 나서고 있습니다(22절). 그의 질문의 요지인 즉은, “세상은 왜 그분을 볼 수 없습니까?”입니다. 아마도 그는 세상이 깜짝 놀랄 하나님의 또 다른 현현(顯現)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볼 수 있는 ‘메시야’의 출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나타나서 능력으로 나라와 민족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관계”는 비가시적인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관계란 “대 연합”,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활의 절정은 최후의 심판 날까지 미루어지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나 지금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는 이 약속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실언(失言)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명. 그 약속이 당시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 대해서도 이루어졌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대해서도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맛볼 수 있을까?
그분의 약속을 듣고, 읽은 것으로 가능할까? 이 일에 나의 손과 발은 필요 없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두 번은 긍정으로, 한 번은 부정적인 선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즉 과연 무슨 수로 아버지와, 아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있음을 느끼고 확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번에도 역시 조건부입니다. 즉 “나의 계명을 지키려 하면”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켜보면”입니다. 여기서 계명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새로운 차원에서 항상 새롭게 하나님과 그 아들을 만나고, 알아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만(참고. 3:16),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15절). 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21절).
우리는 이 두 말씀이 결국 같은 것임을 알 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것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23절).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선포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든 신자들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삶에 내재(內在)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만, 우리는 반대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일 사노라.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20절).
이번에는 ‘유다’가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여전히 그는 어둠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나도 익히 알고 있으며, 매일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그 사실을 대 사도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니요! 그렇다면 언제 그의 눈이 밝아졌을까요?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단락을 통해서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