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시간과 영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1-10약 8분 분량
아무리 인기 좋은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인터넷 상에는 소위 “안티 팬”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그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험담하고, 때로는 저주까지 퍼부어댑니다. 이를 견디지 못하면 그 연예인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님의 인기는 사뭇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이전에도 이런 저런 기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로 인해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계기로 그분은 ‘갈릴리’는 물론 유다 온 지역에 유명 인사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기 원했고, 그가 있을 만 한 곳을 찾아 떼를 지어 몰려다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기만큼이나 적대 세력도 늘어만 갔습니다. 급기야는 그를 죽이려는 무리들도 생겨났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갈릴리’ 고향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일종의 은둔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분의 형제들마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왜 시골구석에 박혀 있느냐는 것이지요. 아마 그분께서 대중의 눈에서 사라져 있는 동안 인기가 다소 수그러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화려한 기적 쇼를 펼쳐야만 할 것처럼 보입니다. 인기 만회를 위해서 말이지요. 요즘 막장 드라마에서 자주 쓰는 수법입니다. 드라마의 인기가 떨어질라 치면 갑자기 새로운 인물을 투입하여 원래 대본에는 없던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수법 말입니다.
과연 이들이 형님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염려했을까? 형님의 인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영향력이 사라질 것을 더 염려했던 것은 아닐까? 형님의 후광(後光)을 입고 자기들 이름을 높여볼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십중팔구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즉 예수의 이름을 빌어 권력이나 명예를 자기 소유로 삼는 일말입니다. 얼마 전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유명한 목사님이 회장에 당선되기 위해서 돈을 썼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왜 돈을 썼을까요? 예수님의 동생들과 같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들 동생들에게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탐욕보다 더 심각한 “무지와 불신”입니다. 우리의 화자도 노골적으로 이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형님이 누구인지 몰랐으니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요구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태도가 무지와 불신의 소치(所致)일까요? 설명이 좀 필요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두 번씩이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것일까? 그 “때”가 과연 언제이기에 동생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는 것일까?
결단의 때. 사람들은 무슨 중대한 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을 언제 할 것인가를 놓고 망설이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언제 이사를 해야 할지, 언제 결혼을 해야 할지, 언제 투자를 해야 할지, 언제 투자한 것을 회수해야 할지, 전쟁에서 언제 적을 공격해야 할지...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인생은 온통 결단과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결단과 선택을 위해서 사람들은 때로 점쟁이를 찾기도 하고, 토정비결을 보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소위 “그 때”, 즉 “결정적인 순간”을 놓고 금식을 하거나 작정 기도에 돌입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결단의 순간을 놓고 고민하며 망설이는 데에는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의 선택이나 최선의 순간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전도서>도 이러한 믿음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
이러니 누가 그 때를 미리 알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 “때”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누가 그 “결정적인 순간”을 결정하는가? “운명”이 그 주인공일까? 이것은 “헬라’식 사고”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무심코 이 사고에 동의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운명의 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속에는 운명이 우리 인생의 주인공임을 받아들인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운명의 순간이 예수님이 말하는 자기의 “때”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때”는 그분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운명이 결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이러한 사고는 <성경>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즉 “성경적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 사실 예수님의 생애는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역시 하나 같이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그것이 <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2-23)
나중에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다시 한 번 이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벧전 1:18-20)
예수님의 전 생애, 특히 그분의 죽음이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실행하셨으며, 궁극적인 책임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동원된 인물들, 즉 ‘가롯 유다’나, ‘유대’ 당국이나, ‘빌라도’나, ‘로마’ 병정들은 한낱 조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역사적 드라마의 제작이나 연출에 기여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예수님에게 죽음의 판결을 내리셨고, 판결 후에는 판결석(判決席)에서 내려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함께 고통 받으셨고, 자신이 내린 그 모든 형벌을 함께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늘 함께였습니다. 화자는 서막 첫 구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면, 그 일들이 일어난 시간들 역시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동생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무시하고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들이 말하는 그 때란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항상 준비되어있다는 말은 아무 때에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때이며, 아무 의미도 없는 때입니다. 그저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주권. 하지만 예수님도 결국에는 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나요? 며칠 후 ‘예루살렘’으로 은밀하게 갔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일은 이전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있기는 했습니다(2:4). 두 경우 모두 예수님께서 비록 마지못해서이긴 하나 결국 동생들이나 어머니의 요청을 들어주신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해입니다. 다시 한 번 화자의 진술을 들어보지요: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9-10절).
화자의 메시지는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두 가지 점에 있어 그렇습니다. 즉 예수님은 형제들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시간표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의 시간표에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요구했던 공개적인 방식이 아니라 조용히 은밀하게 갔습니다.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절대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아무도 그에게 언제, 어떻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그 소설의 작가더러 소설 속으로 들어오라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소설 속의 시간표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을 통제하고 조절합니다. <창세기> 1장은 시간과 공간은 창조된 것이며, 우리 또한 그 시공(時空) 속에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여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물의 형태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의 속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불학정의 원리”라 부릅니다. 다른 경우를 예를 들어봅니다. 자연계에는 너무 빨리 일어나거나, 반대로 너무 늦게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촬영과 상영 기법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나 올챙이 알이 부화하여 개구리가 되는 과정 등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육안(肉眼)으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들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저속(低速)촬영의 기법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로켓이나 총알등과 같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고속(高速)촬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일하시는 방식도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시간표에 따라 그분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이 때로는 너무 빠르거나 때로는 너무 느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언젠가 그분의 관점에서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해달라는 것일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