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4약 9분 분량조회 2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그가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고 계시며,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인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인은 이 세가지 질문은 그 내용 못지 않게 순서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서가 잘못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참으로 진기한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없는 크리스마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변론하려 할 때, 이 세가지를 차례대로, 정확하게, 그리고 인내심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본인은 첫 번째 질문에만 국한해 보려 합니다. 그것도 공관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려 합니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그의 독자들을 영원 이전, 즉 태초 이전의 상황으로 이끌어갑니다. 태초에 누가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태초, 즉 시간과 영원이 맞닿는 태초, 삼위(三位)의 우주가 시작되던 그 태초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있기 이전의 태초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습니다만, 화자의 관심사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것은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계시를 통한 믿음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합리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화자가 이 서막(prolog)에서 예수를 설명하기 위하여 기울이고 있는 노력이나 문학적 솜씨는 그야말로 탁월합니다. 그는 네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를 노래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네 개의 단어는 모두 영어 자음 ‘L’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시인이 “이합체 시”를 쓰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의 대화를 시도함에 있어, 자신만이 알고 있는 단어나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은 ‘레이건’을 ‘루스벨트’ 다음으로 가장 탁월한 대통령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그가 가진 위대한 전달자(communicator)로서의 능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아주 어렵고 전문적인 정치∙경제 용어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 어떤 단어들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에서 우리가 수시로 사용하는 종교적 단어들에 대해서 아주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 “구속”; “옛 언약”; “속량”; “선교.” 바로 이런 점에서 화자의 의지와 노력이 귀감을 삼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선택했다는 것이지요. 당시 요한 공동체가 ‘헬라’적 배경과 ‘유대’적 배경을 지닌 다양한 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로고스’는 분명히 이들 두 독자층에서 각 개인의 지적∙종교적 배경에 따라서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단어였을 것입니다. ‘헬라’적 배경을 가진 독자라면 “전지전능한 지혜, “조물주”, “만물의 이치나 원리”, “초자연적 힘” 등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히브리’적 배경을 가진 독자였다면,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하나님의 창조 행위”, 또는 “하나님의 지혜” 등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화자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열정(pathos)입니다. 그는 마치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헬라’ 철학자들과 더불어 열렬이 논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씨름하고 있는 ‘바울’을 연상시켜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세상을 향한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화자나 ‘바울’이나 지식과 사랑을 겸비한 탁월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나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이제 화자가 밝혀주는 ‘로고스’ 즉 “말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화자의 ‘로고스’ 송(頌)은 시적 아름다움과 역설 그 자체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존재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2절). 어떻게 이런 존재 방식이 가능한지는 우리의 이해와 상상 밖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분명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있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든 영원한 속성을 함께 누려야 할 것인즉, 따라서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로고스
그가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는 단어는 ‘로고스’(Logos)입니다. 즉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 “그는 로고스다”입니다(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조금 후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단어가 현대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문 분야를 표기하는 영어 단어의 끝에 어미(語尾)처럼 붙어 다니는 ‘-ology’가 여기서 파생한 것입니다(예: biology; sociology; theology; 등등). 그런 점에서 화자가 이 개념을 도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으며, 그의 의지와 노력과 창조적 상상력은 귀감으로 삼을 만합니다.
주님(the Lord)
아무튼 “로고스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선언을 통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만일 ‘로고스’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다면,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그 교제의 성격이나 질(質)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냥 침묵하며 각자 다른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지냈을까? 마치 오늘날 별거한 부부가 두 대의 TV를 사서 각자의 방에다 놓고 다른 프로그램을 보며 살듯이 그렇게 지내고 있었을까? 서로에 대한 관심이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지내고 있었을까? 이런 부부 사이에 자녀가 탄생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지 않는 부부는 결코 같은 방을 쓰려 하지 않을 것이며,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면 자녀가 태어날 리가 없습니다. 자녀의 탄생은 사랑의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천지 창조는 어떠합니까? 단순히 ‘로고스’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두 분 사이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이런 식의 유비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자와 성부 사이의 교제는 분명 말할 수 없는 친밀함과,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대화하고, 사랑했으며, 그리고 계획과 비전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격려가 있었으며, 비전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런 교제를 “영원한 언약”이라 부릅니다. 결론적으로, 천지창조는 이 모든 행위들의 장엄한 오케스트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런 묵상 가운데 화자는 ‘로고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그러니까 예수는 창조주이면서, 창조의 매개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창조주라면, 당연히 그는 만유의 주인이자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이처럼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는 곳도 드문데도, 역사적으로 이 문제는 수없이 많은 논쟁을 낳았고,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은 이 구절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낳으신 아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그는 하나님이자, 창조주이자, 따라서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교제와 창조에 관한 우리의 묵상은 교회 내에서 성도 사이의 교제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런 교제가 있으며, 창조가 있습니까?
생명(the Life)
창조는 단순히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창조만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창조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파스퇴르’(L. Pasteur)가 그 유명한 “자라 목 실험”에서 발견한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인과율(因果律)로서,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진화 생물학에서는 이런 식의 인과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화자는 현대 과학적 주장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니다. 그 또한 생명은 반드시 생명을 주는 자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고스’에 대하여 이어지는 선언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4절상).
예수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원천이라는 선언입니다. 그가 생명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생명이 없었다면,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가 없었다면, 창조의 결과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무기물로 가득 찬 천지창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장면이 보여주고 있는 “공허하고, 어둡고, 그리고 온통 죽음의 물로 가득 찬 지구”의 모습 바로 그것이겠지요(창 1:2).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생명은 죽음과 함께 <요한복음>에서 핵심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좁게는 “영생”을 의미하며, 보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니까 화자에게 있어 영생은 단순히 사후 천국에 가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누려야 할 신자의 당연한 특권이자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에 속해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즉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끊어진 자는 이 생명이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로고스’와 하나님 사이에 지속적인 교제의 결과가 생명의 창조로 나타났다면,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교제 역시 동일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영생을 갖기를 원합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빛(the Light)
화자는 또한 생명은 빛을 떠나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하). 자연계에서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만들어지는 유일한 과정이 광합성(光合成)입니다. 대부분의 식물은 이 광합성 즉 빛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로고스’가 생명이자 동시에 빛이 되기도 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요한복음>에서 또 하나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서, 빛이 영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반대로 어두움은 영적인 무지와 상실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공회원들과 함께 한 밤중에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강론을 듣고서 밤 중 어둠 속으로 슬그머니 빠져 나가 그의 선생을 팔아넘깁니다. 예수께서 체포되던 날 밤에 ‘베드로’는 추위와 두려움으로 타오르는 모닥불에 앞에 앉아 불을 쬐면서도 세 번이나 그의 사랑하는 선생님을 부인한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안식일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바퀴벌레와 같은 미물들은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도망하려 합니다. ‘니고데모’도, ‘안나스’도, ‘가롯 유다’도, ‘베드로’도 모두 빛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었던 세상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나는 빛 속에 있습니까? 빛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까? 또는 빛이 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