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한 목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0:7-18약 10분 분량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두 은유는 “양의 문”과 “선한 목자”입니다. 서로 상반된 은유 같기도 합니다만, 이는 예수님의 인격이나 사역의 이중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자동차의 두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분을 “대제사장”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희생 제물”로 그리고 있으며, 이곳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가 하면(1:29), <베드로서>는 그분을 “목자 장”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벧전 5:4).
“선한 목자”는 <요한복음>에서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ejgwv eijmi), 즉 “나는...이라”는 선언의 네 번째에 해당하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단순히 윤리․도덕적인 “선”(善)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황홀한”, “고상한”, “참된” 등의 의미가 더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이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 부를 때 느껴지는 색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라 부를 때와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까?
예수님 스스로는 어떤 호칭을 더 선호하셨을까?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불렀을 때, 그분은 그를 핀잔하시면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교정해 주셨습니다(참고. 막 10:17-18).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선과 악, 또는 윤리나 도덕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체험과 교제의 영역임을 일깨워주시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청년이 하나님을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는 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니고데모’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참고. 3:2). 한 ‘달란트’를 받아 땅 속에 그냥 묻어둔 어느 종과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종의 눈에 비친 주인의 모습은 “마음이 굳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었습니다(참고. 마 25:24).
즉 아주 딱딱하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며, 계산에 능숙한 주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종은 그러한 주인이 두려워서 ‘달란트’를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땅속에 묻어둔 것입니다. 행여나 이자 남기려고 사업에 투자했다가 손해 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누군가에 대해서 “아름답다”거나 “고상하다”할 때는 그 사람의 맛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취향이나, 인격이나, 색깔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랜 만남과 사귐의 결과로 체득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 사람에 관한 책을 읽었거나, 누군가로부터 들어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인 것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지식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서, “아름답고 고상하며 참되신 나의 목자님”하고 부를 때 나는 이미 그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지금도 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선한 목자”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흥분으로 뛰고, 그러면서 죄송하기도 하고, 동시에 감격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양의 목자로서 하신 일이 나를 울타리 밖으로 “불러내어”, “인도하고”, 또한 “앞서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참고. 3-4절). 이는 그분의 보살핌과 양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일이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앞서가는 이 목자가 어디를 그렇게 열심히 가고 있는 것입니까? 어디를 향해서 그렇게 가고 있을까요?
목숨을 버림. 죽음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11, 15, 17, 18절). 그것도 거짓 목자와 대조해서 언급하고 있어 목자의 참 모습을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거짓 목자는 어려움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양들을 내버려주고 걸음아 날 살려야 하고 도망치는 자라고 말합니다(12절). 그러니까 참 목자는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가르치고, 양육할 뿐만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합니다.
그것도 억지로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원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17절);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절). 그분의 자발적이고 주권적인 의지가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를 놓고 우리는 여러 공범들을 거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 “로마 병정들”; “유대 공회”; ‘본디오 빌라도’; ‘유대’인들; 등등. ‘존 스토트’ 목사님도 이점에 관해서 그의 대표작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한 장(章)을 할애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지금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죽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과 관련해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책임자는 성부 하나님이시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동서고금에서 영웅호걸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예수님의 때 이른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는 그분의 죽음이 창세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도 바로 이 죽음을 위해서라고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바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바대로, 예수님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구상에 태어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제주도의 한 목장에 가서 목자 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쓸데없이 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백성의 죄”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대속적”(代贖的) 죽음이라 부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양들을 대신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은 또 한 편으로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설령 누가 그렇게 했다 한들 하나님의 마음을 결코 만족시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속”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구조건을 스스로 충족시키고, 만족시킨 행위이기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대속”은 “자기희생”(self-sacrifice)과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이라는 양면의 동정과 같다 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공의(公義)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스스로를 죽였다는 말인가? 우리가 대속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이 같은 결론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한 목자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양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누구를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속의 한계 내지는 범위를 알게 됩니다. 어려운 용어를 빌자면 소위 “제한 속죄론”(limited atonement)이 그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양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양들의 수가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수는 얼마나 될까? 소위 말하는 144,000일까? 나도 그 속에 들어있을까? 누가 그 속에 들어있을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들 질문 중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도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사실이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듭니까? 아니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됩니까?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우리네 잠언이 이 경우에 얼마나 합당하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누가 양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고, 엿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롯’과 함께 ‘소돔’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할까? 과연 그는 구원을 받았을까 아니면 받지 못했을까? 우리들 중 십중팔구는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평가는 다릅니다. 그는 전혀 다르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신약>은 그를 “의로운 롯”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가롯 유다’는 어떻게 할까요? 과연 그는 예수님의 양이었을까? 예수께서는 그를 향하여, “마귀”로 부르고 있습니다(참고. 10:70-71). 이처럼 우리는 목자 장 예수께서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내가 그분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서로를 앎.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4-15절).
누군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 내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것, 남에게 내가 알려진다는 것, 우리 모두가 병적일 정도로 집착해 있는 것들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난무하는 그 수없이 많은 글들도 결국 한 가지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는 참으로 치유가 어려운 질병입니다.
이것도 부족함인지 또 다른 집착 증세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정신적인 관음증이라 부르고 싶은데, 타인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호기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인터넷 상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습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유명인에 대한 끝도 한도 없는 유언비어나 괴담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컴퓨터를 켜서 처음 뜨는 인터넷 창을 우리 학교 홈페이지로 해놓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내용들로 가득 찬 상업용 창들을 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들 질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공허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상태를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오, 주님.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결코 쉼이 없겠나이다.” 그의 진단은 정말 예리하고 정확한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우리는 혼자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관계 속에서 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아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나님께서는 보신 것입니다. ‘아담’에게 공동체 즉 교회가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담’ 목장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아담’은 “황야의 무법자”나 ‘람보’로 살도록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속칭 “예배만 드리고 가는 양”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의 목장도 없고, 목자도 없으며, 그렇다고 내 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해 혼자 멋대로 살아갑니다. 혼자 와서 풀을 뜯어먹다가 돌아갑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전도하며, 혼자 말씀 묵상합니다. 다른 양들이 <신약> 묵상할 때 자기는 <구약> 묵상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혼자 은혜 받았다고 야단입니다. 느닷없이 간증이나 헌신하겠다고 뛰쳐나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며, 선교사가 되겠다거나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교회를 소란하게 합니다. 정말 골 때리는 양입니다.
아, 불쌍한 양! 이 양은 지금 자기 이름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절).
양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4-15절).
예수님은 나를 부르실 때 나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양은 다 같은 양이며, 소는 다 같은 소, 염소는 다 같은 염소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에게 있어 나는 어느 양과도 구분되는 독특하고도 유일한 한 마리의 양입니다. 그분은 나를 다른 양들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르다고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어느 누군가와 같아질 수가 없고,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는 넓은 그 길을 보며 좁은 길을 걷고 있는 나에 대해서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다른 교회와 같이 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 교회는 그 교회의 이름이 있고,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의 이름이 있을 뿐입니다. 그저 그분은 나에게, “너 자신이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향해서 “<우리 교회>가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 목장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내 목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 양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