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먹지 않아도 배부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31-34약 9분 분량
오해. 여인이 무대에서 사라지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들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를 못합니다. 대신 그들이 가지고 온 빵을 내밉니다. 바로 이 장면이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장면이 주는 수사적(修辭的) 효과를 음미해 보는 것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대조를 통한 “오해”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이 대조되고 있습니까? 여인의 충격과 제자들의 충격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버려두고 간 물동이와 제자들이 가지고 온 빵이 대조적입니다. 화자는 이들 대조를 통해서 제자들의 영적 무지, 즉 “오해”를 드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여인이 급하게 달려가고 있는지,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예수님 앞에 빵을 내밀어 잡수시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에게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누군가 그분에게 이미 먹을 것을 갖다드렸는가 하며 서로에게 물어봅니다(33절).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영적 수준이 ‘니고데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오해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제자들은 더욱 헷갈립니다. 오해가 풀리기는커녕 더욱 깊어만 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과연 무엇일까? 배고프지 않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뜻. 먼저 예수님의 양식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순서인 듯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그분의 양식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앞날의 계획을 세울 때, 직업을 선택하고자 할 때,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사업 상 투자를 하려 할 때 등등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기도하며 필사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투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분의 뜻이 드러날 경우에라도 그 뜻에 따르기보다는 내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대단히 불행하지만 우리에게는 진정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뜻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제자들이 주는 빵처럼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만족만 줄 뿐일 것입니다. ‘수가’ 성 우물가의 물처럼 아무리 먹어도 항상 목마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잡수신 빵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슬리 뉴비긴’의 말대로 예수님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배고픔만이 그분을 압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중적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일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배고픔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또 한 편으로는 지금 당장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니 배고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환희와 감동으로 춤추며 달려가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현재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너무 기뻐 밥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 역시 이러할까요? 나 때문에 즐거워서 밥 먹는 것도 잃어버릴 정도로 행복해 하고 계실까요? 예수님과 같은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때문에, 즉 나의 증거로 인해서 그 인생이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 낳은 영적 자식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자식 걱정입니다. 자식에게 무엇을 해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받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더 주지 못해 안달입니다. 처녀와 어머니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주는 차이입니다. ‘사탄’이 언제 타락하였을까? 그 마음속에 만족이 없을 때, 즉 자기 뜻을 구하려 했을 때입니다. <성경>은 사탄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않습니다만, <에스겔서>에서 중요한 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에스겔서>에 따르면(겔 28:12), ‘사탄’은 원래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였으며,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그는 더 바랄 것이 없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왕이었고, 모든 피조물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3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3-14)
다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가진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 자기의 위치나 신분에 대해서 한 번도 만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늘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위 두 문장에서 “내가 하리라”는 구절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뜻을 이루리라”는 장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이사야>의 말입니다:
11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1-12)
<에덴 이야기>에서도 ‘사탄’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3:14).
완벽한 조건 하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살아가던 ‘아담’을 타락시킨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이 주는 아이러니는 ‘아담’이나 ‘사탄’이나 공히 분에 넘치는 만족을 구했으나 보상으로 받은 것은 끝없는 목마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신 것은 결코 ‘사탄’이 구한 것과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는 하나님의 양식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6-10)
‘사탄’이 자기를 높여 자기 뜻을 이루려 하다가 비참하게 낮아졌으며, 타인들마저 비탄 속에 빠뜨렸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고, 그 결과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으며,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가져주었습니다.
온전히 이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아셨고, 그 것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온전히 이룬다” 함은 “끝까지 완수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시작하였으며 어떻게 그의 생애를 마감하셨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중보”.
나는 어떻습니까? 시작은 하였으나 끝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는 않습니까? 망대를 세우다 말고 그만 두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눅 13).
본인도 시작은 하였으나 끝내지 못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면, <창조교회> 설립과 도중하차가 그 일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당시 교회 식구들은 모두들 마치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듯 그렇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또 있습니다. 수 년 뒤에 <버클랜드-대구교회> 창립 시 공동 담임 목사로 참여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두고 나와 버린 일이 그것입니다. 이 일 역시 좀 더 인내하며 견디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경산교회>를 떠나온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끈기 있고, 도전정신이 있다고들 평가해 줍니다만, 유독 신앙이나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 만족을 모르고, 나를 높여 내 뜻을 이루려 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별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늘 하는 일에 만족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다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섭니다.
제가 수 년 전 어느 예배에서 설교를 하던 중에 만족과 배고프지 않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개인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나에게도 배고프지 않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새로 이사 간 전원주택은 너무 황홀하여 집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주변 경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각 계절은 나름대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하면서 우리를 즐겁게 해 주고 있습니다. 다정한 이웃이 있고, 물이 맑으며, 공기도 신선하고, 알지 못하는 소리로 지저귀며 새들이 정원수 사이로 날아다니며, 밤에는 별들이 더욱 높게만 느껴집니다. 아내를 그렇게 괴롭히던 불면증도 이곳에 와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벗 삼아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때로는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이 무엇인지, 감미로운 맛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간하기 어려워 질 때가 많습니다. 정말 먹지 않아도 배부를 때도 많은 것이죠.
“지금도 이 같은 고백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와 같이 물으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수셨다는 양식을 아직도 제대로 먹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내 안에 그분을 품으라고 권면하십니다.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되라는 것인 줄로 알겠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과 내가 그 자신이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그 자신이 될 필요가 없으며 그와 나는 늘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내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죠. 누군가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고 있다면, “내가 바로 그다. 그 같은 사람이 바로 여기 있다”라고 한다면 이단적 가르침일까요?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즉 남을 도우며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고 자기 일에만 신경 쓰며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합니다. 단순히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즐겁게 사는 한 비결을 소개한 듯합니다. 나에게도 이런 즐거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루지도 못했을 일을 이루며 행복하게 만족한 인생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녕 하나의 큰 즐거움입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도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며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식사며, 커피며, 청소며, 반주며, 목자의 헌신이니 관심과 기도며, 심지어는 남을 말을 경청하는 일 하며... 이 모든 일들은 그 일을 하는 당사자는 물론 도움을 받는 사람들 모두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며,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을 배부르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계속 그렇게 살아갑시다.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우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