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한 밤중의 방문객
김태정 목사약 9분 분량
3:1-11
거리는 어두웠고 황량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는 그렇기를 바랬습니다. 한 고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어둠에서 어둠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도시의 큰 간선도로는 결코 이용하지 않고, 오직 외진 곳으로만 다녀서, 어느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치는 사람 같습니다.
그가 한 밤중에 어둠에서 어둠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사람은 지금 친구들과 함께 어느 마을에 머무르고 있는 예수님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이 동네 유지이자, 종교 지도자로서, 자신이 지금 이 순회 설교자를 만나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알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님은 잠자다 말고 이 사람의 방문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밤중에 낯선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당신이 행하시는 이런 기적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래 겨우 이 이야기 하려고 한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는 사람을 깨우려고 찾아왔다는 말입니까? 칭찬인지 아니면 인정한다는 말인지조차 분명치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절에서 그렇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이 무슨 동문서답(東問西答)입니까? 무슨 불교 식 선문답(禪門答)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지금 ‘니고데모’의 인사말과 예수님의 답변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다시 다루어 보도록 합시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당신이 행하는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실 낯선 방문객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밤에 무엇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당신은 ‘니고데모’의 칭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최소한 친절하게, 그리고 다소 겸손하게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정도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사실 아주 퉁명스럽고 예의가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제가 이 설교를 마친 후에 여러분 중에 누가 제게 와서, “목사님, 오늘 당신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가득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는 오늘과 같은 설교를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로부터 무슨 대답을 듣기 원하십니까?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또는 최소한 “얼마 만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뭐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글쎄요, 서울에서 대구까지 KTX를 타면 대략 2 시간 정도는 걸리죠.” 이 답변은 그 자체로서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답변이 당신의 언급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니고데모’의 인사말과 예수님의 답변은 겉보기와는 그렇게 동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었다면 말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필경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 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자칭 선지자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일련의 설정된 규범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자신이 선지자임을 주장하는 일종의 환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하고, 예언자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말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합산해 본 결과, 예수님은 정말 선지자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그곳으로부터 여기에 올 수 없다. 이해의 점수를 합산하여 신앙의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니야. 관찰이나 연구 조사를 통해서 신앙이나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네.” 정말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길입니다. ‘니고데모’의 관찰과, 그 관찰에 입각해서 연구한 결과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똑똑했고 정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여러 차례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설교도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성경> 공부도 꽤나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이야말로 틀림없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된 대답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시도해 본 경험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한 가지 논쟁거리에 대해서만 답변을 해주어도, 그 사람은 세 가지 네 가지 더 많은 논쟁거리를 가지고 따져듭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왜 하필 유대인이었나요?” “기적은 다른 종교에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기독교만이 유일무이한 진리라고 우겨대는 것입니까?”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창조적인 교사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한 학생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빌라도를 찾아가서 그를 꾸짖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믿지 않던 ‘빌라도’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성으로 따져보니...” “아니야,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어.” 불행하게도 ‘니고데모’는 그리 대단한 시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유(隱喩)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주의적인 편견에 의해 눈이 가려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늙었습니다.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나이 때문에 자궁은 고사하고 택시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환기시켜 주려고 애를 쓰고 계신 반면, ‘니고데모’는 해부학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대로 불지만 너는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그리고 네 얼굴을 가로지르는 미풍은 느낄 수 있지?” 하지만 ‘니고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오 가련한 니고데모여,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나쁜 표현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 나서 이제는 아무런 참신함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더 이상 종교적인 의미해 국한해서 쓰고 있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어느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분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교단의 활동이 왕성한 곳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목회한 교회는 단지 수년 만에 성도의 수가 배가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자기 집 주위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 속에 그의 부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인은 자기 남편과 친한 한 목사님을 찾아가 이렇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남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로 하여금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휴식을 취하도록 권면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마 매 주일마다 반나절이라도 여가를 보내도록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일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물론 그 친구 목사님은 그렇게 했고, 심지어 그에게 장례식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이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사람의 이혼은 교단 지도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교단 총회장이 직접 그 목사님을 돌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총회장은 그 목사님을 올바른 방향으로 교정해 주었는데, 그를 이번에는 성공의 기회가 전혀 없는 조그만 교회로 보냈습니다. 물론 사례비도 상당히 감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그곳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도 수나 예산은 두 배 넘게 늘었으며, 야심에 찬 교회 건축도 계획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새 여성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님은 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만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대로 한 번도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두 번째 부인이 이 목사님의 친구를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 목사님이 듣게 된 말은 이전에 첫 부인으로부터 들었던 것과 꼭 같은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내 남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그가 독서하면서 쉴 수 있도록 권면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목사님의 두 부인이 한 결 같이 가졌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사람에게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이 목사님에게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열정이나 지식에 결핍되어 있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정말 헌신된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의 부인들이 그로부터 발견한 것은 다른 종류의 “결핍”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을까요? 그것은 실존적 공허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죄책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행하거나 행하지 못해서 오는 죄책감이 아닙니다. 자신이 되어야 할 그 본질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니고데모’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방금 소개한 목사님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느 정도의 성공이 요구됩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너는 거듭나야 한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헌신된 사람도,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똑똑하다 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자신을 태어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출생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선물입니다.
오, 가련한 ‘니고데모’! 올바로 살기 위해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자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동해 갔습니다. 오, 가련한 목사님! 성공에서 성공으로 달려가면서, 승리를 추구하면서, 마침내 상을 집으로 가져오기를 희망하면서. 오, 가련한 ‘요한 웨슬러’! 지친 말 위에 타고서, 온 세상의 전도대회를 전전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평화를 얻기를 갈망했습니다. 오, 가련한 ‘마르다’! 부엌에서 손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람들의 칭송과 인정을 한 몸에 받으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복된 선물을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람은 임의대로 분다
너는 그것을 다스릴 수 없어
너는 그것을 얻기 위해 일할 수 없어
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는 것조차 알 수 없어
바람은 임의대로 분다
그리고 너는 오직 그 소리만 듣고,
너의 얼굴에 부딪쳐 오는 미풍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
물론 네가 빨리 달리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턱을 간신히 고정시키지 않으면,
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이 하나님의 영의 은혜를 듣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니고데모’야 포기하라. 열심히 애쓰는 일을 포기하라. 김 목사야 포기하라. ‘마르다’야 포기하라.
바람은 임의대로 분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부드러운 미풍이.
그리고 이것은 약속이다.
한밤에 찾아온 모든 낯선 손님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