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다른 양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0:16약 11분 분량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서 만들어낸 신조어(新造語)입니다만, 신약 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참고. 마 16:18-19).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10절)은 “관계사역”의 열매로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풍성한 삶”에 가장 근접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샬롬”을 꼽은 바 있습니다. “샬롬”을 무엇이라 했던가요?
양(羊)으로서 누릴 수 있는 “샬롬”은 무엇일까? 즉 양은 어떻게 “샬롬”을 누릴 수 있을까? 대답은 “목자의 양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목자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시편> 23은 완벽하게 “샬롬”을 누리고 있는 한 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하고, 순진무구하고, 어리석은 짐승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성질이 아주 까다롭고, 겁이 많으며, 조심성이 많다고 합니다. 예컨대, 이들은 목자보다 앞서 걸어가는 법이 없고, 또한 아무데서나 잘 드러눕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눕게 하려면 서너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집단의식과 사회성이 강한 이들인지라 누울 때 주변에 다른 동료 양들과의 부딪히는 일이 없어야 하며, 누워있는데 파리나 다른 해충들이 와서 괴롭히지 말아야 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여 찾으러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필요한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때만 마음 놓고 풀밭 위에 드러눕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자는 다름 아닌 그 양의 목자입니다. 시인이 지금 이 시에서 그려내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양은 너무나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 “샬롬”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행복해. 나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지극히 만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참고. 1-4절),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아무런 염려와 불안이 없습니다(참고. 6절).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성품이나, 생각이나, 미래 계획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목자 또한 이 양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이심전심의 사귐이 있을 뿐입니다.
“아, 이 목자를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양은 지금 이렇게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넘치는 잔. 그러나 과연 이 양은 목자의 마음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 잔이 넘치는 것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지금 목자의 마음이 그렇게 편해 보이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다소 수심이 어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자에게 무슨 걱정이라도 생긴 것일까요? 이제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목자의 근심은 무엇입니까? 잠시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겠습니다. 기적의 성취에 관한 부분인데, 화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6:11-13).
‘마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무리는 “목자 없는 양들”입니다(참고. 막 6:34).그런 자들이 이날만큼은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며, 먹고 남은 떡의 양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동네에 큰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이웃 사람들은 축하한답시고 자식들까지 데리고 와서는 온 가족이 실컷 먹고 마셔댑니다. 뿐만 아니라, 돌아갈 때에는 남은 음식마저 발발이 싸서 챙겨갑니다. 모르긴 해도 이날 기적의 음식 대접을 받은 무리들 역시 원도 한도 없이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있는 중에도 연신 각자의 호주머니 속으로 빵을 챙겨 넣기에 바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두가 식사를 끝낸 후 남은 빵 조각을 모아 보니 열두 바구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잔이 넘치고 넘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은 음식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버리고 갈까요? “고수래!”하면서 말입니다. 흔히 맹수들은 자신이 사냥한 먹이 감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주변에 아무리 다른 먹이 감이 서성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배불리 먹고 나면 아무 생각이 없는 법이지요. 나중에 허기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이야 그까짓 남은 떡 부스러기 정도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을 어디다 쓰려고요? 들고 다니다가 다시 배고플 때 먹게 하려고요? 나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날 그 무리나 사도들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렸을까요? 집 나간 작은 아들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큰 아들은 과연 헤아렸을까요? 한 마리 사라진 양을 찾느라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이해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시편> 속의 양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목자 없는 양들”이나, 그날 그 기적을 목도한 사도들이나,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나, 탕부(蕩父)의 큰 아들이나, 그리고 지금 주님의 강론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 모두 내 잔이 넘치는 것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의 잔이 넘치는지 비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고플 때는 내 배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제 배가 불러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곳간도 곳간 나름입니다. 늘 비어 있다가 어쩌다 한 번 채워진 곳간 주인은 아까워 퍼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퍼주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채운 곳간인데” 하며 망설입니다. “내 곳간 비었을 때 너희들 언제 한 번이라도 채워 줘 본적이 있느냐?”하며 오히려 한풀이를 하려 합니다. 인심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부나 헌금도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연습과 훈련, 그리고 부모가 하는 것을 본 자식들이 자라서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지금 주님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신 것일까? 당연히 자기 양들이 행복에 겨워하고 있는 것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겠지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냥 즐거워 할 수만은 없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행여 지금 그분의 마음이 아프게 전해져오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을 아주 부담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장(牧者長)과는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매우 성숙한 그분의 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녀의 성숙도는 그가 얼마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느냐로 결정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롱’군은 어찌나 부모의 마음을 끔찍이도 헤아리는지 대학을 졸업하고 실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는데, 유학을 가라고 하는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곳에 와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매 달 월급을 아껴 부모에게 십만 원씩 송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월세 방이 겨울에 난방도 잘 안되고 해서 시설이 좋은 곳으로 옮겨주려고 했으나, 그렇게 되면 월세가 더 들어 부모에게 송금할 돈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냥 지금 있는 곳에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출석도 그렇습니다. 내가 나오라고 하니 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이라도 빠지게 되면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월요일 아침에 내 얼굴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합니다. 이 친구는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를 못합니다. 나는 이런 친구를 “의로운 이방인”(righteous gentile)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목자의 양으로 자처하며 살아가는 나 말입니다. 정말 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부탁하시니 그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 마지 못해 순종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정말 바쁜 일이 있는데도 목장의 사정이나 목자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희생시켜 본 적이 있습니까? 목장 모임에 가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서너 명 모이는 목장에 내가 빠졌을 때 상심하는 목자의 얼굴이 어른거려 마지못해 목장 모임에 참석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이런 것들이 모두 ‘헤세드’의 지극히 작은 예들에 불과한 것이지요.
지난 달 안동에 가서 우리교회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습니다. 교회학교의 달라진 분위기 하며, 동관 목장의 아름다운 모습과 동관 목자의 헌신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썼으면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정도라고 자랑했습니다. 부럽다는 듯이 듣고 있던 장 전도사님께서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전도 좀 하지.”
우리 전도사님 역시 목장 밖의 다른 양들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강박감(强迫感)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나 역시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이와 같은 강박감으로부터 자유스러운 날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했으면 그만이지 강박감은 무슨...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도 ‘바울’조차도 같은 강박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나도 이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모든 일을 억지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도조차도 마지못해 복음 전도를 해야 했다고 말하는데, 그 동기가 즐거움이나 소명의식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한 무리, 한 목자. 지금 주님은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 때문에 노심초사,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습니다. 이들 무리 역시 주님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버릴 양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분의 근심이 큰 것입니다. 원래의 배경에서 보자면, 우리 밖의 무리는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들은 언젠가는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될 잠재적 양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 무리에 대해서 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까? 그것이 나의 목자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성숙한 신자라면 주님의 관심이 머무는 곳에 나의 관심사도 함께 머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즐겁든, 마지못해 억지로 하든, 아니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든, 주님과 동일한 시선으로 그 무리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9:4상).
이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영광스러운 기적을 함께 체험하자는 초청입니다. 주님께서 큰 무리가 자기를 따르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에게 먹이겠느냐” 하셨을 때도, ‘빌립’이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곧바로 펼쳐질 오병이어의 기적에 함께 참여하자는 초청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 밖의 양들에 대해서 그토록 애착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세드’ 즉 그놈의 정(情) 때문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 양들은 목자가 직접 낳고, 몇 년에 걸쳐 먹이고, 입히고, 길렀던, 그래서 자신의 일부가 되어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처럼 애절한 사랑이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부모의 사랑을 맛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가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직접 전도하여 양육하면서, 혹시나 떨어져 나가면 어떻게 할까하면서 가슴 졸이고, 한숨 쉬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교회 내의 다른 지체나 또는 어린 양들에 대해서 이처럼 애절한 관심과 간섭과 기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창조교회 시절 교회에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기쁨과 함께 기대와 근심으로 맞아들인 것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자라게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표 중, 세 번째가 세상을 향한 수직적 관계 사역, 즉 선교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 목장은 진정한 ‘샬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벌써 마음속으로 깊이 느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딘가 허전하고, 목장 모임이 힘이 없고, 특별히 기다려지거나 설렘이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며, 모여도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설교나 찬양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만, 매 번 위로받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근심하고 원통해 하는 하나님을 오히려 우리가 신원(伸寃)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녀가 장성하여 어른이 되면 그 때부터는 부모를 어린아이처럼 돌보고 위로해 주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목장은 양들이 목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목장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여호수아> 목장에서 목격한 바 있습니다(참고. 수 1:16-18).
실로 <여호수아> 목장은 이제 새로운 목장 개척을 위하여 목자로 파송할 성숙한 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수 년 내로 목장을 여섯 개로 늘릴 수 있을까요? 더 중요한 질문은 실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여섯 번째 목장 개척을 위하여 세워놓은 회원 모두가 동의하고 참여하는 세부 실천 방안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가고 있습니까?”
선교재단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재단 기금은 얼마로 작정하였으며, 달성을 위해서 매년 얼마씩을 적립하기는 합니까? 아니면 그냥 한 번 해보는 소리입니까? 선교는 내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노심초사하면서 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