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출생의 신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7:25-31약 8분 분량
출생의 신비에 관한 논쟁은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관심의 대상은 단연 예수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행하는 기적들, 그리고 상식을 뛰어 넘는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그분의 발언들이 그의 기원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논쟁의 핵심은 “과연 그리스도가 언제, 어디서 오는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성분을 묻는 질문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와 하나님. 드라마의 경우라면 극적 효과를 위하여 대개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신비가 드러납니다만, ‘요한’ 화자는 정반대로 아예 처음서부터 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놓고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독특한 문학적 형식 중의 하나도 바로 <서막>에 있음을 배운 바 있습니다. 화자는 <서막>에서 그리스도의 신비, 즉 그의 초자연적 기원을 노래하며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1-3)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에 관한 신비한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즉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라는 모순 말입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모순과 역설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선언 또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당연히 세상은 이와 같은 역설과 모순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지요. 그래서 화자는 세상의 무능력한 반응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5빛이 어둠에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 5, 9-11)
세상은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하며”, 따라서 “영접하지 못합니다.” ‘요한’ 화자는 세상의 무지와 무능력에 대해서 마치 사도 ‘바울’과 합창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발은 이것입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진단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우리는 지금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세련된 지식인이고 겸손한 종교인입니다. 지식과 종교가 겸손을 갖추지 못하면 세상에 해악만 끼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자신의 무지(無知)를 폭로하는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 전문가란 없으며, 어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어린아이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성경. 그런데 바로 여기에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 전문가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로 통칭되는 일단의 무리가 그들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들을 일반 ‘유대’인들과 의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 무리는 아주 세련되고 지적(知的)인 종교인입니다. 명절을 위해서 원근각지에서 몰려든 일반 ‘유대’인들과는 다릅니다. 예컨대, 일반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해서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하고 물었던 것에 반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공회(公會)의 음모를 이미 다 꿰뚫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25절)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회보다 더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국이 예수님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강의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당국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서야 그를 체포하지 않고 그냥 둘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26절).
당연히 그리스도의 출생이나 신분에 대해서도 모를 리가 없겠지요. 그들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27절). 그들의 말인즉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처럼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에 대해서야 모를 리가 없겠지요. 오늘날 우리도 그분의 출신이나 배경 그리고 가족관계까지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기원에 관한 이들의 지식입니다. 어디서 그와 같은 지식을 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성경>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말라기>는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라(말 3:1)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에게는 이와 같은 신비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타당한 논리이며, 당시 일반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상식이자 교리(敎理)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출현에 관한 유일한 본문이었을까? <미가서>는 이와는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즉 출생의 신비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출신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도 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음을 <마가복음>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4-6)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근거도 그들의 <성경> 즉 <미가서>입니다. <다니엘>도 ‘그리스도’는 옛적부터 항상 있어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그리스도와 예수. 그렇다면 이들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 기존의 전승들을 모두 거부했던 것일까?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기원에 관한 이들 “예루살렘 사람들”의 ‘도그마’는 그 자체로서 역설이자 아이러니임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역설이라 함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 한편으로 완벽했으며, 동시에 철저하게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야겠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아는 지식은 정확하고 완벽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28절).
그들이 정학하게 알고 있는 바대로, 예수는 ‘나자렛’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서, ‘갈릴리’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전무(全無)했습니다.
“예수는 알되 그리스도는 모른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이는 마치 “로미오는 읽었으되 줄리엣은 읽지 않았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하는 자의 무지와 위선을 폭로하는 해학이자 조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참으로 명쾌합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8절하).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궤변(詭辯)이 가능하다는 진단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상대를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예수께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까? 예수의 자가진단입니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9절). 대화의 기본을 전혀 모르는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를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발언 태도는 교만하며, 발언 내용은 그야말로 신성모독(神聖冒瀆) 그 자체입니다. 누가 이런 자와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 할까!
당연히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30절상). 그들의 미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케 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에 미묘한 변화 또한 감지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요?
빛과 어둠의 “분열과 분리”입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31절). 이러한 분열은 마치 출애굽 당시 홍해 물이 둘로 갈라지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분열이 있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기도 합니다:
51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1-5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사람들 사이를 화평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분열시키고 분리시킵니다. 세상에서 분리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빛과 어둠의 분리를 극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이제는 공개적인 방법이 아닌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는 동안, 빛의 무리는 한 목소리로 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1절).
그리스도가 어디서 오든 와서 무엇을 행하든 이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없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곧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보다 더 낫다”는 선언인 것이지요. 이는 실로 반어법적인 진리 선언의 백미(白眉)이자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