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2): 다른 두 사람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18약 10분 분량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은 예수님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그날 처형을 당하는 다른 두 사람도 있었다고 네 <복음서>가 공(共)히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이들 역시 그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이들 또한 그랬습니다. 비록 ‘요한 ’은 이들의 신분에 대해서 언급을 자제하고 있습니다만, ‘마가’는 이들이 도둑이라고 밝히고 있고(참고. 막 15:27), ‘누가’는 이들을 행악자로 부르고 있습니다(눅 23:32). 아마도 이들은 ‘바라바’와 함께 당시 자유와 해방 운동을 벌이던 혁명 전사(戰士)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어떤 심정으로 매달려 있을까? 혁명 투사답게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만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고통으로 얼굴은 일그러진 채, 로마 당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조국 ‘유대’와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지나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국 해방을 위한 우리의 의로운 투쟁에 조국과 하나님이 왜 함께 하지 않느냐면서 말입니다. 대개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태도가 이렇습니다. 이럴 때 누군가 좀 알아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런데 사람들은 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모두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에게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향하여 온갖 조롱과 저주를 쏟아내기에 바쁩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 지어다”(눅 23:35);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 지어다”(막 23:35).
이러자 이들 도둑들도 자신들의 처지를 잠시 잊은 것 같습니다. 군중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욕설을 해대기 시작합니다(마 27:44). 자신들의 분노를 이분에게 쏟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는 이중 한 사람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 23:39). 지금 이 사람,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습니다. 사정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명령을 하다니요! 뭐 이런 식입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으면 한 번 해 보든지.”
사실 우리는 갑과 을의 관계가 뒤바뀐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도움을 주려는 자가 안타까워하고 있고, 도움을 받아야 할 자가 이 도둑처럼 도움을 우습게 여기는 세상 말입니다. 좋은 소식을 듣는 자의 반응이 대부분 이렇습니다. “나를 한 번 설득해 보라”든지, “나는 스스로 잘 알아서 하고 있으니 그런 거 필요 없다”든지, “지금은 그러니 나중에 한 번 생각해 보자”는 등의 반응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반응이야 말로 전형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도둑은 필경 구원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원망과 분노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바로 그 시각, 바로 자기 곁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함께 달려있는 혁명의 동지에게 말이지요. 이 사람의 반응을 한 번 봅시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눅 23:40-42).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이처럼 완벽하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마치 “구원문답” 책을 암송(暗誦)이라도 하듯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료 친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입은 자가 이처럼 신속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인식하게 된 것일까요?
평소 <성경> 공부라도 열심히 해두었던 것일까? 평소에 경건 훈련을 열심히 했던 것일까? 예수님의 이름을 이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일까?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그렇습니다. 그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홀연히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왜 그날 그에게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왜 두 사람 모두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일어난 결과와 현상만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바람의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참고. 요 3:8).
이 같은 기적은 나중에 로마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대 사도 ‘베드로’가 그의 집에 들어와 설교를 하고 있는 중에, 성령께서 ‘고넬료’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에게 홀연히 내려오셨습니다(행 10:44). 그들이 설교에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헌신하며 침례를 받은 후가 아니었습니다. 설교 도중에 그냥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하던 ‘베드로’가 오히려 깜짝 놀라, 그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줄로 알고 어찌 이들에게 침례를 금할 수 있겠느냐며 침례를 베풉니다(행 10: 47).
‘고넬료’의 경우보다 더 극적인 일이 지금 십자가에서 이 무명(無名)의 악한(惡漢)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나 침례 ‘요한’을 제외하고는 <신약>에서 성령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유대’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행악자의 신분으로서 말입니다. 평생을 악한으로 살아왔지만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예수님에게 구원을 간청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바로 이 순간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처럼 황홀한 기분, 이처럼 말할 수 없는 평안과 해방감을 일찍이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이제 그는 잔뜩 기대에 부푼 채로, 그 낙원을 상상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을 것 같습니다: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지만 이건 너무 공평하지 못한 처사가 아닙니까? 평생 제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어찌 재수가 좋아 엄청난 횡재를 누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정말 행운아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횡재를 얻자 말자 바로 죽어, 구원 이후의 힘든 삶을 거칠 필요도 없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었으면서도, 하루하루를 고통 가운데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뭐라 말입니까? 아버지 곁에서 묵묵하게 살아온 큰 아들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이나 선물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허랑방탕 제멋대로 살다가 돌아온 작은아들만 반갑게 맞아주는 아버지를 과연 공평하다 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억세게 재수 좋은 행운아라 하는 그가 구원을 받자말자 곧바로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동안 너무 작은 하나님을 내 속에 가두어 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이 나에게 오신 것은 나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요 10:10). 그 풍성한 삶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자 말자 죽은 아이를 행운아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죽은 사람을 행운아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죽음을 놓고 안타깝다거나, 아깝다고 말할지언정 정말 잘 된 일이라고 축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고해(苦海)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인식은 그것이 어떻게 전개될지라도, 살아볼 가치가 있는 참으로 신비한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 가끔 자살로 일찍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 대부분은 아무리 힘들어도 살고 싶어 하지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태어나자 말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 사람을 행운아라 부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를 행운아라 하는 것은 그가 그나마 마지막 행운의 열차에 기적적으로 올라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는 곁에 함께 매달린 친구처럼 그냥 그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을 뻔했습니다.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는 이전보다 더욱 괴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을 운명이었습니다. 그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누가’는 어느 한 부자와 거지 ‘나자로’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참고. 눅 16:19-31). 이런 점에서 그는 정말 행운아였습니다.
이날 이 사람은 두 번의 기적을 체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 번은 그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성령께서 그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 보혜사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았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습니다”(참고. 사 55:6). 그리고 주께서는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사 49:8)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때가 진정 구원의 때였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 은혜 되기 위해서는 함께 있던 나머지 한 도적도 구해주셨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왜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그냥 버려두셨을까? 누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가 있을까요?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15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5-16, 18)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분의 절대 주권을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롬 9:19). 이 항변에 대해서 사도는 논리적인 답변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도 역시 비논리적으로 오히려 꾸짖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논리의 한계로 이 꾸짖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모든 논리나 설교나 설득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음일까? ‘요한’ 화자는 이 두 도적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예 소개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님께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서술입니다(18절). 사실 이 주제는 복음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는 그분의 임재(臨齋) 내지는 현존(現存)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분께서 대답하셨던 그 주제인 것이지요: “나는 야훼니라.”
고통 받는 이집트에 나타나셔야 할 하나님께서 도무지 가능하지도 않을 것 같은 이 시점에, 이곳 ‘시내’ 산에도 계신다는 말은 그분의 소위 무소부재(無所不在)를 강조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선언도 시공을 뛰어넘는 그분의 현존을 의미하는 선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출애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랍비’ 전승에 따르면, 가운데 자리는 항상 가장 중요한 자리로서,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고 상세하게 덧붙임으로써, 그분의 죽음은 결국 예언의 성취였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하).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며,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는” 길만이 내가 살 길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