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멸망치 않고 영생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21약 8분 분량
3장 16절
복음의 빛과 그림자.
“복음”이 갖는 역설은 그것이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에 대해서 열려있지만 오직 “독생자”를 통해서만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믿는 자에게만 열려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후)
우리는 이것을 복음의 이중성(二重性) 또는 복음의 “빛과 그림자”로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망”과 “영생”이 그것입니다. “영생”이 빛 즉 복음의 축복을 대변한다면, “멸망”은 그림자 즉 복음의 저주를 대변한다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바로 이와 같은 복음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6절에 비해 유난히 “심판”과 “정죄” 그리고 “행위”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니 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17-21절)
물질세계에서 빛이 기능하는 바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만, 두 가지 지극히 대조적인 기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광합성을 통한 “생명의 창조”,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살균과 소독을 통한 “멸망과 죽음”입니다. 빛은 그 속성상 어둠을 밝히는 것이지 어둠과 동행하거나, 또는 어둠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광합성은 허공이나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통로 즉 엽록체(葉綠體)라는 매개체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살균과 소독은 어떻습니까? 빛의 진로 앞에 무엇인가 장애물을 놓지만 않으면 됩니다.
“독생자의 빛”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영생”을 창조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무엇 즉 통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통로는 곧 “믿음”입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믿음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自力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들 질문은 이 구절의 핵심을 놓친 질문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믿음의 결과만을 그저 담담히 진술하는 데 있습니다.
굳이 이들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셨고, 그 때 우리 또한 믿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주권(主權)과 우리의 책임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믿음과 영생”이 이처럼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책임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불신과 심판” 역시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사람은 심판과 멸망을 받게 되는가? 스스로 믿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저주이자 그림자입니다.
독생자의 이름.
누구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독생자”의 이름 즉 ‘예수’(Jesus)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알려준 바처럼, “구원자”입니다(마 1:21). 따라서 “구원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선언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논리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야훼’(Jehovah)이며,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예수’인데, 이 두 이름의 영어 단어 첫 두 글자가 똑 같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아주 흥미로운 우연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여전히 생소할 뿐입니다. ‘유대’인들이나 ‘아랍’ 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들은 ‘야훼’ 하나님의 존재나 그를 믿는 일에 있어서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특히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혐오감마저 드러냅니다.
‘로마나 칸’(Romana Kahn)이라 불리는 저의 제자도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저와의 성경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슬림’이었던 그녀는 <창조 이야기>나 <아브라함 이야기>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어 하며, <성경>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더 어렵습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래서 일부러 <요한복음>을 교재로 선택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라는 이름으로 도배를 해놓다시피 한 이 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요한복음>을 읽는 동안 그녀는 ‘예수’의 이름을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이름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이름”(the Name) 때문에 ‘로마나’는 걸려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건만,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로마나’를 통해서 입증된 셈입니다. “독생자”의 이름에 걸려 넘어진 자는 ‘로마나’와 같은 ‘무슬림’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역시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을 통해서 “독생자”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지식은 허상이요 헛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생자”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특권이자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그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영생과 심판의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생과 심판에 대해서 말할 때,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내일 거기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생이나 심판은 우리가 죽어서 맞이하게 될 체험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의 초청을 받았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든지 “때가 되면 믿겠습니다.” 정도입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들은 죽어 지옥에 가서도 계속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비하(卑下)한 바 있습니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한 번 기도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이나 심판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이야 말로 구원받을 만 한 때요, 바로 지금이야 말로 은혜 받을 만 한 때”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나’ 역시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그녀는 복음의 초청을 받았을 때, “다음 기회에 다시 공부하겠다”고 말하면서 빠져나가버렸습니다. 나 역시 이런 그녀를 향해서 그렇게 하라면서 점잖게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실수였습니다.
1871년 10월 8일 ‘시카고’의 한 교회에서 행한 주일 설교에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 목사님도 똑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목사님은 <마태복음> 27장 2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빌라도’의 질문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무디’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면서 회중들에게 이 본문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씨름하다가 다음 주일까지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훗날 이 일이 자신의 생애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영생과 심판이 먼 미래의 그 때 거기서 이루어질 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임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이 과연 무엇입니까? 영생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렇다면 심판은 어떻습니까? 나중에 나에게 임할 그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 역시 나중에 임할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그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절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절)
따라서 ‘빌라도’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었습니다. 자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결정을 유보한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자초(自招)한 것입니다. 구원에 마치 DMZ와 같은 중립 지역 내지 중간 지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제가 ‘로마나’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까요? 그녀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 심판 아래 놓여 있으며,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그 심판 아래 놓여있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해서 같은 입장을 유지하는 한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혹시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 중에 아직도 “내가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하랴?” 하며 결정을 유보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원의 문제에 있어 내일이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